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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기도회 기도문

   

1. 죄에 대해서는 엄하신 하나님 이시지만

 

자녀된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마음 약하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2. 이밤 세상 속에서 시달리는 자녀들을 보시고 안타까우신 마음에

 

그토록 목사님을 통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기에 선택된 저희 자녀들을 불러

 

이 자리에 앉게 하셨으리라 생각 됩니다.

 

아버지 한편 부끄럽기도 하지만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3. 그러한 주님의 마음이 우리 가슴속에 다가옴을 느낍니다.

 

이시간 세상에 살다가 묻혀온 모든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4.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 고민하고 걱정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사업실패, 취직과 승진문제, 질병, 가족 건강 및 구원, 재물축복, 경제불황,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한 문제, 질병등 많은 기도와 간구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라>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 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 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공의를 위해 간구한다 하지만 혹여 저희들의 간구가 주님

 

뜻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간구들이 많을 줄로 압니다.

 

긍휼히 여겨 주옵시고 공의를 위해 구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5. 아버지! 특별히 우리 신천재단을 기도로 섬기시는 지상천 담임목사님을

 

사랑하여 주시고, 사모님과 자녀들의 건강을 지켜 주옵소서

 

부목사님, 전도사님, 모든 교역자님들 각각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하실수 있도록

 

건강과 형통의 복을 주옵소서

 

6. 장로님들과, 주일학교, 교사, 속장, 성가지휘, 반주, 성가대, 주차봉사, 식당봉사,

 

화장실봉사, 예배를 위한 각종 봉사에서 보이지 않게 수고하시는

 

일꾼들의 손에 묻은 땀을 보시고 그들의 노고를 잊지 마옵소서

 

7. 특별히 공산권에서 해외선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선교활동을 하시는 선교사들을

 

돌아보옵소서. 그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게 하여주옵시고, 기도와 물질의 동역자가 연결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영적인 리더쉽과 지혜를 주옵시고 또한 필요한 재정 및 물질과 안심하고 선교할수 있도록 자녀들의 교육과 영적성장도 주님께서 돌아보옵소서

 

8. 끝으로 우리 신천교회가 이 지역사회 교회의 화합을 이끄는 등불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또한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나누는 교회로 우뚝 서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을 눈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였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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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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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길을 묻다 ( October,Friday Night Sermon)

 

본문성구 : 요한복음 14:1-6

 

참고성구 : 빌립보서 4;4-7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70년대 사건 기사 슈퍼맨, 원더우먼 사고 기사

 

우리나라에 흑백 TV가 처음 선보인 것은 전쟁이 막 끝난 뒤인 1954 7월 이라고 합니다. 그 때는 방송도 없었고 미군이 가져온 텔레비전이 전부였습니다. 본격적인 TV방송은 1961년에 국영 KBS가 개국하면서 시작되고,66년에 이르러 국산 텔레비전이 시중에 선보이게 됩니다. 그때 이후 80년 말에는 컬러 tv시대가 열립니다.

 

텔레비전이 주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외국영화를 안방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당시에도 텔레비전을 통해 여러가지 외국영화들이 인기를 많이 끌었는데요. 특히 기억나는 것 가운데 원더우먼, 600백만불의 사나이, 슈퍼맨 등 흥미진진한 볼거리들이 많았죠. 그런데, 초창기에 사람들이 TV프로그램을 현실과 혼돈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특히, 아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대책없이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 일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 안타까운일입니다. 혹시7.80년대 이후 태어나신 분들 중에 제 말씀이 믿기지 않는 분들이 있으신 것 같아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사진자료1,2,3). 이 아이들이 부모님께 한 번만이라도 영화속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물어봤더라면 그런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모르는 것이나, 혹은 미심쩍은 일은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야, 큰 손해를 미리 막을 수 있는 겁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기자 생활을 해 본 저로서는 좋은 질문이 좋은 기사를 낳는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많이 체험했습니다. 집요하고 계산된 질문이 취재원들의 허를 찌를 때 진실과 가까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자녀교육에도 질문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미 목사님을 통해 여러번 들어신 이야깁다만, 우리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딴짓하지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부모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은 훌륭하신 분들이니까 모르는 것을 많이 물어보라고 한답니다.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혹은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질문을 받고, 그런 문답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창의력과 지능이 발달된다고 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질문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만, 잘 되지 않더라구요. 영어도 영어지만 괜히 수업시간에 지장을 주는 것 같고,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주로 뒤에 앉아서 경청하는 편입니다. 듣는 훈련을 하는 거죠

 

II.성경공부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좋은 질문을 통해서 성경구절 속에 들어 있는 감추어진 보물을 캐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질문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특히 요한 복음에서 믿음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식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과는 조금 색깔이 다릅니다. 의심합니다. 따져봅니다. 짚어봅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죠. 이번에도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셔야 할 아버지의 집,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는 길을 제자들도 다 알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품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불쑥 질문을 던집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라고 이야기 하는 걸 보니까 당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에 대해 긴가민가 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도마만 모르고 불쑥 던진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마가 우리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뤄 당시 제자들 다수도 몰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째든 이 질문의 답이 참 걸작입니다.

 

III.여러분들이 너무도 많이 들어 보셨던 유명한 말씀이라 외우시는 분들도 많으실 줄 압니다. 다같이 대답해 보실까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저는 처음 이 말씀을 읽었을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시구나.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교만하신 것 아니야.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그 곳은 이렇게 이렇게 가는 거야, 어디 어디 지나서, 혹은 그 곳이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곳이라면 , 좀 시적인 표현으로 돌려서 말씀하시거나

 

,한편으로는 정말 대단하시다, 내가 믿는 신이 이정도는 되야지, 다른 종교에서는 천상천하 유하독존이라고 외치는 분도 있는데, 멋있다. , 진리, 생명, 좋은 말 다 들어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개인적으로 너무나 많은 우연을 체험했는데요, 마치 누군가가 소를 몰아가듯 저를 몰아가는 듯 했습니다. 사실, 좀 폼나는 설교를 하기 위해 주석부터 펴서 배경과 원어에 관련한 지식 등 평소 성경공부 모임에서 하는 공부와 묵상 방식과는 다르게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답을 알아가는 것 같아 참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의 묵상, 저만의 질문이 없었던 겁니다. 다 남의 말입니다. 좋은 말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래서 여러분께 설명해 드릴 수 있겠는데, 감동이 없었습니다.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을 덮고 사람들을 만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평소하던대로 나만의 두레박으로 은혜의 강가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번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또 한번 큰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왜 주님께서는 당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도마는 눈에 보이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주님은 난데 없이 당신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좀 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몇몇 주석을 참고해 보니,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등등등..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지, 단지 영적으로만 생각하면 그럴 듯 한데, 감동이 없었습니다. 좀 힘들었습니다. 시간은 가는데 설교의 핵심적인 깨달음은 없고, 좀처럼 건져지는 게 없었습니다. 히루 하루 지나가고 목요일 밤이었습니다. 지은이와 함께 놀다가 이른바 아하 모먼트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 딸이 설교준비 잘되가느냐고 물어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아니’, 말씀이 뭐냐고 해서 예수님이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한 부분이라고 했죠. 설교문 쓰기가 좀 힘들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아빠는 왜 예수님이 당신을 굳이 길이라고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지은이도 그러게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길도 아니신데” “밟고 지나가는 길

 

저는 그 순간, 몇해전 목사님과 저녁을 먹다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일본에 파견된 한 선교사가 배교를 했다는 소식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한 신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서양의 천주교의 유입을 막았고 박해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측은 체포된 신부들이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고 지나가면 지역의 천주교인들을 살려주겠다고 했고, 끝내 그 신부님은 고뇌끝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밟고 지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언듯 들으면 참 믿음없고, 순교의 열정이 없어 보이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는 1966년 소설로 출판되어 종교소설로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 올라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인 엔도슈샤쿠 가 쓴 침묵이라는 실화소설입니다. 주인공인 예수회 소속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동료신부의 배교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1635년 일본에 갑니다. 그리고, 그 참혹한 박해 현장을 체험합니다. 이 신부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 사이에서 깊은 방황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응답 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철저히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사람들을 살리기로 하고 성화를 발로 밝으려는 순간,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과연 진짜 이런 음성이 들였는지, 아니면 신부님의 마음속 소리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기독교인의 선택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생명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세상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아들을 버리실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 그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값싼 싸구려 은혜로 둔갑시켜온 저 자신이 미웠습니다.

 

저는 순간 지금까지 의미없이 밟아 온 주님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욕심 때문에 팽개쳐지고 짓밟혀진 주님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왜 주님께서 도마의 질문에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됐고, 성경학자들이 이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을 염두해 두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IV.십자가의 고난, 그 좁은 길, 그 길은 진리의 길이도 합니다. 사실 도마사도가 의심이 많았지만, 결국 요한 복음 20장에서는 누구도 하지못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앞서 한 찬양에도 나오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상처난 자국을 확인하고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한 고백보다 더 직설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더 친근한 고백입니다. 도마는 십자가에서 죽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확인한 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의심에 여지가 없는 참하나님, 참신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재 모습, 참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의 실재 모습이십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세상의 진리,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진리와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입니다. 신약성서학자인 윌리엄 버클레이(William Barclay)는 그의 요한복음 해설서에서 많은 성인들이 진리를 이야기 했지만, 자신이 그 진리라고 이야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며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주장이 예수 안에서 최고조를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실현됐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많은 성인들이 진리 가르치고 그 진리에 입각해 살려고 했지만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모든 인류를 구원에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과 행위는 원천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여 도덕적으로 무결하며 참되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V.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여기에 쓰인 그리어 단어는조에라고 해서 생명이라는 뜻인데, 요한 복음에서는 많은 경우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예수님의 생명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영생은 바로 참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7:3).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구주로 고백하며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겠다고 선포하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영생에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는 로마서 64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레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이곳에 새생명도 같은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서 4319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광야의 길과 사막의 강은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는 어떤 면에서 역설의 땅입니다. 왜냐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땅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땅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인데 그 원뜻은 직역하면From the word ‘말씀으로부터라는 뜻이되죠.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곳은 바로 광야생활을 하면서 였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의 땅 열사의 땅 사막에 물은 곧 생명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생명은 유한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영원하고, 죄인들에게 영생의 복을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에서 만나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이 생명,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선물로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바로 이런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 위를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바로 그렇게 살다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섭니다. 우리가 역사속에서 우리와 함게 숨쉬다 떠나시고 다시 오마 약속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분과 충만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못한 채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분께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길을 알아야 갈 것 아닙니까?

