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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예배·입관예배가 우상숭배인가?  

 

 


[신앙상담] 장례예배·입관예배가 우상숭배인가?

어떤 행사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어,‘장례예식’ ‘결혼예식’ 등으로 용어 바꾸면 돼


- 박종순 원로목사 (충신교회)

 

[Q]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교회의 위로와 보살핌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장례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는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왜 우상숭배가 되는지 궁금하고 바른 모범을 알고 싶습니다.


[A] 먼저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배의 사전적 의미는 섬기다, 경배하다, 최상의 가치를 돌려 드리다 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타 종교에도 예배행위가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대상은 사람이 만든 신이거나 교주이거나 사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대상은 경배와 찬양, 높임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도 사상도 조직도 건물도 예배대상일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제사였습니다. 정해진 제사법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단 한 번도 사람을 제사 대상으로 정한 일이 없었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 제물과 제사법은 다르지만 제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 후 세월이 지나면서 저들의 제사가 형식화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이런 형식화된 제사를 책망하셨습니다.(사 1:11∼13, 미 6:7) 그리고 솔로몬 성전은 주전 587년 외침으로 무너졌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바른 예배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의 요점은 용어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목회자나 교회들이 생각 없이 사용했던 예배용례를 살펴보면 결혼예배 장례예배 회갑예배 학위취득예배 개업예배 등입니다. 문법대로라면 결혼이나 장례 같은 행사가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도 행사도 그 어떤 것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용어와 표현을 바꾸면 됩니다. 결혼예식, 장례예식 그리고 개업이나 축하할 행사들은 감사예배로 용어를 바꾸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결혼예식의 경우는 결혼 당사자와 가족 하객 주례자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는 예식입니다. 주례자의 예식진행과 주례사는 축하와 격려로 진행돼야 합니다.

그러나 장례식은 위로가 필요한 예식입니다. 집례자의 태도나 언어표현, 분위기가 장례식에 걸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조문하는 사람들도 절도와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신격화한다든지 예배대상으로 설정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죽은 사람을 신으로 떠받든다든지 숭배하는 것은 성경이 금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일본의 신사참배나 북한의 동상숭배 등은 분명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용어 선택의 미흡 때문이라면 우상숭배라기보다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일상용어도 바른 말을 사용해야 하지만 교회의 공적 용어들, 예배에 사용되는 용어들은 바로잡고 바로 쓰는 게 필요합니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쓰고 바로 살고가 중요합니다.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55031&code=23111619&sid1=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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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제목 :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말씀 : 마7:12

1.기독교의 황금율

오늘 말씀은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일컬어지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황금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라는 사람이 이 말씀에 감동을 받고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늘 음미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어서 이 말씀을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이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교도 곧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너무나 귀하게 여겨 황금판에 새겨서 걸어놓고 늘 묵상하며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나 재판을 할 때 이 말씀을 종종 인용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상숭배자가 이 말씀을 황금율로 여겼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해야 할까요? 안 그렇습니까? 물론 주님의 말씀이 다 황금보다 귀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도 얼마나 지당하고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서로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서로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이 선지자가 말씀하고 율법에 기록된 말씀의 근간이요, 핵심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것도 당연하지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아래로 사람들 간에 서로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면서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게 말씀이 곧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2:37-40절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도 사실 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나 대접하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죠, 사랑하면 대접하고, 진실로 대접하면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도 서로 대접하라는 말씀과 같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대접하는 것, 이것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두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안다며 위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섬기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래야 합니까?

2.우리 모두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함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유없이 해야 되지요. 안 그래요? 우주만물의 주권자시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명령인데 이유고 뭐고 따질 일이 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아니라면 아닌 줄 알고 무조건 순종해야지요.

그러나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을 때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물론 많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러분, 이 말씀 제일 앞에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 앞에서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런 이유로 어떻게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학생이다. 그러므로 공부해야한다. 나는 성도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와 같이 앞에 있는 내용이 이유가 되어 뒤에 있는 행동을 꼭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으니까 남을 대접해야 할 이유가 그 앞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앞의 말씀 1~11절 전체 말씀인데 특별히 2절과 11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즉 네가 남을 비판하면 너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니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남을 대접하지 않으면 남도 너를 대접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대접을 받고 싶다면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대접이란 먹을 것을 사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도 사랑받고 존중받고 귀히 여김받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무시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겠습니까? 내가 욕하는데 상대방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내가 남을 비방하고 깎아 내리는데 누가 나를 높여 주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높여주면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려면 서로 대접하되 내가 먼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11절에 보면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안다면 선한 나는 너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주겠느냐? 그리고 실제로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서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너희가 먹고 입고 잠자며 활동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거저 주었고, 나아가 독생자까지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귀하게 대접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 귀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삶의 터전을 삶고 있는 땅, 세상에 빛을 주고 따뜻하게 하여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태양, 물, 공기, 각종 동물이며 식물들, 지혜와 능력과 이성,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해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뭐 잘나고 똑똑하고 선하고 의롭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냥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아들 대접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 공로없이 귀한 대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높여주고 대접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올바른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한편으로는 서로 대접하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리고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합니까?

