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저녁예배설교] 악의 세력

 

 

 

말씀 : 잠9:13-18

제목 : 악의 유혹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서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오후 예배 시간에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것이냐, 아니면 좀 바쁜 일이 있는데 그것을 처리해야 할 것이냐, 지금은 매우 나른하고 곤한 시간인데 내 육신의 피곤함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앉아 졸 것이냐, 아니면 비록 나른한 시간이지만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것이냐 여하튼 우리는 언제나 선택 앞에서 살아가게 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선택의 여지도 없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처럼 보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실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다. 선택의 여지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똑같이 나른하고 곤한 시간에 예배를 드려도 어떤 사람은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어떤 사람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땅으로 떨군다. 똑 같은 설교를 해도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아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무덤덤하게 앉아 있다.

사실 모든 선택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내가 선과 진리와 은혜의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는 은혜와 생명으로 다가올 것이요, 반대의 선택을 했다면 말할것도 없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어떤 상황이나 어떤 여건가운데서도 다른 어떤 것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가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최선의 선택을 통하여 내 인생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하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죄된 육신의 본성과 무지로 말미암아 판단력이 흐려져 있다. 우리의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도 온전치 못하다. 더구나 지혜의 소리와 악의 소리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세상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지혜의 소리를 버리고 악의 소리에 끌려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많은 착각과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잠9장의 말씀도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의 말씀을 주신다. 지혜의 소리와 악의 소리가 오늘도 바로 우리 곁에서 들려오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선택을 하여 어떻게 응답하며 살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지혜자의 초청을 살펴보았다. 지혜가 최상의 잔치상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부른다는 것이다. 지혜안에는 최상의 잔치가 준비되어 있으니 모든 어리석은 초청을 뿌리치고 지혜의 초청에 응답하여 생명의 은총을 누리라는 말이다.

이렇게 지혜의 초청에 대하여 말씀한 다음에 오늘 말씀에서는 악의 초청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13-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우매자의 소리에 현혹되는 이유

먼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내용은 미련한 자의 특징이다. 미련한 계집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방탕한 여인을 말하지만 꼭 방탕한 여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유혹하여 죽음의 나락으로 몰고 가는 모든 악의 세력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습은 어떤가?

먼저 그들은 떠들며 어리석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떠든다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되는대로 천박하게 지껄이는 모습을 말한다. 그저 먹고 마시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방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멋대로 생각없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무지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심령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각한 무지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떤지도 알지 못하는채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도무지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명의 은총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인생의 결국이 무엇인지,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기에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죄로 인한 무지가 인생을 완전히 어둠의 나락 속으로 빠뜨려 아무런 죄의식이나 두려움이 없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며 먹고 마시며 방탕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먼저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기억하자. 무지가 큰 죄다. 무지가 사람 죽인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또 호6:3절에는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므로 더욱 힘써 말씀을 상고함으로 진리의 길로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악의 세력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미련한 인생들이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추구하는 쾌락적인 삶이 마치 자유나 즐거움이나 기쁨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까지도 그러한 방탕한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람을 유혹하여 함께 향락을 누리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함정에 빠뜨릴 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미련한 계집으로 대변되는 악의 세력이 집문과 성읍의 높은 곳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객들을 불러 유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집문 앞과 성읍의 높은 곳에서 부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장소를 불문하고 혹은 대상을 불문하고 유혹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집 문은 자기가 기거하는 집을 말하고, 성읍 높은 곳은 모든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문에서 그리고 성읍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 유혹을 한다는 것은 자기 집 문앞으로 스스로 향락을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읍의 대로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유혹의 소리는 장소불문, 인간불문이라는 것이다. 유혹의 손길은 모든 장소에 모든 사람의 곁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도시나 농촌이나, 교회 밖에나 교회안에나, 가정이나 학교나 여하튼 어느 곳에도 죄의 유혹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악의 달콤한 유혹

특별히 이 음녀의 유혹의 소리를 들어보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17절)“ 도적질한 물, 몰래먹는 떡, 이것은 물론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남의 이목을 피하여 행하는 악한 행동을 말한다. 악의 세력이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결국 악의 세력마져도 그런 행위가 옳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더 달고 맛이 있으니 같이 먹자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옳지 않은게 뭐 대수냐 달고 맛있기만 하면 되지, 진리가 다 뭐냐 선은 또 뭐냐 그저 내 육신 편하고 즐겁고 만족하면 되는 거지 뭐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교묘한 사탄의 전술이다. 그야말로 양심에 화인 맞은 소리인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죄된 인간의 본성과 죄된 인간의 욕구를 부추기는 전형적인 사탄의 전략인 것이다. 달콤한 유혹으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죄의 욕망을 자꾸 부추겨서 결국은 죄의 나락 속으로 빠뜨리려는 것이다.

