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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설교] 부활은 우리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집필자 서문강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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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의 예배는 기독론적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 서 계시며,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인간은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즉, 예배란 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도의 인격적이며 순종적인 믿음의 반응이다. 더욱이, 본질적으로 예배는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이다. 물론, 이런 교제와 인격적 관계는 예배자의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예배의 중심 행위라 할 수 있는 '말씀'과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지난날 행하셨던 공생애 사역 및 십자가와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배는 그리스도의 신비(고난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참여는 단순히 지적인 수긍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경험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배와 관련하여 외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보다는 내적인 요소를 강조하셨고(요4:24), 특히 십자가 희생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어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모든 희생제사를 마감, 완성하셨다(히10:12-18).

따라서 신약의 성도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대신 대속 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감사, 찬송하며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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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 누군지 모를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누군지 모를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이들의 그림이나 작품이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엔 계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프로라 하더라도 넘어 설 수 없는 아마추어의 장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억지로 꾸미지 않은 순수와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계산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당신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기도 합니다.

누군지 모를 당신을 위해서...


 

 

믿음에서 께달는다는 것은 


믿음에서 깨달는다는 것은 매번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큰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오래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생활의 요령을 알게되고 하나님의 본질을 알아가게 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하나님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극히 일부분에 대한 깨달음 이지요.

깨달았다고 하나님을 더 잘 믿는다고 볼수도 없고 깨닫지 못했다고 하나님을 잘 못믿는다고 볼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우리가 신앙인 답게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한 부분을 깨달아 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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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기도◆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저희 마음과 생각을 믿음으로 인도하사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교회의 지체된 성도로
  교회의 덕을 세우며 아름다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옵소서.
  예수 십자가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며 살지 못하는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말의 실수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언행심사에 진실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하옵소서.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므로
  저희를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생활에
  이르지 못하는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마음과 생활을 낮추어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을
  다하지 못하는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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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예배 대표기도문 ( Prayer for New Year )

 


지난 한 해도 은혜 가운데 지켜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시작하는 해가 되게 하시고 열매 맺고
응답받는 한해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지난 1년간의 삶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게
하시며 삶의 터전을 넓히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가게 하신 크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이런 감사가 날마다 되어 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교회를 이 곳에 세워주시고 주의 복음과
말씀을 증거 하는 터전을 삼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교회가 올 해에는 더욱더 주의 역사를 감당해 내는
능력있는 교회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각 기관마다 주의 큰 사랑으로 덧입혀 주셔서 모든
기관들이 부흥을 경험하게 하시며 주의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세운 기관장들마다 축복 하시며 각 기관들을 이끌 때에
주께서 주신 지혜로 아름답게 이끌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교회가 주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봉사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며 고아와 과부를 먹이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교회도 성장,부흥 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성도들의 모든 가정도 도우셔서 이제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출발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계속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가정도 있습니다.
온 교회에 모든 가정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올 해에는 웃음과 사랑이 넘처나는 복된 가정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많이 어려웠던 지난 한해의 경제가 되살아나는 한 해가
되길 원합니다.
힘들고 지쳐 고단한 심령들을 없게 하시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나라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정직과 봉사가 넘처나는 정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북한 땅에도 복음이 들어가게 하시며 남과 북이
하나되게 하시여 온 맘으로 주를 섬길 수 있는 복된
땅으로 변화 시켜 주옵소서.

함께 손을 잡고 주를 찬양하며 경배하는 날을 속히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새해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실 목사님께도
함께하사 올 한 해에도 인도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준비하실 때마다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며 그 말씀을 통하여 모든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를 경험케 하옵소서.

교회의 모든 계획들을 운영해 나가실 때에 주의
섭리로 도와주옵소서.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이 올 한해에도 이 성전에
가득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영원토록 인도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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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묙탕과 교회의 공통점

 

1. 벗어야 한다. => 죄

 

2. 뜨거움, 미지근함, 차가움이 골고루 있다. => 신앙

 

3. 돈을 낸다. => 헌금

 

4.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일단 밀어 붙인다. => 기도

 

5. 실례(?)를 범해도 대체적으로 미온적이다. => 관용

 

6. 큰 곳 일수록 까운 입은 사람도 많다. => 예배위원

 

7. 큰 곳 일수록 사우나(싸우나) 하기쉽다. => 재직회시 의견 대립

 

8. (여자는 몰라도) 남자들은 외모보다 주로 중심을(?) 본다. => 믿음

 

9.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는 의미가 없다. => 성령간구

 

10. 들어올 때 보다 나갈 때 심신이 가볍다. => 은혜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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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시대에 가장 논쟁이 되었던 교리가 바로 이신칭의의 교리이다. 이 참된 교리를 통하여 참 신자는 자유와 위안을 얻었고 로마 카톨릭교회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신칭의는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치는 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었을까?

