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야곱 /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한 사람
내 영혼에 불안을 지으시고
내 가느다란 기쁨마저 앗아가신 이여,
당신의 화살이 내 가슴을 뚫고,
나의 평안을 앗아 가셨도다.
아직도 더 가까이 이끄시며,
당신을 떠난 내 모든 발걸음을 뒤집어 엎으시고,
내 손발이 다 잘라질 때까지
계속하여 당신은 나를 치시는도다.
그리고 나는-브니엘의 그이처럼-
내 힘은 절름발이가 되어 일어선다.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비열함과 속임수가 벗겨진.
그 때에 나는 당신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징계로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알리라.
당신께서 또 다른 품으로 가까이 이끌기 위해
칼과 채찍을 아끼지 아니하실 때에.
지나간 과거 속에서 당신의 길을 발견하오니
당신께서 이루신 역사(役事)는 참으로 위대하시도다.
재창조를 위해
살리시고 죽이시며 파괴하시는 영이여
파괴하신 후에는! 내 안에서
당신으로부터 단절케 하는 모든 자취를 제해 주소서.
거룩한 나라에서
당신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까지!
-위니프레드 쿡(Winifred A. Cook)
하나님께서 야곱을 훈련시키시는 것을 통하여,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야곱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끈덕지지만 타협하지 않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셨다. 부정하고 야비한 행동이 그의 인생의 가치를 떨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치 않으시되 결코 그의 죄를 묵인하거나 간과하지 않으셨다. 많은 세월 동안 야곱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추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고, 때문에 야곱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는 것과 “제멋대로 하는 것“이 얼마만한 대가를 치르는가하는 쓰디쓴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이기주의가 그를 징계하는 막대기가 되었다. 마침내 그가 쓴 계략이 그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최종적인 위기와 만나게 한다.
야곱의 삶은 '성도의 견인'보다는 '하나님의 인내'를 예증(例證)해 준다.
하나님의 인내(오래 참으심)가 없이는, 성도의 견인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나라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하시는 당신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은혜로운 훈련을 계속하셨다. 한 가지 방법이 실패하면,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하셨다. 한 세대가 응답하기를 실패하면 참을성 있게 다음 세대와 함께 다시 시작하셨다. 다음 세대들은 우상 숭배로 돌아가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게 되며, 이때 이후 그들은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무익함을 결코 잊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히브리 민족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은 완성시키고야 만다.
바울은 이 확신을 다음의 말씀에 분명하게 표현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그리스도인의 경험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끈기와 지칠 줄 모르는 인내하심의 증거가 충만해 있다.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은 야곱이 그러했듯이 수 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었다. 결국 그는 소망이 없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런던 템즈강 제방의 넝마주의들 틈에서 자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어 포로가 된 곳은 바로 그 곳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시 「천국의 개」(The Hound of Heaven)에서 그는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한다.
밤이고 낮이고 나는 하나님을 떠나 도망하였네.
세월의 아아치 문을 지나 나는 그를 떠나 도망하였지.
그를 떠나
내 마음의 미로 속으로, 눈물 속으로
나는 그를 피해 숨었지.
웃음을 흘리며 내려가
전망이 좋은 언덕으로 나는 도망하였지.
그리고는 거꾸러져 버렸네.
두려움의 거대한 암흑 밑으로
그 곳에서 강한 발걸음이
나를 따라오셨네. 따라오셨네.
주관적인 선택
만일 우리에게 온 세상에 축복을 줄 나라를 건설할 사람을 선택하는 책임이 맡겨진다면, 아마도 야곱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곱은 뒤틀어지고 욕심이 많고 교활했다. 야곱은 비열하게도 쌍둥이 형의 곤경을 이용해서 그의 세상에서의 상속권뿐만 아니라 씨족의 족장으로서의 영적 권위까지 도둑질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때, 도량이 크고 마음이 넓은 에서가 명단에서 훨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를 공정하게 평가하면 야곱은 유전적으로 별로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의 부모에게서 고귀한 성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창 25:28). 이처럼 자기욕심에만 눈이 어두운 성숙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엄하지 않은 어머니, 리브가의 야곱에 대한 사랑은 파괴적이고 절제하지 못하는 사랑이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했다면,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해서, 다른 아들을 속이는 일에 그를 거들었었던, 자기가 편애하는 아들을 향한 거룩하지 못한 야심에 사로잡혔던 비양심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일을 이루려 했다. 그녀는 그녀의 거짓과 불신을 아들에게 전했다. 그가 처음 그의 형을 속였을 때 그녀는 그의 성공을 기뻐하였다. 그녀의 눈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죄에 대해 비싼 값을 치르었다. 그녀는 그를 떠나 보낸 후 다시는 아들을 만나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 범상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쌍둥이를 낳게 될 것이며, 누가 나라의 설립자가 될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창 25:23). 태 중에서의 싸움은 태어나면서 눈에 보이게 되었는데 야곱이 에서의 발뒷꿈치를 잡았던 것이다(창 25:26). 이것이 그의 이름이 “발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tripper)“, “대신 들어 앉은 사람(supplanter)“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배경이다. 에서는 그의 성품 중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보다 더 중요시하였으며, 자신의 제사장적인 특권을 가볍게 포기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창 25:32).
