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 성숙한 그리스도인

 

 

 

말씀 : 고전2:14-3:3

제목 : 성숙한 그리스도인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다음과 같은 세 부류로 구분을 했습니다. 첫째는 거미 같은 인생입니다. 거미는 거미줄로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잡아먹는 곤충입니다. 그러므로 거미같은 인생이란 덫을 놓고 남의 등이나 쳐먹고 살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 같은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미같은 인생이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남에게는 줄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모아 들이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 같은 인생입니다. 꿀벌은 물론 꿀벌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모아서 남에게 다 줍니다. 심지어는 요즘에는 자기 생명을 받쳐 벌침으로 사람들을 고쳐주기도 줍니다. 그래서 꿀벌 같은 인생이란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다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그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을 나눌 때에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향하여 좀더 달려감으로 주의 생명의 은총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1.육에 속한 사람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이란 yucikov"(프쉬키코스)인데 이는 육적인, 천성적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혼에 속한 사람,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죄와 무지를 그대로 가지고 죄된 육신의 소욕대로,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과 육과 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는데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음으로 육과 혼도 죄와 어둠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것을 회복시켜야 영혼을 살려야 하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일을 거부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믿는 일을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전의 14절 말씀 다시 보세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거지요.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미련하고 황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런게 어디있느냐며 도리어 생명에 속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핍박하고 해요. 당연하지요. 인간의 죽은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진리를 알고, 성령의 일을 아는데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으니 다만 미련할 뿐이요, 어리석게 여겨질 뿐인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는 진리를 알고, 주님을 알고, 생명의 길을 아는데 성령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거지요. 영이 죽어 있어서 성령을 체험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죄된 육과 혼의 요구대로 삽니다. 육과 혼의 본능을 따라,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사는 거 뿐이예요. 비록 정신적으로 나름대로 고상한 가치를 추구한다해도 그러나 육은 육이고, 혼은 혼일 뿐이예요.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다가 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인생은 결코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령 세상에서 좀 고상하고 선하고 가치있는 삶을 산다해도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에 하나 육과 정신이 최상의 가치를 드러내며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한분도 절대로 이 편에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편에 서 있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천만다행으로 단순히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과 유사해서 좀 혼돈이 됩니다만 성경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3:1절의 말씀의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특별히 후반절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 말씀이요. 고린도 교인중에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예요? 밖에 있다는 거예요? 안에 있다는 거지요. 안에 있긴 있는데 어린아이같은 자들, 성숙하지 못해서 어린아이 같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긴 했는데 아직은 육체적인 삶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 영보다 육의 지배를 더 많이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남자가 20세가 되면 군에 입대합니다. 입대하자마자 군인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군인으로서의 모습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군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아직 군인 노릇을 잘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사람입니다. 아니 엄마 뱃속에 잉태할 때부터 사람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오래 기간 훈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라서 주님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들처럼 대하며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2절이지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린도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어린아이와 같아서 차마 밥을 먹이지 못하고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이면 체 할 것 같아서, 단단한 밥을 먹이면 배탈이 날 것 같아 못 먹이고 계속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곁의 성도들이 좀 부족하고 연약해도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그럴 수 있느냐고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럴 수 있습니다. 뭐 솔직히 다 도토리 키재기 아니겠습니까? 내가 성숙했으면 얼마나 성숙했겠어요. 내가 믿음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 서로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싸주고 덮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젖은 무엇이고, 밥은 무엇입니까? 젖은 부드럽고 넘기기 쉽고 영양가가 많은 음식입니다. 밥은 무엇입니까? 단단합니다. 그냥 안 넘어 갑니다. 씹어야 합니다. 자기가 침으로 삭혀서 넘겨야 합니다. 거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습니다. 맵고 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젖과 밥이 있습니다. 젖은 부드럽고 달콤한 말씀들, 소화가 잘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등의 주로 은혜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밥은 단단하고 넘기기 힘들고 소화가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로 책망이나 헌신의 요구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은 씁니다. 소화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배탈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목사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까? 어떤 양식을 먹일까? 어떤 분에게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술술 넘어가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에게는 단단하고 거칠고 맵고 쓴 말씀도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어떤 분은 한참 일할 나이이고, 어떤 분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어떤 말씀은 어떤 분에게는 고단백 영양분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분은 먹고 배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큰 어른들에게 매일 젖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또 단단한 음식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달콤한 말씀만 바라지 말고 혹 쓴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혹은 너무 초보적인 말씀을 한다고 그거 다 아는 건데 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정말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아직도 세상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해도 주님을 시인한다면 우리는 비록 어린아이이긴 하지만 주님의 자녀라는 것 때문입니다. 천만다행히도 주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된 모습이 많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더욱 생동감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삶은 물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할 위치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여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그러는 가운데 더욱 은혜와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주의 역사를 펼쳐 가기를 원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인 영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2:15절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육과 혼의 지배보다는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라고 100% 영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과 혼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100% 신령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구분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육 보다는 영에 더 많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요, 영의 지배를 받긴 받지만 아직은 영보다는 육과 혼의 원리에 더 많이 좌우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아직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찬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 15, 16절을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먼저 15절 보면 아주 신나는 말씀이 있어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대요. 이게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남을 마음대로 판단하지만 남에게는 절대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주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향해 힘써 달려가기 때문에 남에게 정죄받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16절절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잘못하면 주님을 가르친다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또 아직도 미성숙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이란 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기에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으면 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임은 맞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기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쫄병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젖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밥을 먹여줄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보살핌을 받고 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그 자신에게는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생명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먼저 정말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 즉 성령을 배제한 채 그저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무엇보다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아직도 그저 육신의 본능만을 따라 살고 있다면 속히 영에 속한 사람 쪽으로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도 온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육신에 속한 사람 즉 믿음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 속했다해도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에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후설교 / 가장 안전한 길