 

정상에 오를 길은 많다고 합니다. 마호메트도 있고, 부처도 있고, 공자도 있고, 노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길, 바른 길은 그래서 길을 잃지 않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은 바로 당신을 밟고 가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VI.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새학기가 시작되고 또 직장과 가정에서 일상적인 일들속에서 바쁘실 줄 압니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당연하게 보지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길을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침묵하신다고 불평만 하지 마시고, 미세하게 들려오는 그 분의 응답에 새벽마다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고통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박해의 현장에서, 불의가 판치는 폭력의 현장에서, 돈과 목숨을 바꾸어야 하는 야만의 현장에서, 여전히 함께 울고 고통해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찢겨지고 짓밟힌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나 그속에 영원한 생명, 천국의 소망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 생활을 돌아보며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말씀에 비춰 우리의 삶을 돌아 보며 아파할 때만이, 우리에게 밟힘을 당하러 오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지 않는 것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으로 일관할 때 우리는 매일 매일 그분의 얼굴을 의미없이 밟고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던지신 그 희생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성령 말씀을 통해 각자가 은혜의 강물을 길어 올리는 체험을 하셔서 머리로만 아는 성경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성경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갈급해지고 그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면 할 수록 주의 희생을 값지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바울 사도는 이런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고 평생을 십자가의 길로만 갔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을 통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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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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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금요저녁예배설교] 여호와께 감사하라 September Friday Night Sermon

 

여호와께 감사하라  

본문 : 136:21-26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6:21-26

 

한 해의 추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을 감사하며 풍성한 곡식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절기입니다. 지금 계절적으로는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지만, 우리의 금년을 풍요롭게 해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허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에는 거두어 들인 곡식만 예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가정을 함께 드리는 절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유대력에 의한 3대 절기는 출애굽기 23:14-17에 계시된 바와 같이, 무교절이라고 하는 유월절과, 칠칠절 또는 초실절, 오순절이라고 하는 맥추절과,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 절기의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서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습니다.

 

히브리인의 유일하신 하나님 사상에서부터 신약의 영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건은 이러한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민족적 단결을 도모한 것이 그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 때의 수장절을 은혜 시대의 감사의 제사로 여기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감사의 조건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감사할 조건을 주실 하나님을 신앙하며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광야 40년의 노정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시지 않았으면 허허한 벌판에 천막을 치고 그들이 어떻게 광야 생활을 견디어 내었겠습니까? 그들의 기다림은 맹목적인 신앙의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이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옮겼다가는 그들에게 금방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들의 경험에 의한 확신이었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은 성막 한 가운데입니다. 말씀 중심의 삶을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백성들이 고통의 종점이 되었다 싶으면 가나안에서 또 다른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그들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결코 전파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의 수확에 대한 기쁨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들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들이 얻은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기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1년 동안 수고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그들의 삶의 우선권이 먼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매사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우선권을 하나님께 돌릴 때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기업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자 누구에게나 이미 응답된 기도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우는 무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고통과 좌절과 슬픔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민족사 속에서 한의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세에 동방의 빛으로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축복 앞에 감사의 눈물로 제사드립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물이 애통하는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을 경험했고 40년 광야 생활도 경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가나안 족속과 수많은 피를 흘리며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적하고 있는 우상 숭배와 부정과 불의와 향락의 불레셋과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편 136편에서와 같이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자신에게 향하여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가정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사회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의 역사가 재조명된 이 땅에서, 그들이 순전한 맘으로 감사하지 못하여 빼앗긴 축복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1. 창조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선하시고 인자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있기까지 인간은 낙원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있을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땅에서 선택받은 백성으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심판과 축복 속에서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이류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주었지만, 그들은 육체를 입고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 제물로 빛의 열매를 드립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시편 기자는 먼저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섭리된 삶을 살아감으로 감사드립시다. 그것은 오직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2.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애굽땅에 종이 되었던 430, 요셉은 정착한 고센 땅에서 이제는 떠나야 했습니다. 비록 고통스럽긴 해도 먹을 것이 많은 나일강변을 떠나 황량하고 적막한 땅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이 있기까지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고통이 임박해지자 그들은 탈출을 주저했습니다. 오늘 수많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막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자유를 찾게 해주어도 잠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영원한 자유를 포기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고통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온갖 경험을 한 다윗은 시편 118:6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애굽을 떠난 자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부터의 탈출입니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안정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때가 있는가 하면 불행한 때가 있고, 즐거운 때가 있는가 하면 괴로운 때가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과 함께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앞장서신 싸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든지 평안하든지 하나님은 함께 계셔서 약속의 자녀들을 위하여 영원토록 싸워 주십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벌떼처럼 그를 에워 쌌으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신 것을 알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감사는 삶 속에서 여호와를 의뢰하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내가 안다는 고백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전부를 드림으로 감사절의 서원 제물을 삼읍시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4. 소망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14:1, 2).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할 제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할지라도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질병과 절망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주님의 모습을 따라 살아야 됩니다. 눈물과 슬픔이 없는 곳, 사망과 고통이 없는 곳,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승리해야 합니다. 금년 감사절은 우리의 산 소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드리는 축제의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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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금요저녁예배설교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본문 / 욥기 42:1~6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욥기 19절에 보면,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잘해주시니까, 욥이 축복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만일 축복을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떠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2).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의 신앙의 진위(眞僞)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위를 늘 공격합니다. 저 사람이 왜 예수님을 믿는가.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왜 믿음생활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셔서입니까? 건강의 복을 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가정에 행복을 주셔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 등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만일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다 빼앗으셔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욥에게 무차별적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재산이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자녀들까지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까지 그에게 저주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은 혼자 남았습니다. 생명만 겨우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욥은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와서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은 처음에는 고난에 대해 잘 대처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1:21).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내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험악해졌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 까다로운 질문을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욥이 혼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장면입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께서 반응하시지 않으실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욥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쏟아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쁜 기도는 없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버릇없이 행동해도 집 안에서 결판내려고 하는 것이 가출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싸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두 사람이 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따로따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할 것은 다 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하고,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놓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적 행동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자신이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고, 의미 없는 되뇜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밥도 차려줍니다. 집 청소도 합니다. 아이들도 돌보지만, 마음은 가정에서 떠난 여인과 같습니다.

대화하지만, 대화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집에서 함께 살 뿐입니다. 정신적 이혼 상태와 같습니다.

 

욥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점잖은 인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욥이 친구들의 변론에 대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집요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을 속이지 않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립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고, 근사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모양을 내고, 규격화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고, 미사여구로 꾸미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통정(通情)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의문화가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욥은 처음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1:21, 2:10).

 

그러나 욥은 무조건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사투(死鬪)를 벌이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화가 난 상태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욥은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해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내리고, 자신의 문제를 무마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이미 답을 얻은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 매우 힘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너무 많아 그냥 문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고, 답이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창자가 뒤틀릴 만큼 기도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외로워집니다. 나의 고통 안으로 들어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삶의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그래서 삶이 헷갈립니다.

고통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답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얄밉습니다.

 

고통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게 답을 얻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난다고 해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따지더라도 하나님께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넓은 분이십니다. 맹숭맹숭하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창자가 끊어질 듯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 속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전투적 의지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점잖고 형식적인 기도를 되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맹숭맹숭하게 영양가 없는 미사여구로 기도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십자가와 마주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난해(難解)한 사건입니다. 욥의 고난이 난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내칩니다.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고통은 독특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독특한 고통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26:39).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시며 아버지께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레슨(lesson)은 정직함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자신의 감정을 매우 정직하게 여과 없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욥의 인내도 중요하지만,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고통을 위장(僞裝)하거나 신앙이 좋은 체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고통과 환경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면, 이곳은 눈물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위장하려 합니다. 고통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고통을 멋지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직함,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지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영혼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사여구로 꾸며 자신을 감추어버린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치며 펑펑 우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왔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이 없는 기도, 토해내지 않는 기도, 감정을 숨긴 기도를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셔가며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이 기도하는 것에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치열함이 묻어있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시련과 고통과 환난과 어려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다가가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고통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가벼움입니다. 신앙의 형식만 남아있고, 내용은 얄팍해져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매우 가볍게 다가갔습니다. 남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친구들은 그럴듯한 교리로 무장한 교과서적인 답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늘 그것을 고민합니다. 제 나이에 삶 속에서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인간의 고난의 깊이를 몸에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직면한 고통에 대해 말씀을 통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다가가 답을 주려고 하는 얄팍한 설교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맞는 말을 하는데,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의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고통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흉터를 놀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작아 보이는 상처라도 그는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십니까? 삶이 무너질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착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결론만 붙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심히 불편하고,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습니까.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요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한 신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로 인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 씨름한 흔적 없이 믿음을 쉽게 가진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인생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안에서는 요동치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성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 하나님께 떼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결해달라고 떼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하나님과 주고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덤덤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힘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저 그렇고, 평안한 때에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없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육적(肉的)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치졸했습니다. 간사했습니다. 인간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지독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하실까요.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있으면, 성경을 들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답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욥은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고, 그 기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욥은 매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고,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친구들은 기막힌 답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지만, 욥은 그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승부를 걸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만만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싸움입니다. 무엇과 싸우시겠습니까. 욥은 마귀, 친구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본문 욥기 42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마침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쉽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길고 길었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냉랭한 교리적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책으로 공부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질문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긴 고통 속에서 뒹굴고 소리치며 하나님께 원망하며 대들다가 마침내 그는 하나님과 마주쳤습니다.

 

욥기 42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동안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듣기만 하던 사람이 자신이 들은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모든 전쟁이 끝납니다. 모든 시비가 그칩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왜 애매모호합니까?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헷갈렸는데, 이제 보았습니다. 더 이상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고, 고통이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나의 고통이 해석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고통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의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고통마저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욥의 인내보다 탁월하십니다.

 

욥은 앙탈을 부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쏟아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습니다. 욥이 언제 하나님께 다가오는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욥에게 맡기셨습니다.

 

욥이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답을 빨리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대가(代價)를 통해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욥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해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뻔한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을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답을 미리 노출하시지 않으십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을 미리 보고 나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올바로 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부림치며 익힌 만큼,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리더가 설명해주는 하나님은 머리에만 남을 뿐입니다.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면, 머리에 남아있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은 삶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싸우며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떠들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욥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터(Martin Luther)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시다니,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욥은 탁월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은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욥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따졌습니다. 욥은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욥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과 크게 다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입술을 통해 욥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이 고백이 나오는 순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시비를 잠재워버리시고, 욥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사탄 앞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인내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시고, 욥이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통해 이전보다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을 통과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가(眞價)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두십니다.

