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설교] 예수님 부활의 의미

 

 


제목 :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말씀 : 마28:1-6

 


1.놀라운 축복의 사건,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날입니다. 오늘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날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크게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입니다. 육체가 병들어 죽다가 살아난 것보다도, 금덩어리를 산더미처럼 얻게 된 것과도, 세상의 가장 큰 권세를 얻게 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요 축복의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리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을 열저 젖히고 나오심으로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은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건강이나 권세나 모든 부귀영화는 며칠 후면 다 사라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6:5에서는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고 그 분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자는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모든 죄와 사망과 어둠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는 진실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의 모든 어둡고 추하고 칙칙하고 절망적인 것들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전인적 생명을 부활시키신 사건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무덤권세,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 다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혼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한 생명을 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늘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 계시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무덤입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으스스하고 캄캄하고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만이 있는 곳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덤속에서 당할 그 고통과 절망과 캄캄함과 두려움과 공포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잠시 무덤의 권세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언제까지 거기 계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하셔서 잠시 맛보아야 할 과정일 뿐이요, 예수님께서는 그 더럽고 냄새나고 절망적인 무덤의 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가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고, 그 부활의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라 죄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죽음과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은 영과 혼과 육신이 다시 살아 전인적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시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서 승리의 주님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승리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이 우리 가운데 힘을 쓰지 못합니다. 더 이상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절망과 더러운 것들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승리의 주님이 그런 것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상황과 어둠의 세력과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 등의 마귀사탄의 권세에 억눌려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인도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사망과 고통과 연약한 것과 절망적인 것들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믿음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온갖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을 친히 보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목격하기 전에는 형편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앞에서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끝났다고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을 만나 주셨을 때,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셨을 때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나 절망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혹은 십자가위에서, 혹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혹은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분이심을 명백히 보여 준 사건입니다.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20:28절에서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고백했지 않았습니까?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인도에 가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믿음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그 잘난 지성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를 접어두고 천지의 창조주로써 생명의 주관자로서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손으로 만져본 사건입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만져 본 것을 기록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걸 믿지 못하는 자들은 오직 그들 자신이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갇혀 있을 따름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는 완전한 부활의 능력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분명한 부활 신앙을 살아가실때에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기쁨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사랑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이간질로 시작된 인간사이의 갈등과 미움과 고통을 깨트리시고 사랑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화와 미움과 저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마귀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사탄은 먼저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 합니다. 그리고 더 부추겨서 하와로 하여금 아담을 꾀어 먹게 함으로써 결국 아담을 공범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담은 사랑하는 아내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갈등과 미움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과 미움은 집안 전체에 누룩처럼 퍼집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와 질투로 죽이게 됩니다. 가족관계가 깨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왜곡된 관계는 더 나아가 이웃과 이웃사이에 불신과 미움과 갈등을 유발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는 가정, 지역사회, 국가 그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투쟁과 갈등과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시기와 미움과 갈등이 편만해 있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에게 몹쓸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에게 침을 뱉고, 뺨을 치며 온갖 희롱을 다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상)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국 사랑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움과 증오와 멸시천대까지도 가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다 떨쳐 버리고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을 부활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 부활절을 보내면서 이점도 깊이 묵상하여 모든 미움과 저주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주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에게 혹시 미움이나 시기나 저주나 질투나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남아 있다면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생명과 사랑과 은혜를 부활시킨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의 심령속에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부활의 기쁨이 더욱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소망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은 한마디로 하늘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해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떡을 나누어 주시고, 죽었던 자를 살려 주심으로써 천국의 모형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늘나라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맛보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실 새로운 세계에서나 완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는 인생이 받게 될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만으로는 천국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물리쳤으면 이제는 새생명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그 깨끗하게 씻어진 공간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로 생명으로 거듭나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하고 낙향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님을 알고,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과 소망 속에 다시 모였습니다. 주님의 분부대로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꿈과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4:33절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비겁하게 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진정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원수는 패한 것입니다. 죄도 패하고, 마귀사탄도 패했습니다. 죽음도 패하고,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원수도 절망도 다 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는 예수님의 것만이 아니라 그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절을 보내며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찾아 오셔서 우리를 모든 죄의 짐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고, 사랑과 믿음을 회복시키고 천국의 소망을 주시는 주님과 더욱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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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설교]시련을 축복으로     

 

 

 

 

로마서 5:3∼4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해 성장하여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시련으로 인해 인생이 무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에 속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 해방의 주역으로서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도전한 결과 51세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훌륭하게 그 일을 감당해냈습니다.

