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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룩한 칭호

 

말씀 : 요일3:1~6

 

1.가장 위대하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칭호

 

여러분, 세상에서 뭔가 특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칭호가 붙습니다. 성왕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또 일반적으로도 음악의 아버지, 축구의 황제, 가왕 누구누구, 요샌 뭐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여신, 얼짱, 몸짱 그러면서 그럴듯한 칭호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복되고 거룩한 칭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칭호로서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 등의 칭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속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실 분 등등의 의미이지요. 세상에 이렇게 거룩하고 복되고 위대한 칭호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고 능력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품이 좋고 엄청난 업적과 공로를 남겨 대단한 칭호를 얻어도 하나님께 적용되는 칭호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도 안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간에 붙여진 칭호 중에 그래도 어느 정도 하나님께 대하여 붙여진 칭호에 근접하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는 칭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누구누구, 성도 누구누구 이런 칭호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물론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칭호에는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세상의 다른 어떤 위대한 칭호나 타이틀이나 지위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물론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지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갔을 때 어떻게 됩니까? 거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됩니다. 물론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거룩과 의와 선과 사랑 등의 영화로운 속성에 있어서는 거의 예수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영광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칭호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뭔가 특출 나서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멋진 칭호를 얻는 것도 귀한 일이고 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칭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 들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1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보라.’ 너무나 엄청난 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의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늘 자부심과 긍지 속에 감사와 기쁨과 거룩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자녀가 된 과정

 

1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컴을 받게 하였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엄청나고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경이로운 사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만해도 엄청난 사랑인데 게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라도 그런 일을 하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과 사람과는 그 비중이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다릅니다. 물론 사람도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을 살린다면 대단한 일이고 칭찬과 상급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심지어 더럽고 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숭고한 헌신도 그 가치가 줄어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물론 그 결과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여 몇 사람을 살린다해도 숫자적으로 얼마 안될 뿐 아니라 그 영혼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못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고 흠없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럴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은 수억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사랑과 헌신과 섬김을 우리가 어디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놀랍고 크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랑을 받은 자인지를 늘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엄청나고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나서 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안다는 것은 마지막때에 주님이 오실 때 우리도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되어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게 됨으로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장래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거룩하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주님이 재림하시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는 확연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주님과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영화로운 몸을 덧입어 주님처럼 거룩하고 영화롭고 선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빛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엄청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무슨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이런 특권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감히 주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특권이요, 주님처럼 되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하고 영화로운 은총들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나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삶 또한 있어야 합니다.

 

오늘 3~6절의 말씀이 그 말씀인데요,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라는 것은 장차 주님과 같이 되어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소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는 이 소망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물론 어느 정도 소망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 질 수 없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고, 만약 범죄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어야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무엇입니까? 물론 겸손 사랑 자비 긍휼 용서 의 선 지혜 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물론 거룩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받쳐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되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방향과 목적에 부합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된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을 버리고,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의 의미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모든 욕심 욕망 미움 저주 시기 질투 불법 악 폭력을 버리고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날 우리가 힘이 없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시스템을 멋지게 하고 재미있게 유쾌하게 편안하게 해 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봉사하고 선을 행해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신뢰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목적을 그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에 대하여 뭐 그렇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진실하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우선 자신의 심령속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신뢰받게 되고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서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랍고 귀한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써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동시에 거룩하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함으로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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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서로 용납하라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서로 용납합시다.

말씀 : 골3:12-14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한다. 한마디로 자비를 베풀고 용납하고 참으며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말은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르고 더 나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계속해서 훈련하다보면 조금씩 가능해진다. 주님 앞에 엎드려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면서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용서하고 받아주고 용납하기를 연습하다보면 조금씩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저 자신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1.사랑과 자비와 긍휼등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과 거룩의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야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에 걸맞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너무나 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가 어떤 특혜를 받았는가?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갖게 되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것도 뭐 남들보다 크게 선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남들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나를 택하셔서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는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사랑의 법을 적용시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향기를 발할까? 얼마나 크나큰 은총 속에 살아갈까?

2.구체적 사랑의 모습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긍휼히 여기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연민을 갖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가 이 마음만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결국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무지해서, 연약해서, 심각하게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아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지 않는가? 오죽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혹 누군가가 잘 사랑해지지가 않고 용서가 잘 안된다면 그의 무지와 죄와 어리석음과 죄로 오염된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보고, 동시에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 되새기며 어찌 하든지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용서하고 그래서 함께 주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자비를 베풀라

자비란 선함, 친절함, 우호적임, 온화함 등을 말하는 것으로 긍휼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연민을 가지면 자비를 베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최대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왜? 불쌍한 영혼이니까. 왜 나도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주의 은총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겸손하라.

겸손은 말 그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하지 못하고, 싸우고 대접받으려고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교만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춘다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뭘 그렇게 잘 났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용서하지 못하고, 허물을 받아주지 못하겠는가?

벧전5:5(하),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4)온유하라.

