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금요철야예배 기도문 ( September,friday night prayer)

 

저희의 예배를 기뻐 받아 주시는 하나님 !

이 시간 주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

금요철야기도회에 저희들이 보였습니다.

이 죄인들을 불러 주님을 믿고 따르게 하시오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세상에서 주님의 돌보심으로 살다가 합심 기도하러 주님 전에 나아왔습니다.

세상 삶에 시달리거나 세상 일에 빠져서 주님을 저버린 자 되었을까 두렵습니다.

저희들의 마음문을 두드려 열게 하시고, 세상 죄를 이기려는 싸움에 승리하게 하옵소서.

약한 저희들의 상처입은 심령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리신 손으로 치유하옵소서.

아직도 저희들의 심령에 교만과 사욕이 스며 있거든 성령으로 깨우치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그 모든 죄의 소멸함을 받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온전한 주님의 능력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의 교회는 저희 인간들의 교회가 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관하사

주님의 현존하는 몸된 교회로서 세상에서 빛이 되게 하시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방주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 교회의 지체된 모든 형제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이루어

위로부터 내리시는 기쁨과 평강과 소망과 사랑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서 참되게 살며,

의롭게 살며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약한 자에게는 힘이 되게 하시고, 좌절한 자에게는 희망을 주게 하옵소서.

없는 자에게는 나누어 주는 자 되게 하시고, 천하고 눌린 자를 높이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었나이다.

저희들도 주님과 같은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와 축복. (마태복음 6:32-33절)


오늘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삶에는 우선순위기 있습니다.

 

먼저해야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상수훈,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

예를 말씀드림으로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손가락이 10개입니다.

열 손가락에 꼽히는 것들 중에

우선순위를 한 번 정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것이 제일 먼저 꼽힙니까?

 

무엇이 우선이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에

맨 먼저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요.

 

다음은 예배 그 다음은

선교와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실 줄로 믿습니다.

 

1.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우선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아브라함은 신앙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서둘러 삼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

모리아 산에 제단을 쌓고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말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큰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언약하시며 메시야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내주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보다 하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2.예수님께서 우선순위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1)부자청년-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청년에게 주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십계명도 지켜야 하지만

사랑의 실천과 순종도 중요한 것입니다.

청년은 하나님과 이웃 보다 재물이 우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녀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이나 형제 자매 부모 자녀가 전토를

100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0:29-30)

 


3)장례식 보다 주님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장례식 보다 먼저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례식은 5-7일-10일-15일

이상 걸리는 풍습이 있었기에 장례보다 선교가

우선임을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3.바디매오의 우선순위(막10:46-52)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눈을 뜨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을 때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바디매오의 소원대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바디매오가 동냥을 했다면

우선순위기 바뀐 것입니다.

 

눈을 떠야 돈을 벌고,

눈을 떠야 결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예수님의 우선순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본문의 하나님 나라는 천국을 의미하며

의는 하나님의 정의 공의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도 이뤄지며

하나님의 정의, 공의가 이 세상에 이뤄지기

까지 천국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공평하신 공의가 이 세상에

이뤄지도록 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5.성도들의 삶의 우선순위.

자녀 보다 부모가 우선인 사람이

효자 효녀입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자신의 생명 보다

하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생명 보다 주님이

우선이었고 선교가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선교가 우선이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주님의 약속대로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것을 체험해 보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더하시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세웁시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


선교와 전도에 최선을 다합시다.

범사에 감사를 드립시다.

헌신하고 봉사하며 충성하고 순종합시다.

 

하나님과 교회와 영혼을 사랑합시다.

큰 믿음을 가집시다.

 


성도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가족이나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세요.

그리하시면

가족과 자녀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먼저 예배를 드리세요.

축복을 보장해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세요.

그리하시면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먼저 선교와 전도에 힘쓰세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먼저 교회를 사랑하세요.

그리하시면 집을 축복해 주십니다.

먼저 기도 드리세요.

그리하시면 응답과 축복이 보장됩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기우리시고 바치세요.

 

그리하시면

생애를 지켜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열 손가락의 우선순위

1)하나님의 영광,

2)예배(주일성수와 예배마다 참석, 새벽기도참석,

3)선교와 전도, 4)감사와 십일조, 5)성령 충만,

6)무시로 혹은 시간을 정해서 성령 안에서 기도,

7)하나님과 교회에 충성, 8)순종,

9)성령의 열매,

10)가족구원, 가정예배, 성도와 가족과 자녀축복.

이상은 제 생각입니다.

 

기도도 우선순위가 있지요.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성령의 역사를 구하고 교회와 목회자위해 기도,

성도들과 가족을 위해 이웃의 구원을 위해

기도드리고 사업과 직장과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교회는 부흥되고

성도는 축복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원천의 기름진 축복과 만사형통의

복과 영혼이 잘 되시고 범사에 넘치는

축복과 강건하시고 안전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금요철야예배설교]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본문 / 신명기 32:10~12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앙과 고난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굉장히 밀접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고난이 다가왔을 때, “문제가 천천히 해결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과정을 통해 일하기 원하십니다. 과정은 믿음이 단련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과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이 왔을 때에 우리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금방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깊이 잠들어계신 주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님은 일어나셔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 처음부터 풍랑이 일지 않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풍랑이 일기 전에 풍랑이 일지 않게 하셨다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슬아슬하게 보내는 것을 은근히 즐기시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에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 말고, 아예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일으키시는 분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같은 분으로 여겨질 때, 우리에게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삶을 어렵고 힘든 상황 속으로 몰아넣으시는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죽도록 기도해야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늑장대응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늑장을 부리시는 것 같습니다.
요셉이 고난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습니다.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입니까. 앞에는 길이 없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마병들이 몰려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은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았습니다. 부도직전에 있는데, 은행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돈이 준비되지 않아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위기의 상황에 내몰릴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시시각각 닥칩니다.

우리는 쉬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편안한 삶,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문제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힘들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산을 오를 때, 4륜구동의 힘이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단숨에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걸어서 땀 흘리며 힘들게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면,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에 올라가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힘들지 않고 정상(頂上)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혹입니다.
쉽고 빠른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쉽고 빠른 길을 걷다 보면, 경험할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정상에 쉽게 오른다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산을 오를 때에 경험할 수 있는 비경(祕境)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면, 쉽게 정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올라갈 때, 순간순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동안 다리의 근육이 단련됩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정상에 이른 사람이 느끼는 기쁨과 걸어서 정상에 이른 사람이 느끼는 기쁨은 다릅니다.

요즘 세상이 척박합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집니다. 사는 것이 전쟁 같습니다. 살다 보면, 고난이 성난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청소년들 중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역경지수가 없습니다. 머리가 좋고, 실력이 있고, 능력은 있는데, 역경지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우울해집니다. 일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실패해도 인생이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을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사는 것보다 강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하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본문 11~12절에 보면,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해서 새끼들을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어릴 때에는 어미는 새끼의 보금자리를 아주 포근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조금만 지나면, 보금자리를 어지럽혀서 그곳에 있지 못하게 만들어서 새끼를 밀어내어버립니다.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금자리에서 떨어지는 독수리 새끼처럼 죽는다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 14:11).