이와 같이 에서는 그의 생득권을 경시했다.
무어(C. G. Moore)는 “쌍둥이 형제 중 하나는 그 형제가 배고파하는 것을 비열하게 이용해서 장자권을 얻고자 했고, 다른 하나는 소중히 여겨야만 할 것을 그렇게 가볍게 여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네 사람 모두를 생각해 보자. 아버지, 어머니, 두형제,그들로부터 무슨 위대하고 복된 것이 나오겠는가?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지 않는다면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보통 그런 곳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곳이다. 그는 다른 아무런 가망이 없는 데서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들어가셨고 그의 손을 야곱 위에 얹어 안수하셨다“라고 기록했다.
야곱은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의 약점에 방해받지 아니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소경에 대해 물었었다.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2, 3)고 대답하셨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데 대한 열쇠가 있다. 그는 벌레같은 야곱을 택하셨으나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왕자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의 비뚤어진 성격은 가장 연약한 자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와 은혜를 보여주시는 좋은 실례가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도록 강하고 고귀하고 똑똑한 사람들만 택하신다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실격이 될 것이다. 바울은 그의 잘 알려진 말씀(고전 1:26-29) 속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된 민족의 조상으로 택하신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도둑질한 것은 애송이 청년의 때가 아니라 성년이 되었을 때이며, 에서를 속여 축복을 받은 때도 성년이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참으로 그는 147세까지 살았으며, 이 불명예스러운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그는 성숙한 장년으로서의 생활 방식이 이미 굳어진 지 오래였다. 심리학자들은 이와 같은 늦은 시기에 성품이 급격히 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심리학적인 법칙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실망할 때조차도 우리에 대해 실망하지 않으신다. 그의 인내는 끝이 없으시며, 그의 자원은 다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속성이 호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을 훈련시키시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칭호를 받으시기까지 자신의 낮추신다.
“야곱의 하나님“(시 20:1/사 41:2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하나님의 친구 모세의 하나님.“
이런 칭호는 부적당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꾼 야곱의 하나님“이라니? 너무도 이상하게 들린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야곱의 이름과 연결시킨다면 자신의 속성에 누를 끼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말 1:3).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두려워 말라“(사41:14).
“야곱의 하나님이 네 피난처이시니“(시 46:7).
하나님께서는 가장 연약하고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사람과 자신을 친밀하게 연결시키기까지 자기를 낮추신다. 벌레보다 더 약하고 무가치한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렇게 하신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추구하는 “벌레“가 왕자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권세를 갖게 된다.
인간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낙천주의자이시다.
그는 숨어 있는 고귀함과 가능성을 잘 찾아내신다. 그분은 까다로운 성미를 가진 사람의 하나님이시며, 비뚤어진 인격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실망하여 포기한 곳에서 시작하기를 좋아하신다. 또한 모든 기질과 성격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철저히 근본적으로 처리해 주시기를 그의 손에 맡기기만 한다면, 그의 모든 사랑과 은혜의 자원을 동원하실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이 매력없는 사람 속에서 왕자와 같은 자질을 보실 수 있다.
말라기의 말씀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는 로마서(9:13)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는데, 이 말씀은 성경의 난해 구절 중 하나이며, 표현상으로 볼때는 하나님이 변덕스러우신 것처럼 보인다. 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받은듯이 보인다.
