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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학/교회사

칼빈/기독교강요/ 인간론

  인간론

 

(제1권 15장)


제15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 :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

1. 인간이 하나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한 점의 죄도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죄를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이제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함을 보여 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이 비참한 파멸로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부패되었고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거의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고결한 인간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실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어떠했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 자연적인 악을 지적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본성을 만드신 창조주께 책임지우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경건은 모든 결함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그 자체의 충분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난을 받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과 싸우며,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자기네 죄과를 하나님께 전가시킨다. 그리고 신격에 대해서 자기가 남보다 더 경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 또한 고의적으로 타락의 책임을 본성에 돌리므로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은 모든 구실을 다 찾아 이것으로 자신의 악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의도를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간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일체의 비난에서 변호하기 위해서 인류의 불행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나중에 적당한 자리에서, 아담에게 부여된 순결에서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떠나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선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하여 견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창 2 : 7, 18 : 27). 왜냐하면, "흙집에 살며"(욥 4 : 19)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든 그 그릇에 생명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릇이 불멸의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담은 당연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함을 자랑할 수가 있었다.

 

2. 육체와 영혼의 차이

더우기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적이면서도 창조함을 받은 본질을 의미하며, 이것은 인간의 보다 고귀한 부분이다. 이 말은 가끔 "영"(靈, spirit)이라고 불린다. 이 명사들이 결합되는 경우에는 서로 그 의미를 달리하지만, "영"이라는 말이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는 솔로몬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 : 7)고 말한 것처럼 이 말은 "영혼"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성부께 부탁하셨고(눅 23 : 46) 스데반이 그리스도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였다는 사실은(행 7 : 59),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혼이 "영"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호흡, 혹은 하나님께서 육체에 주입하신 힘일 뿐 실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로 보나 성경 전체로 보나 저들은 어리석게도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나치게 세상에 애착을 갖고 사는 동안에는 우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그들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약 1 : 17), 흑암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죽음 후에도 생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빛은 흑암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자기네 불멸의식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확실히 양심은 선과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하는데, 바로 이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고 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실체가 아닌 운동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까지 들어설 수 있으며 자신의 죄책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느낄 수 있겠는가? 육체는 오직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의 두려움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영혼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자체는 이 세계를 초월하는 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힘은 생명의 근원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 마음에 부여된 그 탁월한 여러 은사들은 신적인 무엇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이 모든 것들은 불멸적 실재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소유하는 감각은 육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혹은 육체에 속한 물질적인 것 이상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민첩함은 천지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며 이해와 기억으로 모든 시대를 알고 모든 사물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며 또한 과거사에서 미래사를 추론하는 데, 이것은 분명히 육체와는 분리된 어떤 무엇이 인간에게 감취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해하지만, 육체는 전혀 그러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옳은 것과 의로운 것 그리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파악하지만,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에는 감취어 있다. 그러므로 영은 틀림없이 이 지성의 중심이다. 실로 사람을 혼미하게 하며, 생명마저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잠자는 것 그 자체도 불멸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잠자는 것은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관념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감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저자들이 매우 화려한 언어로 훌륭하게 찬양, 묘사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는 간단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에게는 이 단순한 주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구별되는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흙 집"에 살다가(욥 4 : 19), 죽을 때에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각각 몸으로 행한 행위에 따라 마지막 날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상의 여러 구절들, 또는 자주 성경에 나타나는 그와 비슷한 구절들은, 영혼을 육체와 분명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명칭까지 그 혼에 붙여줌으로써 이것이 인간성의 주요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신자들을 권고하면서(고후 7 : 1), 죄의 더러움이 머무는 두 부분을 지적해 준다.