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주일예배설교  / 가장 큰 기쁨의 소식

 

 

 

 


제목 : 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성경 : 행5:27~32

1.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세상의 그 어떤 명절이나 절기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기쁘고 복된 절기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시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것도 다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영광의 몸을 입으시고,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시는 몸을 입으시고 살아 나셔서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두둥실 떠올라 승천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새 생명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굉장하고 놀랍고 신비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세상의 정말 별것 아닌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을 운운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처럼 여기고,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고 유치한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저 고상한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차원에서 믿거나 아니면 그저 세상사는 동안에 복이나 좀 받아보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언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막8:31절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요11:25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마28:6절에서는 말씀대로 살아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확실히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살아나셨는데 예수님과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든지 또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쁨도 능력도 소망도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주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는 그 죽음의 권세와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어두운 세력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히 영화로우신 몸으로 다시 사신 예수님,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여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며 어찌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 속에 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 놀랍고 위대하고 엄청난 소식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리고 구주로 삼으셨다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뭐 당연하지 않느냐고요? 네 물론 당연하지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지금 상황은 그렇게 당연하게 말하기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27,28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보십시오. 지금 유대의 집권자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끌어다가 놓고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예수의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느냐? 그가 죽은 책임을 우리 책임으로 떠 넘기려고 하느냐?’면서 또 그러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제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무슨 헛소리냐?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오직 주님께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말할 뿐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주님은 분명히 살아나셔서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고 당당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부활의 능력과 의미와 자신들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감격과 기쁨과 소망과 확신 속에 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물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물론 부활한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 속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더욱 소망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과학이니 이성이니 문화니 지식이니 하는 별것 아닌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이나 우리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 가운데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고 오직 부활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을 주는 가장 큰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할까요?

2.육체적 안목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토록 확실한 사실이고,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고 놀랍고 엄청난 일이고 우리에게 가장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가장 큰 능력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그 엄청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물론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저 육체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혼이 죽어감으로 오직 육체가 되어 모든 것을 육적 물적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게 들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창6: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노아 가족이외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노아 가족 외에는 다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느냐하면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육체가 된 게 뭡니까? 전에는 육체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본분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 만족과 기쁨과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죽은 영혼을 가지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구만을 채우는데 급급하며 살다보니까 영적인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허황된 이야기로 생각하며 웃고 조롱하며 자신이 얼마나 무지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 것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세상에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무슨 말씀입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제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된 꾸지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눅24: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즉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천사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허황된 말처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제자들이 언제 변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자신을 보았음에도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고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열흘만인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언어를 말하며 강력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집권자들이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며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육체의 사람이었는데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의 부활과 천국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영생복락을 온전히 믿고 그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육의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온갖 죄와 무지와 추함과 어리석음과 한계 속에 있는 육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생명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 속에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8:6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러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영이 죽어 있으므로 오직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의 생각을 따라 살기 때문에 부활이고 천국이고 영생이고 영광의 나라고 도무지 관심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인생인줄 압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받으면 영이 살아나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동행함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씀으로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분은 더욱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엄청난 사실에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활 신앙은 생명력이 넘치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하고 완전하고 온전한 생명을 주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분명히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삶에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인생이 백팔십도 달라졌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살던 사람에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 도망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던 삶에서 죽음을 무릎 쓰고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좌절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때리고 빼앗고 죽이고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데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또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데, 그래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생명의 은혜가운데 살 수 있는데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11: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보세요.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죽기는 죽되 죽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데 그냥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일이고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말 그대로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지금도 계속해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그 순간 거듭나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고,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주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힘차게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물론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부활로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때에 완벽하고 영원한 승리자로서 세세토록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금번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부활의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능력을 마음껏 맛보며, 이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힘차게 전함으로 세상에 부활의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제목 : 언제나 소망은 있습니다

말씀 : 애3:19~26

 

