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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신약

 

언더우드·아펜젤러, 성경번역 첫 단추 끼우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경이 전래된 때는 1816(순조 16) 95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 명령을 받은 해안 탐사선 알레스트호와 리라호가 충남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갈곶)에 상륙했는데, 함장 머레이 맥스웰과 바질 홀 대령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에게 화려한 장정의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의 성경인데, 흠정역(KJV) 성경이었을 것이다.

 

 

그 후 18327월 귀츨라프와 186566년 토마스에 의해 중국어 성경이 조선에 소개됐다. 성경의 도래와 함께 1880년대 만주와 일본에서는 은밀하게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경이 번역되었고 오늘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국내 첫 번역성경은?

 

내한한 선교사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성경 번역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트랜톤, 그리고 헤론은 188727일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번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들이 펴낸 첫 성경이 1887년 간행된 마가의 젼한복음셔 언해였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1885)의 개역본이었다. 한글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잠정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 차원에서 역간 작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으나 아펜젤러의 보라달로마인셔(保羅達羅馬人書)’(1890), ‘마태복음젼’(1892), 게일의 사도행젼’(1892), 펜윅(M C Fenwick)요한복음젼등 사역본(私譯本)이 발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성서공회는 한국성서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요청했다. 번역보다는 수정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가 로스역 누가복음을 수정했는데, 이것이 1890년에 나온 누가복음전이다. 수정본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성서번역위원회는 국내에서 완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이 일이 위임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지연되었고 후에는 언더우드 대신 게일이, 아펜젤러 대신 스크랜톤이 이 일을 추진해 1892120마태복음전이 나왔다. 이 책은 기존 성경의 수정본이 아니라 국내에서 번역된 첫 한국어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30만부 간행됐다.

 

성경번역자회의 조직과 열매

 

한국어 성경번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는 18935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립한 일이다.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번역위원이었고, 1895년에는 레이놀즈가 추가됐다.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된 일 또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번역위원들은 분배된 신약 책들을 그리스어 성경과 영어개역성경(RV)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 및 일본어 성경 대본을 참고해 선교사들을 돕고, 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다시 원번역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한 뒤 전체 번역자들이 참가하는 번역자회에서 토론과 표결을 거쳐 번역자회에서 통과된 대본을 시안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이런 번역 과정이 충실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간행됐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1892년 번역한 마태복음젼을 번역자회가 시안본으로 승인한 것이지만 마가복음(아펜젤러), 요한복음(게일), 사도행전(게일)은 개인 역본이었다. 곧 누가복음(1896),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이상 1897),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1, 2, 3서와 유다서(이상 1898), 에베소서(1899), 그리고 요한계시록(1900)이 번역됐다. 신약의 모든 책이 번역되자 낱권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됐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1900).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안본이었으나 그 이후의 책들은 개인 역본들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초로 신약을 완역한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기념해 190099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약성경 봉헌감사예배가 드려졌다.

 

성경 번역 헌신했던 아펜젤러, 결국 순직

 

비록 신약전서가 출판되었으나 고린도전서 이후의 책들은 번역위원회의 수정이나 독회를 거치지 않은 개인역에 불과했으므로 출판과 함께 수정 작업이 시작됐다. 이 일은 아펜젤러, 레이놀즈, 그리고 게일에게 위임됐다. 이 작업을 위해 아펜젤러는 인천을 출발해 번역자회가 모이는 목포로 가던 중 조난 사고로 한국인 조사 조성규(趙成奎, 趙漢奎라고도 불림)와 함께 순직했다. 1902611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는 게일과 언더우드를, 남장로교는 레이놀즈를 성경번역 사업에 전념토록 배려했다. 결국 이 세 사람의 노고로 수정 작업이 추진돼 1906년에는 성경번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서가 출판됐다. 이 성경이 1938개역신약성서가 출판되기까지 한국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경이다. 성경번역 사업은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한국인 조력자의 수고 또한 적지 않았다. 아펜젤러의 어학선생이자 조사였던 조성규, 게일의 일생 동안의 동료였던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언더우드의 조사였던 송덕조(宋德祚), 레이놀드의 조사였던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 등이 바로 그들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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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통해 기독교 수용에 힘쓴 이수정(李樹廷) 
 

