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예배설교
제목 : 그리스도의 군사

말씀 : 딤후2:1-6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생명의 능력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사탄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유혹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며 덤벼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력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비열하게 때로는 고상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언제 당하는지도 모르게 당한다. 자칫 잘못하면 속임수에 넘어가 도리어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교묘한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이 지금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비진리가 혹은 거짓이 진리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기에 속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분별력을 기르고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사탄에게 속지 않고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1절)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우리가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려면 강해야 한다. 강하지 않으면 진다. 군인이 체력이나 정신이나 사기가 약해지면 진다. 그러므로 우리도 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 그래야 마귀가 덤벼들어도 끄떡 않고 이긴다.

그러면 어떻게 강해지는가? 물론 많지만 일단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란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들을 말한다. 믿음, 구원, 감사, 사랑, 기쁨, 능력, 지혜, 선과 진리와 의 등...... 이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대한 확신과 믿음, 소망을 갖게 된다. 유혹을 분별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상황 환경 고난도 이기게 된다. 그래서 사명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덧입자. 더욱 충만한 은혜를 받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러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그래서 주의 은혜를 덧입고 주의 능력을 덧입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모든 유혹과 도전을 물리치고 힘차게 달려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자.

2.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2절)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자신이 먼저 말씀위에 서서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말씀은 천국을 알게 된다. 인생의 갈길을 알게 한다. 선과 진리를 알게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거짓되고 왜곡되고 잘못된 가치관 속에 있는 풍조와 양식과 습관과 모든 삶의 모습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씀 위에 굳게 서면 능력도 얻게 된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확신과 소망과 위로와 힘을 줌으로 올바른 분별력을 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혹과 도전과 고난과 조롱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천국과 진리의 길도 제대로 모를 뿐 아니라 마귀에게 속기 십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말씀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산다고 말한다.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은혜와 능력과 지식과 판단은 반드시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설령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말씀을 잣대로 삼으라.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붙든다. 힘을 주고 능력을 준다. 마귀 사탄을 물리친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3절)

딤후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진리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자연적인 세상은 결코 예수님께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다. 물론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하기도 하지만 오염되고 왜곡된 이성대로 자신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는데 그친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의 오신 참뜻을 왜곡시킨다. 십자가와 부활과 주되심을 거부하고 꾸며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대적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 고난을 피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해, 생명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향해 달려가려면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고난 즉 희생과 수고와 섬김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빌1: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여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환경이나 상황을 이기고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4.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딤후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사는 그를 모집한 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군사는 그 모집한 자의 뜻에 절대 순복해야 한다. 그래서 군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훈련받으며 적들을 물리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도 동일하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부르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세우셨다. 그래서 세상 속으로 가서 마귀사탄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말씀 훈련, 기도훈련, 전도훈련도 해야 한다. 동시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영광이나 즐거움 보다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직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해 가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길이요 진리의 길이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길이요 동시에 우리 자신도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자유가운데 살게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을 택하며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고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삶이 되자.

5.법대로 경기해야 함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렇다. 모든 경기자는 법대로 해야 한다. 운동경기도 법대로 해야 한다. 시험도 법대로 치러야 한다. 인생도 법대로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법대로 해야 한다. 물론 인생 최상위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법을 제정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한 법을 주셨다. 그 법대로 살아갈 때에 가장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법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7:21절에서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물론 이 말씀이 100%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법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한 따라가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공자가 된다.

오늘부터 사순절 집중전도. 오늘은 주님께 영광 돌리고 안식도 취하는 날. 그러므로 오후에 좀 편히 쉬면 좋은데 전도를 나가려니 솔직히 나도 좀 힘들다. 그러나 이 일은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이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일.

그러므로 좀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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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말씀 : 마11:7~12

제목 : 천국을 침노합시다.

 

1.가장 위대한 선지자 세례 요한

오늘 말씀에 보면 세례 요한에 대한 더 할 수 없는 칭찬이 나타나 있다. 11절 상반절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인간 세상에서 세례 요한보다 위대한 선지자는 없다는 말씀이다. 얼마나 대단한 칭찬인가?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이런 칭찬을 들었으니 얼마나 영광인가?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께 최고의 칭찬을 받았을까?

첫 번째 이유는 세례 요한은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7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예수님이 말씀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란 세상 조류에 따라 이리 저리 변하는 모습을 말한다. 상황과 환경과 이해관계에 따라 생각과 태도가 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세상에 물결에 휩쓸려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끝까지 회개를 외쳤다. 욕을 먹어도 핍박을 당해도 말씀의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심지어는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것에 대하여 책망하였다. 그래서 결국 순교를 당했다.

두 번째는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세례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옷이란 비단옷과 같이 화려한 권세와 부요를 상징한다. 당시에 헤롯 임금이나 사두개인 제사장들은 화려한 의복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마3:4) 즉 세례요한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에도 연연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신 사역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극찬을 받는 선지자가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세례 요한은 직접적으로 메시야 길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10절에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길을 직접 예비한 선지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도 위대한 선지자라는 것이다. 물론 구약 선지자들이나 다른 위대한 신앙인들도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고, 온갖 우상숭배와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상에 대하여 경고하며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은 세례 요한을 이런 모든 선지자들보다도 뛰어난 선지자라고 칭찬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의 길을 직접 예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대면했고, 심지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하며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어주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제자들도 예수님께로 보냈다. 그래서 요한은 극찬을 받았던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는가? 이보다 더 위대한 모습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을 직접 소개하는 일. 예수님께로 직접 인도하는 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일, 이보다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나?

