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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 사역자가 이슬람에 대해 알아야 할 것

모하메드 칼리프 카리지파 쉬아파 순니파 무타질라 메카 히즈라 / 알라위파 드루즈파

 

"이슬람교"는 모하메드의 종교를 가리키는 정확한 이름으로 아랍어의 동사"복종하다"의 부정사(不定詞)이고, "무슬림"은 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정확한 이름으로 같은 동사의 현재분사이다. 이슬람교는 역사의 주목할 만한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이 종교의 창시자가 죽은 지 일세기 이내에 무슬림 제국은 남부 프랑스로부터 스페인, 북 아프리카, 레반트,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국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이것은 동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 아시아 그리고 대서양에서 필리핀, 코카서스 산맥(Caucasus)에서 케이프 타운까지에 널리 퍼져 있고, 유럽인들로부터 하우사 폴라니족, 아리안 인디언족으로부터 필리핀 종족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다양한 인종들로 이루어진 약 12억의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


※ 이슬람교의 기원


1. 모하메드의 초기 삶


이슬람권 사역자가 이슬람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에 관하여


A.D.570년 메카에서 태어난 모하메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아버지의 유복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겨우 6세였을 때 죽었다. 그의 소년 시절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는 홀로 떨어져서 묵상하기 위해 동굴에 들어가곤 했다. 그는 자주 금식을 했고 쉽게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는 그의 고향 메카의 다신교와 조잡한 미신들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족했으므로, 한 참된 하나님의 존재와 초월을 열정적으로 확신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러한 확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기독교나 유대교에 힘입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핫산의 아랍 왕국에는 단성론적 기독교리가 널리 퍼져 있었다. 동방 정교회는 히자즈의 주변에 흩어져 있던 은자들로 대표되었는데, 그가 그들과 접촉했을 것은 당연하다. 네우토리우스 교인들은 알 히라와 페르시아에 자리를 잡았고, 유대교 신자들은 알 메디나, 예멘 아랍 공화국 그리고 그 밖의 곳에서 강세를 보였다. 더구나 그의 삶의 어떤 시기에 탈무드적인 원천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흡수했고 모종의 기독 교리와 접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의 계시


코란의 첫번째 계시가 그에게 온 것은 약 40세 때이었다고 한다. 한 목소리가 세 번 그에게 "그대의 주(主)의 이름으로 낭독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상당 기간 동안 아무런 계시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깊은 영적 우울, 불확신의 기간을 지난 후에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카디야에게서 위로를 받고 숨기 위해 떨면서 집으로 갔지만 한 목소리가 "오 망투를 두르고 있는 그대여, 일어나서 외치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랍의 시인들과 점장이들의 경우와 같이 자신이 귀신에 들리지 않았나 두려워했다. 그러나 카디야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는 곧 점점 더 자주 신의 계시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정통적인 무슬림에게 코란에 있는 모든 구절은, 천사장 가브리엘에 의해서 예언장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코란의 가장 초기 수라(계시)들은 개념의 현저한 단순성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알라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의 도덕적 반응을 촉구하고, 심판의 날을 예언하며,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과 처음 보기에는 대단히 감각적인 것 같은 낙원의 즐거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3.헤지라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에서의 반응은 여전히 미미한 것이었고, A.D 622년에 모하메드는 그의 추종자 약 200명과 함께 알 메디나로 철수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순례 동안에 그를 만났었고,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동료 시민들에게 그가 올 것에 대해 일단의 그 곳 주민들이 그를 초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피(혹은 헤지라)는 모하메드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되었고 적절하게 회교 기원의 시작으로 선택되었다. 메카에서 그는 그의 동향인들에게 참된 한 하나님을 가르쳤으며 앞으로 올 심판에 대해서 경고했던, 거부당한 예언자이었다. 알 메디나에서 그는 곧 정치가, 입법자, 재판관-즉 새로운 신정 정치의 대변인뿐만 아니라 행정관이 되었다.


모하메드가 처음에는, 유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아브라함과 모든 가부장들과 선지자(예언자)들이 설교해 온 유일한 참된 종교로서, 계속 부패해 온 것을 단지 새로이 선포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초기에 성경의 백성들에 대해서 언급한 것들이 한결같이 우호적이었고, 그가 처음에 유대인의 몇 가지 관습들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메디나에서 그는 곧 유대인들이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구약 사건들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설명했었고, 그가 그것들을 인간적인 근원에서 배웠다는 것을 부인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란의 수라들은 그가 전에 믿을 만한 것이라고 확정했었던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구약의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음이 명백히 드러났을 때,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경을 개악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잘못 인용했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비난, 유대인 종족들에 대한 그의 추방 혹은 대학살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서 분간할 수 있듯이 유대적인 것들로부터 아라비아와 메카로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무슬림 공동체가 기도 할 때 향해야 하는 곳은 예루살렘보다는 차라리 카바가 되었고 이교도의 순례 의식이 순화되어 이슬람교속으로 통합되었다.

 

