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별 설교] 종려 주일 예배 설교

 

 

 

제목 : 승리의 입성
말씀 : 눅19:42-44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에 대해 성경은 의미 깊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벳바게 동리에 이르자 주님은 뜻밖의 지시를 하셨습니다. 동리에 들어가서 나귀새끼를 끌어오면 그 위에 타고 입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솔로몬을 기름 부어 왕으로 추대할 때 다윗 왕의 노새에 태워 행진했던 일을 연상케 했습니다. 더욱이 스가랴 선지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고 예언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평강의 왕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무리에 옹위되어 평화롭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마음은 착잡하셨습니다.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불리우는 예루살렘은 온통 투기와 외식으로 꾸며진 거짓 평화를 구가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에 가까이 오신 주님은 우시며 안타까이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눅19:42-44).
하나님과 누려야 할 평화를 잃은 백성에게 평화를 회복시키려 오신 평강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는 끔찍한 죄악이 장차 얼마나 큰 진노를 받을 것인가 생각할 때 주님은 연민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을 위해 위험과 고난, 죽음이 기다리는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음흉한 권력의 음모가 도사린 거대한 성을 향해 고독한 도전자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보기에는 무모한 짓이요, 실패로 평가되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실 확신이 있기에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이른바 육신으로는 두려워서 회피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영적으로는 벌써 승리해 버린 영광을 바라보며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보여 준 승리가 무엇인지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며 은혜를 받읍시다.

1. 악과 증오에 대한 사랑의 도전이요, 승리의 입성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후 한 주간의 생활은 무수한 충돌로 일관했습니다. 우선 성전에 들어가셔서 만민의 기도하는 곳인 아버지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책임자들을 질책하시며 뜰에 매놓은 양들과 비둘기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당시 종교계의 지도층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있을 외식자들’이 라고 서슴없이 여러 차례 질책하시기도 했습니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을 비유하시면서 주인의 포도원을 탈취하기 위해 주인이 보낸 아들을 살해하는 포악을 저지르는 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얼핏보면 주님은 빨리 죽으시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통박하는 상대가 얼마나 악과 증오에 차 있는 무리임을 잘 아시는 주님입니다. 차라리 모른 체 아무 말도 않으면 미움을 증대시키는 어리석음을 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목숨을 내걸고 지도자들의 죄와 허물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저들의 미움에 대한 반발론 증오감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충심의 발로였습니다. 급기야 미움이 극도에 달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용서를 빌어주시는 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아첨하는 말보다 친구의 과오를 지적해 줌으로써 시정하도록 아픈 말을 해주는 용기와 사랑을 갖습니다. 때때로 성직자들이 부패한 정치권력에 대해 가차없는 질책을 쏟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또는 성직자의 본분 밖의 일이라고 입을 다물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나라를 사랑하고, 지도자들을 진정 아끼기 때문에 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이 충정을 모르는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구금하고 살해한 것처럼 옳은 깨우침을 거절합니다. 이런 결과가 두려워서 입을 다무는 크리스천은 악에게 진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상대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성도는 진 것 같으나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악을 악으로 갚게 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사랑과 선으로 갚으신 주님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이 때에 비로소 악과 증오를 사랑으로 승리한 참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입성은 값진 고난을 향한 도전이요, 승리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기에 성도들도 신앙을 통해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주어진 고난이 의미 있고 값진 것일 때 이를 회피하려 한다면 패배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 속에 으레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의 기도는 바로 자기가 당해야 할 고난을 앞에 놓고 몸부림치는 절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의미 있고 값진 일이라면 순종하겠나이다."라고 기도했을 때 그의 손등에는 피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스스로 고난을 택하는 일은 감상적인 선택이 아니요, 피땀을 쏟는 자기 희생이 수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육의 욕구만 따라 사는 자연인과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택하기도 하는 정신인을 구분해 보았습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 때문에 고난을 감수한 사명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힌 선지자들과 주님의 손에 잡힌 사도들이 한결같이 주어진 사명 때문에 고난을 받고 순교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이들을 패배자로 보지 않고 세상을 이긴 승리자들로 증거합니다. 히브리 11 : 38에는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 분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도전하심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신 승리의 입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축복을 받으려는 열심에 비하여 의미 있는 고난을 감수할 사명감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감당치 못할' 성도들이 아니요,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오늘의 교회지도자들이 무겁게 느껴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1-2) 하며 고난에 대한 성도의 적극적인 자세를 교훈합니다. 바울 사도가 간증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겠노라."는 자세로 의미 있는 고난에 도전하는 성도는 고난을 이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입성은 죽음을 향한 도전이요, 승리입니다.
퀴블로러스가 쓴 '인간의 죽음'이라는 글에는 인간이 죽음에 임하는 다섯 가지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고립의 단계, 분노의 단계, 타협의 단계, 우울의 단계를 거쳐서 비로소 죽음에 순응하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이라면 죽음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의 용기란 대단한 것입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아끼는 마음으로 빌립을 통해 도피하실 방도를 제안했을 때 주님은 단호히 거절하시고 결연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24).그리고 이어서 사람이 자기 목숨을 아끼면 잃게 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아낌없이 내놓을 때 참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인간 생명의 참된 가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 도전할 때 빛을 발하는 젓입니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확증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겁내어 도피하셨다거나 사도들이 목숨을 부지하려 복음 증거하는 일을 기피했다면 아직도 온 인류 위에 사망귄세가 왕노릇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오늘도 죽음의 공포를 무기삼아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향해 도전하셔서 부활의 승리를 확증해 주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강하고 담대하여 승리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옥중에서도 생사를 초극한 신앙의 절정을 보여 준 바울의 간증을 우리의 간증으로 선언케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 20-21).
우리는 오늘부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고난주간으로 지냅니다. 그러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주님을 뒤따르시기 바랍니다. 악과 증오가 도사리고 있는 도성, 무서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도성,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서 있는 도성으로 주님을 따라 입성하십시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앞서가신 주님이 승리하시니 반드시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담대히 입을 열어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겁내지 말고 겟세마네의 주님을 따라 피땀 흘리는 기도를 힘씁시다.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위협해도 담대하여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도록 온전히 헌신합시다. 주께서 부활하신 아침, 우리 모두는 환한 얼굴로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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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부할절주일 설교 :: 부활의 첫 열매