노년이 되어 살아온 삶을 회고할 때, 무엇이 기억날 것 같습니까? 여행가고 편하게 살았던 것이 기억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이 기억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삶이 힘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힘든 삶을 통해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이 힘들수록 얻는 혜택이 있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강해집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하다가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좋았던 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굉장히 힘들었던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보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다.
힘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열심히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 않고 강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강해지려면 힘든 순간을 반드시 보내야 합니다. ‘그래도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편안하게 살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어려움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풍랑이 치게 되어있습니다. 위기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약한 상태로 있으면, 당할 수 있습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운동할 때에 힘이 들어야 제대로 운동이 됩니다.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운동은 숨쉬기운동밖에 없습니다. 숨을 몰아쉬고, 근육이 고통을 느낄 정도로 운동해야 제대로 운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강해져야 합니까? 강해져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치기 전에 어미 독수리는 자신의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습니다.
독수리 새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독수리 새끼가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며 날갯짓을 할 때에는 거의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날개를 퍼덕거립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어미가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수직으로 떨어집니다. 새끼가 살려고 날갯짓을 하지만, 아직 날개에 힘이 없어 계속 떨어집니다. 그때 새끼는 죽는다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어미는 이것을 한 번만 하지 않습니다. 한 번만 해서는 독수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미는 수없이 반복해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새끼는 최악의 상황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바람을 가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죽을힘을 다해 퍼덕거린 새끼만 독수리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닭은 주인이 잘게 부셔서 던져주는 것만 집어먹습니다. 닭은 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편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위험 앞에서 도피적인 삶을 살고, 수동적인 삶을 살고, 안일하고 편안한 삶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어려움이 생겨도 죽는다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독수리들은 벼랑 끝에 집을 지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새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실 때에 벼랑 끝을 사용하십니다. 사람은 벼랑 끝에서 강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에게서 괴력이 나옵니다.

독수리 새끼가 둥지에 있는 동안에는 독수리에게서 괴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벼랑 끝에서 떨어질 때, 독수리에게서 괴력이 나옵니다.
둥지 안에서 “날 때는 이렇게 나는 것이다. 1초에 날갯짓을 몇 번 해야 한다.”라고 훈련받는다고 해서 괴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 새끼가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을힘을 다해 날갯짓을 합니다. 새끼가 떨어져서 바닥을 칠 때까지, 어미는 새끼를 돕지 않습니다. 어미가 새끼를 도우면 안 됩니다. 도울 것 같으면, 떨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미는 새끼가 날갯짓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새끼를 내버려둡니다. 날갯짓을 통해 새끼는 독수리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힘들다면, 그것이 정상(正常)입니다. 힘들지 않고 편안한 삶은 비정상입니다. 힘든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갑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날개가 강하게 작동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힘든 순간이 우리에게는 반갑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 나를 나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습관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쉬운 것에 무릎 꿇는 것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아주 쉬운 일에 쉽게 포기하고 무너지는 것도 여러 번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힘든 일을 이겨내는 것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쉽게 무릎 꿇어버리면, 거기서 인생이 멈추어버립니다. 어려움이 왔다고 해서 무릎 꿇어버리면, 거기서 인생이 끝납니다.

어려운 일을 이겨내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죽을 것 같아도 계속해서 날갯짓하다보면, 날개에 힘이 생깁니다.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삶이 강력해집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신이 점점 강해져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맨바닥에서 생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을 통해 믿음이 점점 강화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맷집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잘 감당하게 되어 자신이 강해졌음을 느끼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전에는 반쯤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제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 같은 때에는 하나님께서 받쳐주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우리의 기도는 늘 맴돌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고,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기도하게 됩니다. 늘 골골거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비상(飛上)하게 하십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편안함이 오늘날 우리에게 최고의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미 그 속에 감염되어있습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편안한 삶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적입니다. 편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까?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성공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영적 독립선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독립’이라는 은밀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문제를 해결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기도를 멈춥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원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기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에 나오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으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쉬운 길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백성들을 먹이실 때에도 매일 하루분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틀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 위해서는 이틀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만나와 메추라기를 모으지 못하게 하시고, 매일 하루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늘로부터 매일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세월이 흐를수록 삶이 점점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어도, 나중에는 편안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문제가 끝나고, 아쉬움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믿음 생활을 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많이 주셔서 넘치게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힘듦과 어려움을 겪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그것이 결정됩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만이 형통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형통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때로는 형통입니다.
내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이 형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형통입니다.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형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셉을 보세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에 보면,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창 39:2).
모든 것이 자신의 꿈과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데, 창세기에는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도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는데,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욥기에서 욥이 발견한 것이 그것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42:5).
욥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회복시켜주셔서 감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 한 분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 삶이 어렵고 힘든가, 편안하고 풍족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찾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붙들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복된 삶입니다. 시련이 닥치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함으로 믿음이 자란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그 후에 어떤 문제가 닥쳐도, 하나님만 의뢰하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합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구하지 마시고, 믿음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올수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전혀 없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 삶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면, 어려움이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는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어렵게 하십니까?”라고 기도합니다. 문제에 걸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반면,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를 배우기 원하고, 기도가 깊어지기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기도를 배우고 원하고,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지, 어려움을 달라고 했습니까?”라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나 어려움을 달라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기도가 깊어지고, 기도가 성숙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어려움을 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언제 기도합니까? 벼랑 끝에서 기도합니다. 생존의 문제가 걸렸을 때에 기도합니다. 언제 죽기 살기로 기도합니까? 죽을 만큼 어려움이 닥쳤을 때, 죽기 살기로 기도합니다.
생사(生死)를 건 기도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편안할 때에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죽을 만큼 강력한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사(敎會史)를 살펴보면, 기도의 깊은 경지에 이른 분들은 고난의 깊은 골짜기에서 기도를 배운 분들입니다.

아무나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기도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려고 애쓰는데도 기도의 줄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묘함과 간교함으로 인해 우리는 조금만 배불러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를 통해 나타납니다. 기도의 강도(强度)를 보면, 얼마나 절박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찾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필요를 구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구하는 것과 가진 것을 하나 더 구하는 사람은 기도의 태도가 다릅니다. 한 끼를 굶은 사람과 1주일을 굶은 사람의 기도가 같겠습니까. 먹을 양식을 구하는 사람과 명품 가방을 구하는 사람의 기도가 같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필요를 놓고 기도하든, 절망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든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기가 찾아오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바꾸기 원합니다. 상황이 바뀌면, 행복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변하는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끝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리와 관련된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쉽게 잊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종종 막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앞에 서게 하셨습니까? 왜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게 하십니까? 왜 광야와 같은 불편한 곳으로 몰아가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으로 이끄셔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고, 관록이 붙고, 경험이 쌓이고, 계급장과 훈장이 늘어나면, 우리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보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말했습니다(출 14:13).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닌데, 모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습니까? 무엇을 해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때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개의 줄을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만을 붙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여러 가지 줄을 잘라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다 헛된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고난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줄들을 모두 잘라버리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줄만을 붙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자랑을 모두 버리게 하시고, 헛된 야망을 모두 포기하게 하시고,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믿게 하십니다.

