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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예배에 대한 교훈

 

12:5-7  

 

1)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장소

 

 

5-당신들은,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거처로 삼으시고, 당신들 모든 지파 가운데서 택하신 그 곳으로 찾아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모세가 앞날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이스라엘의 할 일을 예고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전 존재를 그 곳에 계시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그곳에 두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예배드리게 하심을 말합니다. 택하신 곳은 새로운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정착시대는 광야시대와 달라서 어떤 정해진 한 곳에서 예배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업(14:6-21:45) 가운데서 한 특정한 곳을 선택하여 지정하시겠다는 뜻으로 훗날 유다 지파의 땅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립됨으로써 역사적 성취를 봅니다.(대하 6:5 ; 7:12),

 

모세가 전체 율법 중에 여기만큼 강하게 강조하고 마음속에 뿌리박게 하는 특별한 교훈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막 뜰에 세워진 하나의 제단에서 모든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일정한 한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강조하는 이유는

 

1. 그 때에 이교 세계에 유행되었던 많은 신들을 섬기는 풍습과 것과는 구별되어 우상 숭배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유혹과 꾐에 빠져 기울어지는 위험을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해서도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 백성의 심중에 있는 이상스런 경향을 아예 차단하고 순수한 여호와 신앙의 보전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2. 12지파로 분할된 이스라엘 사회 전체를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한 곳에 모임으로 같은 교훈을 받게 되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단합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된 마음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예배에 부패한 관습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그들 사이에 통일성과 평화와 형제의 사랑을 유지하는데 크게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3. 중요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장소에서만 예배한 것은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하나님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믿고 섬기는 생활을 유지시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산당에서 자기 방식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깨끗하고 순결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값지고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라(딤전 2:5).

 

구약 시대의 장소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거룩한 장소는 가나안 땅(2:12), 성막, 성소, 여호와의 궤가 있는 지성소, 또는 여호와의 궤가 놓여 있는 모든 장소, 도피성, 그리고 예루살렘(76:2) 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장소를 선택하여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셨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눈에 보이게 나타내셨습니다(40:34 12:5 왕상8:10 6:1). 그곳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상징으로써 증거를 두게 하셨으며, 또는 제단 등을 두게 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로 삼기도 했습니다(20:24).

 

이러한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개인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기도를 응답하시고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엔 일 년에 세 번씩 정한 절기에 성전에 나아가 예물을 드리며 경배했습니다(23:14).

 

신약 시대의 장소

 

특히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되는 예배드리는 장소문제입니다 4953-높은 산 거친들 초막 궁궐 어디나 예수님을 모신 곳이 천국입니다. 신약 시대의 거룩한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으나 박해 이후에는 각 지방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해서 예배하는 장소(거룩한 장소)에 대한 개념이 확대되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특정한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나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1-23). 지금은 세상 모든 곳이 예루살렘이며 모든 가정이 성전이 될 수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 개개인이 곧 성전이 됩니다(고전3:16,17). 그리고 진정한 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2:21 21:22).

 

2)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정해주신 제사 방법

 

6-당신들은, 번제물과 히생과 십일조와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과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소나 양의 처음 난 것을, 그 곳으로 가져다가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제물을 드리는데 번제는 짐승을 잡은 후 가죽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는(1:3-9) '온전한 헌신'을 말합니다.

 

희생은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피를 흘려 바치는 모든 희생 제물로(1:11 ; 3:2)화목제물. 십일조,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종의 헌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로서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행하여야 할 것이다(고후 9:10-12.18:21-32) 손의 거제는 화제, 요제, 전제와 더불어 제사 드리는 4대 방법 중 하나로. 손을 쳐들어 바치는 것으로 무슨 제사든지 드리고 제단에 불사르지 않습니다. 서원제-하나님께 맹세하여 바치기로 서원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22:21). 낙헌제(자원제)는 자발적이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제사(7:16, 22:21,23:38;15:3,29:39)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13:2,12; 18:15)은 첫 소산물 입니다(18:12-32).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 사건과 관련된 규례로 당시 사람과 짐승을 물론하고 이스라엘의 초태생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는 증거로 당연히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쳐야 할 하나님의 소유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12:1-13:2).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성도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라 하겠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3:25).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의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실 그 장소로 가져와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바쳐야 할 일은 고금을 물론하고 원칙에 있어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23:15-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고 하였다.(16:16)

 

3) 가족과 더불어 즐거워하라

 

6-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당신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그 앞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수고한 일에 복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가족과 함께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께 바쳤던 희생 제물들을 나누어 먹고 즐거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한해의 추수가 끝나면 수고한 일에 복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 얼마를 구별하여 감사 잔치를 베풀고 온 가족이 참여하여 기쁨으로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14:22-27). 너희 가족은 혈연적인 가족 뿐 아니라 그 집에 거하는 종, 심지어는 그 집에 잠시 유하는 나그네(5:14;20:19)까지도 말합니다. 하나님께 바치려는 제물은 제단으로 가져와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자기들이 교통함을 보여주는 표시로서 먹고 마셨습니다. 모든 외식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괴로운 짐으로 여기는 예배는 도리어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은 거룩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예배드림으로써 즐거워야 합니다. 그것이 혼자서가 아니라 가족과 더불어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가족, 또는 이웃과의 연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이웃과의 연합, 여기에서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족, 이웃과 더불어 즐거움이 있는 교제,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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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기도회 기도문

   

1. 죄에 대해서는 엄하신 하나님 이시지만

 

자녀된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마음 약하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2. 이밤 세상 속에서 시달리는 자녀들을 보시고 안타까우신 마음에

 

그토록 목사님을 통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기에 선택된 저희 자녀들을 불러

 

이 자리에 앉게 하셨으리라 생각 됩니다.

 

아버지 한편 부끄럽기도 하지만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3. 그러한 주님의 마음이 우리 가슴속에 다가옴을 느낍니다.

 

이시간 세상에 살다가 묻혀온 모든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4.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 고민하고 걱정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사업실패, 취직과 승진문제, 질병, 가족 건강 및 구원, 재물축복, 경제불황,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한 문제, 질병등 많은 기도와 간구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라>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 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 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공의를 위해 간구한다 하지만 혹여 저희들의 간구가 주님

 

뜻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간구들이 많을 줄로 압니다.

 

긍휼히 여겨 주옵시고 공의를 위해 구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5. 아버지! 특별히 우리 신천재단을 기도로 섬기시는 지상천 담임목사님을

 

사랑하여 주시고, 사모님과 자녀들의 건강을 지켜 주옵소서

 

부목사님, 전도사님, 모든 교역자님들 각각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하실수 있도록

 

건강과 형통의 복을 주옵소서

 

6. 장로님들과, 주일학교, 교사, 속장, 성가지휘, 반주, 성가대, 주차봉사, 식당봉사,

 

화장실봉사, 예배를 위한 각종 봉사에서 보이지 않게 수고하시는

 

일꾼들의 손에 묻은 땀을 보시고 그들의 노고를 잊지 마옵소서

 

7. 특별히 공산권에서 해외선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선교활동을 하시는 선교사들을

 

돌아보옵소서. 그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게 하여주옵시고, 기도와 물질의 동역자가 연결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영적인 리더쉽과 지혜를 주옵시고 또한 필요한 재정 및 물질과 안심하고 선교할수 있도록 자녀들의 교육과 영적성장도 주님께서 돌아보옵소서

 

8. 끝으로 우리 신천교회가 이 지역사회 교회의 화합을 이끄는 등불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또한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교회로 우뚝 서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을 눈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였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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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길을 묻다 ( October,Friday Night Sermon)

 

본문성구 : 요한복음 14:1-6

 

참고성구 : 빌립보서 4;4-7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70년대 사건 기사 슈퍼맨, 원더우먼 사고 기사

 

우리나라에 흑백 TV가 처음 선보인 것은 전쟁이 막 끝난 뒤인 1954 7월 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방송도 없었고 미군이 가져온 텔레비전이 전부였습니다. 본격적인 TV방송은 1961년에 국영 KBS가 개국하면서 시작되고,66년에 이르러 국산 텔레비전이 시중에 선보이게 됩니다. 그때 이후 80년 말에는 컬러 tv시대가 열립니다.

 

텔레비전이 주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외국영화를 안방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당시에도 텔레비전을 통해 여러가지 외국영화들이 인기를 많이 끌었는데요. 특히 기억나는 것 가운데 원더우먼, 600백만불의 사나이, 슈퍼맨 등 흥미진진한 볼거리들이 많았죠. 그런데, 초창기에 사람들이 TV프로그램을 현실과 혼돈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특히, 아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대책없이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 일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 안타까운일입니다. 혹시7.80년대 이후 태어나신 분들 중에 제 말씀이 믿기지 않는 분들이 있으신 것 같아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사진자료1,2,3). 이 아이들이 부모님께 한 번만이라도 영화속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물어봤더라면 그런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모르는 것이나, 혹은 미심쩍은 일은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야, 큰 손해를 미리 막을 수 있는 겁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기자 생활을 해 본 저로서는 좋은 질문이 좋은 기사를 낳는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많이 체험했습니다. 집요하고 계산된 질문이 취재원들의 허를 찌를 때 진실과 가까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자녀교육에도 질문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미 목사님을 통해 여러번 들어신 이야깁다만, 우리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딴짓하지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부모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은 훌륭하신 분들이니까 모르는 것을 많이 물어보라고 한답니다.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혹은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질문을 받고, 그런 문답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창의력과 지능이 발달된다고 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질문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만, 잘 되지 않더라구요. 영어도 영어지만 괜히 수업시간에 지장을 주는 것 같고,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주로 뒤에 앉아서 경청하는 편입니다. 듣는 훈련을 하는 거죠

 

II.성경공부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좋은 질문을 통해서 성경구절 속에 들어 있는 감추어진 보물을 캐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질문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특히 요한 복음에서 믿음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식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과는 조금 색깔이 다릅니다. 의심합니다. 따져봅니다. 짚어봅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죠. 이번에도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셔야 할 아버지의 집,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는 길을 제자들도 다 알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품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불쑥 질문을 던집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라고 이야기 하는 걸 보니까 당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에 대해 긴가민가 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도마만 모르고 불쑥 던진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마가 우리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뤄 당시 제자들 다수도 몰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째든 이 질문의 답이 참 걸작입니다.

