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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사람 (The person who talked to God face to face)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기와의 교제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단지 열망하는 사람들에게만 교제를 허락하시고 자격을 주신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누리는 이 영적인 그룹에 속했다. 그는 한 번 이상을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사십 일을 지냈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33:11).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과 친밀한 삶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완전을 향한“ 긴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보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빚으시는 손길 아래서 그의 성품이 변화되어 간 것을 더듬어 볼 때, 그를 영적인 거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다.

그의 생애는 사십 년간씩 세 시기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사십 년-애굽 궁전에서 왕자로 지냄

 

-혈통

많은 사람들이 위대해진 비결을 찾아 보면 그들의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므람과 요게벳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그 후에 모세를 다루실 수 있게 하였다. 참으로, 이 두 노예의 믿음은 세계 역사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 11:23).

그들의 믿음은 왕의 진노를 무릅쓰게 했고, 그들의 사랑은 왕의 잔인한 명령을 교묘히 피하는 방법을 궁리해 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영광을 주시고 그들의 사랑에 보답해 주셨다. 그 결과로 모세는 경건한 가정과 히브리종교의 혜택을 받았고, 이것은 후에 그가 애굽에서 교육받은 데서 오는 해로운 요소를 중화시키는 것 이상의 작용을 했다. 그 가정에서 그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배웠다. 그의 부모로부터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배웠다. 거룩한 환경과 주변의 경건한 분위기는 그의 성격 발달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그들로부터 두려움이 없는 용기를 배웠다. 그들의 믿음은 왕의 진노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었다. 부모의 용기가 아들 속에 도덕적인 용기를 낳았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히 11:27). 믿음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그의 어린 시절은 하나님의 통치적인 섭리에 대한 놀랄 만한 본보기를 보여 준다. 그를 삼켜 버릴 바로 그 강이 그를 죽음에서 건졌다. 그를 구해 준 사람은 얄궂게도 바로 바로왕의 딸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지혜로 아들이 안전히 보호를 받게 되었다.그녀는 온 세상의 소망이 갈대상자 속에서 나일 강을 떠내려 가고 있다고는 꿈도 꾸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혈통을 통치하신다.

 


-환경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훈련장을 사치스럽고 육욕에 빠지기 쉬운 바로의 궁전으로 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삶의 환경을 지배하시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기계는 다름 아닌 영혼을 부드럽게 구부리기 위한 것.

푹신한 침대와 풍성한 음식이 광야에서의 험란한 방랑 생활을 위해 이상적인 훈련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도덕적으로 자유분방하고 음모로 가득 차 있는 궁전은 경건한 인격 계발에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환경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훈련시키실 때에, 언제나 그를 고립시키고 격리시키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강인한 성품을 계발시키시기 위해 그에게 유혹과 환란의 강풍(强風)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고립이라기보다는 분리의 방법이다. 우리가 만일 종교적인 훈련을 위해 그를 보낸다면 영적으로 조금치도 유익한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궁전으로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도구가 될 사람을 훈련시키신 곳은 바로 궁중생활의 시련의 불 속에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환경을 통치하신다.

 


-교육

기이하게도, 바로의 명령이 모세가 애굽의 옥스포드 또는 하버드에서 비할 데 없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스데반이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모세가 받은 교육과 훈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 7:22).

학자로는, 그는 애굽의 과학과 지혜에 통달하게 되었다. 정치가로서는, 그는 독특한 웅변 능력을 갖고 있었다. 군인으로서는, 그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요세푸스(Josephus)는 이야기한다. 전설에 의하면 애굽 군대가 그의 지휘 아래 대단한 승리를 여러 번 얻었다고 한다. 이 전설이 근거가 있다면, 그의 조직력과 큰무리를 다루는 기술이 설명되어진다. 그의 군사 훈련 가운데는 훈련, 인내와 빠른 결정 등이 그의 교과 과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애굽의 궁정은 바로에게 항복한 시리아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온 속국의 왕자들을 위해 관례상 교육 시설을 제공했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교육은 매우 진보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교육을 통해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라운 지적능력과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남김없이 하나님께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성취하실 수 있다. 지혜로운 자 가운데 택함 받은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으나, 세상은 모세와 바울에게 굉장한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최고 재판소의 배석 판사인 브류어(Hon. D. J. Brewer)씨는 모세를 입법자로 보며 다음과 같이 썼다.

“시내산 꼭대기에서 여호와의 손에서 십계명을 받은 그는 어떤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한 민족의 법전이 되어 온 법 체계를 만드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이 법전은 오늘날 놀랄 만한 문명 사회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모세를 인류의 가장 위대한 입법자 옆에 나란히 둔다 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육을 통치하신다.