우리가 사순절을 맞이하여 전도를 하는 것도 그렇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귀한 일은 없다. 큰 일은 없다. 시급한 일도 없다. 가족과 친척과 이웃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래서 심지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9:3절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설마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뜻일까? 그만큼 가족과 친척을 구원하는 것이 간절히 원하는 바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지도 말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지도 말고, 오직 어찌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 일에 힘씀으로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가치를 누리며 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천국을 침노하라

세례요한을 극찬하신 다음에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천국을 이루어 가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12절을 보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고 하신다. 물론 천국은 결코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귀도 그 누구도 천국을 침략해서 얻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천국을 침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천국을 차지하기 위하여, 혹은 이루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정보도 수집하고, 군비도 확충하고, 군량미도 확보하며 최신식 무기도 준비하고 병사들도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천국을 얻고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차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공략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열심히 묵상하여 천국에 대하여 확실히 알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그 능력으로 마귀의 도전을 물리치고, 천국을 향해 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한다. 또한 세상의 무사안일과도 싸우며 적극적으로 천성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세례요한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천국을 향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격적으로 천국을 이루어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저돌적이었는지 마3:7,8절을 보라.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선생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부으며 너희들이 성전을 지킨다해도, 너희들이 율법선생으로 율법을 가르친다해도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열정과 적극성이 세상의 어떤 조류에도 휩쓸리지 아니하고, 세상의 어떤 협박이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천국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2:14~17절을 보자.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성전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열정으로 그들을 꾸짖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마23장에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닫고 너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구나.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하시면서 신랄하게 책망을 하신 후에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마23:33절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런 하나님께 대한 열정, 적극성이 결국 그들의 눈에 가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것이다. 바로 그런 열정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심을 내야한다. 세상에서 일하는 것의 반만 열심을 내어도 신앙생활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먹고사는 일을 위해서는 죽자사자 일하면서 천국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자녀교육에는 죽어라고 투자하면서 영혼의 생명의 위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세상에서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있으면 열일 젖혀 놓고 쫓아가면서 예배드리는 일이나 교회 일을 하는데는 그렇지 못하다. 자녀를 위해서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낼 수 있지만 교회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천국을 위하여 열심을 내야 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더 기쁜 일인가? 무엇이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인가? 무엇이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가? 무엇이 더 행복하고 평안하고 영원토록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위로와 소망을 누릴 수 있는 일인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적극적인 신앙인이 되자. 예배드리는 일과 말씀 듣는 일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자. 특별히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더욱 열심을 내자. 그래서 우선은 내가 천국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자. 동시에 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자. 그렇게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역사를 이루어가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칭찬과 상급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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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진정한 승리자

말씀 : 딤후2:7-13

 

딤후2장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병사)라고 말씀한다.(3,4절) 왜냐하면 세상은 영적인 전쟁 터이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마귀사탄이 얼마나 교활하게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가? 얼마나 무리를 넘어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가? 그래서 벧전5:8절에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엡6:12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전신갑부를 입으라고 하신다.

그렇다. 세상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다. 사탄마귀가 끈질기게 우리를 공격한다. 때로는 사납고 포악하게 때로는 교활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다가와 유혹하여 넘어 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앞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 강하라, 말씀을 가르치라, 승리하려면 예수의 은혜로 강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으라, 주님을 기쁘게 하라, 법(말씀)대로 살라고 하셨다. 왜?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 사탄마귀의 흉계와 거짓을 간파하여 물리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과 싸워 이김을 우리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계속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한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총을 덧입어 더욱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우뚝 서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흉계와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1.말씀을 묵상하여 총명을 얻으라.

딤후2:6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내가 말하는 것이란 앞의 말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1~6절의 말씀들이다. 예수의 은혜로 강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법대로 경기해야 한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 그러면 주께서 총명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총명이란 물론 진리를 아는 것이다. 바르게 알고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된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 고난이 와도 이긴다.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면 평안을 누리고 기쁨과 자유를 누린다.

과연 무엇이 총명인지, 총명을 어떻게 얻는 지 기억하라. 물론 말씀이다. 거기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나 말씀을 묵상하며 심비에 새기고 그 말씀을 잣대와 등불과 희망과 소망과 힘으로 삼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과 동행하라. 그리하여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예수님을 기억하라.

딤후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생각하라. 예수님을 생각하되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라. 그러면 무엇을 따라 가야 할지 알리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리라. 진정 진리가 무엇인지 알리라. 능력을 받으리라.

무엇이 생명인가? 무엇이 은혜인가? 어디에 영광이 있나? 어디에 기쁨이 있나?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인가? 무엇이 소망인가? 무엇이 영생복락을 가져다 주나? 무엇이 진정 영광스러운 삶인가? 물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다. 우리도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오직 거기에 생명과 구원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 지금 여기서도 진정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아간다. 그래서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된다. 사탄의 역사를 분별하고 물리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방법을 따르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딤후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말씀으로 인하여 숱한 고난을 받았다. 주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다. 그것도 순교를 앞두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말씀이 막힌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너무나 엄청난 장벽이 앞을 가로막아 답답할 때도 있었다. 조바심이 날 때도 있었다. 걱정과 염려가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낙심과 절망과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어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도리어 죽음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는 더욱 힘있게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독교역사는 고난 시에 도리어 생명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다. 때로는 위축되는 듯이 보여도 때로는 심지어 배교자도 생기기도 해도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환난과 핍박을 통해 생명의 역사는 더욱 힘있게 이루어져 왔다.

반면에 잘먹고 잘살고 평안하고 안전하고 걱정과 염려가 없을 때 기독교역사는 도리어 퇴보했다. 서양교회가 그렇고 우리나라 교회가 그렇다. 어렵고 힘들 때 도리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무릎 꿇었다. 우리의 무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엎드려 도우심을 구했다. 주님 앞에 매달렸고 힘들고 어려워도 오히려 더 봉사했고 오히려 더 열정을 가졌다. 그럴 때 교회는 힘과 능력과 은혜가 있었다. 거룩한 삶이 있었다. 그래서 비록 힘들지만 그들은 생명력있는 신앙생활을 유지했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왔다.

그런데 잘먹고 잘살고 여유가 생기고 그러니까 도리어 나태해졌다. 평안해 지니까 아쉬운 게 없어졌다. 등 따뜻하고 배불러지니까 슬슬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것이 좋았고, 재미있는 게 많아졌다. 세상에서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졌다. 좋은 세상이라며 세상으로 자꾸만 나갔다. 그래서 하나님과 도리어 멀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결코 우리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이 우리를 주님 앞에 묶어두는 끈과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며 고난에 동참하라. 그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기억하며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 도리어 고난 가운데 더욱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계기로 삼으라.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은헤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라.

