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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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설교]성령 세례를 받으라

 

 

 

제목 : 성령 세례를 받읍시다.

말씀 : 행1:4,5

1.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재물도 얻고 싶고, 건강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권세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예쁜 부인이나 백마 탄 왕자같은 남편도 얻고 싶습니다. 평안도 자유도 즐거움도 기쁨도 사랑도 존중도 받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좋은 것을 누리며 사랑과 축복과 기쁨 속에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뭔가 좋은 것들을 누리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됨으로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기가 됨으로 이러한 것들에 대한 건전한 추구는 도리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얻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로 이러한 것들보다 더 우선해서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도 우리 인생에게 보템과 유익과 기쁨이 되지만 그보다 더욱 보템과 유익과 은혜와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우리는 인생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영혼은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인간 영혼이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그 엄청난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심령속의 굳어지고 무지한 것들을 깨트려 버리고, 죄된 것들을 씻어 버려야 비로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되고 예수님 믿고 정말로 그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 은혜 기쁨 자유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천만금을 얻을 것보다도, 천하제일의 권세를 얻은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무엇을 기다리라?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 그게 뭡니까? 성령입니다. 요14: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바로 이 약속하신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받아야 너희들이 나를 바르게 알고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약속하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심령이 깨끗해져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고,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을 알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위협이나 유혹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던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를 못했던 제자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는 완전히 180도 달라겼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고 하늘나라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걸어 잠갔던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셨다. 이 분이 그리스도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힘차게 외쳤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옳으냐 너희들 말 듣는 게 옳으냐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을 통하여 또 다른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까지 이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요20:2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 받아야 죄사함 받습니다. 그래야 심령이 깨끗해 집니다. 그래야 눈이 밝아집니다. 천국이 밝게 보입니다.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똑똑하게 들립니다.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상황과 환경을 이깁니다. 죄와 유혹을 이깁니다. 능력있게 생명있게 담대하게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혜가 풍성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요, 지혜의 영이요, 능력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생명과 진리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까?

2.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엡1:23절이지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이 곧 예수 그리스도 곧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지혜,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지상교회는 온전치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교회 안에 만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습니다. 주님의 삶과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곳은 오직 교회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해야 성령 충만 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에서 보았던 4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입니다.(창22:2) 다윗이 장막을 치고 언약궤를 모셔두었던 곳입니다.(대상15: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곳입니다.(대하3: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인류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거룩한 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는 곳, 말씀이 있는 곳,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가 있는 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머물며 더욱 말씀 위에 서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까지는 너희 연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예루살렘은 어디 입니까? 교회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님의 피값으로 세우신 곳,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전도와 섬김과 봉사가 있는 곳입니다. 이런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봉사와 섬김 등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성도와 교제할 때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령을 받게 되고, 이미 받은 자는 더욱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하게 받은 사람은 생명의 은총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주의 사역 힘있게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이 있는 교회, 그래서 이 땅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유일한 기관인 교회를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곳을 가까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섬기고 교제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말씀과 사랑과 은혜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제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정말로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언제 참 제자가 되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대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나서부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기도에 힘쓸 때였습니다.

행1:1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많은 분들과 더불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드디어 오순절 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은 능력있는 제자들이 되어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즉 기도할때에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고,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후 능력있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막9:2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어느 날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만 남았는데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린 소년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못고쳐 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아 나가가 한마디 하니까 귀신이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는 왜 못쫓았습니까, 그러니까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런 모든 잡류들, 더러운 것들, 추한 것들, 유혹들, 마귀의 장난들 다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성도들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이 대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깨어 기도하며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룰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을 물리쳐 버리고 더욱 큰 감사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겸손히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또한 말씀을 듣고 받기 위함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행10:4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씀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를 모셔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밖으로 나가 발 앞에 절하고 모셔 들이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자 그 발아래 엎드려서 절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척, 친구들까지 모아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기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 능력의 말씀 앞에 조용히 무릅꿇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말씀이 송이꿀보다도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더욱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말씀의 은혜로 내 심령이 밝아지고 희망과 은혜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성령의 지배 속에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래야 믿음을 갖게 되고 나아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온전히 성령의 지배속에서 살면서 능력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능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돈이 힘이고 권력이 힘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그게 진짜 힘이 아닙니다. 진짜 힘은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힘입니다. 상황과 환경과 유혹과 핍박과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죽음도 마귀사탄의 권세도 모두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돈과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결국 지는 자가 됩니다. 심지어 아무리 고상하게 종교생활해도, 교회가 아무리 웅장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힘이 없습니다. 환난풍파 몰아치면 무너집니다. 세상의 유혹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서 엡5:18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술의 지배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혼란스럽게 만들고 분별력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영적 도덕적 윤리적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술 뿐아니라 세상의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향락과 오락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과 명예와 지식과 권세와 이런 것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에 취하면 마침내 감각이 무디어지고 영혼이 황폐해지고 그러다 마침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성령은 살리는 영이니까. 지혜의 영이니까, 생명의 영이니까, 사랑의 영이니까, 은혜의 영이니까, 화평과 위로와 소망과 자비의 영이니까, 이런 영으로 충만해야 비로소 올바른 분별력이 생기고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충만해 지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다른 것으로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물밀 듯 쏟아져 내려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완전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그까짓 술이나 향락이나 오락이나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기쁨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추한 것들과 죄와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퍼펙트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에 앞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위하여 교회를 가까이 하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한분도 빠짐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세상의 모든 죄와 추한 것들과 환난과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이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위로 소망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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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범사에 감사하라