 


-포기

사람은 자기의 출생과 환경을 선택할 수 없으나, 자기의 이력을 택하는 일에 있어서는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조만간에 사람은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인생의 분수령에 도달하게 된다-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부합한 것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이 없는 비참함 가운데에서 지내게 된다.

모세는 그가 장성하여 모든 일들을 지혜롭게 판단내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히브리서 11장에 요약되어 있으며, 이 부분을 “위대한 거절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great refusal)이라고 불러왔다. 그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백성의 곤경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이기적으로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의 특권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노예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과 함께 할 것인가? 화려함과 권세와 영광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난과 낮은 신분과 오명을 택할 것인가? 그는 죄의 쾌락이 가장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며, 저울추는 그가 자기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의 반대쪽으로 무겁게 기울어져 있을 나이였다. 세상 권세와 영화의 유혹은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히는 현실이었다. 영원한 것의 가망성과 보상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믿음이 아니고는 만져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중대한 결정의 요소가 네 개의 명사로 표현되어 있다. 「고려」(esteeming/히11:24-28) 이 말은 “계산함, 이것과 저것을 저울로 재어 봄“의 뜻이다. 모세는 조심스럽게 상황의 이해, 득실을 재어 보았다. 그의 선택은 성급하고 황급한 결정이 아닌 침착하고 신중한 선택이었다. 만일 그가 현재의 생활을 포기한다면 그의 빛나는 미래는 풍전등화격이 되고 황폐한 미래가 있게 될 것이다.

그의 “여김“은 「선택」(choosing)하고 「거절」(refusing/히 11:24, 25)하는 데로 나아갔다. 그가 위대한 거절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의 믿음이었다. 그가 바로 궁전에서의 그의 지위를 포기하고, 오늘날 우리도 조금 알 수 있는 애굽의 보화와 쾌락에 등을 돌리는 것은 외적으로 볼 때 그에게 전혀 유익이 없고 모든 것을 잃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선택을 통하여 자신이 이스라엘의 고난과 소망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장엄하고 획기적인 “거절“을 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선택“은 「버림」(forsaking/히 11:27)을 가능하게 했다. 애굽의 부와 쾌락과 영화와 권세를 버리고 빈곤과 고난과 노예 상태와 경멸당하는 것과 정처없이 방황하는 것을 택했다. 대단한 포기였으나 영광스러운 믿음의 승리였다. 그는 애굽의 번쩍거리는 세상 영화와 메시야에 대한 쇠함이 없는 영광을 견주어 보고, 결코 후회가 없는 선택을 하였다.

고통받는 동포들에 대한 새로운 동정심이 그의 마음에 용솟음쳐서 그는 그들의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일격을 가했다(출 2:11, 12).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의분이 끓어 올라 애굽 사람을 죽여 황급히 모래에 묻었다. 그러나 그의 동포들은 그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고 모세는 당황하게 된다. 그가 실패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믿음의 행동과는 거리가 먼, 충동적인 격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영적인 목적은 육신적인 방법으로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배워야 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좌우로 살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중재는 미성숙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을 향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학교에서 더 배워야 할 과정이 있었다. 그는 아직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는“(히 11:34) 사람들 중에 끼지 못했다. 어쨌든, 그를 그의 생애의 두 번째 기간으로 안내한 것은 바로 이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행동이었다.

 

두 번째 사십 년-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서

 

궁전에서 보낸 세월들은 그로 하여금 지적인 훈련에 있어서 비할 데 없이 훌륭한 기회를 제공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두 번째 교육의 장이 시작되어야만 했다. 고독은 종종 위대한 사람을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모세의 광야에서의 시간들은 그의 영혼을 단련하는 데 필요한 기능을 다했다. 그가 애굽의 대학에서 배운 과정은 그가 상류 가운데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광야의 대학에서 배운 과정은 그가 구원자가 될 노예 국가로 자신을 낮출수 있도록 자격을 갖추게 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성화되고 실패를 통해 겸손케되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를 준비시키시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신다.

그분의 훈련 방법은 완벽하다. 온 세상을 위한 법을 제정하게 될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리든지 간에 광범위하고도 풍부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연구해 보면, 보통 도덕적인 결단이 내려진 후에는 정해진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은둔의 기간 또는 때로는 거절당하는 기간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때에 그분이 소명받으신 것(눅 2:42)을 말씀하신 후 공생애가 시작되기까지는 거의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었다. 바울은 하나님과 만난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고독한 가운데 수 년을 보냈다(갈 1:18).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질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훈련 기간 동안 연단 받으면서 안달을 하거나 지름길을 택하려고 애를 써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다.그것은 불가피하게도 막다른 골목인 것이 입증될 것이다.