4. 모하메드의 인격


(한때 유럽에서 널리 퍼졌던) 모하메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꾼이었다는 사상은 다행히도 없어졌다. 그리고 최소한, 그의 초기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초기 계시들을 희망적 관측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그에 관해서 묘사한다. 그의 초기 삶의 불행과 좌절, 아랍인들도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처럼 신의 사자와 경전이 필요하다는 그의 깊은 확신, 그를 그들의 예언자로 특징지어 줄 어떤 계시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그의 갈망 그리고 다양한 내외적 자극이 그의 잡재 의식적인 마음에 불러일으킨 생각들과 이야기들이 이러한 연속되는 계시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그의 확신이 그 설명이다. 그는 때때로 간질 환자, 히스테리 환자, 병리상의 환자, 혹은 계시에 대한 에비온적- 마니교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따금 대단히 비판적인 견해를 취함으로써 계시의 징후들이 때때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 왔다. 물론 그 현상들은 현대의 교령술 무당들이 주장하듯이, 간헐적으로 영에 사로잡힌 증후들로 설명될 수 있다. 코란의 초기 수라들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스타카토 스타일은 이러한 가정들 중의 어느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그의 선지자적 주장들에 대한 기적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는 자연적 요구를, 이야기들에 대한 그의 지식이 오로지 신의 계시에서 나온 것으로 함으로써 충족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너무 세밀하게 탈무드와 일치하여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원천에서 나왔음은 거의 의심할 수가 없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는 다르게 네 명 이상의 아내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고, 그의 시간을 그 여자들 사이에서 균등 분배해야 하는 정상적인 의무로부터 면제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의 양자의 이혼한 아내와 결혼했을 때 아랍의 관습에 상관없이 비판을 모면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첩 메리와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맹세로부터 면제되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몇몇의 아내들 사이에서 야기될 문제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들은 베일을 쓰도록 명령받았고 부정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중 벌을 받는다고 위협받았으며 그의 사후에는 재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학자들은 모하메드의 본질적인 진실성에 대해서 깊이 확신하고 있어서, 그가 어떤 의식적인 사기도 하지 않았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나이가 좀 든 후에 그는 그가 신의 계시를 받은 자라고 지나치게 확신하고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지나치게 믿게 되어, 주위 상황과 그 자신의 성향이 일으킨 협박을 그가 너무 자주 들었다고 믿는 신의 목소리로 진지하게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적으로 심리학자의 문제이지 역사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


그 밖의 점에 대해서 말해 보면, 그의 성격은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혼성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시인이었고 조직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뛰어난 즉흥 시인이었다. 그가 취향에 있어서는 주로 단순했고 기질에 있어서는 상냥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관대하고 단호했으며 친절하고 빈틈이 없었다. 또한 그는 날카로운 심판관이었고 타고난 지도자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잔인해지고 깊은 앙심을 품은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수치를 무릅쓰고 암살할 수도 있었으며 관능적인 경향을 띠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의 하림(후궁)의 규모는 솔로몬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다윗의 것에 비하면 좀더 나은 것이다. 그의 덕망은 그의 동시대인들의 것보다 뛰어났으며 그의 결점은 거의 시대에 이런저런 비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참된 개혁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만약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그가 자신에 대해서 내린 평가대로 받아들였다면, 그의 성격에 대한 다른 견해는 대부분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란은 그의 예언자적 존엄성에 대해서 확실한 용어로 주장하고 있지만, 반면에 그의 소멸성과 불완전성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전설들에서 보이는 그의 언행에 대한 반 신성화와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언행은 곧 이론상으로는 코란 다음 가는 중요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5. 전설들

 


그 종교의 창시자가 그리스도에게 존경심을 바치는 것은 나쁘다고 가르쳤고 그 자신은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솔직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가 마침내 기독교나 그 박의 다른 것에서 그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창시자의 개인적인 습관들에 대한 노예적인 모방을 주창한 것은 이슬람교의 여러 모순들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호가르드(D.G.Hogarth)의 다음과 언급은 정당하다.


중요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간에, 그의 일상적인 행위는 오늘날까지 수백만이 의식적으로 흉내내서 지키는 법규가 되었다. 인간에 의해서 완벽한 인간으로 간주되어 온 사람들 중에 아무도 이처럼 세밀하게 모방되어 본 적은 없었다.


잘 알려진 전통주의자 아마드 이븐 한발은 결코 수박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언자가 수박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껍질 채 먹었는지 혹은 그가 부수어서 깨물어 먹었는지 혹은 잘라먹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가 말했고 행했던 것에 대한 전설들을 모으는 것이 곧 신앙 고백이 되었고, 그의 흩어진 동료들이 여러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무슬림 세계 전체를 여행했던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것은 영감 받은 말들과 행위들에 대한 영감 받지 않은 기록으로 간주되었고, 많은 일련의 서술자들에 의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 서술자들의 이름은 주제의 진실성에 대한 보장으로서 전설의 첫 부분에 항상 기록되었다. 그러나 날조된 전설들이 범람하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그가 죽기 전까지 약4,000개의 전설들을 꾸며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모든 엉뚱한 정치적 철학적 혹은 신학적 사상은 예언자의 진술이라고 함부로 주장된 것에서 그것의 증거를 찾곤 했다. 나중에 위대한 전통주의자들은 전설들은 모아서 정리하였고, 그들 중의 몇 명은 위조된 것과 참된 것을 구별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들의 비평을 실제의 전설이 그럴 듯한가 하는 것보다는 그 전설에 있는 이름들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데에 한정했다. 오늘날 서로 다른 수집물들이 이슬람교의 다른 분파들에 의해서 각각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지만, 모든 경우에 그러한 전설들은 무슬림 신학, 율법, 관습의 1차적 원천으로서 코란 곁에 위치하고 있다.


6. 기독교에 대한 모하메드의 관점

 


모하메드는 기독교의 교의에 대해서 대단히 피상적인 그리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초기 삶에서 그는 유대교인들에게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후기 삶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덜 심한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예수에 대한 코란의 이름인 이사(I'sa)는 메시아이었고 처녀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는 자이었고,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코란은 명백하게 그의 신성을 부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코란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졌다."(혹은 "그는 그들을 속이기 위해서 위조되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그를 자신(하나님)에게로 끌어올렸다고 말하고 있다. 정통적인 무슬림들은 항상 이것은 실수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예수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오고 있다


※ 이슬람교의 발전


1. 칼리프(Caliph)의 직위

 


가장 잘 입증된 견해에 의하면, 모하메드는 어떤 후계자(Caliph)도 지명하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물론 예언자들 중의 마지막이고 가장 위대한 자인 그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웠던 공동체는 정치와 종교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없는 신정국이었고 그러므로 누군가가 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행하기 위해서, 전쟁시에 이끌고 평화시에 인도하기 위해서 확실하게 계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칼리프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고, 마침내 우마르 이븐 알 하타프(자신은 제 2대 칼리프가 됨)가 최초의 신자들 중 하나인 나이 지긋한 아부 바크를 급히 뽑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칼리프 직위의 문제는 이슬람교의 어떤 다른 문제보다도 많은 분열을 일으켰고 유혈이 나게 했다. 그리고 거의 처음부터 최소한 미발달의 상태에 있던 3개의 적대 파가 구분될 수 있었다. 우선 코라이쉬족 가운데 적절한 "초기신자"가 적임이라고 믿은 예언자의 동료들이 있었고, 칼리프직을 우마이야가에 주고 싶어한 메카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는 필요 없고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신에 의해서 그의 후계자로 지명 받았다고 믿는 "합법주의자들"이 있었다.


