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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시작하신 분이 끝도 책임지신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시작하신 분이 끝도 책임지신다
본문 / 빌립보서 1:3~6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오늘날 우리는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자아는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추깁니다.
자아의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연말이 되면, 마음이 괴로운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 마음이 괴롭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에서부터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아는 현대인들에게 우상입니다. 자아는 끝없이 요구합니다. 그래서 늘 목마릅니다.

자아의 욕구가 많은 인생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끝없이 전쟁을 치릅니다. 그 삶은 불안정합니다. 자아의 욕구가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이끌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원하지만, 내일은 또 무엇을 원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큼을 원하지만, 내일은 얼마나 많은 것을 원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소리에 귀기울여보면, 모두 자아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을 빌립보서 앞 부분에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처음과 끝을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그들이 복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변함없이 그 길을 달려가게 만든 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출발점, 그들의 행위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열심을 내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열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열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를 동원해도, 그것은 언젠가 동납니다.

중요한 것은 출발점입니다. 내가 시작했는가, 주님께서 시작하게 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출발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6절은 시작점을 말합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신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은 다릅니다. 자아로부터 시작한 인생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욕망대로, 충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착한 일을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보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인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우리 안에 좋은 생각과 착한 생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욕구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내셔야 합니다. 진짜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할 때에는 언제나 중언부언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우리를 기도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도할 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거룩한 생각, 착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의 욕구는 줄어들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갈망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바람이 우리 자신에게 기울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기도를 하고,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삶을 살면, 기쁨이 점점 줄어듭니다.
마음이 휑하고, 마음이 어둡습니까? 내 속에 어떤 갈망으로 채워져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 이것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변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의 서신’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바울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였습니다. 그는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뻐했습니다. 왜 기뻐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보며 언짢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빌 1: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에 참여하기를 열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유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울고 웃는 삶을 살지 마세요.
우리는 사람들과 비교하고,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에 우리의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목을 매는 체면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시작된 착한 마음에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그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욕구를 억제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하는 생각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소원과 생각에 반응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자아의 욕구, 신변 등에 목을 매면, 우리의 삶이 굉장히 피곤해집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생각, 거룩한 생각, 거룩한 기대감,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내 안에 좋은 생각이 들어오면, 그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착한 동기를 일으키십니다. 무엇을 하는 데 있어서 동기(motivation)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우리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을 준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않았을 때에는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입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오래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왜 공부해야 하는가를 깨달으면, 스스로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학교에 가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제대로 공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복(說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감동, 감화시키셔서 하나님을 위해 기쁨으로 복음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교회에서 억지로 일한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봉사하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을 망칩니다.
그러나 복음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서 동기가 부여되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좋아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점입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설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득에 의해 동기가 분명하게 부여되면, 그 다음에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한 동기를 일으키시고, 악한 동기는 막아주십니다. 불순한 동기, 옛 자아에서 나타나는 잘못된 동기를 물리치게 하십니다. 쓸데없는 욕구가 일어나지 않게 하십니다.
왜 인생이 낭비됩니까? 쓸데없는 일에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동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어두운 마음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자발성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은 생명을 바칠 만한 동기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복음으로 동기가 부여되어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 삶에 동기가 부여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 계속 동기를 부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기꺼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복음을 경험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고, 아무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욕한다 해도, 멈출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입니다.
복음에 의해 설득당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이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복음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이 나를 이끌어갑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그 일을 언제 그만둘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동기가 복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이 일시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겠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박수쳐주고, 선물을 주며 격려하지만, 그것으로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에 차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만, 복음은 기꺼이 움직이게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사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습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늘 똑같은 마음, 똑같은 얼굴로 섬길 수 있는 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는 순간, 미칠 듯이 기쁩니다.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복음이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할 때, 우리는 지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힘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위력적입니다. 식을 줄 모르는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빌립보교회가 그런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 자신도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열정으로 끝없이 달려가게 만드는 에너지는 복음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행 20: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함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하실 때, 거룩한 상상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일으키심으로 착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믿음의 삶에는 상상력이 동원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일으키십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좇던 사람이 영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려면, 상상력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다 보면, 우리 안에 주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 중 하나가 상상력입니다. 믿음의 삶은 상상력을 자라게 합니다.
믿음으로 상상력이 자랄 때, 그것이 비전(vision)이 됩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 상상력이 계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상상의 세계 속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믿음의 세계는 신비롭습니다. 신비로움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곳,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생깁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상상하며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들은 상징적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상징적인 언어 속에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징적인 언어를 읽으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상상하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상상력을 펼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보지 않아도 천국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천국을 상상해보세요.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상상력이 죽어버립니다.
천국은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세계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곳입니다.