온화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있고, 기질이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깨트리고 부서트려서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럽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내 자아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온유하라고 해서 죄와 추함과 더러움 마져도 적당히 받아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하는 말 맞다나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죄는 미워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화를 내기도 하셨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상냥하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좀더 친절하자. 상냥하자.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오래 참으라.

앞서 말씀드렸던 일들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해서 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금방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런 점을 이용해 먹으려고도 한다. 뭔가 나만 손해보고 나만 바보 되는 것 같을 때도 많다.

그러다보면 그만 나도 모르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온유를 지키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같이 대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열 번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여 앞에 잘한 것까지 말짱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도 내 맘대로 잘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깨져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6)용서하라.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서 불만의 원어적인 뜻은 비난, 허물, 책망을 의미하는 말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이나 자신에게 잘못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싫은 사람, 미워하는 사람,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 요구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주님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찌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일만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이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비난하고 욕하고 원수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7)이 모든 것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온전하게 매는 띠란 옷을 입고 모든 옷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띠를 말한다. 즉 사랑이 앞서 말했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등을 하나로 묶어서 온전하게 해 주는 띠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만 있으면 앞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온전치 못하고 타인에게는 욕을 먹을망정 부모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랑이라는 것도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행동으로 잘 안될 때가 많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할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변명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다른 방법이 없다. 은혜받아야 한다. 능력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자아가 깨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래도 온전치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조금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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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도하라

말씀 : 히13:18,19

1.기도의 중요성

1)사도 바울의 기도에 대한 태도

히브리서의 마지막 부분. 본론적인 말씀을 모두 마치고 이제 남은 부분은 성도들에게 부탁의 말씀과 축복. 그중에 오늘은 부탁의 말씀. 그 부탁은 무엇인가? 기도해 달라는 것.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도 자신이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할 것을 강조하며 동시에 계속 기도를 부탁.

①바울 자신이 기도함

[행16: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행16:25]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빌1: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②기도할 것을 강조함

[롬12: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골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살전5:17]쉬지 말고 기도하라

③기도를 요청함

[고후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골4:3]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살전5: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예수님도 기도하시고 기도를 명령하심

①예수님이 기도하심

[막1:35]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14: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②예수님이 기도를 명하심

[마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26: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눅18: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③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심

주기도(마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이 직접 기도하시고 기도를 명하시며 기도를 가르쳐 주셨겠나? 그러니 얼마나 기도해야 하겠나?

2.기도의 의미

1)기도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면 기도할 필요 없다. 그러나 나는 정말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을 긍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신앙의 행위.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바른 신앙생활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2)기도는 영혼의 호흡.

육체는 육체적 양식과 호흡, 마음에는 마음의 양식과 호흡, 영혼에는 영혼의 양식과 호흡이 있어야. 말씀을 통해 생명의 양식을 먹고, 기도로 영적인 신선한 공기를 계속 공급해 주어야.

세상은 영적으로 너무나 오염된 공기. 불신, 불만, 시기, 원망, 이기심, 욕심, 살인, 더러움, 증오, 간음, 도적질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 그래서 영혼이 죽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함으로 영적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치유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3)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과 은혜를 나누어주시기를 바라신다. 그러한 교제의 수단이 말씀과 기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셔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일단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많은 경우 기도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요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듣기부터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9:4)

그런 다음에 우리는 비로소 말해야 한다. 세상에서도 먼저 어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랫사람이 말하는 것이 예의. 말을 할 때도 예의를 갖추어서 해야. 자신의 필요만을 다짜고짜 말해서는 예의가 아니다. 먼저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감사하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필요를 아뢰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늘 하나님과 올바르게 의사소통을 하자. 대화가 단절되면 서로간의 관계도 단절되는 것이다.

4)기도는 문제해결의 열쇠.

그렇다고 기도가 내 뜻을 이루는 도구라는 것은 아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해결하시고 때로는 직접 개입하셔서 해결 하신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서 ‘비밀한 일’은 것은 원어로는 ‘숨겨진 일, 단절된 일, 도달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 우리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알게 됨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 하나님께 관한 모든 것도 우리 지혜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주시고 감동감화를 주시지 않으면 주님도 알 수 없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우리의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해서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나마 주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깨닫게 하셔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때로는 도리어 나를 변화시켜 해결하게도 하신다. 때로는 기적을 통해서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신다. 예수께서도 많은 기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셨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기도할 때에 분명히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에 힘씀으로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5)성도의 향기이다.

계8: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즉 기도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기도가 향기인가?

일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성막 안에 있는 지성소 법궤 앞에서 항상 향을 피워 제사를 드렸다. 제사는 짐승을 잡아 태움으로 죄를 태우며 헌신하겠다는 의미. 동시에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신다는 것은 그 제사 드리는 자의 마음을 받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마찬가지로 기도란 물론 하나님과의 대화를 의미하지만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아 아뢰며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②성도의 인격의 아름다운 향기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 자기 부정.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선과 의와 진리 가운데 살기를 다짐. 남을 욕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구하게 된다.

