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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 죽음을 이긴 사랑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메노파 교도의 가정에서 1858년에 태어나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아펜젤러는 성서를 번역하였으며(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감리교 인쇄 출판소를 확장하여 각종 선교잡지를 발행하기도 했고,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한편 1895년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정동교회에서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지회가 결성되었는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중요한 인물들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서울, 평야, 인천, 수원, 공주, 대구, 전주 등지로 여행하며 전도활동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의 아펜젤러의 사역은 그의 사역기간 5년동안 체중이 180파운드에서 131파운드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정열적인 것이었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 아펜젤러와 그의 조수겸 비서 조한규, 서울에 있던 장로교학생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학생 등과 함께 목포로 항해하는 오사카 선박회사의 쿠마가와 마루호에 승선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항해하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키소가와로 이름 붙여진 다른 선박과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아펜젤러의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또한 이화학당의 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아펜젤러 기념비가 정동교회에 세워졌고,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아직 어둠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의 빛으로 밝히기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사르던 선교사 아펜젤러는 결국 이 나라의 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의 죽음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오늘 이 땅에는 1200만이라는 열매가 맺혀졌다.
이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로부터 얻은 빚을 갚을 때이다.
그 빚을 갚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아펜젤러,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편에 앉히시고 그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셨을 것이 분명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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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 구약

 

 

창세기말라기 완역, 10년 땀이 필요했다

 

국내에서 최초의 신약 번역본인 신약젼셔1900년 출판된 후 자연스럽게 구약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구약 시편이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책이 1898년 삼문출판사가 펴낸 피터스(Alexander A Pieters·彼得·18721958)의 사역본 시편촬요였다. ‘촬요(撮要)’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시편 전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저주시편을 제외한 62편만을 번역한 역본이지만 한국에서의 구약번역의 효시가 된다. 시편은 구약 일부가 역간되기까지 8년간 유일한 구약역본으로 사용됐다. 피터스는 한국에 온 유일한 유대인 선교사로서 시편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도 구약성경 번역위원, 혹은 수정위원으로 활동했다.

   

구약성경 번역 착수

 

1900년 이후 구약성경도 분담하여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아펜젤러는 창세기를, 언더우드는 시편을, 게일은 잠언과 사무엘서를, 스크랜튼은 이사야서를, 레이놀즈는 여호수아서를 맡았다. 그러나 번역작업은 지체되거나 번역자들이 교체되기도 했다. 또 하디(R A Hardie) 마펫(S A Moffett) 노블(W A Noble) 등의 선교사들이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단기간 일하고 사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성경 번역을 신속히 추진하기 위해 레이놀즈와 두 사람의 한국인 김정삼과 이승두에게 구약성경 번역 책임을 일임했다. 두 한국인이 공식적인 성경번역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레이놀즈가 거주하던 전주에서 번역작업에 몰두했다.

 

구약번역 작업은 10여년이 소요돼 191042일 드디어 번역을 완료했다. 그 결과 1911년에 이미 출판된 신약성경과 구약이 묶어져 셩경젼셔라는 이름으로 빛을 보게 됐다. 물론 구약젼셔가 출판되기 이전 낱권으로 창세기, 시편(1906), 잠언, 출애굽기, 사무엘전후서, 말라기(1907), 열왕기상하, 이사야서 번역본(1908)이 출판됐으나 이제 이 모든 책들이 한권으로 묶어 구약젼서로 간행된 것이다. 미국성서공회는 이 책을 상(창세기역대하), (에스라말라기) 두 권으로 출판했다. 이것이 한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성경전서다. 그래서 올해는 한글성경 완역 100주년이 된다. 이 번역본은 성경원문을 참고했지만 1901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표준역(ASV)을 주로 참고했고, 한문성경을 참고한 흔적도 짙다. 이 번역이 이루어지기까지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그리고 한국인 김정삼, 이승두의 노고가 컸다.

 

구약성경 개역 착수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성경도 완전한 것은 없다. 어떤 이들은 흠정역 성경은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만 이 책에도 여러 가지 오류가 있었고 계속적인 수정 작업이 필요했다. 최초의 한글성경 완역본 성경젼서가 출간되자마자 수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특히 구약개역이 시급했으므로 1911구약 개역자회(The Board of Revisers)’를 구성했다. 개역작업은 긴즈버그(C D Ginsburg·1908)가 편집한 대영성서공회 발행의 히브리어 성경이 사용됐다. 이 작업에 헌신한 이들이 언더우드와 게일 그리고 레이놀즈였다. 성경언어에 해박했던 레이놀즈는 성경번역 작업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 사임했다. 언더우드는 1916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써 개역작업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24년 이후 레이놀즈가 다시 개역위원으로 동참했고, 후에는 감리교의 케이블(E M Cable), 하디, 북장로교의 베어드(W M Baird), 호주장로교의 엥겔(G Engel) 등이 위원으로 활동했다.

 

언더우드 사후 개역자회 회장이었던 게일은 조선어풍 번역을 지향했으나 자유역을 지향한다는 오해와 반발로 개역위원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구약성경 번역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25년 기독교창문사를 통해 신역신구약전서(新譯新舊約全書)’를 펴냈다. 한국인 조력자 이원모(李源謨), 이창직(李昌稙), 이교승(李敎承)의 도움이 컸다.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역(私譯) 성경전서다. 비록 게일은 개역위원직을 사임했으나 한국성경 번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성경개역 출간

 

구약성경 개역작업은 지체됐으나 피터스, 베어드, 한국인 남궁혁, 김관식, 김인준, 이원모 등이 가담해 이 일을 추진, 무려 26년에 걸친 작업을 완료하고 마침내 1936구약젼셔 개역본이 간행됐다. 이 개역본을 일부 수정해 1938년에는 보다 완전한 번역본을 출판했다. 신약개역작업은 1926신약개역자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됐는데, 스톡스(M B Stokes), (S D Winn), 로스(C Ross), 커닝햄(F W Cunningham), 크레인(J C Crane), 레이놀즈 등에 의해 추진됐다. 대본으로는 네슬레의 1898년판 희랍어 성경이 사용됐다. 1937년 개정을 완료했고 1938신약개역이란 이름으로 발간됐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합본돼 성경개역1938년에 출간됐다.

 

이 공인역 개정 성경이 1952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해 수정을 거친 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란 이름으로 간행됐다. 1956년 다시 새로운 맞춤법에 따라 일부 수정됐고, 1961년에는 815개소의 자구수정을 거쳤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는 성경이 된 것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24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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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신약

 

언더우드·아펜젤러, 성경번역 첫 단추 끼우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경이 전래된 때는 1816(순조 16) 95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 명령을 받은 해안 탐사선 알레스트호와 리라호가 충남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갈곶)에 상륙했는데, 함장 머레이 맥스웰과 바질 홀 대령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에게 화려한 장정의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의 성경인데, 흠정역(KJV) 성경이었을 것이다.

 

 

그 후 18327월 귀츨라프와 186566년 토마스에 의해 중국어 성경이 조선에 소개됐다. 성경의 도래와 함께 1880년대 만주와 일본에서는 은밀하게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경이 번역되었고 오늘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국내 첫 번역성경은?