4.악의 초대에 응한 결과

정말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떳이 맛이 있을까? 물론 미련한 자의 소리다. 사탄의 소리다. 유혹의 소리다. 그 결과는 오직 죽음 뿐이다. 오늘 18절의 말씀을 보라.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인가? 죽은 자가 그곳에 있다, 그의 객들이 그곳에 음부에 있다. 모두 같은 말이다. 한마디로 그곳에는 곧 그들이 좋다고, 즐거움이 있다고, 쾌락이 있다고 하는 그곳에는 오직 죽음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시체만이 즐비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객들 즉 그들과 함께 동료가 되어 함께 쾌락 속에 잠겨 있던 모든 사람들의 갈 곳은 음부 깊은 곳 곧 지옥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어리석은 자의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죄의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오직 멸망뿐이다. 그런데 대단히 안타깝게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육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죄의 소리에 너무 약하다. 그 길이 쉽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길이 당장은 더 달콤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자의적으로 때로는 타의적으로 그러한 길로 간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죄는 지금도 우리에게 쾌락과 즐거움과 기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사실 거기는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거기는 후회와 절망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선택은 자유이나 결과는 결코 자유가 아님을 기억하라. 오직 진리의 소리,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 때에 더욱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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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제목 :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말씀 : 마1:18-21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의 가정위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지역 주민 여러분과 함께 성탄절을 맞게 되어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희 교회를 찾아주신 분들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하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이 성탄절은 우주 최대의 명절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니 이 지구 뿐 아니라 우주 공간 전체에 걸쳐서 아니 우주 뿐 아니라 저 하늘나라의 성도들이나 천사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영원토록, 그리고 민족이나 혈통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전 우주의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날이요, 은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주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어떤 날과도 비교할 없는 엄청난 축복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이땅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박수를 치겠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서로 간에 사랑과 기쁨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축복의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이 땅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오늘 성탄절이 어떤 날이기에 그렇게도 온 우주 최대의 위대하고 복되고 기쁜 날입니까?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주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해방되고 평화를 누리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켜주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도 결국 다시 늙고 병들고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냥 늙고 병들고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절대 상극이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오늘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보십시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0:10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은 영적, 육체적, 정신적인 전인적인 생명입니다. 즉 죄에서 구원하여 먼저 천국백성이 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이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 누리게 하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물론 돈이나 권세나 건강이나 이런 것도 중요합니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누려야 할 자유와 평화도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운동도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영원한 생명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보다 우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가는 권세를 얻었다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다해도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가운데 처한다면 세상에서 누렸던 그 온갖 부귀영화가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돈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생명이 제일 중요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결코 육체적인 생명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고, 육체적인 생명이 있고, 정신적 생명이 있습니다. 영과 육과 혼이 살아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온전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문제를 아무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천하없는 성인군자나 영웅호걸도 할 수 없습니다. 달나라 별나라 우주 끝까지 갈 수 있는 과학 기술로도 안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누가 해결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혜와 권능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뿐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들은 다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도 능력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2012년전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죄의 대가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망에게 붙잡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영생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부활의 생명을 얻음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자기 죄는 자기가 해결해야지 남이 대신 죽어준다고 어떻게 내 죄가 용서되느냐고 말씀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내 마음만 똑바로 먹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천하없는 성인군자라도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죄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쩔 수없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천길만길 깊은 구렁 속에 갇혀 있다고 칩시다. 그 구렁은 말 그대로 천길 만길 너무 깊어서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올라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네 힘으로 올라오라며 내버려 둬야 합니까? 두레박을 내려 보내주든지 헬리콥터를 내려 보내든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을 때는 그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올라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 길인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서 건져 주러 오신 것입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어도 올라올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주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 품에 온전히 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유일한 구조선으로 보내주신 예수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받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원한 천국을 주신 예수님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이 죽으면 그만이지 천국이 어디 있느냐, 가 보았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여러분,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신은 땅에서 왔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데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들어간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은 그럼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고 묻습니다. 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천국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4:17에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또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누구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성령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님을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세계3대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너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죄 용서받고 천국에 갈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믿든지 만약 믿지 않는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다든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든지 하는 말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어째서 성인이라고 부른단 말입니까?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나는 그 성경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성경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읽혀진 책으로 세계 2,5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수십억의 사람들이 읽고 인간이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지 알게 되고,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바보라서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아니 그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과학의 법칙을 몰라서 부활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그러면 또 예수님 안 믿는 수많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 사실을 안 믿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믿는 분들 중에도 정말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과 육은 차원이 다릅니다. 육적, 물적인 것은 세상의 원리와 법칙아래 있지만 영혼은 세상의 육적 물적 이성적 법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껏해야 3차원의 세계지만 영적인 세계는 4차원 5차원 백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어두워져 있으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훌륭한 과학자들이나 그밖에 위대한 분들은 세상 지식도 잘 알고 영적인 지식도 잘 아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세상적인 지식이나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하지만 영적인 지식은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세상적으로는 똑똑하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운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식과 영적인 지식이 모두 밝은 사람들의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단코 여기서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로 말미암아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인생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래서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세계 역사상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전 우주 공간에 걸쳐서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인류를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살리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우리 인류가 진정한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축복속에 영원히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2:10,11절에서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에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러면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진정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탄과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해방자, 자유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과 고통에서 해방 될 것입니다. 모든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에서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가정과 이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 성탄절에 온전히 예수님을 모심으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여기서 누릴 천국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

그러나 하오나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세상에는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여,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죄와 무지속에 있는지 깨닫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먼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모든 이웃들에게 이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과 사랑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나누어 줄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죽음의 길로 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고, 가난과 핍박과 억압 속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되고,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에 사랑의 빛이 되고, 거짓과 모함과 술수가 있는 곳에 진리의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실로 이 땅 만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참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강 속에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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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 생명에 관한  과학

 

 


