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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라마단 기간 안내 5월6일~6월03일

 

 

 

아랍어로 '더운 달'을 뜻한다. 천사 가브리엘(Gabriel)이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가르친 신성한 달로 여겨,
이슬람교도는 이 기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날마다 5번의 기도를 드린다. 여행자·병자·임신부 등은 면제되지만 대신 이후에 별도로 수일간 금식해야 한다.
이러한 습관은 유대교의 금식일(1월 10일) 규정을 본떠 제정한 것인데, 624년 바두르의 전승(戰勝)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달로 바꾸어 정하였다.


신자에게 부여된 무슬림의 5가지 의무 가운데 하나이며, '라마단'이라는 용어 자체가 금식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 물, 성관계도 금지된다.
 
중동지역과 기타 이슬람국가 여행시 알아야 할 점!

라마다 기간 동안 두바이 사막투어시 벨리댄스가 제외되오니 참조 부탁드립니다.
레스토랑의 경우 대부분 문을 닫긴 하지만 호텔 및 일부 식당은 영업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저희 현지직원의 안내에 따르시면 됩니다.
 

몰디브의 경우 관광객들의 식사는 전혀 문제없으며
다만 현지인들의 경우 저녁 7시 일몰 후 식사를 하기 때문에
한 낮에 한국식 인사로 식사했느냐고 물어보면 좀 어색해 질 수도 있습니다.
 
라마단은 매년 기간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력을 사용하는데 윤달이 없어
라마단이 매년 빨라진다고 합니다. 특정 기간이 되면 전문가들이 달을 관측하고 최고 종교
지도자가 라마단의 시작일을 공표합니다.
 
택시도 현지 운전자들이 이 기간에는 쉬기 때문에 잡기 힘든 기간입니다.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저렴한 식당들이 문을 닫기때문에
서양식이나 중국계 식당을 이용하시는게 더 편리할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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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 선고 받고 9년 째 수감 중인 파키스탄 여성 기독교인

 


아시아 비비의 남편 “그녀는 절대 신앙 부인하지 않을 것”

 

 

▲파키스탄에서 신성모독죄로 9년 째 수감 중인 아시아 비비 ⓒ한국 순교자의 소리


9년 전 신성모독 혐의로 체포돼 교수형을 선고받은 파키스탄의 여성 기독교인 아시아 비비(Asia Bibi)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항의 덕분에 비록 감옥에 있으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국 순교자의 소리(VOM)가 10일 밝혔다.

무하마드 이드리스(Mohammad Idrees)라는 무슬림 소유의 농장에서 일했던 아시아 비비는 함께 일하던 무슬림 여성들로부터 기독교를 떠나 이슬람으로 돌아오라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하루는 이 여성들과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고, 아시아 비비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무하마드는 우리를 위해 해 준 것이 뭐가 있죠?"라고 말했다.

이 말에 분노한 무슬림 여성들은 아시아 비비를 구타하기 시작했고, 다른 무슬림 남자들은 그녀를 방에 가뒀다. 이후 지역 경찰이 와서 그녀를 체포했으며, 17개월 후 파키스탄 법정에서 신성모독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자 전 세계 교회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파키스탄 정부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그리고 지속된 항의와 그녀의 석방 요구에 형 집행은 계속 연기될 수 있었다.

프리미어 뉴스(Premier News)에서 아시아 비비의 남편은 "아시아는 자신이 풀려날 것을 믿고 있다. 그녀의 얼굴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며 "그녀는 자신이 가진 기독교 신앙을 몹시 자랑스러워하며 절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 폴리 현숙 대표는 "아시아 비비가 감옥에 있는 지난 9년간, 하나님은 전 세계 교회가 파키스탄의 핍박받는 형제자매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하셨다"며 "그녀는 감옥과 자신의 나라, 그리고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삶을 계속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VOM은 홈페이지(http://vomkorea.kr)를 통해 70여 개국의 핍박받는 기독교인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그중 파키스탄 내 핍박받는 기독교인에 대한 정보는 아래와 같다.

 

<파키스탄>

 


▲파키스탄 사람들의 모습 ⓒ한국 순교자의 소리


분류: 기독교 금지 국가


국가 정보: 인도 북서쪽에 자리한 파키스탄은 본래 인도 내 무슬림 인구들의 주민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주는 '해결책'으로 만들어진 나라이다. 현재 파키스탄은 탈레반 및 자칭 이슬람 국가(IS) 등과 같은 극단주의 집단들이 야기한 부정부패와 불안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요 종교: 대다수 국민이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수피파 무슬림도 그 수가 적지 않다. 기독교 인구도 소수 존재하는데, 대부분이 하층민이다.

박해 실태: 파키스탄 기독교인들은 사회 및 가족 구성원부터 급진파 집단들과 정부에게까지 광범위한 핍박을 받고 있다.


파키스탄 기독교인의 삶: 파키스탄 신성모독법으로 인해, 기독교인은 언제든 이슬람이나 코란, 무함마드 모독 혐의로 기소될 위험에 처해 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그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고 가혹한 처벌을 당한다. 많은 기독교인이 어느 정도 안전을 지켜줄 폐쇄된 부락에 모여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이 집단 거주지조차 이전에 몇 번이나 대규모 공격을 당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립학교에 다니는 것인데, 공립학교는 이슬람을 가르친다. 기독교인 아이들은 종종 학교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이로 인해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자퇴를 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열악한 교육과 빈곤의 악순환에 갇혀 있는 상태이다. 대부분이 벽돌 굽는 가마에 계약된 하인이나, 거리 청소부 혹은 오물 처리 노동자로 일한다. 신성모독법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감옥을 드나들곤 하며, 그중 일부는 장기 수감 생활을 하기도 한다.

성경 근접성: 파키스탄에서는 성경을 합법적으로 인쇄하고 배포할 수 있다. 하지만 무슬림 집단들이 성경에 반대하고 있다. 시골이나 부족 공동체, 산악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순교자의 소리 사역: 핍박이 심한 지역을 원조하고, 지역 목회자와 전도자를 양성하며, 박해를 당한 희생자들을 직접적으로 돕는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한 형태로 보급하는 사역을 지원한다.


이지희 기자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원본링크]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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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 아닌 기독교 이단’ 경계하되 긍휼 대상으로 이해
 불링거 “거짓 선지자 무함마드는 교활하고 위선적 …
꾸란은 고대 교회 모든 이단의 거짓을 모은 것에 불과” 질타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종교개혁은 유럽사회가 로마 가톨릭교회 중심의 중세적 질서체제에서 근대적 민족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편 이 시기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을 향한 군사적 팽창과 영토 확장이 최고조로 달했던 순간이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고조되던 16~17세기는 오스만 제국에게 유럽으로 영토확장을 위한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종교개혁 직후인 1520년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를 침공하여 중부유럽을 장악했고, 여세를 몰아서 1529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까지 포위했다. 오스만 군대의 빈 공략은 유럽 전체가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가공할만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 무렵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시기보다 고조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기독교인들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서 이슬람의 유럽 점령이 가시화 된 것뿐만 아니라 이슬람화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이슬람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루터, 칼빈, 쯔빙글리, 불링거와 같은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가장 이슬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이슬람 책을 저술하였던 신학자는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 1504~1575)였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로서 40년 이상 교회를 효과적으로 이끈 탁월한 지도자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신학자요, 설교자요, 상담가였다.

1.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이해

 

첫째, 불링거의 저서 <터키>(Der Tuergg)를 통해 본 이슬람

불링거는 1567년에 <터키>(Der Tuergg)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여기에서 터키란 당시 오스만 터키라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내용상 ‘이슬람’이라고 써도 무방하다. 이 책은 이슬람에 관한 불링거의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의 표지에 요한계시록 9장 16절과 17절을 실었다.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이 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그는 그 시대에 터키인들이 유럽으로 물밀 듯이 쇄도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루터처럼 어떤 종말적인 분위기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책의 첫 장의 제목이 ‘이슬람의 신앙과 거짓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하여’이다. 그 책의 첫 문장을 “터키인들의 신앙은 무함마드의 신앙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바로 이어진 문장에서 그는 무함마드를 교활하고(listig), 비열하고(dueckisch), 위선적(glychssnerisch)이라고 특징지었다. 이 책의 둘째 장의 제목은 ‘기독교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인데, 첫 문장이 “한 마디로 하나의 오래되고 참되고 거룩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신앙이 세상의 시작부터 있었는데”라고 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을 천명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무슬림의 신앙과 삶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이다. 특별히 불링거는 디모데전서 4장과 골로새서 2장을 인용하면서 무함마드와 그와 같은 교훈들을 심지어 ‘사탄의 교훈’(tuefeles leeren)이라고까지 불렀다.

 

둘째,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

불링거는 이슬람을 타종교가 아닌 기독교 이단으로 보았다. 그가 1566년에 펴낸 것으로 여겨지는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면서 이슬람의 가르침을 ‘잘못된 가르침’(Irrlehren)이라고 하였으며 이슬람교도들을 가리켜 이단자라고 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꾸란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고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존재도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이슬람의 이단성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현재의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살았던 비잔틴 신학자 요한네스(Johannes)였다. 그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약 20년 후에 태어났다. 만수르(Mansour)의 명문가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군주 무아위야 1세(Muawiyah1, 602~680) 아래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무아위야 1세의 뒤를 이은 왕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자 요한네스는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사바(Mar Saba)수도원에 은신하여 이슬람을 연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저술인 <지식의 근원> ‘제2부 이단에 관하여’ 에서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단이였던 아리우스파 수도사로부터 정보를 받아서 이슬람이 시작되었으며, 꾸란에서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으로 언급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불링거는 요한네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셋째, 불링거의 꾸란에 대한 이해

불링거에게 꾸란은 고대 교회의 모든 이단들의 거짓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 꾸란의 기원을 하나님이 아니라 무함마드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더불어 꾸란에 담겨있는 이단적인 요소들을 지적하였다. 무함마드가 신에게 받았다고 하는 계시와 비전(Vision) 역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꾸란은 이단 사제의 도움과 완고한 유대인과 잘못된 기독교인의 조언이 섞였으며 아리안(Arians), 마케도니안(Macedonians), 네스토리안(Nestorians)과 같은 이단들에 의하여 부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꾸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유일한 중보자 되심도 부인한다. 이같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리의 부인한다. 불링거는 금식, 기도, 구제, 알라와 이슬람을 위하여 싸우다 죽음으로서 모든 죄에서 해방된다는 교리를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무함마드에게 묻는다. 또한 영생, 예배, 결혼 등에 대한 꾸란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다.

 

넷째, 이슬람 지배 아래서 기독교인의 태도

불링거는 1551년 헝가리의 이슬람 정권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헝가리 기독교 지도자들의 편지에 대하여 1551년 6월에 선명하고 원론적인 답신을 보냈다. 성경의 신자들이 사도시대에 우상을 숭배하는 로마제국 아래서도 살았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통치 아래서 바벨론 포로가 된 상태에서도 살았다. 이러한 신뢰 속에서 불링거는 헝가리 신자들에게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근거로(렘 29:7) 평안 중에 삶이 유지될 수 있도록 무슬림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특별히 불링거는 헝가리와 동유럽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우리 모두의 죄악과 관련된 것임을 밝혔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회초리를 벌었다.” 불링거는 헝가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슬람 종교로 인한 고통을 탓하기 전에 그들 자신들을 먼저 살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링거는 헝가리 교인들에게 핍박이 올지라도 하나님이 금지하신 이슬람의 신앙과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불링거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침략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았고, 이와 관련하여 헝가리 기독교인의 회개와 경건회복이 요청된다는 것을 편지에 언급하였다.

 

2. 불링거가 주는 교훈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견해를 다루면서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의 교훈이 있다. 하나는 분별의 척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많은 부분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슬람에서 유일신에 대한 고백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고백은 없다. 또한 우리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은 대속의 은혜인데, 예수의 주 되심을 부인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속이 없고 공덕에 의한 구원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한 점에 있어서는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다. 우리 시대에 그들이 아무리 미사여구의 평화의 말로 접근해 올지라도 그들의 정체를 바로 알고 경계해야 한다. 또 하나는 이슬람에 대하여 경계할 것은 경계하되 그들 역시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며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불링거는 하나님의 백성 밖에 있는 자들의 믿음과 삶에 대하여 보다 긍정적인 암시를 제공한다 즉 무슬림 또한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란 점에 있어서 긍휼의 여지는 있다. 특히 이 점은 불링거에게 있어서 돋보이는 점이다.

 

3.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적용

종교개혁 당시와 같이 다시 한번 21세기 거대한 종교로 우뚝 선 이슬람은 국제사회를 공포와 위협으로 압박하며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국 또한 박근혜 전 대통령 때 구체화된 친 이슬람정책으로 인하여 작년 한 해 동안 이슬람 관광객 1백만 명이 우리나라를 다녀갔으며 할랄 시장의 확대 등 정부는 이슬람 인구를 맞이할 준비로 분주한 듯하다. 이슬람은 더 이상 중동의 종교가 아니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3분의 2가 아시아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슬람 인구가 많은 나라는 국민의 80%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약 1억9000만) 두 번째, 인구의 96%가 무슬림인 파키스탄(약 1억7000만) 그리고 인구의 89%가 무슬림인 방글라데시(약 1억5000만) 등이다. 이 나라 이외에도 이슬람 국가인 우즈베키스탄과 키르키스탄 등 5개국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는 인력 송출국 속에 포함되어 우리나라에 정착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 이슬람 인구도 성장하고 있다. 1956년 208명이었던 한국 이슬람인구는 1970년 3700명, 2009년에는 9만1000명으로 성장하였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의 도전 앞에 이슬람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에 따라서 더 이상 이슬람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밀려오는 이슬람의 도전 앞에 한국교회는 응전을 준비해야 한다. 이슬람이 세상을 뒤흔든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세상을 보고, 교회의 역할을 권고했다. 지금 세대에도 동일한 눈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전진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슬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이슬람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이슬람을 무조건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루터나 칼빈, 불링거처럼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무슬림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전도해야 하는 대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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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기도만이 이슬람과 영적전쟁서 승리하게 한다”
루터, 기독교 타락이 이슬람이라는 징계 불러왔다고 판단 …
칼이 아닌 개혁이 진정한 무기임을 강조했다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현재 기독교 안에 이슬람을 바라보는 네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이슬람에 대한 공포가 혐오적으로 나타나는 이슬람포비아(Islam phobia) 입장이다. 이슬람포비아라는 말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으나 실제로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9·11테러 이후에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둘째는 무슬림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이슬람권 안에서 현지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그대로 따르면서 은밀하게 마음 안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내부자 운동(Inside Movement)적 시각이다. 셋째, 다원주의(pluralism)적 입장이다. 두 종교가 서로 공존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통적인 부분을 강조하며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넷째, 개혁주의적(reformism)입장이다. 이는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떠나서 기존의 기독교로 들어오라고 초청하는 입장이다. 이슬람은 진화론적 종교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라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슬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불편한 관계의 역사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A.D. 570년에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쿠라이쉬(Quraish) 부족의 하심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슬람에 의하면 그가 나이 40이 되었을 때, 메카에서 2마일 떨어진 히라산 동굴에서 계시를 받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쿠라이시 부족의 신(神)이었던 ‘알라’만을 섬기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였다. 무함마드는 70여 차례 전쟁을 치렀으며, 그 가운데 직접 군대를 지휘한 것도 27차례나 된다. 무함마드는 칼을 들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다. A.D. 632년 무함마드는 62세로 메디나에서 고열과 폐렴으로 죽었다.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에 그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무슬림 세계는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서 비잔틴 기독교 제국을 정복해 나갔다. 10년 후 이슬람 군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후 70년 동안 서쪽으로 진군하여 북부 아프리카 전체를 정복했다. 그리고 15세기까지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남부 프랑스와 지중해 서부를 점령했다.

