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관련 예화모음]


♠ 왜 기도 하는가?
죤스라는 학자는 "사람은 왜 기도하는가?" 하는 질문은 마치 뻐꾸기는 왜 우는가?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또 독수리는 왜 끝없이 창공을 치솟아 오르는가? 하는 질문과 다를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뻐꾸기는 울도록 지음을 받았고 독수리는 높이 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기도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기도를 요구합니다. 기도 없이는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 극한 환경이 만드는 {最高}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료는 꽃이나 열매에서 추출한 것이 아니라 고래 기름에서 추출한 것이다. 그런데 보통 고래 기름에서 향료가 나오는게 아니라 병든 고래의 기름에서 나온 물질이 향기로운 향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엠비기스}라고 한다.
병든 소에서 우황이 나와 해열, 진정, 강심제로 쓰인다. 로미산 정상 부근에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수목 한계선}이 있는데 거기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겨우 웅크리고 있는 나무가 가장 공명이 잘되는 바이올린 재료가 된다. 고난은 인생을 값지게 한다.

♠ 하나님을 아는 방법
하나님을 자연 속에서 찾아보면 그의 존재와 그의 지혜와 능력을 엿볼 수 있고, 역사 속에서 찾아보면 도덕적 통치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서 찾아 보는 사람도 하나님의 인격성과 도덕성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추적이 낳은 잡다한 종교와 철학등이 고장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혼란 스럽다.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와 예언자를 통해서 자신을 직접 계시했고 예수는 그 성경 주체요. 성육신이다. 예수를 보고 아는 것이 하나님을 보고 아는 것이다.(요14:7-10).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없다.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 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 절대변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만능의 기계 컴퓨터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폴로13호의 고장 확율은 100만분의 1이였다. 그러나 고장났다. 괄호 안의 수자가 전부 플러스일지라도 괄호 밖의 수자가 마이너스일때 괄호 안의 수자는 마이너스로 변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게산에 넣지 않으면 실패한다. 아무리 보약을 먹어도 하나님의 시한은 못 막는다.무에서 유를 만들고 쓰례기더미 속에서 장미를 피게 하며.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는 하나님의 절대 변수는 컴퓨터의 초인적 게산도 무로 만든다. 모세의 마른 지팡이 하나로 애굽을 이기게 하신 절대변수이다.

♠ 요한복음과 믿음
요한복음은 믿음과 영생의 책이다.
믿음이란 말이 98회 사용되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받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믿음으로 배에서 생수가 터지듯 성령을 받는다 (요7:38) 믿음으로 부활에참여하고(요11:26) 믿음으로 빛 가운데 거하며(요12:46) 믿음으로 예수의 큰일을 행한다(요14:12) 요한 서신에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했으며(요일5:4) 바울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갈3:2, 3:4) 믿음으로 악마를 이겼다(엡6:16) 히브리서 기자는 신.구약 성도의 모든 덕은 믿음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다(히11장)

♠ 예수의 제자된 표식
1.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생활(눅14:27) 십자가는 자원해서 지는 것이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자기 삶을 내 안에서 사는 생활이다. 중생으로 출발한다.
2.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요8:31) 성경 속에 거주하고 성경을 먹고 마시며 사는 순종 생활
3. 열매 맺는 생활(요15:8) 열매에는 두가지가 있다. 성령의 열매, 즉 품성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이다.
4. 사랑(요13:34)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 이 벳지를 달지 않은 크리스찬은 가짜이다.

♠ 유일의 길. 질리. 생명
범죄 이전의 아담은 ①하나님과 통했고 ②하나님을 아버지 알듯 알았고 ③죽음과 죄를 모르는 생명을 소유했었다. 그러나 범죄 후 ㉮ 하나님과의 대하는 단절되고 ㉯하나님 아는 일에는 무지하고 ㉰죄와 생명과와 차단된 가인족이 되었다 아담은 3중 상실을 했다. ⓐ하나님과의 교통 상실 ⓑ하나님 지식 상실 ⓒ생명상실
예수님은 3중 회복을 해 주셨다 ㉠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회복 ㉡말씀이 육신되고 하나님이 사람 되신 분 하나님께 대한 최선 최후의 계시이며 진리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중생과 영생을 주신다. 그 유일성은 내 생명의 수보다 유일하다.

♠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
죽어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그곳에서 나오라"하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요11:44)
우리가 처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어느 무덤 속에 자고 있는가 살펴보자. 회의의 무덤인가? 큰 죄의 무덤인가? 세상 허욕과 근심의 무덤인가? 일 속에 공부 속에 파묻혀 못 나오는 무덤인가? 무슨 시험의 무덤인가?
무덤에 있는 자들아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을 듣자, 아무개여. 네 무덤에서 나오라, 지금 그대가 처해 있는 무덤에서 나오라.