누가 지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기도생활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기도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 힘들어질 때, 기도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당한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이깁니다. 그때 문제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점점 커집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렵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어려워져갑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갑니다. 삶이 힘듭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안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구한다면, 그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은 위기를 넘나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위기 속에서 기도를 배우고, 위기 속에서 믿음이 자라고, 날아오르는 법을 배웁니다.
어려우면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하세요. 기도를 포기하지 마세요. 어려움을 통해 기도를 배워야 할 사람이 기도를 멈춘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와도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끝에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의 환경이 바뀌어도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함께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위기는 축복입니다. 위기는 우리를 우리 되게 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드십니까? 신앙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당연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벼랑 끝에 계십니까? 앞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본래 삶은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이 없다면, 기적도 없습니다.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고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길이 없어 방황하고 헤매다가 길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공허한 이야기를 들으며 방황하다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는데, 인생의 끝에서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전부가 되십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지금 힘든 것이 정상입니다. 힘들어야 합니다.
힘들지 않은 일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믿음을 강화하여 믿음의 날갯짓을 통해 비상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련이 왔을 때에 점점 더 강력하게 피어오릅니다. 믿음을 통해 환난을 통과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고 솟아오릅니다. 아름다워집니다.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왜 삶의 시련 속에서 절망합니까? 무엇을 바라봅니까?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만을 신뢰하세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절망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절망을 무릎 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정확하게 개입하십니다. 때를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도 때도 없이 팔을 내미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린 후, 새끼를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순간에 날아가서 새끼를 받아 올립니다.
새끼 독수리가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도 어미 독수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바닥을 치기 직전에 어미 독수리는 총알같이 날아가 새끼 독수리를 받아서 올립니다.
중요한 것은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등에 업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렸다가 받아 올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새끼 독수리를 독수리가 되게 만듭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새끼가 죽지 않도록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벼랑으로 떨어지는 새끼 독수리를 등으로 받아 올리는 것은 새끼 독수리를 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가오는 수많은 환난과 시련 앞에서 굴하지 않고, 날아오르는 독수리가 되게 하십니다.
어려움이 와서 기도했는데도 응답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자기 마음대로 날아다닙니다. 언제든지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습니다. 악천후(惡天候) 속에서도 가고 싶은 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참새, 비둘기와 다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새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릅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돌진하는 것입니다. 독수리와 같습니다.
독수리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날개로 자기가 방향을 정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방해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멈칫하지 않습니다. 날개를 펴고 날아갑니다.
자유롭게 날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되게 하셔서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독수리가 되면, 그 순간부터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생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그것 때문에 멈칫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날아오릅니다.
끙끙 앓으며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날갯짓을 통해 강해져서 오직 여호와만을 앙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실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 만이 우리가 바라볼,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삶에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 역경 앞에 무릎 꿇지 마시고, 오히려 역경을 무릎 꿇게 만드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날아오르시기 바랍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금요철야예배] 열려진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열려진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라
본문 / 창세기 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적인 삶을 살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은혜, 특권과 축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주신 특권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 하여금 대리적 통치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져버렸습니다. 그 순간 인간에게 있는 신적 능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람은 피조의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며 살아야 하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오히려 지배를 받고, 굴복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극도로 망가지고,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지만, 타락한 인간에 의해 땅이 황폐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만든 문명이 세상을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피조물들이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인간의 범죄는 악독해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만든 문명은 파괴적이고 퇴폐적이고 비극적입니다. 그래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퇴폐적이고 타락한 문화는 갈수록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비인격적이고 파괴적이고 음란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 속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을 파괴합니다. 악한 것을 미화(美化)합니다.
인터넷 문화 속으로 들어가 보세요. 퇴폐적이고 타락한 문화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과 영혼을 망가뜨립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죄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후에 만든 문화와 문명은 갈수록 절망적이고, 비극적으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서운 세상입니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참 악합니다. 어린 아이의 속에도 악이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세상이 악하고 어둡고 비극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을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점점 좋아져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점점 악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하므로 일어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악한 문화와 멸망의 세계로 달려가는 이 땅을 위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이 구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masterpiece, ποιημα)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걸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태초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만드시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 있는 포도나무에 접붙임 된 가지가 되었습니다. 포도나무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가지가 받아 열매가 열린 것처럼, 소망이 없던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살아갈수록 죄만 늘어났습니다. 악취만 더해갑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악한 존재였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깨닫습니다. 자기 안에 선한 것, 의로운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소망이 전혀 없고, 하나님 앞에 멸망해야 마땅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소망 없이 살던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캄캄한 가운데 살아가던 우리에게 소망의 빛이 비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실패한 인간에게 재창조의 기회를 허락하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셨던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황폐하고 소망이 없는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다스리고 지배하여 악이 창궐하던 세상의 한 가운데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소망 없는 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 이 세상을 건져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을 그대로 두면,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악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깊숙한 곳에 있는 죄악에 직면하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악한 궤계가 있습니다. 복음이 아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실패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걸작품이 된 우리는 도피적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세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세상을 복음을 정복하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충만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화명령을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생산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모든 생명은 재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에게 허락하신 독특한 힘입니다.
작은 물고기 속에 생명이 있으면, 그 속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힘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랍니다. 번식합니다. 번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체에 주신 비밀입니다.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재생산합니다. 생명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명체든 생육하고 번성하는 힘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력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은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은 예수님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마른 가지와 같았습니다. 가만히 두면, 더 말라버립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점점 더 말라버립니다. 원나무에서 잘려졌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봄에 물이 가득 차오른 나뭇가지와 같습니다. 봄에 물이 오른 나뭇가지를 보세요. 자르기도 힘듭니다. 생명의 기운이 있기 때문에 가지가 힘 있게 뻗어나갑니다. 잎사귀가 돋아납니다. 열매가 맺힙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합니다. 생명의 힘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땅속의 기운을 빨아올려서 가지 안에 생명의 힘이 충만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에 포도가 맺힙니다.

생명의 힘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안에는 수많은 씨앗이 있습니다. 씨앗이 번식하면, 어마어마한 농장을 이룹니다. 신비롭습니다. 끝없이 번식하고 번성합니다.
씨앗 하나에 담긴 생명력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작은 씨 안에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생명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안에 생명력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에는 얼굴에 핏기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삶이 힘들어 지쳤습니다. 생명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안에 생명의 기운이 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면, 하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주어집니다. 하늘의 부요함이 우리 안에 찾아와 세상의 것들로 인해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영적 생명을 공급받았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중생했다는 것은 구원 받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육체적 생명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세상의 것과는 다른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점점 자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고 있습니다. 물오른 인생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산불이 나서 나무가 다 타버린 것 같은데,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납니다. 생명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내 안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력이 분출되어 옆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어있습니다. 집안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나중에는 가족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 속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세요.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폭발력이 있었습니다. 열두 명에서 120명이 되고, 120명에서 3천 명이 되고, 5천 명이 되고, 나중에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퍼져나갔습니다.
생명의 특징은 번식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습니다. 재생산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령의 불을 받으면, 그 한 사람을 통해 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별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안에 있는 생명이 터졌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임하여 바울이 탄생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불이 붙어 바울이 태어났고, 바울은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힘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소멸되는 힘이 아니고, 왕성한 확장력을 가진 힘입니다.
생명은 확장되고 번식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급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힘이 작동될 때,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은 생명의 힘의 지배를 받습니다. 생각 안에 생명의 힘이 역사하면, 생각이 팽창되어 풍성해집니다.
신자가 은혜를 받으면, 생각에 창의력이 생깁니다. 긍정적인 사고(思考)를 하게 되고, 창조력이 생깁니다. 생각이 쪼그라들지 않고,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자의 말은 소모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생산력과 창조력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을 가진 신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생명을 낳습니다.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가 흘러나옵니다. 죽은 언어는 절망적입니다. 원망하고 낙심하고 비판하게 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언어는 다릅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격려가 있고, 축복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생명력이 있는 사람은 말을 하면, 사람이 살아납니다. 생명의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죽음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생명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압니다. 글을 쓰더라도 죽이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글을 씁니다.
생명의 언어를 통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삶에는 놀라운 열매가 맺힙니다. 생명의 힘을 가진 사람의 땀은 거대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오늘날에는 헛된 땀을 흘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날 헛수고하다가 허무하게 삶을 마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열매가 나타납니다. 번식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이후, 이 땅에 엉겅퀴가 나고,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 열매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힘은 힘대로 들고,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헛된 수고를 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다릅니다. 의미 있는 땀을 흘립니다. 수고한 만큼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둡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은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는 의미도 있지만, 저주가 끝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속에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시는 생명의 열매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입니다.
힘으로 일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의 힘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때문에 나무에 있는 생명으로 인해 가지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님의 안에 있는 생명에 접붙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 우리에게 극상품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제의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우리는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께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면, 죽음의 권세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중등부와 고등부의 학교기도회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30개의 중학교에서, 37개의 고등학교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수십 명의 학생이 모여 기도하는 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학생 한 명이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기도하는 학생이 점점 늘어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왕따 당하는 학교도 있고, 선생님들이 반대하는 학교도 있고, 교장선생님이 기도회를 방해하는 학교도 있지만, 학생들이 눈물 흘리며 기도한다고 합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더 많은 학교로 번져나갈지 모릅니다. 학교 안에서 기도회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상 속에는 사망의 힘, 쇠퇴의 힘이 작동합니다. 죽이고 끌어내리는 힘이 작동합니다. 비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영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을 빼앗아갑니다. 사람들은 좌절하고 낙심하고 한숨지으며 살아갑니다. 힘을 빼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세상에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눌려있습니다. 사람들의 영이 눌려있습니다. 사람들의 정신이 눌려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눌려있습니다. 환경과 사람의 말이 짓누릅니다. 어두운 세상의 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곳에서는 생명의 영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살려면, 생명력이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일으키는 힘이 일어나야 합니다.