그래서 점점 성화되어 감. 그래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마음에는 불만과 시기와 적개심과 원망과 미움이 자리 잡지 못하게 된다. 가정과 이웃과 사회 속에서 화평과 사랑과 정의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결국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3.기도의 내용

물론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이 나라에 영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자신과 우리 모두가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기를 기도해야. 그 중에 오늘 말씀에 나타난 기도의 내용.

1)선한 역사를 위하여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모든 일’은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일, 교회를 섬기는 일, 성도를 믿음 위에 세우는 일,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살게 하는 일. 이런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어떤 사심이나 명예욕이나 권력욕이나 물욕 없이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것. 그러므로 너희들도 이 일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달라는 것.

즉 내 욕망이나 세상에서의 필요나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게 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게 가장 귀한 일이고, 우리 모두에게 결국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복을 가져다 주는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귀한 것보다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2)현실의 문제들

기도의 첫 번째 제목은 선한 역사를 위하여,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적인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님. 현실적인 문제도 하나님의 일보다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문제. 그래서 주님이나 바울도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요청.

오늘 히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내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너희에게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 무슨 문제이지만 모르지만 그들에게 속히 가기를 원했지만 갈 수 없는 상황. 그래서 속히 갈 수 있도록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 것.

예수님께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마6:11절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다음에 현실적으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그러나 그것도 자신의 욕심과 영광과 안일함과 부귀영화를 위해 구하지 말아야. 부귀영화를 위해서도 물론 기도해야 되지만 자기 혼자 영광을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구해야.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광을 누리게 됨.

그러므로 더욱 기도생활에 힘쓰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역사를 위하여, 성도들이 믿음 소망 사랑위에 든든히 서도록, 물질적로 넉넉하고 육체적으로 강건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교회도 더욱 든든히 서가고 우리도 더욱 영육 간에 큰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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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제목 : 흠 없이 설 수 있도록

말씀 : 딤전6:13-16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피할 것은 피하고, 취할 것을 취해야 한다. 운동을 잘하려면 게으름이나 향락을 피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열심히 훈련하고... 좋은 공부를 잘하려면? 돈을 벌려면? 권세를 얻으려면? 모두 마찬가지. 육체적, 정신적 좋은 것을 취하고, 해로운 것들을 피해야....

경건도 마찬가지. 경건에 유익한 것을 취하고 경건에 해로운 것을 피해야. 말씀 기도 찬양 예배를 가까이. 전도 사랑 봉사도 가까이. 반대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피해야. 욕심을 피해야. 탐심을 버려야. 그래서 앞의 6~12절에서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 돈을 피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신앙생활도 바르게 못하고 생명의 기쁨도 잘 누리지 못해. 여기서 자유하면 아주 행복한 인생이 되는데.......

그 대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 이런 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세상의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더 우선권을 두라. 그리하면 자유와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벧전2:11절에서는 말씀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

오늘은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영생을 취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이유를 말씀.

1.사도의 명령(=예수님의 명령)

딤전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앞에서 명한다. 그 하나님은 누구시냐?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 하신 분. 즉 만물의 존재의 근원, 생명의 근원, 생명의 수여자. 생명력의 공급자. 그 이름으로 명령함. 따라서 엄중한 명령. 다른 이의를 달 수 없음. 아멘으로 받아야 함.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야 함.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를 하신 예수님. 빌라도 앞에서 하신 선한 증거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당신께서 왕이신 것을 증언하신 것을 말한다.(마27:11, 막15:2, 눅23:3, 요18:37) 요18: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왜 하필 빌라도 앞에서 하신 선한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셨을까?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 물론 빌라도보다 더 높은 로마 황제도 있었지만 당시 빌라도는 유대에서 가장 높은 사람. 그 앞에서 내가 왕이다. 너의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즉 최고 통치자 위에 계신 분. 인간적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님께 대한 사형 언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인류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만 가능했던 일. 예수님은 그 모든 권세 위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 모든 영계, 물질계의 통치자, 주권자, 심판자. 그 이름으로 명한다.

따라서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라. 두렵고 떨림으로 받으라. 순종하라.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이다. 예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성도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그로 인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가라.

2.주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함.

딤전6: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흠과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지키라. 흠은 모자라는 것. 책망은 모자라는 것을 포함하지만 악하고 불의한 일을 함으로 질책을 받는 것. 즉 흠은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책망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으로 질책을 받는 것.