 

III.여러분들이 너무도 많이 들어 보셨던 유명한 말씀이라 외우시는 분들도 많으실 줄 압니다. 다같이 대답해 보실까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저는 처음 이 말씀을 읽었을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시구나.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교만하신 것 아니야.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그 곳은 이렇게 이렇게 가는 거야, 어디 어디 지나서, 혹은 그 곳이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곳이라면 , 좀 시적인 표현으로 돌려서 말씀하시거나

 

,한편으로는 정말 대단하시다, 내가 믿는 신이 이정도는 되야지, 다른 종교에서는 천상천하 유하독존이라고 외치는 분도 있는데, 멋있다. , 진리, 생명, 좋은 말 다 들어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개인적으로 너무나 많은 우연을 체험했는데요, 마치 누군가가 소를 몰아가듯 저를 몰아가는 듯 했습니다. 사실, 좀 폼나는 설교를 하기 위해 주석부터 펴서 배경과 원어에 관련한 지식 등 평소 성경공부 모임에서 하는 공부와 묵상 방식과는 다르게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답을 알아가는 것 같아 참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의 묵상, 저만의 질문이 없었던 겁니다. 다 남의 말입니다. 좋은 말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래서 여러분께 설명해 드릴 수 있겠는데, 감동이 없었습니다.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을 덮고 사람들을 만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평소하던대로 나만의 두레박으로 은혜의 강가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번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또 한번 큰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왜 주님께서는 당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도마는 눈에 보이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주님은 난데 없이 당신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좀 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몇몇 주석을 참고해 보니,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등등등..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지, 단지 영적으로만 생각하면 그럴 듯 한데, 감동이 없었습니다. 좀 힘들었습니다. 시간은 가는데 설교의 핵심적인 깨달음은 없고, 좀처럼 건져지는 게 없었습니다. 히루 하루 지나가고 목요일 밤이었습니다. 지은이와 함께 놀다가 이른바 아하 모먼트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 딸이 설교준비 잘되가느냐고 물어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아니’, 말씀이 뭐냐고 해서 예수님이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한 부분이라고 했죠. 설교문 쓰기가 좀 힘들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아빠는 왜 예수님이 당신을 굳이 길이라고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지은이도 그러게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길도 아니신데” “밟고 지나가는 길

 

저는 그 순간, 몇해전 목사님과 저녁을 먹다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일본에 파견된 한 선교사가 배교를 했다는 소식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한 신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서양의 천주교의 유입을 막았고 박해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측은 체포된 신부들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고 지나가면 지역의 천주교인들을 살려주겠다고 했고, 끝내 그 신부님은 고뇌끝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밟고 지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언듯 들으면 참 믿음없고, 순교의 열정이 없어 보이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는 1966년 소설로 출판되어 종교소설로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 올라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인 엔도슈샤쿠 가 쓴 침묵이라는 실화소설입니다. 주인공인 예수회 소속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동료신부의 배교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1635년 일본에 갑니다. 그리고, 그 참혹한 박해 현장을 체험합니다. 이 신부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 사이에서 깊은 방황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응답 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철저히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사람들을 살리기로 하고 성화를 발로 밝으려는 순간,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과연 진짜 이런 음성이 들였는지, 아니면 신부님의 마음속 소리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기독교인의 선택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생명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세상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아들을 버리실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 그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값싼 싸구려 은혜로 둔갑시켜온 저 자신이 미웠습니다.

 

저는 순간 지금까지 의미없이 밟아 온 주님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심 때문에 팽개쳐지고 짓밟혀진 주님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왜 주님께서 도마의 질문에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됐고, 성경학자들이 이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을 염두해 두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IV.십자가의 고난, 그 좁은 길, 그 길은 진리의 길이도 합니다. 사실 도마사도가 의심이 많았지만, 결국 요한 복음 20장에서는 누구도 하지못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앞서 한 찬양에도 나오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상처난 자국을 확인하고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한 고백보다 더 직설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더 친근한 고백입니다. 도마는 십자가에서 죽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확인한 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의심에 여지가 없는 참하나님, 참신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재 모습, 참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의 실재 모습이십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세상의 진리,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진리와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입니다. 신약성서학자인 윌리엄 버클레이(William Barclay)는 그의 요한복음 해설서에서 많은 성인들이 진리를 이야기 했지만, 자신이 그 진리라고 이야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며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주장이 예수 안에서 최고조를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실현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많은 성인들이 진리 가르치고 그 진리에 입각해 살려고 했지만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모든 인류를 구원에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과 행위는 원천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여 도덕적으로 무결하며 참되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V.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여기에 쓰인 그리어 단어는조에라고 해서 생명이라는 뜻인데, 요한 복음에서는 많은 경우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예수님의 생명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영생은 바로 참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7:3).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구주로 고백하며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겠다고 선포하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영생에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는 로마서 64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레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이곳에 새생명도 같은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서 4319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광야의 길과 사막의 강은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는 어떤 면에서 역설의 땅입니다. 왜냐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땅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땅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인데 그 원뜻은 직역하면From the word ‘말씀으로부터라는 뜻이되죠.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곳은 바로 광야생활을 하면서 였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의 땅 열사의 땅 사막에 물은 곧 생명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영원하고, 죄인들에게 영생의 복을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에서 만나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이 생명,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선물로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바로 이런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 위를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바로 그렇게 살다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섭니다. 우리가 역사속에서 우리와 함게 숨쉬다 떠나시고 다시 오마 약속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분과 충만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못한 채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분께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길을 알아야 갈 것 아닙니까?

 

정상에 오를 길은 많다고 합니다. 마호메트도 있고, 부처도 있고, 공자도 있고, 노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길, 바른 길은 그래서 길을 잃지 않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은 바로 당신을 밟고 가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VI.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새학기가 시작되고 또 직장과 가정에서 일상적인 일들속에서 바쁘실 줄 압니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당연하게 보지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길을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침묵하신다고 불평만 하지 마시고, 미세하게 들려오는 그 분의 응답에 새벽마다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통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박해의 현장에서, 불의가 판치는 폭력의 현장에서, 돈과 목숨을 바꾸어야 하는 야만의 현장에서, 여전히 함께 울고 고통해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찢겨지고 짓밟힌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나 그속에 영원한 생명, 천국의 소망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 생활을 돌아보며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말씀에 비춰 우리의 삶을 돌아 보며 아파할 때만이,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러 오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지 않는 것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으로 일관할 때 우리는 매일 매일 그분의 얼굴을 의미없이 밟고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던지신 그 희생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성령 말씀을 통해 각자가 은혜의 강물을 길어 올리는 체험을 하셔서 머리로만 아는 성경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성경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갈급해지고 그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면 할 수록 주의 희생을 값지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바울 사도는 이런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고 평생을 십자가의 길로만 갔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을 통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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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금요저녁예배설교] 여호와께 감사하라 September Friday Night Sermon

 

여호와께 감사하라  

본문 : 136:21-26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6:21-26

 

한 해의 추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을 감사하며 풍성한 곡식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절기입니다. 지금 계절적으로는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지만, 우리의 금년을 풍요롭게 해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허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에는 거두어 들인 곡식만 예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가정을 함께 드리는 절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유대력에 의한 3대 절기는 출애굽기 23:14-17에 계시된 바와 같이, 무교절이라고 하는 유월절과, 칠칠절 또는 초실절, 오순절이라고 하는 맥추절과,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 절기의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서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습니다.

 

히브리인의 유일하신 하나님 사상에서부터 신약의 영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건은 이러한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민족적 단결을 도모한 것이 그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 때의 수장절을 은혜 시대의 감사의 제사로 여기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감사의 조건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감사할 조건을 주실 하나님을 신앙하며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광야 40년의 노정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시지 않았으면 허허한 벌판에 천막을 치고 그들이 어떻게 광야 생활을 견디어 내었겠습니까? 그들의 기다림은 맹목적인 신앙의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이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옮겼다가는 그들에게 금방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들의 경험에 의한 확신이었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은 성막 한 가운데입니다. 말씀 중심의 삶을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백성들이 고통의 종점이 되었다 싶으면 가나안에서 또 다른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그들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결코 전파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의 수확에 대한 기쁨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들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들이 얻은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기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1년 동안 수고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그들의 삶의 우선권이 먼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매사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우선권을 하나님께 돌릴 때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기업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자 누구에게나 이미 응답된 기도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우는 무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고통과 좌절과 슬픔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민족사 속에서 한의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세에 동방의 빛으로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축복 앞에 감사의 눈물로 제사드립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물이 애통하는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을 경험했고 40년 광야 생활도 경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가나안 족속과 수많은 피를 흘리며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적하고 있는 우상 숭배와 부정과 불의와 향락의 불레셋과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편 136편에서와 같이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자신에게 향하여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가정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사회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의 역사가 재조명된 이 땅에서, 그들이 순전한 맘으로 감사하지 못하여 빼앗긴 축복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1. 창조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선하시고 인자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있기까지 인간은 낙원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있을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땅에서 선택받은 백성으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심판과 축복 속에서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이류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주었지만, 그들은 육체를 입고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 제물로 빛의 열매를 드립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시편 기자는 먼저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섭리된 삶을 살아감으로 감사드립시다. 그것은 오직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2.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애굽땅에 종이 되었던 430, 요셉은 정착한 고센 땅에서 이제는 떠나야 했습니다. 비록 고통스럽긴 해도 먹을 것이 많은 나일강변을 떠나 황량하고 적막한 땅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이 있기까지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고통이 임박해지자 그들은 탈출을 주저했습니다. 오늘 수많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막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자유를 찾게 해주어도 잠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영원한 자유를 포기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고통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온갖 경험을 한 다윗은 시편 118:6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애굽을 떠난 자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부터의 탈출입니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안정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때가 있는가 하면 불행한 때가 있고, 즐거운 때가 있는가 하면 괴로운 때가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과 함께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앞장서신 싸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든지 평안하든지 하나님은 함께 계셔서 약속의 자녀들을 위하여 영원토록 싸워 주십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벌떼처럼 그를 에워 쌌으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신 것을 알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감사는 삶 속에서 여호와를 의뢰하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내가 안다는 고백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전부를 드림으로 감사절의 서원 제물을 삼읍시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4. 소망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14:1, 2).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할 제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할지라도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질병과 절망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주님의 모습을 따라 살아야 됩니다. 눈물과 슬픔이 없는 곳, 사망과 고통이 없는 곳,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승리해야 합니다. 금년 감사절은 우리의 산 소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드리는 축제의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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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금요저녁예배설교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본문 / 욥기 42:1~6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욥기 19절에 보면,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잘해주시니까, 욥이 축복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만일 축복을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떠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2).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의 신앙의 진위(眞僞)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위를 늘 공격합니다. 저 사람이 왜 예수님을 믿는가.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왜 믿음생활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셔서입니까? 건강의 복을 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가정에 행복을 주셔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 등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만일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다 빼앗으셔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욥에게 무차별적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재산이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자녀들까지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까지 그에게 저주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은 혼자 남았습니다. 생명만 겨우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욥은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와서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은 처음에는 고난에 대해 잘 대처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1:21).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내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험악해졌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 까다로운 질문을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욥이 혼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장면입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께서 반응하시지 않으실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욥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쏟아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쁜 기도는 없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버릇없이 행동해도 집 안에서 결판내려고 하는 것이 가출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싸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두 사람이 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따로따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할 것은 다 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하고,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놓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적 행동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자신이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고, 의미 없는 되뇜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밥도 차려줍니다. 집 청소도 합니다. 아이들도 돌보지만, 마음은 가정에서 떠난 여인과 같습니다.