 

도자기를 몇 도에 굽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강도(强度)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구우면, 쉽게 깨어지는 그릇이 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힘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인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한 단계에 머물러있으면, 하나님께 부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무당을 찾아가 액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가 맺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둘도 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8:35,37~39).

하나님과 바울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도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마저도 하나님과 바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유가 넘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을 제거해버리면, 욥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모든 시험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 믿음의 이유이십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십니다.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 흔들릴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테스트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혼자 고난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마침내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과 배신과 고독과 오해의 긴 터널을 통과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한가운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은 계속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깊고 높고 풍성한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모르는 척하시는, 비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손들게 됩니다. 그 후에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더없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나는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욥은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우리를 칭찬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정직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맴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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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 둘 중 하나만 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둘 중 하나만 하라
본문 /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세상을 바라보면, 기대하기보다 염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염려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염려가 일상사(日常事)가 되어버렸습니다.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람들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옵니다.
염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이 세상은 염려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염려가 섞여있는 모습을 봅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새로운 한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그리고 향후 10년 동안 한국은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 있을 것이라 전망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한국 교회 또한 10년 동안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염려는 인간의 삶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시대마다 염려의 주제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염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이별로 염려하는 것이 다릅니다. 직업이 없을 때에는 직업이 없는 것으로 인해 염려합니다. 그러나 직업을 갖게 되면, 또 다른 염려가 찾아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에게 정확하게 찾아옵니다.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염려 때문에 낭비하는 에너지와 시간은 엄청납니다.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염려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특히 연말이 되면, 염려가 많이 쌓입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 늘 염려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염려가 언제쯤 끝날 것 같습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의 염려가 언제쯤 끝나겠습니까?
나이든 분들은 건강을 염려하십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시험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학생으로 있는 동안에는 계속 염려합니다. 불안정한 경제 여건으로 인해 계속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주변 환경을 보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이든 어른이든 청년이든 남자든 여자든 직장인이든 누구든지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신 분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아이로 인해 염려하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32). 염려를 이방인과 제자를 구별하는 구별점으로 보셨습니다.

제11계명이 있다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일 것 같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다면, 불신자와 뚜렷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염려하는데,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며 살아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正體性)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7).
염려는 우리가 어디에 속한 자인가를 확증시켜줍니다. 염려는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갈 것인가, 불신앙의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기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운명처럼 붙어 다니는 염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6, 28).
이 말씀을 보면,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데, 새를 보고 꽃구경할 시간이 있나. 여유가 있어야 새도 보고, 꽃도 보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주제입니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두 사람에게나 가족에게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고 기록되어있다면 좋겠는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 불가능해보입니다.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頂上)을 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세 가지를 이룰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마치 그림의 떡처럼 보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삶,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는 삶,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때때로 염려하지 말라, 가능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Do not be anxious about something”라고 기록되어있지 않고,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도 바울이 치열한 인생살이를 모르고 말한 것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아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을 가볍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무리한 강요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급적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했다면, 우리가 화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하여 눈을 닦고 다시 봐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걸려 좀처럼 뒤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밀려오는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숨 막히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본문의 말씀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수백 가지 염려가 몰려오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니….
이런 본문을 읽을 때에는 그냥 읽고 지나가버립니다. 현실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무책임하게 내뱉는 넋두리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무게를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현인(賢人),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학식이 있는 사람, 경륜(經綸)이 높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중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답을 이 말씀 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주제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주제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주제입니다.
소극적인 주제는 “염려하지 마라”이고, 적극적인 주제는 “기도하라”입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염려’이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본문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기도와 연결되어있습니다.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염려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본문에서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염려의 대항마로 기도를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와 ‘다만 모든 일에’ 이 두 가지 표현을 대칭적으로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기도, ‘아무 것도’와 ‘다만 모든 일에’를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기도는 서로 반대편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를 붙들면, 다른 하나를 놓을 수 있습니다. 둘 다 붙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느 쪽을 붙들 것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염려와 기도,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염려와 기도는 마치 물과 기름 같습니다.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습니다. 따로 분리됩니다. 염려와 기도는 물과 기름 같습니다.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설교가 찰스 스윈돌(Charles Rozell Swindoll) 목사는 “염려의 리스트(list)를 기도의 리스트로 바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염려 내용을 기도문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꾼다는 것은 우리가 들고 있는, 무거운 염려거리를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섬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단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매우 디테일(detail)합니다. 굉장히 정교하게 조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어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알맹이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든 일에 기도와’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을 먼저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나오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일어나면,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집안의 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 때에는 창문을 열어서 집안의 공기를 바꾸어주어야 합니다. 환기(換氣)시켜야 합니다.
환기시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냄새가 몸에 배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질식할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공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염려의 환경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환기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 자체가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염려에 싸여있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한숨을 쉽니다. 염려거리를 늘어놓습니다.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마치 밀폐된 공간에 좋지 않은 공기가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염려가 더 자랍니다. 염려가 무럭무럭 자랍니다.

우리는 빨리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염려의 자리에 앉아있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의 자리에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재간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계속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염려는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계속 돈만 생각하거나 자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염려하는 형태의 우상입니다. 자신의 건강문제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자신의 몸이 우상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염려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염려는 주님의 손으로 옮겨집니다.

둘째, 간구입니다.
간구(懇求)는 기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입니다.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기도라기보다는 집중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로 방향을 튼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집중(concentrate)해야 합니다. 주님께 마음을 쏟아내어야 합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생각이 분산(分散)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진(double-minded)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산란(散亂)합니다. 삶이 굉장히 힘듭니다.
염려가 많은 사람을 보면,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고를 자주 일으킵니다. 실수를 자주 합니다. 정신없이 행동합니다. 마음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기도의 적극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가볍게 기도하고 끝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이 기도하지 못하고, 얄팍하게 기도하는 데 머뭅니다. 기도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염려를 기도로 막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염려 반, 기도 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도하기 위해 앉아있지만, 염려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것은 간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 반, 염려 반인 경우는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간구는 기도의 세계에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에 깊이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다른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감(交感)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이에 염려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하고, 가볍게 다루기 때문에, 염려가 몰려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염려를 차단하려면, 기도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하지만, 기도하는 데 있어서 약합니다.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도의 깊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몰입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염려가 한 방에 날아가 버립니다. 염려할 일이 생겨도, 기도가 깊어지면 끄떡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산이 아닙니다.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찬송가 288장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훈련 중 하나는 간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사 속에서 깊은 기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기록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의 개념을 넘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에 취하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과 나 둘만 있는 듯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염려가 점점 작아져서 나중에는 없어져버립니다.

셋째, 구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에 찾아오는 염려에 직면하지 않고, 염려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염려에 대한 그릇된 태도입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면, 이럴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염려를 밀어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사태(事態)는 심각한데, 친구와 놀러 다니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염려가 밀려옵니다.

염려는 거부하거나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무시하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염려할 만한 사실을 부정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염려를 부정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셨습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염려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한 사람은 정확하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호하게 기도합니다. 왜 기도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편해 하실까봐 기도하지 않습니다.
매우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찮게 여겨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아무 것도’와 ‘모든 일에’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삶의 문제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삶의 모든 영역을 직시해야 상세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틈새로 염려가 밀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 오는 날, 한 자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다 젖어버렸습니다. 자매는 “하나님, 버스가 오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왔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기다리던 버스가 아니었습니다. 자매는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버스 보내달라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스 보내줬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는 “제가 타야 하는 버스는 501번인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501번 버스라고 말하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게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때에는 매우 상세하게 염려하는데, 기도할 때에는 매우 엉성하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상세하게 염려하는 것 이상으로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는 너무 커서 기도하지 않고, 어떤 문제는 너무 작아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데 있어서 구멍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일지를 쓰는 것이 아주 유용합니다.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 살펴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엉성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도 한두 종류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상처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두운 감정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피곤함, 살아가면서 갖는 욕망, 살면서 느끼는 필요 또한 엄청납니다.
우리가 왜 염려하며 사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의 기도는 매우 엉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즉 감사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상세하게 말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뿌리에는 감사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바탕에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기도에 대해 아주 많이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주신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신 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깊어질 때, 염려는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염려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석가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박사는 “감사가 없는 기도는 날개가 없는 새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놓치는 이유는 현재의 어려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풀어주신 것을 매우 쉽게 잊어버립니다.

시편 103편 2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망각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망각하는 것은 염려를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은혜를 반복해서 회생(回生)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힘든 일도 겪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감사기도를 할 때, 대충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상세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을 매우 가볍게 다룹니다.
감사기도를 할 때, 자신만을 보며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을 생각해도 감사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족들로 인해 감사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함께 믿음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보세요. 그들로 인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나라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을 보면, 나라는 존재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감사가 파도처럼 밀려오면, 염려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소극적으로 감사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핵심적인 것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의 종류, 기도의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기도를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만 가져도, 대부분의 염려는 사라져버립니다.

기도는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 바깥에서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삶의 무게,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 우리가 경험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주님께서 매우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신다면, 주님께서는 ‘염려’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때, 염려가 찾아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가장 염려스러운 삶은 아버지가 없는 삶입니다. 염려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삶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기도, 간구, 감사의 초점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더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필요로부터 시작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의 출발은 나의 필요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가장 필요한 분이시요, 하나님께서 내 삶의 전부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면, 우리의 필요들은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채워지면, 그 외의 것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배고파서 울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우유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엄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인해 충분함을 경험하면, 우리의 삶에서 초조함은 사라집니다.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자유함이 생깁니다.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것이 채워졌습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하고, 주시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필요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기도 훈련은 전심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차이는 집중력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염려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집중력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거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완벽하게 덮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의 강은 거대하게 흐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염려는 지류(支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염려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기도 응답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응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본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시작하여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으로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염려는 세속 세계에서 몰고 들어오는 폐수(廢水)와 같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청정(淸淨) 공기를 우리의 영혼에 밀어 넣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무엇으로 가득 채우시겠습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와 염려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하며 사시겠습니까? 평강 가운데 사시겠습니까?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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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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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시작하신 분이 끝도 책임지신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시작하신 분이 끝도 책임지신다
본문 / 빌립보서 1:3~6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오늘날 우리는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자아는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추깁니다.
자아의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연말이 되면, 마음이 괴로운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 마음이 괴롭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에서부터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아는 현대인들에게 우상입니다. 자아는 끝없이 요구합니다. 그래서 늘 목마릅니다.