1."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테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49:15-16)
2."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43:1)
3."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2-39)"

♠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세가지가 부정되고 있다. "①하나님의 자녀는 유전이나 혈통으로 출생 될 수 없다 베드로의 자녀일지라도 예수를 개인적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못된다 ②종교 감정적 흥분과 황홀과 도취감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날 수 없다 ③종교적 의지와 노력과 성실을 다하고 고행과 금욕 수도생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돌은 아무리 닦아도 돌이고 아무리 좋은 소도 사람은 아니며 아무리 성자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못된다. 그것이 종(種)의 원리이다.

♠ 그리스도의 향기
주님과 우리 사이를 표현하는 여러 비유와 상징이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 양과 목자, 스승과 제자, 친구, 신랑과 신부, 몸과 지체 그리고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대사요, 향기라는 표현을 썼다.
중은 중냄새, 장사꾼은 돈냄새, 정치가는 정치냄새, 도둑은 도둑냄새가 있다. 사냥개는 사람마다 다른 냄새를 추적한다. 우리에게는 예수 믿는 냄새가 나야 한다. 이광수의 소설 {사랑}속의 순옥은 자기 피가 향기롭기를 원했다. 머지 않아 과학자는 마음의 냄새를 재는 기기를 만들것이다. 내 표정 속에, 피속에, 꿈속에, 무의식속에, 죽음속에 예수의 향기를 풍기길 바랍니다.

♠ 신앙과 미신
하나님의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이라면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는 것이 미신이다. 따라서 참 사실을 참 사실대로 믿는 것이 참 신앙이다.
인간을 신앙의 면에서 세 가지로 분류한다면 무신(無信), 미신(迷信), 진신(眞信)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사실은 하나인데 안 믿거나 잘 못 믿거나 옳게 믿거나 셋 중 하나인 셈이다.
더 생각해 보면 못 믿거나 바로 믿는 양자 택일인 것 같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둘 중 하나이지 제 3의 입장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진리가 인간의 무지와 미지 속에 잘못 믿어져 왔던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까지 전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천동설을 믿었다. 불신자의 미지(未知)와 무지(無知) 속에서 예수가 못 믿어지고 있다. 사실을 안다면 안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 생명 로고스
태초에 말씀[예수(로고스 )]이 계시니라. 이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그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니(요1:1) 만물이 예수를 말미암고 예수를 위하여 창조 되었으며 예수 안에서 존립한다(골1:16-17)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모든 무릎이 그에게 굻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2:1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고(마28:18) 그 안에서 통일되게 하신다(엡1:1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 인생의 毒을 다스리는 믿음
어느 시골에 아름다운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주위에 독초가 돋아 나기 시작하더니 물고기가 죽었고 가축들도 그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연못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보자고 말해 동네 사람들이 버드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자 버드나무가 자라면서 독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양분을 다 빼앗아 그 독초는 죽었고 곧 물이 맑아져 물고기가 살고 가축들도 다시 그 물을 마셨습니다. 때로는 인생에 독소가 돋아날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심겨지면 모든 독기가 사라집니다.(김선도칼럼)

♠ 1%의 영감이 없이는…
에디슨은 성고으이 비결을 묻자 {99%의 노력과 1%으 영감 덕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우수한 머리만 믿지 말고 땀흘려 노력하라는 권면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1%의 영감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그 영감이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 짓는데에 1%의 비중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그 1%가 채워지지 않으면 99%가 송두리째 무위로 돌아가야 함을 알아야 한다. 비율로는 1%에 지나지 않지만 그 중요성은 99%의 노력보다 오히려 더할지도 모른다. 1%의 영감.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고 역활이다. 하늘과의 통로를 열지 않으면 1%의 영감은 주어지지 않는다. 기도로, 뜨거운 기도로, 그 통로를 열자.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장 9절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장소를 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을 하나님이 찾아 내셨다. 찾기는 찾았는데 속이 병들고 찢겨 있고, 하나님의 형사이 죽어 있고 인격이 죽어 있고, 영혼이 죽어 있고, 마음과 정신이 병들어 있었다. 이것도 답답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하신다. 약속을 지켜야 할 네가 어디 있느냐? 인격적인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네 본래의 모습이 어디 있느냐? 양심적인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 내가 문을 열자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성화 있는데 성화를 본 사람이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물었다. 이 그림에 문이 있는데 이 문을 밖에서 열 수 있는 고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화가가 말하기를 "이 문은 밖에서 열 수 있는 고리가 없으므로 안에서 열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음의 문은 밖에서는 열 수가 없다. 안에서 부터 내가 열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지금 이 순간 내가 안으로 부터 마음 문을 열고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
설익고 건방진 공대 4학년생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대는 모는 것을 아는가?" 했더니 조금은 안다고 했다. "10퍼센트를 아는가?" 했더니 100만 분의 1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대가 모르는 99퍼센트 속에 하나님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는가?" 했더니 그 다음에는 존재하는지 않는지 그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 모르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했더니 그것도 모르겠다고 했다."그럼 그 모르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했더니 그것도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전 공간과 시간, 그리고 모든 존재를 다 뒤져 볼 수 없다. 하나님을 철학 속에서, 비종교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 성과 양심 속에서, 실험관 속에서, 자연 속에서 찾아봐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하나님을 안다. 그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되어 내게 오신 분이다. 그 밖에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요14:9)

