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선교전략 / 코란의 주제6

무함마드 종교에 대한 가르침

ㅇㄱㄷ 선교사

무함맏은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고안자이다.

이슬람 종교는 무함맏 이전에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 AD 600년 이전에 󰡐알라󰡑, 󰡐이슬람󰡑, 󰡐무슬림󰡑 이러한 단어들은 세상 그 어디에도, 그 어떤 문서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 종교는 하심 계통의 꾸라이쉬 부족의 아둡라의 아들 무함맏에 의해 아라비아의 메카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무함맏은 40세가 되었을 때, 가브리엘이라고 주장하는 천사에 의해 알라에 관한 계시가 아닌, 알라의 뜻에 관한 계시를 시리즈로 받았다.

무함맏은 아담과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모세와 심지어는 예수까지 참 무슬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무지한 자힐리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선지자들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자기의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유일신 여호와가 있었다면,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맏에 의해 유일신이 되어버린 알라가 있다. 무슬림이란 단어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모방하여 󰡐이슬람과 무슬림󰡑, 즉 󰡐복종과 복종하는 자󰡑의 구조를 만든 것이다.

기독교에는 그리스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무함맏은 자기가 스스로 고안해 낸 이슬람 종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라면, 무슬림들의 신앙의 대상은 알라이고, 이 알라는 그 이전의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한 위치를 찬탈해 버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후손으로 왔다면, 자신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혈통으로 왔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아브라함 ? 이스마엘 ? 무함맏 신화를 만들어 냈다. 유대인들에게는 토우랏과 자부르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이, 이제 무슬림들에게는 꾸란과 하디스가 경전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종교의 기준이 되었으며 세계관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닮으려 한다면,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모방하여 닮으려 한다. 사람들의 삶은 그들이 따르는 자를 닮게 마련이고, 실제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면, 무슬림들을 위한 공동체는 움마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영역을 무함맏과 그의 종교 이슬람은 모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꾸란에서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다.

수라 2:135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되라! 올바른 교훈을 찾자!󰡑 라고 그들은 말한다. (즉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되라!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라! 라고 말한다. 너는 말하라! 오 무함맏이여!) 오직 우리는 참 길에서 떠나지 않은 자, 우상숭배자들이 되지 않은 아브라함의 종족에-그의 종교에 (따르고 있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라고 해서 무함맏이 천재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상 무함맏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었으며 전해지는 바로는 문맹이었으며, 꾸란을 읽어서 알 수 있듯이 말에는 모순이 많으며 거짓말쟁이였다. 그가 기록한 꾸란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이 꾸며낸 거짓말들이다.

무함맏은 수라 2:256에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고 말한다. 󰡒종교에 강요하여 들어가게 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사탄과 무함맏은 무슬림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그 길을 막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꾸란에 대해 그 어떠한 질문도 의문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맏의 거짓말들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주고, 어두움 가운데서 어두움의 영이 이끄는대로 무력하게 이끌려 가는 불쌍한 무슬림들을 구원해 내야 한다.

사실상 무슬림들도 꾸란의 가장 중요하고 전체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무슬림들이 꾸란의 모든 내용을 알고 믿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무슬림들은 꾸란의 모든 수라들 중에서 개경장(첫번째 수라)와 이슬람 종교를 가르치고 기독교를 대적하기 위한 것과 같은 극히 일부분의 내용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슬람의 교리나 개경장과 같은 것은 이슬람 종교를 잘 포장해서 이슬람이 진정한 종교라고 선전하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들에 불과하며, 그러한 것들은 꾸란의 전체의 내용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사역자들은 이슬람을 포장한 것들에 지나치게 주목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러한 것들에 현혹되어서도 안된다. 포장된 겉모습 내면에 있는 이슬람의 진정한 모습은 이슬람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역사와 이슬람의 기초가 되고 있는 꾸란의 진정한 주제에 관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의 진정한 주제가 종교 토론에 불과한 것을 모른 채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순히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인 학자들이나 사역자들 조차도 이 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슬람을 다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꾸란의 진정한 주제가 하나님 자신과 그의 계획에 대한 계시나 인간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을 알며, 사랑하고, 찬양하게 하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맛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꾸란의 허구성을 그들도 깨닫도록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나 맹목적인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두움에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꾸란의 내용은 지극히 무의미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알라에게서부터 주어진 것으로 믿고 살아간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비교하면서 설명해 주면 전도하는데에도, 양육하는데에도 대단히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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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 코란의 주제4

무함마드 종교에 대한 가르침

ㅇㄱㄷ선교사

무함맏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좋아했다가 그들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던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수라 구절이 있다. 수라 3:119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그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함맏에게 유대-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펴서 읽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무함맏에게 성경 자체를 펴서 읽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무함맏은 자기의 거짓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거부했다. 도리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어 주면 문맹이었던 무함맏은 그것을 자기식으로 교묘하게 바꾸어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수라 3:78 “그들중에는 (유대인들 중에는) 또 한 그룹이 있는데, 책에 (타우랏에) 있지 않은 것을 ‘책에서’ 라고 너희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타우랏) 책을 혀들을 감아서 (망치고 변질시켜서) 그들이 읽어준다. 그리고 알라의 앞에서 오지 않은(자기의 말들을) ‘알라의 앞에서 온 것’ 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알라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무함맏은 구약과 신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유대-기독교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구절들이 기록된 그대로인지 꾸며서 읽은 것인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무함맏은 자기에게 굴복한 기독교인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도 했으며,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성경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그것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무함맏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거부했을 때, 무함맏은 종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너의 종교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말라” 라고 함으로써 기독교를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위 “알라의 종교”인 이슬람과 유대인들의 종교와 기독교를 동일한 올바른 종교의 범주에 놓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과 극히 일부분의 이스라엘 종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모두 이슬람 종교를 반대한 우상숭배자들이었다고 한결같이 비난하고 있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수라 4:171 “오책이여, (예수를 신이라고 말함으로써) 너의 종교에 있는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마라! 알라 영광에 오직 진리의 말만 하라! 당연히 그 예수 그리스도 마리얌의 아들은 단지 알라의 선지자이고, 그의 마리얌에게 던진 말씀이고, 또한 그의 편에서 온 영일 뿐이다. 됐다. 알라와 그의 선지자들을 믿어라! ‘(주가) 셋 (즉 알라, 마리얌 그리고 이사 셋 모두 주님들이다)’ 라고 말하지 말라! ”

꾸란에서 무함맏은 종종 유대교와 기독교를 세상에서 권위 있는 종교들에 포함시키고 있고, 심지어는 기독교에서 이단시하고 있는 분파까지 무함맏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올바른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수라 2:62 “당연히 믿는자 들이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 (알라에게 믿음을 둔, 그러나 어떤 샤리아법을 준수하지 않는 종교적인 분파인) 사비교도들 (그들로부터) 어떤 자들 (전에 어떤 종교에 있었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유일한) 알라에게, 종말의 날을 믿는다면, 그리고 잘 준수한다면,그들에게 창조주의 앞에서 상급이 있고, 그들을 위해서 위험과 염려가 없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종교는 최고의 권위가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종교이다’ 라고 자주 말한다.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 있어서 아랍 족속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아브라함이 그들의 민족의 조상이고, 종교의 조상이라고 말한다(수라 2:124). 알라가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들을 위한 이맘으로 만들었고, 그의 자손들도 이맘들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종교가 이슬람이었고, 그의 자녀들이 모두 무슬림이었다(수라2:130-132)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함맏 당시의 책의 사람들, 즉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무함맏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수라 3:19).그래서 수라 4:171; 5:77 “오 책의 사람들이여, 너희 종교의 한계를 넘어가지 말라!” 라고말한다. 이 말은 각각의 종교에 한계가 있다는 말로, 이슬람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꾸란에서 무함맏은 자주 이슬람이 가장 좋은 종교, 가장 올바른 종교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항상 한 종교를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여러 종교들을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꾸란의 종교적인 사상 때문에, 오늘날 수 많은 무슬림들은 ‘우리는 당신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있소, 그런데 왜 당신들은 우리의 종교를 존중하지 않소?’ 라고 질문한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존중한다.’ 라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모든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들, 즉 불교와 힌두교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고 하는 말인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이슬람이 절대 진리를 소유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모순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거짓된 종교들을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거짓들도 존중해 달라고 하는 간청을 하는 셈이다.