 

 

 

제목 : 부활의 첫 열매
말씀 : 고전15:20-28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제가 영국에 있을 때에 런던의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를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로서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하에는 큰 공로를 세운 영국 위인들의 묘가 있습니다. 각 묘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 장군, 예술가,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이렇게 죽는 것을..' 하는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묘실은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 "여기 예수의 몸이 누워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천사에 의해 남겨진 묘비명은 "여기 그가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빈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은 그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셔서 온 세계에 참 소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다음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부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하나 둘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사고에 따라 이원론을 받아들여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혹은 정신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애써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생명을 걸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려던 사도 바울에게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은 부활을 자칫 신화적인 이야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반대로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부활을 환생의 교리로 뒤바꿔 놓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우주 안에 속한 법칙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사건이었기에 예수의 부활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과거보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십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과 의학은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보면서 장사한다는 말이요, 둘은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고 마지막은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이랍니다. 비록 우스개 소리이지만 누구든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지 이처럼 존재하지 않은 불로초와 영생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류의 최대 비극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배가 얕은 바다에 있을 때는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만 깊은 바다에 있을 때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은 그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리가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음의 사약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고전15;22)는 본문의 표현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2. 예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독일에 '죽은 자와 잠자는 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어두워오자 잠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밤을 지새고자 어느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의 천사는 이제야 자기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잠의 씨를 뿌리고, 다시 죽음의 천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 마을은 고요 속에 잠들고, 할머니도, 아기도, 그리고 외양간의 소도 모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보던 잠의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것 봐 ! 모두들 잠이 들었어. 이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루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길거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 잠의 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천사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즐거울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싫어해. 모두들 내가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간다고 말해."

이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해졌던 잠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를 바라보며 이렇게말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부활의 날에 잠에서 깨어날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마 그들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사명을 맡은 천사가 아니겠니?" 이 말을 들은 죽음의 천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의 천사와 함께 평안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인 것으로, 장차 부활의 아침이 이르면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 이 후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 순서와 성격이 다를 뿐 죽은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은 예수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재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요 마지막은 믿지 않은 람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의 부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부활은 비참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죽음이 엄습했는데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수입의 모든 곡식을 바친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모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의 몸된 교회와 성도의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그늘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빠져나와 예수와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자는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라고 울부짖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자매가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 버려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너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잠자는 이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입니다. 곧 주님이 재림 때 모든 악한 권세 곧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예
수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와 연관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만이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쓴잔을 서슴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행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니"(히11: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활을 얻고자 갖은 수모와 결박, 옥에 갇힘, 궁핍, 심지어는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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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자가 되라

 

 


본문: 골 3:15-17
찬송가: 135장(구 133장)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
 
첫째,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둘째, 감사는 알되 갚으려 하지 않는 사람. 셋째, 조건을 따져 감사하는 사람. 넷째, 범사에 감사할 줄 알고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성도는 네 번째 사람이 되어야 한다(살전5:16-18). 성경(시100:4) 말씀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했다. 감사대신 불평, 원망하면 마귀들이 춤을 추게 된다. 그래서 기도가 올라가지 않게 되고 응답도 없다. 그러나 감사하면 성령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기도하기만 하면 상달되어 응답을 받게 된다.
 
