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참 모습Ⅲ (마16:13-20)

 

출애굽기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애굽의 정치적 억압과 이방문화에서 탈출하고 미신적 제도와 의식에서 벗어나

자유한 상태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율법주의에서 해방되고 이방문화에 탈출하고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 영원한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행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할 교회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시편교회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며 춤추며 기뻐하는

잔칫집 교회였으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찬양과 노래와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전파하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으며 공의와 진실로 심판하시기

위하여 임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소망 중에 살아가는 교회였다고 말씀드리면서

오늘날 교회들도 이러한 시편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찬양과 춤과 노래가 있는 잔칫집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고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찬양에 담아 전파하고 기쁨의 표정과 미소에 담아 전파하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회복하고 공의와 진실로 심판하러 임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소망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는 복음서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찾아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친히 제시하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유명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복음서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1. 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의 생각에 의해서 지배되기 마련입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신앙고백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그 동안 가르친 진리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주님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복음사업이 지속될 수 있는지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제자들이 천국사업의 계승자가 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1)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본문16 -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열거한 인물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다시 오리라고 기대하던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헤롯까지도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14:1-2 -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지 아니하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왕하2:21) 그는 다시 오리라고 유대 인들이 대망 하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말4:5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의사자

엘리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패망해 가는 이스라엘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린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민족의 패망을 바라모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시고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최고의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성현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성현 중의 한 사람 아니면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는

자들은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성현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없고,

복음을 증거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자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본문15 -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마16:16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이 바로 나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이 신앙고백을 내 것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올바른 신앙고백을 가르친다해도 주체적 내 신앙고백이 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로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2) 그리스도시오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란 구약의 메시야라고 하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삼대직능을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당시 기름부음 받는 자는 왕, 제사장, 선지자 등입니다.


여기서 왕이란 우리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주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중보자이신 구원자를 뜻하며,

선지자란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당신을 구약시대에서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이 백성들이 목타게 기다리던 메시야 구원자입니다. 하고 고백입니다.

(3)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에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 같은 자들과 구별된 신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살아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활동하고 기거하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과 함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을 때만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때에 경건한 그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서도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 없이는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2.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입니다.

베드로의 바른 신앙고백이 있을 때 예수님은 심히 기뻐하시며,

본문17-18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요나 시몬아"라고 하는 뜻은,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오늘날 성과 같은 것이며, "시몬"은 할례 받을 때 받은 이름입니다.

"베드로"라는 뜻은 돌 또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는 뜻은

베드로의 인격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고 베드로의 올바른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은 교회의 든든한 반석과 같은 기초에 속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고백만이 교회를 굳건하게 세웁니다.


그러면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는 분은 누구입니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예수님이 예수님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떠한 인간도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행20:28 -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주인행세를 하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교회의 모습은 철저하게 주님이 주인 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종이며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할 참 모습입니다.

3. 천국열쇠를 가지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9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천주교에서는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문지기

노릇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에 보면 이러한 외곡된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2장에 보면 예수님이 그의 모친과 가나혼인잔치에 참석했을 때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고 했지만 그 어머니가 부탁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결국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에게 부탁하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부탁하면

틀림없이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고 마리아에게 소원을 비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에게 기도해야 할 자이지 인간들의 기도를 받아 중간역할을 하는

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하여 행2:13-14 -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과 여자들과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보이신 것은 마리아의 믿음과 종들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었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베드로 개인의 인격을 보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대표로 했고,

그 신앙고백을 보고 그 신앙 위에 예수님이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기로 하시고 이는

자기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천국 열쇠란 무엇입니까?


①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② 모든 문을 여는 만능키가 되는 기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는

만능의 열쇠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천국 열쇠는 여러분의 바른 신앙고백 주를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이 천국 열쇠입니다.
천국 열쇠는 제자들이 받은 복음을 의미합니다.

이 천국 열쇠를 가지고 베드로는 하루에 삼천 명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었고

고넬료 집에도 가서 천국 문을 열어 주었고 사도 바울은 이방나라와 로마에까지 가서

천국 문을 열어 주었고,

 

도마는 인도에 가서 천국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만 천국 열쇠를 준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에게도 복음이라고 하는 천국 열쇠를 주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천국 문을 여시고 이웃을 위해서도 천국 문을 여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천국 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천국 열쇠를 가지고 가는 곳마다 천국 문을 열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천국 문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기도입니다.

 

복음과 기도의 열쇠를 천국 문을 여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교회의 참 모습Ⅳ(행2:46-47)


성서적 교회의 참 모습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빼 놓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1. 마음이 하나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46상 -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라고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의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월드컵을 생각합니다.

4강에 진출한 것도 중요하지만 온 국민의 마음이 하나되었다고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둡니다. 남녀노소, 지역과, 직업의 귀천을 불문하고 심지어는

외국에 나가있는 동포들까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한마음 됨이 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이루고 우리나라 황선홍 선수와

유상철 선수가 월드컵 올스타 16명중에 뽑히게 되었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성공적인 월드컵 행사를 마치게 한 것입니다.

FIFA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멋진 경기장과 양 국민들의 친절,

훌륭한 물류시설 주최국내의 큰 관심 등으로 가장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대회였다고 극찬하였습니다.


마음이 하나될 때에 위대한 일을 해냅니다.

월드컵기간에 그 엄청난 인파가 모였지만 한마음이 되었기에 질서정연했으며,

마음이 하나되었을 때에 누기 시켜서라 아니라 그들이 떠난 자리에 담배꽁초 쓰레기하나 없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월드컵 기간 중에 범죄율까지 줄었다는 것입니다.

온 국민이 하나될 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온 국민이 짝짝짝짝짝 마음이 하나되어

이러한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정! 짝짝짝짝짝,우리교회! 짝짝짝짝짝 교회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2.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본문46 중 -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성전에 모이는데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기적은 모일 때에 일어납니다. 경기장뿐만 아니라 시청 앞 광화문 네거리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모였습니다.

 

우리나라가 8강 진출권을 놓고 경기를 할 때 제가 백령도에 있었는데

그 섬 주민들까지도 상점가계 문까지 닫고 농협창고 광장으로 모였습니다.

사람은 모일 때에 힘이 생기고 용기도 솟아나는 것입니다.
교회도 모일 때에 성령이 역사하고 능력이 나타나고 성전에 모일 때에

믿음의 용기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모일 때에 열심히 생깁니다.
삼상7:1 - 사무엘의 주선으로 이스라엘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고

기도할 때 기적이 나타나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모이기를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모이기를 소홀히 했던 서구교회와 유럽교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화려하고 웅장했던 교회들이 힘을 잃고 박물관이 되고 골동품 진열장이 되어 관광객들의 볼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했습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항존직을 받은 중직자 까지도 주일 낮 예배만 겨우 참석하고 수요일 찬양예배는 안나와도 되는 것 같이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는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 예배 참석은 세례교인의 삼대의무 중의 하나입니다.

하물며 어떻게 중직자들이 공 예배를 소홀히 합니까?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시기 원합니다.

3. 가정에서 예배하는 교회였습니다.

본문46하 -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합니다.
여기서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다 함은

예배시에 애찬식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행전교회는 가정에서 예배하는 교회였습니다.

온 가족이 모여 애찬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미하여 예배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두 가지 유형의 교회를 보게 되는데,

하나는 성전에 모이는 성전교회요, 또 하나의 교회는 가정에서 모여

예배하는 가정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두 유형의 교회를 살펴보면 먼저 가정교회가 활성화 될 때 성전교회가 부흥했습니다.

 

행2:1 -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120명이 기도하는 중에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는 "마가의 집 다락방"가정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였습니다.

여기서부터 교회가 새 생명을 얻고 예루살렘교회가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가정교회가 활성화 될 때 성전교회가 활성화됩니다.


행10:1 - 고넬료의 집에서 가정교회가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 가정교회에 들어가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이방인 교회가 시작됩니다. 가정교회의 중요성이 여기 있고.

가정예배 또는 목장예배의 중요성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가정교회는 성전교회의 씨앗이 되고 생명력이 되고 풀뿌리가 됩니다.

따라서 가정교회를 살려야 성전교회가 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방초교회에서는 가정교회를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가정주일을 정하여 오전엔 교회에서 온 가정이 나와 함께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모처럼 별미를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쁨으로 예배드리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는 가정은 분명 성전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가정이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한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다섯째 주일 전 토요일은 예비일로 정하시기 바랍니다.

이 날은 가정주일을 지키기 위한 예비일로 말입니다.

 

이 날에는 직장에서 퇴근하는 아빠들은 일찍 집에와 대청소도 하고,

주일날 해야 할 일을 미리 하고 엄마들은 주일날 먹을 음식과 복잡한 것은 미리 준비하고, 자녀들은 주일날 공부할 것 미리 하고,

숙제도 다하고, 직장생활이나 대학생자녀들은 엄마와 함께 음식도 만들고

아빠와 함께 집안정리도 하면서 삶을 배우고 대화도 하며 가정주일을 미리 준비하여 다섯째 주일은 오전에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집으로 돌아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그 날은 아버지 어머니가 제사장이 되고 자녀들은 찬양대가 되어 기쁨으로 예배하고 온 가족이 함께 보내는 축제의 날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꼭 집에서만 예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야외도 좋습니다.

믿는 친척집에 약속하여 함께가거나 초청하여 예배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가정들입니까?