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 : 25)이라고 불렀지만,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혼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의 이 말은 잘못된 말이었을 것이다. 만일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 베드로가 말한 바 영혼의 영원한 구원(벧전 1 : 9) 혹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 그리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 : 11)는 주장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 : 17)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에도 적용된다. 바울이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 : 23)라고 한 사실도 이상과 똑같은 결론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만일 형벌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 역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20 : 28; 눅 12 : 5)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 육체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로 구별하였는데(히 12: 9), 그는 더 이상 더 명백하게 영혼의 실재성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면 나사로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며 부자의 영혼이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눅 16 : 22-23)은 불합리하다고 하겠다. 바울도, 우리가 육신에 그대로 머무는 동안에는 하나님과는 떠나는 것이요, 육신에서 떠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동거하게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 점을 확언하였다(고후 5 : 6, 8).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를 이 이상 더 길게 다루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누가에게서 다음의 말만을 인용하여 첨가하고자 한다. 즉, 천사들과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은 사두개인들의 오류라는 사실이다(행 23 : 8).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다(창 1: 27).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러나 그 형상의 본래의 자리가 영혼에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인간의 외형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지 "다른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도록 되어 있으나 인간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는 격렬한 논쟁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들 외부적 특성에서 보여지고 또 번쩍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시안더(Osiander)는 자신의 저서에서 무익한 생각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가 그릇된 재간꾼임을 증명해 보였는데, 그는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와 영혼 양자에게 확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형상을 인간에게 두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것은 아담이 비록 자신의 완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해진 육체는 그것이 형성된 육체적 외모의 표본이요 전형이었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형상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실로 나는 중보자의 위격에서 모든 신성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순서상 앞서는 그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성자가 성령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면 이때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는데, 어떻게 그가 성령과 닮았으며 어떤 특징과 어떤 모양으로 성령과 유사함을 표현하셨는가를 나는 그에게서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 : 26)고 하신 말씀은 성자의 위격에도 속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는 자신의 형상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우기 오시안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다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전형으로 하거나 표본으로 해서 형성된 데 불과하다. 이렇게 하여 아담이 만들어진 그 원형은, 그가 육신을 쓰기로 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자들의 그 영리함은 한층 그럴 듯하지만,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두 말의 차이점을 까닭 없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양"이라는 말은 설명을 위해서 첨가된 것일 뿐 그 두 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첫째, 말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들은 한 가지 일을 두 번 연거푸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째, 이 문제 자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에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말을 더욱 난해하게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젤렘"(zelem) 곧 형상이라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demuth) 곧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성질에 적용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 표현이 모호했던 까닭으로, 설명을 위해서 "모양대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동일한 관념을 반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자기의 모양의 특징을 새겨 넣으심으로써 그 형상 안에서 자신을 반사하려 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세는 조금 후에 이와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지만 "모양"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일부분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은사를 소유한 영혼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진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라고 한 오시안더의 반대는 무익한 것이다. 건전한 마음을 소유한 독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반대를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죽을 존재로 말한다고 해서 영혼도 죽음에 종속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또한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인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을 영혼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앞에서 주장한 원칙을 고수하여, 하나님의 모양은 모든 종류의 동물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성의 탁월성 전체에까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흔적들은 세계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 이상으로 높이는 것 곧 인간을 범속(凡俗)에서 구별하는 무언의 대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대로 우리들의 최고의 완성은 천사들과 같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마 22 : 30).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특수한 호칭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특별히 인간을 다만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만 비교하였던 것이다.

