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 /고난주간]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Season Preaching / passion week] Tribulation for the salvation of mankind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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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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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Life's Word] 주일오후설교  / Sunday afternoon preaching

 

 

제 목 : 겸손한 자가 받는 은혜

본 문 : 벧전5:5,6

1.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물론 믿음은 기본이고 믿음과 더불어 가지고 있어야 할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덕목은 무엇이냐하면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쁘고 재력있고 빽좋고 능력있는 사람 좋아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기준이고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이 올바른 사람, 특히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경배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러면 자신도 생명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남에게도 기쁨과 은혜를 주는 복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말 낮은 자세로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이 거대한 우주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저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십시오. 그전에 내 자신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신비합니까? 얼마나 굉장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그 굉장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반면에 내 안에 얼마나 죄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까?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 존칼빈 선생은 “내 안에 들어있는 죄악의 1/100이라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롬3:10-12절에서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렘13:23절에서는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상대적인 선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온전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겸손하게 엎드리지 않고 내가 다 안다고, 내가 의롭다고,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교만하게 자기 생각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기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엎드려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그 은혜로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5절 후반절에서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생각하며, 반면에 우리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낮춥니다.

겸손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약함과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 가보면 예수탄생교회가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약400평 정도 되는데 출입구는 단 하나 뿐이고, 게다가 그 문은 높이가 1.2m, 폭은 80Cm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불리는데 그 교회는 허리를 최대한 굽히고 한 사람씩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구부려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의 이성 경험 지식 명예 권세 자존심 내려 놔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무지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도와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받아주세요. 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만나고, 그렇게 예수님 만나면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4:6절에서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약함과 무지함과 한계와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림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겸손한 사람은 열심히 기도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기도가 뭡니까? 주님과 대화하는 거잖아요. 주님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요구하는 것이잖아요. 또한 주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정말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라고 묻는 거잖아요. 지금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 저는 무지해요. 어리석어요. 저는 약해요. 힘주세요. 능력을 주세요. 분별력을 주세요. 마귀사탄의 유혹을 이길 힘을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국 주님의 도우심이 별로 아쉽지 않다는 거지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거지요. 내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의롭게 살고 있다는 거지요. 선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 얼마나 교만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세요. 우리 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26: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 모든 약함과 무지를 이기고 은혜의 충만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4.겸손한 사람은 말씀을 열심히 배웁니다.

겸손한 사람은 열심히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어찌 배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지혜로우시고 그 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는데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말씀을 열심히 배우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 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생명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무지하고 연약한데 그래서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데 어찌 주님 앞에 엎드려 그 말씀을 경청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이나 문화나 기술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과 능력과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그래야 거짓에 속지 않고, 마귀에게 우롱당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 몸과 영혼과 마음을 지켜 주고, 힘과 평강과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여러분, 열심히 배우십시오. 주님께 배우십시오. 그 말씀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지혜를 얻고 분별력을 얻고 능력을 얻어 그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5.겸손한 사람은 순종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순종하는 것이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냥 따라 가는 것입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그냥 믿는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성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순진하게 주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에도 그냥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침 받으려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이성적으로는 정말로 웃기지도 않는 지시를 따랐을 때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빙빙 돌라는 웃기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따랐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적군 앞에 찬양대를 앞세워 찬양을 했을 때 적군이 전멸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어 밀었을 때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백배 천배 만배 수입억배 더 지혜롭고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사55:8,9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개역성경)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냥 주님 따라 가십시오. 설마 하나님이 우리만 못하시겠습니까? 설마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사정과 형편을 모르시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그냥 따라 가십시오. 거기 생명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순진하게 주님의 지시를 따라 온전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의 은혜 가득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겸손한 사람은 높임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낮추시고 비천하게 하시고 멸시당하고 천대받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높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요,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정말 약하고 부족하고 죄많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지혜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선과 의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안에 거하면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그 안에 거하게 됩니까? 겸손한 자입니다. 교만한 자는 제멋대로 합니다. 제 생각대로 합니다. 제 소견에 좋은 대로 합니다. 그래서 죄의 길로 갑니다. 무지한 길로 갑니다. 그래서 결국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분별력을 갖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를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습니다. 그래 존경 받고 그래서 높아집니다. 그래서 진정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3: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오늘 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의 죄와 무지와 한계와 연약함과 부족함고 미련함을 기억하며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 분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며 기도하며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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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설교] 주일낮예배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제목 : 하나님의 지팡이

