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리가 필요한 이유

 

 

 

1. 이단(異端)의 극복         
 

성경적이지 못한 ‘다른 복음’(갈 1:6-9)을 가려낼 수는 지침으로서 필요하다.
 

2. 신앙 성숙         
 

성경 진리의 조직화는 성숙한 사고와 바른 행동을 가능케 한다.
 

3. 성경의 건전한 연구         
 

성경의 전체 맥락 속에서 상호 유기적인 성구들을 관련시켜, 연구할 때 편향적 성경 해석에 따른 오류를 배제할 수 있다.
 

4. 인간 본성과의 조화         
 

성경의 체계적인 연구인 교리는, 유기적으로 사고하며 지식을 통합하여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성과 합치된다.
 
 
5. 전도         
 
논리적 사고 구조를 갖고 있는 불신자들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필수적이다.
 
 
6. 교회의 기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딤전 3:15)는 성경적 진리의 수호를 위하여 일관되고 통일성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한다.

 

2.기독교 진리의 인식 과정
 

1. 인식의 원천-하나님
 

불완전한 인간이 아닌 완전자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만이 구원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원천이실 수 있다(고전 8:6).
 

2. 인식의 통로-하나님의 계시
 

죄인된 인간은 거룩하시며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없고,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능동적으로 진리를 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계시를 통해서만 구원 진리의 인식이 가능하다(요 5:39).
 

3. 인식의 창-이성과 신앙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객관적 진리는 인간의 주관적 수납으로써 그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 종료된다.
 
물론 인식의 과정에 있어서 이성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죄로 오염되어 영적 분별력이 크게 약화된 이성만으로는 진리의 수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이성적 활동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신앙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이는 반(反) 이성적이 아니라 초(超) 이성적이라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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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해야하는 이유?

 

 


 

1.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도의 일에 성공하신 비결을 깨닫게 해 줍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1:14,35]

 

2. 기도는 초대 교회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빌기를 다하며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4:31]

 

3.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고백하게 해줍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40:1,4]

 

4. 기도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도록 해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5:14]

 

5. 기도는 환상을 보게 해줍니다.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행11:5]

 

 

6. 기도는 닫힌 문들이 열리게 해줍니다.

"기도를 항상 힘스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골4:2-3]

 

7. 기도는 사단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엡6:12, 18]

 

8.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합니다.

 "이러함으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3:14-16]

 

9. 기도는 담대히 전도할 힘을 가져다 줍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엡6:18-19]

 

10. 기도는 지혜를 가져다 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1:5]

 

11. 기도는 염려를 평강으로 바꾸어 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12. 기도는 기쁨이 충만하게 해줍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13. 기도는 과실을 맺게 해줍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5-7]

 

14. 기도는 성도를 성장하게 해줍니다.

"간구할 때 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1:4-6]

 

 

 

15. 기도는 새로운 주의 일꾼들이 일어나게 해줍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 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하라 하시니라" [마9:37-38]

 

16. 기도는 부흥을 가져다 줍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대하7:14]

 

17. 기도는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기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라" [시2:8]

 

18. 기도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

 

19.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15:8]

 

20.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립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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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십자가

 


요한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인류를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기도로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이 어떤 분이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럼 구원의 유일한 문이요 길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이름


요한 1/17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
(For the law was given by Moses, but grace and truth came by Jesus Christ.) kjv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스'(Jesus, 지저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의 단축형 '예슈아'의 헬라어 형태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 '여호수아' 속에는 하나님의 성호 네 글자 야훼(YHWH)가 축소되어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인 YHWH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으나 보통 '야훼' 또는 '여호와'로 발음합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 또는 '여호와는 도우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주체요, 모든 도움과 은혜의 주체적 행위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의 영이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는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요한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마가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을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한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

 

로마서 10/13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이 시행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능력을 받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 언어(방언)를 말하며, 악한 것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을 안수하여 치료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 이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나의 구원주로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2.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구세주 그리스도(메시야)입니다.


구약시대 4000년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형벌 기간으로 죄와 율법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인류에게 보내 주셔서 온전한 구원을 이룰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의 뿌리들에서 한 가지가 자랄 것이라. 주의 영이 그의 위에 머물리니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획과 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이라.

 
다니엘 9/25~26 그러므로 알고 깨달으라.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칠 주와 육십이 주가 될 것이요, 그 거리와 그 성벽이 재건되리니 곧 고난스런 때들이라.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 장차 올 그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과 성소를 파괴하리니 그 끝은 홍수로 뒤덮일 것이요, 그 전쟁의 끝에는 황폐함이 정해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뿌리로 하여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실 것을 예언했는데 마태복음 1장에서는 자세한 족보를 들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의 영'(성령)이 그에게 강림하심으로써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이상세계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인 메시야가 활동하고 죽는 시기까지 예언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어 주셔서 그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자를 치유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이라.

 
누가 23/3 빌라도가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니,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라고 하시니라.

 
히브리서 4/14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

 
마태 21/11 그 무리가 말하기를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선지자 예수시라"고 하더라.

 
하나님 영이 강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자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기름이 성령을 상징함으로 구세주를 그리스도(Christ, 기름 부음 받은 자, 헬라어) 또는 메시야(마쉬아흐, Messias, 기름 부음 받은자, 히브리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에서 기름 부음 받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자,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이자, 말씀을 전하는 선자자(대언자)의 역할을 모두 하셨습니다.

 
미가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

 
누가 2/4~7 요셉도 갈리리 나사렛 성읍에서 유대 다윗의 성읍, 즉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가니 (이는 그가 다윗 가문의 계열이기 때문이더라.) 그가 자기와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녀는 아이로 인하여 배가 불렀더라.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그녀가 해산하게 되었더라. 그리하여 그녀가 자기의 첫아들을 낳아 그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이니, 이는 여관에 그들이 들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
 

미가 선지자는 유다의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통치자가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유대인 요셉이 로마황제의 명령에 따라 조세 등록을 위해 갈릴리 나사렛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음으로써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2/11 이는 다윗의 고을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분은 주이신 그리스도시니라.
(For un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ur, which is Christ the Lord.) kjv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주위에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나셨는데 그분은 주(主)이신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끌어 주는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구주(救主, Savior, 구세주, 구원주, 구원자) 또는 주님(the Lord)으로 불립니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라.
 

마태 1/18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러하니라. 그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동침하기 이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그녀에게 나타났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한 처녀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표적(sign)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징표입니다.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는데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예언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약혼)한 사이였지만 동침하기 전에 임신을 했습니다.

 

마태 1/20~21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너 다윗의 아들 요셉아, 마리아를 네 아내로 삼는 일을 두려워 말라.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녀가 한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주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니라.

 
이에 요셉이 파혼하려고 하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마리아와 결혼했고, 마리아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이름을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해 줄 것이기 때문에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여호와)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15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
 

벧전 1/19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인간 유전이 아닌 처녀 상태에서 성령의 잉태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담의 원죄를 상속 받지 않고 하늘이 주신 깨끗한 몸으로 오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나셨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갈 흠 없는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낳으시며,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53/5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것을 암시하는 구절로 우리 죄를 대신해 고통을 받으실 것을 예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악으로 몸이 상하셨고, 이를 믿는 사람은 저주에서 벗어나 치유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초림에 관한 구약의 예언 48가지를 성취하셨는데, 이는 확률적으로 우연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정확히 성취한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란 가장 큰 증거입니다. 이밖에 예수님이 하신 진리의 말씀, 그가 행한 다양한 기적, 십자가 죽음 이후의 부활과 승천 등도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대표적인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로부터 오실 것이다(민 24:17-19). 
•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될 것이다(창 12:3 ;17:19, 민24:17). 
•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다(미 5:2). 
•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다(사 7:14). 
•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는 상세히 예언되어 있다(단 9:25). 
•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선두주자에 의해서 선포될 것이다(사 4:3-4). 
• 메시야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사 9:6). 
• 그는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보내실 것이다(호 11:1). 
• 그는 고난을 받고 속죄를 이루실 것이다(사 53장). 
• 그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다(슼 9:9). 
• 그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쓸개즙과 식초가 주어질 것이다(시 69:21). 
• 그의 뼈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시 43:20). 
• 사람들은 그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하여 제비를 뽑을 것이다(시 22:18). 
• 그는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된 어떤 말들을 할 것이다(시 22:1). 
•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질 것이다(시 16:10). 
• 그리스도는 친구에 의해 배반당한 것이다(시 41:9). 
• 그는 은 삼십에 팔릴 것이다(슼 11:12). 
• 그는 거짓 증인에 의해 모함받을 것이다(시 35:11). 
• 그는 침 뱉음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맞을 것이다(사 50:6). 
• 그는 이유없이 미움을 받을 것이다(시 35:19). 
• 그는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이다(시 22:7,8).

 

 

 
3.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각 시대마다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데 그 계명을 지키면 구원 받고, 지키지 못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아담과 이브 때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계명(명령)을 주셨고, 노아 때는 방주를 짓고 타라는 계명을 주셨으며, 모세 이후에는 율법과 제사법을 주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법, 즉 인류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누가 5/37~38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망가지리라.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부어야만 하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는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지,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 부대가 터져 못 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낡은 가죽 부대는 구약시대, 새 가죽 부대는 신약시대, 헌 포도주는 율법, 새 포도주는 생명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이전 시대의 법인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 6/68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나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영생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Eterner Life)으로 죽었던 우리 영이 살아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구약 시대에는 영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의 계명에 관한 율법과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법밖에 받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영의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 그럼 구약 시대의 율법과 제사법이 신약 시대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a) 형식에 얽매었던 육적인 제사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는 경배(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요한 4/24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 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
(God is a Spirit :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kjv


 사마리아 여인이 꼭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 살아 났기 때문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드리며 영광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제사(offering)는 신께 헌물을 드리는 의미가 있지만 경배(worship, 예배)는 신을 공경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신약시대에는 영이 살아 났기 때문에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화하듯이 기도로써 우리의 소원을 말하면 아버지가 자녀의 소원을 들어 주듯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영이 죽었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구하기는커녕,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에 급급했었습니다.

 

b) 육신에 관한 율법이 영에 관한 생명의 말씀으로 바뀌었습니다.
 

율법은 육체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주신 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인데 우상 섬기지 말고, 살인, 간음, 거짓말,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육신에 관한 법으로 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영에 관한 진리 말씀이 바로 생명의 법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Ⅰ)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모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종류가 613가지나 되어 외우고 실천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 중에는 안식일법이나 제사법이나 정결례 같은 지키기 까다로운 법도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모두 지키기도 어렵지만 모든 율법을 지켰다 하더라도 영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요한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신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멸망(심판, 지옥행)하지 않고 영생(구원, 천국행)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이자, 나의 유일한 구원주임을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 5/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


요한 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6/48~51 나는 그 생명의 빵이라.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그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고 하시니라.

 

마태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과 같아서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들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나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실체가 말씀이니 예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이자 진리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믿어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신앙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Ⅱ)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22/37~3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며, 큰 계명이니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가장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나라 나의 마음과 혼과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늘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의지하며 사랑해야 죄와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합니다.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가까운 사람 뿐만 아나라 불우한 이웃들까지 사랑해 도우란 것입니다.

 
출애굽기 21/23~25 만일 어떤 피해가 따르면 그때는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상처는 상처로, 매질한 것은 매질한 것으로 갚을지니라.

 

마태 5/44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구약시대에는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그대로 갚아 주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나의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잘해 주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내게 해를 끼치는 원수를 미워하지 않기도 힘든데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원한은 나를 악하게 만든다는 걸 생각할 때 오히려 원수를 불쌍히 여기고, 더 이상 죄 짓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진정한 영의 사랑은 육신의 감정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육신의 사랑은 외모나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좋아지고 시간이 지나면 싫증나며 여러 이유로 실망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거룩하고 숭고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인내하고, 친절하고, 온유하고, 시기 질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예의 바르며, 화내지 않고, 선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바라고 믿고 참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점점 미움과 시기와 타툼이 심해지고, 이혼율이 높아가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하거나 이기적이지 않고, 선한 진리와 겸손과 인내와 믿음과 희생으로 다져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Ⅲ) 내게 죄 지은 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18/21~22 그때 베드로가 주께 나와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일곱 번까지라고 말하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하노라.

 

누가 17/4 그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죄를 짓고, 또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돌아와서 '내가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를 용서하라."고 하시더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 보니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또한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자신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한(잘못했)다고 말하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형제가 내게 행한 죄에 대해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마태 18/33 내가 너를 가엾게 여김 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그 이유를 마태 18/23~35 에서 빚 탕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의 큰 죄(빚)를 은혜로 용서(탕감)해 주셨는데 우리가 형제의 작은 죄(빚)를 용서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구원 받은 자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야 계속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마태 6/12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았는데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사울왕을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랬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도 악행을 반복하던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로마서 12/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고 하였느니라.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벧전 2/21~23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한 본을 남겨 놓으시어, 너희로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짓지도 아니 하셨고, 그 입에는 간사함도 없으셨으며,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셨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다시 위협하지 아니하셨으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는 분께 자신을 의탁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악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에 대해 악으로 대항하면 악에게 지는 것이고, 악에 대해 선으로 대응하면 악에게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다시 위협하지 않음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죄를 용서하며, 선으로 악을 이긴 본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Ⅳ)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7/1~3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남의 허물을 비웃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해 상처를 주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 똑같은 죄인인데도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합니다. 이는 남의 흉을 보면서 자신은 우월감을 느끼려는 심리적인 작용에서도 비롯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판단받지 않고 긍휼을 입으려면 나도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마음에 안들거나 연약한 급우를 집단으로 따돌림 하고 괴롭힙니다. 집단 따돌림 당한 학생은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남을 언어나 행동으로 괴롭히는 것은 간접적인 살인행위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오히려 덮어주고 감싸줘야 겠습니다.

 

 

Ⅴ) 마음으로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한 보화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악한 보화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그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국 선한 행동을 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국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미운 마음이나 서운한 마음을 가지면, 결국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의 발생지인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행동으로 범죄한 것이 것이 죄이지만, 신약시대에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도 죄가 됩니다.

 

야고보서 1/15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죄를 짓게 되고, 점점 더 큰 죄를 지어 결국 영혼육의 파멸(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욕심(물욕, 명예욕, 권력욕, 식욕, 성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자전거 타면 소형차라도 타고 싶고, 소형차 타면 중형차 타고 싶으며, 중형차 타면 외제차 타고 싶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저급한 육신의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차원 높은'(영적인) 진리를 추구(사모)하며 살아야겠습니다.

 

4. 유대인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나?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원할 왕이자 기다리던 메시야인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세인 서기관 같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며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죄인, 세리, 창녀, 어부 등 그시대 하층민만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따랐을 뿐입니다.

 

* 그럼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배척했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a) 위선과 탐욕에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예수님이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신랄(辛辣)하게 비판하십니다. 대표적인 잘못은 형식주의와 위선에 빠져서 겉으로는 경건한 체 하고 높임을 받지만 속으로는 각종 죄악과 탐욕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희생하기 싫어하면서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말과 행실이 다른 것 등을 지적하셨습니다.

 

 

마태 23/14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마태 23/25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나 속은 약탈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

 

마태 23/27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처럼 실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도다.


누구든지 자신의 잘못을 들추어 내면 싫은 법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적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오히려 분개했습니다. 민중의 마음이 언행 일치하는 예수님에게로 쏠리자 이에 밥줄이 끊길 것을 염려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세우게 됩니다.

 

b)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 10/33 유대인들이 주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한 일로 인하여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독하기 때문이라. 이는 네가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라."고 하니라.

 

요한 19/7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나이다.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

 

레위기 24/16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지니, 모든 회중이 분명히 그를 돌로 칠지니라. 타국인도 그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 땅에서 난 자와 마찬가지로 죽을지니라.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한 것은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율법에 따르면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하나님 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한 14/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언행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안에 계셔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엄청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아버지께서 보내신 영)의 감동을 통해 우리를 구원할 온전한 진리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마태 27/54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더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인간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부모(사람)로부터 태어난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人子)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로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내면으로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형상을 그대로 닮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지진과 기적이 일어나자 백부장과 지키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합니다.

 

 

c)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율법 파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6/7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이는 그에게서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 함이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고,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자, 38년된 병자 등을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 보다는 율법으로 그를 트집 잡았습니다.

 

마태 12/8 인자는 곧 안식일의 주니라."고 하시더라.

 

예수님은 새시대의 주인으로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전의 법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밤 12시 이후에 다니는 것이 통행금지 죄에 해당했지만 지금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법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구약시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라 하여 율법 모두를 폐하신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3/31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6/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율법 중 제사의식이나 형식적인 규례는 지킬 필요가 없지만 신앙과 도덕적인 계명은 여전히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폐하시고, 더 높은 차원의 영의 법인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근원이 되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은 형제에게 거짓말 하거나 도적질 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율법이 저절로 지켜지게 됩니다.

 
마태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서를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노라.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더 이상적으로 발전시켜 완성시킨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였으나


율법은 초등학문이고, 초등학문을 거쳐야 고등학문인 생명의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도 초등학교를 나와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에 관한 율법은 차원 높은 영의 법을 익히기 위한 과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은 율법도 아닌 장로들이 만든 전통인 유전이었습니다.


마태 15/2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나이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하니,


d)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교만에 빠져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요한 7/52 그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갈릴리에서는 어떤 선지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찾아보라."고 하더라.

 

당시의 엘리트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교만과 위선에 빠져 유대의 변방 지역이었던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학식을 갖추고 위엄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시골 출신이자 정통교육도 받지 못하고 누추한 차림의 예수님께 머리를 굽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가 2/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시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지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암환자가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있는데도 나는 건강하다고 버티면 의사가 치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이런 상황에선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그가 더 많은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거절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땐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오직 예수님만 믿고 의지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은 교만하고 마음이 부유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절하시고,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하며 죄를 애통해 하는 자를 찾아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5. 유대인의 배역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부인가?

 

예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혼인잔치 비유가 나오는데 임금이 아들 혼인잔치를 위해 종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초청하나 다 자기 일에 바뻐 무관심 할 뿐만이 아니라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마태 21/33~41에서는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데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나가서 열매가 익을 때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심히 때리고 죽이므로 '내 아들은 공경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내나 상속자 아들을 죽여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도 죽이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와 이 악한자들을 진멸하고 다른 농부들에게 농장을 줍니다. 이 역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죽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살전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계시록 2/9 내가 너의 행위와 궁핍을 아노라.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모독을 아노니,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사도들을 핍박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복음사역을 훼방하고 박해한 유대인들의 모독을 아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synagogue, 유대인의 집회장소)이라고 합니다.


에스라 7/13 내가 칙령을 내리노니 내 영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서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다 너와 함께 갈지어다.
(I make a decree, that all they of the people of Israel, and of his priests and Levites, in my realm, which are minded of their own freewill to go up to Jerusalem, go with thee.)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freewill) 때문입니다.


freewill은 '자유의지'로 내가 누구의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원격조종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계명들을 이행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슬퍼하여 밤새도록 주께 부르짖더라.

