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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감사의 축복 /Sunday worship preaching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1.감사가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어떤 기독교인 처녀가 불신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는 옛날에 교회를 다니다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못다니고 있지만 결혼하면 즉시 교회에 다니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음에 나가겠다고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결혼 후 얼마 있다가 술을 먹기 시작하는데 거의 매일 술에 취해 밤 늦게 집에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아내도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도 지르고 하여 가정이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가 생겨 부부가 싸울 때마다 아이들은 불안에 떨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을 위해 늘 기도 했지만 그렇게 몇 년을 지나도 변화가 없자 드디어 이혼을 결심하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한 일년만 더 기다려보자며 그 대신 지금부터는 불평이나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남편에게도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성껏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그때부터 마음을 바꾸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그나마 나와 아이들이라도 교회에 다닐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술주정뱅이일지라도 그나마 생활비라도 벌어다 주니 감사합니다. 그나마 일년열두달 365일 계속 술취해 있지는 않고 가끔은 나와 아이들을 생각해 줄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살집과 먹을 것이 있고 이 아이들을 통하여 희망을 갖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많은 조건들을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선은 아내 자신이 살 것 같았습니다. 남편 때문에 늘 답답하고 화가 나고 속이 부글거리며 화병이 날 것만 같았는데 그 후로는 마음이 한결 평안해졌습니다. 또한 큰 소리가 그칠 날이 없던 집안이 평안해지고 그러자 툭하면 엄마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바람에 불안에 떨던 아이들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웬수같이 여겨지던 남편도 점점 측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어디 가는 거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디 가는지 잘 아시면서 뭘 새삼스럽게 물으세요?”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나도 교회가면 안될까?” 아내는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니 여보, 안되다니요? 되고 말구요. 우리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 이런 술주정뱅이에다가 맨 날 당신 속만 지긋지긋하게 썩이고, 아이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이런 못난 사람은 하나님이 받아 주실까?”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셔서 심지어는 살인강도도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다 받아 주세요.”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이 술주정뱅이로 아내의 속을 다 썩게 만들었던 남편이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우선은 자신을 살게 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에게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물론 옆사람에게도 행복 바이러스를 퍼지게 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 복이 오고, 은혜가 임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후4:15절을 보십시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감사가 있는 곳에 더욱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정말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충만한 삶이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함으로 정말로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감사는 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정한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같은 것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에 더욱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욕심과 욕망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속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누려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그 삶에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그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이미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과 육과 혼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은혜를 맛보며 전인적인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하면 더욱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게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더 주기는커녕 이미 주었던 것마저 확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눅19:24~26절을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준 것도 아까워 준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었는데도 감사할 잘도 모르고 자꾸 불평불만이나 한다면 준 것이 아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준 것도 빼앗아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갈 때에 준 사람도 기쁨이 있고 준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더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잘돼도 감사, 안돼도 감사. 형통해도 감사 불통해도 감사. 돈이 많아도 감사 없어도 감사, 내 마음 내 뜻대로 되어도 감사 안되어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감사하며 사는 자들에게 채워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가정이 잘 되고, 직장이 잘되고,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감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헤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감사할 때 물질의 복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일만 생깁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사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마귀가 자꾸만 지금은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속삭여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복을 쌓는 일이요, 그게 은혜를 쌓는 일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강조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우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난 상반기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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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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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십자가의 승리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십자가의 승리

말씀 : 갈3:13-14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이란 약2000여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그 참혹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가져다주신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절기입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때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면서 주님을 환영한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이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승리를 위한 죽음이었음을 상기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었으므로 주님의 고난가운데서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희망과 소망을 갖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속에는 어떻게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1.죄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는 십자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선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사형틀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차에 걸고 무슨 장식품이나 부적처럼 달고 다니지만 십자가는 본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혐오스러운 물건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스럽고, 처절한 고통을 주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의 정도도 말로 할 수 없고, 고통의 시간 또한 많게는 40여일 동안 계속되는 너무나 잔인한 사형방법인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사형은 먼저 채찍으로 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채찍도 보통의 채찍이 아니라 끝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는 채찍입니다. 이것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며 사형장소로 이동합니다.

사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세워놓습니다. 그러면 못박힌 손목과 발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위가 엄습합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독수리가 와서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것도 잠시잠깐이 아니라 목숨이 긴 사람은 40일 동안이나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니 그 고통과 비참함과 참혹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를 지은 인생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셔서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면 우리 모든 인생이 그런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2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9:6에서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는 너무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영토록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나중에 지옥에서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미움과 저주와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은 물론 여기서도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빛과 같은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저주를 풀어준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처절한 고통의 장소였기 때문에 십지가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받을 그 저주, 그 참혹하고 처절한 고통을 대신한 대속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13절 말씀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죄없고 흠없고 티 없으신 예수님,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예수님이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순전히 내가 받을 고통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함을 받아 죄에서 자유인이 되어 새생명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20:28절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요19: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형을 당하면서 그것도 그 저주받은 그 끔찍한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니 이성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야말로 다 이룬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처절한, 그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그 처절한, 그 참혹한 고통의 굴레를 벗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지옥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과학으로도 물론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영원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 저주에 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 입니까?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된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영광 돌리며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십자가

여러분,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랑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너무나 큰 사랑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여러분의 자식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실 용기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식이 아픈 것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자식이 죽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천한 곳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가장 처절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3: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범죄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너무나 크나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이런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또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더욱 감사하여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축복을 가져다준 십자가

여러분,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느냐, 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느냐?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이 뭡니까? 한마디로 영생복락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가는 복입니다. 그래서 눅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의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고, 이 복이야말로 지고지선지은의 복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복복복하면서 복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복은 온전치 못한 복입니다. 제 아무리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걱정 근심이 있고, 질고가 있고, 불안과 외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복은 완전한 복입니다. 100%입니다. 아니 200%, 1,000%입니다. 넘친다는 것이지요.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들은 조금치도 깃들일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은 우리는 바로 그 복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어야만 죄사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만 이런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일이지만 동시에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승리의 주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주님의 처절한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를 보내며 그 저주 받은 십자가, 그 끔찍한 십자가, 그 참혹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만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는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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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생기 넘치는 인생 (Sunday Sermon)