 

내한한 선교사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성경 번역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트랜톤, 그리고 헤론은 188727일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번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들이 펴낸 첫 성경이 1887년 간행된 마가의 젼한복음셔 언해였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1885)의 개역본이었다. 한글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잠정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 차원에서 역간 작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으나 아펜젤러의 보라달로마인셔(保羅達羅馬人書)’(1890), ‘마태복음젼’(1892), 게일의 사도행젼’(1892), 펜윅(M C Fenwick)요한복음젼등 사역본(私譯本)이 발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성서공회는 한국성서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요청했다. 번역보다는 수정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가 로스역 누가복음을 수정했는데, 이것이 1890년에 나온 누가복음전이다. 수정본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성서번역위원회는 국내에서 완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이 일이 위임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지연되었고 후에는 언더우드 대신 게일이, 아펜젤러 대신 스크랜톤이 이 일을 추진해 1892120마태복음전이 나왔다. 이 책은 기존 성경의 수정본이 아니라 국내에서 번역된 첫 한국어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30만부 간행됐다.

 

성경번역자회의 조직과 열매

 

한국어 성경번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는 18935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립한 일이다.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번역위원이었고, 1895년에는 레이놀즈가 추가됐다.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된 일 또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번역위원들은 분배된 신약 책들을 그리스어 성경과 영어개역성경(RV)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 및 일본어 성경 대본을 참고해 선교사들을 돕고, 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다시 원번역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한 뒤 전체 번역자들이 참가하는 번역자회에서 토론과 표결을 거쳐 번역자회에서 통과된 대본을 시안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이런 번역 과정이 충실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간행됐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1892년 번역한 마태복음젼을 번역자회가 시안본으로 승인한 것이지만 마가복음(아펜젤러), 요한복음(게일), 사도행전(게일)은 개인 역본이었다. 곧 누가복음(1896),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이상 1897),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1, 2, 3서와 유다서(이상 1898), 에베소서(1899), 그리고 요한계시록(1900)이 번역됐다. 신약의 모든 책이 번역되자 낱권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됐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1900).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안본이었으나 그 이후의 책들은 개인 역본들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초로 신약을 완역한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기념해 190099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약성경 봉헌감사예배가 드려졌다.

 

성경 번역 헌신했던 아펜젤러, 결국 순직

 

비록 신약전서가 출판되었으나 고린도전서 이후의 책들은 번역위원회의 수정이나 독회를 거치지 않은 개인역에 불과했으므로 출판과 함께 수정 작업이 시작됐다. 이 일은 아펜젤러, 레이놀즈, 그리고 게일에게 위임됐다. 이 작업을 위해 아펜젤러는 인천을 출발해 번역자회가 모이는 목포로 가던 중 조난 사고로 한국인 조사 조성규(趙成奎, 趙漢奎라고도 불림)와 함께 순직했다. 1902611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는 게일과 언더우드를, 남장로교는 레이놀즈를 성경번역 사업에 전념토록 배려했다. 결국 이 세 사람의 노고로 수정 작업이 추진돼 1906년에는 성경번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서가 출판됐다. 이 성경이 1938개역신약성서가 출판되기까지 한국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경이다. 성경번역 사업은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한국인 조력자의 수고 또한 적지 않았다. 아펜젤러의 어학선생이자 조사였던 조성규, 게일의 일생 동안의 동료였던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언더우드의 조사였던 송덕조(宋德祚), 레이놀드의 조사였던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 등이 바로 그들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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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초기 선교정책: 선교지 분담 정책

 

 

 

복음 효율화 위해 교파별로 선교지 나눠

 

알렌의 입국 후 여러 선교단체가 한국에서 일하게 되자 특정 지역의 집중화를 막고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위한 선교부 간의 조정이 필요했다. 이런 배경에서 선교지역 분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복수의 선교부가 한 지역에서 일하게 될 때 야기될 수 있는 불필요한 대립이나 경쟁을 막고 인적·재정적 낭비를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아펜젤러는 이미 1888년 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 선교부 간의 선교지 분담을 제안한 바 있고, 미국남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했을 때(1892)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간에도 선교지 분담 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 이런 점은 합리적인 선교지역 분할이 긴요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선교지 분담에 가장 적극적인 교파가 장로교였다. 미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선교부의 연합체인 ‘장로교 공의회’는 선교지 분담을 포함하여 한국에서는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도록 힘쓴다는 점에 합의했다.

후에 호주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교회가 이 일에 동참하게 된다. 장로교공의회는 장로교치리회가 조직되기 이전까지 상회(上會) 역할을 했다. 이 장로교공의회는 1893년 1월 회원 선교부 간 합의를 거쳐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 남장로교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와 충청도,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 지방을 맡기로 했다. 부산과 경남지방은 호주와 미국북장로교 공동구역으로 했다.

 

미국북장로교와 북감리회의 선교지 분담안

 

1893년 6월에는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와 북감리회 선교부 간의 선교지 분담협의가 이루어졌다. 이 분담안은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나 개항장(開港場)은 공동선교구역으로 하고, 5000명 이하의 지역의 경우 이미 선교를 개시한 선교부의 선취권을 인정해 주고 타 선교부는 가능한 한 이 지역을 피하고 미점유지역 선교를 권장한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또 교회권징은 상호 인정해 주고,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도들의 교단 이동을 인정하되 이명서가 없는 이를 영입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이런 합의에 대해 감리교 감독 포스터(R S Foster)가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리교에서 공식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회도 이 협정을 존중했다.

 

선교지역 분담 논의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경남지방에서는 1900년부터 미북장로교와 호주선교부 간의 협의를 시작하여 1903년 10월 20일 양 선교부 간의 지역조정에 합의하였다. 흔히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구분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경남지역의 남서쪽, 곧 울산 기장 언양 양산 거제 진해 고성 지역은 호주장로교가, 동북쪽, 곧 김해 웅천 밀양 영산 창녕 칠원 창원 지역은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구집중지역인 부산 동래 마산은 양 선교부의 공동구역으로 하였다. 이때의 지역분담에 대해 왕길지가 그린 분담도를 필자가 보관하고 있다. 협의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고 북장로교는 1913년 말 부산·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장감연합공의회 조직

 

1905년에는 장감연합공의회가 조직되어 그동안 미온적이었던 감리교와도 선교지역 분담에 대해 협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커다란 발전이었다. 일단 평안북도 지역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북장로교는 영변 지역을 북감리교에 이양하는 대신 북감리교는 안주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에 이양했다. 각 선교부의 사역이 확대되고 새로운 선교사들이 내한하게 되자 선교지 조정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런 필요에 따라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논의가 계속되었고, 1909년 9월 16일과 17일 양일간 모인 ‘지역분담협정위원회’에서는 주한 미국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등 4개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북감리회와 남감리회 등 2개 감리교 선교부, 곧 6개 선교부가 참여하는 선교지 분담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협정은 선교부 간의 상호존중과 양보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교계예양(敎界禮讓)’ 혹은 ‘예양협정(禮讓協定·Comity Arrangement)’이라고 불리고 있다. 몇 차례의 조정이 뒤따랐으나 대략 다음과 같이 분할되었다. 미국 북장로교는 강계 선천 평양 재령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일부 지역과 경상북도 지방을 맡았고,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대전 부여 등 충청남도 일부와 제주도를,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 지방을, 그리고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부산 진주 마산 거창 통영 등 경남지방을 맡았다.

