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교회] 예수님의 지체가 된 사람들의 연합

 

 

교회는

예수님의 지체가 된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와 살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각각 손과 발 등으로

한 지체가 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 공동체 안에서는

판단할 수도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눈이 코를 판단할 수 없고,

손이 발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 안에서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교회이며

진정한 한 몸을 이룬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들을 품어서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공동체가되어야 합니다.


<조정민의 [왜 예수인가?] 중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

사람의 생각을 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향기가 아닌

사람의 냄새를 풍기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만 치장하고,

자기들끼리만 즐기는 모임이라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샬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1장 십계명을 왜 공부해야 하는가?

 

1. 기독교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성경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용’의 관점에서 구분하면 성경은 기독교신자가 ‘무엇을 믿을 것’(믿음의 법칙)과 그것을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삶의 법칙)에 대해 다루고 있다((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WCF 제1장 제2절)

이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WSC) 제3문답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WLC) 제5문이 설명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문 :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은 무엇인가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무엇인가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5문 :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은 무엇인가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무엇인가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두 가지 중 십계명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삶의 법칙)을 다룬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제39문답에서 제3분답을 인용하고는 제40문답에서부터 제82문답에서까지 십계명에 대해서 다룬다.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제 91문에서 제5문답을 인용하고는 제 92문답에서부터 제149문답에서까지 십계명에 대해서 다룬다.

 

기독교 신자는 믿는 자다. 또한 사는 자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믿고, 성경에서 명령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가 바로 기독교 신자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성경 전체에 있지만, 특히 십계명에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다. 십계명 속에 담겨 있는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원리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02.18.)는 그의 대요리문답(1529)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성경전체를 아는 것이다“

 

 

2.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십계명은 출애굽기 20:2-17과 신명기 5:6-21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참조 제네바교회 요리문답 제232문답)

창세기2;24에 제 7계명, 창세기9:6에 제6계명, 레위기 19:3에 제 4계명과 제 5계명, 레위기 19:4에 제 2계명, 레위기 19:12에 제 3계명, 신명기 27:14:14-26에 제 2, 5, 6, 7, 9계명, 고린도전서 11:2-12에 제 5계명, 에베소서 4:28에 제 8계명, 에베소서 6:1-9에 제 5계명, 에베소서 4:28에 제 8계명, 에베소서 6:1-9에 제 5계명, 데살로니가후서 3:10-12에 제 8계명, 디모데전서 6:6-10에 제 10계명, 요한일서 5:21에 제 1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십계명은 성경 전체에 흩어져 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사무엘상, 열왕기하, 역대상, 느헤미야,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미가, 말라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등 거의 모든 성경에서 십계명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경 전체의 교리를 ‘사람’ 요약한 것으로 그 자체로 영감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하기에 반드시 암송하고 공부한다. 하물며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다루고 있는 십계명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십계명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기독교 신자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살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십계명을 알아야 한다. 십계명을 공부하는 것은 기독교 신자의 본분이자 의무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구원받은 신자라면 십계명을 공부해야 하고, 그 공부한 것을 기초로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

 


- 십계명 언약의 10가지 말씀(해설서), 손재익, 디다스코, 2016.11.10., p. 19-21

[출처] 십계명을 왜 공부해야 하는가? - 손재익|작성자 바른교회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기독교 역사 속 십계명

 

1. 기독교와 십계명

찬송가의 가장 첫 페이지에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실려 있고,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십계명이 실려 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에서 이 3가지는 교리교육의 핵심이었다.

 

교회 역사 초기부터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은 중요하게 여겨졌다. 초대교회의 경우 십계명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에 비래 그 중요성과 활용도가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11세기 이후에 서방교회가 요리문답을 강화하면서 가치와 활용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년?-1274.03.07.)가 신앙교육을 위한 중요한 가르침으로 십계명을 다루면서 교리교육의 중심 자리를 확고하게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 십계명은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함께 교리교육의 중요한 주제였다.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은 기독교 신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3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하는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십계명은 “그것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삶의 문제를 다룬다. 주기도문은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하는 기도의 문제를 다룬다.

 

 

2. 개혁주의 고백문서와 십계명

십계명은 특히 종교개혁 이후에 교리교육의 핵심을 이루었다. 개혁교회 전통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HC)은 제 92-115문답(총 129개 문답 중)에서 십계명을 다루고 있고, 장로교회 전통의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제91문-149문답(총 196개 문답 중)에서, 웨스트 소요리문답은 제 39-82문답(총 107개 문답 중)에서 십계명을 다루고 있다.

그 외에 칼뱅 (Jean Calvin, 1509-1564)이 작성한 제네바교회 요리문답(Catechismus Ecclesiae Genevensis, 1542년)은 제 131-232문답(총 73개 문답 중)에서 십계명을 다루고 있고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의 요리문답은 제461-563문답(총 563개 문답 중)에서 십계명을 다루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WCF)에는 비록 십계명이라는 언급은 없지만, 제1, 2, 4, 6, 7, 19, 21-24, 30, 31 장에서 십계명을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BC)에도 십계명이라는 언급은 없지만 제1, 7, 10, 24, 25, 30-32, 36조에서 십계명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나아가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포함한 대부분의 조직신학 책에서 ‘기독교윤리’의 핵심으로서 십계명을 다루고 있다.