1.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근간에 우리 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무슨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농어촌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인데 농촌사회가 초고령화, 동공화되다보니 교회도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 천국으로 가시는 분은 많고 들어오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지난 1월 말에는 정병호 장로님이 소천하시고, 지난 주에는 최윤익 집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지 8년 좀 넘었는데 제가 직접 장례예식을 치러드린 분이 15분이고, 그밖에 우리교회 다니시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셔서 소천하신 분이 너댓분이 계셔서 약 20명 정도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큰 교회라면 20명이 적은 숫자인지 모르겠지만 전체성도라야 50여명 정도인 교회에서 20여명은 40%에 해당되는 수치이므로 큰 수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성도님들 중에도 연로하시거나 육신의 질고 또는 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도 많습니다. 이재성도는 지난해 10월에 쓰러져 지금까지 넉 달 이상은 누워계시고, 지난 주에는 김춘옥성도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깨관절을 크게 다쳐 인공뼈를 넣는 대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 고상진집사님도 건강이 좋지 못한 가운데 있고, 김병철집사님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몸과 마음이 약하여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김춘옥 성도님과 이재 성도님 문병을 다녀왔는데 김춘옥 성도님은 적어도 몇 개월은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고, 이재성도님은 의식은 회복한 것 같은데 본래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분이라서 사람이 가면 그저 힘없이 손을 겨우 잡고 아는 것 같은 반응만 보이고 있습니다. 그 날 중환자실에서 면회를 하고 나오려하는데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저를 계속 응시하는데 그 눈빛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새벽 기도 시간에는 얼마나 울면서 기도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셨는데 이 불쌍한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 하십니까? 하나님, 이 불쌍한 사람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노라면 정말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그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서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 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애3:49,50절에 보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를 기다리며 그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말씀속에서 우리는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지금은 고난속에서 그저 기도하며 눈물 흘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은혜를 내려 주실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라도 분명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날이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낙심하며 눈물 흘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절망의 그림자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고 할지라도 머잖아 절망의 그림자는 물러가고 마음껏 감사와 기쁨과 은혜의 찬양을 할 수 있는 날이 곧 다가옵니다. 혹시 조금 시간이 걸린다해도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고, 그날이 오면 모든 아픔과 고통과 절망의 탄식소리는 사라지고 기쁨의 찬가가 울려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35: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할 때입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과 고통이 그들을 짓누르고 도무지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곧 해방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맹인의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리며, 저는 자들이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떤 사나운 짐승이나 근심 걱정 염려 불평 탄식거리는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춤추며 찬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은 광야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가나안 복지인 천국에 가기까지는 고통과 아픔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순간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탄식이 변하여 기쁨의 함성이 되며,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어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그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혹 힘든 순간이 있더라도 그저 겸손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은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제들을 반드시 이기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고난의 현실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자연도 온전한 상태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온갖 거짓과 폭력과 질병과 전쟁이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도 상당히 왜곡되어 온갖 자연재해와 질병과 기근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만든 온전치 못한 문명의 이기들이 도리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도 자연도 사람이 만든 문명도 온전치 못함으로 사람과 자연과 문명의 이기들을 통하여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고 받을 때가 너무나 많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그 현실을 이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러분, 보십시오. 21절에 보니까 이것을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소망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마음에 담아 둔 것이 뭡니까? 내 고초와 재난입니다. 그래서 울며 탄식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소망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소망이 생겼습니까? 22절, 24절에 있습니다.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즉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전히 진멸 된 것은 아니어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살려주셨고, 그 자비와 긍휼로 이후로도 우리를 살려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고난의 현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작에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로도 그런 은혜로 우리가 진멸당하지 않고 결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항변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천배만배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욱더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의 고난을 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지금 어떤 고난을 당해도, 어떤 억울한 일을 만나도 욥의 고난과 억울함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엄청나게 받아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천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는 거부였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열명의 예쁜 자녀를 둔 다복하기 한량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졸지에 폭삭 망했습니다. 세상에 망해도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없고, 원통하고 절통해도 이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재산은 몽땅 빼앗겼습니다. 열 명의 자녀가 하루 아침에 모두 죽었습니다.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며 죽으라면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온 몸에는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몸을 긁고 있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도 한때는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죽어서 나왔더라면, 내가 낳던 날이 없었더라면, 내가 낳던 날에 빛이 없었더라면, 어찌하여 내게 생명을 주셔서 이 험한 꼴을 보게 하셨는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참담하고 캄캄하여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면서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그렇게 끝내 무너져 내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의인이 아니지요. 욥23: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는 눈도 귀도 마음도 어두워 하나님을 보이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뭔가 계획을 갖고 계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정금같이 나오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고, 마침내 시련의 기간이 끝나자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이라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만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가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현실이 어렵고 낙심이 될 때에라도 그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저 겸손히 무릎 꿇고 주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소망 중에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길이 보입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24~26절을 보겠습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비록 고난의 현실이 쑥과 담즙처럼 쓰고 아프지만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 되심으로 나는 여호와를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선하시기에, 여호와께서는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므로 분명히 긍휼히 여기사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잠자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그 작은 생각과 이성과 판단으로 함부로 떠들어대지도 않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원망과 불평과 좌절 속에 빠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구원과 섭리를 믿고 조용히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꽤 오래전에 미국에서 15살 난 한 소녀가 심한 구타를 당하여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목격자가 나타나 래리 밀러라는 사람을 지목하며 이 사람이 사건 현장에서 그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래리 밀러가 살인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사실은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시간에 사건 현장에 있지 않고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뚜렷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아 이 목격자의 증언으로 래리는 3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통이 터질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한 목사님의 편지 중 한 귀절에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은 우리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위로를 받은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성실하게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교도소에서 실시하는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그러자 몇 년 후에 그의 신실한 믿음과 열정이 인정되어 성경공부반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교도소 내에서 실시하는 고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죄수들도 열심히 가르쳐 많은 사람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과 중등과정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며 사는 동안의 그 자신도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12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진범이 체포되어 래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무려 12년 동안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정말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출옥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만 알던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타인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약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12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안에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 나갔을 때 결국 그는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요셉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사람이 만든 문명도 심히 왜곡되고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현실 속에는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분통이 터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의 순간에도, 아무리 절망감이 짓누르는 순간에도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분명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현실이 어떻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겸손히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주님의 뜻을 물으며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하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도 주의 은혜를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복된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 목사 (하강교회)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장례예배 Funeral service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자들로 발견되지 않으