감사하면 성도의 삶에 유익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곳에 능력이 나타난다. 일생동안 온 마음과 정성과 물질을 다하여서,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 감사드리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시기를 바란다. 지난날에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미련을 갖지 말자.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감사하며 살아도 모자랄 것이다. 감사는 택함을 받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이며,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날까지 평생 동안 감사만 하고 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첫째도 감사, 둘째도 감사, 셋째도 감사로 일평생 자나 깨나 감사하다가 주님 앞에 설 때에 큰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 불평했던 모든 말과 시간을 회개합니다. 주님 이제부터 주님 뜻대로 평안해도, 힘들어도 항상 감사하게 하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 향 희 목사
든든한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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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 감사가 넘치는 인생

 

 


제목 : 축복받은 사람들

말씀 : 시65:1-5

1.먼저 감사부터 합시다.

(닉부이치치, 오토다케히로타다, 이지선 사진 보여주기)

닉 부이치치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보이스 목사님과 더쉬카 사모님의 사랑과 헌신과 기도로 그는 정상인의 다니는 학교를 다니며 대학까지 나왔습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훈련하여 컴퓨터는 물론 수영, 줄넘기, 골프, 농구를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드럼까지 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9살때부터 학교와 기업, 교회 등 수많은 단체에서 강연을 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의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입니다. 어떠한 상황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절 보십시오. 저는 이와같이 팔다리가 없지만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오토다케 히로타다입니다. 이 사람도 태어날때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진은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자매입니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4학년 때에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퍼센트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살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7개월간의 입원, 11차례의 수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치료. 이후에도 지금까지 매년 몇차례의 끔찍스러운 고통의 수술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난 시간에 간증을 통해서 보았듯이 과거의 그 예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니 돌아가야 할 이유가 뭐냐고, 지금 더 행복하다고, 지금 더 할 일이 많다고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과거의 그 예쁜 얼굴은 잃었지만 오히려 더 주님을 믿는 믿음가운데 든든히 서게 되었고, 주님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와 용기를 줄 수 있는 귀한 것을 얻었기에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돈에 있지도 않고, 권력에 있지도 않습니다. 지식에 있지도 않습니다. 인기에도 있지 않습니다. 얼짱 몸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많든 적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주께서 주신 내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과 기쁨과 존귀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20절에서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달라고 하기 전에, 없는 것에 잃은 것에 좌절하고 낙담하기 전에 이미 주신 것에, 가지고 있는 것에, 누리고 있는 은혜에 먼저 감사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고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거기에 믿음이 있고, 거기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감사부터 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자꾸 달라고 졸라대기 전에, 없다고 불평하기 전에,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꼭 그런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의 뜰에 거하게 됨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감사와 은혜를 알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바로 다윗인데 먼저 다윗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복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4절에서 고백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말 그대로 주님께 택함을 받고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많습니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감사요 은혜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요, 먹고 입고 마시고 숨쉬고 자고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자유를 누리고 평화를 누리고 어느 것 하나 감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도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어느것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큰 은혜요, 감사인 것은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정원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사랑과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신 주님의 자녀가 되어 그 능력과 은혜와 사랑의 주이신 주님의 정원에서 살면서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세상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큰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솔직히 안 그렇습니까? 어떤 집에 산들 이런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제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다 축구장 골프장 수영장을 갖추고 온갖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가꾸어 놓은 정원속에 산다한들 주님의 정원에 사는 것만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새발의 피도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한 너댓살 까지는 그런대로 부유한 가정이었지만 이후로 아버님의 실수로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초가삼간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는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고래등같은 같은 기와집 안채에다가 사랑채도 여러칸이었습니다. 초등학교때 가끔 그 집 마당을 지나면서 열려 있는 대문으로 그 집 안뜰을 몰래 들여다보곤 하였습니다. 안채는 어린나이라서 그런지 무슨 궁궐처럼 보였습니다. 마당에는 나무로 잘 가꿔져 있었고 여러 가지 꽃도 예쁘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마치 천국처럼 보였습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저런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집 뜰안에서 놀면 얼마나 좋을까,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면서 늘 부러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정원에서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정원입니다. 그까짓 고래등같은 기와집 정원이 넓으면 얼마나 넓겠습니까?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정원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정원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우리집입니다. 우리집 뜨락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영광과 기쁨과 은혜와 존귀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되겠지만 그러나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뜰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은총을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때로는 환난과 핍박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올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더욱 주님을 바라보게 만드십니다. 더욱 주님과 동행케하십니다. 