말씀 : 창2:4~7

제목 : 생기 넘치는 인생

 

1.생기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기가 넘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이나 행동에 활력이 있고, 생동감이 있고, 얼굴이 밝아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걸어 갈 때에도 활기가 넘쳐야 하고, 찬송도 좀 힘차게 기쁨에 넘친 모습으로 부르고, 예배를 드릴 때도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계22:5절을 보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보세요.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왕노릇하고 지금 여기서는 거지 노릇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벧전2: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같은 제사장이 뭡니까?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왜 제사장입니까?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거룩한 모습으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그럼 왜 왕입니까? 일단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왕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인 우리는 왕자이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들과 상황과 환경과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왕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생명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를 좀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더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하면서 큰소리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4: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십시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센 장수라도 내가 힘이 없어 못 당하면 그 장수보다 힘이 열배나 강한 장수를 데려오면 이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내 편이시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힘차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씩씩하게 용감하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좀 힘들어도 까짓것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느냐하면서 당당히 맞서 싸우며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녀가 조금 힘들다고 죽을상을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 걱정 탄식하며 세상 다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자녀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러나 자녀가 좀 힘들어도 당당히 맞서 싸우며 활기차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대견스럽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써 하나님의 백성,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더욱 활기차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뭔가 마음과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어도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미 이겼고, 또 이후로 다가올 모든 어둠의 세력들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활기차고 용감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생기를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활기찬 삶을 살려면 생명의 에너지를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뭔가를 이기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뭔가를 힘차게 움직이게 하려면 그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우리 앞에 있는 벽을 무너뜨리려면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든지 장비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자동차가 힘차게 움직이려면 기계적 성능도 좋아야 하지만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기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인생도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힘차게 달려가려면 그렇게 달려가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허우대만 좋다고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육체에 힘을 주는 양질의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체에 필요한 영양소들이 육체에 공급이 되고 일부는 산소와 만나 산화작용을 일으키면서 신체 각 부분에 에너지를 공급함으로 비로소 몸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앞에 놓여져 있는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르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올바르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정신적인 양식을 충분하게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올바르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계속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올바른 인격형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계속 공급받아야 비로소 올바른 인격을 갖추어 어려움도 이겨내고 선과 진리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이런 올바른 인격에 필요한 에너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죽어라고 부자 되고 높아지고 편하게 쉽게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기술만 공급합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맨 날 공부 잘해라. 1등해라. 높아져라. 돈 많이 벌어라. 이런 따위 들입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인사가 부자 되라는 것입니다. 그게 최고의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라고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노는데 게임들이 대부분 싸우고 죽이고 빼앗고 정복하고 높아지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늘 폭력적 선정적 이기적 배타적 물질적 에너지만 공급되니까 사람들이 결국 폭력적 선정적 이기적 배타적 물질적 성향이 강한 인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니까 열일곱살배기 소년이 스물한살날 친누나를 칼로 수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는데 이 소년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을 주로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그날도 4시간동안 폭력적 게임을 한 후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 폭력적 에너지만 잔뜩 공급받으니까 인성이 마비되고 아름답게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게 하는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고 폭력적 부정적 반항적 에너지가 자꾸 축적되고 그런 부정적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자율신경이 제 기능을 잘 못하게 되니까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생명을 아름답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참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자연인은 그러지 않아도 죄로 말미암아 영성이 거의 죽어있기 때문에 영혼에게 생명을 주고 올바르고 진실하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감사와 기쁨으로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에너지를 듬뿍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뭡니까? 그게 바로 오늘 7절에서 말씀하는 생기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만들 때에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물론 흙으로 만든 육체는 생명도 기쁨도 감격도 능력도 없는 그냥 흙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생명력 없는 흙덩이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까?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생기가 뭡니까? 영적 육체적 정신적 생명력을 가지고 살게 하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그러면 생령은 뭡니까? 살아있는 영혼, 즉 생명과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사랑 속에서 뭔가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영혼인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 즉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과 희망과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는 그 생명의 기운이 우리가 가운데 들어올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그 생기가 충만해 지면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이 생명의 에너지를 거의 상실함으로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던 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끝내 이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인생은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과를 도말하시고 나아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기(死氣) 즉 죽음의 기운을 제거하고 생기(生氣) 즉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자들은 생기가 다시금 우리 영혼 속에 들어옴으로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고 그 생기를 받았다고 하는 우리들조차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축 처져서 살 때가 많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도리어 근심 걱정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가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며 심지어 악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고귀한 삶을 살지 못하고 도리어 추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하는데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만 받아 그나마 다행으로 죽지는 않았는데 생명의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육신이 계속해서 왕성하게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밥을 먹어야 하는데 한번 먹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육신을 힘 있게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영양가 높은 음식을 공급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식물도 잘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식물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수분과 영양분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영혼도 그런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을 유지하고 왕성하게 움직여서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생기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충만하게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혼에 생기가 있고 힘차게 움직이고 그래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생기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예배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신앙적 행위가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나아가서는 우리 영혼이 정말 생기 있게 풍성하게 아름답게 힘차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는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일이요, 생명의 산소를 공급해 주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1:1,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영혼에 양질의 양식을 공급할 때에 죽어있는 영혼들이 살아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기로 가득차고 그러면 그 생명의 에너지가 우리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솟아나게 하여 생명력이 넘치게 나아가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게 힘차게 나아가게 함으로 생명의 풍성하게 맺게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 속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데 어찌 그 삶이 힘차게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심령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소망의 기운이 넘치는데 어찌 그 삶이 활기차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생명과 진리와 선의 에너지가 넘치는데 어찌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지 않겠으며,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때에 어찌 생명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그러한 생명의 에너지를 풍성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나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쓸 때에 생기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생기의 통로를 막고 있는 찌꺼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우리는 생기가 충만한 곳을 가까이해야 하는데 그때에 한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은 생기가 흘러들어오는 통로를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기를 받는데 방해가 되는 찌꺼기 같은 것들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기가 넘치는 곳을 찾아와도 그 생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좁아져 있거나 막혀 있으면 어떻게 생기를 충만하게 받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심장이 아무리 힘차게 펌프질을 해서 피를 내보내도 혈관에 진득진득한 것이 달라붙어 있어서 혈관이 좁아졌거나 막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수지에 아무리 물이 가득해도 수로가 막혀 있으면 어떻게 논에 물을 대겠습니까?