 

 

3. 예배와 십계명

기독교 역사에서 십계명은 예배와 관련해서도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그래서 공예배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계명이 낭독된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십계명 낭독을 예배의 한 순서로 여긴다. 오늘날에도 상당수 교회들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니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낭독하든 회중과 함께 낭독하든 이 순서가 존재한다.

 

교회 역사에서 죄와 은혜에 대한 교리가 악화될 때 십계명 낭독이 예배에서 무시되거나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같은 사람들은 예배에서 이 부분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4. 잊혀 가는 십계명

안타깝게도 오늘날, 십계명이 무시되고 있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은 예배의 한 순서로 사용되고 잇고 설교 및 성경공부를 통해서 가르치고 배우지만, 십계명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예배 중에 십계명을 낭독하는 좋은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아마도 예배 시간이 길어질 것을 염려(?)해서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십계명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할뿐더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십계명은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함께 기독교의 교훈을 잘 요약하고 있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분답과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므로 예배의 순서로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또한 교회에서 설교되어야 하고, 가르쳐져야 한다. 공예배에서조차 낭독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십계명을 잊게 될 것이다.

[출처] 기독교 역사 속 십계명 - 손재익|작성자 바른교회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기독교에서의 예배학(禮拜學), 예배(禮拜)란 무엇인가?

 

Ⅰ.서언(序言)

예배란 “최상의 존재에게 표하는 경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최상의 존재에게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예배라는 말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신약 용어는 ‘프로스쿠네오’인데 이것은 “~에게 키스하다, 손에 키스하다, 절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개념은 사람이 존경,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하나님께 적용한다. 우리2는 하나님 앞에 절하며 또 하나님께 최상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4:20~24절은 예배에 대한 연구의 시금석이다. 이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간의 대화인데 ‘예배’라는 말이 본문에서 여덟 번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으려고 교회에 간다. 그런데 음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위해, 또는 설교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위해, 또는 축복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음악과 설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데 그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드림으로써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드리기 위하여 가야 한다. 본질적으로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존경과 경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함께 모이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드릴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마음의 태도 및 우리의 소유물을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

 

본 레포트의 목적은 먼저 예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둘째로, 실상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셋째, 그렇지 않다면 예배를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배의 중요성”, “예배의 근원”, “예배의 대상”, “예배의 영역”, “예배의 본질”, “예배의 결과”,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의 장애물”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예배의 중요성

 

Ⅱ-1.성경은 예배로 가득차 있다.

예배가 중요한 첫째 이유는 성경이 예배에 대해 매우 자주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백 번 거듭해서 예배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그 가운데 예배의우선권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의 몇 가지 구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1.구약의 구절들

 

1) 제1계명의 강조(출20장)

하나님의 몇몇 표준, 원리 및 지침을 계명, 법규, 법령, 법률 및 신조의 형 태로 말씀하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20장 2~6절까지의 제 1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제 1계명은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라 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2) 성막의 설립(출25장)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에 우선을 두고, 예배하는 데 집중하기를 원하셔서 예배를 행할 장소를 설립하신다. 그것이 성막인데 하나님께서 이 예배의 장소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모든 수치, 기 준, 설비를 논하는데 7장(총243절)을 할애하신 점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우 주를 비롯한 삼라만상의 창조를 묘사하는 데는 불과 31절만이 할애 되었을 뿐이다.

 

성소에는 지성소가 있었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었는데, 이 언약궤 맨 위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로 피를 뿌리 는 속죄소가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던 곳은 바로 속죄소인데, 출애 굽기 25장 22절을 보면 예배가 가장 우선적이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3) 성막주위의 진지(민1:52~2:2)

광야 방랑생활 40년 동안 매번 이스라엘 자손이 진지를 세우기 위해 멈춰 설 때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 가까이 있어야 했다. 제사장들 주위에는 레 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열 두 지파가 바깥 쪽의 원을 이루었다. 제사장들 은 예배를 맡고 있었고, 다른 레위인들은 성막을 돌보는 봉사를 맡고 있었 다. 이것은 우선권이 예배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하여 준다.

 

4) 스랍의 예(사6:1~2)

이사야 6:1~2에서 날개 중 네 개가 예배와 관련이 있고, 두 개만이 봉사 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각의 스랍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가렸으며, 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때문에 그의 발을 가렸다. 이는 천사들에게 있어서도 예배가 우선적이었음 을 나타내고 있다.

 

 

5)시편 기자의 권고(시편95:6~7상)

시편95:6~7절 상에서는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 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예배할 것을 권고하는 많은 시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시5:7; 29:2; 45:11; 66:4; 86:9; 96:9; 99:5,9; 132:7; 138:2)

 

2.신약의구절들

 

 

1) 로마서12:1~2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11장에 걸쳐 그리스도인과 그의 모든 유익을 정의 하는 교리를 논한 다음에, 로마서12장1~2절을 통하여 예배에 관해 논하 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받으실만한 영적 예 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산 제사로 몸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런데 그것은 육체적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것은 영적 예배의 행위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위대한 자비 때문에 영적 예배의 행 위로 그에게 우리 자신을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께 참되고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2) 베드로전서 2장5절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구속적 은혜의 기사들을 담고 있다. 그 리고 2장 2~3절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갓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제 구원 받은자로서 베드로전서 2:5절에서 말한다.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집에 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산 돌로 만든 집에서 사신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한다. 받으실만하고, 참되고, 영적인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님의 변혁시키는 사역을 기초로 하여 드려진다.