더욱 주님 앞에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승리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렇게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뜰에 거하며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기억하시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것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세상의 것들 부러워하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질랑 더더구나 말고 나는 하나님의 정원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평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7,8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강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오직 주님만이 인생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속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안에 있는 자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거워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얼마나 많은 전쟁과 도전과 위협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끊임없이 블레셋이나 암몬이나 에돔사람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얼마나 사울에게 괴롭힘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의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참고 견디며 주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대적자들을 물리쳐 주시고 위대한 성왕이 되게하히고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안식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다른데서 오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하나님에게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과 평강과 은혜의 창조자이시고 수여자이시고 주관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그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평강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실제로 여러분, 우리는 외견적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번영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이 만큼 부요하고 태평성대를 누릴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이 땅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찬양소리와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고 성도들이 새벽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이 함께 하셨을 때 우리는 이만한 번영과 자유와 평화와 질서와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안에서는 분명 평안이 있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분명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의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의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평강의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평강의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면서 주님안에 있는 그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결실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평화의 축복에 이어 결실의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보세요. 땅을 권고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고하셨다는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살펴서 필요한 것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돌아보사 물이 필요할 때 물을 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이 필요할 때 태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단비를 내려서 단단해졌던 땅을 부드럽게 하여 싹을 내게 하셨다는 것이죠. 싹을 내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싹에 복을 주셔서 그 싹이 잘 자라도록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푸른 초장이 형성되어 그 초장에는 양떼가 덮여있고, 밭에는 곡식이 넉넉하게 덮여 있어서 온 무리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오늘 이땅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힘든 일이 있고, 때때로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땅은 축복받은 땅이예요. 은혜의 땅입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예요.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값없이 받은 사람들이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도 여러분의 가정과 산업에 결실의 축복이 있는 것은 주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를 권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친히 돌아보시어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절기를 따라 적절한 태양빛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갈 이 축복의 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농사의 현장에서, 사업장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열심히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수고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감사요, 축복이요, 커다란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할 수 있는 터전과 조건과 환경과 건강과 지혜를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제반 조건들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열심히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저 감사할 것 뿐입니다. 영광 돌릴 것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기뻐해야 할일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마음껏 주와 동행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마음껏 찬양하며 예배드리며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복된 삶의 터전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복받은 사람들이지 얼마나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물론 힘들때도 있습니다.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바 은혜가 더 큽니다. 제아무리 어려워도 받은 은혜가 몇 백배 천배 만배 더 큽니다. 그러므로 먼저 감사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있음에 감사하고, 주님의 뜰안에 거하게 하심에 감사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고, 이 풍요로움에 감사하고, 이 자유와 평화와 질서가 있음에 감사하고,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고, 이웃이 있음에 감사하고, 살아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혹시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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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용서

 

 


부경환 목사(경기 오산감리교회) 기자

 

 
찬송 : ‘그 참혹한 십자가에’ 269장 (통 211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성경 : 사무엘하 19장 21~22절

말씀 : 우리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성보다 감정이 훨씬 더 우리 삶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 미움을 걷어내고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습니다.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형들을 용서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고 빚진 자의 비유로 용서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죄 사함의 용서를 받은 우리들이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스테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하나님께서는 죽을죄를 지은 우리들을 용서하시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시므이가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을 저주합니다. 아마도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승리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시므이는 급히 다윗 왕 앞에 나와 19∼20절에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라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를 본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21절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아비새의 말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22절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고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윗은 용서합니다. 우리는 항상 남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것이 십자가처럼 느껴지면 달게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기도 : 우리의 죄를 사랑으로 덮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기만 하면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오늘도 살아갑니다. 그 사랑, 그 은혜 잊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하며 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부경환 목사(경기 오산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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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부활절(Easter)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최대의 축일이다. 초창기에는 유월절을 따라 유대력 니산월(태양력 3-4월) 14일을 부활절로 기념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유월절을 그리스도인의 부활절로 지킬 수 없다는 로마 교회의 판단에 따라 니케아공회(325년)부터는 춘분(3월21일) 이후 최초의 만월(彎月)이 지난 첫 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코 부활절이 유월절보다 먼저 오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부활절의 날자는 매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대체로 3월22일과 4월26일 사이에 떨어지게 된다.
● 2017년= 4월 16일
● 2018년= 4월 1일
● 2019년= 4월 21일
● 2020년= 4월 12일