영적으로도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아무리 생기가 가득해도, 그래서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생기를 공급해 주는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우리 영혼에 생기를 공급하는 통로가 좁아져 있거나 막혀 있으면 생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거나 두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조금 밖에 들어오지 못하면 근근이 생명을 유지한다해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요, 만약 완전히 막혀 있다면 그 영혼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우리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찌꺼기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찌꺼기가 뭡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이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살면서 굳어진 왜곡되고 잘못된 생각들과 가치관과 경험과 지식과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우리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기나 질투나 거짓이나 분노나 염려나 이기심이나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생기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찌꺼기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생기가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좁게 만들거나 막아버림으로 생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받으려면 그 생기를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열심히 찾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모든 왜곡된 경험과 지식과 이성과 욕심과 악과 미움과 그 밖의 모든 왜곡된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6:24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고, 엡4:22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과 한계 속에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열심히 찾아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찾아 나오되 내 생각 이성 경험 지식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의 생기가 충만하게 영혼 속에 흘러들어옴으로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생기 넘치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심에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이다.

그러하오나 주님이시여, 저희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여 주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진실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생기의 통로를 막고 있는 모든 인간중심적인 생각들, 물질만능주의적인 사고들, 그로 인한 모든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모든 어두운 모습들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과 겸손의 삶으로 생명의 통로가 활짝 열려 하나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덧입어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이 땅 모든 이들에게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소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축 도) 이제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운을 막고 있는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주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덧입어 주님의 그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그 생명의 기쁨을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과 저들의 가정과 저들의 경영하는 모는 일들 위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 교통 역사 충만케 하시는 은사가 이제로 영원까지 함께 하시옵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봉헌기도)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아름다운 계절, 이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어 이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시오니 영광과 존귀를 돌리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적은 예물 드리나이다.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에 감격하여 믿음으로 예물 드리는 손길 위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 거룩히 구별하여 십일조 예물 드리는 손길위에 더욱 축복하셔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더욱 풍성하고 강건한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예물 드리는 손길에도 복을 주셔서 더욱 감사와 은혜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예물을 통하여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더욱 힘 있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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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Sunday Sermon)

제목 : 함께 삶의 축복

말씀 : 전4:9-12


1.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함께 하지 않고는 존재 그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많고 능력이 많아도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만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가족과 이웃과 사회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생존이 가능하고, 문화생활도 가능하고, 물질문명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족이 없이 어떻게 인류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이웃과 사회공동체가 없이 인류가 어떻게 이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있었겠습니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근자에 보면 너무나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편한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왜 내가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느냐, 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왜 하기 싫은 일을 남의 이목 때문에 해야 하느냐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편안함만을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생각하지 않고 교회가 무엇을 해 주기만을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들의 왜곡된 가치관이지 결코 옳고 아름답고 귀한 가치관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사회도 아름답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갈등과 시기와 분쟁 속에서 상처와 고통과 슬픔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살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살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손해 보아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의 눈치도 보아야 합니다. 양보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적극 참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이고 그게 우리 사회를 유지하며 우리가 함께 평화롭게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물론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교회공동체는 이 원리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사탄은 교회공동체를 와해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과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유혹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도를 외면하게하고 나아가서는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을 핍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탄의 방해공작과 핍박과 도전을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것은 물론 더욱 하나 되어 협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탄의 역사를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에 특별히 헌신된 사람을 세워주심과 동시에 많은 동역자들을 세워 함께 그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과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훌륭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요압과 아비새와 후새와 같은 동역자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의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열 두 명의 제자를 세워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든 마을이든 회사이든 교회이든 우리는 함께 해야 합니다. 좋은 동역자,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져가고 그럴 때 우리 각 개인이 평안과 자유와 부요함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그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평안함과 안일함과 유익만을 구한다면 자유와 평안과 번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시기와 분쟁과 상처와 아픔만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함께 수고함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다 부족하고 허물 많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먼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되 그러나 우리가 서로 하나되어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할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그래서 결국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코 분열을 조장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와해시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협력자가 되어 함께 수고함으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감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협력이 그토록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앞에서 개괄적으로 말씀드렸지만 본문의 내용을 통해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혼자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뭐 사실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함께해야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쉽게 말하면 힘을 모으고 뜻을 모아 함께 수고할 때에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게 바로 함께 함의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뭐 사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일이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훨씬 능률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도 두 사람이면 할 수 있고, 두 사람이 못하는 일도 세 사람이면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100Kg의 물건은 천사장사라면 모르겠지만 웬만한 사람은 혼자서는 자신의 힘만으로 들어 옮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습니다. 세사람이라면 더 쉽게 옮길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협동의 원리인 것입니다. 비단 물리적으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지적 감정적 정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한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열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모으며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함께 하면 서로 힘과 위로와 격려와 용기와 의욕을 줌으로 몇 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많인 들어본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기러기들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보통 V자 형태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무리를 지어서 날아가면 혼자서 날아갈 때 보다 70%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뒤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들은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들이 날개짓을 하면서 일으킨 바람을 타고 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기러기가 에너지를 방출하여 일으킨 기류를 다른 기러기가 활용하여 날아감으로 다른 기러기는 최소의 에너지를 가지고 멀리 날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기러기가 당연히 먼저 지치겠지요. 그러면 다른 기러기가 교대하여 앞에서 인도하는 방법으로 멀리 간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하지요.

인간의 삶도 동일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일하면 서로 상승작용을 하게 됩니다. 서로 격려가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의욕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일도 훨씬 쉽고 효과적으로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무슨 일을 하든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협력하지 않으면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지 않고 심지어는 열심히 함께 하는 일에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하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맥이 빠지고 의욕이 꺽이고 힘 빠지게 만들어 점점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만드는 심각할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느 집단에 있든지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마을과 사회에서 결코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갈등관계를 조장하거나 걸림돌이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세워주고 그래서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힘든 사람을 세워 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협력의 또 다른 유익은 서로를 세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세워줌으로 가정이든 교회이든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국 공동체를 잘 세워 나감으로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보겠습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말씀 그대로입니다.