♠선(先)믿음, 후(後)지식
선생이나 부모나 선배들이 일러 준 것을 처음에는 덮어 놓고 믿고 해 본 결과 실효를 알게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길을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가는데 일고 가는 것이 아니고 믿고 간다. 결혼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뿌리째 송두리째 어찌 사람을 다 알고 하는가. 약을 알고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음식도 믿고 먹지 어찌 다 일일이 실험해 보고 먹는가. 진실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이 열심히 권해서 해보면 그대로 되는 일이 많다. 인삼 같은 것은 효과를 본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증거 때문에 먹는다. 예수 믿는 것도 수천년 동안 너무도 존경스럽고 진실한 분들이 너무도 열심히 죽으면서까지, 그렇게 많은 분들이 권해서 믿어보면 과연 사실인 것을 후에 알 수 있다.

♠ 가나안 도착
가나안은 광야를 지나서 전쟁을 치르고 요단강을 건너야 도착하게 된다. 천국은 세상을 지나고 영적인 싸움(선한싸움)을 치르고 죽음의 강을 건너서 도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여정은 기독교인들의 신앙 생활의 여정과도 같다.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를 말하며 출애굽의 여정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세상에서 천국으로, 죄에서 의로,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여정이다.

♠ 어리석은 자의 정의(正義)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 성경의 가장 어리 석은 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이다. 성경의 제 1악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케에르 케고르는 "악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다. 이와 반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이다(잠1:7).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교육 만큼 인간에게 참 사는 지혜를 알게 해 주는 교육은 없다. 무신론적 지성은 빛나는 악덕이고 백야(白夜)처럼 어둡다.

♠ 헌신의 뜻
한 대학생이 목사에게 와서 예수님께 헌신한다는 뜻을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생각 끝에 백지 한 장을 가져오게 해서 그 대학생에게 내밀면서 "예수님전 백지 위임장"이라고 쓴 후 주소와 성명과 날짜를 쓰고 지장을 누르게 했다. 주님은 그 위임장에 무슨 말이나 쓸 수 있도록 위임하는 것이다.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부호 미망인의 외동 딸이 있었다. 귀국 때는 한아름 진귀한 선물을 사다 주었다. 이번에는 국제 전화가 왔다 "네 생일에 무슨 선물 사다 줄까?" "엄마, 선물은 싫어 다 그만둬" "그럼 무얼 원하니?" "엄마가 필요해 엄마 자신이" 헬라의 어느 왕이 궁의 보석, 토지, 건물, 의복 모두를 나누어주었다. 한 궁녀만은 원하는 것이 없었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왕이 물었더니 "나는 임금님 자신을 원합니다"했다. 왕은 그녀를 왕비로 택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헌금 드리고 찬양을 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나 자신을 원하시고 나는 주님 자신을 원한다.

♠ 성령이 알게 하신 지식
아무리 완전한 지식도 인간의 지식에는 그림자가 있고 반대 이론이 50%는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가르쳐 준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내 죄와 죽음에서 나를 구속하셨다는 지식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이 내 부활이라는 사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그가 나를 죽도록 사랑하신다는 사실, 주님이 다시 오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은 천지가 없어지고 내가 열 번 죽어도 절대 확신하는 성령이 내 영에게 가르쳐 준 지식이다.

♠예수의 살과 피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를 믿어 그와 연합하여 그의 가지(요15장)가 되고 그의 신부가 되고 그가 성령으로 내 속에 대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천은 먹고사는 양식이 다르다. 세상 떡 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 떡, 생명수인 예수를 먹고산다. 예수가 문자 속에 성육신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성경이 성령으로 신자의 의식과 생활 속에 혈육화 될 때 예수는 내 속에 사시게 된다. ①음식은 생명의 최우선 필수 요소이다. ②음식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필요하다 ③음식은 날마다 필요한 것이다. ④음식의 질이 건강과 성장을 좌우한다.
성경 속의 예수를 주야로 묵상하며 거기에다 뿌리를 박고 그 속에 살며(요8:31) 내 의식을 예수 의식으로 바꾸며 그를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다.