이렇게 하면 자연히 가정의 뿌리가 생기고 구심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마음을 같이 하는 교회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요 가정에서 예배하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러한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여 간직하는 교회 되기 원합니다.

목장예배(구역예배)는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절대 필요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교회 공동체는 유배된 이들을 필요로 한다.
 


자비가 흐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언제나 유배된 이들을 필요로
한다. 교회를 히브리어로 ‘에클레시아eklesia’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에크ek’와 ‘칼레오kaleo’의 합성어로 ‘에크’는 ‘밖으로out’를
뜻하고 ‘칼레오’는 ‘부름call’을 뜻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는 익숙한 곳에서 알지 못하는 곳으로,
정상적이고 안정된 곳에서 우리 모두가 깨어진 인간이요
치료받아야 할 병자임을 체험하여 알게 되는 곳으로
부름 받아 나온 이들의 모임이다.
                                                     -「살며 춤추며」중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기 고향에서 밖으로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밖으로 불러내어 하나님의 집으로 순례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고향과 가족과 가진 바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스스로 유배(무엇이 제자리에서 옮겨짐)됨
으로써 우리는 ‘모두 함께 갖춘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순례자요, 은총이 필요한 죄인임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상동)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예배에 대한 또 하나의 생각

 

주여 오늘도 한 말씀에 깨달음을 주소서


매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수도 없이 드렸지만 그 예배중에 하나님께서 받을 만한

예배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본다.

솔직히 하나님께 예배한다기 보다는 설교 들으러 간적이 더 많았고

좋아하는 찬양을 부르고 오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 잘한것으로 착각하고

오늘 날 까지 신앙생활을 하였던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설교자가 누구냐에 따라 교회에 가고 안가고 싶은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예배 시간이 빨리 끝이 나기를 기다린적은 그 얼마던가?

기도 시간에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 드리지 못하고 아무런 생각없이

기도가 끝나기를 무아지경 속에서 보낸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나의 마음을 드려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도 주일 성수 했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안위를 받을 때가 거의 다 였던것 같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녀가 철이 들어 제 몫을 해내고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내 나이 이제 환갑인데 신앙적인 철이 덜 들어 내 몫을 제대로 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려 드리지 못한 것 같다.

 

오늘 주일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것이 주님마음을 헤아려 드리며

제몫을  다하는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고 묵상하며 기도를 드리던 중에

떠오른 생각 일곱가지를 적어 본다.

 

 

실천하는 예배

 

1.매일 마음 중심에서 울어나오는 한곡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 찬양하기

2.매일 주님의 이름으로 한가지씩 선한 일을 실천하기

3.습관적인 죄를 매일 한가지씩 멀리 하고 회개하기

4.한 번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가까이 하기

5.하루에 한가지씩 감사하고 기도를 통하여 교제하기

6.화 안내고 거룩한 언어 사용하기

7.말씀을 하루에 한가지씩 실천하기

  

마음과 함께 드리지 못하는 예배는 거짓 예배요 마귀에게 속는 것이다.

중심에 기도가 아닌 형식적인 기도는 절에서 염불하는 것과 같다.

실천하지 않는 예배는 모래성을 쌓는 예배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쓰레기요

가인이 드렸던 예배다.

 

참된 예배자는 이 예배가 하나님 받으실 만하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나님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중심을 드려야 한다.

참된 예배자는 자신을  살피고 정결하게 한 후에 정결한 마음으로 주께 나가는 자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불경건한 일이며 부정하고

하나님을 뵈올 자격이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온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하는 예배다.

 

그러기에 예배는 준비하는 것이다.

마음을 준비하고 예물을 준비하고 찬양과 기도를 준비하고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는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성전 재건과 교회 건축은 다릅니다

 


/1:12-15


교회당 건축을 할 때면 목사님들께서 의례히 학개서를 설교 본문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오늘 새벽기도회 학개서를 본문으로 정하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학개서가 제2성전 곧 스룹바벨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그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던 것과 오늘날 신약 시대에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을 동일 선상에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 재건 사업은 신약 시대인 오늘날의 교회당 건축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 구속사의 전개를 위한 통로로 모든 민족 가운데서 특별히 택함받은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나라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동참하시는 신정국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백성의 개개인의 생활은 물론 국가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을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이 성전을 중심으로 신본주의인 삶을 살 때에는 그 나라를 영원히 번영케 할 것이나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고 죄악을 행할 때에는 이 성전 건물이 아무리 크고 화려할지라도 무너뜨리시고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왕상9:1-9) 즉 성전건물 자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앙을 올바로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며 성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상징으로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요 선민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통한 끝없는 경고와 책망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고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각종 범죄를 일삼은 결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각각 B.C 722년과 586년에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 끝에 팔래스틴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개 선지자의 권면과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에 따라 성전 재건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 재건은 곧 선민으로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운동 그 자체였으며 신정국가의 재건 운동과 같은 중차대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교회당 건물은 구약시대의 성전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인 처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구성원들이 신약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입니다(고전6:19. 살전4:8)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인 오늘날의 교회당 건축은 선민 이스라엘의 성전 재건과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당 건축은 단지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간의 결속과 보다 원활한 신앙 생활을 위한 모임의 장소를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를 동일시하여 학개 시대에 성전 재건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대 당면 과재였던 것과 같이 교회 건축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시키는것은 분명한 오해로 시정되어야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교회란

 


우리는 참 하나님과 자기의 하나님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며 참 예수님과 거짓예수를 분별해나가야 합니다. 무엇이 성경적인 진리인지, 유사 진리인지 알아가야 하며 무엇이 교회인지 무엇이 교회가 아닌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인지? 어떤 일이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것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거짓된 교회 개념에 세뇌 당한 채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인 교회 개념을 정확히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충성하고,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교회(Ecclesia=에클레시아)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혹은 "불려 내어진 무리"라는 뜻입니다.(무리, 공동체라는)

 

사람이외의 그 어떤 것도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흔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교회건물은 교회당일 뿐이지 정확한 의미에서 교회당은 교회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제도 역시 .. 그 자체가 교회는 아니며, 그 자체가 신성한 것도 아닙니다.(그것은 대치적 교회구조일 뿐, 결코 교회 본질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뿐 아니라 교회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민화된 증거이자, 무지의 소치이며, 반성경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당 건물을 "주님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곧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3:9,16,6:19,고후6:16엡2:1,딤전3:15,히10:21)

건물 성전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며 폐지되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더 이상 거룩한 장소나 건물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거룩한 사람들만 소유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을 건축해야 한다!!" 는 성경적 근거를 찾아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성경적 근거가 있기는 고사하고 성전에서 행해지던 피의 희생제도와 제사장직도 이미 지나갔으므로 이제 교회는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성경은 명백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7:44절~60절을 보면 스데반은 건물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다가 순교했습니다.(성경에는 십일조제도가 있다. 마23:23) 초대교회에는 오직 연보만 존재했었는데 그때 연보를 건물이나 회당 건축용도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당 건물들을 건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연보)를 건축으로 낭비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모였고, 성령의 친교 (Koinonia)로 개방적이었으며 영적 은사를 행사함으로 세포 분열 방식으로 정신없이 성장해 갔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세시대에서는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며 건물에 비중을 두게 됩니다. 기득권의 탐욕과 명예를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으며 강단에서 비진리가 진리 인냥 선포되었고, 부와 명예, 권세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극심한 부패와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중세는 기독교 역사상 *암흑기*로 불리 워 집니다.

교회 건물은 성공과 부와 명예를 상징하게 됩니다. 큰 교회일수록 성공과 부와 명예는 더 커집니다. 개 교회 건물들은 곧 바로 건물 지상주의, 계급주의, 제도주의, 교권주의, 물질만능주의, 차별주의, 배타주의로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의 한국교회 역시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탐람하여, 크고 화려한 건물과 성공을 위해 장사진을 이루어 일제히 빨리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중세시대 성도들이 자신들의 오류나 맹종을 눈치 챘을까요? 어쩌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愚)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교회 건물도 기능적(Functional)이여야 하며, 수단일 뿐이어야 하며, 결코 목적(an end)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이고 올바른 교회관은, 우리 믿음의 집을 짓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 영혼과 교회가 중세기의 암흑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건물이나 제도나 감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객이 전도된 채, 헛된 노력을 경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넘치는 지혜와 분별력으로 건물을 세우려 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2)우리 자신이 성전입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분(마12:6)이신 예수께서는 왜? 성전을 허무시고(행6:14).. 또 왜?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실 성전으로 삼으셨을까요?(요2:21, 고전3:16)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사람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셨습니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숨어계신 하나님"(사45:15)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소 (Habitation of God)는 (거주지 혹 임재장소)

 

▶① 성막(Tent)에서

▶② 성전으로 (Temple)

▶③ 인간의 육체로 변해왔습니다.

하박국 2:20절 에서 ☞고전 3장 16절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던 구약의 건물성전을.. 인간의 몸으로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단 하나뿐이어야 했던 "건물성전"에서 행해지던 제사장직과, 희생제도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장막의 모형도 십자가에 의해 실체로 완성 되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는 새 계약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육체에 임하시며"(행 2:17)"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자신이)"(행4:21)영(Spirits)과 진리(Truth)로 아버지께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요4:24)"

 

너희가(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고 사도바울은 반문하며, 이 중요한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문(문서 법)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2:15)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3:6)이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벽돌로 지어진 건물(교회당이나 건물성전)에 임하시지 않으며... 오직 사람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다시 말하면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갈2:20)가 실제와 사실로써 체험되지 않는 믿음이란 부질없는 말(입술)만의 믿음이요..공허한 이론(지식)에 불과합니다."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저희를 알며"(요10:27)"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마음 문을 열면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함께 거하시겠다고(계3:20)주 예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기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관계가 기독교 믿음의 핵심이며 또, 사람 자신(개인)이 곧, 성전이 되고, 교회가 되는 이유입니다.