부활절 풍습으로는 ①흰옷(기쁨) ②백합(순결) ③양고기(예수님) ④달걀(새 생명) 등이 있다.
 

B. 고난주간(Passion Week)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종료주일 다음날(월)부터 부활하시기 전날(토)까지 일주일을 말한다. 수난주간이라고도 하는 이 일 주일은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주간으로 특히 최후의 만찬이 열렸던 목요일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계셨던 금요일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심정으로 금식하는 성도들이 많다.
 
 
C. 사순절(Lent)
부활절 전까지 6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40일의 시작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에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 금식, 기도, 묵상 등의 경건생활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음식을 먹는 경우 고기를 제외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는 것이 원칙이다.
● 성경에서 40일은 고난과 인내의 기간을 상징한다. 노아의 홍수 때 밤낮으로 비가 40일간 내렸고(창 7:4),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으며(민 14:33),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D. 사육제)(Carnival)
카니발의 어원은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이다. 즉 원래 사육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실컷 고기를 먹어두는 3-7일 정도의 행사 기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본질은 사라지고 자유와 방종이 과도하게 허용되는 축제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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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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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예배 ] 부활주일예배 예수부활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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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십자가만 바라보라

 

 

 

찬송: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288장(통 204장)

신앙고백: 사도신경

본문: 마태복음 17장 1~8절

말씀: 한국교회가 가진 독특한 것이 있는데 새벽기도와 산기도입니다. 예수님도 새벽기도를 즐겨 하셨고, 산기도도 즐겨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산에 올라가서 졸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깨어서 기도하셨고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이 변화된 모습이 원래 주님의 모습이요, 장차 하늘에 오르실 모습입니다. 이 영광스런 모습을 보아야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확신과 용기가 생기겠기에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실 때에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유대인들에게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이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게 되니 졸던 제자들이 두 눈이 번쩍 뜨여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착각한 것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항상 주연이 있고 조연이 있습니다. 조연은 주연을 빛내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 자리에 주연은 예수님이고 조연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동안 주연이신 주님과 함께 다녔으면서도 이러한 감동이 없다가 조연을 만나보고 감동을 한 것입니다. 주연을 잘 모셔야 합니다. 어떤 집은 남편에게는 매일 김치찌개나 해주다가 이웃집이 오거나, 남편의 직장 동료가 오면 메뉴가 바뀝니다. ‘아니 평소에 우리 아내가 저런 것을 만들 줄 알았나’ 할 정도로 신기한 것들을 막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주연이 남편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그렇고, 오늘 우리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 구원을 얻는 일인데 이것은 잊어버리고 살다가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이나 명예의 축복을 주시면 감격하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명예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신 것에 비하면 조연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였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들고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간곳이 없고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우리가 깊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예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신앙의 깊은 경지를 체험하지 못할 때에 다른 것이 많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받게 됩니다. 그래서 작은 일로 시험을 받고 작은 일 때문에 신앙생활에 축복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크리스천의 위기는 예수님이 희미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험한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그 가운데 예수님을 똑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예수님 외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법을 전하는 곳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풍랑이 있고 어둡던 세상이 밝아지고 분쟁이 있는 곳에 찬송이 넘쳐나게 되며, 세상에 끌려가던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선물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명철 목사(도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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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 진실한 접촉

 

 

 

 

찬송 : ‘구주예수 의지함이’ 542장(통340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가복음 5장 25∼34절