♠ 필요한 기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일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죄를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기도해야 한다. 주의 복음이 전파 되는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기도해야 한다. 갈바를 알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위해서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 바른 결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더 큰 믿음을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은혜에 고마움을 느낄 때 감사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 천국과 은혜의식
세상은 공작이 날개를 과시하듯 경쟁과 과시와 비교하는 데에 온갖 삶의 정력을 소모하고 있다. 미모, 가문, 소유, 권력, 예술, 웅변, 노래, 학력, 의복, 체력 등을 겨루어 1등하고 스타가 되고 인기를 얻기 위해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패자와 승자가 생기고, 등수와 우열이 생기고,빈부와 상하와 온갖 차등이 생긴다. 어린이 세계에도 있고, 실업인 세계 체육인, 예술인, 인기 직업인, 정치인, 학계, 심지어 종교계까지 라이벌은 없는 곳이 없고, 시기, 질투, 중상, 모략 없는 세계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천국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은혜로 성화 되었고 성령의 은사로 봉사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했고, 주시는 힘으로 순교했기 때문에 자랑하고 뽐낼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기 실력으로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은혜 의식은 겸손과 감사와 찬송과 영광만을 주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다. 거기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발붙일 곳이 없다.

♠ 반 예수 판결에 대한 사형
"일요일 오전 천하의 교회의 종소리를 듣는다, 저것은 모두 1900년 전 로마의 사형수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 니체의 말이다. 니체는 거짓말쟁이다. 예수 부활의 증인과 증거만큼 강력한 증언은 일찍이 역사상 없었다. 2000년전 예루살렘의 종교 법정{산헤드린}과 빌라도는 대표된 로마 제국의 정치 법정과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던 민중 세력은 합세해서 예수를 사형했다 니체 족은 살신(殺神)을 선언하고 사르트르 족은 예수를 살신보다 더 냉혹하게 묵살(默殺)했다. 분노한 민중은 K.K.K단이나 공산당 같은 테러리스트 바라바를 등장시키기 위해 예수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수를 부활시켰다. 예수 부활 사실은 인류의 총의(總意)로도 지울 수 없고, 천하가 없어져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 부활은 과거와 미래의 반 예수 판결 전수(全數)에 대한 사형인 동시에 예수의 권위에 대한 최종적인 확증인 것이다.

♠ 어리석은 부자의 4무(四無)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출세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물질적 성공 외에 지위나 학문, 예술과 스포츠와 기술과 명성등 스타격인 인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행복했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네 가지 안 가진 것이 있다.
① 하나님이 그의 의식 속에 없었다. ②내세가 없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다. ③ 영혼을 위한 대비가 없었다. 참 생명은 인간의 영인데 껍데기 가짜 생명만을 생각했다. ④ 이웃이 없었다. 내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내 영혼을 구하려는 노력과 내 이웃을 도우려는 노력도 하나이다. 그것이 내세를 위한 준비이다(눅12:20-21)

♠ 바로 말해라.
크리스마스의 상징처럼 눈에 띄는 풍경은 산타클로스와 징글벨 상가세일, 캠페인일 것이다. 거기에다 각종 파티와 교회가 벌이는 사랑과 구제 행사에 으레 신, 구교 대표들과 국가 대표들까지 인도와 박애의 굵직한 메시지가 성명서처럼 발표된다. 아무튼 예수의 성탄이 인류 역사의 A.D 와 B.C의 분수령인 만큼 인류의 성탄절이 된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사단이 발명한 전술 가운데 독특한 것은 연막 전술이다. 예수님을 산타클로스화 시켰다. 예수님은 병자와 가난한자 눌리고 고통받는 자의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몽매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깨우치는 계몽과 개과천선시키는 산타클로스나 석가나, 해방자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복음의 부산물일 뿐이다. 말을 바로 해야 한다. 예수는 죄값으로 죽은 사람들을 구속해서 영생을 주러 오셨다(요3:16, 사53장) 그것이 성탄의 핵심 진리이고 복음이다. 자기 죽음으로 죽음을 죽여서 영생 얻게 하려 오신 것이 성탄의 참된 의미이다.