대화하지만, 대화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집에서 함께 살 뿐입니다. 정신적 이혼 상태와 같습니다.

 

욥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점잖은 인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욥이 친구들의 변론에 대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집요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을 속이지 않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립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고, 근사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모양을 내고, 규격화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고, 미사여구로 꾸미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통정(通情)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의문화가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욥은 처음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1:21, 2:10).

 

그러나 욥은 무조건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사투(死鬪)를 벌이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화가 난 상태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욥은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해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내리고, 자신의 문제를 무마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이미 답을 얻은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 매우 힘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너무 많아 그냥 문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고, 답이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창자가 뒤틀릴 만큼 기도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외로워집니다. 나의 고통 안으로 들어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삶의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그래서 삶이 헷갈립니다.

고통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답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얄밉습니다.

 

고통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게 답을 얻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난다고 해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따지더라도 하나님께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넓은 분이십니다. 맹숭맹숭하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창자가 끊어질 듯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 속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전투적 의지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점잖고 형식적인 기도를 되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맹숭맹숭하게 영양가 없는 미사여구로 기도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십자가와 마주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난해(難解)한 사건입니다. 욥의 고난이 난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내칩니다.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고통은 독특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독특한 고통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26:39).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시며 아버지께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레슨(lesson)은 정직함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자신의 감정을 매우 정직하게 여과 없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욥의 인내도 중요하지만,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고통을 위장(僞裝)하거나 신앙이 좋은 체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고통과 환경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면, 이곳은 눈물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위장하려 합니다. 고통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고통을 멋지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직함,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지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영혼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사여구로 꾸며 자신을 감추어버린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치며 펑펑 우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왔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이 없는 기도, 토해내지 않는 기도, 감정을 숨긴 기도를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셔가며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이 기도하는 것에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치열함이 묻어있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시련과 고통과 환난과 어려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다가가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고통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가벼움입니다. 신앙의 형식만 남아있고, 내용은 얄팍해져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매우 가볍게 다가갔습니다. 남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친구들은 그럴듯한 교리로 무장한 교과서적인 답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늘 그것을 고민합니다. 제 나이에 삶 속에서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인간의 고난의 깊이를 몸에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직면한 고통에 대해 말씀을 통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다가가 답을 주려고 하는 얄팍한 설교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맞는 말을 하는데,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의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고통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흉터를 놀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작아 보이는 상처라도 그는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십니까? 삶이 무너질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착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결론만 붙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심히 불편하고,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습니까.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요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한 신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로 인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 씨름한 흔적 없이 믿음을 쉽게 가진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인생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안에서는 요동치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성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 하나님께 떼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결해달라고 떼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하나님과 주고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덤덤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힘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저 그렇고, 평안한 때에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없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육적(肉的)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치졸했습니다. 간사했습니다. 인간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지독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하실까요.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있으면, 성경을 들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답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욥은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고, 그 기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욥은 매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고,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친구들은 기막힌 답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지만, 욥은 그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승부를 걸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만만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싸움입니다. 무엇과 싸우시겠습니까. 욥은 마귀, 친구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본문 욥기 42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마침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쉽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길고 길었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냉랭한 교리적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책으로 공부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질문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긴 고통 속에서 뒹굴고 소리치며 하나님께 원망하며 대들다가 마침내 그는 하나님과 마주쳤습니다.

 

욥기 42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동안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듣기만 하던 사람이 자신이 들은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모든 전쟁이 끝납니다. 모든 시비가 그칩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왜 애매모호합니까?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헷갈렸는데, 이제 보았습니다. 더 이상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고, 고통이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나의 고통이 해석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고통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의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고통마저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욥의 인내보다 탁월하십니다.

 

욥은 앙탈을 부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쏟아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습니다. 욥이 언제 하나님께 다가오는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욥에게 맡기셨습니다.

 

욥이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답을 빨리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대가(代價)를 통해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욥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해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뻔한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을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답을 미리 노출하시지 않으십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을 미리 보고 나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올바로 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부림치며 익힌 만큼,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리더가 설명해주는 하나님은 머리에만 남을 뿐입니다.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면, 머리에 남아있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은 삶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싸우며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떠들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욥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터(Martin Luther)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시다니,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욥은 탁월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은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욥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따졌습니다. 욥은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욥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과 크게 다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입술을 통해 욥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이 고백이 나오는 순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시비를 잠재워버리시고, 욥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사탄 앞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인내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시고, 욥이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통해 이전보다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을 통과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가(眞價)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두십니다.

 

도자기를 몇 도에 굽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강도(强度)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구우면, 쉽게 깨어지는 그릇이 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힘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인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한 단계에 머물러있으면, 하나님께 부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무당을 찾아가 액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가 맺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둘도 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8:35,37~39).

하나님과 바울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도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마저도 하나님과 바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유가 넘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을 제거해버리면, 욥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모든 시험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 믿음의 이유이십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십니다.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 흔들릴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테스트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혼자 고난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마침내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과 배신과 고독과 오해의 긴 터널을 통과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한가운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은 계속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깊고 높고 풍성한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모르는 척하시는, 비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손들게 됩니다. 그 후에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더없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나는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욥은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우리를 칭찬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정직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맴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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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설교 / 다시 살아나는 힘

본문 / 호세아 6:1~3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세아 시대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호세아의 가정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호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이 시대의 영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한 후, 밖에 나가 다른 남자에 의해 임신하고 돌아왔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왜 그런 곳으로 몰아넣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행음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호세아를 시청각 자료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종종 내리십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밖에서 임신하여 돌아와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호세아 1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의 의미가 좋지 않습니다.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 1:6). 히브리어로 ‘로’는 ‘없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로루하마는 ‘긍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고멜이 세 번째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호 1:9).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아들과 딸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알리셨습니다.

간음한 여인과 결혼한 선지자 호세아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곤혹스러운 일을 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고통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네가 내 마음을 알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고멜은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다른 남자에 의해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과 호세아가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호세아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네가 내 마음을 알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음에 빠져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겪고 있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고 계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픔을 아는 사람입니다. 선지서를 보면, 선지자들은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고통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다니엘, 에스겔을 비롯한 선지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 시대의 아픔으로 인해 고통했습니다. 선지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 속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자신이 경험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느끼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크게 쓰임 받는 목회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통을 많이 겪었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거나 시련과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인생에서 고통의 쓴 물을 경험하고, 밑바닥까지 경험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신앙에서 참으로 큰 주제입니다. 대개 십자가를 머리로 이해합니다. 깊은 고통의 끝에서 십자가와 마주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고통을 통과하는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 뒹굴다가 십자가를 만납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물론 교리를 통해서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이해한 것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고통의 끝점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고통으로 절규하실 때, 고통의 어두운 커튼 뒤에서 울고 계시는 성부(聖父) 하나님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쉽게 시작하신 분들은 십자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 하나님과 고난이 뒤섞이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십자가에 아들을 매다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호세아의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의 일부일 뿐입니다. 호세아는 자신이 겪는 고통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고통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을 바라보시며 고통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발견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바뀝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는 인간의 고통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고통에 다가가다 보면, 인간이 고통하는 것보다 더 크게 고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호세아가 직면한 고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인해 고통하시는 것을 살짝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처럼, 오늘날의 목회자, 사역자들은 고통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하는 사람이 목회자의 눈에 보이면, 그때부터 목회가 시작됩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직면하여 몸부림치다보면, 어떻게 목회할 것인지 보입니다. 고통을 외면하고 목회한다면, 그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세상의 고통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세상이 고통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은 절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고통이 그 속에 있습니다.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습니다. 호세아 5장 13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병들었습니다. 상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칠 수 없었습니다.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구했지만,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병을 고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심각한 상태로 망가져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졌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상태가 심각합니다. 가정이 휘청거립니다. 가족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지도자들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끝에 서있습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답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빨간 불이 켜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 나고 병들어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보내시고,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진단하셨습니다.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심플(simple)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이 깨어졌습니다. 왜 깨어졌습니까? 왜 망가졌습니까? 왜 병들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남으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몸살을 매우 심하게 알고 있습니다. 원인은 무엇일까요? 세속화가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세속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에 치우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세상이 앉아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집 앞에 교패는 붙어있는데, 그 집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기보다는 TV와 신문, 인터넷을 더 많이 봅니다. 말씀보다 돈을 더 많이 묵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우상숭배 속에는 음란이 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는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우상숭배는 곧 음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도덕을 상징합니다.
우상숭배는 영적 음행이고, 음행은 육체적 음행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하면, 육체가 타락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에 빠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음란합니다. 가정이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가 성적 타락입니다. 음란이 노골적인 사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교회도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우상숭배와 음란만 남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요즘 부부 사이에서 불륜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미쳤습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자녀들이 탈선했습니다.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정신적으로 병들어 고통하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정신병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죄악의
 물결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취해 세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너무 많이 사랑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버느라 정신없고,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쓰느라 정신없습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니까 교회에서 기도회는 인기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기도가 사라졌습니다.
기도회에 사람이 많이 오고 적게 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철야기도 하는 것을 편안하게 느끼지만, 철야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도에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카페에 앉아 3~4시간은 쉽게 보내지만, 밥을 먹기 위해 많은 시간이 걸려도 먼 곳까지 가지만, 기도하는 자리에는 오지 않습니다. 겉모양만 번지르르 할 뿐, 속은 곪아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에 빠져있습니다. 세상을 구하면, 우리는 속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을 구하면, 그 결과가 어떠한가를 호세아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을 구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본문 호세아 6장 1절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치셨지만 하나님께서 싸매어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셨으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나님께서 싸매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북한은 핵을 들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치료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치료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치료자가 되십니다.