4.고난은 영광을 가져다 준다.

딤후2:10~12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바울은 고난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말씀을 결코 막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어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역사를 위하여 달려갔다. 왜? 자신이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복음의 역사에 진력했다.

그래서 10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1절에서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고 하였다. 또 12절에서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의 복음의 사역에는 정말 많은 고난들이 있었지만 죽어가는 영혼들을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아 영원한 영광을 차지할 것을 믿었기에, 참고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면 주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을 알았기에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힘차게 달려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말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과 뜻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역사로 된다.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때로 바라보며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꾸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1절 말씀처럼 죽어야 한다. 내 자아가 죽고 내 가치관과 목표와 목적과 삶의 양식과 우선순위와 방법과 경험이 죽고 주님의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된다. 영광을 누리게 된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영광도 누리지 못한다. 죽지 않으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새것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죽으면 다시 산다. 주님의 것이 된다. 주님과 동행하게 된다. 그러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여러분, 다시 산다는 것,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냥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다시 사는 것이다. 왕노릇 한다고 무슨 권력을 휘두르고 명령을 내리고 복종시키고 그런 왕노릇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영광을 누리는 상태를 말한다. 그 어떤 악의 세력이나 어둠의 세력이 근접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왕도 누릴 수 없고 어떤 백만장자라도 누릴 수 없고 어떤 지식인이라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까짓 세상의 왕이나 부귀영화나 권세 따위는 새발의 피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까짓 세상 명예와 부귀영화 따위는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은혜를 누리자.

5.주님의 약속은 완전하다.

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는 것은 완전히 믿을만하다. 신뢰할만하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신뢰할만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완전히 신뢰할만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주님은 항상 미쁘시다. 주님을 결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다. 자기를 부인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은 물론 자기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자신의 말씀과 약속과 행동에 대하여 완전히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황이 불리하면 오리발을 내밀기도 하고, 아니면 능력이 없어 못하기도 하지만 주님은 절대로 딴 소리도 안하시고 능력이 없어 못하지도 않으신다. 약속을 100% 완전히 지키시는 능력자이시고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렇다. 주님의 나라는 너무나 확실하다. 주님의 약속은 100%이루어진다. 주님의 재림도 천국도 완전하게 이루신다. 영광의 나라도, 영광의 면류관도 완전히 100% 다 이루신다. 세상이 쪼개지고 박살나도 주님의 약속은 변개치 않는다. 아니 도리어 세상이 박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감사하라. 기뻐하라. 우리에게 이 놀라운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를 알지 못하는 죽어가는 저 많은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더욱 기도하고 힘쓰자. 그런 진리를 위한 삶을 살려면 고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광의 고난임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참여하자. 그러기 위해 더욱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거듭난 자아로 살아가자. 그래서 주께 영광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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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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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레20:10절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 안에 굳게 서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을 보자.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계명을 간직하라 /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여기에 보면 말씀에 다양한 표현이 있다. 우선 1절에는 ①‘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순종해야 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에서는 ②‘계명’이라고 말씀한다. 계명이란 말씀그대로 우리가 지킬 것을 명령하신 계율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개역성경에서는 ‘명령’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말씀을 ‘명령’이라고 하신 것은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2절에서는 ③‘법(도)’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은 어떤 기준이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는 것은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또 4절에서는 말씀을 ④‘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예수님과 그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따라 말씀이 곧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 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건 앞에서 보았던 1~4절에 역시 나타나 있다.

1절의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르라는 것이다.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팔아먹지 말라는 것이다. 손해가 나도 힘들어도 어려워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비슷하다. 팔아먹지 말라. 간직하고 있어서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을 따라가라는 말씀.

2절은 1절의 연속인데 후반부에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3절의 손가락에 매라는 것은 가까이 하라는 것인데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늘 보고 듣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남는다. 새겨진다. 아주 그냥 내 가치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새기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완전히 심비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게 하고 그것을 따라가라는 말씀이다.

또 4절의 내 누이, 내 친족이라 하라는 것은 친근히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능력이 있고 평안이 있고 복이 있으니까 세상의 다른 것을 가까이 함도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물론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잠4:23절을 보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또 마22:37절을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4절을 보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말씀을 지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시련 속에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창39:9절을 보자.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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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참으로 많아야 할 것

말씀 : 벧전1:1,2

 

오늘 말씀은 베드로전서의 서론적인 말씀. 1절에 송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2절에서는 수신자들의 정체성을 말씀해주며 축복하는 내용이다.

1.송신자와 수신자

1)송신자 : 사도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본명은 시몬이다. 그는 안드레의 형제로 갈릴리 벳새다의 어부출신이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후에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모든 생업을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마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후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 제자의 핵심인물이 되지만 그는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어서 여러 번 실패도 겪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섰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마16장)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에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다가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마26장,요18장)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가다가 험한 풍랑으로 고난당하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풍덩 뛰어 들었다가 그만 험한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점점 가라앉을 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구원해 주시며 왜 의심하였느냐는 책망을 받기도 한다.(마14장)

가장 뼈아픈 실패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가자고 하자 예수님께서 오늘밤에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신다. 이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떠나도 나는 죽을지언정 떠나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결국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며 부인하는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마26장)

그러나 이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을 받고 예수님의 수제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된다. 그가 설교할 때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40년동안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 하니 즉시 일어나 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중풍병으로 자리에 누운지 팔년이 되는 애니아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하자 즉시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였으며, 욥바의 다비다(도르가)가 죽었을 때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다시 살아나기도 하였다. 또한 룻다, 욥바, 가이사랴를 비롯한 각처를 순방하면서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다가 사명을 감당하였다.

고대 문서들에 의하면 안디옥교회도 베드로가 설립하였다고 하며 소아시아 지역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바벨론,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년에는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는데 네로의 박해 시에 제자들의 간곡한 청원으로 로마를 떠나던 중 주님이 나타나 어디론가 가실 때에 베드로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네가 회피하는 십자가를 다시 지러간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A.D. 68년경)

이런 베드로의 삶에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 실수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그러한 뼈아픈 실수를 딛고 주님 앞에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정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그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에 어떤 형태로든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약하고 부족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서 모든 약하고 부족하고 허물된 것들을 이기고 주님의 역사에 쓰임 받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영원한 영광의 은총을 누리자.