흠은 조금은 소극적 악, 책망은 좀 더 적극적 악.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아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동시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피해야. 거꾸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 앞에 서야. 성령의 은총을 덧입어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그러면 선한 일에 관심과 시간과 재미와 기쁨과 가치와 보람을 느껴. 그러면 감사함으로 할 수 있어. 책망 받지 않기 위하여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3.명령에 순종해야 할 이유

딤전6:15, 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그리스도 앞에 서야 하니까

딤전6:14,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즉 우리가 주님 앞에 서야 하니까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도록 말씀 안에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희망이며 기쁨이며 소망이며 영광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완전한 영광의 나라, 완전한 기쁨, 모든 적대자들을 물리치심. 마귀사탄을 결박하심.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추하고 슬프고 아프고 미련하고 약하고 부족하고 원망과 불평과 가난과 미움과 증오와 불안과 염려와 슬픔과 고통을 완전히 물리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희망이요 소망이요 기쁨이요 영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하며 혹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설 날을 기다리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하며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그 앞에 섰을 때 영광도 받고 상급도 받지만 심판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절에서는 유일한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라고 하셨다. 온 우주만물의 주권자, 통치자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영광과 상급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분의 뜻에 반해서 살아가면 결국 우주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 심판은 세상의 어떤 심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준엄한 심판이다. 영영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혹은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소망과 위로 속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을 살피며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여기서도 하나님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고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잘했다 칭찬받으면 많은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하나님 안에 복이 있으므로

딤전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하나님은 복되시고..... 하나님은 생명, 기쁨, 평안, 은혜, 위로, 소망, 사랑, 풍성....... 무엇이 복인가? 복이 어딨나? 행복이 어딨나? 하나님이 복이시다. 주님을 만난 것이 복이요, 주님을 아는 것이 복이요, 주님을 믿는 것이 복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이다. 이 이상의 복은 없다. 이 이상의 보화는 없다. 이 이상의 행복도 없다. 이 이상의 축복도 없다. 그래서 주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고 하였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3)영생, 빛,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므로

딤전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오직 그에게만 영생이 있음. 물론 우리도 영생함. 그러나 온전한 영생은 예수님의 생명을 덧입어야 가능. 물론 안 믿는 자는 영생은 영생. 그러나 그것은 영생이 아니라 영벌. 영생은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상태에서 영원한 삶이 영생. 하나님은 바로 그런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

그러므로 마땅히 그를 경외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명령을 지켜야. 그때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됨.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심. 완전한 빛. 참 빛. 영원한 빛. 어둠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완전한 빛의 세계. 죄를 가지고는 그 빛가운데로 들어갈 수 없어.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고 예수님의 생명의 덧입어야 그 빛에 가까이 갈 수 있어. 그 빛에 가까이 가면 그 빛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됨.

볼 수 없는 분, 본 사람이 없음. 천상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볼 수 없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대리인으로 통치하심. 그 빛이신 그 영광스러우신 초월적인 하나님 앞에 서려면 흠도 없이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함. 물론 우리 의로서는 안됨. 오직 예수님의 의를 덧입어야 함. 그러나 예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은 최대한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함. 잘 안되어도 때로는 쓰러져도 또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야 함.

그러면 이 땅에서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누리게 됨.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와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됨. 그리고 주님 앞에 감사와 기쁨으로 설 수 있음. 잘했다 칭찬받게 됨.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상급도 받아 누리게 됨.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혹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게 서기 위하여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진리와 성실과 의로써 살아가자. 부족하고 미련할 때는 다시금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위로와 힘을 얻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리하여 오늘 여기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다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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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떳떳한 인생(요일3:18-22)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떳떳한 삶을 위하여

말씀 : 요일3:18~22

 

법이 왜 필요할까? 그밖에 무언가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 같은 질서나 규범이나 관례나 이런 것들은 왜 필요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결코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애당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굳이 그런 규제를 두지 않아도 자기 이성과 영으로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아니 사실은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스스로를 통제하고 제어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성과 지성과 감성과 이성이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진리와 선과 의를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이 없다. 때로는 분별을 하면서 그 분별한 선과 의를 따라 살아갈 능력이 없다. 그래서 법과 규범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법과 규례와 질서를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에서 최대한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두말할나위도 없다. 모든 인생이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죄와 무지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과 인간과 세상과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진리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물론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선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춤으로 저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또한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1.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이 나타남

요일3:18,1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가 정말로 사랑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마음이 있다면 행위도 따른다. 물론 정말 마음은 원인데 여건과 상황이 안돼서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마음에 별로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으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단숨에 달려가지만 마음에 없으면 안강이라도 안 달려간다.

