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설교] 축복하고 축복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축복하고 축복하라
본문 / 민수기 6:23~27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성경을 보면, 선명하게 구분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성경 속에서 대조되는 주제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로 나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축복하셨는데, 아담의 죄로 인해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에게 저주가 찾아왔습니다.

그 후, 우리는 세상 속에서 축복과 저주라는 실체(實體)와 계속해서 마주칩니다. 어떤 곳에는 축복이 있고, 어떤 곳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아주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축복과 저주의 개념은 아주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불행스러운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정에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방황하고 불만족에 빠져있고, 중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한 삶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서 비껴나 있으면,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저주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노력 유무(有無)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가 불완전하지만, 야곱은 축복의 냄새를 맡으며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에서가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무관(無關)한 자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극명(克明)하게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축복과 저주가 아주 뚜렷하게 구별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한쪽에서는 장자(長子)가 죽는 저주와 통곡의 밤을 보내며 절규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반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에서는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선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축복과 저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한쪽에는 어두움이 가득하고, 한쪽에는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피를 바르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피가 어둠과 빛, 저주와 축복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피가 축복과 저주를 갈라놓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인류의 역사(歷史)를 선명하게 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의 관심은 복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하나님은 복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복을 되찾게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아브라함을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복을 되찾게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28:6).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면, 축복이 임하고, 저주가 떠날 것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첫 설교로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저주는 사라지고, 축복이 임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주는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우리에게 축복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게 떵떵거리며 살아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것도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만 가진 사람은 매우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주를 끊어버리고, 축복을 가져오는 출발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라틴어 ‘bĕnĕ dícere’(베네 디체레)에서 파생된 단어로, 칭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칭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특별한 형태의 칭찬, 인정(認定)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야. 내가 기뻐하는 자야. 사람들이 너를 욕하고 멸시하고 천대하고 너를 핍박해도 너는 내 아들이야. 세상의 모든 저주가 너에게 쏠려있어도 너는 내 아들이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인정하시고, 아들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로 인해 기뻐해. 너를 인정해. 너는 존귀한 자야. 너는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야. 나는 너를 보면 기뻐. 너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야.”라고 존재를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기뻐해주는 것이 축복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명했습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모세는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축복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무엇입니까? 축복은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은 그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 3:17). 하나님은 아들을 향해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고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다가 둘째를 낳으면, 둘째에게 관심을 갖느라 첫째에게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아이가 병이 납니다. 그래서 괜히 물을 쏟기도 하고, 동생을 때리기도 합니다. ‘나를 바라봐 달라’는 것입니다.
주목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욕구 불만이 생깁니다. 주목받는다는 것 자체가 사랑을 받는 것이고, 축복입니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데도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욕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먹을 것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주목받지 못하면 불안해합니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평안을 느낍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그것이 회복입니다.
어린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서 주목받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만족을 느낍니다.
부모의 주목을 받으며 자란다는 것은 아이에게 축복입니다. 빗나가는 아이들은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칭찬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주목받기 원합니다. 혼자서 놀 수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엄마를 부릅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면, 승진한 것에 대한 기쁨도 있지만, 인정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더 큽니다. 주목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귀한 사람인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지구에 나 한 사람만 있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만큼 우리가 귀중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우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사람을 단체로 취급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려도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이십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잃어버린 것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등을 돌린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냥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말에는 ‘나는 너의 삶과 함께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관심을 받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라보는 것은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향하는 것이 곧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슬쩍 쳐다보시고 지나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라봐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셔서 바라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시는 것은 재앙입니다. 저주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나 자신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를 내가 끌어안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온몸으로 경험해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깨달은 만큼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커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기 전에 자신을 축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9:18).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보고 축복해야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에게 저주를 쏟고, 남을 못살게 하는 이유는 자신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축복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정말로 축복할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을 축복하며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계 속에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보면,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나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축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끌어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학(自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를 경멸합니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손사래를 칩니다. 자신을 스스로 낮게 평가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목해보세요. 대충 넘어가지 말고, 주목해보세요. 대충 평가하고 끝내버리지 말고,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성경 곳곳에 표현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주목해보세요. 자신의 모습을 피하지 마세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평가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한 자기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열등감이 무엇입니까?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답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소용없습니다. 남이 아무리 칭찬해도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등감은 일종의 병입니다. 병 중의 병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는데, 누가 건져주겠습니까. 건져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말하든,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기준은 늘 바뀝니다. 미인의 기준도 늘 바뀝니다. 시대에 따라 미남, 미녀에 대한 기준이 달라집니다.
방송에 나오는 미남, 미녀의 모습에 속지 마세요. 방송에 나오는 분들은 최고급 미용실에서 일류 미용사와 스타일리스트(stylist)가 비싼 화장품으로 가꾸어줍니다. 그런데 못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옷은 협찬을 받아 최고의 옷을 입습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카메라맨이 최고로 좋은 카메라를 이용하여 얼굴이 작게 보이도록 합니다. 그런데도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사랑의 눈으로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빚으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외형(外形)과 이목구비(耳目口鼻),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무시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지금 나의 삶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열등감에 빠지는 이유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은 인구가 약 1억 명입니다. 그 중 4천 5백만 명이 절대 빈곤층입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주변에 약 5천만 명이 삽니다. 그런데 그곳의 도시 빈민은 아프리카의 빈민과 또 다릅니다. 아주 참혹합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만난 아이들은 다 행복해보였습니다. 그 아이들은 자기가 가난한 줄 모릅니다.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주 행복해보였습니다. 필리핀의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습니다.

왜 불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평합니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답게 만드셨고, 지금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적합하게 선물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재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맡기신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는 왕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의 노랫소리가 사울 왕의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사울은 속이 뒤틀렸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인데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윗을 비교하는 노랫소리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왕인데도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가질 것이 없는 자가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무언가를 가져야, 무엇인가 갖추어야 열등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귀중하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축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입니까. 얼마나 귀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거울 앞에서 “멋져, 훌륭해.”라고 선포하세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너는 정말 귀해. 내가 너를 위해 내 아들을 줄 만큼 너는 귀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그런 나를 축복해야 합니다.

신자(信者)는 자신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왜 힘들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가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축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내가 축복을 흘려보내는 데 인색했기 때문에 그가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여 그의 안에 있는 불만과 안타까움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내가 그를 축복하여 그에게 축복이 흘러갈 때, 저주가 바뀌어 축복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축복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사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기계에 집착하고, 엉뚱한 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중독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우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나를 통해 축복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저주 받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축복하면, 우리 주변이 달라집니다. 주변에 축복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곳은 축복된 곳이 됩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곳이 밝아집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축복하면 그곳이 회복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태양이 비치면 먼지도 빛나기 시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축복해야 합니까? 상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주변을 바라보세요. 사랑은 주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힘들어합니까? 주목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바라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 김춘수 씨의 시 〈꽃〉은 아주 유명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 꽃은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에게 주목합니다. 시선이 고정됩니다.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주는 것입니다.
주의가 산만하던 청년도 사랑에 빠지면, 대단한 집중력을 갖게 됩니다. 한곳에 꽂혀버립니다. 계속 바라보면, 그의 존재와 내가 하나가 됩니다. 젊은 연인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면, 둘이만 보고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시선이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역입니다.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않는데, 나 혼자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목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임무입니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기만 하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실천해보세요.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위력(威力)이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눈길은 다릅니다. 위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세요.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바라보며 열등감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집중하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목받지 못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외된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역사는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왜 주변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리핀에 며칠 머무는 동안, 빈민들이 사는 마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사는 집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습니다. 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지붕이 없는 집도 있었습니다. 집 옆으로 악취가 나는 하수(下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남자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어린 나이에 임신하면, 같이 살아가려니 막막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도망가 버립니다.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힘들어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삽니다. 그래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또 도망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빠가 다른 아이들을 엄마 혼자서 키웁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작은 집에 아이가 10~12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밥을 한 끼밖에 먹지 못합니다. 절대 빈곤의 나라입니다.
참혹한 광경을 많이 봐서 문화적 충격이 컸습니다. 며칠 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필리핀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기막힌 사역현장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스킨십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이 제게 다가와 제 손을 주무르며 만졌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볼을 만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꽃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계속해서 눈을 맞추었습니다. 아이들의 눈이 아주 예뻤습니다.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단지 불쌍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 아이들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눈을 맞추며 바라봐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을 때, 제 눈을 피하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빠에게마저 버림받은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이 따뜻하게 웃으며 안아주고, 스킨십을 해주니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진 찍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자매가 “이 아이들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이 순간을 일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축복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저주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축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주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주만 쏟아져 나올 뿐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더 저주스러운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지금 이슬람 국가들은 분노에 차있습니다.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기고, 나라가 없는 것으로 인한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을 향해 저주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누가 축복할 수 있습니까? 축복을 아는 사람들이 축복할 수 있습니다. 축복을 아는 사람들만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가운데 우리가 축복해주어야 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꽃이 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치유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기만 해도 회복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한 것을 칭찬하고, 그들을 향해 박수쳐주었더니 우리 교회 중ㆍ고등부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칭찬하고 박수쳐주는 것은 그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중ㆍ고등부 학생들이 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내놓을 만한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대한민국의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광경입니다.