아부 바크르의 2년간의 짧은 통치는 주로 "탈퇴의 전쟁들"과 코란의 첫 편찬으로 유명하였다. 예언자가 죽자 많은 종족들은 세금낼 것을 거부했으나, 아부 바르크는 칼로써 순종케 했다. 죽기전에 아부 바크르는 우마르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고, 그의 선출은 아무 탈없이 통과되었다. 그는 이슬람교의 제 2의 창시자로 불리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칼리프로 있을 때에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이집트 등이 무슬림의 무력 아래 함락되었고 많은 중요한 결정적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계승자를 임명하지 않고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투만이 선출 되었다. 그 자신은 나이든 신실한 "초기 신자"이었지만, 거의 끝까지 예언자를 반대했던 우마이야의 귀족 집안 자손이었다. 그의 명령으로 현재의 개정판 코란이 준비되었고 모든 상이한 판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그의 파멸의 원인으로 증명되었고 그는 암살자의 칼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2. 카리지파(Kharijis)

 


사실상 최초의 분열은 "올바르게 인도된" 칼리프들 중 네 번째이며 마지막으로 우트만을 계승했던 알리('Ali)가 칼리프 직위에 있는 동안 일어났다. 두 지도급 동료, 탈하(Talha)와 알 주바이르(al-Zubayr)는 예언자의 과부인 아이샤('A'isha)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일만 명의 무슬림들이 생명을 잃은 카멜(Camel) 전쟁에서 패하였다. 이 사건은 경건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코란은 정당한 이유 없이 형제 무슬림을 살인한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는 곧 훨씬 단호한 적을 만났다. 왜냐하면 시리아의 통치자 무아위야가 그의 친족 우트만의 암살에 대해 복수한다는 구실로 그에게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알리는 우트만의 죽음에 공모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리가 다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쟁의 중요한 때에 무아위야는 교묘하게 알리로 하여금 칼리프 직위의 문제를 중재에 붙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알리 자신의 추종자들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들은 알리가 그렇게 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저버렸다고 느꼈다. 그리고 무아위야에게는 더욱이 충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탈퇴했고 자신들은 "배교적인" 이슬람교로부터 분리시켰다(따라서 그들의 이름이 카리지파가 되었다).

 


3. 쉬아파(shi'a)

 


칼리프직의 말썽 많은 문제는 곧 훨씬 더 중요한 분열을 일으켰는데, 쉬아파(알리의 "추종자들" 혹은 "종파")가 순니 이슬람교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알리를 신이 임명한 예언자의 후계자로 간주한 합법주의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중재하려는 시도가 불행하게도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고, 알리가 한 카리지의 칼에 죽을 때까지 무아위야와 칼리프직에 관해서 계속 논쟁했는데도, 혹은 심지어 그의 장남 알 하산이 왕자의 연금을 받는 교환 조건으로 알리를 계승할 권리를 포기하고 물러나서 알 메디나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 죽었는데도, 그들은 헌신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그들은 알 하산이 무아위야의 명령으로 독살되었다고 주장했고, 그에게 "순교자자들의 주"라는 명칭을 주었으며 그의 동생 알 후세인에게로 그들의 충성심을 옮겼다. 동생은 좀 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1세에 반대하여 일어났을 때, 그는 그의 가족의 대부분과 함께 카르발라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집안에 대한 이러한 도살의 참사는 쉬아파의 교리에 대한 많은 뒷받침이 되었고, 점차 증가하는 수가 하나님은 결코 경건치 못한 지도자들에게 그의 백성을 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고 항상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맘(Imam), 즉 지도자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이후에 칼리프직은 우마이야가에서 세습되었고, 무아위야와 그의 계승자들은 대부분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구식의 아랍 왕들처럼 다스렸다. 그런 상황에서 쉬아파의 선전은 극히 성공적었다. 특히 페르시아인 "예속민"들 가운데에서 더욱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그것에서 아랍의 거만함으로부터 도피할 길이 발견했고 이맘직의 교리가 이슬람교 시대 이전에 왕에 대해 가졌던 태도에 좀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많은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쉬아파의 지지자들은 마침내 우마이야조를 몰락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왕위는 알리나 예언자의 자손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삼촌 압바스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쉬아파는 압바스조하에서 막대하고 부분적으로는 비밀적인 공동체로서 지속되었고, 여러 책략들은 유혈이 낭자한 반란의 형태로 간헐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쉬아파는 무수한 아류 종파들로 갈라지는 경향 때문에 계속적으로 약화되었다.


대다수의 쉬아파는 코란의 해석에 있어서 흔히 순니파와 다르고 심지어는 칼리프 우트만이 알리에게 유리한 많은 절들을 삭제했다고 그를 비난하기는 하지만, 코란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지지하는 순니파의 수집물을 거부하기는 하지만, 전설의 권위를 받아들인다.