 

    1842년 전라도 곡성군 옥라면에서 이병규의 이들로 출생했다. 전주를 본관으로 이해되지만 일설에는 평창이씨로 천주교인 이었던 이승훈의 후손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고종의 친정 후 실력자 민영익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킨 공으로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농학자 안종수(安宗洙)와의 우의가 돈독했다. 그가 귀국하여 일본의 농학자요 기독교인 이었던 쓰다센(津田仙)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이수정에게 전하였고, 이수정은 일본에 가기를 열망하였다. 1882년 9월 일본에 갈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고종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는 도쿄(東京) 외국어 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일본에 체류함으로 정부의 공식적 임무 없이 서구문물을 연구할 수 있었다.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도일한 이수정은 쓰다센을 만나 농사법, 법률, 우편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기독교 교리와 가치를 설명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쓰다센의 안내로 한문성서를 탐독하던 중 성탄절 예배를 참석하기에 이르렀고, 1883년 4월 29일 주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G.W.Knox)의 입회아래 노월정 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가와 (安川亭)의 집례로 세례를 받아 일본에서 최초의 한국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었으며 그해 5월 도쿄에서 모인 제 3회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에 참석, 한국어로 특별기도 순서를 맡았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를 발표함으로써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한국 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 양태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이 있은 후 한글성서 번역사업을 시작했다. 제일 미국 성서 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와 협력하여 한문 성서에 토를 달아 현토한한 신약전서 복음(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였으며 곧이어 순한문 성서인 ‘신약 마가젼’을 번역하게 되었고 이 쪽복음은 1885년 4월에 기독교 교역자로서 처음 입국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감리교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휴대한 성서가 되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에는 미국에서 발간되고 있던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 선교를 요청하는 감동의 글을 기고함으로써 미국을 위시한 여러 선교국가들이 한국에 선교사 파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7월에는 멕클레이(R. S. Maclay)를 김옥균과 접촉시켜 한국에 교육과 의료선교 사업을 하도록 고종께 권유하도록 하여 입국하게 하였고 1885년 1월에는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만나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에 입국 하도록 교량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그해 7명으로 구성된 유학생 교회를 창설, 지도 하였으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에게도 복음을 전해 개화파 지식층에게 시대적 각성을 시켰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구 한국 정부의 노여움을 사 거리가 멀어졌고, 교분이 두터웠던 김옥균과도 소원해져 그의 애국 충정이 오해되어 1886년 귀국후 곧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성서 번역 사업은 소명감에 의해 추진 되었으며 현토한한 신약전서와 본격적 성서번역 시작인 신약 마가전 복음셔언해를 요쿄하마에서 출판한 것은 그의 업적중 가장 빛나는 사업이었다.(2004. 2. 21.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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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특집다큐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이수정 [영상보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이수정

 

 1882년 미국과 영국에 이어 1886년에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1884년 알렌이 그 이듬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질러, 스크렌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르 한다.

