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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알아야 할 이슬람 교리 몇 가지

 

이슬람은 한국 역사에서 생소한 종교였다. 그러나 역사적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원성왕(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괘릉 옆에 무인석상이 서 있다. 무인석상은 곱슬머리와 곱슬 수염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무슬림의 전통 복장인 터번을 쓰고 있다. 그 모습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스님 혜초가 727년에 쓴 왕오천축국전에 의하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방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통일신라 시대에 이미 중동 사람이나 중앙아시아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도 수도인 개경(오늘날의 개성)에 이슬람 사원 격인 예궁(禮宮)이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이슬람 예배가 진행되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역법에는 이슬람력(Islamic calendar)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조선 세조 때에는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 수출하는 도자기 안료인 회청이 수입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한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일부는 한국 문화 속에 동화되었다.

 

이슬람이 다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약 2만 명의 산업연수생이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다. 그 때부터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한국에는 무슬림이 약 25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약 40만 명에 달한다. 이제 이슬람은 한국에서도 중요한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2050년에는 한국의 이슬람 인구가 300-400만 명이 될 것이며, 이슬람은 불교, 천주교에 이어서 3번째 큰 종교가 되고 기독교는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과거 중동이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이슬람 국가들로 바뀌었고,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유럽이 이슬람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이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1. 타하리프(Tahrif): 성경은 변질되었다

 

이슬람에는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교리가 있다. 구약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신약은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변질되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변질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되고, 변질된 내용 가운데 꼭 필요한 부분은 꾸란에 올바르게 정리되어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 핵심을 세 가지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꾸란에는 무함마드라는 예언자가 올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언했는데, 지금 성경에는 그 내용이 없다. 둘째, 꾸란에는 예수님에게 신성이 없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꾸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내용이 없는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원본에는 꾸란과 일치되는 내용들이 있었지만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타락하여 그 내용을 변질시켰기 때문에, 알라께서 하늘에 있는 원본인 꾸란을 무함마드를 통하여 직접 계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에서 주장하듯이 정말 성경은 변질되었을까? 만일 성경이 변질되었다면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내용이 꾸란에 있어야 한다. 꾸란에는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타락했다는 기록은 있어도,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꾸란에는 계시에 의심이 생기면 ‘성서의 백성’들에게 물어 보라고 말하고 있다(꾸란 10:94). 꾸란에는 꾸란 이전에 계시된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내린 율법을 믿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함마드 이전에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내용이 꾸란에 없는데, 언제 변질되었다는 것일까?

 

성경은 변질되지 않았다. 구약성경은 A.D. 90년에 팔레스타인의 얌니아 종교회의를 통하여 확정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B.C. 400년경 말라기서가 기록된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었으며 수백 년 동안 유대인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권위를 예수님께서 인정하셨다(마 4:4; 막 14:27). 기독교에서도 구약 39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여 사용했다. 신약성경은 최종적으로 A.D. 397년 기독교 3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즉,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200여 년 전까지, 성경은 이미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경전으로 확정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1947년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에 있는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은 늦어도 A.D. 1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오늘날과 동일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꾸란은 무슬림들이 성경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믿는 자들이여 알라와 선지자 그리고 선지자에게 계시된 성서와 너희 이전에 계시된 성서를 믿으라 했거늘 알라와 천사들과 성서들과 선지자들과 내세를 부정하는 자 있다면 그는 크게 방황하리라(꾸란 4:136)”

 

2. 타끼야(Taqiyya): 위장 혹은 기만전략

이슬람에는 많은 교파가 존재한다. 그러나 크게 두 교파가 있는데 수니파와 시아파이다. 본래 이 교리는 시아파에서 “기만”을 의미하는 이함(Iham)이라는 교리인데, 수니파에서도 ‘타끼야’라는 교리로 받아들였다. 타끼야라는 아랍어에는 거짓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슬람의 도덕적 딜레마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거짓말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너희의 맹세 속에 비의도적인 것에 대하여는 책망하시지 아니하나 너희 심중에 있는 의도적 맹세는 책망하시느니라 알라는 관용과 은혜로 충만하심이라(꾸란 2:225)” 이 내용은 이슬람 초창기에 이슬람을 반대하는 메카의 쿠라시쉬(Quraish) 부족에게 잡힌 무슬림이, 이슬람을 믿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풀려나서 무함마드에게 와서 고백했을 때 받은 계시이다. 무함마드의 언행록(Hadith)에 의하면 세 가지의 경우에는 거짓말이 허용된다. 첫째,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 둘째, 평화 또는 화해에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 셋째, 여성을 설득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이다. 윌리엄 와그너가 지은 ‘이슬람 세계 변화 전략’은 이슬람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두 가지 거짓말을 추가한다. 여행 중에 하는 거짓말, 즉 무함마드 당시 모든 여행은 상업적인 여행이었다. 따라서 아랍 상인들이 상업을 위하여 하는 거짓말,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이 포함되어 있다.

 

3. 나스크(Naskh): 나중에 받은 계시에 의하여 먼저 받은 계시는 취소되었다

 

꾸란은 무함마드가 A.D. 610년부터 죽기까지 23년 동안 받았다는 내용이다. 꾸란 안에 같은 주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꾸란 2장 240절에 의하면 과부는 1년 이후에 재혼이 가능하다. 그런데 같은 꾸란에 남편이 죽으면 4개월 10일 이후에 재혼이 가능하다는 내용도 있다. “너희 중에 누가 죽어서 과부를 남기면 과부들은 재혼하기 전에 4개월 10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이 정해진 기간을 지키면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을 너희는 비난하지 말 것이다(꾸란 2:234).” 그렇다면 남편이 죽고 언제 재혼이 가능하가?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나스크 교리가 생겼다. 꾸란에 기록된 계시는 바뀔 수 있으며, 계시가 바뀔 때는 나중에 받은 계시가 먼저 받은 계시를 취소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받은 계시는 이슬람 신학에 의하면 취소된 구절이 된다. 이에 대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일 우리(알라)가 원하였다면 우리가 너에게 계시한 것을 없앨 수 있다(꾸란 17:86).”, “우리가 어느 한 구절을 다른 구절로 대체할 때 알라는 그가 보내는 것을 더 잘 알고 있다(꾸란 16:101).”

그래서 꾸란은 메카에서 12년 동안 받은 메카 계시, 그 이후에 메디나에서 10년 동안 받은 메디나 계시로 나뉜다. 메카에서는 무함마드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꾸란 2:256)” 종교는 강요되어서는 안 되고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메디나로 오면서 바뀌게 된다. 메디나로 온 무함마드는 2년 7개월이 지난 후부터는 칼을 들게 된다. 그리고 메카로 가는 대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종교에 강요가 없다던 ‘평화의 계시’는 ‘칼의 계시’로 바뀌었다.

“이교도를 발견하는 대로 살해하라(꾸란 9:5)”, “불신자를 만나거든 목을 쳐라(꾸란 8:12)” 따라서 평화에 관한 계시는 나중에 받은 칼의 계시에 의하여 취소되는 것이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메카에서는 종교의 다름을 인정하였고, 평화를 이루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무슬림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했다(꾸란 29:46). 그러나 메디나에 오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바뀐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메신저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항복하여 지즈야를 지불할 때까지 지하드를 하라 그들이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끼리라(꾸란 9:29)”

“소동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종교가 알라에게로 귀의할 때까지 그들과 싸움을 계속하라(꾸란 8:39)” 이 구절들에 의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바뀌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의 진리인 꾸란의 계시는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어 갔다.

이슬람 초기에 무함마드가 사탄의 계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과 타협하기 위하여, 메카의 부족신이였던 알라에게 세 명의 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계시였다. 그러나 그 계시가 돌연 취소되었다. 무함마드 자신이 사탄의 계시를 받았기에 알라에게 혼이 나고 그 계시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가지고 인도계 영국 작가였던 살만 루시디(Salman Rushidy)가 ‘악마의 시(Satanic Verses)’라는 책을 썼는데, 그로 인하여 무슬림들에게 20년 이상 살해의 위협 속에 지내게 되었다. 또 그 책을 번역한 사람들이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암살을 당하였다.

 출처 : 유해석 선교사 / FIM국제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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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라마단 금식(Muslim Fasting Month)

 

 이슬람교의 교리 중에 신앙고백, 기도, 금식, 자선 그리고 순례가 있다. 이슬람교를 연구하고 있는 비 무슬림 학자들은 그것들을 일컬어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번호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기둥인 금식과 자선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무슬림은 일년 중 이슬람력(Hegira)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에 금식을 한다. 한달동안 계속되는 금식의 시간은 동트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이다. 병자, 여행자, 임산부, 아기 엄마 그리고 어린아이를 제외한 모든 남녀 무슬림이 그 시간에는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되고 흡연도 삼가 해야 한다. 그 금식을 일명 ‘라마단 금식’이라고 한다.

