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교회와 예배] 올바른 기도 훈련

 

무한한 사랑의 대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1.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1) 우리의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지으신 하나님은(잠20:12)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우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신다(시94:9). 기도의 내용을 찬양-감사-회개-간구로 요약한다면, 우리가 어떤 형태의 기도를 드리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보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귀를 세게 잡아 당기며 눈을 세게 부비면서 실감할 수 있다. 바로 고대근동의 최강대국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협박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왕하19:16; 사37:17)라고 기도하며 승리했던 히스기야가 그 훌륭한 실예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시간표와 방법대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므로, 때로는 하나님의 '아니오'와 '기다려'도 '예'와 함께 기도 응답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접수하시지도 않으시며 결재하시지도 않으신다고 낙담하거나(사40:27),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리시지 않으신다는 포도주 찌꺼기 같이 가라앉은(습1:12) 실제적 무신론은(시14:1) 대단히 잘못된 기도의 태도이다.

 

3) 우리는 이웃의 실수에 대하여 대체로 '삼세판'의 최대 인내를 갖고 있다. 형제의 죄를 '일곱번' 용서하려는(마18:21) 베드로의 넉넉한 마음에 우리는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여러 차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마다 찾아와서 "내가 회개하노라"(눅17:4) 고백하는 말에 변함없이 귀를 기울이고, 다정히 들어줄 인격의 소유자는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는 자주 상대방이 인상을 찌푸리며, 등을 돌리며,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던 마음의 상처들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마18:22) 용서하라는 예수님과 함께 그의 아버지 하나님(롬15:6; 엡1:3,17; 골1:3; 벧전1:3) 역시 '널리 용서하시는'(사55:7) 분이시요, 우리의 궁색하고 뻔뻔스러운 목소리에도(벧후2:22 참조) 귀를 기울이시며(대하7:15; 시40:1) 들어주시는(창21:17; 출2:24 = 민20:16 = 신26:7; 행10:31; 요일5:15 등) 우리의 아버지이시다(요20:17; 눅11:13 = 마7:11; 롬8:32; 약1:17).  따라서, 우리는 나같이 무지하고 더럽고 교만한 죄인이 드리는 회개와 순종의 기도에 관심을 가지시며 응답해 주시므로, 더욱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전인격적인 사랑을 고백한다(마22:37; 롬8:38; 고전8:3).

 

2. 기도는 무한한 사랑의 대화이다 (렘2:1-3; 고전13:4-7 참조)

1) 기도는 강요도, 억지도, 체면도, 생색도 결코 아니다. 올바른 기도는 "내가 사랑하는도다. . .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원어: 외치리로다]"의 고백대로 무한한 사랑의 대화이다.

2)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힘들게 일어나는 자신을 애처럽게 바라보는 배우자 앞에서, "새벽기도를 누가 만들어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키나?"가 아니라,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얼마나 샘솟듯 하는 기쁨을 가지고 무한한 사랑의 대화인 기도를 즐겼던가!

 

3) 렘2:1-3은 하나님과 그 언약백성의 관계는 신혼부부로 묘사한다(참조: 겔16:8-14; 호2:19-20; 고후11:2; 엡5:31-33). 혼인의 "우의[원어: 헤세드]와 사랑"(2절)이 드러내는 보편적인 특징은 바로 우리의 올바른 기도생활에도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①보고 싶고(2절, '나를 좇았음'),  ②함께 있고 싶고(2절, '나를 좇았음'), ③말 나누고 싶고(1,2절, '말, 말씀'), ④주고 받고 싶고(3절, '성물, 처음 열매'; 롬13:8, '사랑의 빚'), ⑤최우선권이며(3절, '처음 열매'), ⑥순결하며(3절, '성물'), ⑦질투하며(3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선한 질투란 경쟁자를 참지 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임[출34:14]), ⑧순종하며(2절, '귀에 외쳐, 나를 좇았음'), ⑨나쁜 것을 용서하고(고전13:5,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사죄와 망각의 은혜에 대한 시103:12; 사38:17; 43:25; 미7:19; 요일1:7,9 참조), ⑩좋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2절, '기억'; 주 예수님의 만찬과 '나를 기념하라'는 고전11:23-26 참조).

 

3. 평생의 기도훈련과 성숙

1)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부부사랑은 "환갑과 진갑이 지나가도 늘 신혼부부와 같다"로 요약된다. 사랑의 열매요 선물로서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자신들의 가정을 꾸리며 다 떠나간 후, 중년부부는 새롭게 만난 총각 처녀같이 신혼여행을 가질 수 있다. 그 부부의 사랑은 '신비'(엡5:32의 '비밀'의 원어[무스테리온] 참조]로서, 평생 부부사랑을 함께 새롭게, 더 '넓고, 길게, 높고 깊게'(엡3:18-19) 배우며 누리는 훈련과 성숙의 요소가 있다(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기도가 무한한 사랑의 대화이며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고백할진대, 평생 기도의 훈련과 성숙의 신비가 오늘 여기를 사는 영적 하루살이 속에 놓여 있다.

 

2) 아침에 일찍 일어나며, 저녁에 늦게 눕는 일과 속에서, 성삼위 하나님을 사랑하여 기도하는 동안 사랑의 10대 특징이 얼마나 체득되고 있는가?  제일 먼저 뵙고 싶고(새벽기도), 함께 있고 싶고(마26:60, '한시간 동안도'; 철야기도), 대화하고 싶고(약5:13, 기도와 찬송; 기도는 나 혼자 중언부언하는 독백이 아니며, 하나님이 찾아오시며 말씀하심에 민감한 대화이다), 자신을 드리며 응답을 받으며(작정기도), 최우선권이며(금식기도), 순결하며(회개기도), 질투하며(전도와 선교를 위한 '중보'['지원'이 더 좋은 표현일지?]기도), 순종하며(기도한 대로 실천), 나쁜 것을 용서하고(하나님과 타인의 용서는 물론 자신을 스스로 용서함도 포함; 회개기도에 합당한 열매), 좋은 것을 기억하는(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은혜와 긍휼을 손꼽아 헤아려 봄; 찬송가 489장) 복되고 영광스런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아멘.


 

은혜스런 찬양과 설교를 원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아담한 옷을 입으며--그리스도인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아마 이런 질문을 하면, 아니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특별한 옷을 입어야 하는가? 그냥 자기 마음에 드는 옷을 입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신자들에게 무슨 옷을 입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가르침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 주님은 무슨 옷을 입을 것인가에 대한 큰 원칙은 주셨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복장에 대한 명령을 주셨다. 그 대표적인 명령은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기독교 역사 중에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하려고 했던 무리들이 있었다. 프란시스코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절대적인 무소유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명령은 특정한 시기에, 특별한 사명을 가진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날 일반 성도들에게 그대로 규범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장 9절의 말씀은 어떨까? 사도 바울은 교회의 여자들에게 아담한 옷을 입으라고 명한다. 만약 이것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와 같은 부류에 취급하여 그 당시 문화적 상황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 말씀은 더 이상 교회에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성도들의 의복에 대한 귀한 지침을 삼아야 할 것이다.