 

 

 

민수기 11장 4∼15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군대에 쫓기다 홍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당신이 우리를 끌어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 이같이 하느냐” “애굽에서 당신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 했고,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했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게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길을 터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온 회중이 굶주려 죽게 됐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도 남을 충분한 만나를 새벽마다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만나가 끊길 수 있다며 또 불안해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 우리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샘솟아 나오는 기적을 통해 그들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1년 후 바란 광야에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땐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다. 이제는 우리 기력이 다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미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격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음에도 그들은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저녁마다 메추라기 떼를 공급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처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 많은 식량을 공급하심에 경외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같은 음식에 싫증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린 만나, 저녁마다 진에 덮인 메추라기, 그 기적의 산물을 보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간사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감사하는 일에도 조건부 감사와 범사에 감사하는 게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가 하나님의 응답과 풍성하게 채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렸겠지요. 일종의 조건부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기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잊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알고서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허현 목사(양주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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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설교] 부활은 우리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집필자 서문강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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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사순절설교 : 섬기는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20:28, 막10:45)이라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내기 위한 유월절 양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맞춰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층이 당신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과 떡을 나누어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5-16).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유월절 식사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눌 마지막 식사이며, 그 식사 후에는 잡히셔서 고난과 능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실 마지막이고 결정적인 일이며, 그 뒤에 남는 것은 완성될 하나님나라에서 잔치를 즐기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잔을 돌리시고 떡도 떼어 나누어주셨습니다(눅22:17-20).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는데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22:21-22)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며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오늘 본문 직전의 23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께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었지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보통 충격적인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을 뿐 그들의 관심은 곧 다른 문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니라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한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정말로 당신의 죽음이 가까웠고 당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제자 중에 하나가 당신을 곧 팔아넘길 것이라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그 시점에서조차 제자들은 “또” 그 자리다툼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해온 제자들에게서 드러난 주되고 궁극적인 목적이 동료들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한심스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들의 사고나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확립되어야 할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25-2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경우와 “너희” 즉 제자들의 경우를 대비시키신 데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에서는 임금이 권력을 쥐고 백성을 다스리며 스스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칭송을 듣는 것이 당연시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세계에서는 “큰 자” 즉 존경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더 많은 이들이 오히려 “젊은 자” 곧 존경과 대우를 받을 우선순위에서 뒤에 와야 할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이가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 위에 올라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씀으로 한 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여기서는 세상사람들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대비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자리에 앉아서 날라다 바치는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음식을 나르는 사람보다 크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면서도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구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한 사실을(마20:20-21)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했습니다(마20: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러주신 말씀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철저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열두 제자 모두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배신했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권력욕과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셨는데도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투고 있었다면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 배신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던 제자들은 붙잡히신 예수님을 보고 그를 부인하거나 버리고 도망치기 이전에 이미 다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배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절을 앞두고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지난주일 장로 열 분을 선출하기 위해 공동의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거조례가 금지하고 있는 부정선거운동이 적발되어 긴급히 모인 당회에서 의논 끝에 이번 공동의회를 무기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기껏 모인 공동의회를 유회시키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분도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치러질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문제 삼은 일은 세상에서라면 문제꺼리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라 해도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한국교회의 본이 되고 무엇을 하든 교과서같이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고 의지이기에 우리에게서는 용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깨끗한 선거풍토를 다지고 과열선거운동의 재발을 막자고 모든 장로님들이 몇 달 동안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도 스스로 삼가고 장로로 선출되신 분들은 임직을 육 개월 이상 미루는 아픔을 감내한 역사를 지닌 우리 교회이기에 그런 일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의지를 짓밟고 지지하는 특정 인물들의 명단을 만들어 다량으로 복사해서 버젓이 교회마당에서 돌리는 일은 당회에 대한 정면도전이고 교회에 대한 심대한 배신행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은 세상사람들이 갖는 사고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세상에서 하는 행태를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겠다는 것이 주님에 대한 배신이며 주의 몸 된 교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당회에 들어온다 한들 어떻게 당회원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면 어떻게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겸손하게 열심히 섬기고 항존직을 선출하는 때가 되면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일꾼들이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을 항존직에 세울 줄 아는 성숙한 교인들이 되어야 한국교회와 이 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희망을 꺼뜨리는 일체의 행위는 한국교회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장래가 우리 한 사람 사람의 의식과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모두가 성숙한 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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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사순절을 보내면