 

사무엘상 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이는 주가 보는 것이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후회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 잘 못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하나님도 인간이 자유의지에 관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outward appearance) 보다 마음(heart)을 보시고 다윗을 왕으로 삼으십니다.

 

출애굽기 19/5~6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독특한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9/6 그가 또 말씀하셨도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 내가 또한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니 네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면 모든 백성보다 독특한 보물이 되고, 제사장 왕국이자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구원을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 온갖 죄악과 우상숭배에 빠졌고, 결정적으로 구원주이자 왕인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방인에게 그 모든 복락이 돌아갔습니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

 

2,000년전 유대인의 불신과 무지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유대인은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예표합니다. 즉 죄인된 인간이 의인인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을 용서하셨고,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해 흘리신 그의 피로써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 유대인의 배역은 다음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태 23/35~36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태 27/25 모든 백성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더라.


누가 19/43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죽인 의인과 선지자들의 의로운 피가 당세대에 유대인에게 돌아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무죄한 피(보응)를 자신과 자손들에게 돌린다고 하였습니다.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유대민족을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는데 주위에 흙언덕을 쌓고 입성합니다.

 

 

마가 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거대한 건물들을 보느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니라.

 

로마군은 성전의 금을 약탈하기 위해 성전을 모두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대량학살 했으며, 나라 자체를 없애고, 남은 자들을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또한 유대인은 2000년 가까이 전 세계를 유랑하며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600만명이라는 기록적인 학살을 당했으니 메시야를 죽인 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비 유대인)에 대한 선교입니다.


로마서 2/28~29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법문에 있지 않은 것이라. 그들의 찬사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혼인잔치 비유와 포도원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지중해 인근 여러 나라를 순회하였고,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유대인은 구세주인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요한 4/19~20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더 어두움을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본능과 쾌락과 욕심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육신을 예표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였고, 참혹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두움(죄, 거짓, 사탄)을 좋아하는 육신은 본능적으로 빛(의, 진리,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반항적이고 이기적인 자기 육신을 억제해 복종시켜야 합니다.


6.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면 구원이고, 거부하면 심판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온 인류를 심판하고 사탄에게 내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과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씻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요한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1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 앞에 분명하게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설명한 구절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하고 불평 불만을 늘어 놓아 하나님으로부터 심팜을 받았지만 놋 뱀을 쳐다 보아야 불 뱀에 물리지 않았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불신했던 인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 보아야지만 구원(멸망치 않고 영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눈 앞에 보이므로 거짓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계명을 주시는데 이는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아담 때에는 선악과 따 먹지 말라는 계명이 있었고, 노아 때에는 방주에 타라는 계명이 있었으며, 모세 이후에는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1/7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즉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주이자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씻어져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고전 1/22~24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노니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하나님의 지혜니라.

 

계시록 7/14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 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걸리는(stumblingblock, 장애물) 것이고, 지혜를 찾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게 들리지만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합니다. 계시록에서는 말세 때 대환난을 피하는 사람은 어린 양(예수님)의 피로 자기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말세 때 구원 받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아 거룩하고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a) 대속 (代贖, substitution)

 

대속은 죄를 대신 받는다는 말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자신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기 위해서는 성막에서 자신의 죄를 무죄한 염소나 양에게 안수해 전한 다음 제사장이 암염소나 어린 암컷양을 잡아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단 밑에 쏟은 다음 나머지를 번제단에 불살라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마태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골로새서 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피로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흠 없는'(죄 없는) 어린 양이 되어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져 용서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b) 구속 (球贖, redemption)

 
구속이란 죄인을 속전을 내고 건져낸다는 말로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를 마귀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피로써 죄값을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죄로 감금된 사람을 보석금을 내고 석방시켜 주는 것이나, 노예로 예속된 사람을 '몸 값'(ransom)을 주고 해방시켜 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고 하시더라.
 

고전 6/20 너희는 값을 치루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 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때가 이르면 증거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로 사탄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았으니 우리 모두 예수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은 엄청난 희생과 고초를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로써 값을 치루고 산 존재이니 구원 받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외아들에게 아버지의 성령이 임하시어

삼위 하나님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감사와 영광을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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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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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야곱 /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한 사람

 

 

 
내 영혼에 불안을 지으시고

내 가느다란 기쁨마저 앗아가신 이여,

당신의 화살이 내 가슴을 뚫고,

나의 평안을 앗아 가셨도다.

아직도 더 가까이 이끄시며,

당신을 떠난 내 모든 발걸음을 뒤집어 엎으시고,

내 손발이 다 잘라질 때까지

계속하여 당신은 나를 치시는도다.

그리고 나는-브니엘의 그이처럼-

내 힘은 절름발이가 되어 일어선다.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비열함과 속임수가 벗겨진.

그 때에 나는 당신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징계로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알리라.

당신께서 또 다른 품으로 가까이 이끌기 위해

칼과 채찍을 아끼지 아니하실 때에.

지나간 과거 속에서 당신의 길을 발견하오니

당신께서 이루신 역사(役事)는 참으로 위대하시도다.

재창조를 위해

살리시고 죽이시며 파괴하시는 영이여

파괴하신 후에는! 내 안에서

당신으로부터 단절케 하는 모든 자취를 제해 주소서.

거룩한 나라에서

당신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까지!

-위니프레드 쿡(Winifred A. Cook)
 

하나님께서 야곱을 훈련시키시는 것을 통하여,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야곱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끈덕지지만 타협하지 않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셨다. 부정하고 야비한 행동이 그의 인생의 가치를 떨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치 않으시되 결코 그의 죄를 묵인하거나 간과하지 않으셨다. 많은 세월 동안 야곱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추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고, 때문에 야곱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는 것과 “제멋대로 하는 것“이 얼마만한 대가를 치르는가하는 쓰디쓴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이기주의가 그를 징계하는 막대기가 되었다. 마침내 그가 쓴 계략이 그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최종적인 위기와 만나게 한다.

야곱의 삶은 '성도의 견인'보다는 '하나님의 인내'를 예증(例證)해 준다.

하나님의 인내(오래 참으심)가 없이는, 성도의 견인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나라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하시는 당신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은혜로운 훈련을 계속하셨다. 한 가지 방법이 실패하면,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하셨다. 한 세대가 응답하기를 실패하면 참을성 있게 다음 세대와 함께 다시 시작하셨다. 다음 세대들은 우상 숭배로 돌아가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게 되며, 이때 이후 그들은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무익함을 결코 잊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히브리 민족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은 완성시키고야 만다.

바울은 이 확신을 다음의 말씀에 분명하게 표현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그리스도인의 경험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끈기와 지칠 줄 모르는 인내하심의 증거가 충만해 있다.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은 야곱이 그러했듯이 수 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었다. 결국 그는 소망이 없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런던 템즈강 제방의 넝마주의들 틈에서 자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어 포로가 된 곳은 바로 그 곳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시 「천국의 개」(The Hound of Heaven)에서 그는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한다.


밤이고 낮이고 나는 하나님을 떠나 도망하였네.

세월의 아아치 문을 지나 나는 그를 떠나 도망하였지.

그를 떠나

내 마음의 미로 속으로, 눈물 속으로

나는 그를 피해 숨었지.

웃음을 흘리며 내려가

전망이 좋은 언덕으로 나는 도망하였지.

그리고는 거꾸러져 버렸네.

두려움의 거대한 암흑 밑으로

그 곳에서 강한 발걸음이

나를 따라오셨네. 따라오셨네.

 
주관적인 선택

 
만일 우리에게 온 세상에 축복을 줄 나라를 건설할 사람을 선택하는 책임이 맡겨진다면, 아마도 야곱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곱은 뒤틀어지고 욕심이 많고 교활했다. 야곱은 비열하게도 쌍둥이 형의 곤경을 이용해서 그의 세상에서의 상속권뿐만 아니라 씨족의 족장으로서의 영적 권위까지 도둑질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때, 도량이 크고 마음이 넓은 에서가 명단에서 훨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를 공정하게 평가하면 야곱은 유전적으로 별로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의 부모에게서 고귀한 성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창 25:28). 이처럼 자기욕심에만 눈이 어두운 성숙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엄하지 않은 어머니, 리브가의 야곱에 대한 사랑은 파괴적이고 절제하지 못하는 사랑이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했다면,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해서, 다른 아들을 속이는 일에 그를 거들었었던, 자기가 편애하는 아들을 향한 거룩하지 못한 야심에 사로잡혔던 비양심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일을 이루려 했다. 그녀는 그녀의 거짓과 불신을 아들에게 전했다. 그가 처음 그의 형을 속였을 때 그녀는 그의 성공을 기뻐하였다. 그녀의 눈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죄에 대해 비싼 값을 치르었다. 그녀는 그를 떠나 보낸 후 다시는 아들을 만나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 범상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쌍둥이를 낳게 될 것이며, 누가 나라의 설립자가 될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창 25:23). 태 중에서의 싸움은 태어나면서 눈에 보이게 되었는데 야곱이 에서의 발뒷꿈치를 잡았던 것이다(창 25:26). 이것이 그의 이름이 “발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tripper)“, “대신 들어 앉은 사람(supplanter)“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배경이다. 에서는 그의 성품 중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보다 더 중요시하였으며, 자신의 제사장적인 특권을 가볍게 포기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창 25:32).

이와 같이 에서는 그의 생득권을 경시했다.

무어(C. G. Moore)는 “쌍둥이 형제 중 하나는 그 형제가 배고파하는 것을 비열하게 이용해서 장자권을 얻고자 했고, 다른 하나는 소중히 여겨야만 할 것을 그렇게 가볍게 여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네 사람 모두를 생각해 보자. 아버지, 어머니, 두형제,그들로부터 무슨 위대하고 복된 것이 나오겠는가?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지 않는다면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보통 그런 곳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곳이다. 그는 다른 아무런 가망이 없는 데서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들어가셨고 그의 손을 야곱 위에 얹어 안수하셨다“라고 기록했다.

야곱은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의 약점에 방해받지 아니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소경에 대해 물었었다.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2, 3)고 대답하셨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데 대한 열쇠가 있다. 그는 벌레같은 야곱을 택하셨으나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왕자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의 비뚤어진 성격은 가장 연약한 자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와 은혜를 보여주시는 좋은 실례가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도록 강하고 고귀하고 똑똑한 사람들만 택하신다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실격이 될 것이다. 바울은 그의 잘 알려진 말씀(고전 1:26-29) 속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된 민족의 조상으로 택하신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도둑질한 것은 애송이 청년의 때가 아니라 성년이 되었을 때이며, 에서를 속여 축복을 받은 때도 성년이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참으로 그는 147세까지 살았으며, 이 불명예스러운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그는 성숙한 장년으로서의 생활 방식이 이미 굳어진 지 오래였다. 심리학자들은 이와 같은 늦은 시기에 성품이 급격히 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심리학적인 법칙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실망할 때조차도 우리에 대해 실망하지 않으신다. 그의 인내는 끝이 없으시며, 그의 자원은 다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속성이 호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을 훈련시키시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칭호를 받으시기까지 자신의 낮추신다.

“야곱의 하나님“(시 20:1/사 41:2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하나님의 친구 모세의 하나님.“

이런 칭호는 부적당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라니? 너무도 이상하게 들린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야곱의 이름과 연결시킨다면 자신의 속성에 누를 끼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말 1:3).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두려워 말라“(사41:14).

“야곱의 하나님이 네 피난처이시니“(시 46:7).

하나님께서는 가장 연약하고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사람과 자신을 친밀하게 연결시키기까지 자기를 낮추신다. 벌레보다 더 약하고 무가치한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렇게 하신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추구하는 “벌레“가 왕자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권세를 갖게 된다.

 
인간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낙천주의자이시다.

그는 숨어 있는 고귀함과 가능성을 잘 찾아내신다. 그분은 까다로운 성미를 가진 사람의 하나님이시며, 비뚤어진 인격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실망하여 포기한 곳에서 시작하기를 좋아하신다. 또한 모든 기질과 성격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철저히 근본적으로 처리해 주시기를 그의 손에 맡기기만 한다면, 그의 모든 사랑과 은혜의 자원을 동원하실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이 매력없는 사람 속에서 왕자와 같은 자질을 보실 수 있다.

말라기의 말씀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는 로마서(9:13)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는데, 이 말씀은 성경의 난해 구절 중 하나이며, 표현상으로 볼때는 하나님이 변덕스러우신 것처럼 보인다. 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받은듯이 보인다.

두 가지 사실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첫째, “미워하였다“는 말이 우리 귀에는 거슬리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 꼭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말라기와 바울의 글에 사용된 말은 본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야곱과 에서 개인이 아니라, 그들의 자손인 이스라엘과 에돔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은 그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미리 선택하신 것이다(창 25:23).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적인 뜻을 발휘하시는 데 있어서 유전이나 장점이 아닌 믿음을 아들이 되는 영원한 원리로 정하셨다. 본래의 뜻을 적용해 볼 때, 「사랑」과 「미워하심」은 우리가 이 주관적인 감정들을 이해하듯이 선택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함부로 선택하지 않으시며, 편애에 빠지지도 않으신다. 그 감정적인 용어들은 오히려 나라의 기능과 운명을 의미해 준다. 에돔이 아닌 유다가 역사상 점진적인 계시를 위해 선택되었다“라고 말했다-재미슨, 포셋, 브라운(Jamieson, Faussett and Brown).

그러나 이 말씀을 이차적으로 개인에 적용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신 것은 “변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별력“이었다. 야곱의 모든 비열함과 이중성 뒤에는 영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열망과 영적인 역량이 있었다. 계속하여 야곱은 불순종했으나 영적 열망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에서의 관대하고 매력적인 외모 뒤에는 영적인 것의 가치에 대한 모멸이 숨어 있었다. 그는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것보다 감각적인 욕망의 만족을 더 좋아했다. 야곱은 영적인 가치를 정확하게 느꼈지만, 그는 언제나 그것을 얻기 위해 육신적인 음모에 의지했다.

그의 명백한 약점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영적인 열망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끊임없이 추적케 하시고 성품변화 훈련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시도록 만들었다. 그의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미미한 믿음의 흐름이 있었다. 캠벨 모르간(G. Campbell Morgan)박사는 야곱의 믿음이 아버지의 축복을 원했으나, 두려움 때문에 책략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의 것인 장자권을 원했으나, 두려움은 그것을 비열하게 사기적인 수단으로 얻고자 했다.

우리는 이 사실 속에서 자신의 약함과 실패로 침울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큰 위로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우리의 동료 속에 있는 가장 나쁜 점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좋은 점을 찾아 그것을 계발시키신다. 그는 마음의 참 열망을 아시며 그것을 계발시키시기 위해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섯 번 나타나셨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타협하지 않는 자기 자녀의 실책을 바로 잡아주시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

 


불굴의 추적

 

“약탈자“란 뜻의 야곱의 이름 뒤에는 “단호하고도 사정없이 따라가 적을 덮쳐 그를 넘어뜨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말은 야곱의 생애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그러나 야곱은 그의 적수를 만나 마침내는 그를 얍복강에 “던지신“ 하나님의 추적에 무조건 항복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낙심치 않으시고 참지 않으셨더라면, 야곱은 결코 하나님의 왕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사랑스럽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 그를 벧엘에서 만나 주신지 삼십 년 후 그를 최종적으로 항복시키실 때까지 지치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를 추적하셨다. 그리고 처음 만나주신 곳과 최종적인 항복이 이루어진 곳은 의미 깊게도 같은 장소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추적하신 것은 다음의 네 가지 사건에 의해 구분지어진다.


첫 번째, 벧엘에서의 사건은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도둑질한 후 일어난다(창27:27-29).

이제 허기가 채워지자, 에서는 그의 쌍둥이 동생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야곱이 도망친 것을 알고, 성이 난 에서는 추격을 했다. 그러는 동안 야곱은 하나님과 처음 만나게 된다. 돌베개를 베고 자면서, 그는 꿈 속에서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창 28:12), 그러나 사다리 위에는 하나님 당신이 계셔서 자격이 없는 자녀에게 은혜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전혀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번영과 보호의 절대적인 약속과 함께 그의 자손을 인해 세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주셨다(창 28:14, 15). 두려움에 가득찬 야곱이 외쳤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야곱이 서원하여... “(창 28:17-22).

그리고 그 서원을 잊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야곱의 밧단 아람에서의 생활에서 우리는 기도나 경건의 증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고질적인 물질주의자였다. 그의 생각에는 가축이 최고의 것이었다. 그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다. 벧엘에서의 경험은 단지 희미한 추억이었다. 종종 볼 수 있듯이, 물질적인 번영은 영적인 번영을 질식시킨다. 가축의 수가 늘면서 하나님을 소홀히 하게 되는 수가 종종 있다.


두 번째, 브니엘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야곱은 백 세나 되었다. 이십 년 동안-어떤 성경 학자는 사십 년이라고 말한다-그는 삼촌 라반을 섬겼다. 비양심적인 야곱을 훌륭한 도구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행하셨던 훈련을 주목한다면 큰 도움이 된다. 그 방법은 그보다 더 까다롭고 욕심이 많고 비뚤어진 사람에게 그를 붙이시는 것이었다. 야곱은 그처럼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가장 가증한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방법을 쓰고 계신다.이 기간 내내 야곱은 거짓과 속임을 당하며 지냈다. 잔재주 싸움에서 그는 밀고 밀리는 각축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변화된 것은 바로 이 고된 훈련 덕택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에 맞지 않는 가정 환경이나 회사 조건이나 뜻이 맞지 않는 동료에 대해 이와 유사하게 설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즐거운 생활 조건과 뜻이 맞는 사람들을 선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유익이 된다면 현재의 고통을 아끼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강하고 신실하시며, 우리가 연약할 때, 그대로 두시는 사랑이 아님을 우리는 감사해야만 한다. 우리가 판단해 볼 때, 만일 야곱이 훌륭하고 온당한 사람에게 붙여졌다면 그것은 야곱에게 얼마나 끔찍한 재난이 되었겠는가? 우리는 “훌륭한 사람들“의 영향력과 그들이 우리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해 대단히 과대평가를 한다. 대개 그 반대 종류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와 늘 함께하시며 그 가운데서 그를 붙들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을 금하셔서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다(창31:7, 24, 2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라반“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 만일 라반이 자기 뜻대로 했더라면, 야곱은 빈털털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이 부지런히 일한 대가를 받도록 해 주셨다.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실 때까지 야곱이 이 호된 훈련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것은 그의 성품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좋지 않은 환경에 안달을 하며 그것을 면하고자 애를 쓰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 중에 지름길을 택하고자 한다면 대단한 손실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려운 기간을 필요이상 허락지 않으심을 확신해야 한다.우리가 까다로운 사람들과 삶의 어려운 일들에 대해 바르게 반응할 때, 우리의 인격이 온전해지고 경험이 풍부해진다는 교훈을 주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훈련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야곱은 에서가 사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그를 맞으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창 32:6, 7). 죄의식으로 인한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에서의 나타남은, 과거의 죄는 항상 우리에게 심판으로 나타난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야곱의 죄는 죄를 범했을 때보다 더 무섭게 보인다. 야곱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보호해 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는 대신에(창 28:15), 겁먹은 기도를 한 후 육신적인 방법을 의지했다. 그는 아직도 이전과 같은 기교를 가지고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음모를 꾸미려하였다.

