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본문 / 출애굽기 14:10~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병거들을 거느리고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의 군대는 최첨단 병거들을 거느리고 사막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습니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출신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 부딪쳤습니다.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출구(出口)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상황에 부딪쳐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상황을 겪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는데, 얼마 가지 못해서 숨 막힐 듯한 상황에 놓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 막막하고 캄캄하고 답답하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가장 힘듭니다. 이때는 죽고 싶습니다.
이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생각을 합니다. 죽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백성들보다 모세에게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문제가 리더십(leadership)인 모세에게 고스란히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세는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을 상황에 놓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생마와 같습니다. 그들은 노예 출신입니다. 모세가 이들을 데리고 광야를 지나야 하는데, 며칠 가지 않아 이런 아찔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가장 먼저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장 먼저 테스트(test)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보셨습니다.
모세는 백성들보다 더 심한 압박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테스트하셨습니다.

백성들이 흔들려도 지도자가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십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놀랍게도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모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출 14:13).
답이 전혀 없습니다. 캄캄합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릅니다. 최악(最惡)의 상황입니다. 이런 먹구름 속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본문 13~14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만히 서서’와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어려운 입장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돌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도 부족할 텐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공식을 말씀을 통해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입을 다물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이유를 꼽으라고 하면, ‘원망과 불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말로 실패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상황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말 때문에 실패합니다.

언제 원망 불평합니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이 벌어질 때, 원망 불평하게 됩니다. 내가 원한 것은 A였는데, B라는 상황이 닥치면, 원망 불평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내가 기대하고 생각한 대로 인생이 움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움직여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고생하게 됩니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생을 많이 사신 분들은 이것을 삶으로 체득(體得)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원망 불평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기대한 대로 인생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대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돌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을 다물고 성을 돌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들의 말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전쟁에서 인간의 머리와 인간의 지략(智略)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의 지략, 인간의 머리, 인간의 똑똑함이 필요하다면, 전쟁에서 아군끼리 의사소통해야 합니다. 인간의 싸움이라면, 회의를 해야 하고, 말을 해야 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딱 하나, 절대순종만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셔야 합니다.
사람들끼리 의사소통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입을 열고 떠들다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 전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기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말이 주는 폐해(弊害)를 잘 알고 계십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굉장히 파괴적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입니다.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가정과 교회, 민족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이 역기능(逆機能)을 행사할 때가 많습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의 군사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가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입을 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혜로움은 위기의 순간에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움이 오면 말이 많아집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순간에 나오는 말은 다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부정적인 말은 상황을 전혀 바꾸어놓을 수 없습니다. 악화(惡化)시킬 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너희들의 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말라, 하나님의 역사를 잠잠히 바라보기만 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입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로드맵(roadmap)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아가면,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순간 길을 잃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출애굽시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로드맵,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정확한 가이드라인(guideline)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구약중간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침묵기(沈黙期)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암흑기(暗黑期)입니다.
왜 암흑기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이스라엘의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깜깜한 밤과 같습니다. 마치 벼랑 끝을 걷는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대낮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캄캄한 흑암 가운데 길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19:105).

신구약중간기의 침묵을 깨고, 말씀이 터졌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광야로 갔습니다.
도시에 있던 사람이 왜 광야로 갔습니까? 그곳에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내 삶이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임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그 시대나 개인의 삶이나 가정은 끝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으러 광야로 갔습니다.

어두운 시대에서 빠져나오려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때에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이 가득한 곳에서 말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아니면, 사탄의 시험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지금 출애굽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셔서 홍해 앞에 서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곳까지 오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의 힘든 삶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힘든 삶으로 내모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길이 열립니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길은 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잠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하던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내 소리를 죽여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여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잠잠히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나중에 더 크게 폭발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냥 잠잠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위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냥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청(傾聽)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청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침묵의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침묵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밖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온갖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굴에 다 드러납니다. 그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밖으로 말하지 않을 뿐, 속에는 원망, 불평, 분노 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침묵과 경청은 연결되어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비로소 귀가 열립니다. 침묵과 경청은 같이 다닙니다. 침묵하지 않으면, 경청할 수 없습니다. 경청하는 사람들은 침묵할 줄 압니다.

혼란하고 어려운 순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답입니다. 어려운 순간이 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혼란 중에 있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위력(威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합니다.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의 말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혼돈과 공허 가운데 모든 것에 질서가 찾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청은 단순히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듣는 것은 내가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고, 경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경청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경청은 위로부터 임하시는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위로부터 임합니다. 우리가 촉각(觸覺)을 곤두세운다고 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위로부터 임하셔야 우리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임하시는 말씀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임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경청하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같이 듣는 것이 아닙니다. 경청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細微)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인지, 세상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음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경청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없어집니다. 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이 적어집니다. 말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경청하는 사람은 말 수가 줄어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거기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태도가 몸에 익어있습니다. 그래서 대화 속에서도 하나님이 상대방을 통해 어떤 말씀을 주시려는지 귀를 기울입니다.

경청하는 태도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다양한 영역 속에서 여러분에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청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길이 되고, 빛이 됩니다. 그리고 답이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혼돈과 무질서가 질서를 찾게 됩니다.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귀가 복된 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귀는 복된 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않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 걱정하지 않으면 됩니다.
때로는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나는 너와 함께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들려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엉뚱한 것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소음이 굉장히 많이 생깁니다.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소음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잡다한 이론을 들려주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집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많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치고 올라오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굉장한 소음에 시달리게 됩니다.
소음에 시달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영혼은 혼란에 빠져 죽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어디에 귀 기울여야 합니까?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같이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려운 것은 일어난 상황이 아닙니다. 진짜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길을 잃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경청하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가라고 할 때에 가면 됩니다.
서 있으라고 할 때에는 서 있어야 합니다. 서 있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친구를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영적 지도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백부장이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이 답인 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면, 광야에 있다 해도 길이 나며, 말씀이 로드맵이 될 줄 믿습니다.