4. 4개의 순니파들


논쟁이 불붙은 것은 칼리프직에 관해서만이 아니었다. 이성의 제자들과 전통의 제다들 사이에 영원한 갈등이 이슬람교에서도 법과 신학의 분야에서 가차없이 나타났다. 순니파 이슬람교가 압바스조 시대 초기에 지금처럼 4개의 정통 법률학파들로 나뉘어 진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갈등 때문이었다. 그 네 학파를 살펴보면, 전설적 창시자가 아부 하니파이고 오늘날 대부분의 구 오토만 제국, 북인도에서 지지받고 있는 하니파 혹은 이라크 학파, 이름은 말리크 이븐 아나스에서 나왔으며 북 아프리카와 서 아프리카, 상부 이집트 그리고 수단에서 우세한 말리키 혹은 히자즈학파, 무슬림 법률학의 "아버지"인 알 샤피에 의해 창시되었고, 하부 이집트, 동 아프리카, 남 아라비아, 동남 아시아에서 추종되는 샤피학파, 주로 중앙 아라비아의 와하비족에게 국한되어 있는 한발리 학파 등이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론적인 법학자들(그들의 적들이 하나피 학파를 그렇게 불렀다)과 전통주의자들(그들에게 이 이름을 어느 정도 붙일 만한가 하는 것은 그들간에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밖의 모든 다른 학파들이 자기들에게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한 용어)사이에 쓰라린 갈등이 발전되었다. 실은 아부 하니파와 말리크의 시대에는 그러한 갈등이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체계를 세울 때 후자가 전통에 약간 많이 의존하고 전자가 이론에 의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말리크는 예언자의 바로 그 도시와 환경에서 살았지만, 아부 하니파는 이라크에서 예언자의 선례가 없는 상황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크는 상황에 따라서는 공공복지에 관한 자신의 견해나 판단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극단적인 전통주의자들이 제거하고자 한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된 말씀 자체가 밑바탕이 되는 원리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성이 구체적인 명령이나 금지 사항으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추론해 낼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간은 추론하지 않고 순종해야 한다. 마침내 중도 노선이 우세하게 된 것은 알 샤피파의 영향이었다. 이 학파는 예언자로부터 온 "믿을 만한" 전설들의 가장 중요한 권위를 인식했지만, 항상 변하는 일상 생활의 예측 못할 사건들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정의된 유추법에 의해 신성한 말씀의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는 필요를 충분히 받아들었다. 마침내 네 학파는 모두 코란, 순나 즉(전설들 속에 보존되어 있는) 예언자의 관습, 이즈마 즉 무슬림 공동체의 동의 그리고 키야스 즉 이러한 세 가지로부터 유추적으로 연력한 것을 법의 주용한 네 원천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피 학파는 필요에 따라서 유추의 엄격한 적용을 통해 이르게 된 결론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들이 "좀더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한" 해결책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였다.


5.무타질라(The Mu'tazila)


이성과 전통간의 동일한 갈등이 신학의 영역에서 훨씬 더 가열되었다. 회교 기원2세기 초에 벌써 무타질라라고 알려진 어느 정도 뚜렷이 구분되는 사상가들이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에 반대하고 코란의 교리에 이성의 완화제를 적용시켰다. 그들은 신앙과 불신 사이에(그러므로 축복과 멸망 사이에도) 중간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보다 앞선 카다리파의 영적 후계자들읜 그들은 인간 의지의 자유를 주장했고 신이 인간이 악과 불신을 예정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반드시 정의에 따라 행동하여야 하고 항상 그의 피조물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애야 한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정통파는 어떠한 중간 상태도 부정했고 인간이 모든 행동들은 영원부터 "간직되어 있는 서판"에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이 정의를 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인간 사색의 기초를 부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지성으로 선악을 감지하거나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선악의 본질은 단지 신이 뜻에서만 나왔고 그의 명령과 금지에 의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로부터 벗어난 신학이나 윤리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신적인 속성들(아는 것, 의지를 갖는 것, 말하는 것 등)과 신이 본직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의 논쟁 그리고 코란이 창조된 것인가 혹은 영원한 것인가에 관한 유사한 논쟁이 불붙었다. 무타질라는 그러한 속성들이 신의 본질에 내재해 있지 않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분리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코란은 확실히 창조된 것인데, 그 이유는 이와 다른 주장은 어떻든 코란을 제 2의 신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철학자들


이성의 옹호자들로서 무타질라의 위치는 알 킨디, 알파라비, 이븐 시나, 이븐 러쉬드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진지한 무슬림의 위치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또한 전심으로 그리이스 철학을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이론들과 함께 진리의 형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었다. 그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매우 단순했다. 코란은 진리였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두 진리를 설명했다. 그러므로 코란과 철학은 모두 서로 조화시키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 희랍의 철학 및 지식이 보존되고 유럽으로 재도입된 것은 주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7. 사변 신학자들


그러나 무타질라 견해의 후기 발전과 함께 정통파 가운데에서도 한 집단이 성장해 갔는데, 그들은 코란의 진술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어떤 의문도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비정통파와 칼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칼람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의 사변 신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학문적 체계는 점차적으로 발전해 나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알 아샤리가 전통적으로 주요 공적을 이룩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무타질리로 자라나고 약 40세까지 그들의 견해를 주장했지만, 갑자기 다른 편으로 급회전했다. 그리고 무타질라의 합리주의와 좀더 극단적인 한발리 학파의 조잡한 신인동형론에 반했다.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아야리 체계는 극단적인 원자 형이상학을 신학에 응용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공간은 수많은 단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각각의 단자는 부피가 아닌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음 단자와는 절대 공간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 유사하게 시간은 무수한 연결되지 않은 시간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과 관계에 대한 어떤 사상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에서 분간할 수 있는 한 사물과 다른 것과의 조화 및 명백한 연관 관계를 어느 정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어떤 법이나 필연성에 의해서도 제한 받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서 이러한 해명의 길을 발견했다. 즉 하나님은 계속으로 원자들과 여러 특징들을 창조하고 제거하며, 그럼으로써 모든 움직임과 모든 변화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8. 신비주의자들

 