말씀 : 욥38:1-11

제목 : 신앙과 과학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크게 두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곧 무신론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은 다신론자들이거나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어떤 이는 자신이 나름대로 섬기는 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영이 완전히 죽어 있거나 조금 살아있다해도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이 죽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오직 육체적, 정신적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영역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어서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인간이 만든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의 두가지 큰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그들의 영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오는 오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라야 교제가 가능한데 영이 죽어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이 안되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그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니다. 그러니까 영이 죽어 있는 인생은 인간의 모든 삶을 그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이 완전히 죽어있으니까 그 영역은 부정하고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정신적, 물질적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그저 정신적인 측면으로 이해하여 그건 나약한 사람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물질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하나님을 어디 있느냐, 보았느냐, 천국에 갔다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보았느냐, 귀로 들어보았느냐, 천국에 다녀왔느냐고 묻는 것은 결국 그게 과학적으로 맞는 말이냐,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하는 질문이고 이러한 질문은 바로 과학지상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여러분, 과학이 뭔가? 과학(科學, science)에 대하여 사전에서는 이렇게 나와 있다. ‘자연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과학이란 자연에 관한 것 즉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경험 가능한 세계에 대한 어떤 법칙과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과학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과학은 우주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고 그것을 다 밝혀낼 수도 없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러니 과학의 범위 밖에 있는 하나님을 과학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고 증명하고 알아내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치 과학이 만능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과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으면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는 사실만 인정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1.과학의 지식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오류

과학은 지식적으로도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말하면 과학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음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류의 미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진정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과학은 이런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나 해결점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런 근원적인 문제 말고 일반적인 지식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지식이 과학의 법칙에 의하여 실험될 수 있고 증명되어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국어 공부를 한다고 하자. 국어를 잘하려면 열심히 글을 많이 읽고 쓰며, 문법을 공부하고, 단어를 암기하고 하면서 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능 분야도 과학적 법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로 만나서 교제하거나 사랑하는 일도 거기에 무슨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분야들에도 부분적으로 과학을 도구로 사용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공부도 할 수 있고 좀더 긍정적인 발전을 모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원리가 과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설령 과학의 범주 안에 있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과학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이 광활한 우주와 생명은 분명히 과학의 연구대상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그 신비를 과학으로 다 밝혀낼 수 없다. 즉 과학이 결코 인간과 우주와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과학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할 수 있는 학문도 아닐뿐더러 설령 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고 할지라도 그것도 다 밝혀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2.과학의 능력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오류

그뿐이 아니다. 과학은 이런 지식적인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능력적으로 한계가 많다. 즉 지식적으로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과학이 알고 있는 문제라도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명에 관한 문제를 보자. 생명에 관한 분명 과학의 연구대상이지만 그러나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도 없으며, 죽은 생명체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할 수도 없다. 인간의 노화 현상을 조금 지연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불로장생의 길을 열어줄 수도 없다.

물론 이런 근원적인 문제 말고도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너무나 많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세상의 다른 학문의 문제도 과학으로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나 혹은 과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 모두 지식을 제공할 수도 없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도 없는 과학으로 알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말이다.

3.과학을 말하면서 비과학적인 진화론을 믿고 있는 오류.

조금 공부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소위 진화론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번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 언급한다. 진화론은 한마디로 우주 만물이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땅도 바다도 하늘도 별도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생물들은 처음에 무언가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더니 자꾸자꾸 변화해서 마침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요, 가설에 불과한 이론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과학도 아니다. 증명된 것도 아니고 실험을 통해서 밝혀낸 것도 아니다.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의 법칙으로도 말도 안된다. 물리학적 법칙에도 위배되고, 생물학적 법칙에도 위배된다.

그들이 증거라고 내 놓은 몇몇의 증거들도 사실은 증거도 아니다. 전혀 연결고리도 없으며, 증거라고 말하는 화석이라는 것도 어떤 것은 조작된 것이고, 어떤 것은 처음부터 그냥 그런 동물일 뿐이다. 중간단계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비과학적인 허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4.과학의 방법을 무시하고 신을 거부하는 오류.

과학지상주의자들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엄청난 모순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과학적 방법론은 관찰 ․ 가설 ․ 실험, 입증 ․ 정설, 응용 등인데 신이 없다는 주장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단순히 자신의 신념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이 없다고 과학적으로 말하려면 관찰과 가설과 실험의 과정을 거쳐서 신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실험도 입증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단순히 자기의 신념으로 신이 없다고 주장하니까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원래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으로 경험 가능한 세계만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정신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밝혀 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역은 그 이상의 것이기에 과학적으로는 본래부터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과학적인 잣대에 의하여 판단하려고 하고, 그래서 당연히 과학적인 법칙으로 관찰하고 실험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영역임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모순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여러분, 과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나 과학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이다. 그런데 마치 과학적으로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교만과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일일 뿐인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38:1-3)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을 퍼부어 대신다.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있었느냐, 네가 바다 속을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느냐, 광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느냐, 누가 비를 만들었고, 누가 하늘의 일월성신을 만들었느냐, 너의 마음 속에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그 근원을 아느냐, 네가 거기에 있었느냐 하시면서 네가 알거든 한번 대답해보라고.....

그러니까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양, 마치 자신이 판단자가 되는 양 여기며 말했던 욥에게 그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며 그 무지와 어둠 속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마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말하지만 실상 그들이 아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작은 지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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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은혜충만한 성도

 

 

 

 
말씀 : 엡 3:14-19

제목 : 은혜충만한 그리스도인

 

1.선한 싸움에 승리해야 합니다.