셋째,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려움이 닥쳤다는 것은 우리가 풀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는 의미입니다. 어려운 현실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현실을 거부하려 합니다. 그리고 빨리 벗어나려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유혹이 찾아왔을 때에는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실 때에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빨리 피하는 것은 답이 되지 않습니다. 도피(逃避)하는 것은 답이 되지 않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오듯이 마귀는 우리를 추격해옵니다. 마귀는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면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허락하신 곳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견디고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서(Stand firm)”라고 말했습니다. 움직이지도 말고,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가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곳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쉽게 생각하고, 어려운 현실을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려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다니엘은 바벨론의 궁에 포로로 붙잡혀가 왕실에서 성장하며 왕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에게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모함과 어마어마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갈수록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버텼습니다. 이것이 정공법(正攻法)입니다.
다니엘은 힘든 위기의 한가운데서 도망치지 않고, 그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다니엘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텼기 때문에, 다니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부르심 앞에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는 좋은 일만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도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시편 23편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시편 23편 1~2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데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칩니다. 4절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나옵니다. 5절에 보면, ‘원수의 목전’이 나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곳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기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경험해야 하는 레슨(lesson)이 무엇입니까?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나아갔지만, 위기가 왔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그때 어떤 레슨을 받아야 합니까? 중요한 레슨입니다.
힘든 상황은 힘든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견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훈련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부활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없이 바로 부활로 가고 싶어 합니다.
애굽에서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해서 무조건 빨리 벗어나려 하면, 삶은 늘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힘들 때는 힘들어야 합니다. 힘들 때에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가 일어나기 직전에 어려움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통의 극점(極點)에 이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한계점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고, 인간적으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순간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워옵니다. 새벽이 되기 직전이 가장 어둡습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면, 새벽이 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어두운 순간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때가 중요합니다.

상황이 악화되면, 인간적으로는 절망적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독일의 패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항복하기 전 날에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만 더 참았다면, 하루만 더 견뎠으면 될 텐데, 그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절망한 것입니다.

힘들 때에는 버텨야 합니다. 뒤에서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옵니다. 앞에서는 홍해가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어렵고 막막하고 절망적이고 답이 보이지 않고 끝장난 것 같지만, 그냥 있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기 직전까지는 죽고 싶을 정도로 목이 탑니다. 그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이 시대에도 버텨내기 영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버텨내기에서 실패하면, 곧 다가올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곧 다가올 새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그냥 갈라지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앞과 뒤에서 압박할 대로 압박하고, 인간적으로는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 가운데로 몰아가십니다. 그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답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만 홍해를 가르실 수 있습니다. 그 기적 이후에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두렵다고 힘들다고 도망치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힘들어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다 끝내고 싶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갈 데까지 갔습니다.
그래도 버티세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때가 곧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넷째, 우리 대신 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버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 보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출애굽 역사는 인간의 계획에 의해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풀어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해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치르는 싸움은 하나님과 애굽이 싸우는 것이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선수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과정에서의 싸움은 대리전(代理戰)입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누구와 누구의 싸움인가입니다. 우리가 직접 싸워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싸우셔야 하는 것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아니라면, 마음 푹 놓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서서’는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신뢰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위기 상황 속에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를 잠잠히 바라보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꾸어놓으실 것을 믿습니다.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십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원리는 ‘대신하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큰 덩어리가 되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해주셨다는 것은 성경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구속(救贖) 사건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죽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싸우신다면, 그 싸움은 이미 결론난 것입니다. 승리는 확정되어있습니다. 이의(異意)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겨우 이기시거나 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상대에 따라 오락가락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과 상대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강하십니다.

로마서 8장 31~32절에 보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37절에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실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영원까지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수준과 상관없이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대신 싸워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종살이하게 하시고, 고센 땅으로 야곱의 가족 70명을 불러오시고, 히브리 민족들을 다산(多産)하게 하셔서 백성들의 수를 늘리시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시기로 결정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이스라엘을 편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의 편이 되시고, 우리의 손을 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갈보리 언덕에서의 승리는 결정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의 코앞에 이르러도 애굽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손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과 문제가 코앞에까지 다가와서 금방이라도 죽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싸우십니다.

뒤에서 달려오는 애굽의 군대는 현실입니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때 눈이 흐려지면 안 됩니다. 초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초점을 잃은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고 상황을 바라보면, 백발백중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볼품없는 자신의 형편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신을 보면 한심하고, 주변의 상황을 보면 기가 막힌다면, 두려움이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놓치고,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바라본다면,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울증에 걸립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곳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두려움의 상황을 바라보면, 그곳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디를 바라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두려움의 상황을 바라보면, 그곳으로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가 있는 곳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절망의 늪을 바라보면,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올수록 시선을 한곳에 고정해야 합니다.
사탄은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게 하고, 시선은 분산시킵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킵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초점을 잃어버립니다.
영적 초점이 맞추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신앙이 약화(弱化)됩니다. 시선이 분산되면, 영적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러면 영적 싸움에서 지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못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기체(機體)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착륙하려다가 상황이 좋지 않으면,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못하는데, 비행기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 떨어지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영적 배짱입니다.

우리를 위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애굽의 바로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넘실거리는 홍해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 와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영적 배짱, 영적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10년 이상 하셨다면, 영적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강력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백전백승(百戰百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은 실수하여 질 수도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은 백전백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완승(完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의 군대는 막강합니다. 출애굽기 14장 6절 이후에 보면, 애굽의 군대들이 병거를 갖추고 오는 장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최고의 화력을 갖춘 부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무기는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14장 3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가 이야기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군대를 수장(水葬)시켜버리시고,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문제가 클수록 하나님이 크신 분이심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문제가 닥치면,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큰 문제이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경이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고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극한 어려운 순간에 절망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말하기를 멈추세요. 그리고 귀를 기울이세요. 현실을 그대로 버텨내세요. 어려움이 올수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날이 가까웠습니다. 도피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놓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 죽었을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깊은 고난의 한가운데서 사방이 막혀있고 답이 없을 때, 끝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죽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맹렬히 싸우십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편이 되실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을 높여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날마다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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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본문 / 에베소서 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본문은 우리가 많이 본 구절입니다. 에베소서 3장 14~19절에는 바울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울의 기도 후에 본문
20~21절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송영(頌榮)’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면서 결론적으로 끝내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본문 20절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등식(等式)입니다.