 

수라 5:19“오 책의 사람들이여! 자 우리의 사도가 너희 책들 중에서 감추어진 많은 것을 너희들에게 분명히 한 경우에, 많은 것들을 거절한 때에 왔다. 너희에게 알라로부터 빛과 분명한 책이 왔다…. 알라는 모든 것들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을 포함한 꾸란의 많은 구절에서 알라는 흔히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한다.그렇다고 이러한 인칭과 수가 꾸란 전권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1인칭 단수로, 아주 드물게는 3인칭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칭과 수에 관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유일한 신 알라에 관한 문제가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처럼, 유대인들-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럼 유일신에 관한 무함맏과 유대인들-기독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나? 사실 겉보기에는 유대인들의 유일신에 대한 사상이나, 무함맏의 유일신에 대한 사상은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대인들이 무함맏을 믿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이유는 선지자들에 대한 무함맏의 꾸며낸 이야기들과 자기들이 익숙히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 사이에 존재했던 첨예한 차이점 때문이었다. 이에 첨가하여 기독교인들의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구속사적인 중요성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함맏은 당시의 아랍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우상 숭배자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수라 3:79에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맏이 소위 ‘선지자’라고 불렀던 예수를 하나님으로써 예배하는 것에 대해 무함맏에게 말했고, 무함맏은 자기가 새롭게 시작한 종교의 사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거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을 위해 알라가 그에게 책, 지혜 그리고 선지자직을 준 후에, 사람들에게‘알라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예배하라’ 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된 것이 아니다.”

 

결국 무함맏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죄하고 저주하였으며, 결국에는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수라 29:46 “(오겸손한<신자>자들이여), 너희들은 책들을 가지고 단지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대화하라! 오직 그들 중에서 억압-폭력을 사용하는 자들과만 (예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꾸란도, 너희들에게 주어진 모세오경과 신약성경도 믿는다. 우리들의 신(일라)도, 너희들의 신(일라)도 하나이고, 우리들은 그에게만 순종한다.’라고 말하라.” 초기에 반대에 부딪혔을 당시의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차츰 노골적인 압력 행사로 악화되었다. 수라 9:29,30“알라와 말일을 믿지 않는, 알라와 그의 선지자가 부정하다고 한 것들을 부정하다고 알지 못하는, 진리 (즉 이슬람) 종교에 신뢰하지 않는 책들로 구성되는 어떤이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이 짓밟혀졌을 때 자기들 손으로 세금을 내기 전까지는 전쟁을 하라! 유대인들은 ‘우자이르가 알라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라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서나 증거 없이) 그들의 입에 있는 말들이다.” 이 말은 분명히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된다. 만일 유대-기독교의 하나님이 이슬람의 신과 동일하다면, 왜 이슬람은 억지로 유대-기독교인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려고 그처럼 가혹한 정벌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수라 5:72-73에서 보는 것처럼, 무함맏과 꾸란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노골적으로 저주하고, 유대-기독교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고 왜곡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수라 5:72-73 “알라가 마리얌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은 분명한 불신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 이스라엘이여, 나의 창조주와 너희 창조주가 되는 알라에게 종노릇하라!’ 라고 말했다. 당연히 누구든지 알라에게 쉬르크를 초래하면, 알라가 그에게 낙원을 부정하게<하람> 할 것이고, 그의 있을 곳은 지옥이 될 것이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돕는 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알라는 셋 (즉 알라, 마리얌, 이사) 중의 하나이다’ 라고 하는 자들도 분명히 불신자들이다. 왜냐하면 유일한 알라 외에 어떤 신(일라)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말하고 있는 말들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들 중 불신자가 된 자들을 고통스러운 고난이 붙잡을 것이다.” 수라 3:67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였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무슬림이었고,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무함맏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무슬림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는 알라의 참된 종교, 이슬람이었다고 우긴다. 이렇게 주장해야 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함맏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라고 꾸란에서 여러 번 주장한다. 그는 자기가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끊임 없이 주장한다. 즉 무함맏 자신과 이슬람 종교의 역사성에 치명적인 결핍이 있는 것이다.인류의 역사가 수천년이 흐른 이후에, 즉 7세기 초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슬람 종교에는 역사적인 기반과 배경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역사 시작부터 변함없이 존재했던 종교를 자기의 종교로 삼고, 그 역사적 전통을 가로채는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모두 사실은 이슬람이었다’ 라는 억지주장을 내세웠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라비아 반도로 옮겼으며, 모든 선지자들을 무슬림으로 만들었고, 자기는 가장 신실하게 이슬람 종교를 확증하는 최후의 선지자의 자리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모두 불신자들이며, 우상숭배자들로 정죄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한 후에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길들을 막아놓았다. (알라에게 복종을 의미하는) 이슬람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알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수라 3:105 (종교적) 토론에 빠지는 사람처럼 되지 말라. 그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슬림들에게는 꾸란과 무함맏의 권위와 진실성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도 해서는 안된다. 무함맏은 이미 유대인들-그리스도인들과의 종교적 토론에서 자신의 거짓이 충분히 드러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종교적인 토론을 할수록 자기에게 불리할 뿐만 아니라, 이후 자기를 따르던 무슬림들도 종교적 토론을 하게 되면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는 어떤 대화도 용납치 않았고, 철저히 전쟁과 세금과 같은 압제를 통해서만 그들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명령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무수히 많은 무슬림들이 참된 진리를 알고 싶어도 무함맏의 협박과 주변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그 의심을 감추고, 진리를 알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많은 두려운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일관되게 협박과 공갈로 자기 종교에 붙어있도록 강요하였다. 수라 41:13 “그렇다. 만일 그들이 (즉 메카의 우상숭배자들이 이 상세한 설명 뒤에도 유일한 알라를 믿지 않고) 거절하면, 그 경우에는 말하라! ‘나는 너희들을 정확히 옷-야벳-과 사묻-샘- (종족들을 내려친) 번개과 같은 한 번개, 즉 멸망이(임하는 것)을 경고한다.’”

 

무함맏의 모든 설교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창조주, 유일한 알라만을 섬기고, 알라와 그가 보낸 사도 무함맏에게 복종하고, 알라와 무함맏의 종교인 이슬람을 따르라는 명령으로 함축된다. 꾸란의 다른 모든 내용은 이것을 확증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이것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꾸란에도, 하디스에도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다. 이것이 이슬람 종교의 전부이다. 모세오경, 시편, 신약성경, 그리고 그들의 모든 내용들과 선지자들은 단지 알라가 유일한 참 신이며, 알라가 그의 사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수라 61:11). 즉 무함맏은알라의 이름도, 모든 선지자들도, 천사들과 영적 존재들도 모두 자신이 많든 새로운 종교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이용하고 있다.

 

무함맏은 알라에게도 종교가 있고, 그것이 곧 이슬람이며, 따라서 이슬람은 창세전부터 있었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이슬람은 최후의 종교이며, 무함맏은 최후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다는 논리적 모순을 과감하게 자행한다.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종교가 필요한데, 그것은 곧 유일한 신 알라에게 복종하는 이슬람이라고 가르친다. 천국은 종교적인 교훈이 가득찬 곳이다. 그리고 복종하는 자들은 곧 믿는 자들이며, 그들은 곧 무슬림이라고 가르친다. 무함맏이 말하는 종교와 무함맏의 조상들이 섬겼던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함맏이 말하는 모든 종교 의식들은 아랍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온 것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함맏은 자기 종교의 정통성을 성경의 선지자들의 종교에서 찾는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는 어떤 종교를 고안해 내려고 노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경에서는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교제를 한 번도 종교라는 용어로 설명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께 어떤 종교가 종속되어 있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적 주제들 중에 유사한 것들이 대단히 많은 것은 무함맏과 유대-그리스도인들의 끊임 없는 논쟁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의견의 일치를 얻지 못했다. 성경을 읽을 줄 몰랐던 무함맏은 궁지에 몰렸던 것이다.무함맏은 문맹으로서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자기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대-그리스도이들은 단순히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연구하는 자들이었다. 무함맏의 거짓말들은 모든 선지자들의 삶과 믿음과 그들에게 주어졌던 약속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대인-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명백히 드러났다.그럴 때마다 무함맏은 억지로 꾸며낸 거짓말들로 그들을 공격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무슬림과 대화를 할 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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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 코란의 주제3

무함마드 종교에 대한 가르침

ㅇㄱㄷ 선교사

당시 아랍 사람들은 무함맏의 꾸란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비난 하였다. 수라 25:4-5 그 당시의 사람들이 꾸란에 대해 비난한 내용이다.