화초는 밟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잡초 안에 있는 생명력은 굉장합니다. 그래서 콘크리트를 뚫고 나오기도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력은 잡초 안에 있는 생명력과 같습니다.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납니다. 힘든 일이 있는데도 입에서 찬송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력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는 죽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왔을 때에 눌린다면,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있어도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에도 힘 있게 찬양해야 합니다. 힘 있게 찬양하면 마귀가 떠납니다. 어둠과 슬픔이 떠나고, 염려와 낙심, 한숨이 떠납니다.

누가 나를 욕한다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이 몰려온다면, 그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힘 때문입니다. 내 안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련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생명력이 강하게 분출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력을 옮겨야 합니다.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집회는 수원지와 같습니다.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집회 시간에는 우울함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기뻐하기 때문에 우울증이 파고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력은 죽음의 흔적을 없애버립니다. 사망의 냄새를 사라지게 합니다.

여러분의 안에 생명의 힘이 넘쳐납니까? 죽음의 힘이 넘쳐납니까? 생명의 힘이 넘쳐나야 합니다. 생명력이 있으면 번식합니다. 생명력으로 인해 열매를 맺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잠재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가능성입니다.
씨앗 하나를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씨앗 하나가 심어지면,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를 거두어서 그 속에 있는 씨앗을 또 다시 심으면,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가진 가능성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흥분됩니다.

성경에서는 씨앗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씨앗 안에 가능성을 숨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살던 집에 텃밭이 있었습니다. 유실수도 심고, 온갖 작물을 심었습니다. 씨앗이 자라 열매가 맺히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온 이상,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그냥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시간은 우리의 심령에 씨를 뿌리는 시간입니다. 설교자가 가진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은 말씀을 통해 성도들의 심령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씨를 통해 무슨 역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다 보면, 어느 날 말씀이 믿음과 만나 말씀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그때 말씀의 씨앗이 자라 열매 맺게 되고, 말씀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말씀 자체가 강력한 것입니다. 믿음이 말씀과 만나 작동되면, 말씀이 폭발해버립니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있던 것들이 일어나 우리 안에 있던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들이 사라지고, 인생이 꽃피우게 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가 자신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능성을 가두어버립니다. 열등감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직업이 어떠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대가로 지불하시며 우리를 기막히게 빚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존재의 귀중함을 깨닫는 순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놀라운 것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를 대행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엄청난 가능성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가능성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심성으로 말미암아 죽어있던 것들이 다시 위대한 작품으로 살아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꽃피우게 됩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나이를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8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대작을 그렸습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80세에 불후의 고전 〈파우스트(Faust)〉를 썼습니다.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90세까지 지휘를 했습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92세까지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92세까지 발명에 몰두했습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는 95세까지 하루에 6시간씩 연습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특징은 자신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정체성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살아갈 때, 자신감이 회복됩니다.

우리는 외적인 조건이나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주눅 들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답게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의욕이 일어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선물이 무엇입니까?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소망 없이 살았습니다. 소망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절망과 좌절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복음을 경험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자신감이 회복되었습니다. 제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역하는 것이 신납니다. 설교하는 것이 신납니다. 제 안에 열정이 있습니다.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생각하면, 기대가 됩니다. 복음의 영광과 광휘(光輝)에 빠지면, 세상의 것들로 인해 주눅 들지 않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얼마나 당당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빌 1:21). 바울은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8).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신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갈렙처럼 남들이 도전하지 않는 영역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수 14:9).
기적만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을 사용하기만 해도 충격적인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 중에도 엄청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 중에도 큰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라는 기막힌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안 돼”라고 결론 내렸다면,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의 삶에 있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마음껏 표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의욕이 넘치고, 자신감이 넘쳐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다스리는 권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통치권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각 생물의 이름을 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문화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세상의 문화에 끌려 다니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스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통치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통치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9). 우리는 왕의 자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권세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통치하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명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에게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했습니다(행 3:6). 명령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치유하실 때 “아이야 일어나라(눅 8:54)”,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명령권과 통치권을 사용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라고 말했습니다.
권세를 가진 자들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통치권을 베드로가 동일하게 사용했을 때, 못 걷게 된 이가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성령으로 충만한 그들에게 영적 권세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통치권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다스리는 권세를 구체적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권세 잡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권세로 제압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가운데 큰 권세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를 제압하려면, 성령의 검을 가지고 선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복종하고,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귀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명령권자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명령해야 합니다. 우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권세를 잘 쓰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돈의 권세가 나를 지배하려고 하면, 명령해서 내쫓아야 합니다. 어두운 생각과 근심도 명령해서 내쫓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를 다스릴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를 다스릴 자가 없습니다. 어떤 환경도 우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어두운 환경이 나를 누르면, 어둠의 영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물질의 세계를 다스리기만 해도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질에 끌려 다니면, 신자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세계에 끌려 다니면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줄에 매인 개와 같습니다. 줄에 매여 있는 개는 주인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갑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돈이 주인이 된 인생,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주 적게 가진 듯이 살고, 아무리 적게 가졌어도 엄청난 것을 가진 듯이 사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엄청나게 많아도 아주 적게 가진 듯이 사는 법을 배우세요. 아무리 적게 가졌어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을 가진 듯이 사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별 것 아닌 것에도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왕의 통치권은 기도를 통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다스림의 영역에 속합니다. 적극적으로 기도하세요.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 그곳에 빛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이 어두워지면, 진리의 빛이 영혼을 지배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불의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선포하세요. 불의하고 어둡고 더럽고 악하고 음란한 것이 떠나가도록 선포하세요. 무너지고 깨어진 것이 수축되고 재건되도록 기도하세요.