또 미 북감리교 선교부는 영변 해주 평양 서울 인천 원주 영월 충주 원주 등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북 강원도 일부지역을, 남감리회는 원산 서울 송도(개성) 춘천 등 함남 경기 강원 일부지역을 각각 담당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처럼 서울 평양 원산 등 세 도시 지역은 두개 이상의 선교부가 공동으로 선교한 곳이고, 나머지 지방은 대체로 중복을 피하도록 했다. 다른 교파들, 곧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그리고 성공회 등은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 교파는 자유롭게 선교하였다.

이 선교지 분할정책은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적 인적 낭비를 줄이고 한국을 효과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한 선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으나 해당 선교회의 신학적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신학을 이식하였고, 1930년대의 지방색에 의한 교권 대립, 해방 후 교회분열의 원인(遠因)이 되었다는 지적은 타당성이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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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세워지는 교회들

 

1884년 매서인 서상륜에 의해 순수하게 한국인에 의한 한국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알려진 황해도 소래교회, 후에 한옥으로 신축되었다.

 

 

  화란의 칼뱅주의 신학자인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8-1676)교회의 정치’(Politica Ecclesiastica)에서 선교의 목적을 이방인의 회심(conversio gentium)과 교회의 설립(plantatio ecclesiae)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선교 개념은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광범위한 것이었다. 선교란 기독교 복음운동 전반을 의미했다. 결국 선교란 구도자를 회심하게 하고 교회를 설립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보에티우스가 말하는 선교의 목적은 고전적인 가르침으로 인식돼 왔다.

 

1. 한국 최초교회, 황해도 소래교회

 

한국에서도 한국인의 구도적 활동과 함께 선교사의 내한으로 복음이 전파되자 차츰 회심자가 생겨나게 되었고,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기

 

1887년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 서울 새문안교회

 

   

시작했다. 이미 만주의 한인촌에서 회심자가 생겨나고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없지 않으나, 한국에서 최초의 교회는 1884년에 설립된 소래교회였다.

 

만주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된 서상륜(徐相崙, 1848-1926)은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성경 번역 작업에 깊이 관여하였고, 1882년에 역간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예수셩교 요안 복음젼셔를 가지고 압록강변에서 전도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1883년에는 이 복음서를 가지고 의주(義州)로 돌아왔으나, 위험을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徐景祚, 1852-1938)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으로 이주해 복음서를 반포하였다. 그 결과 이곳에 한국에서의 최초 교회인 송천교회(松川敎會) 곧 소래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 교회 설립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으나 한국의 최초 교회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서상륜과 동생 서경조는 소래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소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선교부에서 건축기금을 후원하고자 했으나 소래교회 신자들은 우리가 우리의 예배당을 세우면서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후세에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서양의 등인 램프 5개를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온 동리를 밝혔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소래교회가 설립된 후 의주, 정주, 강계 등 북한 지역으로도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소래 교회의 서상륜 장로와 가족들 , 동생인 서경조 목사( 한국 최초의 목사 중 1)

 

 

 

2. 한국 교회 최초의 세례, 장로 피택, 성찬식

 

서울에서도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1886711일 알렌의 어학선생이었던 노춘경(盧春京)은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국내에서의 첫 세례였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887123일에는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 세 사람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 송천에 있던 서상륜이 서울로 옮겨와 전도한 결과로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자 1887927일 서울에서 첫 교회가 설립됐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두 번째 개신교회인 새문안교회였다. 당시 신자는 14명이었는데, 다수가 서상륜의 전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그 다음 주일 서상륜과 백홍준은 한국 최초로 장로로 피택되었다.

 

그해 1223일에는 7명의 세례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성찬식이 거행됐는데, 이것이 첫 장로교 성찬식이었다. 곧이어 남대문교회(1887), 승동교회(1893), 연동교회(1894) 등 장로교회가 설립됐다.

1887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서울 정동제일교회

   

 

 

3. 기도처로 시작한 정동제일교회

 

서울 정동에 정주한 아펜젤러는 1887724일 배재학당의 박중상에게, 102일에는 배재학당의 한용경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회심자들이 생겨나게 되자 공식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그 이전에 이미 자신의 집에서 집회를 해왔으나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인원이 증가하자 1887109베델 기도소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세 번째 개신교회이자 첫 감리교회였다.

 

아펜젤러는 1016일에는 만주에서 온 매서(賣書) 전도자 최성균(崔成均)의 아내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여성은 한국에서의 첫 여성 수세자로 알려져 있다. 1023일에는 성명 미상의 강씨, 장점화, 한용경, 그리고 최성균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감리교 첫 성찬식이 거행됐다. 정동교회에 이어 아현교회의 전신인 서문 밖 애오개교회와 상동교회(1888. 12), 동대문교회와 중앙교회(1890) 등의 감리교회가 서울에 설립됐다.

1893년에 세워진 북한의 모 교회 장대현교회(널다리골교회)

   

 

4. 북한의 모()교회, 장대현교회

 

평양에는 18936월 장대현교회가 설립됐다.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평양지부 개척자로 임명된 마펫(Samuel Moffett)은 한석진, 최치량 등 7명의 신자들과 평양 널다리골의 한옥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널다리골교회로 불렸다. 1896년에는 300여명의 교인으로 증가했고, 19006월에는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대현교회로 개명했다. 이 교회를 선교사들은 평양중앙교회라고 불렀다. 평양과 평안도지방 첫 교회였다.

 

이 교회를 모체로 평양의 남문밖교회(1903), 창동 교회(1905), 산정현교회(1906), 서문밖교회(1909) 그 리고 외성교회(1911)가 설립되었다. 그 후 부산에서 는 부산진교회(1892), 초량교회(1893), 제일영도교회 (1894)가 세워졌고, 대구에서는 대구제일교회(1893) 가 설립됐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한국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러한 교회설립은 곧 한국 사회변화의 시작이었다. 세워진 교회들을 통해 학교와 병원과 양로원 등의 사회사업이 시작되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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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각 교단, 한국에 선교사 파송

 

18849월 알렌의 입국을 시작으로 외국의 한국 파송이 시작된다. 첫 선교부는 1789년 조직된 미국 북장로교회(PCUSA,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로서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 북장로교는 알렌에 이어 언더우드 선교사를 파송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于, 1859-1916)188545일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와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당시 국내 정세가 불안해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의 만류로 아펜젤러 부부는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하게 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비록 교파는 달랐으나 일생을 통해 가장 친근한 선교의 반려자로서 상호 협력했다. 영국 런던 출생인 언더우드는 13세세 때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뉴저지 주에 있는 화란개혁교회의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과 호주 각 교단이 파송한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우로부터 좌로) : 미국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 미국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 호주 장로교 데이비스 선교사

 

한국에 파송 된 첫 목사요 선교사였다. 그해 6월에는 의사 헤론(Dr. John Heron)이 내한했고,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됐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개척전도, 의료,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마포삼열(Rev. S. A. Moffett, 1890), 배위량(Rev. W. M. Baird, 1891), 소안론(Rev. W. L. Swallen, 1892), 이길함(Rev. Graham Lee, 1892) 선교사 등이 내한하여 평양과 부산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선교지역을 확대해 갔다. 또 애덤스(Rev. J. E. Adams·1895) 목사 부부는 대구에, 밀러(Rev. F. S. Miller, 1892) 목사는 청주에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그 후 계속하여 선천(1901), 안동(1909) 등지에 선교지부가 설립됐다.