3.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마22:37,38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여러분, 보십시오. 첫째 계명이 뭡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그냥 대충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이고 의무이며,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 완전한 선과 진리와 의이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예우이며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거룩과 의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분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간적으로 제법 똑똑하고 위대하고 선한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면 정말 한없이 작은 자입니다.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한계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인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셔서 영원한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높고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몸과 마음과 정성과 심지어 목숨을 바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님께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정말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며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섬겨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당연한 태도요, 이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릴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올바른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사람을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올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생각 능력 지혜 경험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완전한 주권자이시며 능력자이시며 생명과 진리와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며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이웃을 사랑하며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사람을 바르게 귀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그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회만 열심히 섬기는 것만이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그러한 삶은 거룩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알면 당연히 받은 은혜를 삶속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의롭고 깨끗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고 아래로 사람을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경건이요, 거룩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마22:39,40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보십시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두 번째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레19:18절을 인용하신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있는 레19장의 말씀은 한마디로 성도의 거룩한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레19: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즉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자녀다. 그러므로 너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면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데 거기에 보면 ‘네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헛것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라. 곡물을 거둘 때에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 불의를 행하지 말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등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고,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거짓과 도적질과 불의를 버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깨끗하게 진실하게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마땅한 태도이고 서로가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야 하는데 특별히 여러분, 먼저 가족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족은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귀한 이웃이 아닙니까? 그러면 먼 이웃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면 가족은 얼마나 더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이웃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가족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함으로 서로에게 정말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족 못지않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해야 할 이웃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물론 성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형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똑같은 아버지를 섬기면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엡2:19절에서는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권속이요, 형제이면 얼마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살아간다면 교회에서 얼마나 주님의 향기가 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이루어져가겠습니까?

그런데 근간에 보면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높여주고 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싸우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는 일이므로 우리는 절대로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귀하게 여기고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빛을 비추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섬기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귀하게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을 정말 서로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음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성도들간에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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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앞을 가리면

 

 

어느 농부의 집에 암탉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 암탉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며 키웠답니다.
통통하고 건강한 암탉은 날마다 주인에게 신선한 계란을 하나씩 낳아 주었습니다.
암탉이 계란을 낳으면 주인은 그 계란으로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계란을 모아서 시장에 내다 팔아서 다른 물건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암탉이 낳은 계란은 알이 크고 맛이 좋았기 때문에 특별히 비싼 값에 팔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주인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암탉이 계란을 하루에 한번 낳으니까 계란 반찬을 하루에 한번밖에 먹을 수 없구먼.
며칠 동안 모아도 시장에 갖다 팔면 얼마 되지 않아.
암탉이 알을 좀 더 많이 낳게 하는 방법은 없나?"

주인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고 자기 무릎을 치면서 좋아라 했습니다.
"그래, 먹이를 두 배로 주면 계란도 두 배로 낳을 거 아니야."
주인은 암탉에게 먹이를 두 배로 많이 주었습니다.
암탉은 살찌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이제 몸이 불었으니 알도 많이 낳겠구먼."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살이 찐 암탉은 너무 살쪄서 하루에 하나씩 낳던 계란조차 낳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농부가 자기가 기르는 거위가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알을 낳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좋아서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거위는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황금 알을 낳아 주었습니다.
농부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거위 우리로 달려가서 황금 알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농부는 놀라울 만큼 굉장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늘어가면서 농부는 더욱 욕심이 생겨나고 성급해졌습니다.
농부는 매일 하나씩 낳는 황금 알을 기다릴 수 없어서 거위를 죽여 한꺼번에 모든 황금 알을 얻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위를 죽이고 배를 갈랐는데 뱃속에는 황금 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농부는 더 이상 황금 알을 얻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농부의 성급함과 지나친 욕심 곧 탐욕은 결국 그에게 찾아온 복을 걷어차 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야고보는 약1;14-15절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빌4;11-13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딤전6;6-10절에서는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자족할 수 있는 마음,
지족할 수 있는 믿음이 우리들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면 불만족이 생겨나고
원망과 불평이 생겨나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인간적인 욕심이나 탐욕이 우리들의 앞을 가리게 됩니다.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골3;5)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적인 욕심, 탐욕, 탐심에 의하여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마저 빼앗기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욕심이 우리 마음의 문을, 영혼의 문을, 생각의 문을 가려버리면 우리들은 불행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를 이웃들과 나누고 베풀면서 더욱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과 긍휼과 축복은 나눠주면 줄수록 없어지거나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풍성해지는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6;37-38절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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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예배는 우상숭배입니다.

