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설교] 성경대로 살자

 

 


사도행전 17장 10~15절

극단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극단적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늬만으로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엔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 예수님의 진리가 삶의 결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여전히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없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득실거립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됩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제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갖는 믿음이 부도 맞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내 이름표 달고 나대신 죽으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것이 우리의 핵심가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이 아니라, 내 생각과 지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현장으로 내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스타일의 삶입니다. 성경 스타일의 삶이란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우리를 보고 “어! 저 사람 성경대로 사네? 스타일이 완전 성경스타일이네?”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항상 적용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쫓겨 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다 유대인이며 상당히 영향력도 있고 품위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씀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이 진리라는 결론에 이르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다고 말합니다. 나름 배운 사람들이었고 귀족 출신들이며, 고상하고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었는데 말씀 앞에서 진지하게 반응하더라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듣지만 믿음도 생기지 않고 자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성경의 단편적 지식들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뭘 좀 깨닫는가 싶다가도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듣기 때문에 제자리걸음만 계속합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변화됩니다. 말씀을 절대 결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말씀이 결론이 되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진리가 결론이 되게 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결론 났으면 결론으로 삼아야지 토를 달고, 내 상황에 꿰맞추려 하거나 이리 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내 형편이 어떠한가를 상관하지 않고 말씀을 결론으로 받아 순종했던 사도바울처럼 사는 삶이 성경스타일의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우리의 신앙이 가짜이거나, 말씀이 머리에만 돌고 있거나, 천국과 지옥이 실제가 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겔 16:4∼6)처럼 예수 생명 붙잡고 성경스타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에서 모두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용비 목사(전주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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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절기예배 설교

 

 

 

 

 

제목 : 십자가의 도

말씀 : 고전1:18-25

1.가장 큰 능력인 십자가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지혜와 지식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능력이요, 지혜요, 지식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제 아무리 큰 능력이라도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겠습니까? 제 아무리 고상한 학문이라도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학문이겠습니까? 온 천하를 다 얻는다해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억만금이 있어도, 지상 최고의 권세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잖아요? 결국 돈도 지식도 권세도 과학도 문화도 스포츠도 예술도 다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서인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살리지도 못하고 풍성함도 주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전한 의미의 지식과 능력과 은혜는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지혜와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을 풍요롭게하는 지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러나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과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누가 살리겠어요? 누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겠어요? 아무도 그 아무것도 못합니다. 정치도 못하고, 스포츠도 못하고, 예술도 달나라 별나라 가는 과학도 못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요10:10절 보세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요14:6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이 사실을 알고 믿은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걸 모르면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모르는 거 하나도 없다해도 생명의 도를 모르면 헛 똑똑이요, 헛 지식인이요, 헛 박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왜 표정들이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생명을 영원히 풍성하게 하는 지식과 믿음을 가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가장 똑똑한 사람, 가장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지옥과 마귀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똑똑하고 능력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하며 사세요. 이 시대 최고의 지혜로운 사람으로써 거기에 걸맞는 자부심과 삶의 양식도 가지고 사세요. 최고의 지식인이요, 최고의 지혜자로써 거기에 걸맞게 그 가장 고상한 지식을 바탕으로 거룩함과 의와 진리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며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여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때에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주님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 대한 지식이 최고의 지혜이며 능력인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식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의 은총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주님의 대속함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는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초죽음이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어 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습니다. 생명이 질긴 사람은 열흘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고 때로는 독수리들이 몰려와 산채로 살을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고통이 그 십자가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사야서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를 위하여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당해야 할 그 끔찍한 죄의 대가를,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처참한 지옥의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평화와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방법 밖에는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대안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없습니다. 돈으로도 안됩니다. 지식으로도 안됩니다. 과학으로도 안됩니다. 무슨 고상할 철학으로도 안됩니다. 천년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밖에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죄과 대신하여 받으신 멸시와 천대와 수치의 십자가였습니다. 처절하고 끔찍한 참혹한 고통과 절망과 죽음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총이 찾아 왔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찾아 들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날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죄에서 은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생명이며, 소망이며, 가장 큰 힘이며 지혜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특별히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며 우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기적이고, 편협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못난 자아랑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십자가만이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이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없고 흠없으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우리의 죄과가 도말됨으로 비로소 새생명의 은총을 덧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된 인생을 살리는 유일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또 엡 2:1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을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화목한 관계로 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죄의 장벽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깨뜨려 버린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가장 한 무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가장 강력한 가장 지혜로운 힘은 생명을 살리는 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요, 힘이요, 가장 큰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총알 하나면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막대기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늘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원자폭탄을 터트리면 한꺼번에 수십만의 생명이 희생당합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지진과 해일과 테러와 화재와 전쟁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떻습니까? 살리는 일은 그렇지 못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고사하고라도 생명체에 생긴 조그만 상처하나도 치료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에 조그마한 상처를 내기는 쉽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손가락 하나가 절단되기는 쉬우나 그것을 원상복구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더더구나 죽은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과연 무엇이 가장 큰 능력이겠습니까? 원자폭탄을 수없이 만들어서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여차하면 터뜨려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엄청난 군대를 훈련시키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제력을 쌓고, 돈을 벌고, 엄청난 기술력을 축적하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지식과 지혜와 기술을 쌓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능력 맞습니다. 그런 것들도 어느 정도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병을 보다 잘 치료하고,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 윤리와 도덕과 종교와 철학도 어느 정도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감동을 주기도 하며 어느 정도 선한 길로 이끌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의 가치도 인정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나 과학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하는 등의 세상적인 지혜와 힘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좀더 향상 시키고, 좀더 풍요롭게 하고, 좀더 가치있게 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을 건져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총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 여러분의 삶의 기초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주님께 삶의 근거를 두고 목적을 두고 그 바탕 위에서 다른 모든 삶을 영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 안에 있는 그 힘과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주님의 십자가만이 참된 지혜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가장 큰 지식이며 지혜입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무엇이 참된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생명에 관한 지식입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지식입니다. 죽은 영혼 살리는 지혜가 진짜 지혜입니다. 온천하를 얻어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면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도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면 가장 무식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도 말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기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냐, 그렇게 무기력하게 붙잡혀서 어떻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 받은 십자가는 필요없으니 뭔가 좀 대단한 능력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우리를 해방시키고 먹을 것 입을 것 실컷 먹고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거기서 내려오라, 거기서 뛰어 내려서 너를 구원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이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멸시합니다. 무시합니다. 그게 무슨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냐고, 그게 무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느냐고, 우리는 그 따위는 필요 없으니 돈이나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실상은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련한 것입니다. 사실은 십자가가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재물과 권력과 인간의 이성이 무기력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헛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우리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오늘 20절과 25절 보세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20절)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절)