♠ 예수 안에 산다는 것
어린아이는 내 살 길은 엄마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배가 고파도 엄마 생각, 몸이 아파도 엄마 생각, 신기한 것을 봐도 엄마를 찾고 잘 때도 엄마 손을 붙잡고 엄마 품에서 엄마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듭니다. 크리스천과 주님의 관계도 사랑과 생명의 관계이며 인격적인 신비의 관계이며 영과 영의 관계이다 내주(內住)생활이란 양이 목자를 의존하고, 아기가 부모를 의존하듯, 나무가 태양과 공기와 대지에 뿌리를 박고, 의존해 살듯, 제자가 스승을 믿고, 노아가 방주에서 주만 의지하고,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주만 믿고 살듯이 그렇게 사는 것이다. 95년도도 주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중, 고등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사랑함으로 배우는 사랑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를 아는 지식이 자라고 성도가 성화(聖化) 되기 위해서는 죄를 이기는 것과 성령 안에서 사랑의 생활이 익어야 한다. 대설교가이고 대 신학자일지라도 사랑이 성숙하지 못하고 사랑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고전13장) 신유의 은사가 있고 삼층 천을 갔다 왔을지라도 사랑이 떫은 감 같으면 껍데기 신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을 얻는가? 사랑은 첫째로, 성령 충만의 열매이다. 고로 지속적인 성령 충만의 비결을 배우고, 둘째로, 사랑은 사랑함으로써만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은 말함으로 배우고, 노래는 노래함으로 배우고, 일은 일함으로 배우듯이 사랑은 행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만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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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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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영혼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중간기 상태에 대하여)

중간기 상태란?


사람이 죽은 후 몸의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와 그 영혼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도들의 영혼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성경은 신자들이 죽을 때 가는 곳을 "낙원", "천국", "아브라함의 품", "아버지의 집", "주님이 계신 곳" 등 여러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눅24:42; 히9:24; 눅16:22; 고후5:1,8; 빌1:23; 요14:2,17:24; 고후12:2,4; 히11:10,16 시73:24,25) 위에서 말하는 표현들은 각기 다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일 뿐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의식이 있는가?
초기교회에서는 영혼수면설을 주장한 자도 있었다. 즉 영혼이 부활할 때까지 무의식적인 수면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일부의 재세례파가 영혼 수면설을 옹호하였는데, 칼빈은 그 주장이 잘못됨을 반박하는 논문을 썼었다. 19세기에는 어빙파 중 일부의 사람들이 이 그릇된 교리를 지지했다.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드은 존재의 멸절까지 믿으며 그렇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그릇된 주장의 근거는 인간의 의식은 감각과 인상에 의존한다는데 있다. 더 이상 보고, 듣고, 접촉할 수 없다면 사고나 감정의 작용도 멈추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즉 영혼이 뇌의 활동을 떠나서는 의식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성구들에 두고 있다. 성경에는 죽은 자들에게 의식이 없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아래와 같이 있다(시30:9; 115:17, 146:4; 전9:10; 사38:18,19).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의 영은 신체적인 감각기관에 의존해서만 의식이 가능한 단순한 감각의 도구나, 감각 작용에서만 파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신체적 감각 작용에 의한 경험을 떠나서도 영의 작용이나 의식은 존재할 수 있다. 천사들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인간보다 탁월한 의식을 갖고 있다.
죽음을 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영혼이 잔다는 뜻이 아니고 죽은 자는 떠난 세상에서의 활동이나 수고가 중지 되었다는 뜻이다. 잠잔다고 한 것은 영육으로 된 인간의 활동이 죽음으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음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죽는 자들은 영광스런 깨어남(부활)이 있음을 가리켜 잔다고 한 것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최종적인 영화 상태로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영화로운 상태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행복한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될 지체들의 구원 완성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로 완성될 최종적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계7:9-17의 말씀이 구속 받은 자들의 현세적 삶과 최후의 영화로운 상태의 영생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중간기 상태의 묘사로도 볼 수 있음은 현세적 삶과 중간기 상태와 최종적 영화 상태는 각기 단절된 것이 아니고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1) 쉰다(계14:13참고)
(2)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는다.(계22:4참고).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눈은 항상 그리스도께만 향하고 있다.
(3) 듣는다. 계시록에 있는 영광과 합창과 찬미의 소리를 들으며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말해주는 것을 듣게 된다.
(4) 일한다(마25:21참고) 몸이 없는 동안 영혼들은 천사들처럼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하게 된다(계6:10참고)
(5) 기뻐한다.(마25:21참고)
(6) 살아 있다
(7) 찬송하며(계14:3, 15ㅣ2-4) 위로를 받는다(눅16:25).