 

그러므로 예배가 중요한 첫째 이유는 성경이 예배로 가득 차 있기 때문 이다. 그리고 예배가 중요한 둘째 이유는 운명이 예배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Ⅱ-2. 영생은 예배에 의해서 결정된다

예배는 생활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생활의 핵이다. 받으실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간다. 시간과 영원이 예배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1.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1) 거짓 신들의 예배세상의 물질적인 신이나(욥기31:24~28), 하늘의 초자연적인 신들(신명기 4:14~19)에 대해 예배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그들 자 신이 창조한 우상들에게 예배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받지 않으 신다.

 

2) 잘못된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형상으로, 물질적인 표현으로, 우상으로, 또는 자신의 사고의 결 과 및 산물인 어떤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3) 자기 방식대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예배활동을 개인적 정의에 따라 격하시키는 것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 제 멋대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몇 명의 성경적 인물을 예로들면 “나답과 아비 후(레10:1~2)”, “사울”(삼상13:8~14절상), “웃사”(삼하6:1~9), “바리새인 들”(마15:1~9; 마23:23~28)등이 있는데 예배는 분명히 성경의 규정에 따라 드려져야만 한다.

 

4) 그릇된 태도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우리 마음의 태도가 옳지 못하면 그 예배도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즉, 거짓 신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예배하지도 않고 우리 자신이 고안한 방법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올바른 태도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관련 성경 구절을 보면 “말라기1:6~14; 3:13~15; 4:1~6”, “아모스5:21~27”, “호 세아6:4~7”, “이사야서 1:11~20”, “마가복음 7:6”등이 있다.

 

4.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1) 참된 예배자들의 모습받으실만한 참된 예배자들은 “깨끗한 손”(하나님께 복종하며 청결히 하는 자)과 “청결한 마음”(동기와 욕구가 올바른 자)을 갖고 참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다. 시편 24편 3~6절은 참된 받으실만한 예배자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2) 참된 예배자들의 산출

구원의 목적은 참된 예배이며,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기록은 사람들이 예 배할 목적으로 구속받는 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3) 참된 예배자들의 자세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히브리서12:28절을 보면 “섬기다”라 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을 헬라어 동사인 ‘라트레우오’로서 “예배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의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받으실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우리를 예배하는 자들로 만드 신 하나님께 은혜롭게 반응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받으실만한 예배는 구원의 결과이므로 우리는 받으실만하게 예배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 예배를 확장시키고 그것의 충만함에 따라 사는 것은 그의 몸을 영적인 예배의 행위로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받으실 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 기꺼이 드리는 신자의 순종하는 태도에 의 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을 적절하게 예배하지 않는다면 염려스런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할 것이다.

 

 

4) 참된 예배자들의 개인적인 특성매일의 삶 가운데서 참되고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① 동료그리스도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고(로마서14:28) ②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 도께로 인도하며(로마서15:16) ③ 필요를 따라 물질을 드리고(빌립보서 4:18) ④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며(에베소서 5:8~10) ⑤ 의의 열매로 충만하고(빌립보서1:11) ⑥ 경건하고 단정하며(디모데전서2:3) ⑦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히브리서13:15~16)하여야 한다.

 

 

5) 참된 예배자들이 모이는 목적

우리의 예배가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할지라도 우리는 또한 매 주 공동 예배 에 참석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나머지 육일 동안 예배하도록 고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하여 세상 가운데서 나눔과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예배드릴 목적으로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격려 받는다.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 의인들의 회중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 시는 그 백성 가운데 우리는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과 선행 을 하도록 격려받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에 그 격려가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끼칠 때,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히 13:16). 그리고 다시 그 모임에 돌아올 때 우리는 계속적인 감사의 마음 을 갖고 충만하게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Ⅱ-3. 영원과 구속사가 예배에 의해 묘사된다

예배는 영원과 구속사의 주된 주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1.창조전의 역사

사람이 창조되기 전 영원한 과거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들이 존재했는데, 느헤미야9:6절과 욥기38:4~7절 까지를 보면 그 영원한 과거에도 예배가 진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타락 전의 역사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었을 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러나 이 브가 사단을 예배하기로 결정하고, 아담이 이브를 예배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중단 했을 때, 그들은 타락했다.

 

3.타락 후의 역사

1) 가인과 아벨

아벨은 받으실만한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사람 사이의 최초의 분열이 일어났다.(창세기4:5)

 

 

2) 족장들

족장들이 올바르게 하나님께 예배했을 때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릇되이 예 배했을 때에는 징벌을 받았다.

 

 

3) 이스라엘 국가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후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전세대가 죽고 말았다(민14:22~23). 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예배받기 원하셨던 대로 예배하여 축복을 받았으나 결국 올바르지 않게 예 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전세계에 흩어 버리셨다.

 

 

4)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예루살렘에 가셔서 예배 처소에 들어가 그 처소를 정결케 하셨다(요2:13~17). 또한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을 부르셨다(요한복음4:23~24). 이와같이 예배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로 구 속사의 중심 주제였다.

 

 

4.현재의 역사

교회가 생겨날 당시 그것은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었다. 빌립보서 3:3은 성경에 나온 예배에 대한 위대한 진술들 중의 하나로서 교회에 대한 정의를 잘 내려주고 있다. 교회는 독특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영으로 하나님 을 예배하며,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것을 그 구성으로 한다.