 

오스만과 터키의 술탄 메멧 2세(Mehmet II, 재위 1452~1481) 때인 1453년에 고대 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 비잔틴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메멧 2세는 여세를 몰아 발칸 반도 안으로 유럽의 중심부를 향해 터키 제국의 경계를 넓혀 나갔다. 1475년에는 크림반도(the Crimea)를 탈취하였다. 나아가 1500년에는 알바니아(Albania)를, 1512년에는 몰다비아(Moldavia)를, 1516년에는 루마니아(Romania)를, 1517년에는 몬테네그로(Montenegro)를 복속시켰다. 1517년은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34살의 나이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때다. 1529년 비엔나에서 그 걸음을 멈추게 되기까지, 이들은 계속하여 유럽 중앙으로 전진해 들어왔던 것이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이슬람 군대인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이 종교개혁의 다양한 배경을 형성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슬람에 대한 루터의 저서들

마르틴 루터가 이슬람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한 것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그 다음 해인 1518년에 쓴 <사면의 능력에 대한 논쟁의 해답들>(Resolutione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이다. 또한 서신 등을 통하여 이슬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본격적으로 이슬람에 대하여 써서 출판한 작품은 1529년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전쟁에 대하여>(Vom Kriege wider die Turken) 이었다. 그 후 루터는 터키군대의 움직임을 전해듣고, 또 하나의 작품을 출판하게 되는데,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군대설교>(Heerpredigt wider den Turken)이었다. 세 번째 작품은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기도에 관한 훈계>(Vermahung zum Gebet wider den Turken). 이 작품을 총 세 번(1539년, 1541년, 1543년)을 썼다.

 

이와 함께 1530년 출판된 책 <터키의 의식과 윤리에 대한 책>(Libellus de ritu etmoribus Turcorum)의 서론을 썼다. 또 기억할 만한 것은 루터가 1542년에 편집 번역한 작품인데, 이 책은 1300년 경에 도미니칸 수도사인 리콜도(Riccoldo de Monte Croce)가 쓴 <꾸란에 대한 반박>(Confutatio Alcorani)이다. 본래 루터는 이 책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그가 꾸란의 라틴어 번역본을 읽은 후에 이 책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그 후에 루터는 이 책을 편집하여 번역하였다. 또한 1530년 헝가리의 게오르기우스(Georgius)가 출판한 <무슬림의 의식과 도덕에 대한 책>에서 루터는 ‘경건한 독자에게’(Lectori pio)라는 서문을 썼다. 이 책은 도미니크 수도사인 게오르기우스가 1480년 터키에 사로잡혀서 오랜 기간동안 노예로 있으면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적은 책이다. 루터는 이 책을 이슬람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책으로 여겼다. 이슬람에 대한 또 다른 작품의 서문이 있는데 1542년에 아랍어에 능통했던 취리히의 신학자 테오도르 비블리안더(Theodor Bibliander)가 독일어로 번역한 꾸란의 서문이다. 루터는 1543년 초에 나온 이 책의 서문을 썼다. 다양한 루터의 글을 통하여 루터가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루터의 이해

첫째, 루터는 이슬람의 침략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반대하고 있다. 유럽을 정복하려는 이슬람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루터가 반대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슬람 군대를 보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슬람을 하나님의 채찍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루터는 이슬람을 향해 칼을 들고 벌이는 전쟁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에서 루터는 ‘이슬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하여 이들을 징계하시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했듯이, 기독교의 타락이 이슬람이라는 징계를 불러 왔다고 본 것이다.

 

둘째, 루터는 이슬람과의 외적인 전쟁보다는 먼저 내부의 적(敵)인 ‘기독교인들의 부패와 타락’을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외부의 적인 이슬람보다 내부의 적인 교황청이 더욱 악하다는 것이다. 교황청의 사기꾼들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이슬람 군대와 싸우도록 부추기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슬람 군대보다 내부적인 부패와 거짓과의 싸움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즉, 기독교인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회개가 이슬람보다 더 시급한 문제라고 루터는 보았던 것이다.

 

셋째, 루터는 이슬람과의 전쟁은 영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오스만 터키 이슬람 군대와의 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사탄과의 전쟁이라고 확신하였다. 루터는 이슬람의 신(神)을 사탄으로 보았고, 이 영적인 전쟁은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기도를 통해서만 승리를 거둘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이슬람이라는 채찍을 빼앗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기도로써 이슬람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넷째, 루터는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적(敵)으로 인식하였다. 1529년 이슬람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를 포위한 소식을 들으면서, 루터는 임박한 종말을 의식하며 이슬람을 종말론적인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터키인에 대항하는 군대 설교>에서 루터는 말세에 예언된 두 폭군을 교황과 이슬람으로 해석하고, 다니엘서 7장의 4번째이자 마지막 짐승을 로마 제국으로, 열 뿔을 제국 내의 나라들로, 그리고 뿔들 사이에 있는 ‘작은 뿔’을 이슬람으로 이해하였다. 교황을 “위선의 가면을 쓰고 성전에 앉아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적그리스도”로, 이슬람을 “선하고 정결한 덕목을 지닌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계략을 가진 적그리스도”로 이해했다.

종교개혁 당시의 이슬람 군대의 침략은 온 유럽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족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루터는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신학적, 정치적 눈을 가지고 교회와 세속권력이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조언한다.

 

이 조언은 지금의 한국교회에게도 유용하다.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는 루터의 조언에 따라서 내부적으로 말씀과 거룩을 따르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싸움은 루터의 견해처럼 영적인 전쟁이다. 따라서 회개와 인내가 그 모습이 되어야 한다. 만일 힘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교회가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세속정부의 영역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역할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혼돈될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잃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사랑의 모습으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으로 대체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가 변질되고 골고다 산상의 십자가를 자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이슬람이 몰려왔고, 그에 대항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채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그 주권을 이슬람에게 내어 주고 말았다. 중동이 그랬고, 유럽이 그 길을 가고 있다. 우리 곁에 이슬람이 다가오고 있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다시 개혁을 논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이슬람으로 인하여 종교개혁을 가속화시켰던 마르틴 루터의 말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내 말은 이슬람에 대항하여 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더 개선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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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슬람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꾸란(Quran)1)은 천상(天上)에 원본(原本)이 있으며 무함마드(Muhammad, 571?-632, 이슬람교 시조)에게 계시된 완벽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또 꾸란으로 신구약성경의 진위(眞僞, 참과 거짓)를 구별하는 기준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신구약성경은 여러 사람이 천 오백여 년 동안 쓴 것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많지만 꾸란은 알라(Allah, 이슬람의 하나님)가 무함마드2) 한 사람에게 계시한 것이기 때문에 혼돈과 오류가 없고,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를 받은 때부터 지금까지 일점일획도 변치 않고 원본이 그대로 보존돼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점에 의심을 품으면 거룩한 꾸란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꾸란이 변질되었다거나 한 구절이나 한 단어라도 추가되거나 삭제되었다고 말하는 자체가 알라(Allah)의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모순이 이슬람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슬람 학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슬람의 확장을 위해 그리고 이슬람권에서의 자신의 영향력과 신분 유지를 위해 또 사실을 말했을 경우 직면하게 될 핍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맘 부카리(Bukhari)3)나 이맘 무슬림(Muslim)3)이 수집한 하디스(Hadith, 무함마드의 언행 집)4)는 이슬람교에서 공식적인 경전은 아니지만 꾸란 경전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꾸란 보다 더한 권위가 부여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의 교리를 설명할 때 제일 먼저 무슬림들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다섯 기둥에 대해서 가르친다. 그러나 꾸란에는 이 다섯 가지 의무를 모아 놓은 곳이 없다. 이는 이맘 부카리가 편집한 하디스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교리나 가르침에서 문제점을 제기할 때 어떤 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말하기 보다는 꾸란과 이맘 부카리 혹은 이맘 무슬림의 하디스의 내용을 인용하여 반증한다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서는 하디스에 비교적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런데 그 자료들은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듣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무함마드는 신(神)으로부터 책을 받은 일도 없고, 그가 죽을 때까지 꾸란을 책으로 만든 일도 없고, 후대 무슬림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책으로 묶어 만들라고 명령한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꾸란에는 알라(Allah)가 무함마드에게 책(꾸란)을 내려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꾸란은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성경의 모체가 되는 책을 내려주셨다고 말한다. “그대에게 그 책을 계시하신 분은 알라이시며 그 안에는 근본의 말씀이 있어 성경의 모체가 되고…”(꾸란 3:7) “그분의 종(무함마드)에게 그 책(꾸란)을 계시한 알라께 찬미를 드리나니 그 안에는 일점의 왜곡됨도 없노라.”(꾸란 18:1) 이 두 구절 외에도 꾸란에는 여러 곳에서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책(al-kitab, the Book)을 내려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의 꾸란이라는 경전은 주후 632년 무함마드가 죽을 때까지 없었다. 즉 이슬람의 역사와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죽을 때까지 꾸란을 책의 형태로 만든 일이 없었다. 다만 그가 간헐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암송하는 소리를 들었던 제자들이 그 내용을 나뭇잎이나 돌 등에 새겨놓고 암기하기도 했던 것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꾸란의 내용을 암기하던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게 되어 무함마드의 계시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우마르(Umar)의 제안에 이슬람의 첫 칼리프 아부 바크르(Abu Bakr, 573-634)가 그것들을 모으게 하였고, 1차 수집한 것을 우마르의 딸 하프사에게 맡겼다가 결국 3대 칼리프 우트만(Uthman, 577-656)의 명에 의해서 하프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흩어져 있던 꾸란의 구절들을 수집하여 종합 편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어떤 종류의 완본이든지 조각 본이든지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0)

 

 

초기 무슬림들은 꾸란을 책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카리의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죽은 후 전쟁터에서 꾸란을 암송하던 사람들이 죽고 전쟁이 더 심해져 꾸란 암송 자들이 다 죽어버리면 꾸란 자체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구절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묶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주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명하지 않았던 일을 그의 허락 없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자기들이 볼 때는 좋은 일이지만 알라가 나중에 그 일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아부 바크르는 자이드 빈 타비트(Zaid bin Thabit, ?-665)에게 명하여 꾸란의 조각들을 모으라고 명했던 것이었다. 아부 바크르의 이 같은 명령을 받은 타비트는 산을 옮기라는 명령보다 더 어려운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9)

무함마드는 자기가 계시 받았다고 말했던 꾸란 구절들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낭송해 준 구절들을 나중에 망각하고 잊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낭송하는 것을 듣고 생각났다고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다음의 하디스 구절이 그 증거다. “메신저(무함마드)께서는 사원에서 낭송 자가 꾸란을 낭송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가 잊었던 그것을 생각나게 했으니 나는 알라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Volume 6, Book 61, Number 562) 꾸란의 구절을 망각하는데 대한 계시는 꾸란 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취소하거나 망각케 한 어떤 계시의 구절이 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낫거나 비슷한 것을 가지고 온다. 알라(Allah)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너희는 모르느냐?”(꾸란 2:106, 힐럴리 역)

 


꾸란을 낭송하는 방법은 원래 여러 가지였다. “알라의 메신저(무함마드)께서 가브리엘 천사가 내게 꾸란을 어떤 식으로 낭송해 주기에 내가 다른 식으로 낭송해달라고 계속 부탁을 했더니 결국은 7가지 방법으로 낭송해 주셨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Volume 6, Book 61, Number 513) 꾸란은 원래 다양한 방법으로 낭송할 수 있도록 계시되었다고 이슬람의 제 2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무함마드는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준 꾸란을 그대로 받은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의 요청에 의해서 가브리엘 천사가 낭송하는 방법을 7가지로 다시 계시해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무슬림들은 7세기에 무함마드가 낭송하던 한 가지 억양과 발음과 악센트로 낭송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의미도 모르는 아랍어로 꾸란을 낭송하게 하는 것일까?