 

2. 호주 장로교 한국에 선교사 파송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 번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 장로교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CV,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한국 선교는 188910월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 목사와 그의 누이 데이비스(Mary T. Davies)에 의해 시작됐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해 귀국 후 멜버른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오필드 문법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일했다. 그는 다시 인도로 가고자 했으나 한국 선교의 긴박성을 알리는 북중국 주재 영국교회 선교사 월프(John R Wolfe) 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를 자원하게 됐다. 성공회에 속해 있던 그는 장로교로 이적한 후 에든버러 뉴칼리지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1889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빅토리아주

교파별 한국선교 구역분할

1차 합의 : 1892, 미국 북장, 남장

2차 합의 : 1909, 미국 북장, 남장, 남감, 북감

 

미국 남 감리교

강원도 2/3, 연안, 해주, 원산 이남지역

 

미국 북 감리교

평북, 대천, 박천, 연변, 강원도 1/3, 서울 남부, 충남지역

기타 / 5천 명 이상의 읍 지역은 장, 감 두 교파가 함께 전도하여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했고, 1936년까지 지켜졌다.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 지원으로 그는 102일 부산을 거쳐 104일 그의 누이와 함께 제물포로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언더우드, 헤론 등과 함께 5개월간 지내며 한국어를 습득했다.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한 데이비스는 18903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20일간 500에 이르는 여행을 마치고 44일 부산에 도착했으나 천연두와 폐렴에 감염돼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45일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빅토리아주 장로교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연합회(PWMU)는 한국 선교를 계속 지원했다. 그 결과 189110월에는 매카이(Rev. J Mackay) 목사 부부와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 곧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퍼셋(M. Fawcett) 5명이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부산을 거점으로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다. 후일 호주 장로교는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순회전도 일행

 

부산,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등 5개 지역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자선, 의료 활동을 전개했다.

 

3.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1864년 조직된 미국 남장로교회(PCUS·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는 북장로교 보다 8년 늦게 한국 선교에 동참했다. 189110월 언더우드가 첫 안식년으로 귀국해 내슈빌에서 모인 외국 선교를 위한 신학교협의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 연차대회에서 한국 선교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미국 벤더빌트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윤치호도 한국 선교를 호소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매코믹신학교 학생이었던 테이트(Lewis Boyd Tate)와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정킨(William M Junkin),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등이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처음 남장로교 선교부는 한국 선교 계획이 없었으나 이들의 자원과 선교기금의 후원으로 이들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했다. 이들은 테이트(Miss Mattie Tate),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볼링(Miss Pasty Bolling) 등 미혼 여선교사들과 함께 1892113일 입국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후 전주에 첫 선교부를 설치했다. 이후 광주, 군산, 목포, 순천 등지에도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자선사업 등을 전개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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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는 1884년 6월에, 미국 감리교선교사 R.S. 매클레이가 서울에 와서 1884년 7월 3일 고종으로부터 선교 개시의 허가를 받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를 시작하였다. 공식적인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장로교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내한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아펜젤러가 학생 6명을 데리고 배재학당()을 개교하였으며 스크랜턴은 같은 해 9월 처음으로 서울 정동()에 교회와 병원을 열고, 그의 부인은 단 1명의 여학생으로써 1886년에 이화학당()을 개설하였다. 1887년 1월 정동교회에 처음 한국에서 주일학교()를 열었고, 12월에는 북감리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남감리회도 독자적으로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감리교회의 신앙은 1930년 발표한 기독교 조선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1997년 새롭게 신앙고백을 하고, 이 사회에 대한 봉사와 책임의지를 발표한 사회신경 역시 현대적 의의를 담아 발표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WCC)에 가입되어 있다.

 

현재의 한국 감리교는 4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와, 총회 밑에 5개 연회(서울·중부·동부·남부·삼남)가 있고 연회 밑에 100여 개 지방회가 있는데 평균 한 지방회에 30여 개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1983).

현재 총회는 100-101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4-8 감리회관(광화문빌딩) 16층에 두고 있다. 감리교는 장로교와 함께 역사가 제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많은 교회를 가지고 있다.

 

 

    ○ 요한웨슬리

    ○ 아펜젤러

    ○ 프란시스 애즈버리

 

    ○ 감리교

 

    ○ 기독교대한감리회 약사

    ○ 감리교회 조직

    ○ 교리적 선언

    ○ 사회신경

 

    ○ 엡윗청년회

 

    ○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선교국

    ○ 기독교타임즈

 

   ○ 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목원대학교

 

   ○ 교회

          내리교회(1885. 7.25)  

          정동제일교회(1885.10.11)

          상동교회(1888.10. 9)

          강화교산교회(1893)

          부천제일교회(소사교회, 1930. 11. 1)

 

출처 : http://kcm.kr/dic_view.php?nid=39429&page=1&kword=&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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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특집다큐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이수정 [영상보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이수정

 

 1882년 미국과 영국에 이어 1886년에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1884년 알렌이 그 이듬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질러, 스크렌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르 한다.

 1, 조선의 첫 선교사 알렌

 알렌은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고 중국선교를 하다가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이며 공식적으로는 미국 공관의로 조선에 입국한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이 아니므로 조용히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던 중 1884년 갑신정변이(급진적인 개화파인 김옥규느 서재필, 박영효 등이 일본을 등에 업고 쇄국정책을 내세우는 보수파이며 지권당을 제거하려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살아남은 박영효와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보수파인 민영익과 친분이 있는 이수정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이려고 이수정이 조선으로 귀국하는데 한 요인이 된다.)  일어나고 이 때 민비(명성황후)의 친척이며 보수파인 민영익도 자객의 칼에 7군데 맞아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긴 혈관은 한의들이 할 수가 없었다. 뮐렌도르프의 소개로 알렌은 민영익을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석달이나 성심껏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민영익 뿐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엇고 그 결과 광혜원(은헤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지어줌.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뀜, 광혜원자리는 갑신정변 떄 죽은 홍영식의 집이었다) 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언더우드(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침), 스크렌톤, 앨러스(의료 선교사)모두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알렌 선교사는 선교본부와 관계를 끊고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달은 유럽나라들처럼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와서 조선의 잇권을 빼앗기 위해 열을 올리는 미국의 손, 발이 되어 일을 함으로 지금도 믿지 않는 역사학자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2,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알렌이 1884년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들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개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10살이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남자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남달랐던 형제는 자기전에 늘 기도했다. 다른 학생들이 놀림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던 형제를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릉 학생들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숫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언더우드의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며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미 신학교 재학 중 인도선교 준비를 하였으나 아펜젤러를 만남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탔고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라는 음성을 듣고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을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을 들고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신혼여행도(명성황후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양과 결혼함)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 편집가, 여행가. 정치가로 평화의 사도로서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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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 현상과 접근 전략                                    
 

▲저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이슬람 선교에 헌신했고, 이슬람 중동 연구를 했습니다.