 

5.미래의 역사

역사가 그리스도 재림의 영광 가운데 완성될 때, 그것은 예배에서 절정을 이 룬다. 왜냐하면 예배는 천국과 영광의 주제이기 때문이다.(계시록4:10~11; 계 시록 5:14; 계시록 11:15~17; 계시록 14:6~7; 계시록 15:4; 계시록 19:4; 계시 록 19:10; 계시록 22:8~9)

 

6.그리스도께서 예배를 명하셨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배를 명하셨다(마4:10하). 이 말씀은 창조된 모 든 것에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Ⅲ.예배의 근원(基礎)

구원의 목표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속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5에서 결국 예배를 낳기 위하여 모든 노력이 기울여짐을 말씀하고 있다.

 

 

받으실만한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주님은 누가복음 19:10절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요한복음 4:23절하와 연관시키면,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예배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통하여 예배하는 자들이 된다.

 

Ⅲ-1.그리스도의 죽음(시편22:22~27)

시편 22:1~21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는 묘사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는가에 대한 답은 22절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시편22편은 구속의 목표가 예배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구원이 예배의 기초라는 것이다.

 

 

Ⅲ-2.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린 이유(출20:22~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백(출19:7~8)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기초하거나 그들의 자기 의(義)에 기초해서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20:1~17에서 십계명을 주신 후에 출22:22~26을 통하여 은혜로운 규정을 주신 것이다.

 

출22:22~26에 나타난 은혜로운 규정은 예배의 기초로서 제단과 그 위에 놓을 수 있는 제물들을 설정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제사로 궁극적인 교제를 가능하도록 만드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실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만날 때, 우리의 죄가 처리되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하게 되며, 또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자가 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의해 가능하게 된 구원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근원이다.

 

 

Ⅲ-3.이사야의 예언(사66:22~23)

이사야서는 놀랄만한 방법으로 구속사를 한 눈에 훑는다. 이사야서의 초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위대한 미래 - 메시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 로 옮아간다. 52장과 53장에서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하는 고난받는 종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는 66장에서 는 그 이유가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영원한 예배자들을 낳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천년왕국을 넘어 영원한 상태로 나아간다.

 

Ⅲ-4.한 회심한 죄인의 반응(고전14:23~25)

고전 14:23~25는 어떤 사람이 회심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바울식 표현이다. 진실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열기를 원한다면 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그가 죄를 깨닫고 책망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가 죄를 선고 받고, 책망을 받고, 깨달으면, 그의 반응은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로 나타날 것이다. 구원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예배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예배의 근원 또는 기초가 된다.

 

 

Ⅳ.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이 두 가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영으로서의 하나님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이는 그분의 본질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본질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참된 예배의 기본적인 것이다.

 

Ⅳ-1.영이신 하나님(하나님의 본성)

 

1.하나님의 영성

요한복음4:24절상은 헬라어로 ‘영’이라고 읽는다. 영과 하나님이 용해되어 동등한 것으로 만든다. 즉, 하나님은 하나의 영광스러운 영이신 하나님이시 다.

 

1) 하나님은 형상으로 전락될 수 없다.

이사야서40:18~26의 말씀을 보면 영으로서의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가운데 18, 19, 25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 어떤 형상과도 비길 수 없으며 세상에 서 가장 중요하고 강한 자도 하나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또는 신학적 관점에서 또는 성경적 관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자칫 하나님을 형상으로 전락시 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서 예배되어야만 한다.

 

 

2) 하나님은 한 장소에 제한되실 수 없다하나님은 한 장소에 제한되는 우상이 아니시다(예레미야 23:23~24).

하나님은 특별한 장소 또는 시간에 제한 받으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간에 특별한 정소에만 계시다고 생각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시간과 공간을 충만하게 채우신다.

 

2.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게 예배를 받으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거 룩하심은 “하나님의 독특한 타자성” 또는 “인간 피조물과 하나님의 상이성” 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은 흠이 없으시며, 오류가 없으시며, 죄가 없으 시며, 실수가 없으시며, 또 완전히 의로우시며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 로 참된 예배를 위한 기본적인 이해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선의의 노력과 또 하나님을 거룩하게 존중하지 않으며 진행 되는 - 그러므로 잘못된 - 많은 예배들이 있다. 많은 멋진 노래가 불려지고, 멋진 감정들이 느껴지며, 멋진 생각들이 떠오르고, 또 멋진 정서들이 표현되 고 있다. 구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관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기에 이 러한 “멋진”것들은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정서 활동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당연히 수반되 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이해로 경건한 두려움의 반응을 낳는다는 것이다.