신비주의는 이슬람교에서 처음부터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처럼 보인다. 모하메드 자신은 비록 신비주의적인 면이 가장 적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고독과 단식에의 욕구에 강하게 이끌렀다. 그리고 그가 세운 종교에서 신비주의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금욕주의, 세상 및 세상 악에 대한 부정의 맥락에서였다. 아라비아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 은둔자들은 그러한 태도를 고무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원시 이슬람교의 근본적 요소인 지옥에 대한 두려움의 발전과 먼저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우마이야조 칼리프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난 불경함과 그리고 나서 압바스조의 매우 제한된 경건함으로부터 물러선 것도 그러한 태도를 대단히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창기부터 방랑하는 금욕주의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비교적 흔히 보는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모두 단순한 모직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들 즉 수피파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곧 좀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맥락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에 있어서 그것은 희랍의 교회로부터 많은 힘을 입었고 참으로 페르시아와 인도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로티누스와 신플라톤 학자들에게 많은 힘을 입었다. 무슬림 철학자가 코란의 어떤 가르침들과 희랍 철학의 추상적 개념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고, 사변 신학자들이 아샤리 형이상학의 전면 부정으로부터의 도피처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보통의 순니 무슬림이 자기의 종교에서 시와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비주의에로의 도피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사변 신학자들이 그러한 학문적 업적을 달성하여 영향을 미치게 되자, 정통파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통해서가 아니면 "자연법칙"도 인과 관계도 없어지고, 신학과 윤리학의 가능성도 없어진다. 그들은 코란과 전설들의 예언적 계시에 철저히 의존하는데 만족하거나, 아니면 신이 그를 진실로 찾는 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내려주는 "보다 작은 영감"에 의해서 그것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진실한 수피는 이것에 확고 부동하게 헌신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비록 흐릿하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신이 거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신비주의자의 의무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그 자신을 근절하여, 이 거울을 깨끗하게 하고 그것을 신 쪽으로만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신의 비추임을 받게 될 것이다.

 

 

※ 모하메드를 중심으로 본 이슬람교의 성립 배경과 과정


이슬람교 와 코란


-<셈>계 일신교 계통의 종교로 추종자인 모슬렘은 약 12억정도이며 발흥시기는 7세기 초이다. "이슬람"의 뜻은 "복종"이며 "모슬렘"의 뜻은 "복종하는 사람"이다.


경전은 "코란"이며 114장, 6239절로 되어있다. 코란의 내용은 신관념(神觀念), 천지창조, 인류의 역사와 이에 대한 신의 지배, 종말(終末),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 예배등 의례 적인 규범에서부터 법적 규범까지 포함한다. 또 코란은 알라에 대한 신앙을 언제나 인간 의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1. 이슬람 이전의 아랍부족사회

 


이시기를 자할리야시대 또는 무명시데, 영웅시대라고하며 6~7세기초 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아랍 유목부족의 생존경쟁, 부족적 혈연집단의 연대의식으로 요약할수 있다.


이당시 아랍인은 까흐탄및 아드난이란 두 조상에 기원을 둔다고 여겼다. 까흐탄은 구약의 요그탄에, 아드난은 이스마엘의 자손으로 여겨지며 전자는 남아라비아의 예멘의 여러부족으로 아라비아의 서남부, 후자는 북부 아라비아 출신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인종상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은 크게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뉜다. 유목민(베드윈)은 방목생활과 수렵, 전투, 약탈등으로 생계를 꾸려갔고, 반면 정주민은 중부 아라비아의 오아시스나 해안가에 살며 농업과 상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의 부족은 대개 경우 생각하는 그런 커다란 집합체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비교적 작은 집단이었다. 집단의 기본은 혈연을 유대로 하며, 노예와 해방노예가 있었고 차별을 받고있는 비 자유민인 미왈리, 그리고 다른 부족 출신의 자유민인 할리프가 있었다. 즉 혈연이 바탕이나 그 내부에는 동족이외의 자유민이 스스로의 의사로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유목부족은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 데다 때때로 인근의 다른 부족과 싸우기도 했다. 그들에겐 약탈을 받았다 생각되면 받은 만큼 되갚는 동해복수(同害復讐)가 행해졌다. 부족내에는 뚜FUT한 정치적제도나 조직이 없었고 정치적 권력을 가진자도 없었다. 물론 부족장이 있긴하나 그의 영향력은 그가 부족민에게서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받는가에 의존하며, 자국민인 부족민은 부족내의 중요문제를 부족집회를 개최하여 결정했다.


그러나 같은 부족민은 같은 조상을 갖고있다는 강한 부족의식인 아사비야-집단 연대의식-를 갖고있어 부족내에선 서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혈연은 모든이가 복종해야하는 유일절대의 권위로 여겼다. 이것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연계되어 부족정신을 이뤘다. 이런 부족정신은 자신의 부족민이 살해당하면 가해자가 속한 부족에게 같은 수의 복수를 행하는 것-피의 복수:이를 피하기 위해선 배상금으로 낙타 100마리-을 의무로 여기게 했다. 한편 그들에겐 지와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유목 베드윈의 관습으로, 보통의 경우 부족밖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나 이 지와르관계에 있는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은 수치스런 행위로 여김으로 그의 재산을 보호하게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유목부족은 방목과 약탈로 생계를 유지했으므로 재산에 대한 소유권도 극히 유동적이었고 (강한 부족은 언제든 약한 부족의 재산을 뺏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겐 빈부격차도 크지않아 부족내 개인은 평등하고 상당한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

 


2. 이슬람 발흥시기의 메카

 


그러다 이슬람이 발흥하기 직전, 6세기 후반 히자즈 지방의 메카에 경제적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메카는 대상 교역의 교통 요로에 위치했고 또 성소 카바신전-오늘날 이슬람이 가장 신성한 신전. 코란에 의하면 카바의 건설자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로 되어있다. 카바란 입방체를 의미-이 있어 아라비아의 유목민은 매년 일정시기 이곳을 순례했으며 순례기간인 신성월에는 성역으로서의 메카 및 그 주변에서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되었다.


이시기(6세기 후반)아라비아 반도의 각 부족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우상신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메카이 카바신전에 두고 매년 특정 달에 희생을 바치고, 또 매년 많은 사람들이 순례했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런 신앙은 (우상신) 메카의 중요 소득원이었다. 즉, 땅이 척박해 농사를 할 수 없는 메카는 목축을 했는데 양, 산양, 낙타 등을 순례자에게 팔고, 가축의 생산물, 양모, 가죽등 제사에 남은 것은 상품화하여 타지방의 특산물과 교환하는 것이다.