“불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이 꾸란은) 단지 (무함맏) 자신이 스스로 꾸며낸 거짓말이다. 그에게 이 (거짓말을 지어낼 때) 다른 어떤 종족 (특별히 책들의 종족)이 도와 주었다’ 라고 모독하고 중상한다. 또 그들은 ‘(이것은) 이전에 있던 전설인데, (무함맏이) 그것들을 다시 고쳐 쓴 것이다. 그렇다. (이 전설들은 어떤 자들 편에서) 그에게 아침과 저녁에 읽혀져 주어진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난을 들으면서 무함맏을 따르던 자 중 일부도 무함맏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였다. 이럴 때 무함맏은 그들도 독한 말로 욕을 하였다. 수라 33”12-13 “그 때 외선자들과 마음에 상처 받은 (즉 확신이 약한) 어떤 자들이 ‘알라와 그의 선지자가 우리들에게 오직 거짓 약속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많은 반대에 부딪히자 무함맏은 화가 났다. 무함맏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며,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며,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수라 43:22-26 “아니다. 그들은 말했다. ‘당연히 우리는 조상들을 한 종족-종교 위에 있었고, 당연히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그러므로 우리<알라>는 당신<무함맏>보다 전에 어떤 마을과 도시에 어떤 증거자-선지자 보내지 않았다. 단지 그곳의 나타난 것들이 : ‘당연히 우리 조상들을 한 족속-종교 위에서 찾았고, 당연히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라고 한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만일 내가 너희들에게 너희 조상들을 찾은 종교에서 올바른 종교를 끌어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말할때 , 그들은 : ‘당연히 우리들은 너희들이 사도로 만들어 보낸 종교에 불신자들이다’라고 말했다. 됐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보복을 받았다. 이제 그를 (자기 선지자들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자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라!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종족에게 말했었다. ‘당연히 나는 당신들을 숭배하는 우상들보다 정결하다.” 무함맏은 자기 동족들과 종교적인 문제로 다투게 될 때에도 자기 조상들이 섬겼던 잘못된 우상 숭배보다 올바른 종교를 끌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아브라함에게 두어,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와 동족들이 섬겼던 우상 숭배에서 참 종교를 이끌어 낸 것과 같은 행위을 무함맏 자신이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아랍 우상숭배자들의 비난 중에는 근거 없는 것들도 있었다.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무지막지하게 대한 것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랍인들의 우상 숭배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으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지적되는 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함맏은 단지 아랍인들에게서만 반대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았다. 무함맏이 당시의 사람들과 함께 했던 것처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축복 대신에, 서로에게 욕지거리와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던 지독한 말다툼으로 구성되어 있는 종교의 경전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꾸란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아니라 무함맏이 자기의 반대자들에게 무섭게 쏟아부은 저주로 가득찬 책이다. 꾸란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진리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한 거짓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채운 책이다. 수라 32:13 “나는 지옥을(불신자) 귀신과 사람들의 모든 자로 채우는 자이다.” 이러한 소름끼치는 말을 마귀 이외에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한 독한 저주를 퍼붓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런 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메카에서 무함맏의 종교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 도리어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았고,심지어는 그를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수라18:15,16“자우리 종족은 그 분 외에‘신들을’ (신)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 우상들이 신인 것에 대하여) 분명한 한 증서를 가져온다면. (결코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 (어떠한 문서도 없이, 동료가 있다 라고 하여) 알라의 영광에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보다도 난폭한 자가 누가 있느냐? (젊은이들이여!) 너희들은 그들과 알라 외에 그들이 숭배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서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 (유일한 너희의 창조주, 알라 자신에게 예배하기 위하여) 동굴에 피난처를 찾아가라! 너희 주가 너희에게 자기 은택을 크고 풍성하게 할 것이고, 너희들의 일들을 번성시킬 것이다.”

 

아랍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하고 반대하자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모든 아랍인들을 정죄하였으며, 점점 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를 품게 되었다. 수라 6:114 “(오무함맏,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말하라!) ‘나는 알라 외의 다른 것을 맹세하겠는가? 그 자신이 너희들에게 이 책 (꾸란을) 상세한 (즉 너희들이 논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충분히 답변을 주는) 상태로 내려준 자이지 않느냐?’ 우리가 책을 준 사람들(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그의(꾸란이) 너희들의 창조주보다 진리로 내려진 것을 알 것이다.” 수라 11:17 “자 이제 창조주 편에서 온 분명한 증서를(즉 꾸란을) 소유한 사람이 (단지 이 세상의 유익들만을 찾는 사람들과 똑같겠는가?) 오히려(알라) 편에서 온 증거 (즉 가브리엘 천사가) 그의(무함맏의) 동료이고, 그보다 이전(즉 분명한 문서인 꾸란보다 이전에) 모세의 책(타우랏이) 있었다. 그것은(이스라엘을 위해 온) 인도자와(알라의) 호의이었다. 자, 그 자들이 (즉 분명한 증서를 소유한 자들이) 그것을(꾸란을) 믿게 될 것이다. (선지자에게 대항하여서는) 집단들 중에서 누구든지 그 꾸란에 불신자가 되면, 그에게 약속된 장소는 지옥이다.” 수라 21:7 “(오무함맏) 우리는 너보다 전에도 (천사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사람들을 (즉 인간들을)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계시를 보낸 상태로 선지자로 삼았다. 그렇다. (오 메카 족속아) 만일 너희들이 모를지라도 (타우랏, 인질을 아는) 족속의 지식있는 자들에게 물어보라!”

 

수라 21:7은 알라도 무함맏처럼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할 것을 모르고 기대를 하였던 무지한 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알라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도 모르고 무함맏에게 말했던 것이다. 수라 29:46-47에서 볼 수 있듯이 무함맏은 그의 사역의 초기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라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쳤다.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친근한 책-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오직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토론하라! 단지 그들 중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과만 (날카로운 관계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너희들은 말하라! ‘우리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것에도 (꾸란도), 너희들에게 내려진 (타우랏과 인질도) 믿는다. 우리들의 신도, 너희들의 신도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에게만 복종을 한다.’ (오 무함맏, 우리는 너보다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에게 책들을 내려 주었다.) 그러므로 너에게도 책, 즉 꾸란을 내려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책이 (즉 타우랏과 인질이) 주어진 자들은 그것을 (즉 꾸란을) 믿을 것이다.” 무함맏과 그의 신 알라와 오늘날의 무슬림들은 이 본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끊임없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선을 행하고 있고, 또한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평화를 원하더라도 무슬림들은 결코 평화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무함맏은 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옹호할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과 책을 읽는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 모두를 인정하여 주었다. 수라 3:52-54 “이제 언젠가 예수가 그들 (유대인들) 편에서 불신(신성모독)을 보고서, ‘알라의 (종교에 초대할 때) 누가 나에게 협력자가 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사도들이 ‘우리가 알라의 종교에 협력하는 자들입니다. 알라를 믿었습니다. 오 예수여, 증거하소서, 우리는 알라에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창조주여, 증거한 것을 믿었습니다. 당신의 선지자를 따랐습니다. 충분합니다. 우리를 증거자들의 반열에 기록하소서!’ 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교묘하게 했다. 알라도 교묘하게 했다. 알라는 더 교묘하게 하는 자이다.” 수라 10장은 무함맏이 초기에 이스라엘 민족과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극도로 호의적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라 10:93-94 “의심없이 우리는 이스라엘을 빼어난 최종적인 곳에 장소를 정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하고 깨끗한 것들에서 양식을 주었다. 후에 그들이 지식(즉 모세오경)이 주어질 때까지 불일치(모순) 하지 않았다.…… (오 무함맏), 만일 우리가 너에게 밝힌 것들에서(즉 전에 종족들에 대해 밝힌 우리 구절들에서) 의심하게 된다면, 그럴 경우에 너보다 전에 있었던 책(즉 모세오경과 신약성경) 읽는 사람들로부터 물어보라! 분명히 너에게 창조주 편에서 진리인 꾸란이 왔다.” 수라 44:29-32 “그렇다. 그들에게 하늘도, 땅도 울지 않았고, 그들에게 기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 참으로 우리는 그들을 아는 상태에서 모든 세상들, 즉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였고, 선호하였다.” 비교적 초기의 메카 수라에 속하는 위의 44장에서 무함맏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동경심과 감정은 거의 눈물을 쏟을 직전이었다. 수라 45:16도 비슷한 내용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스라엘 (종족)에게 책, 즉 타우랏, 지혜 그리고 선지자직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들을 정하고 깨끗한 것들에서 양식을 주었으며, 또한 그들을 모든 세상보다 높게 했다.”