 1, 조선의 첫 선교사 알렌

 알렌은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고 중국선교를 하다가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이며 공식적으로는 미국 공관의로 조선에 입국한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이 아니므로 조용히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던 중 1884년 갑신정변이(급진적인 개화파인 김옥규느 서재필, 박영효 등이 일본을 등에 업고 쇄국정책을 내세우는 보수파이며 지권당을 제거하려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살아남은 박영효와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보수파인 민영익과 친분이 있는 이수정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이려고 이수정이 조선으로 귀국하는데 한 요인이 된다.)  일어나고 이 때 민비(명성황후)의 친척이며 보수파인 민영익도 자객의 칼에 7군데 맞아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긴 혈관은 한의들이 할 수가 없었다. 뮐렌도르프의 소개로 알렌은 민영익을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석달이나 성심껏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민영익 뿐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엇고 그 결과 광혜원(은헤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지어줌.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뀜, 광혜원자리는 갑신정변 떄 죽은 홍영식의 집이었다) 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언더우드(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침), 스크렌톤, 앨러스(의료 선교사)모두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알렌 선교사는 선교본부와 관계를 끊고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달은 유럽나라들처럼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와서 조선의 잇권을 빼앗기 위해 열을 올리는 미국의 손, 발이 되어 일을 함으로 지금도 믿지 않는 역사학자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2,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알렌이 1884년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들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개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10살이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남자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남달랐던 형제는 자기전에 늘 기도했다. 다른 학생들이 놀림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던 형제를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릉 학생들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숫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언더우드의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며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미 신학교 재학 중 인도선교 준비를 하였으나 아펜젤러를 만남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탔고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라는 음성을 듣고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을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을 들고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신혼여행도(명성황후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양과 결혼함)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 편집가, 여행가. 정치가로 평화의 사도로서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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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역사와 정체성

 

서론

 

올해는 종교개혁기념 487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의 후손으로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정신을 이해하고 계승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올해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장로교회의 신앙적 역사와 정체성을 다시 한번 발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런 역사적 정체성을 찾을 때 가장 성경적인 원리의 장로교회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론

 

1. 한국의 기독교 역사

 

한국장로교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로교보다 먼저 들어온 로마 카톨릭의 전파를 통해서 이 땅에 기독교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면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선교를 좀더 깊이 있게 이해게 될 것입니다.

 

1) 중국과 일본의 로마 카톨릭 전파

 

16세기 이후로 로마 카톨릭은 선교의 영역을 동양으로 확대하여 한반도 주변의 중국과 일본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도를 거점으로 하여 1549년에 일본 선교가 시작되었고, 1583년에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선교는 단순히 기독교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발전된 과학문명을 통한 정치적인 힘과 함께 선교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이면서 서양의 과학문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명의 발전과 함께 각국의 정치적인 형편이 혼란하게 됨으로 인해서 중국과 일본은 이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본은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강력한 막부 통치시대가 열리면서 지배층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 정벌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1592-1598년 동안 이루어진 임진왜란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만주족을 배경으로 한 후금(後金/여진족이며 후에 청나라)이 중국 본토의 󰡐명󰡑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후금은 명을 치기 전에 명과 우호적 외교를 갖고 있는 조선을 먼지 공격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 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라고 불리는 천주교인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들의 사기을 일으키기 위해서 예수회 일본 부관구장인 󰡐고메스󰡑 신부를 동행시켜서 미사를 행하기도 했을 정도로 일본은 천주교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도하고 전쟁 중에 군인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소개되기도 하며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 천주교인으로 개종하는 등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가 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국은 1627년 여진족의 조선 침략인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이 전쟁은 1637에 󰡒병자호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으로 승리한 청나라는 조선에 막대한 전쟁물자를 요구하고 볼모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소현세자가 중국에 머물면서 예수회 신부인 󰡒아담 샬󰡓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는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흥미를 갖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중국인 궁녀 감독관으로 교인 5명을 동행해서 데리고 가게 되어서 이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천주교는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불교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하여 1777년 천주교 교리연구회 모임이 시작되고, 1784년에는 이승훈의 세례를 통하여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기도 했습니다. 1794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였으며, 정약용이 천주교 성경을 번역사업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발전을 통해서 1831년 정식으로 로마 교황청에 의한 조선교구가 창설되기도 합니다. 1845년에는 한국인 최초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세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발전의 역사 뒤에는 수많은 핍박과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인 제사문제로 인해서 많은 반대에 부딪쳤고, 천주교가 서양의 정치적인 힘을 빌어서 선교를 했기 때문에 조선과 정치적인 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신부들과 교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특히 천주교인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오가작통법(1801)󰡓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신유박해로 300명 이상이 순교하기도 했고, 경신박해, 병인박해, 신미양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핍박을 통해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되었습니다.

