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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遠征 때 코란 탐독한 나폴레옹,

                 그도 실은 무슬림이었다

 

 

      나폴레옹이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자대신 굳이 무슬림으로 바뀐 이유나 그 시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평정으로 일약 전국적 인물로

바뀐 그가 이집트원정에 올라 그의 원정함대가 알렉산드리아항(港)에 닿을 즈음,

          그가 선상에서 6주간 탐독했던 책이 코란이었다는 사실은 영국의 역사작가

빈센트 크로닌이 남긴 <나폴레옹>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이집트의 카디스(무슬림 법관), 쉬크(족장), 이맘(회교僧)들을 모아놓고

선포한 첫 포고령은 “내가 진정한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너희 국민들에게 고하라!”였고,

그 대가로 프랑스군 주둔지역 부근에  둘레 1.5마일 크기의 모스크(회교사원)를 짓겠노라는

약속까지 합니다. 이집트 종교지도자들이 나폴레옹에게 무슬림이 되는 징표로

할례와 (포도주의)금주를 요청하자 그는 잠시 주춤했으나 곧이어 타협이 이뤄집니다.

 


그가 향후 이슬람교를 적극 보호하고, 알라 신의 메신저와 선지자(모함메드)의 친구가

되겠다는 선언을 채택했고, 그는 실제로 유럽 전역에서 벌인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그 영광을 알라신에게 돌림으로서 이 선언을 준수한 걸로 나타나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황제 취임 대관식에서 왕관을 씌워주려는 교황을 거부, 자신이 손으로 

직접 왕관을 쓰는 장면.  자칫 나풀레옹의 위세와 교만을 시사하는 그림으로 오해되고 있으나,

실은 당시 나폴레옹은 이미 회교도로 바뀌어, 교황의 권위는 그에게 무슬림 교리 상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다비드 그림(1806~7)/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그렇다면 훗날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이 대관식에서 교황이 씌워주는 왕관을 거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받아쓴 대목에 대한 해석은 달라져야 합니다.

교황의 왕관을 거부한 이유가 나폴레옹의 권위나 오만 때문이 아니라,

당시 이미 독실한 무슬림으로 바뀌어 있던 그에게 교황의 권위는

무슬림 교리 상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김승웅                        

 

예컨대 미국이민자의 경우 한 세대(30년), 유럽이민자의 경우 3세대가 지나면 정착이 가능하나

프랑스이민자만은 3세대가 지나도 개선은커녕 빈곤의 악순환을 되풀이,

그 정도가 타 지역 이민자의 5~19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이슬람분포는 공식적으로는

7~8%에 불과하나, 이런 기회박탈로 인해 18~24세의 프랑스 청년 4가운데 한명은

이미 IS세력에 대한 동조자, 그것도 적극동조자로 바뀐 걸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니스의 트럭 테러를 다루는 과정에서 미국과 서구 언론이 보인 이 같은 스타일의 변화는

결코 취재보도의 낙후와는 무관한, 오히려 진보적이고 거시적 접근이라는 소회가 듭니다.

니스 테러범인 한 무슬림 운전자의 소년시절이나 프랑스이민경위나 캐는 기존의 미시적 취재로는

이슬람이라는 매머드조직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교전당사국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고 전선에 임한 미군장병들의

정훈(政訓)자료로 미 국무부가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4년, 당시 컬럼비아대학 인류학

여교수 루스 베네딕토에게 ​<국화와 칼>이라는 명저의 집필을 의뢰한 것과 유사한

접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테러취재의 스타일 변화를 기해 일본 자리가 무슬림으로 바뀐 것입니다.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문화일보·시사저널 워싱턴특파원 역임>

 - 2016년 7월 25일字 이투데이 칼럼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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