광야 기간의 시험이 북경의 왕 밍따오(Wang Ming-tao)박사에게 왔다.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그가 만일 타협하지 않는다면 중공에서 투옥되어 고난을 받게 될 입장이 되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기를 소원했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과 훈련으로 그것이 좌절됐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고 외국에 나가 훈련을 계속 받아 위대한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그는 주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훈련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몇 달 후 하나님께서는 나를 집에 가두시고 마루를 쓸고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옷을 수선하는 등의 집안 허드렛 일을 하게 하셨다. 처음에 나는 불행을 느끼며 나를 이와 같이 대하시는 그분께 불평했었다. 그러나 조금 뒤에 나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 비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었다. 삼 년이 지난 뒤나는 이런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나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야망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포부까지도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말단의 지위도 원치 않았다. 대신에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평생동안 비천한 가사 일만 돌보라고 하시더라도 기꺼이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의 모든 헛된 소망과 야심을 포기했다. 이 일들을 회상해 볼 때, 듣기에는 어렵지 않게 들리지만, 그 당시 그것은 많은 눈물과 투쟁과 어마어마한 희생의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이러한 호된 시련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역의 문을 열어 주셨고,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사역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서, 나는 그 엄격한 훈련이 없었더라면 높은 명성에 대한 욕심과 대단한 직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사역이 내게 위험한 것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왕 밍따오 박사는 성경의 각 책에 대한 주석을 출판하기도 했다.

 

 


-소명

광야에 있으면서(출 3:1), 모세는 가장 깊은 교훈을 배웠다. 그때까지 그는 행동가였었지만 이 훈련 기간 동안 그는 「어떠한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시골 생활이 어떤 이상한 현상에 의해 중단되게 된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된다. 모세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기이한 광경을 보려고 그 곳으로 가 보았다. 그가 다시 한 번 인생의 분수령에 서 있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한 채, 삶의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다. 이 타지 않고 빛을 내는 떨기나무의 광경(출 3:2)은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들어서 알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경험에 의한 지식이 된 것은 바로 이곳에서였다. “보잘 것 없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잡아 채신“ 곳이 바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였다.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조용히 명상하는 가운데 보낸 세월들이 그를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시켜 온 것이었다. 불타는 떨기나무의 상징은 명백하다. 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의 상징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 평범한 떨기 나무가 그것을 밝혀주는 불꽃으로 비상한 것이 되었다. 나무 자체는 좋지 않은 나무였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불에 변화되고 빛을 내어 아름답게 되었다.

모세는 그의 과거가 많은 특권을 가졌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평범한 떨기나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그에게 어떤 위대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결과이어야 했다. 떨기나무가 주변의 많은 나무들과 다르게 된 것은 나무의 특성 때문이 아니었고 그 안에서 빛나는 불꽃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필수적인 자격이 신을 벗고 얼굴을 가리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우리 중 대부분이 신을 벗고 겸손히 예배하기보다는 우리의 신을 신은 채 바쁘게 활동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의식하여 얼굴을 가리우기보다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 얼굴을 드는 경향이 훨씬 더 많다. 이것들이 모세가 광야에서 배웠던 가장 중요한 교훈들이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른

한 사람의 생애를 보며,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노라.

연약한 흙으로 빚어진 인간 그릇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것을 보았노라.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나 큰 소리로 외쳤노라.

나의 아버지시여,

나에게 불타오르는 삶의 축복을 주시어

당신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하옵소서.

 


모세는 그가 40년 동안 회피해 오던 부르심을 분명하게 들었다. 그가 그렇게 황급히 도망쳐 온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부르셨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모세는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교훈을 너무나 철저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자기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어려워했다. 이전에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던 애굽의 왕자가 일을 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변명하는 대화를 깊이 다룬 내용이 뒤이어 나온다. 그는 위신(출3:11), 메시지(출 3:13), 권위(출 4:1), 웅변술(출 4:10), 특별한 순응력(출 4:13), 성공(출 5:23) 등이 부족했다. 이보다 더 감동을 주는 부적격의 이유를 열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의식에서 나온 이러한 주저는 매우 겸손하고 경건하게 들린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얻는 대신에, 하나님의 노를 샀다(출 4:14). 하나님의 종이 자신이 부적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책임을 회피할 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노를 사게 된다. 안심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14)]과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으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으로 모세는 모든 신령한 자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했다. 이전에, 그는 너무 성급하고 빨랐었다. 이제 그는 너무 느리고 주저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축복하시고자 하시는 그의 계획이 그의 종의 변덕과 기분에 방해받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종들은 기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움직이며 신속하게 순종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대변자로 세우시고 연약한 아론을 임명하셨는데 아론이 후에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세 번째 사십 년-지도자와 입법자로서 광야에서