 

성경에도 시련을 통해 성장한 요셉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이런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며, 애굽에서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등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어려운 환경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환경에 굴하지 않고 소망을 붙들었던 결과입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 시련을 축복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겸손하게 나를 낮추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시련의 원인이 깨달아지며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유다를 다스리던 여호사밧 왕은 암몬과 모압과 세일 왕이 연합하여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절대 빈곤 상태의 기도는 더 겸손하고 간절하며 마음과 생각에 온통 하나님께 드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호사밧 왕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무기와 군사가 없는 가운데서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기도는 존귀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음은 시련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당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하시는데, 이는 시련이 바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밭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 밭이 귀한 것처럼 시련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시련은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련은 축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련은 축복을 받는 과정입니다. 한결같이 변하지 말고 어려움이 있을수록 하나님의 백성 된 본 자리로 돌아와 굳건히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시련을 축복으로 바꾸는 주인공이 되어야겠습니다.

최성은 전주새벽을여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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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성령을 받으라

 

 


제목 : 성령을 받으라

말씀 : 행19:1-7

 


1.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 가운데 지금 천국에 가 계신 고 이중표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의 설교의 주제는 별세 신앙이었습니다. 별세 신앙이란 말 그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로서 더 이상 내 생각과 고집과 이성과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목사님이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데 그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크게 사용되는 종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유명한 목사님들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때 한가지 발견한 것이 유명한 목사님들은 대부분 낙동강이나 대동강이나 두만강이나 큰 강변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경직, 김창인, 박조준, 김선도, 곽선희 목사님은 대동강 물을 마시며 자랐고, 김재준, 강원용목사님은 두만강 물을 마시며 자랐고, 이종성, 이상근 목사님은 낙동강 물을 마시며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한국교회 유명한 목사님들은 다 큰 강물을 먹고 살아서 저렇게 훌륭한 목사님들이 되었는데 저는 이 전라도의 작은 강 만경강물을 먹고 자라서 이렇게 키도 작고 능력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저도 한국교회를 위하여 큰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종아, 걱정 말아라. 압록강이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 낙동강이 길면 얼마나 길겠느냐? 너는 압록강이나 낙동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생명의 강물을 듬뿍 마시거라. 그러면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성령의 생수를 듬뿍 마셔서 결국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사님 중의 한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세상의 조건도 인생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욱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생명의 강물을 마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생명의 강물을 마셔도 적게 마셨느냐 많이 마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물을 마신 자는 물론 그 영혼이 살아나고 정신이 살아나고 가치관이 살아나고 능력이 살아납니다. 적게 마신 자는 겨우 살아나고 많이 마신 자는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수 강물을 마시지 못한 자는 그 영혼이 죽어있음으로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은총과 능력가운데 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여러분, 여기서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보고 던진 질문입니다. 누구에게 던진 질문이라고요? 제자들에게.... 그러면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 믿을 수 있는데 그러면 제자라면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성령을 받았어야 하는 건데 왜 새삼스럽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진정으로 믿은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받아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그래서 자신이 죽고 거듭나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거기에 걸맞은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그냥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교회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정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뭐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즉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즉 이성과 지성과 마음으로 훌륭하고 능력 있고 선하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분이라는 그런 종교적 차원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유일한 구세주가 되심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자아와 고집과 이성과 가치관이 깨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거듭난 존재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온전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다른 좋은 것들도 얻기를 힘쓰기 전에 먼저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자신의 죄와 무지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거듭난 생명으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써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은 왜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길은 오직 성령을 받는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잖아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우주만물과 인간과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압니까? 누구에게서 배워 압니까? 어떻게 연구해서 압니까? 설령 죄와 무지가운데 있지 않더라도 인간의 지혜는 정말 작은 것으로 그것으로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 우주만물과 생로병사에 대하여도 알 수도 없고 어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유식해도 하나님과 인생과 우주만물을 바르게 알려면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배우기 위해서 물론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함으로 말씀을 들어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동시에 우리 심령 속에 깨달음과 믿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과 인생과 우주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알고 깨닫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2:10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또 요14: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즉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오, 동시에 그것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고 믿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그래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특별히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오직 성령을 받아야 우리 영혼이 살고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기억한다면 인간의 그 작은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과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은 어떻게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성령의 임재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새 생명을 얻고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가정을 방문하고 싶은데 그 집에서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래도 억지로 갔는데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집에 오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오심을 정말 다른 무엇보다도 반가워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고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는 그 영혼 속에 찾아 가시고 거기 오래 머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죽어라고 세상의 별것 아닌 것을 사모하며 그것에 온 정열을 바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고 정말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를 주시는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그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기 위하여 열심히 주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 생명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릴 때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심령이 더러워져 있으면 성령께서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약 귀한 손님을 초청해 놓고는 씻지도 않고 더러운 옷을 입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방에는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어서 냄새가 풀풀 나고 한다면 귀한 손님이 와서 그 집에 들어갈 마음이 나겠습니까?