 

어떤 어린 소녀가 큰 사고를 당하여 양쪽 다리를 심하게 다쳐 거의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여러 번의 수술과 물리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하여 이 소녀는 수술을 받고 물리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몇 차례하는 동안 이 어린 소녀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부모님에게 이제 그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물론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얘야, 안된다. 힘들어도 참아야한다. 지금 잘 견뎌야 나중에 걸을 수도 있고, 그래야 생활하는데 힘들지 않단다.’하면서 달랬습니다. 그러자 어린 소녀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다리를 못쓰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나를 사랑해 주실 거잖아요? 그러니 저를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하면서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린 딸을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네가 다리를 못쓰게 되어도 아니 설령 네 온몸을 못쓰게 된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나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이 고통의 시간들과 싸워 이겨서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바란단다. 왜냐하면 그래야 네 인생이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아름다워 질 것이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소녀는 일년여 동안의 긴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고 성한 몸으로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의 부모님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아니 아예 바보가 된다고 할지라도, 또 심지어는 죄가운데 빠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가 어떤 고난이나 죄악과 싸워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에 지거나 혹은 어떤 어둠의 세력에 억눌려 초라한 인생이 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선한 싸움을 잘 싸워 더 아름답게, 더 거룩하게, 더 온전하게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떤 고난과 시험과 유혹이 오더라도 그것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장은 조금 편하고 쉬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우리 영혼이 유린당하여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고 종노릇하며 결국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나 의미도,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생명과 자유와 평화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세상의 고난과 시험과 유혹과 핍박과 죄악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맞서 싸울 때 비록 그 과정이 조금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누려야 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다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4:7,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조금 힘들다고 세상의 죄와 유혹에 적당히 타협하며 양보하며 살아가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죄의 유혹과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고난과 유혹과 왜곡된 가치들과 맞서 싸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안에 온전한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채울 때 하나님의 능력과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서 세상의 모든 고난과 시험과 죄되고 왜곡된 것들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무엇으로 모든 고난과 죄와 악을 이기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가능하겟습니까?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강한 것 같지 심히 약한 존재입니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죄와 무지를 깨달아 알 수 있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바울은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데 무엇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느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물질적인 부요함이나 세상의 명예나 세상적인 어떤 축복이나 건강이나 이런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덧입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와 선과 은혜와 사랑 등의 선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한 가치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죄와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없고 따라서 다른 것들 즉 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이런 것들이 아무리 풍성해도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이라는 그릇 속에 무엇을 채우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요, 마귀가 들어있으면 마귀의 사람입니다. 진리가 들어 있으면 진리의 사람이요, 거짓이 들어있으면 거짓말쟁이입니다.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 있다면 은혜의 사람이요, 악과 거짓과 추함이 가득 들어 있으면 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복된 마음이 가득차 있으면 축복의 사람이요, 원망과 미움과 저주가 가득 들어 있으면 저주의 사람이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는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와 사랑과 축복과 은혜가 가득 들어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는 모든 죄와 유혹과 어둠을 이기고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은혜가운데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정말 은혜와 진리와 생명의 풍성함 가운데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것들로 우리를 채우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세상의 죄와 악과 어둠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여 진정한 평안이나 행복이나 은혜를 누릴 수 없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도 누리기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무엇을 위하여 힘쓰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복된 삶을 살려면 무엇을 먼저 채워야 합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육신도 건강해야 합니다. 지식과 교양도 쌓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도 얻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까? 국회의원 판사 의사 목사가 되기 전에 하여튼 외형적으로 무언가 그럴듯한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올바른 인성을 갖춘 인격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올바른 인성을 가진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기에다가 올바른 영성을 플러스해야 합니다. 아니 인성보다 영성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인성만 좋으면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영혼이 죽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갖춘 사람이 온전한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이라야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누려야 할 영적 육적 물적 지적 정적 모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믿음과 사랑과 은혜과 진리와 거룩과 의와 선과 지혜로 충만함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영성과 이성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정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크고 높고 깊은 것인가를 알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한없이 크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물론 모든 인류, 모든 우주 공간에 미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길이는 어떻습니까? 그 길이는 무한대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무한한 것이지요. 또 그 깊이는 어떻습니까? 그 사랑의 깊이는 바다 밑바닥까지, 지구 깊은 곳까지 모든 곳에 미치는 것입니다. 높이는 어떻습니까? 그 높이는 하늘 끝에까지 닿는 숭고하고 존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인류에 미치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덧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집니까? 그야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어떻게 우리는 사랑하셨는지를 안다면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그냥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 가운데 차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하여 그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그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정 겸손히 엎드려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말씀묵상할 때 어찌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래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 때에 우리의 심령에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그 감격의 눈물과 함께 세상의 모든 원망 불평 짜증 미움 저주 불신 어두운 것 더러운 것 다 독기 시기 질투 이런 모든 찌꺼기들도 다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내 심령속에 천국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빛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사랑과 감사가 넘쳐흐르는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느끼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릴 때 더욱 은혜의 충만함을 입어 우리 가운에 남아 있는 모든 찌끼 같은 것들을 다 쏟아내 버리고 주님안에 있는 놀라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겠는데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 17,18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온전히 모심으로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그리고 그의 사랑도 올바르게 안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한 거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 비로소 우리의 어둠과 무지는 물러가게 됩니다. 사단은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 속에 빛과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영이 들어오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사탄의 영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죄와 어둠의 그림자도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게 하시고, 따르게 하시고, 생명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까짓 알량한 내 고집, 생각, 이성, 가치관, 주장, 경험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완전히 주장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삶에 완전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니까 빛이시니까 은혜이시니까 능력이시니까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끄떡없이 서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물결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내 작은 생각과 가치관과 의지를 따라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약하고 추하고 왜곡된 것들을 이기고 생명력이 넘치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승리의 사람, 능력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식도 건강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와 빛과 기쁨과 평강와 위로와 소망 등의 온갖 좋은 것들로 여러분의 심령이 가득채움 받아서 진정 세상의 모든 약한 것과 어두운 것과 힘든 것과 죄의 유혹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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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추수감사절설교 / 감사의축복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여러분,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세계적으로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 나라를 대상으로 치안상태를 조사했는데 우리 대한민국이 100만점에 83.1을 기록하여 1등이고 그 다음에 싱가폴, 카타르, 일본 등이고 서유럽이나 미국은 6,70점대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나 남미 지역은 2,30점대가 수두룩하고 가장 치안이 불안한 나라는 베네수엘라인데 15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83점으로 당당히 1등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범죄율은 가장 낮고 범인 검거율은 1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밤 늦은 시간에도 밤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 있어도 안전한 나라, 식당이나 편의점이나 심지어 술집에서도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두고 나와도 누가 가져가지 않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제법 오래전에 제 스마트폰을 식당에 두고 왔는데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폰 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제 폰에 저장 되어 있는 아내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누워 있으면 어떻게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술에 취해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거나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을 보며 저 사람 저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저라나 싶어서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치안상태만 좋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자유와 평화가 보장 되어 있습니까? 얼마나 풍요로습니까? 올해도 농사가 대풍이어서 올해 쌀생산량이 약434만톤으로 최근 6년간 최고의 풍작이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풍년이라 쌀이 남아돌아 정부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이 140만톤이나 되어 처치 곤란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에는 우유가 남아돌아 난리입니다. 그래서 젖소 수를 줄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젖소를 도축하고 그래도 안되어 분유를 만들어 처리하는데 분유 재고가 쌓여 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입니까? 어느 나라를 먹을 게 없어 난린데 우리는 남아돌아서 난리인 것입니다.

