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세계 교회사 약사

  
1. 초기 교회(사도시대와 그 후 시대의 교회)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대교의 축제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 선포를 경청하여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주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손례, 정화례, 안식일등의 유대인의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준수하는 유대교 종파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특수한 공동체를 이루고 고유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하는 사도단과 그 밑에 야고보를 중심으로하는 장로단과 스테파노를 지도자로 하는 부제단이 구성되었다. 사도들의 열성적 선교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 전파되었다. 이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두그룹이 공존하였는데, 하나는 아직도 엄격한 유대사상을 보존하면서 실천하던 유대지방의 에루살렘교회, 갈릴래아교회, 사마리아교회, 요르단 서안지방의 교회등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의 교회, 로마교회 등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이는 개종한 그리스인, 헬레니스트, 기타 비유대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의 등장과 그로 인한 반감, 바울로 사도의 선교활동으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급속히 성장하였고,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였다.

 

2세기에 이르러 12사도들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계시의 사도시대가 끝나고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후 시대에 전하는 사도 후 시대 (100-300)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다시 사도 교부시대(100-150), 초대 교부시대(200-300)로 구분되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관습은 아직도 유대교적 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적 색체를 띄고 있었다.

둘째, 교계제도가 최종적으로 확립되어 주교, 장로, 부제등의 세 성직계급이 등장하였다.

세째,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이단과 투쟁하면서 성립하기 시작하였다.

네째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로마 제국의 영토확장에 따라서 널리 전파되어 교세가 급속적으로 성장하였다.

다섯째로 이러한 교세확장으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황제들에게 정치적불안감을 안겨주어 200년간의 박해를 받았다.

  

1) 교회에 대한 박해

 

가. 박해의 원인

 

첫째 원인 : 유일신교와 다신교의 충돌이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국가의 이교적 경신예식에 참석하고 황제 숭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교 로마인들에게는 무신론자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둘째 원인 : 로마 시민이 그리스도교와 그 신도들에게 갖고있던 오해와 증오심이다. 자연의 재해, 패전등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국가의 신들에게 제사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군중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미움을 폭발시켰다. 또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등 인간의 육신을 먹고 그들이 서로 형제 자매로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세째 원인 : 황제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과 국가위기의식이다.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범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확장의 그리스도교는국가를 전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 교회의 승리와 신앙의 자유

 

311년에 갈레리오 황제(305-313)는 그의 박해가 효과 없음을 인정해야 했고, 죽음을 앞둔 병석에서 관용의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고 콘스탄틴대제의 옹호아래 국교로서 급성장하게 된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황제들의 호의적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였다.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다. 첫째로 수도원이 창설되어 발전하면서 수도생활은 일반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둘째로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여 교회의 모든 현안문제를 해결하거나 결정하였다. 세째로 신앙생활의 활성화와 함께 전례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밖에 국교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정통과 이단 사이의 격렬한 교리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리논쟁은 일련의 공의회를 통해서 해결되었고 그 결과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역사를 가져왔다.

 

5세기 중반기에 국경지대의 게르만 민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험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의 사명을 잃지 않고 유럽세계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는 게르만 민족을 개종시켰다. 특히 서부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족의 개종은 유럽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 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 교회의 기원이 되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2. 중세 시대 전·후기의 교회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를 거쳐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는 시대적으로 양분될 수 있다. 중세 전기(750-1054)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 탄생 등의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 간섭을 받아 교회의 세속화와 교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교회와 국가가 밀착된 관계로 프랑크 제국의 정치적 붕괴는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880-1046)를 탄생시켰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880-962)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후에는 (962-1046) 독일 신성 로마 제국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권을 상실하였다. 아울러 교리 논쟁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 교회가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 동방 교회는 성화상 파괴 논쟁을 통해서 서방교회와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1054년에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1) 성화상 파괴 논쟁

 