시는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시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됩니다. 요즘은 비주얼(visual) 시대라서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습니다. 연속극을 눈을 감고 귀로 들으며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주시고, 눈을 열어주셔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상상하면서 믿음의 세계가 자랍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은 상상력이 뛰어났습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상상력을 키웠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이를 통해 영적 세계가 더욱 실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 보이는 골리앗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상상력이 커졌습니다. 신비의 세계가 그에게는 현실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시인(詩人)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를 크게 느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상상한 세계가 현실보다 더욱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삶에서 파워(power)가 되었습니다.

상상력이 자랄 때, 믿음이 자랍니다. 상상력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상상력이 커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이루실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꿈이 되고, 비전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시련과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생겼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상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시를 읽지 않습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시를 읽어야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열고, 시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여십니다.
시편을 읽을 때,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시편을 읽으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생각의 나래를 펼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작동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비전이 됩니다. 그리고 비전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것이 상상력입니다.
가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커져야 합니다. 그때, 현실은 힘들고 어려워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그는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감옥 안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그가 복음을 위해 달려갈 수 있었던 힘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수록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강력해지고 커져가고 실제화 됩니다. 마치 실제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세계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십니다. 상상의 세계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상상력을 기르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시편 62편 5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앞으로 이루실 것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도, 먹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줄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상력을 가진 예언자였습니다.
현실은 암울했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이 보았던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어두웠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현실을 보면,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어두움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넘어 군대가 일어나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 상상력은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신 비전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매를 맞고 있으면서도 찬송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찬송할 수 있게 만든 힘이 무엇일까요? 캄캄하고 폐쇄된 감옥에 있었지만, 그들은 하늘로부터 임한 빛줄기를 보았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룩한 소원, 착한 생각, 거룩한 동기, 거룩한 상상력을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이루어가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 안에 일어나는 소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동기가 일어나면, 그것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작하신 분이 끝내십니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일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동기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로 선한 상상력을 갖게 하셔서 시작하게 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끝내실 것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담력을 갖게 됩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작과 끝 사이에 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러나 시작하신 분과 끝맺는 분이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출발은 하나님이십니다. 끝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시작과 마침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끝내십니다. 우리 마음대로 결론나지 않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구성이 뻔하면, 독자(讀者)들이 흥미를 잃고,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독자가 예상하는 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긴장감이 없습니다. 재미없는 소설입니다. 이야기의 구성이 싱겁습니다.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때, 독자들은 긴장하고 읽습니다. 작가의 손에 의해 이야기가 결론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낍니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때, 그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흉기를 들고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죽이려고 달려오지만, 독자들은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나쁜 사람이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공격한다 해도, 주인공은 중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악인에 의해 결론나지 않습니다. 지금 일어난 불행한 사건은 우리의 인생의 운명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우리는 시작점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슬아슬할 때가 많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범람하는 가운데 계곡을 건널 때, 아이가 아빠의 손을 잡으려고 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빠의 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아이를 잡으면 안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강력한 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차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손을 꺾을 자가 없습니다.

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른 것은 잊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객사(客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23편 4~6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원수의 목전에 놓인다 해도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다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나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의 추격자가 되셔서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 일어난 일들과 상황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기대하고 예상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속상해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진행형입니다.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시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일이 꼬였다면, 반전(反轉)을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편에서 보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어가십니다.
욥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반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놀랍게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전화위복(轉禍爲福)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어려울수록 끝이 더 기대됩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시작하게 하신 분의 손에 우리의 끝도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뿐,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기도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역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열심히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발 물러나야 합니다. 바쁘게 움직인 손을 잠시 모아야 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먹 쥔 손을 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으세요. 숨을 길게 내쉬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세요.
이제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려놓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에서보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실 일이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기도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바쁘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친밀함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초조해하거나 조바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단순히 체념하고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한 결말을 쥐고 계시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것은 막연히 상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설정해놓은 높은 꿈을 이루어달라고 하나님을 닦달하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시편 130편 5~6절에 보면,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란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세요. ‘하나님께서 꼭 주셔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세요. 하나님만 신뢰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결정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삶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 접으세요. 자아의 욕구에서부터 출발된 것, 자아중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에서 출발한 것이 있다면,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시작점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한 마음, 주님께서 주신 선한 갈망, 거룩한 소원을 붙잡고 달려왔다면,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아가면, 우리의 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원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갈망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것을 위해 달려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복음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했던 빌립보교회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힘든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안에 복음을 주신 하나님,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복음이 진보될 것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흔들림 없이 살았습니다.