집에서도 서로 축복해보세요. 남편이 아내를 축복하고, 아내가 남편을 축복해보세요. 부모는 자녀를 마음껏 축복해보세요.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누르고, 오히려 자녀를 축복해보세요.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약 3:10). 어떻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서는 축복만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축복이 나가지 않으면, 세상은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3장 11절에 보면,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축복만 말할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은 얼굴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다시 살아날 곳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의 입으로는 험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축복해야 합니다. 비관적(悲觀的)으로 말해서도 안 됩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절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과 교회를 향해, 주변의 어두운 곳을 향해 축복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축복할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우리의 최고 사명입니다.
세상의 불행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감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집 안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서로 바빠서 서로를 깊이 바라볼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병듭니까? 관심 받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도 관심을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쏟으면, 식물에서 빛이 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랑을 받고 주목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축복입니다.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봐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관심입니다. 그것이 이해입니다. 그것이 인정(認定)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빠져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통해 축복이 사람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존귀한 존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너는 충분히 멋져.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존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름답고 멋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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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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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중독사회에서 승리하는 신앙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중독사회에서 승리하는 신앙
본문 / 에베소서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오늘날 이 시대는 감각적인 시대입니다. 느낌(feeling)에 충실한 시대입니다.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감각적인 시대에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느낌이 강하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보다 느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결론 날 텐데,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각적인 시대에는 느낌이 매우 강하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인 시대는 말초(末梢)신경을 자극하는 시대입니다. ‘말초’는 나무로 말하면, 가지의 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시대는 아주 가벼운 만족을 얻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문화의 특징은 ‘빨리빨리’에 익숙합니다. 사람들이 오래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래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편리하고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에는 밥을 직접 지어서 먹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떼어 밥을 지어먹었습니다. 뜸을 들여야 했습니다. 아무리 배고파도 한참 기다려야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빨리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자신의 배입니다. 자신의 배를 채워주고 만족시켜주면, 모든 것이 오케이입니다.

사람들은 자극을 좋아합니다. 감각적인 시대의 특징은 ‘좀 더(more)’를 강조합니다. 음악을 듣다가 볼륨(volume)을 점점 높입니다. 그림도 굉장히 강렬해집니다. 먹는 것도 자극적인 맛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찾습니다. 초콜릿(chocolate)의 맛이 얼마나 자극적입니까. 맛이 굉장히 진합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좀 더 강한 것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처음에는 만족스러운데,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오감(五感)은 항상 좀 더 강한 것을 원합니다.
우리가 좀 더 강한 것을 찾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그 속에 빨려듭니다. 우리가 운전해서 가다 보면, 좀 더 빨리 달리고 싶어집니다. 좀 더 빨리 가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데,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여 우두커니 있을지라도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를 밟고 싶습니다.

우리가 좀 더 강한 것을 찾을수록 우리는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내성(耐性)’이라고 합니다. 집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갈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강도(强度)를 점점 높이게 됩니다. 강도를 높이면, 만족할 수 있습니까? 강도를 높여도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만족을 느낀다 해도 만족이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또 다른 만족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만족의 간격(interval), 우리가 만족하고 만족이 사라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집니다. 예전에는 하루는 견딜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하루도 견디지 못합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만족을 찾고 싶어 합니다.
만족의 간격이 계속해서 짧아지면서 나중에는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감각이 파괴된 상태입니다.
감각이 무디어지고 파괴되면, 웬만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강도를 점점 더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로잡힌 상태를 ‘중독(addiction)’이라고 말합니다.

중독과 함께 금단현상(禁斷現象)이 나타납니다. 중독된 행동을 중단하는 순간, 금단현상이 나타납니다. 중독된 행동을 중단하면, 갑자기 불안해집니다. 짜증이 납니다. 정서가 불안해집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나중에는 자신이 집착하던 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의지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의지가 약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던 것을 철저히 의존하게 됩니다. 주의력이 산만해집니다. 자신이 집중하는 것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주의력이 산만해집니다.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컴퓨터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책을 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중독사회입니다. 중독 증세는 앞으로 더 가속(加速)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도 중독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독 증세가 가속되는 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독 증세와 싸워야 합니다.

중독사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면, 굉장히 심각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중독에 빠지게 하는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우리를 중독에 빠지게 하는 문화가 가득합니다.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독에 빠지는 과정이 오래되고 깊을수록 치료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독이 진행되는 각 과정마다 많은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중독을 치료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의 감각, 정서, 심리구조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정서적 건강뿐 아니라 육체적 건강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중독은 어느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으로 인해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해집니다. 어떤 것에 집착할수록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집니다.
중독 환자들은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딘가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중독이 우리의 신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심리적, 정신적, 사회적, 관계적으로도 영향을 끼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독은 영적 사회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중독의 증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독된 상태를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방인들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18~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상태에 대해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해 “그들은 감각 없는 자가 되어”라고 말했습니다. 중독된 상태는 감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라고 설명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컨트롤(control)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중독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준 것입니다.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암(癌)은 육체의 세포가 굳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독은 마음이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독은 심리적, 정서적 암과 같습니다. 삶을 파괴해버립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살게 됩니다.
감각이 망가지고 마음이 굳어져서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총명함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욕심에 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총명이 없다는 것은 판단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깨어졌습니다. 이렇게 된 상태에서는 인생 전체가 망가집니다.
감각이 망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감각이 망가졌다는 것은 감각이 정상(正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중독사회에서 일어나는 치명적인 현상은 영적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중독은 집착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상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집중력은 당연히 떨어집니다.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집중력이 떨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총명이 흐려집니다.

중독이 심해지면 멍해집니다. 알코올 중독자를 보십시오. 항상 술을 생각합니다. 밤에도 술에 찌들려있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술을 생각합니다. “술은 술로 깨운다”라고 말하면서 몽롱한 상태를 술로 깨우려 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기 전까지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밥을 먹기 전에도 술을 먹어야 합니다. 술로 찌든 속을 술로 풀려고 합니다.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중독은 힘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 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독은 무서운 것입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틀 동안 정신을 빼놓을 수 있는 것은 도박 밖에 없습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습니다. 도박에 중독되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도박장에 앉아있습니다.
돈 중독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봅니다. “돈”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술이나 도박, 마약에 중독되는 것 외에도 많은 중독이 있습니다. ‘권력 중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기도 중독됩니다. 거기에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합니다.
요즘은 음식 중독도 많습니다. 한 가지 음식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중독도 있지만, 덜 파괴적인 중독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소비주의 사회입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중독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오히려 소비주의 사회가 중독을 부추깁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는 계속해서 팔아야 합니다. 상품, 프로그램 등을 팔아야 합니다. 상업주의의 기법을 동원하여 소비를 조장해야 합니다. 쇼핑(shopping) 중독, 신상녀(新商女) 등이 바로 소비주의 사회로 인한 중독입니다.
소비주의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에 빠지게 만듭니다. 화려한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빼앗습니다.

중독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욕구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다 보면, 중독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애정결핍의 상태에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을 느끼기 때문에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 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해도 빈 공간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애정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빈 공간을 채우려 하는데, 주변에서 소비주의가 소비를 조장하고, 우리의 감각이 그것에 끌려가니 그것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게임(game) 중독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스포츠(sports) 중독이 대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단적 광기(狂氣)가 있습니다. 취미가 적당한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갑니다. 그것은 중독입니다.
음악 중독도 있습니다. 스피커(speaker) 하나에 수억 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미디어(media) 중독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요즘 지하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잘 보지 않습니다.

중독에 빠지면 몽롱해집니다. 총기(聰氣)가 사라집니다. 심한 경우, 일상의 삶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영적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은혜를 받는 듯하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빨리 돌아가 버립니다.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에 돌아가 버립니다.
은혜를 받아도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중독된 것에 빨려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은혜가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예전에는 우리로 하여금 중독되게 할 만한 문화가 없었습니다. 굉장히 심플(simple)한 문화였습니다.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TV채널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영화도 집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문화가 우리의 말초신경과 정서를 굉장히 자극합니다. 돈만 내면 무엇이든 제공하겠다는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집중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빠져들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중독되게 만들고, 탐닉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문화의 바다에 떠있습니다. 이 상태가 되면, 영적 집중력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영적 갈망(desire)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중독은 엉뚱한 것에 갈망(渴望)하게 만듭니다. 중독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집착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촉각(觸角)이 곤두서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늘 생각합니다. 그것을 갈망합니다. 그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가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집착하는 것입니다.

갈망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망치는 것을 갈망할 것인지, 하나님을 갈망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갈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갈망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갈망하는 대상(對象), 방향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갈망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길이 달라집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중독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심각한 훼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상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에 영적 갈망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 갈망, 영적 사모함이 사라져버립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영적 갈망입니다. 영적 갈망이 없으면, 신앙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게 만드는 힘은 영적 갈망에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영적 갈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밥을 먹고 싶지 않으면, 병들어 죽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아도 입맛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최고로 좋은 반찬은 배고픔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입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끼만 먹지 않아도 무언가를 먹고 싶어 하는 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살게 합니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음식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는 사람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식욕이 넘쳐나기 때문에 집회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영적 식욕이 충만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하기에 바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느라 바쁘지만, 즐거운 이유는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성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적 식욕이 전혀 없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집중하지 못한다면, 설교하는 사람은 힘이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영적 사모함을 가진 성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영적 사모함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갈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갈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그것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영원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아무리 해봐도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갈망하도록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영적 갈망이 채워지면, 다른 갈망이 시시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보다 더 강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을 갈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장애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중독 현상입니다.

영적 굶주림이 있는 사람에게 영적 채워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관해 말씀하실 때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을 사람은 가장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의무적으로 오는 사람과 갈망하는 마음으로 오는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무덤덤한 마음으로 오거나 강요에 의해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사모함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갈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갈망 없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다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영적 갈망이 식어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기울어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이 이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것이고,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전혀 몰랐습니다.
단순히 의무감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고, 그것을 자신의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늘 시무룩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t)가 그린 그림〈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에 보면, 큰 아들은 입구에 애매모호하게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어둡습니다.