말씀 : 출4:17~20

1.믿음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길을 가다보면 때론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건 우리 인생 누구나가 받아 들여야 할 숙명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광야와 같고 나나 너나 세상이나 다 온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와 악함과 추함과 왜곡됨 속에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는 아무도 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제거할 것이냐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최대한 그런 것들을 피하고 최선을 다해 제거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피하고 제거해도 또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니까 이런 것들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이나 시험이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물론 천성적으로 성격이 낙관적인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보다 더 잘 이길 수도 있습니다. 또 성품과 의지가 강하거나 뭔가 능력도 있고 배경이 좋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좀 더 유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건들이 승리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다 죄와 무지가운데 있고 게다가 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능력과 배경이 있더라도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그것을 자기 힘으로 이겨 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어떤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물론 말할 필요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이 온다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그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습니다. 심지어는 인생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이런 주님을 믿고 그 주님과 동행하면 주님께서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용기와 담대함으로 우리 스스로도 잘 헤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8:37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등 우리 인생길 앞에 닥쳐오는 모든 어려운 일들을 말합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지혜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완전한 보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빽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돈도 권력도 능력도 지식도 과학도 그 어떤 우리의 완전한 보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하고 완전한 백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완전하고 영원하고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주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우리를 위로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일을 만나도 오직 주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이시며 구원자이시면 든든하고 완전한 후원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또한 주님이 주신 능력과 은혜로써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며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담대한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유혹도 많고 도전도 많고 환난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에서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다녀야 합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무슨 지팡이를 짚고 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팡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과 인도하심이 확실히 담보된 표징이 되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마음속에 있든 혹은 어떤 특별한 은혜나 은사나 기적의 체험이나 사명이나 여하튼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고 하는 확실한 표징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도전과 유혹과 시련과 고난이 온다해도 그 하나님의 지팡이로 넉넉히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먼저 20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이 말씀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목동생활을 마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40년 전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던 애굽 사람을 죽인 후에 미디안 광야로 망명하여 40년간 목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당당하게 애굽으로 돌아가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처음부터 이렇게 담대하게 애굽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과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도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고 자꾸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출4:1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해 주시겠다고 했는데 바로는커녕 이스라엘 백성들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래, 그럼 좋다. 내가 누구인지를 너에게 보여주겠다. 그래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분명한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뭐냐? 네, 하나님, 지팡입니다. 그래 그럼 그걸 던져 보거라. 그러자 모세가 던집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꼬리를 잡으니 도로 지팡이가 됩니다.

그리고 나서 물론 다른 몇가지 과정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모세를 보내시며 하신 말씀이 오늘 말씀 17절 말씀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이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라고 하였다고 해서 이 지팡이 자체가 무슨 능력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이 지팡이는 처음부터 무슨 특별한 지팡이는 아니었습니다. 이 지팡이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칠 때 쓰던 그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이후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지팡이는 본래 모세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지팡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지팡이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표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지팡이만 들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임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건해지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지팡이를 가지고 가서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고, 모세는 이 말씀을 따라 이 지팡이를 들고 담대히 애굽으로 가서 결국 승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바로 이런 지팡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은혜의 하나님이시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지키셔서 승리케 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고 절망하고 돌아서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천성을 향해 달려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은혜를 받아도 외견적으로 갑자기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상황이나 조건이 좋은 상황과 조건으로 갑자기 바뀌고, 갑자기 장사가 잘 되어 수입이 확 늘어나고, 허약체질이 갑자기 근육질로 변하고, 갑자기 승진을 하고,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일확천금을 하고, 막혔던 혼사 길이 갑자기 확 열리는 등 뭔가 힘들고 어렵고 잘 안 풀리던 일들이 졸지에 사라져 버리고 갑자기 만사형통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뭐가 달라집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지팡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팡이가 뭡니까? 힘없고 약한 때 의지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뭔가 나를 위협하는 것을 물리치는 막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뭔가 방향을 지시하는 도구가 되기고 합니다. 바로 이런 지팡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와 용기로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시23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러분, 다윗이 마냥 평안하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 수많은 인생의 풍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부족함이 없어서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니라 부족함이 있지만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결국 다 해결될 것이고, 결국은 이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결국 하나님 안에서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처음에는 못한다고 안된다고 내가 뭘 하겠느냐고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다고 바로는커녕 이스라엘 백성들도 나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며 몇 번씩이나 꽁무니 뺐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자 용감하게 애굽을 향해 가서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꼭 이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르게 세우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지팡이, 능력의 지팡이, 은혜의 지팡이를 꽉 붙잡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가지고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왜곡되고 추한 것들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3.하나님의 지팡이는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출4:2~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자 여러분, 잘 보십시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예, 지팡입니다. 그래? 그러면 그걸 던져 버려라. 그랬습니다. 지팡이는 의지하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맹수를 물리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꾸짖고 책망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양을 몰 때도 사용합니다. 바로 그걸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의지하고 네가 너의 보호자라고 여기고 너희 생활수단으로 여겼던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양을 칠 때에 사용하던 그런 지팡이는 이제 버리라, 더 이상 그런 지팡이를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그런 너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있으니까 두려워하고 못한다고 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지팡이를 던지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이 되었습니다. 뱀은 사탄의 상징입니다. 모든 거짓과 유혹과 죄와 독의 상징입니다. 즉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의지하고 보호자로 여기고 생활 수단으로 삼던 것들을 계속 의지하면 그런 것들이 너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독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의 삶에 조금 도움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데는 도리어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악의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리라고 하였고, 그래서 버리자 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뱀이 되자 어떻게 하라고 하였습니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뱀의 꼬리를 잡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꼬리를 잡았다가는 뱀이 홱 돌아서서 손을 물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필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뱀에게 물릴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함께 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는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그 따위 것들에게 물릴 것에 염려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 뱀 곧 사탄의 세력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기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고, 그것이 뱀이 되었을 때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꼬리를 잡았을 때 모세가 뱀에 물리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지팡이를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뱀의 꼬리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팡이를 그냥 계속 잡고 있으면 계속 우리의 지팡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걸 던져 버리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던져버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뱀의 꼬리를 잡아야 합니다. 즉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탄의 세력과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기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은혜와 용기를 덧입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자신의 지팡이를 일단 던져 버리기 바랍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믿고 보호자로 여기고 내세우던 것을 던져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겁내지 말고 모든 죄와 유혹과 악한 것들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고, 적당하게 타협하지 말고 그런 것들과 당당히 맞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용기와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주십니다. 이 지팡이를 들고 다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 감히 사탄이 대들지 못합니다. 혹 덤벼든다해도 하나님의 지팡이로 얼마든지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당당히 바로와 맞장 뜨기 위하여 애굽으로 갔고 결국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정말 내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던져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사탄의 꼬리를 잡고 집어 던져 버리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팡이, 능력과 보호와 인도와 동행을 상징하는 믿음의 지팡이를 가지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힘차게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시련과 도전과 어려움과 환난과 핍박과 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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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믿음의 위력을 발하라