자아의 욕구가 많은 인생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끝없이 전쟁을 치릅니다. 그 삶은 불안정합니다. 자아의 욕구가 우리의 삶을 어디로 이끌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원하지만, 내일은 또 무엇을 원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큼을 원하지만, 내일은 얼마나 많은 것을 원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소리에 귀기울여보면, 모두 자아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을 빌립보서 앞 부분에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처음과 끝을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그들이 복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변함없이 그 길을 달려가게 만든 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출발점, 그들의 행위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열심을 내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열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열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를 동원해도, 그것은 언젠가 동납니다.

중요한 것은 출발점입니다. 내가 시작했는가, 주님께서 시작하게 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출발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 6절은 시작점을 말합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신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은 다릅니다. 자아로부터 시작한 인생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욕망대로, 충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착한 일을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보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인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은 우리 안에 좋은 생각과 착한 생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욕구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내셔야 합니다. 진짜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할 때에는 언제나 중언부언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우리를 기도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의 귀를 열어주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도할 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거룩한 생각, 착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의 욕구는 줄어들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갈망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바람이 우리 자신에게 기울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기도를 하고,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삶을 살면, 기쁨이 점점 줄어듭니다.
마음이 휑하고, 마음이 어둡습니까? 내 속에 어떤 갈망으로 채워져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1). 이것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변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의 서신’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바울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였습니다. 그는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뻐했습니다. 왜 기뻐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보며 언짢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빌 1: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에 참여하기를 열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유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마세요.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울고 웃는 삶을 살지 마세요.
우리는 사람들과 비교하고,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에 우리의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에 목을 매는 체면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시작된 착한 마음에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그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욕구를 억제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하는 생각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소원과 생각에 반응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자아의 욕구, 신변 등에 목을 매면, 우리의 삶이 굉장히 피곤해집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생각, 거룩한 생각, 거룩한 기대감,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십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내 안에 좋은 생각이 들어오면, 그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착한 동기를 일으키십니다. 무엇을 하는 데 있어서 동기(motivation)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우리는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을 준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않았을 때에는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입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오래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왜 공부해야 하는가를 깨달으면, 스스로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학교에 가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제대로 공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복(說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감동, 감화시키셔서 하나님을 위해 기쁨으로 복음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교회에서 억지로 일한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봉사하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을 망칩니다.
그러나 복음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서 동기가 부여되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좋아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점입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설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득에 의해 동기가 분명하게 부여되면, 그 다음에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한 동기를 일으키시고, 악한 동기는 막아주십니다. 불순한 동기, 옛 자아에서 나타나는 잘못된 동기를 물리치게 하십니다. 쓸데없는 욕구가 일어나지 않게 하십니다.
왜 인생이 낭비됩니까? 쓸데없는 일에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동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어두운 마음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자발성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은 생명을 바칠 만한 동기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복음으로 동기가 부여되어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우리를 끝까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 삶에 동기가 부여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 계속 동기를 부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기꺼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복음을 경험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고, 아무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욕한다 해도, 멈출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입니다.
복음에 의해 설득당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이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복음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복음이 나를 이끌어갑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그 일을 언제 그만둘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동기가 복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것이 일시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겠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박수쳐주고, 선물을 주며 격려하지만, 그것으로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에 차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만, 복음은 기꺼이 움직이게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사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습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늘 똑같은 마음, 똑같은 얼굴로 섬길 수 있는 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는 순간, 미칠 듯이 기쁩니다.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복음이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할 때, 우리는 지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힘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위력적입니다. 식을 줄 모르는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빌립보교회가 그런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 자신도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열정으로 끝없이 달려가게 만드는 에너지는 복음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행 20: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함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게 하실 때, 거룩한 상상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일으키심으로 착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믿음의 삶에는 상상력이 동원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일으키십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좇던 사람이 영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려면, 상상력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다 보면, 우리 안에 주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 중 하나가 상상력입니다. 믿음의 삶은 상상력을 자라게 합니다.
믿음으로 상상력이 자랄 때, 그것이 비전(vision)이 됩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 상상력이 계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상상의 세계 속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믿음의 세계는 신비롭습니다. 신비로움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곳,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생깁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상상하며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들은 상징적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상징적인 언어 속에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징적인 언어를 읽으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상상하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상상력을 펼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보지 않아도 천국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천국을 상상해보세요.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상상력이 죽어버립니다.
천국은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세계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곳입니다.

시는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시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됩니다. 요즘은 비주얼(visual) 시대라서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습니다. 연속극을 눈을 감고 귀로 들으며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주시고, 눈을 열어주셔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상상하면서 믿음의 세계가 자랍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은 상상력이 뛰어났습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상상력을 키웠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이를 통해 영적 세계가 더욱 실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 보이는 골리앗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상상력이 커졌습니다. 신비의 세계가 그에게는 현실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시인(詩人)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를 크게 느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상상한 세계가 현실보다 더욱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삶에서 파워(power)가 되었습니다.

상상력이 자랄 때, 믿음이 자랍니다. 상상력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상상력이 커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이루실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꿈이 되고, 비전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혀 시련과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거룩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생겼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상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시를 읽지 않습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시를 읽어야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열고, 시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여십니다.
시편을 읽을 때,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시편을 읽으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생각의 나래를 펼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작동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비전이 됩니다. 그리고 비전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것이 상상력입니다.
가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커져야 합니다. 그때, 현실은 힘들고 어려워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그는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감옥 안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그가 복음을 위해 달려갈 수 있었던 힘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수록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강력해지고 커져가고 실제화 됩니다. 마치 실제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세계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십니다. 상상의 세계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상상력을 기르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시편 62편 5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앞으로 이루실 것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어도, 먹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줄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상력을 가진 예언자였습니다.
현실은 암울했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이 보았던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어두웠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현실을 보면,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어두움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넘어 군대가 일어나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 상상력은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신 비전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매를 맞고 있으면서도 찬송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찬송할 수 있게 만든 힘이 무엇일까요? 캄캄하고 폐쇄된 감옥에 있었지만, 그들은 하늘로부터 임한 빛줄기를 보았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룩한 소원, 착한 생각, 거룩한 동기, 거룩한 상상력을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이루어가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 안에 일어나는 소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동기가 일어나면, 그것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비전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작하신 분이 끝내십니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일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동기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로 선한 상상력을 갖게 하셔서 시작하게 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끝내실 것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담력을 갖게 됩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작과 끝 사이에 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러나 시작하신 분과 끝맺는 분이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출발은 하나님이십니다. 끝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시작과 마침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끝내십니다. 우리 마음대로 결론나지 않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구성이 뻔하면, 독자(讀者)들이 흥미를 잃고,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독자가 예상하는 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긴장감이 없습니다. 재미없는 소설입니다. 이야기의 구성이 싱겁습니다.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때, 독자들은 긴장하고 읽습니다. 작가의 손에 의해 이야기가 결론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낍니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때, 그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흉기를 들고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죽이려고 달려오지만, 독자들은 아주 재미있어 합니다. 나쁜 사람이 무리를 지어 주인공을 공격한다 해도, 주인공은 중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악인에 의해 결론나지 않습니다. 지금 일어난 불행한 사건은 우리의 인생의 운명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우리는 시작점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슬아슬할 때가 많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범람하는 가운데 계곡을 건널 때, 아이가 아빠의 손을 잡으려고 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빠의 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아이를 잡으면 안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강력한 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차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손을 꺾을 자가 없습니다.

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른 것은 잊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객사(客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23편 4~6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원수의 목전에 놓인다 해도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다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나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의 추격자가 되셔서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 일어난 일들과 상황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기대하고 예상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속상해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진행형입니다.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시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일이 꼬였다면, 반전(反轉)을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편에서 보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어가십니다.
욥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반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놀랍게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전화위복(轉禍爲福)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어려울수록 끝이 더 기대됩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시작하게 하신 분의 손에 우리의 끝도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뿐,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기도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역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열심히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발 물러나야 합니다. 바쁘게 움직인 손을 잠시 모아야 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먹 쥔 손을 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으세요. 숨을 길게 내쉬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세요.
이제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려놓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편에서보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실 일이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기도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바쁘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친밀함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초조해하거나 조바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단순히 체념하고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한 결말을 쥐고 계시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것은 막연히 상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설정해놓은 높은 꿈을 이루어달라고 하나님을 닦달하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시편 130편 5~6절에 보면,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란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세요. ‘하나님께서 꼭 주셔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세요. 하나님만 신뢰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결정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삶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 접으세요. 자아의 욕구에서부터 출발된 것, 자아중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에서 출발한 것이 있다면,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시작점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한 마음, 주님께서 주신 선한 갈망, 거룩한 소원을 붙잡고 달려왔다면,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아가면, 우리의 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원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갈망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것을 위해 달려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복음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했던 빌립보교회를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힘든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안에 복음을 주신 하나님,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복음이 진보될 것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흔들림 없이 살았습니다.

시작되시는 하나님, 끝을 책임져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거룩한 소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서 거룩한 상상력이 날마다 자라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끝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하세요. 하나님을 높여드리세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끝을 멋지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전능자의 손에 의해 우리의 삶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삶을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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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고통의 터널 끝에서 마주친 하나님
본문 /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욥기 1장 9절에 보면,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잘해주시니까, 욥이 축복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만일 축복을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떠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욥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욥 1:12).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의 신앙의 진위(眞僞)를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탄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 고발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위를 늘 공격합니다. 저 사람이 왜 예수님을 믿는가.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왜 믿음생활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셔서입니까? 건강의 복을 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가정에 행복을 주셔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과 은혜 등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만일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다 빼앗으셔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욥에게 무차별적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재산이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자녀들까지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내까지 그에게 저주하고 떠나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은 혼자 남았습니다. 생명만 겨우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욥은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와서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은 처음에는 고난에 대해 잘 대처했습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인내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주 험악해졌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께 까다로운 질문을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욥이 혼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욥기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장면입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께서 반응하시지 않으실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에도 욥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쏟아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쁜 기도는 없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버릇없이 행동해도 집 안에서 결판내려고 하는 것이 가출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싸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두 사람이 둘 사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따로따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할 것은 다 합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하고,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내어놓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적 행동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자신이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고, 의미 없는 되뇜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지만, 뭔가 허전합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밥도 차려줍니다. 집 청소도 합니다. 아이들도 돌보지만, 마음은 가정에서 떠난 여인과 같습니다.
대화하지만, 대화 속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집에서 함께 살 뿐입니다. 정신적 이혼 상태와 같습니다.