약 725년부터 842년 사이에 비잔틴 교회가 격론하게된 성화상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의 주요 쟁점은 종교적 문제, 즉 그리스도교 교리와 전례에 대한 것이었다. 성화상 파괴는 모든 종교 예술품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구약성서에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에서 구하고 신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하여 어떠한 형태의 모상도 공경하는 것을 금지한 사실에 기인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이 가시적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신약에서 모상금지는 더 이상 구약에서와 같은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교회는 오랫동안 모상에 대해 경고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상보다는 상징을 택하였다. 그러다가 5세기에 성화상의 공경이 시작되어 7세기 비잔틴 교회에 있어서는 대중신심으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 시대에 이르러 소아시아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것은 일반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서 이러한 신심행위가 우상숭배에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육화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그 신성과 인성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낼 수 없었고 또 인간 모습만의 표현은 네스토리우스 사상과 같은 이단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 로마 제국에 있던 단성론의 이단자들도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을 부인하였기 대문에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였다. 아울러 동방교회의 주교들을,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이 시리아와 에집트에 침입하면서 성화상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어서 이들의 개종에 이 신심행위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제 2 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92)는 성화상 공경에 찬의를 공표하였다. 또한 8세기 초에 신학자인 다마소의 요한은,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느님 설교"에 대한 기록일 뿐 아니라 성화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가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신에게만 바치는 흠숭과 피조물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분하였다.

  

2) 동, 서방 교회의 결별

 

비잔틴 교회와 성방의 라틴교회의 견해는 오랫동안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였다. 정치, 신학, 전례, 규율에 있어 상호간에 많은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우기 샤를르 대제와 오토 대제의 서방 제국 건설과 이탈리아 진출, 서방 교회의 개혁 정신등은 두 교회 사이의 대립, 또는 적대감정을 격화시켰다. 결국 두 교회의 충돌은 북구의 노르만 민족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였을 때에, 교황 레오 9세(1049-1054)가 그의 정치세력을 이 점령지역까지 연장하였을 때에 일어났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가 점령자들을 축출하기 위해 교황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미카엘 체프랄리우스(1042-1058)가 그의 관할지역인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내의 충돌을 일으킴으로서 비잔틴 제국과 교황청의 상호이해를 저지시켰다.

 

가) 교회분규의 내용

로마 교황청은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틴 교회를 라틴전례로 통일하고자 시도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였던데 반해, 비잔틴 교회는 관할지역에 있는 라틴전례 성당에서 비잔틴 전례를 사용하고, 미사성제에서 누룩없는 빵의 이용금지 및 사용을 단죄하였으며 전통적인 자치권을 고수하려고 함으로써 분규과 확대되었다.

 

나) 교황특사의 파견과 상호 파문

레오 9세는 두 교회의 협력관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추기경 훔베르트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으나 교황사절단은 고자세의 입장에서 총대주교를 대하였고, 교황의 절대적 권한에 의거하여 체프랄리우스에게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서방교회의 관습이 유효하고 유일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총대주교가 이와같은 요구를 거절하자 훔베르트는 체프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에 대한 파문서를 작성하여 1054년 7월 5일 성 소피아 성당 제대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는 이 파문서를 소각하였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교회회의는 훔베르트와 그의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로써 두 교회는 결별하여 그리스도교 세계는 양분되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 문제는 홈베르트의 월권행사로 간주된다.

  

3) 중세 후기 교회

 

중세 후기(1054-1300)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1073-1085)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 가지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는 11세개에서 시작된 십자군 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났다. 십자군 운동은 기사 수도회의 탄생과 서구의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접촉을 가능케 함으로써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과 예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청빈 운동은 교회의 생활 혁신을 불러 일으켰으나 지나친 주장은 이단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러한 이단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부정적 방법으로 종교재판이 생겨났고 긍정적 입장에서 탁발수도회가 창설되었다. 탁발수도회는 이단자의 개종과 선교활동 이외에 13세기에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에서 학술활동을 통해서 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3. 종교개혁의 원인과 배경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교회(476-1517)를 마감하고, 새로운 교회쇄신의 계기를 마련하여 준 사건은 종교개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교회가 속된 모습을 보였을 때마다 그 내부에서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있어 왔었다. 그런데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교회쇄신 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은 1500여년 동안 전승, 보존되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였고 1504년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결별이후 다시 한번 그리스도교 세계를 오늘날까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갈라 놓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불상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사실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간접적 원인으로서 14-15세기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의 역사적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직접적 원인으로서는 탁발 수도회인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의 신부이며 수사였던 마틴 루터(1483-1546)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원인만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며, 거기에는 종교개혁의 타락 외에 인문주의의 대두라는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인 여러가지 원인들이 겹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 인문주의의 대두

 

인문주의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모든 속박과 권위에서 해방시키려는 사조이다. 따라서 종교, 도덕의 모든 계명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의 의지와 감정의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고자 하였다. 진리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교회의 교리상의 원칙을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조는 새로 발명된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광범위하게 민중 속에 퍼져 갔다.