 

 


찬송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357장(통 39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가복음 11장 11~25절

말씀 :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평온하게 성 밖으로 나가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은 같은 장소를 지나가면서 전날 주님께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놀라서 말합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21절)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기대했을 때 그 무화과나무가 주님을 거절하자 예수님께서도 그 나무를 거절함으로써 초래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일을 통하여 믿음과 기도의 교훈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위력을 발하려면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명령의 권능에 놀랐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생기 있고 적극적인 믿음이 어째서 그들의 기도에 놀라운 권능을 불어 넣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과 권능을 통해서라면 어떠한 큰 어려움도 극복될 뿐 아니라 반드시 순조롭게 해결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위력을 발하려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24절)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을 줄로 믿으라는 기대의 말씀이 아니라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주시는 권세를 지니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그대로 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킨 것처럼 형식과 죄로 뭉쳐진 산을 깊은 바다에 던질 때 믿음으로 세상이 정복되고 사단의 맹렬한 공격은 마침내 잠잠해질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위력을 발하기 위한 기도의 전제 조건을 덧붙이셨습니다. 승리의 기도에 요구되는 조건은 곧 우리가 아무 대가 없이 용서해주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25절) 우리는 기도할 때에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의 적과 우리에게 해를 끼쳤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용서가 부족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데 큰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대해 가지는 하나의 큰 목적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며,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 :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여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믿음의 위력을 발하는 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이에스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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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 설교

 

 

 

 

제목 :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말씀 : 마26:30-35

 

1.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다음에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이제 이 세상 떠날 준비를 다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0절 말씀보세요.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피땀 흘리는 기도를 하러 가시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하면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모르십니까?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아니 단지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시는 주님께서 그 죽음을 향하여 스스로 걸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로 앞의 말씀에 보면 성만찬을 하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떡과 잔을 나누시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26절에서는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28절에서는 잔을 주시며 마시라고 하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45절을 보세요.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이제 때가 되었다. 인자의 때, 곧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할 때가 되었다. 따라서 너희들에게도 고통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좀 쉬어두어라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람산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음을 향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만이 인류의 죄를 속하고 마귀의 권세에서 속량하여 생명의 은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의 그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고통의 길이긴 하였지만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왜 입니까?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짐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나 처절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심지어는 주님도 그 고난의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길임을 아셨기에 결국 찬양하여 그 길을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험하고 멀어도 이 길만이 생명과 진리와 영원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하고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 찬양을 드리며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찬양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믿음을 보시고 더욱 힘주시고 은혜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험난한 전도자의 길을 가면서 늘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16:25절 보세요.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때는 어떤 상황입니까?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냥 감옥에 갇혀 있습니까? 아닙니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습니다. 온 몸에 피멍이 시퍼렇게 들고,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온몸의 상처가 쑤시고 아팠습니다. 게다가 손과 발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했고, 위대하심을 찬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찬양했고, 그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역을 감당케 하신 것에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들이 바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례 받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찬양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려울 때 찬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거 어려운 거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됩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힘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 능력을 받아서 잘되고 형통할 때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도 찬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니 오히려 무엇인가 문제가 있고, 해결이 안 날 때 더욱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구속의 은총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찬양하고, 큰 능력으로 인도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 안에서 더욱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앞에서 본 30절의 말씀에 예수님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하러 감람산으로 가셨습니까?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이곳에 처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늘 기도하러 가시던 장소였습니다.

 

눅22:39,40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여러분, 보십시오. 습관을 좇아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그곳은 생소한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늘 가시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그곳에 뭐하러 가셨습니까? 바람쐬러 가셨던 것도 아니고 놀러 가셨던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큰 일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상시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막1:35절을 보십시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어떤 젊은 목사가 새벽기도가 너희 힘들어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놈이 새벽기도를 만들어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어떤 놈이라니요? 예수님이 만드셨는데요.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조차도 새벽 기도가 필요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예수님조차 습관적으로 나가서 기도하는 일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자나 깨나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놀라운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안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진정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어찌 은혜가 넘치지 않겠습니까?

 

물론 찬양만이 우리의 의무는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주님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할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게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됨으로 능력있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때라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기억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구원과 지혜와 인도와 보호와 거룩과 선과 의를 덧입기 위하여, 그 하사님과의 뜻을 바르게 알고 능력있게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더욱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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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신앙을 이어가는 방법

 

 

 

찬송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14장(통 511)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느헤미야 10장 28∼39절 
 
말씀 :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과 조상들의 잘못을 다 고백한 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이 맹세를 어기면 저주도 기꺼이 받겠다는 아주 단호한 맹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살기로 결단하고 있습니까. 