뭐 그밖에 감사할 것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60년대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만8천불 약300배나 부자가 되었습니다. GDP 그러니까 국민총생산량이 세계 11위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완전히 안정되어 있고 풍요롭고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해도, 혹 힘든 일이 있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고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그런 절기입니다. 비록 때때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귀하고 복된 삶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그래서 이렇게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일부러 추수감사주일을 제정해 두시고 이를 지키며 살라고 하신 이유는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흉악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감사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당연히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의 은총과 감격가운데 살다보면 당연히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대한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또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 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 속에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더욱 믿음과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능력으로 채워주심으로 그 삶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점점 은혜가 넘치고,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면 할수록 은혜는 점점 멀어집니다. 아니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정말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아니 더 주기는커녕 주었던 것마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눅19:24~26절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면서 자꾸 불평이나 하고 더 달라기만 하는 사람은 준 것도 아까워 주었던 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이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신 하나님,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주심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사회가 더욱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감사가 뭡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찌 능력있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 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 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아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주고 드리며 자꾸 복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자꾸 은혜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믿음이니까요. 그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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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선악과에 대하여

 

 

 

제목 : 선악과의 의미

말씀 : 창2:15-17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의문과 의심은 다르다. 의심은 하나님 존재자체나 천국과 지옥 등의 신앙에 관한 중요한 주제들을 잘 믿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의문은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잘 알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왜 그렇까? 왜 그렇게 하셨을까? 과연 어떻게 될까?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등등 신앙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궁금증들이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어떤 주제에 의문을 가질때 더욱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그런 과정을 거쳐 의문점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 신앙은 더욱 견고해지고, 전도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된다.

오늘은 우리 신앙인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점 중의 하나인 선악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져보았는가? 나는 사실 처음 신앙생활 시작할 때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이 선악과 문제다. 나뿐 아니라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를 공격하기도 한다.

선악과와 관련된 의문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놓으셔서 사람들을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는 것이다. 선악과만 없었다면 사람이 그것을 따 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고, 죄를 짓지 않았으면 걱정 근심 고통없이 잘 살았을 터인데 왜 그걸 만들어서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하였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실 때 사람이 결국 따 먹게 될 것을 알았느냐 몰랐느냐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따 먹을 줄을 뻔히 알고도 그것을 만드셨다면 결국 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모르고 만들어놓으셨다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못한 분이 아니냐는 것이다. 전지전능이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걸 모르셨다면 어떻게 전지전능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혹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 100%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한계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나 신앙에 관한 모든 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시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유한하고 부족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당연히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며, 더구나 영적인 세계는 이 세상의 이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그나마 성경이 태초부터 영원까지의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하여 모조리 다 기록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다 알려주어도 다 알지도 못하겠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같은 책들이 수백권, 수천권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한권도 제대로 다 읽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는데 그 수백 수천권의 책을 어떻게 다 읽고 어떻게 다 알겠는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집중해서 다루고 우리가 알고 싶은 모든 것들을 다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 외에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성경이 가라는 곳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성경에 기록한 것 이외에 알 수 없는 부분은 억지로 인간의 이성대로 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연히 억지로 풀다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켜 이단 삼단으로 가지말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은 알려 주신대로 말씀묵상하며 그 안에서 올바르게 알고, 비밀에 두신 것에 비밀에 두신대로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는 우리가 얼마든지 은혜가운데 믿음생활하기에 충분한 만큼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은혜가운데 신앙생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과의 의미는 무엇일까?