우트만 꾸란의 편집이 완료되었을 때 꾸라이시 족들이 교정을 보았다. 우트만은 3명의 꾸라이시 사람들에게 “자이드 빈 타비트의 꾸란 중 어느 부분이라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꾸라이시 방언으로 기록하라. 왜냐하면 꾸란은 그들의 방언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7)

꾸란을 수집할 때 실수로 빠뜨렸던 구절들이 있었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꾸란을 가장 잘 외우고 있었던 4사람이 있었다. 무함마드는 사람들에게 압둘라 빈 마수드, 쌀림, 무아드, 우바이 빈 카압 이 네 사람에게 꾸란을 배우라고 명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21)

그러나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를 역임했던 아부 바크르는 자이드 빈 타비트에게 꾸란을 모으라고 명령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9) 타비트는 실수로 꾸란의 한 구절을 빠뜨렸다고 고백하고는 나중에 무함마드가 낭송하던 것을 들었던 생각이 나서 그 구절을 찾아 나섰다가 결국은 쿠자이마 빈 타비트 알 안싸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구절은 꾸란 쑤라 타우바(9:128~129)였다고 기록되어 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0)

계시된 꾸란 구절이 즉시 수정된 경우도 있다. 꾸란 4:95에 “무슬림 중 알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자들과 집에 앉아 있는 자는 동등하지 않다.”는 구절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다고 하여 자이드가 기록하려는데 그 때 아므르 빈 움막툼(Amr bin Um Maktum)이라는 소경이 무함마드 뒤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오 알라의 메신저여 나 같은 소경에 대한 당신의 명령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계시가 다시 내려왔다는 것이다. “무슬림 중 알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자들과 불구자도 아닌데 집에 앉아 있는 자는 동등하지 않다.”(꾸란4:95)(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2)

 

 

꾸란에는 사탄에게 받은 계시도 있다. 무함마드가 소속되어 있던 메카의 꾸라이시 족이 섬기던 신 알라(Allah)에게는 세 딸 신(神)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라트, 우짜, 마나트였다. 그들에 대한 꾸란이 계시되었는데 “너희는 라트, 우짜, 마나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느냐? 저들은 하늘 높이 나는 학과 같아서 그들의 중재는 알라께서 열납하시느니라”(꾸란53:19~23)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알라의 단일신론을 주장하면서 딸 신들을 인정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계시를 취소하는 새로운 계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계시는 지금 꾸란에 있는 것처럼 세 딸들의 권위를 부인한다.(꾸란 53:19~23) 그러자 사람들이 왜 알라의 계시가 바뀌었냐고 물었을 때 “그 구절은 사탄이 내 혀에 넣어준 것이었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에 의해서 취소되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Al Tabari Hadith Book6 No. 107)

그와 같은 것을 보편화시키면서 인정하는 구절도 있다. “그대 이전에 우리가 보낸 선지자나 예언자들이 계시를 낭송할 때 사탄이 거짓을 그 속에 섞어 넣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러나 알라께서는 사탄이 섞은 것을 취소하시고 자신의 계시를 세우셨다. 알라는 모든 것을 아시고 지혜로우시다.”(꾸란 22:52 힐럴리 역)

꾸란에서 사라진 구절도 있다. “알라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때 그 계시함이 무엇인가는 알라만 아심이라. 이에 그들이 그대는 위조자라고 말하나 그들 대다수는 알지 못하더라.”(꾸란 16:101 최영길 역) 대체라는 말은 하나를 취소하고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말인데 하늘에 원본이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이 같은 꾸란에 대해 미화 된 홍보용 자료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꾸란은 사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부터 수시로 취소 또는 첨가되기도 하며 대체되기도 하는 변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책으로 묶을 생각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꾸란의 구절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는 계시가 분명히 꾸란에 있었고 무함마드도 투석(投石) 형(刑)을 집행했고 그의 후계자들인 칼리프들도 투석 형을 알라의 명령으로 알고 집행했는데 지금은 꾸란에 그 구절이 없다는 것을 보더라도 양심 있는 무슬림 학자들이라면 꾸란이 하늘에 원본이 있었던 것이 그대로 책으로 계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쓴 이 /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출처 / 기독일보 2010.9.15.

1) The Quran is the central religious text of Islam, which Muslims believe to be a revelation from God. It is widely regarded by Muslims as the finest piece of literature in the Arabic language . Quranic chapters are called suras and verses, ayahs.
 2) Muhammad Prophet is considered in Islam to be the greatest messenger and prophet sent by God to guide humanity to the right way. Born: Mecca, Saudi Arabia, Died: June 8, 632 AD, Medina, Saudi Arabia, Full name: Abū al-Qāsim Muḥammad ibn ʿ Abd Allāh ibn ʿAbd al-Muṭṭalib ibn Hāshim, Buried: Green Dome, Medina, Saudi Arabia, Spouse: Maymunah bint al-Harith (m. 629 AD–632 AD)
 3) 이맘 부카리(Bukhari) : 하디스를 수집한 유명한 이슬람 학자로는 이맘 부카리, 이맘 무슬 림 등이 있다.
4) Hadith are collections of the reports claiming to quote what the prophet Muhammad said verbatim on any matter. The term comes from the Arabic meaning “report”, “account” or “narrative”. Wikipedia 하디스(아랍어: حديث نبوي)는 무함마드가 말하고(Qaul), 행동하고(Fi’ul), 다른 사람의 행위를 묵인한(Taqreer) 내용을 기록한 책이며 꾸란(코란), 이 즈마, 끼야쓰와 함께 샤리아(sharia law, 이슬람법)의 4대 원천이다. 무슬림은 알라의 말씀인 꾸란과 더불어 하디스에 기록된 무함마드의 언행(순나)에 따라 행동함을 삶의 기반으로 한다. 종교의 시조의 말을 담은 종교적인 어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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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해 인도네시아편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특징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로 정치와 문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전 인구의 약 88%(176백만명)이 믿고 있는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는 단일신 종교로 '이슬람'은 뜻은 복종, 순종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슬람을 믿는 남자는 '무스림', 여자의 경우 '무슬리마'라고 부르며 경전은 코란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은 인도네시아의 국교가 아닙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불교, 카톨릭, 힌두교, 이슬람교 모두가 공휴일이고 중동의 엄격한 이슬람과는 규율도 느슨한 것이 사실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슬람이 13세기 기존에 정착해 있던 힌두교와 불교와 함께 무력이 아닌 무역으로 인도네시아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다원적 종교관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 가면 차로 30분 이내의 거리에 이슬람 왕궁, 불교사원, 힌두사원이 인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 개로 나누어진 이슬람 종파 때문입니다. 국민의 약 14.3%를 신도로 하는 [나흐다툴 울라마] 와 국민의 약 13.3%[무함마디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두 단체의 지향점이 다른 것도 문제인데 나흐다툴 울라마의 경우 코란, 하디스 외에도 4개의 법학파의 법률에 비중을 두고 있는 반면 현대주의자인 [무함마디야]는 코란과 하디스 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무슬림 인구의 지역적 분포인데 인도네시아 발리의 경우 비이슬람교인이 94%, 동부 누사떵아라 91%, 북부 술라웨시 54%, 말루꾸 46% 등 지역에 따라 천자만별로 다르다는 것도 이슬람이 국교가 되기 힘든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아쩨 주에서도 이슬람법을 적용하려 했으나 기독교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무산된 경우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생활 속 이슬람 문화가 미치는 영향

생활 속에서 찾아보는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화

 

 

 

<사람들의 성향 >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운명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생활이 종교적입니다. 하루에 5번 신에게 예배하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고, 종교적 행사나 의식에는 제한받기를 싫어합니다. 회교도의 경우 금식월인 라마단과 금요일 정오의 모스크 참배에 꼭 참여하며 이슬람교의 전통으로 술을 마시거나 권하는 일이 드물고 그렇기에 술 마시는 사람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신자이면서도 생활 속에는 여전히 미신과 점 같은 토속적인 샤머니즘도 남아있어 여행, 이사를 하기 전 이슬람력과 자와력을 비교해 좋은 날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음식(Halal food) > 이슬람 음식의 중요한 특징은 돼지고기를 금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코란 53절에서 말하는 먹을 수 없는 육식에 대한 말씀을 따른 것으로, '돼지 같은 놈'은 가장 나쁜 욕에 속합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할랄푸드(Halal food)로 따로 분류하고 있으며, 할랄로 분류된 육류로는 소, 염소, , , 오리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무슬림의 손으로 이슬람식 도살 방법에 의해 잡은 것이라야 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마트를 가면 식료품에 Halal이라는 마크가 있어 쉽게 확인이 가능하고 음식점 앞에도 Halal 마크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 친구와 외식을 갈 때도 메뉴마다 Halal 표시가 있어 함께 식사를 하는데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라마단 >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로 1400년 전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 서쪽 동굴에서 알라로부터 코란의 계시를 받은 달입니다. 이 달의 시작을 알리는 초승달이 떠오는 다음 날부터 단식을 시행하는 이슬람의 전통행사이며 이 기간 중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물을 포함해 어떤 음식도 먹어서는 안되고 담배를 피워서도 안됩니다.

라마단이 끝나면 세계 무슬림들의 최대 명절인 이뚤 피뜨리(Idul Fitri, 혹은 르바란)가 시작되며 우리나라 추석처럼 수많은 도시인들이 고향을 찾습니다. 르바란을 전후해서 일주일 동안은 관공서를 포함하여 모든 공공기관이 휴무를 하게 되며 르바란 40일 후에는 이뚤 아드하 꼬르반(Idul Adha Korban)이라는 희생제가 이어지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소와 염소 등을 잡아 음식을 나누는 행사를 말합니다.

 

 

<인도네시아여성>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와 목을 감싸는 스카프를 '질밥(히잡)-Jilbab' 이라고 하는데요 최근 이슬람 최고 의결기구인 '울라마 협의회'는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섹시한 복장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슬림 여성들은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긴 소매와 긴 바지, 치마를 입고 머리에 질밥을 쓰고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10, 20대들이 즐겨 입는다는 질봅(Jilboob) 패션입니다. 인도네시아어 Jilbab과 가슴을 뜻하는 영어 boob의 합성어로 특히 가슴을 강조하는 패션으로 마르푸 아민 부의장은 "질밥을 착용하는 여성은 존중하지만 질밥 착용이 저속해 보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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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 이슬람의 종말론-숨은이맘(Mahdism)

숨은 이맘, 알 마흐디

 

시아 이슬람의 큰 특징은 죽음의 종교라는 사실이다. 죽은 이맘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무덤을 순례하며 추모함으로 자신의 신앙심을 표현한다. 가장 큰 종교적 절기가 후세인의 순교를 애통해 하며 불의에 대한 저항 정신을 기념하는 아슈라라는 절기일 뿐만 아니라, 시아 이슬람(열두 이맘파)의 종주국인 이란의 유명한 모스크는 대부분이 이맘의 무덤이거나 친인척의 무덤과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무슬림들의 정파별 분포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시아 무슬림들은 이슬람 역사속에서 늘 박해 받는 소수파였다. 그들의 믿음과 종교적 관행들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늘 핍박의 개종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중재자 이맘의 무덤을 다니면서 자신들의 현실적 아픔과 동일한 핍박으로 죽은 예언자 혈통의 이맘의 아픔과 동일시하며 함께 애통해 하고 아파한다. 또한 신과 인간의 중재자인 그들을 섬기며 신성시 하는 것을 통해 신으로부터 복과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를 구한다.

 

이 변화의 핵심은 숨겨진 마지막 12번째 이맘인 마흐디의 재출현이다. 이 재림 사상은 시아 이슬람에서 종말론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인도자라 불리는 무함마드 알-문타자르 (-마흐디)에 대한 역사는 신비롭고 기적적인 모습을 띤다. A.D 868년에 태어난 알-마흐디는 아버지이자 11대 이맘인 하산 알-아스카리가 자신이 7살 되던 해(A.D 874)에 죽으면서 12대 이맘으로 등극하고, 바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시아 무슬림들은 그가 현재 이라크 사마라에 있는 모스크 아래의 동굴에 스스로 숨었으며, 이 동굴은 밥 알-가이바 혹은 "은폐의 문"으로 불리는 문에 의해 봉인 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곳 사마라의 모스크는 시아 무슬림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 중에 한곳이며, 지금도 신실한 무슬림들은 여기에 모여서 12번째 이맘이 속히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기도한다.

 

숨겨진 이맘에 관한 중심 교리는 은폐와 재림의 원리이다. 은폐에 대한 믿음은 신이 무함마드 알-마흐디의 목숨을 보전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에서 숨겼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순니 무슬림의 계속되는 박해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은 그가 없어진 874년 이후로 그의 생명을 계속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신이 마흐디를 세상에 다시 보낼 것이고,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은폐는 소은폐기와 대은폐기라는 두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소은폐기 동안은 그의 대리자를 통해서 인간과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하였다. 단지 몸만 숨겨진 상태에서 영적인 지도력이나 빛으로 인도하는 리더쉽 등은 그의 대리자들을 통해서 그대로 행사 되었다.이 기간은 4명의 대리자를 거치면서 70여년간 지속 되었다. 그러나 순니무슬림 정권의 위협이 심해지면서, 은폐의 단계는 대은폐기로 들어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은폐기가 되면서 인간과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영적 리더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하지만 이 시기는 무슬림들의 입장에서는 영적으로 비극적 시기이다. 12번째 이맘은 세상 빛의 중심이었지만 이 은폐기는 이 불을 가리고 있는 인간에게는 암흑기를 의미한다. 시아의 세계관으로는 비극적인 시기이자이맘을 그리워하는 시기이다. 시아 무슬림들은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마지막 이맘이 속히 오기를 지속적으로 갈망한다.

 

그러나 숨은 이맘은 결국에 그의 은폐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그의 나타남은 신실한 신자들에게는 미래에 일어날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귀환은 세상 말기에 마지막 심판이 행해지기 직전에 올 것으로 예상한다. 이 귀환에서 이맘 마흐디는 악을 심판하는 정의의 군대의 선두에 서서, 악에 대한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고, 그 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해서 몇 년간 그 나라를 다스릴 것이고 그 후 자연사 한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맘 마흐디가 오기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미리 와서 이맘 마흐디를 돕는 다는 이론이다

 

사실 마흐디라는 말은 꾸란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았던 말이다. 시아 이슬람에서 쓰는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함)에도 4번 정도 언급이 되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종말론이 구체화 되었을까? 그것은 이슬람 이전에 아라비아 지역에 있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말론과 메시아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의 사상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페르시아 지역의 특수성을 생각할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과 페르시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영지주의의 영향등으로 그들의 종말론을 구체화해 해 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시아에서는 A.D 940년 이후 지금까지를 대은폐기로 부르고 있다. ‘대은폐기동안은 직접적으로 마흐디와 의사소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슬람의 가르침을 상세히 알고 있는 한 무리의 고위 성직자들이 지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 이 사상은 후에 이란의 호메이니에 의해 벨리야테 파키(Velayat-e-Faqih)-이슬람 법학자 통치론-로 구체화 되었고, 1979년 혁명을 통해 지금의 이란의 정부 형태인 발전 시켰다.