 

그래서 무함맏은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자기가 만든 새로운 신과 종교가 서로 비슷하니 함께 숭배하자고 제안한다. 수라 3:64-65 “ ‘(오무함맏) 말하라! ‘오 친근한 책’ (즉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동일한 한 말씀에 일치하여 유일한 알라에게만 예배를 드리자! 그에게 어떤 것도 동료로 만들지 말자! 그리고 알라를 두자! 어떤 것들을 신으로 삼지 말자!’ 만일 그들이 (즉 친근한 책들 그 초대를)거절하면, 그 때는 너희들이 (오 신자들이여) ‘너희들은 증인이 되라! 우리는 무슬림들이다. 유일한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들이다’ 라고 말하라! ”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먼저 무함맏은 자기가 유대-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즉 구약과 신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와서 그것을 확증하는 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무함맏은 우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 모세의 종교, 노아의 종교이고, 무함맏은 그들의 종교에 꾸준히 머물러 있는 자라고 주장한다. 수라12:38,39 “나는<무함맏은> 나의 조상들의 길,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종족과 종교를 따른다. 우리를 위해서 알라에게 어떤 것을 동료로 만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 오 친구들이여, 흩어진 다양한 안개 “신들”이 더 좋은가 아니면 유일하고 승리자 알라가 더 좋으냐? 너희들은 그를 버려두고, 자기들과 조상들이 부른 이름들 -우상들에게만 예배하고 있다… 가장 올바른 종교는 바로 이것이다.” 라고 말한다.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과 조상들이 섬겼던 알라의 동료신들을 비난하고 있으며, 이슬람이 가장 좋은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 종교가 가장 올바른 이유는 알라에게 다른 동료가 없는 유일한 신이기 때문이며, 정통 아브라함의 종교를 따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함맏과 이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아랍 조상들로부터 참된 이슬람 종교를 물려 받았다는 증거가 꾸란에는 전혀 없다. 무함맏에게 있어서 아랍인들은 조상 대대로 우상들을 섬긴 불신자들이었다. 무함맏이 자신의 선지자직의 정통성과 권위를 찾는 것은 자신의 조상들이 섬겼던 종교도 아니고, 결코 자신의 조상도 아닌 아브라함의 종교에 언제나 호소한다. 심지어 무함맏은 아브라함을 자기의 조상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한다. 무함맏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모세와 노아와 예수 등 모든 선지자들이 이슬람 종교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라고 선동한다. 수라 42:13 알라가 노아에게 명령한 것과 같은 동일한 종교를 너희를 위해 제정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종교를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즉 무함맏은 알라의 종교에 있어서 꾸준히 머물러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분할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한결같이 무함맏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무함맏은 자신이 과거의 다른 선지자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자라고 주장한다.수라 46:9 “(오무함맏) 말하라! ‘나는 선지자들 중에서 새롭운 자도, 첫번째도 아니다. (즉 나보다 이전에도 알라의 선지자들이 지나갔다. 왜 너희들은 나의 선지자들에게 놀라서 부정하려고 하느냐?) 나는(미래에) 자신에게도 너희들에게도 무엇이 이루어질지를 모른다. 나는 단지 자신에게 계시된 것을 따르는 자이다. 나는 단지 분명한 경고자이다.” 그러나 무함맏은 자기 자신이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하여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한 것, 즉 전혀 특별한 점이 없고, 첫번째도 아닐만큼 뛰어난 점도 없다고 소개한 것과는 달리, 신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을 뒤엎어 놓을 만큼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를 존재가 되었다. 더군다나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자가 선지자들 중의 가장 위대한 지위를 찬탈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무함맏은 자신이 성경에 자신이 예언되어 있으며, 자신은 성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있는 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함맏은 선지자들과 예언이 중단되었던 역사를 이어주는 자라고 선포한다. 수라 5:19“오 친근한 책이여, 자 우리의 사도(무함맏)이 전에 선지자들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우리에게 어떤(천국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와 어떤(지옥의 고통을) 두렵게 하는 자가 오지 않았다.’ 라고 너희가 말하기 때문에 너희들에게(종교 법령들을) 선포하려고 왔다. 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와(지옥을) 두렵게 하는 자인 자가 왔다.” 본문은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대한 무함맏의 무지를 드러낸다. 신구약 성경이 종결된 이후 상당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떠한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무함맏은 바로 이러한 세월을 간격을 이어주는 최종적인 선지자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무함맏이 문맹이 아니었고, 계시록을 한 번만이라도 읽었다면, 이미 오래 전 성경에 선포된 무서운 저주를 자기에게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 22:18-19“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19:19-21“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탄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 도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그러나 이러한 무함맏의 제안이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처음부터 한결같이 거절되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이다. 수라 3:65-71에서는 유대-기독교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했을 때, 그가 상당히 실망했음을 보여준다. 수라 3:65 “오 친근한 책, 왜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는 우리의 종교에 있었다 라고 하여) 논쟁하느냐! 결국엔 타우랏도, 인질도 그 후에 주어진 것이 분명하지 않으냐? 도대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들이 아는 것들 (모세와 예수 선지자들에)대하여 논쟁하고 있다. 이제 무엇 때문에 너희가 모르는 것 (아브라함이 어떤 종교에 있었는지)에 대하여 논쟁하려 하느냐? 알라는 알고 있고, 너희는 모른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오히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경우에 (알라에게) 복종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상숭배자들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더 가까이 있는 자는 그(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자 이 선지자 (무함맏)과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알라는 겸손한 자들의 친구이다. 친근한 책 중 한 교파는 너희들을 (너희 참 종교로부터) 혼동시키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느끼지 못할 때에 단지 자기들만 혼동시킬 뿐이다. 오 친근한 책이여, 무엇 때문에 너희 자신들이 증거자 되어 알라의 (타우랏에 있는 무함맏이 참 선지자인 것에 대한) 구절들을 부정하느냐? 오 친근한 책이여, 무엇 때문에 너희 자신들이 알면서도 진리를 거짓과 혼합시키고 진리를 가두느냐?”

 

위의 본문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무함맏의 주장으로, 유대인들이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충분히 ‘미친 사람이 지껄이는 헛소리이다’라고 말했을 법한 말이었다.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은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인데, 아브라함이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 즉 무슬림이었다고 억지를 부린다.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장 가까이서 추종하는 자는 무함맏과 무슬림들이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무함맏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짓 선지자로 판단하고 배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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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꾸란 외에도 무함마드의 언행이 담긴 하디스에 근거하여 행동한다.

꾸란에서 알라는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의 말에 따를 것을 명령하고 있기에

무슬림들은 하디스의 가르침에 복종한다. 

 

 

무함마드가 메디나를 다스리던 시절, 사람들은 논쟁을 해결하려면 무함마드에게 갔다.

어느 날 한 무슬림 남자가 유대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문제를 판결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유대인 남자가 말했다.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갑시다. 그가 판결해줄 것이오." 

 

 

무슬림 남자는 이를 거부하고 무함마드의 군대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자 유대인을 싫어한다고 알려진

우마르 이븐 알-카탑에게 가서 판결을 구하자고 말했다.

우마르가 말했다. "나한테 오지 말고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가시오."

무슬림이 말했다. "아닙니다. 당신이 판결해주십시오."

  

그러자 우마르가 "잠깐 기다리시오."라고 말한 뒤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가 칼을 갖고 나와서 무슬림 남자의 목을 베어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슬퍼했는데,

그 이유는 무슬림들은 다른 무슬림을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도 슬퍼했다.

우마르는 무함마드가 가장 아끼는 충직스런 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무함마드는 또 다른 계시를 받는다.

  

 

"그들이 그들 사이에 일어난 모든 분쟁을 그대(무함마드)에게 가지고 와서 판결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대의 판결에 아무런 불만 없이 전적으로 그 판결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참된 무슬림이 아니다. (꾸란 4:65, 4:59)

  

다시 말해 무함마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구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사람이므로 그는 무슬림이 아니다.

