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두 얼굴

 

그런데, 그들의 말처럼 정말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폭력을 일삼는 극렬 원리주의자들은 정말 소수의 테러분자들일 뿐인가? 그들의 주장처럼 이슬람이 정말 그 정도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지만 이슬람은 두 얼굴을 가지고 둘 중의 어느 한 쪽을 편의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하는 변신에 능한 이들임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이며, 테러를 자행하는 극렬 원리주의자들은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온건한 이들이며 우리와 같은 선한 이웃일 뿐이다는 주장들을 당연하듯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이슬람 전략가들이 가장 노리는 전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슬람은 평화를 의미하며 따러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이슬람'평화의 뜻이라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평회를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는 쌀람’(히브리어의 샬롬)이며, ‘이슬람은 단순히 복종’(submission)을 의미할 뿐이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무슬림)로 구성된 종교요, 그 종교의 경전인 꾸란(Quran)은 최소한 다음과 같이 무슬림들에게 명령한다.

 

박해가 없어질 때까지, 종교가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꾸란 2:193)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슬람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평화의 집(Dar Es-Esalam. 다르에 쌀람)’ 전쟁의 집(Dar Al - Harb. 다르 알 하릅)’ 으로 이분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타의 종교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이루어 이슬람의 율법(샤리아)으로 다스림 받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세계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들이 공존하는 현실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인 것이다.

 

흔히 꾸란이냐 칼이냐?” 라는 문구로 이슬람을 이해하던 과거의 표현을 두고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그렇지 않다. 평화의 종교인 이슬람에 대한 서구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편견이 담긴 표현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이야 말로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가장 짧은 표현으로 그 이중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이슬람의 실체는 과거나 지금이나 그 근본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며, 그 전략에 있어서도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있다면 대신 총과 폭탄과 같은 현대식 무기로의 무장이라 하겠다.

 

이슬람은 처음부터 로 세계를 정복해왔고 여전히 을 휘두르며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슬람에선 아무리 아니라하지만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녹색바탕 위에 선명하게 보이는 아랍어 글씨와 그 아래에 놓인 긴 칼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이요,

그 신앙고백의 기초에는 엄연히 긴 이 놓여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거기에는 그 고백과 함께 다른 상징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굳이 평화를 위한 이라고 우긴다면,

평화모든 이교도와의 전쟁을 그치고 난 후의 평화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알라의 이름으로’ (비스밀라) 이 땅에 이교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성전(聖戰. 지하드)해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온 세계가 이슬람 율법이 다스리는 이슬람 세계가 오기 전까지

 전쟁은 쉼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 속에서 테러소식이 가장 많은 나라들을 꼽아보라.

모두 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절대 다수인 국가들이다.

왜 그럴까?

 

 경전을 통한 판단과 분별

 

아무리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평화로 포장하여 소개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절대적이고 규범적인 권위의 원천인 꾸란)코란)의 진술을 부정할 수는 없다. 꾸란에는 수많은 구절들이 무슬림들을 독려하면서 알라를 위해 투쟁(지하드)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여기에 몇 구절만 소개해 본다.

 

알라를 위하여 당신을 적대시 하는 자와 싸워라”(꾸란 2:190, 이하 김용선 번역본)

 

박해가 없어질 때까지, 종교가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2:193)

 

알라와 그 사도에 싸움을 걸고 지상에 해악을 뿌리려 하는 자가 받는 벌은 살해되든가 십자가서 박히든가 손발을 반대쪽부터 절단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국외로 추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서 받는 그들의 굴욕이며 내세에서도 그들에게는 무서운 벌이기다리고 있다 “ ( 5:33)

 

그런데 신성월이 지났으면,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 모든 길에 복병을 두고 기다리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회개하여 예배를 지키고 희사를 한다면 방면해 주라, 알라께서는 관용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시다“ (9:5)

 

어떤 이들의 반박과 같이 기독교 역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살상과 전쟁들을 일으켜 온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그것을 경전을 통해 신의 이름으로 명시적으로 명령하는 것과,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칼을 든 것은 현실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쨌든 이 명령들이 실제로 오늘날 무슬림들에 의해 수행된다고 가정해 보라. 세계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구절들에만 의거해 보더라도 오늘날 테러행위를 서슴지 않는 극렬 무슬림들을 가리켜 어찌 소수의 극렬 윈리주의자라고 비난하겠는가? 오히려 무슬림들은 이러한 꾸란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수행하는 전사들에게 환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무슬림들이 이러한 꾸란의 명령들을 문자적으로 실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수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복음서의 지상명령을 끊임없이 읽고 또 듣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렇게 심각하게 문자적으로 그 명령따라 살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 명령을 발하신지 2천년이 되도록 그 명령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업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꾸란을 읽는 수많은 무슬림들 역시 위에 명시한 구절들을 무자적으로 수행하지 않은 결과 그나마 세계는 이만큼이나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리 주위에는 온건한 무슬림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만,

이같은 알라의 절대적 명령들이 무슬림들의 가슴에 끊임없이 각인되는 한,

어느 날 예기치 않는 때에 그들은 오늘날의 테러분자들로 돌변하여 나타날 가능성들을 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치 수많은 기독청년들이 자아실현을 꿈꾸며 자기만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 삼으라는 지상명령에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도를 전하고 생명을 전하는선교가 아니라, 알라의 이름을 위해서는 테러와 피흘림도 불사한다는데 있다. 기독교의 선교 명령이 준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자연스런 열매인 반면, 이슬람의 지하드가 수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을 멸하고 파괴와 죽음이 열매로 맺어 나오는 현실이라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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