 

새로운 시대를 열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는 마흐디즘은 또한 많은 나라에서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슬람 역사 속에서 순니파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많은 반란들은 카르발라 사건의 후세인의 저항 정신과 마지막 이맘의 재림에 대한 이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실제 19세기 후반에는 수단에서는 무함마드 아흐마드라는 사람이 구세주 마흐디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는 1881년 이집트의 지배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수차례의 승리를 통해 1898년 까지 실제 마흐디 국가를 수립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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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가족공동체 이해를 통한 선교전략 / 움마 다르 일부다처제 수피즘

 


장훈태-천안대학교 기독교학부 선교학


들어가는 말


2001년 9월 11일 테러 사건 이후 지구촌 사람들은 이슬람1)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관심과 함께 이슬람 관련 방송, 학술세미나,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왜 이런 현상들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라민 샤네 교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큰 차이중의 하나는 기독교는 성경을 현지어로 번역하지만 이슬람은 꾸란을 현지어로 절대로 번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아랍권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세계 각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사회의 도덕성이나 사회 참여에 대한 프로그램 또는 마인드보다는 개인적인 신앙차원 즉 종교적 사유화에 더 집중되어 있다. 반면 이슬람은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통합시키는 사고 체계를 갖고 있다2)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를 하거나 이해기 부족하여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가 있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기독교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 신앙을 알라와 신자의 개인적인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이슬람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우리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이슬람 국가의 건국인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본다.3)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통해 그들은 또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리랑카의 이슬람이다. 스리랑카 무슬림들은 가톨릭계의 중 · 고등학교를 인수한 후 무슬림 학교로 변경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4) 이들은 하나의 종족집단을 형성하여 기독교와 대항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 선교사들이나 외국 인권단체의 보고를 통하여 우리는 계속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당하는 박해소식을 보면 알 수 있다.5) 이슬람은 종교의 다원화를 거부하고 종교가정치, 사회의 모든 분야를 독점하려고 한다. 이슬람은 영혼구원을 위한 종교 본질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강제적이라도 이슬람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사회의 종교적 비관용성은 날로 더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 전호진 박사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자기들 나름대로는 할말이 있을지 모르나 합리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극단의 논리이다.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을 정치 이데올로기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도 이슬람을 이데올로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6) 이런 지적과 함께 이슬람의 가족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과 이슬람 공동체의 복음전달, 장애요인과 가능성에 대한 진단을 통하여 복음 전달의 접촉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이슬람의 가족제도


1.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


이슬람은 전 세계 인구 63억의 21%에 해당하는 13억의 무슬림을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7) 최근 들어 무슬림의 성장속도는 어느 종교보다 빠르다. 이슬람은 96%로 가장 높고, 힌두교는 63%, 기독교는 55.6%이다.8) 특히 무슬림은 서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에 걸쳐 살고 있다. 지난 20세기의 무슬림 성장은 대단했으며, 1900년도에는 12.3%에서 2000년은 21.1%로 성장했다. 이는 대부분 높은 출생률과 이주로 인한 성장이다. 서부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미국에서는 개종으로 인한 성장률이 가장 높은 추세이다. 이처럼 급성장 하는 이슬람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이들의 집단적 힘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이슬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A. D 622년 메디나(Medina: al-Madina, 도시)9)로 피신하면서 기본 생활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마호메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메디나에 살고 있던 정주자로서 그들을 지원한 안사르(Ansar)와 메카에서 온 자신의 추종자인 ‘무하지룬’(Muhajirun)의 형제를 맺게 함으로10) 한 집안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 대가족)의11) 주요한 기원이 되었으며 ‘이슬람 형제애’를 이룩하는 기초가 되었다. 메디나의 무슬림 공동체는 단순한 공동체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이며, 그 후의 사건의 경과로 인해서 제국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슬람 공동체 형성의 또 하나의 원인은 무함마드가 죽기전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이슬람의 형제애’를 역설하였다고 한다.


이슬람의 잠언에서도 한 무슬림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무슬림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이란의 혁명가였던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에 성공한 후 "우리 이슬람은 다른 정부와 다른 지역에 거주할 지라도 한 가족이다"라고 선언하므로 이란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이슬람은 무슬림을 형제애로 묶어주는 공동체를 움마라고 하고 이를 알라 신이 세운 거룩한 기구로 믿는다. 이슬람 사회에서 움마의 구속력과 기본적인 특징은 가정이라는 숭고한 체제 속에서 길러지고 북돋아지는 경건성과 도덕적 행위이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서 가족 구성원들과 그에 딸린 식구들의 권한, 의무, 특권과 관련된 분명하고 상세한 훈계와 지시 사항들이 꾸란과 하디스(hadith) 문서에서 발견된다. 더욱이, 가정 생활의 실질적인 모델은 우리가 사랑하는 선지자의 삶의 형태로 주어진다. 무슬림에서 움마는 사회의 기본단위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로서 가정은 상호적인 의무가 있다. 개인은 그 자체로 중요치 않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중요하다.12)


이러한 배경에서 무함마드가 형제애와 평등사상을 강조하게 된 원인은 메카에서 13년 동안 신의 계시를 전달받으면서 활동했던 시기를 메카시대라고 한다. 미신을 타파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해야 한다는 유일신 유신론 사상13)의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 메카에서 그의 주된 임무였다면 메디나에서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인하여 야기된 부족간의 갈등을 치료하고 메카 아주자와 메디나 후원자 및 유대인들 간의 서로 다른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융화시켜 하나의 공동체(ummah) 즉 이슬람 신앙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그의 메디나 사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형제애 사상을 고취14)시켰다. 이슬람에서 형제애 혹은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한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 모두가 신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것을 내세워 신 앞에서는 인간 모두가 똑같다는 평등사상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이슬람의 형제애 혹은 평등사상을 보게 되면 남성 중심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스크 사원을 출입하는 것이나 집안에서의 활동을 보면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구별되어 있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에서 여성의 위치는 상당히 위축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15) 최근 들어 여성 해방운동가들에 의해 무슬림 여성의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꾸란에 나타난 움마는, 먼저 윤리적 공동체로서 신자들이 선행을 서로 격려하고, 악덕을 미워하며 배제하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움마는 단순히 신자들이 모이는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움마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 철저한 신정국가(theocracy)일 뿐 아니라 순수한 종교와 순수한 정치의 분리가 불가능하며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가 없다.16) 따라서 움마라는 이슬람의 공동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교분리는 상상할 수 없다. 종교와 국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연합체이며, 이것이 후에 이슬람이 확산되는데 중요한 모체가 되었다.17) 실질적으로 이슬람 사회에서 국가는 신정(神政)일 뿐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는 왕이나 대통령은 살아있는 신과도 같다고 믿는다. 이슬람 국가에서 알라, 왕, 국가는 삼위일체일 뿐 아니라 이를 비판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될 만큼 종교와 국가는 연합체이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움마는 대가족일 뿐 아니라 일차적인 집단(움마)인 것이다.18)

 

2. 무슬림 가족과 일반적 특징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이슬람의 제도나 관습은 성스러운 율법으로 성립된 종교적인 정치체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그 주권의 원천은 신이며 주권자인 칼리프이다. 즉 칼리프의 일차적인 임무는 이슬람을 지탱하고 전파하는데 있다. 그 율법은 신에 의해서 계시된 성스러운 법률이고 공인된 해석자들에 의해서 확충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단지 신앙과 의식과 종교적인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형사적인 문제는 물론 가족제도와 다른 사회에서는 세속적인 권력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할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무슬림의 가족 혹은 이슬람의 넓은 집단 사회 가운데 그 기초가 되는 공동체인 가족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가 다른 문명사회와 비교해 볼 때 나름대로 특이한 가족제도와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 무슬림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제도들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아야 한다.19) 무슬림 가족은 율법의 기초아래 새로운 가정,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조직, 새로운 교리로서 가족을 이끌어간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무슬림은 상호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며 이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한다. 그러면서도 가정내부에는 평등한 가족관계가 아닌 전향적인 평등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정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무슬림의 가정은 때로는 무미건조해 보일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삶은 은은한 사랑이 배여 있는데 이는 공동체적인 삶의 패턴이 이를 증명하는데, 특히 무슬림들의 주거형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슬림의 주거 형태의 표본은 다르(dar)라고 불리는 가옥이다. ‘다르’는 크든 작든 대부분의 가옥은 중앙에 위치란 마당, 경우에 따라서는 돔으로 덮인 마당과 연결된 방들을 보게 된다. 혹은 건물(bayt)들로 구성되기도 한다. 가옥들은 그 규모, 방들의 숫자, 분수나 멋지게 꾸민 수도시설, 스투코로 된 조각이나 회화, 기타 개인적인 용도의 시설물의 유무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20) 필자가 무슬림 가정을 방문했을 때 가옥의 구조가 지역이나 국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았지만 대부분의 가옥 구조는 비슷했다. 아프리카수단의 경우는 커다란 대지 위에 마당은 중앙에 위치하고 침실과 주방은 별도로 되어 있었다. 이집트의 경우는 시골을 제외하고 도시는 3층집으로 되어 있으면서 남성과 여성의 응접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개방화된 이슬람 지역(마그레브지역)에서는 공동체 중심으로 중앙에 거실이 있어 모두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었다. 집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싸롱을 중심으로 한 긴 의자는 침대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생활이 편리하고, 가족 공동체간의 결속력을 갖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모시는 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며, 부모가 귀찮아 자녀를 괄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가족으로 한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음식을 나눌 뿐 아니라 명예와 수치까지도 함께 공유한다.

 

1) 결속력이 강한 무슬림 가정


앞에서 무슬림 가정은21) 공동체를 중심으로 성립되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서구사회의 가정이 선진화가 되어 개인적이면서 핵가족화 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무슬림 가정은 결코 개인적이 아닌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족공동체의 핵심은 남성 중심이면서 장남의 권위가 매우 높다.22) 무슬림 가족회의에서 의사결정이나 중요한 사항들은 장남의 의사가 상당히 반영된다. 물론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그 가정의 중심 역할을 한다. 한 가정 안에서 가족구성원의 행위나 결정이 독립적일 수 없으며 단절된 ‘너와 나’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남자가 분가할 경우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무슬림 가족 공동체로부터 분가한 형제들은 서구사회에 비하여 여전히 깊은 가족적 공동체와 유대관계를 갖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대개 독립을 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는 그렇지 않다. 부모와 자녀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분상 위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 울타리 안에 있다. 한 예로 자식이 이슬람 율법이나 종교적인 행위에 있어 범법을 행하였을 경우 부모가 모든 것을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 대한 책임이 언제나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2)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의 절대적 권위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는 모든 것에 대한 권위가 존중된다.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대한 일종의 소유권을 가진다. 무슬림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가혹한 학대를 가해도 다른 사람이 옆에서 간섭을 할 수 없다. 무슬림 사회에게 아동학대라는 용어를 찾기란 어렵다.


만약 자녀가 사회적 신분이나 명예가 있게 되면 전적으로 부모의 공덕으로 돌려진다. 자녀가 잘못하면 그것도 부모의 절대적인 책임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녀가 많은 부(富)를 가지게 되면 그것도 부모의 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만큼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의 절대적인 권위만큼 평온하거나 안정적이지는 못한 것이 무슬림가정의 단점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아버지의 지배적인 태도 때문에 아내와 자녀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자유를 찾고자 하여 속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덧붙인다면 아내들은 이 부분에서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23) 그래서 아내나 자녀들이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하더라도 다시 그녀의 남편에게 옮겨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한 여인이 외적으로 사소한 말로 한 가정에 파문을 일으키거나 당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경우 이혼24)까지 초래한다. 이 같은 환경으로 인해 여성들은 부당한 취급과 법적인 구제책이 없는 결혼 생활에서 종종 정서적인 생존을 위해 교묘한 방법이나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기독교인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르며 존경할 것을 권면한다.(엡 5:22-33).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순종에 대한 모델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원하는 대로 하갈을 아내로 취하기도 했고 또 그녀를 내쫓기도 했다. 아내들의 이슬람적인 순종과 성경적인 순종은 비교할 수 없다. 이슬람적 순종은 외적이고 그만큼 쉽게 할 수 있지만, 곧 모욕과 증오감, 복수심과 기만을 낳기도 한다. 반면에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마음에서 스스로 받아들이고 신뢰와 존경을 주며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충실함을 소중히 여긴다. 아무튼 무슬림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나 남편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반대로 모순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무슬림 사회의 생활이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기초되었을때 부부관계, 자식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려내게 되며, 이는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된다.


3) 무슬림 가족 공동체의 명예심


이슬람 사회에 있어서 한 가정의 명예와 가족 구성원인 개인의 명예는 동일하게 여겨진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의 명예는 그 가족의 명예가 되고, 한 사람의 수치는 곧 바로 전체 가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족 중에 하나가 명예를 더럽혔으면 그는 가정에서 추방되기도 하며 다른 누군가 자기 가족 중 한 사람을 욕되게 한다면 가족 전체 명예를 더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한 가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친족 전체의 문제로까지 비화된다. 그만큼 가족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가족의 역할로서 먼저 여성의 위치가 분명하고 투명해야 한다. 여성은 정숙함, 정절, 성적 부도덕이 있어서는 안 된다(수라 33:59; 수라 24:2-10; 24:21-16; 27-33; 수라 4:24). 여성들은 결혼에 있어서도 꾸란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먼저 신앙이 있는 배우자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수라 60:10; 수라 2:221; 4:25), 특정 결혼에 대한 금기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결혼의 금기 사항으로 근친상간이 있다(수라 4:22-27).


4) 무슬림 가정에서 모성(母性)의 중요성


무슬림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은 어린이 교육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무슬림가정은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에 누가 아버지인가를 어린이에게 밝힌다. 입양에 관한 조항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모성의 중요성은 더 강조된다.25) 무슬림들은 자녀를 낳고 기르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뜻을 가진 ‘낙원이 어머니의 발에 있다는 것을 잊어 왔다. 여성 및 무슬림 사회 전체는 이슬람이 성공적인 어머니 상이 무슬림의 종교적 완전성으로 본다는 사실을 망각해 왔다. 유아부터 성인초기의 기간동안 그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 곁에 있어주며 그들을 양육할 때 표현되는 어머니의 애정과 관심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26) Schleifer에 의하면, "무슬림 어머니들은 알라와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 왔을 뿐 아니라 지식을 쌓는 등의 다른 활동들을 성공적으로 추구해 왔다. 무슬림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학자, 상인, 공예인, 심지어 비상시에는 군인으로서 활동하는 것은 이슬람의 견지에 상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샤리아’(Sharia)의 관점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의무로서 모든 여인들에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것들이다. 여성의 기본적인 역할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모성은 여성이 이생에서 존경받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27)


무슬림 사회에서 모성의 중요성은 어린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질서 정연하게 양육 받은 아이들은 몇 가지를 기억하며 일생을 살아야 한다. 어린이는 먼저 ‘너희를 낳아준 자궁을 공경하라’(수라 4:1)는 교육을 받는다. 둘째, 다른 어린이에게 축복하라(수라 16:72). 셋째, 부모를 공경하고, 노인을 보살피라(수라 17:23-24). 넷째, 부모에게 감사하라(수라 31:14). 다섯째, 부모에 대한 친절, 어머니는 그를 낳았다는 것(수라 46:15)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사회에서 모성은 어린이의 성장과 무슬림 공동체의 정체성과 책임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한 가정의 집단성, 돌봄 집단에 소속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에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방식의 집단성을 수행하는 의미를 배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이슬람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지만 족장시대를 거쳐 한 가정의 공동체내의 역할로 인해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의 모성(母性)의 중요성이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현실은 항상 별개의 것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매춘 어린이 범죄(형제가 자매를 죽이는 행위), 근친상간, 남색, 여성할례, 여성의 동성연애, 가족 구성원과 여성 세계의 이기심 등이 부정적인 면이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데, 가족간의 화목, 환대, 사람과의 관계, 행사들의 중요성 강조, 가정의 가치, 어린이와 노안을 돌보는 일 등은 어느 가정보다 강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5) 이슬람 사회의 일부다처제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한다.28) 사회는 제각기 시대적 상황에 따라 불가피하게 또는 남성의 분별없는 성욕으로 일부다처제가 행해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국가들은 법률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을 실정법의 모체로 삼고 있는 이슬람권에서는 예외가 되고 있다. 물론 꾸란도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수한 환경과 조건하에서는 일부다처가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29) 그들은 일부다처제의 뿌리를 아브라함에서 찾는다.30) 이런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무슬림 남자들은 네 명까지의 아내를 둘 수 있다. 이슬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게 된 것은 첫째, 이슬람 초기에 전쟁의 결과로 인해 양산된 전쟁과부와 고아 특히 자립적인 삶이 어려운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둘째, 아내의 불치병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불가능할 경우이다. 셋째, 가족의 대(代)를 잇고 자신의 이름과 가문을 영속화하기 위해서이다.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를 두었을 경우 부양할 재정적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도 특수한 환경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31)


그리고 부인들에 대한 남편의 공정성을 보면, 첫째, 각 부인 소유의 독립가옥을.마련하여 주고, 둘째, 각 부인마다 남자의 낮 시간과 밤 시간을 균등하게 분배하고,셋째, 아침이 되면 각 부인을 찾아가 낮 동안 남편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일이다.32) 그리고 남편은 네 명의 아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편애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네 명의 아내를 항상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고 아내들은 상호간 협력하고 질투하지 말아야 하며 서로 다투거나 질투하게 되면 그것은 이혼 사유가 된다.