그의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는 욕구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귀환을 즐거워하며 살진 송아지를 잡았을 때에 그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비록 나쁜 짓을 했지만, 방황의 끝에서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매우 깊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떠나보니 아버지의 집만한 곳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근처에 있기만 해도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갈망입니다.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모함, 갈망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신앙생활은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독은 갈망을 깨어버립니다. 그래서 중독은 위험합니다. 갈망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립니다.
여러분의 갈망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식어져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비상(非常)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이 유지되는 만큼 우리의 심령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영원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중력이 사라져버리고, 갈망이 식어져버리고, 중독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해버리는 것보다 좀 더 길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선 완전히 만족하는 것보다 약간 모자라게 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무리 재촉해도 자신을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금방 응답해주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금방 금방 응답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망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기도한 것이 빨리 응답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하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할 때, 부모가 금방 해결해주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先進)들 중 영적 세계에 깊이 들어가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시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절망의 순간을 경험하고 난 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해져가는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위험한 것은 조급성(躁急性)입니다. 믿음은 조급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조급한 것은 믿음과 반대됩니다. 믿음생활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독에 빠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조급해집니다. 그래서 빨리 채우려고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빨리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불안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00을 다 채울 수 있어도 약간 덜 채워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약간 모자란 듯이 먹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무엇이든 조금 모자란 상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꽉 찬 것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뷔페(buffet)식당에 가면, 먹을 것이 많이 보입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는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배부름으로 인한 기분 나쁜 현상을 경험해야 합니다.

100% 다 채우면, 만족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만족을 느낍니다. 참 신기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100% 채웠다고 생각할 때, 만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만족을 느낍니다. 욕구 불만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다 채울 수 있어도 다 채우지 않고, 약간 모자란 상태에서 만족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100% 채워진 것으로 인해 만족하려고 하지 말고, 90%에 만족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훈련되면, 우리의 삶의 질(quality)는 높아집니다.

우리는 100%를 채워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00%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족할 수 있어야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수치(數値)의 개념을 떠나 어떠한 형편에 처한다 해도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외부 환경이 나를 주장할 수 없는 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축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중독과 맞서 싸우는 훈련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절제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오늘날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절제(self-control)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절제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소비를 조장하고, 상업적 마케팅(marketing)이 주를 이루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절제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을 훈련하지 않으면, 우리는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독에 빠지면,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다른 것에 빼앗겨버리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무너져버립니다.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는 절제할 수 없습니다. 왜 성령의 열매라고 했을까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만, 성령께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므로 절제의 열매를 맺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놀랍게 역사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버리지 않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제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쓰십니다. 절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낭비됩니다. 방출됩니다. 엉뚱한 곳에 쏟아져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 중독으로 망가진 감각을 금식을 통해 복원해야 합니다.
금식은 절제의 훈련이며, 중독의 가장 좋은 처방 중 하나입니다. 금식은 우리의 영적 갈망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금식은 감각적인 것에 탐닉하려는 성향을 억제하는 훈련입니다. 육체의 욕구에 빨리 반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훈련 중 하나입니다. 금식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인가에 빠져들 것 같고, 컨트롤(control)되지 않고, 감각적으로 변해가고, 영적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면, 금식(fasting)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중독에 빠질까요? 내적 욕구가 찾아올 때, 채우려고 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욕구를 차단하려는, 적극적인 공격방법입니다.
음식을 금식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거스르는 훈련입니다. 식욕은 육체에 만족을 주는, 강렬한 욕구입니다. 이것을 거스르는 훈련이 금식입니다. 그러므로 큰 싸움입니다.

요즘은 음식만 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디어(media) 금식도 있습니다. TV,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영상물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미디어와 거리를 두는 훈련은 요즘 매우 힘든 훈련입니다. 특히 청소년에게는 힘든 훈련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인터넷과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훈련입니다.
이런 금식은 일종의 저항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본성적인 유혹을 저항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묶인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그 훈련을 통해 내 영혼이 묶인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금식 자체는 힘들지만, 육체의 본성을 거스르고, 그것을 묶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때, 금식을 통해 영적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금식은 일종의 나눔입니다. 움켜쥐려는 삶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심각한 중독은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쌓아놓으려는 것입니다. 움켜쥐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훈련은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초고속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적 부를 누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불안정하고, 어두운 가운데 있고, 사람들의 삶이 깨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쌓으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주는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가 사는 길은 나눔의 삶입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사는 길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부가 쌓일수록 이것을 해체하려는 세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은 나눔입니다.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탐욕의 성에 갇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삶이 끝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에서는 러브부산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노숙자사역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누는 것은 오늘날 중요한 이슈(issue)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담아놓거나 쌓아놓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이웃과 주변 교회, 한국 교회, 북한, 열방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여름이 되면, 농어촌교회에도 가시고, 해외 선교지에도 가셔야 합니다. 그것도 나눔입니다.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시간과 물질을 나누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집착과 중독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소비사회입니다. 그리고 중독이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딜레마(dilemma)입니다.
소비만 있고, 나눔이 없으면, 중독은 불가피합니다. 주어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것이 나를 사로잡아버립니다. 그래서 인생이 망가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누고 베푸는 것은 구제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기 살기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질을 나누지 않으면, 물질이 나를 잡아먹습니다.
나만을 위해 축적하기만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한 돌봄의 삶을 살지 않으면, 중독으로 빠져버립니다. 자신만을 위해 쏟아 부으니까 중독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독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감각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금식은 스스로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족한 상태에 스스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의 목표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고,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집착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수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못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내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닌, 내가 집착하고 있는 우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 잡지 못하면, 세상의 것에 우리의 마음이 팔려버립니다. 세상의 종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면, 그때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결박으로부터 풀어주시고,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굶주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도시에서는 스스로 광야를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광야의 삶은 무엇일까요? 도시에 살지만, 불편한 것을 조금씩 감수하고, 부족한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부족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광야의 삶을 통해 비울수록 더욱 채워지는 은혜가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은 부요합니다. 스스로 광야를 선택하고, 도시에서 사막을 만들고, 좀 더 단순하게 살고, 집착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일 때, 그곳에 사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최상의 기쁨과 즐거움, 행복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았지만, 아버지의 집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종들도 풍족하게 누리는데, 아버지의 집 밖에서 거지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집착하고 중독된 삶은 가장 가난한 자의 삶입니다.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모셔 들이면, 온 세상을 가진 것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요동치는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부채질하는 주변 분위기에 의해 들떠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다른 것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빼앗긴 가장 심각한 것은 영적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속임이 강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 안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안해하고, 무엇인가에 쫓기고, 채우기 위해 지친 영혼들을 향해 주님은 “내게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매우 복잡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육신을 만족시켜줄 것처럼 유혹하는 것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문만 나서면, 우리의 후각(嗅覺)을 자극하는 음식들, 우리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좋은 물건들,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우리의 입을 황홀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감각은 날로 무뎌져가는 것을 모르고, 세상에 도취될 위험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은 간단히 빨리 해결해버리고,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곳에 줄을 섭니다. 우리의 감성, 정서 혹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많이 망가졌습니다.
초콜릿이 좋아 계속해서 먹다 보면, 이빨이 상하고, 밥맛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미 세상의 문화에 피할 수 없이 젖어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세상의 문화를 어느 정도 탐닉하고 있어 우리의 감각 기능은 현저히 떨어져있습니다.

세상에 빠져들수록 우리의 영혼은 빨리 쇠퇴하고 초라해져갑니다. 우리는 성미가 급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신경질을 내고, 쉽게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우 위험한 문화의 한 가운데에 갇혀있습니다. 문화의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매일매일 탈출을 시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혼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만연해있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23~24절에 보면,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부추기는 문화 속에 익숙해진 구습을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흉내 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다가는 큰 일 납니다. 감각이 무뎌져가는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갈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갈망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것이 좋든 좋지 않든, 어떤 갈망이든 갈망은 식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갈망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외부적 요소에 의해 우리가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혼을 거스르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강력한 갈망들은 하나님 외에는 다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만을 탐닉하고, 하나님만 집중하고, 하나님께 몰입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중독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 그 안에서 주어집니다.
우리의 영적 식욕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날마다 일어날 때,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맛보지 않았던 기쁨과 새로운 만족, 새로운 행복이 그 안에서 주어질 것입니다.
일시적이고 얄팍한 즐거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만족을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계로 나아가기 전에 유해(有害)한 것에 익숙해져서 감각과 정서와 영혼이 상해버린 영적 환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중독되어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영적인 것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되 간절히 찾지 않는다면, 세상의 것에 중독되어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육신의 배가 고파 밥을 찾는 열망의 10배, 100배 이상으로 영적인 배가 고파야 합니다.
우리는 밥 한 끼만 먹지 않아도 욕구가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영적 갈망은 그것보다 훨씬 강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속임에 말려들지 마세요.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떡과 비교할 수 없는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쉽게 떡을 만들어버리라는, 마귀의 얄팍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육체를 순간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유혹과 매일매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만족을 얻기 전에, 우리는 세상이 주는 감각적인 것에 익숙해져있고, 중독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독(解毒)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굶주려야 합니다. 육신의 배가 고플 때마다 내 영혼의 배가 이렇게 굶주리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누리고, 그 안에서 영적 부요함을 얻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부요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온갖 것으로 우리를 흔들어대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주십니다. 가장 안전하고 만족한 삶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초점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세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다른 곳에 집착하지 말고,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갈망하세요. 하나님께만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 목말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의 강수(江水)로 초대하실 줄 믿습니다. 그 안에서 참된 만족과 참된 회복,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세상에 껄떡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하나님 안에 푹 빠져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맛보았던 기쁨은 진짜가 아닙니다.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 빠져들게 하고, 우리를 망가뜨립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만 갈망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일평생 식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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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본문 / 히브리서 5:8~10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신앙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믿어야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행위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뗄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을 뗀다면, 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은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순종은 붙어있습니다.

