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선교전략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2)

ㅇㄱㄷ 선교사
 

무슬림들이 말하는 선지자들에 관한 사상이나 사용하는 용어들의 의미와 차이점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반대로 우리가 전하는 성경 이야기나 용어들이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어지는 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무슬림들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떠한 존재일까를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할 때, 또는 삼위일체에 대해 우리가 언급할 때,무슬림들의 마음속에는 무함맏과 꾸란이 계시하고 있는 단일신 알라와 그들이 강력하게 배척했던 메카의 다신교 우상들, 즉 다신교 사상을 우선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의 신을 상상할 때,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쉬르크, 즉 알라에게 동료를 초래시키는 이슬람의 가장 큰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 외의 또 다른 신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원인은 하나는 우상숭배자들 때문이고, 하나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육체적이고도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요한복음 1장과 창세기 1장, 그리고 잠언 8장, 시편의 메시야 예언들 중에 특히 2편과 89편 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의 말씀이 왜 메시야로 세움을 받고, 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어야 했는지, 왜 인자가 되셔야 했는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논리 능력과 설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성령의 조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영적인 전쟁은 세계관의 전쟁이다.

 

또 성령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무슬림들은 가브리엘 천사나 무함맏과 같은 영적 존재나 꾸란과 같은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급하는 성령이 곧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구별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의 말씀을 인격적인 창조주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인간의 말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단순한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무함맏과 꾸란이 메시야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꾸란 어디에도 메시야의 의미와 성격 또는 사역에 대해 설명을 해 놓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언급할 때 무슬림들은 이것을 결코 육체적인 의미의 출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부분, 즉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되어 세워지는 면을 시편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다. 동일하게 죄에 대해서 말할 때에 무슬림들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깊이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죄의 심각성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담이 단 한 가지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와 영원한 낙원과 천국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회개에 대해서 말하지만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회개, 단지 “회개한다” 라고 입과 마음으로 고백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그들에게 참된 회개란 자신의 타락한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 전체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율법적인 정결과 부정에 대해 저들이 언급할 때, 우리는 의와 불의, 거룩과 죄,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꾸란에 무함맏은 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지적하지도 않았다.

 

꾸란에서 알라는 아담이 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용서해 주었다. 꾸란에서 나오는 용서와 구원은 사실상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합법적인 근거나 절차가 거의 필요 없다.

 

천국을 정욕적이고 세속적으로 소망하는 저들의 소망이 거짓됨을 지적해 주고, 천사와 같은 거룩한 삶과 부활체로서의 영광스럽고도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영원토록 유지하는 영생에 대해 가르쳐 주어야 한다.

 

지옥을 말할 때 저들은 모든 사람들이 일단 지옥에 가서 형벌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헛된 소망을 버리도록, 지옥에서 천국으로 전혀 옮겨갈 수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헛된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이 외에도 구체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무슬림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들이 대단히 많은 사실을 알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도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착각하도록 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숨겨져 있다.

 

지금까지 나 자신도 무슬림들과 상당히 많은 부분을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가운데 대화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역자들을 살펴보아도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대해, 즉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시키는 꾸란과 하디스와 기타 이슬람의 의식 및 신념들에 대해 일반적인 것 외에는 꽤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같은 것들을 주제로 삼아서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그들의 무엇을 변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기독교인 사역자들이 이슬람의 일반적인 교리들을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사용하여 무슬림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상 이슬람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들이 체계적으로 세워 놓은 교리들이 아니라, 꾸란 자체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 무슬림들의 교리들과 종교 의무들은 꾸란의 허구성을 감추기 위해 치장해 놓은 장식품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그런 것들을 알 필요는 있어도, 결코 다룰 필요가 없다.

 

꾸란을 연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흥미로운 작업이 아니다.

꾸란을 읽는 것은 심지어는 무슬림들에게도 어려운 중노동이다.

 

꾸란을 읽는데 가장 큰 어려운 점은 꾸란 자체 내에 있는 논리적인 모순들과 비약,무의미한 반복들, 심지어는 어두움의 영들의 세계에 대한 무수한 언급들 때문이다.

 

오늘날만 해도 수억의 인구가, 역사상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무슬림들이 자기들의 무지 때문에 지옥에 가고 있다면, 그들 모두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뭐든 해야 한다.

 

따라서 꾸란 자체에 대한 연구는 지옥으로 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것들에 속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그들을 그 속에서부터 끌어내 구원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위의 본문을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이 말씀은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인간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작정,그리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의무와 책임 등에 관계된 것들이지만,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하여 얼마나 다양하고 창조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생명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구원과 멸망을 마치 우리들의 손에 모두 맡겨 놓으신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사역이 얼마나 의미있고, 위대한 것인가를 알게 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이 앓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슬람 지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꾸란을 직접 읽어보고, 꾸란과 성경의 내용상 차이점들을 논리적으로 숙지하고 있으면 전도의 접촉점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무슬림들이 어떤 말을 어떤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히‘말도 안되는 엉뚱한 이야기, 비성경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간주해 버리고 만다면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의 접촉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주로 형성하는 것으로는 꾸란, 하디스, 순나, 세속적인 가치관 등이다. 무슬림들이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극도로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영적 전쟁이 치열한 장소는 각 사람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자리이다. 세계관의 변화와 영적 전쟁 사이의 상관 관계를 별도의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영적 전쟁을 단지 기도와 성령의 능력의 대결만은 아니다. 그것들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심각한 영적 전쟁의 현장은 사람의 지식과 성품과 가치관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고후 10:3-6)“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세계관의 배후에는 그 세계관을 지배하고 형성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영적인 세력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영적 세력은 추종자의 전인격, 즉 지, 정, 의 모두를 통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과 유사하게,무슬림들도 전인적으로 어두움의 영들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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