2)수신자 :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1절)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이 지명은 모두 소아시아 지역.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씀은 실제로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단순히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크리스천들을 의미하기도. 당시 흩어진 유대인 크리스천이나 현지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았다. 유대동족들에게도 핍박을 당하고 특히 이 당시는 로마로부터도 박해를 당하기 시작하던 때였으므로 종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래서 본서에 보면 이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3절 산 소망이 있다. 4절 썩지 않은 유업이 있다. 6절 여러 가지 시험으로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도리어 크게 기뻐한다.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벧전1:24,25)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2:9)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등등....

우리도 나그네들이다. 나그네 길은 고달프고 힘들고 외로울 때가 많다. 우리에게도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도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 하고,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할 때도 많다. 그러나 그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진리에 속한 사람들이 가야할 길이다. 오직 거기에 생명이 있고 산 소망이 있다. 영광의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에 휩쓸려가지도 말고, 나그네 길과 같은 세상의 삶에 목숨 걸지 말고 천성에 소망을 두고 나그네 길의 아픔을 이겨나가자. 더 나아가서 광야의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소망위에 설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자. 그래서 우리 모두 함께 여기서도 승리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자.

2.수신자들의 정체성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 말씀에 보면 크게 두가지 주제가 나타난다. 첫 번째는 수신자들의 정체성으로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하는 내용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는 말씀이다.

먼저 정체성을 보자.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그럼 왜 그렇게 하셨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①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은 예정 교리 한 모습이 나타나나는데 솔직히 예정교리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도 딱 부러지게 정리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에 맡겨두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다 이해 할 수 없는 신비한 영역에 대해서는 그냥 하나님께 맡겨두고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것, 나를 부르셨다는 것, 내가 부름 받고 선택받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자부심과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②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지만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내 마음 내 생각대로 살 때가 많았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서 내 멋대로 살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셨고, 성령께서 감동감화를 주시고 역사하셔서 믿음을 주심으로 예수님 믿고 죄사함 받고 깨끗케 된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저 천국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그렇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한다. 그렇게 성령의 지배 속에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진정 거룩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③우리를 깨끗케 하신 것은 순종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죄 가운데 씻음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죄는 당연히 씻음받고 우리 생각과 목적과 방향과 가치관과 이성과 경험과 지성이 다 깨끗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더럽고 추하고 속된 생각들 속에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고 아름답고 올바른 모습으로 회복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영과 육과 혼의 전인격이 거듭난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거듭나면 당연히 순종하게 된다. 주님의 말씀과 뜻과 삶을 따라 살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며 주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감격하고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며, 더욱 거룩하고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더욱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성령의 능력과 인도와 지혜가운데 살아감으로써 주님의 말씀에 순존하여 죽께 영광을 돌리고 주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자.

3.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축복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택하신 백성들의 정체성을 말씀하신 다음에 사도는 그들을 축복하고 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서신서는 대부분 서두에서 축복하고 말미에서 축복함으로 축복으로 시작하고 축복으로 마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리고 그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안에 있는 은혜와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 고쳐야 될 부분들, 지켜야 할 들을 말씀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우선 성도는 항상 서로를 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책망할 때도 있고, 강권할 때도 있고, 심지어는 징계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들은 성도를 축복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혹은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고, 혹은 제멋대로 살아간다고 저주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성도에 대하여 축복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 주고 축복해야 하고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축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축복의 내용은 더 중요하다. 물론 건강도 중요하고, 물질도 중요하고, 권세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천배 만배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을 위하여 물질이나 육신이나 세상의 명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인생에게 자유를 주고 행복을 주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없으면 행복한 인생이 못된다. 만약 그러고도 행복을 누리다면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참된 생명을 얻는다. 자유와 평화와 감사와 기쁨 속에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가 된다. 은혜가 내 영혼과 생각과 신을 감싸면 만사형통이다. 형통하지 않아도 형통이다. 하늘 평안을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조건과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정말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성령의 깨끗케 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은혜와 평강 속에서 정말 세상의 모든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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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참으로 감사한 이유

말씀 : 골1:1~8

 

1.모든 교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기도

골로새서는 A.D. 62년경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이 기록한 옥중서신. 주된 내용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세상의 어떤 감언이설이나 이단 사설에 빠지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갈 것을 강조함.

그런데 사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는 아니었음.(골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에베소에서 약 150Km 동쪽에 있는 골로새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할 때 이곳에서 복음을 들은 에바브라가 고향인 골로새에 들어와 교회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음.(골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교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지만 골로새 교회를 사랑하고 가르치고 평안하고 바로 서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을 쏟았던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자녀로서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바로 서고 교회가 평안하고 교회가 은혜가운데 든든히 서 가기를 힘쓰고 사랑가운데 하나 되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 가기를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2.소명의식(1절)

골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디모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바울을 선택하고 부르셔서 사도로 세우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목사로 세우심을 받았든 장로나 집사나 권사로 세우심을 받았든 아니면 교사나 다른 직책으로 세움을 받았든 더 나아가 성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성도가 되었고 집사가 되었고 권사 장로 목사가 된 것이다. 내 의지대로, 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다.

심지어 마10:29절에서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이 그를 부를 수도 안 부를 수도, 사도로 세울 수도 안 세울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게다가 사도로 세우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확실한 인준 가운데서 하나님 백으로 사도가 되어 감사와 기쁨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인생을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직분을 주시고 직책을 주셔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하시고 그 영광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게 하신 것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그 사명을 감당함으로 주께 영광 돌리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3.축복의 근원과 내용(2절)

골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축복기도의 내용은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은혜와 평강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가 아니다. 진정하고도 영원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또한 우리가 정말로 구할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세상의 다른 것도 저절로 오거니와 설령 오지 않아도 은혜와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오직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을 찾되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와 평강을 구하자. 그리하여 진정한 평안을 누릴 뿐 아니라 그렇게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에 외적으로 베풀어주는 은혜도 동시에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4.감사의 내용(3-6절)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한 다음에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1)감사의 기도가 나오는 교회

골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나왔다. 얼마나 멋있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할 때에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면 서로가 얼마나 행복할까? 반대의 경우라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 나를 볼 때 감사가 나오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위로가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러면 무엇을 감사했나?