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잇는 우리가 집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

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애개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

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1. 서 론

 성경은 인생을 여러가지 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

하고 이 세상에 와서 나그네 생활을 하다가 언젠가는 본향을로 돌아가

는 것이다.

 2. 본 론

 키에르 케고르는 인생은 날때부터 죽음이라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온

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도께서는 죽음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

다.

 본문에서는 죽음을 세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죽음은 탄식을 벗는 때이다.

     세계의 영웅 나폴레옹은 말하기를 "5대양의 가득찬 물을 인생의

     눈물이 아니오며 6대주에 불어오는 바람은 인생의 탄식소리가 아

     닌가? 라고 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죽음은 탄식을 벗는 때이다.

  2. 죽음은 짐을 벗는 때이다.

     인생은 고달프다. 많은 짐을 지고 허덕인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휘를 편히 쉬게 하리라." 주안에서 산 사람은 내 육

     신의 장막을 벗는 날 영원한 안식에 거함.

  3. 죽음은 썩지 않을 것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산 사람은 죽음의 문을 통과해서는 영원한 세계에서

     썩지 않을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 14:13에 주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했다

 3. 결 론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나라 소망을

위하여, 복음 전파하는 수고를 치루어야 한다.

 김활란 박사는 나의 장례식에서는 승전곡을 부르라고 하였다. 믿음의

생활은 승리자민이 걸어가는 생활이다. 기독교 신지들은 한사람의 나

그네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목적을 두고 살고 그 목적을 이루게 되

는 순레자다. 이것이 곧 승리요 기쁨이요 믿음으로 받는 영원한 기업

이다.