그래서 마6: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고, 약2장에서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셨다. 당연하지 않나?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말로만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계속 말만 하면 위선이 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혹은 상황과 여건이 안돼서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뭐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에 있다는 것도 결국 자기 방어와 변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안 그런가? 정말로 사랑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결국은 한다. 주님을 위한 일도 그렇다. 주님을 위해 드릴 물질도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것이나 자녀를 위한 것은 한다.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시간과 물질이 없고 여건이 안된다고 하지만 자녀를 위해서는 한다. 물론 다는 못하겠지만 주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도 자녀를 위해서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렇게 믿음이나 사랑이 행위로 나타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께 속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불법과 거짓과 악과 더러움 속에 살면 안 되지 않는가? 빛 가운데 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산다면 어떻게 빛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는데 여전히 더러운 모습으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8:12절을 보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빛이신데 그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둠 속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수님이 빛이시니까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그 빛을 받아 당연히 빛의 은혜를 누려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엡5:8,9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진리와 생명과 의와 선과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나온 자로써 온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가자. 다만 따라 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굳세게 됨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할 때에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침으로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하여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을 물리치고 빛과 같은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진실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선을 따르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동시에 나도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스스로 위축되고,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부끄럽고 그래서 결국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렇게 주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결국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됨으로 더더욱 빛의 은혜를 누리기 못하고 어둠의 세력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깨끗하고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당당하다. 마음이 뿌듯하고 자존감이 있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죄와 향락과 불법과 불의에 빠지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다. 숨으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범죄는 주로 어두운 곳에 이루어진다. 물리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의미적으로도 숨겨진 곳, 은밀한 곳,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선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한 일이라면 왜 숨어서 하겠는가? 일부러 나보란 듯이 하지... 그래서 잠28:1절에서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과 진리를 따르되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평안과 가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된다.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나 죄가운데 있거나 하나님 앞에 뭔가 떳떳하지 못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없어진다. 뭔가 그늘진 모습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서, 특별히 사랑의 도를 따라서 그런 말씀들을 실천해 나아갈 때에 정말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자부심을 가지고 생기있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실족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말 믿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로 최선을 다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과 같다. 정말 마음에 원이면 원하는 것을 향해 힘써 가야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실족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별로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실상은 마음에도 그다지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된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은 주님께 맡기고, 그저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역사 감당하며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4.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구하는 바를 얻게 됨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 그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앞의 2:2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면 그를 아는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 알리라고 하셨다. 2: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였다. 2:29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라야 그에게서 난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선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을 향하여 갈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기도라고 해서 맨날 달라는 기도만 드리지도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응답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과 혀로만하고 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기도응답을 기대하겠는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주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힘들고 부자유스럽고 어렵고 번거롭고 통제하고 제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물론 그래도 안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의기소침하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당당하고 생기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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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Sunday evening Service
말씀 : 막8:22~26

제목 :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는 물질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산이나 바다나 땅이나 사람이나 기타의 모든 물질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은 지적, 정신적 눈을 가지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눈을 가지고 있기에 도덕적 가치를 분별하며, 철학적 사고를 하고,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술 활동을 하는가 하면 과학이나 수학 등의 지적인 활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정의는 물론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반드시 보아야 할 이러한 세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세가지 영역의 세계를 보되 바르게 그리고 밝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올바르고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벳새다 지방의 맹인을 고쳐주시는 과정에서 이 맹인에게 육적인 눈과 아울러 영적인 눈도 밝게 해 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벳새다의 맹인의 고쳐주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1.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그 방법이나 과정은 매우 다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도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들을 고쳐주신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먼저 오늘 23절에서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말씀에서는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셔서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마9:27~31절에서도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마가복음10:46~52에는 바디매오라는 맹인을 고쳐주셨는데 거기서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자 눈이 떠졌습니다. 즉 여기서는 오직 말씀으로만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9:1~7을 보면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자 그가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고 나서 어떤 행동을 요구하셨고 그 요구에 순종할 때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같은 맹인을 고쳐주시는데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사람이나 환경이나 물질이나 그 어떠한 것의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주권에 의하여 자유롭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고 때로는 무조건 고쳐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와 교만의 소치입니다. 주님은 결코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얽매어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주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다만 주님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간구하며 기대하며 주님께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방법을 취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23절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이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치유과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칫하면 회의 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신 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굳이 사람들이 없는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실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니 도리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서 고쳐 주시면 얼마나 주님의 인기가 높아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굳이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26절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지 병이나 고쳐주는 분인 줄 알고 병이나 고침받기 위하여 따라다니는 것을 우려해서 였을 것입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해도 주님께서 뭔가를 요구하시거나 뭔가를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무조건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장면은 주님께서 그를 데리고 나가서 그의 눈에 침을 뱉고 나서 안수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만약 누군가 우리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극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눈에 침을 뱉는 것은 전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아니 기왕 고쳐 줄 것이면 좀 고상한 방법으로 하시지 왜 하필이면 침을 뱉아 고쳐주시느냐고 불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 그랬지 않았습니까?(왕하5장)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갔을 때 무슨 대대적인 종교의식을 통하여 고쳐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선지자가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모멸감을 느끼며 제깐 놈이 뭔데 나와 보지도 않고 그 잘난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느냐, 그까짓 요단강에서 씻으려면 차라리 그보다 몇배 더 크고 아름다운 우리 아람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에서 씻겠다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맹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이 이성적으로 수용이 되든 안되든, 침을 바르든, 물을 바르든, 진흙을 바르든, 심지어 똥을 바르든 주님의 방법에 순응하고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순순히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내 의사와 내 이성의 생각과는 별개로 주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때 결국 주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3.주님을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침을 바르고 안수하신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을 던지자 맹인이 대답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8:24)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들이었기 때문에 나무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무가 많이 서있는 것을 보고 사람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해서 마치 나무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시 안수를 하시자 그가 말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8:25)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안수를 두 번 하신 것입니다. 23절에서 안수하고 25절에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안수로 병을 못고치시나요? 아니 안수하지 않으면 못고치나요? 아니죠. 말씀만으로도 고치시죠. 그런데 왜 굳이 침을 뱉고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하셨을까요? 일단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어떻게 하시든지 순종하라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이 맹인이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시 안수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수는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또는 영력이 주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안수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믿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수를 두 번하셨다는 것은 물론 안수를 받는 자의 태도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안수를 하셨는데 그러자 이 사람이 주목하여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처음에는 주목하여 보지 않아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눈이 안떠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하니까 주목하여 보게 되었고 그러자 온전히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여 보았다는 문자적인 뜻은 ‘~을 통하여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역을 해서 주목하여 즉 열중하여 보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원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확신하는 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하려 세상을 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보였고 세상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보기 위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심으로 주님과 천국과 세상을 밝게 바르게 볼 수 있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바르게 보입니다. 목적과 방향과 목표가 확실히 보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물질계를 보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면 그 모든 것이 바르게 정확하게 확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정말 올바르고 정확한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은 오직 주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면서 모든 어둠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벳새다 맹인은 고쳐주시는 과정을 다시한번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실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엎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역사하시든 그대로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경제를 보고, 정치를 보고, 소망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밝고 바르고 정확한 눈으로 모든 물질계를 보고, 지적이고도 정신적인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르게 확실하게 보면서 살아가실 때에 더욱 온전한 생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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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제목 : 우리를 택하신 이유