믿는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믿는다면 순종이라는 행위가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독립되어있지 않습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만 믿을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말로 합니다.
어디까지 믿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는 데까지가 믿음입니다. 순종이 없다면, 아직 믿음이 증명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애매모호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고민할 뿐입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갈등합니다.
믿음이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성 안에는 불순종의 뿌리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 뿌리가 깊습니다. 그 뿌리는 아담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에게 일어나는 불순종의 뿌리는 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마귀를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엡 2:2). 사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할 뿐, 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는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의 삶을 살면, 마귀의 부하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성 자체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태어난 영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순종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오늘도 온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영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든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불순종의 영은 이전에도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불순종의 영과 거역의 영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불순종합니다. 불순종의 영이 더덕더덕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밥을 먹을 정도만 되어도 그 아이에게 불순종의 영이 역사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불순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류에게 찾아온 저주, 인류에게 찾아온 모든 고통의 원흉(元兇)은 불순종에 있습니다. 불순종의 뿌리, 불순종의 잔재(殘滓)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고통이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순종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순종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생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말씀에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옮겨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깨어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순종은 그가 믿음으로 출발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불순종의 고리를 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순종의 삶을 배웁니다. 믿음의 최상(最上)의 질은 순종으로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위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키워드(keyword)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순종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병을 고치시고, 숱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초점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 행하시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8).
예수님의 사역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 속에 능력을 행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병이 낫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본문 8~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학교’에 다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순종의 삶을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있는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순종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클라이맥스(climax)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의 클라이맥스인 독자(獨子)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리는 사건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와 오버랩(overlap)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묶여 모리아 산의 제단 위에 있는 이삭처럼 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이 이 땅에 있는 불순종의 고리를 모두 끊어버리고, 모든 저주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깊고 깊은 불순종의 뿌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순종을 배웁니다. 순종을 배우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과 모든 아픔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까? 순종을 통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려는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함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그냥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실 때에도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종의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순종은 자아(自我)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순종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갈보리 언덕과 비슷합니다.

순종의 첫 발을 내딛고, 구원의 길로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삶은 창세기 22장에서 순종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순종은 자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날로 내리치려는 제단 위에 누워있던 이삭의 모습에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의 핵심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순종이 쉽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진노의 잔을 마시기 전에 멈칫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은 순종을 결단하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요 19:30).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일에 순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외침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저주를 끊어버리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 속에는 완전한 순종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에 완전히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99%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100%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목적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보면 불순종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방향과 목적을 잃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찬사(讚辭)를 보냅니다. 그가 남긴 말, 그가 행한 행적(行蹟)에 대해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삶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에 맞춰져있었습니다.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은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말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시지만, 자신의 말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좋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철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할 말을 알려주시면, 그것을 전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단독으로 무언가를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권세 역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능력이 없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는가’입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역을 하더라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순종’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키워드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순종을 배운 것은 우리에게도 순종을 배우게 하셔서 순종을 통해 모든 저주를 끊어버리고,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통(貫通)하는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종이 새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끌어당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이 순종하도록 하나님을 닦달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순종을 놓치면, 인생이 꼬여버립니다.

불순종은 딴 것이 아닙니다. 내 일에 몰두하고 사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외면하고, 내 일에만 빠져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기도하더라도 기도 안에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그 기도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고, 결국 모든 것이 자기에게로 돌아가거나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마지막 가장 숨 가쁜 고비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숨고르기를 하셨습니다. 매우 힘들고 벅찼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의 오물을 혼자 뒤집어쓰셨습니다. 죄악의 진노의 무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순종에 초점을 맞추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함으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일어난 원죄(原罪)적 삶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50). 친가족이라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불순종의 고리를 끊고, 순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믿음에서 순종이 나오지만,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순종이 깊어집니다. 사랑은 깊은 순종을 낳습니다. 사랑은 의무적인 순종이 아니라,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순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한다면 말하기도 전에 이미 순종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순종할 때, 사랑으로 결속됩니다. 사랑으로 순종할 때, 아버지와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단계로 나아간다면,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더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은 순종을 낳고, 믿음이 순종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사랑하면 순종적인 관계가 됩니다. 믿음과 순종, 사랑과 순종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첫째, 순종은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는 삶 자체가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실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순종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순종이 능력을 낳습니다. 그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순종의 숨은 비밀은 놀랍습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숨어있습니다. 능력을 행하려고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순종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풀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 따라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말씀으로 실제화됩니다.
말씀이 참된 말씀인 것을 확인하려면, 순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에 말씀이 사실로 드러나고,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난 현장,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난 현장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돌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해서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는 행위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보십시오. 순종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고통과 불행이 찾아왔다면, 에덴에서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축복을 회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이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롬 5:19).
인류가 불행하게 살아가는 원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을 가로막는 주범(主犯)은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불순종의 삶을 사는 만큼 방황이 길어졌습니다.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돌고 돌며 고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겪지 않아도 될 생고생을 자초(自招)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소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이 불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모리아 산에서도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삭도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처음부터 불순종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세 사람 중 누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야곱은 나중에 자신의 입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창 47:9).

우리의 삶의 축복은 순종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순종의 삶을 살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인생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인생을 복잡하게 해석하려고 하십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풀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생애도 보면, 복에서 출발하여 복으로 끝납니다. 야곱은 복 때문에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복 때문에 인생이 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복이 출발하게 됩니다. 인류가 잃어버린 복이 출발합니다. 잃어버린 축복이 회복됩니다. 저주를 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3).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복을 되찾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1세대는 원망불평하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2세대에게 신명기를 주셨습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는 ‘순종’입니다.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모든 축복을 되찾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복을 약속하시고, 인류의 복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갈보리 언덕에서의 순종을 통해 복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복은 순종을 통해 흘러가게 됩니다. 믿음에서 나온 순종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찾아온 인류의 저주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을 통해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순종은 축복을 가져옵니다. 기억하십시오. 축복의 원리는 순종입니다. 우리의 삶을 순종의 원리 위에 올려놓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묶인 것이 자동으로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꼬인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꼬여있습니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왜 꼬였는지 살펴보세요.
순종해야 하는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순종은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복과 연결된 경우에는 항상 명령형을 사용하셨습니다.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꼬여있던 것을 순종을 통해 푸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불순종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 있다면, 생수의 강이 막힙니다. 여러분의 삶에 순종하지 않는 영역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죄가 타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막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뚫리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원리입니다.

순종은 성경 속에서 거대한 핵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형통이고,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셔도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순종이 축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최고의 순종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 받으셨습니다. 아들이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은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통해 얻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자녀가 순종할 때, 부모는 기쁩니다. 순종을 통해 관계가 깊어집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의(祭儀)적 제사보다 순종이 중요하고,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순서와 의식(儀式)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삶이 참된 예배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순종하고 사는 것 자체가 예배입니다. 걸어가는 것이 예배이고, 모든 행위가 예배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계속 붙들어야 할 주제는 순종입니다.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복잡하게 하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키워드를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난 후에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을 익혀야 합니다. 순종이 점점 깊어져갈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나고,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순종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도 순종이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학습한다는 의미입니다. 한순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순종을 배워가므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한순간에 순종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오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셨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원망 불평하면 안 됩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사건과 실패와 고통을 통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그 일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실 때에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고집이 죽지 않으면,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순종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했던 마리아를 보세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기를 겪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1:38).

순종은 조건과 상황을 따지지 않고, 말씀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순종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순종학교의 주 과목은 십자가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입니다. 순종은 위험한 것이지만, 우리를 가장 완전한 길로 이끕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합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기 위해서입니까? 성경적 지식을 쌓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묵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를 들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합니까? 목적은 단 하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의 길을 열어주시고, 그의 영혼을 열어주셔서 말씀이 그 사람의 심비(心碑)에 새겨지게 하십니다.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령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귀가 닫혀버립니다.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닫혀버립니다. 불순종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불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稀貴)해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어도 소용없었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더 이상 들려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 같이 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려는 회중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까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죽어가는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해도 말씀이 벽을 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벽을 치고 다시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는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생명을 걸겠다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설교자의 머리와 영에 주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임하여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 말씀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이미 그런 역사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순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성령이 주님을 도우셔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훈련받고 기도하는 모든 행위의 목적은 오직 하나,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을 들으면, 성령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오직 순종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종으로 귀착(歸着)됩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순종으로 결론 나야 합니다. 성령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런데 목적을 분명히 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깊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순종이 깊어집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순종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말은 적게 하시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 가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들고, 얼마나 많은 역사를 일으키는지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변혁은 순종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을 틀어막고 있는, 모든 어둠, 저주 등이 순종을 통해 해결됩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 아들의 순종은 불순종으로 인해 고통 받던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으셨습니다.
지난 날 우리 안에 있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불순종의 뿌리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며 살았던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순종의 영이 여러분을 지배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말씀 앞에 거꾸러지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 말씀에 귀 기울이고, 힘들고 어려워도 순종해보세요.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No”라고 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오늘 이후로는 “Yes”라고 반응하셔서 묶인 것이 모두 풀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신앙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불순종의 영이 떠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것까지만 믿음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해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순종으로 증명해야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키워드는 순종입니다. 순종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편에서 99% 순종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불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인생이 도약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순종이 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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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Friday Night Sermon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눅11:1-4절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불이 붙으면 그 기도의 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를 배우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 기도란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라는 것은 크신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기도는 배우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잘 배워서 실천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1.귀한 존재가 됩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지 아니할 때는 창피를 당했지만 기도를 할 때는 전혀 다른 사 람이 되었습니다. 행5:15절에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들도 열심히 기도하면 이런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기도만큼 빨리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존재 의미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왜 달라집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쓰시니까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천한 쓰임이 아니라 귀한 쓰임을 받게 됩니다.

2.소원이 성취됩니다. 마15: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 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마15:23절에 "예수는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귀찮다고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크다고 하면서 소원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을 보시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시20:4절에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21:2절에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소원이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그 소원이 꼭 성취될 것입니다.

3.가나안 여자는 기도로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마15: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돈을 가지고 소원을 이루었던 것이 아닙니다. 인맥을 가지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의술이나 다른 방법이 아니라 기도를 알았고 기도를 배웠기에 소원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배우고 바로 하는 자에게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시37:42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145:19절에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4.한나는 기도로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한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한나는 아들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산부인과를 찾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배우고 바로 사용하는 자에게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악할 찌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이라고 했습니다.이 말씀은 주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소원을 성취해 주시는 것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바로 배우면 바로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5.문제가 있을 때 답을 빨리 찾습니다. 단2:18-19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했습니다.