필자가 사우디에 가서 처음 목격하게 된 라마단 금식은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는 동안 라마단 금식이 봄철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 헤지라(Hegira)의 계산 방식이 음력인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과는 달리 윤달이 없어서 매년 라마단 달이 9일씩 빨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헤지라는 계절에 무관한, 오직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달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년 라마단 달에 15억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금식의 유래는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명상을 하다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게 된 것을 기념하고, 예언자의 고행에 동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이슬람 신학자들은 금식의 12가지 의미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반포하였다.

1. 금식은 사랑의 원칙을 가르쳐 준다. 2. 창조적 희망감과 낙천적 인생관을 갖게 해 준다. 3. 진정한 덕을 심어 준다. 4. 건전한 양심을 배양한다. 5. 인내심과 비 이기심을 고취시킨다. 6. 절제와 의지력의 효과적인 실습이다. 7. 투명한 영혼으로 초월의 경지에 들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여 경쾌한 몸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8. 현명한 저축과 건전한 가게 예산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9. 노련한 적응 기술을 터득시킨다. 10. 심신 단련과 건전한 생존의 기초를 닦아준다. 11. 사회적 귀속, 화합과 형제애, 알라와 법 앞에서 참다운 평등의 정신을 진작시킨다. 12. 자기 안정과 자제,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보존, 승리와 평화를 위한 알라의 처방이다.

 

필자는 이슬람 신학자들이 라마단 금식을 통해서 구도자가 체험하게 될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훈련과 공동체에 미칠 장점들은 언급하고 있으나 매년 행하는 라마단 금식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매년 라마단 금식에 참여하는 사우디 무슬림들에게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마단이 오면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금식에 참여한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음식과 물을 금하고 담배를 피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열심히 모스크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규칙적으로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던 사람이 음식을 금하니 얼마나 배가 고프고 힘이 들겠는가?

특히 현장에서 뜨거운 태양을 온몸에 받으며 중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주로 삼국인들임)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금식기간에 몸이 야위고 건강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에 참여하는 그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알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알라를 기쁘게 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금식한다. 오직 알라를 생각하여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웃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할 때에 박탈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인내한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자신의 정욕을 훈련하고 육체적인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 간다.

그러나 성서적인 관점에서 바라 볼 때 라마단 금식은 바른 금식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금식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저녁(해가 지면서 해가 뜨기 전까지)에 두 세 차례의 식사를 한 후 아침 예배를 드리고 낮에 잠을 자는 식으로 생활 패턴이 바뀐 것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식 기간에 식품이 더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금식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데 라마단 금식은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 기간에는 비 무슬림도 무슬림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신고가 되면 구속이 되고 추방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찰학교를 짓던 공사 현장에서 한 미국인이 라마단 금식 기간에 담배를 피우다가 자기 수하에서 일하던 사우디인이 신고하므로 추방되는 일이 있었다. 셋째, 외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라마단 기간에 많은 현지인이 해외 여행을 한다. 그들은 주로 유럽과 동남아를 여행하며 즐긴다. 그 기간에 각 항공사의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어려운 사실이 이를 묵시적으로 증명해 준다.


축제의 향연

 라마단 금식이 끝나면 그들은 ‘이드’ 축제를 가진다. ‘이드’ 축제는 금식을 무사히 끝낸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향연이다. 3일 동안 계속되는 축제를 위해 집집마다 수양을 잡아 요리(갑싸)를 해 놓고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은 초청하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우애를 다진다. 때로는 외국인을 자기 집에 초청하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현지인과의 이런 유대 관계는 사역에 아주 중요한 교량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나심이라는 동네에서 살 때에 마음씨 착한 30대 초반의 현지인이 앞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부인 둘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었는데, 어느날 필자의 대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그가 큰 고기 덩어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필자에게 건네 주며 ‘이드’ 축제를 위해 잡은 양고기인데 먹으라고 했다. 그가 준 고기는 값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그 선물에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이 배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날 선물 받았던 고기는 냉동고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양고기 요리를 잘하는 유집사님(지금은 한국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음)께 드렸다.

축제 기간에 무슬림들은 연 수입의 2.5%를 구제금으로 사회에 환원을 한다. 이를 자카트(Jacket)라고 한다. 자카트는 종교성을 통해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금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개인이 이웃을 돕기도 한다. 그들의 자카트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이 아니라 의무 사항으로 되어 있다. 무함마드가 자카트를 종교적인 의무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 한국일보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거지가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필자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체류하는 동안 거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다만 라마단 금식이 끝난 후 이드 축제 기간에 구걸을 하는 사람들은 목격한 적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이드 축제 기간에 구걸을 하고 돕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여인들이 차도르를 쓰고 가가호호 방문을 하며 구걸을 하고, 길거리에 좌판을 벌려 놓고 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 여인들은 가난한 과부들과 대부분 성지 순례를 왔다가 사우디에 체류하고 있는 아프리카인 들이라고 알려 지고 있다.

자카트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현지인 인데, 경제 사범으로 장기 복역 중에 있던 한국 사람(무슬림)이 자카트의 혜택을 입고 출옥하여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

무슬림들이 자카트를 죄 사함과 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 수단으로 믿고 행하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기독교인의 금식 기도는 어떠한가? 현대 크리스천들은 금식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문화적인 경향이라고 본다. 현대 문화가 사람들을 편하고, 급하게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한번 클릭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무엇 때문에 금식 기도를 하겠는가? 그들은 물질이 필요하면 하나님보다 먼저 파워 볼 티켓을 생각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영적으로 부패하고 어둡던 시대(중세)에 “금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만약 루터가 지금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면, 물질 문명은 이루었으나 중세기보다 더 영적으로 무질서하고 도덕적으로 타락되어 재난과 질병과 사고가 많은 이 시대에 금식하지 않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장 탄식을 할 것이다.

성경에는 금식에 대한 교훈과 실례가 많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소원과 재난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를 들면, 에스더는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했고(에4:16), 다윗은 병든 아들의 회복을 위해 7일을 금식 기도했으며(삼하12:16-18), 다니엘은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21일을 금식 기도했다(단10:2-3). 그리고 모세는 언약의 돌판을 받기 위해 40일을 금식 기도했고(신9:9),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다(마4:2).

성경은 금식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천명했다(사58:6). 어떻게 금식 기도를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첫째, 금식 기도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금식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소개하셨다(마6:9).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금식 기도의 목적은 영적인 승리여야 한다. 이사야는 금식의 목적을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고 했다. 성도는 매일 매일 영적 전쟁에 직면하며 살고 있다.

성도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 이면에 자신을 억압하고, 넘어뜨리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사탄이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금식 기도하여 영적 권능을 힘입고 강력한 진들을 파하며, 삶 속에서 빛의 영역, 자유의 영역을 넓혀 가야 한다. 셋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사야는 “또 주린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7)라고 했다. 금식 기도를 하면서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공복의 아픔과 박탈의 경험을 통해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이웃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 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금식 기도를 드리는 구도자에게 너무나 귀한 축복들을 약속하셨다(사58:8-11)

금식 기도의 목마름과 갈증을 갖자. 금식 기도를 통해 영성을 회복 받자.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자(고전10:31).

조완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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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슬람교,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슬람은 한국 역사에서 생소한 종교였다.

그러나 역사적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원성왕(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괘릉 옆에 무인석상이 서 있다.

무인석상은 곱슬머리와 곱슬 수염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무슬림의 전통 복장인 터번을 쓰고 있다.

그 모습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스님 혜초가 727년에 쓴 왕오천축국전에 의하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방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통일신라 시대에 이미 중동 사람이나 중앙아시아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도 수도인 개경(오늘날의 개성)에 이슬람 사원 격인 예궁(禮宮)이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이슬람 예배가 진행되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역법에는 이슬람력(Islamic calendar)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조선 세조 때에는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 수출하는 도자기 안료인 회청이 수입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한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일부는 한국 문화 속에 동화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당시 터키 출신 이맘 두 명이 병사들과 함께 건너와 청진학교를 세우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에 교육으로 이슬람을 소개했다. 이들의 노력 덕에 2년 후 한국인 두 명이 무슬림이 되었다. 1955년 이 개종자를 필두로 현재 한국인 무슬림은 5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인 무슬림은 무슬림 국가의 재정 원조를 힘입어, 첫 모스크 서울중앙성원(Seoul Central Masjid)을 이태원에 세웠다. 현재 한국 전역에 모스크 10개와 기도처 40개가 있다.