 

1) 경건한 두려움의 반응

시편 96:2~9까지의 말씀을 보면 모든 예배와 찬양후에, 9절에서 핵심 진 술에 이르는데 여기에 예배의 태도 또는 관점이 있다. 결국 거룩하심은 두 려움과 분리되어 이해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매우 거룩한 존재 이심을 인식하게되면 자신이 매우 부정적인 존재임도 분명히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룩한 경외감을 낳는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피조물에 대해 거룩한 반응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 정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압도적인 부정함을 느끼 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개념이 단지 구약의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2:28절 하~29, 이사야서 6:1~8, 디모데후서 2:22등과 같은 성경 말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2) 감사의 반응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 하심이 우리에게 감사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에 따라 보 응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는 이러한 하 나님의 자비조차도 우리에게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롬2:4).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보여주 셨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개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롬6:23). 즉 우리가 죄를 지닌 채로 하나님의 임재 가 운데로 달려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남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죄에 대해 의로운 분노를 발 하실 날이 온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행동할 권리를 갖고 계신다. 우리 는 은혜와 자비에만 익숙해져서 하나님이 의로운 것을 행하실 때 그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가 있는 가?”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삶이 어렵게 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가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생각이 반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죄에 가득찬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실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저주와 사망의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 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부정함에 대 하여 거룩한 방법을 행동하셨던 것이고 또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께 약속했던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을 때 왜 우리가 죽지 않았나? 하는 은혜와 자비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당하신 분이 아니라 자비로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때때 로 하나님께서 의로운 것을 행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생각나게 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기 위하여 그것 을 예 또는 표지로 행하신다(고전10:5~12).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부당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침해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자비로우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요, 초점인 것이다.

 

Ⅳ-2.아버지이신 하나님(하나님의 본질적인 관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관련하여 아버지라는 용어를 볼 때,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을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광대하시고, 편재하시고, 영원한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또한 친밀하시고, 사랑하시고, 개인적인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또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요한복음 4장에서 토론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도 아니고, 또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강조점도 아니다. 그 강조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하나님의 삼위일체 칭호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그분은 하나이신 세 인격 즉, 삼위일체 (三位一體, TRINITY)이시다. 이 삼위일체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이 여기서 “아버지”로 불리워 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를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내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자의 아버지시다. 그리고 성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 므로 우리가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모든 인류의 아버지(자 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를 모호하게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칭호와 별개로 예배되실 수 없다.

 

1) 예수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신 의미

신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논의될 때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 리스도의 아버지를 나타낸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언급하셨을 때 예수님이 그의 신성,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진술하고 계신 것이다.(요한복음 5:17~18; 요한복음10:29~33; 요한복음 17:1~5; 마태복음 11:27; 요한복음14:6~11)

 

 

2) “아버지”란 용어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

서신서(書信書)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에 배되고 동일시 된다.(에베소서1:3상; 에배소서1:17상; 고린도후서 1:3; 빌립보서2:9~11; 로마서 15:6; 베드로전서 1:3상; 요한 2서 3절)

 

 

2.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1) 아들에 대한 예배

요한복음 5:23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동등성에 대한 논리적 결론을 내 려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에배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아 들을 예배하여야 한다. 이는 아들의 이름으로 나아오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예배할 수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합가운데 정의 되며, 초대교회 내에서 나타났고, 요한복음 20:38에서 사도 도마에 의해서 선언 되었다.

 

 

2) 성령에 대한 예배

성령님을 예배하라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 아무데에도 없다. 하지만 모든 에배는 성령의 권능 가운데 고무된다. 우리에게 하나님 의 임재 가운데 나아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롬8:15; 갈4:6).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권 능과 임재 가운데서 이다. 그는 에배의 중요한 부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삼위일체적으로 성령님은 아들과 아버 지와 동등하시기 때문에 그 또한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그러면 요한복음 4:20~24에 따르면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영이신 하나님이다. 어떤 모호하고둥둥 떠다니는 정의되지 않은 영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다. 누구의 아버지이신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신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 하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게 되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소중한 것이다.

 

 

Ⅴ.예배의 영역(場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히 성전, 성막 그리고 매우 특별한 지리적 장소에서 예배했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4:20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그녀는 예배드려야 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곧 모두 제거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장소도 예베 처소가 되지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Ⅴ-1.옛 언약의 상징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는 더 이상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드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성막이나 성전 또는 의식 및 희생 제도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상징, 표상 및 그림들을 부인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모든 상징들이 사라지고 물질적인 성전, 제물 및 제사장들이 필요하지 않게 될 때가 노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 살아있는 성전과 살아있는 제사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제물은 단 하나의 완전한, 최종적인, 영구적인 - 모든 다른 제사들을 종식하는 - 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에는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그것들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고 하나님은 결코 성막이나 성전에 제한되거나 한정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상징은 마음의 자극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서 상징들은 실제가 되었고 또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으로 옮아갔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어떤 사람이든 지성소로 곧바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막15:38)

 

- 그렇다면 이와 같이 前制度가 끝나고, 성전이 있지 않다면 그리고 특별한 물질적 건물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예배를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다음에 있다.

 

Ⅴ-2.새 언약의 실재

1.우리의 개인적 몸인 성전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은 성령의 살아있는 성전들이다. 이는 사도 바울도 고 린도전서 6:19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해변에서, 산에 서, 시골에서 또는 당신의 거실에서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또한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나무 아래 앉아서, 숲 가운데를 걸으며, 베 란다에 앉아 별들을 바라보면서, 아침에 신선한 꽃 내음을 맡으면서 하나님 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러면 이로인해 내가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라는 의 문이 생기게 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교회에 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차 원을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2.우리의 집단적 모임의 성전

오늘날에는 예배 처소 -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그분의 백성을 만나는 건물 - 가 있다. 이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매우 생생한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 리고 그는 그들을 연결되지 않은 개인적 성전들로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권속에 속해 있어 공동 시민권에 의 해 연결되어 있고 또 가족으로 공동 혈연에 의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 라 건물로서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에배소서2:19~22). 하나님은 특별한 건물을 갖고 계신다. 그것은 구속된 성도들의 가시적이 고 살아있는 모임이다. 함께 모일 때에 우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구성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개인적 성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집 단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대한 성전인 것이다.