1.선악과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낙원 같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셔서 인간에게 주었다. 거기는 생명나무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실과나무를 비롯하여 각종 동식물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에게 주시며 그것들을 다스리며 누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네 마음대로 먹어도 좋지만 단 하나 선악과만은 금지하셨다.

그렇다면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선악과는 인간이 범치 말아야 할 하나님의 영역의 표시하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만든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이 선악과을 볼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선악과를 볼때마다 하나님이 인간의 통치자가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뜻대로 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표로써 하나님께서 금한 이 실과는 절대로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선악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 규정이었던 것이다.

여러분, 사실 자식들도 똑같다. 자식들에게 금지조항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허용하면 결국 방자해진다. 버릇이 없어진다. 아버지나 자기나 똑 같은 줄로 안다. 그러나 일정한 금지조항을 두고 지키게 하면 무언가 자신이 부모의 영역을 침범할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고 그러므로써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의 통치권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살아갈때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자.

2.인간의 삶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선악과나 사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일도 없고, 사단의 유혹으로 죄를 지을 염려도 없이 평안하게 살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과연 그러한 상태 즉 죄의 영향에서 100% 배제된 상태에서의 선이나 자유나 평안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결국 로봇과 같은 삶에 불과하고 로봇과 같은 삶이라면 오로지 선 속에 산다해도 참된 인생의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악에 빠질 유혹이 전혀없이 모든 것이 선인 상태라면 선을 선택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동으로 선을 행하며 산다면 그것은 결국 로봇에 불과한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로봇에 불과한 삶은 결코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자녀가 부모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그저 부모가 조종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겠는가? 설령 자녀가 오직 선(善) 가운데 산다고 할지라도 그 인생에 과연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녀가 세상에 죄의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써 선과 의와 진리를 선택하며 살아간다면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인격을 가지고 선과 진리와 의를 선택함으로써 진정 의미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악과라는 금지 규정을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그 고귀한 인격을 선하게 활용하여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도 더욱 가치있고 의미있게하는 삶을 살아가자.

3.인간과의 계약관계 속에서 온전한 교제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임의로 먹으라하시고 선악과만은 먹지말라고 하신 것은 일종의 인간과 맺은 계약이다. 그래서 이것은 소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분, 부부가 어떻게 이루어지나? 그것은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상대방을 사랑하며 도우며 협력하며 위로하며 격려하며 동반자로 살겠다는 약속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잘 지켜질 때 부부관계는 행복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쌍방이라도 이 약속을 어길 때는 자칫하면 부부관계는 깨지든지 아니면 함께 산다 해도 그 삶은 행복할 수가 없다.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회생활은 계약관계로 형성된다. 성문법이든 불문법이든 관습법이든 여하튼 모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계약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 즉 생각과 감정과 이성과 지성과 영성을 가지고 일정한 계약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계약관계 속에서 우리와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주신 지정의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그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며 살아갈때에 인간의 삶도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만약 이 계약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제가 가능할까? 그렇지 못하다. 그러면 그냥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을 받아먹는 일방적인 관계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인생은 고귀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그렇지 않은가?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없고 그저 맨날 받기만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무가치하겠는가? 그게 무슨 교제이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일부러 계약관계를 만들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것은 주시고, 인간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은 드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지고 우리 인생의 삶도 참된 의미와 가치를 누리는 삶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내용이 좀 어려웠는지 모르겠지만 이 선악과와 관련된 문제도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믿음도 온전해지고 이것을 가지고 공격을 한다든지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이해시켜 줌으로 저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

선악과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다른 많은 것을 주시고 단 하나 선악과만을 금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 다른 존재로 하나님은 다스리고 통치하시고 인간은 거기에 따라야 할 존재임을 명심하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분명히 받아들여 살아갈때에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하시려는데 있다. 인간이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선을 택하며 살아감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와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세 번째는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계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기에 우리와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모든 교제는 계약을 전제로 한다. 어떤 관계라도 어떤 형태라도 계약관계를 통해서 유지된다. 그리고 계약에는 언제나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 지켜지지 않으면 계약관계는 파기된다. 계약이 파기되면 서로의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선악과는 바로 그런 계약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계약에 충실할때에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늘 유지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유익한 것들을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인간도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선악과를 두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온전히 순복하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을 동원하여 선과 진리와 의의 편을 선택하며, 또 하나님께 주신 계약관계에 충실하게 임하여 살아갈때에 저와 여러분은 더욱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는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리고 우리에게는 더욱 생명의 은총과 인생의 참된 가치가 있는 삶이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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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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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주일예배설교] 감사하는 자의 복

 

 


제목 : 감사하는 자의 복

말씀 : 시107:1~7

 

1.감사는 현재를 행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굽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권세나 지식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100여세대가 살고 있는 15평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기본 재산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월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재산도 월급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속극에 나오는 넓고 호화스러운 집과 멋진 청춘남녀들과 그들이 다니는 멋진 직장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너무나 멋지게 생긴 사람들과 사는데 내 꼴은 이게 뭐냐고 탄식하며 원망하며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감사할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이 귀한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비록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넉넉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 먹을 것, 입을 것,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주일 하루 쉬면서 예배드리고 가족과 함께 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똑같이 기본 재산이나 월급도 많지 않고 15평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전자의 사람은 그나마 그 작은 아파트도 진정으로 소유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가난뱅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릴 줄 아는 부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개를 가지고도 백가지를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백개를 가지고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부자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물론 한 개를 가졌어도 백가지 천가지를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백개 천개를 가졌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만가지를 주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가난뱅이인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내 손에 펜 한 자루 쥘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펜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사랑의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내 입으로 말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입으로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신을 신고 집으로도 일터로도 갈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까요.