시작되시는 하나님, 끝을 책임져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거룩한 소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서 거룩한 상상력이 날마다 자라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끝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하세요. 하나님을 높여드리세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끝을 멋지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전능자의 손에 의해 우리의 삶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삶을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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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아낄 것을 아끼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반전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아낄 것을 아끼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반전
본문 / 요한복음 6: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은 아주 유명합니다.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다양하고 깊은 메시지가 많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누군가가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祝謝)하신 후에 그것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오병이어가 참 중요합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있어서 마중물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성자 예수님도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가 되신다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로 만드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드레가 소년의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테스트하시기 위해 누군가가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무엇인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소년이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신 사건은 유명합니다. 소년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지만, 소년의 오병이어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소년의 오병이어는 기적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自存)하시는 분이십니다. 홀로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하나님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시는 일들을 마음껏 얼마든지 무한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에는 조금도 차질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충해드려야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돕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아쉬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누군가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년이 가지고 온 오병이어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 탐나셔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이의 도시락에 눈독을 들이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벳새다 들판에 5천 명의 남자가 앉아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하면, 2만 명가량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앉아있는 가운데, 기쁨이 가득한 얼굴을 가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놓은 소년입니다.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소년이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며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불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를 끼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상(床)을 차려놓으시고, 우리에게 그 위에 젓가락만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어마어마한 잔치에 젓가락만 올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돕든지 돕지 않든지 하나님께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마음껏 무한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도 신났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 가장 신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바친 어린 아이가 가장 기뻤을 것입니다. 자신이 드린 작은 도시락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며 기뻐했을 어린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주님께서는 그냥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지만, 소년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도시락의 위대한 변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끌어들이시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들판, 어두운 곳, 빈들, 아무것도 없는 곳, 사람들이 허기진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를 사용하셔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여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병이어,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아이가 먹어버렸다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년이 그것을 가져왔을 때,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한 끼 분량의 도시락으로 많은 어른들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으로 많은 어른들을 먹이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일종의 반전(反轉)입니다. 작은 도시락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끼어들 때, 우리는 초라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과 하나님의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주님이 만났을 때, 땅과 하늘이 만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작은 도시락이지만, 주님의 손에 드려지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시는 타이밍(timing)과 우리의 작은 행동이 맞아떨어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군중 속에서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어린 아이의 행동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감추어질 수 있는 작은 행동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운집해있는 가운데,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가져오는 행위는 묻힐 수도 있습니다. 눈에 띌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대한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들판에 있는 사람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남았습니다.

누가 오병이어를 바쳤습니까?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를 내어놓았습니다. 많은 어른들은 뭐했을까요? 먹을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린 아이 뿐이었을까요?
성경은 어린 아이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생각이 복잡합니다. 본문에 보면, 안드레와 빌립, 다른 제자들은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어른들도 빌립과 안드레처럼 생각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외에도 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벳새다 들판은 외딴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식을 챙겨왔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먹을 것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나만 먹어도 모자라는데, 각자 알아서 하겠지. 이런 때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생각이 단순합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좋지만,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에는,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때에는 생각이 단순해야 합니다.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행동합니다. 결정하고 행동하기 전에는 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뉩니다. 그러나 결정하는 순간에는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어른들은 생각이 많고 복잡하여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고수(高手)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듭니다. 하수(下手)는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빨리 옮기는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얼굴만 보아서는 속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속이 환하게 보입니다.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수를 감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오병이어 이야기에 아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어른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사용하셨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남자 어른만 5천 명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보리떡은 아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원어 성경에 보면, ‘아주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아주 작은 물고기 두 마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멸치 정도 되는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이나 크기, 수와 상관없습니다. 똑똑한 사람, 재력이 있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과 상관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린 아이를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기도하고 난 후에도 머리가 계속 아프다면, 기도하지 않고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절에서는 기도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딴 짓을 하면 죽창으로 맞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복잡하고 아프다가도 기도한 후에는 머리가 맑아져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머리가 복잡했는데, 기도하고 나면 개운해져야 합니다.
먹구름이 걷히고, 머릿속이 맑아집니다. 문제가 단순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안고 씨름하다가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안고 있으면 복잡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간단합니다.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계산했다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생각이 많습니다.
아이는 계산 없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자신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는데, 말씀을 가르치시는 주님께서 계시니까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간 것이 중요합니다. 아주 단순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삶의 핵심을 가르쳐줍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얼마가 되든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주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주님께 넘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후에 그 문제를 다시 가져가십니까?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문제는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행동으로 옮겨본 사람에게는 단순한 일이지만, 행동으로 옮겨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가진 문제를 주님께 옮기는 데 10~20년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잡한 생각들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정리해주시는 답을 붙잡으면, 우리의 생각이 단순해집니다.

아이는 계산할 줄 몰랐습니다. 아이는 안드레처럼 ‘이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라고 생각하거나, 빌립처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다.’라고 산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능력이 없습니다.
계산을 넘어선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계산하면 계산으로 끝납니다. 계산하지 않은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생각, 수많은 계산 등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풀 수 있는 문제라면, 여러분 스스로 해결하세요. 여러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끙끙댈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은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고민하고 염려하고 생각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둘째, 오병이어입니다.
단순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아주 작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예수님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원재료는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작다고 해서 작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량을 봅니다. 그러나 수량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 아이가 주님께 바친 오병이어는 어린 아이의 전부였습니다.

