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금요저녁예배설교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본문 / 욥기 42:1~6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욥기 1장 9절에 보면,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잘해주시니까, 욥이 축복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만일 축복을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떠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욥 1:12).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의 신앙의 진위(眞僞)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위를 늘 공격합니다. 저 사람이 왜 예수님을 믿는가.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왜 믿음생활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셔서입니까? 건강의 복을 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가정에 행복을 주셔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 등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만일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다 빼앗으셔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욥에게 무차별적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재산이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자녀들까지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까지 그에게 저주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은 혼자 남았습니다. 생명만 겨우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욥은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와서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은 처음에는 고난에 대해 잘 대처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내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험악해졌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 까다로운 질문을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욥이 혼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장면입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께서 반응하시지 않으실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욥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쏟아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쁜 기도는 없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버릇없이 행동해도 집 안에서 결판내려고 하는 것이 가출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싸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두 사람이 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따로따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할 것은 다 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하고,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놓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적 행동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자신이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고, 의미 없는 되뇜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밥도 차려줍니다. 집 청소도 합니다. 아이들도 돌보지만, 마음은 가정에서 떠난 여인과 같습니다.
대화하지만, 대화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집에서 함께 살 뿐입니다. 정신적 이혼 상태와 같습니다.
욥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점잖은 인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욥이 친구들의 변론에 대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집요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을 속이지 않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립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고, 근사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모양을 내고, 규격화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고, 미사여구로 꾸미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통정(通情)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의문화가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욥은 처음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2:10).
그러나 욥은 무조건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사투(死鬪)를 벌이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화가 난 상태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욥은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해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내리고, 자신의 문제를 무마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이미 답을 얻은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 매우 힘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너무 많아 그냥 문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고, 답이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창자가 뒤틀릴 만큼 기도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외로워집니다. 나의 고통 안으로 들어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삶의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그래서 삶이 헷갈립니다.
고통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답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얄밉습니다.
고통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게 답을 얻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난다고 해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따지더라도 하나님께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넓은 분이십니다. 맹숭맹숭하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창자가 끊어질 듯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 속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전투적 의지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점잖고 형식적인 기도를 되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맹숭맹숭하게 영양가 없는 미사여구로 기도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십자가와 마주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난해(難解)한 사건입니다. 욥의 고난이 난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내칩니다.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고통은 독특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독특한 고통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시며 아버지께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레슨(lesson)은 정직함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자신의 감정을 매우 정직하게 여과 없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욥의 인내도 중요하지만,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고통을 위장(僞裝)하거나 신앙이 좋은 체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고통과 환경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면, 이곳은 눈물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위장하려 합니다. 고통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고통을 멋지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직함,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지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영혼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사여구로 꾸며 자신을 감추어버린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치며 펑펑 우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왔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이 없는 기도, 토해내지 않는 기도, 감정을 숨긴 기도를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셔가며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이 기도하는 것에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치열함이 묻어있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시련과 고통과 환난과 어려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다가가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고통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가벼움입니다. 신앙의 형식만 남아있고, 내용은 얄팍해져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매우 가볍게 다가갔습니다. 남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친구들은 그럴듯한 교리로 무장한 교과서적인 답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늘 그것을 고민합니다. 제 나이에 삶 속에서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인간의 고난의 깊이를 몸에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직면한 고통에 대해 말씀을 통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다가가 답을 주려고 하는 얄팍한 설교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맞는 말을 하는데,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의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고통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흉터를 놀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작아 보이는 상처라도 그는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십니까? 삶이 무너질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착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결론만 붙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심히 불편하고,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습니까.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요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한 신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로 인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 씨름한 흔적 없이 믿음을 쉽게 가진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인생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안에서는 요동치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성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 하나님께 떼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결해달라고 떼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하나님과 주고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덤덤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힘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저 그렇고, 평안한 때에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없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육적(肉的)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치졸했습니다. 간사했습니다. 인간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지독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하실까요.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있으면, 성경을 들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답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욥은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고, 그 기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욥은 매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고,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친구들은 기막힌 답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지만, 욥은 그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승부를 걸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만만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싸움입니다. 무엇과 싸우시겠습니까. 욥은 마귀, 친구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본문 욥기 42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마침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쉽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길고 길었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냉랭한 교리적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책으로 공부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질문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긴 고통 속에서 뒹굴고 소리치며 하나님께 원망하며 대들다가 마침내 그는 하나님과 마주쳤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동안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듣기만 하던 사람이 자신이 들은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모든 전쟁이 끝납니다. 모든 시비가 그칩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왜 애매모호합니까?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헷갈렸는데, 이제 보았습니다. 더 이상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고, 고통이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나의 고통이 해석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고통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의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고통마저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욥의 인내보다 탁월하십니다.
욥은 앙탈을 부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쏟아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습니다. 욥이 언제 하나님께 다가오는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욥에게 맡기셨습니다.
욥이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답을 빨리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대가(代價)를 통해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욥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해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뻔한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을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답을 미리 노출하시지 않으십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을 미리 보고 나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올바로 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부림치며 익힌 만큼,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리더가 설명해주는 하나님은 머리에만 남을 뿐입니다.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면, 머리에 남아있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은 삶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싸우며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떠들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욥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시다니,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욥은 탁월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은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욥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따졌습니다. 욥은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욥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과 크게 다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입술을 통해 욥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이 고백이 나오는 순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시비를 잠재워버리시고, 욥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사탄 앞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인내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시고, 욥이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통해 이전보다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을 통과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가(眞價)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두십니다.
도자기를 몇 도에 굽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강도(强度)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구우면, 쉽게 깨어지는 그릇이 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힘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인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한 단계에 머물러있으면, 하나님께 부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무당을 찾아가 액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가 맺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둘도 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롬 8:35,37~39).
하나님과 바울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도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마저도 하나님과 바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유가 넘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을 제거해버리면, 욥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모든 시험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 믿음의 이유이십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십니다.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 흔들릴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테스트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혼자 고난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마침내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과 배신과 고독과 오해의 긴 터널을 통과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한가운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은 계속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깊고 높고 풍성한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모르는 척하시는, 비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손들게 됩니다. 그 후에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더없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나는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욥은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우리를 칭찬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정직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맴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