내 귀로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은한 꽃향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따뜻한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해도 손에 펜만 한 자루 쥘 수 있어도, 말만 할 수 있어도, 들을 수만 있어도, 걸을 수만 있어도, 냄새만 맡을 수 있어도, 내 곁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뭔가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찾는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을 진정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격언에는 천국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고, 지옥은 불평하는 자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 불평 낙심 절망하지 말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풍성한 계절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멀쩡한 사지를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와 평화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하기전에 먼저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저와 여러분은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심령으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감사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오늘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일의 복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이기도 합니다. 감사할 때에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만 감사할 때에 힘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긍정적 적극적 에너지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앞길이 열리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없이 머리와 몸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좌절과 원망이 아니라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에 보내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하고 그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정상적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오토다케의 부모나 오토다케 본인이 없는 것을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있었다면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아들을 주셨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왜 이런 꼴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왜 남들 다 가지고 있는 팔다리도 내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면 이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나마나 저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얻어먹는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부모나 그 자신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불리한 여건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을 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감사하며 위대한 일을 감당하며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입니다. 감사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께 대하여 만족감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게 만듭니다. 사랑과 기쁨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갈등과 미움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없애버립니다. 또한 감사는 정신적, 육체적 긴장을 완화시켜 줍니다. 면역력을 높이고 활력을 주어 육체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질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하고 설령 질병이 와도 감사와 긍정속에 사는 사람은 치료가 잘 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소화를 잘되게 만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잘 되지요, 힘과 의욕이 생기지요, 마음이 편해지고, 육체의 신진대사도 잘 되지요, 옆에 있는 사람도 기쁘게 하지요, 어려움이 와도 낙심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지요, 모든 일에 긍정과 적극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게 되지요, 그러니 어떻게 잘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에게 힘과 의욕과 활력과 기쁨을 주고, 매사에 적극성과 긍정과 열심을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감동시키고 그래서 오늘이 행복하게 하고 내일의 축복이 보장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가 곧 믿음의 척도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아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심을 믿는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감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이렇게 신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우리의 죄과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알고 믿는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창조, 인도, 거룩, 의, 선, 구원을 믿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사 곧 믿음이요, 믿음이 곧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는 감사하지 않는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게다가 천국의 은총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감사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믿음이 있는 자도 감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심으로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요건들이 있지만 설령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부터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 즉 죄와 마귀와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할 때 우리를 부르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고 천국길인지 천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치닫던 인생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커녕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다만 건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있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이 있으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지금 이미 주어진 것에서 감사거리를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지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가운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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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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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윤택한 영혼을 위하여

 

 

 

 

말씀 : 갈2:19~21

제목 : 영혼을 윤택함을 위하여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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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고난을 받는 자세

 


제목 : 고난을 받는 자세
말씀 : 골 1:24


본문 :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믿음대로 살아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것, 예수 믿게 된 것,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가장 큰 것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시민이 된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짐으로 받는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랄수록 말씀대로 살고 하루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이 계속 되면 참 좋겠지만 때때로 고민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지금같이 은혜롭게 살고 지금같이 좋을 때가 없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더 말씀대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도 전혀 생각 밖의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흉년이 와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은 고난이 정말 많았습니다. 욥과 같은 경우도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였지만 엄청난 고난이 닥치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다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이 날마다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고난 없이 산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나올 때에도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고난 속에서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애매한 고난, 선한 일을 위하여 받게 되는 고난”(벧전 2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당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은 유익이 많습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그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고난 중에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고난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이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 고난 때문에 세상이 이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2. 또 선한 일을 하는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받은 상과 영광을 생각할 때 이 고난을 잘 참을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문제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음대로 사는데도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이런 고난이 올 때 화가 나고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또 해결이 안 되어서 고민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이 없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4. 하나님께서 이런 애매한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라도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익을 주시려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는 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자세]