 남은 유가족들은 본문 말씀대로 믿음안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나

믿음으로 영원한 하늘나라 기업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절기예배] 부활절예배 설교

 

 

 

제 목 :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말 씀 : 고린도전서 15장 12절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3월 주일오후예배설교

 

 

 

 

 

 

제목 : 그리스도의 군사

말씀 : 딤후2:1-6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생명의 능력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사탄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유혹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며 덤벼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력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비열하게 때로는 고상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언제 당하는지도 모르게 당한다. 자칫 잘못하면 속임수에 넘어가 도리어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교묘한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이 지금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비진리가 혹은 거짓이 진리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기에 속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분별력을 기르고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사탄에게 속지 않고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1절)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우리가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려면 강해야 한다. 강하지 않으면 진다. 군인이 체력이나 정신이나 사기가 약해지면 진다. 그러므로 우리도 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 그래야 마귀가 덤벼들어도 끄떡 않고 이긴다.

그러면 어떻게 강해지는가? 물론 많지만 일단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란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들을 말한다. 믿음, 구원, 감사, 사랑, 기쁨, 능력, 지혜, 선과 진리와 의 등...... 이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대한 확신과 믿음, 소망을 갖게 된다. 유혹을 분별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상황 환경 고난도 이기게 된다. 그래서 사명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덧입자. 더욱 충만한 은혜를 받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러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그래서 주의 은혜를 덧입고 주의 능력을 덧입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모든 유혹과 도전을 물리치고 힘차게 달려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자.

2.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2절)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자신이 먼저 말씀위에 서서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말씀은 천국을 알게 된다. 인생의 갈길을 알게 한다. 선과 진리를 알게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거짓되고 왜곡되고 잘못된 가치관 속에 있는 풍조와 양식과 습관과 모든 삶의 모습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씀 위에 굳게 서면 능력도 얻게 된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확신과 소망과 위로와 힘을 줌으로 올바른 분별력을 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혹과 도전과 고난과 조롱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천국과 진리의 길도 제대로 모를 뿐 아니라 마귀에게 속기 십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말씀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산다고 말한다.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은혜와 능력과 지식과 판단은 반드시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설령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말씀을 잣대로 삼으라.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붙든다. 힘을 주고 능력을 준다. 마귀 사탄을 물리친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3절)

딤후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진리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자연적인 세상은 결코 예수님께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다. 물론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하기도 하지만 오염되고 왜곡된 이성대로 자신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는데 그친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의 오신 참뜻을 왜곡시킨다. 십자가와 부활과 주되심을 거부하고 꾸며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대적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 고난을 피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해, 생명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향해 달려가려면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고난 즉 희생과 수고와 섬김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빌1: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여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환경이나 상황을 이기고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4.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딤후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사는 그를 모집한 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군사는 그 모집한 자의 뜻에 절대 순복해야 한다. 그래서 군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훈련받으며 적들을 물리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도 동일하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부르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세우셨다. 그래서 세상 속으로 가서 마귀사탄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말씀 훈련, 기도훈련, 전도훈련도 해야 한다. 동시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영광이나 즐거움 보다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직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해 가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길이요 진리의 길이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길이요 동시에 우리 자신도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자유가운데 살게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을 택하며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고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삶이 되자.

5.법대로 경기해야 함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렇다. 모든 경기자는 법대로 해야 한다. 운동경기도 법대로 해야 한다. 시험도 법대로 치러야 한다. 인생도 법대로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법대로 해야 한다. 물론 인생 최상위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법을 제정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한 법을 주셨다. 그 법대로 살아갈 때에 가장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법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7:21절에서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물론 이 말씀이 100%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법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한 따라가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공자가 된다.

오늘부터 사순절 집중전도. 오늘은 주님께 영광 돌리고 안식도 취하는 날. 그러므로 오후에 좀 편히 쉬면 좋은데 전도를 나가려니 솔직히 나도 좀 힘들다. 그러나 이 일은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이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일.