여러분, 지혜자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가 어디 있습니까? 참된 변사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지혜롭게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강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똑똑하겠습니까? 누가 우주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미래를 알겠습니까?

오직 참된 지혜하는 하나님 뿐입니다. 진짜 진짜 진진짜 선비는 주님 뿐입니다. 참된 변사는 주님뿐입니다. 참으로 강한 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참으로 참된 지식을 가진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 하나님 택하신 인류구원의 방법인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인류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도를 따르십시오. 누가 어떻게 세상없는 소리해도 십자가의 도가 지혜이고 능력이고 복음이고 생명입니다. 십자가의 도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생명얻는 지혜가 없습니다. 생명얻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얻는 도가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도만이 생명의 도요, 지혜의 도요, 능력의 도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때에 정말 큰 능력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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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설교] 빌라도의 선택  Pilate's Choice,Lent Preaching      


 


 


제목 : 빌라도의 선택

말씀 : 마27:15-26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좀 억울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면서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격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으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빌라도는 정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24절에서 빌라도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는 어느 정도 종교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공정성을 기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빌라도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빌라도는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므로 중대 사안에 대한 법적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 정부 즉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게 판단하여 최종결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데 만약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사형언도를 해야 하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23절에 보면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하고 있고 또 요18:38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중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조금 애를 썼다고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옳지 않은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 진리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빌라도의 이 옳지 않은 결정을 보면서, 그래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라도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빌라도는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의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빌라도를 향하여 아우성을 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역자를 살려두면 당신은 로마의 충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빌라도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슨 큰 폭동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그러면 치안상태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이었습니다. 출세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라도는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사람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 육신의 소리, 유혹의 소리를 뿌리치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 다 뿌리쳐 버리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때로는 어떤 때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때에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빌라도는 진리의 소리를 작은 소리라고 무시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빌라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그의 아내를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고 소수이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옳지 않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항상 요란하고 커다란 소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는 좁은 길에, 작은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소수의 소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먼저는 산을 흔들만한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작고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만한 가냘픈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힘들어 하실 때 아주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리하여 네 배고픔을 해결하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보여주라. 그러면 너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라는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란하고 요란스런 거짓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커다란 거짓소리를 물리치시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기의 소리에, 명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큰 소리에 파묻혀 그만 진리의 소리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떠들어대든 주님앞에 조용히 엎드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빌라도는 사람들의 큰 소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져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는 롯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떠나라고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창13:9)

여러분,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롯은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하란을 잃고 큰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늙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좋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좋은 땅으로 갔던 롯은 풍요로운 땅에서 잘먹고 잘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땅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다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그 땅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관계를 맺어 모압과 암몬 족속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당장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 갔던 롯은 재물로, 가문의 체통도, 윤리도, 믿음도, 하나님의 유업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듣는 절기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무슨 화려한 소리, 대박이 터지는 소리, 출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커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내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세상의 권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폭동과 관련되어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지위도 빼앗기고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대대로 남은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정말 세상의 크고 시끄러운 소리,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군중의 소리, 부귀영화의 소리, 물질의 소리, 무사안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작은 소리일지라도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진정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으며 생명의 은총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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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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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설교]부활의 생명으로

 

 


제목 : 부활의 생명으로

말씀 : 눅24:30-35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날입니다. 진정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이상 어찌 할수 없을만큼 참혹하고 처절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러나 그 어둡고 절망적인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그 어떤 날보다도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이고 은혜의 날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탄생한 날과도,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더 얻은 날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은혜의 날이요, 큰 축복의 날입니다.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다시한번 깊이 되새기며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시고 살아갈때에 더욱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삶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나 인간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러킁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끊어졌던 생명이 다시 살아난단 말인가? 어떻게 죽어서 썩어 흙이 된 인간이 다시 살 수 있단 말인가하면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살이 찢기시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당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창으로 찌름으로 온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묘지에 장사지내었습니다.