"아담한"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검소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특히 여성도들은 검소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검소하다는 큰 원칙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이가이다.  재세례파의 후예들은 이 원칙에 근거하여 단색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아미쉬 공동체와 같은 이들은 옷에 어떤 장식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단추도 장식이라 생각하여 단추를 없애고 철핀으로 옷을 잇도록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사고방식이 너무 율법적이 아닌가라고 생각들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노력에 대해서 우리는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다른 교파들은 이 말씀은 그냥 공허한 원칙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공허하다는 말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아담하게 입으며"라는 구절과 별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뜻이다.  검소하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주관적이다. 예를 들면, 부자들에게는 300만원의 옷도 검소한 옷이 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3만원의 옷도 사치스러운 옷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검소하다는 말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을까?  아무리 부자지만 300만원짜리 옷을 검소한 옷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구나 오늘날은 옷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다. 특히 여성들은 옷을 자기 자신의 표현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검소한 옷을 입으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날 세상의 기본적인 가르침과 전혀 상반된 가르침인 것이다. 적어도 성경에 있어서 옷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경건이 나타나도록 하여야 한다. 즉 옷에 대한 관점 자체가 틀리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더 많고, 더 좋고, 더 비싼 옷이 팔려야만 돌아갈 수 있는 체제이다. 따라서 소비를 줄이면,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게 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세상은 여자들로 하여금 더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입으라고 유혹한다.  옷에 관한한 적어도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의 문화는 대립하고 있다.

여자들로 하여금 옷의 유혹을 가장 쉽고 빈번하게 일으키는 것은 여성잡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대부분의 여성잡지는 광고가 지면보다 훨씬 많은 것은 볼 수 있다. 광고도 총 천연색 칼라로 무장하고 있다.  이 여성잡지가 가장 많이 읽히는 곳은 미장원이다. 2-3시간씩 앉아 있으면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여성잡지를 구독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독여성이라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여성지는 수준이 상당히 낮기 때문에 여성들의 사고를 저하시킨다. 그리고 생각할 거리를 한정시킨다. 여성들이 모인 곳에 심방을 가보면 많은 경우에 텔레비젼 이야기 아니면 여성지에 나온 이야기가 화제가 된다. 많은 주제가 자녀 교육외에는 옷과 치장에 관한 이야기다. 

성도들이, 특히 여성들이 옷을 고르거나 입을 때, 특히 교회에 갈 때에는, 주 관심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화려한 옷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검소한 옷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그런 옷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최대한 노력하여 그런 옷을 입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는 여성잡지에서 눈을 될 수 있는대로 때는 것이 영적 건강에 유익하다고 본다.  오늘부터 미장원에 갈 때는 좋은 경건 서적을 지참하고 가는 것을 모든 믿음의 여성들에게 권면해 본다.


은혜스런 찬양과 설교를 원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교회와 예배] 자매에게 하듯 하라: 7계명과 성농담(음담패설)

 

최근 서울대 의대 교수가 간호사에 대한 성희롱으로 다시 성희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번 사건의 특이한 점은 대부분 이러한 성희롱 사건이 있으면, 당사자들이 대부분 부인하는데 반해서 본인 스스로가 그러한 혐의들을 시인했다는 것이다. 안 했다고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교수가 그렇게 한 것은 그 만큼 그의 행위가 광범위하고 노골적이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사실, 그 교수의 성희롱을 보면, 어떻게 그런 행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심각하였다. 그 교수는 긴장이 흐를 수밖에 없는 수술실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성적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야 말로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음담패설이 죄의식 없이 퍼져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상당수의 목사들에게서도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음담 패설은 성도와 목회자들에게서도 적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음담패설은 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할까?  음담패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내숭" 떠는 것 보다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덜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악한 것을 피하기 위해서 더 악한 것을 택하는 방법이다. "내숭"은 그대로 음담패설을 즐기면서도 죄책감이라도 가지는 것이지만, 음담패설 자체를 말하는 것은 죄를 공개적이고 뻔뻔스럽게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교회는 일반적으로 성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해 왔다. 그래서 공식 석상에서 이야기되기 보다 몇몇 아는 사람들의 사적인 모임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고 또한 그러한 이야기들은 종종 음담패설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마침내 성희롱으로 발전하게 된다. 성도들이 이러한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에 성경은 성행위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성경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냥 "동침하니라"라는 구절로 끝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성경이 영화 시나리오라면, 성경의 수많은 "동침하니라"는 구절 뒤에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성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으며, 그 지침은 우리가 성을 어떻게 이야기 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이 되어야 한다.

성에 관한 한 우리에게 참된 길잡이가 되는 가장 중요한 성경은 아가서이다. 아가서가 물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오직 그러한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아가서를 아담의 노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에 대한 주석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다음 구절을 읽어 보자.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구나." 아가서가 만약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단지 연애시 정도로 이해되거나 더 나아가 고대 시대 판의 포르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가서는 여호와의 이스라엘, 나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인 부부의 참된 모습을 그리기 때문에 정경에 포함되었고,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서 부부만이 가지는 성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은 "성"을 유모어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을 하나의 우스개 소리로 만드는 음담 패설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성경은 성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컨텍스트는 부부이다. 따라서 가정의 관점에서 떠나 성을 이야기하게 되면, 성의 고귀함은 사라지고 성적 농담이 될 가능성이 매우 많다.

"비둘기"는 여전히 내가 집사람을 집에서 부를 때의 애칭이다. 물론 이 단어는 아가서에서 빌려 온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 지 모르지만, 이 애칭은 우리 부부 사이의 친밀감을 훨씬 높여 준다. 즉, 성에 대한 표현은 똑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부부와 성을 즐기면서 아내에게 키스가 얼마나 좋은 지를 표현하는 것은 서로에게 성적인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말이라도 부부관계를 떠나게 되면, 그것은 우스개 소리가 될 가능성이 훨씬 많아진다. 예를 들면 섹스를 즐기다가 부인에게 "당신 젖가슴은 쌍태 노루 같애"라고 말하면, 부인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말을 어떤 모임에서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욱이 그 표현이 "당신(2인칭)"에서 "어떤 여자(3인칭)"로 바뀌게 되면, 여자에 대한 모욕이 된다. 왜냐하면, 여성의 신체에 대한 표현은 여자를 비하시킬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음욕을 음담패설로 아예 드러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더 왜곡시키는 것이다. 더구나 음담패설은 종종 성희롱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음담패설과 성희롱의 차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니 믿음의 남성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  어떤 나이든 목사님에게서 "여자를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 말의 뜻은 이해가 가지만 너무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이 부분에서 디모데전서 5장 2절은 중요한 원칙을 우리에게 준다. 바울은 목사 디모데에게 "젊은 여자를 일절 순결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명한다. 이것은 젊은 여자를 대하는 모든 목사들에게 중요한 교훈이다. 성희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사람의 말이 정말로 성희롱이었는지 아닌지의 기준은 자신이 한 말이 자기의 여동생이나 누나에게 말하였을 때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성적인 표현들은 대부분 "성희롱"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매에게 하듯 하라"는 명령은 모든 법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판사는 성폭행이나 성희롱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 바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는 원칙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희롱을 판사의 여동생이나 아내가 당하였다고 생각해 보라. 그에게서 어떤 판결이 나겠는가?