거의 40년째 이슬람을 연구하고 있는데, 특별히 저희 단체 인터콥은 이슬람을 선교하는 단체입니다.

 

저희 선교사가 1,050명 정도 나가 계신데, 거의 다 이슬람권이죠.

그것도 중동 중심의 프런티어(최전방) 이슬람 선교를 하고 있는데요,

 

저희는 처음부터 청년들을 내보냈습니다. 왜냐면 언어가 안 되면, 아무 것도 안 되니까요.

우리 한국에 들어온 언더우드, 토마스,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도 다 20대 청년들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아무래도 프론티어 선교니까, 청년들을 보내서, 언어가 되어야 뭘 하죠.

그래서 신학적인 소양이 필요하면, 5년 선교한 다음에 불러들여서, 신학공부를 일부 시킵니다.

 

저희들은 신학공부를 다 한 후에 선교하기 보다는, 역순으로 먼저 선교지로 보냅니다.

왜냐면 그동안 교회에서 잘 양육 받았고, 성경공부 하면서 훈련받은 게 있으니까요,

또한 이슬람 선교지 현장은 ‘목회’라기보다 ‘전도’니까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저희들도, 정보가, 아무래도 바닥 현장 정보가 저희에게 좀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이슬람에 대해 좀 나눌 때,

기존의 여러분의 생각과 혹시 다른 점이 일부 있더라도,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1천여 명의 선교사들이 보내오는 생생한 현장 정보가 있으니까요.

 

 

◑이슬람을 우리가 생각하고 접근할 때는, 일단 몇 가지 고려해야 될 사항이 있습니다.

  <이슬람의 독특성>을 알아야 됩니다.

 

▲1. 이슬람은 <배교자를 살해>합니다.

배교자를 살해하는 종교는, 세상에 이슬람 말고는 없습니다.

불교, 기독교, 심지어 사이비들도 배교했다고 일률적으로 처단하는, 참수하는 종교는 세상에 없습니다.

교리에 위배된다고, 그렇게 참수를 명하지는 않습니다.

 

또 이슬람교의 설립자 무함마드를 비난해도 살해합니다.

풍자하는 만화만 게제해도 폭탄 던지는 데는,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비난한다고 죽입니까? 그렇지 않죠.

또 경전 코란을 비난하면, 목을 쳐서 죽입니다.

 

그래서 배교자 살해, 그리고 설립자 비난하면 죽이고, 자기들의 경전을 모욕하면 죽이고..

정말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컨텐츠를 가지고 있는 이런 종교가,

지금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지금 이슬람은 자기들이 20억이라 그러는데, 저희들이 봐도 16~17억은 됩니다.

기독교는, 가톨릭을 빼고, 몰몬교 같은 이단 다 빼고

순수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8.5~9억입니다.

이슬람이 복음주의보다 2배가 많습니다.

 

국가로는 58개가 이슬람 국가입니다. (팔레스타인 포함)

그들 나라가 통째로 다 이슬람입니다.

 

유럽에서도 4~5%, 가톨릭 4%, 복음주의 4%

그러니까, 유럽에서도 이슬람이 최대종교가 된 것입니다.

 

또한 무서운 것은, 이슬람이 지금 무섭게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2. 이슬람의 두 번째 독특성은 이슬람은 <정교일치 종교>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어설픈 정교일치는 다 없어졌습니다. 바티칸 빼고요,

실질적으로 세계적 종교에서, 정교일치 종교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은 정교일치, 국가종교입니다.

그래서 포교를 국가 차원에서, 국가 예산으로 합니다.

모든 이슬람 국가에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거기서 국가 예산으로 포교하기 때문에, 포교활동이 엄청납니다.

 

지금 사우디가 경제가 좀 어려워져서 몇 년동안 헤매고 있습니다만

수년 전만 해도 사우디가 1주일 쓰는 선교비를 다 합하면,

우리 세계 복음주의 교회가 1년 쓰는 예산과 똑같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사우디가 포교에 하루에 쓰는 예산을 합하면,

제일 많이 선교비를 쓰는 미국의 남침례교단의 (1년예산?) 보다 많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물량 예산으로 국가가 포교하니까요. 뭐 그 힘이라는 게 엄청나죠.

그래서 이슬람을 이렇게 국가종교로 봐야지요,

 

그래서 사우디가 너무 포교에 예산을 많이 쓰다가

현재 경제가 어려워진 점도 좀 있습니다.

 

그들이 포교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리더십 경쟁이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시아파, 수니파, 자기가 리더라고 경쟁하다가 너무 무리해서..

 

어쨌든 이런 국가 종교라는 점.

그래서 사우디나 중동의 어느 국가든지, 해외에 자기 나라 국가가 진출하면,

회사 펀드가 진출하면, 그걸 다 포교로 일부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가를 안 내줍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와 있는 모든 이슬람 펀드들이나, 이슬람 회사들도 전부 수입의 일정 부분을

North American Islamic Society 북미이슬람협회로 기부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교단분열, 교회분열로 개체화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쪽으로 모든 예산을 집중해서, 그 예산으로

미디어, 심지어 국가까지 기관에 투자해서 움직입니다.

 

미국은 좀 크니까 자기들이 움직이기가 좀 힘들지요.

한국에 이슬람 비판 안 나옵니다. 아프간 피랍 때 보셨지만,

국민 21명이 한 달 동안 피랍되었는데,

한국의 모든 언론들이 이슬람에 호의적이었습니다.

 

이슬람이 좋은 종교, 평화의 종교라는 프로그램을 계속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펀드 자체가 이런 미디어, TV, 방송, 신문에 주식을 삽니다.

투자를 그 쪽으로 해 버리니까, 메이저 언론 중에 하나가 되버리는 거죠.

 

또 이슬람을 비판해서, 중동에 진출해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아무 것도 못 하는 거죠.

우리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이태원 이슬람 사원,

한국 정부가 70년 때 중동 진출 할 때, '하나 짓고 오셔야지..'

그래서 국가가 땅을 내서, 지은 겁니다.

 

두 번째 삼성이 진출하려고 하니까, '하나 짓고 오셔야지' 해서,

그때 부산에 두 번째 이슬람 사원을, 삼성이 지은 겁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이슬람 금융법을 독특하게 인정받으려고 하다가,

수쿠크 법, 당시 우리 기독교가 쎄게 반대해서 일단 포기되었는데,

그런데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할랄법, 이슬람 음식법을 독특하게 적용받고, 국가 지원을 받기 위해서

지금 엄청난 프로젝트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이슬람 선교를 할 때,

우리 정부는 뭐 엄청나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석유가 나는 곳이 주로 이슬람 지역인데,

한국 기독교가 그쪽에 선교하면, 결국 이슬람을 자극함으로써,

한국과 이슬람과 관계가 언젠가는 안 좋아져서,

석유자원 공급에 만약 차질이 생긴다면.. 그러니 이슬람권 선교를 자제하라..는 분위기로 흐르죠.

 

그래서 이슬람 선교를 하던 저희 인터콥은 지난 15년동안 엄청나게..