한국인 무슬림이 점차 늘어나자 사회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전체 통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근 들어 계속 늘고 있다. 게다가 외국인 출신의 무슬림이 한국에 더 들어오고 있다. 2007년까지 한국으로 들어온 외국인 무슬림은 110,000명이었다.
이슬람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가 부족하여, 공장이나 학교에서 무슬림이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한국에 살면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예로 한국 정부의 아시아 프로그램 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무슬림 노동자는 불행히도 연수 훈련지를 돼지 사육 농장으로 배정받았다. 한국 측에서 사육용 돼지를 키우는 일이 무슬림에게는 금지돼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계속적으로 이슬람이 다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약 2만 명의 산업연수생이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다.

그 때부터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한국에는 무슬림이 약 25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약 40만 명에 달한다.

이제 이슬람은 한국에서도 중요한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2050년에는 한국의 이슬람 인구가 300-400만 명이 될 것이며,

이슬람은 불교, 천주교에 이어서 3번째 큰 종교가 되고 기독교는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과거 중동이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이슬람 국가들로 바뀌었고,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유럽이 이슬람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이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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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역사

(1) 선사시대: 민족의 유래   (2) 힌두-불교시대 (BC 1-14세기)  (3) 이슬람의 전래와 말라카왕국

(4)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  (5) 네덜란드의 진출  (6) 영국의 진출과 식민화 과정

 (7) 일본 점령기 (1942-1945)  (8) 전후 영국의 복귀와 독립과정 (1945-1957)

 (9) 말라야 공산당의 준동과 비상사태 선포  (10) 말레이시아 연방 (Federation of Malaysia)의 탄생 

(11) 복합민족 사회의 형성과 1969년 인종폭동 사태
 

1. 선사시대: 민족의 유래

 

동남아는 현대의 중요한 4대 문명, 즉 중국, 인도, 이슬람 그리고 서구문명 등 모든 문화가 공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역이다. 이러한 문화적 패턴은 동남아의 고유전통에 다양성을 더해 주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이러한 유입문화는 토착생활에 접목되어지거나 또는 흡수되어서 동남아시아 특유의 문화적 다양성을 연출하였다.

 

동남아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역에서는 BC 약 100만년전의 사람 두개골 (피테칸트로푸스)이 중부 자바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동남아 지역에 가장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약 2만년전 빙하기 말에 이 지역에서 살았던 구석기 시대인들로 오늘날 필리핀의 네그리토스(Negritos)인과, 사라와크의 뻬난 (Penan), 사바의 룽우스(Rungus)족, 말레이 반도의 산간부족인 오스트라로이드 베도이드 (Australoid Veddoid) 또는 오랑 아슬리인들의 조상들이다. 이들은 키가 작고 곱슬머리로 짐승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최초의 말레이인들이 북으로부터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기원전 약 2500-1000년 사이의 신석기시대로 추정되는데 Proto-Malays라 불리우는 이들은 오늘날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그리고 버마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 당시의 민족이동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약 2-3세기에 걸쳐 또다른 일단의 말레이인들이 중국과 티벳으로부터 말레이 반도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를 관통, 인도네시아 제도 등지로 퍼져나갔는데 이들 후기 말레이인(Deutro-Malays)은 이전의 이주민들보다 앞선 영농기술과 새로운 금속기술을 가져왔다. 이 청동기와 철기문화는 맨처음 청동기가 제조된 흔적이 발견된 베트남의 마을 이름을 따서 동선(Dongson) 문화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 예술형태는 중국의 것과 연관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동선문화기가 시작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인도문화의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중국과 인도문화가 전래하기까지 토착적인 동남아의 문화적 특징은 이미 구체화되어 있었다. 기술면에서 이들 주민은 논에 물을 댈 줄 알았고, 짐승을 길들였으며, 야금술을 터득했고, 계절풍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항해술을 익혔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모계중심의 전통에 따라 자손의 혈통과 상속을 책임지는 여성이 사회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촌락들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원주민은 이들 프로토 말레이와 듀트로 말레이인의 후손, 오랑 아슬리 등을 통칭하여 부미뿌뜨라(Bumi Putera)라 칭하고 있다.

 

2. 힌두-불교시대 (BC 1 - 14세기)

 

말레이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새로운 역사발전은 BC 1세기경 이 지역과 중국 및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와의 정규적 교역활동이 개시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하여 해상무역의 교차로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관심을 기울여서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이 서로 경쟁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였다. 동서교역이 활발하던 이 시기에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지역에서 일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지만 서기 7세기 이전까지는 이 지역에서 말레이족을 중심으로한 본격적인 정치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 불교왕국 스리비자야의 등장

 

말레이족에 의한 본격적인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7세기부터로 중국의 역사기록과 이 지역에서 나오는 비문 등의 자료에 의하면, 수마트라 남부지역에서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무역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스리비자야 (Srivijaya)가 7세기에 가장 영향력있는 고대국가로 등장하였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7세기 말부터 약 600년 동안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그리고 서부 쟈바와 서부 칼리만탄 일부에 걸쳐서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전략요충인 순다와 말라카 해협을 지배한 스리비자야는 상업상의 우월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구들을 건설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무역선들로부터 통행세를 거두었다. 한편 스리비자야는 중국에 대해서는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서기 670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사절을 보냈으며 이같은 사절의 파견은 그후 76년간 계속되었다.

스리비자야는 대승불교 왕국이었다. 중국의 불교도 이칭 (Iching)이 672년 한 페르시아의 배를 타고 Palembang에 도착하였다. 그는 인도로 가기 전에 범어를 공부하기 위하여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스리비자야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의하면 스리비자야에는 천명의 대승불교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 말레이 반도 북부의 Ligor에 775년 범어로 세워진 비문에는 대승불교 사원을 세운 스리비자야 왕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어 스리비자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한편, 서기 750년경 대승불교는 자바에 나타난 사일렌드라 (Silendra) 왕조의 보호아래 한동안 중부 자바에 전파되었으나 곧 힌두교로 대체되고 말았다. 당시 열렬한 불교사찰 건설자인 사일렌드라 왕에 의해 772년 세워진 것이 Borobudur 사원이다. 보로부드르란 발음하기 힘든 부미삼바라부다하라 (Bhumisambarabhudhara)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보살의 10계단 위에 선을 쌓은 산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산위에 만든 9단의 거대한 사리탑으로 둘레가 3마일이나 되는 원형 회랑과 4백개의 불상을 가지고 있다. 엷게 양각된 조각들은 신성한 대승불교의 경전내용과 세속 자바인들의 생활, 관습 등을 설명해주고 있다. 공격적 성향의 사일렌드라인들은 앙코르, 안남 등과 싸웠으며 850년경 결혼동맹을 통하여 스리비자야와 통합하였다.

 

(나) 스리비자야의 쇠퇴: 스리비자야는 11세기 초, 동남아시아 및 중국과의 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남인도의 촐라(Chola)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었다. 촐라국은 1011년 스리비자야 지배하에 있던 주요 무역항을 공격하였고 스리비자야의 가신국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에 13세기 들어 스리비자야가 크게 쇠퇴하면서 당시까지 스리비자야의 영향권하에 있던 말레이 반도는 태국의 소승불교 왕국 영향권하로 편입되었으며 보르네오는 자바의 힌두왕국인 Majapahit에 의해 지배되었다. 스리비자야는 1377년 마자빠힛 왕국에 의해 멸망된다. 스리비자야는 끝까지 수마트라에 거점을 두었으며, 이때까지 말레이 반도에 거점을 둔 왕국은 없었다. 즉, 힌두-불교시대 (스리비자야 왕국부터 15세기 초 이슬람 왕국 설립전까지)의 대부분 기간동안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거주민들은 자바나 수마트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다) 힌두-불교문화의 마자빠힛(Majapahit) 왕조

 

자바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고대왕국인 Majapahit 왕국은 1294년부터 포르투갈이 향료섬에 들어온 1520년까지 2세기 이상 존속되었다. 마자빠힛 왕국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전 지역, 칼리만탄의 거의 대부분과 동부 쟈바에 걸쳐 거대한 속국을 거느린 대왕국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1330-1364년 사이 재임했던 가자마다(Gaja Mada) 재상으로 인도네시아 최초의 제국건설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당시 하얌 울룩(Hayam Wuluk) 왕과 함께 해양 동남아의 대부분에 대해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당시 마자빠힛의 영토는 말레이 반도와 1377년 멸망한 스리비자야를 포함한 수마트라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이 죽은후 왕국이 분열하기 시작,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영토가 줄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때 새로운 정치와 종교세력들이 나타났다. 아유타야 (Ayuthia)는 남쪽으로 세력을 뻗어오고 중국인들은 교역권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슬람의 출현이었다. 이후 오랜 기간동안에 걸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이슬람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마자빠힛 왕국은 힌두의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교역권도 상실하게 되었다. 정치의 중심은 다시 말라카 해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마트라쪽이 아니라 말레이 반도의 서쪽 해안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3. 이슬람의 전래와 말라카 왕국

 

이슬람인들은 인도에서 북부 수마트라를 경유해서 말라야에 왔다. 1292년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돌아가던 마르코폴로는 북부 수마트라에서 2개의 이슬람 공동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말라야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트렝가누(Trengganu) 강의 동북쪽 해안에서 발견된 돌조각에서이다. 아랍어로 새겨져 있는 이 돌은 1326년-138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바섬 전체가 훗날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자바 지역에 광범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말라카 왕국을 통해서였는데 말라카 왕국은 말레이 반도에 거주하는 말레이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15세기 중엽까지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 소국가들과 수마트라 동부 연안의 전역을 그 세력권 하에 두었다.