말씀 : 딤전1:12-17

우리는 정말 감사할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정말 행복하게 기쁘게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받은 바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게 어딨나? 내가 무얼 잘나고 선하다고 날 찾아와 만나주셨나? 뭐 남보다 선하다고 날 구원해 주셨나? 내 생명, 시간, 육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 천가지 만가지 억가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겠나!

만약 우리가 자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어 별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데 감사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근심 걱정 염려 불평하며 산다면, 아니면 맨날 더 달라고 노래를 부른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적으로라도 기쁘게 살아야 한다. 부모 앞에서 억지로라도 행복한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1.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직분 맡겨 주심에 감사함(12,13절)

딤전1:12,13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예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사와 기쁨 속에 죽도록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설령 충성되이 여겨 맡겨주신 것이 아니라 하도 일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세워주셨다고 할지라도 감사하고 영광 돌릴 일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 같은 것을 주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나 같은 것을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게 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크나큰 영광인가?

게다가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추한 존재였나?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나? 얼마나 많은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었나? 그런데 그런 나를 주님의 자녀로 받아 주신 것이다. 주님의 자녀라니 얼마나 영광인가?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가? 왕자가 되는 것도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재벌의 자녀가 되는 것도 제법 누릴 것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까짓 것들과 비교나 되겠는가?

또한 우리 각자에게 귀한 달란트와 사명을 주셨다. 직책과 직분을 주셨다. 이게 보통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명암에 근사한 직함을 새겨 가지고 다닌다. 무슨무슨 박사 ○○○, 변호사 ○○○, 의사 ○○○, 국회의원 ○○○, 나는 목사 조학환이다. 나는 이게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로 ○○○ 이것도 엄청난 영광이다. 꼭 목사 장로만 그런 게 아니다. 권사 ○○○, 집사 ○○○. 꼭 직분자만 그런 게 아니다. 성도 ○○○, 이것도 얼마나 굉장한 이름인가? 아니 사실은 이게 가장 영광스러운 명칭이다. 성도, 대단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자녀. 이 이상 더 귀한 이름이 어디 있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다. 이게 상상이 가나? 세상의 무슨 직함이나 직책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단 말인가? 또한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빛으로 생명으로 은혜로 인도하는 일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귀하겠나?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아름답겠나? 중요하겠나? 보람 있겠나? 가치가 있겠나?

게다가 나 같이 자격도 없는, 공로도 없는 인생에게 이 귀한 생명과 이 귀한 믿음과 이 귀한 사명을 맡겨 주셨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요, 그저 영광 돌리며 기쁨으로 감당해야 되지 않겠나? 그러므로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주의 풍성하신 은혜에 감사함(14절)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주님의 자녀가 되고 게다가 귀한 직분까지 맡겨 주신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다. 다시 말해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이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셨든지 그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질병이나 환난을 통해서 했어도, 설령 나 혼자 믿게 되었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이다.

안 그런가? 뭐 우리가 그렇게 남들에 비해 특별하게 착하게 의롭고 아름다운 삶을 산 것도 아니다. 더 겸손한 것도 아니고, 더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다른 사람들은 놔두고 나를 부르셨는지는 모른다. 그건 그냥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요, 그것이 결코 내 의와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의와 공로와 겸손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우리를 부르셔서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말 그저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하고,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미련하고 부족하고 직분이나 직책이나 달란트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3.긍휼을 입은 까닭.(15,16절)

딤전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살인죄나 음란죄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실을 가리킨다. 사실 도덕적 윤리적 죄보다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데 가표를 던지고 하는 일이 더 큰 죄이다. 물론 윤리적 경제적 정치적 죄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악한 죄이긴 하지만 복음의 역사를 막는 자들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들이며 결국 많은 사람들을 지옥가게 만드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 죄수까지도 회개하는 자는 받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죄까지도 참으사 구원해 주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론 기본적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다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죄인에 대하여 참으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도 참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며 복음의 역사를 감당해 나가야 될 것에 대한 모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 괴수와 같은 날 참으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참고 기다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도 참고, 심지어는 내게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참음으로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요 사명이요,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4.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림(17절)

딤전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이렇게 직분을 맡겨 주신 것,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 죄인 중의 괴수를 불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보내고 있다.