  

 

추모예배에 대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함과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글을 올립니 다. 기독인들은 아무생각없이 추도식을 드리고 있습 니다. 부모가 훌륭한 삶을 사셨기에 그분의 발자 취를 본받기위해서, 친목의 시간을 가지고, 고향을 찾 아 사셨던 산천도 둘러보는것에는 충분히 공감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뜻을 잘못인식하고 있는것 같아 자료를 준비하여 글을 올렸습니다.

 

추도예배, 추모예배, 차례 등 일종의 제례(祭禮) 행위들이 한국교회가 전통문화와 어울려 무비판적으로 드려지고 있습니다. 성경말씀그대로 지켜며 살아야 하는데 어떤 뚜 렷한 예배규정없이 기독교 예배정신을 흐려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렇다 할 성경적인 가르침을 내놓지 않고 관행대로 , 기성교회가 해왔던 대로 비성경적인 우상숭배 행위를 하고 있음에 고민하며 주님보 시기에 죄악을 행하는 것은 아닌가 염려하고 있 습니다.

 

첫째: 추도나 추모는 어원적(語原的) 의미에서 비성경적입니다.

 

제사(祭祀): ()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차려놓고 의식을 베푸는 것. 추도(追悼):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슬퍼하는 것. 추모(追慕): 죽은 사람을 사모하는것. 차례(茶禮): 음력 매달 초하루 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지내는 제사.

 

한결같이 죽은 사람과 그의 혼령을 대상으로 애 도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예()를 갖추라는 말이 없으며, 또한 죽은 것에 대한 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학적 의미에서 볼 때 비성경적입니다. 십계명에는 예배의 대상이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명시합니다.(1계명) 또한 예배의 방법(2계명), 예배의 정신(3계 명)에서 어떤 우상적인 것도 금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십 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사는 물론이고 추도, 추모, 차례 예배 등은 모두가 죽은 자를 대상으로 한 예배이 므로 십계명을 위반하는 죄인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 엎드림, 경배, 따름, 섬김)라는 술어는 확실히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이나 사람에 게 적용될 수 없는 말입니다.

 

셋째: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해 이교도처럼 슬퍼함 을 금합니다. (19:28)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야훼니라. "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네째: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한 예물헌납도 금합니 다. (26: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 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 님 야훼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 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다섯째: 성경은 죽은 자에게 제사함을 바알브올 을 숭배하는 죄라고 단언합니다. (시편106:28)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여섯째: 성경은 우상과 관계되는 모든 종교행위 를 저주하고 심판하실 것을 단언합니다. (22:18)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야 훼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 니라’ (18:11,12)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 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야훼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야훼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 아내시느니라.

 

(20:2, 27)"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 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 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 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하는 예배라는 거룩한 술어를 추도예배, 추모예배, 혹은 차례예배라는 기이한 명목 아래 미화시켜 이미 죽은 자를 사모 하고 명복을 빌고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의 절대 주권영역이라는 진리 앞 에 명백히 죄악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발인예배, 장례예배는 한번에 한하여 드려야 하 며 지속적으로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추모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매년 한번씩 자식 의 도리라며 기념일을 만들어 수십년간 추모예 배를 드린다는것은 부모가 우상이 될수 있다는 것과 신앙생활의 모본을 보여주시다가 천국에 가셔서 하나님께 영원한 경배를 드리고 있는 부모님 또 한 절기처럼 자신을 기념하며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 외에 죽은자와 바꿀 수 없으며, 또한 순교자나 성자에 대한 추도 추모예배 역시 비성경적, 반기독교 윤리행위임 을 기억하고 이에 대한 깊이있는 신학자들과 주 의종들의 기도와 고민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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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한  삶이란? 