따라서 우마르가 죽인 사람은 무슬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여도 괜찮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계시를 직접 들을 수 없으므로

무함마드의 말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만일 무슬림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와 같은 내용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전승에 의해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이라면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부정확한 묘사를 하는 이유는

하디스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무함마드가 이슬람의 대표자가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무슬림의 시각에서 이런 태도는 이단이다. chw

 

- 마크 A. 가브리엘 <이슬람과 유대인 - 그 끝나지 않은 전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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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경장 (알파티하)

 

1.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2. 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3. 그분은 자애로우시고 자비로 우시며

4.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5.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오며 당신에게만 구원을 비노니

6.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7.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



메카에서 계시된 7절로 자주 낭송되는 꾸란의 진수다.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을 7절이라고 꾸란(15:87)은 언급하고 있다. 무슬림이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를 통해서 최소한 17회 이상 암송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본장을 암송하지 않는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이바다 이븐 사미트」는 전하고 있다.

본 장은 이슬람의 기본원리를 비롯하여, 우주만물의 운행질서를 주관하는 주체자에 대한 인간의 태도, 내세관, 경배와 구원의 대상자,인류가 걸어야 할 바른 길,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속성, 신의 노여움을 받았던 민족과 방황했던 민족에 대한 역사적 사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본 장의 명칭은「알파티하」외에도 책중의 책(Ummul Kitab), 찬양(alHamdu), 질병의 치료(al Shifa'a), 무궁무진한 지식의 창고(al Kanj) 등 12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예배는 본 장이 제일 먼저 암송됨으로써 시작되고 예배의 효력이 발생한다. 즉 본 장이 암송됨으로써 신앙의 문이 열린다는 의미에서 개경장(Fatiha, or the Opening Chapter)이라 불리워지게 된 것으로 본다. 본 장이 서두에 있으나 그것은 계시된 순서가 아니라 편집상의 순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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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최영길교수/꾸란해설 번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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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쓰밀라 히르라흐마 니르라힘

 

꾸란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나 영혼, 정신, 그리고 육체라고 하는 특징을 감안해서, 이들 인류의 훌륭한 가치에 상응한 형태로 최고로부터 내려진 것입니다.

오늘날 10억이라는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꾸란에는, 알라로부터 받은 영원한 동시에 보편의 원리원칙이 기록되어 있으며, 최단거리로 행복으로 연결되는, 빛으로 비추어진 길로 사람들을 데려가고 있습니다.

꾸란은 지금까지 세계를 인솔하고 장려한 문명을 발달시킨 많은 사회에서 빛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몇천몇만이라는 학자나 철학자, 사상가를 배출해 왔습니다. 이 의미에서, 이 이외의 어떠한 규범도 꾸란의 규범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계시가 이루어진 날 이래, 꾸란은 수많은 이의나 비판에 처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꾸란은 상처를 입는 일 없이 항상 승리에 빛나고 있습니다.

꾸란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결정화되어, 정신을 개발하고, 시종일관 진실을 명시합니다. 한 송이의 꽃 안에 우주의 온갖 미를 찾아내는, 그리고 한 방울의 물방울에서 세찬 폭풍우를  마음속에 그릴 수 있는 신자만이 그 참다운 용모를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랍인뿐만 아니라 아랍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의 언어학자・문학자는 꾸란의 운문을 듣고 칭찬한 나머지 항복이라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진정함을 인식하고 내용을 이해한 자는 이 웅변적인 걸작 앞에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무슬림들은 꾸란에 확신을 갖고, 마음속으로부터 믿는 것을 통해서만 단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는 무슬림일 수 없고, 또 동료들과 강고한 약속을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앙이란 양심의 문제이다" 라는 의미는, "나는 알라를 믿으며, 그 예언자와 꾸란도 믿습니다" 라고 혀와 양심의 쌍방에 따라서 단언합니다. 이것들을 이해한 연후에 행해지는 숭배행위의 하나 하나가, 이 선서를 진실로 증명해 줍니다.

인류가 무지와 불신앙이라는 야만함의 한가운데에서 바둥거리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꾸란은 이 세상에 용솟음치며 나와서, 계몽이라는 홍수에 의해 온세계를 빛으로 흘러 넘치게 했습니다. 꾸란은 비류가 없는 방법으로 혁명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증인을 찾으라면 역사가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꾸란은 인류가 존재하는 의미와 그 성질, 진실과 지혜, 그리고 신(神)의 본질과 속성・아름다운 이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균형잡힌 방법으로 가르쳐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이 보다 우수한 책은 달리 없습니다. 학식있는 성자가 널리 알린 예지나 참다운 현인들이 보인 철학에 접하면 일목요연할 것입니다.

꾸란은 진짜의 정의, 참다운 자유, 균형잡힌 평등, 선량함, 존경, 미덕, 그리고 자비의 실천을 모든 창조물에게 명령하고 있는 유례가 드문 책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억압과 다신교, 부정, 무지하게 있는 것, 오직(汚職) , 이자, 거짓말, 그리고 위증을 금지한 비류가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또 꾸란은 고아와 가난한 사람, 억압된 사람들을 옹호하고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리고 왕도 노예도, 사령관도 병졸도, 원고도 피고도, 똑같은 의자에 앉혀서 재판을 받게 하는 오직 하나의 책입니다.

꾸란이 미신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명시대 아랍인이 14세기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견해는 지혜와 참다운 철학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꾸란과 그것이 가져온 것을 비판한다면 그 사람들은, 인간생활에서의 질서와 조화, 평화와 안전을 아주 단기간, 아니 한 순간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떠한 방법을 갖고 올 수 있는 것일까요? ・・・꾸란과는 관계가 없는 원리원칙을 바탕으로 한 문명의 비참함, 불안정을 접할 때 마다, 또 빛을 빼앗겨 곤란에 처하고, 타격을 받아 신음소리를 내는 수많은 마음을 눈으로 볼 때 마다, 그들처럼 비뚤어진 생각・옹고집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최고로 질서가 있는, 정연한 생활이라는 것은 꾸란의 숨결이 가져 오는 생활입니다. 실제, 오늘날의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높은 평가・칭찬을 받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일 중에는 몇세기도 전에 바로 꾸란속에서 장려되던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무슬림이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마치 직업인냥 꾸란을 계속 공격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내용에 관해서는 애매하고 표면적인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꾸란을 면밀하게 알아보지 않고, 또는 읽어 보는 것 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을 제멋대로 내퍼붓는 것은 짓궂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사람들의 태도와 일부 무지한 사람들이 실증적 과학에 대해서 보이는 옹고집과의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진실에 눈을 떠 주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 (그에게 평화와 축복이 있으소서)를 믿고, 그리고 꾸란을 믿는 사람은 알라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꾸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 것이 되고,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다면 알라를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무슬림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적인 양상입니다.

꾸란의 힘에 의해서 사람들은 최고의 수준, 즉 알라께서 말을 걸어 주시는 것  같은 지위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이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의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꾸란을 통해서 자기에게 이야기해 주시는 것을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저는 맹세코 알라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꾸란의 계몽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면, 우리들이 무덤,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지점을 마치 통과하고 있는 중인 것 같이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최후의 심판의 날을 지나 시라-트의 다리 (천국으로의 다리)를 건너는 체험, 지옥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격심한 몸서리, 천국의 완만한 언덕에서 나아가는 평온한 걸음 이라고 하는 경험들을 몸소하게 될 것입니다.

무슬림이 꾸란을 이해하고 깊은 곳에서 그것을 감지하는 것을 방해한 자들은, 그 결과 무슬림을 이슬람의 정신과 정수로부터도 멀어지게 하는 데에 성공한 것입니다.

가까운 장래에, 지식과 기술, 예술의 추세는 꾸란이라는 대양을 향하는 격류가 되고, 실제 그것들의 근원이었던 그 대양으로 흘러들어가서 융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칭찬과 경악으로 그것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장래에 꾸란의 시대가 도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지켜보시는 분의 말씀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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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 “계시”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의 실체 이해

 
I. 서론

꾸란에서 "계시“전달자로 “가브리엘 천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은 Sura 2:97-98과 Sura 66:4이다.