욥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하는, 점잖은 인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욥이 친구들의 변론에 대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집요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회개하라고 했지만,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을 속이지 않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정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립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지 않고, 근사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모양을 내고, 규격화된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형식을 갖추고, 예의를 갖추고, 미사여구로 꾸미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통정(通情)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의문화가 있습니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모습으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욥은 처음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2:10).

그러나 욥은 무조건 참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독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힘겹게 사투(死鬪)를 벌이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났으면 좋겠는데, 그는 화가 난 상태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피를 토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다른 곳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욥은 고난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가볍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해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성급하게 결론내리고, 자신의 문제를 무마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이미 답을 얻은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 매우 힘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너무 많아 그냥 문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고, 답이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창자가 뒤틀릴 만큼 기도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외로워집니다. 나의 고통 안으로 들어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삶의 해답은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그래서 삶이 헷갈립니다.
고통에 대한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답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얄밉습니다.

고통의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게 답을 얻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난다고 해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따지더라도 하나님께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넓은 분이십니다. 맹숭맹숭하게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창자가 끊어질 듯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 속에서 그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 전투적 의지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점잖고 형식적인 기도를 되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맹숭맹숭하게 영양가 없는 미사여구로 기도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십자가와 마주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난해(難解)한 사건입니다. 욥의 고난이 난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내칩니다.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고통은 독특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독특한 고통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께서는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시며 아버지께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한 레슨(lesson)은 정직함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자신의 감정을 매우 정직하게 여과 없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터져 나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욥의 인내도 중요하지만, 욥의 진실함을 배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고통을 위장(僞裝)하거나 신앙이 좋은 체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고통과 환경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면, 이곳은 눈물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위장하려 합니다. 고통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고통을 멋지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직함,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지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영혼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사여구로 꾸며 자신을 감추어버린 기도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치며 펑펑 우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혼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러 교회에 왔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이 없는 기도, 토해내지 않는 기도, 감정을 숨긴 기도를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셔가며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이 기도하는 것에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치열함이 묻어있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시련과 고통과 환난과 어려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몸부림치며 끊임없이 다가가지 않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고통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가벼움입니다. 신앙의 형식만 남아있고, 내용은 얄팍해져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매우 가볍게 다가갔습니다. 남은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친구들은 그럴듯한 교리로 무장한 교과서적인 답만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늘 그것을 고민합니다. 제 나이에 삶 속에서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인간의 고난의 깊이를 몸에 어느 정도 습득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직면한 고통에 대해 말씀을 통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다가가 답을 주려고 하는 얄팍한 설교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데, 얄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맞는 말을 하는데,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의 바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고통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흉터를 놀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작아 보이는 상처라도 그는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십니까? 삶이 무너질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착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결론만 붙들고 애쓰지만, 속으로는 심히 불편하고, 하나님께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은 없습니까.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집요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고분고분한 신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신앙과 삶의 문제로 인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 씨름한 흔적 없이 믿음을 쉽게 가진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인생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안에서는 요동치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지성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 하나님께 떼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결해달라고 떼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냉랭합니다. 하나님과 주고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덤덤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힘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저 그렇고, 평안한 때에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없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육적(肉的)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치졸했습니다. 간사했습니다. 인간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지독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하실까요.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인생에 문제가 있으면, 성경을 들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답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욥은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치고, 그 기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욥은 매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고,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니 욥은 흔들렸습니다.
친구들은 기막힌 답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지만, 욥은 그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승부를 걸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만만한 것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싸움입니다. 무엇과 싸우시겠습니까. 욥은 마귀, 친구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모든 결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본문 욥기 42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욥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마침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쉽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길고 길었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냉랭한 교리적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책으로 공부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질문한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긴 고통 속에서 뒹굴고 소리치며 하나님께 원망하며 대들다가 마침내 그는 하나님과 마주쳤습니다.

욥기 42장 5절에 보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동안 듣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듣기만 하던 사람이 자신이 들은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모든 전쟁이 끝납니다. 모든 시비가 그칩니다. 왜 말이 많습니까? 왜 애매모호합니까?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헷갈렸는데, 이제 보았습니다. 더 이상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이제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이 풀렸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해되지 않고, 고통이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으면 됩니다.
나의 고통이 해석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고통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의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고통마저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전혀 끼어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욥의 인내보다 탁월하십니다.

욥은 앙탈을 부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쏟아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듣고 계셨습니다. 욥이 언제 하나님께 다가오는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욥에게 맡기셨습니다.

욥이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답을 빨리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대가(代價)를 통해 고통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욥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 대해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하나님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뻔한 방식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을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답을 미리 노출하시지 않으십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을 미리 보고 나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올바로 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물론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망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부림치며 익힌 만큼,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리더가 설명해주는 하나님은 머리에만 남을 뿐입니다.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면, 머리에 남아있는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으로 남아있는 하나님은 삶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 싸우며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가야 합니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을 마치 아는 것처럼 떠들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욥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시다니,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욥은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욥은 탁월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은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욥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따졌습니다. 욥은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욥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과 크게 다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입술을 통해 욥의 정직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이 고백이 나오는 순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시비를 잠재워버리시고, 욥이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사탄 앞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인내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하시고, 욥이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통해 이전보다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을 통과한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더욱 깊이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가(眞價)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두십니다.

도자기를 몇 도에 굽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강도(强度)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구우면, 쉽게 깨어지는 그릇이 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힘든 일만 없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인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한 단계에 머물러있으면, 하나님께 부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무당을 찾아가 액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가 맺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둘도 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롬 8:35,37~39).
하나님과 바울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도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마저도 하나님과 바울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가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유가 넘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을 제거해버리면, 욥이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모든 시험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욥은 자신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 믿음의 이유이십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십니다.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 흔들릴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테스트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끼어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면,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혼자 고난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십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마침내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의 모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발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과 배신과 고독과 오해의 긴 터널을 통과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한가운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은 계속됩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더 깊고 높고 풍성한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모르는 척하시는, 비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손들게 됩니다. 그 후에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더없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나는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욥은 이전보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겨낸 우리를 칭찬하시고, 더 풍성한 은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정직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맴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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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저녁예배설교]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본문 / 히브리서 10:36~11:1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자꾸 뒤로 물러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까.

본문 히브리서 10장 끝 부분에 보면, 뒤로 물러나는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본문 히브리서 10장 38~39절에 보면,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은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적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뒤로 물러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픈 상처들, 아픈 경험들이 우리에게 족쇄가 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생각보다 아프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간 듯한데, 뒤로 돌아왔습니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앞으로 치고 나아가야 하는데, 과거에 노예생활을 했던 경험이 믿음의 삶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듯하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했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들은 광야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과거에 실수한 것을 가지고 자책(自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못난이야. 나는 실패자야.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스스로 자신의 점수를 매깁니다.
과거의 실수로 인해 스스로에게 딱지를 붙입니다. 과거의 경험, 과거의 이력(履歷) 속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과거를 돌아보면,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실패가 더 많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것, 죄를 지은 것 등 숨기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이 자신을 위축시킵니다.
과거의 경험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외상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강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고, 오늘 나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큰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 오는 날에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비가 오면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가 오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끔찍했던 사고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한 사람은 생각이 부정적이고 어둡습니다.
어두운 생각의 습관이 자신을 꽁꽁 묶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듯하다가 뒤로 물러나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사실은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이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태도의 영향을 받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미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게 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는 상관없습니다. 믿음은 미래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과 상담해보면, 과거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느낍니다. 과거의 힘은 아주 강합니다. 과거는 어느 시점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실수와 실패, 아픈 경험들을 묵상하고 곱씹게 합니다. 과거의 환영(幻影)에 시달리게 합니다. 과거의 경험, 사건, 좋지 않은 기억들이 완전히 지워지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과거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에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가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했던 어둡고 끔찍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게 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갇혀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뒤로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로부터 나오게 하셨는데,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믿음의 삶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후진(後進)하지 않습니다. 비행기에는 후진 기능이 없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도 자체적으로 후진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삶이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입니다. 믿음의 날개를 단 사람은 뒤로 날아가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자동차에는 백미러(back mirror)가 없습니다. 그 기능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만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사는 맹수(猛獸)들을 보면, 눈이 앞에 있습니다. 옆을 보지 않습니다. 옆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목표물이 보이면 전진합니다.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사슴을 비롯한 연약한 동물들은 눈이 옆에 있습니다. 누가 공격하지는 않는지 살피며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믿음은 전진형(前進形)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앞을 바라봅니다. 믿음은 실상(實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실상을 손에 잡은 것처럼 바라보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미술전시회에 갔을 때,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림을 보면서 할 말이 없습니다. 특히 추상화의 경우에는 뭐가 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사상과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그냥 그린 것이 아닙니다.

눈이 있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볼 줄 알아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볼 줄 아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면, 미래가 보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과거가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려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과거가 지워져버립니다. 미래가 더 강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과거에 실수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미래가 선명하게 보일수록 담대해집니다. 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과거보다 미래가 더 선명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기억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믿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억하라는 것은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사건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역사(役事)에 대한 기대감이 생깁니다.
홍해 사건을 깊이 묵상하면, 홍해가 갈라진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거룩한 상상력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성경에서 일어난 역사가 내 삶에도 일어날 것 같습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린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가슴이 뜁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신화(神話)나 동화가 아니고, 실제 사건입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이런 이야기를 계속 읽고 묵상하다 보면, 그 이야기가 액자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재현(再現)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을 왜 기록해놓으셨습니까? 단지 재미있게 읽으라고 기록해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시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일으키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진리의 책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의 생생한 언어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歷史)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계속됩니다. 성경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추억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미래를 향해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책입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미래가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定常)입니다.
다윗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는데, 왜 미래가 보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겠구나.’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답답한 상황 속에 있지만, 홍해를 여신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홍해는 오늘도 열립니다. 홍해는 오늘도 갈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흥분하게 됩니다. 꿈이 생깁니다. 가슴이 뜁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믿음은 시간이 지나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서 직접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미리 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에 될 일이 미리 보이고, 그것이 믿어지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 다른 사람보다 몇 단계 앞선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단계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점프합니다. 도약이 일어납니다. 출발 지점부터 다릅니다. 믿음은 점프하게 하고, 상상을 넘어섭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논리적으로 도약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성이나 현실적으로 계산 가능한 세상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크게 점프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산술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의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씨앗만 보면 초라합니다. 별 것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씨앗 하나를 보면서 그것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펼쳐질 농장을 기대합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손에 잡힌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마치 실물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환상이 아니라, 실상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삶이 깊어지면, 멀리 있는 것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느낍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합니까? 까마득하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면, 내 앞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망합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마치 그것이 내 앞에 펼쳐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데, 왜 뒤로 물러납니까?
믿음은 미래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본 사람은 미래에 일어난 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과거형보다는 미래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반석’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 게바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반석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굉장히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불안정한(unstable)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습니까? 현재의 모습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모습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촐랑거리는 베드로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으로 뛸, 견고한 베드로의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고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미리 보시고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현재를 말하지 않고, 미래를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과거를 말합니다. “너는 이전에 실패했잖아. 그래서 너는 안 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폐쇄적이고 부정적이고 비관적(cynical)인 용어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릅니다. 항상 미래적입니다.