 

 


말씀 : 엡 5:18 ; 갈 5:19-21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묵상 :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우리는 우리의 일터에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할 수 있을까요? 일단 우리 크리스천들은 일하는 사람들로서 업무를 잘해야 합니다. 늘 최고의 성과를 내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이 크리스천답게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고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애쓰는 태도 역시 크리스천답게 일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가 오늘 성령 충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은 직장 생활에서 업무보다 더 어렵다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할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성령 충만하면 어려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힘든 직장 생활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의 중요성을 바울에게 배워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과 6장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 이하에서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교훈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한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이 에베소서 5장 19절 이하에서 차례로 교회 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직장 생활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이 교회와 가정과 직장의 크리스천 트라이앵글에서 우리는 피차 복종하며 균형을 잘 유지해야 성령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요한 마당인 이 세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우리가 고민하다 보면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율법 아래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육체의 열매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의 열매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먼저 세상적인 육체의 열매를 이야기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이런 것들은 과일의 이름일 리는 없지만 그것이 열매를 맺으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생각 속에서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육체의 열매와 대조되는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성령 충만한 직업인은 일터에서 바로 이런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면 우리도 이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이 아홉 가지 열매들을 보면 우리 일터에서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캐릭터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런 사랑을 일터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일터는 분명히 달라집니다. 자신에게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은 항상 기쁨과 즐거운 미소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기분도 좋게 할 것이고 결국 일터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희락의 열매입니다.

화평의 성품을 보여 줄 때 우리는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습니다.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화를 자주 내어 주변 사람들이 조마조마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성령 충만하면 분노를 절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오래 참음의 열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감탄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서 하나님이 주신 재물과 인생의 자원들을 나누고 양선, 착한 성품을 드러내는 일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관계에서 신실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충성과 겸손하고 부드러운 온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절제하는 여러 미덕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일터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우리들의 변화로 인해 일터가 달라질 것입니다.

일터는 그저 내 일만 잘 하면 되는 곳이라고 치우친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업무는 관계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바람직한 관계를 잘 가져서 성령 충만한 일터를 만들어가겠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일터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겠습니다. 큰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작은 일부터 시도하겠습니다. 늘 성령의 열매를 생각하면서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할 곳입니다. 제가 관계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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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안에서 살아가는 방법 


1.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한다.

   세상에 많은 주제들이 있고 마음을 끌고 유혹하는 것들이 많을지라도 다 다루지도 말고 마음이 끌리지도 말려면 먼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제 일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한다.


2.  말씀과 기도를 하루에 아침에 한 시간 이상 한다.

  말씀은 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의 임재가 있도록 하는 것을 목 표로 한다. 하나님앞에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성경연구와 간구의 시간은 따로 연장하여 갖도록 한다.


3.  말씀충만은 성령충만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간다. 의로운 삶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데 이 삶이 성령충만을 유지하고 다시 받는 최적의 조건이다.

고넬료의 성령받은 사건을 생각할 것. 예수님을 전할 때에 의인이었던 고넬료는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을 받는다.


4. 날마다 말씀을 양식으로 먹으라.

먹지 않고 지내는 날이 없도록 하라.


5.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회개하고 이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으며 우리는  정결하여지고 그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선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의 대가이다. 선물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6. 언제나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성령의 역사속으로 들어간다.

성령의 다스리심안으로 들어간다. 나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고 열매맺게 된다.


이때에 성령의 주시는 방언을 하게 되는데 계속 방언을 한다.

이는 중보기도로서 마땅히 제사장이 해야하는 기도인 것이다.

사무엘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하였다. 이는 제사장으로서는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는 죄가 되는 것이다.


6.1 몸이 아픈 곳에, 무거운 곳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치유안에 거하라. 우리는 몸과 영과 혼이 다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7. 타인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라.

기도할 때에 타인이 생각나거든 그를 위하여 충분히 기도한다. 마음속에 되었다 할 때까지 기도한다.


8.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죄의 종이 되면 즉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를 헌신한다. 재헌신하는 것이다. 이는 죄를 지으면서 나를 죄의 종으로 내가 주었기 때문이다.


9. 평안과 기쁨을 확인하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내가 임하여 있다는 증거이다.


평안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이며 기쁨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증거이다. 이때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잘 될 것이다.

 

10. 시대를 분별하라.

유혹케 하는 것과 귀신의 가르침이 횡행하는 시대이다. 교회의 부정적 운명론에 빠지지 말라.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고 잘못된 것이다.