 

몬1: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롬16:5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고전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교회, 또는 성전은 오직 사람들을 말하며, 교회는 선택된(chosen), 순례하는 (pilgrim), 계약의(covenant)증거 하는(witness), 거룩한(holy)백성들입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재차 강조하며 중요시하는 이유는..우리가 주의 몸된 교회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게 될 때 비로소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들이...참 진리를 모른 채 고전3장11절~15 말씀처럼.. 금이나 은이 아닌.. 낡아지고 태워지고 무너져갈(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헛된 공력으로) 믿음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3)교회건물을 성전이라 부르지 마세요.

 

교회건물과 교회라는 의미는 다릅니다.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그 당시 권력 화되고 건물을 신성시하는 카톨릭이 성경에도 없는 개념을 넣는 것을 경계해서 분명히 밝힌 내용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용어가 교회의 큰 건물이라는 겉모양을 자랑하는 인간의 못된 심성을 따라 다시 생긴다는 것은 중세시대개념으로 돌아가는 시대 퇴보적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도 용어를 바로 써야겠습니다. 교회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에클레시아), 즉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교회건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적 신앙을 같이 합력하기 위한 공적이면서 부수적인 도구이지, 그 자체가 공동체나 성전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실체가 아니라 모형이요. 그림자 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를 구약의 물리적인 성전과 동일시하면, 우리는 아직도 그런 구약의 희생제사와 제사장을 똑같이 세우고 제사해야 합니다.

 

신약에서는 그 성전과 희생제사의 실체가 예수그리스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상징한다는 것이 신약의 기본원리입니다.(요2:21, 계21:11 고전3:16)

 

교회건물은 성전이 아니라, 공적인 예배와 모임, 성례의 집행 장소로써의 부수적인 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지금 성전은 우리 신자 자신이죠. 즉 크리스챤입니다. 즉, 물리적 성전은 사도시대 이후로 신약에선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영적인 의미로 상징화나 더 풍성히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성전을 가지고 자랑하는 유대인들과 제자들에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진다고 했습니다.(마24:1-2)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위선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이제는 물리적 건물로써의 성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는 본질적 성전이 세워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을 잘 나타내는 사건이 AD70년 로마 디도장군의 예루살렘함락과 더불어 된 성전 무너짐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구약적 물리적 성전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교회건물을 통해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인간의 사고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66:1 행7:48, 17:24) 솔로몬도 성전을 지으면서도 그런 것을 백성들에게 경계시키고 있습니다.(왕상8:27-49)

 

그리고 사실 초대교회 때 핍박 받을 때 권력자들의 핍박을 피해 소규모의 가정규모의 교회들이 있거나, 여러 군데 동굴을 파놓고 군인들을 피해 여러 군데 도망 다니면서 예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그런 교회모습은 물리적 성전과는 확실히 거리가 멉니다.

 

지금 너무 겉 숫자만 늘어서 건물가지고 성전이라고 자랑하는 사역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 범했던 우를 똑같이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물 속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모여서 예배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겠지만, 그것이 건물자체에 성스러움이 있어서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4) 내 몸이 성전이라

 

고전3: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또 성전이 된 내 몸의 모습은 어떤 상태이어야 하는가?

우리 몸은 어떤 몸인가?

 

롬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일상 사석 같은 자리에서 똥내 나는 몸으로 예배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하시면서 모세당시 레위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을 때 몸 상태를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사사 이후부터 제사장직무를 맡은 레위지파들은 철저하게 제사장 본연의 임무를 직무유기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레위를 으뜸이라고까지 했습니다.(대상9:34)

 

제사장 직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해주는 한 대목이기도합니다. 글쎄 레위가 제사장직은 고사하고 싸움질하는 전쟁 놀음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대상12:26-28)

이런 몰지각한 레위지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나왔습니다.

 

대상13:10에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이것이 개인을 향해서 치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날 성경을 보는 많은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내가 제사장인데 도대체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성전 된 내 몸을 도대체 얼마나 관리하고 있는지....그런 성전(법궤)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다윗처럼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상13:8에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 하니라.

이후에 웃사가 죽고 베레스 웃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요시야 왕 때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보수하면서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 책의 말을 듣자 옷을 찢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 왕 18년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왕하23: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이 어떤 사람이었느냐?

왕하23:25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고 했습니다.

마음뿐이 아니고 보이는 내 육신도 깨끗이 하라는 말씀

 

우리의 모든 생활이 사람의 행실이 아니고 짐승의 행실이 나올 때 나 자신은 모릅니다.

성경이란 거울을 통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사단이라는 또 하나의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어 놓게 만드니까? 사도 바울 조차도 이런 현실 속에서 고통스럽게 외치는 한마디를 하십시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은 오직 마음이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심령에게만 거하십니다.*

오직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심령만이 하나님의 처소입니다.(고전3:16,6:19,고후6:1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있어야합니다.

복의 개념이 세상 사람과 같아서는 행복 할 수가 없습니다.

죄지은 인간의 심령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새 생명을 받아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중생)

 

주님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자리였다.

신앙 양심에 걸리는 것을 찾아내야합니다.

말씀을 배척하면 빛난 과거의 은혜 생활은 간곳이 없고

비극이 찾아드는 어둠만 있을 뿐이다. 말씀은 새겨야한다.(렘31:33)

 

믿음과 은혜는 하나님의 것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2:9)

 

여기서 "너희"(성도)가 바로!!! "교회"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바로!!! "성전"입니다. 보이는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가르치는 자들은 영적으로 어리고 무지한 자들에게 거짓말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자의 모임' 그 자체입니다. 보이는 건물은 그저 단순히..예배당일 뿐입니다."

 

이는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모든 일)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찌라"(에베소서4:13~15)

 

우리는 가끔식 어떤 일에만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범사(모든 일)에 그에게(예수 그리스도)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5) 교회의 본질

 

신약성경은 교회라는 개념을 나타낼 때‘에클레시아’란 말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kaleo' 즉 ’- 으로 부르다‘와 ’ek' 즉 ‘밖으로부터’에서 취해진 합성어이다. 그것은 ‘- 로부터 불러 낸 자’(to call out from)라는 뜻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교회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불러내었다는 뜻이다.

 

그 부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끔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다. 하나님의 뜻을 마땅히 순종해야 할 백성이 교회라면 교회는 세계 선교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라고 그 본질을 말한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본질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교회론은 철저하게 성경으로부터 정의되고 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세워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의 터 위에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초대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의 제자들이 그 부활 사건을 증거 하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대와 예수님이 영광중에 다시 재림하실 소망을 안고 한 자리에 모이면서부터 교회는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던 증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이 사도들의 증거와 사역 위에 세워졌다. 사도는 교회의 시작이며 영구한 기초석이 되었다. 이런 근거에서 교회는 사도적인 것이다. 교회가 사도 적이라는 말은 사도 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스 큉에 의하면 이 사도성은 교회의 본질을 결정하는 다른 모든 속성-즉 다양성 중에 통일성, 개체성 중의 보편성, 죄 성 중의 거룩 성-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사도적인가의 여부에 따라 그것이 성경적인 교회인가의 여부를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교회가 하나 되고 거룩하고 보편적일 수 있는가? 참된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있지 않고, 그것이 과연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는가 하는 데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 교회가 사도 적인가 하는데 있다”

 

우리는 성전을 재건하는 사람들입니다. 범죄로 깨어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신령한 건축가들입니다. 그 일은 바로 내 믿음의 순금등대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거룩한 성전으로 재건될 때, 나의 앞날을 밝히는 소망의 등불이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십자가 종탑이 있는 건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건물은 교회라는 말보다는 예배당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란 거룩한 성도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그 단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룩한 성도, 즉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란1>주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3>구원받은 사람들의 단체입니다.

4>세상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교회=(헬)에클+레시아=밖에서(세상) + 불러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는 건물이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이 볼 때 때때로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 중에서 위선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아직 참된 교회로 변화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교회입니다(빌레몬서1장2절 참조)예수님이 오시기전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교회였으나 예수님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부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교회이며, 주위에 보이는 건물은 교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 건물인 것입니다.교회들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과 하나님과 교재 하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하나님은 광대하시기에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기위해 그리고, 주일성수를 위해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더 아름답고 영화롭게 하기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 예배당은 단지 편의시설일 뿐, 교회도 성전도 아니다.******

 

교회와 예배당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신앙의 공동체를 두고 한 말이며,

예배당은 그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소를 특정 건물로 만들고, 그 장소를 신당이나 혹은 무슨 사원처럼 꾸며놓고, 그 건물 혹은 장소에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직자를 구별해 따로 세우고, 하나님께 예물(헌금)을 바치게 함으로 그곳이(장소) 당당한 교회로 인식이 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라 하면, 일단은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60년대만 해도 예배장소에 예배당이라고 간판을 써 붙인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건물에 교회란 간판을 부착한 교회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교회라고 했을 때,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장소)에 나가는 사람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 교회 교인 혹은 그 교회 성도, 그 교회 집사, 권사, 장로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성도, 즉 교회를 위해 예배당(장소)이 필요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예배당을 위해, 성도(교회)가 필요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주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 주께서 피 흘려 부여하신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건물에 빼앗긴 채, 건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혹은 예배당과 교회를 혼동한 채 열심만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만약, 예배당을 때려 부수고, 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설까요? 그것은 신앙심이 투철하다고 자랑삼는 소위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이 앞장 설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과거 미국의 역사를 보면 그랬습니다. 흑인 노예 해방을 하자고 했을 때 가장 첨예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보수주의 미국남부교회 사람들 이였다는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는 것을 봐서입니다.