이번에 그의 기교는 거짓말보다는 상대방을 달래는 것이었다. 그는 형을 달래기 위해 주의하여 잘 준비한 선물로 가축떼를 앞세워 출발시킨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이것은 한 사람 역사의 전환기를 이루는 결정적인 밤이었다. 씨름을 시작한 것은 야곱이 아니고 하나님이었지만, 야곱은 놀랄 만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자기 삶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며 무사히 어려움을 넘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는 항상 그래 왔다. 그러나 하늘의 씨름꾼의 끈기있는 압박이 계속되었다. 축복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저항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야곱은 강한 씨름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수단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양심적이지 못했으나, 여태까지 판결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상대와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하나님은 야곱이 굴복하려 들지 않자 그를 평생동안 다리를 절게 만들었다(창 32:25, 26). 이 싸움은 야곱에게 영원한 표식을 남겼다. 왜 씨름꾼(하나님)은 더 일찍 이렇게 하시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야곱이 자발적으로 먼저 항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어지자 야곱은 그의 상대를 붙잡고 외쳤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이르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지점은 아니지만 야곱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내내 준비해 오셨던 위치에 이르도록 자신을 조종하는데에 성공했다! 홀로 싸우다 실패한 것을 통해서 야곱은 승리했던 때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제임스 맥콩키(James H. McConkey)씨는 그의 의사 친구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사님,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환도뼈는 인체에서 가장 강한 부분입니다. 말이 똑바로 잡아당겨도 사지를 떼어 낼수는 없습니다. 환도뼈를 휘게 했을 때만 떼어 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순식간에 야곱은 몸의 중심을 잃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 충만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적인 삶이 끝나야만 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있는 영적인 원리이다.

이 사건에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는 그의 삶의 죄와 수치를 직면해야 했다. 그의 이름이 마치 맷돌처럼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사기꾼, 협잡꾼, 야바위꾼...그는 그것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회개하며 그가 대답했다. “야곱이니이다“ 찬탈자 사기꾼! 이 한 마디 말 속에 실패하는 생애의 본질이 집약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근거가 된 이 고백을 한 뒤 그는 축복의 길에 서게 되었다. 그가 더 큰 축복의 언약을 받은 것도 브니엘에서였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러나 그는 이긴 것이 아니라 항복하지 않았던가? 그는 항복함으로 이겼던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그의 성품의 완악함을 깨뜨리시는 데 성공하셨다.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호 12:4).

당신이 침묵하셔도 소용이 없으며,

내 환도를 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뼈가 위골된다 하여도

당신을 내 품에서 놓지 않으리.

씨름을 하며 나는 당신을 가지 못하게 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을 알며,

당신이 누구신 줄을 알 때까지.
 

세 번째, 세겜에서의 사건이 뒤따른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시게도 야곱의 옛 이름과 옛 수치를 제거해 주셨으므로, 야곱은 물론 그의 새 이름에 맞게 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의 타고난 의심과 술책은 여간해서는 없어지기 어려웠다.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형을 속이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을 향하여 장막을 쳤다(창 33:13-18). 소돔에서 유사한 어리석은 행동을 했던 그의 친척 롯처럼 그는 그의 거짓과 불신앙에 대해 값비싼 값을 치루었다(창 34:30).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술책을 써서 곤궁을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비극이 그의 가족을 삼켜 버리게 되었다. 뒤따르는 이야기는 강간과 살인과 두려움의 이야기이다. 야곱은 서원을 깨뜨리고 헌신을 망각한 것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처음 만나 주신 지 삼십 년이 흘렀다. 그의 행동을 볼 때 그처럼 완악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 마땅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며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덕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한번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확신을 주시려 하셨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네 번째, 두 번째 벧엘의 사건이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드디어 사랑의 아버지의 인내하시는 징계가 그 목적을 달성했다. 야곱은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가족들을 서둘러 모아 벧엘로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여행을 했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 35:5).

부끄럽게도 그가 무시했었던 그 하나님께서 그의 죄의 대가가 그를 덮치는 것을 막아 주셨다. 벧엘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발견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창 35:9).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축복하시는 일에 결코 낙심이 없으시며 자녀들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끝없는 자원을 가지고 계시다.

다시 한 번 야곱은 그가 완고해서 방해했었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들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창 35:10).

이제 야곱은 그의 새 이름의 특권에 합당하게 살았고 다시는 술책을 꾸미고 사기를 하는 옛날의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훈련은 효력이 있어서 벌레와 같은 야곱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나란히 함께 믿음의 사람들의 대열에 끼게 되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히 11:2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이 세대나 다른 세대나 사람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단지 시험의 사건이 다를 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부심, 야심, 돈, 이성 문제(異性問題), 그들의 이상(理想)에 다다르지 못하는 등 시험을 당하여 실패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종종 옛날과 똑같은 죄가 되살아나 힘을 발하여 그들을 쓰러뜨린다. 똑같은 비극적인 성격의 결함이 일생 동안 마치 경찰견처럼 그들을 뒤쫓는다. 잇따른 패배로 인해 소망이 마비되고 만다.

이런 사람들에게 마귀는 미래가 과거보다 결코 더 나아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의 메시지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이 대표적인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복음을 말씀하고 계시다. 유전의 법칙이 최고의 법칙이 아니다. 심리학의 법칙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 야곱의 하나님은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계속 기회를 주시는 뛰어난 하나님이시다. 두번째-혹은 스물 두 번째-기회가 반드시 과거의 실패로 인한 현재의 결과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그 실패조차도 새로운 승리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도 낭비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심지어 실패조차도, 중요한 교육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야곱에 대한 최상의 교훈은 어떠한 실패라도 종국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기질,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도 희망을 가지신다. 어떠한 과거의 실패도 그 사람의 가능성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붙드시고 나면, 그를 축복하시겠다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실망이 없이 끝까지 그를 추적하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야곱을 처리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실패했다고 물리치셨더라면, 오순절의 위대한 설교사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쓰레기더미에서 들으셔서 그 실패를 통해 더 광범위하고 열매 맺는 사역을 창조하심으로써 마귀에게 역습을 가하신다. 아무리 연약하고 흔들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귀히 보신다.
 

오스왈드 샌더스 「충분히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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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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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신론]삼위일체(Trinity)

 


 삼위일체(Trinity)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다룬 반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규명한다. 즉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지칭되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삼위(三位)로 계시며,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일한 일체(一體)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존재 양식에 있어서 한 분으로서의 유일신(唯一神)이시나 그 유일하신 분이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계시가 아닌 일반 사고로써는 발견될 수 없는 신비이다.
 

1. 삼위일체의 교리적 정의(定義)
 

삼위일체란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이 신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1) 하나님의 본체(本體)는 단 하나로서 절대 나뉘어질 수 없다(신 4:25; 슥 14:9; 고전 8:6; 딤전 2:5).         
 

2) 한 신적 실유(實有)에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개체적 실존(實存)이 있다.         
 

3) 절대로 나뉘어질 수 없는 본체의 모든 속성이 삼위 안에 각각 완전하게 존재한다(요 10:30; 14:11; 골 2:9).         
 

4) 한 신적 실유(divine) 안에 존재하는 삼위는 그 실존(subsistence)에 있어서나 사역(事役)에 있어서 일정한 순서가 있다. 그런데 이 순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1) 존재론적 순서 - 이것은 인출(引出,derivation)의 논리적 순서로서,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부터 발생(發生)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부터 발출(發出)하시되 성부는 다른 위에서 인출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2) 경륜적 순서(經綸的 順序) - 외향적 사역(外向的 事役)의 순서로서, 만물은 성부 ‘에게서’ 나오고(‘of’ or ‘out of’), 성자로 ‘말미암고’(‘through’ or ‘by means of’), 성령 ‘안에’(‘in’) 있다(요 1:3,14).

  (3) 사역적 순서 - 이것은 인간의 구속에 관한 논리적 순서로서,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 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 5:8), 성령은 그 효과를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 3:18)는 것이다.
 


2. 삼위일체의 성경적 증거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적 사색이 아니며 절대 오류가 없는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다.
 


1) 구약의 증거         
 

신약 성경에는 미치지 못하나 구약 성경에서도 희미하게 삼위일체를 계시한다.
 

  (1) ‘우리’라는 하나님 스스로의 표현(창 1:26,27; 3:22; 11:17; 사 6:8).

  (2) ‘여호와’와 ‘주’에 대한 동시적 언급(시 110:1).

  (3) ‘여호와의 천사’와 ‘여호와’의 동일시 혹은 구분(창 16:7-13; 18:1-19; 출 3:2-5).

  (4) 성자이신 ‘하나님의 지혜’ (잠 3:19; 8:1) 및 ‘말씀’(시 33:4, 6; 119:89)과 하나님과 동시적 언급.

  (5) 성령에 대한 인격적 묘사(창 6:3; 느 9:20; 시 51:11; 사 40:13).
 

2) 신약의 증거         
 

신약에서는 또 다른 하나님이신, 성육(成肉)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로 언급을 하는 만큼 삼위일체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1)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단일표현과 더불어 삼위 각 위에 대한 구별적 묘사(행 5:3,4; 롬 9:5; 고전 8:6).

  (2) 삼위 각 위간의 인격적 유대관계에 대한 묘사(요 3:35; 15:10; 16:14).

  (3)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사항에서의 삼위 이름의 언급(마 28:19; 고후 13:13).
 


3. 삼위의 개별적 연구
 

  삼위(三位)로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각 위별로 개별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어느 정도 용이하다. 그러나 삼위는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다.
 


1) 성부(聖父)         
 

  (1) 명칭 - 그분에 대한 주요한 이름인 ‘아버지’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며(욥 1:6; 2:1; 눅 3:38), 구약 선민(選民)을 보호하시며(신 14:1; 사 63:16), 신약 신자들의 구원자이심(요 1:12; 롬 8:15)을 표현한다.

  (2) 사역 - 성자를 발생하시며 성령을 발출하신 내향적 사역과 만물 창조와 구속을 계획하며 보전 섭리하시는 외향적 사역이 있다.
 

2) 성자(聖子)         
 

  (1) 명칭 - 제 2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명칭은 ‘아들’이다. 그는 성육신 이전부터 아들로 언급되며(요 1:14,18; 갈 4:4), 성육신에서 아들되심이 증명되었다(요 3:17). 또한 스스로 성부를 ‘아버지’로 부르심으로써 당신의 아들됨을 확증하셨다(마 6:9; 요 20:17).

  (2) 사역 - 만물은 근본 성부로 말미암지만, 성자는 그것의 실제적 창조와 보전을 담당하신다(요 1:3,10; 히 1:2,3). 한편 인간 구속의 경우, 하나님은 계획하시나 그것의 성취는 성자로 말미암는다.
 

3) 성령(聖靈)         
 

  (1) 명칭 - ‘하나님의 영’(고전 2:11) 혹은 ‘그리스도의 영’(갈 4:6)이라는 명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외향적 사역을 담당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성령’의 ‘성’(聖)은 그분이 성부와 성자에 대하여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2) 사역 - 성령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을 뒤따른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신적 경륜을 피조물에게 직접 전달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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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사람 (The person who talked to God face to face)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기와의 교제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단지 열망하는 사람들에게만 교제를 허락하시고 자격을 주신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누리는 이 영적인 그룹에 속했다. 그는 한 번 이상을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사십 일을 지냈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33:11).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과 친밀한 삶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완전을 향한“ 긴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보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빚으시는 손길 아래서 그의 성품이 변화되어 간 것을 더듬어 볼 때, 그를 영적인 거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다.

그의 생애는 사십 년간씩 세 시기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사십 년-애굽 궁전에서 왕자로 지냄

 

-혈통

많은 사람들이 위대해진 비결을 찾아 보면 그들의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므람과 요게벳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그 후에 모세를 다루실 수 있게 하였다. 참으로, 이 두 노예의 믿음은 세계 역사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 11:23).

그들의 믿음은 왕의 진노를 무릅쓰게 했고, 그들의 사랑은 왕의 잔인한 명령을 교묘히 피하는 방법을 궁리해 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영광을 주시고 그들의 사랑에 보답해 주셨다. 그 결과로 모세는 경건한 가정과 히브리종교의 혜택을 받았고, 이것은 후에 그가 애굽에서 교육받은 데서 오는 해로운 요소를 중화시키는 것 이상의 작용을 했다. 그 가정에서 그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배웠다. 그의 부모로부터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배웠다. 거룩한 환경과 주변의 경건한 분위기는 그의 성격 발달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그들로부터 두려움이 없는 용기를 배웠다. 그들의 믿음은 왕의 진노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었다. 부모의 용기가 아들 속에 도덕적인 용기를 낳았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히 11:27). 믿음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그의 어린 시절은 하나님의 통치적인 섭리에 대한 놀랄 만한 본보기를 보여 준다. 그를 삼켜 버릴 바로 그 강이 그를 죽음에서 건졌다. 그를 구해 준 사람은 얄궂게도 바로 바로왕의 딸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지혜로 아들이 안전히 보호를 받게 되었다.그녀는 온 세상의 소망이 갈대상자 속에서 나일 강을 떠내려 가고 있다고는 꿈도 꾸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혈통을 통치하신다.

 


-환경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훈련장을 사치스럽고 육욕에 빠지기 쉬운 바로의 궁전으로 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삶의 환경을 지배하시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기계는 다름 아닌 영혼을 부드럽게 구부리기 위한 것.

푹신한 침대와 풍성한 음식이 광야에서의 험란한 방랑 생활을 위해 이상적인 훈련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도덕적으로 자유분방하고 음모로 가득 차 있는 궁전은 경건한 인격 계발에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환경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훈련시키실 때에, 언제나 그를 고립시키고 격리시키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강인한 성품을 계발시키시기 위해 그에게 유혹과 환란의 강풍(强風)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고립이라기보다는 분리의 방법이다. 우리가 만일 종교적인 훈련을 위해 그를 보낸다면 영적으로 조금치도 유익한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궁전으로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도구가 될 사람을 훈련시키신 곳은 바로 궁중생활의 시련의 불 속에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환경을 통치하신다.

 


-교육

기이하게도, 바로의 명령이 모세가 애굽의 옥스포드 또는 하버드에서 비할 데 없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스데반이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모세가 받은 교육과 훈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 7:22).

학자로는, 그는 애굽의 과학과 지혜에 통달하게 되었다. 정치가로서는, 그는 독특한 웅변 능력을 갖고 있었다. 군인으로서는, 그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요세푸스(Josephus)는 이야기한다. 전설에 의하면 애굽 군대가 그의 지휘 아래 대단한 승리를 여러 번 얻었다고 한다. 이 전설이 근거가 있다면, 그의 조직력과 큰무리를 다루는 기술이 설명되어진다. 그의 군사 훈련 가운데는 훈련, 인내와 빠른 결정 등이 그의 교과 과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애굽의 궁정은 바로에게 항복한 시리아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온 속국의 왕자들을 위해 관례상 교육 시설을 제공했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교육은 매우 진보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교육을 통해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지적능력과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남김없이 하나님께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성취하실 수 있다. 지혜로운 자 가운데 택함 받은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으나, 세상은 모세와 바울에게 굉장한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최고 재판소의 배석 판사인 브류어(Hon. D. J. Brewer)씨는 모세를 입법자로 보며 다음과 같이 썼다.

“시내산 꼭대기에서 여호와의 손에서 십계명을 받은 그는 어떤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한 민족의 법전이 되어 온 법 체계를 만드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이 법전은 오늘날 놀랄 만한 문명 사회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모세를 인류의 가장 위대한 입법자 옆에 나란히 둔다 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육을 통치하신다.

 


-포기

사람은 자기의 출생과 환경을 선택할 수 없으나, 자기의 이력을 택하는 일에 있어서는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조만간에 사람은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인생의 분수령에 도달하게 된다-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부합한 것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이 없는 비참함 가운데에서 지내게 된다.

모세는 그가 장성하여 모든 일들을 지혜롭게 판단내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히브리서 11장에 요약되어 있으며, 이 부분을 “위대한 거절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great refusal)이라고 불러왔다. 그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백성의 곤경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이기적으로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의 특권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노예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과 함께 할 것인가? 화려함과 권세와 영광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난과 낮은 신분과 오명을 택할 것인가? 그는 죄의 쾌락이 가장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며, 저울추는 그가 자기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의 반대쪽으로 무겁게 기울어져 있을 나이였다. 세상 권세와 영화의 유혹은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히는 현실이었다. 영원한 것의 가망성과 보상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믿음이 아니고는 만져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중대한 결정의 요소가 네 개의 명사로 표현되어 있다. 「고려」(esteeming/히11:24-28) 이 말은 “계산함, 이것과 저것을 저울로 재어 봄“의 뜻이다. 모세는 조심스럽게 상황의 이해, 득실을 재어 보았다. 그의 선택은 성급하고 황급한 결정이 아닌 침착하고 신중한 선택이었다. 만일 그가 현재의 생활을 포기한다면 그의 빛나는 미래는 풍전등화격이 되고 황폐한 미래가 있게 될 것이다.

그의 “여김“은 「선택」(choosing)하고 「거절」(refusing/히 11:24, 25)하는 데로 나아갔다. 그가 위대한 거절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의 믿음이었다. 그가 바로 궁전에서의 그의 지위를 포기하고, 오늘날 우리도 조금 알 수 있는 애굽의 보화와 쾌락에 등을 돌리는 것은 외적으로 볼 때 그에게 전혀 유익이 없고 모든 것을 잃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선택을 통하여 자신이 이스라엘의 고난과 소망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장엄하고 획기적인 “거절“을 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선택“은 「버림」(forsaking/히 11:27)을 가능하게 했다. 애굽의 부와 쾌락과 영화와 권세를 버리고 빈곤과 고난과 노예 상태와 경멸당하는 것과 정처없이 방황하는 것을 택했다. 대단한 포기였으나 영광스러운 믿음의 승리였다. 그는 애굽의 번쩍거리는 세상 영화와 메시야에 대한 쇠함이 없는 영광을 견주어 보고, 결코 후회가 없는 선택을 하였다.