아무튼 이슬람 사회에서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는 것은 남녀간의 차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 ‘동등하게’라는 말의 의미를 한 남자가 모든 아내를 물질적인 면에서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만약 그가 한 여자에게 반지나 드레스를 주면 다른 여자에게도 같은 품질의 반지나 드레스를 주어야 한다.33) 동등하게라는 논리에 대해서 이 정순 박사는 부인들 사이의 동등함을 말하는 것이며,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둘 수 있는 것은 남녀의 차별이지 동등이 아니라34)고 지적한다. 오늘날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금하는 나라는 마그레브의 튀니지와 소아시아의 터키이다. 일부다처제를 지키는 나라는 모로코, 레바논, 요르단, 수단 등이다. 국가법에 의해 승인에 의해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나라는 시리아, 이란, 소말리아, 파키스탄, 인도35)등이다.

 


6) 남녀차별과 서구의 문제


우리의 삶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순진하다 못해 무신경적이라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신을 남녀로 구별하여 관계하지 않지만 동양에서의 세계관은 남녀가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동양 여인이 한 남자와 대화를 한다고 보면 곤란하다. 한 여성이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와 대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적절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에 큰 신경을 쓰면서 유혹을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동양의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남녀간의 차별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슬람 학자 알리 다쉬티에 의하면,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여자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며, 여자에 대한 어떠한 가혹스런 대우도 허용된 풍속이었다고 한다. 꾸란 4:34에 ‘남자들은 여자의 관리자이며‥ 반항적인 여자라고 생각되는 자들을 충고하고, 또 여자를 침실로 데려가 때리라고 가르친다’. 꾸란 4:38에 ‘남자는 여자의 보호자’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남녀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슬람법에서는 상속에서도 남녀간의 차이가 있음을 언급한다. 남녀간의 상속액 배분 비율은 2대1의 기준이 보통이다.36)


따라서 이슬람에서 남녀 차별은 여자가 얌전한 체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성별이 중요하고 힘을 가졌는지 실증하는 것이 된다. 남녀 차별은 가문의 명예와 평판이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정은 가족들의 이성 관계를 제한하고 조정하며 통제한다. 이는 남성의 권력을 기초로 해서 아랍인들이 여성을 성 차별하는 기반이 되도록 한다.37) 그 이유는 남녀간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잠재력이 있는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남녀간의 차별은 꾸란에서 전반적으로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나타내고 있어 그 영향이 오늘날 전 이슬람 세계에 미치고 있다.

 

7) 무슬림 가정에서 여성의 보호


이슬람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일부다처제를 개인의 욕구나 성적인 만족을 위한 것보다는 사회복지 개념으로 해석한다. 꾸란 4:3에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 손이 소유한 것이거늘 그것이···적합한 것이라" 이 구절은 고아의 복지를 위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결혼에 대한 규칙을 소개하고 있다. 이 결혼 준칙의 선포한 역사적 배경은 「우후드」 전투시기 이후부터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무슬림 병사들의 사상자가 발생함으로 무슬림 공동체내에는 많은 고아들과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대우는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야 하고 인간의 박애정신과 평등원칙에 의하여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38)


예로, 모로코에서 한 젊은 남자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실행하기 위해 메카에 두 번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슬람 준칙을 지키기 위해 메카를 순례한 것이다. 무슬림 법에는 여성은 혼사서 자유롭게 메카를 순례하지 못하며, 항상 남자 친척의 남성이나 인도자의 안내가 있어야만 순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성은 남성의 보호가 있어야만 활동할 수 있다. 무슬림 여성이 남성과 동행하거나 여행을 할 수 있다. 해도 여성은 베일(veil)을 착용하고 떠나야 한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베일은 여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상이다. 이는 여성으로 하여금 유혹하는 행동, 꾸밈새, 여성의 정숙함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착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속이 아닌 보호로 간주된다. 오늘날 무슬림 여성해방운동가들에 의해 베일에 대한 규정을 법적으로 폐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얼마 전 터키의 일부 여성들은 베일을 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현재 이슬람의 변화이며 여성해방운동가들의 주장을 허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베일은 남성들로부터 보호하는 방패일 뿐 아니라 남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유혹을 방어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39)


그러나 꾸란에서 제시하는 여성에 대한 좋은 의도의 규칙이나 방법이 있다. 해도여성에 대한 우대정책은 매우 부정적이다. 실질적으로 이슬람 지역에서 고아원이나 여성을 위한 복지시설은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한 남자에게 고아들과 여성을 관리하도록 허락한 것은 이슬람 전통문학 즉 자힐리야 문화가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 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불이익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는 꾸란 4:3에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결혼한 여성의 불이익이 내용상에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 여성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성불능이거나 심한 질병으로 성생활을 할 수 없어 이혼을 할 경우 그 부인은 보호해 줄 보호자를 잃게 된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질병에 걸린 부인을 보호하면서 다른 여성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슬림 사회의 법이나 준칙을 볼 때 꾸란은 대체적으로 여성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곳, 여성의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곳이 무슬림 가정의 특성이다.

 

Ⅱ. 이슬람 가족제도에 따른 복음 전달


무슬림의 한 구성원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많은 장애물로 이슬람 근본주의와 전통적인 교리, 자할리야의 문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 남성 중심의 결혼과 권위 등이 있다. 그들이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어려움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감정적,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인 이유들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뿌리 깊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프리카 식민주의 시절에 제국주의적인 선교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기독교인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 빛과 소금의 역할로 생활화되지 않은 모습들이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가져온 동기였다. 실제적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은 대화를 거부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현실은 과거 서구선교사들과 잘못된 선교정책, 탄압에 의한 것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더 실제적인 장애요소는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가족공동체, 국가, 지역 공동체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는다.


1. 무슬림 전통주의적 제도로 인한 복음 전달의 장애요인


오늘의 교회는 선교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만연해 있다. 선교라는 단어의 의미는 재정의 되고 희석되어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것만이 선교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선교는 복음적인 측면과 사회적 측면 사이에 항상 균형을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떤 측면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발견하게 된다. 과거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NGO 활동을 통한 기아대책, 지뢰희생자, 고아 입양 문제를 위해 선교하고 모금하는 것, 성경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 라디오를 통한 복음전파를 위해 모금하는 것이 선교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향한 헌신으로 사역하는 선교사와 교회개척, 선교현장의 교역자들을 돕는 선교 헌금을 모금하는 일은 그렇게도 힘이 든다. 그 이유는 교회와 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교의 정의에 대한 혼란과 뒤범벅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이같은 혼돈은 선교가 우월하다는 생각, 선교는 오래 전에 끝이 났다는 사고가 지배적일 때 일차적인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중국에서는 ‘교회가 신자 한사람을 얻을 때마다 나라는 국민 한 사람을 잃는다’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로 아시아의 그리도인들 중에는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족들과 고통스럽게 이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었다.40) 또한 북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경우경찰의 계속적인 검문과 미행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41) 동아프리카의 경우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여자의 경우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남자의 경우는 여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42) 그만큼 신앙의 자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슬람 사회에서는 다른 종교의 회심의 자유보다는 박해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세계 이슬람 국가들은 타종교 국가를 대상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면서 자국 내에서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슬람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이를 위해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슬람국가에서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향해 ‘당신은 종교의 자유를 믿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물론 믿는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면 허용하겠는가’라고 질문하면 ‘나는 그의 목을 자를 것입니다’라는 대답43)을 보면, 기독교인에 대한 이해나 회심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무슬림임을 알 수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은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 무슬림 공동체에서 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종교적, 가족적, 사회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슬람법은 전통적 사회의 종교적 관습, 법률적인 제도, 경제적 적용제도가 배교자로부터 재산이나 생명을 빼앗는 것도 합법적으로 간주한다. 무슬림들은 작은 공동체 안에 한 사람이라도 배교하게 되면 직장에서의 퇴출과 취업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배교는 단순히 개종한다는 말로 쉽게 표현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공동체 곧 작은 공동체인 가족들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복잡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실제적으로 모로코에서 한 자녀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그 여파는 아버지와 그 형제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공동체에 연관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어떤 한 사람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엄청난 희생을 지불해야만 한다. 이처럼 이슬람에서 개종하는 사람은 이슬람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부모, 남편, 아내 등으로부터 심한 핍박, 고통, 추방, 불이익 등의 온갖 불이익을 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회심하는 사람들이 비록 실제적인 숫자와는 여전히 적지만 어느 때보다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슬람권에서 영적인 필요를 점점 더 느끼고 있고 그들을 위한 기도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이슬람 지역의 형제, 자매들은 기독교의 영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육신, 영생, 구원, 죄 용서 등에 대한 용어들은 이슬람에서 듣지 못한 것들이라 매우 관심이 높다.


샤네 교수는 이슬람권 선교의 가장 장애물 중 또 하나는 바로 정치적 문제라고 지적한다.44)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배경이나 기반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은 정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현지에서 정치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흐려지고 혼동스럽게 된다.


패트릭 존스톤(Patrick Johnstone)은 이슬람 선교장애 요인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감정적,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 이유들이라’고45)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실제적인 요소는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국가와 가족으로부터의 강한 압박과 추방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 근본진리를 믿고 신앙생활하기란 그만큼 힘이 든다. 따라서 무슬림 전통주의적 제도에서는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의 장애가 발생하게 되어 선교의 장애가 된다.

 

2. 무슬림 가족 공동체 따른 선교전략


1) 기독교선교 메시지의 사회적 공적 영역에서의 효과


우리는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접촉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슬람 사역의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기독교 선교 메시지가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효과적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만 되는 것인가의 문제가 남게 된다.


이슬람 지역의 선교사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분명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종교가 정치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종교와 정치는 상호 교차하며 정치 공동체와 도덕적 공동체에 의해 상호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종교가 정치를 인준하고 영향을 미쳐야지 정치가 종교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에 의해 인준 받는 정치는 정치적 행위가 기독교 신앙과 신실함의 핵심인 정직성과 책임성의 표준에 도달해야 함을 지도자들이 주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구속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고 인간 공동체내에서 상호간 책임을 져야 한다.


2) 복음전달의 효과적인 기회


종교는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보고자 하는 인간실존의 한계에 대한 몸부림이며, 인간 존재 의미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의 방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인간론이 사람의 자력 구원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철학적이면서 이데올로기적이다.


무슬림들이 알라에 대하여 경배하거나 꾸란을 낭송할 때, 알리에 대하여 순종할 때 마음에 평안히 오고 사회전반에 걸쳐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종교이상의 이슬람교는 단순히 종교 이상의 총체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의 주장처럼 이슬람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 삶 그 자체이다.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것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무슬림들이 이러한 삶에 만족하며, 알라에 대한 순종과 행위가 일치하는가에 대하여 묻는다면 회의적이다. 필자는 무슬림들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의문점을 갖는다.


하나는 그들이 신봉하고 믿는 알라에 대한 신앙이 진실하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둘째는 강압적이고, 준칙에 의존하고, 불평등적인 신앙 규범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가? 셋째, 이슬람은 신앙이라고 보기보다는 정치적이라는 점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넷째, 어떻게 종교가 삶의 일부가 된 무슬림들의 영혼을 악령이 지배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무슬림들의 일상적인 삶이 꾸란에서 규정하고 있는 엄격한 신앙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무슬림들의 영은 대부분 샤머니즘으로 불리는 악한 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46)


이슬람의 무속 신앙적인 요인은 신비주의에 속하는 수피즘과 관련이 있다. 수피는 원래 이슬람의 세속적이며 비금욕적인 성격에 반대하면서 출발했다. 이슬람의 창시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극에 달했고, 이미 독신주의에 대한 비난과 영적인 기능을 가진 성직자 제도의 부재 등에 기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생명의 위치에 대한 예비적인 타협 등은 중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종교로 이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 지도자들 가운데 이슬람에 헌신적인 정신을 그들의 일상생활에 바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이슬람은 단순한 외적 의례들의 집합이 아닌 영적인 훈련이었다.47) 수피주의자의 핵심은 수도원적이거나 아니면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이동하면서 꾸란이나 종교적인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 만남을 가졌고, 이러한 암송은 예배의식 성격을 띄어 일종의 춤과 반복적인 리듬 그리고 경전의 암송을 통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수피지도자들을 신봉할 뿐 아니라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섬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슬람은 다양한 신앙양태를 가졌음에도 과거나 현재에도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이슬람은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상대가 되어 복음에 대해 너무나 강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 내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것을 믿을 만한 증거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슬람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의문은 복음전달의 좋은 기회가 된다.48) 최근 이슬람의 과격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행위는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가져다주었다. 파키스탄, 알제리, 이집트, 수단, 아프가니스탄, 이란,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에서 발생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방화와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지하드’(Jihad)라는 명분을 내세워 야만적이고 환멸을 안겨주는 행동을 보여줌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의 극단적인 이슬람 신봉자들은 교회와 민간인을 향해 약탈을 감행했고, 자바섬에 위치한 교회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한 교회의 목사 부부가 교회 건물 안에서 이방 신에게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일도 발생했다. 순교자 부부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죽었지만 그 결과 범죄자 가운데 한 명이 회심하여 믿음을 갖게 되었다.49)


둘째, 이슬람 지역을 향한 중보 기도가 더욱더 강하게 실행되고 있다. 최근 『모로코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라는 소책자는 마그레브에 속한 한 국가를 향한 52주중보기도 책자이다.50)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회심을 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예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서 또는 부인할 수 없는 기적적인 치료를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최근 이슬람 지역에서 개인, 가정들 그리고 한 지역 사회가 예수께 돌아오고 있다. 기도는 선교의 돌파구가 되는 도구이다.