6.기도를 배우면 힘있는 사람이 됩니다. 시86:16절에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 틀림없이 힘을 주십니다. 힘을 얻어본 경험이 있는 자는 알 것입니다.

영력도 주시고 체력도 주십니다. 수1:5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면 당할 자 없는 힘을 주십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힘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힘을주십니다. 기도의 코드를 꼽으면 힘이 솟아납니다. 단2:46절에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하자 어떠한 힘을 얻었습니까?

7.기도를 배우면 문제해결을 받습니다. 시109:4절에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기도로 해결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늘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을 통하여 기도로 해결하는 하나님에 참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8.인간 관계를 기도로 해결 해야 합니다. 시109:2절에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거짓 혀와 악한 궤계를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로 해결할 뿐이라는 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9.자기의 나갈 길을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방해와 자식의 방해와 주변 나라의 방해가 있어도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시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 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가는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10.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 물어 보고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삼상23:2절에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물어보고 해결했습니다. 삼상23:4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묻자온데"라고 했는데 또 물어보고 기도를 했 습니다. 오늘 우리가 삶 속에서 첫째로 해야 할 것은 기도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진행해야 합니다.

11.기도를 배우면 승리 합니다. 기도로 다니엘이 승리했고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승리했습니다.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시118:7절에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했습니다.

고전1:27-28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고전1:29-31절에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단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은 나약한 인간입니다. 주 안에서 믿음으로 자유함을 누리며 우리의 삶 자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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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도적질하지 말지니라 Friday Night Sermon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20:15절)

 
제8계명에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재산을 불의한 방법으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9:11절에 "너희도 도둑질하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도둑질이란 무엇입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입니다. 남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는 것입니다.

1.부당한 방법으로 부(富)를 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정당한 방법에 의한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로서 재산을 축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도 없이 타인의 재산을 훔친다거나 그들이 노력한 대가를 가로채는 것은 분명 죄악입니다.

이 죄악을 가리켜 우리는 도적질이라 부릅니다. 사실 도적질은 지구상의 어느 사회에서도 금지되어 있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기본적인 규범으로 제시하신 십계명 중에 도적질을 금하는 규정을 두심으로써 도적질이 얼마나 악하고 무서운 범죄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도적질은 자신의 만족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범죄입니다. 도적질은 인간의 성실과 근면한 노력과 진실된 땀의 의리를 앗아가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당한 방법으로 얻어진 이익에 즐거워하지 말고 성실히 흘린 땀의 대가로 주어지는 결실을 기뻐할 것입니다.

2)이웃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1)이웃의 소유를 내 수고 없이 가져오는 것을 우리는 끊어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노력 없는 대가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고한대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2)저울추를 속이며 장사하는 것도 도적입니다. 품꾼의 삯을 속인다거나,

되를 속이고 저울추를 속이고 장사함은 도적 행위입니다. 장사는 신용으로 해야 합니다. (3)관리들이 도적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뇌물 받는 것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관리들이 뇌물 안 먹는 청렴한 관리의 풍토가 조성되지 않고는 이 사회가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신 없이 한국에 새 소망 찾기 어렵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수고하지 아니한 뇌물을 먹지 아니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자기 자신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1)인색함은 도적입니다. 전6:2절에 "어떤 사람은 그 심령에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富饒)와 존귀(尊貴)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음으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재물을 주었습니다.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인색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질이나 건강이나 영향력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살 동안 내게 맡겨 주신 청지기적 직분입니다. 내 것이라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색함으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를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와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허비함으로 도적질하는 경우입니다. 탕자가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올 분깃을 다 받아 객지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다 소비했습니다. 온전히 잘못 사용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허비했다면 도적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2)게으름이 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가 계속 이 땅에서 번성해야 하고 충만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게으르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다하지 못하면 도적질 행위가 됩니다.

2.도적질이란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옛말에 "돈이면 호랑이 눈썹도 베어 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금전 만능주의를 비꼬아 표현한 속담입니다. 오늘날 이 속담처럼 배금주의에 깊이 물든 인간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으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타인의 삶을 무참히도 짓밟고 있습니다. 자신의 풍요한 삶을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행은 비단 경제적인 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타인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악질적인 범죄 행위가 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절대 금하신 도적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적질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레 9:13)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절대 법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웃의 생명을 해치는 도적질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신24:7절).

제 8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는 조심해야 할 일과 힘쓸 일이 있습니다. 1)조심해야 할 것은
첫째는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연히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하고 절약 정신으로 알뜰한 살림살이를 해야겠습니다. 둘째, 남의 부채에 조심해야 합니다.

남에게 빚은 될 수 있는 대로 지지말고 외상 거래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피치 못해 빌린 돈을 속히 갚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과도한 욕심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나 욕망과 야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욕망은 삼가야 합니다.

2)힘쓸 것은, 첫째, 자립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부모를 의지하며 살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자립토록 힘써야 합니다. 둘째, 선한 일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법에 어긋나는 사업,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사업은 피해야 합니다. 셋째, 근면·정직·인내 이 세 가지만 있으면 한 푼 없어도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의식주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넷째, 나만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까지 도와 주는 정신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것이 많지만 이 시간 우리는 제 8계명에 관한 죄를 회개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리고 성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뵙고 회개하면서 한 첫 말이 "내가 남의 것 탐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나이다 그리고 내 재산의 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3.도적질은 중복된 죄가 됨으로 금해야 합니다. 레7:8-19절에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양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이방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행위로는 하나님을 진노케 하면서 성전을 자랑하고 구원을 얻었다고 자부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마음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상과 더불어 섬김을 받지 않으시며 불의와 죄와 어두움과 같이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이같이 타락된 근본적 이유는 바알에게 분향하며 알지 못한 다른 신들을 좇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삶의 불행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거짓되고 악한 심성 때문입니다. 인류의 행복은 참된 사회 규범이 시행되는 곳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물질과 인간의 능력과 자연을 우상으로 섬기고, 타락과 거짓된 생활 악행을 다 범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 예배를 드리며 고백하니 그들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 중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며 행위로는 배반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남을 미워하고 욕하는 것은 살인죄입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죄입니다.

세례 받을 때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거짓 맹세를 한 죄입니다. 세상 권력, 직장, 자녀, 남편,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지배보다 그것들의 지배를 더 받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입니다. 어찌하든지 도적질이란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에 따르는 여러 가지의 죄가 부과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조심하되 먼저 물질(物質)관에서 조심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4.소유의 개념을 바로 알 것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모 든 국가들은 개인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소유권은 자신이 땀 흘린 노력의 결과로 얻은 것이나 혹은 상속이나 타인이 증여한 것이거나 그 모든 물질을

모두 각 개인에게 그 재산의 소유권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재산의 소유권은 사회적 계약에 의해 법률로 명시되어 있지만 그 근원적인 개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근본적인 구조를 통하여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재산은 노동의 산물인데 노동은

인간의 생존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창3:19절). 그러므로 노동과 함께 그 소산물의 소유를 주셨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로 미루어 볼 때 재산의 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잠16:26; 엡4:28; 딤후3:10절). 세상의 끝은 일시적입니다. 참된 부요는 하늘나라에만 있습니다.

이 세상은 쉽게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고 감사의 은사를 키워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인의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남을 구제할지언정 구제 받지 말게 하시고 우리 자손이 꾸어 주지만,

꾸임을 받지 말게 하소서 나와 우리 자손들이 남을 대접할지언정 대접받지 말게 하시고 남을 주면서도 우리의 창고가 넘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남을 주면서 사는 축복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는 인생이 그들은 귀한 인생임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의 부요
를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날마다 살아나가는 아름다운 생애가 우리 앞에 열릴 적에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이 더욱 속에 깊어질 줄로 확신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의 심령 위에 축복으로 임하는 시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5.도적질의 원인입니다. 사람들이 도적질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인간의 마음 속의 충동에 따른 내적 원인과 외부에서 가해지는 외적 원인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내적 원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의 것을 훔치게 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요인을 살펴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불 신앙으로 말미암은 도적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 6:25-34)에서 우리에게 먹고 마실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까지도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더욱 귀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공급하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지 못하므로 자신들의 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도적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주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주관자이시라는 것을 이론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염려에 의한 도적질은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2)탐욕으로 말미암은 도적질이 있습니다. 좀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

허영에 사로잡힌 마음은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차 도적질을 하게 됩니다. 2)외적 원인입니다. (1)타인에 의한 도적질이 있습니다. 세계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약육 장식의 지배 원칙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강한 힘의 소유자가,

약한 자의 힘을 돕지 못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약한 자를 도둑으로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2)사단에게 지배된 도적질이 있습니다. 사단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을 파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단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여 지배하려는 도둑의 가장 큰 우두머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원인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양심에 조금도 부끄럽지 아니하도록 매사에 조심하며 살 것입니다. 그 조심 가운데서 물질에 청렴결백하여야 합니다.