메카는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상업의 중심뿐 아니라 금융의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왕성해졌고, 이결과 유목내지 반유목경제에서 상업경제로 이행하게되며 급기야 6세기후반엔 아라비아의 최대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조직 및 그들의 의식면에서는 부족적 연대성이나 동해복수와 같은 유목생활에 적합한 사회제도나 의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메케의 대다수 주민은 쿠라이쉬라는 부족에 속해 있었다. 쿠라이쉬부족은 스스로 대상을 조직하고 교역을 하면서 전에 가졌던 유목부족적인 부족연대의식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의 풍조에 물들어 부족내 유력자들은 약소자를 돕는 부족적 의무를 망각해갔다. 부족적 집단 지향형에서 개인적 이익 지향형으로의 이런 변화는 유목적 의식구조와 새로운 상업경제적 환경의 모순과 갈등을 가져와 이슬람이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된다.

 

3. 모하멧드

 


모하멧드는 쿠라이쉬부족의 일원으로 570년경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6살 때 잃은 그는 할아버지의 보호하에 있다가 그의 숙부 아부 앗딸리브에게 위탁되어 성장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않으나, 메카의 대상활동에 참가하여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25세엔 약 15세 연상의 거부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한다. 그후 40세 정도되었을 610년경 그는 처음 알라의 계시를 받아 최초의 3년간은 그에게 찾아오는 특정인을 상대로 전도를, 614년에는 대중전도에 나서게된다. 그는 예언자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한 후 13년간을 메카에서 10년을 메디나에서 지냈는데 코란의 2/3가 메카에서, 1/3메디나에서 받은 계시이다.


코란은 예언자 모하멧드에게 계시된 유일신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처음 계시받은 610년경에서 623년 타계할 때까지 약 23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시된 장구(章句)를 모은 것이다.


그가 처음 계시를 받은 것은 라마단(9월)말 히라동산에서 명상을 하다 대천사 가브리엘로 부터라고 전승-모하메드의 언행록-은 전한다. 초기계시는 ①신의 은총과 권능. ②부활과 최후 심판. ③절대자에 대한 감사와 예배. ④베풂과 너그러움으로 요약된다.

 

4. 박해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 반대자들의 주된 이유는 이 종교와 교리를 수락함으로 발생되리라 예상되는 정치 경제적 영향 때문이었다.


코란은 내세에 궁극적 가치를 둠으로 현세적인 것을 상대화하면, 부의 적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신앙과 선행을 강조했다. 이 선행은 부족적 연대의식의 발로가 아닌 오히려 종교적 개인주의의 가치기준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메카가 변화과정에 있었다해도 부족조직은 여전히 강했던 당시로선 종족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여겨 반발이 더했다. 그러나 어떤의미에선 코란의 상부상조원리는 사라져가는 옛 부족적 윤리의 좋은점의 재생이라 할 수 있다. 암튼 코란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부족적 집단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됐고, 코란의 내세주의는 아랍부족의 현세주의를 부정하며 지상의 모든 권위를 상대화하고 대상인(大商人)층을 정점으로하는 메카 사회 체제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중대사였다. 모하메드와 대상인층은 사이가 나빴지만 당시 그를 양육한 숙부의, 족장으로서의 비호로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615년경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를 첨가하면 입교하겠다는 메카 대상인층의 제안을 거절함으로 둘 사이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게다가 그를 비호하던 숙부 아부 앗딸리브가 619년 별세하고, 잇달아 부인 카디자도 사망한데다, 또다른 숙부 아부 라하브가 씨족장으로서의 그의 보호를 취소하자 모하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메카 동쪽 약 60㎞ 떨어진 고원도시 띠아프로 가나, 거기서도 배척당한다.

 


5. 히즈라

 


620년경 야스리브-현재 메디나-에서 메카를 방문한 여러명의 순례자들이 모하메드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다음해엔 다른 동료를 데려와 아까바에서 모하메드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아까바의 맹세.


야스리브, 즉 메디나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업을 주요생업으로 삼은 도시이다. 경제적 실권은 유태족이 장악했고, 그외 두 아랍부족 아으스와 하즈라즈가 있었는데 둘의 계속적인 상쟁으로 메디나의 정국은 불안정했다. 즉, 여기서도 새로운 정주사회에 적합치 못한 관습에 대치할 새로운 윤리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이를 확립치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모하메드는 그의 이상을 실현코자 알라를 궁극의 주권자로, 자신을 지상의 대리인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현실세계에 건설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메디나로 이주(이를 히즈라라고 함)한다.


한편 그를 초청하는 메디나 사람들은, 물론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는 자들이지만 또한 모하메드가 아랍부족간의 분쟁조정자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메디나출신은 공정한 입장을 취하기 힘들며, 보통사람으로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힘들것이나 모하메드는 메카의 망명자이고, 알라의 사도이므로 적격자란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모하메드의 히즈라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메카의 이슬람교도들은 무하지룬, 메디나의 아랍인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자를 안사르라 불렸으며 이들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 움마를 형성했다. 또 메카에 삶의 기반을 다 두고 와야했던 무하지룬을 위해 모하메드는 안사르의 자택에 무하지룬을 생활하도록 했다.

 


6. 바드르 전투와 우후드 전투

 


안사르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무하지룬은 그들의 생활보장 방법으로 "대상 습격"을 택한다. -당시 아랍 유목부족에게있어 대상 습격은 합법적이며 명예로운 생활수단이었다.


