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선교종결자


조승호 선교사(차드)

 

들어가는 글

요즘 종결자라는 단어가 유행인 것 같다. 낯선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신조어는 아니다. 외래어긴 하지만 terminator라는 단어가 더 친숙하다. 굳이 다른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끈질긴 자’, ‘끝을 보고야 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선교에도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 좀 더 문학적인 표현으로 ‘선교의 마침표’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시대에 선교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선교를 유언으로 명령하시고 2천 년이 훨씬 넘어선 지금에도 선교는 미완성 과업으로 남아 종결되지 않을까? ‘선교는 하나님이 종결자다’라는 말은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정답 같은 오답이다. 선교의 종결자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자는 바로 교회다.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단체도 아니다. 교회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제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선교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가 하나님이라면 교회가 철로이기 때문이다. 철로 없이 기차는 달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선교의 종결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이다. 머리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개정개역)

 

 선교의 목적(종결)은 무엇인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온 땅의 사람들이 승리와 기쁨의 상징인 '종려 가지'를 들고 순결을 의미하는 '흰 옷'을 입고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다.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지만 온전한 화음은 아니다. 사람들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22). 구원받은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어린 양의 희생의 사랑을 노래해야만 하는 합창제가 남아 있다. 그 장엄한 노래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울려 퍼지는 그날 드디어 선교의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그 때 역사의 막은 내려진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것을 말씀하시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개정개역)

 

1)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너머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셨다. 눈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사람들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그들이 나아간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맞서다가 강제로 흩어지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셨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인류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종족마다 제각기 독특한 컬러를 가지고 서로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샬롬이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신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과 조화를 이룬 샬롬공동체를 꿈꾸신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하신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 10:5 개정개역)

 

2) 예수님의 첫 사역지

예수님께서 첫 사역지로 정하신 곳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고향 나사렛도 아니고 태어나신 곳이요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도 아니었다. 이방의 갈릴리였다.(마 4:12-16)

 

왜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메시아로 선포된 이후의 첫 사역지로 정하셨을까? 단지 다른 지방보다 더 멸시 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이 불쌍해서일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같다.

 

3) 예수님의 오신 목적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 때문에 원심적 선교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요나 선지자가 이방인을 향해 나아갔지만 어디까지나 떠밀려 억지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심적선교를 스스로 펼치셨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듣고 이스라엘의 언약 속으로 들어왔다(수2:9-10). 이방 여인 룻도 인애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왔다. 모두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구심적인 선교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출 19:6).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꿈을 포기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역으로 선교의 도구로 이용하셨다. 그들을 바벨론 포로와 앗수르의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당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에 당신의 백성을 심으셨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그들과 함께 거기 머물면서 스스로 당신을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내셨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 스스로 나태내시고 당신의 구원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었다. 예수, 그이름은 여호와 삼마의 신약적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개정개역)

 

이 말씀은 어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구절이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인가? 죽기로 예정된 하나의 밀알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죽음으로 맺게 될 많은 열매는 바로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이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선민 의식에 절어 있던 유대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들을 향하여 뜬금없이 밀알(죽음과 열매)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한 종족만이 아니라 온 땅의 모든 족속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는 바로 그 때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이다.” (요 12:23)

 

이것이 복음의 특징이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큰 소식 말 그대로 복음인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개정개역)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성경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4) 교회의 태동 목적

지상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 주시었다. 이제는 또 다른 보혜사를 통해서 천상사역이 시작되었다.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성령은 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갓 태어난 교회의 울음소리는 함께한 모든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는 각기 다른 방언으로 울려 펴졌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태동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사건이다. 교회는 모든 방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개정개역)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단어

 

왜 그럼 이토록 중요한 개념을 교회는 오랫동안 몰랐을까? 우리의 성경해석이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 유익이 되는 한 구절만 쏙 뽑아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빌 4:13의 말씀을 우리는 좋아한다. 그러나 그 참 의미는 헤아려 보지 못하고 무작정 좋아하는 것 같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개정개역)

 