6.도적질 않기 위해서의 자세입니다. 우선 자기 재산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에 충실해야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비교하지 맙시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특권은 우리의 소유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여건이 내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데 축복이 있습니다. 격언에 "마귀가 번 것은 무엇이든지 마귀의 뱃속으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모든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살전4:6절)고 권고했습니다. 게으른 자는 일종의 도적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정직하게 일해야 합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나의 소유, 가족, 재산, 시간, 재능,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일만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도적질은 인간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도 도적질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것을 훔친다"고 함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영광과 시간 등을 인간이 자의(自意)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규례를 제시하면서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리지 않는 것이 곧 도적질이라 규정하셨습니다. 말3:8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적질보다 더욱 심각하고 근본적인 죄악입니다. 이처럼 만홀히 여기는 자는 "아간"처럼(수7장), "가룟 유다"처럼(요12:6절), "아니니아" 부부처럼(행5장)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십일조를 철저히 할 것이고, 인간 관계에서는 물질에 대한 정확한 계산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7.물질에 정직하지 못하면 주의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고전6:10절에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신앙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는 아무렇게나 하여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무율법주의적 이론을 작성하여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허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지니 즉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하는 자나,

술 취한 자나 토색하는 자마다 도저히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제를 속이고 또 서로 송사하며 또 분쟁하니 이러고서야 어찌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가 있으리요. 물론 고린도 교회의 신자 전체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으로 인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의 세례를 받아 과거의 모든 불의한 죄를 깨끗이 사하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성결의 생애에 나아가는 자도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결한 생애를 가져야 할 성도들이여! 불신자와 동일한,

표준의 도적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나 거룩한 도덕적 생활을 힘쓰는 중에 세상의 물질관이 청렴결백할 때에 영원한 기업까지 받아 영원한 물질을 소유하며 누리며 살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라면 적어도 남의 재산이나 타인의 삶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오직 자신의 안일과 욕망만을 충족시키려는 극단적인 욕심을 버립시다. 깨끗하고 성실히, 그리고 땀 흘리며 이 세상을 삽시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성도가 추구해야 할 바입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도적질이란 사회·윤리적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도 분명히 죄악된 행위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심판이 있습니다. 죄악된 행위인 도적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1)우리들을 더럽게 합니다.(마15:19-20절). (2)도적질의 행위만큼의 처벌을 당해야 합니다.

그 처벌은 돌로 맞아 죽은 아간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수7:21-26절). (3)반드시 배상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배상할 것이 없으면 자신의 몸까지라도 팔아서 배상하였습니다. 출22:1-4절에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깊을지니라.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 할 것이요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 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심판에서는 도적질 당한 자의 손해 이상으로 자기에게도 고통이 따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을 믿음의 사람으로 솔선 수범하여 앞서 지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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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어린양의 피를 좌우 설주에 뿌리라 Friday Night Sermon

어린양의 피를 좌우 설주에 뿌리라

(출12:1-22절)


 
성경학적으로 사람에게는 표가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의 표입니다. 그것은 가인의 표요(창 4:15절), 둘째의 표는 영생 곧 구원의 표징입니다. 셋째는 아벨의 표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의 표입니다. 그것이 구원 얻는 자들의 이마에 새겨져 있습니다.(계7:13; 14:1절).

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구원의 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피입니다. 출12:13절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피는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의 표적입니다. 어떤 피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바로 이러한 효력을 지니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희생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 효력의 피에 대해 살펴보면서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대속의 상징으로서의 피입니다. 피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표적이나 어린양의 입장에서는 표징입니다. 즉 이는 이스라엘을 대신한 대속적 죽음을 나타냅니다. 히9: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 뜻을 찾아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구약 시대에는 피는 정결케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9:13절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피는 죄 사함을 얻게 한다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짐승의 피가 죄를 속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레7: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피만이 죄를 속하고 사해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죄가 사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는 생명을 죽이는 병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만이 죄를 씻어 낼 수 있고, 죄의 병균을 죽일 수 있고, 죄의 권세를 정복할 수 있기 때문에 피 흘림이 없이는 무죄하고 고귀한 생명의 희생의 피가 아니면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사해 줌으로 죄에서 구원해내기 위하여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의 양심을 정결케 하며 인간의 주홍 같은 붉은 죄, 먹 같은 검은 죄를 씻어내며 정결케 하며 깨끗이 사함을 주어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엡1:7; 요일 1:7; 벧전1:19절).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의 언약만을 믿을 것입니다.

본문7절에 그 양의 피로 그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왜 피를 바르라고 했습니까? 13절에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나오는데 사람과 생축의 첫 태생을 다 죽이게 되는데 이때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재앙이 그냥 넘어가고 발라지지 않은 집은 재앙이 임하여 첫 태생이 다 죽게 됩니다.

이 때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았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에는 재앙이 임하여 첫 태생이 다 죽는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는 다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예표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양의 피를 발라 놓으면 구원받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마음의, 문설주에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마음에 바른 자는 다 구원을 받습니다. 피를 안벽 부분 즉 보이지 않는 곳에 바르면 안 되고 반드시 밖에서,

제일 잘 보이는 데 문설주에 바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즉 자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생활을 숨기면 안 됩니다.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롬10:9-12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2.하나님의 약속에 의거한 피입니다.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약 속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13절). 실상 어린양이 흘린 피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볼 때에……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 피는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고 생명을 보존케 하는 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합니다. 사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오셨고 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믿는 사람은 죽지 않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요6:53-56절).

따라서 우리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어린양이 구원의 대속 물임과 또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임을 믿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피가 됨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유월절 어린양은 우리의 영원한,

대속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사53:7; 요1:29절). 이사야는 모든 선지자 가운데 가장 많이 고난의 진의를 발표하였는데 그가 찔리고 상한 죄의 대가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롬6:23절에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값이 있는 이상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갚지 않으면 그 값이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으로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의 죄로 인함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고개 숙여 감사함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3.흠 없고 순전한 피입니다. 유월절 희생으로 제정된 짐승은 어린 양 중에서도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5절)이어야만 했습니다 문학적으로 양은 순결과 온유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따라서 양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내는 데 매우 적절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 흠이 없고 순결한 어린양의 흘린 피는 인간을 대속하고 구원하는 재료로 사용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양의 피가 의미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역시 완전하고 순전한 피입니다.(벧전1:19절). 아무리 큰배라도 작은 구멍 하나로 가라앉는 것처럼 구원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께 만일 흠이 있다면 전 인류를 구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피입니다. 히7:26절에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신분을 재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거룩하지 못합니다. 거룩하지도 못하면서 거룩한 것 같이 모양을 내는 외식하는 자도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꽤 많이 거룩한 척 했습니다. 오늘날도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 자기만이 잘 믿는다 하는 자들이 거룩한 척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거룩합니다. 시16:10절에 "주의 거룩한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속한 그리스도인들도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이름과 같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예수님은 악이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성품으로나, 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온전히 선하신 분입니다. "선하다"는 말 가운데는 "나쁜 것이란 추호도 없고 구부러진 것이 없고 참 좋으신 분,

진실하시고 정직하신 분, 사랑으로 충만하신 사랑의 화신"이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된 사람들도 예수님을 닮아 악이 없어야 합니다. 온전히 선해야 합니다. 진실과 정직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3)예수님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세상에 오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출 생시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되었으리만큼 원죄가 없고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 4:15절). 죄가 없기 때문에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양이건 염소이건 송아지이건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과 허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죄와 허물이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담당하는 속죄 제물의 자격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 죄인이지만 무죄하신 예수님 앞에 나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 씻음 받은 횐 옷을 입고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사망의 위험을 모면하는 피였습니다. 출12:29절에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 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치시매"라고 했습니다. 애굽에게 행해진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은 장자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에 속한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그 첫 소생이 죽음을 당하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재앙을 모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어린 수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그 재앙을 피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유월절이라 부릅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 구원의 모형이며 가장 선명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유월절의 희생인 어린양과 그 피에 나타난 교훈이 그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만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상징이며 구속의 예표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절)라고 하였는데 그는 이사야의 성격에 대한 분명히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상징적인 모형이 구약에 많이 나타나 있지만 유월절 사건만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잘 예표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히9:11-1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피는 생명이므로 피에는 구속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9:22절에서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벧전1:18-19절에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히9:14절).

피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구원에는 이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문설주에 피를 발랐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 심령에 그리스도의 피를 발라야 합니다. 우리가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한 것도 많은 성도들과 우국지사들의 피가 이 땅 위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과 성직자들이 희생을 당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피가 이 땅에 뿌려 줌으로 신앙의 자유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5.유월절 양의 피입니다. 1)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입니다. (1)어린양의 피입니다.(3절).
(2)일년 된 수양이었습니다.(5절). (3)흠 없는 어린양이었습니다.(5절). (4)4일 동안이나 구별시킨 양이었습니다(6절). (5)해질 무렵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습니다.(6절).

(6)이스라엘 회중에게 잡혀 죽은 양입니다.(6절). (7)뼈 하나라도 꺾임을 당하지 아니한 양이었습니다.(46절). 2)뿌림을 당한 어린양의 피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그 피를 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1)그릇에 담아서 우슬초 묶음으로 뿌려지는 피입니다(22절).

(2)문설주 좌우와 인방에 뿌려지는 피입니다.(7절). (3)반드시 뿌려져야 할 피입니다.(7:
22-23). 이유는 그것이 구원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설주와 인방의 피를 보고 하나님의 사자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피를 뿌린다" 함은 정결과 보호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먹임을 당할 어린양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죽어서 피 뿌림을 당할 뿐 아니라 먹히움이 되었습니다. "먹는다" 함은 "삶"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 운동"을 뜻합니다. (1)가족 수대로 먹어야 했습니다.(3절). 그것은 개인 개인의 출애굽입니다. 구원은 개인 개인의 고유한 구원입니다.

누구든지의 구원입니다.(요3:16절). 그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냅니다. (2)불에 구워 먹어야만 했습니다.(8, 10절). 이는 예수의 구원은 극에 달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통에서 주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마27:46-47절). 예수는 불을 붙이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는 이 불이 붙기를 원합니다.

이는 십자가 수난의 고통을 불에 비유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속론적(십자가)인 신앙을 가져야 함을 뜻합니다. 결코 날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9절). 삶아서도 안 됩니다.(출2:9절). 십자가의 피(불)와 성령의 불을 통과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3)완전히 먹어야만 했습니다.(10절).

남는 것이 없이 완전히 다 먹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완전히 신앙함을 뜻합니다. (4)즉시 먹어야만 했습니다.(10절). 아침까지 미루거나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그 방에 출애굽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29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오늘의 구원이요, 지금의 구원입니다.