성령님도 그렇습니다. 우리 심령이 불신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와 음란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 등의 온갖 악하고 추하고 냄새나는 것들로 차 있으면 성령님이 찾아오시지도 않고 설령 찾아 오신다해도 금방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한다면 정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며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기쁘시게 찾아오시고, 계속적으로 함께 하시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24:3,4절에서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동시에 우리 심령을 거룩하고 의롭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아름답게 함으로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기쁨으로 찾아가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성령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그러면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기본적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 그대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당연히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도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상태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치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물론 결과가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고, 아니 결과는 반대인데 원리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용감해 집니다. 전에 있던 교회 사택에 바로 아랫집에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술을 안 먹었을 때는 말도 안하고 누구한테 해로운 소리 한마디 못하는 색시 같은 양반인데 술에 취하면 돌변합니다. 부인한테 행패를 부리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사택 앞에 와서 혼자서 막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러면 우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술취한 사람 상대해봐야 나만 손해니까요. 그러면 혼자 소리지르다가 제풀에 꺾여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술 때문에 감각이 무뎌져 겁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술 취하면 죄를 짓는데도 용감해 집니다.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걸고 싸우고 음란한 짓을 합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 취하면 나쁘게 용감하지만 성령에 취하면 진리 안에서 용감해 집니다. 마귀사탄 따위가 두렵지 않습니다. 가난도 멸시도 환난과 핍박도 심지어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유대관원들이 또 다시 예수를 전하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해도 하나님 말씀 듣는 것과 너희 말 듣는 것과 어느 것이 옳으냐면서 용감하게 예수님을 전했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집니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듯이 술취하면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또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 진절머리 나게 붙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힘든 일들을 조금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진짜로 근심걱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무디어져서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함으로 누리는 일시적이고 결과적으로 더 큰 아픔을 초래하는 왜곡된 평안입니다. 그래서 술이 깨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됩니다. 더구나 그런 과정에서 온갖 죄와 악 속에 빠지게 되고, 자기 몸 다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돈을 악을 사용하는,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미련하고 악한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진짜로 세상 근심 걱정 염려 원망 불평이 없어지게 됩니다.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게 됨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5:22,2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래서 또 엡5: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즘에 보면 심지어 교회 안에서 조차도 술 먹는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순전히 마귀 사탄의 역사에 놀아나는 일입니다. 여러분, 좀전에 말씀드린 엡5:18절에서 술취한 것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2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같은 잠23:20절을 보십시오.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을 즐겨하는 자들과 사귀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나실인 즉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사람은 독주는 물론 포도주나 심지어 포도나무 소산도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뭐 그밖에 술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윤리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다주는지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도 먹고 서양교회에서도 먹는데 하면서 괜찮은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남들이 도둑질하면 같이 도둑질 할 건가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 다 그래도 심지어 교회가 다 그래도 오직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말씀만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오직 거기에만이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특별히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즐거움이나 그 어떤 다른 것을 사모함보다도 성령의 임재하심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고 깨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심령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 위에 성령이 충만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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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Today's preaching ] 주님과의 아침식사

 

 

 

요한복음 21장 15∼19절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종 시험 과목은 ‘항복’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다윗, 사도 바울 등 하나님의 용사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항복의 날’을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배반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순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도 항복의 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베드로는 결정적인 배신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날 밤, 3년 전 주님을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3년 전에 하던 바로 그 일을 그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입니다. 그는 밤새 수고하였지만 빈 배였습니다. 하지만 새벽에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만선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 후 주님은 먼저 호숫가에 내려가셔서 떡과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때 배에서 내린 베드로는 주님께 다가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생선이 필요했다기보다 주님께 다가올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생선을 가지러 간 베드로는 생선을 세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또다시 베드로에게 다가가십니다. “와서 아침 먹어라.” 짤막한 주님의 식사 초청입니다.

식사를 끝내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세 번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원어 성서에는 주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아가페(헌신적인 사랑)’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 다 ‘필리아(친구의 사랑 혹은 우정)’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아가페’로 묻는 주님께 ‘필리아’의 사랑 고백은 거절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질문에서는 주님이 단어를 바꾸십니다. ‘필리아’로 말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 번째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필리아!’ 그런데 베드로의 세 번째 대답은 ‘노’가 아닌 ‘예스’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정답을 맞힌 것이 아니라 주님이 베드로의 정답에 맞는 문제를 내신 겁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두 번씩이나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결정적인 주님의 방문은 두 번이지만 매일매일, 숨 쉬는 순간마다 방문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게 순교를 암시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누군가가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은 원치 아니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를 항복하게 했습니까.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찾아오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다가설 수 있도록 명분을 제공해주십니다. 아침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 ‘필리아’의 사랑으로 질문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무장된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인격의 깊이와 넓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작은 사랑의 고백을 쓰시기에 우리의 큰 일도 작은 일이 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사랑 고백을 사용하십니다.