이 말씀은 11절과 12절의 연속성 속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개정개역)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가난, 궁핍, 핍박, 환란, 죽음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런 것들은 모두 뺀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만이다. 그는 가난해도 비참하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부해도 교만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환란과 죽음이 그를 대면하여서도 그는 감사할 수 있다.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28:18-20 이러한 우를 범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 종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잊었다. 오직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라는 말씀만을 기억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으로 가라’는 선교의 명령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평범했던 한 사람,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암 케리’에게 세계를 바라보게 하셨다. 개신교선교는 그렇게 무명의 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어렵게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William Carrey, Pere des missions moderns, 1761~183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시작된 근대선교도 한동안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교회가 보지 못하던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보게 한 사람이 바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선교사이다.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그 이후 교회는 종족이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를 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해 가는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종족이란 공통의 역사와 한 언어와 문화로 연결된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 선교사들의 3%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사역한다는 통계는 이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목적(목표)과 전략의 혼돈

 

종결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선교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한 가지이다. 그러나 전략은 여러 가지이다.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략은 변한다. 목적은 전략에 선행한다. 목적이 없는 전략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과 전략을 혼동해 왔다. 선교의 목적과 전략을 혼동했던 것 같다. Peter Wagner, 풀러신학교 교수는 전략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략이란 하나의 분명한 목표(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다. 선교전략이란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다.”

목적과 전략의 혼동이 선교사역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퍼즐의 한 조각만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모든 종족을 보아야 한다.

  

미전도종족 선교의 역사

 

1970년대에 전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바로 미전도종족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선교학자들은 믿었다. 만약에 그들을 겨냥한 어떤 효과적인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다면 2000년 말에는 선교의 사역이 종결될 것이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 랄프 윈터박사는 참가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16,750 종족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 세계선교의 새로운 도전을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그도 알지 못했다. 아직은 자세한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1980년 영국의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랄프 윈터는 다시 지구상의 미전도종족에 대한 도전을 하였다. 그때 스칸디나비아 출신 그린랜드에서 사역하고 있던 한 선교사가 강단에 올라와 “2000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교회를!”라고 외쳤고 함께 자리한 수천 명의 전세계의 교회 선교 지도자들이 함께 구호를 외쳤다. 예정에 없던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따라 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십 년 후에 AD2000운동이 출발하였다.

Patrick Johnstone(Operation World 편집자이며 WEC선교회)의 선교사는 그간의 십 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발표한다. 이른바 ‘세계 복음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보고서이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13,000여 종족에 대한 리서치를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1만 명 이상 되는 종족중에 2% 미만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혹은 5%미만의 신자를 가진 종족을 교회개척이 시급하게 필요한 종족으로 규정했다.

두 번째 성과로는 이 연합운동의 결과 1900년 5개 단체에서 2000년에는 73개의 단체가 주로 종족을 중심으로한 연합사역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도표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이유가 있다. 엄청난 인구가 사는 사람들 속에 단지 하나 교회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반딧불 하나로 넓은 홀을 다 밝힐 수는 없다. 소금 농도는 3.5%이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바로 3.5%의 소금의 힘이다. 100미리 리터의 물에 3.5그램의 소금만 있으면 그 물은 웬만해서 썩지 않는다.티스푼 하나가 5그램이라고 한다. 3.5그램은 스푼의 위를 깎아낸 정도의 분량이 아닐까? 적어도 한 종족에 3.5%의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 'FTT 운동이란' 639개 종족 복음화 추진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가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를 주최하면서 대회에 참여한 한 소그룹 지도자들이 모든 종족에게 교회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 그룹은 ‘테이블 71’이라고 칭했다(그분들이 자리했던 테이블 번호). 2004년 가을에 이들은 다시 모여 남은 비접촉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남은 과업 완수’(Finishing The Task) 운동을 시작했다. FTT운동의 목표는 3400여 미전도종족 중 1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639개의 미개척 종족을 우선 복음화시키는 데 있다.또 미전도종족 입양뿐만 아니라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가 자립 및 재생산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를 위해 지역교회와 현장 선교사, 선교단체의 유기적인 네트워크 구성이 필수요건이다. 특히 지역교회가 선교에 주체가 되고 선교단체는 정보와 전략을 제시하는 협력기관으로 활동한다.