 

그래서 참 교회(사람)는 예배당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돌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보다는 예배당(건물)을 섬기는 것이 우선 되어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주객이 전도(主客顚倒)되었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왜 이런 현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당과 교회를 혼동하기 때문이랄 수 있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란 한계설정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현상일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그 장소를 "성전" 혹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도들에게 인식을 시키고, 그 건물을 아름답게 건축하게 하고, 경건하게 하고, 소중하게 인식을 시켜, 교회당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당(神堂)에 신을 모시고 사는 이방 종교인들이 행하는 짓을, 성령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어둠의 자식들이 되게 했다는 것이 심각한 오늘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은 우리 자신들이 곧 교회라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방 신은 신당에 모셔두고 신당을 찾아 섬기지만, 크리스천은 우리 몸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성전이라 한 것입니다.(고전3:16, 6:19, 고후6:16)

 

이 소중한 일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왜곡해서 예배당을 교회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된 것은 신당문화의 영향과 성직자(목사)들이 은연중에 자신들을 사제(司祭) 혹은 제사장이나 승려와 같은 중재자의 신분을 취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피 흘려 사신바 된 주의 백성(참 교회)들이 교회당이란 곳에 묶여, 목사 한 사람의 왕국을 위해서 혹은 목사기업 기능을 위해서 충성 봉사를 다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흑암권세의 포로들이 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교회당에 빼앗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들을 신자(교회)각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고, 그 신분이 각 사람에게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참 교회가 회복되는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의 주장을 한번쯤 되새겨 보면서, 오늘의 신자들의 처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두고, 사탄의 회란 말을 했습니다. 사탄의 집단에 불과한 중세 교회를 떠나 개혁교회를 출발시켰지만, 지금의 교회 상황은 중세 카톨릭보다도 더 사탄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면, 반드시 개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시대의 성전에 관한 인식문제는 개혁의 중심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이 성전이란 이름에 모아지고, 문제의 발생도 성전이란 이름에서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전이라 말한 것은 가시적 혹은 영적인 것을 포함한 성전 전체 개념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여기서 "성전 된 자기 육체"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란 것을 확인시킨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은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 비유, 등으로 설명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자기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안식일,

둘째가 법궤,

셋째가 성전이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실체는 사실 그리스도를 가르친 모형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눅6: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1:14 / 법궤는 말씀)

"성전 된 자기 육체"(요2:21, 계21:22)

 

이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폐기되고(성전 휘장이 갈라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으로 성전을 완성하신(다시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실 교회 개혁을 말하게 된 것은 땅에 다시 성전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포장된 신종 율법의 노예로 전락되어 땅의 건물(성전)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런 교회가 없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 분들은 강단에 올라갈 수 없다고, 교회법으로 정한 교단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교회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성전)이란 의식 때문이죠. 이 같은 의식을 가진 분들의 생각은 그와 같은 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혹 지금도 예배당을 신성시하거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처소나 집처럼 인식을 시키려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일은 하루속히 중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 행위요, 하나님나라의 반역행위요, 주께서 피 흘려 진리로 자유케 한 백성들로 종교(성전)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그리스도의 값진 피 흘리심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시 임재 처소였다는 것을 압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막을 대신해서 지어진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란 점에서 성전이란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된 것이고,(요2:21) 성전 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분의 영(갈 4:6)이 오순절 성령으로 강림 하셨는데, 그 영(성령)이 임한 곳이 곧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어디로 임하셨는가? 사도행전 2장17절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 "모든 육체에" 부어준 것이라 증거 함으로, 믿는 자의 몸(마음)에 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갈4:6)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고전3:16)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령이 임하신 믿는 자의 각 사람의 몸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예배당을 지어놓고, 혹은 지으려 하면서 성전이란 말을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말하게 되면, 순진하기만한 신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목사 노릇을 한다 해도,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께로부터 부인(否認)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마7:22-23) 일개 건축물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들먹이며 성전 운운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일이며, 수많은 영혼들을 어둠으로 이끄는데 그 사안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거짓을 가르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수만 명, 수십 만 명을 모은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대단히 거창하게 하기를 원하심이 아니요, 비록 사람들 보기엔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란 것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합니다.(마7:21, 마25:34-4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것도

사람을(성전)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배당의 조직이나 제도, 건물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예배(禮拜)에 대한 이해

 

1. 예배의 시초(始初)

 

에덴 동산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와 만남이 자유로웠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두려워 숨게 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교제의 단절을 가져온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가 성막과 성전에서 가시적으로 제사를 통하여 만나주시는 제사 사건으로 표현되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는 타락한 인간을 만나주시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약에서 제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한 제도로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장과 희생물을 통하여 예배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직접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 만남이며 대화라고 할 수 있다

 

 2. 예배의 어원(語原)

 

 1) 샤하(히) : ‘엎드려 절하다, 구부리다, 굴복하다’을 뜻을 갖고 있다(출4:31).

 2) 아바드(히) : ’봉사, 수고, 섬김’이란 뜻을 갖고 있다(창2:5,15:출3:16:민1:51:사19:21)

 3) 프로스쿠네오(헬) : ‘존경의 표시로 다른 사람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말한다(마18:26,14:33:요4:22-25)

 4) 레이투르기아(헬) : ‘국가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 또는 ‘교회의 예배’를 말한다(행 13:2).

 5) Worship(영) : ‘가치 있는 대상에 대한 인정’ 또는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자에 대한 찬미’ 등의 뜻을 지닌다.

 6) Service(영) :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의무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7) Liturgy(영) : 공적인 일을 의미하고, 라틴어에서 파생된 ‘Cult’란 말은 "숭배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최상의 존경심과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시29:2).

 

3. 예배(禮拜, worship)의 정의(定義)

 

신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말씀에 응답함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생각에 관심과 마음의 사랑을 주님께 집중함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것이다.

즉 최고의 가치, 사랑, 헌신을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이다(요14:6;딤전2:5;요4:21-24).

 

4. 예배의 대상(對象)

 

하나님(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5. 예배의 목적(目的)

 

인간이 살아가는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표현하는 행위'(시29:2,96:8)라고 할 수 있다.

 

6. 예배의 중요성(重要性)

 

 1)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영광을 받기 위하심)이기 때문이다(사43:7;고전10:31;롬1:18-23;엡1:3-6).

 2)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출3:12,20:3-6)

 3)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요4:23).

 4)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롬12:1)

 5)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여 주시기 때문이다(살전5:23;시16:8,9)

 6)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요4:23).

 7) 구원받은 자의 의무이다(살후2:13,3:2).

 
7. 예배의 구조(構造)

 

 1) 내적인 마음의 태도(경외, 존경, 경탄)와 객관적인 행위인 외적인 행동(엎드림, 섬김, 절함)의 결합이다.

 2) 계시(하나님의 초청, 성경봉독, 설교, 축도)와 응답(찬송, 기도, 헌금)으로 대별된다.

 3) <부르시고-만나고-파송 한다>는 구조이다.

     첫째, 부르시고

     -> '하나님의 초청'이다.

           이것은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다는 의미이다.

     둘째, 만나고

     -> '말씀 속에서 만남'이다. 

          설교를 통하여 우리와대화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으로 살아갈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셋째, 파송한다

     -> '세상으로의 파송과 복 주심'이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대하며 새로워진 사람들에게  사명을 맡기며 세상으로 파송한다.

 
8. 예배의 요소(要素)

 

 1) 고정적 요소 : 말씀, 기도, 찬송, 성찬, 헌금

 2) 유동적 요소 : 주기도문, 사도신경, 교독문, 광고, 친교

 3) 상향적 요소 : 찬송, 기도, 헌금

 4) 하향적 요소 : 성경봉독, 성찬, 설교

 

9.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

 

* "너희는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아니할 것이요"(암5:22).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1:11,12).

*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렘6:20).

 

 

10.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쁨보다 나으니"(삼상15:22).

*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21:3).

*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21:3).

*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히11:4).

 

 

11. 참다운 예배

 

*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16:6)

*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 하나님께서 희생제물 보다 우선하여 하나님을 아는(믿음, 말씀 순종, 의와 공평, 공의, 인자와 진리, 신령과 진정,

    산 제사) 예배를 기뻐하신다고 요약할 수 있다.

 

 

12. 예배의 기본(基本)

 

 1)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나 사물이 아니라 참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마4:10;요5:23;고후13:13).

 2) 예배는 무엇보다도 기독론에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게 계시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3) 예배는 성령론에 근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는 모두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예배는 교회론과 깊이 연결되어 표현되어야 한다.

     교회는 언약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배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5)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한다(요4:23-24).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찬송하고, 부르고, 신뢰하고,

     섬겨야 한다(롬1:20;행17:24;시119:68;렘10:7;시31:23;18:3;롬10:12;시62:8;수24:14;막12:33).