  믿음이 어린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받는 자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고난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애매한 고난이 왔을 때 첫째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애매한 고난이 온 이유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무엇인가 내게 말씀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뜻을 알기 위해서 엎드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크게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큰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면 큰 축복을 받고 큰 일꾼이 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엎드리면 자신에게는 복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고난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서 밥이 되는 고난이 왔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만 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눈을 여셔서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6-9) 이 시대는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 비밀을 알았으니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지역마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이 쳐들어왔습니다.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했을 때 18만5천의 군사들이 다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히스기야의 이름이 더 높아지고 그 위기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이나 더 살게 하시고 증거로 해 그림자가 15도나 더 뒤로 물러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 낙심하지 마시고 히스기야처럼 엎드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만을 결심합니다. 이유는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복 받을 것을 믿습니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말씀대로 살 것을 결심하고 애를 쓰면 반드시 축복하시고 책임지시는 것을 눈으로 볼 줄 믿습니다. 창세기 26장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삭은 흉년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지방에 갔습니다. 그 때에 100배의 축복을 주셔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도 거룩하게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다니엘이 포로였지만 왕의 진미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늘 3번 기도했을 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결국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서울에서 집회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를 새로 잘 짓고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보통은 강사숙소를 호텔로 자주 정하는데 저에게는 교회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집사님 댁에 큰방을 주셨습니다. 제법 큰집이었지만 추운 날씨였는데도 방에 불을 떼지 않았고 물도 찬 물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장로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집사님 남편이 왔습니다. 그 남편이 제게 공손히 인사하면서 ‘목사님, 저는 1년에 한 두 번 교회에 소풍갑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을 교회에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식사 후에 모두 교회에 가고 저는 조금 여유 있게 가려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걸어가면 5분 거리를 고물 자동차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 놀랐습니다. 저녁예배 드리고 나오니까 또 차로 저를 집에 데려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예배 때에는 5시 정각에 남편이 넥타이까지 매고 부인 성경을 들고 차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는 제가 1시간 이상 기도하니까 그 분이 못 기다리고 먼저 가셔서 저는 걸어서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집회를 계속 했습니다. 그 남편을 보면 귀하고 방을 보면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목요일 새벽에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이 추리닝을 입고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차를 경찰이 몰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면허도 없이 새벽에 운전 연습한다고 자신이 끌고 돌아다니다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운전 연습한다고 저를 데리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축복해주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주의 종이 대접받는 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낮 공부 때까지 계속 기도할 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낮 공부를 마치고 점심을 시내에서 먹고 돌아오니까 대문을 활짝 열고 남편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편이 저를 데리고 소파에 앉더니 두 내외가 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중동에 수출을 했는데 사업을 확장시켰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은행에서 압류하려고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부흥회가 있었고, 교회에서는 부흥강사를 위해서 호텔도 얻고 준비도 했는데 두 내외가 모시겠다고 하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낙심할까봐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예배 나가서 부인집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십일조 생활을 했는데 회사가 잘 되니까 십일조의 액수가 커져서 떼먹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5분 거리에 살면서도 장로님, 목사님 아무도 대접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대접하지 못하고 집이 날아갈 상황이 되자 부흥강사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가 거기서 머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망한 사람이 결심하고 십일조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장로님들과 저를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에 경찰에 걸리는 바람에 저는 기도했는데 그 시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출전람회 중에 그 회사도 전시를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 회사를 보다가 1억 5천만원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1억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래서 그 회사를 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수출 제품을 들고 교회에 가져와서 간증하고 설교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하기로 결심하십시오. 둘째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3.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욥의 문제는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이 났다는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만약 욥이 그 상황 중에 기뻐하고 감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살겠습니까?

1.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난은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은 마치 뜨거운 불의 용광로와 같아서 금을 넣으면 모든 찌꺼기가 사라지고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유도 없이 고난을 주시는데 목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 사람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정욕, 혈기, 교만, 위선, 오만의 모든 찌꺼기들을 없애기 위해서 고난의 용광로 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넣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는 은혜를 받으면 위대해지지만 자신에게 고난을 준 사람을 원망하고 미움을 가지면 그 사람은 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고난을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자세가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과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반드시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셉과 같이 억울한 고난은 반드시 더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은 항상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3. 세 번째로 고난이 왔을 때 항상 기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믿음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그 모습으로 사도 바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성숙의 변화는 고난 받는 태도와 정비례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해져가는 것은 고난 받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과 목표가 주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계속 디모데에게 강조하는 것이 고난을 잘 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자세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도 고난 많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되지 말고 모든 고난을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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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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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말씀

 

 


고난 뒤에 있는 축복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
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장 7절-11절)


1. 모든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것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보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나는 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디를 가 보아도 안전한 삶의 터전은 없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지진>이 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날 때 보면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삶의 터는 어디에 가 살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탈북자들을 일컬어 <새터민>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저들이 천신만고 악몽과 같은 생활의 터전에서 탈출하여 <새터민>이 되었지만, 정작 남한에 와 보니 역시 세
상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 새 터를 마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서 고생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눈물날 정도로 고생한 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딜 가나 모두 힘든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세상 안에서도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터가 흔들릴 때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위에 찬송가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비유적으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너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위에 짓는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석이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왜 필요한가?
잔잔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도가 일어나 몰려오기 시작하면 닻이 필요합니다.
<닻>을 내리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데, 어떤 가정은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이란 닻줄이 없거나 끊어졌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터가 견고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터는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육체도 튼튼해지려면 단련해야 튼튼해집니다.
팔뚝의 힘도, 다리의 힘도, 반복된 운동을 통하여 견고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기성세대에 비하여 약해졌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6.25 세대들을 보면 모두 삶의 연단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세대들 보다 강하게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왜 군대에서 해병대가 강하다고 합니까?
훈련을 강하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삶의 터를 견고케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마귀를 대적하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방탕하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낙심할 환경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포기하는 환경에서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마귀를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낙심하면 들어 누워 버립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합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그어 버립니다.
폭력을 씁니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그러다 나오면 다시 반복해 그런 길을 걷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들리는 터전에서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믿음이란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닻줄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폭풍이 지난 후에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앙의 눈으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눈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이 눈을 통하여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보았습니다.
에스더도 이 눈을 통하여 담력과 힘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보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 뒤에 오는 축
복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도 100배나 얻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다는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리입니다.
그 고리에 닻줄을 매어 놓으면 어떤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참으로 가사에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으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었습니다.
참으로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 그런 험한 세상을 만난 세대들이었지만, 전쟁, 죽음, 배고픔, 가난의 험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길에서 이제까지,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 하십시요.
우리의 믿음의 터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모쪼록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서십시요.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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