남자들에게는 자기 누나나 여동생의 순결을 지키려고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여동생 주위에 모르는 남자가 접근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게 그 남자에 대해서 공격적이 된다. 심지어 상대방이 깡패인 줄 알면서도 덤비기도 한다. 목사들은 바로 젊은 여자들을 대할 때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즉, 목사들은 젊은 여성들을 대할 때, 그들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비율이 많고 여성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진다. 그 사이에서 목사는 여성들과 성농담을 할 위험성도 많아진다. 만약 그 이야기를 자신의 여동생에게 말하여도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말은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은 거두어 들여야 한다.

한국 사회와 교회는 성 농담과 음담패설을 은근히 즐김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음란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 점에서, "자매에게 하듯 하라"는 모든 믿음의 남성들에게, 특히 목사들에게 주는 엄숙한 주의 명령이다.  고신신앙의 모토는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다. 순결에 대한 사랑은 목사에게 있어서, 특히 교회의 젊은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나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고신 정신을 진정으로 오늘날 이어가는 것이다

 

은혜스런 찬양과 설교를 원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풍성한 예배를 향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실까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찬송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찬송을 좋아하실까?”라는 질문 다음에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은 어떻게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실까?”라는 질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성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선정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찬양의 방식을 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기준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찬양의 방식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라틴어 찬양에서 모국어 찬양으로 바뀐 것이다. 중세 시대에 찬송은 거의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그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라틴어는 서방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인 언어였다. 옛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히브리어를, 신약교회를 위해서는 헬라어를, 서방 유럽교회를 위해서는 라틴어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모국어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은 수준 낮은 예배 행위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을 때 유림들이 반대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라틴어로 찬송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찬송을 제대로 부를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찬송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무슨 뜻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중세 시대에 성도들은 찬송 시간에 찬송을 부르기보다 찬송을 감상했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찬송의 곡조를 감상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설프게 저급한 영어(독일어, 프랑스어)로 찬송하는 것 보다는 품위있는 라틴어로 찬송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 열납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유투브에서 그레고리 성가를 찾아 듣다 보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선율의 아름다움에 금방 반할지도 모른다.

 

라틴어 찬송이 주가 되다 보니 찬송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소수의 성가대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가사가 라틴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곡조도 아주 어려웠기 때문에 따라 부른 것이 쉽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전 참석자가 함께 부르는 회중 찬송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더 나아가 소수에 의한 성가대 찬양은 구약의 예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변호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찬송의 관습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품위 있는 언어로 작성되고 고도의 아름다운 선율로 작곡된 찬송을 더 좋아하신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중세의 방식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찬송이 신자들에게 미신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믿음은 분명한 지식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찬송과 기도는 공적인 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알아듣는 언어로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213). 루터파의 경우 라틴어 찬송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개혁파는 모국어 찬송만을 받아들였다.

 

회중찬송이 가능하기 위해서 모국어 가사와 더불어 곡조의 단순화가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그 당시 잘 알려진 민요들이 찬송가 안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멜로디는 계속 부르다 보면 별로 재미는 없을 수 있겠지만 가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 모든 성도가 함께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이 있었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배경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고 고난도의 선율에 의한 성가대의 특별찬송보다는 단순하고 담백한 선율에 따른 회중찬송을 더 좋아하신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찬송을 점검해 보자. 요즘 CCM의 특성 중의 하나는 따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박자가 곡조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찬양팀은 최신 노래를 연주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좌석에 앉은 회원들은 찬송을 부르기 보다는 찬송을 듣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대형 수련회의 경우에 그러하다. 앞에서는 아주 열정적으로 찬양팀이 노래하고 있지만 뒤에는 대다수가 팔짱을 끼고 듣거나 심지어 자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찬양이 일부 매니아들을 위한 시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CCM의 문제는 부르는 이들에게 가사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한다. 예를 들어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찬송을 부른 이들에게 그 의미를 물어 보면 대부분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뜻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가사의 내용이 아니라 곡을 통해서 경험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CCM 노래가 1절로 되어 있고 그것을 느끼고 경험할 때까지 여러 번 계속 반복적으로 부른다. 이것은 정확히 타락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성과 그대로 일치한다. 믿음이 분명한 지식에 근거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점차 우리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특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특송은 특별찬송의 준말이며 이것은 보통찬송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특송을 좋아하실까? 성가대의 찬송도 일종의 특송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사라진 전통이 우리 한국교회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있다. 성가대의 찬송 시간에 성가대는 열심히 아름답게 노래하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것을 듣고 있다. 끝나고 나서 아멘!”이라고 화답하기도 한다. 소수는 노래하고 다수는 경청하는 찬송 방식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참고로 필자는 음악에 관심이 있는 좀 있는 편인데 성가대의 찬양이 정말 은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아마 음악에 대한 수준이 높을수록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찬송의 방식에서 가장 논쟁이 된 부분은 악기 사용에 관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기본적으로 예배 시간에 악기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오늘날도 그리스 정교회는 악기를 대부분 사용하지 않는다. 종교개혁가들 중에서도 악기 사용을 반대한 대표적인 사람이 쯔빙글리였다. 칼빈도 악기 사용에 대해서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심지어 수천 곡이 넘는 찬송을 작사하였던 요한 웨슬레도 악기 사용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악기의 사용이 찬송에 도움 보다는 해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는 오르겐 사용과 관련하여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리는 교파는 아예 악기파와 무악기파가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기타나 드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기성세대는 상당히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제 교회마다 기타나 드럼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교회의 쇠퇴로 인하여 기타나 드럼이 방치되어 가고 있는 교회도 적지 않다. 이제는 그와 같은 악기를 다룰 사람이 교회에 없는 실정이다. 악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교회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신대원생들의 경우 음악이 없으면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악기를 사용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아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악기사용을 명하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기 사용에 대해서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하겠다. 과연 오늘날 과도한 악기의 사용이 정말로 찬송에 도움이 되는지를 진지하게 질문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에 찬송을 부르는 방식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시편과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마음에 감사함으로(with grace in heart)”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한다(3:1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5). “마음에 감사함으로는 찬송 방식의 대 원칙이 되어야 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찬송 방식을 판단하여야 한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투잡(알바/부업)으로 월급 만큰 수익이 됩니다.

아래 접속하셔서 상담받아 보시고 결정하세요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교회와예배] 예배는 많이 드리면 드릴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예배와 집회의 엄밀한 구분이 없어진 결과 예배는 거의 공해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사예배, 회갑예배, 칠순예배, 출판감사예배, 학위취득예배, 은퇴찬하예배..... 별의 별 예배가 교회 안에 들어 왔는데 성도들은 이제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예배는 많이 드리면 드릴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라는 이교도적인 생각들은 예수 믿고 나서도 잘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1)

...

한국교회나 선교단체에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개회예배와 폐회예배이다. 어떤 프로그램을 하면 꼭 개회예배를 하고 폐회예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교단체나 개 교회 수련회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예배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아무도 그 예배에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회예배를 기대하면서 시간 맞추어서 참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신학교수들이 모이는 학회라고 다를 것은 없다. 개회예배 참석자 수를 보면 민망할 정도이고, 폐회예배는 거의 때우는 수준이다. 결국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학회는 학회에 맞게, 수련회는 수련회에 맞게 집회를 운영하면 된다.