2)믿음, 사랑(4절)

골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정말로 가장 감사한 것은 무엇일까?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믿음보다 더 감사한 것은 없다. 믿음이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이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믿음 있음에 감사하라. 믿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라.

믿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동반한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도 온다. 믿으면 주님의 구속하심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자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서로가 사랑함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감으로 그 은혜를 누리고 생명의 기쁨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자.

3)하늘에 쌓아둔 소망(5절)

골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두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진리를 듣고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있음을 알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음을 진리를 바르게 들으면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복음 진리가 뭔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받는다. 거듭난다. 구원받고 거듭나는 것은 영혼만이 아니다. 생각과 마음과 가치관과 목적과 목표가 거듭난다. 그러면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천국의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안다. 그러면 세상의 것을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내 시간과 물질과 능력과 정열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라. 하늘에 소망을 쌓으라. 그리하여 세상의 것에 얽매어 힘든 삶을 살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소망과 은혜가운데 능력 있게 주님과 동행하라.

4)열매를 맺음(6절)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로새 교회는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기 시작했다. 즉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으니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니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렇다. 복음을 들으면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은혜를 깨달았으면 어떤 형태로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소용 없다. 만약 은혜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열매가 없다면 이 또한 소용없다. 즉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닫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들어야 한다. 듣되 나를 버리고 들어야 한다. 나의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들어야 한다. 그러면 은혜를 받게 된다. 은혜를 받으면 삶이 다른 양상으로 바뀐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진리의 길을 알고 그러한 삶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 열매를 맺는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가자.

5.골로새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진 이유(7,8절)

골1:7,8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7절에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임을 알 수 있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목회 할 때에 바울에게 배우고 고향인 골로새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교인들을 가르친 것이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 에바브라에게서 복음을 듣고 배워 믿음과 사랑과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에바브라는 어떤 사람이었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하였다. 신실은 충성과 같은 말로 ‘신실한, 믿을만한, 진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첫째는 배우고 깨닫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앞의 6절에서 그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를 맺었다고 했다. 7절에서는 에바브라에게 배웠다고 했다. 즉 골로새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배웠던 것이다. 특별히 영적인 일은 세상적인 이치와 법과 지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겸손하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바브라는 신실한 종이라고 했다. 신실과 충성은 앞에서 말했듯이 원어가 똑같다. 신실한, 믿을만한, 진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일꾼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이냐하면 신실하고 믿을만하고 거짓이 없고 진실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무슨 지식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능력이나 이런 것들이 우선되는 덕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능력 있고 뛰어나고 많이 알고 힘세고 외모가 좋고 한 것을 강조하지 않고 오직 충성스럽고 진실하고 성실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자. 주님과 이웃과 가족에 대하여 진실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늘에 소망을 두자.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은혜를 받고 열매를 맺어가자. 무엇보다도 신실한 모습으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서 열매를 맺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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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존귀한 신분, 존귀한 삶

말씀 : 골1:13-23

 

골로새서도 다른 서신서와 마찬가지로 전반부(1,2장) 복음, 후반부(3,4장) 삶. 우리도 항상 먼저 복음. 그 다음에 삶을 중시해야.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야 하고,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삶이 뒷받침 되어야. 그래야 진짜 믿음,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감격과 기쁨 가운데 주께 영광 돌리고 그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인생.

오늘 말씀. 복음의 내용, 그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의 존귀한 상태, 그리고 그 이유. 기독교의 핵심. 믿음이 뭐냐, 왜 우리가 교회에 다녀야 하느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리고 왜 우리를 부르셨나? 어떻게 해야 하나?

1.복음을 믿은 결과(13,14절)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기서는 복음을 믿은 자들의 상태 혹은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흑암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아들의 나라로, 영광의 나라로, 은혜의 나라로 옮겨졌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 1)아들안에서 죄사함 받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길.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길. 즉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구원받으려면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왜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으므로. 죄씻음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 뿐이므로.

2)예수님 믿으면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짐. 흑암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아들의 나라, 영광의 나라, 은혜의 나라로 옮겨졌다. 굉장한 사실, 엄청난 사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더럽고 추하고 멸망당할 사탄의 자녀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신분.

이것이 복음의 핵심, 이것이 교회에 다녀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이거 하나면 얼마든지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어. 우리 모두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2.예수님 만이 구원자이신 이유(15-19절)

골1:15~19 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왜 예수님만이 구원자이신가? ①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15절) 여기서 먼저 나신 자라는 말씀은 마치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생각할 오해의 여지가 있다. 물론 아니다. 이 말씀은 천지만물에 대한 예수님의 우월성과 소유권을 말씀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있기 전부터 만들어진 자가 아니라 저절로 나신자로 계시다는 말씀.

그래서 곧바로 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말씀. 또 요1: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고, 요10:30절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

②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엄청난 사실, 놀라운 사실, 이 말씀에 온 우주만물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모든 이유가 들어있다. 하나님의 능력, 지혜, 지식, 주권, 주인 되심 등의 ... 그러므로 물론 당연히 주님만이 인류를 심판하고 구원하실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16절을 다시보라.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 요1:1-3절을 보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③천하만물의 으뜸이시기 때문이다.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여기서 으뜸이란 ‘첫째, 최초, 최고’라는 말로 우주만물의 첫 자리를 점유하다는 의미. 즉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당연히 천하만물의 으뜸이시오, 주관자이시고,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로서의 능력과 자격과 지혜와 사랑과 선과 의를 온전히 갖추신 유일한 구원자.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으라. 믿었으면 정말 예수님을 최고의 자리에 앉혀 드리라. 주권을 인정하라. 소유권을 인정하라. 나나 자식이나 돈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육체적 안일함이나 즐거움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안된다. 오직 예수님을 최고의 자리에 앉혀 드리고 그 통치와 그 뜻을 따르며 살자.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자.