  (1) 기도는 합법적인 것을 위해서 해야 한다(요일5:14).

  (2) 기도는 살아있거나 장차 살아갈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서 해야한다(딤전2:1-2;요17:20;삼하7:29;룻4:12).

  (3) 소리 내어 기도한다면 잘 알려진 언어로 해야 한다(고전14:14).

  (4) 경건한 두려움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행15:21;계1:3).

  (5) 강도(講道)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침이니 크게 주의하여 행하여야 한다(딤후4:2)

  (6) 이해와 믿음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양심적으로 들어야 한다(약1:22;행10:33;마13:19;히4:2;사66:2).

  (7) 마음에 감사함으로 찬송시를 노래한다(골3:16;엡5:19;약5:13).

  (8) 성례를 바르게 시행하고, 합당하게 받는다( 마28:19;고전11:23-29;행2:42).

 6)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주일을 구별하여야 한다(계1:10;출20:8,10;마5:17-18;창2:2-3;고전16:1-2;행20:7).

 

13. 예배의 금기(禁忌)

 

 1) 천사나 성인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에게 예배해서는 안된다(골2:18;계19:10;롬1:25).

 2) 오직 그리스도 외에 어떤 다른 이의 중보를 통해서도 예배할 수 없다(요14:6;딤전2:5;엡2:18;골3:17).

 3) 어떤 보이는 표현물이나 성경에서 규정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방식을 따라 예배 받으시지 않으신다

    (신12:32마15:9;행17:25;마4:9-10;신15:1-20;출20:4-6).

 4)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된다(삼하12:21-23;눅16:25-26;계14:13).

 5)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었다고 알려진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된다(요일5:16).

 

출처 : 바른신학 바른신앙 http://cafe.daum.net/correcttheology/1EvS/1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기독교 예배학(禮拜學)

  

Ⅰ.서언(序言)

 

예배란 “최상의 존재에게 표하는 경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최상의 존재에게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예배라는 말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신약 용어는 ‘프로스쿠네오’인데 이것은 “~에게 키스하다, 손에 키스하다, 절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개념은 사람이 존경,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하나님께 적용한다. 우리2는 하나님 앞에 절하며 또 하나님께 최상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4:20~24절은 예배에 대한 연구의 시금석이다. 이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간의 대화인데 ‘예배’라는 말이 본문에서 여덟 번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으려고 교회에 간다. 그런데 음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위해, 또는 설교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위해, 또는 축복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음악과 설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데 그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드림으로써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드리기 위하여 가야 한다. 본질적으로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존경과 경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함께 모이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드릴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마음의 태도 및 우리의 소유물을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

 

본 레포트의 목적은 먼저 예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둘째로, 실상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셋째, 그렇지 않다면 예배를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배의 중요성”, “예배의 근원”, “예배의 대상”, “예배의 영역”, “예배의 본질”, “예배의 결과”,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의 장애물”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예배의 중요성

 

Ⅱ-1.성경은 예배로 가득차 있다.

예배가 중요한 첫째 이유는 성경이 예배에 대해 매우 자주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백 번 거듭해서 예배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그 가운데 예배의우선권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의 몇 가지 구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1.구약의 구절들

 

1) 제1계명의 강조(출20장)

하나님의 몇몇 표준, 원리 및 지침을 계명, 법규, 법령, 법률 및 신조의 형 태로 말씀하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20장 2~6절까지의 제 1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제 1계명은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라 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2) 성막의 설립(출25장)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에 우선을 두고, 예배하는 데 집중하기를 원하셔서 예배를 행할 장소를 설립하신다. 그것이 성막인데 하나님께서 이 예배의 장소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모든 수치, 기 준, 설비를 논하는데 7장(총243절)을 할애하신 점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우 주를 비롯한 삼라만상의 창조를 묘사하는 데는 불과 31절만이 할애 되었을 뿐이다.

 

성소에는 지성소가 있었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었는데, 이 언약궤 맨 위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로 피를 뿌리 는 속죄소가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던 곳은 바로 속죄소인데, 출애 굽기 25장 22절을 보면 예배가 가장 우선적이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3) 성막주위의 진지(민1:52~2:2)

광야 방랑생활 40년 동안 매번 이스라엘 자손이 진지를 세우기 위해 멈춰 설 때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 가까이 있어야 했다. 제사장들 주위에는 레 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열 두 지파가 바깥 쪽의 원을 이루었다. 제사장들 은 예배를 맡고 있었고, 다른 레위인들은 성막을 돌보는 봉사를 맡고 있었 다. 이것은 우선권이 예배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하여 준다.

 

4) 스랍의 예(사6:1~2)

이사야 6:1~2에서 날개 중 네 개가 예배와 관련이 있고, 두 개만이 봉사 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각의 스랍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가렸으며, 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때문에 그의 발을 가렸다. 이는 천사들에게 있어서도 예배가 우선적이었음 을 나타내고 있다.

 

5)시편 기자의 권고(시편95:6~7상)

시편95:6~7절 상에서는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 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예배할 것을 권고하는 많은 시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시5:7; 29:2; 45:11; 66:4; 86:9; 96:9; 99:5,9; 132:7; 138:2)

 

2.신약의구절들

 

1) 로마서12:1~2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11장에 걸쳐 그리스도인과 그의 모든 유익을 정의 하는 교리를 논한 다음에, 로마서12장1~2절을 통하여 예배에 관해 논하 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받으실만한 영적 예 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산 제사로 몸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런데 그것은 육체적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것은 영적 예배의 행위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위대한 자비 때문에 영적 예배의 행 위로 그에게 우리 자신을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께 참되고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2) 베드로전서 2장5절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구속적 은혜의 기사들을 담고 있다. 그 리고 2장 2~3절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갓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제 구원 받은자로서 베드로전서 2:5절에서 말한다.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집에 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산 돌로 만든 집에서 사신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한다. 받으실만하고, 참되고, 영적인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님의 변혁시키는 사역을 기초로 하여 드려진다.

 

그러므로 예배가 중요한 첫째 이유는 성경이 예배로 가득 차 있기 때문 이다. 그리고 예배가 중요한 둘째 이유는 운명이 예배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Ⅱ-2. 영생은 예배에 의해서 결정된다

예배는 생활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생활의 핵이다. 받으실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간다. 시간과 영원이 예배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1.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1) 거짓 신들의 예배세상의 물질적인 신이나(욥기31:24~28), 하늘의 초자연적인 신들(신명기 4:14~19)에 대해 예배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그들 자 신이 창조한 우상들에게 예배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받지 않으 신다.

 

2) 잘못된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형상으로, 물질적인 표현으로, 우상으로, 또는 자신의 사고의 결 과 및 산물인 어떤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3) 자기 방식대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예배활동을 개인적 정의에 따라 격하시키는 것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 제 멋대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몇 명의 성경적 인물을 예로들면 “나답과 아비 후(레10:1~2)”, “사울”(삼상13:8~14절상), “웃사”(삼하6:1~9), “바리새인 들”(마15:1~9; 마23:23~28)등이 있는데 예배는 분명히 성경의 규정에 따라 드려져야만 한다.

 

4) 그릇된 태도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우리 마음의 태도가 옳지 못하면 그 예배도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즉, 거짓 신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예배하지도 않고 우리 자신이 고안한 방법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올바른 태도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관련 성경 구절을 보면 “말라기1:6~14; 3:13~15; 4:1~6”, “아모스5:21~27”, “호 세아6:4~7”, “이사야서 1:11~20”, “마가복음 7:6”등이 있다.

 

4.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1) 참된 예배자들의 모습받으실만한 참된 예배자들은 “깨끗한 손”(하나님께 복종하며 청결히 하는 자)과 “청결한 마음”(동기와 욕구가 올바른 자)을 갖고 참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다.시편 24편 3~6절은 참된 받으실만한 예배자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2) 참된 예배자들의 산출

구원의 목적은 참된 예배이며,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기록은 사람들이 예 배할 목적으로 구속받는 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3) 참된 예배자들의 자세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히브리서12:28절을 보면 “섬기다”라 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을 헬라어 동사인 ‘라트레우오’로서 “예배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의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받으실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우리를 예배하는 자들로 만드 신 하나님께 은혜롭게 반응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받으실만한 예배는 구원의 결과이므로 우리는 받으실만하게 예배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 예배를 확장시키고 그것의 충만함에 따라 사는 것은 그의 몸을 영적인 예배의 행위로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받으실 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 기꺼이 드리는 신자의 순종하는 태도에 의 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을 적절하게 예배하지 않는다면 염려스런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할 것이다.

 

4) 참된 예배자들의 개인적인 특성매일의 삶 가운데서 참되고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① 동료그리스도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고(로마서14:28) ②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 도께로 인도하며(로마서15:16) ③ 필요를 따라 물질을 드리고(빌립보서 4:18) ④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며(에베소서 5:8~10) ⑤ 의의 열매로 충만하고(빌립보서1:11) ⑥ 경건하고 단정하며(디모데전서2:3) ⑦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히브리서13:15~16)하여야 한다.