셋째, 이슬람국가의 도시화가 복음 전달의 접촉점이 된다. 도시들은 다민족적, 다인종적, 다언어적, 다종교적이다. 이 도시들은 지구촌의 변화를 만드는 곳이며, 권력의 중심지들이다. 도시들이 움직일 때 전세계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1)


도시화는 도전적인 장소이다. 도시들은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들로 가득할 뿐 아니라 대립하는 세계관, 가치 체계, 생활양식들이 도시 중심지에 밀접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동일한 장소들이 자연환경과 인간 생활을 총체적으로 황폐화시키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발산한다. 도시들은 많은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하여 매일 다투는 전쟁터와 같다. 이런 측면에서 20세기의 선교 개척지는 시골과 같은 지역으로 이식되었지만 이제는 도시를 미래의 개척지라고 생각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20세기까지는 기독교가 시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21세기의 기독교는 도시에 중심을 잡고 사역해야 할 것이다.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이슬람 공동체의 영향력과 동일한 대가족 공동체의 영향력에서 좀더 떨어진 환경에 머물게 되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는 복음을 접하기에 훨씬 열린 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이슬람 지역에 대한 선교 전략이나 사역을 계획하는 자들은 도시의 실정을 수용해야 한다. 도시 성장의 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구속 목적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다. 이 엄청난 사람들의 군집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있어 가장 큰 복음화의 기회들 중 하나를 교회에 제공하게 하신다. 대도시에 밀어닥친 여러 인종들, 족속들, 다양한 인간 집단들은 지역적으로 과거의 어느 때보다 더 접근하기 용이하다. 경우에 따라서 새로운 도시 거주자들이 겪는 변화의 과정들은 그들로 하여금 더 복음을 잘 받아들이게 하기도 한다. 또한 도시화에 따라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인 가난, 질병, 마약, 매춘, 범죄, 청소년의 일탈행위 등이 도시 한가운데 방치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전도 종족 집단(Unreached People Group)을52) 향한 복음 전달과 도시선교의 기회가 된다.


따라서 세계의 도시화는 선교의 구조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 구조로도 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께서는 지구의 사람들을 서로 더 밀접하게 접촉시키고, 더 많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의존하여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을 통해 결정적인 활동을 하고 계신다.53) 이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속의 목적을 역사에 진척시킨다. 우리 시대의 표적은 이슬람권 도시이다. 도시를 향한 전 세계적인 이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선교의 가장 위대한 무대를 설치하시고 최후의 시간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3)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화


최근 상황화에 대해 기술한 서적들이 많이 있다.54) 그래서 무슬림을 위해 사역하고자 하는 이들은 숙독하여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전략과 개념을 가지고 사역을 추진할 수 있을까를 타진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사역을 위해서는 복음을 상황화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양한 생각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자신들의 문화 가운데 있는 무슬림에게 나아가기 위해 완전히 무슬림 스타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55) 이러한 접근 방법은 무슬림들과 동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슬림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될 수 있는 서구인과는 다르게 가족과 공동체와 연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복음을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전해 주려는 타문화 사역자 그룹이 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현지문화에 장애가 되는 것은 말씀을 전할 때 반드시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 복음이 전달된다면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 상황화에 있어서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다른 문화, 언어그룹, 종교적 공동체에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아 사역에 있어서 상황화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에 있어 조심해야 한다. 성경에는 상황화에 대한 두 개의 중요한 모델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이다. 선교학자들은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화하신 행위를 묘사할 때 성육신 사역(Incarnational Ministry)을 사용한다. 예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을 살았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죄의 구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죄의 굴레 속으로 구태여 들어가실 필요는 없으셨다. 따라서 예수는 유대사회에서 사회적 위치가 낮은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가 존중받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과 문제화 삼으신 것을 본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회심자 사이의 통합을 위하여 무척 노력했다. 바울 자신은 이방인 도시에 살았고 나름대로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타문화의 말씀 전달자로서 유대인, 이방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이슬람 문화에서 그들을 회심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성을 개발하는 일이다. 관계성에 대한 가치는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에게 또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둘째는 무슬림에서 회심한 자들이 겪게 되는 최대의 갈등은 가장 가까운 공동체와 결별하고 고립되어 개인주의적인 서구식 삶의 스타일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만일 무슬림 회심자들을 위한 기독교 공동체가 없다면 그들은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은 되돌아서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슬람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의 영에 눌리지 않아야 한다. 무슬림을 우리의 적 사단의 종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의 적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만든 이슬람의 영이지 무슬림이 아니다. 그리고 무슬림은 우리의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나눌 형제로 보아야 한다. 콜린 채프만이말한 것처럼 무슬림들을 대할 때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56)

 

나오는 말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상대일 뿐 아니라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공동체를 바탕으로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아랍 지도자 무암마르 가디프는 남아프리카의 이슬람화를 위해 후원을 하고 있다. 이 움직임은 아프리카에서 경제, 문학, 정치적인 연합체를 이루고자하는 이슬람 부흥운동 중의 하나이다.57) 이슬람은 아랍어를 대륙의 주된 공용어로 내걸고, 이슬람 공동체를 통한 세계각국에 무역의 기회를 증진시키려 할 뿐 아니라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개종자를 얻어내려 하고 있다. 새로운 모스국, 이슬람 학교와 대학들이 전 세계에 세워지고 있다.


이제 전 세계는 이슬람의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보일 때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 선교에 있어서 여러 문제 중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신학적인 부분이 아니라 문화적이 부분으로서 이슬람 공동체(Ummah)의 독특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 작은 공동체인 가족에 대한 부분은 이슬람 선교전략에 중요한 부분이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가족공동체 이해를 통하여 북음의 접촉점에 대한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 가능성을 통하여 이슬람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전략들을 활용한다면 이슬람 선교를 위한 모델이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 가능성으로 먼저 개종자를 돕는 일이다. 회심자가 두 얼굴을 갖는 것이 어쩌면 거의 불가피하고 처음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회심자가 집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을 그룹 사람들에게 말하면 위험성이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런 영적 미숙함에 있는 자들을 살아남도록 도와주고, 언제나 만나서 도울 준비, 성경 공부를 통하여 꾸란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따르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무슬림을 위해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도록 기도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기도는 복음전도의 기본이 된다. 기도 없는 선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적 전쟁에 있어 승리하고 사랑이 있는 행함을 보여줄 때 무슬림 선교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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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1 이슬람(Islam)이라는 말은 무슬림들에게는 신에 대해서 신자가 ‘항복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 그 분사형인 무슬림(Muslim)은 그러한 항복의 행위를 취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무슬림은 어느 다른 존재가 아닌 ‘오로지’신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며, 따라서 다신주의자가 아닌 유일신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라민 샤네 교수는 예일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이슬람 선교를 위한 해법’이란 주제로 홍영기 교수와 대담한 것을 재인용하였다.

3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김호동 억(서울: 까치글방, 2001), 18.

4 필자가 스리랑카 북부지역을 방문했을 때 미션계의 고등학교가 무슬림화 된 곳을 목격했으며, 가톨릭이나 기독교계의 교사들을 추방하고 대신 무슬림 교사로 채용한다는 소식을 접한바 있다(2002.7_8 스리랑카 북부지역 리서치)

5 오픈도어(opendoors) 선교회가 발행하는 기도소식지에 의하면,‘박해받는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는 도표가 있다. 기독교 박해 1순위로 사우디아라비아로서 이슬람의 종주국이며, 전세계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선두기지이다. 다음으로 북한, 라오스,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베트남, 이란, 몰디브, 남부수단, 코모로제도 등이다.

6 전호진, 『이슬람, 종교인가?』(서울: SFC출판부, 2002), 9. 저자는 본고에서 이슬람을 하나의 종교로 보기보다는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다.

7 Patrick Johnstone & Jason Mandryk, Operation World(Carlisle: Paternoster, 2001), 2; 49.

8 이 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17 재인용

9 메디나는 새로운 신앙과 신도들의 중심지가 되는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메디나에서의 계시들은 무슬림 공동체 안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과 관련된 법적 정치적인 사항들을 포함하는 곳이기도 하다.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16.

10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서울: 예영컴퓨니케이션, 1998), 173.

11 움마와 관련된 것으로 Mahathir Mohamad, Islam & The Muslim ummah, (Hashim Makarnddin: Ma1aysia, 2000), 51-62를 참고하라. 핸드릭 크래머,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최정만 역(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5), 244.

12 Affan Selj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1",/Feb, 1991을 참조함.

13 무함마드가 주장하는 메카에서 유일신론, 유신론 사상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꾸란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으로 그의 신성과(수라 5:19) 십자가 죽음(수라 4:157)에 대한 이중적 부인을 하고 있다.·예수에 대한 긍정적 측면은 예수에 대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언급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 처녀였다(마 1:18-25; 눅 1:26-35). 그러나 꾸란에 보면 무슬림들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수태를 받아들인다(수라 3:45-47; 19:21; 21:91)또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꾸란 에 그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인데, 꾸란은 거기에 대한 참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왜 임의적인가(수라 3:59)? 다만 마리아는 위대한 여인으로 칭송을 받을 뿐이다.

14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서울: 도서출판 신지평,1999), 58-9.

15 Latifa, 『빼앗긴 얼굴』 최은희 역(서울: 이례, 2002)을 참고하기 바란다. 1996년 탈레반 정권이 들어선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에게 권위,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다. 라티파는 탈레반의 광신적인 신앙이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희선, "아랍·이슬람 여성에 관한 고찰"-종교적 당위성과 현실- 『선교-문화연구』 2001년 제5·6호(천암: 천안대학교 선교-문화연구소), 51이하를 참조 바란다.

16 전호진, 『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293.

17 Ibid., 158-60.

18 봅쇼 그랜, 『마침내 드러나다』 이숙희 역(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5), 174.

19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185-90.

20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136.

21 Affan Seli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l’’, Jan/Feb,1991을 참고하라. 무슬림 가정의 제도는 이슬람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가정은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그 구성원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사회의 기본 단위이다.

22 꾸란 2:228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보다 상위(上位)에 있고 또 위력(偉力)하여 여자의 보호가 된다’(꾸란 4:34)는 것을 보아 남성 우월주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이슬람에서 여성의위치는 언제나 차별적이다. 상속 액에서도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예배의 참석에서도 구별되어 참여한다. 꾸란 4:34에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때문이라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서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으로 남성을 따를것이며 남성이 부재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고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가볍게 때려 줄 것이라 그러나 다시 순종할 경우는 그들에게 해로운 어떠한 수단도 강구하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라. 『성 꾸란』 최영길 역, (사우디아라비아 파하드 국왕성꾸란 출판청)을 참고바람.

23 크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티,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예수 전도단 역(서울: 예수 전도단, 1998), 114 재인용.

24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은 아주 단순하다. 남편이 아내를 향해 ‘나는 너와 이혼한다’라는 말을 세 번만 되풀이하면 어떤 설명이나 이유 없이 부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꾸란 65;1,2).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꾸란 2:229절을 보면 된다. ‘화해를 통한 두 번의 이혼은 허락되나 그 후의 두 당사자는 동등한 조건으로 재결합을 하든지 이혼을 해야되며 너희가 그녀들에게 주었던 지참금을 되돌려 가져오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나…’라고 되어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에 대한 것도 다양하다. 먼저 수라 2:226-242에 나타난 것을 보면, 4개월간의 격리의 시간을 가진 뒤 이혼을 할 수 있다. 수라 4:19-21에는 그들의 뜻에 반하여 여성을 재산으로 삼는 것은 금지하고 있으며, 수라4:127-131에는 과부와 고아들을 도울 것을 명하고 있다. 수라 33:49에는 동침하기 전에 이혼하려 할 때에는 ‘이다트’기간(3개월)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수라 58:1-4에는 오래된 이교도들의 이혼제도를 배척하기도 한다.

25 Donna p. Smith, & Andreas Maurer, 『무슬림을 위한 기독교 전도』(South Africa: MeRCSA,1998), 114-265.; Scheifer, Motherhood in Islam 88.; Andreas Maurer, Islam mission seminar (Intercultural Leadership Institute, 2002), 6

26 Andreas Maurer, Islam mission seminar, 7.

27 Ibid.

28 꾸란 4:3에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줄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것보다 적합한 것이라".

29 최영길,『이슬람의 이해』 214.

30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164.

31 Hammudah Abd al Ati, The Family Structure in Islam(USA: American Trust Publications, 1977), 50-145.

32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216.

33 존 엘더, 『무슬림을 향한 성경적 접근』 KTM 편집부 역(서울: 도서출판 펴내기, 1992), 86-87.

34 이 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34.

35 Ibid.

36 전호진,.『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299.; 꾸란 4:11; 남자에게는 여자의 두 배에 달하는 몫이 차려지느니라…둘 이상의 여자가 있을 경우는 유산의 3분의 2를 취하고 여자 하나만 있을 때는 절반을 얻게 되느니라’

37 크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트,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59-60.

38 『성 꾸란 』 최영길 역, 130.

39 Anne Cppper, Ishamal My Brother(London: STL Books, I988), 30.; 이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36.

40 로버트 슈라이터, 『신학의 토착화』 황애경 역(서울: 가톨릭출판사, 1991), 67.

41 필자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기독교인이 무슬림과 대화를 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소환된 것을 보았다.

42 Ibid., 69.

43 전호진, 『종교다원주의 타종교 선교전략』 296.

44 라민 샤네 교수는 예일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이슬람 선교를 위한해법’이란 주제로 홍영기 교수와 대담한 것을 재인용.

45 Patrick Johnstone, The Church Bigger than you think, 이창규, 유병국역(서울: WEC출판부, 1999), 192.

46 박순종,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무슬림과 이슬람교에 대한 인식조사" 『세계선교』 1999

년 봄·여름호/ 통권35호, 115-16.

47 Ibid.,117에서 재인용.

48 최근 이란은 이슬람 혁명 후 개종 변화가 꿈틀대고 있다. 그 이유는 국민염원 외면한 정치에 이슬람교도 의문, 회의가 싹트고 있다. 정부는 기독교 성장에 제동을 걸고 있지만 비밀 가정교회로 복음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수십만 명의 잠재된 개종인구에 비해 사역자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함태경, "이란 선교역사와 교회현황" 『국민일보 선교편』 2002년 7월 23일.

49 Patrick Johnstone, The Churuh Bigger than you think, 193.

50 이 책자는 순니 이슬람 신봉자들이 99%나 되는 모로코를 향한 기도책자이다. 모로코 신자들과 모로코에 복음을 전하고자 사역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시작된 것이 바로 ‘Arise Shine Morocco’(ASM)이다. 이는 모로코와 미전도 종족 그룹, 그리고 모로코 교회들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전 세계 교회에 알리고 기도를 집중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51 Rogers S. Greenway,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육" 장훈태역 『선교신학의 21세기 동향』(서울; 이례서원, 2000), 512.