 

(가) 말라카 왕국의 건설

 

스리비자야가 마자빠힛 왕국에 속국으로 전락한 후 스리비자야 왕국의 한 왕자였던 빠라메스와라 (Parameswara)가 빨렘방으로부터 말라카로 건너와서 1403년 이 지역을 근거지로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를 계기로 말레이 반도에의 역사시대가 개시되는데 빠라메스와라의 이복동생인 무자파르 샤(Muzaffar Shah)는 이슬람을 국교화하여 서아시아 및 인도 방면의 부유한 이슬람 상인을 끌어들여 말라카 항의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한편 빠라메스와라는 말라카 해협을 경유하는 모든 선박이 말라카를 거쳐갈 수 있도록 동 지역을 국제 항구도시로 육성해 나갔다. 말라카국은 동서 해상교통로의 요충인 말라카 해협 중심지를 독점지배하고 말라카 항을 적극 활용하여 인도와 페르시아, 시리아를 거쳐 동 아프리카 연안과 지중해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통상범위를 확보하였으며 이 무역망을 통하여 각종 생산품들을 세계 전역으로 교역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말라카는 세계통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스리비자야의 유산을 계승하게 되었다. 말라카 왕국은 15, 16세기에 번영기를 맞았으며 당시 인근 지역을 직할지, 속령, 조공국으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초기부터 말라카 왕국의 주요 위협세력은 씨얌(Siam)족이었다. 그러나 말라카는 1405년 이래로 명나라의 보호를 받았고, 자주 명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건국이래 말라카 왕국은 계속해서 각종 사절단을 북경에 보냈다.

 

말라카 왕국의 번영은 현명한 통치자들이 천연의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하여 국제무역의 공동체를 창출해냄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의 번영은 멀리 동방의 나라로부터 간접무역에 의해 수입되는 고급향료와 양질의 열대작물에 매료되어 있던 유럽열강들로 하여금 말라카와 직접 접촉에 나서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포르투갈의 식민통치자들은 이로써 말라카 왕국의 정복이 새로운 국제무역망을 창출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서구열강은 앞을 다투어 커피, 차, 담배, 사탕수수 등 양질의 열대작물의 보고인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제도를 정복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이곳의 각종 향료와 열대작물은 말라카 왕국이 장악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망을 통해 서구의 여러나라로 흘러들어갔다.

 

향료는 유럽인들에게 대단히 필요한 상품이었다. 유럽에서는 겨울 동안 많은 수의 가축을 생존시킬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가축이 도살되었고 그 고기의 선도를 유지할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소금과 향료가 이용되었고, 수입한 향료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동북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후추였다. 오랫동안 맛없는 음식에 길들여져 온 유럽인들에게 말루꾸(Maluku) 군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육두구는 실로 훌륭한 향취와 음식의 맛을 일깨워 주었다. 더구나 정향과 육두구가 향료의 역할뿐만 아니라 탁월한 약재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육두구는 특히 두뇌를 강화시키고 기억을 명료하게 하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동시에 몸을 따뜻하게 보해주는 다용도의 신비한 향료였다.

 

각종 향료와 양질의 열대작물은 초기에 아랍의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서 서구로 운반되었다. 일찍이 카이로에서 말루꾸까지 해로를 개척했던 이들은 말루꾸에서 정향과 육두구를 구입하고, 쟈바 서북부의 반땀(Bantam)에서 후추를 샀으며, 기타의 열대작물은 주로 이방인인 중개상들로부터 구입하는 절차를 거쳤다. 아랍상인들은 향료제도에서 사들인 향료와 열대작물을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까지 운반하였다.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망을 손에 넣음으로써 막대한 동양의 부를 한꺼번에 장악할 목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포르투갈이 서구 열강중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 군도로 내도하게 된다.

 

(나) 이슬람 시대의 개막과 말라카의 쇠망

 

말라카 왕국은 이 지역에서 힌두-불교 시대의 막을 내리고 이슬람 시대의 시작을 가져왔다. 이슬람은 아랍 및 인도상인과의 교역과정에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말라카 왕국은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무역을 통해 말레이어를 상업용어로 각지에 전해 오늘날의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모태가 되도록 하였다. 이슬람교는 말라카로부터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말레이 소국가들로 전파되었고, 교역로를 따라 인도네시아 군도로까지 전해졌다. 이슬람교는 말레이인의 주요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그들의 생활양식과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 왕국은 말레이 술탄 상속체계의 미확립, 식량 등 생필품의 대 자바의존, 지배계급과 민중사이를 연결하는 완충계급 부재 등의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1511년 포르투갈의 공격을 당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침공하여 말라카시를 점령하면서 말라야는 포르투갈과, 그때까지 말라카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체왕국, 부기스, 미낭까바우족의 활동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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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세기의 오스만  제국군

 

13세기 말 몽골에 위협을 피해 소아시아에 정착한 투르코만 족은 오스만 1세가 비잔틴 국경지대의 8개의 성과 에스키세히르, 예니세히르를 점령하면서 오스만 공국을 건국했다.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세르비아, 불가리아, 타타르 족의 침공, 대 카탈로니아 용병단의 반란으로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을 약탈, 점령하면서 성장한 오스만 공국은 바야지드 1세(1389~1402년)가 1389년 세르비아 동맹국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속국으로 만듦과 동시에 술탄 자리에 올라 제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전의 오스만의 군주들은 대공(Emir)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바야자드 1세 아래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헝가리와 부르고뉴의 연합군을 제압하고(1396년)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진군했으나, 1402년 14만의 병력을 이끌고 서진해 온 몽골의 후예 티무르에게 바야자드 1세가 이끄는 8만 5천명의 오스만 투르크 군이 앙카라에서 패배하고, 이어 바야자드 1세가 티무르 군에 사로잡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141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술탄이 된 마호멧 1세(1413~1421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재건했고 무라드 2세(1421~1451년)는 정복전쟁을 다시 재개해 1444년 코소보에서 그가 이끄는 5~6만 명의 오스만 군이 2만 4천명의 유럽연합군을 철저하게 패배시켜 콘스탄티노플을 고립시켰다. 정복자 메멧 2세(1451~1481년)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683년 비에나 공성전이 패배로 끝날 때까지 유럽의 최대위협세력으로 남는다.