  

2) 정치적 원인

 

신성 로마 제국의 무력화와 모든 구속으로부터 국가의 절대권위를 가능하게 하는 로마법의 채택은 신앙분열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제후들의 세력은 커졌고, 교회에 관한 일에서부터 자기 백성의 신앙생활에 까지 지배하기에 이른다. 한편 그들은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성당, 수도원의 재산을 노리게 되고, 이러한 중에 교회에 대한 반항운동을 성공시키게 되는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3) 사회 경제적인 원인

 

중세 말기의 서구사회는 경제적으로 볼 때 도시와 지방 사이에 빈부격차가 극심하였다. 당시 몰락과정에 있었던 기사계급과 농민계급의 빈곤화도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불안과 불평, 불만족에 있었던 그들은 반교회운동에 휩쓸리게 된다. 여기서 그들 속에 뿌려진 후기 인문주의자들의 소책자는 민심을 점차로 교회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4. 종교 개혁 시대의 교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의 수사 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통신앙의 기저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시키는 종교 개혁시대(1500-1650)을 열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즈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가 탄생하였다. 여기서 마르틴 루터와 '대사논쟁'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마르틴 루터

 

루터는 1483년 10월 10일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아이슬레벤에서 빈농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서 부친의 소망에 따라 법학부에 등록하였으나, 2개월 후에 스토테른하임이란 마을 근처에서 뇌우 속에 번쩍이는 번개불에 놀라 죽음이 임박하였다는 위기 위식에서 수도자가 되기로 다짐하고 에르프르트의 성 아우구스틴 은수사회에 들어갔다. 그는 1506년 수도서원을 하였고 1년 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신학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초기 생애 속에서 그 나름대로 경건한 신앙인, 모범적 수도자, 열성적 사목자로서 생활하였던 루터는 '성베드로 대성전 전대사'의 시행과정에서 드러난 남용에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1517년에 교회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독일의 대사시행을 책임진 고위 성직자에게 항의하는 편지와 대사 남용을 논박하는 신학명제인 '95개항' 명제를 작성하여 보내어 대사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의 기운을 루터의 종교개혁에 두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이 대사논쟁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의 촛점이 되었던 대사논쟁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2) 대사 논쟁

 

루터에게 항의의 구실이 된 것은 대사문제이다. 당시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1506년 로마 대성전 개축에 착수했다. 규모가 컸던 만큼 막대한 비용이 들어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1513-1521)는 전대사를 반포하고 신도들의 재정적 도움을 청햇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 대사의 반포가 너무 자주 있었고, 그 위에 대사 선전자들 주변에는 흔히 탐욕이 뒤따랐다. 그들은 이 대사를 기회로 잡아 돈벌이로 이용하였고, 그 폐단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거리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사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하여 대사의 효과를 과대하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잘못과 죄의 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고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를 구원과 혼동하여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성사표를 곧 천국 통행증으로 오해하였다. 신자들은 고해성사표에서 강조하는 대사를 얻기 위하여 필요한 내적 정화를 등한시 하여 돈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교리가 중세말기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여기에 근거한 대사 시행과 대사 판매의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장된 교리를 밝힌 적이 없다. 이제 교회 안에서는 잘못된 대사 시행에 대한 개혁의 소리가 높았고, 대사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항' 명제를 공표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하겠다. 이같은 대사논쟁으로 인하여, 결국 루터는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 당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구교(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로 나뉘게 되는 역사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5. 교회의 쇄신운동

 

한편 가톨릭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그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와 바젤 공의회(1431-1491)에서 교회 쇄신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고, 르네상스 교황들도 산발적으로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모두 좌절되거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교황들과 교황청에 이를 시행할 만한 내적 및 종교적 역량이 결여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우기 교회 쇄신을 위한 공의회 개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1523-1534)는 공의회 소집을 주저하였다. 그 이유는 교황이 공의회주의, 즉 공의회 우위사상의 재등장을 우려하였고 교황령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여러가지 이유로 몇 차례의 연기를 거쳐 1545년 12월에 가톨릭의 교회 쇄신 공의회는 트리엔트에서 개최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퇴락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 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트리엔트 개혁정신은 선교 활동에서도 나타났다. 종교개혁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었던 가톨릭 교회는 교회쇄신의 일환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섰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등의 수도회와 예수회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이제 가톨릭 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6. 근대 공의회 이전 교회(19세기)