우리가 다스려야 할 영역이 매우 많습니다. 세상 주관자인 마귀가 다스리도록 방치되어있는 세상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마귀들의 무대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 전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두움이 떠나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선제공격해야 합니다. 반전의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명령권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이 땅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사용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스릴 때, 그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면, 그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수세에 몰려 전전긍긍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스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어디서든 왕의 권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직급과 상관없습니다. 신분과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의 대행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통치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번식력과도 같습니다. 번성하는 힘입니다. 확장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분출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해 잠재력과 가능성이 깨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마음껏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다스림의 권세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지배 받지 마세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에 여러분 모두 쓰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망의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 소망을 일으키는 일에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이 땅은 소망 없는 땅이 되어버립니다. 버려진 땅, 사탄의 권세 아래에 지배 당하는 땅이 되어버립니다.
그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꾸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생명력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잠재력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왕의 권세를 아낌없이 사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금요저녁예배] 감정보다 믿음에 우선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자 / 감정보다 믿음에 우선하라

본문 / 열왕기상 19:1~8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우리의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떤 시대보다 감정의 영역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 우리의 행불행(幸不幸)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감정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 세대에서는 감정이 무시되었습니다. 감정을 표출하는 데 문화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울지 못하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큰 소리로 웃지 못하게 하며 감정을 억압시켰습니다.

과거에는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참아야 했습니다. 외로워도 참았습니다.
한국 문화 속에는 참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병(火病)이 되었습니다. 화병은 세계에서 통용되는, 한국인의 병을 가리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만 있는 병입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병이 됩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억압하고 무시합니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그것이 암이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감정을 억누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감정이 순화(純化)되어야 합니다.

감정은 중요한 것입니다. 감정의 영역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감정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감정이 죽으면, 사람은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감정에서 오는 것입니다. 감정이 살아있어야 모든 것이 생동감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이 건강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생동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줄 압니다. 좋은 것을 좋다, 좋지 않은 것은 좋지 않다고 표현할 줄 압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 점점 사라집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것을 ‘포커페이스(poker face)’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표현하고, 감탄사를 터뜨리고, 박장대소하는 등의 모든 것이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애하고 사귐이 깊어지려면, 감정적 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을 너무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감정 때문에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정의 요소를 잘못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 전체가 무너집니다.
감정에 빠져 살다 보면, 감정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면서 삶의 위기를 맡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감정의 문제에 구멍이 생기고, 감정이 깨어지면, 감정의 영향력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큰 사고가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의지보다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느낌(feeling)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설화법(直說話法)을 사용하여 말합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느낌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느낌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면,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오늘날 감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초래되는 위험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무엇보다 감정이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의 대전투에서 승리한 전사(戰士)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냥 선지자가 아닙니다. 대선지자입니다.
그는 어둡고 불의한 시대와 맞서서 하나님 편의 선두에 서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850명을 홀로 상대했던, 강성(强性)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그 엘리야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우울해진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자살충동을 느꼈습니다. 자살할 수 있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간단하게 다룰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엘리야,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대선지자였습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승리했던 전사였습니다.
그런데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라면, 갈 데까지 간 것입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살하지는 못하고, “하나님, 데려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간 것을 의미합니다. 감정이 곤두박질친 상태입니다. 절망의 상태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갈 데까지 간 것 아닙니까. 더 이상 갈 곳이 있겠습니까.

기막힌 승리를 거둔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交感)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뜨겁게 경험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영역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가 영적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영적 침체(depression)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감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모든 것이 싫습니다.

감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영향을 준 것은 감정적 요소입니다. 감정을 잘못 다루면, 감정이 우리의 삶 전체를 뒤집어놓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습니다. 그 상태로 내버려두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감정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묘한 것입니다. 어떤 감정에 휩쓸리면,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심장, 신장 등의 기관이 아플 때, 약을 먹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감정의 문제는 약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이 오르고, 밥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가 흔들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최악의 상태에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것이 감정의 영역입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중심에 놓이는 순간, 삶은 불행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삶은 위태로워집니다.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앞에 와있게 됩니다. 우선됩니다. 감정이 나를 이끌고 갑니다. 감정이 나를 주도합니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사로잡아버리면, 감정이 나를 어떤 지경에 빠지게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감정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가에 매우 민감합니다. 자신이 지금 즐거운지, 외로운지, 슬픈가에 매우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상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면,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게 됩니다.

우리는 감정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충동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의 말 “내일 너를 죽이겠다.”는 한 마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갑자기 곤두박질쳤습니다.
그에게서 강력한 전사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갈멜 산 정상에서 승리했던 선지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갑자기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길르앗에서,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입니다. 그는 전사 중의 전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과 기적을 한두 번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엘리야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고, 어마어마한 기적을 체험하고, 온갖 훈련을 받았다 할지라도 엘리야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뒷부분에 보면, 야고보는 엘리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기록했습니다(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정상에서 850대 1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위대한 역사는 엘리야 자신의 인간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력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주목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갈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시선을 놓치고, 지금 일어난 형편을 주목하고, 한 여인의 말이 비수에 꽂혔습니다. 그때 본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는 순간, 추락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 등의 직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했다 해도 내일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잘 했던 사람들 중에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상태에 몰두하는 순간, 갑자기 허망해집니다. 갑자기 낙심하게 됩니다. 갑자기 절망하고, 갑자기 울적해집니다.

화려한 무대가 끝나고, 커튼이 내려진 후, 무대 뒤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습니다. 자신을 묵상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비참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자기를 비하하는 감정에 빠집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빠지면, 감정이 무너집니다.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울적해집니다.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감정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감정은 변화무쌍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갖습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합니다. 감정이 파도를 탑니다.
바다를 보면, 파도가 없을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파도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다양한 파도가 다양한 모습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감정의 바다가 그렇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파도처럼 불안정합니다. 바다 물결에 밀려 요동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천의 얼굴을 갖습니다.

감정의 파도가 높이 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파도가 난폭해지면, 큰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파도에 자신이 휩싸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외로움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다양합니다. 그런데 외로움이 나를 사로잡는 순간,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본래 쉽게 변하는 존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변하는 것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변하는 것 중에 가장 잘 변하는 것이 감정입니다. 감정보다 쉽게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에 의존한 삶을 믿을 수 있을까요? 감정의 영향을 잘 받는 기질을 가진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늘 불안정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불안정합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영역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자주 사고를 칩니다.

신자가 감정의 영역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자주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우울증 환자가 많습니다. 신자가 되었지만,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전의 기질이나 감정의 영역이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영역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위험한 상태에 빠질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삶을 살아갑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귀는 우리의 감정에 집중하라고,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라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지금 느끼는 것이 옳은 것이고, 전부라고 속입니다. 그것에 충실하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감정을 들끓게 합니다. 충동질합니다. 감정이 앞장서서 우리를 끌고 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감정에 끌려 다닌다면, 감정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감정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은 미래가 없습니다. 어디로 끌려갈지 알 수 없습니다.
감정에 빠지지 마세요. 감정에 몰입하지 마세요. 감정에 속지 마세요. 감정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도 습관입니다. 오래된 죄성에 의해 속박된 감정은 습관이 되고 기질이 됩니다.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환경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질입니다. 어두운 감정이 그 사람을 계속해서 지배했기 때문에, 감정을 다루지 않은 상태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두 번 은혜 받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화된 슬픔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음에도, 습관화된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울해집니다.
우울이 삶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자신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기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울한 기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울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감정적으로 침체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의 힘으로 감정을 해결하려 하면, 실패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기려고 하다가 오히려 참담한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두운 감정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외롭고 우울한 감정을 이기려고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를 만날 때에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외롭고 우울한 감정이 다시 찾아옵니다.
감정을 이겨보려고 나들이하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신나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다시 우울해집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동안에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즐거워지려고 노력할수록 실패합니다.
자신이 해결하려 할수록 자신의 상태가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불쌍하게 보이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의 초점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둠의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울의 감정에서 기쁨의 감정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렇게 전환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무궁한 기쁨을 누리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 우리는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만이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감정이 여러분의 중심에 놓이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놓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좌소(座所)에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실 때, 우리의 삶의 감정을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고개를 돌리면, 놀라운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예수님께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려고 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울한 감정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깊이 빠져들 뿐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의 감정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웃고 싶다고 해서 웃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기쁨은 자가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려고 하지 마세요. 감정에 집중하지 마세요. 때로는 외로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외로움의 감정에 매달려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관심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 더욱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전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주목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외로운 감정, 우울한 감정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행복과 즐거움 때문에 춤을 추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울할 틈이 없습니다.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즐거움과 행복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무한히 흘러넘칩니다.