본문 호세아 6장 3절에 보면,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근원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나은 지식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지식이 많습니다. 세상에서도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투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투자하면 망할 확률이 높습니다.
등산에 대한 지식 없이 산을 오르면 죽습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하는 데 산에 오르는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자동차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없이 운전할 경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사고가 나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나무에 대한 지식 없이 나무를 기르다가는 나무를 죽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런 지식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고, 나라가 망가지고, 온 세상이 망가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심각하고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욕구를 형상화시킨 것입니다. 인간의 탐심이 우상숭배를 만들어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면, 우상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살려줄 것 같은 우상이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상은 허상(虛像)입니다. 실재(實在)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입니다. 우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목을 맵니다.
사람들은 사랑할 이성을 원합니다. 자기가 찾던 사람을 만나면,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만족이 있을 줄 알고, 거기에 목을 맵니다. 그런데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욕망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과 욕망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사랑과 욕망을 구분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구합니다.
그런 관계에서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사랑을 구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구했고, 그 속에 탐심이 불타올랐기 때문에 그것이 채워지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욕망은 쉽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다른 욕망을 찾아 나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배우지 않고서는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욕망은 어떤 것입니까? 상대를 희생시켜 자신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육체적이고 자아 중심적입니다.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니까 집에 가서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 사랑은 시작도 아름답고 끝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욕망은 시작도 끝도 비극입니다.

호세아서에서 만나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음란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자신의 욕망이 추구하는 대로 형상화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숭배와 음란이 함께 움직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은 우리를 오히려 망하게 합니다. 마귀는 잘못된 지식을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잘못된 지식은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갑니다.
전도서는 하나님 없는 지식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가르쳐줍니다. 세상 지식의 끝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떠나가게 하고, 허무와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요즘 인문학 열풍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인문학은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인문학도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마틴 루터(Martin Luther) 등은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는 인문학은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학문은 결론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질문하고, 신학은 답한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지식을 쌓고도 망하는 길로 갑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의 지식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바른 지식을 대하면, 세상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 교회의 금요철야에 학생들이 많이 참석한다고 이야기했더니 “그 학생들은 공부하지 않고 철야기도하러 나옵니까? 그 학생들은 언제 공부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은혜를 받으면, 공부를 잘하게 되어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지혜의 문이 열립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내가 누구인가 알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 알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입니다.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없습니다.
철야기도하러 나와서 은혜를 받으면, 100% 보장됩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왜 방황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살 것 같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세해서 성공한 자리에 있지만, 망가지는 인생이 많습니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른 채 달리다보니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살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풀립니다.
하나님을 알면, 인생이 보입니다. 인생 전체가 보입니다. 어디에 삶을 쏟아 부어야 할지 깨닫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등하느라 세월을 보냅니다. 왜 갈등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준이 정확하게 세워져있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등하느라 세월을 다 보냅니다.
왜 갈등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준이 되시면, 갈등이 사라져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의 기준이 정확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생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빌 1:20). 살고 죽는 이유가 그리스도와 복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등하거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선명했습니다. 그는 이기적이지 않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지 않았습니다. 선명하고 뚜렷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스라엘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버리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식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취급되는가에 여러분의 미래가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가 여러분의 삶을 결정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면, 그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놓여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온갖 프로그램을 동원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합니다.

말씀은 뒷전에 두고, 이상한 프로그램이나 세미나로 대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피곤하기 때문에 캠프 기간만이라도 쉬게 해줘야 한다고, 말씀은 양념 정도로 생각하면, 그 캠프는 죽습니다. 나중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캠프에 보내지 않습니다. 아이를 쉬게 하기 위해 왜 굳이 교회 캠프에 보내겠습니까.

본문 호세아 6장 3절에 보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자고 강조했습니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힘써 알자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힘써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욥은 고난 가운데 마침내 하나님과 대면(對面)했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욥은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욥은 눈이 열려 하나님과 대면했습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전환점(turning point)은 무엇입니까?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온몸으로 만난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후 야곱의 인생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만 들었다가 하나님을 눈으로 본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현재의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성경 속에 기록된 역사적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의 시간, 나의 삶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으면,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 가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운전하고 달려가는 자동차 안에서, 일하는 가운데, 집에서, 때로는 잠결에도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둔감하고, 죄 속에 살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끝에 계신 것 같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의식에 참여해도 마음은 냉랭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거리가 느껴진다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7).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도록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도마는 확실하게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감각적 시대’라고 합니다. 온몸으로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감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것을 느끼고, 좋은 것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감각으로 죄를 즐기고, 감각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여 망가져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호세아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으로, 모든 감각으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과 혼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모호하게 아는 것에 그친다면, 감각적인 세상에서 유혹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머리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죄악의 물결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으로 들어가 보세요. 유혹의 현장에 가보세요. 음란한 바람이 불어 닥치면, 웬만한 사람은 정신을 잃습니다. 우리의 감각과 이성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주저앉아버립니다.
정욕을 부채질하는 곳에 가보세요. 열기가 대단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의 현장에 가보세요. 뜨겁습니다. 화끈합니다. 불길이 타오릅니다.
슈퍼스타의 공연장에 가보세요. 영혼이 떠나갈 정도로 압도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소리 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상태로 세상으로 나아가면, 모든 감각을 흔들어놓는 세상의 유혹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10분 기도했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상태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무슨 재주로 이기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8).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은 예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열기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년 가을 광안대교에서 불꽃축제를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압도당합니다. 그런데 동네에서도 아이들이 불꽃놀이를 합니다. 거기에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들끼리 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압도당하면, 온 영혼이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유혹을 이길 만한 강력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여길 만큼 하나님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적 경험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찬송가 몇 장 부르고, 잠시 기도했다고 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열기가 매우 강력합니다. 세상은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강한데, 신앙생활은 지루하다면, 세상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보다 세상의 즐거움이 강하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교리로만 알고, 하나님을 뜨겁게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는 금요철야기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주일 동안 세상의 죄악의 물결 속에서 살았습니다. 주일에 1시간 자리에 앉아있는 것으로는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푹 빠져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경험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께 빠져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가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세요. 여러분의 고통에만 머물러있지 마시고, 고통을 통해 십자가를 발견하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광로입니다. 그 속에 빠지면, 죽고 싶을 만큼 좋습니다. 세상의 하찮은 우상과 즐거움으로부터 우리를 빠져나오게 하고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을 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금요철야에 오실 때에는 작정하고 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기를 소망하며 오셔야 합니다.
금요철야에 오는 순간, 세상에서 놀던 사람도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영적 흡입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금요철야 시간에 압도하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깊은 도를 깨닫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빠져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금요철야 시간에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여호와께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깨어진 것을 모두 싸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세요. 그것이 가장 위대한 지식이요, 그것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수록 이 세상의 음란과 우상숭배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만족과 기쁨, 즐거움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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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고난에 응답하라 Friday Night Sermon

고난에 응답하라
본문 / 로마서 5:3~6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은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하루도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온갖 고난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마치 온 세상이 고통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고통의 바다, 고해(苦海)인 것 같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고통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별별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는 무풍지대(無風地帶)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이 성도들 중에도 많습니다.
교역자들이 제출한 심방보고서를 보면, 성도들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아픈 사연들이 매우 많습니다. 아픔, 시련, 고난 등의 문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지금은 고난이 없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만 고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중ㆍ고등학생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찌르면 눈물을 쏟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네가 걱정할 게 뭐가 있냐”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ㆍ고등학생들을 만나보면, 인생은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고난이 우리를 지옥과 같은 곳으로 끌고 갈 수도 있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축복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갈라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하던지 천국과 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종류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reaction과 response, 두 종류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두 가지 모두 ‘반응’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reaction은 반응이라 할 수 있고, response는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반응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절망합니다. 때로는 분노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벽을 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reaction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힘들어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이 reaction입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본능적인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께 반응했습니다. 그것이 reaction입니다. 인간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누구나 이렇게 행동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갑자기 몰아닥치면, 처음에는 누구든지 당황하여 인간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힘듭니다. 죽고 싶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절망이 큽니다. 고통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한 순간에 뒤집어엎어버립니다. 고난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뒤엉켜버립니다.
reaction은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reaction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response해야 합니다. 고난에 응답해야 합니다.
response는 reaction과 다릅니다. reaction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response에는 자신의 의지가 들어갑니다. 자신의 주관이 들어갑니다. 자신의 해석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response는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response는 우리의 의지가 담긴, 믿음의 행동입니다.

reaction은 본능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것은 reaction입니다.
response는 reaction과 다릅니다. response에는 믿음이 들어갑니다. 의지적인 행동이 따릅니다. 본능적인 행동을 거부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도적입니다. 믿음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반응(reaction)과 응답(response)은 전혀 다른 인생을 만듭니다.