만약 길을 가다가 제법 깊은 곳에 떨어져 큰 상처를 입었는데 옆에 아무도 없어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행자가 있어서 이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준다면 생명을 보존하고 온전히 회복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꼭 육체적으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큰 시련으로 절망가운데 있을 때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사람의 절망감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와함께 하며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며 격려와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주면 절망감은 축소되고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자살하는 사람들의 80%는 자살을 시도하기 수개월 전부터 어떤 형태로든 자살의 징조를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낌새를 바로 알아채고 누군가 곁에서 도움을 주면 대부분의 자살은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이 이를 잘 알아차리지를 못함으로 실제로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함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죄의 유혹을 받을 때도 그렇습니다. 죄의 유혹 속에 갈등하고 있을 때에 아무도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를 권면하고, 만류하고,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쉽게 죄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함께 하며 그의 잘못된 생각들을 진정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면 죄의 구렁 속에서 헤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도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거나 원망과 불평 속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와 함께 하는 신실한 신앙인이 없다면 자칫 불신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하며 권면하며 위로할 때 그는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좋은 동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을에서나 좋은 동행자, 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주고, 위로자가 되고, 기도해주며, 돌보아주며, 감싸주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희망과 소망을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정말 아름다울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공동체는 아름답게 세워지고 그 가운데서 우리의 삶도 더욱 평안하고 가쁨과 은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느 곳에 있든 좋은 협력자, 동행자가 되어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직장과 다른 모든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워나감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함께 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함께 함의 또다른 유익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사랑과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이 말씀은 팔레스틴 지역의 기후적 특성에서 나온 경험담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광야가 많는데 광야지역은 낮에는 매우 뜨겁고 덮지만 일단 해가 지고나면 무척 쌀쌀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광야에서 여행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밤이 되면 함께 모여서 일부의 겉옷은 아래에 깔고 일부는 함께 덮고 자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침구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게다가 서로의 체온 때문에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하면 따뜻합니다. 단지 몸만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영혼도 따뜻해지고 기쁨과 은혜가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혼자 있으면 어떻습니까? 혼자서는 기쁨도 사랑도 환희도 열정도 갖기 어렵습니다. 육체적으로 따뜻하지 않습니다. 마음적으로도 외롭습니다. 영적으로도 뜨거운 열정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장작불은 모여 있을 때에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마음적으로 영적으로 여럿이 함께 할 때에 열정과 기쁨과 감격을 느끼기 쉽습니다.

여러분, 가정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에 부부가 있고 자녀가 있고 그러면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그런 곳에 이야기가 있고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얼마나 적적하겠습니까? 몇 년 전에 우리 집 양반이 병원에서 3주 입원해 있는데 나 혼자 집에서 자려니까 얼마나 적적한지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니 가족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입니까?

또 교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옆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고맙고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라면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를 세워주고 위로와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되새기며 정말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그래서 함께 하면서 좋은 동행자로 협력자로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함께 하면 어려움을 이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함께 함의 또 하나의 유익은 난관에 봉착해도 실망하지 않고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혼자 하다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일도 여럿이 하면 어렵고 힘든 일도 포기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잖아요. 어떤 이일을 추진하다가 난관에 봉착했어요. 물론 우리는 그때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혼자할 때는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용기를 줄 때 다시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힘써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귀는 바로 그렇게 혼자 할 때를 공격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는데 함께 하는 자가 없고 기도도 위로도 격력도 용기도 주지 않으면 자칫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약한 때를 이용하며 더 수작을 부립니다. 거봐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공연히 헛수고하지 말고 그만둬라. 그리고 또 솔직히 네가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하느냐? 대충해라. 그냥 적당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살아라. 그게 네 신상에 좋다. 하면서 온갖 수작을 부리며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무기력하게 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믿음의 동행자가 있어서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면 다시금 힘을 얻어 믿음의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나아가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코 분열을 조장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와해시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협력자가 되어 함께 수고함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감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가며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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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날)  /복된 동행, 복된 인생(Sunday Sermon)

제목 : 복된 동행, 복된 인생

본문 : 창5:21-24

 

1.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복된 인생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여 모든 성도 여러분과 고향을 찾은 모든 성도여러분의 가족과 일가친척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귀한 설 명절을 맞이하여 온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정말 하나님 앞에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혈육간에도 진정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를 마음껏 나누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저는 명절 때면 가끔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저희 집은 가난해서 초가 삼 칸에 살았는데 우리 이웃에는 안채는 커다란 ㄱ자 기와집이고 사랑채도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기와집인데다가 큰 대문이 있는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집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집에는 제 또래의 예쁜 소녀가 살고 있기도 해서 가끔 그 집 대문 안을 기웃거려 보곤 하였습니다. 그 집 안뜰에는 화단도 잘 가꾸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꽃나무도 심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성대하게 제사도 지내는 등 그 집은 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는 제가 어린 마음에 철도 없고 예수님도 몰랐기 때문에 부러워하긴 했는데 그게 정말 부러움의 대상일까요? 물론 뭐 그런 것도 좋은 것이긴 하지요. 가난하고 초라하게 사는 것보다야 기왕이면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좋은 것 먹으며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게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외적인 환경들이 우리를 정말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 있고 복되고 위대한 인생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귀하고 아름답고 대단하고 멋있는 인생은 말할 것도 없이 완전히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그 뜻대로 바르게 아름답게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생의 가치가 있고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대궐같은 집에서, 명절이면 시커먼 승용차가 몇 대씩 몰려오고, 뭐 가문에서 장관이 나고, 판검사가 나고 그래서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는 것들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것들 정말 별거 아닙니다. 암만 그래봐야 그런 것들이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가치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거짓과 편법을 행하기 쉽고 그래서 상처와 고통을 주기 쉽고,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것들 바라보다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래서 결국 영원한 진노를 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떵떵거리며 잘먹고 잘사는 것이 멋있고 가치있고 위대한 삶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속에 있는 인생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녕 중요한 것은 우주 만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시며, 생명의 주관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 안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주님과 동행하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라야 지금 여기서도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이요,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인 것입니다.