안성우 목사 (로고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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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도회헌신예배] 헌신의 은혜

 

 

 

 

제목 : 헌신의 은혜

말씀 : 고후8:1~9

1.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제법 오래전에 경기도 의정부의 미군 부대 옆에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교회는 교인이라야 약30여 명 남짓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두 분 장로님을 중심으로 교인들이 두 패로 갈려 분쟁이 생겨 서로 헐뜯고 이간질하며 싸움만 교회는 잘 돌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종을 치는 사람이 없어 목사님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꼬마 아들에게 종을 좀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예하고 달려가 종을 치고는 막 달려오다가 그만 과속으로 달려오던 미군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고 시간이 되어 강대상에 올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조금 있으려니까 뭔가 웅성웅성하더니 교인들이 빨리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끝까지 예배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왔고 그때서야 아들이 차에 치어 죽은 사실을 알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사고현장에는 경찰과 미군 장성이 와 있었고 아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었습니다. 이를 본 사모님은 졸도하여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미군 장성이 다른 부관들과 함께 와서 목사님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운전병의 실수로 이런 일이 일어난 점 진정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목사님, 무엇이든 목사님께서 해 달라는 대로 정성을 다해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장군님,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내 아들은 하나님께서 뭔가 뜻이 계셔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제게 아무것도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운전병도 너무 책망하거나 징계하지 마십시오.”

이에 미군 장군이 너무나 감격하여 세상에! 이렇게 귀한 주의 종이 있다니 하면서 재삼재사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부대로 돌아가서는 참모들과 목사님에게 어떻게 해 드리면 좋을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참모들이 그 목사님의 교회가 너무 초라하니 좀 더 크게 새로 지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결국 전적으로 미군이 부담하여 넓은 부지를 구입하고 초라한 교회는 헐어버리고 크고 멋진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배당 건축되고 봉헌식을 드리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예배당 열쇠를 드리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열쇠를 가지고 강단으로 올라가다가 그만 중간에 멈추어서더니 그 자리에 서서 울면서 올라오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어서 올라오시라고 하자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감히 강단에 올라 갈 자격도 없고, 목사님께 열쇠를 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장로로서 허물어져 가는 성전을 건축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기는커녕 싸움만 했는데 어떻게 올라가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를 대신하여 목사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이 되어 교회가 세워졌는데 제가 어떻게 이 열쇠를 목사님께 드리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내려가서 장로님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그만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다음에 목사님이 장로님의 손을 잡고 올라와서 열쇠를 봉헌하여 헌당식을 마치게 되었고 이후로 교회는 온 교우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를 섬김으로 아름답게 부흥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들이 사고로 죽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목사님은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으니 아들이 죽은 것도 분명의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 일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그 아들을 통하여 성도들을 깨닫게 하여 교회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뜻대로 되어 목사님의 아들이 희생제물이 되어 교회를 살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것이니 주님 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 하면서 주님께 맡기며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그럴 때 우리 자신도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6:19,20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래서 롬14: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이제 내가 살아도’라는 복음성가도 있지 않습니까? 함께 불러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신앙의 고백가운데 살기를 바랍니다.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 어차피 사라질 것을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영광입니까? 어차피 무엇인가에게 바쳐져야 할 것들,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바쳐진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2.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힘껏 주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는 그들도 너무나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주신 물질도 힘껏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오늘2,3절을 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여러분, 보십시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이 있었고 극심한 가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연보를 하였습니다.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극심한 가난이 도리어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환난의 많은 시련 속에서도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극심한 가난이 도리어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있습니까?

우선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며 적은대로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록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천배만배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도 주님이 주신 은혜가 더 크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은 그것을 얼마든지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까지 오셨습니다. 침뱉음과 뺨맞음과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로마 병정들이 휘두른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모와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여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찌 헌신하고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한 권사님이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권사로서 잘 한 일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하나님, 저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 믿음 안에서 자라나서 다 결혼하고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도 귀한 일이다. 그런데 자녀를 위한 헌신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 아니냐? 그보다 나를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지 말해봐라.