신자는 고난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고난에 대해 체념해서도 안 됩니다.
고난에 대해 반응하기만 하면, 궁지(corner)에 몰리게 됩니다. 반응(reaction)은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화시킬 뿐입니다.

신자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해야 합니다. 고난 자체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을 봅시다. 다니엘은 포로로 붙잡혀 바벨론으로 갔습니다.
다니엘의 삶은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를 시기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난의 풀무불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했습니다. 그는 고난에 믿음으로 응답했습니다.

고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더욱 강해집니다. 진짜 믿음은 용광로 속에서 더욱 진짜가 됩니다. 그것이 고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고난 속에서 죽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고난에 응답했습니다.

고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려면, 상황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잘 해석하면, 해석의 과정 속에서 고난의 덩어리가 작아집니다.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석하면, 고난을 다루어서 고난에 대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재해석하는가가 핵심입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면, 고통이요 절망입니다. 그러나 상황을 재해석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상황을 다르게 볼 줄 압니다. 오랫동안 믿음생활하다 보면,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angle)이 달라집니다. 관점이 다양해지고 넓어집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다 보면, 다른 눈이 열립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믿음생활하다보면, 우리의 시야가 점점 넓어집니다. 사물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둘러싼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많은 것과 연결되어있으며, 하늘에 닿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의 때에 왜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고난을 당하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 바로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가는데,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왔습니다. 길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변하여 모세를 향해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기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습니까? 길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길이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든 길을 내실 수 있으십니다.
믿음의 시각(視覺)을 가지면 자유로워집니다. 믿음은 큰 그림을 보게 합니다. 상황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보게 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했고, 모든 것이 꼬일 대로 꼬여있었습니다. 요셉은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react했다면, 그의 인생은 굉장히 불행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렌즈(lens)를 고난에 맞추면, 고난에 집중하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고난에 response하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고난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불을 걷어차고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다 보면,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고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렌즈가 바뀌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환난과 시련에 대해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하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이 오는데 기쁘게 여기는 것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면, 고난은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에 대해 응답하면, 우리는 고난의 피해자(被害者)가 아니라, 고난의 수혜자(受惠者)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올 수 있는 수많은 고난에 의해 떠밀려 다니지 않고, 오히려 고난으로 인해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할 수 있을까요?
첫째, 고난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 자체를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관점은 바꿀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하나님의 징벌이라 생각합니다. 고난은 불행이요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나님은 왜 나를 버리시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표현입니다. 환난이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갑니다. 환난 자체는 힘듭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는 고난과 시련을 부정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환난과 시련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것은 고난에 대한 응답입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는 것은 환난 자체를 즐거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환난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자체는 힘들지만, 인내하며 연단 받는 가운데 마침내 이루어질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며 즐거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난 자체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연단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연단이 끝났을 때에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를 보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시고, 밀쳐버리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가까이 오시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난은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싫어하셔서 바울에게 고난을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바울이 약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바울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이 그에게 머물러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고후 12:9).
바울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더욱 깊어졌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react하지 않았습니다. response했습니다. 고난에 응답했습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절에 보면,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고난에 대한 response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배우고 익히면, 그 후에는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는 말씀을 다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이 오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체득한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제대로 박힙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배운 말씀입니다.
그 외의 것은 알 듯 모를 듯합니다. 삶에 체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으로 인하여 말씀에 눈을 떴습니다. 성경공부를 한다고 말씀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배우는 말씀은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오면, 다 사라져버립니다.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내 편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는데, 고난을 통하여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삶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인간의 한계이자 축복입니다.

고난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질문이면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결코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고난의 문제는 하나님의 편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쉽습니다. 하나님께 어려운 문제가 있겠습니까.
고난의 문제가 우리의 편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편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에 대해 설명해주셔도 우리는 고난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잘못된 관점과 견해를 가지고, 고난 속에서 회의(懷疑)에 빠져 어려움을 당합니다.

세상은 고난이고, 신자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의문의 고난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난 속에서 헤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으며 신앙의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고난을 다 없애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대해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response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선택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방식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 가운데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의 마지막 쓴 잔 한 방울까지 다 마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끝까지 고통 속에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를 선택하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지시고, 우리의 고통을 안으시고, 고난의 한가운데 들어가심으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고난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에 동참하심으로 우리의 고통을 다루시고, 고난의 바다를 우리와 함께 건너가십니다.
십자가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최고의 고통을 경험하심으로 온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가운데로 뛰어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서서 팔짱을 끼고 지시하시거나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겪으심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한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을 이해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과정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요,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독특한 축복이 고통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해 넘어지지 않고, 고난을 통해 강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는 가운데 우리에게 영적 근육이 생기게 하십니다.

나이가 들면, 근육이 약해집니다. 근육이 없으면, 서있을 수 없습니다. 관절염이 생기는 이유는 근육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근육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뼈를 받쳐주는 것이 근육인데, 근육이 생기려면 운동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은 특별히 운동하지 않아도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몸이 단단합니다. 그런데 근육이 없으면, 몸이 물렁물렁합니다.

역기나 아령을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근육(muscle)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근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근육은 고통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역기나 아령을 들면, 고통을 통해 근육에 미세한 파열이 일어나면서 근육질이 됩니다.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생깁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영적 근육이 필요합니다.
역기를 들 때, 처음부터 무거운 것을 들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들다 보면,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게 됩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이겨내야 합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나면, 처음에는 몸살을 앓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계속해서 들다 보면, 더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게 됩니다. 조금 무게가 달라져도,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고통 없이는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힘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근육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하게 살면, 성인병에 걸립니다. 먹고 운동하지 않으면, 활동하지 않으면, 몸이 약해집니다. 근육이 풀어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서있을 수도 없습니다. 근육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뼈는 있지만, 근육이 없습니다. 뼈를 받쳐주는 근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필요합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든 못하는 사람이든 고난은 찾아옵니다. 설명할 수 있는 고난, 설명할 수 없는 고난, 불가해(不可解)한 고난 등 별별 고난이 찾아옵니다.

고난은 고난을 통해 이겨내야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면서 만들어진 영적 근육이 또 다른 고난을 이겨내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음의 순례의 길을 걸어갈 때, 고난을 통해 만들어진 영적 근육이 필요합니다.
일평생 별별 사건과 수많은 시련과 고난과 시험이 닥치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아령으로 영적 근육을 계속해서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단백질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맞서 reaction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영적 근육이 조금씩 생깁니다. 영적 근육은 한꺼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면역 체계는 한꺼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순례의 길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영적 근육이 만들어집니다.

시련과 환난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그 시간을 통해 더 강해집니다. 30대 때에 매우 깊은 시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받고, 능력을 받고, 영적 근육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40~50대가 되면 어떤 고난도 가볍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웬만한 고난에는 믿음으로 response합니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고난을 전혀 경험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산 사람에게 어느 날 고난이 밀려오면,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영적 근육이 만들어진 사람들은 담력이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이 깊어집니다. 고난 속에서 성품이 다듬어집니다.
고난을 통하여 천국의 소망이 깊어집니다. 우리 안에 있던 불순물이 고난을 통해 제거되어 순결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금 같이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만 닮아가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강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 속에서 영적 근육이 만들어지면, 어떤 시련과 환난에도 즐거워하며 소망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유토피아(utopia)가 아닙니다. 고난의 무풍지대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집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은 고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은 저주요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렌즈로 보면, 고난이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궁극적 승리를 약속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거꾸로 매달로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의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집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와도 분명한 것은 끝에는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의 과정 속에서 별 일이 다 일어날 것입니다. 우여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를 순금 같이 빚으시고, 우리를 성화(聖化)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게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고난을 이겨낸 사람과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後者)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에 react한 사람들은 고난으로 인해 한이 맺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가해자(加害者)가 아닙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을 보세요. 사탄이 그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하시고,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욥기의 피날레(finale)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고난을 통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것을 믿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고난이 오면 힘듭니다. 그러나 무조건 ‘할렐루야’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인내함으로 영적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영적 근육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인내를 통하여 response함으로 영적 근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친구가 나를 위해 아령을 든다고 해서 내 몸에 근육이 생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근육을 만들려면, 내가 운동해야 합니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으며 내가 운동해야 내 몸에 근육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옮기실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고통의 바다를 건넘으로 영적 근육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면 인내해야 합니다.
만일 인내하기를 포기한다면, 지상(地上)에서 살 수 없습니다. 고난에 떠밀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는 고난을 통해 고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난마저도 관여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 근육맨이 된 것입니다.
그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난까지도 도와줄 수 있는 강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이 없기를 바라면, 힘든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과하되 바르게 통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다루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영적 근육이 강화되면, 고난을 감당할수록 강력해집니다. 그리고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의도하신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통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 근육이 생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더 큰 고난이 왔을 때,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어떠한 고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고난을 믿음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고난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경험입니다. 남의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리 들어도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몸이 아파도 당사자가 아픈 것이지, 내가 아픈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저 위로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고난의 참관자이지, 고난의 참여자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의 바깥에서 고난을 해석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봤습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머리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생동감이 없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도, 가슴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볍습니다. 기도도 가볍습니다. 묵상도 가볍습니다.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양은 다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이 있습니다. 단순히 은혜로운 찬양이 아닙니다.
고통의 밑바닥에서부터 나오는 찬송은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깊은 고난의 밑바닥까지 갔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强度)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만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밥은 절실하지 않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먹을 뿐입니다. 그러나 끼니 문제로 고통을 경험해본 사람이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변적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피부에 와 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말씀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나는 배부르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식적 지식과 경험적 지식이 있습니다. 인식적 지식은 머리로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큰 힘이 없습니다. 여기에 생명을 걸 수도 없습니다.
경험적 지식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지식입니다. 고난을 통해 경험한 지식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실제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 중에 중요한 것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책상에서 배운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입니다. 가까운 하나님이 아니라, 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더 배우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에 대해 말하며 측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언제 그것을 경험했습니까?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십자가를 만났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계속해서 십자가를 말한 이유를 아십니까? 십자가와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 한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게 됩니까? 평소에는 십자가를 깊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을 때, 십자가를 만나면, 그 속에 농축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죄인인 나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버립니다.