우리에게서 믿음의 언어가 흘러나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믿음의 언어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미래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결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결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묵상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엽기적인 소설을 계속 읽으면, 생각도 오염되고, 말도 엽기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머리에 들어있는 것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묵상한 말씀이 우리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의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행 3:6).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계속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40세 정도 되었습니다.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입니다. 미래적인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 역시 얼마 전까지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는 디베랴 바닷가로 도망갔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닷가로 간 것은 과거로의 회귀(回歸)를 의미합니다. 물고기 잡던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실패자요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는 낙오자의 모습으로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과거로 숨었습니다.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난 후 과거에 사로잡혀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을 믿음의 선포를 통해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미래를 향해 믿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만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머물러있고, 과거로 도피했던 삶에서 미래를 보고, 다른 사람까지 미래로 이끌어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뜨셔서 과거의 것을 모두 떠나보내고, 앞에 선명하게 보이고, 눈이 열려서 다른 사람까지도 미래로 이끌어주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믿음의 눈으로 보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래형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의 형태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현재 운명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일어나 춤출 것을 미리 보며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게 되고,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권면할 때,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말씀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교역자가 성도의 집에 심방을 가면, 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성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심방을 가면서 말씀을 준비해가지만, 성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정에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 말씀은 그 성도의 가정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 말씀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 말씀이 성도의 가정을 살립니다.

그런데 말씀이 생각나려면, 먼저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암송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 말씀이 차 있으면, 말씀이 내 삶을 바꿉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읽다 보면, 말씀에 내 속에 충만히 거하게 되고,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내 삶을 바꿉니다. 그리고 그것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말씀 속에 삽니다. 이것이 제게 축복입니다. 독수리같이 날아오르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을 때,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이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고 고민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에서 짜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말씀이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말씀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주야(晝夜)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씀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밥 한 끼를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1주일 동안 말씀을 읽지 않아도 영이 생생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먹으면, 힘든 상황이 다가와도 말씀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냅니다. 힘든 상황에 적합한 말씀이 떠오르면, 힘이 납니다. 진리의 힘이 바로 그렇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엄청납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씀이 떠오르면, 그 말씀이 힘이 됩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말씀이 나에게 임하면, 그 말씀으로 인해 고난을 넉넉히 이깁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말씀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현재는 암울하고 힘들어서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말씀은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납니다. 말씀을 통해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말씀이 흘러나오면, 그 말씀은 이미 여러분 안에서 능력이 되어있습니다.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생기면, 미래는 이미 열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세요.

성경에 보면, 역사서도 있고, 예언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서 우리에게 익숙한 명구(名句)는 계속해서 읽어야 합니다. 암송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수시로 입으로 되뇌세요.
기도할 때에도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보세요. 자신의 말로 주절주절 기도하지 말고, 말씀을 떠올리며 기도하세요.

조지 뮬러(George Müller)의 기도 방식이 이러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기도하기 전에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확신이 생기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5만 번 기도응답 받은 조지 뮬러의 기도의 파워는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파워가 있습니다. 기도할수록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그 확신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기도가 강력해집니다.

감사와 불평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결을 맞출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불평 불만합니까? 하나님과 결이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결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에 따라 그림이 달라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기대할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현실만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결이 맞춰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날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곧 능력이 되고, 현실이 되고, 미래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익어가고 흘러넘쳐서 우리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화 됩니다. 미래를 향해 우리의 삶이 열립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본 사람들이 순종합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 미래를 향해 갑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본향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게 하고, 미래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합니다. 아무나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마리아의 믿음이 돋보였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요 2:5).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순종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순종의 단계에서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알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4).
예수님의 싸늘한 반응에 마리아는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상황이 묘해지기도 합니다. 마리아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마리아는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믿음을 강화하여 하인들에게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이미 보았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것을 미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감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감(六感), 여섯 번째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예감했습니다.
믿음은 기대감을 갖게 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본 사람들은 행동하는 데 민첩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익히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당장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믿음으로 사는 법을 익히면, 그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믿음과 반대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믿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생각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면, 빌립은 믿음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라고 말씀하셨을 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4: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믿음을 사용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려고 접근하는 사람과 흩어져서 각자 알아서 해결하게 하려는 사람은 태도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세히 보면, 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자이십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 해보자”하는 긍정적인 태도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반대부터 합니다.

야구를 보면, 타율(打率)이 높은 선수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방망이를 많이 휘두릅니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횟수가 많아야 공을 맞출 확률이 높아집니다.
아무리 잘 치는 선수라도 지나치게 신중하면 공은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삼진아웃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확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놓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가 다릅니다. 관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꾸준히 살면, 확실히 다른 인생이 펼쳐집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는 길이 다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고 열려있습니다. 무엇이든 해보려고 합니다. 실패하더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워도 도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출발하기 쉽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시작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고민하는 시간이 매우 깁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랫동안 갈등하고 고민하고 주저하고 멈칫거리며 세월을 보냅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썼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한 번 살아보고 죽어야지,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쉽게 시작합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특별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무엇인가 시작하는 데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실패할지 모르지만, 쉽게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찔한 일인데, 믿음의 사람은 시도해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쉽게 시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작할 때에 고민을 지워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했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굉장히 소심했습니다. 그런데 제 삶에서 중요한 고비에는 미친 결정을 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가, 어떻게 그 일을 시작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 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순발력이 있습니다. 다윗은 대단한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40일 동안 대치(對峙)하고 있었습니다. 40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블레셋 군대를 고함치고 있고, 이스라엘 군대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먼저 행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가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순발력을 가지고 사고를 저지른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들고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을 고르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주워들고 갔습니다. 다윗은 이미 이긴 자의 모습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도 순발력이 있었습니다. 밤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베드로가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마 14:2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대단한 순발력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탁월한 순발력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주님께서 “오라”라고 말씀하시니 베드로는 바로 배에서 내려서 물 위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풍랑의 높이와 길이를 재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순발력으로 인해 베드로는 쓰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행동파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을 받고 난 후, 그는 온전하게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앞으로 내딛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탁월한 순발력을 통해 드러납니다.
순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으로 되어질 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보이는 사람은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미래에 되어질 일을 보았습니다. 멀리서 본 사람입니다.
현실에서는 약속을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해놓으신 것이 매우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 있고, 어떠한 핍박이 있다 해도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들의 앞에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칠 만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은 뒤로 물러나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앞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들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붙들리지 마세요.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실패한 것을 붙잡고 평가하는 것에 연연해하지 마세요.
과거에 실패한 것은 과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담대히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새 일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물쭈물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현실을 정면 공격하고, 정면으로 승부하세요.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말하세요. 미래를 선포하세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셔서 말씀이 흘러나가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현실이 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미래가 선명하게 보이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읽을 때, 말씀이 오늘도 현실화되는 약속임을 믿으시고,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두려움 없이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을 때, 순종이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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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Friday Night Sermon

제목 /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
본문 / 출애굽기 3:1~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팔짱을 끼시고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는데, 하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부재(不在)’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무지(無知)와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도,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거리감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힘이 빠집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우리의 곁에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힘을 잃습니다. 주일도 잘 지키고, 교회의 활동에도 참여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깥 세계에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하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에 힘이 없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돕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거리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어려워지고, 우리의 삶은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삶의 매 순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때, 우리의 삶은 사건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 역사(役事)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순간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역사가 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야곱이 홀로 외로이 돌 베개를 베고 잘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 모든 것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하셨습니다. 모세가 나일 강에 띄워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왕실에서 자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지나다녔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은 뭔가 다릅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직감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떨기나무가 불에 계속 타는데, 불이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불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불이 타고 있는 상징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뚜렷하게 경험했습니다.
저 멀리 계신다고 생각했고, 자신과 상관없을 것 같던 하나님께서 모세의 생애 가운데 아주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모세는 불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아주 뜨겁게 느꼈습니다.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 불을 구경하는 것과 불에 대한 그림책을 읽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불은 이론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뜨겁고 강력합니다.
화재의 현장 근처에 가보면, 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모세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문자로 이해하는 하나님과 실제로 온몸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글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셨다는 것을 느끼면, 용광로 근처에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지 않으시는 불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강도의 열기와 함께 빛으로 오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감(直感)했습니다. 충격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찾아오실 때에는 용무(用務)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때는 매우 특별한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을 거십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모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실에 있을 때에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은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이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저항할 수 없고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모른 체 하거나 딴청을 피울 수도 없었습니다.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가던 길을 멈춰 섰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일을 경험하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매우 가까이 다가오시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귀중한 일이 있다 해도, 우리 가까이에 다가오신 하나님께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신 적 있습니까?
이런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시선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하십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지나다녔을 뿐입니다. 양을 치며 풀을 찾아 다녔을 뿐입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강한 흡입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가까이 다가오신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순간, 모세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한눈 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한눈팔지 않으십니다. 모세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이때는 무조건 멈춰서야 합니다.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다가오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멈춰 세우십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직장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사람도 꼼짝할 수 없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그 앞에서 꼼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길을 열심히 걸어갔던 사울을 멈춰 서게 하셨습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미션(mission)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는 순간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출 3: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4).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쓸 수 없는 표현입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도 아니고, 미래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현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십니다.
타고 만 잿더미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떨기나무가 불에 타면, 잿더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계속 불이 붙어있었습니다. 불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떨기나무가 잿더미가 되어버리면,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나무가 잿더미가 되어버리면, 과거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현재이시기 때문에, 불 가운데서 계속 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모세를 만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 모세 앞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나는 시간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현재입니다.

모세는 궁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8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과거의 시간입니다. 묻힌 시간입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입니다. 그 시간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실패와 방황으로 점철된 시간입니다.