아이가 먹을 것을 내어놓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아이는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배고파도 참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굶더라도 아이들은 먹입니다.
아이들은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공동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은 너무 배고프면 옆에 있는 아이의 것을 빼앗아먹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있던 시대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보리떡과 아주 작은 물고기는 그 시대가 빈곤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끼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배고픔을 느낍니다. 넉넉한 상황이라면,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 로비를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무엇인가 먹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제가 다가가 “목사님 하나 줄래?”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의 반응을 보면, 아이의 가정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선뜻 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손을 뒤로 숨기는 아이도 있습니다.
선뜻 주는 아이의 손에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선뜻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과자 한 봉지를 가지고 있으니, 하나 정도는 선뜻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이 별로 없을 때에는 주면서도 고민합니다. 하나만 있을 때에는 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좋아하고, 맛있는 것은 더욱 줄 수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풍족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먹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식구가 열다섯 명이었습니다. 저희 형제 6남매에 고모와 삼촌까지 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어머니께서 상을 차리시면, 전쟁이 벌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빨리 먹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생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생선이 반찬으로 없는 날에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생선이 있어야 밥을 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에 철없이 생선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제가 본문의 어린 아이였다면, 보리떡 다섯 개는 내어놓았겠지만, 물고기 두 마리는 끝까지 내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생선을 어떻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사물을 보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산에 올라가 꽃을 따서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를 먹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누어먹는 것은 아이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배고프고, 가진 것이 하나밖에 없을 때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를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울 유일한 음식이었고, 아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이것을 작은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에게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수량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아이가 그것을 가져오기까지 얼마나 망설였겠습니까.

아이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가져온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아이는 허기진 상태에서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그것은 아이에게 있어서 전부였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그 도시락을 얼마나 정성껏 싸주셨겠습니까.
아이들에게는 절제력이 없습니다. 먹는 것에 있어서 인내력이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자신이 가진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있어서 오병이어는 전부였습니다. 절제력이 없고, 이기심이 많은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배고픈 상태에서 오병이어를 내어놓았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제력이 약하고, 먹는 것을 밝히는 아이가 자신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도시락을 주님께 가져왔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아이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모두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가 가진 전부를 가져왔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가진 전부를 가져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라면 조금은 남기고 가져올 것 같은데, 본문에 나오는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이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아끼지 않고 내어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소년의 행위를 봅니다.

움켜쥐고 싶어 하는 욕망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몸부림칩니다. 많이 가졌음에도 더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의 것들을 빼앗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소년이 자기가 가진 도시락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았다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소년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행위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만한 특종거리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단지 군중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의 뒷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떡을 먹고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9~5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떡 다섯 개를 놓고 축사하시고, 군중들을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년이 바친 보리떡은 곧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자들이 떡을 나누어주는 행위는 주님의 살이 찢어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이가 떡과 생선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것과 오버랩(overlap)됩니다.
아이가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떡으로 군중들이 먹고 배부름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인류가 구원 받았습니다.