 

5) 참된 예배자들이 모이는 목적

우리의 예배가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할지라도 우리는 또한 매 주 공동 예배 에 참석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나머지 육일 동안 예배하도록 고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하여 세상 가운데서 나눔과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예배드릴 목적으로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격려 받는다.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 의인들의 회중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 시는 그 백성 가운데 우리는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과 선행 을 하도록 격려받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에 그 격려가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끼칠 때,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히 13:16). 그리고 다시 그 모임에 돌아올 때 우리는 계속적인 감사의 마음 을 갖고 충만하게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Ⅱ-3. 영원과 구속사가 예배에 의해 묘사된다

예배는 영원과 구속사의 주된 주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1.창조전의 역사

사람이 창조되기 전 영원한 과거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들이 존재했는데, 느헤미야9:6절과욥기38:4~7절 까지를 보면 그 영원한 과거에도 예배가 진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타락 전의 역사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었을 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러나 이 브가 사단을 예배하기로 결정하고, 아담이 이브를 예배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중단 했을 때, 그들은 타락했다.

 

3.타락 후의 역사

1) 가인과 아벨

아벨은 받으실만한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사람 사이의 최초의 분열이 일어났다.(창세기4:5)

 

2) 족장들

족장들이 올바르게 하나님께 예배했을 때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릇되이 예 배했을 때에는 징벌을 받았다.

 

3) 이스라엘 국가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후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전세대가 죽고 말았다(민14:22~23). 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예배받기 원하셨던 대로 예배하여 축복을 받았으나 결국 올바르지 않게 예 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전세계에 흩어 버리셨다.

 

4)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예루살렘에 가셔서 예배 처소에 들어가 그 처소를 정결케 하셨다(요2:13~17). 또한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을 부르셨다(요한복음4:23~24). 이와같이 예배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로 구 속사의 중심 주제였다.

 

4.현재의 역사

교회가 생겨날 당시 그것은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었다. 빌립보서 3:3은 성경에 나온 예배에 대한 위대한 진술들 중의 하나로서 교회에 대한 정의를 잘 내려주고 있다. 교회는 독특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영으로 하나님 을 예배하며,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것을 그 구성으로 한다.

 

5.미래의 역사

역사가 그리스도 재림의 영광 가운데 완성될 때, 그것은 예배에서 절정을 이 룬다. 왜냐하면 예배는 천국과 영광의 주제이기 때문이다.(계시록4:10~11; 계 시록 5:14; 계시록 11:15~17; 계시록 14:6~7; 계시록 15:4; 계시록 19:4; 계시 록 19:10; 계시록 22:8~9)

 

6.그리스도께서 예배를 명하셨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배를 명하셨다(마4:10하). 이 말씀은 창조된 모 든 것에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Ⅲ.예배의 근원(基礎)

 

구원의 목표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속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5에서 결국 예배를 낳기 위하여 모든 노력이 기울여짐을 말씀하고 있다.

 

받으실만한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주님은 누가복음 19:10절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요한복음 4:23절하와 연관시키면,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예배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통하여 예배하는 자들이 된다.

 

Ⅲ-1.그리스도의 죽음(시편22:22~27)

시편 22:1~21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는 묘사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는가에 대한 답은 22절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시편22편은 구속의 목표가 예배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구원이 예배의 기초라는 것이다.

 

Ⅲ-2.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린 이유(출20:22~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백(출19:7~8)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기초하거나 그들의 자기 의(義)에 기초해서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20:1~17에서 십계명을 주신 후에 출22:22~26을 통하여 은혜로운 규정을 주신 것이다.

 

출22:22~26에 나타난 은혜로운 규정은 예배의 기초로서 제단과 그 위에 놓을 수 있는 제물들을 설정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제사로 궁극적인 교제를 가능하도록 만드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실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만날 때, 우리의 죄가 처리되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하게 되며, 또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자가 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의해 가능하게 된 구원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근원이다.

 

Ⅲ-3.이사야의 예언(사66:22~23)

이사야서는 놀랄만한 방법으로 구속사를 한 눈에 훑는다. 이사야서의 초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위대한 미래 - 메시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 로 옮아간다. 52장과 53장에서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하는 고난받는 종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는 66장에서 는 그 이유가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영원한 예배자들을 낳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천년왕국을 넘어 영원한 상태로 나아간다.

 

Ⅲ-4.한 회심한 죄인의 반응(고전14:23~25)

고전 14:23~25는 어떤 사람이 회심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바울식 표현이다. 진실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열기를 원한다면 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그가 죄를 깨닫고 책망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가 죄를 선고 받고, 책망을 받고, 깨달으면, 그의 반응은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로 나타날 것이다. 구원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예배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예배의 근원 또는 기초가 된다.

 

Ⅳ.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이 두 가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영으로서의 하나님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이는 그분의 본질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본질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참된 예배의 기본적인 것이다.

 

Ⅳ-1.영이신 하나님(하나님의 본성)

 

1.하나님의 영성

요한복음4:24절상은 헬라어로 ‘영’이라고 읽는다. 영과 하나님이 용해되어 동등한 것으로 만든다. 즉, 하나님은 하나의 영광스러운 영이신 하나님이시 다.

 

1) 하나님은 형상으로 전락될 수 없다.

이사야서40:18~26의 말씀을 보면 영으로서의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가운데 18, 19, 25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 어떤 형상과도 비길 수 없으며 세상에 서 가장 중요하고 강한 자도 하나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또는 신학적 관점에서 또는 성경적 관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자칫 하나님을 형상으로 전락시 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서 예배되어야만 한다.

 

2) 하나님은 한 장소에 제한되실 수 없다하나님은 한 장소에 제한되는 우상이 아니시다(예레미야 23:23~24).

하나님은 특별한 장소 또는 시간에 제한 받으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간에 특별한 정소에만 계시다고 생각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시간과 공간을 충만하게 채우신다.

 

2.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게 예배를 받으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거 룩하심은 “하나님의 독특한 타자성” 또는 “인간 피조물과 하나님의 상이성” 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은 흠이 없으시며, 오류가 없으시며, 죄가 없으 시며, 실수가 없으시며, 또 완전히 의로우시며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 로 참된 예배를 위한 기본적인 이해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선의의 노력과 또 하나님을 거룩하게 존중하지 않으며 진행 되는 - 그러므로 잘못된 - 많은 예배들이 있다. 많은 멋진 노래가 불려지고, 멋진 감정들이 느껴지며, 멋진 생각들이 떠오르고, 또 멋진 정서들이 표현되 고 있다. 구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관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기에 이 러한 “멋진”것들은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정서 활동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당연히 수반되 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이해로 경건한 두려움의 반응을 낳는다는 것이다.

 

1) 경건한 두려움의 반응

시편 96:2~9까지의 말씀을 보면 모든 예배와 찬양후에, 9절에서 핵심 진 술에 이르는데 여기에 예배의 태도 또는 관점이 있다. 결국 거룩하심은 두 려움과 분리되어 이해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매우 거룩한 존재 이심을 인식하게되면 자신이 매우 부정적인 존재임도 분명히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룩한 경외감을 낳는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피조물에 대해 거룩한 반응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 정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압도적인 부정함을 느끼 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개념이 단지 구약의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2:28절 하~29, 이사야서 6:1~8, 디모데후서 2:22등과 같은 성경 말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2) 감사의 반응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 하심이 우리에게 감사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에 따라 보 응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는 이러한 하 나님의 자비조차도 우리에게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롬2:4).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보여주 셨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개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롬6:23). 즉 우리가 죄를 지닌 채로 하나님의 임재 가 운데로 달려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남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죄에 대해 의로운 분노를 발 하실 날이 온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행동할 권리를 갖고 계신다. 우리 는 은혜와 자비에만 익숙해져서 하나님이 의로운 것을 행하실 때 그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가 있는 가?”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삶이 어렵게 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가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생각이 반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죄에 가득찬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실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저주와 사망의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 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부정함에 대 하여 거룩한 방법을 행동하셨던 것이고 또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께 약속했던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을 때 왜 우리가 죽지 않았나? 하는 은혜와 자비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당하신 분이 아니라 자비로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때때 로 하나님께서 의로운 것을 행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생각나게 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기 위하여 그것 을 예 또는 표지로 행하신다(고전10:5~12).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부당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침해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자비로우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요, 초점인 것이다.

 

Ⅳ-2.아버지이신 하나님(하나님의 본질적인 관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관련하여 아버지라는 용어를 볼 때,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을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광대하시고, 편재하시고, 영원한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또한 친밀하시고, 사랑하시고, 개인적인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또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요한복음 4장에서 토론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도 아니고, 또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강조점도 아니다. 그 강조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하나님의 삼위일체 칭호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그분은 하나이신 세 인격 즉, 삼위일체 (三位一體, TRINITY)이시다. 이 삼위일체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이 여기서 “아버지”로 불리워 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를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내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자의 아버지시다. 그리고 성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 므로 우리가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모든 인류의 아버지(자 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를 모호하게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칭호와 별개로 예배되실 수 없다.

 

1) 예수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신 의미

신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논의될 때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 리스도의 아버지를 나타낸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언급하셨을 때 예수님이 그의 신성,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진술하고 계신 것이다.(요한복음 5:17~18; 요한복음10:29~33; 요한복음 17:1~5; 마태복음 11:27; 요한복음14:6~11)

 

2) “아버지”란 용어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

서신서(書信書)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에 배되고 동일시 된다.(에베소서1:3상; 에배소서1:17상; 고린도후서 1:3; 빌립보서2:9~11; 로마서 15:6; 베드로전서 1:3상; 요한 2서 3절)

 

2.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1) 아들에 대한 예배

요한복음 5:23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동등성에 대한 논리적 결론을 내 려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에배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아 들을 예배하여야 한다. 이는 아들의 이름으로 나아오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예배할 수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합가운데 정의 되며, 초대교회 내에서 나타났고, 요한복음 20:38에서 사도 도마에 의해서 선언 되었다.