 

2)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우리를 “산 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함께 모일 때 하나님께서 독특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시는 예배 처소를 구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그 자신을 나타내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에 게 움직이시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2:5)

 

3)바울은 고린도후서 6:16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 가운 데서 움직이신다고 밝히고 있으며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 하다고 권면하고 있다(고린도전서 3:9; 3:16~17)

 

4)우리가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는 놀랄만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 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로 만들어진 성전이 아니 라 살아있는 육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히브리서10:24~25).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에배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혼자서 예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모임 가운데서 예배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집단적인 모임이 필요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산 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오는 자극과 확인,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성취하시는(우리가 혼자있을 때는 성취하실 수 없는) 독특하고 놀라운 사역에 대해 반드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을 에배하는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Ⅵ.예배의 본질(本質)

 

Ⅵ-1.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벗어난 것들

 

1.사마리아인의 예배(진리없는 신령)

요한복음 4:22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 을 예배하고”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 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몇몇 진리들을 알 만큼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구원 의 계시를 전부 알 정도로 충분한 지식은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적절한 지식이 없는 열광적인 예배였다. 그 들이 드리는 예배는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었고, 충성된 것이 었지만 그들에게는 올바른 내용이 없었다. 즉, 그들은 신령으로 예배했지만 진리로 예배하지는 않았다.

 

 

2.유대인들의 예배(신령없는 진리)

요한복음 4: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유대인)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의 태도는 사마리아인들과 정반대이다. 그들은 구약의 39권 모두를 받아들이며 구원의 가르침에 대한 전체계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차갑고 율법적이며 위선적이었고(마태복음6:1~8), 예배 동작을 모두 행했으나 그 안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들의 예 배는 생명이 없는 것이었고 그들은 진리는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비어 있었다.

 

Ⅵ-2.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1.신령으로 드리는 예배

1) 의미

신령으로 드리는 에배는 인간의 영 - 속 사람을 뜻한다. 우리는 안에서부 터 밖으로 에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은 적절한 장소, 적절한 시간, 적절한 말과 적절한 태도, 적절한 의복, 적절한 형식, 적절한 행동, 적절한 음악, 적절한 분위기 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부 - 영혼에 무엇이 있는가 의 문제이다. 바울과 다윗은 심령과 내부로부터의 예배 그리고 회개하는 예배와 마음 속이 찬양으로 가득차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로마서1:9; 시편103:1; 시편51:15~17)

 

 

2) 방법

어떻게 하면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찬양으로 가득차서 우리 입이 열려질 때 찬양이 쏟아져 나오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냉 랭한 마음, 즉 지루하며 무관심한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해 보면

 

 

(1) 성령께 사로잡힘

성령께 사로잡히는 것(고린도전서2:11; 고린도전서12:3)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으로 예배드릴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성령께서 거기 계셔 그것을 고무해야 한다. 즉, 성령께서 예배를 북돋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원 받은 것이다. 일단 구원을 받으 면,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향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촉구하고, 찌르 며, 밀어부치고, 가르치며,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 그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다.

 

 

(2)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함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새로워진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다. 하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는 것은 예배를 시작하는 방아쇠가 된다. 즉, 온 마음을 한 가지 주제인 하나님께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 다. 효과적인 예배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은 온 마음을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할 수 있는 것 즉, 하나님에 대해 묵상 할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묵상함

묵상은 지식에 기초하는 것인데 만일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 한다면 생각할 주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순 수하며, 가장 참되고, 가장 멋지고 복된 묵상은 발견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우리의 모든 사 고과정을 완전히 사로잡을 때까지 그 진리를 묵상하라는 것이다. 이러 한 묵상이 진정한 예배를 하도록 한다.

 

 

(4)나누이지 않는 마음

우리 심령을 예배에 집중시키려 애쓸 때, 한 가지 주된 방해거리가 나 타날 것이다. 그것은 자아(自我)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예배는 방해를 받는다. 우리에게는 종종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어서, 발견이나 기도, 묵상, 예배 등을 위한 시간이 없다. 또한 나누이지 않는 마음을 갖기도 어렵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계획, 우리의 행동, 우리의 필요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自我)는 항상 예배를 방해한다. 우리가 자아를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에 빠져들 때까지는 진정 하나님을 자유롭게 에배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진정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는 사실로 귀착되어진다. 찬양이 고정되고, 견고하며 하나님의 기사에 집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 이익, 축복 등 보다 항상 하나님을 위에 모시고 그분을 우선해야 한다.(시편86:5~ 11; 요일2:27; 요한복음16:13; 시편108:1~3; 시편112:7~8; 시 편57:7~11)

  

⑤ 열리고 회개하는 심령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접근할 때, 우리는 열리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다 가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탐조등을 켜서 당신께서 한구석에서 발견 한 것들을 드러내어 주소서”라고 기꺼이 말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만일 예배하는 것이 어렵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그 사람의 삶에는 오랫동안 간과되어졌고 하나님 만 알고 계시는 영역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영역들을 찾아 그것을 보여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런 후에 상 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 죄들을 고백하고 그 죄를 처리하여 야 한다(시편139:23~24; 사6:6~7)

 

2. 진리로 드리는 예배

모든 예배는 진리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느낀 감 정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진 반응이다. 만일 우리가 진리로 예배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가운데 예배드 려야 한다.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곳은 그분의 말씀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요한복음17:17;시편119:142,160)