3.우리를 구원하신 이유(20-22절)

골1:20~22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왜 우리를 아들의 자리로 옮겨주셨는가? ①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20절)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생명과 은혜와 축복과 기쁨과 평안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화목할 때만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좋은 은혜들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도리어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그래서 십자가로 죄의 권세를 깨뜨려 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불화하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아들의 지위로 회복되고, 아들의 지위가 회복되니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유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라. 물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지만 아직은 온전한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원죄는 치유되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남아 있다. 아직도 죄된 본성과 생각과 행동들이 남아 있다. 이것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최대한 화목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②흠없는 자로 서게 하려 하심이다.(22절) 우리를 구원해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다. 물론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구원의 은총은 물론 세상에서 누려야 할 은혜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십자가로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것 뿐만 아니라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도 흠없는 자로 서기를 원하신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 앞에 아름답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흠없는 자로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광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받아 구원함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더욱 성결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한 관계속에서 살아가자.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자. 동시에 그렇게 흠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힘쓰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자.

4.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방법(23절)

골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속함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김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흠없이 설수 있는가? 두말할 나위없이 믿음에 거하는 것이다. 복음의 소망위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23절)

믿음에 거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의 근거가 복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이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목표가 되고 기준이 되고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또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 속에서도 세상의 것은 머잖아 지나가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나라에 소망을 두고 꿋꿋하게 말씀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환난이 오나 핍박이 오나 세상의 가치관이나 문화나 삶의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든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우왕좌왕하지 말고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럴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여 창조주 예수님, 만물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다시한번 되새기자. 그 예수님의 통치를 온전히 따르자. 그 예수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구속함을 얻고 영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음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어떤 상황속에서도 믿음의 굳게 서서 주님과의 온전한 화목한 관계속에서 살아갈 때 주님 안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다가 흠없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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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 : 살전4:13-18절

 

데살로니가 교회. 참 좋은 교회.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서 있는 교회. 그런데 지상 교회는 불완전.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두가지 큰 문제. 성적 부정 행위와 재림에 대한 오해. 그래서 성결하라. 형제(사랑하는 배우자)를 저 버림은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일을 하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더라도 오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

그러면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실한 증거. 이것으로 위로를 삼고 믿음을 지키라.

1.믿는 자의 소망(13절)

살전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 전혀 다르다. 본질적으로 다르다. 완전한 소망이 있다. 영원한 소망이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영광의 나라로의 이사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어떤 형편에서든지 소망이 있다. 기쁨이 있다. 이 소망은 세상의 소망과 다르다. 아니 세상의 것은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문명이든 과학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진짜 소망이 아니다. 완전한 소망이 아니다. 질적으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다. 곧 썩는다. 갖고 있는 동안도 별것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완전하다. 영원하다. 영원히 완전하게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완전한 소망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준다. 자유와 위로를 준다.

그래서 시39:7절에서는 말씀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래서 또 롬8:24절에서는 말씀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세상은 잠시잠깐이다. 곧 영광의 나라가 온다. 주님이 오신다. 아니면 내가 주님께로 곧 간다.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자를 위하여 영광의 나라를 예비해두고 계신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이에 대한 분명한 믿음 가운데 주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의 모든 험한 것, 힘든 것, 유혹들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2.주님의 재림과 부활, 휴거(14-17절)

살전4:14~17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의 상황에 대한 말씀.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인데 다시 오실 때에 이미 예수님 믿고 낙원에 있는 영혼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며 그 때에 천사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고 그러면 이미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신령한 육체를 입게 되고, 그 때까지 살아있는 잘은 곧바로 신령한 육신으로 변화하여 공중으로 떠올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

그런데 사실 재림 사건이나 그 이전의 대 환난기나 천년왕국이나 이런 것들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분명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은 너무나 확실한데 그 방법과 과정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딱 잘라 말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가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죄-심판, 믿음-구원이다. 그러나 그래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사실인데 오늘 재림에 관한 말씀이니까 여기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일단 신앙생활에 있어서 좀 혼동되기 쉬운 것은 예수님의 재림 전과 재림 후가 어떻게 다른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이 완전히 갈라지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있을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20:11-15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러면 이런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어떤 상태로 있는가? 낙원과 음부이다. 낙원은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대기 장소이고, 음부는 지옥으로 가기 위한 대기 장소이다.

눅16:22-24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일단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대기 장소로 들어가게 된다. 낙원은 천국에 갈 사람들이 대기 장소요, 음부는 지옥 갈 사람들의 대기 장소이다. 물론 이때는 아직 신령한 몸을 입지는 않았고 영으로 존재한다. 낙원에 간 영혼은 천국과 같은 은총을 누리며 대기하다가 예수님 재림 시에 부활하여 영혼과 신령한 육체와 결합하여 완전한 천국으로 들어가고, 음부에 들어간 영혼들은 지옥과 같은 고통을 누리다가 예수님 재림 시에 역시 영생하는 몸을 입고 지옥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완전한 정보는 아니지만 성경을 종합해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말씀도 보라. 이렇게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영혼들은 낙원과 음부에서 대기하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살아나게 되는데 때가 되면 주님이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했다. 호령은 말그대로 위엄차게 큰 소리로 외치는 명령이다. 감히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명령이다. 아마도 죽은 자들을 깨우는 소리 일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을 맞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말씀일지도 모른다.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은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승리의 나팔, 영광의 팡파르이다. 이때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도 그 영광의 팡파레에 맞추어 일어나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된다.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그러면 그때까지 살아있는 자는?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러니까 이때는 산자와 죽은 자가 똑같이 되는 것.

그렇다면 이때의 불신자는? 물론 성경에서 정확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일단 죽어 음부로 간다. 그리고 이들은 주님의 백보좌 심판이 있을 때까지 음부에서 대기. 일단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도들이 먼저 영광의 부활체를 입고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하게 됨.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러다가 천년이 차면 다시 잠깐 마귀사탄이 놓이고 이때 곡과 마곡의 전쟁, 아마겟돈 전쟁. 그러나 물론 마귀사탄의 패배. 그리고 드디어 백보좌 심판, 이후 완전한 천국과 지옥. 앞에서말씀드렸듯이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기기 까지의 과정은 세세하고 정확하게 말씀 드릴 수 없어.