 

 

 

제목 : 가장 안전한 길

말씀 : 잠3:5,6

 


사람이란 어차피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젊음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여하튼 나는 그냥 내 존재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어떤 참람한 사람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미련한 중에 미련한 인생이요, 불쌍한 중에 불쌍한 인생이다. 그까짓 주먹이 세면 얼마나 셀까? 오래가면 얼마나 오래갈까?

대통령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라야 고작해야 5년인데 5년 임기가 끝남과 함께 그가 의지하는 것도 사라진다. 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돈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돈과 함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지식이나 명예와 권세나 과학이나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다. 가장 큰 능력 자, 가장 지혜로운 자, 가장 사랑이 충만한 자, 가장 인자한 자, 가장 영원한 자 이런 자를 의지해야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가 누구일까? 물어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1.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

오늘 5절 말씀을 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네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요, 가장 복된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인가?

1)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依賴하여야 한다.

본문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방법론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이 마음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란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좀 풀어 말한다면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중심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 어느 한 영역이라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감정,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이성, 우리의 육체, 우리의 능력 등 하여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분을 총동원하여 그 어느 부분이라고 빠짐이 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떤 영역을 남겨놓고 어떤 부분은 맡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하면 이것은 무언가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는 온전한 믿음의 관계속에 있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런 오류속에 살때가 많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감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적인 것과 이성적인 부분을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긴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은 아무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과 시대의 흐름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그야말로 갓난아기가 하나님만 졸졸 따라 다니는 것 같이 우리의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자.

2)人間에 대한 信賴를 버려야 한다.

오늘 본문의 5절 말씀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너무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마6: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지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자기지식이나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의지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그것을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다.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다. 하나님은 권능자이시지만 인간은 약하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둘 중에 무엇을 따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해야한다. 그래야만이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래야 만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도 깊이 되새기며 나보다는 하나님 편을 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3)凡事에 하나님을 認定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했다. 이 말씀도 정말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정말 깊이 묵상해보자.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중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범사라는 말에 주목해 보라. 과연 범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말을 따르는가?

여기서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이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걸어가야 할 모든 길, 인생항로의 전체, 인생길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하였는데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안다면 그 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안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정말 이해하는가? 이 사실을 정말 아는가? 정말 인정하는가? 그러면 맡기라. 정말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깨닫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자. 어떤 부분은 인정하고 어떤 부분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자.