그러나 3일후에 가보니 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안식후 첫날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와 살로메에게 천사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노라고.... 그리고 베드로에게, 제자들에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500여 문도에게 여러번 나타나셔서 함께 말씀도 하시고 함께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함께 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당신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처럼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팔목과 발목에 대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못박혀 있었는데, 더구나 군병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가 다 쏟아져 내렸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I.Q.가 두자리 숫자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다가 11명 모두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자의 밥이 되어, 어떤 사람은 칼에 맞아, 어떤 이는 돌에 맞아,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놓고 부활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바보가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습니까?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온갖 모욕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기에, 그들의 귀로 들었고, 눈으로는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았기에 그래서 그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속된 말로 때려죽인다해도 「예수는 부활하셨다.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런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이 없으면 말짱 헛일입니다. 사랑도 좋고, 선고 좋고, 거룩도 좋지만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그거 다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랑이니 선이니 의니 거룩이니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 윤리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사망권세 억눌려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이러한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혼돈되고 말세가 가까워오면 올수록 진리는 비진리에 의하여 더 많은 도전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앞으로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 질 것입니다.

요즈음 무슨 다빈치 코든지 뭔지 때문에 교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에서는 법원에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소설과 영화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가 결혼을 했고 그 후손들이 지금 살고 있다느니 뭐 이따위 허튼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그림 속에 암호처럼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시온수도회에서 그런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지만 아직 그들중 일부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소설과 영화 속에 무슨 역사를 들먹이며 교묘하게 역사성이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말하고 있으나 다 허구입니다. 교묘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역사에 대입시켜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마귀의 장난인 것입니다.

또 며칠전에 뉴스에 보니까 유다복음서가 공개되었는데 이 복음서는 성경에 있는 복음서의 내용과 다르게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하여 그렇게 했다고 해서 교계에 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허튼소리입니다. 정통 신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쓴 책입니다. 영지주의란 신비한 영적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물론 당연히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절대자의 신령한 영으로 오신 분으로 그 예수님과의 신비한 영적인 교통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이단사설에 불과합니다. 그저 인간의 철학일뿐이지요.

여러분, 복음서가 성경에 있는 사복음서만 있는게 아닙니다.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요셉복음등 등 성경외의 많은 복음서와 많은 서신서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구약성경외에 많은 성경과 비슷한 문서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것은 가짜이고, 어떤 것은 이단자들이 쓴 것이고, 어떤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읽어도 별 문제는 없으나 성경에는 미치지 못하는 문서들입니다. 이러한 문서들은 거의 성경과 동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진리와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소리에도 현혹되지 마세요. 세상의 다른 어떤 소리에도 귀 기울지말 고, 여러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도 맡기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누가 뭐라고 현혹한다해도 오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정녕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를 다시한번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바로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낙심중에 낙향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새로운 희망과 소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된 두사람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 즉 글로바라는 사람과 이름을 알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제자가 예수님을 참혹한 죽음속으로 보낸 뒤에 좌절과 실의속에서 터덜터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아주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능력 많으신 스승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다른 모든 고통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심지어는 죽었던 사람까지도 살리는 이분이라면 능히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의 기대는 십자가 앞에서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권능 있으셨던 주님이 그만 로마 병정들에게 온갖 조롱과 희롱을 당하시면서도 저항한번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침을 뱉아도, 채찍으로 내리쳐도, 가시면류관을 씌워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참을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온갖 희롱과 조롱을 퍼부어대도 주님은 그저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엇습니다. “어이, 자네가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면서. 한번 지금 그 힘을 발휘해 보시지. 아니, 자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한번 너 자신을 먼저 구원해 보시지 그래. 자기도 못 구하는 주제에 남을 구하겠다고. 정말 웃기는구먼.”

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이봐, 남은 구원해 주었다며 자네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뭐,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럼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래. 그럼 좋아, 지금이라도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럼 우리가 믿어주지.” 그러나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그냥 매달려 계셨고, 끝내는 그 십자가위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메시야라고 여겼던 예수,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여겼던 예수, 이 가난과 압제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믿었던 예수, 그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제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실망과 좌절속에서 힘없이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망과 좌절 속에서 낙향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찾아가셔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러자 글로바는 기가 막혀서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근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모른단 말이요?」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느냐?」

글로바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일이오. 그는 권세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고, 엄청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병과 죽음에서 구해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엊그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소.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는 줄 너희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더냐?」라고 하시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에 관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들의 심령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불신으로 얼어붙어 있던 그들의 마음속에 어디선가 한줄이 빛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의심의 안개도 걷혔습니다. 내가 너희위하여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났습니다. 결국 바로 자신들과 이야기하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단 말이오, 우리가 엠마오로 가다가 그분을 보았소,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야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소.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소.」 그리하여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때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감당해 나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형벌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과 저주와 고통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그 저주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과 실의와 좌절과 불안과 공포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과 절망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날, 다시금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심으로써 모든 죄의 권세를 벗어던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현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오직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보혈로 온전히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사망 권세를 보기좋게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그 부활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좌절하게 하던 모든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영원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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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별 설교] 사순절 예배 설교  / Lent Worship Preaching               
 