고통받는 동포들에 대한 새로운 동정심이 그의 마음에 용솟음쳐서 그는 그들의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일격을 가했다(출 2:11, 12).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의분이 끓어 올라 애굽 사람을 죽여 황급히 모래에 묻었다. 그러나 그의 동포들은 그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고 모세는 당황하게 된다. 그가 실패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믿음의 행동과는 거리가 먼, 충동적인 격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영적인 목적은 육신적인 방법으로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배워야 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좌우로 살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중재는 미성숙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을 향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학교에서 더 배워야 할 과정이 있었다. 그는 아직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는“(히 11:34) 사람들 중에 끼지 못했다. 어쨌든, 그를 그의 생애의 두 번째 기간으로 안내한 것은 바로 이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행동이었다.

 

두 번째 사십 년-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서

 

궁전에서 보낸 세월들은 그로 하여금 지적인 훈련에 있어서 비할 데 없이 훌륭한 기회를 제공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두 번째 교육의 장이 시작되어야만 했다. 고독은 종종 위대한 사람을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모세의 광야에서의 시간들은 그의 영혼을 단련하는 데 필요한 기능을 다했다. 그가 애굽의 대학에서 배운 과정은 그가 상류 가운데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광야의 대학에서 배운 과정은 그가 구원자가 될 노예 국가로 자신을 낮출수 있도록 자격을 갖추게 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성화되고 실패를 통해 겸손케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를 준비시키시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신다.

그분의 훈련 방법은 완벽하다. 온 세상을 위한 법을 제정하게 될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리든지 간에 광범위하고도 풍부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연구해 보면, 보통 도덕적인 결단이 내려진 후에는 정해진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은둔의 기간 또는 때로는 거절당하는 기간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때에 그분이 소명받으신 것(눅 2:42)을 말씀하신 후 공생애가 시작되기까지는 거의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었다. 바울은 하나님과 만난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고독한 가운데 수 년을 보냈다(갈 1:18).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질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훈련 기간 동안 연단 받으면서 안달을 하거나 지름길을 택하려고 애를 써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다.그것은 불가피하게도 막다른 골목인 것이 입증될 것이다.

광야 기간의 시험이 북경의 왕 밍따오(Wang Ming-tao)박사에게 왔다.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그가 만일 타협하지 않는다면 중공에서 투옥되어 고난을 받게 될 입장이 되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기를 소원했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과 훈련으로 그것이 좌절됐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고 외국에 나가 훈련을 계속 받아 위대한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그는 주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훈련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몇 달 후 하나님께서는 나를 집에 가두시고 마루를 쓸고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옷을 수선하는 등의 집안 허드렛 일을 하게 하셨다. 처음에 나는 불행을 느끼며 나를 이와 같이 대하시는 그분께 불평했었다. 그러나 조금 뒤에 나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 비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었다. 삼 년이 지난 뒤나는 이런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나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야망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포부까지도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말단의 지위도 원치 않았다. 대신에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평생동안 비천한 가사 일만 돌보라고 하시더라도 기꺼이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의 모든 헛된 소망과 야심을 포기했다. 이 일들을 회상해 볼 때, 듣기에는 어렵지 않게 들리지만, 그 당시 그것은 많은 눈물과 투쟁과 어마어마한 희생의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이러한 호된 시련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역의 문을 열어 주셨고,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사역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서, 나는 그 엄격한 훈련이 없었더라면 높은 명성에 대한 욕심과 대단한 직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사역이 내게 위험한 것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왕 밍따오 박사는 성경의 각 책에 대한 주석을 출판하기도 했다.

 

 


-소명

광야에 있으면서(출 3:1), 모세는 가장 깊은 교훈을 배웠다. 그때까지 그는 행동가였었지만 이 훈련 기간 동안 그는 「어떠한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시골 생활이 어떤 이상한 현상에 의해 중단되게 된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된다. 모세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기이한 광경을 보려고 그 곳으로 가 보았다. 그가 다시 한 번 인생의 분수령에 서 있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한 채, 삶의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다. 이 타지 않고 빛을 내는 떨기나무의 광경(출 3:2)은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들어서 알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경험에 의한 지식이 된 것은 바로 이곳에서였다. “보잘 것 없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잡아 채신“ 곳이 바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였다.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조용히 명상하는 가운데 보낸 세월들이 그를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시켜 온 것이었다. 불타는 떨기나무의 상징은 명백하다. 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의 상징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 평범한 떨기 나무가 그것을 밝혀주는 불꽃으로 비상한 것이 되었다. 나무 자체는 좋지 않은 나무였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불에 변화되고 빛을 내어 아름답게 되었다.

모세는 그의 과거가 많은 특권을 가졌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평범한 떨기나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그에게 어떤 위대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결과이어야 했다. 떨기나무가 주변의 많은 나무들과 다르게 된 것은 나무의 특성 때문이 아니었고 그 안에서 빛나는 불꽃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필수적인 자격이 신을 벗고 얼굴을 가리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우리 중 대부분이 신을 벗고 겸손히 예배하기보다는 우리의 신을 신은 채 바쁘게 활동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의식하여 얼굴을 가리우기보다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 얼굴을 드는 경향이 훨씬 더 많다. 이것들이 모세가 광야에서 배웠던 가장 중요한 교훈들이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른

한 사람의 생애를 보며,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노라.

연약한 흙으로 빚어진 인간 그릇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것을 보았노라.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나 큰 소리로 외쳤노라.

나의 아버지시여,

나에게 불타오르는 삶의 축복을 주시어

당신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옵소서.

 


모세는 그가 40년 동안 회피해 오던 부르심을 분명하게 들었다. 그가 그렇게 황급히 도망쳐 온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부르셨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모세는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교훈을 너무나 철저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자기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어려워했다. 이전에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던 애굽의 왕자가 일을 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변명하는 대화를 깊이 다룬 내용이 뒤이어 나온다. 그는 위신(출3:11), 메시지(출 3:13), 권위(출 4:1), 웅변술(출 4:10), 특별한 순응력(출 4:13), 성공(출 5:23) 등이 부족했다. 이보다 더 감동을 주는 부적격의 이유를 열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의식에서 나온 이러한 주저는 매우 겸손하고 경건하게 들린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얻는 대신에, 하나님의 노를 샀다(출 4:14). 하나님의 종이 자신이 부적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책임을 회피할 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노를 사게 된다. 안심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14)]과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으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으로 모세는 모든 신령한 자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했다. 이전에, 그는 너무 성급하고 빨랐었다. 이제 그는 너무 느리고 주저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축복하시고자 하시는 그의 계획이 그의 종의 변덕과 기분에 방해받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종들은 기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움직이며 신속하게 순종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대변자로 세우시고 연약한 아론을 임명하셨는데 아론이 후에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세 번째 사십 년-지도자와 입법자로서 광야에서

 

그의 시험의 기간은 끝이 났고,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해방자로 나타났다. 그가 최고의 업적을 이룬 것이 팔십 세가 넘어서였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스포트라이트가 젊은이들에게 비쳐질 때에,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결실과 중요한 사역이 아직도 미래에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은 나이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고 격려가 된다. 연륜과 숨겨진 훈련이 성숙한 판단과 다른 이들과 쉽사리 공감을 하게 되는 유익을 낳는다.

-지도력

지도자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만이 지도력을 구사할 때 치루어야 하는 대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 모세에게는 백성들의 문제를 판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해석해 주는 힘든 일이 주어졌다.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곁에섰는지라“(출 18:13).

이것은 그의 모든 신경을 소모하며 심지어는 그의 육체의 여력을 모두 짜내는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람이 남을 구해 주면서 동시에 자신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지도력만큼 큰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은 없다.여자가 믿음으로 주님의 겉옷 가를 만졌을 때 주님의 능력이 그녀에게 미쳤다(마9:20).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와서 모세로 하여금 그러한 끊임없는 노동의 결과를 직면하게 해 주었다.

“그대가...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출 18:18).

이드로의 충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을 텐데 모세가 그 충고를 따랐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충고도 또한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라는 사실을 믿고, 그 충고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위임하고 그 일을 수행할 수있도록 그들을 훈련시키는 최고의 지도력을 구사한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뒤에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종종 하나님께서 맡기셨다기보다는 사람에 의해 떠맡겨진 무거운 짐과 책임을 맡고 있어서, 결국은 몸과 신경이 그 압박을 견뎌낼 수 없게된다. 그러한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대로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면, 그들의 기독교신앙이 그 결과를 면제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지도력을 구사할 때 치루어야 하는 대가를 더 명백히 알고 있는 이드로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이것을 명하셨다면 그대가 할 수 있으리라“(출18:23/사역).

이것이 이드로의 확신이었다. 다른 이들이 우리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떠맡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이 우리보다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일을 양도해야만 한다. 이것은 완전주의자에게 어려운 시험이다. 모세는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나, 만일 그가 계속 했더라면 오래 가지 않아서 그는 단지 기억 속의 인물로 되었을지 모른다. 진정한 선교사들에게 시험이 되는 일 중에 하나가 기꺼이 책임을 본토의 그리스도인에게 양도하고, 그들이 시련과 실수를 통해 경험을 얻는 동안 도울 준비를 하고 곁에 지켜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책임을 발전시킬 때 우리 동료들은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훈련하고 사용하게 된다.

 


-시험들

모세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 받았던 많은 시험들 중에서, 다섯 가지를 선택했다.

 

첫째, 타협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것은 허락을 받기 위해 조건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협하여 우리의 기준을 낮추는 것을 허락할 때 그것은 언제나 후퇴를 가져오게 된다. 모세와 바로와의 논쟁은 타협으로 이끄는 점차적인 유혹에 대한 고전적인 본보기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그러나 애굽을 떠나지는 말라“(출 8:25).

이것이 왕의 첫 번째 제안이었다. 현대에도 이와 비슷한 제안이 있다.

“종교를 무시하지는 말라. 하지만 좁아져서 세상을 아주 끊어버릴 필요는 없다.“

다음에 그가 제한한 것은 “너희가 희생을 드리기 위해 애굽에서 나갈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 8:28)는 것이었다.

 

둘째, 다음에는 육친의 정에 대한 시험이었다.

“너희 남정만 가고 여자와 어린 것들은 남겨 두라“(출 10:11).

“가야만 한다면 가라. 그러나 너무 지나쳐서 가족들로 하여금 너의 유행에 뒤떨어진 기준을 따르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세상적인 출세를 방해하지 말라.“

그의 마지막 시도는 욕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출 10:24).

“너의 종교적인 확신이 너의 사업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라.“

분명한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모세는 이 도전들을 간파했다. 양과 소떼들을 두고 떠난다면 그들은 빈털털이가 된 것이며,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릴 것이 없게 된다. 그의 답변은 명쾌하고 단호했다.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나이다“(출 10:26).

 

셋째, 홍해에 이르렀을 때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시험에 부딪혔다.한편으로는 건널 수 없는 바알스본 지역이 놓여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통과하기가 불가능한 모래 사막이 있었다. 그들 앞에는 건널 수 없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고, 뒤에는 무적의 바로 군대가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철저하게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택한 사람에게 보기 드문 경험은 아니다.

이 예기치 못했던, 좌절이 되는 경험으로 백성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출 14:11).

그들이 불평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그 날 놀라운 명령을 내리는데, 이것은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에게는 단지 환상처럼 보였다(출14:13). 두려워 할 모든 이유가 있는 때에 “두려워 말라“고 하였다.

“가만히 있을지니라.“

바로가 급하게 그들을 뒤따라 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모세는 불가능한 상황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합격하였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그 성공이 영광스럽게 입증되었다. 그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그들은 하나님의 근원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밀착시켜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보여 주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중국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불가능한 상황들에 직면했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하나님을 위해 착수하는 위대한 사역의 대부분에는 불가능한 단계, 어려운 단계, 성취되는 단계의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넷째, 모세도 야심의 시험을 당했었다.

모세가 시내산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에 빠지자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그들을 향해 불타올랐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

이미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이 모세에게 쓰라린 시련인 것이 증명이 되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진을 위한 놀라운 기회를 제시하고 계셨다.

제안을 하신 분이 다름아닌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시험은 더욱 어려웠다. 모세의 답변에서 그의 사심이 없는 고귀한 성품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의 행복에 있었다. 대담하고 집요하게 하나님을 붙잡고 배교한 나라에 대한 심판을 돌리기 위해 중보 기도를 했다. 하나님의 “나대로 하게 하라“는 기도에 있어서 모세의 능력에 대한 대단한 칭찬이었다.

 

다섯째, 질투에 대한 시험이었다.

성이 난 여호수아가 말했다.

“엘닷과 메닷이 예언하더이다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민 11:28).

모세가 자기를 보좌하기 위해서 택했던 사람 중에 두 사람이 갑자기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들은 그가 모세의 대권을 침해하고 그의 권위에 도전한 것에 대해 시기했다. 그러나 모세의 너그러운 성품에는 질투나 시기가 자리를 잡을 곳이 없었다. 그는 이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었다. 모세는 말한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과 교제를 갖고 있는 영적 지도자는 그의 위신이나 대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매우 온유한“ 모세는 사소한 사리 사욕의 편견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 시험들을 통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인 대단한 도덕적인 힘과 영적인 힘과 진실한 인간성을 입증했다.

 

비극과 승리

 

그가 신실하고 이타적으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는 어둡고 슬프게 끝이 났다. 그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은 얼핏 생각할 때 가벼운 실패에 대해 너무 엄중한 형벌이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건을 분석해 볼 때 그것은 그렇게 사소한 실패가 아닌 것이 나타난다.

그의 실패는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민 20:12).

그의 행동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나타냈다. 그의 불신앙은 불순종을 가져와서 “그는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다“(시 106:33). 마음은 언제나 입술로 나타난다. 그의 행동은 자기 절제의 부족에서 온 결과였다.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며 두 번 치라“고 하시지 않고 “명하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행동은 그의 불신앙을 표현해 준다. 명백하고 분명한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의 죄를 더 엄중하게 다루시는데, 특히 그들의 공적인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될 때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에 몹시 실망한 모세는 하나님께 그 말씀을 돌이켜 주실 것을 세 번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5, 26)는 것이었다. 죄는 용서받았으나 죄에 대한 벌은 그대로 남았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끝은 영광스러운 결과가 되며 깊은 절망은 기쁜 운명으로 끝이 난다. 가나안의 변화 산상에서, 잠시 예수님의 권세와 영광이 드러났을 때,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엘리야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모세였다. 그러면 그 주제는 무엇이었는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했다“(눅 9:31).

그들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죄의 노예된 데서 해방시키셔서 구속받은 무리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거룩한 구속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받았다.

모세는 마음에 소원하던 것을 받았다.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오직 잠시 동안이었고 그는 장차 올 영광을 미리 맛보게 되었다.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며, 그것도 다름아닌 영광의 주님과 함께 들어갔다.

전에는 밟아 보지도 못했던 산 위에서

영광에 둘러싸여

우리의 생명을 구해 주실 주님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과 더불어 이야기했네.

우리 모두의 경험에는 모세의 경험과 같은 의미가 없는가? 우리의 가장 큰 소망과 포부가 늘 이 세상에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저건너에는 성취의 땅이 있다.항상 이 세상에서 온전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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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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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바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늘 기도하기를 피하여 왔던 내가

열심히 그리고 두려워하며 구했소

나의 모든 배반과 그 수치를 가르쳐 주시고,

오-사랑하시는 분이시여,

나 때문에 입은 상처를 내게 보이소서!

오-당신은 용서하시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모든 사하심으로

내 결백을 다시 새롭게 할 수는 없나이다!

오-그리스도여! 당신은 나를 위하여 죽으셔서

내 죄를 사하셨으나

고통을 제하신 것은 아니옵니다.

오-당신들에게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오-나는 내가 본 것만을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내가 본 그것을 당신이 볼 수 있도록.

오-주님,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실패도 주저도 아니하렵니다.

그것을 구하고, 열망하기만 하렵니다.

제단 숯불을 내 입술 위에 얹으사,

나를 변케 하소서.

속히, 그리고 영원히-

내게 기도한 이상의 깨우침을 주셔서,

갸날픈 나의 노력에 은혜를 더하사

매여 있는 영혼들에게 오늘 오순절을 허락하소서.

-마이어스(F. W. H. Meyers)

 

어느 견지에서 보든지 간에, 사도 바울을 날카롭게 분석하면 할수록 그의 모습은 점점 더 위대하게 나타난다. 선택된 하나님의 그릇(행 9:15)으로서, 바울의 생애는 무한한 솜씨와 지혜로 이루어졌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로 비유한다면 중국의 북경에서 맹자와 공자를 인용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영국으로 치자면, 기가 막힌 신학을 논하며 옥스포드에서 그것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 러시아에서는 소련 과학 학술회(Soviet Academy of Science)에서 자기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바울은 그 당대에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토저(A. W. Tozer) 박사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이며, 세계 사상 가장 그 이력이 놀라운 사람이다. 그의 업적을 생각해 보라. 나는 그가 한 분야에서 이룬 업적을 생각해 볼때, 어떻게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게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한 분야 이상 전공할 수 없으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흡수할 정도의 위대한 인물로 보인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모두 뛰어난 것이었다. 로마 감옥에서 처형될 때까지 그는 그러했다.

교회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고 강력한 적이며 가장 가혹한 박해자인 그를 택하여 그가 파괴하려고 하던 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도, 심오한 신학자, 설득력있는 변론가, 지칠 줄 모르는 선교사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배경

 

그의 부모는 베냐민 족속으로서, 유명한 조상 사울왕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그는 아버지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 바울루스(Paulus)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훌륭한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의 부친은 매우 엄격하게 율법의 모든 의식을 지키고자 했으며, 그를 바리새인의 훌륭한 전통에 따라 세심하게 그를 훈련시키고자 했다(빌 3:4-8). 그 가정은 다소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보아 매우 유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거의 전 세계적인 언어인 헬라어 외에도, 팔레스타인의 아람어도 사용했다. 훌륭한 집안의 다른 소년들처럼,바울도 알리시안(Alician) 염소의 털로 천막을 만드는 일을 배웠다. 바울은 다소의 시민권을 상속받았다.

약 15세쯤 되었을 때에 그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그는 주도적인 학문의 도시였던 고향 다소에서 이미 학문적 분위기에 젖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일곱 명의 율법 박사 중 한 사람인 가말리엘(행 22:3) 문하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 위대한 랍비 가말리엘은 담대히 “율법의 미“라고 불리우는 사람으로, 고매한 인격과 박식한 학문으로 유명했다. 그에게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율법의 엄한 규율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행 22:5).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접근할 수 있었으며 또 신임을 받았던 것을 볼 때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는 산헤드린 회원이었고 순교자들을 정죄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그의 예리한 정신력은 학문에서 동료들을 능가하게 했다. 그는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던 자“(갈 1:14)였다고 간증했다.