범사라는 말을 다시한번 주목하라.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우리는 범사에 그를 올바르게 알고 오직 그 뜻만을 좇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씀만이 유일한 잣대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2.하나님을 依賴하는 자가 받는 福

그래서 오늘 본문 6절 하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다.

여기서 지도하다는 말은 「평탄하게 하다, 곧게하다, 똑바르게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혜, 능력, 경험, 이성 의지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셔서 평탄케해 주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모든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것들을 평탄하게 하셔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의 현실들을 이기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똑바르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시다. 전지자이시다. 사랑과 능력의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신다. 그 분만이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완전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자.

우리의 알량한 명철도 의지하지 말라. 경험도 의지하지 말라. 지식도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한 것들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라. 주님을 의지하되 마음을 다하여 의지하라. 전인격을 다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그리하여 선한 목자되시는 주님의 지도하심가운데 은혜와 평강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전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인데 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사순절예배설교] 빌라도의 선택

 

 


제목 : 빌라도의 선택

말씀 : 마27:15-26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좀 억울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면서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격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으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빌라도는 정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24절에서 빌라도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는 어느 정도 종교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공정성을 기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빌라도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빌라도는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므로 중대 사안에 대한 법적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 정부 즉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게 판단하여 최종결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데 만약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사형언도를 해야 하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23절에 보면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하고 있고 또 요18:38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중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조금 애를 썼다고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옳지 않은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 진리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빌라도의 이 옳지 않은 결정을 보면서, 그래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라도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빌라도는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의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빌라도를 향하여 아우성을 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역자를 살려두면 당신은 로마의 충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빌라도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슨 큰 폭동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그러면 치안상태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이었습니다. 출세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라도는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사람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 육신의 소리, 유혹의 소리를 뿌리치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 다 뿌리쳐 버리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때로는 어떤 때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때에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빌라도는 진리의 소리를 작은 소리라고 무시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빌라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그의 아내를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고 소수이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옳지 않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항상 요란하고 커다란 소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는 좁은 길에, 작은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소수의 소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먼저는 산을 흔들만한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작고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만한 가냘픈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힘들어 하실 때 아주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리하여 네 배고픔을 해결하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보여주라. 그러면 너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라는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란하고 요란스런 거짓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커다란 거짓소리를 물리치시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기의 소리에, 명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큰 소리에 파묻혀 그만 진리의 소리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떠들어대든 주님앞에 조용히 엎드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빌라도는 사람들의 큰 소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져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는 롯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떠나라고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창13:9)

여러분,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롯은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하란을 잃고 큰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늙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좋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좋은 땅으로 갔던 롯은 풍요로운 땅에서 잘먹고 잘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땅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다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그 땅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관계를 맺어 모압과 암몬 족속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당장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 갔던 롯은 재물로, 가문의 체통도, 윤리도, 믿음도, 하나님의 유업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듣는 절기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무슨 화려한 소리, 대박이 터지는 소리, 출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커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내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세상의 권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폭동과 관련되어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지위도 빼앗기고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대대로 남은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정말 세상의 크고 시끄러운 소리,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군중의 소리, 부귀영화의 소리, 물질의 소리, 무사안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작은 소리일지라도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진정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으며 생명의 은총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오늘의 설교] 범사에 감사하라

 

 

 

제목 :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 : 민수기 11장 4∼15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군대에 쫓기다 홍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당신이 우리를 끌어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 이같이 하느냐” “애굽에서 당신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 했고,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했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게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길을 터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온 회중이 굶주려 죽게 됐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도 남을 충분한 만나를 새벽마다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만나가 끊길 수 있다며 또 불안해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 우리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샘솟아 나오는 기적을 통해 그들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1년 후 바란 광야에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땐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다. 이제는 우리 기력이 다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미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격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음에도 그들은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저녁마다 메추라기 떼를 공급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처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 많은 식량을 공급하심에 경외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같은 음식에 싫증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린 만나, 저녁마다 진에 덮인 메추라기, 그 기적의 산물을 보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간사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감사하는 일에도 조건부 감사와 범사에 감사하는 게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가 하나님의 응답과 풍성하게 채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렸겠지요. 일종의 조건부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기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잊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알고서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허현 목사(양주진리교회)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새벽기도회 설교 ] 승리하는 삶 

 

 

 

제목 : 승리하는 삶 
말씀 : 여호수아 10:40∼43

최근 한 방송에서 주변 상황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명한 심리실험 15가지를 본 적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인간의 개인적인 도덕성이나 됨됨이에 상관 없이 상황에 휩쓸리는 비율이 70%였고 권위에 복종하는 비율은 65%로 나타났습니다.