아이가 자기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내어놓은 행위를 4복음서에서 대서특필(大書特筆)한 이유는 그 속에 구원사적인 의미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행하실 때, 떡을 떼시며 제자들에게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6). 주님을 먹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배부름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사건을 통하여,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때, 하나님의 아낌없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소년은 아낌없이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아낌없음과 하나님의 아낌없음이 만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흘러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한 끼 분량의 도시락을 통해 5천 명, 아니 2만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시는 것을 30배, 60배, 100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오병이어 사건은 100배가 아닙니다. 아이의 한 끼 도시락을 통해 2만 명이 먹고도 남았으니 2만 배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입니다. 흘러넘치고도 남도록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는 수치(數値)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이것은 복음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흥분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당당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중한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모든 것이 흘러넘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바닥을 긁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산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머리를 굴리며 살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마구 부어주시는데, 따지고 계산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아이의 행위가 클로즈업(closeup)되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끼거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아끼려고 하십니까? 무엇을 움켜쥐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은 본문의 안드레처럼 “그것을 가지고 무엇 하려고?”라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신앙적인 말을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우리가 떡을 쥐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려야 수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오병이어가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고, 재주도 없어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자신의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직업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젊음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삶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끼는 것,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님 앞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쥐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놓으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아낌없음과 하나님의 아낌없음이 만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5천 명 중의 한 사람, 어린 아이,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허기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본문은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이 하나님의 손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고픈 현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어린 아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궁무진한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30배, 60배, 100배가 아닙니다. 천 배, 만 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도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驚異)로운 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드러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끼는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반전이 일어나는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쥐고 있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때, 주님의 위대한 손길 속에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님의 손에 올려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움켜쥐고 있거나 아끼는 것이 있다면, 주님께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아끼지 않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기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흘러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제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흘러넘치시는 분이십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까다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넉넉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십니다(엡 3:2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아리는 것 이상으로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십니다. 하나님의 부요함이 여러분의 삶에 흘러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통해 수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광야와 같고, 빈 들과 같고, 벳새다 들판과 같은 이 세상에서 허기진 군중들을 먹이고도 남는 구원의 만찬에 여러분의 삶이 기막히게 쓰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서 귀중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이 내어놓은 도시락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보며 소년은 최고의 기쁨, 환희, 즐거움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쓰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쫀쫀하지 않습니다. 바닥을 긁는 삶이 아닙니다. 부요한 삶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막혀있는 것이 터져야 합니다. 삶을 가로막고 있어 삶을 답답하게 만들고, 응고되게 하는 것이 터져야 합니다. 그것이 터지면, 하나님의 무한대와 연결되어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귀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일을 우리 교회에 맡기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어떤 것이든 어렵지 않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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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본문 / 빌립보서 3: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 인생은 문제투성이입니다.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느라 세월을 보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생을 다 보내면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문제 속에 갇힙니다.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는 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제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에 도달해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에 매이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문제를 따라가지 말고, 목표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문제를 푸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기도하다 보면, 수세에 몰릴 수 있습니다. 문제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든 해결되지 않든 문제 속에 갇히게 됩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향해 기도하며 나아가다 보면, 문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늘 고민을 풀어놓고, 넋두리하듯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과녁이 정확해야 합니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떻게 필요한지 목표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를 정확하게 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방향이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문제로, 고민으로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문제에 휘말려버리고, 달려가야 할 목표를 놓쳐버리면, 문제 속에 갇혀서 문제를 풀다가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나중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삶의 방향을 놓쳐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기 원하시는지, 우리는 큰 그림(big picture)을 보아야 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좁고 작게 보지 말고, 크게 보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의 어디쯤 가고 있는가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어디쯤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푯대의 방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미완(未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영적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초신자가 아닙니다. 웬만큼 믿은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상당히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도입니다. 영적 성취를 맛보았던 사도입니다. 삼층천까지 경험한 사람입니다. 신비한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헌신에 있어서도 굉장한 수준에 이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영적 고지(高地)에 이른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세계와 사역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베테랑 산악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해발 5천m 이상 올라갔음에도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찍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어느 정도 받고 나면, 포만감(飽滿感)을 느낍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누려야 할 구원의 부요함을 이야기합니다. 미래에 천국에 갔을 때, 완성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구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미래에 우리가 가게 될 천국도 있지만, 이 땅에서 확장되어야 할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과 기쁨이 무궁무진하게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도 끝이 없습니다. 찬송가 304장에 보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세계를 향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에 더욱 목말라합니다. 좀 더 깊은 사랑을 원합니다. 갈망이 일어납니다.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 목마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성경을 대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대한 책도 읽었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린 아이가 손으로 물을 움켜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의 초입(初入)에서 찰랑거리는 정도만 경험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디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悔心)한 후에 굉장히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는 율법에 통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들어와서 율법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신서에 “달려가노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멈출 줄 모르는 열정을 서신서를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그는 질주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끝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해도 끝이 없습니다. 은혜의 바다에서 아무리 헤엄쳐도 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영적 세계 안에 깊이 들어가고 싶은 열망과 함께 성도들을 영적 세계 속으로 좀 더 깊이 끌어들이려는 갈망을 느낍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자신이 도달하지 못하면, 성도들을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세계가 있는데, 성도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놓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8).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세계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크다는 의미입니다. 완전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비록 연약하고 무력하고 속이 좁고 무너지고 깨어지고 시험에 들고 죄를 짓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는 높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속상한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 때문에 속상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 때문에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산과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자신은 영적 세계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달려가야 할 목표가 여전히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결론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경지에 이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었고, 양육 과정을 다 마쳤고, 봉사도 어느 정도 했다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만만한 사람과 비교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준을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는 한없이 부족한 자가 됩니다. 교회에서 양육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많은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너무 심오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영적 정상(頂上)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13~14).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있습니까? 영적 세계에서 안주(安住)는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어느 시점에 멈추어서 세월을 보내면 안 됩니다.
갈증이 일어나야 합니다. 간절함이 생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간,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만하고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바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바울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바울과 우리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도달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등정 길에서 수많은 능선을 넘으며 비경(秘境)을 맛본 사람은 더 오르려는 갈증을 느낍니다. 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고, 사모함이 일어나고, 갈증을 느낍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가 달려갑니까? 누가 멈추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숙제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착각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자신을 볼 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때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주님 앞에서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세계 안으로 들어간 후, 비쳐진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수록 은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집니다.
한없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면서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비쳐주시기를 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이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을 모르면, 착각하게 됩니다. 자신만만해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자신만만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힘을 믿고 목회할 때에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때 겸손해집니다.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 고통이 옵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했습니다(롬 7:24). 이것은 고통의 절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절규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상태로 인해 안타까워한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이 깊이 느껴지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런 고통이 찾아오면 처절해집니다. 갈 곳이 없어집니다.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지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만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면,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냥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달려간다고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연약함을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기 위해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발견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딘가에 도달한 것처럼 만족하거나 멈추어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복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가 적잖게 무거웠습니다. 심심찮게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다 보면, 자신은 부적격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죄가 수치(羞恥)로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 생활로 깊이 나아가려 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 하면, 자신의 과거의 부도덕한 삶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이전의 삶이 현재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전의 상처가 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아름답다고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수치스러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나쁜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 들은 것보다 욕들은 것이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은 수없이 들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의 욕을 들은 것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비극적인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성공한 기억보다 실패한 기억이 더 뚜렷합니다. 그것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과거를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뒤로 돌아갑니다.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만 감옥은 아닙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지 않은 경험과 실수를 계속 떠올리다 보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런데 불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을 삼켜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미래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등 끔찍한 일을 행했던 사울과 같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요, 포행자였던 자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자신을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과거의 어떤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워주시는 능력이 복음인 줄 믿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된 기록을 지워도 통신사를 통해 휴대폰을 처음 샀을 때의 기록을 다 복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과학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는 은혜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이 계속 반추(反芻)되고 복기(復棋)되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죄책감에 시달리며 과거로 도망쳐버리는 안타까운 삶을 사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움과 실수 때문에 굴을 파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보혈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義)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입니다. 뒤가 아니라, 앞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과거는 끝났습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덮이시기 바랍니다.