그러자 권사님은 ‘저는 주일 예배도 드리고,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 청소도 하고 점식식사 준비도 하고 설거지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것도 잘 한 일이구나. 그런데 그것도 권사가 아니라 일반성도라도 다 해야 할 일이 아니냐? 그런 것 말고 나를 위해 네가 특별히 한 일을 말해 보거라.’ 그러자 권사님이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섭섭하구나. 나는 네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심지어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했고 앞으로 네가 와서 살 천국 집도 마련해 놓았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위해서 별로 한 일이 없나 보구나. 너무 섭섭하구나.’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비록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그래도 주신 은혜가 천배만배 큽니다. 게다가 주님은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2:20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게다가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 이 큰 은혜를 받았으니 어찌 그 분을 위해서 살지 않겠느냐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고, 주의 은혜가 더욱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헌신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과 봉사하고 충성하라고 하신 것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고귀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또한 그렇게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역사에 참여한 심령들에게는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고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요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만을 받으시게 합당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난하게 되고,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은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인류를 살리고, 부활을 통하여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로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고 부활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힘들고 지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그런 귀한 사역을 통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요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만 부요케되고 우리는 어렵고 힘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도 감사와 기쁨과 자부심과 보람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또한 그런 귀한 사역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복을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상급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마19:29절을 보십시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물론 무조건 전토를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에 영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이 땅에서도 여러 배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평안북도 정주에 백사겸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그 마을에 선교사가 들어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 분은 열심히 교회 일에 충성을 다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온 성도들이 함께 나와 벽돌을 찍고 땀을 흘리며 일했지만 그래도 건축비가 부족하여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사겸성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 1000평을 모두 팔아서 건축비로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완공되었고 백사겸 성도는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교회 사찰로 임명되어 겨우 생활비를 받아 연명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님이 백성도의 신실함을 보고 그의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은 파커대학과 프린스톤신학교와 대학원을 거쳐 예일대 철학박사, 파커대학 신학박사, 스프링필더대학 인문학박사, 디포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연세대교수, 서울대 교수, 연세대총장을 거쳐 제2대 문교부장관을 지내고 정부에서 대한민국무궁화 훈장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신 후에는 국립묘지 애국지사의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책임져 주시고 백배천배로 갚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심은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누릴 뿐 아니라 이 역사에 참여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려 하심입니다. 그 생명의 역사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귀한 사역입니다. 그래서 그 귀한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귀히 여기시고 그래서 큰 상급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여전도회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 몸과 마음과 시간가 물질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이 땅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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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교회의 사명( The mission of the church)

 

 

 


사무엘상 4장 19∼22절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로 진입하던 역사적 전환기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이 이스라엘을 이끌다 가문이 몰락하고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참담한 상황입니다.

 

한 가문이나 한 시대의 흥망성쇠는 어느 민족에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평범한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람인 성경 기자는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적 시각으로 보고 해석합니다. 이 익명의 선지자는 제사장 엘리 가문의 몰락 이유를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문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패망 원인도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민족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교훈합니다(21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죄를 범했고, 엘리는 이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나머지 책망과 교훈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탐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제사를 멸시하고 제사장을 돕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일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2장 17, 22, 30절). 또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을 전하고 보여주는 사명을 외면했습니다.

이 시대를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3장 1절). 엘리 가문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합니다. 오늘의 교회, 곧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중히 여기며 신앙생활과 사명을 감당해야 할지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과 자랑은 예산이 많은 것이나 교인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크고 웅장한 건물이나 편리한 시설, 좋은 교육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과 자랑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계신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사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예배하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전하고, 하나님의 이상 곧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가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실현되는 평화의 세상을 위해 목회하고 선교하는 교회 상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줘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물질과 인적 자원과 세상 권세까지 가진 막강한 조직과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과 온유와 관용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세상에 구현하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우리는 개인을 위해, 교회만을 위해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굶주리고 가난한 형제와 나누라고 주신 물질의 축복을 내 말을 듣고 내 편이 되어야만 준다고 형제의 자존심을 짓밟지는 않습니까?

하늘의 영광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 오시지 않고 순례자의 도상에, 말구유에, 가장 작은 자로, 약한 자로, 낮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 뜻을 받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원구 목사(서울 효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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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성령충만함을 받으라

 

 

 