 

항상 그렇듯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자. 이신칭의의 정확한 뜻은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라 몇 가지를 분명히 해두자.

 

1. 이것은 믿음을 통해서 의인이 된다 혹은 변한다는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교리이다. 죄인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법적인 의미에서 의롭다 선언을 받는 것이지, 그 죄인이 실제로성품이 변화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신칭의를 이신득의라고 하는 것은 혼동을 줄 수 있기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이신득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2. 이신칭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라면 이 교리를 다 받아들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명백한 이단이 될 수밖에 없다. 로마교 역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않는다. 개신교와 로마교의 차이는 이것이다.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라고 주장하지만, 로마교는 믿음 뿐만이 아니라 행함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예를 보라. 그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을 때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을 때다.

 

3. 이신칭의의 교리는 믿음을 통해서의롭다 칭함을받는다고 주장한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믿음 때문에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믿음을 통해서, 즉 믿음을 수단으로 칭의를 얻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이 칭의에 대한 근거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칭의를 얻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밖에 있는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다. 요약하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의롭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고, 그구속사역의 의가 믿음만을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된다.

 

4. 또 하나의 논쟁은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믿음인가에 관한 것이다. 개혁교회는 오직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항상 구원 혹은생명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우리의 행위와 구분이 되기는 하지만,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 믿음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가르침 대로,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칭의가 믿음과 믿음이 일으키는 행위 둘 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칭의는 어디까지 구원에 이르는 참 된 믿음,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5. 칭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로마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주입(infusion)이 되어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변화된다고주장한다. 따라서 로마교에 따르면, 우리가 의로운 이유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의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전가(imputation) 시켜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한다.

 

6. 칭의와 성화.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로마교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칭의는 우리 안에 믿음으로 시작되어서, 소망에 의해서 굳건하게 되고, 사랑에의해서 완성되는 어떤 것이다. 이 의는 우리 안에 있는것이 때문에, 잃어 버릴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을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로마교는 특별히 고해성사 교리를 발전시켰다.

 

6. 1 칭의 교리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의인인가 아니면 죄인인가? 이런 질문은 신자로 하여금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항상,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주옵시고라고 기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측면에서는 의인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죄인이다. 이것을 보통 simul iustus et peccartor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의롭다 선언을 받는다. 이 의는 완전한 의다. 하지만, 우리의 성품은 여전히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성 범죄자가 정상 참작과 돌 보아야 할 자녀 때문에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고 하자. 그는 신분 상으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하지만 성품상 그는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은 아니다. 전자가 칭의에해당한다면, 후자는 성화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 칭의의 교리가 주는 유익.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전가 됨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상태이다. 성품의 변화가아니라 신분의 변화이다. 칭의의 교리를 잘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확실하게 느낀다. 우리의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상태와 성품을 바라 볼 때,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없다. 하지만, 우리밖에 계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8. 선행과 칭의: 이신칭의가 선행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선행은 칭의와 관련해서만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이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선행에 힘쓰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칭의가 중요한 교리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칭의의 교리를 제대로 안 신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삶을 살 수 밖에없을 것이다. 칭의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감사의 삶도 그에 못지 않게 구원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하는 믿음, 즉 행함을 일으키는 믿음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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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세째주일 낮예배 대표기도문 (September.Sunday worship service)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지난 한 주간 동안도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이 시간 또한 아버지 앞에 나와 예배 드리게 인도해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오늘도 거룩한 주일

 

저희들 주님의 만져주심과 위로하심이 필요하여

 

그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곳에 모였습니다

 

이 시간 먼저 우리 속에 숨겨진 죄악과 악한 것들이 생각나 회개하게 하시고

 

세상 속에 더러워진 거짓되고 교만한 마음들도 주님 앞에 고백하오니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용서받고 회복되게 하옵소서