 

 

 

제목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말씀 : 요13:1-17


예수님이 누구신가? 오늘 16번째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 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 이 요한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중에서도 13장부터 17장은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고 가장 진하게 보여 줍니다. 그 중에서도 요13장은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가장 진하고 가장 강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여기 "끝까지"라는 말은 시 간적으로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 가장 진하고 가장 뜨겁게 사랑하셨다 는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그리고 최고로"(To the end and to the uttermost)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고 질적으로 한계가 있 습니다.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조건적입니 다.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마지막까지 최고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 "자기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 주로 믿게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믿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앞으로 믿게 될 모 든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들과 저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이별의 때가 이른 줄을 아셨을 때 예수님의 사랑은 더욱 더 뜨거워졌습니다. 이별은 마음을 슬프게도 하지만 사랑을 더 뜨겁게 만듭니다. 저는 이별 의 아픔과 슬픔을 이따금씩 경험합니다. 몇 년전 영국에서 공부하던 딸 혜원이를 영국에 두 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몇 년전 항가리에서 선교하는 박윤 애 선교사를 항가리에 두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최근에 한 주간 동안 사랑을 함께 나누던 뉴질랜들의 성도들과 귀여운 어린 아이들을 뉴질랜드 공항에 남겨 두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이별의 때가 가까이 이르렀 음을 아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슬픈 마음과 함께 뜨거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예수 님의 사랑은 더욱 더 간절해 졌고 뜨거워졌습니다. 끝까지 최고로 사랑했습니다.