본문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이 가슴이 꽂힐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본문 로마서 5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지고 깨어집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경험하시고 난 후에 우리를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식으로 우리를 만나주신 분이 아니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하나하나가 뼈 속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아프다고 할 때, 우리의 아픔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인식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의 한가운데 밀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체득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노른자위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응어리가 풀리고, 아픔이 치유되고, 고통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저주요, 실패의 상징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실패는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이 십자가와 만나면, 그 고통은 다른 사건으로 변합니다. 고통이 축복이 되고, 고통이 아름다운 스토리(story)로 변합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가 홀로 당하는 고통은 저주와 같지만, 십자가를 만나면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사람들마다 다른 고통을 안고 십자가를 만납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십자가 안에서 다양한 색깔로 변하여 영롱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진리를 경험하고,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깊이 만나면, 그 속에서 우리의 고난은 새로운 색깔로 변화되고,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의 세계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때, 십자가의 의미를 일부분이라도 깨닫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엄청난 위력이 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십자가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반전됩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십자가와 연결되면, 실패가 아닙니다. 부활로 연결됩니다. 부활로 완성됩니다. 놀라운 영광으로 결론 맺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영적 경험이 쌓일 때, 믿음이 자랍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냥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교실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책상 앞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책을 통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파 위에서, 따뜻한 카페에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 치열한 싸움을 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험의 끝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고난 끝에서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믿음은 무적의 믿음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십자가로 맞서고, 고난에 응답할 때, 우리의 인생이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힘들고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풀리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미 다른 세계에 와 있습니다.

고난은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오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가 얕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한가운데서 만난 하나님은 다릅니다. 이론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재(實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온몸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때, 어떤 고난이 와도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거나 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믿음으로 재해석하고, 고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응답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고통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에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에 주님과 함께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를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인해 피해자가 되지 마시고, 수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심으로 영적으로 더욱 강력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불가피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영적 근력을 키워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응답하세요. 믿음으로 맞서세요. 그러면 고난은 반드시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고난은 반드시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반전시키실 줄 믿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만나면, 부활로 이어질 것입니다. 고난에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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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금요철야예배설교 / 형통한 삶의 원리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형통한 삶의 원리
본문 / 창세기 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만 확실하게 붙잡아도 복된 인생입니다.
다른 복을 다 받았다 해도 구원의 복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구원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복입니다.

성경은 미래적인 의미의 구원, 장차 우리에게 닥칠 천국만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지상(地上)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원 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 이전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진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 세상적으로 잘나간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축복이 그 삶 속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백성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 때에 잃어버린 것을 구원 받음으로 되찾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복을 받을 뿐 아니고, 우리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미래에 천국에 가는 복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묶여있는 것들이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은혜를 받으면,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의 삶과는 다른 일상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일에 은혜를 받고, 월요일에 출근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놀다가 주일 저녁에는 지쳐버립니다. 세상의 낙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에 생활의 중심이 잡혀있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복잡하게 살다 보면, 몸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기 때문에 맑은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삶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실해집니다. 새벽기도에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성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시간 관리(time management)가 되어야 새벽기도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객기(客氣)를 부리지 않습니다. 과욕(過慾)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욕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그런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졌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삶의 질서가 생겼습니다. 성실해졌습니다. 게으름이 사라졌습니다. 객기가 사라졌습니다. 정신이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졌습니다. 열 받을 일도 적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열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에 안정감이 생깁니다. 삶의 규모가 생깁니다.
신앙인들이 장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찬양대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장수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묶여있던 것들이 하나씩 풀립니다. 그래서 집안 전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힘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하면서 질서 있고 안정된 삶을 살면, 불필요한 일과 어려운 일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꼬였던 관계가 풀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변한 것이 많아집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안해지고 자연스러워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꼬인 것이 풀립니다. 나쁜 습관들이 제거됩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던 사람이 은혜 생활을 통해 평강을 얻게 됩니다. 어두웠던 가정에 웃음꽃이 핍니다. 그래서 일의 능률이 오릅니다.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은혜를 받고, 기도하다 보면, 모든 것이 처리됩니다. 힘 있게 찬양하다 보면,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게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문제와 응어리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가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 없이 살았던 때에 우리를 감고 있던 족쇄들이 하나씩 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싸움이나 갈등이 이전보다 훨씬 적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면, 삶의 전반에 걸쳐 혁명이 일어납니다.
저희 집안을 보면, 그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형제들끼리도 싸우고 정신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그런 모습이 없어졌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관계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백성에게 따라오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삶에 축복이 됩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자손들을 향한 야곱의 축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유언이면서도 예언입니다. 그리고 축복입니다.
본문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그림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샘 곁의 무성한 가지에 비유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샘 곁에 있는 나무는 가뭄과 상관없습니다. 기근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주변의 상황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땅이 말라있으면, 그곳에 있는 나무는 비가 올 때 잠시 파릇해지다가 다시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언제나 푸르고 무성합니다.
이집트의 사막은 매우 덥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곳곳에 나무가 있습니다. 싯딤나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나무는 샘 곁에 있습니다.

경기(景氣)가 좋으면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가,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표정이 굳어버리는 사람은 샘 곁에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때 잘 나갈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잘 나갈 수는 없습니다. 결과를 보면, 한때 잘 나간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가끔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반짝 축복이 아닙니다. 지속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비가 오지 않아 매우 메마릅니다. 잎사귀가 바짝 마를 만큼 태양빛이 강렬하지만,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살아납니다.
햇빛이 너무 뜨거우면, 햇빛이 나무를 말려 죽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결과적으로는 살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를 뛰어넘는 파워가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를 이겨낼 힘이 없는 것이 인생의 불행입니다.
샘 곁에 심어진 나무는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샘 곁의 나무는 뿌리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샘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뭄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를 강화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뿌리는 신앙의 기본기를 의미합니다. 복음, 신ㆍ구약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에 보면,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위에,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신ㆍ구약성경,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후에 허공에 뜹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습니다.
누가 구원에 이르는 복을 누립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왜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복음의 중요한 메시지가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대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기본적인 것이 내 삶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삶에서 근원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흔들린다 해도, 뿌리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삶이 요동치는 이유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잡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트경기장에 가면, 요트를 볼 수 있습니다. 요트의 바닥에 보면, 납덩어리로 된 축이 있습니다. 납덩어리로 된 축이 요트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파도가 쳐도, 요트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배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뒤집어집니다.
요트는 아주 날렵한데, 납덩어리가 요트의 중심을 잡고 있어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크지 않은 요트를 타고 태평양까지 항해하기도 합니다. 흔들렸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중심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뿌리를 지키면 나무는 삽니다. 그러므로 샘 곁의 나무는 뿌리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형 교회에는 건성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험 든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진리 안에서 뿌리를 확고하게 내려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3).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끊임없이 빨아 당기는 사람은 뿌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마치 성경에 구멍을 낼 듯이 집중하여 읽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사모함이 매우 큽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먹습니다.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말씀의 핵심을 기록하여 그것을 묵상하고, 그것을 놓고 기도하여, 말씀을 강화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믿음의 뿌리가 강화됩니다.
그 사람은 샘 곁에 뿌리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큰 일 납니다. 영혼이 힘을 잃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말씀 안에 살면, 어려움이 와도 말씀이 나를 지켜줍니다. 진리의 힘은 굉장히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에 빵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빵 앞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받으면, 우리의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환난과 시련과 고난을 넉넉히 이겨냅니다. 그리고 고난이 축복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의 한가운데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고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자랍니다.