 

4. 하나님은 형상에 대한 참된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탁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간주되어야 할 기능들을 보다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면, 아직 이 "형상"에 관한 정의는 충분히 내려졌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이것을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에서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했을 때, 이 변절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회복의 시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본래의 순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이유에서 제2의 아담이라고 불려진다.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지음을 받을 때 받은 "산 영"을 대조하고(고전 15 : 45) 중생(重生)의 은혜의 부요함을 찬양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중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 : 10)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권고와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4).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 갱신에 대하여 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가를 알게 된다. 그는 첫째로는 지식을 말하며, 둘째로는 순결한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이 제유법(提喩法)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원리는 전복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 : 18).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신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형상과 같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회복되어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확립되면 육체의 모양에 대한 오시안더의 공상은 즉시 스스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이 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 : 7)이라고 하고 여자를 이 명예로운 지위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은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정치적 질서에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형상이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은 그와 똑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단정하여,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요 1 : 4)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의도는,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인간이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지성의 빛이 결합된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어떻게 창조되었는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성의 완전한 탁월성으로, 이것은 타락 이전에는 아담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후에는 부패하여 거의 지워졌기 때문에, 파멸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하고 이지러지고 오염된 것뿐이다. 이것은 지금 부분적으로 피택자들에게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을 논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영혼이 오성과 의지와 기억을 내포한다고 해서 그것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본 어거스틴이 이론은 결코 건전한 것이 못 된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이 인간에게 주어진 지배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도 개연성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만물의 상속자요 소유자로 정해졌다는 이 특징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당연히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실로 그것은 영혼의 내적 선(善)인 것이다.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시어 선을 악에서, 정의를 불의에서 각각 분간해내며,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과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지도적인 부분을 "토 헤게모니콘(toj hgemonikovn, 지도력)"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지의 통제아래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간의 최초의 상태는 이와 같은 탁월한 은사들로 뛰어난 품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때문에 그의 이성과 지성, 분별력, 판단력은 지상생활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것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찾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선택이 추가되어, 욕구를 조정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며 그리하여 의지로 하여금 이성의 지도에 완전히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완전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유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일의 발생 여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본성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의 문제를 여기서 소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인내성을 받지 못했던 까닭으로, 그는 아주 쉽게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선택하는 일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축복을 부패시키기 전에는 그의 마음과 의지는 최고의 공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모든 유기적인 부분들은 순종할 수 있도록 바르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철학자들은 흑암 속에서 크게 헤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조각들 가운데서 균형이 잘 잡힌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 없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원리를 고수하였다. 그들은 또한, 인간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조정하지 못한다면 덕과 악덕의 구별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었더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감취어 있었으며, 따라서 인간이 천지를 혼동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런데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절충함으로써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 하늘과 땅 어디에도 그들의 이 절충 사상은 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후손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부패한 상태에서부터 기원하여 유전적인 오염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영혼의 각 부분은 올바르게 형성되었으며 마음은 건전하였고 의지는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아담의 의지의 힘이 약했던 까닭에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아담의 신분 그 자체가 어떠한 변명도 물리치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답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할 수 없거나 범죄를 원하지 않도록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하나님께 강요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인간성은 한층 탁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치 이런 본성을 사람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불평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자유롭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들어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취어 있다. 그리고 근신하여 이를 캐내지 않는 것이 우리로서는 지혜로운 일이다. 실로 아담이 의지를 행사하였더라면 그는 그 능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의지의 행사가 있으려면 인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으로서는 조금도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파멸을 자발적으로 초래하였을 정도로 아주 많은 힘을 받았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평범하고 변하기 쉬운 의지를 주시어 그를 타락하게 하고 이 타락에서 자신의 영광의 기회를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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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성화는 가능한가? 


완전 성화는 가능한가? / 박영돈목사님

제2의 축복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우리가 다시는 죄와 침체의 수렁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 없는 영적 고봉에 계속 머무르게 될 것처럼 말한다. 마치 영 단번에(once-and-for all) 약함과 패배와 탄식의 삶이 능력과 승리와 기쁨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같이 말한다. 과연 그러한 삶이 가능한 것인가? 전통적인 입장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칼빈은 “거듭난 자 안에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탄 재와 같은 악이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그를 죄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한다”고 했다. 그래서 신자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와 모든 약함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단계에 이를 수는 없다. 신자의 최선의 행위도 여전히 죄의 자국으로 얼룩져 있기에, “이생의 가장 탁월한 최상의 상태마저도 오직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칼빈주의 신앙고백서들은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십계명을 자세히 해석하면서 신자는 이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강조해 온 것을 깡그리 부인하기라도 하듯이 이렇게 결론짓는다. “자신의 힘으로나, 이생에서 받은 어떤 은혜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우리 모두는 매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것을 범할 뿐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생에서는 가장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이 순종의 미미한 시작만을 했을 뿐이다.”
  이런 표현은 성화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것처럼 들린다. 자연히 많은 의문과 반론을 불러일으킨다. 안토니 후크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현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이렇게 반문한다. “만약 가장 거룩한 사람마저도 다만 순종의 작은 시작밖에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신자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크마의 지적대로, 이런 신조의 진술에 의하면 거룩함의 성취도와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힘써도 지키지 못 할 것을 애써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꼭 있느냐는 자포자기적 심리를 조장할 수 있다. 교육심리학적으로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을 낮은 윤리적 수준에 만족하게 하며, 거기에 안주케 하기 쉽다. 더불어 거룩함을 간절히 추구하는 이들은 이런 전통적인 가르침에 실망하여 좀 더 나은 성화론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웨슬리라고 할 수 있다.
 