........

우리 교회의 경우 일 년에 두 번씩 긴 나들이라는 이름으로 수련회를 하는데

첫 순서는 2시부터 저녁시간까지 수영입니다.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

이것이 바람직한 방향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투잡(알바/부업)으로 월급 만큰 수익이 됩니다.

아래 접속하셔서 상담받아 보시고 결정하세요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현장과 목회 / 개척교회 설립 격려사

 

격려사

 

목사와 교수로 있으면서 수많은 격려사를 들었지만 격려사를 제가 직접 하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이제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게 되었네요. 나이가 이제는 좀 들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격려사를 부탁받고 그동안 들었던 모든 격려사를 조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격려사 중에서 정말로 격려가 되었던 격려사는 한편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제 격려사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격려사가 진정으로 격려가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야말로 가장 위안이 되는 격려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어밖에 할 줄 모르는 사도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위대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거의 불가능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임마누엘의 약속보다 더 큰 격려는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많은 격려사에서 이 핵심이 빠졌기 때문에 격려사에서 격려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날 젊은 후배 목사들이 위대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척박한 상황 속에서 개척의 현장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가르친 한 제자가 교회를 설립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말이 격려가 될 수 있을까요? 저도 예수님께서 제게 가르쳐 준 격려사를 그대로 하고 싶습니다.

 

세종시 장로교회와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결코 이 교회를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이 교회가 자립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성심껏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최정복 강도사는 교회 개척하기 전에 우리 교회에서 6개월 동안 출석하면서 개척을 준비하였고, 일 년에 2차례 전교인이 함께, 긴 나들이라고 불리는 수양회를 두 교회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이 두 교회의 하나 됨과 교제를 더욱 더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2. 또한 제가 섬기는 광교장로교회가 먼저 모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개척을 하고 나서 교회가 실패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충분한 신학적 준비없이 목사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목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개척교회가 따라 갈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되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광교장로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서 앞으로 개척하는 교회의 희망과 길잡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3. 마지막으로 성도님들께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좋은 개척교회의 회원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제 딸이 주일 저녁이면 제게 전화를 하는데 세종시 장로교회를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개척교회라고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즐겁고 행복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전도 방법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투잡 ( 재택알바 / 부업 )으로 월급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예배 십계명

 

1. 예배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최고의 축복이다 예배 시간보다 귀중한 것이 없으므로 절대 빠지지 말라.(시73:27-28)

2. 예배시간 20분전에 교회에 와서 앞자리부터 의자 안쪽으로 먼저 온 성도순으로 앉아 예배를 정성된 마음으로 드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려라.(요4:24)

3. 먼저와서 기도하고 주보를 보고 중요한 부분은 표시하고 성경본문을 찾아 읽고 믿음으로 예배를 기다리라.(잠15:8)

4. 성령충만 받기 위해 마음 문 열고 찬양 인도자에 따라 찬송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불러 라.(행13:18)

5. 창조적인 예배가 되기 위하여 믿음 안에서 긴장하고 어린 아이들이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잘 훈련시켜라.(행13:8-12)

6. 예배는 전쟁인 동시에 축제이다. 그러므로 절대 졸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정성껏 드리라. (행20:8-10)

7. 예배는 생명이요 응답이다.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설교 말씀을 듣고 은혜롭게 말씀을 사모하고 고백하는 믿음으로 아멘하라.(호8:6)

8. 신령과 진정된 예배가 되도록 철저히 준비하며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도록 말씀을 들으며 은혜스럽게 아멘으로 크게 화답하라.(고후1:20)

9. 불신자와 세신자에게 매력적인 예배가 되게하며 주님을 사모하게 하고 예배를 생활화 하도록 하라.(시84:10)

10. 통성기도는 믿음으로 손을 들고 크게 부르짖어 간절히 하며 받은 은혜 감사하여 준비된 예물을 봉투에 담아 정성껏 드리고 축복과 승리로 예배를 장식하라.(대상29:10-24)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예배의 역사와 그 발전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예배는 )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예배는 오늘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추구할수록 요청되는 것은 예배의 본질과 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역사를 아는 자가 힘이 있다는 말은 예배의 분야에도 적용된다. 오늘 교회의 예배는 수천년을 말없이 흐르고 있는 강물처럼, 교회의 시작에서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굽이굽이 흘러오고 있다. 그러기에 예배연구를 위해서 한 부분을 파편처럼 떼어내어 연구할 수는 없다. 예배의 역사와 그 발전을 고찰하는 것은 오늘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계획과 변화를 위해서는 필요하다.

여기서는 오늘 예배갱신을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예배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교회의 예배의 갱신을 위해서 필요한 예배역사 중에서 중요한 특징만을 언급할 것이다. 또한 단순한 예배의 형태를 지닌 한국교회에 호소력있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 예배와 청교도 예배에 보다 중점을 둔다. 예배의 역사와 발전을 고찰하기에 앞서, 연구의 의의를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다.

첫째, 오늘 교회 예배의 형태와 요소가 지닌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세 로마천주교의 복잡하고 신비로운 예전에서 표현되는 예전적 행동들의 의미를 회중은 물론, 집례하는 사제들까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배운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에 대해 칼빈은 강하게 거부감을 갖고 비판한다. 예배적 행위는 이해되지 않을 때 미신적인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예배형식이 비교적 간단함으로 그와같은 일이 잦지는 않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몇차례의 성례전연구세미나을 인도하면서 확신하게 되는 것은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예전적, 역사적 이해를 깊이 하는 만큼, 성례전을 통해 얻는 은혜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둘째, 예배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는 잊혀져 있으나 역사 속에서 표현된 예배의 유산들을 찾아낼수 있다. 한 때, 역사적, 문화적 이유 때문에 생략되거나 축소된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것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봉독은 초대교회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예배요소였다. 설교는 성경본문을 위해 봉사, 즉, 해설과 적용하는 것이었다. 성경본문을 낭독하는 시간이나 차지하는 위치에서 오늘 개혁교회의 말씀중심의 예배에서는 오히려 퇴보한 면이 있다. 설교를 위해 봉사하는 위치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셋째, 예배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예배의 변화의 패턴을 고찰함으로 예배의 갱신의 원리를 삼을 수 있다. 시대, 문화와 장소가 바뀜에 따라 그에 맞게 예배의 형태가 변할 때, 변하지 않았던 원칙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한정된 지면에 방대한 그리스도예배의 역사를 다 담을 수 없다. 예배역사연구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도전을 준다면 이 글의 목적을 다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예배발전의 개요


개신교예배는 개혁자들의 신학과 예전으로 부터 시작하여 교단마다 강조점을 달리하며 발전해나갔는데, 한가지 공통된 특징은 다양성이다. 지역마다 시대에 따라 예배의 형태가 다르게 표현되었고, 개신교회는 서로 크게 대립하지 않고 이러한 다양성을 수용해 왔다. 이러한 개신교예배는 성서의 초대기독교공동체의 예배와 초기 교부들에 의해 유지되었던 예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역사와 발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통과 개혁의 변증법적 변형이다. 기독교 예배는 시대마다 전통적인 예전에 예속되려는 성향과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려는 개혁적 시도가 긴장 또는 갈등구조를 유지하며 변천되어왔다.