만세의 왕이란 시간적으로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한다. 썩지 아니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고안해서 손으로 만든 어떤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를 말한다. 홀로 하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인 유일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 하나님만이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유일하신 참 신이므로 이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다. 영원불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오직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천지의 주재이시다.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시간적 질적 공간으로 완전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에 의하여 모든 역사는 진행된다. 알든 알지 못하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것은 사람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 구원해 주셨다. 오래 참으시며 은혜를 풍성하게 내려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모습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자. 감사와 기쁨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자.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향기를 발하여 주님 품으로 인도하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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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서로 용납합시다.

말씀 : 골3:12-14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한다. 한마디로 자비를 베풀고 용납하고 참으며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말은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르고 더 나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계속해서 훈련하다보면 조금씩 가능해진다. 주님 앞에 엎드려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면서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용서하고 받아주고 용납하기를 연습하다보면 조금씩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저 자신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1.사랑과 자비와 긍휼등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과 거룩의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야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에 걸맞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너무나 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가 어떤 특혜를 받았는가?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갖게 되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것도 뭐 남들보다 크게 선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남들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나를 택하셔서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는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사랑의 법을 적용시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향기를 발할까? 얼마나 크나큰 은총 속에 살아갈까?

2.구체적 사랑의 모습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긍휼히 여기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연민을 갖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가 이 마음만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결국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무지해서, 연약해서, 심각하게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아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지 않는가? 오죽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혹 누군가가 잘 사랑해지지가 않고 용서가 잘 안된다면 그의 무지와 죄와 어리석음과 죄로 오염된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보고, 동시에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 되새기며 어찌 하든지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용서하고 그래서 함께 주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자비를 베풀라

자비란 선함, 친절함, 우호적임, 온화함 등을 말하는 것으로 긍휼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연민을 가지면 자비를 베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최대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왜? 불쌍한 영혼이니까. 왜 나도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주의 은총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겸손하라.

겸손은 말 그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하지 못하고, 싸우고 대접받으려고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교만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춘다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뭘 그렇게 잘 났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용서하지 못하고, 허물을 받아주지 못하겠는가?

벧전5:5(하),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4)온유하라.

온화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있고, 기질이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깨트리고 부서트려서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럽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내 자아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온유하라고 해서 죄와 추함과 더러움 마져도 적당히 받아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하는 말 맞다나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죄는 미워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화를 내기도 하셨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상냥하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좀더 친절하자. 상냥하자.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오래 참으라.

앞서 말씀드렸던 일들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해서 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금방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런 점을 이용해 먹으려고도 한다. 뭔가 나만 손해보고 나만 바보 되는 것 같을 때도 많다.

그러다보면 그만 나도 모르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온유를 지키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같이 대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열 번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여 앞에 잘한 것까지 말짱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도 내 맘대로 잘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깨져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6)용서하라.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서 불만의 원어적인 뜻은 비난, 허물, 책망을 의미하는 말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이나 자신에게 잘못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싫은 사람, 미워하는 사람,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 요구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주님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찌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일만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이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비난하고 욕하고 원수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7)이 모든 것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온전하게 매는 띠란 옷을 입고 모든 옷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띠를 말한다. 즉 사랑이 앞서 말했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등을 하나로 묶어서 온전하게 해 주는 띠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만 있으면 앞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온전치 못하고 타인에게는 욕을 먹을망정 부모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랑이라는 것도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행동으로 잘 안될 때가 많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할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변명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다른 방법이 없다. 은혜받아야 한다. 능력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자아가 깨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래도 온전치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조금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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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은혜에 굳게 서라

말씀 : 벧전5:12~14

 

오늘 말씀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부분이다. 베드로사도는 마지막 부분에서 본 서신의 대필자를 소개하고 은혜에 굳게 설 것과 서로 문안 할 것을 권면한 후 축도로 마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교훈들을 살펴보자.