완전주의
  웨슬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성화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그의 불만이 깔려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불완전 교리가 거짓된 삶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남용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칼빈주의에서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 온갖 종류의 합리화”를 제공한다. “얼마나 우리 마음은 항상 준비된 핑계로서 이 ‘어쩔 수 없음’(inevitability)에 초점을 맞추기가 쉬운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자신감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계속 추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웨슬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 무오한 완전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경험한 이도 연약함과 무지와 실수가 있으며, 그에 대한 용서의 은혜가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그는 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온 세상에 말해왔다.… 나는 내가 묘사한 성품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웨슬리는 성화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는 칼빈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까지 말했다. “칼빈이 그랬던 것과 꼭 같다. 이 점에서 나는 그와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입장에서 볼 때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한 성화의 수준을 완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함으로써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 외에도 그의 견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내재해 있다. 그중에 하나는 죄를 “아는 계명을 고의로 범한 것”으로 정의한 점이다. 그런 식으로 죄를 규정함으로써 웨슬리는 죄가 신적계명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요구보다 인간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인식 여부에 근거하여 결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칭의 후 ‘즉각적 성화’(instantaneous sanctification)가 일어난다는 그의 가르침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단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성결운동과 케직 사경회가 강조한 제2의 축복과 오순절운동이 주창한 중생 후 성령세례의 가르침에 초석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미’와 ‘아직도’의 균형
  '완전에 대한 추구’는 웨슬리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죄에서 자유하여 온전히 거룩하게 사는 것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바이다. 칼빈 또한 웨슬리 못지않게 거룩에 대한 열망과 온전한 삶에 대한 염원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같은 성화에 대한 관심과 갈망을 가졌음에도 그들의 성화론은 대조적인 특색을 띤다. 칼빈은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갈망이며 목표이지만 그 소원은 오직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뿐이며, 그 전까지의 신자의 삶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주 불완전한 삶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에 웨슬리는 성령의 은혜는 신자를 죄의 결박에서 획기적으로 자유케 하는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강조점의 뚜렷한 차이는 그들이 성화론을 썼던 상황에서 직면했던 요구와 도전과 대적이 다른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 속에서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면, 웨슬리는 불완전교리가 남용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새롭게 불러 일으켜야 할 사명을 느꼈다.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는 현재 실현된 것과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것 사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지 못한 점이다. ‘이미’(already) 쪽으로 편중되므로 과장된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칼빈은 ‘아직도’라는 종말론적 포커스를 통해 성화를 고찰함으로써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완전주의적 망상과 영적 우월주의를 추방해 버린다. 동시에 성화의 참된 다이내믹인 겸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에 계속 내재하는 죄성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죄와 불완전에 대해 좀 더 사실적인 안목을 갖게 하며 그로 인해 경성하는 삶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패성에 점점 더 예민해짐을 의미한다. 더 거룩해지고 은혜가 충만해질수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의 높은 수준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되며, 동시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이룬 거룩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서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 깊이 절감하며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겸손의 밑바닥으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다. 만약 ‘겸손을 통해서 거룩해진다’(holiness through humility)는 역설적인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영적교만과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의 측면, 즉 신자의 죄성과 불완전에 역점을 둔 칼빈의 가르침은 간혹 그 문맥 속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칼빈의 본래의도와는 달리 성화에 대해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로 오도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불완전 교리가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하는 신자의 중대한 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좋은 구실로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순종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기 십상이다. 현대교회는 칼빈이 불완전을 강조해야만 했던 종교개혁의 상황과 대조적인 국면에 처해있다. 지금은 웨슬리가 가졌던 관심과 강조점이 필요한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가 치우친 또 다른 극단적 오류를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가 성령안의 승리와 역동적인 성화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는 한, 이러한 도전을 통해 우리 신앙의 ‘불완전’과 ‘완전’, ‘이미’와 ‘아직도’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자료출처: 선지동산 49호 게재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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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적인 시각에서 본 신약의 영성
1.영성에 대한 정의
복음주의 진영의 대부분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영성을 지지하며, 영성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 사람이 된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성령을 쫓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지칭한다. (막 12:30-31)
2. 균형적인 시각에서 본 영성
최근 영성개념의 혼란은 신약성경 교훈에 기초한 '균형성'을 상실하고 부분적인 진리를 극대화하거나 왜곡하여 그것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데 원인이 있다. 이런 영성개념의 왜곡 현상은 역사적으로 심령부흥회의 감정적 열광주의, 상속이원론, 은사제일주의, 말씀객관주의, 차가운 지성주의, 금욕적 세상도피주의, 개인영혼 구원사상, 신비주의 등의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다.
1) 삼위일체 신론에 기초한 영적 균형성
참된 영성 개념은  삼위일체 신론에 함당하게 기초하여 정립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신론 중에서 한 분만을 강조하는 영적 생활은 영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2) 회심 경험과 영적 균형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출발점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제2축복' 경험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들음으로'(갈 3:2,5) 성령을 받는 일에서 시작된다.
3) 윤리와 은사 사이의 균형성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 사역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은혜의 외면적 작용이다.
4) 올바른 신앙과 바른 실천 사이의 균형성
정통신앙(Orthodoxy)와 정통실천(Orthopraxy)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영적 생활은 참된 영적 생활이 아니다.
5)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균형성
현실 교회들이 영적 균형을 잃기 쉬운 또 다른 영역은 '영과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 사이의 균형성이다. 후자없는 전자만을 강조하는 신앙 자세는 영적 생활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6)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균형성
기독교의 영성 구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already) 이루어진 것과 '아직' (not yet) 이루어 지지 않은 것 사이를 살아가는 종말론적 긴장 구조와 관련이 있다. 영성 두축들 가운데 '이미' 쪽만을 강조하게 되면 위에서 말한 영과의 신학이나 변영의 신학을 추구하게 되고 교회의 영성은 쉽사리 현세지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7) 감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의 균형성
현실 교회들 가운데서 영적 균형을 잃기 쉬운 또 다른 영역은 감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의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9) 사랑과 공의 사이의 균형성
기독교인의 영성은 사랑과 공의 사이에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죄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태도를 나타내야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은혜롭게 넘어가면서 불의에 눈 감으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10) 결어
오늘날 한국교회 속에서도 성령운동이나 은사집회 같은 것들이 교회나 기도원 마다 수없이 유향하고 있지만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재현하고자 하시는 십자가의 형상은 잘 나타나 않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복음이 없이 영광의 신학만을 추구하는 세속화의 위기이며 십자가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위기이다.  참된 기독교 영성은 십자가 신학을 회복하는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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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신학체계와 루터의 신학