죽은 자와 신자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는가?
강신술자들은 죽은 영혼들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실제로 발생된다고  믿고 있다.
로마카톨릭은 성모 마리아와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의 기도를 들을 수 있고 또 중보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이것도 일종의 죽은 자와 직접 접촉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일부 개신교도들도 죽은 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의 말을 다 들으며, 우리의 하는 일을 정확하게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것도 죽은 자와 산자의 직접 접촉설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신념을 지지해 주지 않고 오히려 배격한다.(욥10:21,7:9,10; 삼하12:23; 신18:11; 레20:6;사8:19).
특히 신명기 18장을 참고하라. 삼상28:3-25에 나온 사무엘의 영혼은 실제 사무엘의 영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마귀다. 악령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할 수 있다.

천국에서도 진보와 성장이 계속되는가?
천국에서는 회개를 통한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비록 성화를 이룸에는 진보가 없을지라도 다른 면의 진보와 성장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사랑하는 것, 소망하는 것은 영원히 있게 된다. 소망할 것이 영원히 있게 다함은 진보하는 것이 영원히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새 노래를 부른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갈수록 새로워지고 기쁨이 점점 더 새롭고 충만해 진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성장과 진보는 완전과 조화될 수 없다고 하지만 완전한 아이는 자라는 아이인 것 같이(눅2:52참고) 천국의 삶도 여러 면으로 더욱 충만해지는 삶일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진보나 성장이 없는 절대적, 불변적 무한적 완전이나 인간의 완전은 천국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목표를 가진 유한한 완전인 것이다(사40:25, 26, 44:6, 54:5).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영원히 다 해아릴 수 없다.

음부란 어떤 곳인가?
음부(구약에서는 스올, 신약에서는 하데스)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스올은 구약에서 60회이상 나온다. 70인역에서와 신약에서는 "스올"을 일반적으로 "하데스"로 번역하고 있다.
스올은 "무덤" 또는 단순히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또한 분명히 악인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번역해야 바른 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신32:22; 시9:17,55:5. 잠15:24등참고).
단순히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거나(이 경우 의인들에게도 해당) 아니면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데스"란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가?
(1) 죽은 자들의 처소
(2) 형벌의 장소
(3) 지옥
(4) 가장 낮은 장소 또는 상태라는 뜻을 가진다(마11:23; 마16:18; 눅16:23ㅣ 계1:18, 6:8 참고)

앞에서 본바대로 음부는 신앙의 인물들도 가는 곳으로(참42:38; 눅16:23; 행2:27,31)말하기도 하고, 악인들이 가는 곳으로 말하기도 한다(시9:17; 눅16:24). 성경에서 음부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음부"를 천국도 지옥도 아닌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는 중간기 처소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약의 "스올" 또는 신약의 "하데스"라는 말이
(1) 무덤
(2) 단순한 죽음의 상태
(3) 지옥이란 의미로 쓰여지고 있음을 알았더라면..

음부를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 3의 처소라든지 죽어 소멸되는 상태로 오해도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조직신학(송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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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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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병철 회장님의 질문에 대해서 내가 하고 싶은 답변

 

오래전 고 이병철 삼성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카톨릭교 신부에게 질문한 내용이 중앙일보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 회장님께서 삶을 마감하기 직전에 사춘기 청소년 같은 솔직하고 평범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질문을 하셨기에 이에 대해서 나도 나름대로 답해보고 싶었다. 물론 고 이회장님께 답해드리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도 이회장님과 같은 의문점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 자신에게 답해보고 싶은 것이다.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신은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세상사(섭리)를 보면 신이 있고, 신은 이미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고(세상사를 통해서) 있다.

따라서 신은 보고자 하면 보이고, 보고자하는 마음자세가 결여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 눈에 공기(하나님)와 바람(섭리)이 부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세상사)을 보면 공기(하나님)의 존재와 바람(섭리)이 부는 것을 보는 것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 데에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나?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時. 空. 靈魂의 한계물)은 없을 것이다.

창조주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피조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창조주 즉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창조주 외에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존재하는 피조물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3. 창조와 진화 중에 어느 것이 맞는가?


창조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자구에 묶여서 협소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창조를 넓게 해석해야 한다. 나는 창조과정에 진화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진화는 변화이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창조이야기는 비유와 상징의 표현이다. 몇십만년 전의 원시인류의 화석이 발견되는 데에 성경처럼 6천년 전에 인류가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의 시대에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 비록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이것 또한 신의 창조인 것이다.


4. 과학이 발달하면 무병장수의 시대가 올 것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피조물의 한계를 넘지는 못한다.

무병장수는 축복이아니라 끔직한 재앙이다. 사는 목표가 죽음인데 죽음을 없애면 무엇을 목표로 해서 진지하게 살겠는가?