전성기의 오스만 군대는 둔전병인 지방 기병대 시파히와 예나체리를 포함하는 술탄의 군대 카피쿨루 군단이 핵심을 이루었다. 이 외에 지원병인 아자프가 전쟁 중 보병으로 참전하고, 여러 속국에서 병력을 지원했다. 전통적인 오스만 투르크 군의 전술은 경기병인 아키닉스가 전초부대로써 정찰, 기습, 유인 등의 임무를 맡고, 아자프는 그 뒤에서 화살로 적군을 약화시키는 임무를, 예나체리는 중앙에 배치돼 참호와 목책, 낙타, 포병대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군의 중앙과 술탄을 보호하는 임무를, 지방 기병대인 시파히는 양쪽 날개에 배치돼 적군이 아군의 중앙으로 돌파를 시도하면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강습해 적군을 괴멸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술탄의 친위 기병대인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시파이의 뒤에 배치돼 필요하면 전장에 투입됐고, 타타르와 세르비아의 기병대를 진영 뒤에 숨겨 갑자기 적군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15~16세기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대부분의 전쟁에는 2만~4만 명의 전투병을, 대규모 원정에는 6~8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최대 16만 명 정도의 병력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1.술탄의 군대. 카피쿨루 군단:


원래 술탄의 노예로 이루어진 술탄의 친위대였던 카피쿨루는 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추가시켜 술탄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카피쿨루 군단은 술탄의 기병대인 카푸쿨루 수바릴레이(Qapukulu Suvarilei, 궁정 기병대)와 정예 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주력으로 하고, 귀족 및 지방 유력자의 자제들로 구성된 술탄의 호위기병대 무테페리카, 포병대와 공병대가 포함돼 있었다. 15세기 초반까지는 그리스도 교 출신의 전쟁포로들이 카피쿨루의 핵심을 이루었지만 1438년부터는 그리스도 교인의 자식들을 강제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정착됐다. 데브시르베 제도는 그리스도 교 40가구 중 1명의 아이를 강제 징집시켜 1년에 1000~3000명을 뽑았는데 주로 농촌지역의 그리스도 교 가정에서 8~15세의 아이들이 징집됐으며, 도시지역이나 해안가, 아들이 1명만 있는 가정, 유태인, 광부, 전략적 요충지의 주민 등은 강제 징집대상에서 제외됐다. 14~18세기 동안 술탄들은 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점차 카피쿨루 군단의 병력을 늘였다. 메멧 2세(1451~1481년) 치하에서는 카피쿨루 군단 내의 예나체리 병력을 1만 2천명 선으로 늘리고(메멧 2세 초기에는 3000명의 카푸쿨루 슈발레이와 6000명의 예나체리가 존재) 술래이만 1세(1520~1566년)은 카피쿨루 군단의 병력을 4만 8천명으로 증가시켰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술탄은 광대해진 제국을 통제하기 위해 예나체리를 주요지역에 주둔시켰는데, 지방에 정착한 예나체리들은 술탄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그 지방의 유지들과 유착하게 되는 폐해를 낳게 된다.


가. 술탄의 엘리트 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Qapukulu Suvarilei, 궁정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술탄의 친위 기병대로 중무장을 한 기병대였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술탄의 보병대인 예나체리 보다 군사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으며, 예나체리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강제 징집된 그리스도 교 아이들 중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시동(ic oglani)으로 뽑혀 토프카프 궁전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시파히(지방 기병대)의 집으로 보내져 터키어와 이슬람교를 배우면서 예나체리로 키워졌다. 시동으로 뽑힌 아이들은 궁전학교에서 2~7년 동안 백인 환관장(Kapi Agasi)의 관할 하에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궁전학교에 들어온 시동은 먼저 이슬람교에 관해 배우고 교수(Hocas) 아래서 일반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재능에 따라서 정치, 종교, 혹은 군사에 대해 교육받았다. 이들은 터키어, 페르시아어, 아랍문학, 마상술, 창술, 궁술, 레슬링, 체육, 음악 등을 배웠다. 궁전학교에서는 시동들을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예절이 바르며,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인재로 키웠다. 교육이 끝나면 시험을 쳐 시동들 중 가장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술탄의 궁전에 들어가 관리로써의 길을 걷고 나머지는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의 장교나 일반기병이 됐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6개의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가장 먼저 창설된 연대는 좌 용병연대(Ulufeciyan-i yesar), 우 용병연대(Ulifeciyan-i yemin), 좌 외인연대(Guerba-i yemin), 우 외인연대(Guerba-o yesar)로 이 4개의 연대가 궁정기병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나머지 2개의 연대는 무사연대(silahtar), 와 종자연대(sipahi oglan)로 이들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 내에서도 엘리트로 여겨지는 연대였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당시에는 2500명가량의 카푸쿨루 수바릴레이가 있었으나, 16세기 말에는 그 수가 6000명 남짓으로 늘어났다.
각 연대는 ‘케투다 예리’가 지휘했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에는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 예나체리, 아랍인, 페르시아인, 쿠르드 이슬람교인 이 편입되기도 했다.


나. 예나체리:

술탄의 정예 보병대. 14세기 중반 무라드 1세가 오스만 투르크 최초의 정규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창설했다. 예나체리가 창설될 무렵에는 1000명 남짓의 예나체리가 있었으나, 점차 그 숫자가 늘어 15세기 중반에는 1만 여명 술래이만 1세(1520~1566년)치하에서는 2만 명의 예나체리가 있었다. 예나체리는 공성부대만이 철갑옷을 걸치고, 대부분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15~16세기의 예나체리는 합성궁을 주 무장으로 애용했으나, 15세기 중반부터 총을 도입하기 시작해서 16세기 말에 이르면 대부분의 예나체리가 머스켓 총으로 무장했다. 예나체리는 거의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훈련받았으며, 서유럽의 집단사격전술과는 달리 예나체리는 개개인의 사격능력에 의존하는 전술을 썼다. 예나체리는 능숙한 사수로 이름이 높아서 달이 뜬 밤에도 총으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강제 징집돼온 그리스도교 아이들 중 시동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외국인아이(Acemi Oglan)로 분류돼 예나체리로 키워졌다. 이들은 맨 처음 시파히의 가정이나, 귀족의 가정, 항구, 궁전주방에서 5~7년간 하인으로 일하면서 이슬람교와 터키어를 배우고,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대부분은 훈련대(Acemi Oack)에 입대해 수학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예나체리의 엘리트 사단인 보스탄시(Bostanci, 정원사)사단에 바로 입대하거나, 제독부에 입대했다. 혹은 지원부대인 병기부(Ortas Cebeci), 포병대(Topcu), 대포 수송대(Top Arabaci)에 편입되기도 했다. 16세기 말부터 예나체리의 아들이나 이슬람교 자유민 이 예나체리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그리스도교 아이들을 강제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붕괴됐다.

예나체리는 3개 사단 196개 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예나체리의 주요 3개 사단은 세마아트(Cemaat, 집회)사단, 볼루크(boluk, )사단, 세그멘(Segmen, 사냥꾼)사단이었다. 세마아트 사단은 예나체리 사단 중 가장 규모가 큰 사단으로 101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는데, 술탄의 호위대인 왼손잡이 연대(Solak ortas)와 술탄의 70개의 영지와 이스탄불의 해안방어를 담당하는 엘리트 사단인 정원사 사단(Bostanci)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마아트 사단의 예나체리는 새로 점령한 지역에 주둔하기도 했다. 볼루크 사단은 예나체리 사단 중 두 번째로 큰 사단으로 61개의 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볼루크 사단에는 예나체리 사령관의 호위대 및 이스탄불의 성문을 지키는 주둔군이 포함돼 있었다. 세그멘 사단은 34개의 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예나체리 총사령관(Yeniceri Agas)은 예나체리 출신으로 궁전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 중에 선발됐다. 예나체리 총사령관의 권한은 막강해서 술탄이나 술탄이 임명한 전군 총사령관만이 예나체리 총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예나체리 총사령관 이외에 예나체리의 사령부에 속한 장군들은: 세마아트 사단 사령관(Kul Kahyast)과 세크멘 사단 사령관(Sekbanbasi), 이스탄불의 주둔군과 예나체리 훈련대를 관할하는 이스탄불 사령관(Istanbul Agasi), 수석 시종장(Ocak Imami), 재무장(Beythulmalci), 징집장(Muhzir Aga), 술탄의 궁전에서 예나체리 총사령관을 대표한 사령관대리(Kahya Yeri), 예나체리의 훈련을 총괄한 훈련대장(Talimhanecibasi), 예나체리의 처벌과 사형을 담당한 감옥소장(Azar Basi), 예나체리의 행정업무를 총괄한 서기관(Yeniceri Katibi) 등이 있었다.