그의 서신 중에 나타난 자서전적인 이야기에서 바울은 개종 이전의 자신을 매우 자기 확신적이며 내세를 믿고 청결한 생활과 율법을 준수하고 존경할 만하고,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것이 없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결코 탕자였던 일이 없으며, 정죄함없이 자신을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평가할 수 있었으며, 자기 의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한 일이 없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지나친 열심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역사의 페이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도말해버리고자 한 노력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와 같이 회심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완전성을 굳게 믿고 있었고 그의 신앙이 타당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한 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복잡다단한 사람이었다. 사도들은 각기 어떤 한가지 뛰어난 장점이나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그는 아마도 교회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극단주의자였고, 안드레는 보수주의자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 두 가지르 다 가지고 있었다. 즉 베드로처럼 모험주의자이면서 안드레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는 원칙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적이었으나 방법에 있어서는 급진적이었다. 원칙이 걸려 있을 때에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으나(갈 2:5), 방법론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전 9:22).

 

회심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회심을 교회사상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보시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 그 사건을 세 번이나 상세하게 보충적인 이야기를 기록하게 하셨다. 이 획기적인 사건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연구한 사람 중의 하나는 리틀톤(Lyttelton)경인데, 그는 의회의 의원으로서 영국의 모든 정치적 토론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내각에서 재무성 장관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가이기도 했다.

그와 그의 친구인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는 성경은 사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기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리틀톤경은 바울의 회심을, 웨스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택하여 비판하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완전한 편견에서 각자가 맡은 분야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긴 세월에 걸친 연구 결과,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뒤집어 엎으려는 그 노력을 통해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멜도(F. J. Meldau)는 말하기를 그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사기를 폭로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에 서로를 축하했다고 이야기한다. 리틀톤은 그가 펴낸 논문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울의 회심과 사도직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신앙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논문이 굉장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사무엘 죤스톤(Samuel Johnston)박사는 그것은 “불신앙이 그럴 듯한 답변을 날조하는 것이 불가능한“ 논문이라고 단언하였다.리틀톤경은 그 경우에 있어서 모든 가능성을 남김없이 연구하여 네 가지 명제를 세웠다.

바울은 거짓인 것을 알고 또한 그것을 말하는 사기꾼이거나,

너무 과열된 상상으로 인한 열광자이거나,

다른 사람의 사기에 속았거나,

그가 선포하는 회심의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따라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인 경우다.

성경의 기록을 가지고 그는 바울이 사기꾼이 아님을 논증하였다. 어떤 동기가 이 새로운 종파를 몹시도 증오하는 다메섹 도상에 있던 그를 돌이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였던 것일까? 동기는 없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부와 명예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 그는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는 자기 추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동기는 다른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서신을 보면 가장 엄격한 도덕성이 숨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증오와 멸시와 박해를 받게 되는 일이었다. 과연 그는 자신이 사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기뻐하며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것을 감수하였겠는가?

그것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무익한 사기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리틀톤은 그 이론을 자체적으로 모순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자신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진실인 것을 알지 않느냐고 호소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행 26:16).

“이것은 매우 뚜렷한 증거이다. 그 사실이 유명하다는 것과 재판석에 앉아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왕을 향하여 담대하게 자기 증인이 될 것을 부탁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한 증거이다.“

만일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아나니아가 어떻게 다메섹에 있는 자기의 적을 만나러 갈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은 논증을 거쳐, 리틀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바울은 사기꾼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회심에 대해 꾸며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헌신 후에 아라비아에서의 격리 기간이 뒤따라왔다(갈 1:17).

 


고든(S. D. Gordon) 박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를 열망하신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모든 사람은 다 아라비아나 대학에서 광야의 훈련이라는 과정을 밟았다. 요셉과 모세, 엘리야, 밥티스마 요한, 바울, 번연, 모리슨, 져드슨,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 자신도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 그러하셨다. 이들은 우수한 졸업자 중에 몇 명일 뿐이다. 그러나 등록금이 매우 비싸고, 그 과정이 극히 어려우며, 훈련은 너무 엄격하므로 많은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탈락하고 만다. 그 현저한 결과는 넓은 시야와 강한 담력과 예리한 시각과 통찰력 등이다. 철저한 하나님 신뢰와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것과 어린 아이같은 단순함, 따뜻한 동정심과 깊은 겸손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가장 최고의 것은 인내로서, 이것은 가장 진귀한 특성으로, 가장 하나님을 닮는 것이요, 가장 어렵고 긴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에는 지름길이 없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난지 3년 만에 거룩한 성으로 가서(갈 1:8), 베드로와 처음 교제를 갖고, 랍비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애를 썼으나, 그 희망은 쓰디쓴 좌절로 돌아가고 말았다(행 22:17-20). 그 다음 몇 해 동안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명확치가 않다. 그는 분명히 시리아와 길리기아에서 수 년을 설교하며 지냈을 것이다(갈 1:21). 이러한 복음 사업을 위한 준비 기간은 안디옥교회에서의 일 년간의 풍부한 경험으로 끝난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행 11:25, 26/13:1-4).

 

특성

 

바울을 복합적인 사람으로 만든 몇 가지 특성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성실성/ 구약의 명령인 “너는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실(완전)하라“(신 18:13)는 말씀은 바울 안에서 명료하게 예증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에도, 그리고 나중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박해를 받을 때에도 똑같이 성실하였다. 그가 슬프게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가 의식적으로 불성실한 일은 없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전 4:4).

성실은 자기를 드러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열심/ 그는 그가 착수한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예절의 모든 열심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이제는 성령님에 의해 새로운 통로로 인도되어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의 범주에 들어왔다. 빌립보서 3장 16절에 나오는 “핍박“(persecute)이라는 말은 빌립보서 3장 14절의 “좇아 가노라“와 같은 말이다.

결단/ 야전 사령관인 몽고메리(Montgomery) 경의 지도자로서의 필수적인 자질 일곱중의 하나가 분명한 결단력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 사도의 뛰어난 특징이었다. 예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질 때에도, 그는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질문을 하였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진심으로 하는 이 질문 가운데 그는 이미 절대적인 순종과 충성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의 단호한 성품은 망설이는 것을 몰랐다. 임무를 알면 바로 행했다.

겸손/ 바울은 위대한 회개에서 나오는 겸손으로 살았고, 그 겸손은 점점 깊어갔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9).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러나 캠벨 모간이 말한 것처럼, 거짓 겸손이 없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겸손의 증거는 없다. 그의 사도직과 사역에 대해 도전받았을 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특권과 업적을 자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도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 12:11).

그는 모순된 자신을 보이지 않았다.용기/ 그는 놀라울 정도로 헬라인들이 높이 평가하는 이상적인 마음의 균형을 드러내주었다. 위험을 찾거나 무모하게 거기 뛰어들지 않은 반면에, 주님의 일이 걸려 있기만 하면 한 순간도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위기와 위험과 반대로부터 조그마한 움추림도 없었다. 그의 도덕적 용기는 육체적 용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서신들은 그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인사 문제와 교회의 어려움을 가지고, 어지러운 상황 가운데서 두려움없이 온유하게 처리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훈계나 책망을 해서 자신의 마음이 상하는 것을 피하려고 일들을 태만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는 아니었다(고전 2:3/고후 7:5).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서 일어나 승리하는 법을 배웠다.

너그러움/ 좁고 답답한 사람 사울에서 가장 아량이 많고 관대한 사람 바울로 바뀐 변화는 회심의 기적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은 그의 마음을 넓혔을 뿐아니라 그의 마음을 크게 하고 시야를 확대시켜 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사랑의 넓이를 점점 더 많이 반사시켰다. 다른 이의 성공에 대한 그의 순수한 기쁨이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그는 도량있고 인내심이 있다고 해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 타협하지 않았으며, 위대한 베드로가 관계되어 있을 때조차도 그러했다(갈 2:11).

독립심/ 독립심은 소년에게는 파괴를 가져오나 훈련되고 성장한 사람에게는 위대한 자산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 4).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그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 깊이 고려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이와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여 함이라“(고후 8:21).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 1:10)라고 묻지만 또한 이렇게 말한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되“(고전 10:33).

이 말들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기에게 청지기 직분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았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기독교 사역의 독소인 개인주의와 무책임한 독립을 벗어날 수있었다. 그의 독립에 있어서 바울은 다른 이들의 양심적인 거리낌을 조심스럽게 존중하였던 것이다(고후 4:2).

친밀함/ 바울은 비이기적인 우정의 천재였다. 많은 다른 위대한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고립된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친구들을 사로잡고 열정적인 사랑과 충성을 받는 독특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와 디모데와의 우정은 나이 든 사람과 청년사이의 우정의 모범이 된다. 사랑받는 의원 누가와의 우정은 비슷한 나이와 취향의 사람들끼리의 우정의 좋은 예가 된다. 그는 사교적인 사람이었으며 친구들과 떨어져 있을 때는 철저하게 외로움을 느낀 사람이었다. 요한 마가에 대한 문제로 바나바와 결렬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불일치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가 「발작」(paroxysm)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나 바나바를 충심으로 생각하였으며, 그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그를 칭찬하였다. 그들 서로의 사랑이 시험을 이겨냈다. 이러한 우정의 역량이 바울이 그리스도인 지도자를 재생산해 낸 능력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감사/ 그의 서신은 자기가 받은 친절과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한 뜨거운 감사가 숨쉬고 있다. 그는 결코 “감사“ 편지를 쓰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칭찬에 후했으며 동정심이 많고 행동은 사려깊었다. 그의 서신의 어조를 볼 때, 세월이 지나갈수록 이러한 자질들이 점점더 두드러져 갔다.

형제 자매의 사랑을 얻었으니

빠른 세상에서나, 땅 속에 묻혀서나,

보라,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흠없는 하나님의 가족, 주님께서도 나를 기다리시네.

영혼에 대한 열정/ 마이어스(F. W. H. Meyers)는 그의 위대한 시에서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위대한 영혼에 대한 부담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설교자

 

종종 전할 말씀이 내게 임하면

환상은 떠나가고 진실이 드러나네.

사막이나 무리나 성읍이나 강이나

밝은 낙원의 공기 속에 녹아들고

영혼처럼 나는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도다.

정복자가 되어야 할 묶인 자들, 왕이 되어야 할 노예들을

공허한 경이 속에 그들의 한 가지 소망을 들으며,

슬프게 보이는 것들에만 만족하고 있는.

견딜 수 없는 갈망의 용솟음 속에

트럼펫 소리처럼 내 전신을 흔들고

오-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죽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위해 죽으리.

그들 모두를 위해 바쳐져서!

 


만일 설교를 그 결과에 따라 평가한다면, 바울이야말로 설교자의 왕이었다. 그는 디모데에게 한 그의 말에 대한 바로 그 본보기였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그의 설교는 공공 강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웅변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말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그는 호언장담을 하거나 자기 확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그는 세상의 궤변에 의지하지 않았다.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고전 2:4).

그는 오직 성령만 의지하였고 “성령과 그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설교하였다.그의 설교 방법은 경우에 따라 다양했다.

때로는 논쟁적이기도 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느니라“(행 9:22).

그는 논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여 그들의 이성을 만족시켰다. 그는 늘 사색과 기도로 분명한 확신을 얻었고 어떤 논쟁도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지적인 겁장이가 아니었고, 그의 신앙에 대한 도전에 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 지당하다고 믿었으므로, 그것을 증명하였다.

-아덴에서: “회당에서는... 날마다... 변론하니“(행 17:17).

-고린도에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행 17:4).

그러나 그는 단지 이기기 위해서 논쟁을 좋아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사람이나 청중을 잃는 희생을 치루어 가면서까지 논쟁을 이기지 않았다. 참으로, 그는 많은 반대자들을 감동시켰으며, 아덴에서는 몇몇 철학자들까지 감동시켰다.

동시에 그의 설교는 설득력이 있었으며, 간청과 호소가 넘쳤다.

그는 단지 사실과 논쟁만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을 권하노니“(고후 5:11).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4).

다가올 심판에 대한 믿음이 그의 호소에 긴박감을 더해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한없이 좋으시기만 한 분이 아니었고, 죄를 묵인하실 수 없으시며 온세계에서 죄를 말살시키셔야만 하는 분이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설득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또 어떤 때는 그의 설교는 교훈적이어서, 청중들의 특별한 욕구를 채워 주었다.

그는 설교가인 동시에 교사였다. 그는 3년 동안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던 것이다(행 19:9). 그는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살면서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행 18:11) 지냈었다. 사람들은 텅빈 머리로는 믿을 수도 자랄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 조직적으로 가르치는 데 투신했다. 그는 종종 가르침의 결론을 내리면서 질문을 던지는 교육 방법을 사용하였다.그의 다양한 접근 방법에서 그의 융통성을 볼 수 있다.

고정된 방법이 없었다. 그는 청중에 따라 메시지를 적절하게 전했다. 그는 로마통치자들이나, 헬라 선생들이나, 아시아의 관원이나 히브리 율법사들에게나 능숙하게 전했다. 그는 회당의 유대인들에게나, 아크로폴리스의 헬라 철학자나 루스드라의 이교도 군중이나 베스도 앞에서 법정의 회의 때에나 자신을 쉽게 적응시켰다.

그의 설교의 어조는 그의 말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이었다.

“내가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행 20:31)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흔치 않은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눈물없는 기독교 신앙의 저주“라는 이름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계의 신학 체계가 그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주님께서 아직 미발달의 형태로 주신 진리를 하나님의 영감 아래서, 체계적인 신학과 철학과, “모든 기독교 운동에 답하는“ 윤리로 발전시켰다.

 

기도의 사람

 

기도만큼 그 사람의 영적 생활의 질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다. 그의 서신 가운데 나타나는 꾸밈이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바울의 기도에 우리는 감사해야만 한다. 곳곳에서 기도가 그의 영적 생활에 보조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이었던 것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놀라운 사실은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기도가 없는 심령 때문에 슬퍼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기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실패 때문에 자신을 책망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기도의 확신을 빼앗아가는 정죄감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형태를 따르지는 않았으나 결코 흐트러지거나부주의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디에서도 기도의 정당성을 설명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를 그리스도인의 타고난 태도요, 영적 생활의 정상적인 표현으로 생각했다. 그의 기도는 때로는 조용하고 명상적이었고, 때로는 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늘까지 불타 올랐다. 그의 기도는 감사로 충만했으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가 그의 서신 가운데서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설교보다는 기도에서였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기도는 “계속 되풀이된다“는 의미에서 끊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롬 1:9/고전 1:4/엡 1:15, 16/골 1:3/살전 1:3).

이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이 찬양과 기도의 제목이었다. 또 그것은 사심이 없었다. 그의 기도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에 관한 것이었다. 중보 기도는 그의 영적 경험의 활력소였다. 회심자들과 그가 세운 교회를 위한 그의 기도는 모든 세대의 본이 된다. 그 기도들은 그가 그들의 성장과 발전에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지 나타내 준다. 골로새서 2장 1절에서 3절까지의 그의 기도의 간구는 새신자들과 새로이 세워진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의 기도는 꿈꾸는 몽상이 아닌, 분투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 특성을 가장 생생하고 강한 모습의 언어로 사용하여 그리고 있으며, 사람이 일상적인 노동을 하듯 지칠 때까지 수고하면서, 상을 얻기 위하여 경기장에서 다투는 운동 선수처럼, 생명을 걸고 싸우는 군사처럼 가장 꾸밈없이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응답을 크게 확신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응답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그의 기세를 조금도 꺾지 못했다. 끊임없이 초자연의 영역에 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중재를 기대했다. 기도가 부적당한 환경이란 없었다.

어쨌든 바울은 자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열망하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할것을 권면했다. 그는 새로 회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요청하고 있다(살전 5:25).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

그는 자기를 위한 그들의 기도를 예의상 추가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사역에 결정적인 요소로 보았다.

“이것이 너희 간구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빌 1:9).

그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엡 6:19), 전도할 문이 열리도록(골 4:3), 또 구원을 위하여(갈 1:4) 기도해 주기를 바랬다.

바울의 기도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으며, 그 정신은 겸손하고 경건하며, 형식면에서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드러내고 있으며, 표현에 있어서는 열렬하고 확신에 가득차 있다.

다음 장에서는 선교사의 본으로서의 바울을 다루고자 한다.

 

 

 

 

바울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바울이 갖고 있었던 로마 시민권은 오늘날 기독교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 가운데 겪는 두 가지 어려움을 면제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치외법권이 없었다. 그리고 외국 땅이 없었다. 바울이 가는 곳은 어디나 그의 정부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에 가서 외국의 사법권에 순종해야 하는 외국인으로 일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제국의 어디에서나 자유로웠다. 그가 빌립보나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호소했을 때, 그는 외국 나라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는 모두 다 국내 선교 사역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선교 사역은 자기 나라 국기 아래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로는, 바울은 자기 문화권으로 갔다는 점이다. 그가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그와 거리가 없었다. 기독교는 19세기 동안 동서를 멀리 떼어 놓았다. 확실히 동서는 서로 떨어져 있고 선교사들은 다양한 습관, 생활방식, 소비 규모, 사상, 전통에 있어서 큰 간격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우리들처럼 그런 간격을 뛰어 넘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기와 똑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많은 집단들에게 동료 시민으로 갔다. 하나로 통일된 제국 안에서는 오늘날의 선교사들이 직면하는 문제점들, 즉 자립 문제, 선교사와 자국 교회와의 관계, 선교자금의 사용 등의 문제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 선교사는 이러한 문제가 아닌 그들 자체의 어려움을 안고 사역을 하였다.

-스피어(R. E. Speer)

 


이 그러하며, 그의 모습은 2,000년간 점점 더 높이 우뚝 세워지고 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그의 선교적 열심의 뿌리가 되는 원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이론도 있다.

맥기퍼트(McGiffert)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회심 전부터 바울은 랍비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것은 자기생애를 참된 의를 전파하는 데 헌신하기 위해서였으며, 의가 발전되는 것을 막는 모든 것과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모든 것을 타도하기 위해서였다“(행 22:3/빌 3:5-6).

그의 회심은 이러한 선교적 열정을 없애기보다는 그 열정을 더욱 강화시키고 그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다.

첫 번째 기독교 선교사인 바울의 가르침과 모범은 모든 세대를 위한 성공적인 사역의 원리를 세워 놓았다. 그는 세상의 어느 선교사보다도 하나님의 패턴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의 이익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되고 독특한 자질을 갖추고 있던 그리스도의 도구였다. 다른 선교사들은 한 대륙에 복음의 문을 열어 놓았으나, 바울은 온 세상에 열어 놓았다.

 

소명

 

그의 소명은 매우 독특하고 분명한 것이어서 잘못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이에 대해 증거하였다.

“주께서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이 악명높은 핍박자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맞아 들인다는 것이 아나니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두려운 일이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16).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가 평생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받아야 할 훈련에 대해 덧붙여 말씀하셨다.