먼저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방인과 결혼하는 문제로 나라가 위기에 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페니키아 출신 이세벨이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시집오면서 얼마나 나라 안에 우상숭배가 극심해졌습니까. 솔로몬도 외교적 수단으로 이방여인들과 결혼하면서 결국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혼미해지고 타락의 길로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우리가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이방인과 결혼해선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 차이가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결혼은 가정 안에서 작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큽니다. 

유다 백성들은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겠노라 맹세합니다. 당시에 주민들이 유대인으로만 구성돼 있었다면 모두가 율법을 지킬테니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같이 사는 이방인들이 안식일에도 물건을 팔았고, 유다 백성도 그 물건을 사왔던 것입니다.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물품이나 곡물을 사지 않겠노라고 선언합니다. 안식일을 구별된 하나님의 날로 지키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줬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는데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이 대대에 전해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를 통한 믿음생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노력이 계속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교회와 예배에 소홀히 하면서 주관적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겠노라 했던 결단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믿음을 대대에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이 대를 이어 전수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날을 힘써 지킴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한성훈 목사(수원 살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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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고난의 의미

 

 

 

제목 : 고난의 유익

말씀 : 롬5:1-4

17세기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며, 거의 성자에 반열에 오를 큼 훌륭한 목사였던 죤 번연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사실 신학을 전공한 분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분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의 직업은 함석이나 쇠붙이 등을 붙이고 때우는 땜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고 수십번씩 성경을 읽으며 기타의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세상적인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그는 목사가 되었으며(침례교에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음.) 기독교 교리서와 기도문 등의 많은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천로역정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읽혀져 많은 도전과 소망을 주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파란만장했다. 그는 침례교의 설교자였는데 국교파의 모함을 받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만하다가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찍 하나님품으로 가고 말았다. 큰 딸 메리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두 아들은 번연만큼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불후의 명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기독교인이라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가?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치기 힘든 질고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물론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류가 고통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고통의 현실에 직접개입하지 않으실까? 물론 무언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1.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열심히 부모를 찾는다.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열심히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멀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벌써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지나며 점점 멀어져 그때부터는 별로 찾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힘없고 빽없고 혼자 살기 어렵고 고통의 현실이 있으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쉬운 게 없으면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통과 어려움과 아쉬운게 없이 평안해지면 슬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평안히 거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고역으로 힘들어지자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가정적으로도 평안할때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여하튼 무언가 시련과 고통이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아시기에 여러번 평안하고 형통할 때 조심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31:20,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 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환난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세의 노래 즉 이스라엘의 배교를 경고한 노래를 통하여 비로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어리석어서 평안할 때 주님을 멀리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으로 경고를 보내신다.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엎드리라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 마는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 인생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혹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축복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 앞에 더욱 엎드리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도리어 복의 기회로 만들어가자.

2.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다지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부족한 것도 없다면 천국이 무에 그리 그리워지겠는가? 그저 세상의 것에 빠져서 무사안일하게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 하신 것이다. 먹고 배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 천국이 그렇게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의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고, 천국을 사모할때에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더욱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천국을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천국의 은혜를 앞당겨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3.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현실을 허용하신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

그래서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했다. 또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그 앞에 엎드리자.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인생의 구렁속으로 몰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앞에 더욱 엎드려 살아갈때에 어떤 어려움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자.

4.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살고 있는 땅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산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성장하여 아주 단단하게 되었고 뿌리도 깊이 내려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뿌리도 깊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더위나 추위나 습도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기 쉽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고통의 현장속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심지어는 환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수 있는가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비록 고통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결국 이겨내고 은혜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할때에 결국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훈련되어지고 그렇게 잘 훈련될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를 더욱 소망위에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에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고난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고난은 분명히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쓴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혹시 고난의 현실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더욱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기 위한 것이든, 더욱 우리를 소망위에 세우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혹시 우리의 죄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케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현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하여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누릴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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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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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 십자가로 승리하시다

 

 

 

 

 

성경본문| 골로새 02장 08절 ~ 15절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아프리카 우간다 어느 교회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의 우간다는 독재자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악명이 높은 그러한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케파쎔팡기 라고 하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는 7000명이 넘는 큰 교회로 영적 지도자로서 귀한 역사를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부득불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독재자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그런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정부에 알려졌습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다섯 명의 비밀경찰이 찾아왔습니다. 모두는 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에 그들은 사무실에 총을 가지고 겨누며 들어와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각오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온유하게 대답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게 2분간의 시간만 주시면 기도하고 나의 생을, 내 목회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또박또박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 통치자 이디아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명령을 원치 않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하는 불행한 이 다섯 사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기도하는 목사님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솟았습니다. 비밀경찰도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대장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다.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못본 것,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하고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습니다.

 

여러분,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이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하는 제목의 글입니다.

"가장 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을 깨뜨리는 것은 쇠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물은 구름에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날려간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고로 죽음이 가장 강하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챤이 누구입니까? 도대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뭡니까? 크리스챤이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 이해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어떤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올시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속성이 결정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법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그 속에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바로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제자들 앞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승리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시간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선언이요 여유요 엄청난 위세입니다. 비록 죽으면서도 그렇게 죽이는 자들을 여유 있게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에 짓궂은 생각입니다만은 한마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떨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좀 할 때가 있어요.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이놈들, 두고보자" 만일에 그렇게 말씀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한마디가 역사를 바꿉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만든 것이올시다. 여러분, 십자가는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돼요. 그것이 승리올시다. 억지로 도망가다가 능력도 없고 지혜도 없고 일이 꼬여들어서 할 수 없이 죽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성경이,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그 주제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요. 십자가는 예정된 것이요 십자가는 계획된 것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이요 그리고 십자가를 진 거라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책 전부입니다. 총 주제올시다. 이걸 모른다면 성경을 못 본 사람이지요.