(5)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만 했습니다.(8절). 고난의 의의를 되새기면서 먹으라는 뜻입니다. 애굽에서의 고난, 그 고난에서의 해방을 위한 어린양의 죽으신 고난을 씹으면서 먹어야 합니다. (6)출애굽 자세로 먹어야만 했습니다(11절).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만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십자가의 멍에를 메고 예수 따라 행군할 준비를 뜻합니다.

6.유월절 양의 피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 왕을 굴복시키시기 위하여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은 죽음의 사자를 보내사 애굽의 가정에서 장자와 처음 낳은 새끼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재앙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서,

유대인의 집에서는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유대인의 집 앞에 이르러서는 문설주에 피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집을 건너갔다고 해서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만일에 문설주에 피가 없었다면 유대인의 집에도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곧 유월절 어린양의 피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된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을 믿습니다. 롬5:21절에 보면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사망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광복절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잊어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유와 주권을 찾기 위하여

흘린 순국 선열들의 피가 있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흘린 6·25동란에서 희생된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피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유대인이라면 유월절 양의 피를 잊어서는 안 되고,

참된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피를 잊어서 안 되듯, 이 참된 한국인이라면 순국 선열들이 흘린 피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7.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죽음의 재앙을 고지(告知)하 시면서 곁들여 "어린양의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13절)라는 구원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근거는 히브리인이냐 아니면 애굽인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판가름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어린 양의 피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 역시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의 피입니다. 곧 예수께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히 9:28) 그 피는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의 피가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에게는 어떤 환경이나 신분이나 인종이 문제가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이에 대하여 살게 하는(벧전2:24절) 그 능력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표적을 믿고 받아들인 집만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구원의 표적인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의 피를 믿음으로써 그 피를 마음의 중심에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피를 믿을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어 주셔서 심판과 멸망의 칼날이 넘어가게 됩니다. 광야의 놋 뱀은 물뱀의 독을 치료하는 구원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이것을 믿고 바라본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보혈은

온 세상이 죄를 이기고도 남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야 합니다.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는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피가 집에 있고 그 피가 표적이 되고 그 피가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를 넘어가게 하고 그 피가 재앙에 멸하지 않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그 피가 이렇게 구원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 피가 해방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 피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히12:1절). 그 피는 대속에 의한 구원의 요건이 된 것입니다. 그 피는 뿌리는 방법을 통하여 속죄의 효과를 나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피는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되어지도록 한 것입니다. 그 피는 이스라엘 역사의 신기원이 되었습니다.

그 피는 해방 운동의 출력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양은 선민을 위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선민을 위하여 피 뿌림을 당했습니다. 그 고기는 선민을 위하여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 피는 사망에서 구원되는 생명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피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셨습니다.(고전5:7절). 여기에 구원 종교의 특색이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 종교의 자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 종교의 본질이 있습니다. 예수의 그 피가 곧 내 생명, 내 구원, 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찬송이나 기도는 기독교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는 예배나 설교는 기독교의 예배나 설교는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전도나 사랑의 구제는 예수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유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1:18-19절).

8.말씀을 정리합니다. 장자 사망 사건은 과거 애굽에서 있었던 일회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은 이를 한 해에 한 번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 희생의 피를 체험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피 값으로 영생을 얻었으므로 그 영생의 삶을 오늘과 연결시켜 성숙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의 기적을 체험한 구원받은 성도의 바람직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삶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붉은 피를 흘려주신 그 피를 바라보면서 험악한 이 세상에서 넉넉한 승리를 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의 자랑스러운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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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성령을 속이는 사건 Friday Night Sermon

성령을 속이는 사건

(행5:1-11절)

 
우리들이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할 때 어떤 믿음과 정신으로 하느냐가 참으로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의 열정과 감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깊은 감동과 은혜 속에서 일하게 합니다.

본문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자리에서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기적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 같은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1.본문의 내용 줄거리와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내 놓을 때 판 금액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 내놓았습니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금액의 일부를 감추는 행위는 "사탄이 아나니아 속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는 결국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듣고 있는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죽게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메고 가서 장사지낸 이후 3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그후에 그의 아내 삽비라가 자기 남편이 이미 죽은 줄 모르고 들어옵니다. 남편인 아나니아가 금액의 일부를 감출 때 아내도 알았다고 합니다. 그 때 아내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이 이게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베드로는 책망합니다. 왜 주의 영을 시험하러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도 남편처럼 너에 시체를 메어 나가리라"고 하자 베드로 앞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온 교회는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초대 교회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빨리 죽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교회 나올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헌금하고 봉사한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지 장난 삼아 하나님을 놀린다면 자칫하면 내 생명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긴장감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들을 두렵게 하는 말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을 협박하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함부로 해석해서 협박하는 그런 말씀으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교회 당회장 목사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당회장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렇게 된다던가 또 헌금을 반드시 목사 발 앞에 내 놓아야 한다고 해서도 안됩니다.

또한 교회 건축헌금을 작정하는데 이용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아픔을 상담해 왔습니다. 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한 이후 마침 집을 팔아 이사하게 되어서 목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정헌금의 일부를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통해 치는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 교회에 붙어 있을 수가 없어서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 아나니아 삽비라부부에 해당된 그런 못된 신앙인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는 잘못된 적용을 낳고 그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돈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대로 헌금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물론 교회 헌금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하나님의 교회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초대교회를 설립케 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성령께서 주관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십니다. 이 일에 사도들이 쓰임 받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킴으로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그 증거와 그 증거에 따른 반응과 삶의 변화들은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셨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곧 믿는 모든 무리들로 하여금 한 마음 한 뜻으로, 물건과 재물들을 서로 나누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뿐만 아닙니다. 행4:33-35정을 보시겠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어진 일들입니다.

초대교회에 활동했던 사도들이나 교회는 그 활동에 필요한 재정적인 보충이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36절에서 말하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36절에 보시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을 재정적으로, 얼마나 도왔으면 그의 별명을 권위자라고 했겠습니까? 이 권위자라고 했을 때 권은 권할 권(勸)자에 위로할 위(慰)자입니다.

요셉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은혜를 받고 땅을 팔아 낸 헌금이 초대교회에 상당히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아 권위자, 혹은 위로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므로 다른 사람에게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영광과 칭송을 받는 것이 탐났던 모양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밭을 팔아 그 돈을 내면 교회에서 칭찬을 받고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돈으로 교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자신들도 그렇게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부부가 하는 행동과 생각이 죽을 만한 죄목에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작정한 금액의 반만 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죽음을 당할 일입니까? 여기서 성령께서 돈의 액수를 가지고 트집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의 결과 은혜를 받아 그분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광과 칭송이 탐남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봉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3.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유지되게 하 는 것을 추방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흉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봉사와 헌금생활도 흉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런 흉내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직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통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자신이 칭송을 받고 싶은 생각, 즉 그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특징은 항상 현실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할 때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돈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기록한 누가는 누가복음 22: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행동입니다.

우리들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마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지 말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멋대로 살도록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과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그래서 마태복음 26: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시험을 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자신이 과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니면 지금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거부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마귀의 유혹으로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7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 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승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우리들의 일차적인 관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 속에서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하는 어떤 규칙들을 찾아내어 그 규칙들을 신앙의 원리로 삼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그런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신앙의 생활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그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설명되고 있는가에 대한 분명한 진리가 설명되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들에게 늘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기룟유다와 같이 이들 부부들도 그들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탐욕과 허영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까지 이용하고 사도들까지 이용하겠다는 그들의 사탄적 발상에 철퇴를 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짐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에 구경꾼으로 다닌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어렵게 되었는데도 불보듯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정한 사람입니까? 과연 그런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크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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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 Friday Night Sermon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

(행3:1-10절)

 
사도행전 1장과 2장은 어떻게 해서 사도행전이 가능하게 되었고 사도행전이 무엇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인가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 세가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성령 세례를 약속해 주셨고, 둘째는 복음이 유대인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이방인에게 증거될 것을 약속해 주셨고,

세번째는 예수님께서 재림,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2장에서는 1장에서의 약속대로 성령 강림을 통한, 성령세례의 역사가 오순절에 나타났고 방언을 통해서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게 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사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증거와 그 반응을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게 하신 놀라운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본문의 전후 문맥입니다. 본문 3:1-10절 말씀은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사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1장과 2장의 말씀에 대한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라는데 일단 관심의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본문 사건만을 가지고 묵상한다면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의 의도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이미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에 이르기 까지 예수의 복음이 증거될 것을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런 약속을 해 주시면서 그 복음의 성격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라는 형식을 통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3장에 와서 그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께서 권능으로 예수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고 선포되게 합니다. 이같이 성령께서 하시는 이 일은 천상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 지상의 교회와 온 땅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파송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같은 성령께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으로"(행1:22)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 1:8절에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3장은 어떤 형태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일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사용하시되 제자들의 도움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베드로는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3)고 외칩니다.

2.기적의 사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사건은 그야말로 놀라운 기적의 사건입니다. 감히 우리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놀랄만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기적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이 믿음만 있으면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들도 그런 믿음만 있으면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도 복음이 증거되는 곳이라면 당연히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 기적의 의미와 목적을 살펴보 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 보시면 많은 병자와 귀신을 고쳐 주시고 많은 권능과 이적들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기적들이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병에 걸리지 않고 귀신이 꼭 쫓겨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이런 사건들을 그런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에서 그런 기적들을 도입하고 그런 기적들을 통하여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계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깨닫는 것도 중요 하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적용" 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기적은 권능을 베푸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시겠습니다.

마 11:20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권능은 이적을 통한 권능입니다. 그같은 권능을 베푸신 목적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지 않는자들에 대한 심판이 목적입니다.

본문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권능과 이 기적은 11절 이후에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해석해 주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회개를 촉구해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여전히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주후 70년경에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대로(요2:19) 성전 역시 무너졌습니다. 3:1에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라고 합니다.

아직도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 성전에서 하루 두번씩 예배와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오전 9시와 오후 3시입니다. 그때 예배란 제사를 의미합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제단 가까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제사장은 그 제단위에 놓은 양을 잡아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게 됩니다.