두 가지 사실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첫째, “미워하였다“는 말이 우리 귀에는 거슬리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 꼭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말라기와 바울의 글에 사용된 말은 본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야곱과 에서 개인이 아니라, 그들의 자손인 이스라엘과 에돔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은 그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미리 선택하신 것이다(창 25:23).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적인 뜻을 발휘하시는 데 있어서 유전이나 장점이 아닌 믿음을 아들이 되는 영원한 원리로 정하셨다. 본래의 뜻을 적용해 볼 때, 「사랑」과 「미워하심」은 우리가 이 주관적인 감정들을 이해하듯이 선택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함부로 선택하지 않으시며, 편애에 빠지지도 않으신다. 그 감정적인 용어들은 오히려 나라의 기능과 운명을 의미해 준다. 에돔이 아닌 유다가 역사상 점진적인 계시를 위해 선택되었다“라고 말했다-재미슨, 포셋, 브라운(Jamieson, Faussett and Brown).
그러나 이 말씀을 이차적으로 개인에 적용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신 것은 “변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별력“이었다. 야곱의 모든 비열함과 이중성 뒤에는 영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열망과 영적인 역량이 있었다. 계속하여 야곱은 불순종했으나 영적 열망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에서의 관대하고 매력적인 외모 뒤에는 영적인 것의 가치에 대한 모멸이 숨어 있었다. 그는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것보다 감각적인 욕망의 만족을 더 좋아했다. 야곱은 영적인 가치를 정확하게 느꼈지만, 그는 언제나 그것을 얻기 위해 육신적인 음모에 의지했다.
그의 명백한 약점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영적인 열망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끊임없이 추적케 하시고 성품변화 훈련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시도록 만들었다. 그의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미미한 믿음의 흐름이 있었다. 캠벨 모르간(G. Campbell Morgan)박사는 야곱의 믿음이 아버지의 축복을 원했으나, 두려움 때문에 책략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의 것인 장자권을 원했으나, 두려움은 그것을 비열하게 사기적인 수단으로 얻고자 했다.
우리는 이 사실 속에서 자신의 약함과 실패로 침울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큰 위로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우리의 동료 속에 있는 가장 나쁜 점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좋은 점을 찾아 그것을 계발시키신다. 그는 마음의 참 열망을 아시며 그것을 계발시키시기 위해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섯 번 나타나셨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타협하지 않는 자기 자녀의 실책을 바로 잡아주시며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
불굴의 추적
“약탈자“란 뜻의 야곱의 이름 뒤에는 “단호하고도 사정없이 따라가 적을 덮쳐 그를 넘어뜨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말은 야곱의 생애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그러나 야곱은 그의 적수를 만나 마침내는 그를 얍복강에 “던지신“ 하나님의 추적에 무조건 항복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낙심치 않으시고 참지 않으셨더라면, 야곱은 결코 하나님의 왕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사랑스럽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 그를 벧엘에서 만나 주신지 삼십 년 후 그를 최종적으로 항복시키실 때까지 지치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를 추적하셨다. 그리고 처음 만나주신 곳과 최종적인 항복이 이루어진 곳은 의미 깊게도 같은 장소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추적하신 것은 다음의 네 가지 사건에 의해 구분지어진다.
첫 번째, 벧엘에서의 사건은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도둑질한 후 일어난다(창27:27-29).
이제 허기가 채워지자, 에서는 그의 쌍둥이 동생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야곱이 도망친 것을 알고, 성이 난 에서는 추격을 했다. 그러는 동안 야곱은 하나님과 처음 만나게 된다. 돌베개를 베고 자면서, 그는 꿈 속에서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창 28:12), 그러나 사다리 위에는 하나님 당신이 계셔서 자격이 없는 자녀에게 은혜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전혀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번영과 보호의 절대적인 약속과 함께 그의 자손을 인해 세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주셨다(창 28:14, 15). 두려움에 가득찬 야곱이 외쳤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야곱이 서원하여... “(창 28:17-22).
그리고 그 서원을 잊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야곱의 밧단 아람에서의 생활에서 우리는 기도나 경건의 증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고질적인 물질주의자였다. 그의 생각에는 가축이 최고의 것이었다. 그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으나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다. 벧엘에서의 경험은 단지 희미한 추억이었다. 종종 볼 수 있듯이, 물질적인 번영은 영적인 번영을 질식시킨다. 가축의 수가 늘면서 하나님을 소홀히 하게 되는 수가 종종 있다.