언론사들 다 움직여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슬람 선교를 왜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세계가 자원외교, 자원전쟁인데.. 그래서 중국도 아프리카로 몰려가잖아요.

미국이 아직 남겨둔 아프리카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에게 중동을 빼앗겼으니, 중국은 아프리카로 엄청나게 진출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 정부도 자원외교가 핵심인데, 정부의 부처도 긴장하게 되죠.

혹시 정부시책에 방해가 될까봐요. 아프간 피랍 사태 때, 왜 그렇게 몰아갔겠어요?

 

‘위험한 데 왜 가느냐?’는 논리로 아예 접근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때 한국 청와대에 탄원서를 썼습니다.

폰트 12로 글씨 크게 해서 눈에 잘 보이도록, 3장으로 요약해서 썼습니다. 약 5년 전에 일입니다.

 

‘우리가 이슬람 선교 한다고 해서 자원외교에 장애 받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대민관계에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씩 다 썼습니다.

 

그래서 어느 전문가를 불러서라도,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공개 토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비공개 토론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토의하자고 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조금 공격이 약해졌는데, 여전히 부담스럽죠.

 

우리가 이슬람 선교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자원외교나 국가관계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이슬람 교리적으로, 이슬람 율법적으로도요.

 

또 이슬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얘기했죠.

그런데 상식적으로는 ‘한국 기독교가 이슬람에서 설치고 다니면, 당연히 안 좋지 않냐?’

그건 상식(사회적 통념)이죠.

그러나 이슬람을 깊이 알면, 절대 그렇게 말 안 합니다.

 

그러니까 사회 통념 말고, 이슬람의 세계관을 깊이 알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슬람을 접근할 때는,

그 독특성 속에서 이슬람의 세계관과 메카니즘을 생각해야지,

일반 상식으로 접근하면 절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들이 2004년에 팔레스타인에서 2천5백명이 모인 공개집회를 했습니다.

또 2000년에 카자흐스탄에서 이슬람 국가 최초로 공개집회를 해서 2만5천명이 모였습니다.

또 아프간에서 했는데, 우리 정부가 너무 걱정해서, 그때 논란이 많았죠.

 

어떤 사람이 제게 ‘아니 어떻게 팔레스타인에서, 카자흐스탄에서 공개집회를 합니까?’

제가 ‘그 나라 정부의 장관도 참석하는 행사입니다.’

 

‘당신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속였지요?’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카자흐스탄에서, 아프간 카불 공설운동장에서 집회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알리고 그 나라 장관들과 다 협의합니다. 프로그램을요.’

 

이슬람 선교는 열심히 하지만, 이슬람 연구 분석은 안 합니다.

선교사역에 헌신하다 보면, 시간이 없어서 연구를 못 합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슬람은 우리가 선교할 때는, 이슬람에 대해서 깊게 안 알아도 됩니다.

복음이 능력이니까요. 그러나 정책을 장기적으로 수립할 때는, 이슬람을 알아야 됩니다.

 

 

▲3. 이슬람의 또 하나의 독특성은, <이슬람 해외 이주>가 엄청납니다. 아시죠?

지금 세계 자체가 글로벌 유동성이 엄청 심화되어서,

세계가 시장이 지배하는 세계 체제, 원 글로벌 마케팅이 되면서, 이주 현상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글로벌 커뮤니티가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특별히 이슬람 인구가 폭증하니까,

이슬람에는 젊은이가 많으니까요.

 

한국, 일본은 고령화되니까, 많이 이주 못 합니다. 점점 육아도 줄잖아요.

그런데 이슬람은 젊은이 인구가 폭증하니까, 막 이주자들이 전 세계로 몰려가는 거죠.

 

그리고 금요일 이슬람 예배는, 당당하게 이슬람 성직자들이 포교설교를 합니다.

‘당신들은 전 세계로 나가라.’

 

그래서 아이를 엄청나게 많이 낳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청년 중동 멋있잖아요.

덩치 크고 약간 까무잡잡하고, 또 엄청하게 육체적인 힘이 강해요.

그래서 한국 자매들도, 무슬림 선교사들과 수 천 명 (추산) 엄청나게 결혼했습니다.

 

그 무슬림 청년에게 ‘당신 예수 믿냐?’

‘아, 당연히 믿죠.’

 

뭘로 믿느냐고 물어야죠. '선지자냐, 메시아냐?'로 물어야지요.

그러나 믿음이 훈련이 안 된 자매들은, 그런 거 잘 모르죠.

 

또 무슬림 청년이 찬양도 따라 부릅니다. 아, 예수 찬양하죠, 왜 못해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대목만 없으면, 안심하고 찬양하죠.

어차피 예수가 오셔서 심판할 재림자인데, (코란에 예수님이 그런 선지자로 나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는 안 믿는 거죠.

 

이슬람에 의하면,

그래서 이번에 지난 라마단 때, 이슬람 IS 사이비 국가지만 창설한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소위 캘리프 라고 선언한 사람이, 라마단 특별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했는데,

그 7~8개 항목 중에,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믿으며, 그가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 코란 3장55절.

‘알라가 가라사대, 내가 예수를 지극히 영광스럽게 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리라’

예수를 (선지자로, 사람으로) 따른다니, 크리스천도 미혹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슬람을 모르니, 막 헷갈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터콥이 이슬람에 가면, 가자마자 얘기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공격당합니다.

 

처음부터 크리스천이라 말 해야 사는 거죠. 그러면 손 안 대요.

‘말 안 했어? 나중에 알게 되었어? 이 친구 봐라.’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자신을 밝혀야 되는 겁니다. 정직하게 해야 됩니다

괜히 작전하다가 자기가 터지는 겁니다.

그렇게 처음에 작전한 이유가, 이슬람을 몰라서 그러는 거죠.

 

제가 터키에서 쫓겨날 때, 그 날 우리 마을 사람들이 막 떼거지로 몰려와서

‘우리가 정부에게 항의하겠다. 우리가 너를 처음부터 아는데, 왜 정부가 너를 쫓아내느냐?’

제가 데모하지 말라고 그랬죠. 그러면 다음 후배들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시끄럽게 신문에 나고 그러면요.

 

그러니까 이슬람을 알아야 되는데, 모르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메카니즘을 알아야 되는데, 별로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체계적으로 해야, 핵심을 알게 되잖아요.

 

그냥 교리, 금식, 맨날 종교적 행위 책만 보니까, 그건 사실 몰라도 됩니다.

모든 종교에 있는 종교행위를.. 어차피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것인데요.

 

 

▲4. 그 다음에 <이슬람 글로벌 현상>이 아주 독특합니다.

그래서 이주자들이 가고, 우리 한인들이 여기 미국 땅에 왔습니다.

보세요. 1.5세, 1.7세, 2세 이렇게 나누는데요.

 

우리 한국인은 2세대가 되면 아주 민족성 자체가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슬람은 3세대, 5세대가 되어도 안 바뀝니다.

보세요, 뉴욕의 아랍인들, 터키인들. 3세 4세 5세대에 가도 똑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2세만 되어도, 완전 서구화로 개종되어서, 부모와도 대화도 안 됩니다.

급속하게 변화됩니다.

 

한국인은 출세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사회에 일찍 동화되려고 합니다.