둘째,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현재에 집중하여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달려가노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계속해서 진행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변화와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경지로 나아가려면,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때부터 도태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됩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피카소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업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쇠퇴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삶도, 재능과 은사도 부지런히 달음질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쇠퇴해버립니다.

믿음의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앉아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삶 속에서 묵상할 때, 파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와 내 삶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상은 철학적이고 모호한 개념 덩어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살린 말씀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앞으로 치고 나아가는 사람의 기도에는 용맹함이 있습니다. 기도가 살아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음질치는 사람만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해 믿음의 행군을 하며 끊임없이 달음질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할 때에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열심히 해보세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행동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미래의 천국을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현실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말고 자라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는 쉬어서는 안 됩니다. 완주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한순간도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목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시선을 목표에 두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지만, 문제에 빠지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우여곡절이 있다 할지라도 마침내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표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한순간에 목표를 놓칩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은 산만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도록 우리를 흔들어놓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목표보다 현실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가 많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보지만, 낮게 나는 새는 먹이를 잘 먹습니다.
그러므로 먹이를 잘 잡으려면,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해버립니다.

해운대에서 오륙도까지 오가는 유람선이 있습니다. 유람선 옆에 항상 갈매기가 함께 날고 있습니다.
갈매기가 왜 유람선과 함께 나는지 아십니까?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서입니다. 갈매기는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 유람선 주위를 돕니다. 그래서 그 갈매기들은 더 높이 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현실의 유혹은 위험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에 시달리다 보면, 영적 성숙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영적 성숙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이 연마되는 일도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원숙해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서 어느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황당한 행동을 합니다. 말씀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아는 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체화(體化)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방향, 시선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푯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현실의 잡다한 문제들이 우리의 시선을 흐트러 놓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신앙은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과 시선을 놓쳐버리고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푯대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영적 성숙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달려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바라본 사람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목표지점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한 방향을 향해 질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시선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왜 삶이 복잡해집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한지 아십니까? 본질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삶이 유치해지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삶을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질에 집중하면, 삶이 심플해집니다.

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합니까? 기도와 묵상은 우리의 삶의 목표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탈선하지 않았는지, 시선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조준하며 달려가야 할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맞춰진 초점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왜 아이가 길을 잃어버립니까? 엄마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바둑판만 보고 있으면, 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으면, 비행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둑과 관련된 격언 중에 ‘반외팔목(盤外八目)’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둑판 안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데,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불안함이나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눈팔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에서 한눈팔지 말고, 푯대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집중력이 신앙의 관건입니다.

고난이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힘들어서 고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난 속에 파묻혀서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혼자 당하는 것 같습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은 모두 행복해보입니다. 나만 불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난에 파묻혀서 인생이 점점 죽어갑니다.