 

1)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피조 세계와 양심 속에서 드러내셨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명백하게 자신을 게시하셨다. 우리가 진리로 예 배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규정된대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창조와 양심의 하나님에 대해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 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의 계시와 떨어져서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로마 서1:18~19,25)

 

2) 모든 예배는 반드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시편 47:7)

예배는 단지 손을 모아쥐고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아니면 아무 의미나 내용 없는 황홀경에 빠진 경험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심지어 좋은 감정도 아니다. 물론 감정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예배는 말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드리는 찬양의 표현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 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이는 참된 예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임은 어떤 모임이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 하나 님을 예배할 수 없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령으로 또 진리에 따라 예배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3) 예배에 있어 모든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결코 속 임수로 성경을 오용해서는 않될 것이며 또 우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정직하여서도 안된다. 우리는 오직 진리 가운데로 행하여야 한다.(고린도후서4:2)

 

4) 초대교회 교인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것은 사도들의 저술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였 다. 그것은 진리의 실체로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것에 대해 예배드렸다 (사도행전2:42)

 

5)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쳤다(디모데전서4:13)

 

6) 초대교회가 예배드릴 때 그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이용했으며 찬양과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 의 찬양이 규정되며, 우리의 예배는 신적 기준에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골 로새서3:16~17)

 

7) 무지(無知)한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사도행전17:23)

 

예배의 특성은 찬양과 기도, 노래, 헌금 그리고 생활 가운데서 우리 속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항상 그분의 계시된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가 항상 그렇게 되도록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감상 적이고 광신적이며,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두편의 한 가 운데가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받으셔야하기 때문이다.

 

 

Ⅶ.예배의 결과(結果)

 

Ⅶ-1.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시편50:23). 우리 삶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레위기10:3)

 

Ⅶ-2.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된다

예배하는 교회는 정결한 교회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때 거기에는 우리의 죄됨에 대한 인식과 그 죄됨을 포기하려는 기꺼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거기에는 깨끗하고 정결하게 되려는 불타는 열망이 있다(시편24:3~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죄에 더욱 더 압도되어 다윗과 같이 이렇게 외치게 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시편139:23~24절상)

 

교회에 있어서 성찬식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우리의 죄된 모습에 직면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바로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그토록 자주 성찬식을 행했던 것이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된다.

 

 

Ⅶ-3.교회가 세움을 받는다

초대교회가 예배를 드렸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 또한 받은 것을 알게 된다(사도행전2:47). 그리고 그들은 성읍을 완전히 그들의 교리로 가득차게 했다(사도행전5:28)

 

예배하는 교회는 쌓아 올려지는 교회 - 즉 세움받은 교회이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자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세워지고, 강해지며, 변화되어 진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예배가 거룩한 기대와 함께 시작하는 것처럼, 그것은 거룩한 기대로 끝을 맺는다.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되며, 교회가 세움받는 것이다.

 

Ⅶ-4.안 믿는 자들이 구원 받는다

예배하는 공동체의 심오한 증거는 어떤 단독적인 설교가 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안믿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린도전서 14:23~25)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스도인이 깨끗하게 되며 교회의 품성이 높아지고 잃어버린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Ⅷ.예배를 위한 준비(準備)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때, 문제는 성가대나 설교가 얼마나 잘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준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의 한 구절인 히브리서 10:22절 말씀이 성경전체에서 예배에 대한 가장 위대한 최종 변론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Ⅷ-1.부르심

“…나아가자…”

이는 예배에 대한 부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라, 지금은 예배할 때이다. 하나님께로 향해서 가까이 나가자”

 

 

Ⅷ-2.점검표

1) 진지함

“…참마음…”

우리는 진정으로 진지한가? 우리의 마음은 모아져 있고 온 마음을 다해 예 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2) 충성됨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더 이상 노력이나 의식의 체계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 에서 온전한 믿음을 갖고 나온다고 하는 충분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는 것이 충성을 의미한다.

 

3) 겸손함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악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겸손과 무가치함을 위식하게 된다. 주 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로부터 우리를 뿌려서 깨끗하게 하셨다는 사실 외에는 하나님 임재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깨끗함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마음을 씻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날마다 씻는 것이다. 예배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고백을 통하여 생활 가운데 짓는 죄 를 처리해야 한다. 비록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서 깨끗하게 되었지만 우리 의 발은 여전히 이 세상의 먼지를 묻히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 한다.

 

 

Ⅸ.예배의 장애물(障碍物)들

 

Ⅸ-1.회개의 예배

만일 우리의 삶속에 죄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죄를 고백해야 한다. 사무엘상 12장을 보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한 후, 또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태어난 아이가 죽은 후의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든 일 후에 20절을 보면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회개의 예배이다.

 

다윗은 비극적인 상황 - 자신의 어린 아기를 잃음 - 한 가운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예배했다. 이는 그 자신이 마땅히 받을 것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회개의 예배란 징벌의 와중에서마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죄를 고백하며, “나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결코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 회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진솔한 회개가 없는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방해하는 첫번쩨 장애물이다.