그러나 분명한 반드시 부활이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영광의 몸을 입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지 않은 다른 피조물들은 죽으면 끝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영생이 있다. 천국에서 영생이냐, 지옥에서 영생이나 이것만 다를 뿐이다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복의 개념을 세상적인 것에 국한시키지 말라. 시간적으로 잠시잠깐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말라. 영원한 안목을 가지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방법을 따르며 살아감으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자.

3.천국의 삶(17,18절)

살전4:17,18 17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렇다. 주를 믿는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 거기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린다. 그리고 이후로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님의 완전한 보호와 인도와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이용 영광이다. 이것 때문에 믿음 생활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여기는 아직 천국이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다. 천국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된 상태는 아니다. 이미 인침을 받았고 보장도 되어 있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리는 것은 천국의 그림자이다. 완전한 천국은 주님이 다시 오시고 백보좌 심판을 하시고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질 때 누리게 된다.

그 때의 상태는 계21,22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도 한다. 어떻게 알겠느냐고 한다. 그래서 그냥 세상의 것에 얽매어 산다. 세상의 것을 소망으로 삼는다. 그러나 아니다. 끝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것이 소망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은 아신다. 오직 성경은 그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분명한 것은 믿는 자는 영생복락이요, 믿지 않는 자는 영영 형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근본이다. 이런 믿음을 가질 때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도 참 생명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소망과 감사와 능력과 은혜가 넘치게 된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질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속에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힘든 일과 환난과 핍박과 유혹을 이기고 진정 생명의 은혜와 감사와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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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말씀을 생각나게 하라

말씀 : 벧후1:12~15

 

1.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지난 주일에 주일학교 예배에 박현재 혼자 나와 예배를 드렸다. 설교 중에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말씀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에도 보내주시고 우리에게 지혜도 주시고 예쁜 마음도 주시고 나쁜 것에서도 지켜주셔서 멋있게 훌륭하게 해 주시는 분이므로 끝까지 예수님 잘 믿고 나쁜 말이나 행동도 하지 말고 나중에 크면 술이나 담배도 피우지 말고 예쁘게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현재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근데요, 우리 아버지는 자꾸 술을 먹어요. 술 귀신이 들어갔나봐요.’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설교하다가 한참을 웃었다.

한참 웃다가 ‘그래 네 아버지 속에 술귀신이 들어있다.’고 하려다가 그러면 현재가 아버지한테 목사님이 아버지 속에 술 귀신이 들어있다고 했다고 하면 공연히 현재마져 교회에 못 나오게 할 까봐 그러지는 못하고 속으로 그래 네 말이 맞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술귀신이 들어갔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음란 귀신이다. 술귀신이다. 돈 귀신이다 그러면서 귀신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특정 귀신이 들어 있다기보다는 마귀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이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이나 음란이나 향락이나 이런 것들 얽매이는 사람은 그 영혼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마귀의 지배를 받아 자꾸 그런 것들이 생각나 거기에 얽매이니까 귀신이 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이 나온다. 그 마음을 지배하고 그 마음속에 가득차 있는 것들이 결국은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리 마음을 믿음과 말씀과 진리와 선과 의와 사랑 등의 거룩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믿음과 선과 진리의 말이 나오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낙심하고 좌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고 천국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된다. 우리 마음을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 영광이나 욕심으로 채우지 말고 주님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말씀을 가까이하라. 기도하라. 찬양하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심령이 하나님과 말씀과 선과 의와 거룩과 진리로 가득차 진리의 사람으로 살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함께 살펴볼 때에 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자.

2.항상 말씀이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벧후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이미 베드로후서의 독자들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더욱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말씀이 생각나 그 말씀을 따라 살게 하려고 다시 이 말씀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항상 생각나게 하려한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형통하나 불통하나 건강하나 그렇지 못하나 상황이 좋거나 나쁘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항상 말씀이 생각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낙심 염려 걱정 불평 불만 원망에 빠지지 않는다. 시험에 들지 않는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왜? 항상 말씀이 생각나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분별력과 능력을 갖게 되어 소망과 위로를 얻게 되고 악한 것들을 물리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나?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 지혜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과 지혜와 지혜를 주신다. 우리를 선과 진리와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의 심비에 새겨져 있으면 당연히 그 말씀이 우리를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줌으로 당연히 승리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말씀듣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우리 심령이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고 사탄의 유혹에 속지 않게 된다. 마귀 사탄이 감히 대들지도 못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끌려 다닌다. 유혹에 속는다. 왜곡된 가치관에 휩쓸려 다니게 된다. 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따라 다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힘씀으로 우리 심령이 주님으로 말씀으로 은혜로 거룩으로 진리로 가득 참으로써 세상의 헛된 것들에게 속지도 말고 끌려 다니지도 말고 마귀 사탄에 속지도 말고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의 지배도 받지 말고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자.

3.성경을 주신 목적

벧후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2절 말씀에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이다. 오늘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본서를 쓴 목적이기도 하다. 진리에 서서 항상 이것이 생각나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뭐냐하면 그 앞의 말씀들을 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 열매있는 자가 되고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실족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언제라도 생각나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믿음을 잘 지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이 말씀을 다시 쓴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라는 것이다. 죄와 무지 가운데 영원한 형벌로 치달아가고 있는 인생에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려주어 예수님 믿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것, 이것이 성경의 목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저 평안하게 건강하게 잘 먹고 잘살게 하려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물론 물질적 세상적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지만 말씀과 진리와 은혜 가운데 살다보며 저절로 평안도 건강도 물질적인 부요함도 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요20:31절에서도 말씀하셨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또 딤후3:16,17절에서도 말씀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오늘 날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의 은총을 누리지도 못하고 역할을 잘 못할 때가 너무 많다.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치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도 생명의 은총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가지 못하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목적, 믿음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우리 자신이 먼저 진정한 생명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생명의 기쁨을 누리고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로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자.

4.육신의 장막에 있을 동안에 힘써야 할 것.