1 근본주의, 복음주의,그리고 개혁주의

1.서론

우리는 근본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자주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을 깊이 이해하고

각각의 차이점을 분명히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2. 근본주의 역사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본주의 운동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들은 그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1871년 신구파의 여낳ㅂ 이후, 북장로교 안에서는 자유주의 도전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3. 근본주의 해석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20세기초 미국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현대주의적 기독교 운동이다

근본주의란 일차적으로 미국에서 일어난 현재주의와 진화론과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정통 기독교를 보수하려는

보수적인 기독교 인들의 광범위한 연합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다섯가지 기본교리들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 부활과 재림, 이적의 역사성-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핵심 교리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가 반드시 수호해야 할 교리들이다.

4. 근본주의 다른 면

근본주의 운동이 나중에는 분리적이고 전투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근본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집단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극복해나가야 할 모습이다. 근본주의의 부정적 모습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미 복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복음주의는 21세기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역사

복음주의를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의 중심 메시지를 믿음을오 받아들이고 성경의 무오한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규정한다면,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미 부흥운동을 그 시작으로 삼는다.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20세기 초반의 근본주의 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근본주의 운동은 복음주의적 개신교들이 중심이 되었던 운동이였기 때문이다.

2.복음주의자의 특성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개 복음주의란 2000년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성을 보수하는 입장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규정한다. 복음주의자는 성경의 신적 권위와 영감과 무오성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또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대사회적 책이과 봉사를 강조한다.

. 개혁주의

1.개혁주의 역사적 뿌리

스위스의 쯔빙글리와 제네바의 칼빈과 스코틀란드의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사상이 개혁주의의 역사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개혁파는 화란(네델란드)과 영국까지 확산된다. 유럽에서는 스코틀란드와 화란이 개혁주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 개혁파드은 본국의 종교적 핍박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종교공동체를 건설했다. 이들이 청교들이다. 청교도들의 개혁신앙은 미국 국가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결어

근본주의, 복음주의, 및 개혁주의와 한국교회

근본주의란 말은 일차적으로 미국 내에서 일어난 개신교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현재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 신학적으로 편협하고 비관용적이고 전투적이고 분리주의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 교회 내의 진보주의 자들은 보수주의 자들을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근본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경향은 진보주의자들이 기독교 역사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개혁주의는 일정한 신학체계를 가리키는 말이고, 복음주의란 신학적 체계라기 보다는 신학적인 운동 또는 신학적인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운동의 특성과 방향을 예의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도 본래 교리적인 측면에서나 교회적인 측면에서 폭이

좁지 않다. 개혁주의의 문화 신학적 측면이 충분히 계발되면 복음주의적인 여러 특성들 중의 상당 부분을 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개혁주의 자들은 복음주의라는 큰 흐름 안에서 개혁주의의 특성을 견지하면서 복음주의의 장점을

흡수해나감으로써, 개혁주의가 현대의 정통 기독교 운동의 주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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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

 

칼빈의 주요저서로 종교개혁 신앙의 표준적인 진술이 된 성서신학개요이다. 이 책은 개신교 신학의 고전으로 종교개혁 시대에 가장 체계적인 신학서로 평가받는다. 칼빈이 1536년 바젤에서 라틴어 초판 간행(6장). 초판을 발행한 뒤 칼뱅 자신이 개정하고 보완하여 1559년에 80장으로된 최종 결정판이 나왔다.