1. 초대기독교

초대 기독교의 예배에는 일정한 형식과 자유가 어우러져 있었던 것 같다. 천국복음의 전파와 종말론적 사건이 전개되는 제자공동체에는 황무지를 개간할 때와 같은 자유함이 있었다. 한편으론 유대교의 회당예배와 불가분리관계에서 그 형식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초기 기독교예배는 유대교의 하나님 예배와 동일한 기초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초대기독교예배에 전통에의 예속과 새로운 세계를 여는 자유로움의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카 쿨만이 지적한 것처럼 초대기독교예배는 비록 예배의 내용에 있어서는 유대적 전통에 예속되지 않았지만, 형식에 있어서 유대교 예배의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배의 구조는 물론이고 각 요소들도 직접 간접으로 유대적 표현을 따랐다. 그러나 초대공동체 예배의 특징은 그들의 자유로운 영적표현에 있다. 그들의 자유로운 예수의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유대적 전통들을 새롭게 해석한 예수의 종말론적 선언과 행위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를 유대교가 허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히 원시기독교예배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훼르디난드 한이 지적한 원시기독교 예배가 유대교 예배로부터 나와 새로운 형식을 요구한 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행위의 현재적인 현실성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원시공동체의 본질적인 세가지 요소는 예수의 활동과 죽음, 예수의 부활과 현재, 임재, 그리고 성령의 활동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유대교 예배와 함께할 수 없는 상이점이라는 것을 들었다. 초대기독교예배는 이 세가지 본질적 요소의 상관 관계를 통해 잘 이해된다. 즉, 부활의 증인들은 예수의 활동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며, 성령의 강림과 활동을 통하여 보증을 얻었으며, 바로 여기에서 공동체의식이 성취된 것이다. 이런 초대공동체의 특이성은 유대교예배의 전통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주었으며, 이후의 예배의 역사 속에서 변증법적 변형을 이루어가는 중심적 요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초대기독교예배가 유대교의 예배에서 분리되어가는 과정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기독교공동체의 형성과 발전과 함께 고찰해야 한다. 한(Hahn)은 초대기독교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네부류, 즉 아람어를 사용한 기독교 공동체, 헬레니즘저 유대인 기독교공동체, 이방인기독교공동체, 속 사도시대의 예배로 나누어 이 공동체들의 예배와 유대교의 예배의 상관관계를 역사적으로 기술한다. 먼저, 아람어를 사용한 기독교공동체예배는 사도행전 2-5장의 누가의 진술에서 알려졌는데, 유대교예배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는 면들을 보여준다.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보인 곳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마 18:20)는 말씀은 유대교적 예배이해를 거부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교 예배에 필요한 소수 열 사람이 포기되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세례로, 유월절 식사는 성만찬으로, 마라나타기도, 구원소식의 선교설교등은 기독교공동체의 독특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아멘, 할렐루야, 기도형식등 유대교예배적 표현들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또한 성전과 율법의 경우 중심적 위치에서만 벗어났을 뿐, 이 공동체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성전과 회당은 선포와 선교의 장소였다. 후에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공동체의 독자적 지배력을 인수한 이후에는 강화가 되어 엄격한 율법준수, 유대적 제의 질서에의 충실등 편협한 유대인 기독교가 형성되었다.

그 다음, 스데반, 빌립, 바나바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의 연대를 유지하며 안디옥에서 발전했던 헬리니즘적 유대인기독교공동체는 사도행전6장1-6절의 기사에서 히브리적 유대인기독 공동체와 확실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유대교 예배에 있어서 더욱 확실히 분리시키고 있다. 헬라어구약을 사용하고,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도 예수의 의도를 더욱 철저히 받아들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공동체에서 유대적 제의적 표상들을 종말을 선언함과 동시에 기독론적이고 교회론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율법과 성전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셋째, 초기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에는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예배의 본질적 요소를 수용한 채, 성령의 활발한 활동이 포함되었다. 이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보여주는 예배의 설명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데, 사도적 교훈에 포함할 수 있는 교훈(디다케), 계시, 지식이 있고, 아멘이나 방언, 마라나타의 기도의 요소, 찬미가 있다. 여기에 다른 곳에서 성렁의 은사로 분류한 예언, 방언, 통역의 요소들도 언급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부적으로는 무질서와 분열, 그리고 공동체의 폐쇄성이고, 밖으로는 주위 세계의 이교적인 사상의 위협이였다. 이것을 간파한 바울은 한편으론 질서와 통일성, 공동체의 덕, 예배의 이해성을 강조하였고, 다른 한편으론 유대주의에 대해서처럼 혼합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노력들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저항하였다.

마지막으로 속 사도시대(60년초부터 1세기말)의 예배는 요한계시록 히브리서, 야고보서, 목회서신,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에서 간접적인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대는 은사적인 형태가 전례적인 공식문과 공동체의 직분적 질서에 의식적으로 결부딤으로써 부분적으로 약화되는데, 따라서 유대적 제의개념들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의 경우에 종말론적 기독론적 메시지를 유대묵시문화적 표상자료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계시록4, 5장의 천상예배를 보라] 히브리서 역시 제의적인 진술로 가득차 있다.[7:1-10:18] 야고보서에는 아람어를 사용한 유대인 기독교에서 수용된 장로제도가 전제되어 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정체성을 전통적인 제의적 술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벧전2:5,9] 이 시대는 목회서신에서 처럼, 문서와 교훈이 나타나고, 전례적인 공식문과 공동체적 질서가 구체화되는데, 따라서 예배의 살아있는 은사적인 형태는 의식문에 흡수되어 약화되었다.


2. 교부시대와 중세시대

콘스탄틴대제의 회심이전까지 기독교예배는 사적예배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회심은 예배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사회관습을 수용하여 시민을 위한 예배를 꾀한 것이었다. 바실리카식 건물, 예복, 행렬, 촛불, 향등이 들어왔고, 세례와 성찬의 예전적 구조가 이때 고정되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이후 시대의 예전의 기초를 이루는 왕성한 예배의 발전를 이룸과 동시에 그만큼 초대교회의 종말론적을 기대가 희미해져갔다. 중세에 이르러 예전의 복잡함과 화려함은 극치에 달하지만, 이미 오신 주님과 그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맥스웰은 라틴예전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자국어로 진행하는 프론(Prone)이란 부분 이외에는 라틴어를 사용하므로 회중의 참여를 약화시켰으며 예배를 불건전한 신비적 분위기로 빠져들게 했다. 이런 신비감 조성에는 예배의식의 정교하고 복잡함이 가세하였다. 시편송이 줄고 수준높고 기교적인 음악이 늘어갔고, 회중들을 의식 진행과 연결해주던 부제의 역활도 집례자의 단순한 보조자 정도로 약화되었다. 무엇보다도 미사 횟수가 경건의 잣대처럼 되어 미사의 횟수가 증가 했고, 사적 미사로의 길을 터 주었다. 미사는 회중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적 미사처럼 회중을 위해서 드려졌다. 본당이외에 부속건물을 둔 것이나 동방교회와는 달리 교회 안에 여러 개의 제단을 둔 것이 이를 반영한다.