그의 소명이 그를 선교사로 만든 것이 아닌 반면에, 소명은 그의 선교적 열정의 방향을 명확하게 해 주었다. 그는 이제 바리새인의 선교사가 아닌 그리스도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충성은 율법이 아닌 자기를 사로잡으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바쳐졌다. 점차적으로 그는 이 부르심이 자기 삶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획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행 13:46/ 18:6/ 22:18-21/ 26:16-18).

 

훈련

 

바울은 종교적, 지적으로 우월한 독특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쓸모있게 사용받기 위해서는, 그 영혼의 열심이 꺼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 불타오르는 영혼이 단련을 받아야만 했다. 이것을 위해 물러나 고독한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의 생애에 변혁이 급작스럽고 완벽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의 사고를 재조정하고 신학을 정립할 시간이 필요했다.

스피어(Robert E. Speer)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역은 스릴이 있는 것이었으나 그는 새로운 사역 가운데 즉시 뛰어들지 않았다. 그는 물러나 오랫동안 조용히 묵상 가운데 있었다. 핍박의 뜨거운 흥분이 그가 냉정을 잃도록 하지는 못했고, 그는 지혜롭고 고요한 하나님의 영에 인도되어 물러가 내적인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에는 남의 것을 빌려온 것이 아닌, 독창적이고, 하나님께 받은 신선한 자기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영적 학교에서의 이 특별 훈련은 아라비아에서 지낸 3년 내지는 그 이상의 기간이었다(갈 1:17-18). 무한히 한적한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복음을 가지고 나갈 자기 사자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다. 선교사 후보자들에게는 항상 그들의 조급한 열정에는 지루한 예비 훈련을 단축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초기의 훈련을 충성스럽게 받을 때에 더 큰 기회에의 엄숙한 위임을 위해 준비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사역을 위해 더 넓은 지역으로 떠나기에 앞서 자기 고향 다소에 가서 자신이 사역자임을 입증했다(행 11:25).

 

야망

 

바울이 영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사정없이 자신을 몰아치는 일들이 있었다. 그는 중생하기 전의 야망과는 정반대가 되는 이 새로운 야심에 대해 세 번 이야기하고 있다. 예전의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을 근절시키고 교회의 영향력을 뿌리뽑으려는 것이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며“(행 9:1).

이 야심은 그가 하늘의 환상에 사로잡히기까지, 새로운 정복지로 그를 몰아 넣었다.

그의 야심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야심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왕국의 발전속에서 새로운 중심을 찾았다. 바울은 항상 현상 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하여 새로운 목표를 향해 분투하였다. 이제 그는 자기가 근절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영적 축복을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라“(롬 1:11)고 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야심의 특징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어떠한 고난이나 사역도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그는 이 야심을 갖고 충성스럽게 사역하였다.

그의 야심은 행동면에서 볼 때 냉정하고 근면하고 자립적이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살전 4:11, 12).

그는 항상 자기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것이 생업의 의무를 면제해 주거나 부적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훈계하였다. 그는 경건한 게으름뱅이가 될 시간이 없었다.

그의 야심을 업적면에서 여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5:20, 21).

바울은 예민한 영적 폐쇄 공포증으로 고통받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는 전진을 향한 만족할 줄 모르는 정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울타리 안에 있고자 하지 않았다. 그가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 22:21)하신 부르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임무에 충실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국경선을 모르는 세계 시민으로서 끝없는 비젼을 가지고 나라들을 넘나들었다. 필요를 채워주어야겠다는 것이 그에게는 억제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고린도로, 로마로, 스페인(서바나)으로 가장 멀리 있는 로마 제국의 경계와 알려진 세계를 다 돌아다녔다.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서바나로 가리라“(롬 15:24, 28).

이것은 다른데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세대의 교회에 대한 본이 된다. 오늘날의 교회는 마땅히 모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할 야심을 가져야 한다. 이 세상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케 하는 것만큼 고상한 목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유사한 야심이 모든 위대한 선교사의 상상과 마음을 불태워 왔다.

 


무언가 숨겨져 있다. 가서 그것을 찾으라.

멀리 가서 찾아 보라.

무엇인가 잃어 버려진 그 먼 곳에 가서.

잃어버린 바 되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가라!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백성이 준비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감추어 놓으셨으나

그 때에 주께서 나를 전파자로 택하셨고

나는 그것을 찾았노라.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것이라.

-키플링(Kipling)

 


바울의 야심은 본질적으로 헌신적인 것이었으며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사욕이 없는 사랑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대한 가장 좋은 실례였다. 바울의 전통을 따라서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탐욕이나 야심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 온전한 번제로 드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우기를“ 열망한다고 말했다.

 

동기

 

이러한 불타오르는 야심은 오직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점화될 수 있었는데, 바울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그의 선교적 노력을 자극시켰던 요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가장 강한 요소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끄는 힘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다메섹 도상에서 그의 반항적인 마음을 깨뜨려 사로잡으셨던 사랑이 그가 육체밖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때까지 그를 사로잡으셨다. 바로 이것이 그로 비할데 없는 수고와 고난을 감당하도록 용기를 북돋우었다.

그리고 또한 피할 수 없는 의무감도 있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바울은 자기가 발견한 것을 나누고자 하는 진정한 선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두를 포용하는 의무감이 모든 인종적인 장애와 문화적 차이를 뛰어 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목적 안에 포함이 되며 모두가 구원을 받을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다. 사회적 지위, 부와 빈곤, 문명이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는 그의 빚을 갚아야만 했다.

 

유리한 입장

 

헬라 도시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세계 선교사로서 독특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는 로마인의 실용성, 헬라인의 융통성, 히브리인의 강인성 등 세 민족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권은 오늘날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당하는 압력을 면제시켜 주었다. 로마시민에게는 외국땅 같은 것이 없었다. 치외법권이라는 곤란한 문제가 결코 제기되지 않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의 나라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제국은 모두 같은 문화권이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는 없었다. 기록되어 있는 세번의 경우에 그는 자기의 로마 시민권에 대해 하나님을 송축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행 16:37/25:10/27:24).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바울은 유대인의 복잡한 입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을 그들의 경전을 가지고 논박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당시 가장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행 22:3)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율법 지식과 학문을 논란할 수 없었다. 그는 또한 그 당시의 철학 체계에도 능통하였기 때문에 그 추종자들을 그들의 이론에 근거하여 논박할 수 있었다.

그가 소년 시절에 배운 장막을 만드는 일이 생계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교회들에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게 권면하고 책망까지도 할 수 있었다. 즉 종종 재정 원조에서 오게 되는 부담이 없었던 것이다.

 

불리한 조건들

 

이러한 장점들이 그의 선교 사역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반면에, 바울은 몇 가지 심한 핸디캡으로 괴로워하였다. 그는 자신과 때로는 동역자들을 위해, 종종 밤낮으로 일해야 했다. 놀라운 일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가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주 설교할 마땅한 장소조차도 없었다. 말썽꾸러기로 회당에서 바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는 동역자들의 배반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바나바, 후메내오, 빌레도, 부겔로, 허모게네 등의 일이다. 쓰디쓴 경험을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느니라“(딤후 1:15).

그는 그를 따라다니며 사역을 방해하려고 하는 거짓 선생들과 율법가들의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은 그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그의 사도직에 도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택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방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의 회심자들이 항상 견고했던 것은 아니었다. 육체적인 고난은 일상적인 경험처럼 보였다. 지치고 고통을 당하고 배고프고 목마르며 춥고 벌거벗으며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며 돌에 맞고 배가 파선을 당하며 땅에서와 바다에서 위험을 당하는 것은 선교사로서의 체험의 한 부분이었다(고후 11:23-28).

이러한 곤경과 고난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본보기가 된다. 그는 수동적으로 그것들을 견디어 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것들을 사랑하였다(고후 11:30). 그는 그것들을 순전한 악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겸손케 하는 도구로 여겼다(고후 12:7). 그것들은 그에게 은혜의 통로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제거하시기보다는, 그것들을 슬기롭게 견디어 내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고후 12:9). 그것들조차도 자랑과 기쁨의 제목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인도하심

 

그가 회심하는 즉시, 하나님의 선교 사역으로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사역은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사역을 한 후에야 시작되었다. 그 교회는 여러 인종의 지도자가 있는 세계주의적인 교회였다. 지도자들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동안 성령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

바울은 자기가 받은 부르심이 그가 협력하고 있는 교회에 확인되고, 그들이 그 부르심을 확인해 줄 때까지 선교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3).

교회 지도자들의 협조적인 지도자 또한 바울이 받은 개인적인 인도하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안디옥 교회는 이와 같이 다른 교회들이 다투어 따를만한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선교사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그가 협력하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인준을 받는다는 것은 교회와 선교사 모두에게 대단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바울이 교회가 파송한 자기보다 더 경험이 많은 동역자와 함께 얼마동안 동역했다는 것은 의미깊은 일이다. 제 1차 전도 여행 때뿐만 아니라 제 2차 전도 여행 때에도 얼마동안 함께 동역했다.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 선배 선교사 밑에서 함께 일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의심할 바 없이 이 경건한 사람은 이 훈련 기간 동안 바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그의 후배가 급속히 성장하여 마침내는 팀의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 바나바가 그를 질투하였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있다.

마게도니아에서 소명받은 경험(행 16:6-10)은 최초의 선교적 소명을 받은 예가 아니고, 이미 최초의 소명에 응답한 사람을 특정한 사역의 분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사역의 시기와 장소를 선택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아시아와 비두니아에는 나중에 말씀이 전파되었다. 이 시기에는 메시지가 서방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었다. 유럽은 추수를 위해 무르익어 있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민감한 바울은 성령의 막으심에 순종하여, 자기 뜻대로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드로아에 머물러 기도 가운데 그의 동료 사역자와 함께 의논하며 하나님의 지리적인 뜻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먼 미래의 결과가 그의 순종에 달려 있었다.

바울이 지상 명령(마 28:19-20)에 순종한 후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았다. 이것이 그를 인도해 주는 유일한 한 가지 요소였다. 그는 첫 번째 임무를 끝마치고 아직 복음에 접한 일이 없는 광대한 지역을 향해 나아갔다. 환상을 본 후에도 그는 동료들과 함께 그가 받은 인도하심을 점검해 보았으며 그 때의 모두는 성령의 역사로 한 마음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라.“

 

이와 같이 그는 마게도니아로 출발하기 전에, 그 환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며 성령의 증거가 있으며, 형제들에게 동의를 받으며, 그의 판단에도 인정이 가는가를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이렇게 재확인하였기 때문에 그는 대적당하거나 채찍맞아 등에 피를 흘리며 빌립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방법

 

바울이 마게도니아 사람의 부름에 응답하여 유럽에 들어갔을 때, 이 세상을 포위하게 될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 그가 택하였던 방법들은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그 이후 수 세기 동안 비슷한 결과를 맺어 왔다.

사도 행전은 최초의 선교 입문서로 선교의 역사와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전형적인 설교의 장면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으며, 모든 세대를 위한 선교 사역의 훌륭한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다. 실패도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서 원리와 방법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세계 복음화에 흔히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논평이다. 이 책은 의미깊게도 평균 한 세대인 30년 간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새 시대 여명기에 불쌍할 정도로 약한 일군의 남녀들을 통해 그들의 일생 동안 어떠한 일들이 성취될 수 있었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여 주고 계시다. 이 영감된 기록과 오늘날의 선교 현실을 비교해 볼 때, 놀랍게도 모든 종족가운데 부딪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전면적인 전략에 그의 책략을 택했다. 그의 행동을 살펴 볼 때 그는 점차적으로 대도시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도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장 유력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계속적인 교회 성장을 확보했다. 그는 신자 각자가 자신을 복음 전파의 중심으로 생각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는 집중적인 개인 전도와 더불어 멀리 순회하며 복음 전도에 힘썼으며, 언제나 새 지역이 주님의 주권 하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롬 15:19, 20). 그는 그리스도 이전에 세계를 저주했던 세 가지가 그리스도안에서 제하여졌다는 것을 전파했다(갈 3:28). 복음은 모든 종족과 계급,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위한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전 9:22)는 말은 결코 헛된 자랑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복음 전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비젼은 그 자신이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도구가 되어 세운 교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일을 성취시키시는 데 있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그는 진리에 응답하는 남자와 여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신앙 고백 위에, 그는 단순하고 융통성있는 조직을 가지고 있는 자립 공동 사회를 세웠다(행 14:23/ 딛 1:5). 그는 복음의 씨만 뿌리고 떠나 버리는 것에 만족치 않고, 복음의 가치를 들고 나갈 영구적인 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목표를 위해 아직은 초기 상태인 하나님의 진리를 조심스레 소개했다. 일단 이 교회들이 세워지면, 그는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거나, 돌아가서 방문을 하거나, 동료 사역자를 보내어 그들의 증거를 도움으로써 계속적인 교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의 생명이 그들의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다.

“너희가 주 안에서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

그의 사랑의 열정이 이와 같았다.

그는 죄의 보편성과 그에 대한 십자가의 충족성에 관한 보편적인 복음을 전했다(롬 1:3-5/3:29-30/5:7-8).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신다는 것과 그가 확실히 세상을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고전 1:24/빌 2:9-11).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회심한 직후에 그들에게 준 그의 폭넓은 교훈은 인상적이다. 그가 불과 한 달도 못되는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가 다룬 교리의 기초는 놀라고도 남음이 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의 행실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자기보다 자질이 덜 갖추어진 사람들에게 책임을 위임하는 데 대가였다. 다른 이들을 훈련시켜 그들에게 일을 맡기곤 했다. 그의 동료 사역자들은 종종 다른 민족, 다른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기꺼이 돕고자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그러한 기대가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가 되었다. 그는 장래성있는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쳐서, 그들을 책임감있는 위치에 세웠다(행 16:1-4/엡 6:21-22/빌 4:3).

그의 깊은 우정은 동료 사역자들을 그에게 묶어 놓았고, 그가 도울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들은 그들의 젊음과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들을 용기있게 직시할 수 있었다. 그는 재정적인 동기를 주지 않았고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후원을 받지 않은 반면에, 후한 대접은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이러한 유리한 위치에서 그는 자유롭게 희생적인 헌금을 강하게 권면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회심자들에게 자신의 것과 같은 기준을 세웠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며, 얼마나 훌륭한 선교사인가! 파라(Farrar) 학장은 바울의 자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바울은 베드로처럼 정력적이고 요한처럼 명상적이었다. 바울, 그는 이기심이 전혀없는 영웅, 바울, 종교적 자유의 위대한 옹호자, 바울, 크리소스톰(Chrysostom)보다 더 위대한 설교자, 사비에르(Xavier)보다 더 위대한 선교사, 루터(Luther)보다 더 위대한 개혁자이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보다 더 위대한 신학자, 바울, 그는 이방인을 위한 영감받은 사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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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주요인물 30인

  


 

1 고넬료(Cornelilus) - 뜻: 뿔

 

로마군대의 백부 장이었으며 이방인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함으로서 최초의 이방인으로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 된 자. 고넬료는 가이사라에 살고 있는 군대의 백부 장이었다.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으며 늘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욥바에 사는 베드로를 청하여 들으라고 한다. 또한 베드로에게도 계시가 있어 가이사랴에서 찾아오는 이방인의 청을 거절하지 말고 청에 응해라 하니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초대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 님에 대해서 말할 때 성령이 임하여 그 방에 있는 모두가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의 높임을 듣게 되었다. 베드로가 우리 함께 성령을 받았으니 어찌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안줄 수 있느냐하며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리하여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며칠 더 묵어가기를 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이는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고넬료의 믿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2 나사로(Nazarus) - 뜻: 하나님의 도움

 

나사로는 신약 성경에서 두 사람이 나타난다. 1. 하나는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로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려낸 참으로 행복한 나사로 이고(요 11:4) 2. 또 한 나사로는 비유로 가르치실 때 쓴 거지 나사로도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나사로는 천국에 갔다고 말씀하셨다.(눅 16:22-23)

 

첫 번째 베다니의 나사로는 예수 님이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로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비유로 말씀하신 나사로는 예나 지금이나 빈부의 차이가 극심한 것을 생각하면 부자와 가난한자의 비유로 우리한테 주는 시사가 많다.

 

나사로는 부자가 버린 음식찌거기로 연명하였으며 몸도 엉망이어서 전신이 곪아터진 상태이었다가, 둘 다 죽어서 나사로는 천국의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고 부자는 음부에서 뜨거운 불꽃가운데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렇게 뜨거운데 에서 고통 받고 있으니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뭍여 내혀를 적시는 일이라도 할 수 있게 청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

 

스스로 다 위로 받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위로할 일이 없도록 우리는 너무나 욕심이 많지 않은지 생각해 볼일이다.

 
 

3 노아(Noah) - 뜻: 위로, 휴식

 

아담의 8세손으로 당세의 의인이며 완전한자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관영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를 선지자로 삼아 120년 동안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류를 멸하시었다. 노아만이 의로운 사람이며 순종하였음으로 방주를 만들게 한후 40일 동안 비를 내리게 하여 방주 안에 있는 생물이외는 모든 생물은 다 멸해버리었다. 1년 10일 동안 방주에서 생활한 모든 생물이 모든 생물의 새로운 조상이 되었다. 홍수 때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 부부, 아들 셋, 며느리 셋, 도합8명이다. 노아는 그 후 350년 더 살다가 950살에 죽었다(창 9:) 시대가 악하여(눅 17:27) 홍수로 진멸하시고자 할 때 오직 노아만이 의로운 고로 방주를 만들고 피하라 미리 지시하였다.

 
 

4 니고데모(Nicodemus) - 뜻: 이긴 백성

 

바리새교인이며 유대 율법사이며 산해드린 공회 회원이었다. 예수님께 밤에 직접 찾아와 도를 물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 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라고 말씀하심.

 

(요 3:2-3)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오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 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 다윗(David) - 뜻: 사랑하는 자

 

아브라함의 14세손 이새의 여덟째아들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통치자. 베들레헴의 양치는 소년이었으나 물맷돌을 들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나아가 블레셋 대장 골리앗을 쳐 죽이고 승전하였다(삼상 10:10-13). 후에 사울 왕에 이어 이스라엘의 2대왕이 되어 이스라엘이 왕정국가로서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 국권을 떨친 이스라엘 왕이다(삼상 16:1-13). 다윗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고 그 분의 말씀 데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인간적인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하나님은 그를 크게 쓰셨던 점이다.

 
 
6 드보라(Deborah) - 뜻: 벌

 

랍비 돗의 아내로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여 선지자겸 사사(*왕정이전에 이스라엘 통치자)의 일을 겸임하였다. 그때는 가나안 왕 야빈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에 의해 이스라엘이 심히 학대받고 있었다. 그런데 드보라가 여호와의 명을 받아 바락을 시켜 납달리 자손과 스볼론 자손 일만 명을 모으게 하고 다볼산에 미리 오르게 하고 시스라의 군대를 유인케 하여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시킨다. 이같이 드보라는 비록 여자였지만 통찰력과 판단력이 예민하고 정확하였고 영감이 풍성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문제를 잘 재판하였다. 사사기 5장에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노래하며 기록한 시는 "드보라의 노래"로 히브리 인의 산문시중에서 유명한 시가 되었다.(삿 5:) 다음은 드보라의 노래의 일부이다.