바울의 신앙의 핵심은 ‘in Christ(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샘 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집회가 열립니다. 매일 새벽에 세 번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9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매일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혼자서 신앙생활하기 힘들면, 교회에 오시면 됩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쓰고 외워서 말씀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그러면 ‘무성한 가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삶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샘 곁에 심긴 나무는 자연스럽게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무성한 가지는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지에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요셉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창고에 모아들였습니다.
그 후에 주변 나라에는 기근이 들었지만, 애굽은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가족 70인을 다 먹여 살렸습니다.
주변 나라에서는 기근이 들었지만, 요셉은 끄떡없었습니다.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도움을 요청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나중에는 야곱도 애굽으로 왔고, 모두 고센 땅에서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면,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살게 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는 기근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이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샘 곁에 서 있으면 됩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요셉 가(家)의 모든 사람이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가족은 기름진 고센 땅에서 거대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부요합니다. 풍요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지만, 영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물질적 가난을 이겨낼 만큼 영적으로 부요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부요하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해도 항상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부요하고, 믿음도 좋다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부요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을 이야기할 때, 기쁨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사랑이 충만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소용 있겠습니까. 몸은 건강한데, 사랑이 충만하지 않고 기쁨이 충만하지 않다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구원의 복을 의미합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재적 삶 속에서 누려야 하는 부요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바닥을 긁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 끙끙 앓고 힘들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바울을 보세요. 인간적으로는 힘들게 살았습니다. 감옥생활도 했고, 쫓겨 다니기도 했고, 굶주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불편한 삶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지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그리고 바울이 쓴 서신을 보면, 감사로 넘쳐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했습니다(고후 6:10). 이것이 복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믿음의 백성들,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어려웠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쪼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여유로움이 항상 있습니다. 영적 부요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넉넉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습니다.
복음 안에 사로잡힌 부활의 신앙이 바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풍성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요셉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직장에서 매출이 신장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만 먹고사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지가 담을 넘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만 잘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만 먹여 살린 것이 아닙니다. 애굽과 주변의 나라까지 먹여 살렸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3). 여기서 ‘복’은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복 받은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나누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나눌 때, 복이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나눌 것이 없습니다. 채워진 사람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졌어도 결핍 증세를 느낀다면,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핍 증세를 느끼는 사람이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눌 수 없습니다. 더 채워야 하는데,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데,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를 축복하신 후에 우리를 통해 복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구원의 복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는 내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우리는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한 그릇이 차고 넘치면, 또 다른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흘려버리고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는 것, 나누어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비 중심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쓰기에도 모자랍니다. 이 사회는 과소비를 부추깁니다. 그래서 아무리 벌어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지금은 연봉이 올라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을 규모 있게 정리하고,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모자랍니다.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니까 나누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축복 안에 있지 못합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상태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느끼는 충분함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충분함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함을 느끼게 되면, 부요한 자가 됩니다. 흘려보낼 수 있게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재앙과 같습니다.
신앙의 최고 레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하는 삶입니다. 신앙의 절정에 감사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왜 문제가 생겼습니까? 에덴동산은 완벽한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완벽한 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무슨 죄를 지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천국의 삶이 시작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면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뻗어나가게 하십니다. 남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까지 빛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그늘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받는 사람이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축복하시며 내가 받은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여러분이 빨리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내가 샘 곁의 가지가 되어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 속에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위로 받고, 소망을 얻고, 구원 받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샘 곁의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라 비틀어져서 뿌리 뽑힌 나무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어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행복이 흘러가야 합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3~24절에 보면,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셉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요셉의 주위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요셉을 학대했습니다. 마치 활을 겨누듯 요셉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더 강했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변에 불신 세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셉은 전능자의 손을 힘입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셉을 붙들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도 아니고, 환경도 아닙니다. 우리가 전능자의 도우심을 경험하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서 신앙의 묘미(妙味)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련의 파도를 타고, 목적지까지 항해하는 법을 체득해야 합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함으로 인생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순풍에 돛단 듯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애물과 복병이 생기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전능자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온갖 술책과 간교함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리숙합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간교와 술수, 중상모략 등 온갖 죄악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을 이기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이기려면, 그들보다 한 수 위여야 합니다.
우리의 방식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세요. 요셉의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요셉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요셉을 빼내셨습니다.

전능자의 손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을 보면, 전능자의 손이 항상 있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말씀의 원리와 방법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4~25절에 보면,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야곱의 전능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축복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셉을 축복하는데, 야곱의 이름이 등장하고, 하나님을 가리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셉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야곱은 문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약점 투성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복을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잔꾀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기로 결정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고치고서라도 그를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소망 없는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을 안겨주시고 그를 축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축복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나아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습니다. 성격 좋고, 매너 좋고, 매력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성격이 까칠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격이 까칠해도 구원 받았습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면, 오십보백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예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 받게 하시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야곱은 실패 투성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후에 야곱이 요셉의 자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것을 보면, 야곱은 두 팔을 엇바꾸어 얹었습니다. 야곱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었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시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편에서 주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될 것이 안 되고, 안 될 것이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일반적인 은총을 넘어 특이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야곱의 인생처럼, 무엇인가 안 되고, 일이 꼬여 힘들게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하는 일마다 어렵습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그것을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야곱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이 되지 않는 야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데 있습니다. 인간 야곱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우리의 실수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하나님과 우리는 공동 운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편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력대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으로 우리의 인생이 결론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의 편이 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조금 느긋해질 수 있습니다.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죽는다고 앓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창세기 49장 24절에 보면,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석이 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요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환경으로 인해 요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석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1).
우리는 이스라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의 삶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키셨습니다. 망할 것 같았지만, 망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요셉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안 될 것 같았던 것을 되게 하셨습니다.

열심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아주 잘 될 것 같았는데,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 될 것 같았는데, 막판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99% 될 것 같았던 일이 안 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그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 될 것 같아서 눈물 흘리고 금식하며 기도해서 잘 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입술에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으로 사는 삶을 끝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재주와 능력과 열심으로 살던 것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열심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열심 안에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 아래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능자의 손길 아래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전능자 야곱의 손에 우리의 인생이 달려있다는 것을 믿으면,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버지의 자녀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사고를 친다 해도 아버지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배짱이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야곱이 한두 번 사고 쳤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두 번 도와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문제를 뛰어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자신만 복을 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믿음의 거장(巨匠)으로 세우셔서 그들의 자손들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인생, 헤매는 인생이 아니라 길을 제시하는 인생, 남의 덕을 보는 인생이 아니라 남에게 덕을 끼치는 인생, 꼬이는 인생이 아니라 풀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추적해보면, 결론은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의 결론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전능자의 손을 의지하세요.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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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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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 둘 중 하나만 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둘 중 하나만 하라
본문 /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세상을 바라보면, 기대하기보다 염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염려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염려가 일상사(日常事)가 되어버렸습니다.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람들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옵니다.
염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이 세상은 염려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염려가 섞여있는 모습을 봅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새로운 한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리고 향후 10년 동안 한국은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 있을 것이라 전망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한국 교회 또한 10년 동안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염려는 인간의 삶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시대마다 염려의 주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염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이별로 염려하는 것이 다릅니다. 직업이 없을 때에는 직업이 없는 것으로 인해 염려합니다. 그러나 직업을 갖게 되면, 또 다른 염려가 찾아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정확하게 찾아옵니다.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염려 때문에 낭비하는 에너지와 시간은 엄청납니다.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염려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특히 연말이 되면, 염려가 많이 쌓입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 늘 염려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염려가 언제쯤 끝날 것 같습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의 염려가 언제쯤 끝나겠습니까?
나이든 분들은 건강을 염려하십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시험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학생으로 있는 동안에는 계속 염려합니다. 불안정한 경제 여건으로 인해 계속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주변 환경을 보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이든 어른이든 청년이든 남자든 여자든 직장인이든 누구든지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신 분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아이로 인해 염려하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32). 염려를 이방인과 제자를 구별하는 구별점으로 보셨습니다.

제11계명이 있다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다면, 불신자와 뚜렷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염려하는데,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며 살아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正體性)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7).
염려는 우리가 어디에 속한 자인가를 확증시켜줍니다. 염려는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갈 것인가, 불신앙의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기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운명처럼 붙어 다니는 염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6, 28).
이 말씀을 보면,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데, 새를 보고 꽃구경할 시간이 있나. 여유가 있어야 새도 보고, 꽃도 보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주제입니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두 사람에게나 가족에게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고 기록되어있다면 좋겠는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 불가능해보입니다.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頂上)을 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세 가지를 이룰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마치 그림의 떡처럼 보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삶,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는 삶,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때때로 염려하지 말라, 가능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Do not be anxious about something”라고 기록되어있지 않고,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도 바울이 치열한 인생살이를 모르고 말한 것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아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을 가볍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무리한 강요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급적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했다면, 우리가 화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하여 눈을 닦고 다시 봐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걸려 좀처럼 뒤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밀려오는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숨 막히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본문의 말씀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수백 가지 염려가 몰려오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니….
이런 본문을 읽을 때에는 그냥 읽고 지나가버립니다. 현실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무책임하게 내뱉는 넋두리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무게를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현인(賢人),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학식이 있는 사람, 경륜(經綸)이 높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중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답을 이 말씀 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주제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주제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주제입니다.
소극적인 주제는 “염려하지 마라”이고, 적극적인 주제는 “기도하라”입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염려’이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본문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기도와 연결되어있습니다.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염려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본문에서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염려의 대항마로 기도를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와 ‘다만 모든 일에’ 이 두 가지 표현을 대칭적으로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기도, ‘아무 것도’와 ‘다만 모든 일에’를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기도는 서로 반대편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를 붙들면, 다른 하나를 놓을 수 있습니다. 둘 다 붙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느 쪽을 붙들 것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염려와 기도,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염려와 기도는 마치 물과 기름 같습니다.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습니다. 따로 분리됩니다. 염려와 기도는 물과 기름 같습니다.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설교가 찰스 스윈돌(Charles Rozell Swindoll) 목사는 “염려의 리스트(list)를 기도의 리스트로 바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염려 내용을 기도문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꾼다는 것은 우리가 들고 있는, 무거운 염려거리를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섬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단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매우 디테일(detail)합니다. 굉장히 정교하게 조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어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알맹이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든 일에 기도와’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을 먼저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나오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일어나면,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집안의 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 때에는 창문을 열어서 집안의 공기를 바꾸어주어야 합니다. 환기(換氣)시켜야 합니다.
환기시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냄새가 몸에 배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질식할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공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염려의 환경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환기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 자체가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염려에 싸여있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한숨을 쉽니다. 염려거리를 늘어놓습니다.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마치 밀폐된 공간에 좋지 않은 공기가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염려가 더 자랍니다. 염려가 무럭무럭 자랍니다.

우리는 빨리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염려의 자리에 앉아있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의 자리에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재간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계속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염려는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계속 돈만 생각하거나 자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염려하는 형태의 우상입니다. 자신의 건강문제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자신의 몸이 우상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염려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염려는 주님의 손으로 옮겨집니다.

둘째, 간구입니다.
간구(懇求)는 기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입니다.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라기보다는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로 방향을 튼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집중(concentrate)해야 합니다. 주님께 마음을 쏟아내어야 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생각이 분산(分散)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진(double-minded)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산란(散亂)합니다. 삶이 굉장히 힘듭니다.
염려가 많은 사람을 보면,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고를 자주 일으킵니다. 실수를 자주 합니다. 정신없이 행동합니다. 마음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기도의 적극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가볍게 기도하고 끝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이 기도하지 못하고, 얄팍하게 기도하는 데 머뭅니다. 기도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염려를 기도로 막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염려 반, 기도 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도하기 위해 앉아있지만, 염려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것은 간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 반, 염려 반인 경우는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간구는 기도의 세계에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에 깊이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다른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감(交感)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이에 염려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하고, 가볍게 다루기 때문에, 염려가 몰려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염려를 차단하려면, 기도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하지만, 기도하는 데 있어서 약합니다.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도의 깊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염려가 한 방에 날아가 버립니다. 염려할 일이 생겨도, 기도가 깊어지면 끄떡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산이 아닙니다.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찬송가 288장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훈련 중 하나는 간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사 속에서 깊은 기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기록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의 개념을 넘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에 취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과 나 둘만 있는 듯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염려가 점점 작아져서 나중에는 없어져버립니다.