신자(信者)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기도로 먹고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할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가는 여정(旅程)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배우지 못하면, 일평생 힘들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하면 주신다는 기본적인 등식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면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는 구절이 눈에 띕니다. 우리가 구한 것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에도 응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매우 적극적인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십니까? 그렇다면 큰 일 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다 응답된다면 큰 일 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다 응답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정욕적인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평소에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우리의 기도에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하는 바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때에 꺼림칙하다면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할 때에 담대함이 생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확신이 생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것이 없을 때, 우리는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바른 관계에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은 귀한 것입니다. 그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안에 들어오는 생각들은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에 우리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거룩한 생각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에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 살까, 어떻게 하면 영혼을 구원할까’하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까지 들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 이상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것을 생각한다 해도 하나님의 생각에 미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능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 사라가 많이 늙어서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상태와 같은 자신에게 자식을 주신다는 것은 경험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생각을 넘어선 것입니다.
하늘에 별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거룩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상상력이 심각하게 결여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게으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을 일으키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장막에서 나와서 밤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5).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의 상상력을 자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엄청나게 많은 별들을 바라보게 하시며, 아브라함의 상상력을 자극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거룩한 상상력이 일어나게 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상상력이 풍성해집니다.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에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꿈꿔보지도 못한 일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그렇게 됩니다.
현실은 암담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어둠 속에 갇히지 않고, 어둠을 뚫고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현실에 갇힙니다. 답답한 현실에 갇혀버립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상상의 날개, 생각의 날개를 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문제를 뚫고 새 역사를 펼치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상상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단조로운 언어 속에 갇혀 계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언어 속에 갇혀 계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신다는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구해야 할 것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읊조리는 기도의 틀 안에 갇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훨씬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문구(文句)를 바꾸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돌보십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말로 표현된 기도보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중(心中)을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생각까지 넓혀야 합니다. 믿음으로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저 너머의 세계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넘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끝은 아닙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단어에 유념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넘치도록’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십니다.
이것은 넘치고 있는데, 그 위에 더 넘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매우 많은데, 그 위에 더 부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시대의 특징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到來)한 것입니다. 율법 아래와 은혜 아래의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율법 시대는 정확합니다. 자칫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모든 것은 불완전합니다. 정확해야 합니다. 넘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다릅니다. 은혜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들이부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넘치도록’ 이 표현은 최상급을 의미합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무제한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복음이 주는 은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흘러넘치는 것이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끼지 아니하시고’라는 표현은 참 멋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이 없으십니다. 아끼면 넘치지 못합니다. 넘친다는 것은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냥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음을 입증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셨으면, 죽이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실 때에 항상 아들 예수님이 기준이 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의 아들과 견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것을 느끼면서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롬 8:37).

상한가(上限價)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상한선(上限線)이 갑자기 뛰어올랐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치는 대가를 지불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 18~19절에 보면,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한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최고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덧붙일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세상 어디에나 결핍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다 해도 무엇인가 모자랍니다. 아주 멋진 집에 이사를 가도, 뭔가 결함이 있습니다. 아주 멋진 곳에 여행을 가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와 같이 사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충만이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충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커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무엇입니까? 계산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을 의미합니다. 넘치도록 흘러 부어지니까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닫혀있으면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부어지니 어떻게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불만족입니다. 풍요의 세상을 살고 있지만, 결핍 증세를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핍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 채워지지 않습니까? 잘못된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부족한데, 돈이 더 생기면 채워집니까? 채워지지 않습니다. 돈이 부족해서 돈으로 채워진다면 좋은데, 돈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이 더 마릅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면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체득(體得)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충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무제한적 공급, 은혜를 알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넘치도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 더하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관점이 있다면, 수정되기를 바랍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결정적인 문제는 주인에 대해 오해한 것입니다. 주인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주인을 매우 인색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신앙에 매우 치명적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뒤틀려있으면 힘듭니다. 아버지는 부자인데, 자녀가 아버지께 용돈을 받을 때마다 눈치를 본다면, 얼마나 한심합니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매우 답답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는 돼지 죽통을 훑다가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제자들은 어린 아이의 손에 있는 오병이어 그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5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열두 바구니에 차게 남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에도 그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적극적으로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예외 규정을 만들고, 축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 속에서 이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간증이 담긴 고백입니다. 모든 필요(all needs)를 채우시리라는 의미입니다.
구하지 않는 것도 불신앙이지만, 축소하여 구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하는 것에 더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풍성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영역 속에서 무제한적으로 부어짐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의미입니다.
염려하는 삶은 바닥을 긁는 삶입니다. 은혜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흘러넘칩니다. 율법은 우리가 행한 만큼 돌아오는 것이고, 은혜는 우리가 행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늘 주눅들어있습니다. 눈치보고 끙끙거리며 살아갑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도 기도 내용이 다릅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라지도 않습니다. 생각이 늘 부정적입니다. 하나님을 인색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실 리 있나’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율법적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복음 안에서 은혜에 흠뻑 젖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아들이라는 대가(代價)를 지불하시고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노력과 공로를 내세운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지만, 예수님의 공로가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며 우리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당당해야 합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바닥을 긁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주님 앞에 강력하게 부르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넘치도록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 전혀 계산하지 않으시고 부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사랑에 빠져 실성한 아버지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돌아오는데도 불구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했습니다.
모든 것을 더하여주시는 은혜, 모든 것에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노력해도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산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일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가 쪼그라들지는 않습니까? 생각이 초라해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제한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인색한 분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구하는 것의 지평이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더하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까지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갇혀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훨씬 넘치도록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점은 두 가지여야 합니다. 하나는 본문 21절 말씀입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제한적으로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생각의 초점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정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보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둘째,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생각의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넘치도록 부어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과 방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맞추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신경 쓰십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직장에 들어갈 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교사로 여기에 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흘려보내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갈 방향을 바로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십니다.