 

(삿 5:1-3)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양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7 디도(Titus) - 뜻: 공경한다

 

헬라인으로서 신실한 성도의 표상이며 바울의 동역 자요 초대교회의 목회자. 파울의 두터운 인간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사역에 크게 기여한 신앙의 사람이며 영적 지도력과 자상함을 겸비한 신앙의 표본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디도를 보내면서 편지(고린도후서)를 보내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디도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 디도에 대한 바울의 믿음을 알 수 있다.

 

(고후 8:23-24) 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 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디도서는 디도가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바울사도가 직접 디도에게 보낸 목회서신이다.

 
 

8 디모데(Timothy) - 뜻: 하나님을 공경한다

 

소아시아의 루가오니오 사람으로 바울과 함께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로마등지에 순회전도하니 바울이 그를 가리켜 나와 함께 동행하는 자라 하였고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하였다(고전 4:17).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에서 사역하였으며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 디모데 전.후서이다.

   

9. 라합(Rahab) - 뜻: 넓다

 

여리고에 있는 가나안의 기생으로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의 일가도 함께 구원을 받은 신앙의 용사로 인정되었으며 예수의 선조의 한 사람이 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여리고 성의 사정을 정탐하기 위하여 파송된 정탐꾼을

기생 라합이 숨겨주고 살려 보내 줌으로서 구원을 얻었다(수 2:1-6)

 

10 마리아(Mary) - 뜻: 높여진 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목수 요셉의 부인 예수님 이외에 야고보, 유다, 요셉, 시몬과 여러 명의 딸을 둠.

 

(눅 1:30-35)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되고 지극히 높은 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11 마리아(Mary)

 

주께 헌신한 믿음의 여인. 예루살램 교외의 베다니 출신. 마르다의 동생이며 예수 님께서 무덤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요 11:1) 예수가 마리아 집에 방문했을 때 그의 발치에서 말씀을 경청하여 예수 님의 칭찬을 받았으며 (눅 10:38-42), 나사로를 살리시었을 때는 감사의 표시로 예수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려(요 12:3:마 26:7) 이는 장차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것이라고 예수가 말함(마 26:12-13).

 

(요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 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2 마르다(Martha)

 

헌신적인 봉사의 여인. 예루살렘 교외의 베다니 출신. 마리아의 언니이며 예수 님께서 무덤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로 실질적인 가장역할을 함. 예수가 마르다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의 동생 마리아가 자기의 일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다 오히려 예수 님께 꾸중을 들음(눅 10:38-42). 나사로를 살리시었을 때는 감사의 표시로 잔치를 베풀어주고 예수님만이 나사로는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짐(요 11:1-44). 같은 자매이지만 성격은 다르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 말씀에 대한 사모의정은 들다 컸다.

 

(요 11:38-41)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3 막달라 마리아(Mary)

 

은총에 감사한 여인. 갈릴리 서쪽 막달라 지방에 거주하였으며 상류계층으로 풍요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시달림을 당하다가 예수에 의해 치유 받음(막 27:56 : 막 16:9). 귀신이 쫓겨나자 예수께 감사하고 이후로는 예수를 뒤에서 늘 따르고 예수님이 가시는 데에는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 있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뒤를 항상 따랐으며(마 27:56) 빌라도의 법정, 갈보리산의 십자가형과 예수의 임종, 무덤에서 시체가 매장 당하는 것까지를 다 지켜보았다. 죽은 지 삼일 후에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가 최초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이를 베드로 요한 등 사도에게 알리게 된다(마 28:1-9:막 16:9: 요 20:1-16). 이같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후로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예수께 헌신한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다.

 

(마 28:1-10) 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우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 사대 평안 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 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4 모세(Moses) - 뜻: 물에서 건져 냄

 

통속적인 설명으로는 "건져 낸다"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노예 생활에서부터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인도한 위대한 종교 지도자이며 정치가이다. (애굽을 나온 것은 1290년 경). 모세는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낳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이다. 당시 애굽의 박해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물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왕녀가 발견하고 데려다가 양자를 삼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로 들어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간 양육 받으며 애굽의 학술에 통달하였다(행 7:22).

 

40세 때 동족을 학대한 애굽인을 살해한 후 미디안으로 도망하여 은거하여 있다가 80세에 호렙산에서 여호와의 부름을 받고 형 아론의 도움을 약속받아 애굽으로 돌아와 6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급의 파란만장한 대 자정을 이끈 이스라엘 역사의 지도자. 이로부터 40년간 이스라엘 지도자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 역사적인 지도자로 활약. 120세에 여호수아에게 대권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남 (출 12:51: 3:10).

 

(출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5 바나바(Barnabas) - 뜻: 권위자, 위로의 아들

 

기독교 최초 개종한 한 삶의 이름이다. 레위 사람으로 본명은 요세이다. 성품이 온유하고 재능이 다양하여 당시 사람들이 바나바를 권위자라고 불렀다. 성신을 받은 후에 토지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바쳐 구제 사업에 쓰게 하였다(행 4:36-37). 사울이 회개한 후 예루살렘에 가서 교우들을 만나고자 하나 모두 핍박자로 알고 두려 워 만나지 않을 때에 바나바가 데리고 가서 잘 소개하였다(행 9:26 -27). 5년후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가 왕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시찰차 파송하였다(행 11:20).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에 와서 같이 전도하여 대 부흥을 일으켰다 (행 11:25-26). 주후 45년 바울과 같이 안디옥 교회에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오 는 길에 생질 마가를 데리고 왔다(행 11:30, 12:25). 특히 바나바는 사도바울의 난처함을 돌보아 주는 것을 통해 위로의 아들임을 보여준다(행 4:37:9:26-27)

 

(행 9:26-27)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16 바디메오(Bartimaeus) - 뜻: 디메오의 아들

 

예수님이 여리고성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뛰어나와 구원을 청한 소경으로 눈 고침을 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46)

 

(막 10:46-52)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17 삭게오(Zacchaeus) - 뜻: 순결

 

여리고성의 세리장(세무서장)으로 키가 작았다. 부정 축제로 큰 부자가 되었으나 그의 직업과 그의 불의한 행동 때문에 동족들의 멸시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도 군중들 틈에 끼어 예수를 만나려 했으나 키가 작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마침 옆에 뽕나무가 있어 위에 올라가 예수를 보았다. 이때 예수님은 뽕나무 아래서 발을 멈추시고 삭개오를 불러 내려 그의 집에 묵어가시겠다고 하였다. 그날 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기가 지금까지 축적한 제산 중에 억울하게 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노라 군중 앞에서 선포하였다(눅 19:1-10)

   

18. 에스더(Esther) - 뜻: 별
 

죽으면 죽으리라! 는 비장한 각오로 자기 민족을 구원한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 본명은 하닷사인 것을 왕후의 위에 오를 때 에스더라고 고쳤다. 아비하일의 딸로서 어렸을 때 조실 부모하고 4촌 오빠인 모르드개의 양육을 받아오던 중 왕후 와스디가 폐출 당한 뒤 전국에서 모여온 수많은 아리따운 처녀 중에 내시 헤개의 추천으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간택되어 왕후가 되었다 (에 1:19, 2:7-9, 16-18).

 
총리 하만이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모르드개에게 분노하여 전 유대 민족을 죽 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모르드개가 이것을 알고 에스더에게 편지하니 에스더가 왕에게 고하여 그 일을 뒤엎고 전날 왕을 암살하려던 자를 알려 주어 화를 면케한 공로가 있는 모르드개로 총리를 삼고 유 대인을 칙명을 취소하는 동시에 유대인에게 자유권을 주고 적대 행동을 하려던 자를 다 죽였다(에3:5,6, 4:1, 7:-8:).
 

(에 4:1-17) “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5. 에스더가 왕의 어명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라 하매 6. 하닥이 대궐 문 앞 성 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7.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를 하닥에게 말하고 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9. 하닥이 돌아와 모르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알리매 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12. 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19 엘리사 (Elisha) - 뜻: 하나님의 구원

 

소명 : 아벨므홀라인 사밧의 아들로 소 12겨리로 밭을 갈고 있을 때 엘리야가 지나 가다가 겉옷을 벗어던지며 부르니 농구를 불살라 소 한 겨리를 잡아 백성에게 주어 먹이고 엘리야를 따라가 제자가 되었다(왕상 19:16-21). 8년 후 엘리야가 승천하려 할 때에 세 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여도 듣지 않고 끝까지 따르매 "네 요구가 무엇이냐"고 물은즉 당신의 영감을 배나 달라고 구하여 받아 가지고 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어가지고 돌아와서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였다.

 

이적 : 이스라엘 왕 여호람부터 요아스 시대까지 그가 행한 이적은 다음과 같다.

 

(1)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쳐서 갈라지게 하고 건너왔다(왕하 2:13-14).

 

(2) 불결한 몸에 소금을 넣어 음료수를 만들었다(왕하 2:20).

 

(3) 벧엘로 가는 길에서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조롱할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42명의 아이들을 찢었다(왕하 2:23-24).

 

(4) 유대와 에돔이 동맹하여 모압왕과 싸울 때 물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물을 내어 그 지경에 가득하게 하였다(왕하 3:20)

 

(5)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에게 기름을 만들어 주어 빚을 갚게 하였다(왕하 4:7)

 

(6) 사렙지방 여인에게 아들을 낳게하고 그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렸다(왕하 4:17,35)

 

(7) 우물물의 독을 제거하였다(왕하 4:41).

 

(8) 바알살리사에서 보리떡 20개로 백명을 먹이고 남았다(왕하 4:40-44)

 

(9)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왕하 5:24 눅 4:27).

 

(10) 자기 종 게하시에게 문둥병을 주었다(왕하5:27)

 

(11)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왕하 6:6).

 

(12) 자기 사환의 눈을 밝게 하여 불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호위한 것을 보여 주었다(왕하 6:17).

 

(13) 아람 군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로 인도하고 그 눈을 다시 밝게 하여 사마리아 성중에 있는 것을 보게 하였다(왕하 6:18-20).

 

(14) 엘리사가 죽은 다음 해에 어떤 사람이 죽은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 놓았더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났다 (왕하 13:2-21)

 

예언 : (1) 아람군사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 물가가 폭동하여 배가 고파서 자식을 잡아먹는 자가 생겼다(왕하 6:24-29)

 

(2) 엘리사가 곡가가 폭락할 것을 예언하였더니 주가 아람군대에게 병거와 병마의 소리와 군대의 큰 소리를 들리게 하시니 그 소리에 놀라 다 도망가니 예언대로 곡가가 폭락 하였다(왕하 7:1-7,16)

 

(3) 하사엘이 아람왕이 되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것을 예언함(왕하 8:1-15)

 

(4) 선지자의 생도 중 한명을 불러 길르앗 라못에 가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될 것을 예언하게 하였다(왕하 9:1-10)

 

(5) 임종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아람을 세번쳐서 이길 것을 예언한 후 별세였다(왕하13:18) 그는 천성이 청렴 강직했고(왕하 5:15-16), 엘리야는 왕가의 핍박을 받으면서 지냈으나 그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한 관계로 왕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가 엘리야를 따른 것은 베드로와 비슷하고 이적을 많이 행한 것은 예수님의 비교할 수 있다.

 

엘리사는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엘리사의 사역은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한 구국과 애족의 선지자였다. 엘리사는 여리고 지역의 폐수를 소 금을 섞어 양질의 물로 변화시켰다. 그 후 여리고 지역은 농산물과 식수의 염려가 없게 되었다. 그 외에도 신비한 기적을 어느 선지자보다도 많이 경험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크게 나타낸 선지자였다.

 

그 중에서도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자가 되었을 때 요단강에 일곱 번 씻게 하여 그의 병을 고쳐준 사건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왕하 5장).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냈고 나라의 체통을 세웠으며 아무런 예물을 받지 아니하므로 선민의 품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아람군 대가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 도단 성을 포위했을 때 아람 군대보다 하나님의 군대(불 말과 불 병거)가 더 많은 것을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그 뒤 아람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을 때 기근으로 주려 죽게 될 무렵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왕하 7:1) 한 예언과 같이 병거소리와 말소리, 큰 군대의 소리로 인해 아람군대가 도주하여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 엘리사는 66년간 큰 선지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다.

 

교훈과 적용 : 첫째, 선지자는 선견자일 뿐만 아니라 한 시대와 한 민족을 깨우치고 지도하는 영적인 안내자이다. 둘째, 엘리사의 권고를 듣지 않은 북조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권고를 듣자.

   

20 엘리아 (Elijah) - 뜻: 여호와는 하나님

 

[1]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 가장 무서웠던 예언자. 북왕국 아합왕(B.C. 876-854)과 아하시야왕 시대에 걸쳐 사역하였다.

 

(1) 디셉 사람(왕상 17:1).

 

(2) 아합 왕에게 예언하기를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 하고 그릿 시가에 숨어있을 때 여호와가 까마귀를 시켜 조석 식물을 날라다 주게 했다(왕상 17:1-7)

 

(3) 사르밧 과부집에 유숙하는 중에 한줌의 보리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여러 날을 먹었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고 그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려 주었다(왕상 17:8-24)

 

(4) 아합 왕 때에 왕과 백성이 바알우상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함으로 견책하고 아합왕에게 참신과 거짓 신을 가려내자 하여 바알선지 4백 명과 아세라의 선지 4백5십 명을 데리고 갈멜산에 올라가 송아지로 재물을 삼고 각기 자기의 신에게 기도하여 불로 응답함을 보자 하여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이 정오가 지나도록 외쳤으나 응답이 없고 엘리야가 여호와한테 부르짖을 때 불이 내려와 제물과 도랑의 물까지 모두 태워 버렸다. 즉시 백성들을 시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 850명을 기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 모두 죽였다.(왕상 18:19-40)

 

(5) 왕후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하므로 주의 천사가 어루만지고 식물을 주고 호렙 산굴에 있을 때는 여호와가 강한 바람과 지진과 작은 소리의 세 가지로 보이시고 명령하시기를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셨다(왕상 19:1-6)

 

(6) 농부 엘리사가 경작하고 있을때 자기 겉 옷을 던져 따라오게 하였다 (왕상19:19-21)

 

(7) 아합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뺏었을 때 왕 앞에 나타나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으리라 하였다(왕상 21:17-19)

 

(8) 이스라엘왕 아하시야가 사자 50명씩 두 번 보내어 오라 하는 것을 천화로 사루게 하고 세 번 째에야 가서 왕이 죽을 것을 예언했다(왕하 1:9-16)

 

(9) 승천하게 되어 엘리사에게 세 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였으나 떠나지 않으므로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니 당신의 영감을 배나 원한다 하므로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보면 성취하리라 하고 겉옷을 떨어뜨리고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왕하 2:1-11)

 

(10) 그의 심정과 재능이 세례 요한과 비슷하다 하였다(눅 1:17)

 

(11)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에 모세와 같이 나타나서 주님과 말씀하셨다(마 17:3)

 

(12) 야고보는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하여 주신다고 엘리야를 비유로 권면하였다(약 5:17)

 

*그는 험상한 모습과 탈속한 옷차림, 비호같이 빠른 걸음, 기근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건장한 모습, 굴에서도 살 수 있는 억센 습관이 그의 특색이었다. 여호와 신의 예배에 절대적인 선지자였고 국가 운명에 대하여 예민한 통찰과 염려를 한 애국적인 인물이며 구약 선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1 여호수아(Jehoshua) - 뜻: 여호와의 구원

 
[1] 사사 여호수아.

 

(1) 에브라임지파 눈의 아들로서 본명은 호세아다(민 13:8).

 

(2) 모세의 수종자가 되어 항상 회막곁에 있었다(출 33:11)

 

(3) 가나안에 보낸 12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 10지파의 정탐을 보고 할 때에 민중을 낙담케 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으나 여호수아는 갈렙과 같이 강경히 말하기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그들의 신은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니 두려워 말고 쳐들어가자고 하였다(민 13:1-14:10)

 

(4) 그래서 여호와가 20세 이상 된 자로 여호와를 원망한 자를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가리라 하셨다(미 14:26-32)

 

(5) 여호와의 명령으로 제사장 엘르아살이 회중의 목전에서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모세의 후계자를 삼았다(민 27:18-23).

 

(6) 여호아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개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같이 있으리라 하셨다(신 31:23)

 

(7) 모세가 죽은 후에 싯딤에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냈다(수 2:1)

 

(8)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12인을 택하여 언약궤를 메우고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너서 길갈에 진치고 여리고 성을 쳐서 취하는 동시에 전일 2인의 정탐꾼을 숨겼다가 돌려보내준 기생 라합을 구원하였다 (수 3:11-17, 5:10-15, 6:20-27)

 

(9) 아이 성을 치다가 패하자 그 장본인 아간을 잡아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쳐 죽인 후 아이성을 다시 쳐서 불살라 황폐케 함(수 7:4-29)

 

(10) 계속 가나안 7족을 멸하여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분배하고 자기는 에브라임산지 딤낫세라를 받아 그 성읍을 증건 하고 거기 거하였다(수 19:49-51)

 

(11) 살인한자를 위하여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도피성을 셋씩 건설하고 임종시에 백성을 세겜에 모으고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권면한 후 별세하니 110세 였다. 딤낫세라에 장사 하였다 (수 19: 수 20: 24:1,14,19,20; 행 7:45)

 

[여호수아]("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 는 그 이름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평생토록 헌신한 하나님의 종이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 눈의 아들로 태어난 여호수아의 본래 이름은 [호세아]("구원"이란 뜻)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혹독한 학대를 받으며 노예 생활을하고 있을때 태어나 자유를 구가할 해방의 날을 고대하며 성장하였다.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애굽의 억압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숨통을 죌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룬 모세를 따라 귀향길에 오른 여호수아는 모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려 40년간이나 모세의 부관으로 있으면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연단을 받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긍정적인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는 탁월한 군사적, 정치적 역량까지 갖추어 민족의 지도자로서 쓰임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결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는 여호수아는 결국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감당하기에 부족함을 아는 여호수아는 두렵고 떨릴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면과 약속의 말씀으로 큰 힘을 주시고 백성들까지도 지원하여 순종을 약속함으로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한 지도자로서 첫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성령 충만하여 지혜가 뛰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행력 앞에 요단강이 갈라지고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여호수아의 군대는 가나안 족속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하나님께 약속받은 땅을 점령해 나갔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이 야훼의 성전임을 아는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함으로써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여호수아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해와 달의 운행까지도 변경시키시고 그의 백성과 함께 전쟁에 임하시므로 이스라엘이 거두는 승리의 전과는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믿음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을 치루고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여호수아는 각 지파별로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자신의 몫에 욕심 을 내지 않고 먼저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토지를 분배해 준 여호수아는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산지만을 차지할 정도로 청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처럼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여호수아도 두 가지 실수를 보였다.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기브온 거민들과 언약을 맺음으로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씨앗을 남겼다. 또한 후임자를 육성치 못함으로 인하여 사사시대에 이르러 혼란을 야기케 하였다.