 

2) 성령에 대한 예배

성령님을 예배하라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 아무데에도 없다. 하지만 모든 에배는 성령의 권능 가운데 고무된다. 우리에게 하나님 의 임재 가운데 나아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롬8:15; 갈4:6).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권 능과 임재 가운데서 이다. 그는 에배의 중요한 부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삼위일체적으로 성령님은 아들과 아버 지와 동등하시기 때문에 그 또한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그러면 요한복음 4:20~24에 따르면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영이신 하나님이다. 어떤 모호하고둥둥 떠다니는 정의되지 않은 영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다. 누구의 아버지이신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신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 하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게 되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소중한 것이다.

 

Ⅴ.예배의 영역(場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히 성전, 성막 그리고 매우 특별한 지리적 장소에서 예배했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4:20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그녀는 예배드려야 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곧 모두 제거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장소도 예베 처소가 되지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Ⅴ-1.옛 언약의 상징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는 더 이상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드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성막이나 성전 또는 의식 및 희생 제도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상징, 표상 및 그림들을 부인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모든 상징들이 사라지고 물질적인 성전, 제물 및 제사장들이 필요하지 않게 될 때가 노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 살아있는 성전과 살아있는 제사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제물은 단 하나의 완전한, 최종적인, 영구적인 - 모든 다른 제사들을 종식하는 - 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에는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그것들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고 하나님은 결코 성막이나 성전에 제한되거나 한정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상징은 마음의 자극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서 상징들은 실제가 되었고 또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으로 옮아갔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어떤 사람이든 지성소로 곧바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막15:38)

 

- 그렇다면 이와 같이 前制度가 끝나고, 성전이 있지 않다면 그리고 특별한 물질적 건물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예배를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다음에 있다.

 

Ⅴ-2.새 언약의 실재

1.우리의 개인적 몸인 성전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은 성령의 살아있는 성전들이다. 이는 사도 바울도 고 린도전서 6:19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해변에서, 산에 서, 시골에서 또는 당신의 거실에서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또한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나무 아래 앉아서, 숲 가운데를 걸으며, 베 란다에 앉아 별들을 바라보면서, 아침에 신선한 꽃 내음을 맡으면서 하나님 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러면 이로인해 내가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라는 의 문이 생기게 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교회에 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차 원을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2.우리의 집단적 모임의 성전

오늘날에는 예배 처소 -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그분의 백성을 만나는 건물 - 가 있다. 이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매우 생생한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 리고 그는 그들을 연결되지 않은 개인적 성전들로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권속에 속해 있어 공동 시민권에 의 해 연결되어 있고 또 가족으로 공동 혈연에 의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 라 건물로서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에배소서2:19~22). 하나님은 특별한 건물을 갖고 계신다. 그것은 구속된 성도들의 가시적이 고 살아있는 모임이다. 함께 모일 때에 우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구성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개인적 성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집 단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대한 성전인 것이다.

 

2)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우리를 “산 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함께 모일 때 하나님께서 독특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시는 예배 처소를 구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그 자신을 나타내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에 게 움직이시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2:5)

 

3)바울은 고린도후서 6:16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 가운 데서 움직이신다고 밝히고 있으며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 하다고 권면하고 있다(고린도전서 3:9; 3:16~17)

 

4)우리가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는 놀랄만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 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로 만들어진 성전이 아니 라 살아있는 육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히브리서10:24~25).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에배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혼자서 예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모임 가운데서 예배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집단적인 모임이 필요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산 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오는 자극과 확인,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성취하시는(우리가 혼자있을 때는 성취하실 수 없는) 독특하고 놀라운 사역에 대해 반드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을 에배하는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Ⅵ.예배의 본질(本質)

 

Ⅵ-1.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벗어난 것들

 

1.사마리아인의 예배(진리없는 신령)

요한복음 4:22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 을 예배하고”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 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몇몇 진리들을 알 만큼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구원 의 계시를 전부 알 정도로 충분한 지식은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적절한 지식이 없는 열광적인 예배였다. 그 들이 드리는 예배는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었고, 충성된 것이 었지만 그들에게는 올바른 내용이 없었다. 즉, 그들은 신령으로 예배했지만 진리로 예배하지는 않았다.

 

2.유대인들의 예배(신령없는 진리)

요한복음 4: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유대인)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의 태도는 사마리아인들과 정반대이다. 그들은 구약의 39권 모두를 받아들이며 구원의 가르침에 대한 전체계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차갑고 율법적이며 위선적이었고(마태복음6:1~8), 예배 동작을 모두 행했으나 그 안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들의 예 배는 생명이 없는 것이었고 그들은 진리는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비어 있었다.

 

Ⅵ-2.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1.신령으로 드리는 예배

1) 의미

신령으로 드리는 에배는 인간의 영 - 속 사람을 뜻한다. 우리는 안에서부 터 밖으로 에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은 적절한 장소, 적절한 시간, 적절한 말과 적절한 태도, 적절한 의복, 적절한 형식, 적절한 행동, 적절한 음악, 적절한 분위기 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부 - 영혼에 무엇이 있는가 의 문제이다. 바울과 다윗은 심령과 내부로부터의 예배 그리고 회개하는 예배와 마음 속이 찬양으로 가득차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로마서1:9; 시편103:1; 시편51:15~17)

 

2) 방법

어떻게 하면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찬양으로 가득차서 우리 입이 열려질 때 찬양이 쏟아져 나오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냉 랭한 마음, 즉 지루하며 무관심한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해 보면

 

(1) 성령께 사로잡힘

성령께 사로잡히는 것(고린도전서2:11; 고린도전서12:3)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으로 예배드릴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성령께서 거기 계셔 그것을 고무해야 한다. 즉, 성령께서 예배를 북돋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원 받은 것이다. 일단 구원을 받으 면,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향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촉구하고, 찌르 며, 밀어부치고, 가르치며,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 그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다.

 

(2)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함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새로워진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다. 하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는 것은 예배를 시작하는 방아쇠가 된다. 즉, 온 마음을 한 가지 주제인 하나님께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 다. 효과적인 예배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은 온 마음을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할 수 있는 것 즉, 하나님에 대해 묵상 할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묵상함

묵상은 지식에 기초하는 것인데 만일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 한다면 생각할 주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순 수하며, 가장 참되고, 가장 멋지고 복된 묵상은 발견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우리의 모든 사 고과정을 완전히 사로잡을 때까지 그 진리를 묵상하라는 것이다. 이러 한 묵상이 진정한 예배를 하도록 한다.

 

(4)나누이지 않는 마음

우리 심령을 예배에 집중시키려 애쓸 때, 한 가지 주된 방해거리가 나 타날 것이다. 그것은 자아(自我)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예배는 방해를 받는다. 우리에게는 종종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어서, 발견이나 기도, 묵상, 예배 등을 위한 시간이 없다. 또한 나누이지 않는 마음을 갖기도 어렵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계획, 우리의 행동, 우리의 필요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自我)는 항상 예배를 방해한다. 우리가 자아를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에 빠져들 때까지는 진정 하나님을 자유롭게 에배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진정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는 사실로 귀착되어진다. 찬양이 고정되고, 견고하며 하나님의 기사에 집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 이익, 축복 등 보다 항상 하나님을 위에 모시고 그분을 우선해야 한다.(시편86:5~ 11; 요일2:27; 요한복음16:13; 시편108:1~3; 시편112:7~8; 시 편57:7~11)

  

⑤ 열리고 회개하는 심령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접근할 때, 우리는 열리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다 가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탐조등을 켜서 당신께서 한구석에서 발견 한 것들을 드러내어 주소서”라고 기꺼이 말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만일 예배하는 것이 어렵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그 사람의 삶에는 오랫동안 간과되어졌고 하나님 만 알고 계시는 영역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영역들을 찾아 그것을 보여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런 후에 상 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 죄들을 고백하고 그 죄를 처리하여 야 한다(시편139:23~24; 사6:6~7)

 

2. 진리로 드리는 예배

모든 예배는 진리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느낀 감 정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진 반응이다. 만일 우리가 진리로 예배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가운데 예배드 려야 한다.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곳은 그분의 말씀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요한복음17:17;시편119:142,160)

 

1)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피조 세계와 양심 속에서 드러내셨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명백하게 자신을 게시하셨다. 우리가 진리로 예 배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규정된대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창조와 양심의 하나님에 대해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 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의 계시와 떨어져서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로마 서1:18~19,25)

 

2) 모든 예배는 반드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시편 47:7)

예배는 단지 손을 모아쥐고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아니면 아무 의미나 내용 없는 황홀경에 빠진 경험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심지어 좋은 감정도 아니다. 물론 감정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예배는 말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드리는 찬양의 표현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 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이는 참된 예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임은 어떤 모임이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 하나 님을 예배할 수 없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령으로 또 진리에 따라 예배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3) 예배에 있어 모든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결코 속 임수로 성경을 오용해서는 않될 것이며 또 우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정직하여서도 안된다. 우리는 오직 진리 가운데로 행하여야 한다.(고린도후서4:2)

 

4) 초대교회 교인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것은 사도들의 저술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였 다. 그것은 진리의 실체로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것에 대해 예배드렸다 (사도행전2:42)

 

5)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쳤다(디모데전서4:13)

 

6) 초대교회가 예배드릴 때 그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이용했으며 찬양과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 의 찬양이 규정되며, 우리의 예배는 신적 기준에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골 로새서3:16~17)

 

7) 무지(無知)한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사도행전17:23)

 

예배의 특성은 찬양과 기도, 노래, 헌금 그리고 생활 가운데서 우리 속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항상 그분의 계시된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가 항상 그렇게 되도록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감상 적이고 광신적이며,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두편의 한 가 운데가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받으셔야하기 때문이다.