잠4:7~9절을 보겠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보세요. 지혜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지혜를 얻고 지혜를 높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화로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의 도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복된 설명절에 오늘까지 하나님안에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귀하고 복된 인생이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생명이시고 기쁨이시고 평안이시고 영광이신데 그 주님과 동행하면 그 은총을 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총을 주지 못하는 것들과 동행하면 어찌 그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에녹이라는 사람은 온전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놀라운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습니다. 22절 말씀 보세요.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므두셀라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밥먹고 일하고 결혼해서 아기 낳아 기르면서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이래로 오직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에녹과 선지자 엘리야, 이 두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너무나 영광스럽고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24절을 보겠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말씀그대로 에녹이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니까 그를 산채로 데리고 가셔서 세상에 있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황홀했겠습니까? 산채로 그 몸이 영화의 몸이 되어 두둥실 떠올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꿈속에서 가끔 새처럼 날아다닐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속된 말로 기분이 얼마나 째집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건 속된 말로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에녹은 더 이상 세상의 시간과 공간과 모든 힘들고 약하고 어려운 것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화의 몸이 되어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올라간 것입니다. 한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고 황홀했겠습니까? 너무나 감격스러워 할렐루야! 할렐루야가 저절로 터져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에녹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요? 그것은 앞에서 보았던 22절과 2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뭡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에녹은 365년을 살면서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가는 특별한 은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면 분명히 은혜를 충만하게 받습니다. 당연하잖아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뢰와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믿음이 있다면 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이 안되는 것은 자꾸 세상에 뭐 다른 좋은 것은 없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좋은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하나님 안에 정말 좋은 게 있는데 왜 한눈을 팔겠습니까?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자꾸 다른 것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즐거움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면 곤란한 거예요. 이건 결국 하나님을 잘 못믿는 거예요. 안 그래요? 아니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평안과 축복이 있는데 왜 그걸 놔두고 엉뚱한데 가서 기웃거리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도 이걸 잊지 말고 그저 갓난아기처럼 사나 죽으나 하나님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잘났다고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지식을 따라 내 눈에 보이는대로 살아가지 말고 주님이 가시는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별것 아닌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 권세나 지식이나 이런 것들 따라가지도 말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시며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목표와 방향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표에 우리의 뜻과 우리의 뜻을 일치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려면 하나님과 뜻이 같아야 하고, 방향과 목표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울이 목표인 사람과 부산이 목표인 사람이 함께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의사가 되려는 사람과 축구선수가 되려는 사람이 같이 공부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표와 내 목표가 다르면 결코 동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목표와 방향이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의 목표와 방향과 뜻에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 안에 생명과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무지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운 것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향과 나의 방향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이걸 일치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날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데,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나의 뜻보다 높고 깊고 완벽하신데 하나님께 나를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요10:2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목자이신데 거기에 생명과 평안과 안식이 있는데 무얼 따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 듣고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목표와 방향을 고집하지 말고, 자꾸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목표와 방향에 맞추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과정과 방법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목표와 뜻이 같더라도 방법이 다르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요? 같이 제주도가 목적지라해도 한 사람은 비행기 타고 가고 한 사람은 배타고 가면 동행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백두산에 오르면서 한 사람은 중국 쪽에서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북한 쪽에서 올라가면 동행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려면 목표와 뜻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동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풍조가 만연된 세대에서는 우리는 이점을 특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하고, 권력도 얻고, 문명의 이기도 가능한 많이 누려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문화적 혜택을 보다 많이 누리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벌고, 지식을 쌓고, 권력을 얻고, 문화생활을 즐기되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고 누리는 과정이나 방법들도 하나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만한 방법과 과정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도 얻고 또 얻은 것들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인가를 얻는 과정에서도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방법과 과정을 무시한 채 얻으려고 할 때가 많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해야 하는데 그저 자신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진정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고 시기와 질투와 갈등과 싸움을 유발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은 결코 성공할 수도 없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설령 인간적으로 성공을 한 것처럼 보여도 결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설령 많은 것을 가졌어도 물거품이 될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결국 심판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11:9절을 보십시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의 뜻에 맞춤과 동시에 그것을 이루는 방법과 과정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추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설령 돌아가는 일이 있어도, 설령 늦게 성취하는 한이 있어도, 설령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그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생각대로 어떤 일들을 추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을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또 하나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에녹은 무려 300여년 간이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해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어떻게 동행이 가능합니까? 연합되면 가능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영적으로 서로 한 덩어리로 묶여져 있으면 온전한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 기분이 좋고 사이가 좋고 상황과 환경이 좋으면 어느 정도 동행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뭔가 좀 상황과 환경이 좋지 않다거나 둘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동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묶여져 있으면 기분과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절대 분리되면 안됩니다.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인과 종으로 연합된 것 아닙니까? 그렇게 주인과 종으로 연합되었으면 이제는 당연히 주님이 생각하는대로 생각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님이 가시는 곳에 가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된 관계요 그러면 자연히 동행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 15:5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주님을 멀리하거나 따로따로 놀거나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엉뚱한 것과 동행하지 말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래서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주님께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오직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동행할 때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위로와 평안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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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세상을 이긴 사람들 (Sunday Sermon) 

제 목 : 세상을 이긴 사람들

말 씀 : 요16:31~33

 

1.자신의 무지를 알아야 합니다.

금번 설날에 저도 87세 되신 어머니가 계셔서 고향에 가서 하룻밤 자고 왔는데요, 저녁 때 쯤에 저희 형님이 바둑을 좋아하셔서 바둑 TV에서 프로 9단끼리 두는 바둑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보고 있더니 ‘에이, 저건 아무래도 너무 과했다.’ 그러는 거예요. 내 참 기가 차서.... 지금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몇단 이라고요? 프로 9단. 우리 형님은 아마 3급쯤 되는 것 같아요. 바둑에서 프로 9단이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입신이라고 하는데 아마 3급 주제에 감히 입신들이 두는 바둑을 보면서 과했다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아도 유분수지 감히 누구 앞에서 판단을 하는 겁니까? 정말 가소롭지 않습니까? 아마 3급짜리하고 프로 9단하고 맞바둑을 두면 아마 살아 남을 게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감히 판단을 하다니 정말 가소롭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쩌면 그게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실상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워서 아는 세계는 정말 쥐꼬리 만큼도 안되는데 마치 세상 모든 걸 아는 양 말하고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거죠. 여러분, 안 그래요? 이 무한한 우주공간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니 우주 공간은 고사하고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들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게 부지기수입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먼지들이 떠다니고 있고, 음파, 전자파, 바이러스, 세균들을 비롯한 별의 별 것들이 다 떠다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고 있는 공기 중에는 질소, 산소, 아르곤, 이산화탄소, 탄산가스, 네온, 헬륨, 메탄, 크리프톤, 수소, 아산화질소, 키세논 등 12가지의 물질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들이 하나나 보입니까?