3. 동방교회

동방교회 예배는 상징적인 행위들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재현해 보이며, 따라서 길고 반복되는 것이 많다. 폴 버기스(Paul Verghese)는 동방교회 예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무엇보다도 자국어(vernacular)사용의 권장인데, 이는 서방교회와의 큰 차이점이 된다. 서방 로마캐톨릭교회는 라틴어를 그들의 예전의 유일한 언어로 제2바티칸 공의회까지 사용했던데 비해 동방교회는 성경과 예식서(the Divine Liturgy)는 회중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 초기때부터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회중의 참여(Congregational participation)다. 무엇보다도 이 예전에서의 부제(deacon)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사제들이 성소막 안에서 예전을 집행하는 동안 제단에 서서 회중에게 중보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인도한다. 넷째, 사제 혼자 성찬 집례를 허용하지 않는다. 적어도 세사람, 즉 사제와 집사와 회중의 대표하는 한사람이 있어야 한다. 에디오피아 동방교회는 두명의 사제와 세명의 집사가 성찬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 인원이다. 사제들은 매일 성찬을 할 필요가 없었고 함께 나눌 회중이 있을 때에만 성찬을 행했다. 다섯째, 성령임재기도(epiklesis)인데, 서방 로마예전에서는 성찬제정어 전에 하는 봉헌기도중에 드려지는데 비해, 동방교회는 성찬제정어 후에 드리기 때문에 성물이 성별되는 시점을 놓고 서방교회와 논쟁이 있었다. 여섯째는 성상(icon)과 성소막(iconostasis), 예배신학적인 면에서는 예배의 신학적 풍부성,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 대한 철저한 인식, 화려한 詩語에 담긴 신실한 경건성, 기도문의 성경중심성, 예전적 색깔, 소리, 움직임등의 구체적인 예전 형태와 행위, 예전형태의 다양성이란 특징을 보여준다.


4. 종교개혁당시의 예배

중세의 예배의 관심은 성례전의 형태와 성물에 있었던데 반해,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각 예전의 단순한 행위 하나 하나에 있었다. 성례전은 약화되고 개신교예배의 특징이 된 교육적 예배는 더욱 강화되어갔다. 자국어, 인쇄된 서적, 긴 설교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또 한가지 개신교예배의 특징이라면 예배구조에서 찬송에 독립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이겠다.

죤 바클리(John Barkley)는 개혁교회의 세가지 특징을 말하기를, 첫째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경배와 감사, 겸손과 회개, 하나님 말씀을 들음,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와 회중 자신들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있다. 둘째, 예배는 항상 공동체적이므로 비록 혼자 기도할 때일지라도 다른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셋째, 예배는 공동체적이므로, 내향적인 동시에 외향적인 성격이 있고 따라서 침묵과 말씀, 음악과 예배적 행동, 촛불과 색깔등을 사용한다.

단순성을 강조한 칼빈은 그의 예전적 모델을 교황제도에 앞선 고대교회였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결합된 원리를 찾으려고 노렸했다. 그에게 성경에서 벗어난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배은망덕한 것이며, 불경건이고 지독한 불충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보다 성경에 충실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인간의 고안물을 최소한도로 첨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너무 개성적인 예배는 인간의 잘못된 상상력의 산물을 숭배하는" 자들을 경계했고 그 대안으로 예전적인 예배를 지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외부형식이 영적예배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정교한 의식적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예배자가 자신들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성경적 권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쥬리히예배서(The Zurich liturgy, 1535)를 만든 쯔빙글리는 많은 말이나 교훈, 의식적인 순서보다는 단순성과 고요함을 선호했는데, 기념설로 알려진 그의 성만찬 신학의 특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관상(contemplation), 친교(fellowship), 감사, 도덕적 열정이다. 특히 상상력이 고갈되거나 마음이 혼란함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두가지 관상의 주제를 주었는데, 하나는 성찬의 성물로, 이들은 매우 빨리 효과적으로 예배자의 마음을 자극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른 한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끼리 이야기하는 것처럼 회중들에게 읽어준다. 이러한 관상은 성찬을 통해 성물자체의 깊은 의미, 즉 갈보리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실히 의심없이 마치 현장에서 눈으로 보듯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죤 낙스는 그의 예배서(The Form of Prayers)에서 후에 개혁교회의 특징이 될 여러 요소들을 강조했다. 즉, 성령의 영감에 의해 집례자 자신의 기도들을 작성하고, 공동체적 행위를 위해 성경을 자국어로 모든이에 들려지도록 큰 소리로 읽혀졌다. 설교를 위한 단순한 예복만을 남겨두므로 목사와 평신도의 간격을 좁히고, 예배인도는 칼빈이 목회했던 스트라스부르그나 제네바에서처럼 성찬상이 아니라 강대상에서 했다.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는 종교개혁자들의 예배의 일치점은 첫째,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행하는 중세미사를 거부하였다. 둘째는 화체설거부, 셋째는 말씀의 회복으로 말씀과 성례전 사이 균형을 꾀하였고 말씀과 성례전의 이중구조를 주장했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말씀우선순위와 성례전 1년 4회 주장이 장로교회 뿐 아니라 영국청교도, 침례교도, 장로교도, 회중교회의 표준이 되었다. 개혁자들은 자국어사용에 대해서도 일치했다. 반면에 개혁자들 사이에 차이점도 있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통의 수용정도에 대한 불일치가 심각했다. 루터교와 성공회는 대부분 받아들였으나, 쯔빙글리파와 재세례파는 완전히 거부했고, 개혁교회는 중간 입장이었다.


5. 청교도예배

종교개혁 이후에 근대에 이르기까지 개신교회에 가장 큰 예배적 전통과 특징은 청교도예배에서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특히 청교도 신앙을 초대기독교신앙의 모델로 보고 지향해 오고 있기에 그들의 예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교도의 예배목표는 교회의 전통적인 인습이나 인간의 고안물로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 규례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예배는 엄격한 성경적인 기초, 언약의 강조,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에 대한 표현과 평신도에 대한 격려를 담고 있었다. 그 예배는 철저한 성경중심, 성찬은 물론 찬송과 기도와 교회건축에 있어서 단순한 예전, 설교와 기도에 있어서 탈원고적 성향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철저한 성경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설교를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여겼는데 이런 설교중심의 예배는 강대의 중앙에 놓인 강단의 위치에서 나타난다. 설교의 시간은 한시간에서 두시간까지 걸리기도 했는데, 이 때 설교에서 오늘날의 매스미디아와 시민교육의 역활도 담당했다. 말씀의 묵상후에 회중의 형편을 충분히 반영한 친밀하고 자연스런 즉석기도, 검은 가운이나 높은 강단도 말씀에 대한 강조점을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설교의 특징은 연속설교에 구절마다 해석하였다. 18세기 이전에는 설교자가 기도와 설교에 모두 즉흥적이기를 기대했고, 18세기초에는 설교메모에 매달리지만 않는다면 설교메모를 사용할 수 있었다. 주기도문은 로마카톨릭이나 영국 국교회처럼 매주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모범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음악에 대해서는 최초의 청교도들이 교회성가대에 대해 회중들의 찬양특권을 빼앗는다는 부정적인 견해와는 달리 많은 개혁과 진전이 있었고 성가대들을 배출하는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성찬은 목사의 관심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월 1회 또는 격월로 집행되었다. 성찬받기 전에 회개와 믿음을 요구했고 앉는 자세로 받은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무릎꿇음의 우상숭배적 위함을 피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종말론적 특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초기 청교도 예배의 형태와 순서는 단순했지만, 내용은 길었다. 매 주일 오전 9시에 대예배를 오후2시에 오후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마다 3시간에서 3시간 반정도 걸렸다. 예배시간이 긴 이유는 긴기도때문이다. 개회 기도도 15분이나 길었지만 설교 후의 기도는 설교만큼 길어서 한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오후 예배도 마찬가지여서, 회중들은 주일의 6시간 이상을 예배시간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예배들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일주일의 삶의 절정으로 여겼다는 것은 청교도들이 예배를 통해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진지한 자세를 잘 나타내준다.