 

2.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선교

 

1) 19세기 말의 정치적인 상황

 

17세기 이후로 천주교가 조선에 정착을 했지만 많은 박해로 인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침체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19세기의 어려운 정치적 혼란을 통해서 이 땅에 복음이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19세기의 혼란한 정치적 어려움 가운데 조선은 강제적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런 정치적 상황을 통해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정신적인 면에서 전쟁과 정치의 혼란으로 유교와 불교에 대한 신앙에 회의를 느끼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신앙적 내용을 소망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16세기 이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습니다.임진왜란 이후 침체되었던 정치적 형편이 회복되자 1876년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는 무력을 시도했고 급기야는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계속해서 조선의 모든 영역의 통치권을 얻기 위해서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조선 땅에서 일으켰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이후 영국과 미국의 동의를 얻어 일본은 을사조약(1905)을 체결하고 결국에는 1910년에 󰡐한일합방조약󰡑을 통해서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 국가로 만듭니다. 이와 같은 격변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음이 흘러들어올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희망을 빼앗긴 민족에서 참된

소망의 빛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2) 중국과 일본을 통한 성경 유입

 

한국장로교회의 독특한 역사는 1885년 본격적인 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성경이 먼저 유입되고

그 성경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교회가 형성되는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번역과 소개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에는 천주교와 다른 나라의 기독교 선교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특히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와 성서공회를 통하여 성경번역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인 알렉산더 윌리암슨과 그 제자들인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를 통해서 한국선교의 문이 시작되는데 그 중 로스를 통하여 성경번역이 이루어집니다.

1878년 로스는 이응찬의 도움으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7년 번역이 완성되어 󰡒예수셩교젼셔󰡓가 출판되었습니다. 성경번역이 이루어진 후에는 각양의 방식을 통해서 조선으로 성경이 보급되었으며

그 중 서상륜을 통해서 언더우드에게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소래교회(1887)가 세워지기도 합니다.

 

일본을 통해서는 이수정이 성경번역의 일을 완성하는데,

그는 온건개화파에 속한 인물로서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를 구하고 신임을 얻어 일본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1882년에 토교 축지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계기를 통해서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 녹스에 의해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갔던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1883년말에 토교에 한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이수정은 1883년 5월부터 성경번역을 시작했으며,

1885년 신약성경을 출판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거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1885년에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기독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일어났던 장로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성경이 번역되고

이 성경을 배포하면서 많은 회심자들을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로교회의 선교초기 활동은 이 땅에 기독교를 정착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3)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1884년 알렌은 의사의 신분으로 한국 땅에 들어옵니다. 그는 1884년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당한 명성왕후의 가족인 민영익을 치료해줌으로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광혜원(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 병원은 후에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에 의해서 새롭게 운영되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교사의 직함을 가지고 입국한 사람은 1885년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입니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소속을 둔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그가 선교사업으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행한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도 있지만 1893년 시작된 성경번역 사업과 성경교육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장로교는 처음부터 철저한 성경관에 입각한 정신을 기초로 성경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져 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07년에는 장로교회의 역사 중에서 아주 중요한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카나다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장로교회 질서체계의 핵심이 되는 󰡒노회󰡓를 조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독노회󰡓라고 합니다. 이처럼 장로교회는 선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우선적으로 장로정치제도를 확립하여 성경적인 정치제도를 통한 성경적 교회 확립을 하기 위해서 힘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독노회에서는 성경적인 장로정치제도를 체계화한 것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장로교회의 정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신조를 본격적으로 확립해 줬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요약본으로 인도에서 사용되던 신조를 정리해서 󰡒12신조󰡓를 채택한 것입니다. 이 신조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정통장로교회의 중요한 정신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동의해야 할 자체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함에 있어서, 이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한 모(母)교회의 교리적인 표준을 거부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러한 교리적 표준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값진 해석으로,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교리체계로 기리는 바이다. 그리고 본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자체의 요리문답으로 채용하는 바이다.