셋째, 구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에 찾아오는 염려에 직면하지 않고, 염려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염려에 대한 그릇된 태도입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면, 이럴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염려를 밀어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사태(事態)는 심각한데, 친구와 놀러 다니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염려가 밀려옵니다.

염려는 거부하거나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무시하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염려할 만한 사실을 부정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염려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염려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한 사람은 정확하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호하게 기도합니다. 왜 기도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편해 하실까봐 기도하지 않습니다.
매우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찮게 여겨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와 ‘모든 일에’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삶의 문제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삶의 모든 영역을 직시해야 상세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틈새로 염려가 밀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 오는 날, 한 자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다 젖어버렸습니다. 자매는 “하나님, 버스가 오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왔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기다리던 버스가 아니었습니다. 자매는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버스 보내달라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스 보내줬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는 “제가 타야 하는 버스는 501번인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501번 버스라고 말하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게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때에는 매우 상세하게 염려하는데, 기도할 때에는 매우 엉성하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상세하게 염려하는 것 이상으로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는 너무 커서 기도하지 않고, 어떤 문제는 너무 작아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데 있어서 구멍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일지를 쓰는 것이 아주 유용합니다.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 살펴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엉성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도 한두 종류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상처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두운 감정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피곤함, 살아가면서 갖는 욕망, 살면서 느끼는 필요 또한 엄청납니다.
우리가 왜 염려하며 사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의 기도는 매우 엉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즉 감사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상세하게 말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뿌리에는 감사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바탕에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기도에 대해 아주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주신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신 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깊어질 때, 염려는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염려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석가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박사는 “감사가 없는 기도는 날개가 없는 새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놓치는 이유는 현재의 어려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풀어주신 것을 매우 쉽게 잊어버립니다.

시편 103편 2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망각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망각하는 것은 염려를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은혜를 반복해서 회생(回生)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힘든 일도 겪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감사기도를 할 때, 대충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을 매우 가볍게 다룹니다.
감사기도를 할 때, 자신만을 보며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을 생각해도 감사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족들로 인해 감사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보세요. 그들로 인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나라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을 보면, 나라는 존재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감사가 파도처럼 밀려오면, 염려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소극적으로 감사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핵심적인 것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의 종류, 기도의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기도를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만 가져도, 대부분의 염려는 사라져버립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 바깥에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삶의 무게,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 우리가 경험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주님께서 매우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신다면, 주님께서는 ‘염려’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가장 염려스러운 삶은 아버지가 없는 삶입니다. 염려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삶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기도, 간구, 감사의 초점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더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필요로부터 시작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의 출발은 나의 필요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가장 필요한 분이시요, 하나님께서 내 삶의 전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면, 우리의 필요들은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채워지면, 그 외의 것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배고파서 울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유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엄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인해 충분함을 경험하면, 우리의 삶에서 초조함은 사라집니다.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자유함이 생깁니다.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것이 채워졌습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하고, 주시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필요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기도 훈련은 전심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차이는 집중력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집중력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거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완벽하게 덮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의 강은 거대하게 흐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염려는 지류(支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염려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기도 응답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응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본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시작하여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으로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염려는 세속 세계에서 몰고 들어오는 폐수(廢水)와 같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청정(淸淨) 공기를 우리의 영혼에 밀어 넣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무엇으로 가득 채우시겠습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와 염려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하며 사시겠습니까? 평강 가운데 사시겠습니까?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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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본문 /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욥기 1장 9절에 보면,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잘해주시니까, 욥이 축복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만일 축복을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떠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욥 1:12).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의 신앙의 진위(眞僞)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위를 늘 공격합니다. 저 사람이 왜 예수님을 믿는가.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왜 믿음생활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셔서입니까? 건강의 복을 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가정에 행복을 주셔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 등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만일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다 빼앗으셔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욥에게 무차별적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재산이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자녀들까지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까지 그에게 저주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은 혼자 남았습니다. 생명만 겨우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욥은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와서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은 처음에는 고난에 대해 잘 대처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내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험악해졌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 까다로운 질문을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욥이 혼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장면입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께서 반응하시지 않으실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욥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쏟아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쁜 기도는 없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버릇없이 행동해도 집 안에서 결판내려고 하는 것이 가출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싸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두 사람이 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따로따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할 것은 다 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하고,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놓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적 행동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자신이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고, 의미 없는 되뇜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밥도 차려줍니다. 집 청소도 합니다. 아이들도 돌보지만, 마음은 가정에서 떠난 여인과 같습니다.
대화하지만, 대화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집에서 함께 살 뿐입니다. 정신적 이혼 상태와 같습니다.

욥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점잖은 인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욥이 친구들의 변론에 대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집요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을 속이지 않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립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고, 근사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모양을 내고, 규격화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고, 미사여구로 꾸미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통정(通情)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의문화가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욥은 처음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2:10).

그러나 욥은 무조건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사투(死鬪)를 벌이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화가 난 상태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욥은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해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내리고, 자신의 문제를 무마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이미 답을 얻은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 매우 힘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너무 많아 그냥 문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고, 답이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창자가 뒤틀릴 만큼 기도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외로워집니다. 나의 고통 안으로 들어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삶의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그래서 삶이 헷갈립니다.
고통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답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얄밉습니다.

고통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게 답을 얻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난다고 해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따지더라도 하나님께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넓은 분이십니다. 맹숭맹숭하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창자가 끊어질 듯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 속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전투적 의지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점잖고 형식적인 기도를 되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맹숭맹숭하게 영양가 없는 미사여구로 기도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십자가와 마주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난해(難解)한 사건입니다. 욥의 고난이 난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내칩니다.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고통은 독특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독특한 고통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시며 아버지께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레슨(lesson)은 정직함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자신의 감정을 매우 정직하게 여과 없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욥의 인내도 중요하지만,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고통을 위장(僞裝)하거나 신앙이 좋은 체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고통과 환경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면, 이곳은 눈물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위장하려 합니다. 고통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고통을 멋지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직함,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지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영혼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사여구로 꾸며 자신을 감추어버린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치며 펑펑 우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왔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이 없는 기도, 토해내지 않는 기도, 감정을 숨긴 기도를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셔가며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이 기도하는 것에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치열함이 묻어있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시련과 고통과 환난과 어려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다가가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고통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가벼움입니다. 신앙의 형식만 남아있고, 내용은 얄팍해져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매우 가볍게 다가갔습니다. 남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친구들은 그럴듯한 교리로 무장한 교과서적인 답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늘 그것을 고민합니다. 제 나이에 삶 속에서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인간의 고난의 깊이를 몸에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직면한 고통에 대해 말씀을 통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다가가 답을 주려고 하는 얄팍한 설교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맞는 말을 하는데,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의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고통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흉터를 놀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작아 보이는 상처라도 그는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십니까? 삶이 무너질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착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결론만 붙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심히 불편하고,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습니까.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요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한 신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로 인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 씨름한 흔적 없이 믿음을 쉽게 가진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인생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안에서는 요동치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성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 하나님께 떼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결해달라고 떼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하나님과 주고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덤덤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힘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저 그렇고, 평안한 때에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없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육적(肉的)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치졸했습니다. 간사했습니다. 인간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지독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하실까요.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있으면, 성경을 들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답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욥은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고, 그 기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욥은 매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고,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친구들은 기막힌 답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지만, 욥은 그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승부를 걸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만만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싸움입니다. 무엇과 싸우시겠습니까. 욥은 마귀, 친구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본문 욥기 42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마침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쉽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길고 길었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냉랭한 교리적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책으로 공부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질문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긴 고통 속에서 뒹굴고 소리치며 하나님께 원망하며 대들다가 마침내 그는 하나님과 마주쳤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동안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듣기만 하던 사람이 자신이 들은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모든 전쟁이 끝납니다. 모든 시비가 그칩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왜 애매모호합니까?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헷갈렸는데, 이제 보았습니다. 더 이상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고, 고통이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나의 고통이 해석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고통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의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고통마저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욥의 인내보다 탁월하십니다.

욥은 앙탈을 부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쏟아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습니다. 욥이 언제 하나님께 다가오는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욥에게 맡기셨습니다.

욥이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답을 빨리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대가(代價)를 통해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욥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해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뻔한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을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답을 미리 노출하시지 않으십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을 미리 보고 나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올바로 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부림치며 익힌 만큼,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리더가 설명해주는 하나님은 머리에만 남을 뿐입니다.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면, 머리에 남아있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은 삶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싸우며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떠들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욥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시다니,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욥은 탁월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은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욥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따졌습니다. 욥은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욥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과 크게 다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입술을 통해 욥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이 고백이 나오는 순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시비를 잠재워버리시고, 욥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사탄 앞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인내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시고, 욥이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통해 이전보다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을 통과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가(眞價)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두십니다.

도자기를 몇 도에 굽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강도(强度)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구우면, 쉽게 깨어지는 그릇이 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힘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인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한 단계에 머물러있으면, 하나님께 부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무당을 찾아가 액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가 맺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둘도 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롬 8:35,37~39).
하나님과 바울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도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마저도 하나님과 바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유가 넘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을 제거해버리면, 욥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모든 시험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 믿음의 이유이십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십니다.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 흔들릴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테스트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혼자 고난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마침내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과 배신과 고독과 오해의 긴 터널을 통과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한가운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은 계속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깊고 높고 풍성한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모르는 척하시는, 비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손들게 됩니다. 그 후에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더없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나는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욥은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우리를 칭찬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정직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맴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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