 

19세기를 사로잡았던 사상인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켜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유럽지역에서 그 권위를 상실하였고 세속화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교황청의 승리를 안겨 주었다. 교회는 반가톨릭적 교회에서 단결하였고 국가 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교황지상주의)을 일으켰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가톨릭 자유주의는 교회를 내적 혼란 속에 휩싸이게 하였으나 신앙 오류표(Syllabus)의 반포로 인해 외적으로 평온에 들어 갔다. 또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에 대한 신조 결정으로 분열되어 독일에서는 '구가톨릭 교회'가 떨어져 나갔으며 이른바 '문화투쟁'으로 교회는 일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였으나 가톨릭인의 단합으로 결국은 승리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 대중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1891년에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 또는 '노동 헌장'이라 불리는 칙서(새로운 사태)를 발표하여 근로 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칙서는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 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7. 현대 공의회 이후 교회(20세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교황 요한 23세(1958-1963)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가 마무리 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1962-1965).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고 외적으로는 문호를 개방하여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촉진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회법을 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계획은 3년 동안의 공의회에서 진지하게 논의 되었으며, 1983년에 새로운 교회법이 선포되어 1984년에 발효하게 되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다.

  

8. 참고문헌

 

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서울, 1985.

2. 요트 마르크스, 가톨릭 교회사 上下, 김창주 편역,

3. 김성태, 세계교회사 I,
 

(출처 : '세계 교회사 약사' - 네이버 지식iN)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종교개혁의 개념과 의의

 

1.종교개혁의 의의

 

종교 개혁’ (Religious Reformation)16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이후 유럽 전역에 걸쳐 종교뿐아니라

문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새로운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종교라는 말은 오늘날 원초적 존재나 가능성에 대한

영적인 이해와 추구를 일컫는 보편적인 개념어이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 종교는 기독교 제한적으로 사용된

용어였다. 이 용어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람직한 믿음과 삶의 태도를 의미했다.

개혁이란 우선적으로 표면적인 부분이 아닌 근본적인 부분의 변화를 의했다. 개혁이란 새로운 창조나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폐기가 아닌 회복’(Recovery)을 의미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면, 16세기 유럽의

종교 개혁은 일차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충실했던 초대 교회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앙생활 전반을 바른 모습으로 회복하려 했던 운동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2.루터의 이신칭의 사상

 

15171031일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 근방에 면죄부를 판매하기위해 찾아온 테첼을 향해 대학의 한교수가 면죄부 판매가 과연 장당한지 신학적 쟁점들을 놓고 공개적으로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유명한 95개조의

반박문이였다 당시 로마교황청의 새로운 교황궁전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교황청의 조치는 독일 제후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먼저 나서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을 때 획기적인 사건이였으며 그로인해 제후들과

지식인들은 이 내용을 근거로 면죄부 판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성경본분 연구와 강의를 통해 정립한 자신의 구원론을 정립했다. 루터는 이 성경본분에서 구원은 카톨릭이 가르치는 것처럼 면죄부 구입이나 고해성사와 같은 성사에 참여하는 등의 행위의 공로로 획득해 완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것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 것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이신칭의교리이다.

 

3.칼빈의 예배 개혁 사상

 

루터에 비해 자신의 개인사를 잘 말하지 않았던 칼빈은 1509년 프랑스에서 출생했다. 그는 젊은 시절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 유능한 법학자이며 인문학자로 성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를 종교개혁자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재능을 활용해 1538년 종교개혁의 개요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기독교강요를 출판함으로써 유능한 종교개혁의 사상가로 주목을 받았다. 칼빈은 그해 가을 우연히 방문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선배 목회자