여러분, 소리는 얼마나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인간의 가청 주파수는 20hz~20Khz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귀가 아주 밝을 경우이고 보통은 그 절반인 50hz~10Khz대의 음파만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가 아무리 밝아봐야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의 몇백분의 일, 몇천분의 일도 못 듣고 있고, 눈이 아무리 밝아봐야 우주공간 속에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몇억분의 일도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는 것도 그렇고 경험한 것도 그렇습니다. 모르는 것이 백배 천배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세상 일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떠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죽어라고 안 믿습니다. 또 어떤 분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건 도대체 말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조용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냥 아멘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거예요.

고전1:25절 말씀보세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은 어리석은 것도 없고 약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사람의 가장 똑똑하고 잘나고 강한 것보다 하나님의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 천만배 강하고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된 말로 까불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잠3: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아멘으로 화답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모든 능력과 생명과 기쁨과 평안의 근원이신 주님의 은총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 안에 온전한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고 믿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내려놓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결국 진리의 길로 달려가게 되고 그 대에 진정한 승리자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우리가 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는데요, 33절 말씀 보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이 뭐가 이해가 안가냐? 그것은 이 말씀을 주실 때의 상황을 알면 왜 이해가 잘 안가는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32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같이 보실까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너희가 곧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 있을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즉 이때는 예수님이 곧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의 처형의 때가 가까운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말이 안 되잖아요. 이제 곧 군인들에게 잡혀서 온갖 조롱과 핍박과 멸시와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분이 세상을 이겼다니 이게 말이 되냐구요?

그러나 결과는 어땠습니까? 물론 당연하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결국 이기셨습니다. 무지한 로마병정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조롱과 채찍과 침뱉음과 십자가 죽음의 권세를 다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너희도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희에게도 반드시 승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제자들도 그 말씀대로 믿음으로 승리하고 영원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작은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살피고 주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답이 보이고 길이 보입니다. 승리의 길이 열립니다. 인생의 승패는 외적인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의하여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승패는 오직 믿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이나 이성을 의지하는 자는 100% 실패합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과 복과 은혜와 평안의 근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100% 완전한 승리자가 됩니다. 그래서 요일5:4에서는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이성대로 판단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한 승리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32절)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32,33절 다시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너희가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떠날지라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의 그 능력과 지혜와 권세와 사랑과 은혜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때로는 환난과 핍박이 있겠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결국 너희들은 영광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따르는 너희들에게도 나와 함께하는 내 아버지께서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 함께하시는 한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아버지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너희들의 사명을 감당하거라. 이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이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망할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고 하였지만 용기는 가상하지만 교만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습니다. 실패가 있습니다. 낙심과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따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승리와 기쁨과 생명과 은혜와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영원무궁하십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 안 그래요? 어떻게 집니까? 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한번 말씀해보세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져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져요? 어떻게 져요? 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롬8:37~39절 보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 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혹시 어려움이 있어도 잠시 잠깐입니다.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뭔가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지금에 눈에 보이지 않아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이요 부족함이요 어리석음이지 결코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무언가 앞이 좀 어둡다고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근심하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 앞에 기도하며 주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능력과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33절)

여러분, 우리가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와 평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33절 다시 보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러분, 보세요.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비록 지금 육체적으로는 너희를 떠나지만 그러나 영으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하면 내 안에 있는 은혜와 평안이 너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너의 일을 하라. 그러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냥 함께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평강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므로 그 안에 있는 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100%이깁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승리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거기에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인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런 것들 바라보고 거기서 인생의 성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100% 실패합니다. 당연하잖아요? 사람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람에게서 오는 것은 다 불완전하고, 다 한계가 있고, 다 죄에 오염되어 있고, 썩어지고 사라지는 것들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지켜줍니까? 지켜주기는커녕 그런 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듦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얻지 못하여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완전합니다. 끝까지 나와 함께 합니다. 아니 끝이 없습니다. 100% 확실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구애되지도 않습니다. 모든 조건과 환경과 상황과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요14:27절을 보세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세상이 주는 것과는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히 다른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평강을 주셔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완전한 평강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모자랍니다. 미련합니다. 죄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서는 반드시 집니다. 마귀사탄과 나 혼자 싸우면 절대로 승리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은혜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100% 승리합니다. 감히 사탄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살았던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은 모두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노아는 그러한 믿음으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120년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노아의 가족을 무시하고 조롱하였고, 그 배를 짓느라고 수없는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구원의 날을 바라보며 방주를 지어 결국 그 가족 여덟 식구가 구원받아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나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기고 부인을 빼앗길 뻔하기도 하고 아들 이삭을 그것도 백살에 낳은 외동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세상적인 척도가 아닌 오직 주님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지만 그러나 결국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에게도 여러 가지 기가 막힌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울에게 쫓겨 다른 나라로 도망가 몇 년동안 고통의 세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식에게 쫓겨 도망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범죄로 선지자에게 혼나고 자식이 죽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결국 가장 위대한 성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일희일비하지도 말고, 내 생각이나 지혜나 경험으로 판단하지도 말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고 인생 끝난 것처럼 좌절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누구도 무엇도 당할 수 없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상황과 환경이 좋지 않아도 주님의 방법을 따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용기와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진정한 승리의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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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snuday sermons

 

고난 뒤에 있는 축복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
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장 7절-11절)