기쁨이라는 단어 속에는 ‘충만’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그 속에는 우울함, 울적함, 답답함 등의 어두운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다운되고, 무엇인가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즉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곤경에 처하고 절망 속에 있을 때,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감정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을 때,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납니다.

우울증은 영적 태만으로부터 비롯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울증의 요인이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울증의 요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영적 태만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요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찾는 것에서 다른 것으로 시선을 옮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고통이 우울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둔 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 상태에 매우 예민하여 그 속에 빠져듭니다.
여러분의 감정 상태에서 빠져나와 그리스도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찾되 간절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가져야 할 처방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느낌이 대세입니다. 느낌이 강조되면, 감정이 왕이 됩니다. 감정이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느낌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이 중요합니다. 감정이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 더 이상 약이 없습니다.
감정에 빠진 사람들은 사실 여부보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무게를 둡니다. 자신의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34편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34:8). 여기서 ‘맛본다’는 것을 감정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목사는 “맛보아 안다는 것은 어떤 느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험해보기 전에는 느낄 수 없다. 이것은 감정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맛보고 난 후,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시편 기자가 맛보아 안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진리를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깨달을 때에 찾아오는 것이 기쁨입니다.

맛본다는 것을 체험에만 초점을 두면, 핵심을 놓쳐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관심의 초점은 진리에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깨달을 때에 오는 기쁨은 순간적으로 느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달음으로 온몸이 전율하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말씀의 의미가 깨달아지고, 말씀이 영혼을 파고들어오는 것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체득함으로 느끼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다’라고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삶을 살면, 감정의 지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전부가 아닙니다. 감정은 부분입니다.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것은 사실입니다. 진리입니다.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도 아닌데, 응답을 받지 못하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질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영적 거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느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은 느낌입니다. 자기 느낌입니다.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지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상황에 집중하다 보면,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는 상황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상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심한 모습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우리도 엘리야처럼 될 수 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처한 형편을 보니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니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이세벨의 독기어린 말이 그의 가슴에 꽂혔습니다. 외로워하고 있을 때에 영향력 있는 사람의 한 마디는 사람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당함의 근거는 우리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이나 모습에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믿음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감정의 지배를 벗어나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우울한 감정을 이겨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끌고 가야 합니다. 그때 생기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의 활기를 유지할 때, 강력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의 횡포에 시달립니다. 더 우울해집니다. 더 힘듭니다. 이겨내지 못합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울하면 술을 마십니다. 과할 정도로 운동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화가 나있습니다. 늘 우울해합니다.

살다 보면, 감정이 망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에 위로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소금을 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우리의 삶을 참 복잡합니다. 감정이 파도칠 때,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사고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망증이 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역사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점점 빠져 들어갑니다. 마침내 낙심합니다. 그는 진리가 아니라, 감정에 집중했습니다.

비가 와도 구름 위에는 태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이 없다고 느끼면, 태양이 없습니까? 태양이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힘든 순간에도 주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침묵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난에 대한 해석입니다. 자신의 처지로 인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어내어 자신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을 자기가 만들어내어 자기에게 일어난 고난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자기 스스로 공격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가라앉아있던 감정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정을 분석하지 마세요. 말씀을 묵상하고, 믿음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충만하여 여러분의 감정이 말씀의 지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가 여러분을 붙잡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라고 말했습니다(엡 6:14). 그러므로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를 둘러 무장해야 합니다.
허리띠를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단단히 매어야 합니다. 말씀을 놓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놓치면, 감정이 그 자리에 끼어듭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진리의 허리띠가 나를 붙들어주고, 나로 하여금 중심을 잡게 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진리가 느슨해지면, 감정이 밀고 들어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리스도에게서 시선을 떼게 되고 혼란스러워집니다. 그 지점에서 모두 추락하게 됩니다.

상황을 떠올리지 마세요. 말씀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위력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파도치는, 여러분의 감정을 믿지 마세요. 요동치지 않는 진리를 믿으세요.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시선을 놓치면,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영적 시야가 흐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시선이 산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믿음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시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시선을 맞춥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여호와께로 얼굴을 돌립니다.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정은 어려운 상황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고, 어려운 상황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의지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지속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감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있게 하는 동안 말씀이 강화됩니다. 말씀이 강화될수록 감정의 파도는 잠들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오고,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염려, 우울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울증 환자들이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괴로워 술을 마시는 여 성도가 있었습니다. 의사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약물을 복용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말씀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회복되었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위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시편 42편 11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불안하십니까? 낙심 가운데 갇혀있습니까? 지쳤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까? 그 가운데 멈추어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가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문제 가운데 휩싸여 기분이 나쁘고, 짜증이 나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감정에 따라 춤추지 말고, 믿음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무엇을 느끼는가에 몰두하지 마시고,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것에 집중하지 마세요. 믿고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환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감정도 안정감을 얻고, 믿음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회가 굉장히 불안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불안정한 것이 특징입니다. 굉장히 요동칩니다. 정치적으로도 변화가 많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합니다. 별 사건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자살 원인의 1위가 우울증입니다. 한국에서는 화병이 더 많습니다. 분노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뛰어내립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감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환경은 언제나 파도칩니다. 그 속에 우리의 감정을 던져놓으면, 감정이 어떤 파도가 되어 나를 삼켜버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의 감정을 지배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감정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순화되어야 합니다.

어둠의 감정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에게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오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신앙생활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객관적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쁨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대했던 엘리야,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연약한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도 보장되어있지 않습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감정에 집중하지 마시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에 사로잡히면, 진리가 나를 지배하고 통제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으로 인해 충만한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울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펴세요. 말씀을 들으세요.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금요철야예배]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문제보다 목표에 집중하라