1.신실한 조력자 실루아노

벧전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신실한 형제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써서 권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앞의 말씀들은 베드로가 실루아노를 시켜 이 서신을 대필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 12절부터 14절까지만 베드로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을 직접 기록한 것은 본 서신이 베드로의 서신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즉 베드로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자신이 직접 서신을 기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실루아노에게 대필케 하고 그를 통하여 편지를 전해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인으로 사도행전에 자주 나오는 2차 전도여행시 바울과 함께 전도를 했던 신실한 동역자이다. 실루아노라는 이름으로는 고린도후서나 데살로니가전후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경로로 베드로를 돕고 있었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서는 베드로를 도와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실라 즉 실루아노는 때론 처음에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 있다가 지금은 베드로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슨 일이든 전면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곁에서 도와줄 조력자들도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또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과 같은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고, 바울에게는 실라 디모데 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뵈뵈 등의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어떤 공동체나 마찬가지다. 물론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잘해야 하지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잘 도와주고 협력해 주지 않으면 어떤 공동체도 바르고 힘있게 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기보고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고 우습게 여기는 데 이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런 내조가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저도 물론 마찬가지다. 저의 목회사역의 반 이상은 아내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늘 고맙고 다른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도 물론 그렇다. 교회청소나 식사준비나 차량운행이나 예배위원이나 모두 너무 귀한 사역이다. 다시 말해 꼭 성가대나 교사나 구역장이나 무슨 선교회나 전도회의 임원이나 이런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 모든 일들이 교회를 세워가는데 꼭 필요한 일이고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름답게 유지하고 제 기능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사회구조가 아주 잘못된 것 중의 하나는 말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공부많이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농사를 짓거나 작은 공장이나 식당이나 혹은 속된 말로 노가다 일을 하면 아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런 곳에 일하는 분들이 안계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겠나? 누군가는 청소도 해야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고 공장에서 일도 해야 하고 노가다도 해야 한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잠자고 타고 보고 듣고 누리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런 분들의 수고에 의하여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분들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은 나 자신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어떤 곳에서든지 어떤 일을 맡았든 성실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그렇게 수고하는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귀히 여기자. 그래서 우리 모두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도 이루어가며 함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은혜에 굳게 서라

벧전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서신의 대언자를 말씀한 베드로는 마지막 권면에 들어간다. 마지막 권면의 첫째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은혜가 뭐냐? 내가 지금까지 써서 보내는 것이 참된 은혜인데 바로 이 참된 은혜위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써서 보낸 참된 은혜란 무엇인가? 물론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혜택들이다. 우리 생명,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그 중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은혜이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은혜이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신 것이 은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이 은혜란 그런 포괄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금까지 베드로전서에서 강조했던 내용들이다. 우리는 산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조금 힘들어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 그게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이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선을 위하여 고난도 받으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되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그 은혜위에 서라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중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진짜 은혜이다. 그냥 잘먹고 잘살고 만사형통하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물론 은혜이긴 하지만 그것은 온전치 못한 은혜이다. 그런 은혜에 빠지면 환난과 핍박이 오고 뭔가 일이 잘 안되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하게 된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게 된다. 일이 잘 풀되고 알아주면 주의 일을 좀 하다가 일이 잘 안되고 알아주지 않고 상황이 힘들어지면 주의 일을 회피하게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무조건 편하고 좋은 것만을 찾지도 않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좌우되지 않으며,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관계없다. 주님 주신 은혜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너무 크기 때문에 고난이 오거나 누가 어떻게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감사하며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약하고 악하고 거짓되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운 곳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많은 시련과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들엔 일희일비하지 않고 의연히 주신 사명 감당하며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 진정한 은혜를 받자. 주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생각하자. 그래서 어떤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게 됨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모든 상황속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며 의연하게 천성을 향해 나아감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서로 문안하라.

벧전5:13,14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서로 문안할 것을 권면한다. 여기서 바벨론이란 오직 육체적 물질적 유익과 기쁨과 만족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세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계18:2절에서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래서 당시 교회에서는 오직 세속적 관점으로 나라를 통치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가장 큰 세력인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 아들 마가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였다. 마가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상당히 부유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멋모르고 1차 전도여행 시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갔다가 너무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2차전도 여행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이 사람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생겨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따로 전도여행을 하게 된다. 이후로 마가는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바울에게도 인정받고 베드로에게도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로마교회와 마가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면서 너희 끼리도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볼이나 이마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물론 이것은 친밀감의 표현이다. 그렇게 너희도 서로 친밀하게 문안하라는 것이다.

물론 문안한다는 것은 그저 서로 안부나 물으라는 것은 아니다. 믿음안에서 형제자매된 자들로서 마땅히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면서 형편을 살피며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고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고 도우며 좋은 교제 가운데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자. 서로 가까이하며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자. 그러기 위하여 더욱 친밀한 교제도 이루어가자.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진정한 가족으로써 서로 위로받고 힘을 얻으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자.

4.축도

벧전5: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서신서의 마지막은 언제나 축도이다. 고전16:23,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엡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빌4:23 골4:18, 살전5:28, 살후3:18, 딤전6:21, 딤후4:22, 딛3:15.....

이러한 축도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축복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축복의 내용이다. 그렇다. 우리는 무조건 서로 축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원수조차 사랑하라 하였고, 롬12:14절에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물론 그 말씀대로 살 때에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자. 결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하지 말라. 그건 마귀가 하는 짓이다.

그러면 축복하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다. 물론 돈과 건강과 명예의 복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은혜보다 더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생명을 얻고, 물질도 육체도 명예도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고 모든 상황에서도 진정한 은혜를 누리게 되고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 때문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인하여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을 지키자. 아니 믿음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와 기쁨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자. 이 일을 위하여 서로 기도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며 천성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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