 

예수님의 많은 이적이 무엇을 말합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귀머거리를 열게 하고 아,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와라"고 소리를 칩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 이 말이에요. 그걸 설명하자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이게.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그래 빌라도는 그것이 알 수가 없어서 "Behold this man,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말없이 죽어가느냐" 하는 거지. 그걸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언해 왔습니다. 예표로 확증을 해왔습니다. 수많은 양,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예표입니다. Prototype 입니다. 계속해서 보여주고 예언해주고 그 예언이 오늘 와서 십자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클라이막스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에요. 십자가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우주적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계획적인 일이라는 것이죠.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성이요 이것은 예언의 성취요 이것은 본래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요 그것이 이 시간에 와서 결정적인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올시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는 뭐니뭐니 해도 사랑의 계시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승리올시다.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사랑 자체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랑의 소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사랑을 전달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 쉽게 사랑한다는 말했다가는 뺨맞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랑이 전달이 돼야겠는데 이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의 진실한 언어는 희생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부잣집 아들딸들이 이게 문제라고요. 부모님이 아무리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그리고 뭐, 이거 해주고 저거 해주고. 그저 못마땅합디다만은 저로서 볼 때는 그거 지금 철따구니 없는 아이들 장가가고 시집가는 데다가 뭐 큰집을 사주고……. 난 마음에 안들어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들도 저들대로 고생을 하고 살아야지. 그런데 부모가 옛날에 고생했다고 해서 "너는 고생하지 마라"해서 집 사주고 차 사주고 다 사주는데, 틀림없는 것은 이렇게 사랑 받은 자녀는 불효자가 됩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워서 밥 한끼를 제대로 못 주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면서 키운 그 자녀는 커서 철저하게 효자가 됩니다. 그걸 아셔야 되요. 오직 희생만이 사랑의 효과적 언어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경험했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려워서 겨울에 추운 때에 어머니가 메리야스 장사를 해요. 메리야스 몇 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그저 이집 저집 다니면서 팔아요. 아들은 남의 사무실에 가서 청소하면서 일을 하고 밤에 야간 고등학교를 다닙니다. 밤중에 돌아온 아들을 놓고 "미안하다. 오늘은 밥을 못했다" 구워놓았던 고구마 하나를 까주면서 "이거를 먹고 오늘은 때우자." "어머니 시장하실텐데 어찌하여 이걸 제게 줍니까?" 그 고구마 하나를 받아먹으면서 눈물을 뚝뚝뚝뚝 흘렸어요. 이 아들이 고려대학교 상과 수석으로 들어갔어요. 그 어려운 가운데 고학을 해서 졸업을 했어요. 졸업식 날 제가 같이 참여했어요. 그 아들이 졸업장을 갖다가 어머니에게 주면서 "이것은 제게 아닙니다. 어머니의 졸업장입니다." 어머니가 "내가 너를 위해서 해준 게 뭐냐. 밥도 제대로 못 주고 학비도 못 줬는데……." 둘이 끌어안고 우는 장면은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고구마 얻어먹고 자란 아이는 효도하더라구요. 자동차 준 아이는 효도하지 않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이래서 많은 고난 속에 희생, 사랑은 분명합니다. 저 분이 얼마나 희생하나? 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나? 그걸 보고야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수용합니다. 사랑을 믿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살리기 위하여 그는 죽으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안에 엄청난 사랑이 계시되어있고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의미가 계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 이것은 의의 개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나라 정치처럼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벌을 받아야지요.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지요. 그냥 슬쩍슬쩍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심판은 엄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했던 것이에요.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어느 마을이 아주 Puritan 마을인데 깨끗하게 정결하게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좀 엄격한 마을이 있는데, 어느 처녀가 어쩌자고 결혼하기 전에 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요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 일은 온 마을의 궂은 일은 그 수도사가 하는 거예요. 이런 수도사 한사람이 그 마을에 있었는데 이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이것은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됩니다. 그런데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해요. 그래서 지금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직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감옥에서 죽었어요.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다고요.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이 수도사는 왜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 저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했어요. 내가 죽어야만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는 의의 승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거기서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고 합니다. 충족돼요. 그리고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긍휼의 승리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 은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만이 이 십자가만이 이 긍휼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음을 확증해 주시는 것이올시다.