예나체리의 기본부대 단위는 100~3000명으로 구성된 연대(Orta)로 코르바시(Corbaci, 국 만드는 사람)가 연대를 지휘하고, 아스시 우스타(Asci Usta, 주방장)가 부연대장을, 아스시(Asci, 요리사)여러 명이 아스시 우스타를 보조했다. 그 아래로는 하사관을 맡은 전령(Cavus)과 기수(Bayraktar)가 병사들을 지휘했다. 병사들은 경력에 따라서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신입병(Eskinci)이 가장 아래계급이고, 전공을 세운 병사는 고참병(Eskinci)으로 승진했다. 병사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은 연금병(Oturak)으로 이 계급에 오르면 결혼이 허가되고, 민간인 직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연금병은 대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다. 포병대와 지원부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세기 말 대포를 도입해, 메메드 1세와 무라드 2세 치하에서 상당한 규모의 포병대를 보유했다. 1440년에는 오스만 군도 서서히 야전포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거대한 공성포는 142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15세기 중반에는 450kg 의 포탄을 1마일 가량 날릴 수 있는 대포가 등장했다. 15세기 중반의 오스만 군이 보유한 대포는 200~300문 정도였다. 15세기 중반의 공성포는 하루에 10발 정도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오스만의 포병대는 서유럽의 검은색 연기가 나는 화약보다 우수한 흰색 연기가 나는 화약을 사용했다. 오스만 군의 포병대는 공격하기 바로 전에 다수의 대포가 차례대로 대포를 쏘고, 대포를 장전할 때는 엄폐물 뒤에 숨어 자신을 보호했다. 그 다음에는 중간 크기의 대포가 적군의 요새를 약화시키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공성포가 적의 요새에 결정타를 가하는 방식으로 포격을 가했다. 오스만의 대포는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높이거나 낮추어서 대포의 사정거리를 조정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오스만 군은 포도탄(일종의 산탄)과 폭죽 등을 대포에 쓰기 시작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의 포병은 대부분 중앙군 카피쿨루 군단에 속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이후 메멧 1세는 카피쿨루 군단의 포병대를 포병연대(topcu ocagi)와 대포의 수송임무를 맡는 수송연대(top arabacilari)로 나누었다. 1575년 카피쿨루 군단의 포병연대의 포수는 1000명 정도였고, 17세기 말에 이르면 포수의 숫자는 50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포병대를 보조하는 부대는 구포부대 , 수류탄부대, 땅굴부대, 폭탄부대를 포함하고 있었던 야전공병연대(humbaracilar), 와 공성공병연대(lagimcilar)가 있었다. 이 중 야전공병연대는 구포(곡사포)와 유리나 쇠로 만든 폭탄, 유리나 청동으로 만든 수류탄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공성공병연대는 군대 내의 노동자들을 통제했고, 공성 시에는 땅굴을 파고 폭약을 성벽이나 성문에 폭약을 설치하거나, 참호를 만드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이 밖에 카피쿨루 군단에 속한 지원부대는 병기부대(Cebecis), 물 배급부대(Saka), 장인부대(Karhane)가 있었다. 병기부대는 600여명의 기술자가 무기의 수리, 무기의 보급 등의 임무를 맡았다. 물 배급부대는 카피쿨루 군단의 의무병으로 전투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옮기거나, 부상자를 돌보는 일을 했다. 장인부대는 34개의 중대로 이루어진 기술자 부대로 검 제작공, 양털 제작자, 초장이, 화살 제작자, 포목상, 편자 제작공, 비단공, 약사, 구리 제작자, 주석 제작공, 빵 만드는 사람, 약사, 신발공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2.봉건기병 시파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봉건기병. 오스만 군에서는 봉건기병 시파히가 군의 주력병력이었다. 15~16세기에는 4만 명 안팎의 시파히가 전쟁에 참가했다. 시파히는 보통 중무장을 했으나, 중앙군의 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에 비하면 가벼운 무장을 했다. 시파히는 보통 체인메일에 주요부분을 철판으로 덧댄 메일 플레이트 갑옷, 화살, 창, 방패, 칼 등으로 무장했고, 보조 무기로는 메이스를 애용했다. 서유럽의 기사처럼 영지 티마르(timar)가 내려져 기병으로써의 무장을 갖추게 했으나, 서유럽의 기사와는 달리 시파히에게는 자신의 영지에 제한된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시파히는 자신의 땅을 직접 경작해야 했고, 자기 영지 주변의 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했으며, 국가에서는 시파히에게 봉급을 주지 않았다.

시파히는 소아시아 혹은 유럽지역에 정착했는데, 시파히가 하사받은 영지는 연간 수입 750에스퍼(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은화)에서 2만 에스퍼 사이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시파히는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의 일부와 영지에서 나오는 농산물 중 5분의 1~3분의 1 정도를 받았다. 영지의 규모에 따라 각 시파히는 일정한 숫자의 기병을 데리고 참전해야 했는데 연간수입 1500~3000에스퍼(소아시아 지역) 혹은 6000 에스퍼 (유럽지방)이상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시파히는 잘 무장한 기병인 종자와 경무장을 한 노예기병 한 명씩을 거느리고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부유한 영지를 가진 시파히는 15명의 기병을 이끌고 참전했고, 최대 50명의 기병을 이끌고 참전하는 시파히도 있었다.

전쟁에 참가하는 시파히는 1000명의 기병을 지휘하는 점호장(alay bey)밑에 편입됐다. 점호장은 시파히 중 가장 높은 계급으로 각 속주의 기병을 소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점호장 밑에는 기수(beyrak-dar)와 수위장(cavus) 점호장을 보좌했다. 한 속주에서는 보통 1000~3000명의 시파히를 소집할 수 있었는데 각 속주의 총독(sancak bey)은 휘하에 1~3명의 점호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총독은 20명 이상의 시파히로 구성된 친위대를 데리고 다녔으며, 속주의 행정업무와 군사를 총괄했다. 이와 더불어 총독은 각 주요도시에 경찰총장(subashis)을 임명했다. 경찰총장은 전시에는 100~수백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100명을 지휘하는 사람은 중대장(ceri-bashi)로 주로 부유한 영지를 가진 시파히가 중대장을 맡았다. 중대장 아래로는 10명을 지휘하는 십장(ceri-surucus)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시파히 10명 중 1명이 후방에 남아 세금징수를 하고 영지의 방어를 맡았다.


3. 속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속국들은 오스만 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초기인 14~15세기에는 오스만 군중 속국의 병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오스만 제국 의 속국 대부분은 주요도시가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한 다음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속국 귀족의 자제들이나 터키 귀족의 자제들은 술탄의 호위 기병대인 무테페리카(Muteferrika)에 소속돼 오스만 제국식의 교육을 받으면서 인질의 역할을 했다. 발칸 반도의 여러 기독교 속국들은 그리스도 교 5~10가구에 1명의 기독교 중장보병 보이누크(voynuk)를 제공했다. 속국의 중장기병은 기독교 군주가 자신의 직할부대를 제공하거나, 오스만 제국에서 면세를 받거나 영지를 하사받은 이들이 중장기병으로 참전했다. 기독교 속국에서는 최대 5만 명의 병력차출이 가능했다.

크림 칸국의 타타르 족은 궁기병을 오스만 제국에 제공했다. 대부분의 타타르 부족민은 가난했기 때문에 대게 보병으로 참전했다. 타타르 족의 칸은 칸의 직할지에서 뽑은 20개 중대의 말탄 총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칸의 직할부대 이외에 타타르 족 귀족들의 병력이 타타르 군의 다수를 차지했다. 코사크 인은 4개의 바퀴가 달린 무거운 마차를 연결해 요새를 만들고 그 위에 가벼운 대포와 총병을 배치하는 야전요새를 애용했다. 코사크 인은 전투용 카누를 이용해서 우크라이나 의 강을 지배했다. 동부 소아시아의 쿠르드 족은 1514년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돼 기병을 제공했다.

중동의 속국들은 대부분 자국의 방위목적 이외에는 오스만 제국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대부분 중동의 속국들은 반독립 상태를 유지해 소수의 예나체리를 제외하고는 오스만 제국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속국은 또한 무기를 만드는 자원을 제공했다. 세르비아에서는 대포를 제작해 오스만 제국에 상납하고, 몰도비아,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에서는 머스켓 총을 만드는 나무, 짐말, 주석, 초석, 밧줄등을 오스만 제국군에 상납했고, 쿠르드 족, 이라크, 레바논에서는 심지, 유황, 초석 등을 오스만 제국군에 상납했다.


4.비정규군:

오스만 군의 비정규군은 크게 보병 지원병인 아자브(azab, 젊은 남자), 적군 영토를 약탈하는 목적으로 쓰인 경기병 아킨지스(akinjis, 약탈자), 각 지방의 방위를 책임지는 각종 경비대 등으로 나뉘었다.

아자브는 전쟁기간 동안 보병으로 지원한 병사들로, 전쟁이 끝나면 언제든지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최대 4만 명의 아자브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자브는 주로 활로 무장을 했고, 칼을 갖고 있거나 막대기로 무장한 아자브도 있었다. 아자브는 아군이 전투 진형을 짜기까지 화살로 적군을 묶어두는 임무를 맡았다. 원래 아자브는 전쟁중에만 봉급을 받았으나, 14세기말에는 항상 봉급을 받으면서 요새에 주둔하는 아자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는 국경지방의 속주에 사는 모든 이슬람교인이 주둔군 아자브나 해군 아자브로 징집될 수 있었다. 베야지드 2세 치하에서 국경지방의 20~30가구의 주민들이 한 명의 아자브를 지원하는 제도가 정착됐다.