본문 / 빌립보서 3:12~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 인생은 문제투성이입니다.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느라 세월을 보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인생을 다 보내면 안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문제 속에 갇힙니다.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는 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문제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에 도달해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에 매이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문제를 따라가지 말고, 목표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문제를 푸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기도하다 보면, 수세에 몰릴 수 있습니다. 문제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든 해결되지 않든 문제 속에 갇히게 됩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향해 기도하며 나아가다 보면, 문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늘 고민을 풀어놓고, 넋두리하듯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과녁이 정확해야 합니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떻게 필요한지 목표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를 정확하게 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방향이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문제로, 고민으로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문제에 휘말려버리고, 달려가야 할 목표를 놓쳐버리면, 문제 속에 갇혀서 문제를 풀다가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나중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신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삶의 방향을 놓쳐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기 원하시는지, 우리는 큰 그림(big picture)을 보아야 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좁고 작게 보지 말고, 크게 보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의 어디쯤 가고 있는가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어디쯤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푯대의 방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미완(未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영적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초신자가 아닙니다. 웬만큼 믿은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상당히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도입니다. 영적 성취를 맛보았던 사도입니다. 삼층천까지 경험한 사람입니다. 신비한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헌신에 있어서도 굉장한 수준에 이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영적 고지(高地)에 이른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세계와 사역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베테랑 산악인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해발 5천m 이상 올라갔음에도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일찍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어느 정도 받고 나면, 포만감(飽滿感)을 느낍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누려야 할 구원의 부요함을 이야기합니다. 미래에 천국에 갔을 때, 완성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구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미래에 우리가 가게 될 천국도 있지만, 이 땅에서 확장되어야 할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과 기쁨이 무궁무진하게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도 끝이 없습니다. 찬송가 304장에 보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깊은 세계를 향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에 더욱 목말라합니다. 좀 더 깊은 사랑을 원합니다. 갈망이 일어납니다.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 목마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성경을 대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대한 책도 읽었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린 아이가 손으로 물을 움켜내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의 초입(初入)에서 찰랑거리는 정도만 경험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어디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悔心)한 후에 굉장히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는 율법에 통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들어와서 율법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신서에 “달려가노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멈출 줄 모르는 열정을 서신서를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그는 질주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끝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해도 끝이 없습니다. 은혜의 바다에서 아무리 헤엄쳐도 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영적 세계 안에 깊이 들어가고 싶은 열망과 함께 성도들을 영적 세계 속으로 좀 더 깊이 끌어들이려는 갈망을 느낍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자신이 도달하지 못하면, 성도들을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세계가 있는데, 성도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놓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은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8).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세계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도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크다는 의미입니다. 완전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비록 연약하고 무력하고 속이 좁고 무너지고 깨어지고 시험에 들고 죄를 짓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는 높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속상한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 때문에 속상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 때문에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산과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자신은 영적 세계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달려가야 할 목표가 여전히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결론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경지에 이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었고, 양육 과정을 다 마쳤고, 봉사도 어느 정도 했다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까?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만만한 사람과 비교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준을 우리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는 한없이 부족한 자가 됩니다. 교회에서 양육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많은 것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너무 심오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바울은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영적 정상(頂上)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13~14).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있습니까? 영적 세계에서 안주(安住)는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어느 시점에 멈추어서 세월을 보내면 안 됩니다.
갈증이 일어나야 합니다. 간절함이 생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간,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만하고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바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바울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바울과 우리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도달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등정 길에서 수많은 능선을 넘으며 비경(秘境)을 맛본 사람은 더 오르려는 갈증을 느낍니다. 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고, 사모함이 일어나고, 갈증을 느낍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가 달려갑니까? 누가 멈추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숙제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착각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자신을 볼 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때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주님 앞에서 시인할 것은 시인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세계 안으로 들어간 후, 비쳐진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수록 은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집니다.
한없이 연약한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면서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비쳐주시기를 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이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을 모르면, 착각하게 됩니다. 자신만만해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자신만만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힘을 믿고 목회할 때에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때 겸손해집니다. 겸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 고통이 옵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했습니다(롬 7:24). 이것은 고통의 절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절규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상태로 인해 안타까워한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이 깊이 느껴지면,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런 고통이 찾아오면 처절해집니다. 갈 곳이 없어집니다.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지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만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확인하면,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냥 멈추어 있을 수 없습니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달려간다고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연약함을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기 위해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발견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딘가에 도달한 것처럼 만족하거나 멈추어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푯대를 향해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복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며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가 적잖게 무거웠습니다. 심심찮게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자신의 과거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다 보면, 자신은 부적격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죄가 수치(羞恥)로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 생활로 깊이 나아가려 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 하면, 자신의 과거의 부도덕한 삶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이전의 삶이 현재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전의 상처가 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아름답다고 여길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수치스러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상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나쁜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 들은 것보다 욕들은 것이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칭찬은 수없이 들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의 욕을 들은 것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행복했던 순간보다 비극적인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성공한 기억보다 실패한 기억이 더 뚜렷합니다. 그것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과거를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뒤로 돌아갑니다.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만 감옥은 아닙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지 않은 경험과 실수를 계속 떠올리다 보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런데 불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을 삼켜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미래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등 끔찍한 일을 행했던 사울과 같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요, 포행자였던 자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자신을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과거의 어떤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워주시는 능력이 복음인 줄 믿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된 기록을 지워도 통신사를 통해 휴대폰을 처음 샀을 때의 기록을 다 복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과학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불의와 실수, 오점도 완전히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는 은혜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이 계속 반추(反芻)되고 복기(復棋)되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죄책감에 시달리며 과거로 도망쳐버리는 안타까운 삶을 사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움과 실수 때문에 굴을 파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보혈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義)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입니다. 뒤가 아니라, 앞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과거는 끝났습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덮이시기 바랍니다.

둘째,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현재에 집중하여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달려가노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계속해서 진행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변화와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경지로 나아가려면,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때부터 도태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됩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피카소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기업도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쇠퇴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삶도, 재능과 은사도 부지런히 달음질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쇠퇴해버립니다.

믿음의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앉아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삶 속에서 묵상할 때, 파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와 내 삶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상은 철학적이고 모호한 개념 덩어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살린 말씀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앞으로 치고 나아가는 사람의 기도에는 용맹함이 있습니다. 기도가 살아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음질치는 사람만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해 믿음의 행군을 하며 끊임없이 달음질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할 때에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열심히 해보세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행동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미래의 천국을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해야 합니다. 현실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말고 자라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는 쉬어서는 안 됩니다. 완주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한순간도 머물러있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목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시선을 목표에 두고 놓치지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지만, 문제에 빠지지 말고,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방향만 놓치지 않으면, 우여곡절이 있다 할지라도 마침내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에 집중해야 합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큰 그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표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한순간에 목표를 놓칩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은 산만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도록 우리를 흔들어놓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목표보다 현실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가 많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보지만, 낮게 나는 새는 먹이를 잘 먹습니다.
그러므로 먹이를 잘 잡으려면,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해버립니다.

해운대에서 오륙도까지 오가는 유람선이 있습니다. 유람선 옆에 항상 갈매기가 함께 날고 있습니다.
갈매기가 왜 유람선과 함께 나는지 아십니까?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서입니다. 갈매기는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를 먹기 위해 유람선 주위를 돕니다. 그래서 그 갈매기들은 더 높이 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현실의 유혹은 위험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에 시달리다 보면, 영적 성숙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영적 성숙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격이 연마되는 일도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원숙해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서 어느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황당한 행동을 합니다. 말씀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아는 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는 것이 체화(體化)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방향, 시선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푯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현실의 잡다한 문제들이 우리의 시선을 흐트러 놓을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신앙은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과 시선을 놓쳐버리고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푯대는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영적 성숙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초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달려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바라본 사람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목표지점을 놓치지 않는 사람은 한 방향을 향해 질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시선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왜 삶이 복잡해집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한지 아십니까? 본질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삶이 유치해지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삶을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질에 집중하면, 삶이 심플해집니다.

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합니까? 기도와 묵상은 우리의 삶의 목표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탈선하지 않았는지, 시선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조준하며 달려가야 할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맞춰진 초점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왜 아이가 길을 잃어버립니까? 엄마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바둑판만 보고 있으면, 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 자신만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으면, 비행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둑과 관련된 격언 중에 ‘반외팔목(盤外八目)’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둑판 안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데, 바둑판 밖에서 보면 여덟 집이 더 유리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불안함이나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눈팔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에서 한눈팔지 말고, 푯대를 정확하게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집중력이 신앙의 관건입니다.