 

그러나 85세에 민족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아 110세에 죽음을 맞기까지 자신은 물론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스스로 본을 보인 여호수아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어떠한 위험이 다가와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약속의 땅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성경: 출애굽기 33장11절.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본명은 호세아였고 에브라힘 지파의 눈의 아들이었습니다(민 13:8). 일찍부터 모세의 수종자가 되어 측근에서 그를 도왔으며 모세의 감화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종교심이 강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청년기에 이미 영적인 사람으로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회막을 떠날 줄을 모르고 기도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출33:11) 또한 12명의 정탐꾼을 각 지파에서 선발하여 가나안땅에 파송하였을 때 여호수아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 열 사람의 불신앙의 보고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의 보고는 유명한 간증이 되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허락 속에 모세의 안수를 받고 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민 27:18-23). 그 후 가나안 7족속을 진멸하고 그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지도자의 궁핍을 느끼지 못 할 만큼 여호수아는 모세의 자리를 잘 지켰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선민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자기들의 사명을 만족스럽게 바로 감당했고 선민의 지도자의 자질을 잘 갖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교훈과적용 : 첫째, 여호수아는 영적인 자질도 좋았고 성막을 떠나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이 하나님의 큰 종이 되게 하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둘째, 12정탐꾼을 대신했던 그의 믿음은 그 민족을 대신한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22 요나단 (Jonathan) - 뜻: 여호와께서 주심

 

여기 소개하는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이며 다윗의 친구 요나단을 말한다. 사울왕이 군사 일 천명을 선발하여 요나단에게 맡긴 후 베냐민 기브아에 주둔 케하여 블레셋의 침공을 막도록 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군대의 용사로 다윗처럼 오직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운 신앙의 용장이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 14:6)

 

어떤 날 사울왕은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기 전에는 아무도 음식을 먹어서 안된다는 금식령을 선포했다. 요나단은 이 선포를 듣지 못하고 지팡이로 꿀을 찍어 입에 넣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사울왕은 맹세코 요나단을 죽이려 했으나 백성들의 탄원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삼상 14:27-52).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을 때 요나단은 그의 무용과 신앙에 감동되어 그를 영원한 벗으로 받아들이고 생사를 같이할 것을 맹세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나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 이었더라](삼상 20:17) 다윗은 요나단의 우정으로 인하여 몇 차례 위기에서 구원받게 되었으며 이 은공의 보답으로 다윗은 요나단이 길보아산에서 전사한 후 그의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에게 극진한 후의를 베풀었다(삼하 9:1 -13). 이들의 우정은 창공의 태양 같고 황야의 꽃처럼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참 신앙인들만이 쌓을 수 있는 금자탑과도 같은 것이었다.

 

교훈과 적용: 첫째, 사욕이 없는 사랑의 봉사는 그 자손에게까지 축복의 조건이 된다. 선한 일에 부요하자. 둘째, 다윗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 은혜는 우정에 대한 의리였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

 

23 요셉(Joseph) - 뜻: 그는 더하실 것

 

요셉은 라헬의 첫 번째 아들이며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는 성품이 온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대단히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 만득자로 얻은 아들이어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고 열한 단의 곡식 단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말함으로써 형들의 미움과 시기가 날로 더해갔습니다(창 37:3-11).

 

그 형들이 도단에서 양을 칠 때에 그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형들의 목장을 찾아갔습니다. 이때에 형들이 의논하여 요셉을 죽이기로 결의하였고 르우벤의 제의에 따라 구덩이에 넣게 되었으며 다시 유다의 제의로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을 받고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함께 포함되고 있음을 그림을 보듯이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애굽의 장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보디발의 아내가 끈기있게 유혹하였으나 단호하게 거절하자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반복되는 고통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첩경이 되었습니다. 자기가족을 애굽 고센 땅에 이주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을 애굽의 국장같이 치렀고 요셉도 1백10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모세가 그 유골을 들고 나와 세겜에 안장되었습니다(수 24:32)

 

교훈과 적용 : 첫째,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도 충성되게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받은 축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힘든 유혹을 물리쳤을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24 모르드게(Mordecai)

 

바벨론 신 마르닥에서 유래된 이름일 것으로 추측된다. 에스더의 사촌 오빠이며 양아버지(에 2:7).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가족은 여고니아와 같이 포로가 되었다(에 2:5-6). 아하수에로 왕 암살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였다(에 6:1-11). 여기서 우리는 모르드게가 에스더의 오빠로 알려저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며 에스더의 믿음이 워낙 두드러지게 이야기됨으로 모르드게는 그저 에스더의 오빠로서만 알려지고 있슴이 진정한 모르드게의 신앙이 무시되는 듯한 느낌이 있어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에스더 4장에 보면 처음부터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오빠 모르드게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비가 된 것도 다 이를 위하여 된 것이지 너와 네 가족의 안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압력이 있었기에 에스더가 그러한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됨을 다음의 두절에서 극명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모르드게의 믿음과 지혜가 에스더에 못지않음을 알 수 있다.

 

(에 4:13-14)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14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25 서위렴2세( William Hamilton Shaw)

 

한국의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마친 미 해군대위- 그의 아버지 서위렴 선교사가 그의 아들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목산채플을 건축하여 봉헌하니 이가 바로 목동캠퍼스에 있었던 대학교회였다.

   

26 아브라함(Abraham) - 뜻: 열국의 아버지

 

본래는 아브람 이었으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이라 고쳐주었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음. 신앙의 아버지라고 함.

 

27 이삭(Isaac) - 뜻: 웃음

 

아브라함이 100세에 사라에서 얻은 아들 이삭을 얻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슴. 40세에 외종형 부두엘의 딸 리브가를 아내로 취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으니 곧 에서와 야곱이다((창 20:1-5, 22:2-13).

 
 

27 나오미(Naomi) - 뜻: 나의 즐거움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의 아내, 룻의 시어머니.

 
28 룻(Ruth) - 뜻 : 자손

 

[1] 셈의 아들(창 10:22)

 

[2] 모압 여자로 시어머니에게 효성한 한 여자(룻 4:13, 마 1:5).

 

룻기 1장15-17절. 룻은 "우정"이라는 뜻이다. 룻은 모압여자로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모압에 이주해 사는 기간 그의 아들 말론과 결혼한 나오미의 며느리(룻1:4) 이후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고(룻1:5) 효성스런 며느리로(롯 1:6-18), 보아스와 재혼하고(룻 4:9-13), 오벳을 낳았다(룻 4:17). 그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다(마 1:5-16).
 

29 한나 (Hannah) - 뜻 : 자비

 

(1) 엘가나의 두 아내중 한 사람으로 사무엘의 어머니.

(2) 기도를 드려 사무엘의 얻어 하나님에게 바침 (삼상 1:1).

(3) 삼상 2:1-10의 한나의 찬가는 눅 1:46-55의 마리아의 찬가와 비교 된다.

 

[한나] ("은총"이라는 뜻)는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이다. 그녀는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므로 다른 아내로부터는 미움을 받았다. 즉 브닌나가 한나를 시기한 것은 한나가 갑절이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대한 반항이었다. 한편 한나는 나이가 넘도록 자식이 없었으므로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제사드릴 때에 " 만일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니다"라고 서원 기도를 드렸다.

 

유대인은 무자함을 일종의 저주로 비관했지만 한나는 누구를 원망치 않고 하나님께 하소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엘가나는 한나를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라고 위로하였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의 기도하는 것을보고 술에 취한 줄 오해하였지만 한나의 중심 소원을 들은 후 그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응답하시길 소원하였다. 한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져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으며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아들을 바쳤던 것이다(삼상 1장). 사무엘은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여기서 몇 가지 한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30 바울(Paul) - 뜻 : 작은 자

 

1) 출생과 교육 :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열심 있는 자이며(행 22:3) 청결한 양심으로 선조 때부터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고(딤후1:3) 할례를 받았고 자랑할 만한 베냐민 지파요 율법으로는 바리세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의 선두에서 핍박하던 사람이니 바리세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도무지 결점이 없는 사람이었다(빌 3:5-6).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다(갈 1:14).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행 22:26-28).

 

(2) 성격: 논리의 힘과 능력의 결합 즉 이성과 영력이 일치된 것이 특색이다. 결점이 있다면 너무 성급하여 후회하는 일이 있었던 점(행 15:39, 23:4-5). 자기 몸에 가시가 있다고 말한 것은 성격의 나무람 같다(교후 12:7).

 

(3) 회개: 기독인들이 율법을 경히 여기고 성전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었다(행 6:31). 스데반 죽이는 일에 가담한 것은 의분심에서 였다(행 7:5-4:3). 그 후 기독교인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였다(행 9:1-2).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크리스천이 되었다(행 9:1, 22:4, 26:9).

 

(4) 선교활동: 공중 앞에서 회개한 사실을 간증하고 전환된 마음을 수습하고 앞날을 위한 준비로 아라비아에 은퇴하여 더욱 힘을 얻고 돌아와 유대 인에게 예수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임을 전파하였다(갈 1:16-18, 행 9:22).

 

신약성서 27권중 서신(Epistle) 혹은 "편지"(Letter)의 형태로 된 글이 21개나 있다이 중에서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 13개이다. 이를 다시 바울 한사람으로만 발신된 것으로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가 있고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는 "바울과 디모데" 두사람의 이름으로, 또한 고린도전서는 "바울과 소스테네" 두 사람 이름으로 발신되었고,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세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된 편지이다. 이를 편의상 아래와 같이 구분해서 연구한다.

 

(1) 초기 서신들 : 데살로니가 전서, 후서

(2) 주요 서신들 :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3) 옥중 서신들 :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4) 목회 서신들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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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구원론] 구원의 이해

 

 

 

1. 구원의 전반적 이해
 

구원론은 구원을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지를 다루는 부분과 그 구원이 각 사람에게 적용되는 과정을 다루는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서는 전반적인 것에 대해 언급한다.
 


1. 구원의 서정(序程)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란 구원이라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세부적으로 나누고 그 순서를 정한 것을 말한다. 물론 성령의 사역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순서를 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인간 구원을 위한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살피고, 그 은혜를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적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 순서일 뿐이다.
 


1)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서정         
 

성경의 분명한 언급은 없으나, 롬 8:30에 따라 소명(calling), 중생(regeneration), 회심(conversion), 신앙(faith), 칭의 (justification), 성화(sanstification), 견인(perseverance), 영화(glorification)라는 구원의 순서를 말할 수 있다.
 

2) 구원의 서정에 대한 다양한 견해         
 

구원의 서정에 관한 견해는 크게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 알미니안파, 개혁파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구원의 과정에서의 인간 의지 혹은 선행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구원의 전체 조건으로 강조한다. 즉 하나님만이 구원의 근본 열쇠를 지니고 계시다.
 
 

2.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
 

여기서는 성부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주체로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고찰한다.
 
 

1) 성령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         
 

일반 사역은 자연과 인간을 유지 발전시키며, 일반 은총(一般恩寵)적 지도를 통하여 창조시에 받은 은사를 계발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시는 일이다. 사실 이것은 다음에 언급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준비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특별 사역은, 택자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시켜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이다(요 3:5; 14:16,17; 고후 3:18; 약 4:5,6).
 

2) 일반 사역의 방법         
 

일반 계시를 통한 자연인의 양심 지도(롬 2:14,15), 세속 통치자에 의한 인간의 완악함의 억제(롬 13:4,5), 특별 계시의 영향에 의한 신적 율법과 일치되는 공적 여론의 형성, 신적 율법과 일치되는 각종 사회 보상 제도를 통한 일반적인 선행 장려 등이다.
 

3) 일반 사역의 효과         
 

회개의 기회 부여를 위한 신적 형벌 집행의 유예(사 48:9; 렘 7:23-25; 눅 13:6-9), 인간 사회 및 개인 속에서의 죄 확산 억제(창 20:6; 31:7; 롬 13:1-4), 진리와 도덕 및 종교에 대한 욕구 유지(행 17:22; 롬 2:15),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외면적 선과 세속적 공의(公義) 수행(왕하 10:29,30; 14:3,14-16), 현세에서의 자연적 축복의 향유(창 17:20; 마 5:44; 눅 6:35,36)등이다.
 
 

3. 예수와의 신비적 연합(神秘的 聯合)
 


1) 의미         
 

이것은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 신자들간의 영적 연합을 말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에 이르게 됨을 가리킨다(롬 6:3,5). 한편 이것은 자연인이 아담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대조된다(창 5:3; 롬 5:12-19; 고전 15:49).
 

2) 특성         
 

  (1) 유기적(有機的) 연합 - 그리스도는 신자 안에서 역사하시며,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봉사한다(요 15:5; 고전 6:15-19; 엡 1:22,23).

  (2) 생명적(生命的) 연합 - 영적으로 죽었으나(엡 2:1)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아나게 되었다(고후 13:5; 갈 2:20).

  (3) 중재적(仲裁的) 연합 - 성령의 중재로 말미암은 연합이다(고전 6:17; 12:13; 고후 3:17,18; 갈 3:2,3).

  (4) 발전적(發展的) 연합 - 성령의 감화에 따라 그 연합의 정도가 더욱 심화된다(요 14:24; 15:4,5; 갈 2:20).

  (5) 개인적(個人的) 연합 - 신자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요 14:20; 고후 5:17).

  (6) 변형적(變形的) 연합 - 옛 사람을 벗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된다(골 1:24; 3:10; 벧전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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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 이해 ?

 

◈ 진리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이 성령의 감동 하심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며 그 원본에 있어서는 전혀 오류가 없는 것으로 믿는다 . 오직 성경만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 외에 또 다른 하나님 말씀은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초는 성경이다.

(딤후 3:16. 벧후 1:21. 잠 30:5-6 )

◈ 하나님


하나님은 한분 이시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한 하시며 편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또한 변함이 없으시다.

(출.34:6-7. 신6:4. 마28:19. 요 4:24, 10:30. 행 5:3-4. 고후 13:14. 히 1:8-12 )

 
◈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는 동정녀를 통하여 무죄하게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으 며 인간의 연약을 가지시고 사셨으나 범죄치 않으셨으므로 죄가 없으시다. 그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무덤에 묻히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성도의 대제사장으로 앉아 계신다.

(마1:21-23. 요 1:1.14. 행 1:9. 롬 1:3-4. 고후 5:21. 히 1:8. 4:14-15. 7:25. 벧전 2:24, 3:18)

◈ 성령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삼위 중에 한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듭난 자들 안에 거하셔서 구원에 대한 보증이 되신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시며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 하신다.

(마 28:19. 요 16:8. 롬 8:9-16. 고전 12:13. 엡 1:13-14 )


◈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 되었으며 죄가 없는 자였으나 그는 죄를 범해 죄인이 되었고 인간의 조상으로서 그 모든 후손들에게 죄의 본성을 물려 주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 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또한 죄를 범하여 죄인이다. 하나님의 구원 없이는 인간들에게 소망이 없다.

(창1:27, 9:6. 롬 5:12. 엡 2:1)


◈ 죄


죄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죄는 또한 의를 행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 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죄의 값으로 사망 즉 죽음을 요구하셨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사 53:6. 겔 18:24. 롬 3:23. 약 2:10, 4:17. 계 20:11-15)


◈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죄 용서함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며 율법 준수나 선행으로 얻지 못한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모두 영생을 얻는 다.

(막 1:15. 요 1:12-13. 행 4:12. 롬 10:9-13. 고전 15: 1-4. 히 9:22)


◈ 교회


우주적인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부터 휴거 때까지 구원 받은 모든 자들로 이루어진다. 각 지역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축소형이다. 지역 교회는 구원 받은 자들로 이루어지며 모여서 함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며 또한 전도를 한다. 각 지역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지역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 하도록 목자들에게 맡기셨다(장로들, 감독들, 목사들, 목자들은 성경에서 모두 같은 자을 말하고 있다). 각 지역 교회에는 또한 실질적인 면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집사들이 있다.

(행 2:42-47. 고전 12:12-13, 27. 엡 1:22-23, 5:24-25,30. 행 6:3-6. 딤전 3:1-13. 히13:17)


◈ 예식


교회에는 두 가지 예식이 있다. 하나는 침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만찬이다. 물 속에 잠기는 침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묻히는 것을 상징하며 물에서 나올 때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만찬은 신자들이 주님의 고난 받으심 과 죽으심을 기념하며 예배하고 또한 그가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맨 처음에는 매일 떡을 떼었으며 나중에는 매주 주님의 날에 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마 28:19-20. 눅 22:19-20. 행 2:42-47, 10:47-48, 20:7. 고전11:26)


◈ 속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또한 그의 죽으심과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시기에 충분하며 죄를 속하기 위한 다른 노력이나 선행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엡1:7, 2:8-9. 고후 5:21. 벧전 3:18)

 

◈ 구원의 확신과 안전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씀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원히 안전하다.

(요5:24,10:28-29. 롬 5:1. 딤후 1:12. 요일 5:13 )


◈ 그리스도인의 삶과 우선순위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혼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데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지 말라고 명하시고 주를 신실히 섬기는 자들에게는 하늘에서 보상을 약속하셨다.

(마 6:19-34. 막 8:34-35. 고전 3:12-15. 벧전 1:15-16. 요일 2:6)


◈ 성령의 은사

성령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날 때 각자에게 주님을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도록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고유한 권한으로 주신 것이며 사람이 바라거나 기도함으로 주시지 않는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기초적인 은사가 있으며(사도, 선지자) 병 고침이나 능력 행함,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과 같은 이적의 은사가 있고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즉 변환기에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기초적인 은사나 이적의 은사들은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끝났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병을 고치실 수가 있고 방언을 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기도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한 것이며 은사로 주신 것은 아니다.

(롬 12:6-8. 고전 12:7-11, 14:22. 고후 12:12. 엡 2:20, 3:5, 4:11-12. 히2:3-4)


◈ 장래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시대를 통하여 인간과 관계를 가지시고 또한 다스려 오셨다. 각 시대 마다 구원의 방법은 오직 믿음 뿐이었다. 현 시대는 은혜의 시대이다. 교회는 은혜시대 이전 에는 존재하지 않았었고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는다. 은혜시대 끝에는 교회의 휴거가 있고 그 후에는 대환란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천년왕국과 불신 영혼들에 대한 심판과 구원 받은 자들에 대한 영원한 복락이 있을 것이다.

(마 24:21, 29-30, 25:46. 롬 6:14. 고전 10:32. 엡 3:2-6. 골 1:25-27. 살전 4:13-18, 5:4-10 히 7:18-19. 계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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