아킨지스는 원래 투르크 족의 전사 출신으로 이루어졌던 궁기병 부대로 1362년부터 국경지방의 주요 전략 요충지에 배치돼 적국의 영토를 약탈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 중에 아킨지스는 본대보다 먼저 적군의 영토에 진출해 적국 영토의 약탈, 적군의 통신망 교란, 정찰, 주요도로 확보 의 임무를 맡았다. 평상시에는 적국의 약탈로부터 국경지방을 방위했다. 아킨지스는 점령이 어려운 산악지대에 투입되거나, 점령이 어려울 경우, 반란군이나 적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아킨지스는 투르크의 족장들이 지휘했고, 아킨지스는 족장에게 봉급을 받거나, 약탈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최대 3만 명가량의 아킨지스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킨지스는 10단위로 구성돼 있었고(10명, 100명, 1000명),보통 2마리의 말을 끌고 다녔다. 아킨지스는 창과 활, 세이버로 무장했다.

오스만 제국에는 아자브와 아킨지스 외에 각 지역을 방위하는 비정규군이 존재했다. 고눌루얀(gonulluyan, 지원병)은 각 지방에서 주요도로의 순찰과 요새의 방위를 맡은 지원병으로 기병과 보병을 소유하고 있었다. 마르톨로(martolo)는 발칸 반도에서 세금을 면제받으면서 지방군으로 주둔한 부대였다. 고눌루얀과 마르톨로는 대게 소규모로 수백명 이하의 병사들이 지방의 경비 군으로 활약했다. 마르콜로와 고눌루얀 중 일부분은 갑옷을 착용했으며, 창, 칼, 방패, 총 등의 무기로 무장했다.


5. 해군:

오스만의 해군은 동지중해의 사라센과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백 년간 오스만은 이탈리아 및 서지중해 국가들과 비슷한 형태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스만 해군의 주요임무는 육군을 수송하고 가능하면 해안포격으로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스만 해군은 제국의 방대한 해안선을 방어하고, 기독교 해적의 안식처였던 지중해 여러 섬을 장악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세기 초반 카라시 공국과 다르나넬 공국을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 출신의 선원과 투르크 전사들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해군을 창설했다. 15세기 중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동지중해에서 베네치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다. 1470년 오스만 해군은 92척의 겔리 선을 보유해 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15세기 말에 이르면 오스만 해군에 소속된 배는 500척에 육박했다. 1499~1502년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60척의 3단 겔리 선, 30척의 푸스타에 선, 3척의 대형 겔리선, 2척의 대형 카락선, 18척의 소형범선, 보급선 127척에 총 선원 수 3만 7천명을 동원했다. 오스만이 베네치아와의 전쟁에 참가시킨 2척의 대형 카락은 1080톤에, 2층 갑판, 탑승인원 1000명의 대형선이었다.

오스만은 1421~1430년 경 해전에 대포를 도입해 15세기 베네치아 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배들이 그들의 배보다 더 낳은 대포로 무장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겔리 선은 대형포로 무장하고 소형 노선인 푸스타에 선은 다수의 소형포를 장착했다. 오스만 해군은 화약무기를 도입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함선으로 홍해와 아라비아 만, 인도양의 재해 권을 장악하고, 포루투갈와 에디오피아의 해군을 견제할 수 있었다. 1511년 오스만 제국은 홍해함대를 현대화했고, 1525년에는 수에즈에 1530년에는 아라비아 만의 바르사에 해군기지와 조선소를 건설했다. 이어 알제리와 튀니스를 합병해 오스만의 해군은 서유럽을 위협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지중해 함대는 북 아프리카 함대, 이집트 함대, 에개해 함대가 포함돼 있었다.

오스만의 해군은 오스만의 해양 속주에서 지원했다. 겔리 선의 선원들은 그리스, 알바니아,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터키 해안가에서 징병됐다. 겔리 선의 노 젓는 사람들은 전쟁포로나 범죄자가 주를 이루었다. 이외에도 범선을 전문으로 하는 선원들은 칼욘실러(kalyonciler, 갈레온 선원)라고 불렸다. 15세기의 오스만 해군은 선박 수에서 서유럽을 압도했고, 강력한 함선과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선원의 질이 서유럽보다 떨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강에서 활약하는 함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다뉴브 함대는 60~200척의 소형선을 보유하고 다뷰브 강에서 병력수송, 대포운반, 육군의 지원 등의 임무를 맡았다. 모라바 함대는 80~100척의 겔리선, 겔리엇, 보트로 기병과 보병을 수송했다. 300명의 상비군이 항상 모라바 함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6. 전략, 전술:

오스만 제국은 많은 정복전쟁을 치루면서 점차 계획적이고, 유연한 전략을 수립해갔다. 전쟁은 그 전 해의 10월~11월에 계획을 시작해서 다음 해 8~9월에 전쟁을 시작했다. 군 사령부는 이전 전투의 기록과 옛 군인들의 목격담을 조사하고, 막대한 양의 보급품을 준비했다. 지방군의 동원령은 12월에 내려져 동원령을 받은 지방군은 이스탄불, 베오그라드, 코르틴 등의 도시에 집결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술탄의 깃발이나 재상의 깃발이 토프카피 궁전에 세워졌다. 진군로에 있는 도로와 다리는 수리되고 다리가 없는 강에는 다수의 거룻배를 띄워 다리를 대신했다. 오스만 군은 해질 때 행군을 시작해 정오에 야영지를 세웠다. 행군 중에는 먼저 경기병대가 정찰을 하고 중무장한 엘리트 기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기병대의 뒤로 보병대와 기술자 부대가 따르고 부대의 측면과 후위는 기병대가 보호했다.

오스만 군은 보병이 중앙을 방어하는 동안 기병이 적군의 측면이나 후방을 강습해 섬멸하는 방어적인 전술을 애용했다. 16세기 초 오스만 군은 경기병대가 적군을 아군의 보병대 앞으로 유인해 오면 아자프와 예나체리, 포병대가 적군을 사격하고 기병대가 적군의 측면을 돌파하는 전술을 썼다. 예나체리의 전술은 일단 적군을 사격하고 쐐기꼴의 진형을 이루어 적군에게 돌격하는 방식을 썼는데, 당시 예나체리의 돌격은 무적으로 알려졌다.

오스만 군은 전투마차를 야전요새로 애용했는데, 각 마차는 2마리의 노새가 끌고 각 마차에는 총병과 작은 대포가 배치됐다. 마차의 밑에는 탄약상자를 넣고 필요하면 마차 여러 대를 체인으로 연결해 야전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오스만 군이 공성전을 치룰 때는 궁병과 총병이 성을 향해 사격을 가해 적군이 성 뒤에 숨게 함과 동시에 사다리 부대가 성벽으로 접근했다. 장기간의 공성전을 치룰 때는 깊은 참호를 파 계속 성벽 쪽으로 서서히 전진하고 30~100명의 지원자로 이루어진 각 공성부대가 제한된 임무(가령, 성문 밑에 폭약을 설치한다던가)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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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지역 베두윈(유목민)의 생활과 문화

 

우리가 중동하면 떠올리는 친근한 풍경은 양이나 염소를 몰며 사막을 오가는 유목민 무리의 모습이다. 현대에 들어와 그 비율이 감소하고는 있지만 유목은 전통적으로 중동 지역의 대표적인 삶의 방식이며 이 지역 문화의 모태였다. 건조한 사막 기후라는 자연 환경의 여건상 중동인들은 옛부터 유목을 생업의 하나로 삼아 왔으며 이에 따라 오늘날 그들, 특히 아랍인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은 유목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동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관찰은 국제정치·경제 등 각 방면에서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 지역 주민들의 의식구조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세기 동안 중동 사회는 세가지 유형의 공동체 즉 베두윈, 정착 농경민, 도시 주민으로 구분되어 왔다. 현재 이곳 주민의 50%가 농업에 종사하고, 45% 이상이 도시거주자이며 5% 미만이 유목민이다. 이들 세 부류의 생활방식에서 특히 베두윈이 도시 문명의 영향에 동화되지 않은 채 자체의 전통적인 생활형태를 지속해 왔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유목민들 중에는 매년 농업 종사자로 정착하거나 도시 직업을 구하는 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목민들이 정착민으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성장과 서구 기술의 영향이 크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필연적인 삶의 방식에 따라 베두윈의 물질 문화는 빈약하다. 이들의 주요 재산은 자신이 기르는 동물과 거처인 천막에 불과하다. 천막 기둥의 수가 보여주는 천막의 크기는 그 소유자의 부와 사회적 지위의 표시가 된다. 그들은 빈번한 이동으로 인해 적은 양의 생활 필수품만을 갖고 다닌다. 의복 또한 거친 재료로 된 긴 겉옷이 주 복장이며 겨울에는 낙타털로 짠 천으로 만들어진 외투가 고작이다. 양이나 염소, 낙타, 말을 기르고 그 부산물인 우유, 버터, 치즈 및 양모를 팔아 생계를 해결한다. 특히 낙타는 젖과 고기, 의복과 천막 재료를 제공하고 운송 수단으로 매우 중요하다.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수자원이 개발되기 이전에 사막은 유목민에게 근근히 생계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부족만이 있었으며 보다 큰 규모의 정치 구조는 존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대규모 사회는 행정·군사 및 비생산적인 부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잉여 식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부족이 감당하는 주요 임무는 구성원 개개인을 타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부족은 혈족 간의 단결을 강조하고 집단 유대와 상호 책임을 최상의 가치로 내세움으로써 유지되었다. 이러한 소규모 사회에서는 집단 의식이 우선시되며 개인은 집단의 도덕률을 준수하며 살아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개인은 집단의 규율을 따르며 자신의 이익을 집단의 이익과 일치시킴으로써 집단이 개별 성원에게 제공하는 지원에 보답해야 했다. 따라서 유목 집단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보다는 소속 부족에 대한 충성이 더욱 중요시 된다. 부족민은 자신들만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금 납부나 의회법률의 인정, 군복무, 국경 준수를 거부하기도 한다.