고난만 보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 너머에 계신 주님을 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나를 나답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면, 푯대가 보입니다.
푯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목표를 바꾸면, 습관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도, 그리스도는 끝없이 깊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복음의 빛을 발견하고, 너무 좋아 밤을 새워보았지만, 복음의 광채를 다 볼 수 없는 바울의 안타까움이 본문에 묻어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광채를 다 본다면, 우리의 눈을 멀게 됩니다. 우리는 한꺼번에 하나님을 다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좁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한꺼번에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건 속에서 푯대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다 보면,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스탠포드대의 졸업식 연설에서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인생을 만들며, 마침내 세계적인 신화를 창조한 애플사가 탄생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점들이 연결되어 오묘한 일들이 일어나 애플사가 탄생했습니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난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우리의 인생의 점들을 연결하셔서 우리를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거룩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하십니다.

살다 보면 아찔한 순간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을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생에 수많은 파도가 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입니다.
목표를 놓치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애쓰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의 세계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역사는 개인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야 합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까? 목표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를 완성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어렵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힘듭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틀린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완성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그 길만이 미래가 보장된 길인 줄 믿습니다.

쉬운 길을 찾지 마세요. 우리의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변화되게 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야 합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허물, 실수와 실패가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연약한 허물이 다 벗겨지고,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연약한 모습에 머물러있지 않고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 달음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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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저녁예배설교]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되라
본문 / 사무엘상 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본문의 말씀은 어려울 수도 있고, 아주 쉬울 수도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이십니다. 제한이 전혀 없으신(unlimited)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한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접속(接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하나님과 떨어져 상관없이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접속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굉장한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것이 단절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다시 이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동선(動線)이 됩니다. 믿음이 강하면, 하나님과 강하게 접속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께 있는 능력과 지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무한한 자원들이 우리에게 흘러오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다양한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수원지의 물이 가정으로 오기까지 연결해주는 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관이 끊어졌거나 녹이 슬거나 막혀있으면, 물이 흘러올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와이파이(Wi-Fi)가 터지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곳에서는 인터넷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휴대폰이 발달되어있어서 어디서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연결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순간, 지구촌 어디와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고 싶은 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세계와 이어집니다.
연결된다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 최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보다 나은 접속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접속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지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삶은 한 순간에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연결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누구와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접속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흘려보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통로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접속된 곳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 됩니다. 하나님과 접속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아예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차이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연결하려고 해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말았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신 상태가 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도 있고, 들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신 상태가 매우 양호한 사람입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 3장 1절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는 말씀이 거의 끊긴 상태였습니다.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 끊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자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송신(送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신(受信)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침묵하시면,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바로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기근 중의 기근은 말씀의 기근입니다. 가장 무서운 기근입니다.

아모스 8장 11~13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의 기근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말씀의 기근이 있으면, 시대 전체가 어두움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일종의 재앙입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희귀하면, 영적으로 갈하여 쓰러집니다.

본문에 보면,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와 어린 사무엘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 지도자였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막에서는 밤에 등불을 켜서 아침까지 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밤임을 의미합니다.
소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3절 뒷부분에 보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2절의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는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야 할 것 같은데,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웠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사무엘이 누워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직분이나 나이, 경륜과 상관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상태를 잘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과 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엘리 시대와 영적 상황이 비슷한 시대가 또 한 번 있었습니다. 엘리 시대에 영적 어두움이 있었던 것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직전에 영적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를 ‘하나님의 침묵기’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심각한 영적 접촉 불량이 일어난 시기에 하나님과의 최상의 접촉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를 가리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마 3:3).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出現)과 하나님의 새 시대를 여는 계시를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시대에 그 말씀을 송출(送出)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통로를 열어놓으셨습니다. 엘리 시대에는 어린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던 야인(野人)이었습니다. 멋진 성전 안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빈 들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풀어놓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통로입니다. 누구를 통해 일하시는가, 누구에게 말씀을 흘려보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풀어놓을 자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접촉 상태가 양호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나 직분자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먼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도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나은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고 말씀의 능력으로 병이 나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때 항상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들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시대 전체가 어두움에 휩싸여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제 엘리 시대는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와는 할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절연(絶緣)된 엘리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제 너와 일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너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끊어지면,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 직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재앙에 가까운 일입니다. 기근 중의 기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결된 자와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결된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일어나는 곳이 역사의 주 무대가 됩니다.
우리가 평신도로서 사업을 하거나 직장에 다니거나 무엇을 하든지 삶의 영역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엘리와 신약의 세례 요한을 대조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성전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서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엘리는 성전에서 살았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성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 세팅(setting)된 곳입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것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피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거룩하게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거창한 타이틀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도권의 제사장이나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웃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소(聖所)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터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입니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으로 가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 제도나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곳이 성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는데,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긴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목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해박한 지식으로 성경을 꿰는 성경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목말랐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속이 끊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궤변에 불과했습니다. 소음(騷音)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가슴이 탔습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없는 말씀으로 허기를 일시적으로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영혼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은 좋아지지만, 돌아서면 공허해졌습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이와 직분에 상관없습니다.