 

그들 무슬림들은 자기 이슬람 세계관이 지배하기 때문에, 출세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막 생존, 2천년 동안 고난 받으며 살다 보니까,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그냥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치니까,

생존을 위해서 자기자체를 개조시키고 민족성을 바꿔버립니다.

 

미국만 아니라, 옛날 블라디보스톡(연해주), 중앙아시아에 갔던 한인들도

미국 교포들과 비슷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요.

 

소비에트 150개 국가중에서, 이렇게 개종된 2세 3세 때 종족 자체가 달라져 버린 건

우리 민족이 톡특합니다.

우리 들은 어디 가든지, 쉽게 그 나라에 적응을 잘 합니다.

 

상황화 contextualization 라는 말은, 한국인들에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상황화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말인데,

우리는 상황화를 안 가르쳐 줘도, 스스로 알아서 너무 잘 합니다.

어딜 가든지 현지인처럼 금방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절대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팀을 이뤄서 보이지 않는 가상의 무슬림 공동체를 도시마다 이루어서,

그 나라를 바꾸려 합니다.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한국으로 엄청나게 몰려오니까, 이주자들 잘 해주자.’ 막 국가가 켐페인을 했습니다.

이슬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바뀌지 않습니다.

복음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정책이 잘못된 거죠.

 

아예 노동자를 다른 데서 불러오거나, 캄보디아, 미얀마 등 비이슬람 권에서요.

‘불러다놓고 잘 해주자?’ .. 절대 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급속 개종되니까, 저네(무슬림)들도 그렇게 될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슬림은 절대로 안 변하는 종족이고,

이 두 가지를 비교연구하면, 거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5. 글로벌 지하드

와하비 사우디에서 시작했는데,

어쨌든 처음부터 사우디 왕가와 종교와 정치가 통합한 메카니즘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원형이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서구 식민지 통치를 받다 보니까, 막 서구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는데,

열등의식 속에서 헤매다가 1차세계대전이 터지고, 서구가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서구세계에서 자체 자기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적 사회의 담론을 자기(이슬람 지식층)들이 듣죠.

그러면서 1920년 대에 ‘이제 서구는 안 되겠다’

 

그러다 2차세계대전이 또 터졌습니다.

자신감을 갖고서 이슬람이 더 확신했습니다. ‘이제 서구는 안 된다.’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권력투쟁하고 헤게모니 투쟁하는 서구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문명이 다 타락해서 그렇다.'

 

그러면서 <이슬람 형제단>이 등장하는데,

하산 알 바나 Hasan al-Bannā 가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시작합니다.  주1)

서구문명에 대한 저항운동이 싹트기 시작했죠.

 

그런데 서구의 세계를 민족주의 체제 프로젝트, 민족주의 시대의 도래,

이게 전세계로 퍼져나가다가

아랍세계도 이슬람인데 민족국가, 이집트 민족주의, 터키 민족주의가 막 나온 겁니다.

 

이걸 막 저항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이슬람이다. 왜 민족으로 이슬람 세계를 나누느냐’

그러면서 저항운동을 했는데, 팔 바너

그 다음에 싸이드 쿠틉 Sayyid Qutb 이 사람이 미국 버클리에서 공부했는데,   주2)

그때 하필 60년대에 유학왔습니다. 히피들이 난리칠 때,

 

그걸 보면서 타락한 미국이라는 확신을 갖고 돌아가서,

‘이것은 지금 유럽이 아니고, 모든 서구세계가 심각한데,

이들이 세계를 타락시킨다. 그래서 타락한 서구의 리더십을 해체시켜라. 인류 미래를 위하여.’

그러면서 글로벌 지하드를 이론화 시킵니다. 글로벌 지하드!

 

그래서 그들이 글로벌 지하드를 전개하게 된게 2가지 이유입니다.

1) 서구는 힘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문제는 그들은 타락한 인생들이다.

그래서 글로벌 지하드를 해야 한다.

 

이게 나중에 알 카에다, IS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제가 1980년대부터 이런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다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대학의 젊은 강사로 뛰는 사람들입니다.

동네에서 그냥 사는 무슬림하고는 다릅니다.

 

다 똑똑한 사람들. 알 카에다, IS에 들어와 있잖아요.

유럽, 미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중심멤버 들입니다.

유럽,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 대학을 졸업한 이슬람 청년들입니다.

 

무식해서, 종교적으로 세뇌되어서 ‘내 몸 던지고 죽는다’는

그런 사회 부적응자도 IS에 일부 있겠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수뇌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계관을 정치화 시켜서, political Islam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막 정치 투쟁을 합니다.

 

그런데 그 타깃을 보십시오.

911때 세계무역센타와 펜타곤

-세계무역센터는 세계 경제력의 상징입니다.

-펜타곤은 세계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서구가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세계를 타락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두 심벌을 공격한 것입니다.

공격할 대상이 많은데, 하필 왜 거기를 공격했을까요?

 

제가 1980년대부터 무슬림들을 만날 때마다

‘저항하면 안 됩니다. 물리적 투쟁으로 세계는 절대로 좋게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 풀뿌리 운동, 한 사람씩 변해야 한다고 얘길 하죠.

‘그게 더딜 것 같지만, 세계를 바꾸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투쟁하고 저항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슬림들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까?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유럽을 1천~1천5백년 동안 지배해 오면서,

이렇게 타락시켜놓고, 왜 실패한 모델을 얘기하십니까?’

 

당신들에게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지만, 다 타락시켰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타락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왜 실패한 모델을 거론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들의 방법 밖에 안 남았다고 합니다.

 

'전 세계가 타락했고, 우리 이슬람권만 남았는데, 여기도 지금 타락해 가고 있다.'

개인주의, 알코올 문화, 성적 타락, 물질주의

돈만 있으면 엄청난 권세를 휘두르고..

돈 없으면 비굴하게 돈 앞에 무릎 꿇고.. 이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항해서

계속해서 ‘글로벌 저항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막스가 ‘사회적 분배 정의 justice’를 내세워서 세계의 반쪽을 지난 1백년간 지배했는데,

지금 이슬람 극단주의는 ‘도덕성 morality’을 들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식은, 이슬람 국가의 엄격한 율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정치와 통합해서,

이슬람법에 배치되는 사악한 모든 것을 제거하려 드는 것입니다.

 

그 동기 모티베이션은, ‘타락한 서구 문명에 대한 저항의식’입니다.

 

그래서 왜 911사태와 같은 극단적 테러를 저질렀느냐?

세계에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랍니다.

‘우리는 타락한 서구 문명에 도전한다. 서구문명의 리더십은 해체되어야 한다. 인류 미래를 위해서!’

 

타락한 서구문명이 세계를 리드하면, 인류 전체가 타락한다는,

자기들만의 편협된 논리를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톱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지를 미국도, 유럽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 일본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남미가 받았습니다. 중국, 러시아도 받았다고 봅니다.

그들 국민들 가운데 일부가 빈 라덴을 칭송하고 나섰습니다.

아프리카 국민들 가운데 일부도 빈 라덴을 칭송했습니다.

이슬람국가들의 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빈 라덴을 지지한 것은, 당연하고요.