그러므로 좀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   기쁨과 평안

 

 

 

제목 : 떳떳한 삶을 위하여

말씀 : 요일3:18~22

법이 왜 필요할까? 그밖에 무언가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 같은 질서나 규범이나 관례나 이런 것들은 왜 필요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결코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애당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굳이 그런 규제를 두지 않아도 자기 이성과 영으로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아니 사실은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스스로를 통제하고 제어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성과 지성과 감성과 이성이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진리와 선과 의를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이 없다. 때로는 분별을 하면서 그 분별한 선과 의를 따라 살아갈 능력이 없다. 그래서 법과 규범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법과 규례와 질서를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에서 최대한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두말할나위도 없다. 모든 인생이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죄와 무지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과 인간과 세상과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진리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물론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선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춤으로 저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또한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1.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이 나타남

요일3:18,1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가 정말로 사랑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마음이 있다면 행위도 따른다. 물론 정말 마음은 원인데 여건과 상황이 안돼서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마음에 별로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으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단숨에 달려가지만 마음에 없으면 안강이라도 안 달려간다.

그래서 마6: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고, 약2장에서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셨다. 당연하지 않나?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말로만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계속 말만 하면 위선이 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혹은 상황과 여건이 안돼서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뭐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에 있다는 것도 결국 자기 방어와 변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안 그런가? 정말로 사랑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결국은 한다. 주님을 위한 일도 그렇다. 주님을 위해 드릴 물질도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것이나 자녀를 위한 것은 한다.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시간과 물질이 없고 여건이 안된다고 하지만 자녀를 위해서는 한다. 물론 다는 못하겠지만 주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도 자녀를 위해서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렇게 믿음이나 사랑이 행위로 나타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께 속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불법과 거짓과 악과 더러움 속에 살면 안 되지 않는가? 빛 가운데 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산다면 어떻게 빛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는데 여전히 더러운 모습으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8:12절을 보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빛이신데 그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둠 속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수님이 빛이시니까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그 빛을 받아 당연히 빛의 은혜를 누려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엡5:8,9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진리와 생명과 의와 선과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나온 자로써 온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가자. 다만 따라 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굳세게 됨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할 때에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침으로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하여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을 물리치고 빛과 같은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진실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선을 따르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동시에 나도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스스로 위축되고,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부끄럽고 그래서 결국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렇게 주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결국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됨으로 더더욱 빛의 은혜를 누리기 못하고 어둠의 세력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깨끗하고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당당하다. 마음이 뿌듯하고 자존감이 있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죄와 향락과 불법과 불의에 빠지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다. 숨으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범죄는 주로 어두운 곳에 이루어진다. 물리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의미적으로도 숨겨진 곳, 은밀한 곳,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선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한 일이라면 왜 숨어서 하겠는가? 일부러 나보란 듯이 하지... 그래서 잠28:1절에서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과 진리를 따르되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평안과 가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된다.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나 죄가운데 있거나 하나님 앞에 뭔가 떳떳하지 못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없어진다. 뭔가 그늘진 모습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서, 특별히 사랑의 도를 따라서 그런 말씀들을 실천해 나아갈 때에 정말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자부심을 가지고 생기있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실족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말 믿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로 최선을 다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과 같다. 정말 마음에 원이면 원하는 것을 향해 힘써 가야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실족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별로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실상은 마음에도 그다지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된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은 주님께 맡기고, 그저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역사 감당하며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4.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구하는 바를 얻게 됨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 그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앞의 2:2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면 그를 아는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 알리라고 하셨다. 2: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였다. 2:29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라야 그에게서 난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선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을 향하여 갈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기도라고 해서 맨날 달라는 기도만 드리지도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응답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과 혀로만하고 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기도응답을 기대하겠는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주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힘들고 부자유스럽고 어렵고 번거롭고 통제하고 제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물론 그래도 안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의기소침하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당당하고 생기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복된 만남을 위하여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하강교회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사순절설교 : 은혜충만한 인생