그 중 흥미로운 실험 하나는 의사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의사가 진료와는 전혀 상관 없는 행위를 요구했음에도 사람들은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의사가 시켜서 했다'는 단순한 대답을 했습니다. 믿음도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말씀하시니까 순종했습니다'라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실험에서 보이듯 상황의 힘은 악을 퍼뜨리기도 하지만 선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도 믿음의 바이러스를 뿌리면 믿음이 퍼져나가고 순종의 바이러스를 뿌리면 순종이 퍼져나가지만 불신과 불평의 바이러스가 퍼지면 온통 서로를 비난하는 화살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선을 퍼트리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길 힘은 믿음뿐(요 15: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통해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엡 6:12)들입니다.

삶의 문제 속에 있는 배후는 돈, 사람, 여러 가지 환경 등으로 가장한 사단입니다. 야곱의 얍복 강가나 모세의 미디안 광야생활은 힘들고 외로운 시절이었지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쓰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평탄하지 않은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고 복되게 하기 위해 사단을 이길 힘을 길러주시는 능력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적장을 물리쳐야 합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지레 겁먹어 도망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그를 움직이는 적장, 사단을 처치하면 승리는 내것이 됩니다.

이를 이길 방법은 십자가의 주님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크게 소리내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가정과 심령의 사단의 집을 파괴하고 정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깊은 은혜와 평안을 소유하십시오.

최성은 새벽을여는교회 목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부활절설교 부활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제가 영국에 있을 때에 런던의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를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로서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하에는 큰 공로를 세운 영국 위인들의 묘가 있습니다. 각 묘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 장군, 예술가,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이렇게 죽는 것을..' 하는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묘실은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 "여기 예수의 몸이 누워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천사에 의해 남겨진 묘비명은 "여기 그가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빈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은 그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셔서 온 세계에 참 소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다음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부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하나 둘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사고에 따라 이원론을 받아들여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혹은 정신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애써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생명을 걸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려던 사도 바울에게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은 부활을 자칫 신화적인 이야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반대로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부활을 환생의 교리로 뒤바꿔 놓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우주 안에 속한 법칙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사건이었기에 예수의 부활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과거보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십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과 의학은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보면서 장사한다는 말이요, 둘은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고 마지막은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이랍니다. 비록 우스개 소리이지만 누구든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지 이처럼 존재하지 않은 불로초와 영생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류의 최대 비극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배가 얕은 바다에 있을 때는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만 깊은 바다에 있을 때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은 그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리가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음의 사약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고전15;22)는 본문의 표현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2. 예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독일에 '죽은 자와 잠자는 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어두워오자 잠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밤을 지새고자 어느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의 천사는 이제야 자기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잠의 씨를 뿌리고, 다시 죽음의 천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 마을은 고요 속에 잠들고, 할머니도, 아기도, 그리고 외양간의 소도 모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보던 잠의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것 봐 ! 모두들 잠이 들었어. 이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루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길거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 잠의 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천사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즐거울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싫어해. 모두들 내가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간다고 말해."

이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해졌던 잠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를 바라보며 이렇게말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부활의 날에 잠에서 깨어날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마 그들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사명을 맡은 천사가 아니겠니?" 이 말을 들은 죽음의 천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의 천사와 함께 평안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인 것으로, 장차 부활의 아침이 이르면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 이 후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 순서와 성격이 다를 뿐 죽은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은 예수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재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요 마지막은 믿지 않은 람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의 부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부활은 비참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죽음이 엄습했는데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수입의 모든 곡식을 바친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모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의 몸된 교회와 성도의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그늘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빠져나와 예수와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자는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라고 울부짖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자매가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 버려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너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잠자는 이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입니다. 곧 주님이 재림 때 모든 악한 권세 곧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예
수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와 연관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만이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쓴잔을 서슴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행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니"(히11: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활을 얻고자 갖은 수모와 결박, 옥에 갇힘, 궁핍, 심지어는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성가대헌신예배]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

 

 

 

말씀 : 느12:27-30

제목 :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먼저 오늘 이렇게 성가대 헌신예배를 드리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오랫동안 성가대를 운영하고 있지 못하다가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성가대를 재조직하여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며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리게 됨을 무한감사 드립니다.