2. 예수님은 "행동으로 사랑하신" 분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 의 발을 씻기시고"(4,5). 진정한 사랑은 몸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사람 을 손으로 만지고 싶어하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말 로 하는 사랑이 은과 같은 사랑이라면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사랑은 금과 같은 사랑입니 다. Word is silver, deed is gold. Preaching is silver, life is gold. 예수님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 을 손으로 만지시며 거룩하신 손으로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발 을 씻는 행동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첫째는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는 죄 사함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미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 욕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날마다 죄를 범하는 죄인들이었습 니다. 날마다 발이 더러워지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날마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의 허물과 죄를 씻어주 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죄를 씻어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거룩하신 주님의 손으로 만지시면서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들의 모든 병을 고치시고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고도 남는 거룩하신 손입니다. 그 거 룩하신 손, 십자가 못에 박히신 손, 피 묻은 손으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동은 둘째로 겸손과 섬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겸 손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섬김을 받아야 구원을 얻습 니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 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것은 종의 차림을 한 것입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 을 씻긴 것은 하인들이 하는 섬기는 일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사랑은 입으로 하는 설교로 나타나지 않았고 손으로 하는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죄 씻음 의 행동과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3.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하신 분"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옳으니라 "(14).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보고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 했습니다. 왜 제자들보고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했을 까요?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행동하 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닮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들의 손과 삶이 거룩해 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성자처럼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 문입니다. 우리들도 성 프랜시스처럼 또는 손양원 목사님처럼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 문입니다. 우리들이 마귀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시지 않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발을 씻으라"는 분부는 우리들을 괴롭게 하는 분부가 아니라 우리들을 복되 게 만드시는 분부였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서로 발을 씻는 것 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니라 행복한 일입니다. "너희 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러분들 그렇게 믿으십니까? 지난 5월에 장로로 임직을 받으신 두분 장로님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부인들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주님을 닮아 가는 복된 일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앞으로 나와서 서로 발을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먼저 아내의 발을 씻고 그 다음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의 더러운 발을 먼저 씻어 주옵소서. 나도 주님의 분부를 따라 발 을 씻어줍니다 이렇게 기로하는 마음으로 서로 발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는 행동에도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 는 의미가 있고 서로를 섬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 고 서로를 섬길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서 일어납니다. 주님이 하신 그 일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죄 씻음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훈계나 강의나 설교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발을 씻는 사랑과 겸손과 봉사의 행위로 이루어 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끝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행동으로 사랑하신 분입니다. 발을 씻는 겸손과 봉사의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서로 발을 씻 으라고 분부하신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서로 발을 씻는 일을 실천하십 시다. 북한 동포들의 발을 씻어야 하며 수재와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서로 발을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극 복하시면서 우리들의 더러운 발을 손으로 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깨끗하게 씻 어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들의 발을 날마다 씻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도 서로 서로 발 을 씻어 주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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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부활주일예배 설교 <죽음을 이기신 예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고전 15:1-26 )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 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 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 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老)교수, 이제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의표를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1998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 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 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만 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랑의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서초구의 전체 인구가 40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의 60%에 해당합니다. 1년에 서초구 인구의 60%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의교회만 해도 하루에 한 명 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1년에 365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의교회 교인 전체로 따지자면, 거의 100명에서 120명중에 하나가 날마다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우리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진지하게 직시해야 될 실체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낍니까?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덤을 갖고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고상하게 대답을 하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는데 다 이해한 체 한다면 본심을 숨긴 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굉장히 감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정말로 옥 목사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마음이 끌렸는지에 대하여 그는 퍽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바람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람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해 안에 자기 친구 셋을 잃은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은퇴를 한 사람 인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를 타려다가 '윽' 하고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친구는 40대 부인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모이는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길을 드라이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유조차가 앞에 있는 차를 못 봤던지 들이받아 차에 화재가 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건장한 친구인데,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졸지에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셋씩이나 잃어버리는 기막힌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되자, 그의 마음 속에서 죽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 죽음이 마지막 이라고 하는 말에 저항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마음에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 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여 워하던 어린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 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 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 백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한 예로 시편16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빗대어서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기가 부활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가기 싫어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다에 빠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고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큰 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 인자도 무덤에서 사흘 동안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요나가 사흘 후에 살아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나의 사건마저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구원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 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 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섹을 향해 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 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 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 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다음부터 바울은 숨만 쉬고 있었지 제 정신이 아니었 습니다.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 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입니다.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확실하게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혜택에 대해 논하라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믿도록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여러 명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나사로라든지, 이렇게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이 진리를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숭맹숭하다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매료되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한 사람인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이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빅 뉴스 가운데 제 1면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자로 나올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죽은 자는 살 수 있다.' 하는 뉴스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부활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 중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 믿음도 헛되고'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했다면 우리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떠났더라도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서 있을지 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바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벌써 더위 때문에 힘이 드는데 왜 여기 와 앉아 있습니까? 모두 다 오염이 되어서 갈 때도 마땅치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연인과 함께 꽃향기도 맡고 아름다운 인생의 꿈도 서로 나누면 좋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기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괜히 재미있는 일도 못하고 한 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장 복 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언급한 성경이 17권이나 되고, 나머지 10권은 간접적으로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빼고서는 신약의 말씀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준다.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절부터 24절까지 보면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흔들면서 요제를 드립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 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 구원을 주십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습니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 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않습니다. 죽음이 불쾌한 것이긴 하지만 저주스러운 것으로보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마침표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배짱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놓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지금 여든 세 살 정도 되십니다. 그분이 쓴 글을 최근에 보았더니 참 인상 깊은 말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주소를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이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 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지 모릅니다. 얼마나 비통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랑의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 남편이 30대에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다. 라고 그랬더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안 갔습니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는 것,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며칠 전에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목회자의 사표가 되는 어른이었 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빈소 앞에 가서 한참 동안 앞에 있는 큰 사진을 쳐다보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사진은 아마 그분이 한 80세 정도 되었을 때 찍은 것 같았습니다. 깊게 파인 주름살이 잔뜩 덮여 있는 얼굴, 이목구비의 모든 균형이 다 어그러진 얼굴, 생명의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얼굴, 이것을 쳐다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마당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정말 허무하네, 허무해.' 그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물은 안 나오겠지만 당장 이런 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허무하네. 빌어먹을 세상, 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죽어야지. 마지막이 저 모양인데 잘 살겠다, 의롭게 살겠다,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목사님의 그 사진을 보면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엄청난 미남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시겠지.'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눈물을 쥐어짜면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합시다.