제목 :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 : 엡5:15~18

1.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유일한 구원자라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는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풍성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가 믿는 그 믿음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으로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야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래야 비로소 그 믿음이 주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 은혜를 누리고 못 누리고를 떠나서 믿는다고 하며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말하나마나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 충만하게 받으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체를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왜요? 때가 악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때가 악해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지혜가 없으면 악하고 왜곡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악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올바른 분별력과 힘을 가지고 그걸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얻게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의 왜곡되고 헛된 것들을 물리치고 진정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신도 하나님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죄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 어두운 영혼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되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알게 됩니다.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세상의 죄와 무지와 도전과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올바른 분별력과 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의 받아야 합니다. 받되 한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지 못하면 어떻게 근근이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몰라도 세상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을 이길만한 영적 능력이 부족하여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게 되어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니기는 다니는데 예수님 안에 넘쳐흐르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못 받아도 별거 없습니다. 세상의 것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그래봤자 죄인이고 그래봤자 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속에 지지고 볶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다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영생복락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살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자연인 그대로는 어떤 생명의 은총도 누릴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쁘시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어 생명의 능력과 은헤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설령 억지로 간대해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오심을 다른 무엇보다 기뻐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그 영혼 속에 기쁨으로 찾아 가셔서 거기 계속 머무시면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 즉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믿고 그러기에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님과의 만남과 그 안에서 누리게 될 은총을 진실로 사모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모하는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돈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달려갑니다. 오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이런 것에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곳으로 달려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지요. 그러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드립시다. 말씀 묵상합시다.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무엇으로 성령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영은 오직 영으로만 통하기 때문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로 대화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 영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말씀 되새기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4절을 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말씀 되새기며 기도에 힘썼을 때 드디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총을 사모하신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러면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이미 상당부분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도전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못 받아도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 가운데 있던 옛자아가 죽고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 가지고 있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의미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새롭고 올바르고 살아있는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천국시민이 됨으로 거듭나고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니 거듭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알든 알지 못하든 사탄의 지배 속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며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죄와 무지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방황하는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 똑똑하고 잘나고 세상에 모르는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실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세상에 지배당하고 세상에 취하여 세상 사람들이 살아 가는대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물론 성령은 생명의 영, 은혜의 영,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기시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의 풍성한 은혜과 기쁨과 능력을 평안과 위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삶의 모습을 보면 흡사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물론 결과는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과 마음을 술이 지배해버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이 내 마음을 지배해 버리니까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상방뇨도 하고, 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술이 나를 지배해 버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은 영적 육체적 마음적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 선한 영, 은혜의 영, 의의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로 달려가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도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심지어 환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이기게 마침내 완전한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술이 내 정신 줄을 제 맘대로 조종하여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추하고 더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곤해서 사람을 질려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에 취하면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지만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근심걱정을 조금쯤은 잊어버려 약간은 평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건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잠시 약간의 정신적인 마취를 시켜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취가 풀리면 즉 술에서 깨어나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평강과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근심 걱정이나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진정으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더욱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에 보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있지 않고 돈과 명예와 안일함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와 세상 즐거움에 취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술과 마약과 향락과 도박에 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세상에 취해서 헌신과 봉사와 충성과 이런 거룩한 귀하고 복된 가치들을 고색창연한 옛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고, 술을 마셔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18절에서 술 취한 것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여러분, 그래도 마셔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들은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 롬12: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보세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술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습니까? 그게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왜곡된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거룩한 산제물이 되고 그래야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면서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대의 왜곡된 풍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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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 종려주일 설교 Palm Sunday preaching

 

 

 

제목 : 만왕의 왕 예수
말씀 : 눅19:28-40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는 미국과 영국연합군이 바그다드에 입성했습니다. 폭격으로 중요한 모든 건물들이 다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사람들이 죽을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이라크 국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바그다드에 왔다. 고 했습니다.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극을 안겨 주었습니다. 부모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울부짖음, 병상에서 부모를 잃고 누워 있는 어린아이. 그 처참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저들은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면서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 왔습니다. 앞으로 군정을 통해서 자유를 주겠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그분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기마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12영도 더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는 조그마한 나귀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에미가 아니라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길들여진 나귀가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태울 수가 없어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얼마나 초라합니까? 왕의 입성으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입성 하셨습니다. 왜냐구요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셨습니다. 빼앗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 둘을 불러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메여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끌고 오라 누가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래서 제자들이 갔습니다. 정말 나귀새끼가 있고 저들이 끌고 갈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왜 남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 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니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습니다.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습니다. 안장하나 없어서 겉옷을 안장으로 삼았습니다. 궁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금으로 만든 안장을 깔고 다니는데 예수님은 천으로 된 안장 하나도 없습니다. 가시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탄자를 못 깔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겉옷은 겉옷이 아니라 사랑의 양탄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들이 큰소리로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는 왕의 입성을 알리는 소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때 주님의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입성하는데 왕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왕이면서 만 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 가슴이 뭉클 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무엇인데 왕께서 나를 위해 고초를 당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1.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누가 세우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왕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정신 병원에 한 환자가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하고 가니까 저 앞에서 고무신을 끈으로 묽어 끌고 오는 환자가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를 임명했냐 그러더 랍니다. 세상에는 원하지도 않는데 세우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폭력으로 제가 왕이 된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심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 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고 증언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고 강제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나서 들리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2.나귀 타고 오신 왕
왕의 입성이라면 뭔가 화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나귀 타고 입성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국에 내빈 하나만 와도 빨간 융탄 자가 깔리고 고급 쎄단차가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나귀는 장사꾼들이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타고 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오는 것을 겁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그들과 친숙한 동물입니다. 그들 삶 속에는 언제나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모신 자리가 평화입니다. 또한 나귀 타고 오심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심입니다.  만 왕의 왕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쓸데없는 교만과 허세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언제든지 빈 수레가 요란 하구요 가벼운 것이 멀리 날라 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님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겉치레로 화려한 것 보다 든든한 속마음을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를 진정 사랑하는 제자들의 순종이 더 좋은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겉옷이 양탄자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양탄자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사랑은 돈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입니까? 무엇이 더 귀한 것입니까? 그분은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며 도리어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3.찬양 받고 받으실 왕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 되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4.죽으러 오신 왕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남들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주님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의왕처럼 군림하러 가는 줄 알고 자기들도 한자리 할 줄 알고 좋아하나 주님은 그러하질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시기에 인간적으로는 더욱 고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발을 옮기자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지금 답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가 안됩니다. 왜 죽으러 간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로마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왕으로 올라앉으면 그만인데 왜 저렇게 꾸물거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담배를 피우더랍니다. 그래서 꼬마 놈이 왠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더니 “ 마음이 답답해서 피운답니다. 네가 뭐가 그리 답답하냐 했더니 남북통일이 안돼서 그럽니다 하더랍니다. 어른들이 답답 한거요 빨리빨리 철조망 뜯어내고 손잡으면 될 터인데 맨 날 무슨 회담이나 하고 앉았으니 답답하지요. 제자들이 그래요