말씀 : 오늘 본문 내용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이라는 병으로 고통을 당하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의 옷에 손을 대므로 병이 낫게 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고 진실하게 주님과 만나고 접촉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말 못할 고민을 12년 동안이나 안고 살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돈만 많이 쓰고 병은 악화됐습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줄 수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병을 주님께 말씀드리기 힘들었습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놀랍게도 병이 치료됐습니다. 근원적으로 치유되었으며 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손을 대는 그 순간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수많은 사람이 서로 밀쳐서 주님께 손을 댄 사람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만진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고백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사건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봉사를 했습니까. 과연 나는 이 여인과 같은 믿음으로 진실하게 주님과 접촉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아무런 의식도 믿음도 없이 예배하고 봉사한다며 교회에 오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수없이 많은 예배를 하면서도 감동이 없고 매번 반복되는 의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까. 단 한 번 예배를 드려도 진지하고 진실하게 하고 예배하면서 누리는 기쁨과 감격이 너무 커서 삶의 활력을 경험한 적은 몇 번이나 됩니까. 간절하게 기도하며 눈물로 주님을 만났더니 놀라운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며 기도의 즐거움을 누린 경험은 얼마나 됩니까.

진실한 접촉은 놀라운 은혜를 입게 합니다.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주님 곁에 가까이 와서 서로 밀면서 주님과 접촉한 수많은 사람 중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이 여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진실한 믿음의 접촉이 없이는 이런 기적이 없습니다.

나의 신앙생활을 반성합시다. 12년 동안의 고통과 아픔이 한 번의 접촉으로 해결된 이 여인처럼 우리가 주님을 진실하게 만나고 접촉하므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고 늘 기쁨과 감격의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예배를 통해서도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는 진실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그 진지함을 유지하고 기도할 때마다 그 진실한 접촉이 이루어지게 합시다.

기도 : 나는 얼마나 진지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만나고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단 한 번의 예배에서라도 진지한 접촉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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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찬송과 기도

 

 

 

제 목 : 찬송과 기도

말 씀 : 약5:13-18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굴곡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평안할 때가 있으면 뭔가 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일이 자꾸 꼬일 때도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 들어옴으로써 어렵고 힘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어렵고 힘들 때가 있더라도 너무 힘들어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으려니 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또 형통할 때에도 너무 자랑하거나 남 앞에 으스대지 마세요.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기쁠때나 슬플때나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며 감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여기에 대한 답변을 주고 계십니다.

1.고난이 올 때 기도하라.

오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난 앞에서 아무 대책이나 노력도 없이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험이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세요.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웬지 아세요. 그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앞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주셔서 그 고난에 넉넉히 대처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하여 결국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셔서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혹시 고난이 온다해도 당황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18절 까지는 우리 인생에게 다가오는 고난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인 질병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장로(교회대표자)를 청하여 기도하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라고 하니까 앞으로 아프면 목사님 부르지 말고 장로님 불러야 되나 생각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목사도 장로입니다.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일 두가지를 다하는 장로를 목사라하고, 치리만 하는 장로를 일반적으로 장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질병이 생겼을 때 먼저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병원에는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반적인 고난도 먼저 기도하고 대책을 세우고, 질병도 먼저 함께 기도하고 병원도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보입니다.

2)믿음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라.

약5:1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여기에 보면 질병의 원인이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것은 질병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온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것은 질병의 원인이 본인의 죄로 인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하라. 서로 기도하라. 이것은 죄를 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사람앞에서도 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자신의 죄를 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만큼 죄를 철저히 회개한다는 의미와 함께 죄로부터 철저히 떠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서로 내 놓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더욱 힘이 있는 것입니다.

3)간절히 기도하라.

오늘 17,18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에게 무슨 신성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이 나타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간절히 해야 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어놓고 매달려 부르짖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도 죽음을 직면했을 때 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을 때 눈물로 침상을 띄울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을 때 간절히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장)를 통하여 낙망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질병이든지 어떤 다른 고난이든지 혹시 고난이 올 때 먼저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대한 믿음 가운데서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목숨을 내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즐거울 때는 찬송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그렇다고 고난당할 때는 기도만 하고, 즐거울 때는 찬송만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당할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하고, 즐거울 때는 특별히 더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은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경제가 풀리고 자녀가 잘되고 취업이 되고 병이 낫고 하여튼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내가 누리는 모든 형통함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잘될 때 오히려 신앙을 까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되고 형통하니까 아쉬운 게 없다고 찬양도 기도도 예배 생활도 잘 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능력이요 노력인 줄 알고 자기가 영광을 다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아 숨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를 잘 만났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노력했다면 노력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는 어디서 왔습니까? 머리가 좋다면 그 좋은 머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때가 좋았다면 그 좋은 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럴 때 감사와 기쁨과 은혜는 더욱 충만해집니다. 일도 더욱 잘 풀려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기쁠때나 즐거울 때나 형통할 때나 불통할 때나 먼저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당할 때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면 받는대로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어떤 여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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