 

 

 

시험당하신 예수님(마 4:1-11)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 공생애를 시작하심에 앞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주님께서 인간과 동일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이러한 시험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러 형태로 항상 존재 합니다. 주님이 당하신 시험의 유형에 대해 살펴봄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① 물질로 유혹했습니다(3절) -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물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약점을 알고 성도를 유혹합니다. 이에 주님은 나그네로 잠깐 머무는 이 세상에서의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하나님께로 온 영적 양식을 취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요 6:27). 자녀가 무엇이 필요한지 그 부모가 알듯이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자녀된 성도의 필요를 모르시겠습니까? 따라서 성도는 물질로 인해 받는 시험을 주의 말씀으로 물리쳐야 하겠습니다(4절).

  ② 세상 영광으로 유혹했습니다(5,6절) - 사단은 오늘도 우리에게 현실과 조금만 타협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기와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6:24). 이처럼 세상의 영광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벧전 1:24).

  ③ 세상 권세로 유혹했습니다(8,9절) - 사단이 보여 주는 세상의 권세는 너무나 위대하게 보입니다. 사단은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증거처럼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늘 백성으로 영원한 권세를 가진 자로서 어찌 그것을 하찮은 세상의 권세와 바꿀 수 있겠습니까?(계 2:25,26)

 

  주님은 이 모든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승리는 이미 사단을 이기신 주님을 의지할 때만 가능합니다. 항상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빌 4:13).

 
 

   마라의 교훈(출 15:22-26)  

 

  마라란 '쓴물'이란 뜻으로 광야 여정 중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난 오아시스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물은 너무 써서 아무리 목마른 백성이라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마라에 이르게 하셨을까요. 백성을 마라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인생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마라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 사람이 사는 인생은 고행(苦行)이라 할 만큼 우리의 인생에는 마라와 같은 시련과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시련은 세상 사람의 삶 속에는 물론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의 삶 속에도 존재합니다.

  ②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됩니다(25절) - 하나님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라의 쓴물을 맛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또다른 축복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마라의 쓴물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③ 마라의 극복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26절) -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무릎꿇고 기도했을 때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간단히 바꾸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 모든 문제는 이렇게 쉽게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고난을 극복하신 후에 온전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주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 과정입니다. 그의 뜻 안에서 온전히 연단되어 축복의 단물을 마시는 우리가 됩시다(벧전 1:7).

 
 

   고난의 유익(롬 8:17)  

 

  사람들에게 있어 고난은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유익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고난은 우리에게 화가 아닌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럼 고난이 인생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고후 12:9) -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지만 마음이 굳어져 버린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은 이러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며 그러한 연약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합니다.

  ② 하나님을 의뢰하게 됩니다(고후 1:9) - 인간은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인데도 교만하여 스스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고난은 이러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여 절대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바라고 의뢰하게 합니다.

  ③ 장차 올 영광을 생각케 합니다(롬 8:17) - 성도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로하심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위로는 이땅에서의 삶은 나그네의 삶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는 성도에게 있어 고난은 슬픔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에의 참여인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예비된 영광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닫고, 그분을 의지하며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가 됩시다.
 

   고난을 기뻐한 바울(고전 15:31; 갈 6:17; 골 1:24)  

 

  각 교회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는 고난받으셨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도 바울의 눈물어린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바울은 고난의 길이라도 기뻐하며 나아갔습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을 통해 동일한 제자의 길을 가는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봅시다.

 