그 밖에 Sura 53:5-7에서는 “가브리엘 천사”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3인칭 대명사 “그(he)”에 대한 각주내용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다루고 있다. 또한 Sura 97에서는 “계시” 전달자로 ‘the Rū�ḥ€(the Spirit)’가 한국어 꾸란에 각각 “성령” 또는 “가브리엘 천사”라고 번역되어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Sura 2:97-98, 53:5-7은 모두 메디나 “계시”이고,

 

 “가브리엘 천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Sura 53:5-7과 97은 메카 “계시”라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최영길은 “어느 날 밤 무함마드는 눈 앞에서 신의 모습을 대하고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 하였으나 메디나 이주 후 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유대교의 교리를 알고 천사 가브리엘의 강림이라고 해석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슬람 학자조차도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던 당시에 자신에게 “계시”를 전하여 준 “계시”전달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최영길은 무함마드가 “계시”전달자를 “가브리엘 천사”라고 확신하게 된 동기를 유대교의 교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에 부인 카디자의 사촌, ‘와라카 이븐 나우팔 (Waraqa Ibn Nawfal)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와라카는 기독교인이었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듣고 성서내용의 일부를 읽어서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븐 히샴’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카디자와 함께 와라카를 찾아가지 않았고 다만 카디자가 전해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카디자로부터 무함마드가 보고 들었던 것들에 대하여 전해들은 와라카는 “It is the great Namus.”라고 하면서,

만약 무함마드에게 일어난 일이 사실이라면 무함마드는 선지자가 틀림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Namus”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브리엘 천사”로 해석하게 되어 진 것이다.

아랍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Namus”5는 “비밀-secret” or “법-law”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무슬림들에게는 “가브리엘 천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는 현대 이슬람사회에서 . “Namus” “명예”나 “권위”를 상징하는 단어로 가족구성원들 사이에서, 특별히 부인들이나 딸들, 여자형제들에 대한 남성의 명예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모세에게 율법이 임했듯이 무함마드에게 임한 “율법”을 “Namus”라고도 하고,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주었다는 “가브리엘 천사”를 “Namus”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와라카는 카바신전을 돌아보고 있는 무함마드를 찾아가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무함마드에게도 임했음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와라카는 메카의 기독교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도 아니었고

무함마드에게 임한 ‘영’을 정의해 줄만큼 영적으로 성숙한사람도 아니었다.

 

다음은 “가브리엘 천사”에 대한 언급이 있는 꾸란 구절들이다.

직접적인 언급이 있는 구절들과 간접적인 언급과 더불어 해설이 있는 꾸란 구절들을 고찰함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계시”전달자로 소개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꾸란 “계시”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천사”에 대한 실체를 각각 무함마드의 이해, 카디자의 이해, 민속 신앙적 이해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렇게 각기 다른 해석을 하는 이유는 꾸란 “가브리엘”의 “계시”에 관한 구절들8에서 볼 수 있듯이 “계시”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천사”가 한 번도 자신을 가브리엘 천사라고 소개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꾸란은 “가브리엘 천사”를 “성령”이라고 정의하고 있어서, 꾸란 “계시”에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의 정체성 문제는 기독교 신관인 삼위일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꾸란의 “계시”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천사”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II. 가브리엘 천사”에 대한 언급이 있는 꾸란 구절들

A. Sura 2: 97-98

Sura 2는 메디나에서 계시된 286절로 전체 114장 중 가장 긴 장이다.

Sura 2의 장명은 “바까라(암소)”인데 내용 중 삼분의 일 이상이 성서의 백성들이라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의 자손 유대인들과 메디나에서 거주하고 있는 무슬림들과의 관계, 그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음모, 죄악 등의 일련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10 이는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 들이며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세력들이 메디나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러므로 Sura 2 : 97-98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계시”의 권위를 피력하면서 자신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은 Sura 2 : 97-98의 내용이다. 일러 가로되 가브리엘 천사의 적은 하나님의 적이라 말하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그대에게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꾸란을 계시하셨나니 그것은 이전에 확증되었노라 그것은 믿음이 진실한 자의 길이요 복음이니라 하나님과 그분 의 천사들과 가브리엘과 미카엘에게의 적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적이거늘 실로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대적이시라

다음은 아랍어 꾸란의 음역으로 아랍어 원전에 “Jibriila (지브릴-가브리엘의 아랍어 격변화)”가 분명

히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Qul mań€-kaana 'aduw-walli-Jibriila fa-'innahuu nazzalahuu 'alaa qalbika bi-'iẓ�nillaahi muṣ€addiqal-limaa bayna ya-dayhi wa hudań�w-wa bushraa lil-Mu'-miniin,- (Sura 2:97) Mań€-kaana 'aduwwal-lil-laahi wa malaaa-'ikatihii warusulihii wa Jibriila wa Miikaala fa-'innallaaha 'aduwwullil-kaafiriin. (Sura 2:98)12

메디나 “계시”는 특성 면에서 메카 “계시”와 많은 차이가 있다. 꾸란 114개 장중에서 메디나 “계시”는 20개이고 나머지 94개의 장은 메카 “계시”이다. 그런데 장과 절의 길이를 보면 꾸란 전체의 3분의 1이 메디나 “계시”이고 3분의 2가 메카 “계시”이다. 그런데 초기에 “계시”된 메카 “계시”에 비하면 메디나 “계시”는 그 장과 절의 길이가 길다. 왜냐하면 메카 “계시”가 단지 우상숭배의 부정과 알라에 대한 유일신 신앙의 확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메디나 “계시”는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건설로 인하여 ‘움마’의 개념이 메디나 “계시”속에 나와 있으며 ‘움마’의 질서를 어떻게 이룩하여야 할 것인가가 메디나 “계시”에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메디나 “계시”는 군사를 포함한 정치적, 사회적 요소가 포함되어있다. 특별히 사회성이 풍부한 것이 메디나 “계시”의 특색이라고 한다. 즉 메카 “계시”가 우상숭배의 부정과 알라에 대한 유일신 신앙의 확립이었다고 한다면, 메디나 “계시”는 정치적 시기를 맞아 대외적인 요소와 함께 대내적인 사회성을 풍부히 한 것이다. 무함마드가 “예언자”로서 메디나에서 살았던 시대는 10여년에 지나지 않지만 이때의 “계시”적 특성은 군사를 포함하는 정치성 때문에 “계시”의 구절이 산문조로 되고 내용도 훨씬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메카 “계시”처럼 암시적, 종교적, 상징적 이라기보다는 현실성이 많이 보인다.

메디나 “계시”는 기독교의 교리서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Sura 2 : 97-98은 “계

시”로서의 꾸란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보인다. 무엇보다도 Sura 2 : 97-98은 꾸란의 “계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전해 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14 이 구절은 메카에서 최초로 “계시”되었다는 Sura 97과는 다른 입장에서 서술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Sura 97에서는 ‘the Rū�ḥ€(the Spirit)’를 한국어로 “성령”과 “가브리엘 천사”로 해석하여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메카“계시”에서는 확신이 없게 기술되었던 “계시”전달자가 메디나 이주 이후에 주위의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과 사회적 필요에 의하여 더욱 확고해 졌음을 보여준다. 메디나 이주 이후에 쓰여진 꾸란 구절들이 산문적이고 상징적 이기보다 구체적인 것은 이슬람공동체 ‘움마’를 견고히 하기위한 교리작업의 일환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Sura 2 : 97-98은 꾸란 “계시”전달자로서 “가브리엘 천사”를 확고히 주장하고 있는 구절이다.

B. Sura 66: 4

Sura 66은 메디나에서 “계시”된 12절로 선지자의 가정에 관계되는 규범을 소개하면서 무슬림여성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무함마드와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순결을 지키고 믿음에 충실한 여성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과 믿는 사람으로서 실수하고 , 과오를 범했을 때는 즉시 참회하고 선행으로 속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언급되고 있는데, 무함마드에게 누를 끼쳤다는 부인 ‘하프사’와 ‘아이샤’가 회개하지 않고 이로 인하여 무함마드가 이혼하게 된다 하여도 “가브리엘 천사”가 무함마드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Sura 66:4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일 너희 둘이 하나님께 회개하면 너희에게 복이 될 것이라 또한 너희 마음도 이미 그렇게 기울었노라 너희 서로가 그분께 거역한다 하여도 하나님과 가브리엘천사와 믿음으로 의로운 자들이 그분을 도울 것이며 천사들도 더욱 그러하리라.