두 번째, 브니엘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야곱은 백 세나 되었다. 이십 년 동안-어떤 성경 학자는 사십 년이라고 말한다-그는 삼촌 라반을 섬겼다. 비양심적인 야곱을 훌륭한 도구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행하셨던 훈련을 주목한다면 큰 도움이 된다. 그 방법은 그보다 더 까다롭고 욕심이 많고 비뚤어진 사람에게 그를 붙이시는 것이었다. 야곱은 그처럼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가장 가증한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방법을 쓰고 계신다.이 기간 내내 야곱은 거짓과 속임을 당하며 지냈다. 잔재주 싸움에서 그는 밀고 밀리는 각축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변화된 것은 바로 이 고된 훈련 덕택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에 맞지 않는 가정 환경이나 회사 조건이나 뜻이 맞지 않는 동료에 대해 이와 유사하게 설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즐거운 생활 조건과 뜻이 맞는 사람들을 선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유익이 된다면 현재의 고통을 아끼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강하고 신실하시며, 우리가 연약할 때, 그대로 두시는 사랑이 아님을 우리는 감사해야만 한다. 우리가 판단해 볼 때, 만일 야곱이 훌륭하고 온당한 사람에게 붙여졌다면 그것은 야곱에게 얼마나 끔찍한 재난이 되었겠는가? 우리는 “훌륭한 사람들“의 영향력과 그들이 우리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해 대단히 과대평가를 한다. 대개 그 반대 종류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와 늘 함께하시며 그 가운데서 그를 붙들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을 금하셔서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다(창31:7, 24, 2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라반“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하신다. 만일 라반이 자기 뜻대로 했더라면, 야곱은 빈털털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이 부지런히 일한 대가를 받도록 해 주셨다.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실 때까지 야곱이 이 호된 훈련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것은 그의 성품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좋지 않은 환경에 안달을 하며 그것을 면하고자 애를 쓰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 중에 지름길을 택하고자 한다면 대단한 손실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려운 기간을 필요이상 허락지 않으심을 확신해야 한다.우리가 까다로운 사람들과 삶의 어려운 일들에 대해 바르게 반응할 때, 우리의 인격이 온전해지고 경험이 풍부해진다는 교훈을 주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훈련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야곱은 에서가 사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그를 맞으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창 32:6, 7). 죄의식으로 인한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 에서의 나타남은, 과거의 죄는 항상 우리에게 심판으로 나타난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야곱의 죄는 죄를 범했을 때보다 더 무섭게 보인다. 야곱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보호해 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는 대신에(창 28:15), 겁먹은 기도를 한 후 육신적인 방법을 의지했다. 그는 아직도 이전과 같은 기교를 가지고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음모를 꾸미려하였다.
이번에 그의 기교는 거짓말보다는 상대방을 달래는 것이었다. 그는 형을 달래기 위해 주의하여 잘 준비한 선물로 가축떼를 앞세워 출발시킨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이것은 한 사람 역사의 전환기를 이루는 결정적인 밤이었다. 씨름을 시작한 것은 야곱이 아니고 하나님이었지만, 야곱은 놀랄 만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자기 삶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며 무사히 어려움을 넘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는 항상 그래 왔다. 그러나 하늘의 씨름꾼의 끈기있는 압박이 계속되었다. 축복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저항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야곱은 강한 씨름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수단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양심적이지 못했으나, 여태까지 판결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상대와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하나님은 야곱이 굴복하려 들지 않자 그를 평생동안 다리를 절게 만들었다(창 32:25, 26). 이 싸움은 야곱에게 영원한 표식을 남겼다. 왜 씨름꾼(하나님)은 더 일찍 이렇게 하시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야곱이 자발적으로 먼저 항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어지자 야곱은 그의 상대를 붙잡고 외쳤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이르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지점은 아니지만 야곱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내내 준비해 오셨던 위치에 이르도록 자신을 조종하는데에 성공했다! 홀로 싸우다 실패한 것을 통해서 야곱은 승리했던 때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제임스 맥콩키(James H. McConkey)씨는 그의 의사 친구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사님,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환도뼈는 인체에서 가장 강한 부분입니다. 말이 똑바로 잡아당겨도 사지를 떼어 낼수는 없습니다. 환도뼈를 휘게 했을 때만 떼어 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순식간에 야곱은 몸의 중심을 잃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 충만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적인 삶이 끝나야만 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있는 영적인 원리이다.