 

그의 시험의 기간은 끝이 났고,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해방자로 나타났다. 그가 최고의 업적을 이룬 것이 팔십 세가 넘어서였다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스포트라이트가 젊은이들에게 비쳐질 때에,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결실과 중요한 사역이 아직도 미래에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은 나이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고 격려가 된다. 연륜과 숨겨진 훈련이 성숙한 판단과 다른 이들과 쉽사리 공감을 하게 되는 유익을 낳는다.

-지도력

지도자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만이 지도력을 구사할 때 치루어야 하는 대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 모세에게는 백성들의 문제를 판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해석해 주는 힘든 일이 주어졌다.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곁에섰는지라“(출 18:13).

이것은 그의 모든 신경을 소모하며 심지어는 그의 육체의 여력을 모두 짜내는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람이 남을 구해 주면서 동시에 자신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지도력만큼 큰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은 없다.여자가 믿음으로 주님의 겉옷 가를 만졌을 때 주님의 능력이 그녀에게 미쳤다(마9:20).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와서 모세로 하여금 그러한 끊임없는 노동의 결과를 직면하게 해 주었다.

“그대가...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출 18:18).

이드로의 충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을 텐데 모세가 그 충고를 따랐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충고도 또한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라는 사실을 믿고, 그 충고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위임하고 그 일을 수행할 수있도록 그들을 훈련시키는 최고의 지도력을 구사한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뒤에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종종 하나님께서 맡기셨다기보다는 사람에 의해 떠맡겨진 무거운 짐과 책임을 맡고 있어서, 결국은 몸과 신경이 그 압박을 견뎌낼 수 없게된다. 그러한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대로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면, 그들의 기독교신앙이 그 결과를 면제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지도력을 구사할 때 치루어야 하는 대가를 더 명백히 알고 있는 이드로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이것을 명하셨다면 그대가 할 수 있으리라“(출18:23/사역).

이것이 이드로의 확신이었다. 다른 이들이 우리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떠맡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이 우리보다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일을 양도해야만 한다. 이것은 완전주의자에게 어려운 시험이다. 모세는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나, 만일 그가 계속 했더라면 오래 가지 않아서 그는 단지 기억 속의 인물로 되었을지 모른다. 진정한 선교사들에게 시험이 되는 일 중에 하나가 기꺼이 책임을 본토의 그리스도인에게 양도하고, 그들이 시련과 실수를 통해 경험을 얻는 동안 도울 준비를 하고 곁에 지켜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책임을 발전시킬 때 우리 동료들은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훈련하고 사용하게 된다.

 


-시험들

모세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 받았던 많은 시험들 중에서, 다섯 가지를 선택했다.

 

첫째, 타협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것은 허락을 받기 위해 조건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협하여 우리의 기준을 낮추는 것을 허락할 때 그것은 언제나 후퇴를 가져오게 된다. 모세와 바로와의 논쟁은 타협으로 이끄는 점차적인 유혹에 대한 고전적인 본보기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그러나 애굽을 떠나지는 말라“(출 8:25).

이것이 왕의 첫 번째 제안이었다. 현대에도 이와 비슷한 제안이 있다.

“종교를 무시하지는 말라. 하지만 좁아져서 세상을 아주 끊어버릴 필요는 없다.“

다음에 그가 제한한 것은 “너희가 희생을 드리기 위해 애굽에서 나갈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 8:28)는 것이었다.

 

둘째, 다음에는 육친의 정에 대한 시험이었다.

“너희 남정만 가고 여자와 어린 것들은 남겨 두라“(출 10:11).

“가야만 한다면 가라. 그러나 너무 지나쳐서 가족들로 하여금 너의 유행에 뒤떨어진 기준을 따르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세상적인 출세를 방해하지 말라.“

그의 마지막 시도는 욕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출 10:24).

“너의 종교적인 확신이 너의 사업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라.“

분명한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모세는 이 도전들을 간파했다. 양과 소떼들을 두고 떠난다면 그들은 빈털털이가 된 것이며,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릴 것이 없게 된다. 그의 답변은 명쾌하고 단호했다.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나이다“(출 10:26).