믿음생활하면서 답답한 일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맞추지 말고 나를 예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찢으신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기 무엇인지를 알고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영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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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설교] 전인적 부활의 능력

 

 

 

제목 :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 : 요5:24~29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이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 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 생명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만이 참 종교의 조건입니다. 제아무리 지적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으로 고상하고 심지어 사랑이 충만해도 생명의 없으면 빛 좋은 개살구요, 알맹이 없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진짜고 이 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믿지를 못합니다.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마저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건 인간의 죄와 무지와 한계의 소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인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거나 말거나 부활은 우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실이고 진실이고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누누이 예언되었던 일이요,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시고 약속하신 일입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리고 물론 당연히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28: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대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를 보기 좋게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은 물론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그 분이 온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물론 이 일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영웅호걸이나 종교의 창시자나 철학이나 지식이나 과학이나 그 어떤 것도 하지도 못했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생명을 조금 유익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조금 생명을 연장하고 조금 건강하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생명을 창조할 수도, 살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우리 주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도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셨고, 그러자 사망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였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고 명령하자 청년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셨을 때 썩어 가던 나사로가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병들어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소녀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자 즉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오늘 친히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보내며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고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넘침으로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과 승리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러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부활의 생명을 마음껏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먼저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부활의 능력과 은혜를 마음껏 맛보며 살아가려면 먼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우리 영혼이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죄와 무지와 불의를 비롯한 모든 어둠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다는 것은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의와 선과 진리에 대하여 살아남으로 말씀가운데 진리가운데 선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넘치게 되고, 그러면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악하고 추한 것들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부활의 생명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25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이 때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살아난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냐? 바로 지금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말씀에서의 죽은 자는 육신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이 죽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오직 심판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혹 듣는다해도 믿고 회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도 죽은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살아난다는 것은 육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영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난다는 것은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거듭남이지요. 그래서 바로 앞절의 24절에서는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거듭남이고 구원이고 영적인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먼저 바로 이 거듭남, 즉 영적인 부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단은 천국백성이 되고 그 다음에는 부활의 생명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거듭남으로 일단은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부활했으면 이제는 과거에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있을 때 우리를 지배하던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들을 뿌리쳐 버려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영적으로 부활했는데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과거에 우리 영혼이 죽어 있어서 죄와 무지와 마귀사탄의 종이 되어 끌려다녔지만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모든 마귀사탄의 흉계와 유혹과 위협을 간파해 내고 호통을 치며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며 세상의 영광과 명예와 물질과 육신의 욕구와 모든 원망과 불평과 좌절과 시기와 질투와 거짓 등의 세상의 모든 더럽고 추하고 속되고 죄된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영혼이 부활한 자의 삶이요, 이것이 진정 능력있는 삶이요, 진정한 자유와 승리를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상황이나 환경이나 돈과 명예와 세상 영광과 세상 즐거움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 걱정 근심 염려 원망 불평 좌절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아름답게 감사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평강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할렐루야 찬양하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4:12,13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외치며 능력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고 온전히 거듭남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죄로 인하여 죽어있던 영혼이 온전히 부활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으로 이기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어 온전히 거듭난 심령, 부활한 영혼으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약하고 추하고 악하고 속된 것과 모든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을 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예수님의 생명 은혜 기쁨 평안 위로 소망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인격적 부활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부활하면 자연히 인격적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는 우리 영혼이 죽어 있어서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도 알지 못합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어서 캄캄한 가운데 있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별빛도 달빛도 그 어떤 인공적인 조명도 없는 완전히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가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구덩이에 빠지고 벽에 부딪치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는 인생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게 됩니다. 올바른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저 죄된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부활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어 있어서 감각도 없고 분별력도 없고 캄캄한 가운데 있던 우리 영혼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고 그래서 생명의 빛이 비춰지고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영혼이 살아나면 그야말로 우리 영혼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본분을 바르게 깨닫습니다. 내 육신과 생명과 능력과 지혜와 지식과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비로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을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줄 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 부활의 주님의 은혜가 충만함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희망과 소망과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름다워지고, 정직과 진실과 성실로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송하는 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말씀의 맛이 꿀맛처럼 달아집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을 가까이하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심령 속에 생명의 은혜로 더욱 가득하게 되고 그리하여 현재적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의 모습이요, 이것이 바로 말 그대로 거듭난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과거에 죽어있던 영혼이 살아난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와 죽음과 사탄이 내 안에 역사했으나 이제는 예수님과 의와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영광을 돌리며 하늘나라를 맛보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일단 영적으로 온전히 부활한 생명을 가지고, 더 나아가 과거의 모든 악하고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인 모든 모습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림으로 인격적으로도 온전히 부활하여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육체적 부활