10.1  이제는 전도를 하는 시대가 아닌 닫힌 문의 시대라고 하는 자들도 있다. 개척교회가 너무 어렵기만 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환란 때에 교회가 고통을 당한다고만 주장하는 이들은 너무 부정적이다. 교회는 승리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10.2  교회의 통합을 말하면서 혼합주의 정책을 쓰는 것은 사단의 전술이다. 1년 전인가 2005년 세계일보에 “내 것 고집버려야 종교갈등 치유“라는 기사의 글이 실렸는데 어떤 신부가 종교혼합정책을 쓰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성당에 봉축 연등을 내걸고 108배 행사를 갖는 등 대거 고산성당 정 홍규 (51세) 신부의 종교간 벽 허물기 노력이 보도된적이 있다. 그는 대구 지하철 참사희생자를 위하여 장승굿을 치르기 위하여 승려와도 만났다고 하는 신부이다.  이것은 귀신들린 행위밖에는 안된다.


성경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십계명에 나온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안에서나 하는 이야기지 그런 구태의연한 소리 하지 마쇼“라고 세상은 말한다. 그렇다. 세상은 우상숭배라고 하지 않고 타종교라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임이 분명하지 않는가? 당신이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구분은 당연히 되어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엄청 잘못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신부는 굿까지 하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뒤에 사단과 귀신의 세력이 주장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굿을 하자고 찾아다니는 것은 끌려다니는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는 못하고 오히려 이미 첩자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내 것을 가지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외쳐야 하며 그것으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의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면 목숨을 걸어도 되지만 말씀의 정확한 해석이 없다면 목숨을 걸라고 해도 걸 확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개신교 안에서도 이러한 구분이 없고 유야 무야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2005년 8월 옥 한흠 목사님이 승려를 만났다고 한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성경해석이 부족하여 잘못 말한 것이 있다고 하자.(휴거의 시기에 대하여도 말한 바가 있다가 취소함.)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고 올바르게 가르친다는 소문이 난 옥한흠 목사님이 대화를 하기 위하여 승려를 초빙하였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가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면  옥 목사님은 당연히 구원의 문제부터 짚고 나가야 한다. 사회의 정화나 이런 문제를 같이 논의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혼합주의는 배타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라 정결한 삶의 반대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신 신앙과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신앙의 어떤 노력이나 방식으로 취득하지 않는다.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고 올바로 할 때에 나를 헌신할 때에 종으로 드릴 때에 목숨을 바칠 때에 성령충만을 주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성령충만을 주신다.


11.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라.

오늘날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주제들이 있다. 배울 것, 볼 것, 구경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하여 그분과의 교제를 가장 중요시하고 실제적으로 교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맛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단순하고 맹목적이라고 사람들이 말할지 몰라도 최소한 맹목적인 것은 아니다. 눈감은 장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한 것은 좋은 것이다. 성령 안에서만 거하라. 그것이 답이다.


말씀대로 믿어라. 사단은 이제 세부적으로 이래 저래 말씀을 안 믿고 부정하고 의심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정확히 해석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12. 교회와 사역자는 신앙안에서도 잘못된 것들은 다 구별하고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부흥을 말씀하시는데 해골조차 살리신다.  이때에 하나님은 에스겔 44장에서 제사장들을 다시 세워주시고 교육하시는데 그중에 부과된 것이 다음이다.


에스겔

44: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1) 거룩과 속된 것을 구별하라.  : 거룩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속된 것은 피조물의 세계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며 그분을 거룩히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되는 대로 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면 전부라는 생각을 떠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것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위임명령에 포함된 것이다.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으니 세상이 갈 길을 몰라 죄악속에서 헤미이는 것이다.


2)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부정하게 사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부정은 정결하지 않은 곧 더러운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씻고나서 그는 정결하게 되어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고 그렇게 하여 그는 성령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모든 부정한 생각을 버리고, 부정한 영(귀신)을 쫓아내고 부정한 영상들을 버리고 부정한 행위와 습관들을 버리고 의롭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13.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삶을 유지하라.

계시록 14장의 144000의 기준이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는데 또한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만을 말하는 것이다.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니고 우상숭배의 하나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이 말을 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안에서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진리를 듣게 된다.

다 같이 한 사회, 행복한 나라를 위하여 사는데....... 라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가 아니다. 기독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싸우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회개할 사람들이 회개하라는 것이다.

 

14. 나의 약점을 보강하고 약점 때문에 넘어지지 않게 하라.


자신을 관리해야 한다. 자기가 죄를 짓지 귀신이 원인이 아니다. 귀신과 사단은 유혹을 하지만 사실상 죄를 짓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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