무슨 생각이 좋은 생각입니까? 나누고 베풀려는 생각이 좋은 생각입니다. 착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착한 일에 넘치도록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이웃과 나눌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것을 나누기로 생각하는 것이 부요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생각을 기뻐하십니다.
이 생각 위에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부어지고 흘러넘치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은 하나님은 능하신 분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셨으면, 반드시 주십니다.
여기서 ‘능히’라는 말은 100%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사안(事案)에 따라 되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power that is at work within us)’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능력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거룩한 상상력의 날개를 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세요.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겨우 걱정 염려하지 않는 수준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견뎌내는 삶이 아닙니다. 지루한 기도생활로 근근이 신앙의 맥을 이어가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을 격파하고, 내가 만든 울타리를 걷어내고, 경계선 없이 무제한적으로(unlimitedly) 역사하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믿음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소원을 축소시키지 마세요.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는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제한적으로 부어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축복이 넘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풍성한 분이신지, 우리가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시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끼지 않으십니다. 아끼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대가를 지불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아끼실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목표와 방향이 정확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기도하는 것,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충만한데 더 부어주시고, 계산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생활하면서 자신을 축소시키고, 하나님을 제한하고, 겨우 버티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거룩한 상상력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한 상상력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한 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제한 없는 기도를 거침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우리를 통해 흘러넘쳐서 우리 주변으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를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흘러넘치게 하시고, 더하여주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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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본문 /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설교 제목이 “‘더’ 얻을 것인가, ‘다’ 빼앗길 것인가”입니다. 설교 제목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는 줄을 잘 서야 합니다. 더 얻는 쪽에 설 것인지, 아니면 다 빼앗기는 쪽에 설 것인지 잘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겼습니다. 종의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여기서 한 달란트의 가치가 매우 큽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런데 6천 데나리온이라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수억 원이 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굉장한 배려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마음먹고 종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물론 주인이 그냥 떠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소유를 반드시 종에게 맡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자신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긴 것으로 보아 주인이 상당히 부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겼습니다.

이 비유를 전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이 돈을 더 벌기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맡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더 남긴 종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분위기를 보면, 주인은 더 많은 것을 끌어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오히려 종들을 배려하고, 종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만약 돈을 끌어 모으는 것이 주인의 목표였다면, 주인은 돌아와서 종들에게 맡긴 것을 다 거두어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은 주인 자신의 유익보다 종들을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있는 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기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것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잠재력, 가능성(possibility)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재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주도 많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지혜와 창의력이 무궁무진합니다. 우리 안에 매장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얼마나 활용하고 개발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어마어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물질도 주시고, 직업도 주시고, 열정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특별히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마당을 깔아놓으시고, “내가 준 것으로 무엇이든 해봐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껏 뛸 수 있도록 마당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 받은 이후에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 안에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지원 속에서 풍성한 구원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옛날의 저주의 삶이 끝나고, 죄악으로 묶였던 노예 된 삶에서 자유를 얻어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의 권세를 끊고, 악습을 끊고,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들이 마음껏 꽃피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의 세계 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구원은 잔치입니다.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넘치도록 더하여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무엇이든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무엇이든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후에 우리를 간섭하시기보다 우리가 마음껏 해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마음껏 활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4~15절에 보면,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긴 후,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긴 후에 그것을 어떻게 하라고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겨놓고 주인은 떠났습니다. 멋진 주인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이제 공은 종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맡겼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뢰를 의미합니다.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사실 주인은 모험을 한 것입니다. 종들에게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인이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면, 자신의 재산을 금리가 좋은 곳에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이자를 많이 주는 곳에 원금을 맡기고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종들에게 맡겼다는 것은 종들을 신뢰했음을 의미합니다. 주인은 실패할 수도 있음에도 종들을 신뢰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길 때, 종들이 잘못하여 돈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100% 성공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종들을 신뢰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대로 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종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책임지겠다는 주인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맡길 때에는 자신이 맡긴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종들에게 맡긴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고 싶었습니다.
주인은 대단한 모험을 한 것입니다. 위험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신뢰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음껏 해보라고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남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불려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신앙의 삶은 우리가 받은 것을 불려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는 열 달란트가 되고, 열 달란트는 스무 달란트가 되어야 합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네 달란트로 불려야 하고, 네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여덟 달란트가 되게 해야 합니다. 받은 것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이 줄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비유를 통해 풍성한 이야기가 여러분의 인생에서 흘러나오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와 다른 이야기를 써가야 합니다. 주인이 본래 원하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네가 멋지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선용(善用)해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재산을 늘린 사람들에게 칭찬합니다. 그리고 주인은 재산을 늘린 사람에게 재산을 더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산을 늘리는 것이 주인이 의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늘린 종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보너스도 주었습니다.

왜 주인은 재산을 늘리는 것을 원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우리가 사장(死藏)시켜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선용하고, 투자하고, 배가시켜서 우리를 통해 나눌 것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목적은 그것을 늘려서 세상을 부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을 더 풍성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쪼그라들어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줄 것도 없고, 다른 사람과 나눌 것도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늘려서 복과 은혜와 풍성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면, 누가 나누겠습니까. 나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업이 잘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갈수록 풍성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늘리지 않으면, 나누어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을 하나님의 종들에게 충분히 주셔서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구원하고, 아름답고 풍성하게 바꾸어나가는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배가시켜서 주변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불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을 불려야 합니다. 은혜를 불려야 합니다. 받은 은혜와 깨달은 것을 불려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불려서 이 민족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가지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갈수록 늘어나야 합니다. 갈수록 더욱 쓰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살다 보면, 여기저기서 나를 불러야 합니다. 내가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내가 늘렸더니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쓰임 받는 것입니다. 나의 간증을 듣고 싶어 하고, 내가 깨달은 것은 나누기 원하고, 내가 받은 은혜를 얻기 원하여 나를 불러주는 곳이 많아야 합니다. 이렇게 쓰임 받으면, 내 인생은 배가 됩니다. 최대화(maximize)됩니다.
명성과 칭송, 사람들의 인정(認定)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쓰임 받고, 내가 가는 곳마다 불이 일어나고, 내가 가는 곳마다 역사가 일어나면, 그 인생은 배가(倍加)의 인생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기는 인생입니다.