여러분,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일단은 영적으로 부활하게 되고, 영적으로 부활하면 전 인격이 새로워져 인격적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과 혼의 부활이 전부는 아닙니다. 부활의 완성은 신령한 육체로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마지막 부활이요 완전한 부활이요 궁극적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것인데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거부함으로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간 영혼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8,29절을 보겠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보십시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때가 온다. 그때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요,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선한 일, 악한 일은 단순히 인격적으로 선하고 악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인격적으로 아무리 선해도 선한 일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선한 일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선을 행해도 선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설령 세상에서 선을 좀 행한다해도 선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0: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육체적인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육체는 지금의 육체와는 달리 신령한 육체요, 영광스러운 육체입니다. 그래서 늙지도 병들지도 아프지도 죽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염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은 하나도 없고, 하나도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한 육체입니다. 이 신령한 육신은 물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시공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5:42~44절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선 영적으로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부활합니다. 이 육체적인 부활이 이루어질 때 부활이 완성됩니다. 영적 인격적 부활을 가진 자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어둠과 마귀사탄과 죽음과 세상의 왜곡되고 무지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을 이기는 삶을 살기는 하지만 100%는 못됩니다. 혹 70%. 혹 80%, 혹 90%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혹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져 전인격적으로 부활이 완전히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 어둠의 권세, 마귀 사탄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을 맞이하여 진정 오직 유일한 생명의 부활이신 예수님을 더욱 온전히 심령 속에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실로 영혼이 온전히 거듭나고 부활하고 인격적으로도 거듭나고 부활함으로 마귀 사탄 어둠 권세 물리치신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악한 것들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부활이 완성된 단계가 아니라서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반드시 영과 육과 혼이 완전한 새 생명으로서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모든 죄와 무지와 추함과 낙심 원망 불평 절망 근심 염려 시기 미움 거짓 위선 다 집어던지고 믿음과 사랑과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부활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부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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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다음 세대를 세웁시다

 

 


신앙고백: 사도신경

본문: 열왕기상 19장 15~17절

한 해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이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우리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새겨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사명을 받는 순간입니다. 왕후 이세벨의 칼을 피해 도망친 엘리야는 힘든 광야 길을 통과해 호렙산에 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다시금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 아람나라와 이스라엘의 새로운 통치자가 세워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역사의 실제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말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통치자가 되게 하는 장본인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그의 제자 엘리사이기 때문입니다(왕하 8∼9장).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 일을 한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통찰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엘리야의 손을 통해 일어나는 일과 그의 제자 엘리사의 손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사명은 그대로 그의 제자 엘리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를 통해 이뤄지는 일은 엘리야를 통해 이뤄지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와 같이 이뤄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즉 한 사람을 통해 이뤄지는 일이 당대에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제자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져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하는 일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하는 것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인 흐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인생은 그야말로 벽돌 하나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며, 역사의 한 점을 찍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눈을 열어 우리 선배들을 통해 이어져온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나를 통해 이어져야 하고, 동시에 우리의 후배를 통해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안목을 역사적 제자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대만을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의 선후배가 함께 스크럼을 짜고서 영적싸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세대에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은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대를 이어 엘리야의 일이 엘리사에게 이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가 이어지고 함께 그 일을 이뤄가는 것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예수님의 일을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적 제자도의 안목을 갖고 다음 세대를 일으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무익한 종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 사람을 통해 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겸손하게 내 세대에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고, 다음 세대를 준비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이어지게 만드는 일을 신실하게 감당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준비돼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를 능가할 만한 일꾼으로 준비되고 있습니까? 한 해를 마감하는 이때에 우리의 인생에 대한 예비결산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 : 우리가 장차 주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받을 수 있도록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박지웅 목사(서울 내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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