1. 모든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것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보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나는 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디를 가 보아도 안전한 삶의 터전은 없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지진>이 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날 때 보면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삶의 터는 어디에 가 살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탈북자들을 일컬어 <새터민>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저들이 천신만고 악몽과 같은 생활의 터전에서 탈출하여 <새터민>이 되었지만, 정작 남한에 와 보니 역시 세
상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 새 터를 마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서 고생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눈물날 정도로 고생한 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딜 가나 모두 힘든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세상 안에서도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터가 흔들릴 때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위에 찬송가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비유적으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너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위에 짓는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석이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왜 필요한가?
잔잔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도가 일어나 몰려오기 시작하면 닻이 필요합니다.
<닻>을 내리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데, 어떤 가정은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이란 닻줄이 없거나 끊어졌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터가 견고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터는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육체도 튼튼해지려면 단련해야 튼튼해집니다.
팔뚝의 힘도, 다리의 힘도, 반복된 운동을 통하여 견고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기성세대에 비하여 약해졌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6.25 세대들을 보면 모두 삶의 연단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세대들 보다 강하게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왜 군대에서 해병대가 강하다고 합니까?
훈련을 강하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삶의 터를 견고케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마귀를 대적하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방탕하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낙심할 환경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포기하는 환경에서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마귀를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낙심하면 들어 누워 버립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합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그어 버립니다.
폭력을 씁니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그러다 나오면 다시 반복해 그런 길을 걷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들리는 터전에서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믿음이란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닻줄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폭풍이 지난 후에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앙의 눈으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눈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이 눈을 통하여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보았습니다.
에스더도 이 눈을 통하여 담력과 힘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보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 뒤에 오는 축
복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도 100배나 얻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다는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리입니다.
그 고리에 닻줄을 매어 놓으면 어떤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참으로 가사에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으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었습니다.
참으로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 그런 험한 세상을 만난 세대들이었지만, 전쟁, 죽음, 배고픔, 가난의 험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길에서 이제까지,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 하십시요.
우리의 믿음의 터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모쪼록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서십시요.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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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주일설교

주일낮설교   

제 목 :

말 씀 : 시103:1-5

1.너무나 큰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의우총사진 보여주기) 주일날 아침부터 그것도 감사주일 아침부터 웬 무덤이냐고 하시겠지만 이게 무슨 무덤인지 아세요. 의우총이라고 소의 무덤과 묘비입니다. 이 의우총은 상주에 있는데 이 의우총이 세워진 유래는 이렇습니다.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의 서상모라는 분이 암송아지 한 마리를 사다 기르게 되었는데 이웃에 사는 김보배라는 할머니가 이 소를 너무 예뻐해서 오고가며 늘 쓰다듬어 주고 배추나 고구마나 옥수수 등 먹을 것을 종종 갖다 주곤 했답니다. 그렇게 송아지때부터 어미소가 될 때까지 아니 그 후로 약10년간 그렇게 이 소를 사랑해주다가 87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장례를 마친 다음날 이 소가 없어져 동네 사람들이 나서 찾았는데 글쎄 이 소가 김보배 할머니의 무덤에 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무덤은 외양간에서 2km 정도 떨어진 산 중에 있었는데 어떻게 찾아갔는지 거기에 가 있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소가 할머니의 산소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아들이 이 소가 하도 기특하고 고마워서 막걸리와 두부와 배추 등을 접대하며 조문객으로 예우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이 소가 19살의 나이로 늙어 죽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 소를 극진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주었고, 상주시에서는 그 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의로운 소의 무덤 ‘의우총’을 만들어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약간은 과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소를 통해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됩니까? 사실 이 소뿐만 아니라 우리는 은혜 갚은 동물 특히 은혜 갚은 개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동물도 이와같이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얼마나 더 해야 하겠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안 그래요?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동물만 못해서야 어떻게 체면이 서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은혜를 안다면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이차적으로는 사람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누리는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생명은 어디서 왔습니까? 물론 부모님이 주셨지요. 그럼 그 부모님은 어디서부터 오셨습니까? 물론 조부모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진화론을 사실로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찌해서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더니 점점 진화해서 무슨 벌레 같은 것이 되고 좀더 진화해서 어류도 되고 파충류도 조류가 되고 그러다가 짐승이 되고 그 중 하나인 원숭이가 점점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학의 법칙에 의해서도 생명체는 결코 저절로 생겨날 수 없습니다. 설령 만에 하나 단세포 생명체가 생겼다해도 그 단세포 생명체가 이 신비하고 오묘하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사람까지 진화가 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안 그래요? 벌레의 어디에 인간의 이 신비하고 오묘하고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유전자가 있기에 그게 사람까지 진화가 됩니까? 우주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빅뱅론이니 뭐니 어쩌구하는데그것도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생명이든 자연이든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면 그 어떤 방법으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이든 인간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물질, 생명, 육체는 물론 이성, 지성, 감성, 능력, 지혜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숨쉬고 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태양과 공기와 물과 양식을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1분 1초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대상29:14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며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부모님의 은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부모님만 아닙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알고 생명을 얻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것은 물론 자동차, 스마트폰, 텔레비전, 냉장고, 문화시설, 체육시설, 이 부요함, 평화, 자유, 질서 이 모든 것들에 이웃이 함께 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우리가 누리고 할 수 있는 것 중에 오로지 혼자만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늘 맥추감사주일인데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물론 매일 매순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걸 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제 잘나서 저 혼자 사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알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또 최선을 다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의 삶속에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늘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너무나 많은 은혜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을 안다면 언제나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당연하고 그게 내가 네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습니까? 여러분, 지금 한번 눈을 감고 감사거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있습니다. 몸이 온전치 못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하고 편히 쉴 집이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와 질서가 있습니다. 태양이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그 태양아래서 온갖 식물과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새들은 노래하고 마실 물이 있고, 숨쉴 수 있는 공기가 있고,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동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고 차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스마트폰도 있고,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고..... 여하간 있고 있고 있고 계속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자꾸만 없는 것, 부족한 것만 생각하며 가난뱅이처럼 삽니다. 자꾸만 남의 탓, 환경 탓, 상황 탓하며 불평불만을 터트립니다. 세상을 향해 에이 망할 놈의 세상, 에이 도적놈들 하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못난 것, 잘 못하는 것만 생각하며 부모 탓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미련할데가 어디 있습니까?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면 도대체 어쩔 셈입니까? 그런 사람은 암만 많이 줘봐야 소용없습니다.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줘도 누리지 못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상황이나 소유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이고 가능한 것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것을 먼저 봅니다. 똑같이 믿음 생활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미 주신 것,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저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없는 것만 생각하며 맨날 달라고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아시는 살전5:16~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고, 또한 감사하는 자가 은혜를 아는 자요, 또한 그렇게 감사할 때에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더구나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와 무지로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3,4절의 말씀 보겠습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그러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든 인생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심히 연약하고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모르고 그저 제 잘난 멋에 살다가 그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만다행히도 우리가 죄와 무지와 한계속에 있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할렐루야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엊그제 우리 교회 가까이에 계신 이웃분이 위암으로 위 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고해서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위 전체를 절제해야 할 만큼 엄중한 상황이었는데도 그래서 자칫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천만다행히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지 않아 수술이 잘 되어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고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육체적인 생명도 너무나 귀한 것이니까 너무나 기쁜 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암을 고침 받은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조금 연장시킨 것일 뿐 얼마 있으면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도 또 죄와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아야 한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릴 영생복락의 세상은 그야말로 고통이나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아픈 것이나 죽음의 그림자는 눈꼽만큼도 없는 나라입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행복과 사랑과 은혜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인정을 하든 말든 그건 인간의 죄와 무지와 한계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결론에 불과하고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의 은총을 입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혜택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생명과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도 늘 서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잘났건 못났건 능력이 많건 적건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가 최곱니다. 예수님이외는 이보다 소중한 존재가 없습니다. 세상의 누가 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보다 나를 더 아껴주고 더 사랑해 주겠습니까? 어떤 다른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가 나를 위해서 그토록 수고해 주고 아껴주고 하겠습니까? 누가 내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보다 더 의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최곱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양육해 주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그렇게 애타게 기도해 주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맨날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해서 전해 드리겠습니까?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 있든지 감사하며 일해야 합니다. 직장이 있어 일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일 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직장을 통하여 내 가정의 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농촌 환경이 많이 열악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농사지을 땅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농사지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요,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농사를 통하여 가정을 꾸려오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아가 농사를 경영하여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거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나 교회에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나 우리가 정말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동시에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가족과 교우들과 직장동료들과 심지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감사를 표하며 어떤 형태로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삶의 자리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천국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축복이 오고, 감사하는 마음 속에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불평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여러분 같으면 안 그러겠습니가? 줘도줘도 감사는커녕 투덜거리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불만하면 줬던 것도 빼앗아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그 은혜와 사랑을 알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5절을 보십시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가까이하는데 어찌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어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사는 자들에게 분명히 좋은 것들로 충만케 채워주십니다.