벧후1:13~15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육신의 장막을 벗어던질 때가 멀지 않았는데 육신의 장막에 있는 동안 어찌 하든지 너희를 믿음 위에, 말씀 위에 굳게 서게 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준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사도 베드로가 자신의 몸을 장막이라고 말씀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장막이란 말 그대로 천막을 말하는 것으로 임시 거주지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육신은 우리 영혼이 임시 거주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인간이 육신과 영혼으로 되어 있는데 육신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 영혼이 잠시 머무는 텐트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장막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낡아지고 결국 무너지고 썩는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육신인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은 흙으로 지어진 장막 집이므로 곧 허물어지지만 영혼은 죽지 않으므로 다시 하나님께로 가서 죄사함의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고후5:1절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들이 정작 중요한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금방 썩어 없어질 육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즐기며 인생을 바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야말로 껍데기만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껍데기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온갖 것을 다하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곧 무어질 육신의 장막집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한 우리가 떠난 후에 우리 후대들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정말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물론 말씀 안에서 살게 하는 일이다.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가 생명력이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사람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깨끗하게 살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고, 이것이 인류를 살리는 일이고, 서로가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죽으나 사나 말씀을 따라야 하고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에게 다른 것은 못 남겨 주어도 말씀의 유산만을 남겨 주어야 한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물론 문제이긴 하지만 영혼이 죽어가는 것에 비교하면 작은 문제이다. 진짜 문제는 영혼이 죽어가는 것이다.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요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 생활에 힘써 더욱 믿음과 말씀위에 굳게 서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우리 후대들이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어 건강하게 잘 먹고 잘살기를 바라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것을 위하여 후원하는 것도 필요는 하지만 그보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진리의 사람 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자. 육신의 장막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자. 그리하여 우리 모두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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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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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

말씀 : 벧전1:18~21

 

뉴욕의 한 교회에서 아주 오래전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할머니가 예배가 끝내 갈 즈음에 손을 들더니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 주세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목사님이 허락을 하자 할머니가 앞으로 나가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1860년 9월 19일, 이 교회 바로 옆에 있는 한 노예시장에서 노예로 팔려가기 위하여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노예를 사려는 사람들이 모이자 우리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경매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나는 어디로 팔려갈까, 내가 팔려 갈 집 주인들은 좋은 사람일까, 나를 학대하고 나를 짐승처럼 대하는 아닐까, 과연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점잖은 신사분이 오시더니 나를 800불을 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분은 나를 해방시켜주며 이제는 당신은 자유인이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이 교회의 목사님이셨는데 그 날 예배시간에 우리가 지금은 노예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번 주일날 한 사람의 노예라도 해방시켜주자고 의논이 되어 노예 한 사람을 사게 되었는데 거기서 바로 내가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 후로 나는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약 70년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교회도 너무나 감사하고 도무지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한 평생 이 교회를 섬기고 기도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나름대로 섬겨왔습니다.

이제 저는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미천한 사람이지만 이제 제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노예에서 해방되어 그 은혜를 도무지 잊을 수가 없어서 한평생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나를 해방시켜 준 이 교회에 감사함으로 섬겼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 다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잊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정말 아름답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구속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노예로 있다가 해방되는 것도 이와 같이 감격스럽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평생 잊을 수 없고,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일진대 죄와 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건짐 받은 이 은혜는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하고 찬양하고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속 받았는지,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의 그 놀랍고 크고 영광스럽고 고귀함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세상의 헛된 것으로부터 대속 받음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 받았다. ‘헛된’이라는 말은 ‘공허한, 헛된, 효과 없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무익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헛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숭배를 비롯한 세상의 헛된 사상이나 종교나 철학이나 물질 등의 죄와 무지 속에서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과 종교를 따라 행하던 모든 행실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헛되고 무익하고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상과 가치가 완전히 무가치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상까지도 100% 무가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온전치는 못하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거나 희망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헛된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 약간의 유익을 얻는다해도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고 나아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음으로 인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가는 악한 행위에 불과한 것인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상과 자신과 육신의 욕망과 돈과 명예와 사람 등의 헛된 것을 섬기며 그걸 인생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죄와 사망과 지옥의 노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다행스럽고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사람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도 평생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할 텐데 하물며 마귀에게서 해방되고 영원한 지옥에서 구속되어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이 은혜를 어찌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람의 노예 생활하는 것도 두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일진대 마귀사탄의 종노릇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얼마나 더 끔찍스러운 일인지를 기억하며 거기서 해방되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이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감격과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니 평생 이 은혜를 잊지 말고 다시는 세상의 것에 종노릇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들로써 진정 거룩하고 아름답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대속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된 것임.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우리가 과거의 모든 헛된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금이나 은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도 아니고,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이나 성인군자나 선지자나 능력자가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전부터 하나님께 함께 계셨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물론 우선은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결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고귀하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은 우리도 너무나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속 혹은 대속이 뭡니까? 한마디로 값을 지불하고 처벌을 면제받아 구원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노예로 팔린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풀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구속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 고귀한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의 삯을 지불하시고 죄와 마귀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여러분, 세상에서 한 1,000억을 주고 산 물건이라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얼마나 애지중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천억 1조 100조가 아닙니다. 온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대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난 존재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물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이보다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복되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 보다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평생을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은혜 속에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리가 고귀한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는 정말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몸값을 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귀한 존재이니까 귀하게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한 몸을 함부로 굴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왕자와 거지와 어울려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아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몇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똥통에서 놀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과 모든 죄와 마귀 사탄으로부터 너무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그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 너무나 고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벧전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래서 영광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 믿음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우리 소망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온전히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세상의 헛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생명과 생명의 기쁨이 있는 양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고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죄와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와 사탄의 권세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헛된 것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나라가 있는 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고귀한 존재이니까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땅의 것을 좇아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몰라서 세상의 것을, 헛된 것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는 그걸 알았으니까요.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엄청난 은혜와 기쁨과 영광과 은혜가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걸 안다면 왜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겠습니까? 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인생인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보다 천하보다 세상 모든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그 영광과 존귀와 거룩하고 기쁨과 은혜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 찬양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놀라운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이 놀라운 신분에 걸맞게 거룩하게 아름답게 존귀하게 살아가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에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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