 

기독교강요 초판이 1536년 세상에 나왔을 때, 이 걸작은 기독교계를 뒤흔들었고 역사를 움직였다. 당시의 로마교회는 기독교강요를 두려워했다. 또한 개혁교회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체계가 잡히고, 당당하게 참 교회를 향한 길을 갈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죤 칼빈은 일류 신학자로 인정받았다.

 

1559년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초판을 내놓았을 때, 주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그와같은 성공을 거두게하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더 분발하도록 격려해주신 여러분들의 열렬한 평가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미력이나마 보답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큰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한다"(독자에게 드리는 글 중에서).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2.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3. 그리스도의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 4.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다.


⑴ 칼빈이 26세 때 쓰고 다음 해 1536년 3월 스위스 바젤에서 초판이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8절판 520페이지의 라틴어 판이었고 목적은 ①변증과 ②교육이었다. 모두 6장으로 되었는데 ①법(십계명) ②사도신경 ③ 주기도문 ④성례(세례와 성찬) ⑤잘못된 5성례 ⑥그리스도인의 자유. 이 순서는 루터의 요리문답서를 닮았다.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이었고 곧 매진되었다. 재판이 요구되자 개정판을 내기로 하였다. 이때 벌써 국제적 명망을 얻게 되었다.

 

⑵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라틴어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모두 11장이었고 그 중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구약 비교", "예정과 섭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등 세 장이 들어가고 여기 부서의 영향이 크게 보인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장은 부서의 "영혼의 참된 치유"(The True cure of Souls)의 영향을 입었다.

 

⑶ 1541년 불란서어 판이 나오다. 불란서어 문장에 큰 영향을 끼침.

 

⑷ 1543년에는 전 21장으로 증보함, 1545년 재간, 1550, 1553, 1554 수정판(1545, 1551 불란서어판)

 

⑸ 1559년 최종 라틴어판, 전 4권이며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 ①성부 ②성자 ③성령 ④거룩한 공회

 

⑹ 성격 : 성경의 진리를 단순(Simplicity) 명료(Clarity) 조직(System)적으로 설명하려 하였 으며 여러 차례의 개정판을 내었으나 근본적 원리는 변치 않았다.

 

목적 : 신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위한 준비를 시키려함.
(to prepare students of theology for the reading of the Divine Word) 이 책은 칼빈 자신의 친구보다 책을 통해 전세계에 더 많은 친구를 만들어 내었고 개신교의 신학 교과서 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총론(Summa Theologica)에 비견되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에서 100년간 신학 교과서로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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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종교개혁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하루 3시간 이상 기도,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직업소명관과 사유재산제로 자본주의 토대 구축
“사탄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수도사들이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뿐이다.”

 

이 기도문은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개혁 반대파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으려 했을 때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했던 기도이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루터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한스 루터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자식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삶과 구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왜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담화·Tischreden>에는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도중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때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루터는 불안과 번민에 휩싸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가 되어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교회가 제시한 고해성사나 신비주의적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루터는 “즉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온 느낌을 스스로 가졌다”고 말했다.

신약 독일어번역 통해 독일통일 기여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결과로 14세기경부터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업(善業)으로 갚을 것을 권했다.

가톨릭교회는 성당건설과 포교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권하면서 면죄부(免罪符)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루터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이를 불태워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당시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에 의해서나 아니면 분명한 이성에 의해 나를 설복시키지 않는다면,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위에 대한 역사적인 양심선언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큰 공헌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의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영주(領主)들 간의 분쟁 조정을 위해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소천(召天)하였다.(1546년)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으로 응답해야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해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소명을 받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기독교인은 모두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루터에 의해 개신교에서는 새로운 소명관(召命觀), 즉 직업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일부 재세례파(再洗禮派)가 주장하던 공유재산제도를 비판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다. 루터는 상업활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기독교적 방식으로 실시될 수 있다고 봤다.