 

또한 그렇게 감사하여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여 찬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어 창공의 지배자인 독수리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나 염려없이 창공을 누비듯이 그 삶이 힘차고 능력이 있고 자유와 평안이 넘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해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히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삶에 힘이 있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게 됩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욕심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둔 것들이 대들지 못하고 설령 대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넉넉히 이겨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여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욱 충만하게 덧입어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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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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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히브리서 31~3)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브리서 3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한 평생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난후 유대 사회로부터 추방당하고 로마 정부의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떠한 존재이며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우리의 정체성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31절은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아무도 주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644절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56절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우리는 구원받을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4:1).

 

괜찮습니다 다 괜찮습니다책의 저자 안희환 목사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중학교 때 신문 배달하다가 사고를 당하게 되어 왼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 팔이 없음을 절망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사람 만들어 달라는 것, 공부 못하지 않게 지혜 달라는 것, 설교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기울었던 가세가 살아나게 되었고, 사고 때문에 한 학년 유급해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공부가 재미있어지며 전교 1등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 현재는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며 절망하거나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사람들에게 왼팔 없는 목회자 안희환 목사는 이렇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가난해도, 못 배웠어도 많은 실패를 경험했어도 몸에 장애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마음을 고쳐먹으면, 사람이 변하면, 나머지 것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능력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을 향해 날마다 기도 여행을 떠난다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거룩한 형제들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과 구별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11절은 말씀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거룩케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과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526절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과 말씀으로 구별된 거룩한 형제들답게 세상에 물들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세상을 다스리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우리의 믿음의 대상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 31절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신앙고백의 대상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사도이십니다. 요한복음 638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사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요, 그가 하신 표적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시므로 그의 말씀과 행동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귀신이 떠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입고,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길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2021절은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한 길을 가고 있는 나귀 선교사권병희 선교사를 소개합니다. 그는 서울대 농학과 박사학위를 마치고 농업 전문가로 일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가 쓰시겠다는 부르심에 묵묵히 끌려가던 벳바게의 나귀처럼 그는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 방글라데시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가나안농군학교의 분교를 세우고 오직 복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기경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10년 동안이나 척박한 땅을 묵묵히 기경한 방글라데시를 떠나 다시 새로운 땅 캘커타를 향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도 캘커타를 향해 떠났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교사가 되면 어떻게 될 거라는 계산도 없이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삶은 내가 계획하고 꿈꾸던 것보다 훨씬 보람되고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걸음만 앞서 가시면 곧장 따라가겠다고 결심하고 순종했더니 주님의 귀한 일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늘 나보다 한 수가 높으신 주님께 그저 감사와 함께 항복의 손을 듭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소외되고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십자가에서 피 흘려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단번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12절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죄에서 자유를 얻습니다(4:1415).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가시관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비방과 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가난과 비난과 배신과 버림받는 아픔과 고통을 다 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사 우리를 도우십니다.

 

히브리서 725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어떤 절망과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습니까?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사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주님께 연결해 주는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

 

 

하나님의 자녀가 역경과 고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절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의 1차 수신자들은 유대교의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대교와 타협하거나 유대교로 복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서 눈을 돌려 환난과 핍박 가운데 고난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그들을 도우시는 예수님께 영적 시선을 집중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일수록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12:23).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삶을 점령하시도록 예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그리할 때 환난을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를 체휼하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마음을 쏟을 때 담대한 믿음이 생겨 어떤 환난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넉넉히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살았던 것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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