사무엘은 굉장히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직 성전에 대해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에 비해 성전에서 일평생을 보낸 엘리는 성전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직분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엘리의 육신의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보면, 엘리는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넘어져서 죽었습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영은 자동적으로 어두워집니다. 말씀이 끊어지면, 영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기능이 멈춘 것입니다.

엘리와 세례 요한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만 열심을 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만 열심을 내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포장되어있지만, 들여다 보면 자신의 일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엘리와 두 아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그것이 일이 되고, 일을 계속하다 보니 자신의 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경종(警鐘)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 답을 얻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잊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거창한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형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외치는 광야의 소리(voice)였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아실현과 성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의 삶을 요한복음에서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언제 짜증이 많이 납니까? 하나님께 대해 불평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왜 하나님께 불평합니까?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지 않으실 때, 우리는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이 강화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계속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파수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인지 자신의 일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영광이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자아 중심적 삶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신하는 데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께 주장하고 싶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이기심이 굉장히 고질적입니다.

짜증이 많이 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화가 많이 나는 때는 언제입니까? 가장 민감하게 행동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자신과 연관된 것에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입니다. 자신과 연관되지 않은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거슬리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화를 내거나, 그리스도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엘라 골짜기의 다윗의 영성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족속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불쾌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소년 다윗 외에는 분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자아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임할 수 없습니다.
접속 불량이 일어납니다. 자아로 충만해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탐욕이 가득하여 자아 중심적이고, 세상의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삶에 하나님의 음성이 끊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매일 자신의 일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엘리도 제사장 업무로 바빴을 것입니다.
사실 제사장의 일은 굉장히 많습니다. 엘리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주님보다 일을 더 신경 썼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셔놓고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인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 자신이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망과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눅 10:40).

자아중심적인 사람과 일 중심적인 사람은 동일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아 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가해자로 생각합니다. 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마저도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 일, 자기 생각, 자기 계획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마르다는 온통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고 일했지만, 주님과 상관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모습은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사람이 매일 매일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가끔 주님을 생각할 뿐,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내기에는 매우 바쁩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습니다. 한나의 통절한 기도로 하나님께서는 영적 불임을 치유하시고, 사무엘을 말씀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무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흘려보낼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 있습니까?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영혼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오는, 영혼을 흔드는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흔들어 깨우십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듣는데, 영혼이 깨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에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속삭이듯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인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감합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에 어두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죄와 타락한 본성,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덮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임해야 합니다. 영혼을 관통해야 합니다. 심장의 폐부(肺腑)를 갈라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한다면, 그냥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양가 없는 농담을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으십니다.

저는 말씀사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신 것을 전합니다. 제게 임했던 말씀이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여 성도가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에게로 흘려보내는 말씀의 통로가 됩니다. 말씀이 흘러가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고, 부흥이 임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부터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 엘리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엘리에게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반응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방 안에서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는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말씀이 임하면,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아이냐 어른이냐, 목사냐 평신도냐, 10년 믿은 사람인가 초신자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들린다면, 놀라운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과 일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로로 사용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수신 상태가 좋다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수신 상태가 좋다는 것은 자아 중심적 삶을 버리고,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말씀이 홍해를 가릅니다. 그 말씀이 흘러나갈 때,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에스겔서에서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어 일어난 것처럼. 절망 속에 있던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명의 길을 가게 하시고, 수많은 일꾼을 일으키는 역사가 말씀이 임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삶이 위험한 모험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모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것보다 확실한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한다면, 그것보다 위대하고, 그것보다 멋있는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 역사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가 삶의 전성기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반응했던 사무엘처럼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하나님,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게 말씀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왜 답답해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슬퍼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무능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혼란에 빠져있습니까? 왜 갈등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지금 암에 걸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열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은 재앙입니다. 기근입니다. 가장 위험한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가장 중요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이와 형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써나가셨습니다.
학력, 사회적 지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사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이 역사의 중심부입니다. 그곳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사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어머니의 서원에 의해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다시 반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여러분의 심령에서 흘러나온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것이 능력이 됩니다. 이것이 축복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엘리,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말씀이 끊어졌습니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 규율을 지키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열심을 낸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아 중심적 삶을 내려놓고, 철저히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십시오. 무슨 말씀에든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길이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가슴이 미여집니다. 통곡하게 됩니다.
말씀의 홍수시대이지만, 먹을 물이 없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입니다. 말씀이 끊어진 시대입니다. 영적 어두움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찾지 마세요. 말씀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잡다한 소음과 같은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같은 말씀, 영혼에 빛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 능력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끼시며, 주의 말씀을 들을 귀를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엘리는 눈만 어두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도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말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가며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고도 남는, 존재를 흔들어놓는, 폭풍처럼 임하시는, 영혼을 뒤덮는, 생명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밀고 들어와 말씀 앞에 압도당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시작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십니다.
여러분 모두 그 일에 쓰임 받는 통로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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