 

오늘날 아랍세계에서 시골과 도시의 많은 주민들은 자신들의 근본이 베두윈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점은 많은 정착민들이 베두윈 기풍을 행동양식의 이상적인 귀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서구화에 탐닉한 일부 아랍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베두윈을 과거의 영광된 아랍 영웅시대의 계승자이며 살아있는 증인으로 우러러 보고 있다. 다마스커스를 비롯한 도시의 명문가에서는 자식을 한두해 동안 사막 유목민에게 보내 예절과 가치관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아랍 베두윈이 전통적으로 중시하는 대표적인 도덕적 가치는 환대에서 나타나는 관대함이다. 손님에 대한 환대는 가난한 베두윈들도 행하는 숭고한 덕목으로 오늘날에도 아랍 도시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인상적인 관습이다. 극진한 환대를 베푼 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위신을 높인다는 것 외에 잠재적인 고객과, 부족 분쟁시의 정치적 협력자를 확보하게 된다. 결국 환대는 궁극적으로 베두윈 최상의 목표인 집단 강화를 위해 활용된다. 환대의 관습은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 생겨났다. 사막에서 집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 생명을 보전할 수가 없다. 사막이 그를 죽이든지 그와 마주치는 사람들 무리가 그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길잃은 개인을 맞아주고 보호하는 것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일이 되었다. 환대의 규율에 따라 도망자도 손님이 되며 주인은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그를 지켜주어야 한다. 이러한 환대의 관습은 오늘날 촌락과 도시 생활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즉 결혼, 장례, 할례, 건물 완공, 라마단(이슬람교 금식의 달) 기간 등의 행사를 맞이해 주인은 주민들,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물질을 베푸는 관대함의 관습은 전통적인 아랍사회에서 빈부 격차가 존재하며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아랍인들에게 남아있는 베두윈 문화의 잔재 중 대표적인 것은 그들의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에 가까운 기피의 태도이다. 오늘날까지 아랍 유목민들과 일반인들 중에는 농사나 기능직에 종사하는 것을 불명예스런 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편안한 생활을 선호하며 근육을 사용하지 않는 일을 좋아하는 아랍인들의 성향은 아랍문화의 서구화 과정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집트 사회에서 육체노동의 낮은 위치는 계급 의식을 조장하고 협동과 대화, 발전의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제기된 바도 있다. ‘인간은 이마의 땀을 흘리고서야 빵을 먹을 것’이라는, 성경 창세기에 반영된 중동 지역의 신화는 아랍 베두윈들의 노동관을 보여준다. 곧 그들에게 있어 노동은 신이 인간에 내린 징벌과 저주의 결과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기간 중 중동지역의 행위 규범에서 이상적인 것은 가능한 한 육체노동을 피하고, 요행이나 상업 활동에 의해 부를 얻는 것이었다. 중세 아랍의 생활과 가치관, 신앙 등을 반영한 아랍의 고전 『천일야화』에는 힘든 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닥치는 최악의 운명임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산재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베두윈의 자유로운 삶과 용맹, 남성다움, 명예를 중시하는 그들의 가치관을 강조하며 그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아랍 베두윈의 사회적 관습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지켰던 관습과 매우 유사하고 베두윈의 언어는 가장 순수한 아랍어라는 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베두윈 사회가 위축되고 그 낭만적인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겠지만 베두윈 문화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순수와 이상의 상징으로서 이 지역 주민들의 삶 속에서 계속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김능우·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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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경 아라비아반도는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세력다툼으로 전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파르티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와 파르티아,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대신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전쟁상태에 있었는데 이들 세력들 사이에서 아라비아 사막지대에 거주하던 아랍부족들은 양측간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로마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별볼일 없는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곳에는 로마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여전히 미개한 풍습들이 남아있었으며, 가증스러운 수백개의 우상을 세워놓고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메카는 많은 오아시스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큰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570년경에 예언자 무함마드(محمد = 마호메트)가 태어납니다. 그는 어린시절에 고아가되어 상인이었던 삼촌의 손으로 자라게 되는데, 이후 삼촌의 직업을 물려받아 상인이 된 그는 26세때 가게주인인 15세 연상의 카디자와 결혼해서 가족을 이룹니다. 그러다 40세 무렵 그는 영적인 명상을 위해 메카 외곽의 히라 동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번쩍거리는 광채와 함께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그로부터 신의 계시를 받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완전 딴사람이 되어 메카의 시민들에게 예언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미 돈맛을 볼때로 본 메카 귀족들은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박해에 이기다못한 그들은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피신합니다. 이를 히지라 (هجرة) 라고 부르며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으로 삼습니다.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하느님(아랍어: 알라)이 보낸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그의 사상이나 이슬람 경전 꾸란(القرآن)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나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일치합니다.

 

꾸란의 첫장인 개경장(Al-Fatiha - الفاتحة). 개경장에는 이슬람신앙의 핵심이 들어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 그 분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며 /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며 당신께만 구원을 청하노니 / 저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하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가 걷지 않은 길이나이다. /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포교활동과 부족간의 분쟁조절, 그리스도교국인 에티오피아왕의 보호를 통해 세력을 이룹니다. 그는 메디나의 대표자가 되었으며 이윽고 메카와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624년 5월 17일, 메디나군과 메카군은 바드르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غزوة بدر) 이 전투에서 메카군은 무함마드 군의 일방적인 돌격에 큰 피해를 입어 전승에 의하면 '70명이 전사하고, 70명이 사로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전합니다. - 이슬람학자들은 이는 메카 총전력의 15~16%정도로 추측합니다 - 바드르전투는 꾸란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대가 한심하리만큼 적은 병력을 갖고 있었을때 그대를 바드르에서 도왔다. 그 분은 그대가 감사해하는 것을 보고 그대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대가 믿음에 대해 말하였던것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 3000명의 천사를 보내어 그대들을 도와줘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그대가 굳건하게 믿음을 갖고, 올바르게 행한다면 적이 그대를 향해 빠른속도로 밀려 올지라도, 그대의 주님은 무시무시한 5000명의 천사를 보내어 그대를 도울것이다." - 이므란(가족장) 3:123~125

 

무함마드 시대 아랍인들은 동시대 비잔티움인이나 페르시아인에 비해 지극히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위 그림은 무함마드시대 무슬림 전사들의 모습을 고증한 그림으로, 왼쪽부터 지휘관, 복합궁을 들고 있는 아랍인 궁사, 무슬림에게 우호적인 베두인 족장의 모습입니다. 이슬람하면 떠오르는 언월도는 아직 없었고, 체인메일을 착용한 경우가 일부 보이지만 돈이 많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전사들만 국한되었습니다. 흥미있는 점은 그림 뒤의 낙타안장에 가죽으로 된 등자가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아랍인들에게 등자가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썩어서 남아있지 않는 가죽등자는 사용했을 법 합니다.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뛰어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동시에 많은 부족들과 연합한 무함마드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630년 무함마드의 군대는 메카를 정복하고, 까바 신전에 모셔져 있던 수백개의 우상을 모조리 때려부수고 난 다음, "하느님 외의 신은 없다!" 를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세계사의 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새로운 문화권의 탄생을 선언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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