52 E. A. Speiser, The Anchor Bible: Genesis(New York: Doubleday, 1964), 86.

53 Rogers S. Greenway,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육" 514.

54 정흥호, 『상황화 신학』 서울: 로고스, 1998,: 베반스, 스티브. 『상황화신학』. 최형근 역. 서울: 죠이선교회, 2002.: 부스웰, 제임스 "상황화:이론과 전통, 그 방법."『신학과 선교』, 데이비드J. 헤셀그레이브 편, 93-126. 서울: 엠마오, 1986.;서창원, 『제3세계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Stephen. Bevans, "Models of Contextual Theologies." Missiology 13, no. 2(April1985); shoki Coe, "Contextualization." InMission Trends No. 3: Third World Theologies, ed. Geraid H. Anderson and T.F. Stransky, 19-24.New york; paulist press, 1976.; bruce C.E.F.leming, Contextualization of Theology: An Evangelical Assessment.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80.; Dean S. Gillilrinand, "Principles od the Christian Approach ot an African-Based Islamic Society.: Missiology ;Heideman, Eugene S. "Syncretism, Contextualization, Orthodoxy, and Heresy." Missiology 25, no. I(January 1997): David J.Hesselgrave, and Edward Rommen. Contextualization: Meangs, Methods, and Models.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9.; Kato, Byang. "The gospl, Cultural Contextualization, and Religious Syncretism." In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ed. Douglas, J.D. Minneapolis: World Wide Publications, 1975.; Bruce. Nicholls, Contextualization: A theology of Gospel and Culture. Downers Grove: Inter-Varsiry Press, 1979.; Robert J.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Maryknoll: Orbis books, 1985.

55 로렌드 뮬러, 『모슬렘 선교를 위한 TOOLS』 임하나 역(서울: WEC출판부, 2002), 77.

56 공일주, 『이싸냐 예수냐?』(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7), 169-70.

57 1995년 10월 22일 요한네스 버그의 ‘선이 타임수’에 게재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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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한 100가지 질문

 

1. 이슬람(Islam)이란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무슬림 (복종자란 의미로 이슬람교도를 통칭)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2. 알라(Allah)는 무슨 의미인가?

 

유일한 창조자라는 뜻이며 아랍어의 중성(中性) 보통명사. ‘알라신()’이라고 부르면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3. 이슬람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역사적 실체로서 이슬람의 원년(元年)은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해(헤지라) 신앙공동체를 만든 622년이다. 무하마드는 610년에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4.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이슬람은 어떤가?

 

평화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어원인 살라미(salami)는 평화란 뜻이다.

 

5. 무하마드는 어떤 인물인가?

 

서기 570년쯤 아라비아의 꾸라이쉬족()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6세 때 죽었다. 삼촌 집에서 양육됐고 25세 때 40세 부자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40세부터 알라의 계시를 받아 포교활동을 하다가 632년에 숨졌다.

 

6. 이슬람의 예언자(預言者)란 무슨 뜻인가?

 

알라의 말씀을 인간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에선 모두 124000명의 예언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28명이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의 성경(聖經) 인물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무하마드가 주요 예언자다.

 

7. 헤지라(Hijra)란 어떤 것인가?

 

무하마드가 지역 부족들의 탄압을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추종자 70여명을 데리고 622년에 이주한 사건으로 성스러운 이주를 뜻한다.

 

8. 무하마드는 메디나에서 움마(Ummah)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무하마드가 신도들을 모아 만든 형제애적인 신앙공동체. 그후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신도들의 공동체란 의미로 움마란 단어가 사용됐다.

 

9. 무하마드는 부인을 몇 명이나 두었나?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4명 이상은 두지 않았다. 코란의 규칙을 지킨 것이었다.

 

10. 무하마드의 후계자라는 칼리프는 어떻게 선출되었나?

 

무하마드는 아들이 없었고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후계자는 신도들이 협의해 투표로 선출했다. 1대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였다.

 

11. 코란은 언제 완성됐으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무하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은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모아 644~656년에 완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114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을 수라라고 한다. 알라가 1인칭으로 말하는 형식을 취했다.

 

12. 코란은 왜 아랍어로만 읽어야 한다고 하는가?

 

알라가 내려준 언어인 아랍어만이 가장 아름답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13. 하디스(Hadith)는 무엇인가?

 

무하마드의 언행 및 전승을 기록한 책으로 종교예식과 일상생활 세칙을 모두 담고 있다.

 

14. 술탄은 무엇인가?

 

칼리프의 위임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 내지 전역을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자의 칭호.

 

15. 이슬람은 특히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보나?

 

이슬람은 예수(이사라고 부름)가 훌륭한 예언자지만 신성(神性)은 없으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본다.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16. 교리적으로 보아 이슬람은 유태교 및 기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하마드는 초기 시리아와 아라비아 쪽으로 흘러나온 기독교 이단인 단성론(單性論)과 유태교 이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쪽 교리를 채택했다. 상당수 주변부 교리나 풍습도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가져간 것으로 본다.

 

17.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을 어떻게 보는가?

 

사이비 기독교 종파가 아랍 토착종교와 결합하여 발생한 전혀 별개 종교로 본다. 알라는 아라비아 부족의 월신(月神)에서 유래됐으며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18.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관계는?

 

이슬람의 3대 성지(聖地)중 하나. 코란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무하마드가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천상(天上)여행을 다녀왔다는 전설에 따라 성전산에 바위사원이 세워졌다.

 

19. 이슬람에도 원죄(原罪)의 개념이 있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란 개념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죄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20. 이슬람의 종파에는 어떤 것이 있나?

 

수니(Sunni)파가 다수파로 초기 칼리프들을 무하마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한다. 아라비아, 이집트, 터키 등에 널리 퍼져 있다. 시아(Shiite)파는 2대 종파로 암살당한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본다. 이란이 본거지이고 이라크, 시리아 등에 분포한다. 이밖에 타 종교와 혼합한 드루즈파,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 등이 있다.

 

21. 이슬람의 율법이라는 샤리아는 어떤 것인가?

 

법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내용이 많아 결혼이나 식사방법, 기도 방법이나 기도 시기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22. 이슬람의 율법은 법을 공개 집행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법 집행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정의를 실천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그렇게 실시해 왔으나 최근에는 종파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23. 이슬람 사회에서 일반법률은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나?

 

사우디 아라비아, 수단, 이란 등에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헌법이다. 하지만 터키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이슬람 제국에서는 샤리아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폐지하고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법 제도를 채택했다.

 

24. 이슬람교도(무슬림)들에게는 육신(六信)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인가?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알라를 믿는다. 예언자들을 믿는다. 거룩한 책들(코란 포함)을 믿는다. 천사들을 믿는다. 심판과 부활을 믿는다. 알라의 법칙과 정명론(定命論)을 믿는다.

 

25. 무슬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5가지 기본적인 의무는 무엇인가?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신앙고백(샤하다), 하루 다섯번의 기도(사라트), 구제(자카트), 메카 순례(하지), 라마단 금식(禁食)(사움)이다. 시아파는 여기에 성전(聖戰)(지하드)을 추가한다.

 

26.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할 때 메카를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하마드는 처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고 했다가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구약도 제대로 모른다며 자신을 비웃자 630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기도 방향으로 정했다.

 

27. 예배는 꼭 정해진 시간에 보아야 하나?

 

태양의 위치에 따르도록 돼 있기에 정확한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28. 모스크는 어떤 곳인가?

 

아랍어로 엎드리는 곳이란 뜻의 마스지드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의 예배당을 일컫는다.

 

29.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몸을 씻는 이유는?

 

예배 전 몸을 씻는 것을 우두(wudu)라 하는데, 알라에 대한 예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코란에도 청결하지 않은 몸으로 행하는 예배는 받지 않겠다고 되어 있다.

 

30. 모스크에 딸려 있는 미나렛의 역할은?

 

예배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는 역할(아잔ㆍadhan)을 하며, 이를 행하는 사람은 무에진(muezzin)이라 한다.

 

31. 무에진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나?

 

크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32. 모스크 안에서도 남녀는 따로 앉아 예배를 보나?

 

남녀가 따로 앉되 남자가 앞에 앉는다. 좁은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불편한 점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33. 이슬람에는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고 하는데,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오마르를 물라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신과 인간 사이에 중매자를 두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중매자만 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슬람에선 성직자가 없다. 물라는 종교지도자, 율법학자란 뜻이다.

 

34. 이슬람을 흔히 정교(政敎)일치 종교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코란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 전반을 망라하기에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는다. 성과 속을 구별할 경우 정신생활이 물질생활에 종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5. 이슬람에서 모든 사람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슬람은 지위나, 명성, 부와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 알라와의 만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36. 이슬람 사회의 슈라(shura)는 무엇인가?

 

협의를 뜻하는 말. 무하마드도 무슨 결정을 할 때는 슈라를 거쳤다. 지금도 쿠웨이트, 아프간 등 이슬람국가 중에는 슈라를 국회와 같은 기구로 활용하고 있다.

 

37.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라사)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고등교육 시설을 말하나 전통적으로는 울라마(율법사) 양성이 주목적이다.

 

38. 이슬람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유는?

 

알라가 유일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 금지이기 때문이다.

 

39.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보는데 왜 그런가?

 

이슬람에선 금요일에 태양이 떠올랐고 아담이 창조됐으며 심판이 일어나기 때문에 금요일을 가장 훌륭한 날로 여긴다.

 

40.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기독교가 활동하고 있나?

 

일부 아랍지역에서 극소수 기독교 신도가 있으나 계속되는 탄압과 사회적 소외로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저 대개 단성론자나 정교회(正敎會) 계통으로 서방 기독교와는 차이가 난다.

 

41. 무슬림들이 많이 쓰는 인샬라는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따라라는 아랍어로 무슬림들이 일상 생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한다.

 

42. 이슬람에선 하루를 무엇으로 기준하여 계산하는가?

 

유태인과 같이 하루 해가 지면 새로운 날로 간주하고 아랍쪽도 그런 관행이 있어 결혼식 등 중요 행사를 밤에 열곤 했지만 지금은 대체로 하루 계산이 서구와 비슷해졌다.

 

43. 라마단은 무엇이고 왜 단식(斷食)을 규정하고 있나?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은 달(대략 음력 9월경)을 라마단으로 정하고 단식을 한다. 초기엔 24시간이었으나 10일로, 다시 한달로 연장됐다. 올해 라마단은 1117일에 시작한다. 단식으로 지옥의 문이 닫히고 천국의 문이 열린다며 속죄의 의미를 강조한다 

  

44.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교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된다. 부부관계를 해도 안되며 남을 비방하는 말을 삼가야 하고 향수 냄새를 맡거나 화를 내서도 안된다. 다만 13세 미만의 어린이, 노약자들, 여행자, 생리 중인 여자 등은 단식이 면제된다.

 

45. 무슬림들은 반드시 메카순례를 해야만 하나?

 

모든 무슬림들은 자유로운 성인으로 온전하고 건강하며 적당한 재산이 있다면, 그리고 순례하는 동안 가족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일생에 한번 메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외이면 면제가 되기도 하고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다. 기업체에는 메카 순례를 위해 회사가 돈을 적립해주기도 한다.

 

46. 메카의 카바 신전이란 어떤 곳인가?

 

원래 아라비아 다신교(多神敎)의 우상숭배 장소였으나 무하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알라에게 예배드린 곳이라며 이곳을 성지(聖地)로 삼았다. 카바란 입방체란 뜻.

 

47. 성지순례시 메카에서 하는 의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

 

보통 카바 신전을 7바퀴 돌고 내부의 검은 돌에 키스한 뒤 잠잠이란 우물 주변에 있는 99개 예언자들 무덤과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블리스(사탄)라고 하는 돌기둥에 돌을 던지며 코란 구절을 외운다. 또 메카에서 25떨어진 아라파트 언덕을 오르고 6떨어진 미나에서 양과 낙타로 희생제사를 드린다.

 

48. 이스마엘과 이삭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서로 어떤 관계인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자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 나중에 본처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다.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은 쫓겨나아랍인의 조상이 됐고, 적자(嫡子)인 이삭은 유태인의 조상이 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49. 이슬람교도들은 왜 턱수염과 구렛나루를 기르나?

 

예언자 무하마드가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하여 그에 따르려는 행동인데, 여기에 유목민 고유의 연장자 우대 전통과 어울려 더욱 확산됐다.

 

50. 이슬람권 국가의 여성들이 집 밖에 나설 때마다 차도르(머리를 덮어싸는 보자기로 이란에서는 히잡이라고 함)를 쓰는 이유는?

 

남녀가 상대의 육체(겉모습)만 보고 인격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남자의 경우도 맨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공중목욕탕에서도 꼭 팬티를 입는다.

 

51. 흔히 성전(聖戰)으로 일컬어지는 지하드(jihad)는 무엇을 의미하나.

 

지하드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항거 등 자기 방어의 목적을 갖고 있다. 또 내부적으로도 부패에 찌든 사회,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지키는 일도 이에 포함된다. 지하드가 악용 내지 남용될 소지가 있으나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52. 아프간 여성들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부르카는 어떻게 생겼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다. 내놓는 것은 손 뿐인데 그것마저 망사로 쳐 외부에선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다.

 

53. 이슬람 지역 여성들은 어릴 때 할례를 해야 한다는데, 그 이유는?

 

할례란 성기의 일부를 도려내는 작업으로 그걸 하면 성에 대한 욕구가 절제된다고 한다. 아랍이나 아프리카의 토착 풍습.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성에게만 요구한다는 차원에선 여성 차별이라 말할 수 있다.

 

54. 이슬람 사회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나?

 

여성이 혼전에 순결을 잃는다거나 결혼 후에 간통을 하게 되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 해서 그 아버지나 오빠가 당사자를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명예살인이라 부른다. 따라서 명예를 더럽힌 남자도 이 사회에선 발을 붙이지 못한다.

 

55. 이슬람 지역 여성들이 손발을 치장하는 헤나(henna)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헤나란 꽃가루와 나뭇가루, 식물성 기름 등을 한데 섞어 만든 검은 색 계통의 안료를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아랍, 인도 여성들은 손등과 손바닥, 발등에 식물의 줄기나 잎, 나비 등을 예쁘게 그려 치장한다. 남성의 시선을 끌기 위해생겨난 풍습.

 

56. 아랍지역에도 찻집이 있나?

 

물론 있다. 서양의 오픈 카페처럼 주로 길거리에 있는데, 남성들만 출입한다. 여기서 물담배, 체스 등을 즐긴다.

 

57. 아랍과 이슬람, 중동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아랍은 인종, 언어 등 문화적인 요소를 일컫고, 이슬람은 알라를 믿는 종교를 말하며, 중동은 지리적 개념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칭한다.

 

58. 중동 평화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은 어디인가?

 

현재 이스라엘 영토 및 점령지역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합친 지역.