받은 것을 꿀꺽 삼켜버리고, 본전치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늘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기뻐서 더 주었습니다. 더하여 더 남겨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불리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습니다. 여기서 바로 가서 장사했다는 것을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투자했다는 의미입니다.
투자는 언제나 위험합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위험이 느껴집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는 것은 모험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종입니다. 그러니 장사해봤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맡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가서 그것을 장사했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투자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두었다가 나중에 주인이 왔을 때에 그것을 내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서 장사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위험합니다. 그런데 해석에 차이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하는 것이 위험하지만, 그것을 기회라고 여겼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하는 것이 위험하니까 그런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어느 쪽이든 위험합니다.
가서 장사하다가 잃어버리는 위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만히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선택할 것인가, 가서 장사하다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위험이 있음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본문은 어느 쪽을 지지합니까? 둘 다 위험하지만, 성경은 투자하는 쪽, 시도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성경에서는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모험을 시도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본문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험한 일임을 말합니다.
인생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은 안 됩니다. 죽을 때에 죽더라도 시도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 속에 깔린 중요한 주제(theme)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업이든 목회든 모든 일이 힘듭니다. 어느 직종이든 힘들지 않다고 일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영역의 일이든 힘들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일이 쉬웠던 때가 언제입니까? 쉬운 일이 있습니까?
남의 일은 쉬워 보입니다. 그런데 쉬운 일은 없습니다. 다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안 될 이유를 찾으면, 안 될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신랄하게 책망 받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혹독하게 책망 받는 것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있는 것을 빼앗아버리고,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했습니다. 조금의 자비도 없습니다. 아주 심각하게 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혹독한 심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습니다. 이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아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현상유지를 한 것입니다. 현상유지를 한 것을 어떻게 보면 잘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관점을 달랐습니다. 주인이 보기에 이 사람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유지는 어떤 면에서 보면 악한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인이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주인에게 받았던 한 달란트를 다 써버린 것도 아닙니다.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충격적인 선포를 했습니다. 주인에게서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을 뿐인데, 주인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왜 악합니까? 주인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입니다.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큰 잘못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주인은 따지고 있습니다. 주인은 종을 신뢰하여 그에게 기회를 주고 그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그는 몸을 사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생각하기에는 종이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최소한 그렇게 하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는 것이야말로 주인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생각이었다면, 주인이 직접 땅에 묻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줄 몰라서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생각이었다면, 주인은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 맡겼다면, 이자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이 최소한의 시도도 하지 않은 것을 책망했습니다. 이처럼 주인이 맡긴 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사역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무난한 것이 최상(最上)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남길 것인가, 아니면 빼앗길 것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가만히 있을 것인가 뭔가 할 것인가, 안전이냐 모험이냐, 주인으로부터 더 얻을 것인가 아니면 다 빼앗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했습니다. 이것은 투자했다는 의미입니다. 투자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모험할 수 있습니다. 모험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험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시도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의 믿음을 체크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믿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주인은 종을 믿고 달란트를 맡겼고, 위험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시도해야 합니다. 모험해야 합니다. 도전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시기 원하십니다. 믿음의 삶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삶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려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데,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쓸데없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필요합니까? 위험한 일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바로 가서 장사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모험입니다. 잘못하면 다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도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안전한 삶을 떠났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맡기셔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빼앗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빼앗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쪼그라드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잠재력, 가능성 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엄청난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기대는 엄청납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리발을 내미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삶의 조건과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안전을 찾게 됩니다.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별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난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요령껏 적당히 살아가려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본문의 비유에 의하면, 우리 인생은 기회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자체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마당을 깔아주시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시며,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불려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은혜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혼자 가지고 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은 것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일평생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금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불리고 남겨야 합니다. 줄이면 안 됩니다. 쪼그라들면 안 됩니다. 세월을 보내며 그것을 땅에 묻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머리도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머리도 자꾸 써야 합니다. 두뇌는 쓰면 쓸수록 좋아집니다. 자꾸 쓰면 두뇌가 발달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써야 은사가 계발됩니다. 쓰지 않으면 은사는 없어집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계속 가르쳐보세요.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쓸수록 능력이 더 나타납니다. 쓰지 않으면 녹슬어 없어집니다.

하다 보면, 무엇이든지 어렵습니다. 시도하다 보면,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시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옵니다.
가만히 있을 때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인데, 하다 보니 그곳에서 또 다른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되든 되지 않든, 어렵든 쉽든 해보아야 그곳에서 의외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인의 의도는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험을 두려워합니다.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괜히 무엇인가 하다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에 대해 곡해(曲解)하고, 자기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의식의 차이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이든 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이든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식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지능지수도 비슷비슷합니다. 능력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의식의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의 의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을 잘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서 한 달란트를 묻어버렸습니다.