모하메드는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이 파견하는 대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메카측과의 전면대결을 의미한다. 메카측에선 상업활동이 방해받는 것은 사활의 문제이고, 쿠라이쉬 부족의 체면과 권위에 관한 일이기도 했다. 반면 메디나의 이슬람교도측에선 약탈은 경제적 자립의 토대가 될 수있고, 또 그들을 박해했던 불신앙자들에 대한 성전(聖戰-지하드)이라는 대의명분도있었다. 유목민이 아닌 모하메드가 약탈을 결의한 것에는 경제적 이익뿐이 아니라 쿠라이쉬 부족의 세력을 약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습격은 무하지룬이 주를 이루나 곧 안사르의 참가도 늘어나 바드르 전투에선 무하지룬 86명 안사르 238명이 참여했다 한다. 이 전투는 두배에 달하는 쿠라이쉬 부족의 대군을 완전격파하여 이슬람 교도에겐 자심감을 심어주고, 모하메드는 예언자적 위치가 고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 실제로 "예언자"란 칭호는 바드르 숭리의 후로, 바드르 전투에 관한 코란 계시인 8장에 처 음 나온다. 그 이전까진 "알라의 사도"로 칭한다.)


코란 8장 전리품의 장에선 이날을 "구제의 날"로 부른다. 이 승리로 이슬람교도들은 알라가 모하메드와 이슬람교도의 편임을 확신하게 된다. 더구나 전리품의 1/5을 모하메드의 집안의 경비와 이슬람교도의 궁핍한 자의 구제비로 모하메드가 취할 수 있게한 것은 그가 일반 신도와는 다른 특수한 지위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긴 하나 교단국가(교단國家)의 통치와 비슷한 정치가 시작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르드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은 메디나에서 자리를 굳히고 모하메드와 그의 공동체는 확고부동해지나, 메카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잃어버린 위신 회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625년 3월 유목민을 포함하는 메카군 약 3천명이 메디나를 공격해왔다. 이에 대응하기위해 이슬람군은 메디나의 교외 우후드 언덕에 진을 치나 전투가 개시되기 얼마전 일부의 신자들이 전열을 떠나고, 또 메카 기병대의 활약으로 이슬람군은 이 우후드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메카의 이전투의 중요목적은 모하메드가 메디나에 건설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파괴하고, 바드르 전투에서의 손실의 몇곱을 갚아주는 것이었다. 이런 메카군은 우후드 언덕에서 돌연 전투를 중지하고 메디나로의진격 대신 메카로 회군한다. 이것은 메카의 사상자도 많았거니와 메디나의 이슬람군 이탈자인 사이비 이슬람 신자의 세력증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드르 전투의 승리로 알라의 도움을 확신하던 이슬람교도둘은 우후드 전투의 결과를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알라의 처벌과, 신앙의 견고함을 확인하기위한 수단으로 내린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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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교도와의 대립과 이슬람교의 확립

 


메카 후기 메디나 초기 이슬람 법은 유태교도나 기독교 및 다른 일신교도에 대해 종교상의 관용을 베풀었다. 모하메드는 자기에게 계시된 것이 자기 이전의 일신교 예언자들에게 내려진 계시를 확인하는 것이라 믿어, 유태교도를 계시받은 경전의 백성으로 생각, 그 신앙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일신교도들도 자신을 예언자로 인정해 줄 것으로 예상한 결과이다. 메디나로 이주한 모하메드는 처음 유태교도와 맺은 협약인 <메디나 헌장>으로 유태교와 이슬람공동체인 움마의 공존을 인정했다.


또 유태교의 제도를 채택하여 메디나 초기시대엔 이슬람 교도가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토록 하고, 유태교의 1월 10일(속죄일) 단식일의 종교행사도 받아들인다. 또 예배일이 금요일인 것도 유태교의 안식일(토요일) 준비와 상통된다. 이런식의 친유태교 정책은 모슬렘의 계전 백성의 여자와의 결혼을 허용하고 (여자의 경우 비이슬람교와의 결혼은 금지됨) 그들이 먹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게 허용한다.


이런식으로 모하메드는 유태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유태교는 정치적으로는 이에 동의한 흔적이 있으나 종교적 문제에선 거부했다. 유태교의 반대는 모하메드의 유일신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참으로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인가, 예언자인가 하는 부분에서 그들의 성서해석 결과 그를 인정치 않으려 한데 있다.


결국 메디나 이주후 2년째인 624년 유태인이 모하메드를 그들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계통의 한 예언자로 인정치 않자, 모하메드는 그때까지 예루살렘을 향하던 예배방향을 메카의 카바로 향하게 하고, 바드르 전투 후엔 1월10일 행하던 단식을 대신해 라마단(9월)달에 1개월간 단식을 실시케 한다. -라마단 단식은 아바다드(종교적 의무 행위)의 하나로 그달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모든 음식의 섭취를 금한다.


이렇게 유태교로부터 거부를 받게되자 모하메드는 유태교에 반격을 가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세운 카바신전으로 예배방향을 바꾼 것은 이슬람교를 아랍의 전통위에 확립시켜 세계적 종교를 이룩하려는 것이고, 유태교와의 결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 카바를 향함은 아랍 다신교의 신전으로서가 아닌, 알라의 집으로서의 카바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바드르 전투 후 카바신전의 건설자로서의 예언자 아브라함의 의의가 코란에 강조되어 계시되는데 내용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신전을 건설하고 이를 알라께 봉납했고 그자손(아랍인) 가운데 한사도가 나오길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하메드가 일어난 것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수 있게 만든다.


아브라함은 유태교도 기독교도 아닌 하니프-순수한 종교의 신도, 순수한 일신교도-이며 그의 신앙은 이슬람이었고 모하메드의 가르침도 아브라함이 믿는 일신교의 부활이라 여기며, 코란은 그 계시가 모세나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뜻은 신에대한 절대복종이란 아랍어에서 나왔는데 이 어휘가 코란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바드르 전투 이후의 일로, 유태교와의 대립이 시작되면서이다.


순수한 아브라함의 종교복원으로서의 이슬람이란 성격은 모하메드의 구약성서에 관한 역사적 객관적 지식에서 도출되었다고는 볼수없다. 대신 코란은 유태교와 기독교가 본래 옳은 성전을 잘못해석하고, 그 일부를 조작하거나, 감추었다고 비난함으로써 유태교의 성서의 전통적 해석에 의거한 비난을 다른차원에서 되받아쳤다.