 

 


제목 : 만선(滿船) 인생

말씀 : 요21:1-6

1.깨달음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啐 떠들 줄, 啄 쫄 탁, 同 같을 동, 機 기회 기자를 쓰는데 계란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어 나올 때를 비유하여 나온 말로 때를 알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해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병아리는 때가 되면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껍질을 톡톡 두드려 어미 닭에게 껍질을 깨트려 달라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줄(啐)입니다. 그러면 어미 닭은 이 신호를 듣고 병아리가 나올 때가 되었으니 도와달라는 신호인 줄 깨닫고 거기에 응답해서 껍질을 톡톡 쪼아 깨트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탁(啄)입니다.

이와같이 병아리는 병아리대로 어미닭은 어미 닭대로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져야하는데 이게 동기(同機同)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고, 너무 늦게 행동하면 자칫하면 병아리는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원리는 비단 병아리가 부화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깨닫기만하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행동하는 것도 시기가 있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행동하고자 해도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달아야 하고 나아가 적절한 시기에 행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져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줄탁동기가 필요합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았으면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고, 또한 깨닫기는 깨달아도 거기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닫고 그 깨달음을 따라 행동할 때에 비로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의 도, 생명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속에서 자기 생각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뭔가 좀 알 것 같은 데 조금 지나면 그만 말씀의 의미를 다 까먹고 그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예수님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 말씀대로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보자 저분에게서는 기대할 것이 없다면서 다 떠나 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심지어는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떡만을 생각하며, 육신의 떡을 걱정하며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막8:17절에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어찌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동안 그만큼 너희들과 함께 하며 너희에게 말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만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파도를 명령하여 잔잔케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내가 생명의 주임을 너희에게 분명히 보여주었건만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먹을 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느냐고 하시면서 영적인 감각이 둔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선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줄탁동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 심령의 문을 톡톡 두리면서 잽싸게 응답하여 그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정말 주님과 주님의 뜻과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총을 바르게 깨닫고 이해함으로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주님을 바르게 알고, 나아가서는 그 아는 지식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삶이 하나 되고, 믿음과 행동이 하나 되고, 신앙과 삶이 조화를 이루저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을 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안타깝게도 주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자기마음대로 엉뚱한 일을 하다가 참혹한 실패를 당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러니까 어부출신으로 갈릴리 바닷가에 잔뼈가 굵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른 여러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닷가로 나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피라미 한마디로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후 여러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숨어 있는 방에 찾아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자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이 시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셨겠습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제자들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했습니다. 부흥집회를 열든지 성경사경회를 하든지 간절히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열두제자 뿐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모아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분명히 알려주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상기시켜 주며 이 분이 진정 메시아요, 생명의 주님이셨음을 선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제자격이었던 베드로가 먼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으나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때에, 기도해야 할 때에,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에 엉뚱하게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때 그 결과는 처참한 실패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안 잡혀도 그렇게 안 잡힐 수가 있는지 일부러 안 잡으려고 기를 쓰고 그물을 던져도 밤새도록 던지면 다만 피라미 몇마리라도 잡힐 법한데 단 한 마리도 안 잡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로 말하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 고기잡이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라면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일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 했지만 헛 그물질이었습니다. 피라미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고생만 실컷하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빈털터리였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 주님을 떠난 인생이 바로 이와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에게 얼마나 쓰라린 실패가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맘대로 살아갈 때는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남는 것은 처절한 실패뿐이요, 빈손 뿐이요, 빈 그물 뿐이요, 빈 배 뿐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혹시 잠시 무엇인가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돈이 남겠습니까? 권세가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뿐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렘2:1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을 버린 것과 제 맘대로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기만 많이 잡으면 거기 행복이 있고, 거기 풍성한 삶이 있는 줄 알고 죽자사자 세상의 고기만 잡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터진 웅덩이에 물을 채우는 일이요,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일과 같아서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세상의 고기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고기를 잡기 전에 주님께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풍성케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힘쓰며 나와 내 가정과 교회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음의 사람들도 조차도 자꾸만 세상의 고기만 잡는 일에 열중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온전히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주일에도 세상의 고기를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정열을 세상의 고기를 잡는 일에만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남는 것은 빈배요, 고통과 상처뿐이요, 하나님의 진노뿐인 참으로 가려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로 내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 말씀따라 행동했을 때 성공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했을 때는 실패뿐이요, 반면에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에 확실한 성공이 보장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6절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여러분, 정말 놀라운 일입니까? 밤새도록 피라미 한 마리 못 잡았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엄청난 물고기가 잡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한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사실 왼편이냐 오른편이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며 설마하니 왼편에만 계속 그물을 던졌겠습니까? 설령 왼편에만 던졌다해도 왼편이나 오른편이 다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것도 무슨 커다한 항공모함도 아닌 조그만 배에서 왼편 오른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의 의지를 따라 던졌을 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앞의 3절 말씀과 정 반대입니다. 주님을 떠나 자기 소견대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을 때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피라미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헛고생 했습니다. 헛그물질을 했습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허탈과와 낙심과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네 생각, 네 지식, 네 경험속에 성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치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술이나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 때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성공의 비결입니다. 말씀따라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어디 멀리가야 성공이 있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을 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높은 자리도 올라가야 합니다. 기왕이면 명예와 권세도 얻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더 잘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도 앞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행하는 인생이라야 진정한 성공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있는 곳 그 곳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든 직장생활을 하든 사업을 하든 높은 벼슬을 하든 내 방식대로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삶에 반드시 성공이 있고, 반드시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28:2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그러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자녀가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영육간에 온전한 복을 받는 성공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과 경험과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말씀대로 인생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내 힘과 지혜대로 내 마음대로 헛 그물질 하지 말고, 주님께서 던지라는 곳에 그물을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영육간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진정한 성공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가정예배]가족이 함께하는 가정예배