다음은 아랍어 꾸란의 음역으로 아랍어 원전에 “Jibriilu (가브리엘)”가 분명히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메디나에서 쓰여진 구절은 아랍어 원전에서 ‘the Rū�ḥ€(the Spirit)’가 아닌 “Jibriilu (지브릴-가브리엘의 아랍어 격변화)”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이는 Sura 2 : 97-98에 관한 설명과 같이 ‘움마’공동체의 확립과 사회적 필요에 의하여 이슬람의 교리를 설법하고 꾸란 “계시”의 권위를 세우고자 메디나 이주 이후 후대에 이르러 “가브리엘 천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구절들이라고 볼 수 있다. 본 장은 메카에서 “계시”된 5절로 이루어져 있다. 메카에서 내려졌다는 꾸란 구절들은 이와 같이 메디나에서 “계시”되었다는 구절들에 비하여 짧은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구절의 길이에 따라 구성된 꾸란의 특성상 꾸란의 뒤쪽에 있는 장들이 주로 메카에서 “계시”되었다는 구절들이다. 97장의 특징은 “계시”의 전달자인 “가브리엘 천사”가 주석에만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구절들과 달리 메카에서 “계시”되었다는 Sura 97에는 “Jibrill(가브리엘)”이라는 단어가 아랍어 원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Tanassalul-malaaa-'ikatu war-Ruuhu fiihaa bi-'iẓ�ni Rabbihim-min-kulli' ‘amr:”(Sura 97:4)17 여기서 ‘한 영(the Spirit by Allah's permission - Ruuhu)’ 이라는 표현만 있을 뿐 “가브리엘 천사”라는 말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한국어 꾸란에 “가브리엘 천사”, “성령”이라고 표현된 것은 메디나 “계시”의 영향을 받아 꾸란 주석가들의 해석에 의한 것일 뿐이다.

본장의 명칭은 제1절의 “실로 하나님은 거룩한 밤에 이 계시를 내리나니”에서 언급된 ‘까다르’란 어휘

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꾸란 97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1. 선실로 하나님은 거룩한 밤에 이 계시를 내리나니

2. 거룩한 밤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대에게 설명하여 주리요

3. 거룩한 이 밤은 천개월보다 더 훌륭한 밤으로

4. 이 밤에 천사들과 가브리엘 천사가 주님의 명령을 받아 강림하여

5. 아침 동녘까지 머무르며 평안하소서 하고 인사하더라

Sura 97의 주제는 “경이로운 권능(능력)의 밤”이다. “계시”가 이 세상에 내려와 멋진 세상과 각 개인의 삶속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알라의 영적 능력이 나타나면서 그릇된 행실들을 바로하고 평화와 화합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다.19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가 이 밤에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꾸란이 “계시”된 것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과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새 시대가 도래 하였으나 이슬람에서는 그렇지 않다. 알라는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그의 말씀을 대신하여 보냈고 그 말씀이 꾸란(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a person)이 되었다. 여기서 무슬림들은 알라가 꾸란에서 현현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임마누엘 하시면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점은 꾸란 이라는 생명이 없는 글들과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차이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에서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손주영도 그의 책에서 “기독교에서는 신의 말씀이 ‘육신화 되었음’을 믿는데, 무슬림들은 신의 말씀이 ‘꾸란이 되어 내려왔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이 ‘신의 말씀’인 꾸란을 일생동안 부단히 읽고 암송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표현한다.”22고 한다. 여기서 “계시”전달자에 관하여 해석상의 문제를 살펴 볼 때 같은 저자인 최영길이 각각 달리 “가브리엘 천사”라고 했다가 “성령”이라고 해석한 것은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다. 물론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성령”으로 이해하고 기술 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원문의 ‘Ruuhu - the Rū�ḥ€(the Spirit)’를 생각 할 때에 “성령”이 아닌 ‘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Ruuhu - the Rū€ḥ�(the Spirit)’를 ‘성령’으로 해석하고 표현한다면 ‘Ruuhu- the Rū€ḥ�(the Spirit)’가 하나님의 영이 되므로 삼위일체론을 받아드리는 것이 되고, 그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은 아들도 없고 동반자도 없다고 할 때에 ‘Ruuhu - the Rū€ḥ�(the Spirit)’는 ‘창조된 영’으로서 성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D. Sura 53:1-18

Sura 53은 메카에서 "계시"된 62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꾸란의 메시지와 부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다른 메카 "계시"와 유사한 내용과 목적을 다루고 있다.23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는 한 점의 흠도 없고 무함마드의 이기적인 의도나 다른 사람들의 속이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절대 아니라 분명히 알라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Sura 53의 주제는 꾸란 “계시”는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이나 착각은 알라를 의심하고 알라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라는 모든 것의 원천이요 목적으로 꾸란 “계시”는 착각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중 1절부터 18절까지는 무함마드에게 영에 대하여 두 가지 비젼(vision)을 주고 있다. 다음은 1절 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이다.

1. 지는 별을 두고 맹세하사

2. 너희의 동료는 방황하지도 않고 유혹 되지도 아니했으며

3. 그의 욕망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

4. 그것은 그에게 내려진 계시라

5. 그는 능력의 있으신 분25으로부터 배웠노라

6. 그는 지혜를 가지고 나타났으니

7. 그는 지평선 가장 높은 곳에 있었노라

8. 그런 후 그는 가까이 다가왔으니

9. 그 거리는 활 양쪽 끝 사이의 길이 혹은 그보다 더 가까웠더라

10.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그의 종에게 전하고자 한 계시를 내렸으매

11. 그의 마음은 그가 본 것에 대하여 거짓함이 없더라

12. 그래도 너희는 그가 본 것에 관하여 논쟁하고 있느뇨

13. 실로 그는 다시 한 번 그를26 보았으니

14. 마지막 시드라 나무 옆에 있었더라

15. 그곳 가까이에는 영주할 천국이 있으니

16. 보라 시드라 나무가 가리워지매

17. 그의 시선은 흩어지지 아니하고 한계를 넘지도 않더라

18. 실로 그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예증들을 보았노라

우리는 메카에서 “계시”된 Sura 53:5에서 “계시” 전달자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다만 주석가들이 “계시” 전달자를 “가브리엘 천사”라고 해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는 대부분의 “계시”들을 말로 받았으나

Sura 53은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순니’파 사람들이 “가브리엘 천사”가 무함마드를 찾아와서 영감으로 비젼을 주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그가 들었던 음성과 그가 본 비젼을 알라로부터 온 “계시”라고 해석하였다. 그렇지만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이슬람교에서의 영감과 기독교의 영감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무함마드는 그가 “계시”를 받은 경험에 대하여 여러 차례 그의 친구들에게 설명하였는데27 “계시”적 현상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Sura 53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가브리엘”을 약 30-50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보았다고 한다.

그는 그 영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영을 힘세고 권능 있는 영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이 ‘가브리엘’의 특성28을 설명하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구절은 5절과 13절인데, “능력이 있으신 분”과 “그를”은 영어 꾸란을 살 펴볼 때 “one mighty in power”와 “him”으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고 아랍어 꾸란에는 “'Allamahuu Shadiidul-Quwaa” (Sura 53: 5), “Wa laqad ra-'aahunazlatan 'ukhraa”(Sura 53: 13)29라고 나와 있을 뿐 “가브리엘 천사 - Jibrill”을 직접 언급한 구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꾸란과 영어 꾸란 각주에서는 ‘“가브리엘 천사”라고 일컬어진다.’ 라는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후에 메디나 “계시”에서의 확실한 언급에 영향을 받아 주석가에 의하여 재해석되고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출처 :  소윤정 (서울기독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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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M국제선교회 크리스천을 위한 이슬람 세미나

 

유영대 기자 국민일보

 

"30대 여성 A씨는 파키스탄에서 온 무슬림 남성과 2004년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전에 자신의 종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 이슬람 경전인 꾸란(코란)을 읽도록 강요했다. 꾸란을 공부하지 않는다며 언어·신체적 폭력을 휘둘렀고 한국국적을 취득한 뒤 이혼하겠다고 했다. 10B양은 중학생 때이던 2010년 여름 인도네시아 무슬림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 신앙고백을 하고 무슬림이 됐다. 20대 중반의 여성 C씨도 인터넷 이슬람카페 회원들에게 궁금한 것을 묻다가 무슬림이 됐고 2011년 회원 3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앙고백을 했다."(소윤정 아세아연합신학대 선교대학원 교수)

 

이슬람이 한국여성들을 집중적으로 포교하는 등 한국인에 대한 포교를 강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FIM국제선교회는 28일 서울 서초구 나루터로 신반포중앙교회에서 크리스천을 위한 이슬람 세미나를 갖고 이슬람의 한국 내 포교 현황과 한국교회의 대처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FIM국제선교회 유해석 대표는 영국의 이슬람화 과정이 한국에 주는 교훈을 제목으로 한 강의에서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10년 안에 10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현재 OIC(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주요 종교인 국가의 연합체) 57개국 출신자 128698명이 국내에 체류하고 있다. 불법 체류자 23653명을 포함하면 전체 체류인원은 15만명이 넘는다. 또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 따르면 한국인 무슬림은 19703700명에서 8022000, 200535000, 20097만명으로 급증했다. 이를 종합하면 현재 국내의 내·외국인 무슬림 수는 최소 23만명에 달하며 현재 추세대로면 100만명 돌파도 멀지 않았다는 게 유 대표의 관측이다.