 

또한 이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죽음을 넘어섭니다. 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 십자가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길입니다. 칼 바르트 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그의 교회 교의학 속에서 "사람의 생의 단 한번의 기회"라고 하는 논문을 씁니다.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하나 있어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은 바로 곧, 죽음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향하는 길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로 끝내는 시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삽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그 한순간을 작품처럼, 클라이막스로 그렇게 맞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모멘토리(Mementori)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모멘토리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모멘토 도미니(Memento Domini), 모멘토 도미니,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나의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기회를 가장 귀한 기회로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고 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저는 이래저래 북한을 자주 내왕을 합니다. 북한에 있는 고관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도 해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아시는 대로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재단 이사장의 임명장을 받고, 큰 행사를 치루고 저녁에 이렇게 파티를 하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왜 우리를 돕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한 것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북한을 10여년 동안 돕는데, 그 돕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까?" "대가 없습니다. 내가 평양시내에다가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뭘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보느냐?" 그러니까 "그래도 한 말씀 해주세요." "딱 한마디만 할께요. 예수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작년에도 400명 죽였다며. 인정을 하더라고요. 그런고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그는 말합니다. "안 죽일 수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셉니다." 왜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를 기독교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하고 산 사람들 만나보니까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더라고요. 기독교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지상의 영광입니다.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입니다. 그러니 사양할 리가 없죠. 두려워할 리도 없죠. 승리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를 위하여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것입니다. 승리를 믿고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승리의 계시가 바로 십자가에 확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이 길을 통하여 승리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호산나를 먼저 부르고 당당하게 갈보리 언덕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늘 십자가를 쳐다보며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직도 우리 마음은 어둡고 비겁하고 나약할 때가 많음을 용서하옵소서. 십자가 안에 있는 감추어진 승리의 의미를 날마다 확인하면서 영원한 승리의 생을 오늘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곽선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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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 부부의 불행 이야기(행5장1-11)

 

성경본문|사도행전 5장 01절 ~ 11절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국기원에서 개최된 “2006 미션컵 전국태권도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며 태권도 시범을 잠시 관람했는데, 청소년들이 자기들이 닦은 태권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태권도 시범에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눈물겨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모인 600여명 이상의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최선을 다하는 순복음노원교회 성도들의 헌신적인 모습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도 행전 2장 이하에 기록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행4:34,35).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저들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 중에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기도회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교제하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전도하는 일이나 바치는 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와 같은 불성실한 신자들 중의 두 사람인 아나니아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불성실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저는 그렇게 추측합니다.

 

바클레이의 주석을 보았더니 아나니아 부부가 범한 죄 중의 기본적인 죄가 불성실의 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Failure in diligence 가 그들의 기본적인 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신앙 생활에 불성실할 때, 여러가지 잘못에 빠질 수가 있는데 오늘 아침 아나니아 부부가 빠졌던 세 가지 잘못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첫째, 아나니아 부부는 명예욕에 빠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존경과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신앙의 인격을 갖추고 봉사의 삶을 지니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됩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행16:2)라고 했습니다. 도르가는 욥바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행10:22). 도르가와 고넬료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도 모두 칭찬 받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6:3). 초대교회 신자들 중 밭과 집이 있는 신자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고 사도들은 그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했을 때, 저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신자들이 신자다운 인격과 삶을 지닐 때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이 사회로부터 인정과 존경과 칭찬을 많이 받는 것은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에 있는 신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도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 중에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헌금으로 바치고 특히 바나바가 밭을 팔아서 그 값을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래서 저들이 사도들과 신자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을 보았을 때, 아나니아 부부는 자기들도 무엇을 해서라도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새로 시작하는 개척교회인 영안교회를 8개월 동안 맡아서 섬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얻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교회당을 하나 지어서 바치든지, 1억 원의 헌금을 드리든지, 자동차를 한 대 사서 드리는 일이 반드시 옳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자동차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1억 원의 헌금을 드릴 때, 1억 원 상당의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도 봉사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일부러 시도할 때 무서운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경고의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마6:2).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과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억지로 헌금도 하고 억지로 구제도 하고 억지로 봉사도 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정 반대로 생각을 하면 그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래, 나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을 받지 않으려고 헌금도 하지 않고, 구제도 하지 않고, 봉사도 하지 않아, 내가 참 잘 하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시면서 그를 칭찬하시고 부자의 인색한 헌금은 칭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막12:41-44). 아나니아 부부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두 사람이 공모한 후 소유를 팔았습니다. 바나바처럼 그들도 땅을 팔았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었지만 그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불순한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나니아 부부는 탐욕에 빠졌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소유를 판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명예욕에 이끌려서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헌금을 하기 위해서 소유를 판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소유를 판 값이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소유를 판 값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을 다 바치기가 아까운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탐욕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기로 공모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꼭 맞았습니다.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부부가 좋은 일에 공모를 하여야 하는데 아나니아 부부는 나쁜 일에 공모를 했습니다.

 

박종렬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나쁜 일에 부부가 보조를 맞추는 일이 있다. 예배에 지각하고 헌금에 인색하고 맡은 일에 무책임하고 말 많고 세상 쾌락을 사랑하고 교역자를 괴롭히는 일에 부부가 죽이 맞는 일이 있다. 아나니아 부부가 그러했다.”

아나니아 부부는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기로 공모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돈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두 사람은 돈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헌금을 바치기 위해서 마련한 돈이었는데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의 일부를 떼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사랑해서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다가 그만 무서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너무 사랑하다가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을 때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시지만은 않습니다. 무섭게 책망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구약 시대에 아간이란 사람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덩이 오십 세겔을 자기 장막 땅 속에 감추었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아 아골 골짜기 돌 무더기에 묻힌 일이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 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수7:25).


엘리사의 종 게하시도 옷 두 벌과 은 두 달란트를 나아만에게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었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왕하5:26,27). 재물에 대한 탐심과 탐욕은 무서운 책망과 무서운 저주를 불러옵니다.