루터의 이러한 사상은 이후 칼빈(Jean Calvin)과 칼빈주의자들을 거쳐 근대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또 구걸을 금지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제도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린이들에 대한 무상교육을 주장했다. 특히 공중도서관을 세우되 거기에는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희랍, 로마의 고전, 법률, 의학, 예술, 역사서적의 비치도 주장했다. 루터는 스스로 과학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에 감탄을 보냈다.

우리는 루터를 말할 때 당연히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에 이끌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혁’은 오로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만을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던졌습니다.”

루터가 살았던 15세기에는 종교개혁과 함께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때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일 뿐이어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를 움직였다. 그러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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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하나님의 힘만이 괴로움의 무거운 짐을 견디게 하고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할 것이다.”<존 칼빈Jean Calvin*1509~1564>

마틴 루터와 더불어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노용(Noyon*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원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함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노용관구의 여러 가지 업무를 보다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칼빈의 어머니 즈앤(Jeanne)은 음식점을 경영하던 노용시의 온건파 유지급 인사의 딸로 경건한 부인이었다.

칼빈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어린시절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리 판단이 정확했으며 지적 능력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제럴드 칼빈(Gerald Calvin)으로부터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세(La Marche) 대학에 등록했다. 이후 그는 몽테규(Montaigu)대학으로 옮겨 금욕적이고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의 최종학위는 1531년 오를레앙(Orleans)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이다. 칼빈은 5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 수 많은 프로테스탄트 동역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종교 개혁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된다.  

1533년경 20대 초반의 칼빈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이 시기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갑작스러운 회심을 체험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성직자로서 종교 개혁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1534년 5월 4일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 했다. 1534년에 그는 제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에 반대하여 ‘심령 수면설’이라는 소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프란시스 1세는 종교개혁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을 박해했다. 그의 박해 이유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의 로마교회 미사와 교리 그리고 부패한 성직자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마교회와 이미 결별한 칼빈도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하여 신학을 연구하게 된다.

 

제1차 제네바 종교개혁

제네바에서 칼빈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제네바는 외국인에 대한 텃세가 강한 도시였기 때문에 칼빈은 처음에 ‘저 프랑인’이라며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1536년 10월 로잔에서 벌어진 성찬에 대한 논쟁 이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당시 그는 논쟁에 참석하여 로마 가톨릭의 오류인 성찬론에 관해 교부 신학을 인용하여 하나하나 반박했는데, 결과적으로  논쟁은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이듬해인 1537년 칼빈은 비로소 제네바에서 정식으로 설교할 수 있게 됐다.

 

칼빈은 제네바 시민의 종교교육과 교회조직을 관할하게 됐다. 그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자에게도 성찬을 베풀었던 제네바 교회에 대한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칼빈은 주의 성찬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성찬과 관련하여 “주님의 성찬을 부끄럽게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결정하겠다”는 고백을 자주하곤 했다. 따라서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매주일 성만찬을 거행할 것과 제네바 각 행정구역에 특정인을 임명하여 목사를 도와 함께 교회를 치리하자는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을 작성하여 제출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성찬에 대해 호의적이던 당시 제네바 시 의회는 성찬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로인해 1538년 칼빈은 스위스에서 추방당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1541년까지 칼빈은 현재 프랑스 영토인 독일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는 수 많은 프랑스 종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다. 칼빈은 종교개혁가였던 마틴 부처(Martin Bucher)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400~500여명에 이르는 프랑스 종교 피난민들의 목회자가 되어 한달에 한차례 성만찬을 베풀며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는 비로소 제네바에서 실행할 수 없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제를 실행할 수 있었다. 특히 칼빈은 이 시기 그의 필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의 개정판을 저술하였으며 1540년 8월 마틴 부처의 소개로 만난 이델레트라는 두 아이를 가진 과부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복의 성품으로 1548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칼빈을 도와 모범적인 가정을 이뤘다.

 

제2차 제네바 종교개혁

1539년 칼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치적 혁명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와  베른(Bern)이 제네바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제네바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바로 제네바 시민들이 칼빈을 다시 부른 것이다. 3년 전 그를 추방했던 시민들은 기마대까지 동원해 칼빈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칼빈은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경의 원리로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교회와 국가가 서로 분리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1541년 ‘제네바 교회의 법령’을 제정, 공포하고 1542년 방대한 양의 ‘제네바 교리문답’을 완성했다. 칼빈은 교인들을 철저히 교리적으로 훈련시켰다. 칼빈의 엄격한 노선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제네바 시에는 도박이 사라지고 춤이 금지됐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특히 당시 많은 사람들을 영혼을 황폐화시켰던 미신과 교황주의도 사라졌다.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나왔고 칼빈의 설교를 듣기위해 성 베드로 교회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 차게 됐다. 그는 1559년 현 제네바 대학의 전신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다. 처음 162명으로 개원했으나 5년 만에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빈의 신학 강의를 들으러 몰려왔다. 그는 아카데미를 통해 제네바를 종교개혁운동의 거점도시로 만들었다.