이 사건에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는 그의 삶의 죄와 수치를 직면해야 했다. 그의 이름이 마치 맷돌처럼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사기꾼, 협잡꾼, 야바위꾼...그는 그것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회개하며 그가 대답했다. “야곱이니이다“ 찬탈자 사기꾼! 이 한 마디 말 속에 실패하는 생애의 본질이 집약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근거가 된 이 고백을 한 뒤 그는 축복의 길에 서게 되었다. 그가 더 큰 축복의 언약을 받은 것도 브니엘에서였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러나 그는 이긴 것이 아니라 항복하지 않았던가? 그는 항복함으로 이겼던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그의 성품의 완악함을 깨뜨리시는 데 성공하셨다.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호 12:4).
당신이 침묵하셔도 소용이 없으며,
내 환도를 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뼈가 위골된다 하여도
당신을 내 품에서 놓지 않으리.
씨름을 하며 나는 당신을 가지 못하게 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을 알며,
당신이 누구신 줄을 알 때까지.
세 번째, 세겜에서의 사건이 뒤따른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시게도 야곱의 옛 이름과 옛 수치를 제거해 주셨으므로, 야곱은 물론 그의 새 이름에 맞게 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의 타고난 의심과 술책은 여간해서는 없어지기 어려웠다.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형을 속이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을 향하여 장막을 쳤다(창 33:13-18). 소돔에서 유사한 어리석은 행동을 했던 그의 친척 롯처럼 그는 그의 거짓과 불신앙에 대해 값비싼 값을 치루었다(창 34:30).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술책을 써서 곤궁을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비극이 그의 가족을 삼켜 버리게 되었다. 뒤따르는 이야기는 강간과 살인과 두려움의 이야기이다. 야곱은 서원을 깨뜨리고 헌신을 망각한 것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처음 만나 주신 지 삼십 년이 흘렀다. 그의 행동을 볼 때 그처럼 완악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 마땅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며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덕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한번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확신을 주시려 하셨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네 번째, 두 번째 벧엘의 사건이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드디어 사랑의 아버지의 인내하시는 징계가 그 목적을 달성했다. 야곱은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가족들을 서둘러 모아 벧엘로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여행을 했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 35:5).
부끄럽게도 그가 무시했었던 그 하나님께서 그의 죄의 대가가 그를 덮치는 것을 막아 주셨다. 벧엘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발견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창 35:9).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축복하시는 일에 결코 낙심이 없으시며 자녀들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끝없는 자원을 가지고 계시다.
다시 한 번 야곱은 그가 완고해서 방해했었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들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창 35:10).
이제 야곱은 그의 새 이름의 특권에 합당하게 살았고 다시는 술책을 꾸미고 사기를 하는 옛날의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훈련은 효력이 있어서 벌레와 같은 야곱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나란히 함께 믿음의 사람들의 대열에 끼게 되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히 11:2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이 세대나 다른 세대나 사람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단지 시험의 사건이 다를 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부심, 야심, 돈, 이성 문제(異性問題), 그들의 이상(理想)에 다다르지 못하는 등 시험을 당하여 실패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종종 옛날과 똑같은 죄가 되살아나 힘을 발하여 그들을 쓰러뜨린다. 똑같은 비극적인 성격의 결함이 일생 동안 마치 경찰견처럼 그들을 뒤쫓는다. 잇따른 패배로 인해 소망이 마비되고 만다.
이런 사람들에게 마귀는 미래가 과거보다 결코 더 나아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의 메시지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이 대표적인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복음을 말씀하고 계시다. 유전의 법칙이 최고의 법칙이 아니다. 심리학의 법칙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 야곱의 하나님은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계속 기회를 주시는 뛰어난 하나님이시다. 두번째-혹은 스물 두 번째-기회가 반드시 과거의 실패로 인한 현재의 결과를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그 실패조차도 새로운 승리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도 낭비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심지어 실패조차도, 중요한 교육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야곱에 대한 최상의 교훈은 어떠한 실패라도 종국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기질,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도 희망을 가지신다. 어떠한 과거의 실패도 그 사람의 가능성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붙드시고 나면, 그를 축복하시겠다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실망이 없이 끝까지 그를 추적하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야곱을 처리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실패했다고 물리치셨더라면, 오순절의 위대한 설교사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쓰레기더미에서 들으셔서 그 실패를 통해 더 광범위하고 열매 맺는 사역을 창조하심으로써 마귀에게 역습을 가하신다. 아무리 연약하고 흔들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귀히 보신다.
오스왈드 샌더스 「충분히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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