 

Ⅸ-2.받아들임의 예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가져오신 환경들 중 일부를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그러한 환경들은 그들을 비통하게 만들고 결국 예배를 드릴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욥’을 보면서 분명한 받아들임의 예배를 배울 수 있다(욥기1:20~22). 또한 ‘죠지 뮬러’의 말을 상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죽는 날이 왔다. 인간의 칭찬과 인간의 비난에 대해 죽는 날,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해 죽는 날이 왔다.” ‘욥’ 역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하고 있다.

 

받아들임의 예배는 우리의 상황 - 지위, 경력, 노력, 배우자, 자녀 - 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사랑하는 자를 잃는 것, 자녀를 잃는 것, 직업을 잃는 것, 질병의 고통 등)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저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수 없는 마음이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두번째 장애물이다.

 

Ⅸ-3.헌신의 예배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자기 아들을 이삭을 데리고 간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의 생명을 기꺼이 취하면서 여전히 그것을 예배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창세기22:4~5). 이것은 그 댓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을 예배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러므로 헌신적인 마음과 정신이 없는 우리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X.結言(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에배의 정의와 중요성, 근원, 대상, 영역, 본질, 결과, 준비, 장애물등을 살펴 보았다. 본 결론에서는 참된 예배를 위한 자기 점검을 위에 기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매번 예배 드릴 때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진지한가? 나의 마음은 모아져 있는가? 내 온 마음은 하나님께 바쳐져 있는가? 나는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가? 나는 발견과 묵상을 통해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봄으로써 갈급한 마음으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있는가?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고 분명히 믿는가? 나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흘리신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내 삶에 있는 모든 죄를 처리하고 깨끗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조금만 성의를 갖고 성경을 펴서 히브리서 10:22를 읽고 점검표대로 살펴 보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배를 위해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진지한가? 나는 새 언약이라는 진리에 전념하는가? 나는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사역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를 평가하고 있는가? 나는 순수한가? 나의 삶에 있는 죄를 처리해 왔는가? 이렇게 해나간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절상)고 말할 수 있게될 것이고 이를 근간으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參考文獻

1.죤 맥아더(한화룡 옮김) , 참된 예배, 도서출판 두란노, 2000

2.벧엘 성경 편찬위원회, 벧엘 성경, (주) 종로서적출판, 1997

 

3. 기타 논문자료 다수
 출처 : http://kcm.kr/dic_view.php?nid=41213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예배학 / 예배의 정의(定義)

 

 

프랭크린 지글러(Franklin Segler)는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인 맹종”이라고 했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으며(done), 무엇을 하고 계시며(doing), 무엇을 하실 것인가(will do)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으면 결국 방관자나 구경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요4:22)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알고 예배한다는 뜻인가?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첫째, 예배의 대상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인식

둘째, 기독교의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속사에 대한 확신

셋째, 예배를 역동적으로 이끌어 가시고, 성도들을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깨닫는 사람만이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은총과 응답”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랭클린 지글러(Franklin Segler)는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사람들의 정성어린 응답이다”라고 했고, 폴 훈(Paul W. Hoon)은 “예배의 현장은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지점이다”이라고 했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Ɵeoς)과 그의 백성(λαος) 사이에서 발생된 사건(Event)이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없이 예배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반드시 거기 계셔야 하고, 동시에 예배자인 그의 백성들이 있어야 실재 예배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예배의 두 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먼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어떤 은총을 내리셨는가? 크게 이야기 하면 두 가지인데

그 첫째는 ‘창조의 은총’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베풀어주시는 보편적인 은혜이다. 예를들면 햇볕을 주시고, 비와 신선한 공기를 주셔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살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창조의 은총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을 깨닫고 감격하여 응답하는 행위(Responsive Action)가 곧 예배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응답겠는가?

이것이 곧 예배의 내용이다. 예배의 내용으로는 경배와 찬양, 감사, 참회, 헌금, 기도가 있다. 이 다섯 가지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이 헌금과 기도이다.

 

우선 헌금은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그의 백성들이 마음의 중심을 담아 감사를 고백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헌금인데, 그것을 드리면서 복을 달라고 흥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60배 100배로 축복해달라 한다면 하나님이 부담스러워서 그것을 받으시겠는가? 도로 가져가라 하지 않겠는가?

헌금은 우리의 눈물과 땀과 정성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거룩한 사랑과 감사의 고백이다. 이 거룩한 순서를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 같은 시간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기도이다.

우리 기독교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의 행위로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기도는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주신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가슴을 채우는 것이 기도이다.

 

그의 백성들이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여 경배와 찬양, 감사, 참회, 헌금, 그리고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 이때 하나님은 세우신 종(목사)을 통하여 말씀과 성례전을 주시고 강복을 선언하게 한다. 말씀과 성례전 강복선언은 하나님이 예배시간의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특히 강복선언은 일반 기도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백성들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예배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시간은 바로 이때뿐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강복선언이 채 마치기 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강복선언을 축도라고 불러왔는데 엄밀히 말하면 축도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축도라고 할 때 축(祝)자는 빌다는 뜻이다. 축도는 무엇을 비는 일반기도와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셔서 하늘의 복이 있으라고 선포하는 것이지, 복을 비는 기도가 전혀 아니다. 하나님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신데 누구에게 복을 달라고 빌겠는가? 그래서 축도가 아니라 강복선언(Benediction)이라고 해야 맞다.

 

http://www.mspcs.org/mspcscgi/index.php?document_srl=12881&listStyle=viewer&mid=goodmessage

 

출처 : 바른신학 바른신앙 http://cafe.daum.net/correcttheology/1EvS/29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