죽음을 근본적으로 의식하기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살며 자식들을 사랑하고 잘 키우려고 애쓰며 희망의 끈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다행인 것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이 죽을 날을 비밀에 부쳐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죽을 날을 미리 안다면 이 또한 세상을 개판(?)으로 만들어 갈 것일 텐데...

아무튼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마치 ‘하급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계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5.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왜 고통과 불행과 아픔을 주었는가?


인간의 고통과 불행과 아픔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주인이 되시는 신의 마음대로이다. 이것은 현실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고통과 불행과 아픔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지 원래 고통과 불행과 아픔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 신의 관점과 피조된 인간의 관점이 정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심이 바로 고통과 불행과 아픔 자체이지, 신은 자신의 자식인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과 아픔을 주지 않으신다. 이런 문제는 신과 자신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고통과 불행과 아픔은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의 원천이다.

이런 것들이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교향곡을 구성하는 악보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인간에 대한 신의 신묘막측한 사랑(배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진정으로 원숙한 인간이라 할 것이다.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선.악을 포함한 신의 창조와 섭리는 인간이 따질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부모님에게 왜 나를 낳았느냐고 따지는 것보다 더 불경스럽고 어리석은 질문이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이다. 선과 악은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神은 선과 악의 균형을 맞춰가며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오늘도 섭리하고 계시며 그 와중에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행.불행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히틀러도 어린 시절에는 하나님을 갈망했던 믿음을 동경한 신실한 소년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신의 섭리에는 선.악이 그리고 선인과 악인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7. 우리가 죄를 짓도록 버려두다가 결국 예수의 대속에 의지해야만 하게끔 만들었는가?


時空안에 있는 피조물은 원천적으로 죄의 소산이고 죄를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이 제일 우선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하나님도 예상하시고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피조물들 간의 조화를 원하셨지만 그 사랑의 뜻이 인간의 상징인 아담의 욕심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구원책으로 신이 친히 예수의 형태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들의 죄악의 환부를 수술하여 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죄악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러므로 예수의 대속에 의해서만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일심동체로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받을 수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 인간이 혼자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의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8.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성경은 원래 수많은 사본이 존재하고 원본은 없는 책이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 어떻게 관여(섭리)하고 계신지를 예를 들어 설명한 책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쓴 신앙의 기록들 가운데서 가장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들만 추려서 발간한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자는 따로 있지만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오늘의 이회장님 같은 탁월한 분들도 의심을 가지는 인간과 인생에 관해서 명확한 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출현한 책이 성경이다.


9. 종교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묻는 질문이다. 종교는 진리이고 현실이다. 종교라는 말 대신에 ‘현실의 진리’라는 말을 쓰면 이해가 될 것이다. 종교는 현실과 동 떨어져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현실문제 자체이다. 종교(신)가 가장 1차적이고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현실이다.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이다. 그러므로 하드웨어인 육신은 망가져도 소프트웨어는 존재한다. 靈魂중에서도 혼은 살아오면서 생각한 마음의 이력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의해서 죽은 후에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영은 영원한 것이다. 이 영을 통해서 창조주와 연결되는 것이고, 육신은 죽어도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인 靈은 본질상 피조된 물질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기에, 없어질 수(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영은 원래의 고향인 창조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모든 종교는 존재의 진리를 찾는 것이다. 즉, 인간과 세상의 본질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종교는 보는 관점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나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결코 타 종교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싶지 않다.


12. 종교를 갖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는가?


종교를 갖지 않아도 자신이 유한한 피조물임을 자각하고 따라서 전지전능한 신을 인정하며 신을 위주로 살아간다면 천국이나 극락에 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은 현실적으로 종교생활을 하지 않고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교만으로 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공했든 실패했든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피조물의 한계를 자각하지 않고 산 사람은 신이 가장 낮은 등급으로 취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모님을 무시하고 혼자 산 자식과 같기 때문이다.


13. 종교의 목적은 착하게 사는 것인가?


종교의 목적은 자신이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고 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 착하게 살도록 유도하는 것이 직접목적은 아니다.

물론 종교에 심취할수록 이전보다 더 착하게 살게 되는 것은 부수적이며 필연적 현상이다.


14. 인간의 영혼이 죽은 후에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맞는가?


인간의 영은 창조주께로부터 왔기에 魂.肉과 달리 원래의 자리인 창조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군대에서 제대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魂(사는 동안 가졌던 마음의 이력서)과 육은 이 세상에서 산 흔적이지만 靈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는 원래 있던 곳인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천국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 지?'는 죽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이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믿음대로는 살아야 한다. 그 성적표는 나중에 받아볼 수 밖에 없다.