 

소윤정 아세아연합신학대 선교대학원 교수는 이슬람과 한국여성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무슬림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여성은 지난해 12월 현재 1638이라며 이 중 45.8%(750)의 한국여성은 파키스탄 무슬림과 결혼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소 교수는 이슬람이 특히 인터넷과 방송 등을 통해 한국 여성들을 집중 포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슬림들은 이들 매체를 통해 이슬람을 믿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이고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한다면서 교회는 헌금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봉사하는 것이라며 기독교를 의식한 발언을 통해 이슬람을 홍보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일부다처제는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고 남편이 이혼하지 않도록 부인을 4명까지 두게 함으로써 여성을 철저히 보호한다는 교리도 적극 옹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 대표도 꾸란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은 반드시 무슬림 남성과 결혼해야 하며 무슬림 여성의 90% 이상은 같은 민족과 결혼한다면서 반면 무슬림 남성은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 등 어떤 종교의 여성과도 결혼할 수 있으며 이슬람법에 따라 자녀를 낳으면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게 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세대가 갈수록 이슬람 인구는 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 교수는 무슬림과 결혼한 여성은 이슬람교의 교세확장을 위한 도구가 된다이러한 결혼관의 차이를 모르고 결혼한 많은 한국여성들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교육과 홍보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강연자들은 한국교회가 이슬람의 포교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소 교수는 무엇보다 무슬림 여성 전도와 한국 여성들의 복음화를 위해 이슬람에 관한 전문성을 갖춘 여성목회자 리더십을 세우고 무슬림 선교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유 대표는 "영국 등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한국교회는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없도록 건강성을 회복하고, 다문화 선교에 힘을 모으며, 신앙 전승률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성봉 신반포중앙교회 목사는 "이슬람은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라며 "그들이 미사여구를 동원해 접근할지라도 정체를 바로 알고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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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화의 특징 (무슬림의 5주 6신)

 

이슬람은 생활 종교입니다. 그것은 114장에 이르는 경전인 꾸란(코란)의 내용이 천지 창조와 인간의 창조, 이후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에 대한 내용과 인간 생활 전반에 걸친 가르침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신자의 생활은 이슬람의 기본을 이루는 '오주, 육신' (五柱 六信)을 믿고 지키는 것이 기 기본을 이루는데

이는 다섯가지 의무와 여섯 가지 믿음으로 반드시 지켜야합니다.

 

오주는

1.신앙 선언

2.예배

3.희사 (구빈세)

4.단식

5.성지순례입니다.

 

신앙선언은 이슬람 신자가 될 때 "하나님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맏은 그 사도임을 증언합니다."라는 내용을 증인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무슬림(이슬람 신자)가 됩니다.

 

예배는 하루 다섯 차례 (새벽, 정오, 오후, 일몰, )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하여 간단한 형식으로 깨끗한 장소 어디서나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 전에는 반드시 몸을 깨끗이 씼어야하며 이를 '우두'라고합니다.

 

우두를 하지 않은 예배는 무효입니다.

자기 수입의 40분의 1 (생활에 필요한 최소 경비를 뺀 수악금의 1/40)을 반드시 가난한 사람에게 전해야합니다.

 

단식은 이슬람력 (음력의 일종)으로 매년 9월인 '라마단'달에 매일 새벽 예배로부터 저녁 예배까지 즉, 해가 떠있는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단식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저녁 예배 후에는 허기를 면할 정도의 소량의 식사를 허용합니다.

 

절약된 음식과 물자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단식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게한답니다.

 

성지 순례는 일생에 한번 순수한 자기 비용으로 메카를 순례해야합니다.

순례는 이슬람력 12월인 둘-핫즈에 순례 기간 중해야 합니다.

 

육신은

1.하나님

2.천사들

3.경전들

4.사도와 예언자들

5.정명(定命)

6.최후 심판일을 믿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유일신으로 천지를 창조하고 우주를 운영하는 절대자입니다.

 

둘째, 천사들이라함은 하나님을 보좌하고 인간을 돕는 성스러운 존재이나 이성을 갖지 못하며 하나님의 명을 충실히 따를 뿐입니다. 인간 보다 한단계 아래의 피조물입니다. 천사의 존재와 그 기능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셋째, 경전들은 태초 이래 유일신이 인간에게 전한 말씀들을 모두 일컫는데 이 중에는 구약, 신약, 꾸란(코란)이 모두 포함됩니다. 다만 이슬람에서는 꾸란을 절대적인 경전으로 믿고 다른 경전들에 대해서는 계시의 사실과 그것을 전한 예언자들의 존재를 믿지만 구약이나 신약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꾸란 이전의 경전들이 인간의 편의에 의해 선별되어짐으로 변형되었고 그러므로 꾸란이 완벽한 형태의 경정으로 다시 전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꾸란에는 구약과 신약의 내용들 중 많은 부분이 언급되어 있기도 합니다.

 

넷째, 사도와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로 신의 말씀과 예언을 인류에게 전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다섯째 정명은 절대신이 인간에게 정한 원칙과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 많은 경전과 예언들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고 인류와 우주의 모든 일들이 절대 유일신의 뜻에 따라 운영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섯째, 최후 심판일이 언젠가 오고 인간의 선악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진다는 것으로 일면 기독교의 최후 심판일과 개념은 같지만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관계로 예수를 통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개인의 신앙의 정도와 선악을 얼마나 행했는지에 따라 구원과 징벌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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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과 기독교의 가르침의 차이점>

구분

이슬람(무슬림)

기독교(크리스챤)

1. 믿음의 대상

유일신 알라(Allah) - 절대 자존하며 인간과 그 어떤 언약도 맺지 않음,

기독교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신

삼위일체 하나님(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2. 구원에 이르는 길

(1) 선행과 알라에 대한 충성도

(2) 성전(Jihad)를 통해 죽어야 함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

3. 경전의 성격

가브리엘의 계시를 무함마드가 

구술함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4. 경전의 지위

무함마드를 통해 단 23년 동안 

주어진 알라의 메시지

유일무이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진리

5. 선지자의 자리매김

독점적 지위를 갖는 선지자(Prophet) 이면서 단순한

 메신져로서의 무함마드

구원의 유일한 길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6. 삼위일체에 대한 시각

알라, 예수, 마리암

(Maryam 혹은 Marium)

성부, 성자, 성령

6. 죄에 대하여

알라의 징벌을 피할 수 없는 요소. 회개의 개념은 단순한 실책에 대한 용서, 알라의 자비를 구하는데 초점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입음

7. 천국관의 차이

여자는 갈 수 없음. 선행이 무거울 때, 알라의 가르침에 성실했을 때, 성전(Jihad)를 통해 알라와 무함마드를 위해 죽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했을 때

8. 신 앞에서의 사람의 지위

종(Servant). 언제나 신의 자비를 

구해야 하는 종속적 존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림

9. 생활에서의 신앙

외식적이고 드러내는 경건생활

인격적 변화는 관심 사항 아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중심이 됨

10. 남녀의 지위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는 종속물이자 소유물. 성적인 유희의 대상임

동등한 영적 지위를 누림

11. 신으로부터의 

사랑의 성격

조건적 물질적 자애로움

(알라-주인, 인간-종)

무조건적 영적 사랑

(독생자의 보혈로 인간을 구원)

12. 축복에 대하여

조건부 축복, 알라의 일방적 권위에 불과함

축복의 언약을 지키시는 거룩한 영

13. 사람에 대한 섭리하심의 정의

종에 대한 주인의 심판과 권세, 인간에 대한 절대적 권위 강조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인내하시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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