파렐의 강권으로 이 도시의 목회자가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교개혁의 목적은 특히 칼빈의 예배와 교회 개혁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미사에서 사제가 떡을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어 주고 신도들에게 먹게하는 행위를 통해 예수님의 몸이 가진 신비한 능력이 누적된 죄를 처리한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이 볼 때 이와 같은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매주 성찬대 위에서 희생제사로 죽이는 모독적인 행위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류의 죄와 그 책임을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이를 확증하셧다. 그러므로 매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죄가 남아 연옥까지만 갈 수 있다는 주장은 성도들의 양심을 속박하기 위한 허위였다. 칼빈은 미사를 부인하고

예배를 개혁하기 위해 말씀이 중심이 되는 예배를 실천하려 했다. 그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 교회와 직분들이 있는 것이 교회와 직분자들 위해 예배와 복음이 이용당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4. 종교개혁의 의의와 한국교회의 적용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구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제대로 그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종교개혁을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종교개혁의 다섯가지’sola’를 언급하면서 난해한 교리를 나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오직 하나님의 영광은 16세기 종교개혁의 맥락

속에서 정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 종교개혁의 세 가지 과제들과 그 개혁과 회복 과정에서 강조된 원리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첫째, 바른 가르침의 회복이 필요하다. 둘째,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셋째, 교회 제도가 회복되어야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통치하실 수 있도록 모든 구성원들은 지체로서 낮아져야 한다.

 

5. 결어

 

16세기 서유럽의 종교개혁은 몇 사람들이 특정 지역에서 교회의 몇 가지 문제들에 불만을 가지고 변화를 시도한

운동이 아니였다. 또 다른 교회 성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한 프로그램이나 단회적 이벤트도 아니였다.

그들은 가르침과 예배외 제도의문제를 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아 성경의 가름침대로 회복함으로써

당시 기독교의 신앙 전반을 새롭게 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성취나 업적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말씀하시고 드러나기를 소원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여 담대하게 순송하며

복음을 증거하고 다음 세대에 전할 때에만 한국교회의 회복을 소망할 수 있다.

  출처 : 총회 목회대학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칼뱅주의(영어: Calvinism) 또는 개혁주의(영어: Reformed Theology), 장 칼뱅이 주창한 기독교의 사상 및 신학 사조로서[1] 종교 개혁을 통해 체계화되어 개신교의 주요 신학으로 자리잡은 사상을 가리킨다.[2] ‘칼뱅주의란 말은 칼뱅 개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나 이는 매우 드물다.[3] 다만 그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발전하게 된 데에 칼뱅이 미친 지대한 영향에 칼뱅주의란 이름이 연유한다. 칼뱅주의가 종교 개혁 당시 개신교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유럽 각지에 개혁교회(영어: Reformed Church)가 발생하였다. 이들 개혁교회를 통해 칼뱅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뱅주의를 말할 때에는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별칭들이 있는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불린다.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개혁 침례교회가 대표적이다. 칼뱅주의는 문화, 경제, 교육, 정치 그리고 복지를 포함한 근대 사회를 형성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 받는다.[4]

 

역사적 배경[편집]

 

종교 개혁[편집]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하며 이를 바꾸고자 한 종교 개혁은 결국 개신교회의 분리를 가져왔다.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에는 다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장 칼뱅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 이는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영향력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장 칼뱅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5]

 

장 칼뱅은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 중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그리고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면서 개신교의 신학은 점차 칼뱅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 칼뱅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6] 이렇게 하여 유럽에 자리잡은 개신교회가 개혁교회이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이다.[7] 이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 된 신학 사상 및 그 전통을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포함하여 오늘날까지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칼뱅주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편집]

 

개혁주의를 잘 나타내는 문서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문서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독일),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네덜란드)이며, 이외에도 제2스위스 신앙고백(츠빙글리 전통), 프랑스 신앙고백, 제네바 요리문답(제네바 전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스코틀랜드) 등이 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주로 채택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그 대/소요리 문답 또한 개혁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작성한 개혁 침례교회의 제2차 런던신앙고백은 침례신앙 위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개혁교회의 가지들[편집]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네덜란드 이주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회의 신도들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주의를 전파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아공의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이라는 지배질서를 바벨탑 이야기에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아 사람은 아시아 사람끼리 흩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자의적인 성서해석이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진짜 의미에는 상관없이 백인은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나, 흑인은 그렇지 않다는 개혁파 교회 교리의 악용으로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물론 이러한 잘못에 대해 개혁교회에서는 흑백통합정부가 들어선 뒤에 사과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을 위한 죄책고백을 실천하였다.[8]

 

핵심 교리[편집]

 

칼뱅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다섯 솔라, 언약신학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5대 강령의 경우 앞 글자를 따서 영어로는 TULIP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개신교의 다른 여러 신학 유파와 칼뱅주의를 구분짓는 내용들이 된다.