  ① 나는 날마다 죽었노라(고전 15:31) - 바울은 매일의 삶 속에서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우리의 죄악된 성품과 세상적인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②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 바울은 예수의 흔적, 즉 진리의 증거함으로 오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며 그를 온전히 좇아가는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③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신에 채우노라(골 1:24) -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도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그러한 바울에게 주님은 넘치는 사랑과 위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은 그에게는 차라리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혹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그 고난의 길은 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영광이나 바울의 영광이 고난 뒤에 온 것임을 기억하며 고난을 이기는 자가 됩시다(벧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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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제목: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본문:마 7:13,14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물 한방울을 자신의 손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습니다. 우주의 지혜를 바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이 물한방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바다에 비해 물한방울과 같은 그 지혜를 가지고 어떻게 성공하셨습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세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자신의 생활을 즐길 것, 세 번째는 삶의 여유를 가질 것 등 이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자신의 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삶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깊이 성찰해보지 못하고 그저 감정과 세파 속에 휩쓸려가기 쉽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주방기구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한 후 유명해 진 미국의 성공철학자 지그 지글라(zig ziglar)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①정직한 사람 ②인격이 좋은 사람 ③성실한 사람 ④신념이 강한 사람 ⑤충성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세계에서 가장은 많은 강연을 한 인물로 20세기말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경영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통하여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은 그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①주도적이 되라 ②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③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④상호이익을 추구하라 ⑤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⑥시너지를 활용하라 ⑦심신을 단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공의 비법이 어디 있다고 여기십니까?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단언코 믿음과 노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앞서 말씀드린 것들도 다 성공을 위한 중요한 요건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믿음과 노력이 없다면 그 위대한 것도 이루어낼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낸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으며, 설령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성공하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인간적으로 인내하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언가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의 일이나 무언가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피나는 노력을 투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매맞고 주리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힘써 결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몇 번씩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핍박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수함으로 주님의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은 이만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전구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노아 웹스터라는 사람은 웹스터사전을 집필하기 위해 36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두 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시인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시를 보통 99번씩 다듬어 완성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은 무려 10년의 세월에 걸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인생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위인이라고 불리거나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좁은 길을 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험하고 힘들어서 가기 어려운 좁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서 정말 올바르게 성공한다는 것도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일부러 골목길을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넓고 평평하게 잘 닦여진 고속도로로 다니지 말고 일부러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대로로 가지말고 음침한 골목길로 가라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씀입니까?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길을 그저 가기 쉽다고 아무 길로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하기 쉬운대로, 마음에 끌리는대로, 무사안일하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힘든 길이라도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옳은 길, 바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간섭하는 것이 성가시고, 마음에 부담이 가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진리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된 본성 때문에 그 길이 결코 가기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포기하고 그저 편하고 무사안일한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러나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좁은 길은 무엇이며, 넓은 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길을 가야만하는 것입니까?

1. 넓은 길은 육신에 이끌려 자기 마음대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13절의 말씀을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고 넓은 길은 그저 육신의 이끌림을 따라 대강대강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편한대로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길입니다. 그저 죄된 본성의 욕구를 따라 가면되는 길을 말합니다. 사람의 통제나 제재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간섭도 거부하며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가는 길을 말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입니다. 세상물결 흘러 가는대로 적당히 따라 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저 육신이 요구대로 살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않습니다. 죄된 본성의 요구에 따라 때로는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자기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편한 길이겠습니까? 그것이 자유를 누리는 길이겠습니까? 물론 당치 않은 말입니다. 그것은 편한 길도 아니고, 자유의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대로 놀아나는 길입니다. 편하고 좋고 자유로운 길 같지만 그 길은 결코 자유로운 길이 아니라 죄의 노예된 길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결국은 죽음의 길일 따름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뱀의 속삭임에 유혹되어 아담과 하와가 갔던 길인 것입니다.

어느날 뱀은 하와를 찾아가 속삭였습니다. 정말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자 하와가 그렇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은 다시 말합니다. 아니다.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자 하와는 점점 뱀의 꾀임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보니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결국은 죽음과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괞찮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 편한대로 해라. 네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하라.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네 인생 네가 네 뜻대로 살아라. 왜 간섭받고 사느냐? 자꾸만 이래라, 저래라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없다. 그들은 너를 얽어매려고 한다. 너는 자유인이다. 그러니 네 마음에 편한대로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한 사단의 소리입니다. 사단의 소리가 별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역하면 그게 곧 사단이요, 적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6:24절에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또 눅8:21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내 모친이요,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좁은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요구에 충실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을 길로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셨던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실때에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좁은 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하는데 너희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길이 뭡니까?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하나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길은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하게 생명으로 통하는 하나밖에 없는 외길이기에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여러 군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예수님 밖에 없는 외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또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12절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딱 하나입니다. 곧 예수님만이 생명의 문이요, 구원의 문이요, 영생의 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은 많다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굳이 외길만 고집할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남쪽에서 올라가든 북쪽에서 올라가든 아무데로나 올라가도 정상에 올라가기만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나름대로 신을 찾아 올라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소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탄의 소리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소리가 사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라고 하는데 둘이라고 하면 그것이 사탄의 소리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보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사람의 소리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사람이 연구해보니까, 내가 도를 닦아 보니까 그런 것처럼 보이더라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미 예언되어 있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대로 이땅에 오신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만이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고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주장하는 넓을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인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오직 한길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그 좁은 길은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실때에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두번째로 좁은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저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것도 쉽습니다. 죄된 인간의 본성에 따라 대강대강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세상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죽은 삶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 갑니다. 그러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힘차게 거슬러 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인생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길은 결코 녹녹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죄와 무지로 오염된 심령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의 대세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조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치와 이상과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길은 간섭받아야 하고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때로는 알기는 알면서도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우리를 자꾸만 다른 길로 내 몰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진리만이 가득하다면 저절로 진리의 길로 가겠는데 우리 안에 비진리가, 거짓된 것들이, 죄된 것들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것들이 들어있어서 우리를 자꾸만 그 길로 이끌어가려고 하니까 그것들과 싸우느라고 힘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길이고, 좁은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대 사도도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협착하다고 하셨습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어떤 제재를 받는 답답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육신의 요구와 생각과 세상에 보이는 것을 따라하면 쉽겠는데 그것들을 부정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좀 힘이들고 답답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려고 하니까 물질적으로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도 내 혈기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의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희생해야 하고,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 안되고, 힘이 들고, 그래서 가기가 어려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길이 비록 좁을 지라도 가야하고, 답답해도 가야하고, 손해를 봐도 가야하고, 희생을 당해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손해를 보아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만이 진정한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리의 길은 결코 다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둠과 연약함과 무지함 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정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전한 진정한 성공자도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생명을 원하신다면 다수가 가는 길을 좇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신다면, 우리가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면, 더욱이 여러분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기를 원하신다면 진리 편에 서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편에 서 계시기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면 열심히 좁은 길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을 부인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여 생명을 향하려 세상의 조류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모두 세상적으로나 하나님나라에서나 진정한 성공자가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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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예수님의 전도방법