 

4) 평양신학교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장로교회는 교회를 세우는 것도 중요한 목표로 생각했지만 이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서 철저한 개혁신앙으로 훈련된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사역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1901년에 한국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평양에 있다고 해서 󰡐평양신학교󰡑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 학교의 교수진은 미국의 북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특히 구 프린스톤에서 신학수업을 마친 선교사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마포삼열, 곽안력, 이길함, 블레어, 무어, 로스, 버히슬, 아담스, 이눌서, 어도만, 구레인, 함일돈, 소안론 목사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함일돈 목사와 같은 사람은 1920년대의 미국 장로교회의 신.구학파 분리 때 메이첸을 따라서 메이첸이 주도하던 󰡒독립선교회󰡓로 자리를 옮겨서 선교사역을 할 정도로 개혁신앙에 철저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는 구프린스턴 시절 메이첸과 워필드에게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개혁신앙을 정립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마포삼열 목사는 자유주의자들이 󰡐어빙돈성경주석󰡑을 출판한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개혁신앙의 입장에서 󰡐표준성경주석󰡑을 발간하고 그 서문에 개혁신앙의 중요한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기도 했습니다.

 

본 주석의 집필자들은 성경 전부가 만서 지중에 최대서요, 신의 참된 말씀임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선히 개괄되어 있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적 표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신조를 구성하는바, 본 주석의 집필자들이 이 신조를 믿음은 이것이 신의 말씀에 교훈되었음을 믿는 때문이다. 집팔자들은 성경이 이 신조의 제개조를 완전히 지지한다고 믿는다.

 

초기 선교사들의 중요한 선교사역들 중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장로교회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이 선교정책은 󰡒자립, 자치, 자전󰡓이라고 하는 표어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이런 표어들이 나오게 된 신학적 기반을 들 수 있습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선교정책은 성경중심의 신앙과 성경중심의 교회통치와 전도를 들 수 있습니다. 감리교나 로마 카톨릭은 주로 사회사업을 통해서 교회활동을 넓혀갔지만 장로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중심의 신앙, 교육, 교회정치확립, 전도를 세워갔던 것입니다. 주요한 내용들을 보면 요리문답 교육을 위한 주일학교, 일주일 동안의 온종일 사경회, 지교회에서의 학습교인반, 가정예배, 성경통신과정, 주일학교 연장, 기독교 면려운동(구제), 여름성경학교, 성경클럽, 상품을 내건 조직적인 암송 공부 등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교회 안에서 철저하게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신조를 배우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됩니다.

 

이와 같은 장로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입장과 또한 장로정치의 확립을 통해서 초기한국장로교회는 미국의 구프린스턴의 개혁신앙적 입장을 계승한 철저한 보수주의, 칼빈주의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특징을 세우게 되는 것을 봅니다. 장로교회의 철저한 보수주의적 신앙모습에 대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 입교를 위한 학습세례의 과정이 매우 엄격하고 어려웠던 것을 봅니다. 대상자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삶의 변화된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면 세례를 보류했으며, 입교한 성도들도 철저하게 권징을 받기도 했습니다. 1900년에 행해졌던 입교문답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주일을 성수합니까?, 당신은 음주를 합니까?, 나는 한 대 술고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내 몸을 잘못 사용한다면 나는 영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당신을 유혹하지 않던가요? 웬걸요. 물론 유혹하지요. 만일 내가 계속하여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나는 끊임없이 노름, 간음죄 등에 유혹 받았을 것입니다.