 

다섯 솔라[편집]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

 

언약신학[편집]

 

언약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 내용은 지켜야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가지 언약이 결국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구속 언약 (covenant of redemption): 삼위일체 중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 쪽에서는 모든 사람의 죄값에 해당하는 심판을 맛보고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이행하겠다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 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들의 머리로 인정하며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을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내용이다. 이 언약이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된 것으로 본다.

행위 언약 (covenant of works):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아담은 실패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는 죽음이 왔다고 본다.

은혜 언약 (covenant of grace): 아담이 실패한 이후로 곧바로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다. 사람 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받으실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며, 하나님 쪽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내용이다.

 

5대 강령[편집]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편집]

 

칼뱅주의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서 예배를 성경, 기도, 찬송, 헌상, 성찬 과 세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특수한 은혜를 내리시기 위해 정하신 방도라고 본다. 이것들을 은혜의 방도라고 부르는데, 어떠한 것들이 은헤의 방도인가 뿐만 아니라 그 방도들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또한 성경에 계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특징이다. 이는 물론 Sola Scriptura 정신과 부합된다. 특히 예배에 해당하는 도리들을 묶어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예배할 때 예수님이라고 상상하여 만든 그림이나 조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표적인 규정적 원리의 하나이다. 그 원리들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칼빈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교파별로 이러한 규정적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는 성경 구절에는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예배하지 말라"[9]이다. 둘째 계명이 야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이미 첫째 계명[10]에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의 뜻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 그분의 형상이라고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역사가 성경 출애굽기 324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 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칼뱅주의[편집]

 

칼뱅주의와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칼뱅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전적 타락'설에서 언급되었듯이 칼빈주의는 자연인이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렸다든지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되냐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라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이러한 칼뱅주의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라스무스다. 여기에 반박하고 '전적 타락'설을 주장한 것이 루터의 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에 대한 기독교의 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지을 수 있다:

합력설(synergism)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라는 것이다.단독설(monergism)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하는 것도 그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마르틴 루터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잘 알려진 것이 4~5세기에 있었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고 어거스틴은 단독설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교회는 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 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도르트 총회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다.) 18세기에는 웨슬리가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합력설/단독설과 관련해서 잘 알려진 신학자 또는 목회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을 들 수 있다.

 

 

그 누구라도 구원을, 아무리 작은 일부분이라도, 사람의 자유의지와 연관짓는다면, 그는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

마틴 루터(Martin Luther), Bondage of the Will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무엇이라도 우리가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

존 오웬, Works of John Owen, Vol.3, p.433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옥으로 가고자 하는 자유의지는 있으나 천국으로 가려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르려는 의지와 힘을 만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

   

죽은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만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아마 죄인이 자기 자유 의지로 그리스도께 돌아서는 것 또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 (하나님의 주권은)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멸망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주권과 맞선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우리의 영혼에 대한 주권에 습복하는 것입니다; 곧 그 분께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강퍅케 하시고자 하는 자에게 그렇게 하시는 분으로서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2, The Banner of Truth Trust, Reprinted 1995, pp.849-854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편집]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대상과 속죄의 유효성과 범위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칼빈주의는 복음의 유효성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 동시에 제한적 속죄를 말한다. 여기서 제한적이라는 것은 계량적인 뜻만이 아니라 한정적(definite) 또는 특정적 (particular)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는 인류에 대한 복음의 유효성과 제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량적으로 선택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예배의 전통과 형식 그리고 신앙 생활에 있어서 초기 종교개혁 시대의 전통을 고수한다.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자체를 극단적 칼빈주의로 해석한다

 

반응형

'신학과교회사 >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교 박해의 종료.  (0) 2017.06.12
기독교박해의 역사 (10대 박해)  (0) 2017.06.12
기독교 박해의 원인  (0) 2017.06.12
기독교박해의 역사-1  (0) 2017.06.12
마틴 루터 와 종교개혁  (1) 2017.06.11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