능력의 차이는 배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식의 차이는 백 배의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장애물을 보지 말고, 기회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하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기회보다 장애물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면 모든 것이 문제입니다.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장애물을 장애물로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기회로 보려고 훈련해보세요. 장애물은 기회이고, 문제에는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장애물 때문에 모든 것을 멈춰버립니다. 사람들이 얼어붙습니다. 그런데 장애물이 없는 곳이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곳이 있습니까. 어디든지 문제는 있습니다. 어디든지 장애물은 있습니다.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기회가 됩니다. 일사천리로 쉬운 것은 기회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쉬운데, 그것이 어떻게 기회가 되겠습니까. 어려우니까 해볼 만합니다.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고, 장애물이 있으니까 해볼 만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태도와 각도와 의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안 된다 하고, 모든 사람이 문제와 장애물이 있어서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곳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쉬운 길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운 길을 골라 가면, 그곳에 기회가 많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장사하다가 어려움이 생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장사하다가 손해를 보거나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주인이 그 소식을 들었다면, 주인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주인은 그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맡기고, 종들이 가서 무엇이든 해보려고 애쓰다가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주인이 들으면, 주인은 그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제가 주인이라면, 종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끌어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돈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종들이 잘되라고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면 종들이 힘들어할 때에 주인은 종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종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주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우리가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땅에 묻어두었는데, 어떻게 도와주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려고 애쓸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아무나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염려하는 사람은 계속 염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려고 열심히 애쓰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공급해주십니다. 먹여주십니다. 책임져주십니다. 모자라면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은 1차적으로 종들이 시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은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것을 종들이 품고 있거나 땅에 묻거나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실패하거나 성공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주인은 종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일단 시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삶이 게으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다가 무엇인가 선택한다면, 그 선택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면 선택한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게으른 삶, 악한 삶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과감한 결단과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일이 벌어집니다. 위험하지만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땅에 묻어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일이 없는데, 무엇을 도와주시겠습니까.
누가 기도합니까? 일하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날마다 먹고 노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강력하게 기도할까요? 일을 크게 벌여놓은 사람이 강력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순간, 기도는 뜨거워집니다.
그런 사람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기도할 때에도 몸이 앞으로 기울어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것이 없는 사람은 등을 의자에 기댄 채 기도하다가 졸기도 합니다. 기도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 시간에 조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조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뭔가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불이 붙는 기도제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시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기도해도 기도가 맹숭맹숭합니다. 긴장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에 좁니다.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냥 있지 마세요. 무엇인가 시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사용하세요. 활용하세요. 머리를 쓰세요. “하나님, 아이디어를 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창의력이 살아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사업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해주십시오. 창의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세요. 일을 벌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다보면 해본 사람만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꾸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제가 부임한 후, 특별새벽기도를 여러 번 했습니다. 몇 주간에 걸쳐 특별새벽기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주간에 걸쳐 특별새벽기도를 인도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교 제목과 본문을 미리 정해놓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의 핵심 주제가 정해져야 설교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평소의 스케줄을 다 소화하면서 매일 매일 설교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에는 부흥회를 인도하듯이 설교해야 합니다. 너저분하게 설교한다면, 누가 오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제가 호주에서 목회하면서 훈련되어있어서 어렵지는 않습니다. 저는 호주에서 목회하는 동안 외부 강사를 교회에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제가 다 했습니다. ‘내 양은 내가 먹인다’라는 생각으로 제가 다 했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 최고로 맛있습니다. 가끔 외식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때로는 입만 버렸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 강사를 초청하지 않고, 제가 다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제 설교만 들었습니다.
물론 외부 강사를 초청하면, 저는 편해져서 좋습니다. 저도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 했기 때문에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다 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 나중에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시간을 주고, 주제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무엇이든지 하세요. 일단 많이 하세요. 저는 쉬는 시간에 글을 씁니다. 글이 되든 말든 쉬는 시간마다 계속 쓰다 보니 매주 수영로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매주 설교 준비하고, 스케줄이 많은데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글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육전도사 시절부터 틈만 나면 글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뭐합니까? 노는 손으로 글 쓰고, 쉬는 시간에 생각하고, 쉬더라도 책을 가지고 놀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해보면, 자신에게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재능이 살아납니다.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으면, 선택해보고, 그 일에 도전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다 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경험이 생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20여 년 전, 수영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에 1주일 동안 일곱 개의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소그룹 사역, 제자훈련에 있어서 잔뼈가 굵어졌습니다. 지금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꾸 해보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일단 일해야 합니다. 모험해야 합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일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일도 합니다.
힘에 부치도록 일하다 보니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능력 주세요. 역사해주세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서울기도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에는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가면, 마치 개척 교회의 목사가 된 기분입니다. 기도모임 장소가 크지 않은 곳인데도 ‘오늘 이곳이 가득 찰까?’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채워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서울기도모임이 저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서울기도모임에 가면, 제가 굉장히 친절해집니다.
부산에서는 성도들과 대화할 수도 없고, 성도들도 제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면, 저는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데 서울기도모임에서는 그렇게 하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합니다. 서울기도모임은 저를 겸손하게 만들고, 저로 하여금 한 영혼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서울기도모임을 통해 제 성품을 다듬어 가십니다.
화요일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면, 저는 저녁도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여, 이곳을 채워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일을 벌이세요. 입을 크게 벌리세요. “하나님, 이번 일이 잘되어야 합니다. 잘되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지경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기도에 저절로 불이 붙도록 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그냥 기도했겠습니까. 엘리야는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머리는 양쪽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했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세상을 보면 소망이 없으니까, 환경을 보면 불안하니까 머리를 양쪽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한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며 기도하다가 끝내지 마세요. 피 끓는 시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때에도 맹숭맹숭합니다. 맹숭맹숭하게 살다가 인생이 끝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재다가 인생을 끝내지 마세요.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은 없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고, 오늘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내 삶의 모든 것을 걸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금방 옵니다.

본문에 보면, 주인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서 결산했습니다. 그 날은 금방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활용하세요. 활용하시고 불리세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더 늘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인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복음 안에서 문화명령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의 한가운데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야말로 팔을 걷어붙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과 자원과 재능과 가능성을 온 세상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꾸어놓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극적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험하셔야 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부지런해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게으르면 안 됩니다. 잠을 줄이세요. 걸을 때에도 빨리빨리 걸으세요. 가만히 있지 마세요.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던지세요.
죽을 각오로 해보세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멋지게 쓰십니다. 그러므로 몸을 아끼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엄청난 것을 사장(死藏)시키지 마세요.

저는 원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계속 설교하다 보니 이렇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서면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지금도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제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이만큼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제 삶을 드리고,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이만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영로교회에 부임하여 3년여의 시간 동안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몸을 아끼지 않고, 계속 드리려고 합니다. 언제라도 후회함이 없는 순간순간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가진 것 이상으로 저를 쓰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저를 어떻게 쓰실지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지금보다 더 쓰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몸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던질 용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여한이 없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주인은 종들을 신뢰하고, 종들에게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종들에 대한 주인의 배려가 눈물겹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엄청난 것을 맡겼습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교회에 중등부, 고등부,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깨어있는 한 사람, 자신의 삶에 모험을 거는 한 사람, 믿음으로 승부를 거는 한 사람, 몸을 아끼지 않고 불사르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이 역사(歷史)를 바꿉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둔다면, 그런 사람이 백 명, 만 명 있다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작은 것을 받았다 할지라도 거기에 모든 것을 걸면,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덧붙여지면, 감당할 수 없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받으시겠습니까? 다 빼앗기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더욱 풍족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인은 최종적으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긴 종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겼을 뿐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주님을 위해 삶을 드리며, 주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남겼을 때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면, 시너지(synergy) 효과가 일어납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니 얼마나 신바람 나겠습니까. 더 놀랍고 강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삶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얼마나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주인이 이 종을 그냥 두겠습니까. 주인이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자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주님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늘 부정적인 말만 하고, 남을 욕하고, 남을 탓하고, 억지 논리로 무장되어있는 사람과는 말씀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최선을 다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여 남기는 인생이 되면, 갈수록 즐거움이 넘칠 것입니다. 신바람 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밀어주실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잘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역하다 보면, 잘되면 잘되다 보니 더 잘되는 시너지 효과가 일어납니다. 안 되면 더 안 되어 곤두박질칩니다. 잘되면 더욱 잘되어 신바람 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쪼그라드는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대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계속 진행형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기막힌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험한 일을 시도하셨습니다. 우리를 믿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분히 실력발휘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실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89세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80세에 불후의 고전 〈파우스트(Faust)〉를 탈고했습니다.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90세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살았습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92세까지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했습니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92세의 나이에 발명에 몰두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여러분의 인생이 축소되지 않고, 확장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모험을 즐기세요. 나이를 탓하지 마세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모험하세요. 죽을 때까지 피가 끓게 하세요.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뇌가 회전하는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꿈꾸세요. 시도하세요. 도전하세요. 인생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세요. 갈수록 부요해지기를 원합니다. 갈수록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갈수록 최대화(maximize)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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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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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터널을 통해 순금으로

본문 / 욥기 23:8~13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고난, 고통을 말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욥입니다. 욥은 시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욥만큼 고난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붓고 떠났습니다. 욥의 몸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긁어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위로의 말을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의 속을 긁었습니다. 지옥과 같은 상황이 욥의 앞에 펼쳐졌습니다.