 

위의 입교문답을 통해서 한국장로교회가 초창기부터 얼마나 경건하고 엄격한 신앙과 교회의 질서를 요구했지는 알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매춘과 흡연을 퇴치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웰본은 1904년 선교보고서에서 󰡒금주, 주일성수 파기, 그리고 다른 죄 때문에 세 명의 교인에게 교인자격을 정지시켜야만 했다󰡓고 보고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청교도적인 경건정신의 신앙과 삶을 계승한 한국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입교의 조건으로 음주, 흡연, 노름의 금지와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등의 생활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3. 한국장로교회의 발전과 분열

 

1) 자유주의의 도전과 1934년, 1935년 장로교 총회 결정

 

한국장로교회가 선교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한국교회에는 자유주의신앙을 가지고 그 신앙을 전파하는 자유주의 목사들과 교회들도 세워졌습니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점점 더 보수주의적 입장을 세워가고 있는 개혁교회를 위협했습니다. 자유주의 목사들은 일본과 미국, 카나다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많이 배워와서 한국교회에 급속히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주의의 입장은 성경의 권위을 부정하고 신조교육의 필요성을 제외시켜버리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한 목사들은 일본이 당시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를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인정하던 시대에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런 사상을 자연히 받아들이기 되었으며,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람들도 미국이 구 프린스턴과 신 프린스턴이 나누어지면서 신파를 중심으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탄생, 부활, 재림, 기적 등을 부정하는 󰡒오번 선언서󰡓에 서명한 신학자들에게서 공부를 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한국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일본에서 바르트 신학을 공부한 김재준 목사입니다. 이 사람은 후에 정통장로교의 성경관과 신조관을 부정하고 자유주의적 입장을 확립하기 위해서 󰡒한국신학대학󰡓을 설립하여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세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김재준 목사는 바르트의 사상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설을 부정하고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인간의 말도 있으며, 그 안에는 잘못된 부분도 많다고 언급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증거정도라고 권위를 낮추기도 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의 성경비평과 진화론 등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김춘배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교회내의 여권문제를 심각하게 도전했습니다. 즉, 그는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은 2000년 전의 일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비판하면서 교회내서 여성목사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장로교 안에서 자유주의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총회는 1934, 1935년에 거쳐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립니다. 박형룡 목사를 연구위원으로 세워서 제시된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난 후에 김재준 목사의 창세기 저자 문제나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기독공보, 적극신앙단, 아빙돈 주석에 대한 입장을 모두 거부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반대는 근대의 파괴적 성경 비평가들의 주장하는 이론인 바 그들은 과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데 머물지 않고 오경 전부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세 시대로부터 여러 세기 후대 어떤 인물들이 기록한 위조문서로 돌립니다. 또 그들은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 다른 여러 책과 신약 여러 책을 후대인의 위조문서로 인정하며 그 기록의 내용에 신화와, 고담(古談), 미신 등 각종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여 냄으로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신조 제1조를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합니다.󰡓라고 결정했다. 또한 여성권리와 관련해서는 󰡒성경은 여자의 교권을 불허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 시대 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그 정신 태도가 파괴적 성경비평의 정신태도와 다름이 없습니다.---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가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 42조와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입니다.󰡓라고 결정했습니다.

 

2) 장로교의 분열

 

한국장로교회는 일제식민지라고 하는 혼란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서 점차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팽배하면서 장로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절하게됨으로 인해서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폐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목사와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협력을 통해서 1940년 󰡐조선신학교󰡑라고 하는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 학교는 김재준 목사와 더불어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해방이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한국장로교회에 심각한 위기를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1951년 이 학교와 속해 있는 목사들을 제명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장로교회는 1차분열을 갖게 됩니다. 김재준 목사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학교를 세웁니다. 이것이 󰡐한국신학대학󰡑이며, 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인 것입니다.

 

2차 분열은 신사참배의 문제로 갈라지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총회차원에서 허락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큰 죄이며, 아픔이었습니다. 해방 후 신사참배를 인정한 목사와 거부한 목사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결국에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52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교단은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측)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3차 분열은 WCC에 대한 입장이 갈라짐으로 인해서 장로교회 안에서 심각한 논쟁을 거친 후에 분열하게 됩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WCC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그룹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따라서 1960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측)이라는 교단을 새롭게 형성합니다. 이 학교는 후에 바르트의 신학사상을 자신들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유주의적인 신학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머지 교회들은 󰡒합동측󰡓이라는 형태로 기존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됩니다.