 

무슬림들은 ‘너희 기독교인들이 세계를 다 전반적으로 타락시키지 않았느냐’

그때 우리 기독교는 ‘이 땅에 죄가 있어서 그렇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고 지향한다.

물론 우리가 이 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되,

그러나 궁극적으로 천국을 소망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되, 사랑으로, 섬김과 봉사로 다스린다. 군사, 경제적 파워가 아니라!’

 

이것이 바로 천국 복음 kingdom gospel입니다.

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때,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는 social gospel 이 아니라, kingdom gospel입니다.

세상에 social gospel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극단적 이슬람 저항운동도, 이 계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불 수 있겠죠.)

그런데 kingdom gospel 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회개의 메시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회개의 복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죄로부터 회개가 없는 메시지가 무슨 킹덤 가스펠입니까.

 

911사태는 어떻게 보면, 서구물질 문명과 이슬람 종교문명의 지구적 충돌인데요,

사무엘 헌팅턴은, 세계를 몇 개의 큰 문명권으로 나누고, ‘문명간의 충돌’을 예견했지요.

그러나 더 엄격히 말하면 ‘물질문명’과 ‘정신/종교문명’의 지구적 충돌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국제화이죠.

 

고통하는 무슬림, 고통하는 세계

심리적 프롤레타리아(빈자들)들을 서구의 지배하에서 해방시키려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그렇게 이슬람극단주의를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가 역사에서 막을 내리자

그것의 대안운동이, 이슬람 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카에다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은,

다 유럽에서 시작했습니다. 중동에서 시작한 게 아니에요.

 

그 원형은 아하비, 중동에서 시작했지만

그게 운동 movement 로 성장해서 발원한 곳은, 유럽입니다.

그게 지금 글로벌 운동으로 퍼지고 있는데, 역시 유럽이 진원지입니다.

 

유럽으로 이민 갔던 무슬림들의 자녀 세대들에게서,

또한 유럽으로 유학갔던 중동 무슬림 청년들에게서,

타락한 서구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그들이 독일에서 사회주의 철학을 공부하고,

결국은 사회주의 운동을 이론적으로 배우고,

그것을 이슬람 신앙과 접합시켜서, 글로벌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감당을 못해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60개국가와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저 IS의 핵심멤버들은 2~3만명입니다.

그 2~3만명을 감당 못해서, 60개국과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한국 일본 다 포함해서, 2015년 1월에 결성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우리나라 625때

미국이 한국을 돕기 위해서 16개국의 군사동맹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소련과 중공이라는 엄청난 대국이 개입했는데, 자유진영에서 고작 16개국 참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 IS 2~3만명 감당 못해서, 60개국이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영적인 세력이 배후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4천년 전에 시작된,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이

이제 지구적으로 팽창된 거죠.

 

4천년 동안 지속적으로 팽창되어온 구조적 갈등이

이제 지구적으로 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4천년의 뿌리를 가진 갈등이 지구를 흔드니까,

세계의 국가들이 지금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쉽게 감당하지 못하리라 내다봅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표면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것은 세계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세계 교회는, 지금 대개 방관하고 있고, 방관하니까

세계 국가들이 이것을 해결하겠다고 난리 치면서

지금 이라크, 시리아에서 지난 수년 동안, 5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11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50만명이나 죽이고, 그 땅에 평화를 갖고 오겠다는 것은..

이건 마귀나 하는 일입니다.

 

우리 세계 교회가 방관하는 사이에, 세계 정부가 문제 해결하겠다고 나서는데,

난장판이 될 가능성도 큽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 1명 죽이면, 자기 집안 친척 중심으로 10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또 1명 죽이면, 또 그 주위 가족, 친척 가운데서 테러리스트가 10명이 자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사적 해결은,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우리의 방법으로 기도하고, 복음전하고,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요?

내부자 운동 좋습니다. 잘 지혜롭게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spiritual innovation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자기들이 은과 금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거기에 반발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 외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꾸 다른 전략 세워봐야, 별로 소용없습니다.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능력으로!

 

그래서 하여간 중동 전체 아랍 세계는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하나는 왕정국가 – 사우디, 쿠웨이트, UAE, 요르단

하나는 대통령제 국가 –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을 뽑습니다.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그런데 소위 아랍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서, 지금 대통령제 국가들이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왕정 국가들은 다 살아남았습니다.

 

누가 더 독재입니까? 왕정국가 철권 통치가 지배하는 게 더 독재죠.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민주화 아랍의 봄 운동이 일어나더니,

진짜 독재 왕정국가들은 건재하고, 대통령제 국가들이 다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시리아 하나 대통령제가 남았는데, 저거 하나 제거하자고 소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거한 나라마다 이슬람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민주화가 된 게 아니고, 극단주의 이슬람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여간 주님은 그래도 역사하십니다.

IS가 3천개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전 세계 3천곳에서 리쿠르트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논리를 계속 전개하면서, 서구사회를 비판했습니다.

 

그럼 관심 있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겠지요.

그러면 파리, 런던, 시드니 이런 곳에서, 접촉자들을 만나서, 시리아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이런 IS의 만행에 대해, 자체적으로 대항하는 세력도 일어났습니다.

   ‘야, 너희들이 참수해서 죽이니까, 세계가 이슬람이 나쁜 종교라고 욕하고 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너희는 가짜 이슬람이다.’

   이렇게 순진한 무슬림들이 거기에 댓글을 달아서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IS는 코란의 경전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코란 몇 장 몇 절에

   ‘변절자들은 참수하라고 되어있다.’며 자기들은 코란대로 따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평소에 코란을 전혀 읽지 않던 무슬림들이 혼란에 빠집니다.

   IS의 극단주의 이슬람 운동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이게 이슬람이었어? 세계가 이슬람화 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 한다고?’

 

   그래서 막 이슬람에서 이탈하는 세력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엄청난 이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제가 최근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젊은 목회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제게 하는 말이 ‘지난 수 년 동안에, 2백만명의 무슬림이 기독교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7월에 사우디에 갔는데요, 거기서 목격한 엄청난 변화는 말도 못합니다.

 

지금 이란은요, 1992년에 2천5백명의 크리스천, 지금은 3백만명이 되었습니다.

막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엄청납니다.

 

이런 혼란과 소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관계없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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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하산 알 반나  Hasan al-Banna  1906∼1949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초대 단장(mur-shid). 나일 델타농촌 출신.

다르 알 울름(‘학문의 집’)에서 학문을 배우고, 도시생활의 허식에 반발해,

1929년 중학교교원으로서 부임한 이스마일리야에서 형제단을 비밀결사로 창설했다.

1940년대에는 이집트 최대의 대중정치단체가 되었다. 그의 성향은 보수적이었다.

그는 이 조직을 신비적 권위로서 통할했다. 팔레스타인 분규 때는 대중을 선동하고,

비밀군사기관에 의한 요인암살 등의 테러를 조직했는데, 역으로 비밀경찰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슬람사전, 2002. 11. 15., 학문사)

 

 

주2) 사이드 쿠틉   Sayyid Qutb     1906~1966

그는 이슬람 원리주의 이론과 행동철학을 다듬고 체계화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이슬람 이데올로기화’와 ‘이슬람 혁명’이론의 주창자이다.

오늘날 이집트를 비롯한 무슬림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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