 

 
 
찬송 : ‘먹보다도 더 검은’ 423장(통 213)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디모데후서 2장 19∼21절

말씀 : 4세기 헬라 교부인 크리소스톰은 “바울은 질그릇이었으나 금그릇이 됐고, 유다는 금그릇이었으나 질그릇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질그릇 인생 속에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보배를 지니면 그리스도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복음이 자꾸 변질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겠습니다.

 

본문은 십자가 복음의 진리와 삶의 깨끗함이 그리스도께 사용되기 위한 본질적 조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주님이 쓰시는 귀한 그릇이 있습니다. 귀한 그릇은 깨끗해야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악해지고 교회가 그 영향을 받아도 여러분과 같은, 십자가 진리를 사랑하는 ‘깨끗한 그릇’이 있기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사람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교회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혹은 선택받은 자들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 터가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권세가 복음 진리를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천지 등 여러 이단들이 진리를 대적해 일어나도 복음 진리의 깃발을 가진 우리는 굳게 서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또 말합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주님은 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도 말씀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경향이나 주장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본문 20절에서는 복음 진리의 깨끗함을 지키고 그것을 굳게 붙드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로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여기서 ‘큰 집’은 물론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에는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이 두 그릇은 참 교인과 가짜 교인을 나타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참 교사와 거짓 교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디모데와 같은 진정한 교사와 후메내오, 알렉산더 같은 가짜 교사가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사람 안에 십자가 피의 복음이 담겨져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집주인이 정하는 조건은 한 가지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그릇은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 여기서 깨끗함이란 십자가 진리의 깨끗함과 삶의 순전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용하는 본질적 조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피 흘려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복음으로 깨끗한 그릇이 되어 그리스도께 사용되는 귀한 그릇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 :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변질되지 않는 십자가 피의 복음을 받게 하시고 깨끗한 삶을 살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절기설교] 고난주간설교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