 

* Target 2020

예수전도단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족속에 복음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제자화하기 위하여 서기 2020년까지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우리는“Target 2020”이라고 부른다.

‘Target2020’은 최소복음화된 국가와 인구 백만 이상이나 관문되는 대도시, 미전도종족 내에 토착적인 교회를 개척, 제자화하고 스스로 배가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갖는다.

1.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 나라 50개 국을 개척한다.

2.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와 관문도시 13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3.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미전도종족과 관문종족 17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넘어야 할 장벽

 

오늘날 선교의 완성이라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도 많고 싸워 이겨야 할 적들도 많다.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

전년도(2010년)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20억의 인구가 아직도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종족이라고 한다(크리스챤 투데이 2011.10. 23). 2010년 10월 3차 로잔대회에서 20일 ‘세계의 종교’(World Faith)란 주제하에 열린 미싱피플 : 복음을 듣지 못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란 세미나에서 미전도종족 네트워크인 ‘에슨 투 에슨’(Ethne To Ethne)의 선교 지도자들이 한 발표이다. 수많은 세계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세계 선교에 열정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1만 6천여 가량의 미전도종족 중 3천7백여 종족이 복음을 접하지도 못한 채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교회들의 주저함이 영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선교회, 선교사들이 주저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단지 3%만이 미전도 종족에게로 파송되고 있다는 것을 미국 언리치드피를즈 대표 켄트 박사는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가 미전도종족 선교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 이라는 생각 때문에 투자하길 원치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이 갈렙의 정신이 아닌 메뚜기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개정개역)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3 개정개역)

 

또 하나의 주저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편견도 작용한다. 이 편견에 대해 15년간 미전도종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온 에디오피아 출신의 아리킬룸 베예네선교사는 소말리아에서 복음을 듣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된 미전도종족 출신 청년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면 달라 보이고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다.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무서워 보일지 몰라도 안으로는 진리를 갈급하게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개정개역)

이 고백은 하나님을 아는 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개정개역)

 

미전도종족선교의 목표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끔 인도하는 일이다. ‘에슨 투 에슨’의 남아공 디렉터 피터 탄탈 선교사는 아프리카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배우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프리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독교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1900년에 아프리카에는 8백만여의 기독교 인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5억이 기독교인이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독교인구가 90%를 넘는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또한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률과 빈곤, 부정부패와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미전도종족 선교를 행함에 있어서 이겨야 할 도전은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가르치고 또한 보여줘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개정개역)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개정개역])

 

본문에서 본 동사는 ‘제자를 삼아라’이다. ‘세례를 주다’와 ‘가르치라’는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베풀면서 그리고 가르치면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이 분사형 단어들은 제자를 삼는 방법(전략)과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세례는 예수님과 더불어 죽고 살았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종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새생명의 사람을 낳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되는 첫 걸음이다. 가르치되 머리에 지식만을 넣어주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가르침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내려 가야 한다. 삶으로 실천된 지식이 아니면 율법처럼 죽이는 의문이 될 수 있다. 진리가 실생활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행하시고 가르치셨다'. 순서에 주목해 보자. '가르치고 행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1:1).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면 생명 없는 종교로만 남게 된다.

 

나가는 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그 동안 우리는 선교의 쉼표는 찍었다. 많은 선교 전략들이 유행처럼 등장하고 사라졌다. 느낌표도 찍었다. 선교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슴 절절히 외쳤고 그 결과 선교사 이만 명 시대를 열었다. 선교의 말 줄임표도 찍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땅끝으로 남아있는 많은 종족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행진해야 할지 머뭇거렸다.이제는 유행에 휩쓸리지 말자. 이제는 전략과 목적에 혼란을 갖지도 말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부를 그 영광과 환희의 송가를 부를 그날을 향해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자. 3%는 부끄럽다. 적어도 십일조, 1/10 선교사는 미전도 종족, 복음이 시급한 사람들에게 나아가 제자를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임마누엘 주님의 마라나타를 꿈꾼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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