우리가 방황하고 고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확실하게 쥘 수 있는 현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계속해서 과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리고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흘러가버린 시간은 후회로 남습니다. 미래는 아직 우리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일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내일은 낯섭니다. 그리고 내일은 언제나 불안정합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해서는 모두 염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4). 이것은 내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해서는 늘 염려스러워합니다. 그렇다고 내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현재의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시간도 눈 깜빡할 사이에 과거로 흘러가버립니다. 우리는 달력을 넘기느라 바쁩니다. 지금도 순간순간이 과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가 과거로 끝나버리지 않고, 현재가 현재가 되려면, 지금 이곳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모세는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양떼를 치며 호렙 산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고, 과거로 흘러가버릴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곧 과거가 되어버릴 한 시점에서 현재적인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그 순간의 시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는 시간이 됩니다.
특별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로 인한 충만함이 현재의 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올 때, 내 삶의 시간은 특별한 현재가 됩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내 삶을 바꾸어놓습니다. 과거의 40년, 80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질량이 폭발해버립니다. 마치 핵이 분열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시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118편 24절에 보면,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현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때, 이 시간은 흘러가버릴 과거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재와 만나서 시간의 질량이 폭발하면서 인생에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때, 내 삶은 단순히 과거가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현재적 사건이 됩니다. 그 시점부터 내 인생은 뒤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게 됩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생명이 밀고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은 거대한 사건입니다. 애굽의 바로를 꺾는 힘이 여기에서 나오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출애굽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폭풍 같은 힘이 나옵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으로 찾아오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 속에 찾아오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를 묶고 있던 아픔과 상처를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면, 이때부터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역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전혀 새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모세는 양떼를 몰고 다니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매우 평범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 속에 다가오시면, 그곳은 특별한 곳이 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직함을 가져야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신 그 순간은 특별한 현재가 됩니다. 그 순간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면, 우리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빠르게 움직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순간에 선택해야 합니다.

모세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전에는 양떼들을 거느리고 광야를 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가오신 순간, 평범했던 삶이 비범하게 바뀌었습니다. 이때 기회가 온 것입니다.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면 됩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을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 가라. 고통하고 신음하는 내 백성들에게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삶을 흔들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순간과 나의 선택이 만나면,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건이 터집니다. 모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세월을 청산하고, 구원사(救援史) 속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핵이 분열하여 폭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버립니다. 순간으로 끝나버립니다.
시간은 매정합니다.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지나가버린 시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버린 파도로는 서핑(surfing)을 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간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할 때,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응하지 못하면, 인생 전체가 안타까운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과거의 시간이 되어버립니다. 과거는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을 거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셨고, 모세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모세가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미 40년간 광야를 떠도는 목동의 생활에 익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반응하기를 주저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제 무엇인가 새롭게 시도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세요.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힘들지만 그런 대로 살 만합니다.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미래는 항상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그 순간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 속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모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히브리 민족들은 애굽의 압제 속에서 고통이 극에 달해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인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다가오십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42:5).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실제적으로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은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 경험하게 됩니다. 단순히 은혜 받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순절에 불과 바람 같은 경험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흔들어놓습니다. 모든 경험보다 뛰어난 경험입니다.
어떤 위기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새로운 경험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환난의 순간에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제에 사로잡혀서 시간을 보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보며 불평합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보려고 할 때에 보입니다. 사람이 앞에서 왔다 갔다 해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께서 가까이에 다가오셔서 말을 거시는데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충격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면 앞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시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위기가 다가왔을 때, 하나님이 다가오신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감각이 무디어지고, 생각이 좁아지고, 마음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사건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다가오신 것을 확실히 알려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모세는 가까이에서 보려고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모세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인생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에 중요한 것은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폭풍 속에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에 중요한 것은 폭풍이 아닙니다. 폭풍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헷갈리면 안 됩니다.

폭풍이 아무리 거세다 할지라도 폭풍에 정신이 팔려서 폭풍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인생에 폭풍과 같은 문제가 몰아닥친다 해도 하나님을 만나면, 폭풍은 잠잠해집니다.
하나님은 실재(實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폭풍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하나님은 현존(現存)하십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폭풍으로 인해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놓칠 때, 우리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임재는 더욱 빛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바깥에서 점잖게 무게 잡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의 한가운데서 함께 고통하고 계십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에 와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문제에 빠져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제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 가운데 찾아오시고, 고통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찾아오실 때, 더 이상 인생의 아픔으로 인해 시달리지 않습니다. 내 삶에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에 가까이 다가오셔야 일이 시작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스스로 하려고 했던 것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야 합니다. 그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에 불이 사라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은 파워(power)를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3장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힘도 다루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떨기나무가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이라는 엄청난 힘을 계속해서 다루고 계시니까 불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파워를 다스리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불은 계속 타고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불을 계속해서 붙이려면,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불을 태울 수 있는 원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도 불이 계속 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타고 있는 불과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충분하시고, 자원이 전혀 고갈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충분하고 흘러넘칩니다. 하나님은 에너지가 영원히 넘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불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불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능력을 주셔서 새 일을 행하시기 원하셨습니다.

불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사라지지 않으시는 하나님,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영원히 충분하신 하나님, 영원히 넘쳐흐르시는 하나님, 에너지가 충만하신 하나님, 스스로 능력을 통제하시고 조절하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에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아주 흔한 나무입니다. 사막에는 떨기나무만 자랍니다. 다른 나무는 사막에서 살 수 없습니다.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떨기나무는 잎도 나지 않습니다. 사막에서 물이 있는 낮은 지역에서만 자랍니다. 떨기나무는 사막에서 잎도 나지 않는 거친 나무, 그늘도 만들지 못하는 쓰임새 없는 나무입니다. 불에 타면, 재가 한 줌도 남지 않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볼 품 없는 존재입니다. 불이 붙으면, 한 줌의 재 밖에 되지 않을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존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소멸되지 않는 성령의 불이 우리에게 붙으면,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떨기나무와 같이 보잘것없는 인생이지만, 척박한 땅에 심겨 있다 할지라도 영원한 불이신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어떠한 경우에도 망하지 않고 살아날 것입니다.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는,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거대한 힘에 의해 이끌려갑니다.
그때는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광야에서 모세와 출애굽의 모세는 전혀 다른 인생입니다. 영원한 현재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날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것은 모세의 인생 가운데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인생에 가까이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난 순간, 그의 인생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과거와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새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오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면,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스펙과도 상관없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의 딱지가 붙은 사람입니다. 그는 양치기였습니다. 도피하는 삶을 살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가오시는 순간, 하나님의 현재와 만났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간이 우리의 삶에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한 적이 언제입니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나의 존재를 흔들어놓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막의 떨기나무를 이용하셔서 모세를 집중시키셨습니다. 아무리 둔하다 해도 알아차릴 수 있는 확실한 사인(sign)을 통하여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깨어있고 민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임합니다.
이런 일은 특이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곳에서 일어납니다.
사막은 모세가 늘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일상 가운데 늘 다니는 곳,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우리에게 익숙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언제 체험해보셨습니까. 길을 걷다가 하나님의 강한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강력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데,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셔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하다가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을 거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을 거십니다.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으십니다. 우리에게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하십니다.
이 사건 이후, 모세는 과거회귀형의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미래의 시간으로 갔습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상황은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후회로 점철됩니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을 뿐입니다.

40년 동안 모세의 인생은 광야에서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맸으니 얼마나 쪼그라들었겠습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만 반복되었습니다.
사라질 운명이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타지 않는 불 되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반전(反轉)을 일으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다가오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인생은 그냥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라지는 인생이 많습니다. 사라져서 한 줌의 재가 되고 맙니다. 시간은 과거로 흘러가버립니다. 초라하게 쪼그라듭니다.
사라지지 않고 불꽃 같이 일어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시간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가 겹쳐질 때, 우리의 삶은 기적이 되고, 인생의 특별한 스토리가 쓰여집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경이를 만나게 되고, 놀라운 기적과 특별한 사건들이 하나님의 스토리 안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문을 노크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와 마주 앉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시간은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40년 광야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버릴 수 있는, 80년의 세월이 한 줌의 재로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생에 위대한 반전을 일으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마주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는가에 대해 온전히 반응하고 순종하면, 색다른 인생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후회로 가득 찬 과거형의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십니다.
영원히 현재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후회로 점철된 인생이 아니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마주 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밋밋하지 않습니다. 강력합니다.
오순절에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셨던 성령의 충만함이 사도들의 삶을 바꾸어놓았던 것처럼, 역사를 새롭게 썼던 것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과거에 빠져서 과거에 묻혀 살아가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이끌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는 불이 됩니다.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가 우리 속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충만한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매우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파묻히거나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끊임없이 충분히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끊임없이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불은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시련과 환난도 이겨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심으로 사건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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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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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 행동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행동보다 기다림이 먼저다
본문 / 시편 62:1~12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급한 상황에 코앞에 닥치면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기다림은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실패, 파산일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을 망가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참을 수 없을 것처럼 압박감이 밀려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끝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조기(早期)에 무너져버립니다.