이러한 청교도 예배는 영어 언어권 세계에서 성장해온, 장로교회, 개혁교회, 회중교회,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유니테리언 교파들에게 지배적인 형식이 되었고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비예전적 예배

침례교 예배에서는 의식문을 철저히 거부했는데, 심지어 성경의 직접적인 사용도 배제하였다. 설교하려고 본문봉독후에 성경이나 원고를 보지 않고 몇 편의 설교를 한다. 즉석기도를 하고 시편을 암송하여 부른다. 성찬은 쯔빙글리의 전통을 따라 매월 또는 분기별로 하지만, 칼빈주의적 권징을 더 엄격하게-예를 들면 수찬정지- 실행하기도 한다. 회중교회(Congregation Church) 예배는 보다 칼빈주의와 청교도 예배의 영향을 받았는데 예전적인 기도를 거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서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반대한다.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는 스코틀랜드 장로였던 알렉산더 캠벨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철폐하고, 사도신경은 비성서적으로 보고, 믿음을 고백하면 바로 침례를 행하고, 매주일 성찬을 주장하였다. 오순절교회예배는 특별한 체험과 황홀함이 성령의 임재라고 확신하는데, 늘 성령의 은사를 구한다. 이는 회개의 체험이나 성령세례와 관계되는데, 대부분 치유를 목표로 한다. 그들의 예배의 특징은 자발성인데, 기도와 간증과 고백과 찬송에서 잘 나타난다. 신오순절교회(Neo-Pentecostal church)예배에서는 오순절교회처럼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를 믿지만, 오순절교회와는 달리 은사중심으로 흐르지 않는다. 퀘이커 교도들은 성령의 임재를 내적인 조명으로 말하며, 은사와 특권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이다. 내적인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수적이고 외적인 요소인 말씀까지도 성령의 체험을 위해서는 이차적이된다. 성찬의 제정어는 영적인 실체를 말하는 것이고, 세례의 말씀도 성령의 세례로만 이해한다.


7. 현대개신교 예배

20세기 초에 결성된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25년에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합쳐서 한 교단을 이루고, 예배의식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와 감독교회, 성공회의 예배의식, 감리교와 회중교회로 부터 가져왔다. 이런 예배의식은 융통성이 있었다. 찬송도 생략할 수 있고, 사도신경도 필수적은 아니다. 성서일과와 함께 기도문들이 제공되는데, 고전적인 기도문-크리소스톰의 예전, 성공회의 공동기도서, 칼빈의 기도등-에서 취하여 짧게 변형시켰다. 성만찬은 매월 또는 년 4회 집례된다.
 
개신교회예배의 발전 가능성.


지금까지 초대기독교공동체의 예배로부터 중세, 개혁교회, 청교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예배의 역사연구로부터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역동성 회복을 위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1. 거룩성을 유지하는 예배.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성은 중심적 위치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의식적인 예배속에서 더욱 강조되어온 경향이었으나,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와 구속사건에 대한 기억을 회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했고, 그 후 역사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을 예전 속에 정확히 표현하려는데 집중하는 나머지 지나치게 의식화된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회상은 예전적 틀 속에 정형화될 수는 없다. 회중들의 속에서 현재의 사건으로 재현될 때,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하게 되고, 거기에 참된 거룩성을 경험하게 된다.


2. 회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예배.

예배에서 회중은 하나님의 은총의 수혜자의 위치에 있다. 회중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예배에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수적 사랑으로 회중을 부르시고 예비하신 은혜와 복을 내리신다. 그런 의미에서 회중은 수혜자요,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자로서 회중이 경계해야할 것은 예배에서의 수동성(pasivisity)이다. 먼저, 수동성에 대한 극복으로 예배순서에 회중들의 참여를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회중들의 참여는 초대교회에서 회중들이 예언이나 통역을 하는 모습에서, 또한 초기 동방교회의 부제의 능동적인 역활에서 발견되는데, 오늘 현대교회에서도 회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봉독순서를 담당한다든지, 중보기도의 한 주제를 맡아 기도하든지, 세례식 때에 수세자에게 간증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등이다. 그런데, 수동성은 이처럼 예배순서의 진행에 직접 참여함으로 모두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진정한 응답을 하는가에 관한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수동성의 위험은 회중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 순서의 대부분을 진행하는 집례자라하더라도 은총에 대한 진지한 참여가 없고 습관적으로 진행한다면, 수동성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보아야한다. 에릭슨(Craig D. Erickson)은 회중들의 지적이며 동적인 참여(participation)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패턴을 정리해보면, 중보기도나 찬송 또는 평화의 교환에 즉석참여(spontaneous involvement), 고백이나 들음, 나눔에서의 침묵의 패턴(silent e engagement)등이다. 수직적인 참여는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한다.


3. 세계를 위한 행동이 있는 예배.

훼르디난드 한(Hahn)은 술어적 진단을 통해서 초기예배의 성격을 요약하면서, 예배적 집회와 세상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봉사 사이를 따로 구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 그 당시의 聖과 俗의 개념을 허무시고, 俗을 향해 열려진 공동체를 설립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기독교예배는 밖을 향해 열려진 공동체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속사도시대예배에서 나타난 회중의 제사장직(priesthood)은 회중들이 세상의 구속을 위한 제사장임을 강조함으로 열린예배로서의 그리스도교예배의 성격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교예배의 역사는 시대마다 전통과 개혁의 변증법적 변형을 보여왔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회중에게 전통적인 예전은 귀한 유산으로 평가되기도하고 때로는 무의미한 형식으로 비판되어왔다.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려는 개혁적 시도가 긴장 또는 갈등구조를 유지하며 변천되어왔다. 여기에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의 신앙에 부합한 예전의 발굴을 위한 성실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개혁해가는 교회의 정신이 요청되는 때다. 이제, 데이비드 뉴만의 외침은 더욱 호소력이 있게 들린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게 하고 거기에서 능력있는 증인으로 서게하는 갱신된 예배의 열매는 교회 안의 기존의 고정된 틀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정신의 돌출을 허용하지 않고는 맺히질 않는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예배와 삶에 대해서

 

이승구교수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예배와 삶은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다른 '소위 종교들'과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등한 종교적 표현일수록 종교 의식은 화려하고 복잡하며, 또한 예배의식 가운데서는 번문욕례적 용어가 많이 사용되지만, 의식이나 예배가 구체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런데 때때로 기독 교회가 그런 저등한 종교성에 사로 잡혀 온 역사적 경험이 많이 있어 왔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은 종교 의식이 화려해 가는 것, 그리고 종교 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화려해져 가고 장엄해져 가는 것과 예배와 삶의 분리 현상이 심화되는 것은 같이 가는 경우가 많았음을 드러내 준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의 예배와 삶은 어떤가?"를 깊이 자문해 보았으면 한다. 그 대답을 해야 하는 이들은 우리 개개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때때로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바를 예배에서 찾으려고 하기도 하게 된다. 모든 종교들에서 이런 시도는 무수했고, 심지어 기독교 교회 안에서도 이런 시도는 끊임 없이 있어 왔다. 우리들의 세속적인 삶의 모습이 현저 할 수록 우리는 이 세속과는 다른 거룩한 장소를 갈구하고, 거룩한 시간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의 예배와 삶은 그렇게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잘 알게 된다.