이후 제네바의 개혁과 정치는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칼빈의 건강은 그에 비해 더욱 악화되어 갔다. 칼빈은 평생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등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열정적인 사역을 계속했다. 그는 연 200회의 설교와 200회의 강의를 하였으며 성경 각 권의 주석을 썼다. 그는 필생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했으며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썼다. 그의 저작전집은 모두 59권에 달한다. 그는 임종이 가까울 무렵 비명(碑銘)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564년 5월 27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 이미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152년 파리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됐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됐다. 특히 영국교회는 칼빈주의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하여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의 영향력으로 인해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됐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빈주의를 따르게 됐다.

 

칼빈의 신학은 매우 실용적이며 시대적인 신학이었다. 그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했다. 칼빈의 신학은 성찬론과 예정론을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마틴 루터의 신학과 일치한다.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 그리스도 속죄의 절대성, 진정한 앎을 위한 계시의 필연성, 강력한 인격적 신앙을 강조하는 점은 루터를 계승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루터는 당시 사람들을 교권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데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 칼빈의 사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중심으로  했다. ‘오직 주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명제가 이러한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신학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칼빈의 사상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빈신학의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가 성립됐다. 160년 전 결성된 ‘세계개혁교회연맹’(WRAC)에는 현재 107개국 215교단 7500만의 신자가 소속돼 있다. 한편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두 이념이 모두 칼빈의 사상에서 유래했다. 일례로 목사 외에 장로, 집사, 교사 등의 평신도들을 교회의 리더십으로 세운 대의적 교회정치 형태는 이후의 민주주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또 서구 시민민주의의 정치체계의 사상적 기반인 로크와 루소 등의 자연권 사상, 근대의 시민혁명이 모두 칼빈의 신학과 내용적으로 연관성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주장한 칼빈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교회와 신학이 주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계속적으로 거듭나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

하루 3시간 이상 기도,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직업소명관과 사유재산제로 자본주의 토대 구축
“사탄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수도사들이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뿐이다.”

이 기도문은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개혁 반대파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으려 했을 때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했던 기도이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루터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한스 루터는 엄격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자식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자신의 삶과 구원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왜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담화·Tischreden>에는 1505년 7월 2일 루터가 친구와 함께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도중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 것으로 적혀 있다. 이 때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루터는 불안과 번민에 휩싸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가 되어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교회가 제시한 고해성사나 신비주의적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게 된다.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루터는 “즉시 다시 태어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 바로 그 자체에 들어온 느낌을 스스로 가졌다”고 말했다.

신약 독일어번역 통해 독일통일 기여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결과로 14세기경부터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업(善業)으로 갚을 것을 권했다.

가톨릭교회는 성당건설과 포교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권하면서 면죄부(免罪符)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루터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이를 불태워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당시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에 의해서나 아니면 분명한 이성에 의해 나를 설복시키지 않는다면,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제국의 권위에 대한 역사적인 양심선언이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거의 자격을 가진 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큰 공헌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철저히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의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영주(領主)들 간의 분쟁 조정을 위해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소천(召天)하였다.(1546년)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으로 응답해야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해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소명을 받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기독교인은 모두가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루터에 의해 개신교에서는 새로운 소명관(召命觀), 즉 직업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 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일부 재세례파(再洗禮派)가 주장하던 공유재산제도를 비판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옹호했다. 루터는 상업활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기독교적 방식으로 실시될 수 있다고 봤다.

루터의 이러한 사상은 이후 칼빈(Jean Calvin)과 칼빈주의자들을 거쳐 근대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는 또 구걸을 금지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제도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어린이들에 대한 무상교육을 주장했다. 특히 공중도서관을 세우되 거기에는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전과 희랍, 로마의 고전, 법률, 의학, 예술, 역사서적의 비치도 주장했다. 루터는 스스로 과학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에 감탄을 보냈다.

우리는 루터를 말할 때 당연히 ‘종교개혁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에 이끌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혁’은 오로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만을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던졌습니다.”

루터가 살았던 15세기에는 종교개혁과 함께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때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일 뿐이어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를 움직였다. 그러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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