 

결론

 

한국장로교회는 어려운 사회형편 속에서 시작하여 점차 뿌리를 내리며 발전해 왔습니다. 자유주의의 많은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는 분열이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이 분열은 순수한 성경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분열한 것이지 어떤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 개혁파교회가 지켜왔던 성경적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는 고민과 아픔을 겪어왔던 것입니다. 교파가 단순히 하나로 있는 것 자체가 외형적으로 보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인정하면서까지 연합을 지켜가기 보다는 분열의 아픔이 있을지라도 진리의 순수성을 지켜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정신을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한국장로교회는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60년 이후로 한국장로회는 다양한 자유주의적 신앙과 신비주의적인 신앙의 도전으로 많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또한 장로교회 안에서도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지켜왔던 성경적 교리를 소홀히 여기면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위기를 맡게 됩니다. 이제는 장로교회안에 더 이상 선조들이 목숨처럼 지켜왔던 보수주의적 신앙관을 찾아볼 수 없고 여러 가지 혼합된 신앙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와 같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는 장로교회의 역사를 다시한번 살펴보면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회복하여 성경적인 신앙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신원균 목사(한마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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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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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  Underwood‘s Prayer for Korea Mission

 

언어두드 선교사님의 기도를 동영상으로 보시고자 하시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여기]

 

Horace Grant Underwood‘s Prayer for Korea Mission.
 
Lord, nothing is visible at this moment.
Lord, you have planted us on this barren and poor land,
where not even a single tree can grow tall enough.
 
It is such a miracle that we could come to this land across the wide Pacific Ocean.
Nothing is visible, though, in this land on which we seem to have been dropped off by your hand.
 
Only stubbornly stained darkness can be seen.
Only Korean people chained with poverty and superstition can be seen.
They don't even know why they are chained, what suffering is.
They just distrust us and express anger to us as we tell them how to take away their suffering, which is not suffering to them.
 
The thoughts of Korean men are not visible.
The mind of this government is not visible.
We are afraid that we may not have any more opportunity to see the women commuting on Kamas(-a cart carried by men).
And we do not see what to do.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져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읶쎼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고 출발하는 과정에는 극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했다.
언더우드가 작성한 '회고'에 따르면, 올트만스(일본선교사)에게 조선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의 선교지는 인도였다. 그런데 일 년 뒤, 그는 조선으로 파송해주기를 바라는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했다.

언더우드는 이수정(한국 최초로 주기도문을 번역했던 성경번역자)의 글을 읽기 몇 달 전까지도
자신의 선교지가 어딘지를 모른채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고 한다.
그때 미국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주기를 바라는 이수정이 쓴 글이
1884년 1월 26일 자 The Illustrated Christian Weekly를 통해 미국에 처음 소개됐다.
언더우드는 이수정의 글을 읽고 자기를 조선으로 부르는 음성으로 여겨 선교사를 지원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미국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했고,
언더우드는 11월 11일 목사 안수를 받고 곧바로 교단을 옮겼다.
그는 뉴욕에서 출발하기 전, 미국을 시찰 중인 일본 군사시찰단을 우연히 만났으며,
군사시찰단과 같이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항하는 우편 증기선 '시티 오브 뉴욕'에 승선해
1885년 1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 한국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


그렇습니다. 지금은 비행기로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그 당시는 배로 몇 달 걸려 태평양을 건너 조선땅까지 왔다고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에서 나타난 조선의 모습을 보면서
그 당시의 조선이 지금은 선교사님들로 말미암아
선교대국이 되었고,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되었다고 해도
아무도 부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제는 여러나라에 선교사로 나가서
우리가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하지 않을까요

 

요즈음 캄보디아,라오스, 태국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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