 

저의 삶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제가 헌금을 떼어 먹은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돈에 대한 탐심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나를 위해서 판공비를 어느 정도 쓸 수도 있었지만 거의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교회가 써야 할 돈이 많을 때 되도록 적게 쓰려고 했고 다른 돈으로 그것을 보충한 일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제가 저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들은 이야기이지만, 저의 어머니는 돈에 대해서 깨끗했습니다. 남에게서 빌린 돈은 기한 내에 반드시 값 곤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돈에 대해서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어둡고 컴컴한 면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판 값에서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두 사람이 공모해서 벽장에 감추었는지 땅을 파고 거기에 감추었는지,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책망과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나니아 부부는 거짓과 불 회개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명예욕이나 탐욕 등 죄에 빠질 때 그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예수님은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 부부가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고 일부를 그에게 가져왔을 때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에게 저들이 땅 값을 감춘 죄를 정면으로 지적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아나니아는 사도 베드로의 긴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시간 후 그의 아내 삽비라가 사도 베드로에게 와서 똑 같은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기들의 죄를 은폐했습니다. “예 이것뿐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행5:7,8). 두 사람이 단단히 공모를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 회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명예욕이나 탐욕이나 거짓의 잘못을 범할 때 그것이 단순한 윤리적인 죄에 그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단을 끌어드리는 무서운 죄이고 성령을 대적하는 무서운 죄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 앞에서 명예욕이나 탐욕이나 거짓의 죄를 범할 때 그것이 사단을 끌어드리고 성령과 대적하는 무서운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 회개에 빠진 아나니아 부부는 둘 다 사도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아나이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사람들이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행5:5,6).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 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하더라”(행5:10,1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아나니아 부부의 불행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의 생활을 하다가 그리고 헌금의 일부를 교회에 갖다 비치다가 심판을 받게 되는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강변교회 신자들 중에서 아나니아 부부와 같은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는 책망의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불행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평상시에 신앙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기도와 교제와 봉사와 전도와 바치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도부원들처럼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봉사하기를 힘쓰고 전도하기를 힘쓰면 될 것입니다. 평상시에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인 청교도들은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지나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위선과 거짓의 죄를 범하게 될 때 즉시즉시 회개를 하면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일곱 집사들의 행복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모두 일곱 집사들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될지언정 아나니아 부부 같은 불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출 처| 김명혁목사(강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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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부모님의 참된 사랑 (Sunday Sermons Preaching)

 

 

 


제목 : 참된 부모님 사랑
말씀 : 출20:12


충북 제천 출신으로 허리가 굽은 곱사등이로 판사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곱사등이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는데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술과 도박에서 벗어나려고 손가락까지 절단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노름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가정 형편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오더니 또다시 어머니에게 노름 밑천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어디서 노름 밑천을 가져오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버지가 홧김에 어린 아들을 마당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척추를 크게 다쳐 곱사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면 철없는 아이들이 놀려대기 일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에 열중하며 그나마 자신을 반겨주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결국 명문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였고, 판사가 된 이후에는 다른 여러 형제들도 있었지만 자기 집에 모시며 극진히 섬겨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정말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부모가 무지해서 제대로 못해 주었어도, 심지어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어도 그래도 부모니까, 그래도 날 낳아주신 분이니까 섬기고 공경하고 모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하셨는데 하물며 부모님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길러 주신 부모님, 설령 만에 하나 그렇지 못했을지라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잘 공경하고 섬김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이유

1)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 주셨느냐와 관계없이 생명을 주신 것 그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공경하며 섬겨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아름다운 땅위에 태어나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인 행위를 비롯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열심히 수고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이 모든 생명의 활동이 얼마나 귀하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생명이 누구에게로부터 왔습니까? 물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이 위대한 생명체가 태어나게 하시고 대대로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대대로 전수시켜주는 위대한 생명의 창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낳아 주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을지라도 이 너무나 소중하고 위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인생길 살다가 어렵고 힘들고 답답하고 낙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 귀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공경하며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때에 부모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여러분에게도 더욱 은혜가 충만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헌신적인 사랑으로 양육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며 공경해야 하는데 더더구나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25사변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피난민 대열의 제일 후미에 쳐져 피난을 가다가 그만 가슴에 작은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지만 엄마의 가슴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사람들은 아기 엄마가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저마다 살기 위하여 도망을 가고 결국 다 죽어가는 엄마와 아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는 엄마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젖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엄마는 출혈이 너무 심하여 의식이 몽롱해져 가면서도 피범벅이 된 젖꼭지를 아이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엄마의 가슴에서 나오는 피를 빨아먹게 되었고, 결국 몇 시간 후에 엄마는 과다 출혈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군인들이 지나가다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아기를 구해 주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피를 먹고 이틀 동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좀 덜할지 모르지만 저와 같은 세대만해도 가히 부모의 피를 먹고 살았다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정말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하며 자녀만큼은 조금이라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던져서 수고하고 헌신했던 분들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셨듯이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 주신 그런 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삼하18:33절 하반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것은 다윗이 셋째아들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며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압살롬이 누구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했던 패역무도한 자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궁에서 쫓겨나 도망가게 되었는데 이를 뒤쫓다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 했던 이 패역무도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더라면 하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을 던져서,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며, 자식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이 굶은 것은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멸시천대를 당해도 자식이 멸시천대를 당하는 꼴은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 어찌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자녀 여러분, 이와같이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 나아가 그야말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헌신과 수고로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공경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과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해야 합니까?