또 우리 자신이 부활할 그 날을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관한 가능성을 길게 변증한 사도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57절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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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설교] 고난주간의 십자가의 사랑


 

 


제목 : 사랑의 십자가

말씀 : 마27:38-44

 


1.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주님의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실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끔찍한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저주받은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말할나위없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전1:18에서는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는 것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는 유일한 능력이요 힘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인들 왜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할까요? 지식으로 할까요? 과학으로 할까요? 윤리도덕으로 할까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다는 사실 조차 모릅니다.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르고 천국이 있네 없네, 아무거나 믿으면 좋은 데 가네 마네하며 떠듭니다.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참 안타깝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반대로 이 놀라운 생명의 비밀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동행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동시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죄를 혐오하고 멀리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그렇잖아요? 그 놈의 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가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생명을 얻었는지를 망각하고 마치 구원이 거저 얻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거저 얻어진 것은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가치 없이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부자집 자녀들은 돈 귀한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흔전만전 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알면 절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을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죄를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은 온갖 썩은 냄새와 똥냄새가 풀풀나고 구더기가 들끓는 그런 더럽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곳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또는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며 대드는데 그곳으로 가까이 가겠습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이보다 더 더럽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순절 특별히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동시에 정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오직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몰라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주신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생명의 역사를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너무나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주님은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①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때린 후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침을 뱉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②유대종교지도자들은 눈을 가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조롱했습니다. ③불과 며칠전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호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④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⑤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들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모욕했습니다. 이런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우리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는 백번 천번 만번 죽어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하지 않습니까? 또 그냥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그 은혜만을 누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주님이 그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안다면 어찌 그냥 편히 앉아 은혜만 누리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정말 백번 죽고 또 죽어도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주님의 그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의 은혜를 덧입은 자의 마땅한 의무이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우리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려면 이러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즐거움만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보다는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받쳐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고귀하고 영화로운 삶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정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정말 복되고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또 오늘 성찬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이 당하신 그 처절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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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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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설교]성령을 받으라

 


 
제목 :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 : 엡5:15~18

1.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유일한 구원자라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는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풍성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가 믿는 그 믿음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으로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야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래야 비로소 그 믿음이 주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 은혜를 누리고 못 누리고를 떠나서 믿는다고 하며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말하나마나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 충만하게 받으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체를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왜요? 때가 악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때가 악해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지혜가 없으면 악하고 왜곡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악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올바른 분별력과 힘을 가지고 그걸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얻게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의 왜곡되고 헛된 것들을 물리치고 진정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신도 하나님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죄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 어두운 영혼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되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알게 됩니다.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세상의 죄와 무지와 도전과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올바른 분별력과 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의 받아야 합니다. 받되 한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지 못하면 어떻게 근근이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몰라도 세상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을 이길만한 영적 능력이 부족하여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게 되어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니기는 다니는데 예수님 안에 넘쳐흐르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못 받아도 별거 없습니다. 세상의 것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그래봤자 죄인이고 그래봤자 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속에 지지고 볶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다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영생복락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살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자연인 그대로는 어떤 생명의 은총도 누릴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쁘시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어 생명의 능력과 은헤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설령 억지로 간대해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오심을 다른 무엇보다 기뻐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그 영혼 속에 기쁨으로 찾아 가셔서 거기 계속 머무시면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 즉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믿고 그러기에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님과의 만남과 그 안에서 누리게 될 은총을 진실로 사모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모하는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돈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달려갑니다. 오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이런 것에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곳으로 달려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지요. 그러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드립시다. 말씀 묵상합시다.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무엇으로 성령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영은 오직 영으로만 통하기 때문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로 대화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 영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말씀 되새기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4절을 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말씀 되새기며 기도에 힘썼을 때 드디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총을 사모하신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러면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이미 상당부분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도전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못 받아도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 가운데 있던 옛자아가 죽고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 가지고 있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의미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새롭고 올바르고 살아있는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천국시민이 됨으로 거듭나고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니 거듭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알든 알지 못하든 사탄의 지배 속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며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죄와 무지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방황하는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 똑똑하고 잘나고 세상에 모르는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실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세상에 지배당하고 세상에 취하여 세상 사람들이 살아 가는대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물론 성령은 생명의 영, 은혜의 영,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기시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의 풍성한 은혜과 기쁨과 능력을 평안과 위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삶의 모습을 보면 흡사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물론 결과는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과 마음을 술이 지배해버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이 내 마음을 지배해 버리니까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상방뇨도 하고, 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술이 나를 지배해 버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은 영적 육체적 마음적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 선한 영, 은혜의 영, 의의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로 달려가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도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심지어 환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이기게 마침내 완전한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술이 내 정신 줄을 제 맘대로 조종하여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추하고 더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곤해서 사람을 질려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에 취하면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지만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근심걱정을 조금쯤은 잊어버려 약간은 평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건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잠시 약간의 정신적인 마취를 시켜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취가 풀리면 즉 술에서 깨어나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평강과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근심 걱정이나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진정으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더욱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에 보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있지 않고 돈과 명예와 안일함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와 세상 즐거움에 취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술과 마약과 향락과 도박에 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세상에 취해서 헌신과 봉사와 충성과 이런 거룩한 귀하고 복된 가치들을 고색창연한 옛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고, 술을 마셔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18절에서 술 취한 것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여러분, 그래도 마셔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들은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 롬12: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보세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술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습니까? 그게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왜곡된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거룩한 산제물이 되고 그래야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면서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대의 왜곡된 풍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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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찬송과 기도