본문은 다윗이 인생의 역경 가운데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록한 시입니다. 사람들의 추측에 의하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피해 다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죽음의 위기를 느꼈던 때에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 가운데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죽음이 몰아닥쳐 왕권과는 멀어져가던 때와 왕이 되었음에도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쫓겨 다니던 이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혹독한 시기를 보내며 이 시를 기록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바란다는 말에는 기다린다(wait)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을 통해 단련되고, 기다림을 통해 증명됩니다. 믿음이 있다면 기다립니다. 기다림을 통해 믿음이 정금(正金) 같이 다듬어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통해 믿음을 입증합니다. 노아는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굉장한 시간 동안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7년을 기다렸습니다.
다윗도 왕이 되기까지 계속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지겹도록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이 언제 끝날 것인지를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기다림을 통해 훈련을 받습니다. 시련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에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어떤 상황 속에 있습니까? 본문 3절에 보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잠히 있는 것은 기다리는 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 입을 열면 안 됩니까? 입을 열면, 원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일제히 공격합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악인들은 다윗을 흔들려고 입을 엽니다. 독설(毒舌)을 퍼붓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가장 힘든 것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악담을 듣는 것입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헷갈립니다. 좋은 말인 것 같은데, 속을 파고듭니다.
욥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좋은 말을 해줬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쓴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에 귀 기울이면 정신없습니다. 내가 힘들 때에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가 오히려 더 힘들게 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자신이 기다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바보가 아님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려움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할 말이 많아집니다. 왜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말하면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큰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다리는 것을 쓸데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문제가 있을 때에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을 사람들은 무기력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자로 여깁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침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는 우리도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사람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떠들어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해도 침묵해야 합니다.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을 때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네가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다면, 무엇인가 해야 한다. 왜 기다리고 있냐, 뭐하는 거냐.”라고 다그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무기력하고 게을러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다윗은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을 의지할 필요도 없으니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입방아도 끝나는 날이 옵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넋을 놓고 막연히 있는 무기력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것에는 고도(高度)의 영적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집중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 속에서 이슈(issue)는 끝없이 일어납니다. 세상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가는 것이 매일매일 수없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전쟁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삶에 사고가 끝없이 터지고,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은혜 받았을 때에는 좋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아가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마치 그 문제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사건이 삶에서 중심부를 차지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영적 집중력을 테스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만 바라볼 수 있겠니? 나만 바라보고, 나만 기다릴 수 있겠니?”라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가 만난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고정할 수 있겠는지 하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신앙의 여정(旅程)에서 실패한 순간을 더듬어보세요.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것에 실패했을 때, 우리의 인생은 무너집니다.
문제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고정시켰던 시선을 문제 때문에 놓칠 때에 삶이 무너집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다리다가 문제가 인생 가운데 크게 찾아와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회오리바람이 부니까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면, 우리의 삶은 요동칩니다. 세상이 요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 고개를 돌리게 하는 유혹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방법을 찾습니다. 묘수(妙手)를 찾아다닙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외에 많은 길이 우리 앞에 펼쳐져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만을 바란다는 것은 다른 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에서 실패합니다. 중도(中途)에서 포기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다윗은 광야 속에서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기다리는 과정에서 힘든 것은 기다리고 있는데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기다리고 바라고 있는데, 상황은 더 악해집니다.
상황이 좋아지면 좋겠는데, 상황이 악해질 때, 불안함을 느낍니다. 그때 자신이 무엇인가 하려고 액션(action)을 취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죄악의 고비를 수없이 통과해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면서 막바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한 막바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시선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을 바랄 때, 승리하게 됩니다.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흩어집니다. 흩어지고 떠나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남은 자들과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비를 넘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시선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기다린 사람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기다린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린 자들을 결코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눈을 고정하고 기다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결코 거절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스토리(story)입니다. 다윗이 기름 부으심을 받고 왕이 되는 그 날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칠 만한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의 시선에서 하나님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끝이구나,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이제 벼랑 끝이구나, 이제 죽음이구나라고 생각될 만한 자신을 죽일 듯한 어마어마한 문제들이 그에게 닥칠 때,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때,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다림에 반응하실까? 자칫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향해 사람들은 욕할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기다렸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오히려 네 삶은 힘들어지지 않았느냐?”라고 공격하려고 합니다.

시편 69편 6절에 보면,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찾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에 기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적들이 둘러싸고 있을 때에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에게 신앙은 기다림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다림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활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활동적인 사람을 좋아합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인정 받습니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너의 실력을 입증해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약해지신 주님께 사탄은 “너의 실력을 보여 봐”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를 다그칩니다. 우리를 정신없이 몰아갑니다. 능력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문제를 만났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왜 기도만 하고 있냐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무엇인가 해보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라고 활동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귀가 아프도록 듣는 이야기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넣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엇인가 노력하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기도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충동질에 막 몰려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없이 무언가를 합니다. 마치 지금 하지 않으면 망할 것처럼, 마귀는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새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움직여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압니다. 액션을 취해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영적 센스(sense)입니다.
잠잠히 기다리라는 것은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자가 세상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을 구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학생이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만 잠잠히 바람이여, 내일 시험 문제의 답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진로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에는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미래를 주님께 맡깁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공부는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은 책에 있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은 교과서에 있지 않습니다.
공부는 잘했어도 인생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알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면, 답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풀 수 있는 문제보다 풀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많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추격했습니다. 답이 없었습니다. 왕을 죽일 수도 없습니다.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윗 스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반역하여 아버지의 권좌(權座)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문제입니다. 교실 안에서 출제되지 않는 유형의 문제가 세상 속에는 매우 많습니다.
다윗만 이런 문제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못한 난제(難題)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수시로 닥칩니다.

세상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 해보라고 합니다. 인간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우리의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시편 46편 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경험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레슨(lesson)입니다.
이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것만 배운다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 이전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를 기다리고, 그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인간의 노력과 재능으로 만든 세상이 대단해보입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나 빌 게이츠(Bill Gates)가 만들어놓은 것은 세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만 해도 설교를 준비할 때 원고를 종이에 손으로 썼습니다. 쓰다가 틀리면 찢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타자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컴퓨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태블릿PC를 보며 설교합니다.
과학 문명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시대가 올 것입니다. 음식을 주문하면, 사람이 철가방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철가방을 들고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편리함과 신속함과 생산성은 놀랍습니다. 앞으로 로봇 산업이 대단할 것 같습니다. 이미 굉장히 많이 진화되었습니다. 앞으로 지능이 있는 로봇이 인간이 하던 일을 다 빼앗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은 어마어마하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문명을 보세요. 인간이 열심을 다해 만들어놓은 것으로 인간이 만족해하고 행복해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망합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해서 인간은 오히려 절망에 빠집니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한계를 만납니다. 인간이 가진 문명끼리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집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얻은 것에 만족하는 순간, 곧 절망에 빠집니다.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직장에서 높은 성과를 내며 최선을 다했는데, 은퇴한 이후에는 ‘이 일을 위해 내 인생을 바쳤는가.’하는 실망과 좌절에 빠집니다. 허무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는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평가받은 사람들도 마지막에는 허무에 빠집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디에 있나, 내가 어디에서 왔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성과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토록 몸부림치며 업적을 쌓았는데,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그럴수록 인간의 능력과 활동이 더욱 강조됩니다. 조급해집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빠집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강조할수록 오히려 더 큰 미궁(迷宮)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 사람의 도움을 얻으려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액션과 자기 방법,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왜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보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했습니다. 상반(相反)된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의 편에서 보면, 지체(遲滯)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에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아무리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에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작품을 만드시는 시간입니다. 다윗을 다윗답게 빚어내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활동보다 하나님의 활동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가 신뢰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훨씬 더 크고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1년, 10년, 20년, 한평생 쏟아 부은 것보다 하나님의 1분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오류가 있습니다. 불완전합니다.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 역사하셔도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다리면서 초조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단순히 약속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의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뚝 세워주신 것입니다.

후손을 얻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족장으로 태어난 것이 중요합니다.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을 다윗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레슨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훈련된 사람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라이센스(licence)를 가졌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태도를 견지(堅持)해야 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먼저 액션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대하며 잠잠히 기다릴 줄 아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고백을 살펴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우리가 행동하기 이전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열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급하게 서두른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급하다 해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먼저 일을 시작하여 다 망쳐놓은 후에 하나님께 책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내 뜻대로 다 망가뜨려놓습니다.
기다리지 못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망쳐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잠잠히 기다려보셨습니까.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자녀에 대해, 주변의 환경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기다려보셨습니까.
우리는 기다리기 전에 답답한 현실 앞에 '문제를 확실히 고쳐놓고야 말겠어.'라고 생각하며 먼저 칼을 들어버립니다.

아이를 부모의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아이가 사춘기만 되어도 부모가 아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남편을 아내의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아내의 마음대로 남편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난 후에야 손을 듭니다.

다윗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다윗은 지독스럽게 기다린 사람입니다.
그는 어두운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황무지로, 굴로 계속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블레셋까지 도망가서 미친 체 하고 살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그를 반역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4).
120명의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들은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과 노력과 재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본문 1절에 보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120명의 사람들이 기다린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더 나은 상황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당하면, 그것이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은 환경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면, 늦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산 것은 허송세월한 것이고, 후회만 남습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면, 그곳에 인생의 해답이 다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의 고백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 5~7절에 보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있습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시기를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광야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입니다.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광야에서 반석과 힘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요동칩니다. 불완전합니다. 갈수록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항상 흔들립니다. 요동치지 않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 담을 치지만 무너져버립니다. 높은 울타리도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격자들이 침입해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답을 말해줍니다. 답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문제에 휩싸이지 마세요. 하나님께 사로잡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압도당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려고 하면, 오히려 더 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은 위기의 순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꼬이고 복잡할 때, 내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실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실적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쌓아도, 우리가 쌓는 것은 쌓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쌓으시는 것은 쌓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제력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인간의 재능과 실력은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뚜렷한 음성은 하나입니다. 하나님만 우리의 의지가 되시고, 우리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삶의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망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잘 만들어 가시려는데, 괜히 끼어들어 망가뜨리게 됩니다.

여러분의 노력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기다린다 해도, 기다리는 것은 마이너스(minus)가 아닙니다. 믿음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인생의 노정(路程)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리는, 세상의 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지 말라고 합니다. 무언가 하라고 합니다. 움직이라고 합니다.
요란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기 위해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에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기분이 나아지는 법을 찾지 마세요. 상황이 완화되는 길을 찾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만 찾으세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세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면, 삶의 어떤 순간에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황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만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합니다.

삶 속에서 어려운 문제를 당한 분이 계십니까? 스스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세요. 기다리세요.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기다리세요. 결코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결코 후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 고비를 넘으면, 상황을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시편 46편 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가 찾아와도,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놓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문제가 터지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터져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에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길이 없습니까? 그때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chance)입니다. 다른 길을 찾지 마세요.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문제 때문에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막힌 순간입니다.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을 기다리는가를 보십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를 보십니다.

본문 시편 62편에 보면, ‘그만(He alone)’라는 문구(文句)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기도의 줄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줄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줄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그만둬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그만두는 것처럼 억울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줄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도의 자리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고,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무시하지 않으시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저는 제 삶에서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호주에 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길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왜 여기에 왔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당황스러웠습니다. 모든 것이 막힌 것 같았습니다.
제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정말 암울했습니다.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막다른 길에 놓인 것 같았습니다. 비상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머니에 돈도 없었습니다. 이역만리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액션을 취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많은 줄을 잡고 싶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묘수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때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방법을 찾고 싶은 욕망이 목까지 차올랐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사울이 굴에 들어왔을 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대로 하면,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렸습니다.

실력이 있고, 재주가 많아서 우리의 열심을 펼쳐나가는 것을 먼저 배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해볼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액션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놀라운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입니다. 그 후로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문제들 앞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만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문제가 오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우리 스스로 방법을 찾으라고, 우리의 실력을 보이라고 우리를 충동합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활동하는 이 시대 속에서 믿음은 비활동적인 것입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야말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먼저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액션이 발달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터지면, 자기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뒤로 돌려놓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의 실력으로 살려는 행위를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으십니다. 모든 소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완성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찾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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