 

59.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종종 벌어지는 인티파다(Intifada)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에 저항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되찾기 위해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이는 무차별 과격 무장 봉기를 뜻한다.

 

60. 아프간의 실질적인 정부인 탈레반은 어떤 조직인가?

 

구도자란 뜻. 이슬람학교에서 코란을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199410월 동남부 칸다하르의 이슬람학교 학생운동가들이 세웠다. 969월 이슬람 조직간의 내전에서 승리, 국토의 90%를 장악했다. 종파간 자치형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지만 UN은 합법적인 정부로 간주하지 않는다.

 

61. 이슬람의 교리에 폭력을 인정하거나 찬미하는 부분이 있나?

 

공식적으로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리주의자들은 지하드(聖戰)를 언급한 코란 구절들을 자주 동원한다. 하디스에는 지하드가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데 첫째 순수한 포교활동이며 둘째 신앙의 방어로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밝혔다.

 

62. 이슬람 부흥운동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정신적 쇠퇴를 비판하고 무하마드의 움마 정신, 즉 순수 이슬람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반서구적, 반체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63.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현재의 사우디 왕국을 세운 와하브의 와하비주의(主義)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다. 사우디는 친()서방적이지만 국민들은 와하비주의에 기반한 엄숙주의, 배타주의, 그리고 혁신을 반대하는 극도의 보수주의를 지킨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샤리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이란이나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이 사례가 될 수 있다.

 

64. 원리주의자들은 왜 테러를 일삼고, 서구에 증오감을 갖고 있나?

 

서구의 물질주의가 이슬람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서구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히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이를 분쇄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테러리즘이 증폭됐다.

 

65. 이슬람교에서는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을 용인하고 있는가?

 

테러리스트로 이슬람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반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하드와 관련해 그들이 공개적 또는 잠재적으로 존경받기도 한다.

 

66. 이란에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부패한 친미(親美) 팔레비 정권이 이란을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의 전통과 정신이 훼손되자 호메이니를 비롯한 물라(율법학자)들이 왕정을 끈질기게 비판, 왕정 타도로 이어졌다.

 

67. 이슬람권 반미(反美)의 뿌리는?

 

터키의 경우 근대화와 세속화에 어느 정도 성공해 세계체제에 순조롭게 편입했다. 하지만 나머지 중동 국가들은 이교도(異敎徒) 국가인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페르시아만 전쟁 등으로 반미운동이 확산됐다.

 

68. 서구의 이슬람공포증은?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은 유럽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다는 게 정설. 강한 군대를 몰고 다니며 코란이냐 칼이냐를 외치는 이슬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적대의식과 두려움이 생겨났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1세기 십자군이 일어났다.

 

69. 이슬람 무장단체에는 어느 지역에 어떤 것이 있나.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이 본격적인 불을 지폈다. 현재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집트의 자마아트 이슬라미야, 알제리의 무장무슬림그룹,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 등이 있다.

 

70. 이슬람에서 음주와 돼지고기의 식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음주는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이집트를 제외한 이슬람 국가에서 금지된다. 돼지고기는 불결한 음식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된다.

 

71. ()은 어떤 방식으로 잡는가?

 

이슬람법에 따라서 희생제를 맡는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말한 뒤 단숨에 양의 목을 자른다. 피는 동맥을 통해 완전히 뺀 다음 고기를 도려낸다.

 

72. 이슬람권에서 술을 마실수 있나?

 

음주는 코란에선 우상숭배·도박과 함께 금지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하나다. 마실 수도 없고 제조할 수도 없다.

 

73. 이슬람에서는 남자에게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데,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인가? 왜 여성은 4명의 남편을 둘 수 없나?

 

코란의 규정에 의해 경제적 능력과 부인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에 한해서만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복수의 남편을 거느릴 수 없다. 여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보아 그랬을 것이다.

 

74.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신부가 될 여자에게 마흘이라는 것을 지불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신랑이 결혼과 함께 신부집에 지불하는 돈으로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증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돈은 이혼을 하더라도 여성의 몫이다.

 

75. 코란에서 별도로 금지하고 있는 결혼도 있나?

 

어머니, 여형제,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이모, 고모, 형제 자매의 여아, 유모,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여자, 장모 등과는 결혼할 수 없다.

 

76. 이슬람사회에서도 이혼은 가능한가?

 

남자는 언제든지 이혼 청구가 가능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77. 이슬람사회에도 창녀가 있나?

 

순결과 가정을 중시하는 이슬람이라 원칙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주 은밀하게 존재한다.

 

78. 이슬람의 남녀 분리 사회생활은?

 

원칙적으로 남녀의 공간이 분리돼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물론 집안에서도 그러하다. 사람과의 접촉이 많은 직종은 그래서 남자들이 한다. 그러나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그러한 전통이 허물어지고 있다.

 

79. 왜 이슬람 국가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가?

 

이슬람만의 습관은 아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러하다. 손은 남의 것과 섞일 염려가 없어 가장 위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0. 왜 무슬림들은 오른손을 신성시하나?

 

하늘에서 알라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높은 곳이며, 순교하면 바로 그 오른쪽에 앉을 수 있다고 믿는다.

 

81. 아랍인들의 주식은 무엇인가?

 

쿠브즈라 부르는 우리의 빈대떡 크기 만한 식빵이다.

 

82. 이슬람 지역에도 대중목욕탕이 있나?

 

큰 도시의 시장에는 반드시 함맘(hammam)이라 부르는 대중목욕탕이 있다. 둥근 천장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바닥은 대리석이다. 그러나 욕조는 없다. 물을 수조에서 받아 씻을 뿐인데, 때를 벗기지 않는다. 팬티 차림으로 목욕한다.

 

83. 이슬람 전통 도시를 흔히 메디나(medina)라 부르는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모스크와 마드라사(종교학교), 함맘(대중목욕탕), 수크(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길가의 집은 대개 가게를 겸한다. 메디나의 외곽은 외부 공격에 대비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84. 이슬람 지역의 시장은 어떠한가?

 

수크(souq, 페르시아나 터키에선 바자)라고 하는데, 없는 게 없다. 매력은 흥정에 있다.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매우 인간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85. 유태인, 화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상인이라고 하는 아랍인들의 상술은 어떠한가?

 

돈을 버는 일에 종사하나 돈버는 데만 급급하지 않는다. 마케팅에 열을 올리지 않으며 대체로 향락산업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86. 이슬람교는 초기부터 포교가 빨랐다. 그 비결은?

 

우선 이들에 맞설 만한 세력이 없었고 단순한 교리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데다 종교적 열정이 매우 강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87. 아라베스크 문양이란 어떤 것인가?

 

살아 있는 것들은 그리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식물의 형상, 기하학적 도형, 코란의 서체(書體) 등을 이용하여 문양을 그렸는데 이를 아라베스크 문양이라 부른다.

 

88. 모스크가 대체로 돔 구조로 되어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반구형(半球形)의 돔은 천상의 하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알라에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89. 이슬람교도들은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나?

 

아이가 태어난 뒤 7일째 되는 날에 일가 친지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낭송한 다음 축하연을 베푼다. 이름은 맨 앞쪽이 그 아이 이름이고 뒤로 갈수록 먼 조상의 이름이나, 이름의 길이는 가문에 따라 다르다.

 

90. 이슬람의 장례는 어떠한가?

 

유족들은 사자를 위해 매장하나 대개의 경우 묘는 작게 만든다. 장례식은 모스크에서 치른다.

 

91. 이슬람에선 3개의 시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

 

그들은 원래 헤지라 역()을 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선 서력을 무시할 수 없게 돼 두 개의 시계가 필요하다. 여기에 일출과 일몰에 의해 시간이 결정되는 예배 때문에 또하나가 필요하다.

 

92.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나?

 

금요일은 이들에겐 안식일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게문도 닫는다. 모스크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남는 시간은 코란을 읽으며 하루를 지낸다.

 

93. 물에 대한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이 있나?

 

물은 알라가 준 것으로 개인이 독점할 수 없으며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청결하게 이용해야 한다. 도시의 길거리에 설치된 물독의 물도 절대 헛되이 쓰지 않는다.

 

94.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세계 180여 개국에 12억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국가 수만도 55개나 된다.

 

95. 현재 서구에서도 이슬람은 포교되고 있는가?

 

아랍 및 아프리카인들의 유럽 또는 미국으로의 이주에 따라 서구에서도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인구 5800만의 프랑스의 경우, 개신교도가 70만명인 데 비해 이슬람교도는 300만명이나 된다.

 

96. 한국과 이슬람 지역은 언제 어떻게 교류하기 시작했나?

 

이슬람과 우리와의 교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때의 아랍측 기록에 신라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데다 서역인이라 부르는 석상이 신라인들에 의해 세워지기도 했다. 교역에 따른 인적 교류인 것으로 보인다.

 

97. 현재 한국의 이슬람교 사원과 신도는 어느 정도인가. 언제 들어왔나?

 

625 때 터키군의 파병으로 이슬람이 우리에게 다시 알려졌는데, 최초의 모스크는 오일쇼크 때인 1976년 서울 이태원에 세워졌다. 현재는 전국 5곳에 사원이 있으며, 신도는 주로 이슬람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근로자들이다.

 

98. 현재 한국에서 이슬람교 포교활동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

 

적극적인 포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이슬람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9. 한국에서도 이슬람 또는 아랍음식을 맛볼 수 있나?

 

서울 이태원동의 해밀튼호텔과 중앙성원 주위에서 아랍·인도음식을 즐길 수 있다. 차와 향료 등도 구할 수 있다.

 

100. 덕수 장씨가 아랍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13세기 원나라 제국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던 아랍인 삼가(三哥)가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한국사회에 동화되었는데, 덕수 장()씨가 바로 그 후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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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바라본 꾸란의 오류와 모순들

 
꾸란(Quran)은 이슬람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경전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을 알라가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계시라고 믿는다. 알라가 천사 ‘지브릴’(Gabriel)을 통해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23년 동안(A.D. 610-632) 한 구절 한 구절씩 계시해 준 내용이라는 것이다.

 

꾸란은 모두 114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무함마드가 처음 이슬람을 시작했던 메카(Mecca)에서 받은 계시(A.D. 610-622)와 메디나(Medina)로 이주한 이후에 받은 메디나 계시(A.D. 622-632)로 나뉜다. 꾸란에 사용된 언어는 아랍어다. 따라서 이슬람에서는 반드시 아랍어로 기록된 것만을 꾸란이라고 한다. 다른 언어로 된 꾸란은 아무리 완벽한 번역이라도 계시 언어인 아랍어가 아니기 때문에 ‘꾸란 해설서’라고 한다. 이러한 꾸란의 내용 가운데 기독교 입장에서 역사적인 오류와 성경이 변형된 내용들과 모순이 발견된다. 여기서 그 내용들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적인 오류들

 

1) 파라오 궁전에 있던 하만: 꾸란에는 하만(Haman)이 모세가 있을 당시 파라오의 친구로서 이집트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파라오가 말하길 족장들이여 나 외에는 너희를 위한 어떤 신도 내가 아는 바 없나니 하만아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내가 모세의 신을 볼 수 있도록 높은 궁전을 짓도록 하라 실로 나(파라오)는 그(모세)가 거짓말하는 자라 생각하니라”(꾸란 28:38) 모세와 하만이 함께 있는 모습은 꾸란의 다른 구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때 파라오가 말하였더라 하만이여! 내게 높은 궁전을 지어다오 내가 길과 방법을 얻고자 함이라”(꾸란 40:36) 그러나 성경에서 하만은 메데(Media)와 파사(Persia)의 아하수에로 왕의 대신이다(에 3:1-2). 꾸란은 그를 천 년이나 앞서 이집트의 파라오의 대신으로 만들어서, 출애굽의 이야기와 에스더의 이야기를 혼합시켰다.

 

2) 모세 때의 사마리아인들이 있었는가?: 꾸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 있을 때 사마리아인들의 제안으로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인이 그들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형상화하니 소의 울음소리 같더라 그리고 말하길 이것이 너희들의 신이며 모세의 신이었으나 그(모세)가 잊었도다”(꾸란 20:88)라며 두 번(꾸란 20:95)이나 모세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송아지를 만든 것은 아론이다(출 34:1-6). 또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때 존재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공(B.C. 722)을 받아서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이스라엘에 남아서 아시리아인(Assyria)들과의 통혼함으로써 생겨난 자손들이다. 즉 사마리아인들은 모세가 죽고 5-7세기 이후에나 이스라엘에 등장했다. 참고로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3) 메카에 대한 아부라하(Abraha)의 공격은 어떻게 중단되었나?: 무함마드가 태어난 A.D. 570년을 이슬람에서는 ‘코끼리의 해’라고 부른다. 아브라하(Abraha) 장군이 메카를 침공하여 카바를 파괴하려고 결단한 해이기도 하다. 이 내용은 6세기 초 예멘의 힘야르트 왕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자, 홍해 건너 아비시니아(Abyssinia, 현재 에티오피아) 기독교 왕국에서 아브라하(Abraha) 장군을 보내서 예멘을 정복한다. 그는 또한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메카를 침공했다가, 알라가 카바신전을 지키기 위하여 수천 마리의 새들로 하여금 그의 군대 머리 위에 구운 진흙으로 된 돌을 떨어뜨리게 해서 많은 군인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 내용이 꾸란에 기록되어 있다. “그대 주님께서 코끼리의 무리를 어떻게 하셨는지 그 소식이 이르지 아니했느뇨? 그들의 음모를 파멸시켜 버리지 아니했는가? 알라는 그들에게 새 떼를 보내어 모레와 흙으로 된 돌멩이를 던지셨나니 그들을 다 갉아먹어 버린 마른 잎과도 같았더라”(꾸란 105:1-5) 그러나 역사적인 자료들에 따르면, 아브라하 군대는 천연두로 추정되는 전염병으로 인해 후퇴한 것이었다.

 

4) 무함마드 때에 있었던 알악사(Al-Aqsa) 모스크: 무함마드는 “밤하늘의 여행”(Night Journey)에서 지브릴 천사가 자신을 예루살렘에 있던 알악사(Al-Aqsa) 모스크로 데려갔고, 그곳을 본 후에 승천하여 칠층천을 방문하고 돌아 왔다고 한다 “그분(알라)의 종을 밤에 하람 모스크에서 알악사 모스크로 여행케 한 그분께 영광이 있으소서”(꾸란 17:1). 그러나 알악사 모스크는 무함마드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알악사 모스크는 십자군에 의해 교회로 처음 지어졌으며, A.D. 1187년 무슬림 지도자 살라딘(Saladin, 1137-1193)이 예루살렘 수복 후 모스크로 바꾼 건물이었다. 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라는 황금돔 모스크는 A.D. 691년이 되어서야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A.D. 632년 무함마드가 죽고 나서 59년 후다.

/유해석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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