 

셋째, 홍해에 이르렀을 때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시험에 부딪혔다.한편으로는 건널 수 없는 바알스본 지역이 놓여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통과하기가 불가능한 모래 사막이 있었다. 그들 앞에는 건널 수 없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고, 뒤에는 무적의 바로 군대가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철저하게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택한 사람에게 보기 드문 경험은 아니다.

이 예기치 못했던, 좌절이 되는 경험으로 백성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출 14:11).

그들이 불평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그 날 놀라운 명령을 내리는데, 이것은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에게는 단지 환상처럼 보였다(출14:13). 두려워 할 모든 이유가 있는 때에 “두려워 말라“고 하였다.

“가만히 있을지니라.“

바로가 급하게 그들을 뒤따라 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모세는 불가능한 상황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합격하였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그 성공이 영광스럽게 입증되었다. 그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그들은 하나님의 근원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밀착시켜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보여 주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중국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불가능한 상황들에 직면했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하나님을 위해 착수하는 위대한 사역의 대부분에는 불가능한 단계, 어려운 단계, 성취되는 단계의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넷째, 모세도 야심의 시험을 당했었다.

모세가 시내산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에 빠지자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그들을 향해 불타올랐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

이미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이 모세에게 쓰라린 시련인 것이 증명이 되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진을 위한 놀라운 기회를 제시하고 계셨다.

제안을 하신 분이 다름아닌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시험은 더욱 어려웠다. 모세의 답변에서 그의 사심이 없는 고귀한 성품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의 행복에 있었다. 대담하고 집요하게 하나님을 붙잡고 배교한 나라에 대한 심판을 돌리기 위해 중보 기도를 했다. 하나님의 “나대로 하게 하라“는 기도에 있어서 모세의 능력에 대한 대단한 칭찬이었다.

 

다섯째, 질투에 대한 시험이었다.

성이 난 여호수아가 말했다.

“엘닷과 메닷이 예언하더이다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민 11:28).

모세가 자기를 보좌하기 위해서 택했던 사람 중에 두 사람이 갑자기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들은 그가 모세의 대권을 침해하고 그의 권위에 도전한 것에 대해 시기했다. 그러나 모세의 너그러운 성품에는 질투나 시기가 자리를 잡을 곳이 없었다. 그는 이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었다. 모세는 말한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과 교제를 갖고 있는 영적 지도자는 그의 위신이나 대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매우 온유한“ 모세는 사소한 사리 사욕의 편견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 시험들을 통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인 대단한 도덕적인 힘과 영적인 힘과 진실한 인간성을 입증했다.

 

비극과 승리

 

그가 신실하고 이타적으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는 어둡고 슬프게 끝이 났다. 그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은 얼핏 생각할 때 가벼운 실패에 대해 너무 엄중한 형벌이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건을 분석해 볼 때 그것은 그렇게 사소한 실패가 아닌 것이 나타난다.

그의 실패는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민 20:12).

그의 행동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나타냈다. 그의 불신앙은 불순종을 가져와서 “그는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다“(시 106:33). 마음은 언제나 입술로 나타난다. 그의 행동은 자기 절제의 부족에서 온 결과였다.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며 두 번 치라“고 하시지 않고 “명하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행동은 그의 불신앙을 표현해 준다. 명백하고 분명한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의 죄를 더 엄중하게 다루시는데, 특히 그들의 공적인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될 때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에 몹시 실망한 모세는 하나님께 그 말씀을 돌이켜 주실 것을 세 번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5, 26)는 것이었다. 죄는 용서받았으나 죄에 대한 벌은 그대로 남았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끝은 영광스러운 결과가 되며 깊은 절망은 기쁜 운명으로 끝이 난다. 가나안의 변화 산상에서, 잠시 예수님의 권세와 영광이 드러났을 때,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엘리야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모세였다. 그러면 그 주제는 무엇이었는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했다“(눅 9:31).

그들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죄의 노예된 데서 해방시키셔서 구속받은 무리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거룩한 구속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받았다.

모세는 마음에 소원하던 것을 받았다.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오직 잠시 동안이었고 그는 장차 올 영광을 미리 맛보게 되었다.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며, 그것도 다름아닌 영광의 주님과 함께 들어갔다.

전에는 밟아 보지도 못했던 산 위에서

영광에 둘러싸여

우리의 생명을 구해 주실 주님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과 더불어 이야기했네.

우리 모두의 경험에는 모세의 경험과 같은 의미가 없는가? 우리의 가장 큰 소망과 포부가 늘 이 세상에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저건너에는 성취의 땅이 있다.항상 이 세상에서 온전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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