예배는 우리의 삶을 대신하거나 대치하는 것이 아니며, 삶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 전체를 주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또 그렇게 살아 가겠다는 더 강한 헌신의 다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우리의 삶 전체의 총화요, 정수라고도 할 수 있다. 성경적 기독교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반드시 예배해야 하고, 예배한 자답게 살아 가야만 하는 것이다.


주께 예배를 드리고 온 주일 저녁에 우리는 주님께 우엇인가 잘 해 드렸다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어리석은 공로 의식에 사로 잡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예배를 드린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주께 드려야 하는 구속받은 우리의 정체성에 충실할 것을 다시 다짐해야 할 것이다. 주일에 예배를 드린 사람답게 한 주간 동안도 매일매일과 순간순간을 주께 우리의 삶을 드리는 자들로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런 자들로서 생각하고, 그런 자들로서 느끼고, 결단하고 성령님에 의존해서 노력해 가면서 말이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은혜이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은혜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은혜로 주어진 것을 자랑 할 수 없을 것이고, 오직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드신 주님의 은혜일 뿐일 것이다.

 

만일에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이 컬럼을 읽는 이들만이라도, 아니 나 작신이라도 진정 이렇게 산다면 이 세상은 훨씬 살만한 세상, 맛 있는 세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예배의 규정적 원리

 

이승구교수 

 

과거의 개혁파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예배의 일정한 방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칼빈은 “율법 가운데서 규정된 적합한 예배”(legitimate worship as is prescribed in the law)가 있다고 하면서(Institutes, 1. 2. 2),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일정한 규범을 따라 자신을 예배하시기를 원하신다고 말하고 있다(Institutes, 1. 12. 3). 예배를 비롯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고 말하고 있다(Institutes, 4. 10. 30). 이와 같이 참성도에게는 “성경만이 바른 예배를 위한 유일한 시금석”이다.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서도 칼빈은 이점을 아주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예배와 부패되고 오염된 예배를 구별하는 시금석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재가 받지 않은 것은 그 어떤 예배의 방식이라도 거부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관습은 신앙을 촉진하지 않고 퇴색시킨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런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 “부패하고 오염된”(vitiated) 것이고, “허구적인”(fictitious) 것이며, “미신적인”(superstitious) 것이라고 한다. 오직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진리를 각인할 때만 예배의 관습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치신 것만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노력해 왔다. 다른 일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경배할 때도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어떤 순서를 마련해 드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것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 생각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예배 방식과 요소들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공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에 늘 충실해 왔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루터와 함께, 하나님을 표상하는 상들(images)을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 “하나님의 가시적 형상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Institutes, 1. 11. 2).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모양들, 그림들, 그리고 미신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표징들(signs)을 모두 다 옳지 않다고 반박하신다(Institutes, 1. 11. 1).

 

그런데 루터와는 달리 우리는 이와 같은 상(象, image)의 문제만이 아니라 예배의 다른 요소들도 다 성경의 지지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씀에 충실하다고 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신약의 말씀을 생각한다. 칼빈은 신약의 성숙한 시기에 비교하여 구약 시기를 어린이 같은 시기라고 생각하면서 구약의 예배의 요소들을 통해 신약 예배를 규정하려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 구약 교회의 예배와 신약 교회의 예배는 형태는 다르고 본질에서만 동일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예배가 신약에서는 간소하고 단순화되어, 신약에 가르친 요소들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의견이다. 전적으로 옛언약에 지배되던 백성에게 고유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잘못된 계승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다윗은 하나님을 하프로 찬미하라고 했지만 칼빈은 이것이 구약에만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신약 시대에는 성전과 언약궤가 사라졌으나 그 자리에 설교와 성례전이 있다고 한다. 칼빈은 예배의 모든 요소들이 신약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구원과 다른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말씀이다. “당연히 말씀이 언제나 본질적인 요소이다.” 말씀과 바른 교리(doctrina)에 대한 선포가 없으면 예배는 외식으로 변질 된다고 칼빈은 강하게 말한다. 모임에서 믿음과 경건에 박차를 가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함께 모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의 칼빈의 입장이다.

 

둘째는 예배 중의 회중 찬송을 둘째 요소로 언급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고 엄숙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 노래를 하는 것은 거룩한 행동에 확실한 위엄과 운치를 더하며 기도를 하겠다는 진한 열성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칼빈은 예배 중에 찬송하는 일을 강조한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14:15 말씀을 따르면서, 찬송을 일종의 기도로 이해했다. 제네바 시편(1543)에 붙인 서문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공적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어떤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고, 어떤 기도는 노래와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으로 기도할 때에는 (1) 곡조에 더 치우쳐서 가사의 영적인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고, (2)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에 합당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가 말한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한다기 보다는 말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던 바를 존중하면서 찬송할 것을 권한다(Institutes, 3. 20. 32). 칼빈은 또한 생각 없이 일종의 의례적인 미신으로 퇴락하는 노래하기를 경고한다. 그래서 칼빈은 찬송할 때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참된 찬양 대신에 괴성으로 더렵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찬송의 내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의 찬송이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인지는 마음의 상태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한다. 하나님과 화해해 있음을 잘 알고, 영원한 축복에 대한 희망으로 우리의 마음이 평온하고 기쁠 때만 하나님이 온전히 찬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진정한 찬양은 진정한 성화의 삶과 같이 가야 한다는 것도 칼빈은 강조한다. 왜냐하면 “경건한 행위로 드러나지 않으면 혀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와 함께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언급되는 공동체의 기도에(Institutes, 3. 20. 29) 대한 칼빈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공중 기도에서는 “회중이 통용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와 달리하는 것은 “교회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교회의 예배나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한다(Institutes, 3. 20. 33). 또한 사적인 기도에서와 같이 많은 말로나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귀를 자극하려 하거나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7에서 말씀하신 중언부언하는 것(the vain speaking, βαττολογίαν)으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Institutes, 3. 20. 29). 그러므로 기도에서는 외식을 보여서는 안 되고, 명성을 얻으려고 해서도 안 되며, 짧은 말을 되풀이해서도 안 된다고 하며, 태산 같은 말로 자기선전을 하지도 말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속마음을 보시는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기도할 것을 강조한다(Institutes,3. 20. 29).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