고난이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힘들어서 고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난 속에 파묻혀서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혼자 당하는 것 같습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은 모두 행복해보입니다. 나만 불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난에 파묻혀서 인생이 점점 죽어갑니다.

고난만 보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 너머에 계신 주님을 보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나를 나답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면, 푯대가 보입니다.
푯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목표를 바꾸면, 습관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도, 그리스도는 끝없이 깊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복음의 빛을 발견하고, 너무 좋아 밤을 새워보았지만, 복음의 광채를 다 볼 수 없는 바울의 안타까움이 본문에 묻어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광채를 다 본다면, 우리의 눈을 멀게 됩니다. 우리는 한꺼번에 하나님을 다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좁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한꺼번에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건 속에서 푯대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다 보면,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스탠포드대의 졸업식 연설에서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인생을 만들며, 마침내 세계적인 신화를 창조한 애플사가 탄생했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점들이 연결되어 오묘한 일들이 일어나 애플사가 탄생했습니다.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자신이 설립한 애플사에서 쫓겨난 것도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의 삶에 일어날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우리의 인생의 점들을 연결하셔서 우리를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거룩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하십니다.

살다 보면 아찔한 순간이 있습니다. 인생의 길을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생에 수많은 파도가 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푯대입니다.
목표를 놓치지 않으면,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애쓰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의 세계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역사는 개인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야 합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까? 목표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를 완성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어렵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힘듭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틀린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완성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그 길만이 미래가 보장된 길인 줄 믿습니다.

쉬운 길을 찾지 마세요. 우리의 낮은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변화되게 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야 합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허물, 실수와 실패가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연약한 허물이 다 벗겨지고, 주님과 같이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연약한 모습에 머물러있지 않고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 달음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지난 닷새동안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섭리 속에서 주님의 선하신 뜻을
깨달아 알게 하시며 평탄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기도하게 하시며, 말씀으로 덧입혀 주심을 더욱 감사합니다.
드려지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을 다하여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구하옵기는, 시작은 있었으나 끝이 없었고, 구하는 것은 많았으나 감사가 없었으며,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

었던 우리의 모습들을 깨닫습니다. 너무나 한심하기 짝이 없었던 모습들을,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주님

의 크신 사랑과 보혈로써 깨끗이 씻어 주시고 거듭나는 시간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느 때보다 기도가 절실한 이때에 기도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사오니 기도의 입술을 주장하여 주옵시며,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선한뜻을 깨달아 믿음으로 결단하는 시간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아름다운 믿음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 부족했던 모습들을 깨달아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새로운 비젼과 구체적인 계획으로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낳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믿음들을 주시옵소서.

때때로 삶의 무게가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이생의 부함과 평안만이 우리의 전부가 되지 말게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

신 주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하셔서 감사로 인해 더 큰 감사의 삶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단위에 세우신 목사님께도 함께 하시사, 오늘도 세우신 교회와 지역 복음화를 위해 애쓰시는 눈물의 기도와 결단을 기

뻐 받아 주옵시며, 그 기도와 믿음에 합당한 성도들로 붙들어 주셔서 교회가 날로 부흥,성장케 하시며 진실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매임과 고통도 감수하는 사도바울과 같은 믿음을 주옵소서.

오늘도 선포 되어지는 말씀가운데 함께 하시사 하나님 말씀만이 아름답게 선포되게 하시며 말씀을 통해 결단하며 심령

이 거듭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하심을 믿사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저희와 함께 하시며 은혜가운데 살아가도록 축복하시어서
오늘 금요예배에 모이게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심령이 오직 주님만을 향하여 영광을
돌리오니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지난 5일 동안의 삶에서 저희의 주홍같은 죄들이 많사오니
오직 주님의 보혈로 씻으사 깨끗케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직도 죄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님의 성호를 더럽히는 추악한 일을 서슴치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을 향한 저희의 믿음을 지키게 하시며
저희의 가슴이 오직 성령의 불길로 태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보혈인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오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구원의 방주가 되게 하시옵소서.
수없는 상처받은 심령들이 와서 쉼을 얻으며
교만한 자들은 무릎을 꿇고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 성도들 모두가 주님을 위해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오늘도 기도 제목을 주님 앞에 놓고 기도할 때에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 주시고 응답으로 화답하길 바라오며
우리모두가 소망과 기쁨가운데 돌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사랑의 말씀을 성령의 권능으로 인도하시고
성령님께서 동행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여 주심에
귀한 체험을 하는 시간되게 하여주시고
믿음의 좋은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축복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귀한 이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진제공 : 아름다운 전원교회 선우교회 / 031-356-8305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죄악의 늪에서 건져주시어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 안에서 거하시게 하여 주시고

오늘도 우리 모두를 사랑하심으로 금요 기도회로 불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상하고 찟긴 심령을 위로받게 하옵시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얻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세상에 살면서 흠 없고 깨끗한 모습으로 살기를 원했지만

부족하여 주님 원하시는 뜻대로 살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저희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심게 하옵시고 심은 대로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이 땅에 우리 교회를 세워 주시고 부흥성장하게 하여 주심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우리교회가 위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하오니

추진하고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합력 하여 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름부어 세우신 목사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이끌어 가시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축복하시며 치유의 말씀을 선포 해주실 때에

기사와 이적이 우리가운데 나타날 줄 믿습니다.  

그 어떠한 환난과 픽박과 어려움이 다가올지라도

저희들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주를 찬송하며 기도하게 하옵시고, 승리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지금도 우리 마음에 계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밭이 옥토가 되어 주님의 사랑을 한껏 누리게 하옵시고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저희들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물질의 어려움이 물러가게 하옵시고,

풍성함으로 나누어주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복을 가정들마다 넘치도록 부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하늘의 귀한 은혜의 말씀으로서 저희들에게 새힘을 공급하여 주시옵시고,

빈들에 마른풀들이 단비를 맞아 소성 하듯이

우리 영과. 육이 소성케 되는 뜨거운 기도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밤에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소원들을 아뢰고 간구 하였사오니

친히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갈급해 하는 심령들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먹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7월 금요 철야예배 대표기도문 (friday night prayer&worship)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
오늘 이 저녁 시가에도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시고, 즐거움이 되셔서
찬양하며 주님께 나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저희와 함께 하시며 은혜 가운데 살아가도록
축복하시다가 오늘 금요철야 기도회의 자리에
모이게 하여 주심에 무한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심령이 오직 주님만을 향하여 영광을 돌리오니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지난 5일 동안도 돌아보건대
저희 주홍 같은 죄들이 많사오나 오직 주님의 보혈로 씻으사
깨끗케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아직도 죄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님의 성호를 더럽히는 추악한 일을 서슴치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을 향한
저희 믿음을 지키게 하시며 저희의 가슴이
오직 성령의 불길로 가득 차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보혈인 피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오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냄새가 풍기며 예수의 향기가 되게 도와 주옵소서.
사회에 없어서는 안되는 구원의 방주가 되게 하시고
수없이 상처 받은 심령들이 와서 쉼을 얻으며
교만한 자들은 무릎을 꿇으며 방향을 잃은 자들은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의 모두는 주님을 위한 삶을 살기를 원하오니
그 길은 원망이 없이 기쁨으로 살아가는 길인 줄을 알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기도 제목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기도할 때에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 주시어서 응답하여 주시고
모두가 소망과 기쁨가운데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중에 임하시는 주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사랑의 말씀을 전하실 목사님을 기억하사
성령의 권능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귀한 말씀이 들려질 때마다
모두가 변화되어 믿음의 좋은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저희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