막 살다가 이렇게 되었다면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욥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은 혹시라도 자기가 모르는 가운데 자녀들이 죄를 지었을까봐 자녀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정도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당하는 고통은 의문의 고통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입니다.

고통이 깊어질 때에 가장 두려운 일은 믿음이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신가’라고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통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고, 그 고통이 길어질 때에 가장 큰 위기는 믿음의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신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위기를 맞는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생기고 힘들어도, 믿음을 붙잡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위기를 맞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고통이 하나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겹쳐서 일어나고, 그 고통이 하루 이틀, 끝도 없이 이어질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최대의 기입니다.

욥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무죄를 계속 주장합니다. 자신은 이런 끔찍한 벌을 받을 만큼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욥에게는 또 다른 영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본문 욥기 23장 8~9절에 보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앞으로 가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고, 뒤로 가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어디를 가나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숨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입니다. 고통 자체도 문제이지만,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큰 고통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보인다면, 고통은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차라리 이것이 내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맞으면, 질문이 자꾸 생깁니다. 보통 때에는 질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생기면, 질문이 생깁니다. 욥은 얼마나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오늘도 힘들게 살고 계신 분, 어려움을 가운데 계신 분들은 질문을 많이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없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은 하나님께 질문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질문이 없기 때문에 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런 질문은 귀에 익은 질문입니다.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에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where are you?”

고대사회에서는 고통을 하나님의 징벌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일반적 해석이었습니다. 누가 큰 병에 걸리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누가 큰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잘못해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네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그런 일을 당했을 거야.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얘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결론을 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에 빠져있을 때에 사람들이 이런 말, 저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 휘말려 고통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 말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이 내 고통을 해석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결론을 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의 말 때문에 희비(喜悲)곡선을 그립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 나의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이 타는 듯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말씀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욥의 모습은 굉장히 중요한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에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본문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삶은 미궁에 빠져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확신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욥은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알고 계신다고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세상에 다양한 미래전문가들이 예견(豫見)도 하고, 연구도 하지만, 세상은 연구하고 데이터를 분석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점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변화무상합니다. 수많은 변수가 생깁니다. 별별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측불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해보세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는 욥의 고백에서 우리는 욥의 신앙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의 인생길이 하나님의 길에 연결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역사(役事) 속에 자신의 인생이 올려져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본문 욥기 23장 13절에 보면, 욥은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시다고 고백했습니다. ‘일정하다’ 이 말은 신실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매우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을 갑자기 바꾸거나 변덕스러우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고집하시고, 반드시 이루어내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어난 일에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일어난 일만 바라보면, 일희일비(一喜一悲)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는 길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빨리 사라지기를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로 인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여기서 ‘단련’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입니다.
단련이라는 단어에는 제련(製鍊), 정제(精製)라는 뜻이 있습니다. 검증의 의미도 있습니다. 일종의 테스트를 의미합니다. 불을 통과하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제련을 통과하지 않으면, 정품(正品)이 될 수 없습니다.
단련을 받는 것은 힘든 것이지만, 좋은 것입니다. 저절로 순금이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테스트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단련은 매우 힘듭니다. 때로는 혹독한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금은 불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불 안에 던져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불은 무서운 것입니다. 불이 탈 때에 근처에만 가도 공포스럽습니다.

우리의 삶에 불이 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온 삶을 불태울 것 같습니다. ‘아, 이것이 끝이구나. 내 인생이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이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죽고 싶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욥이 그런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욥은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이런 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연단을 거치기 전과 후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연단을 받기 전에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련하시기 이전에는 순금이 아닙니다.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에는 불순물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종종 고통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신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용광로를 거친 신자와 거치지 않은 신자가 있습니다. 시련을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불을 통과하고 시련을 통과하고 연단 받은 사람은 다릅니다. 재질이 다릅니다. 성분이 다릅니다. 수준이 다릅니다. 쓰임세가 다릅니다. 품격의 차이가 있습니다.

불을 통과하지 않으면, 불순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받아야 순금이 되나”라고 항변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고통을 받아야 순금이 됩니다.
그래서 순전하고 온전하게 살았던 욥에게도 단련이 필요했습니다. 단련을 받지 않으면, 순금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깨어져야 할 부분이 아직 많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교만함이 나옵니다. 고개를 듭니다. 우쭐거립니다. 건들건들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찌꺼기가 많을수록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렵습니다. 진짜 금이 되려면, 불의 고난을 거쳐야 합니다.
고난을 반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순금이 되려고 하면, 고난은 불가피합니다. 이것이 딜레마(dilemma)입니다.

시련을 통과하면서 변화됩니다. 시련은 많은 일을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제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불의 시련은 정규과목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 체험을 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광야는 시련의 장소입니다. 인간의 자만심과 자랑을 다 걷어내는 곳입니다. 시련을 통과한 사람은 우선 성품이 다릅니다. 순수합니다. 사려가 깊습니다. 부드럽습니다. 깨끗합니다. 고집스러움이 없습니다.

연단하다 보면, 찌꺼기가 계속 나옵니다.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의 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평생 연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연단할수록 우리 안에서 찌꺼기가 나옵니다.

철야에 열심히 참석하고,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서 깊이 기도하고, 주일에는 예배를 한 번만 드리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드려도 내 안에 찌꺼기가 있습니다.
내가 은혜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자신이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날카로운 발톱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말로 죄를 짓습니다. 자기 의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하는 가운데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배워서 깨닫는 것과 시련을 통과하며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 말씀을 깨달은 것과 고통을 통해 말씀을 깨달은 것은 다릅니다. 질이 다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은 다릅니다.