여러분, 찬양은 우리 기독교인의 삶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하나님을 찬양케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43:21절에 보면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케 하기 위해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매일 찬송만 부르게 하기 위해서 지으셨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지으셨다는 것,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일중의 하나는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존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 그 인생은 진정으로 값지고 의미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원수들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힘과 뜻을 모아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나서 낙성식을 거행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기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성벽 낙성식의 모습을 보면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느혜미야는 성벽 중건의 낙성식을 찬양의 축제로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오늘 말씀에 있는대로 노래하는 자들과 악기를 다루는 자들을 전국에서 불러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면서 즐겁게 봉헌식을 행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이렇게 찬양을 중심으로 낙성식을 거행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겠습니까?

1.하나님께서는 찬양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찬양케 하기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봇이 내가 의도한바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여러분이 의도한대로 그대로 움직이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때 여러분의 마음이 흡족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찬양하는 삶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중의 하나는 역시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의 특징이 무엇이냐 찬양 잘하기로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찬양을 잘한다고 해서 단순히 노래 실력이 좋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기쁘나 슬프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언제나 찬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느헤미야도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찬양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아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앎으로 찬양의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지혜로운 믿음 생활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효자, 효녀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을 알아 그 원하는 바를 해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모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하면서 제깐에는 부모에게 효도한답시고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드린들 그것을 부모님이 어찌 기뻐하겠습니까?

부모는 자식과 함께 살고 싶은데 양로원에 보내 놓고 어쩌다 한번씩 찾아간다면 그것이 어찌 효도가 되겠습니까? 부모는 자녀들이 서로 화목하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늘 싸움만 한다면 이것이 어찌 효도가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효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 원하시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곧 효도인 것입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헌금은 얼마나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은 그 분에게 우선 집에서 약국에서나 늘 찬송을 하라고 했습니다. 손님이 와도 일부러 한번 들어보라는 듯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정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선은 그 자신이 정말 기쁨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찬양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그의 심령속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이 정말 늘 밝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 약사가 늘 그렇게 감사하며 기쁘게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손님들도 훨씬 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업도 더욱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요, 일석이조요,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래서 또한 하나님이 찬양을 그토록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정에서 찬양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만큼 복된 가정이 없습니다. 물론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 자신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그 모든 가족구성원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근심걱정이 물러가게 해 줍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열심히 찬송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성가대원들은 그중에서도 일부러 빼내어 찬양하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찬양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은혜와 기쁨을 선물하는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찬양하는 삶이 쉽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찬양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과 직책을 주셔서 찬양케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찬양하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는데 그 중에서 또 빼내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으니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아멘하며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연습에 참여하시고 정말 감사와 감격과 기쁨속에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범사에 잘되어지고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족과 성도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찬양의 회복이 진정한 영성의 회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가장 좋았을 때는 다윗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믿음이 가장 좋았을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성대한 찬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시대는 날마다 성전에서 성가대의 우렁찬 찬양 소리가 온 예루살렘에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삼하6:5에서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다윗이 행했던 찬양의 모습을 보십시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대상23:5 이하를 보십시다. 찬양하는 레위인들이 몇 명이라고 했습니까? 4,000명입니다. 25:1이하에 보면 그 중에서 악기를 다루는 자와 노래에 아주 익숙한 자의 수가 288인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찬양대의 규모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이 내는 헌물로 생활하였으며 온 종일 성전에서 찬양을 준비하며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시대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온 백성이 참여하였고, 거대한 성가대를 조직하여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의 물결이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 시대로 들어가면서 점점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왕상 8:3-5절에 보면 솔로몬이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를 옮기는 장면이 있습니다. 법궤를 성전에 안치하면서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왕상8: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구절에서도 하나님께 큰 찬양을 드렸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 왕상 8:62-64절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광경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14일동안 낙성식을 행하게 되는데 그때 화목제로 드린 제물은 소가 22,000마리이고 양이 무려 120,000마리나 합이 142,000마리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거의 10,000마리의 제물을 잡아서 드렸던 것입니다. 하루에 만 마리면 한 시간에 거의 500마리의 소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니 얼마나 대단한 광경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성대한 성전 낙성식에도 이상하리라 만치 찬양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던 것입니다.