 

창조의 하나님

 

풀성한 가을처럼

 

우리 교회의 모든 부서들과 구역들도

 

새로운 열정으로 풍성한 열매을 맺을 수 있게하시고

 

주 안에서 따뜻한 사랑의 교제가 넘치게 하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

 

이 나라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사

 

이제는 수많은 상처와 분열과 거짓으로부터 벗어나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정하신 믿음의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세워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다시 한번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하시고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만드신 귀한 자녀인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에서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 당하고 죽어가는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바라 보시며

 

애 끓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까이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도 우리가 알기 원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 멸망의 고통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오니

 

이제는 죽어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낮은 곳까지 육신의 몸으로 직접 찾아 오시어

 

우리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 큰 사랑이 이해 되고 믿어지는 복된 마음을 주시옵소서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백성들이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며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죄악으로 쓰러질 때 십자가를 생각하며 일어나게 하시고

 

질병으로 아프고 넘어질 때 채찍을 맞으신 주님을 기억하며 치유 받게 하시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말 못할 고통으로 눈물 흘릴 때 마다

 

우리 대신 고통 당하시고 죽음으로 값을 치르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귀한 말씀을 들고 단 위에 서시는

 

목사님을 붙들어 주시고

 

늘 항상 성령 충만케 하시고 영육간의 강건함을 주시어

 

사단의 어떠한 공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게 하여 주시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주의 종이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저희들 주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목사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저희 믿음이 굳건하게 세워지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충만케 되는

 

뜨겁고 놀라운 은혜가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성가대의 찬양가운데 함께 하사

 

드리는 찬양을 통하여 우리들의 영혼이 울리게 하시고

 

이 자리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시간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에 항상 응답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이 모든 말씀을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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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명언] 하나님은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며,

 

십자가는 모든 거짓이 생생히 드러나는 곳이다. 회개의 자리이고, 그리고, 부활이 약속되는 자리이다.
 우리 개개인은 의미가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갈보리언덕위의 십자가는 모든 복잡다단한 삶의 문제의 해답이다.
 인간은 하나님앞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의 고난의 목적도 우리의 삶의 목적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에 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에게 자신까지 내어주신다.
 잘못 살아온 삶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고난, 절망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나에게서 이기심이 커지면 하나님이 작아지고, 이기심이 작아지면 하나님이 커지는 것이다.
 한 인간의 인생도, 인류의 역사도, 다 하나의 구원사이다.
 그리스도는 죄속에 갇혀있는 우리들의 자아를 우리들의 죄를 깨뜨리시고 구출해 주신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영적 본능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들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신채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해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우리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계획을 볼 수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실천한 만큼 유효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출입하시며 머무시며 일하시는 장소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부르심의 열매를 맺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생각, 마음, 느낌이 언어로 구성되듯이 믿음도 언어로 구성된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하다.
 삶의 문제가 많을수록 그대신 하나님과 많이 그리고 깊이 만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듯이 나의 문제들도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내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고 해결을 위해서 더 애쓰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해서 우리들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신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 지혜와 지식을 간구한다.
 아무도 지혜를 타고나지 않는다. 지혜는 성경을 읽고 실천에 옮길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얻은 것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먼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 일 뿐이다.
 삶의 목표와 방향이 희미한 사람이 유혹과 시험에 쉽게 빠진다. 시험이 예견되는 상황을 피하며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야한다.
 선과 악이 뒤섞여 있을 수는 없다.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선택해야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가능한 것이다.
 미워하면 미워하는 사람이 망가지게 된다. 반면에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려주어서 용서와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말은 일을 세우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자.
 악은 절대로 안정을 제공하지 못한다. 오직 정직만이 뿌리를 깊이 내릴 수가 있다.
 우리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일상생활을 해나가자.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자.
 좋은 친구를 가지고 싶으면 자신이 먼저 좋은 친구가 돼야한다. 다른 사람도 좋은 친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온전히 지켜준다. 그리고 정직함이 삶을 승리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며, 동시에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약속과 책임을 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의 변명뒤에 가려진 동기를 보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의 중심을 보신다. 중심이 바르게 서야 생명을 얻는 것 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뭐엇에든지 중독되지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시며,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신다.
 역경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있는 기회를 준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쉽게 움츠려들지 않는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겪고 있는 역경이 내일의 더 큰 역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상대방 때문에 화가 나거나 섭섭할 때에, 반드시 서로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잘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흥분하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앙갚음의 유혹을 느낄까? 내가 그렇게 정당한가?
 나는 왜 내 생각과 내 느낌을 고집할까? 그만큼 내가 절대적으로 옳은가?
 성령의 인도로 내가 나자신을 봤을 때에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나의 작은 마음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곧 치유이다.                   곧 예수그리스도가 치유인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물고 있는 것에 있는 것이다.
 내 문제는 회개해서 구원받고 마음을 키우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내가 부딪히는 삶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돼서 참 기쁘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른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착각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없고, 나만 문제가 있다고 오해하는 것에도 있다.
 말씀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기도하니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어간다.
 내 문제에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문제들이 결국은 선을 이루는 역할을 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죄까지도 무시하거나, 괸대하거나, 합리화시키고 있다
 구원은 나에게 오리무중이라서 잘 모르고 자신도 서지않는 문제들의 실상을 알게 되고 벗어나는 것입니다.
 생생한 소망이 우리의 인격을 통합시키고 조화시키고 치유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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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명언] 믿는자의 소생한 영혼에 성령이 내주하신다.