책상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은 말씀을 다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배워 아는 것은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 깨우친 진리는 심장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몸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깨닫고 붙잡은 말씀은 심비(心碑)에 새겨집니다. 지우려야 지울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 깨달은 말씀은 진짜입니다.
심장을 관통(貫通)한 말씀입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습니다. 슬며시 붙잡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처럼 붙잡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분들은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다릅니다. 그래서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어떤 사람은요 고난 속에서 말씀을 듣는데, 말씀이 막 파고들어오니까 말씀을 듣는 내내 웁니다.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편안할 때, 배부를 때에는 말씀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말씀이 없어도 오늘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련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오늘 이 말씀이 없으면, 내가 나가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말씀이 양약(良藥)이 되고, 생명줄이 됩니다.

육신의 배가 부르면, 영적으로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방자(放恣)히 행합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묵시(黙示)’는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말씀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귀중하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불순종하다가 한 번 크게 혼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말씀의 위력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이 진짜구나. 잘못하면 큰 일 나는구나.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되겠구나.’라고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고난을 통하여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고 깨달았다면, 고난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재산을 잃고서라도 말씀을 제대로 배웠다면, 결코 손해 본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하고서라도,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큰 화를 면했다면,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면,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학교는 고난학교입니다. 최고의 수업은 광야수업입니다. 고난을 통해 온몸으로 배운 말씀은 잊으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왔냐고 원망불평하며 세월을 보내면, 고통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찾아오면, 원망 불평하며 세월을 보냅니다. 고난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부하고 부정하고 완강하게 반항합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난 고통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금을 용광로 속에 넣으면, 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금이 됩니다. 가짜 금덩이는 용광로 속에 넣으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가를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과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시련을 통해 믿음이 검증됩니다. 시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아직 믿음이 검증된 것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짜 믿음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더 견고해집니다.

시련이 왔을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시련을 통해 더 순수해지고 더 견고해지고 더 단단해집니다. 그러나 가짜 믿음은 시련을 통과하면 그냥 무너져버립니다.

누구나 희망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도 희망을 말합니다. 어려운 세상일수록 “희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려고 한다고 희망을 갖게 됩니까? 희망의 근거가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분명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엉터리 희망입니다. 그런 희망은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한 방에 사라져버립니다. 시련을 통해 검증된 믿음 속에서 얻은 희망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고난이 찾아옵니다. 남들이 겪지 않는 독특한 고난 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 일반적인 반응은 고난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했습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요? 욥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언젠가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시각을 배워야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시련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욥은 시련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련은 끝이 아니고 과정입니다. 과정이라는 것은 지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좋은 작품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순금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의 순간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련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하나님 안에서 다루어지면, 고통 또한 좋은 재료가 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삶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으셨습니다.

고통의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시련이 좀 더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인 무력감을 느낄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이해합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먼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한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기도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기도를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간단한 레슨이 아닙니다.

전적 무력감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배우는 것, 말씀을 깨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고 나니 말씀을 깨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어려움을 겪기 전에 기도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라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세미나에 참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와 관련된 성구를 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품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성품이 되는 것, 겸손해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말 겸손한 분을 만나면, ‘대가를 많이 지불하셨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성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른 후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분을 보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간단한 연장은 적당한 불로로 만들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려면, 온도가 더 올라가야 합니다. 간단한 도구를 만들 때에는 대충 구워도 됩니다. 어마어마한 도구를 만들려면, 온도를 높이 올려야 합니다.

생존의 문제로 인해 처절한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고통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매달려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은 웬만한 문제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시련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더 심한 고난이 오면 모르겠지만, 더 심한 고난이 오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고난을 다 이겨냅니다.

어느 사역자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주 폭력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구타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많았습니다.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 이렇게 고생하며 자라는가’라고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니 아버지로부터 욕 먹고 맞았던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사역하는 동안,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만나도 자신이 겪은 고난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아주 심하게 구타당했기 때문에 웬만한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찾아오는 연단, 시련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견뎌야 합니다. 연단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거부하고 싶습니다.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단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대로 통과해야 합니다. 비켜날 수 없습니다. 불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미지근하거나 뜨겁지 않은 불은 없습니다, 불을 견뎌내는 과정 속에서 찌꺼기를 떨어내는 과정에 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연단의 과정에서는 “나 죽어요. 나 죽어요.”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의 연단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 40일 금식 시간을 통해 혹독한 과정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며 고난 받으신 것은 40년 이스라엘 광야의 모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굶주림의 끝에 가셨습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난 후 예수님께서는 떡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벼랑 끝에서, 시련의 혹독한 끝에서 떡보다 진리가 더 귀중하다는 것을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연단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연단을 기뻐해야 합니다. 연단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견뎌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6~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연단은 끝까지 잘 받아야 합니다. 연단을 받다가 그만두면,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연단을 마스터해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순금 같은 믿음이 됩니다.

여러분 중에는 ‘내 나이가 많은데, 이 나이까지 고생하고 시련이 계속된다’라고 원망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시련은 이제 끝나면 좋겠다. 이제 편안하게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기막히게 쓰였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순금으로 빚어 가시는 손길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시련 속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손길을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시련을 시련으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아무 일도 없는 삶을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요셉이 부모로부터 떨어져 이국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9장 23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들어간 상황 속에서도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형통’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창 39:2, 3, 23). 그런데 상황은 암울한 시련의 때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통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통은 제대로 된 제련의 과정, 연단의 과정을 통해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깎이고 빚어져서 명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일평생 아무 어려움 없이, 어떤 시련도 없이, 어떤 고통도 없이 그냥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는 것은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선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떤 시험이 와도 우리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만들어놓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통의 세상을 삽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고통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어떻게 다루시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우시고 쓰시기 위해 단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차원이 다른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통하여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인생길에 다양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일을 맞을 때, 우리는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이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는 일은 내 삶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고난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단련하시고, 그 후에 우리를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십니다.
고난의 삶을 지금 겪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승리하는 날이 곧 올 것입니다. 순금 같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표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기가 막힌 걸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의 인생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불행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절망으로 저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시고 승리하게 하셔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으로 결론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훈련, 단련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단련하신 후에 순금 같이 되신 분들을 주변에서 만나고 계실 것입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고통의 터널을 통해 하나님께서 빚으신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작품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경탄(驚歎)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기 23장 10절의 말씀을 꼭 붙드시고 어떤 시련이 와도 욥처럼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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