또 왕하23장에는 이스라엘에서 다윗왕 다음으로 성군이라고 부르는 요시야 왕의 대대적인 종교개혁의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우상을 멸하고 율법을 부활시켰던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찬양의 회복에 대한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후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점점 쇠하여져 갔고, 레위인들은 점점 성전을 떠나 농사를 짓거나 기타의 일을 하며 연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본연의 임무를 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 생활의 비극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영적인 타락과 함께 찬양이 사라졌고, 동시에 찬양이 식어져 갔을 때 영적으로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양과 영성은 비례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은 찬양의 고백입니다. 기쁨이 없이는, 감사함이 없이는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고, 감격이 있고, 주님안에 있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있는 자에게는 찬양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하는 영혼이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며, 찬양하는 순간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밝게 빛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 상태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히 측정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찬양입니다. 즉 내가 얼마나 찬양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 받았을 때는 흥얼흥얼 찬양이 입에서 절로 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식었을 때는 찬양 대신 불평과 불만이 쌓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아니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만났는데 어떻게 찬양이 나온단 말입니까”.“목사님도 저와 같은 상황을 당한다면 그런 말씀을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8)”고 고백한 하박국의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했던 바울과 실라와 같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뻐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더더욱 충만히 누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설령 어려움이 있더라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라도 찬양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라도 찬양을 해야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거듭거듭 불순종하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를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 크신 권능과 지혜로 우주를 운행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은 음악 이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입니다. 직장에서도, 길을 가다가도 찬송을 부르십시오. 기쁨이 밀물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평안이 찾아 올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는 사람마다 찬양의 입술에서 피어나는 향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것입니다.

잘 못해도 좋습니다. 음정 박자 가사 좀 틀리면 어떻습니까? 음정이나 박자나 가사를 잘 모르겠거든 작사 작곡을 해가면서라도 찬송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술이 좀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재능이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함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실력도 길러야 합니다. 되도록 많이 연습해서 기술적으로 훌륭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좀 실력이 없어도 능력이 없어도 지혜가 부족하더라도 마음을 다해서 기쁨과 감격으로 그 은혜에 눈물 흘리며 찬송하는 그 찬송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교가 있고,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그 마음에 믿음이 없고,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신앙고백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가사 박자 음정이 좀 틀리더라도 그 은혜와 사랑과 긍휼하심을 깨닫고 감격과 기쁨과 은혜로 부른다면 그것이 진정한 신앙고백이요, 그것이 진정한 찬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무엇보다도 우리 성가대가 이와같이 귀한 찬양의 사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비록 좀 실력이 딸려도 능력이 좀 부족해도 때로는 바쁘고 힘이 들더라도 언제나 감격과 은혜속에 주님을 찬양하는 성가대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열심히 연습에 참여하고 마음으로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받은 바 그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이 사역에 열심히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찬양을 좋아했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는 성가대가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도 늘 찬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축복된 인생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오후설교 참 지혜자

 

 


제목 : 참 지혜자의 삶

말씀 : 엡5:15-18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한 뒤 다시 3차 전도여행시에 와서 3년간이나 눈물로 목회 하여 세운 교회였다.(행20:31) 그리고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항구도시로 해상교통의 요충지기도 했고, 이 에베소에서 소아시아 전역으로 도로가 나 있어서 인근의 교통의 요충지기도 했다.

따라서 상업과 무역업이 발달하였고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어마어마한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도 여타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는 교회이기도 했다. 물론 에베소교회만의 어떤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었고, 또한 신분적으로도 자유자와 종된 자들이 혼재해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아직도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고, 이방인들은 헬라문화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세속으로부터의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면 1장에서 3장까지는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적인 말씀을 한 다음에 4장에서 6장까지는 주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가 이제 주님을 믿고 거듭난 존재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 악하고 혼탁한 세상속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세상 속에 살아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세상 속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세월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는 오늘 말씀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15,16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그런즉」이라는 말은 이유접속사로써 바로 앞부분의 말씀들이 이제부터 논하고자하는 말씀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세상은 어두움이고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에 참예한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런즉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다.