 

 

 

말씀 : 예수님의 전도방법

제목 : 요4:1-5

어느 날 목사님이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전도에 대하여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자 한 집사님이 말했다. “목사님, 우리는 지혜도 부족하고, 말씀도 잘 모르고, 성령의 능력도 부족해서 전도를 잘 못합니다. 그런 일은 아무래도 목사님이 전문가시니까 목사님이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다. “양이 새끼를 낳지 목자가 새끼를 낳는 것 보았습니까?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해 주면 양들이 안전하게 꼴을 먹으며 성장하게 되고 그러면 자기들끼리 새끼를 낳아 양무리가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목사는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님도 전도를 하셨는데 감히 누가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전도는 목사만 하는 일이 아니라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할 가장 막중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왕도는 없다. 전도에 대한 분명한 사명감 가운데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기도하며 가르침을 받으며 훈련하며 하나씩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전도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보았다. 오늘부터는 전도의 실제적인 측면으로 여러 가지 전도의 방법들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전도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배워보자.

1.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

예수님의 전도사역을 압축해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두군데 있는데 그것은 마4:23절과 9:35절이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즉 예수님은 가르치심과 전도와 병고침을 통하여 전도사역에 힘쓰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은 기도나 하시면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복음전파와 가르침과 병고침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직접 복음을 전하시는데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직접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냥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하셨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였으면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되 한편으로는 직접 복음을 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일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자.

2.사람들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셨다.(1-3)

오늘 본문 요4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한 여인을 주님품으로 인도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1-3절에 보라.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제자들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이 바리새인들이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셨다는 말씀이다. 왜 그러셨을까? 한마디로 지금은 다른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변론하거나 충돌하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보면 이렇다. 당시 세례요한은 갈릴리지역을 통치하던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를 삼은 것에 대하여 부당함을 말하다가 헤롯에 의하여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유대인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서슴없이 독설을 퍼붓곤 했기 때문이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니까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자기들의 노력 없이도 다른 사람에 의하여 제거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세례요한이 제거되어 좋아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정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하나의 정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세례요한보다 더 강력한 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들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아직은 이들과 불필요한 마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에 갈릴리로 가시기로 한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는 가급적 세상의 일반 대중이나 지도자나 통치자들과 가능한 마찰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찰이나 갈등이나 대립관계는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고,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저 좋은 게 좋다고 그들과 어울려서 적당히 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아닌 것은 아니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정말 지혜가 필요하다. 자칫 그들과 갈등이나 대립 관계가 되면 복음의 역사에도 지장을 받게 되고, 공연히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분명히 선을 그을 부분은 긋되 협력해야 할 부분은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건전하고 유익한 일에는 우리가 더욱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일이라도 선한 일, 의로운 일, 유익하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결국 우리를 인정하게 되고, 나아가 존경심마져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보다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5:16절에서 말씀하셨지 않는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어떤 영역에서든지 빛된 모습을 가지자. 세상과 갈등하고 대립하고 기피하고 정죄받지 말고 정말 옳은 일, 선한 일, 의로운 일, 정직하고 거룩한 일등을 통하여 세상에서 인정받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자.