이왕 한 세상 사는 것, 후회없이 살도록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아봐야하는 것일 뿐이다.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주는 교훈은?

 

신앙과 세상살이와는 별개이다. 각자가 받은 재능이 다르기에 신앙이 없어도 이회장님 처럼 대 성공을 거둘 수가 있다. 그러나 신은 각 개인을 필요에 따라서 창조하고 사용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이회장님이 온 힘을 기우려서 사업을 한 결과, 이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섭리였다. 이 회장님이 누린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신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이회장님이 죽을 때, 살아있을 때에 벌었던 것을 가지고 가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실을 돌아가실 때까지 몰랐다면 실망이다.

하나님은 신앙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창조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향권 밖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부인해 봤자 하나님께 불효만 하는 것이다!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유했는데에 그러면 부자는 악인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무슨 마음으로 부자가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일구고 부자가 되었고, 이런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면 물고기가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 당연하듯이 당연히 부자도 천국에 들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도 세리 삭게오의 중심을 보셨지 그의 사회적인 평판을 보시고 구원하신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17. 종교와 범죄는 상관이 없는가?


성경은 아담이후에 사람은 원래 악한존재(성악설)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입 속에 넣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종교가 범죄를 점차적으로 줄일 수는 있어도 종교국가라고해서 범죄가 현저히 감소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국민들이 진심으로 종교인이 아닌 이상, 종교의 범죄예방효과는 크지 않지만, 점차적으로 범죄감소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교도소를 백 개 짓는 것보다는 예배당 하나를 짓는 것이 유익한 것이다.


18. 신앙인이 광인처럼 되는 이유?


여기에는 바람직한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바람직한 면은 정말로 은혜로 충만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현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는 이단 종파에서 보듯이 독단적인 아집에 빠져서 사회의 빈축까지 사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자신의 현세에서의 한풀이나 내세에 대한 보장에 국한해서 생각한다면 광인처럼 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19. 종교와 정치는 별개인가?


종교는 인간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대신에 국가 권력과는 상관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과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종교와 정치는 별개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래서 주님도 바리새인의 교묘한 질문에 "하나님의 것은하나님께로,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로..."라고 답하셨지 않은가?

정치는 현실이고 종교는 현실이 목표로 하는 원대한 개념이기에, 정치와 종교가 합해지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성이 될 것이다. 선도 악도 아닌 어중간한 돌연변이가 될 것이다.


20. 우리니라에 교회가 많은 데에 왜 그렇게 범죄가 많은가?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과정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조급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 중에 참 신앙인이 많아진다면 분명히 범죄와 사회적 시련은 점차로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 던지는 이회장님의 꾸지람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21. 로마교황의결정에는 잘 못이 없다는데?


로마교황도 사람인 이상 잘못이 있겠지만 일반인들 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다.

하루 24시간을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분이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잘못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교황을 한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이해해 드려야 한다.

 

22. 종교는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가?


기독교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기독교의 이상과 배치된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모든 교인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마 이것이 기독교적 이상일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숙제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기업가를 중히 쓰시는 것을 보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때에 따라서는 자본주의도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본다.


23.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모든 피조물은 시작과 끝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 거대한 우주도 피조물이기에, 가엽게도 시작과 끝이 있는 데에 지구에 왜 종말이 없겠는가?

다만 종말은 다른 의미에서 새로운 시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하계가 태어나고 성장하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듯이...시작과 끝은 언제나 맞물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은 우리가 알고자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후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위대한 기업가이신 고 이병철 삼성회장님도 죽을 때가지 인생의 기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번민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 같은 범생들로 하여금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가지게 하는군요.

교우 여러분! 사는 끝 날까지 영.육간에 건강히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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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

 

음의 글 /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에베소서 4장 6절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를 묻기 전에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보이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상상 속의 존재로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주위의 많은 부분에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분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으며 찾을 수 있는 곳은 우리 역사의 한복판입니다.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 혹은 종교의 영역에만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심을 발견하고, 우리의 사회와 역사가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해 아름다운 곳이 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삶의 역사 한복판에 계십니다. 우리의 역사 안에 계시는 그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열린 마음과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삶에서 천국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서 ‘하늘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형제를 향한 미움과 증오, 시기심과 욕심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만들어가며 지금 여기에서부터 천국을 이뤄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이웃 안에 계십니다. 주님께 있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전혀 별개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이웃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이웃 안에 계십니다. 이웃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태도로 이웃을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웃 안에 계십니다. 다른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계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증명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의해 판단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님의 영이 계신 곳에서 가장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가득 찬 우리 생애와 우리 사회, 우리 역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며 하늘나라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오늘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홍인식 목사 (멕시코 장로회 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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