 

 운명이나 우연은 없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의 평안은 하나님이 선하게 섭리하심을 믿고 의지하는데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고, 양육되고, 훈련되고 있는 하나님의 자식들이다. 
 우라가 죄를 지어서 우리안의 영.혼.육이 위계질서를 잊어버리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믿는자에게 성령이 내주하여 그의 영혼과 함께있게 되며 구원받은자로서 살게해 주신다.
 믿는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지않고, 자신에게 내주해 계신 불변의 성령에 의지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사는 것이다.
 예수의 공로와 의에 힘입어서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 내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면 인간전체가 완전히 바뀌어 새사람이 된다.
 믿는 사람안에는 영혼외에 성령도 내주해있으며 성령을 통해서 인도와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인간은 하나님을 알수 없으며 자기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수없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은사로 받았을 뿐이다.
 은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의인이 된다.
 은총은 하니님이 주시나 은총에서 나오는 선행, 구원, 천국, 부활, 영생은 우리들의 것이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수 있게되고, 하나님을 만나게된다. 또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게시이며, 성경안에서 살아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히 만나게된다.
 진리는 스스로를 증명한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알수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말씀하시고, 조명하시고, 가르치신다.
 믿는자의 소생한 영혼에 성령이 내주하신다.
 하나님이 작정하셨고 미리 아시기에 인도하시는 것이다.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않아도 좋은 것이다. 어차피 하나님뜻대로 되는 것이니까...
 내 문제들은 내가 하나님뜻대로 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들이기에 좋은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하나님뜻대로 되는 것이기에 나는 자유롭다. 내것이 없으니까...참 좋다.
 솔직히 하나님아버지외에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겁난다면 인간적인 착각입니다.
 두려움은 싫음이고, 안일함이며, 이기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해 주신다.
 "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다른사람의 마음은 무시하라. 둘 다 따르지는 못한다.
 이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채로는 하나님을 따르지못한다. 하나님이 꼭 해결해 주실 문제이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높아져가면 두려움은 녹아버린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게된다. 
 이웃을 불필요하게 오해하거나, 과대평가하거나, 경계하지 말아야한다.
 하나님은 인간사회를 영으로 연결하시고, 지배하신다. 섭리하신다.
 이세상 것들은 모두 다 “태산이 높다하되,하늘아래 뫼이로다.”의 수준입니다.
 나는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매일 매일 위로 위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내가 이해를 못 하지만 절묘하게 섭리해 주십니다.
 문제가 없는 강한 자가 되려하지말고, 주님께 의지해서 살아가는 약한 자가 되게해 주십시오.
 사람은 흙덩어리입니다. 무엇이 겁이나고 왜? 열등감을 가집니까? 착각입니다.
 나한테나, 세상에나,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늘 공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작정하셨고, 모든 것을 미리 아시기에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하나님뜻대로 되는 것이기에 나는 자유롭다. 내 의도가 없으니까...참 좋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가면 두려움은 녹아버린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게 된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절묘하게 섭리해주십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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