3.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를 찾아가셨다.(4,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기피하여 들어가지 않는 사마리아땅으로 들어 가셨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기피하는 이유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리아는 옛날 남북분열왕국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북왕국이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하면서 앗수르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유력한 자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대신에 자기네 나라 사람들과 그들의 정복지에서 다른 많은 이방인들을 사마리아로 보내어 함께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혼인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방인을 죄인으로 취급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남왕국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아주 추하게 여기며 멸시하며 상종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북쪽에 있는 갈릴리를 가려면 같은 나라이면서도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기피하여 서쪽의 해변길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동쪽의 베뢰아 길로 돌아가든지 하여 그 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시되 그냥 가깝기 때문에 가신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로 가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가신 것이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것은 오늘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리아를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통행하여야 하겠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과해야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래서 그 땅으로 일부러 들어가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사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경멸하고 더럽게 여기는 땅이었지만 주님에게만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유대나 사마리아나 갈릴리나 주님에게는 모두가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고 있는 안타까운 땅이었다. 그래서 그곳에도 유대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던 것이다. 아니 단순히 필요를 느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멸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지 말고 그들에게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된다안된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아무리 완고하고 추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혼이나 우리 영혼이나 똑같이 주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 생명이나 우리 생명이나 천하보다 귀한 것은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딤전2:4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세가지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는 예수님은 직접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시되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기도만 하지 않고 발로 뛰셨으며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직접 전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두 번째는 세상과 가급적 갈등관계를 피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히 성별된 삶을 삶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건전하고 유익한 일들을 위하여서는 발벗고 나서서 세상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멸시당하고 소외당하고 추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 영혼과 우리의 영혼이 똑같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으며 복음의 역사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편으로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며 다른 한편으로 선한 일로 사랑의 빛을 비출 때 교회가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복음의 역사도 더욱 힘있게 이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며 힘쓸 때 정말 주님의 복음의 역사가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우리들도 잘했다 칭찬듣고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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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감사의 축복 /Sunday worship preaching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1.감사가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어떤 기독교인 처녀가 불신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는 옛날에 교회를 다니다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못다니고 있지만 결혼하면 즉시 교회에 다니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음에 나가겠다고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결혼 후 얼마 있다가 술을 먹기 시작하는데 거의 매일 술에 취해 밤 늦게 집에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아내도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도 지르고 하여 가정이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가 생겨 부부가 싸울 때마다 아이들은 불안에 떨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을 위해 늘 기도 했지만 그렇게 몇 년을 지나도 변화가 없자 드디어 이혼을 결심하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한 일년만 더 기다려보자며 그 대신 지금부터는 불평이나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남편에게도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성껏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그때부터 마음을 바꾸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그나마 나와 아이들이라도 교회에 다닐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술주정뱅이일지라도 그나마 생활비라도 벌어다 주니 감사합니다. 그나마 일년열두달 365일 계속 술취해 있지는 않고 가끔은 나와 아이들을 생각해 줄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살집과 먹을 것이 있고 이 아이들을 통하여 희망을 갖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많은 조건들을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선은 아내 자신이 살 것 같았습니다. 남편 때문에 늘 답답하고 화가 나고 속이 부글거리며 화병이 날 것만 같았는데 그 후로는 마음이 한결 평안해졌습니다. 또한 큰 소리가 그칠 날이 없던 집안이 평안해지고 그러자 툭하면 엄마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바람에 불안에 떨던 아이들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웬수같이 여겨지던 남편도 점점 측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어디 가는 거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디 가는지 잘 아시면서 뭘 새삼스럽게 물으세요?”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나도 교회가면 안될까?” 아내는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니 여보, 안되다니요? 되고 말구요. 우리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 이런 술주정뱅이에다가 맨 날 당신 속만 지긋지긋하게 썩이고, 아이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이런 못난 사람은 하나님이 받아 주실까?”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셔서 심지어는 살인강도도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다 받아 주세요.”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이 술주정뱅이로 아내의 속을 다 썩게 만들었던 남편이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우선은 자신을 살게 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에게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물론 옆사람에게도 행복 바이러스를 퍼지게 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 복이 오고, 은혜가 임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후4:15절을 보십시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감사가 있는 곳에 더욱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정말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충만한 삶이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함으로 정말로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감사는 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정한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같은 것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에 더욱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욕심과 욕망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속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누려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그 삶에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그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이미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과 육과 혼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은혜를 맛보며 전인적인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하면 더욱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게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더 주기는커녕 이미 주었던 것마저 확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눅19:24~26절을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준 것도 아까워 준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었는데도 감사할 잘도 모르고 자꾸 불평불만이나 한다면 준 것이 아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준 것도 빼앗아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갈 때에 준 사람도 기쁨이 있고 준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더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잘돼도 감사, 안돼도 감사. 형통해도 감사 불통해도 감사. 돈이 많아도 감사 없어도 감사, 내 마음 내 뜻대로 되어도 감사 안되어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감사하며 사는 자들에게 채워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가정이 잘 되고, 직장이 잘되고,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감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헤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감사할 때 물질의 복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일만 생깁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사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마귀가 자꾸만 지금은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속삭여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복을 쌓는 일이요, 그게 은혜를 쌓는 일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강조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우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난 상반기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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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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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부활절 주일예배 설교

 

 

 

 