즉 이제는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살펴서 빛의 자녀처럼 살아가라는 말인 것이다. 세상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말고 참된 지혜를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1차원적인 욕구 속에 살아간다. 1차적인 욕구란 먹는 욕구이다. 좀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2차적인 욕구를 위하여 살기도 한다.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정신적,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더 고상한 사람들은 3차적인 욕구까지도 추구한다. 이것은 남을 위한 삶이다. 선을 베풀며, 남을 도우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충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추구해야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한가지 더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관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할 부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 이후에 우리가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추구해야할 첫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만이 진실로 세월을 아끼는 삶인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을 온전하게 준비하는 행위이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삶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얽매여 있는 삶이나 좀더 고상하게 문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나 더 나아가서는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까지도 거기에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족한 삶이다. 그것은 온전치 못한 삶이다. 반쪽 인생이다. 설령 돈과 명예와 부귀와 세상적인 영광을 누린다해도 그것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자. 물론 1차적인 욕구나 2차적인 욕구나 3차적인 욕구도 추구해야 되겠지만 거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가운데 미래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되자.

2.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뜻을 살피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지금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주님은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시는가? 오늘의 시간들을 주님은 어떻게 보내시기를 원하시는가?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나에게 물질이 있다면, 나에게 건강이 있다면, 나에게 지식이 있다면, 나에게 권력이 있다면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살펴서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트루엣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만이 온전한 것이다. 변함없는 진리이다. 영원한 것이다. 그 곳에만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그 뜻대로 살 때만이 진정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나와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온 우주까지도 진정한 기쁨과 영광을 받으며 만족을 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깨어 기도해야 한다. 물론 주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외롭고 고독한 길일 때도 있다. 고난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살길이기에 그것만이 생명의 길이기에 그것만이 궁극적인 승리의 길, 축복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만 하는 것이다.

3.성령 충만하여 사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참된 지혜의 삶을 사는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오늘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소아시아의 중심적인 도시 중의 하나로 상업이 발달하고 농업 역시도 번창해 있었다. 아데미 여신의 커다란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그에 따라 향락의 문화도 번창해 있었다. 그래서 사도는 특별히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술이란 우리 인간의 정신을 빼앗아가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술은 인간의 윤리, 도덕성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많은 죄악들이 술과 연관되어 있다. 또 평상시에는 얌전하던 사람도 술만 들어가면 떠들어대기도 하고, 난폭한 짓을 하기도 하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술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육체적인 제어 능력도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술은 인간의 혼미케하는 주범이다. 뿐만아니라 건강을 해치고 시간을 빼앗는다. 그래서 사도는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존재인 술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엉뚱한 것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물론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술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술은 사람을 어둠속에 빠지게 하는 주범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꼭 술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혼미케하며 육체와 시간과 건강에 해로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 의미에서 배격하라는 의미이다. 여하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영혼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게하는 모든 것들을 다 배격하고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영생복락의 길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라는 말씀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중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도 많다. 술, 노름, 담배, 마약, 향락 등은 우리를 결국은 파멸의 길로 이끈다. 심지어는 그 자체로서는 건전한 것들이 거기에 취해버리면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도 많다. 건전한 취미생활, 돈, 명예, 사랑, 지식, 문화, 과학 등등은 그 자체로서는 건전하고 유익한 것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러한 것들에 취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을 빼앗겨 버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결국은 생명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요청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악한 것들은 배격할 수 있고, 건전한 것들은 올바르게 사용하며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은 단 한번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일회적인 것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지속적인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다시는 성령의 세례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그렇지 않다. 지금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가도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언제나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가 성령을 외면하고 성령과의 관계에서 멀리가고자 할 때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허용하신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보통의 경우에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고넬료의 가정은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함을 받기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며, 깨어 기도하자.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이것이 진실로 승리하는 삶이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이요,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의 삶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