 

Ⅶ.예배의 결과(結果)

 

Ⅶ-1.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시편50:23). 우리 삶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레위기10:3)

 

Ⅶ-2.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된다

예배하는 교회는 정결한 교회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때 거기에는 우리의 죄됨에 대한 인식과 그 죄됨을 포기하려는 기꺼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거기에는 깨끗하고 정결하게 되려는 불타는 열망이 있다(시편24:3~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죄에 더욱 더 압도되어 다윗과 같이 이렇게 외치게 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시편139:23~24절상)

 

교회에 있어서 성찬식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우리의 죄된 모습에 직면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바로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그토록 자주 성찬식을 행했던 것이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된다.

 

Ⅶ-3.교회가 세움을 받는다

초대교회가 예배를 드렸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 또한 받은 것을 알게 된다(사도행전2:47). 그리고 그들은 성읍을 완전히 그들의 교리로 가득차게 했다(사도행전5:28)

 

예배하는 교회는 쌓아 올려지는 교회 - 즉 세움받은 교회이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자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세워지고, 강해지며, 변화되어 진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예배가 거룩한 기대와 함께 시작하는 것처럼, 그것은 거룩한 기대로 끝을 맺는다.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되며, 교회가 세움받는 것이다.

 

Ⅶ-4.안 믿는 자들이 구원 받는다

예배하는 공동체의 심오한 증거는 어떤 단독적인 설교가 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안믿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린도전서 14:23~25)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스도인이 깨끗하게 되며 교회의 품성이 높아지고 잃어버린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Ⅷ.예배를 위한 준비(準備)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때, 문제는 성가대나 설교가 얼마나 잘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준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의 한 구절인 히브리서 10:22절 말씀이 성경전체에서 예배에 대한 가장 위대한 최종 변론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Ⅷ-1.부르심

“…나아가자…”

이는 예배에 대한 부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라, 지금은 예배할 때이다. 하나님께로 향해서 가까이 나가자”

 

Ⅷ-2.점검표

1) 진지함

“…참마음…”

우리는 진정으로 진지한가? 우리의 마음은 모아져 있고 온 마음을 다해 예 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2) 충성됨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더 이상 노력이나 의식의 체계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 에서 온전한 믿음을 갖고 나온다고 하는 충분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는 것이 충성을 의미한다.

 

3) 겸손함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악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겸손과 무가치함을 위식하게 된다. 주 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로부터 우리를 뿌려서 깨끗하게 하셨다는 사실 외에는 하나님 임재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깨끗함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마음을 씻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날마다 씻는 것이다. 예배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고백을 통하여 생활 가운데 짓는 죄 를 처리해야 한다. 비록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서 깨끗하게 되었지만 우리 의 발은 여전히 이 세상의 먼지를 묻히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 한다.

 

 

Ⅸ.예배의 장애물(障碍物)들

 

Ⅸ-1.회개의 예배

만일 우리의 삶속에 죄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죄를 고백해야 한다.사무엘상 12장을 보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한 후, 또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태어난 아이가 죽은 후의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든 일 후에 20절을 보면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회개의 예배이다.

 

다윗은 비극적인 상황 - 자신의 어린 아기를 잃음 - 한 가운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예배했다. 이는 그 자신이 마땅히 받을 것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회개의 예배란 징벌의 와중에서마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죄를 고백하며, “나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결코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 회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진솔한 회개가 없는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방해하는 첫번쩨 장애물이다.

 

Ⅸ-2.받아들임의 예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가져오신 환경들 중 일부를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그러한 환경들은 그들을 비통하게 만들고 결국 예배를 드릴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욥’을 보면서 분명한 받아들임의 예배를 배울 수 있다(욥기1:20~22). 또한 ‘죠지 뮬러’의 말을 상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죽는 날이 왔다. 인간의 칭찬과 인간의 비난에 대해 죽는 날,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해 죽는 날이 왔다.” ‘욥’ 역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하고 있다.

 

받아들임의 예배는 우리의 상황 - 지위, 경력, 노력, 배우자, 자녀 - 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사랑하는 자를 잃는 것, 자녀를 잃는 것, 직업을 잃는 것, 질병의 고통 등)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저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수 없는 마음이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두번째 장애물이다.

 

Ⅸ-3.헌신의 예배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자기 아들을 이삭을 데리고 간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의 생명을 기꺼이 취하면서 여전히 그것을 예배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창세기22:4~5). 이것은 그 댓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을 예배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러므로 헌신적인 마음과 정신이 없는 우리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X.結言(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에배의 정의와 중요성, 근원, 대상, 영역, 본질, 결과, 준비, 장애물등을 살펴 보았다. 본 결론에서는 참된 예배를 위한 자기 점검을 위에 기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매번 예배 드릴 때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진지한가? 나의 마음은 모아져 있는가? 내 온 마음은 하나님께 바쳐져 있는가? 나는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가? 나는 발견과 묵상을 통해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봄으로써 갈급한 마음으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있는가?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고 분명히 믿는가? 나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흘리신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내 삶에 있는 모든 죄를 처리하고 깨끗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조금만 성의를 갖고 성경을 펴서 히브리서 10:22를 읽고 점검표대로 살펴 보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배를 위해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진지한가? 나는 새 언약이라는 진리에 전념하는가? 나는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사역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를 평가하고 있는가? 나는 순수한가? 나의 삶에 있는 죄를 처리해 왔는가? 이렇게 해나간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절상)고 말할 수 있게될 것이고 이를 근간으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예배의 정의(定義)

 

 

프랭크린 지글러(Franklin Segler)는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인 맹종”이라고 했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으며(done), 무엇을 하고 계시며(doing),무엇을 하실 것인가(will do)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다.이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으면 결국 방관자나 구경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요4:22)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알고 예배한다는 뜻인가?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첫째, 예배의 대상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인식

둘째, 기독교의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속사에 대한 확신

셋째, 예배를 역동적으로 이끌어 가시고, 성도들을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깨닫는 사람만이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은총과 응답”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랭클린 지글러(Franklin Segler)는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사람들의 정성어린 응답이다”라고 했고, 폴 훈(Paul W. Hoon)은 “예배의 현장은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지점이다”이라고 했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Ɵeoς)과 그의 백성(λαος) 사이에서 발생된 사건(Event)이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없이 예배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반드시 거기 계셔야 하고, 동시에 예배자인 그의 백성들이 있어야 실재 예배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예배의 두 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먼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어떤 은총을 내리셨는가? 크게 이야기 하면 두 가지인데

그 첫째는 ‘창조의 은총’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베풀어주시는 보편적인 은혜이다. 예를들면 햇볕을 주시고, 비와 신선한 공기를 주셔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살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창조의 은총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을 깨닫고 감격하여 응답하는 행위(Responsive Action)가 곧 예배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응답겠는가?

이것이 곧 예배의 내용이다. 예배의 내용으로는 경배와 찬양, 감사, 참회, 헌금,기도가 있다. 이 다섯 가지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이 헌금과 기도이다.

 

우선 헌금은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그의 백성들이 마음의 중심을 담아 감사를 고백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헌금인데, 그것을 드리면서 복을 달라고 흥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60배 100배로 축복해달라 한다면 하나님이 부담스러워서 그것을 받으시겠는가? 도로 가져가라 하지 않겠는가?

헌금은 우리의 눈물과 땀과 정성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거룩한 사랑과 감사의 고백이다. 이 거룩한 순서를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 같은 시간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기도이다.

우리 기독교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의 행위로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기도는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주신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가슴을 채우는 것이 기도이다.

 

그의 백성들이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여 경배와 찬양, 감사, 참회, 헌금, 그리고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 이때 하나님은 세우신 종(목사)을 통하여 말씀과 성례전을 주시고 강복을 선언하게 한다. 말씀과 성례전 강복선언은 하나님이 예배시간의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특히 강복선언은 일반 기도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백성들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예배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시간은 바로 이때뿐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강복선언이 채 마치기 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강복선언을 축도라고 불러왔는데 엄밀히 말하면 축도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축도라고 할 때 축(祝)자는 빌다는 뜻이다. 축도는 무엇을 비는 일반기도와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셔서 하늘의 복이 있으라고 선포하는 것이지, 복을 비는 기도가 전혀 아니다. 하나님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신데 누구에게 복을 달라고 빌겠는가? 그래서 축도가 아니라 강복선언(Benediction)이라고 해야 맞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하나되려고 하기 이전에 말씀으로 자라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여기서 모두가 같은 말을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이것은 이것저것 세상적인 것으로 교인들을 가르치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배운 순수한 복음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사람의 사상을 가르치면 반드시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사이의 분열이 생깁니다아무리 좋은 사상이라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아무리 심하게 질책을 하고 아무리 분명하게 지적을 해도 놀랍게 하나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서택 목사 설교중에서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