 

 


제 목 : 찬송과 기도

말 씀 : 약5:13-18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굴곡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평안할 때가 있으면 뭔가 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일이 자꾸 꼬일 때도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 들어옴으로써 어렵고 힘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어렵고 힘들 때가 있더라도 너무 힘들어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으려니 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또 형통할 때에도 너무 자랑하거나 남 앞에 으스대지 마세요.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기쁠때나 슬플때나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며 감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여기에 대한 답변을 주고 계십니다.

1.고난이 올 때 기도하라.

오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난 앞에서 아무 대책이나 노력도 없이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험이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세요.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웬지 아세요. 그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앞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주셔서 그 고난에 넉넉히 대처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하여 결국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셔서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혹시 고난이 온다해도 당황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18절 까지는 우리 인생에게 다가오는 고난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인 질병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장로(교회대표자)를 청하여 기도하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라고 하니까 앞으로 아프면 목사님 부르지 말고 장로님 불러야 되나 생각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목사도 장로입니다.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일 두가지를 다하는 장로를 목사라하고, 치리만 하는 장로를 일반적으로 장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질병이 생겼을 때 먼저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병원에는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반적인 고난도 먼저 기도하고 대책을 세우고, 질병도 먼저 함께 기도하고 병원도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보입니다.

2)믿음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라.

약5:1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여기에 보면 질병의 원인이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것은 질병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온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것은 질병의 원인이 본인의 죄로 인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하라. 서로 기도하라. 이것은 죄를 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사람앞에서도 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자신의 죄를 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만큼 죄를 철저히 회개한다는 의미와 함께 죄로부터 철저히 떠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서로 내 놓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더욱 힘이 있는 것입니다.

3)간절히 기도하라.

오늘 17,18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에게 무슨 신성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이 나타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간절히 해야 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어놓고 매달려 부르짖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도 죽음을 직면했을 때 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을 때 눈물로 침상을 띄울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을 때 간절히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장)를 통하여 낙망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질병이든지 어떤 다른 고난이든지 혹시 고난이 올 때 먼저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대한 믿음 가운데서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목숨을 내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즐거울 때는 찬송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그렇다고 고난당할 때는 기도만 하고, 즐거울 때는 찬송만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당할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하고, 즐거울 때는 특별히 더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은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경제가 풀리고 자녀가 잘되고 취업이 되고 병이 낫고 하여튼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내가 누리는 모든 형통함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잘될 때 오히려 신앙을 까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되고 형통하니까 아쉬운 게 없다고 찬양도 기도도 예배 생활도 잘 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능력이요 노력인 줄 알고 자기가 영광을 다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아 숨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를 잘 만났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노력했다면 노력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는 어디서 왔습니까? 머리가 좋다면 그 좋은 머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때가 좋았다면 그 좋은 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럴 때 감사와 기쁨과 은혜는 더욱 충만해집니다. 일도 더욱 잘 풀려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기쁠때나 즐거울 때나 형통할 때나 불통할 때나 먼저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당할 때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면 받는대로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어떤 여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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