제목 : 부활의 능력

말씀 : 고전15:12~15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만이 참종교의 조건입니다. 제아무리 고상하고 수준높고 지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철학적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없으면 헛일입니다. 영원한 생명, 이게 있어야 진짜고 이게 있어야 생명이 있는 종교이고, 이 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이란 고린도교인 중에 일부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물론 다 부활을 믿으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안 하십니까? 여러분,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에 누누이 예언되었던 사실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일입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리고 물론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28: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대로, 예수님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걸 믿으셔야 합니다. 이걸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게 없으면 제아무리 고상하고 깨끗하고 선하고 능력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빈 쭉정이입니다. 생명이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와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는 사망과 마귀사탄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려 버리고 승리하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사망권세보다 큰 권세가 없습니다. 사망은 모는 것을 삼켜버립니다. 사람은 물로 돈도 권세도 과학도 삼켜버립니다. 지식도 능력도 아름다움도 젊음도 사랑도 모조리 삼켜 버립니다. 제아무리 잘나도 똑똑하고 지식과 권세가 있어도 사망권세 앞에 대항할 자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세를 가졌다해도 사망권세가 한번 내리치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힘이 대단합니다. 미국의 무인우주선이 시속 약2만km로 약4개월 동안 비행하여 화성에 착륙하여 사진을 지구로 전송하고 있다니 참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심지어 마음만 먹는다면 복제인간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니까 인간이 참 대단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능력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입니다. 아무리 수억 수조 Km를 날아가는 우주를 탐사해도 생명과 죽음의 문제는 속수무책입니다. 제 아무리 인간이 기술이 좋고 과학이 발달해도 쌀 한 톨 만들어 낼 수 없고, 하찮은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생명체를 가지고 어떻게 조금 변형시키고 장난을 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명을 창조할 수도 없고,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죽었고, 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도 죽음 앞에서는 쪽도 못썼습니다. 그밖에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나 그 어떤 유명한 과학자나 정치가나 사상가나 영웅호걸이나 할 것 없이 죽음 앞에서는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망권세 억눌려 있으실 수 없었던 주님은 사망 권세,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사망의 권세,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시는 생명의 주가 되심을 만천하에 명백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전에도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소녀야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자 죽은 소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며 잔잔하라고 말씀하시자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이런 모든 사건들은 그 분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어둠의 권세, 악의 권세를 이기는 유일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 모두가 죽음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승리의 보장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인류 최대의 적인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 우리에게 어떤 승리인들 못 가져다주겠습니까?

여러분, 눅11:21,22절을 보십시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여기서 앞의 강한 자는 사탄입니다. 뒤의 더 강한 자는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인류의 범죄이후에 마치 사탄이 우리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 육신과 물질과 시간과 능력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며 제멋대로 사용하도록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능력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사탄이 제멋대로 사용하던 것들을 빼앗아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모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우리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삶으로 원위치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떤 시험과 유혹이 오든지 고난이나 핍박이나 가난이나 어려움이나 그 밖에 그 어떤 어둠의 권세가 대들든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8:35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그런 것들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지킴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가장 강한 자를 이기신 예수님, 그래서 완전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신데 우리가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낙심하고 절망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물리치신 예수님,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신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심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힘든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물질이 부족해도, 혹시 육신이 좀 건강치 못해도 혹시 자녀가 뭔가 좀 문제에 직면해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원망 불평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활의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그 부활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 모든 승리가 있는데, 예수님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는데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낙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평 불만 원망 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분명히 승리가 있는데, 예수님 안에 분명히 생명의 은총이 있는데 우리가 소망과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자 아닙니까?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망과 위로과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요, 소망일 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자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능력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866년 글래스고우 대학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적인 활동을 한 데이빗 리빙스턴 목사님께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학위를 받기 위하여 강단으로 나오는 리빙스턴 선교사는 갖은 고초로 겉모양은 수척 할대로 수척해져 있었고, 사자에게 물린 왼팔은 제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선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감사와 기쁨으로 힘 있게 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아프리카에서 지낸 세월을 희생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그저 조금이나마 갚으려 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미력하나마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저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걸 어찌 희생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맹수와 질병과 혹독한 기후와 야만인 가운데서 지금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저 감사할 것 뿐이었습니다.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나는 다시 아프리카로 갈 것입니다. 거기가 내 삶의 자리이고 거기에 내 인생의 보람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헌신하다가 60세의 나이에 아프리카의 한 오지의 자신의 방에서 기도하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쁨과 보람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백한 대로 부활의 주님을 믿었고 그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로 그리고 주님앞에 설 날에 대한 소망으로 그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에게는 분명 이런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16:2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염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다시 볼 것이다. 즉 부활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기쁨을 찾을 것이요, 그 기쁨은 그 아무도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었을 때 감사와 기쁨으로 제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그런 승리를 주셨습니다. 죄로부터 건져주시고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심으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모든 상황 모든 환경 모든 여건 속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며 감사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새롭게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셔 들이고 부활의 주님과 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능력과 소망과 위로 가우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런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어둠과 모든 약한 것들과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과 그 밖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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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제목: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말씀: 암 9:1-15


아모스서의 말씀을 읽으면 심판과 징계의 하나님이 무섭고 가혹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특히 9장 1-5절 말씀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은 섬뜩하기마저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무섭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본 마음은 죽이고 멸망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죄의 속성을 정확히 아시기에 죄를 절대로 용납하실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죄에 엄격하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절대로 적당히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악함과 죄와 더러움의 껍질을 벗기시기 위해 체질하시며 연단하십니다. 9절에 이러한 하나님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입니다.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에 하나님의 속마음이 묻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11-15절 말씀처럼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날에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다시 회복시키고", "그들이 만국 백성을 기업으로 얻게 하겠다."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나 쉽게 포기하곤 합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징계하시기는 할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내 생각, 내 기준으로 마음대로 단정 짓고 포기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 때로는 징계하고 경고하면서도 회복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 이 마음으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품을 수 있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향해 꿈을 가지고 계시고 한 번도 그 꿈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신데 나는 그 꿈이 희미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대충, 살아지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요동칠 때가 있다. 현재의 내 모습, 현실 상황에 메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힘을 내야겠다. 사춘기 딸아이를 바라볼 때도 오늘의 말씀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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