1)힘에 겹도록 섬겨야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출20:12절을 보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공경하라는 말 db'K;(카바드)는 ‘무겁다, 힘겹다, 짐이 되다, 존경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공경은 힘에 겹도록 즉 최선을 다해서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섬기며 영화롭게 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힘에 겹도록 해야 그게 진정한 공경이고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형편대로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안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으면 하고 안 남으면 안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쓰고 남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기 전에 먼저 따로 떼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볼일 다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볼 일을 보기 전에 하나님과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볼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공경이고 그게 섬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시간이 남으면 하는 게 그게 무슨 섬김입니까? 돈이 남으면 하는 게 그게 무슨 섬김입니까? 물론 시간이 남아도, 돈이 남아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러나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섬김이나 헌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님이 정말로 나에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요, 나아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분이요, 그래서 내 생명의 은인이요, 내 존재의 근거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이나 부모님이 내 모든 행동의 일차적인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행동의 일차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다하고 나머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하고 그리고 그 나머지로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섬김이요 공경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 이 원리를 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부모님이 내 생명의 은인이요, 내 존재의 근거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래서 하나님과 부모님이 내 모든 행동을 제어하는 근거가 되어 먼저 공경하고 섬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부모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럴 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님 공경의 또 다른 자세는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이 곧 공경한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고 인정한다면 상대방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상대방이 부모님이건 하나님이건 그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혹은 그 지혜와 그 능력을 인정한다면 그 분을 높여 드리고 영화롭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면 어찌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엡6:1절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문에서 옳다는 말은 ‘준수하다, 의롭다, 법을 지킨다, 의무를 이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고, 도리이고 그래서 그것이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시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양육해 주신 부모님을 섬기고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보면 한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일까지 순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일을 하는 것은 결국 우주만물의 최정점에 계신 최상의 어른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뜻에는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기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교회를 가야하는데 부모님이 교회에 다니지 않으셔서 못 가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왜 교회에 가야하는지를 인내심을 가지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설령 부모님이 노를 발하셔도, 심지어 매를 든다고 해도 끝까지 참고 공손하게 말씀을 드리고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는 백배 천배 더 순종하고 더 공경하고 더 섬겨야 합니다. 자신이 정말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부모님도 그 자녀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또 꼭 신앙문제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모님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때로는 적절치 못한 말씀이나 행동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일단은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공손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항변하고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면 안 됩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일단은 공손하고 겸손한 자세로 경청한 다음에 말씀이 다 끝나고 나면 공손하게 자신의 뜻을 밝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이 좁혀지지 않으면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정말 공경하고 섬기면서 기다리다가 기회를 보아가며 공손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부모님도 자녀의 뜻을 받아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모님의 권위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정상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물론 이려니와 혹시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지 않거나 일상생활에서 불합리한 말씀을 하신다 할지라도 결코 대항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언제나 존중히 여기며 공손한 태도로 최선을 다함으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축복도 함께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모님들은 뭔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는 자녀를 위하여 온갖 헌신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점점 작아집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워집니다. 바로 이럴 때 모든 자녀들은 이제 거꾸로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심지어는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으니 부모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힘들 때는 이제 거꾸로 자녀가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어떤 설문조사에 의하면 2002년에는 노후에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67% 정도였는데 10년이 지난 2012년 그러니까 작년에는 35%정도만이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현상은 아무리 대세라고 할지라도 결코 올바른 가치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며,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입니다.

여러분, 오늘 정말 얼마나 왜곡된 가치가 판을 치고 있는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분별해야 합니다. 요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그게 정말로 옳으냐 그르냐보다는 대세가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대법관 아홉명 중 여섯명이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도 적극적으로 간통제 폐지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좀더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간통죄는 사람들의 범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거예요. 법감정이란 쉽게 말해 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즉 옛날 사람들은 간통을 큰 죄로 생각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별로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없애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놈의 법입니까? 잘못된 가치관이나 왜곡된 생각들을 바르게 잡아주는 게 법이지, 선이든 악이든 진리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법입니까? 그럼 다수의 사람들이 도둑질을 죄로 느끼지 않으면 도적질도 처벌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까? 여러분, 다수가 선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대세가 진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진리는 오직 1%만 따라가도, 아니 아무도 안 따라가도 진리이고, 99%아니라 100%가 따라가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우리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의 잣대로 삼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안강에 나갔더니 길가에 현수막이 하나 붙어 있는데 거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오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 떡하니 ‘안강성당’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안강성당에서 석가모니가 온 것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세상의 대세입니다. 불교에서 ‘축 성탄’하면서 성당에 축하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성당에서 ‘축 불탄’하면서 화답합니다. 세상적으로는 멋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그게 바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다가오는 사탄의 장난입니다. 성경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신 우상에 불과한 것이요, 사람을 속이는 사탄의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다수의 사람들이 자녀들이 부모님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엡6:2절을 보십시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공경이라는 말은 ‘평가하다,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상을 주다, 가치를 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생명을 주시고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양육해 주신 부모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헌신을 인정하고 거기에 걸맞게 경의를 표하며 몸과 마음과 물질까지 드려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자녀들의 본분이요, 책임이요,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부모님을 평상시에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힘없고 약할 때에 더욱 봉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 헌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양육해주신 부모님께 정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나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나머지 찌꺼기로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모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상시에도 그래야 되지만 특히 부모님이 연세가 드셔서 약하고 힘들 때 부모님을 잘 봉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도 풍성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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