제물을 잡는 예식을 마친 후 예식을 집전하는 제사장은 제단을 떠나 성소로 들어갑니다. 제사장이 제단을 떠나 성소로 들어가 있는 동안 사람들은 개인기도에 들어갑니다. 누가복음 18:9절 이하에 기록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당시에 모든 역사와 구원은 성전안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상적인 이야기가 뒤집혀 지는 순간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은 성전 안이 아니라 성전 마당 밖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로부터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그 앉은뱅이가 성전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베풀 수 있는 "금과 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절)고 할 때 그 앉은뱅이가 곧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전과 제사는 유대인들에게 독점물이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만이 구원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원이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증거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성전이 신앙의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성전은 허물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일어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제 그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임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임한다는 그들의 상식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2:21).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가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었습니다.

4.여전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도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병마와 귀신을 지배하시고 다스렸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도 계속 성령님을 통하여 병마와 귀신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또한 당신의 택한 자녀들과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키심으로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이방인들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어진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갖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고 꾸짖으면 사탄은 한길로 들어왔다가 일곱길로 도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현실에 봉착하였을 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므로 축복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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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기도란 무엇인가? Friday Night Sermon

기도란 무엇인가?

"마 7:7-8절

 
우리들이 이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달라고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필요에 따라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확신의 농도만큼 기도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1.기도를 하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6: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는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구약성경은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고 대신 그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죄용서를 받곤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상12:19절에 보면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자신들을 위해서 제사장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만인 제사장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우리는 응답을 받습니다.

요14: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요15:16절에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행사를 위해서 경비를 청구합니다. 청구서의 내역을 다 쓰고 나서 맨 나증에 청구자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청구서를 낼 때 그 내역을 아뢰고 마지막에 청구자를 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청구자는 누구여야 하느냐는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은 청구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할 때 그 기도를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2.기도를 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고 나면 그 기도에 대한 결과는 어떤 형태로든 지 응답을 받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때와 시기를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가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 응답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를 많이 할 수록 많은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내 실적과 내 공로가 많기 때문에 그 나의 공로를 보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많이 의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어린아이들과 같은 신앙과 믿음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많이 기도를 해야 많이 응답해 주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린 자녀들 중에도 가만히 보면 부모님께 자꾸 달라고 하는 이들이 더 많이 받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꾸 달라고 할 때 화를 내다가도 "내 새끼니까 나에게 이렇게 달라"고 보채는 구나 하고 그 아들부터주는 법입니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사랑스러운 관계라면 자꾸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나는 못받더라도 너나 많이 받아라는 양보심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신다는 그 사실을 제대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 있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확신 있는 믿음이 없다거나 그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을 위해서 우리는 더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자만이 기도합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고 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따라서 기도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바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가만히 보면 언제나 기도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생깁니다.

3.기도의 3단계의 방법과 3단계의 응답의 축복이 있습니다. 마7:7-8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신앙이라면 누구나가 다 암기할 정도로 친근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3단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구하라. ②찾으라. ③두드리라. 이 3단계 기도의 방법에 따라오는 3단계 응답의 축복은, ①구할 때 얻는다.

②찾을 때 찾는다. ③두드릴 때 열린다. 종합해 보면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립니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를 말씀합니다. 또한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찾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자신을 향하여 찾는 자를 버리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찾으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하게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시27:8절에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암5:4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암5:8절에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은 이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전도에 대해서 기도를 한다면 "한 달에 몇 명을 전도하고 싶습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이런 기도를 간절히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누구에게, 어떤 자에게 전도할 것인가를 묻습니다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해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대상까지 확신을 주십니다. 그 때 내가 전도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기도하면 내 마음 속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찾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찾습니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면 분명코 문이 열리는 법입니다. 찾기만 찾고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드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들어줍니다.

4.기도 응답의 조건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요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 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15:1-6절까지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누구를 상징하고 있는가?

예수님이십니다. 가지는 누구입니까?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내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나는 거기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나무와 가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붙어 있는 관계입니다. 어떻게 붙어 있는 관계입니까? 장난감이나 어떤 기계가 연합된 것이나,

조립으로 조립되어져서 붙어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믿음으로 간구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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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수가성 여인의 구원 Friday Night Sermon

수가성 여인의 구원

(요4:1-54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 언급하셨고, 그 여자는 그분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하게 정리돼야 할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의 죄의 문제, 예배, 메시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문제 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녀와 더불어 이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말씀하셨습니다. 본 장은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부분(4:1-42절)과, 귀족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베푸신 부분(1:43-54절)으로 구분됩니다.

어떤 면에서, 두 부분 모두 기적을 내포하고 있는데,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위한 "먼 거리에서의" 치료만큼이나 놀라운 것입니다.

1.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1-42)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혼혈인이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서 배척되고 증오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경쟁하느라 그들 자신의 종교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4:20-24절)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4:25절).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는데"(4절), 이는 하나님께서 죄 많은 한 여인을 위하여 그녀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서 생수를 발견하게 되는 일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에 대한 기록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각기 다른 단계들을 보게 됩니다.

1)"당신은 유대인으로서"라고 했습니다.(1-9절) 유대의 랍비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호의를 요청했다는 것은 그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서 유대인이라는 사실 이상의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죄인은 그리스도에 대해 장님이며, 영원한 것보다는 단지 물을 얻으려는 것과 같은 생활에 관한 일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2)"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10-15절) 예수께서는 10절에서 그녀의 무지함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과, 그녀의 면전에 있는 구세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생수(생명수)를 말씀하셨으나, 그 여인은 문자 그대로의 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죄인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얼마나 잘 혼동합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인 탄생으로 생각했었으며(3:4절), 제자들조차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인 떡으로 생각하였습니다.(31-34절).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세상 것들은 만족을 주지 못함과, 그리스도가 없이는 사람들이 항상 "다시 목마를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눅16:19-31절은 이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규명합니다. 이 생에서 쾌락의 갈증을 느꼈던 부자는 지옥에서조차도 다시 목말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생수가 신자의 속에서 솟아나서, 그를 계속적으로 소생시키며 만족시킬 것을 약속하셨는데, 여전히 이 여인은 혼동하면서 그 물을 요청하였습니다.

3)"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16-24절) 비록 혼동하고는 있었으나 생수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었던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죄에 직면하였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녀의 양심을 자극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자신의 죄를 직시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숨기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잠28:13절). 이 여인의 화젯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눈여겨 보시기바랍니다. 오늘날의 회심한 죄인처럼, 그들은 종교에 있어서의 차이점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예배하리이까?" "어느 종교가 옳은지요?"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과, 이 일은 다만 구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구원은 유대인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자신의 죄와,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과, 그녀의 종교적 신앙의 공허함(헛됨)을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4)"내가 그(그리스도)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42절) 이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말씀의 권위에 눈이 뜨인 그녀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녀는 그 동네의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간증을 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신자들의 마지막 간증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본 장에서 제자들에 대해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음식보다도 육적인 음식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피곤하셨고(6절) 목말랐으며, 분명히 배고프셨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것 이상의 영적인 것들을 두셨습니다. 제자들은 식품(유익한 것)을 사 온 반면, 그리스도는 영혼(보다 나은 것)을 구하셨습니다. 사마리아로 올 때에 제자들은 아마도 "여기서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을 겁니다. 이 곳 사람들은 마음이 굳은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의 적이니까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추수하도록 무르익은 들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뿌린 이들과 거둔 이들 모두가 추수할 밭에서 함께 일해야 함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고전3:5-9).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적절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혼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모범을 주목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리우는 개인적인 편견이나 육적인 필요들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그 여인과 우호적인 방법으로 만나셨고, 결정하도록 그녀를 강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명하게도, 그리스도는 대화를 이끌어 그녀의 마음에 효과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그녀에게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개인적이고 애정 있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물과 같은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아, 이것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실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피하지 않았고, 그녀의 필요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2.왕의 신하를 위해 베푸신 그리스도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기적 가운데 두번째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들은 사람이 구원받는 방도와 그에 따르는 결과를 묘사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의 두 가지 기적은 갈보리의 가나에서 일어났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예증하며, 이 장에서 아들을 고치심은 구원이 믿음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 아들은 가나에서 27km떨어진 가버나움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가시기를 원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서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년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가지 않으셨으나 그 대신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 서너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을 터인데 52절의 "어제"라는 말은 그가 가나에서 하루 내내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 소년은 1시에 치료를 받았는데, 그 다음날에야 아버지는 집에 당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제로 믿었음을 나타내는데,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집으로 내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이룰 것을 나는 믿는다." 그 귀족은 분명히 가나에 머무르면서 어떤 업무를 처리한 후,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소유하였습니다.(롬15:13절). 그의 신뢰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들에게서 "당신의 아들이 살았나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언제 치료되었는가를 그들에게 물었고, 그 시각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때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의 온 집안이 그리스도를 신뢰하였습니다.

롬10: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42절에서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무엇인가를 보며 표적과 기사들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단도 속이기 위해 표적과 기사를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셔야합니다.(살후2:9-10절).

만약 당신의 구원이 느낌, 꿈, 환상, 음성 또는 어떤 다른 육적인 증거들에 근거하고 있다면 매우 위험한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믿음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확신을 줄뿐입니다.

요일5:9-13절에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 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 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3.증거 하는 신앙입니다.(53-54절) 1)그 사람은 "자신의 온 집안 사람들"에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과 교훈들을 전해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모두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고 그분께 자신들을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2)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이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부패한 정부 속에서 부도덕한 관리들과 어울리는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조롱과 핍박을 겪을 뿐 아니라 아마도 지위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신앙은 증거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하신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을 알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마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눅8:38,39절에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행16:30-31절에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면 그 속에 예수 새 생명이 있기에 전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다면 자신을 뒤돌아보며 점점하여야 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는가? 나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므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간증하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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