카바신전을 알라의 집으로 간주하고 아브라함을 그 건설자로 여기는 것은 당시 메카와 그 주변 주민의 일반적 통념이었다. 모하메드는 이런 통념을 이용하여 이슬람교를 아랍의 민족감정과 민족적 전통위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여 이슬람에 의한 아랍 민족의 통합과 모하메드 자신에대한 쿠라이쉬 부족의 적의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에 애니미즘의 요소를 남겼다는 오해와, 8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을 아랍 민족종교로 곡해하게한 중요원인이 되었다.


7.한다꾸(참호) 전투와 모하메드의 말년

 


627년 3월 쿠라이쉬 부족은 우후드전투에서 일단 바드르 전투의 복수를 했지만 모하메드와 그 움마를 지상에서 말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약 7천 5백명의 부족연합군으로 메디나 대 포위작전을 행한다. 이에 대응하여 모하메드는 약 3천명 정도의 군사를 모집 메디나의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모든 곳에 참호를 팠다.- 한다꾸 전투


연합군은 2주나 포위를 했으나 참호를 못넘고 메카로 돌아간다. 쿠라이쉬 부족은 모든 재력을 원정에 소비하였으나 포위작전의 실패로 그 위신을 상실하고, 메카와 메디나의 균형은 메디나로 기울게된다.


모하메드는 연합군이 철수하자 곧 유태교도인 꾸라이자 부족을 처형하고 628년엔 1천 4백명의 이슬람교도를 이끌고 카바신전 순례에 나섰다. 쿠라이쉬 부족은 2백명의 기병대로 이를 저지하려했다. 결국 후다이비야에서 향후 10년간의 휴전과 다음해의 메카순례를 약속함으로 둘은 타협을 한다.-후다이비야 조약


모하메드는 주위 여러부족을 제압하거나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유태교도를 메디나로부터 완전 추방한다. 그후 630년 1월 일만 대군을 이끌고 메카에 진격하여 전의를 잃은 쿠라이쉬 부족으로부터 항복을 얻는다. 무혈입성한 이슬람군은 카바신전의 우상과 메카시내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여 이교(異敎)의 시대를 종식시킨다.

아랍의 유력한 쿠라이쉬 부족을 정복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부족이 메디나에 사절을 보내 맹약을 맺고 이슬람교를 수용한다.


630년 모하메드는 3만 대군을 인솔하여 타부끄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슬람의 북방정책의 일환으로서, 이슬람교의 위용과시가 목적이었다고 추정된다. 그후 632년 모하메드는 순례를 마치고 수개월후 세상을 뜬다.- 이별의 순례라 한다.-코란에 순례에 대한 규정은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이때의 선례로서 순례양식이 답습되고 있다.

 

 이슬람의 종파를 중심으로 재정리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슬람이 모두 같은 신조와 의례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다. 순니이슬람에는 4개의 법학파가 있으며 또 정치적으로 보아도 세사람의 칼리파가 동시에 존재하여 수백년간을 대치해 온 일도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이라는 건물 속에는 수많은 주거용 아파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 가운데도 청교도, 개혁주의자, 신비주의자, 원리주의자(fundamentalist) 및 광적 신자 등이 있는 것이다. 세계의 큰 종교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에도 일반 평신도들이 갖는 정통적인 중심개념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순니 무슬림이라고 부르고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20% 미만의 소수파 가운데에도 16%의 시아 무슬림, 그리고 나머지 다른 종파들이 있다.


1. 순니 무슬림

 


역사적으로 보면 순니들은 무슬림공동체 즉 움마의 순나(sunnah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순나란 꾸란, 하디스 및 예언자와 정통칼리파들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들은 자신만이 정통무슬림이라 자처하면서 그들의 꾸란과 순나해설 또 그들의 종교적 입장과 행위가 이슬람의 주류가 되어 왔다고 본다. 4대 법학파 (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의 추종자는 이슬람전통의 주류에 속하는 순니라고 믿는다.

이슬람 정통파는 상당한 정도의 견해 차이를 모두 그들의 교리에 포용해 왔지만 이슬람 역사의 초기에 그들도 순니 공동체에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점이 발생했다. 너무나 이단적이고 이질적인 분파들이 나타나 이슬람 역사속의 정치적, 종교적 및 사회경제적인 흐름을 조화 내지 융합시키려는 세력을 비난하고 나섰다.


2. 카리즈(카와리즈)파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25년째 되던 해에 칼리파 우스만이 살해당하자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살해범의 체포에 주저하자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커스 총독 무아위야가 아랍의 씨족 전통에 따라 복수를 외치며 반기를 들어 무슬림끼리의 내란에 돌입했다. 이 제1차 내란 중에 무아위야의 평화협상 제의에 직면한 알리파는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이러한 분열에서 전열을 가다듬기 어려운 알리가 부득이 협상에 응하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를 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알리의 진영을 떠나니 이것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카리즈파(탈퇴자)이다. 후대에 카리즈파의 주장은 이것을 더욱 선명하게 요약하였다. 즉 마음을 달래는 것은 혀가 아니고 바로 행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카리즈파는 전투적인 청교도요 행동주의자여서 법을 그들의 손으로 집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지하드(jihad 성전)를 여섯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그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무슬림을 살해할 정도였다. 알리 자신도 이들에 의해서 661년에 살해당했다.


카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꾸라이쉬의 자손만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순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점은 독실성이어서 심지어 건강하고 총명한 흑인노예도 칼리파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가운데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카리즈파는 우마위야조의 초기에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나 후에 무정부적인 그들의 태도 때문에 분파작용이 일어나 저절로 약화되었다.


이 파의 추종자는 오늘날까지 미미하게 존속하고 있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및 아라비아반도의 오만에 그 추종자를 볼 수 있다. 카리즈파의 맹신적인 청교도 정신만 아직까지 순니무슬림 속에 남아, 18세기에 이르러 아라비아반도에서 와하비(Wahhabi) 운동의 발생 동기가 되어 오늘날 사우디 왕가의 모태가 되었다.

 

3. 시아(쉬아)파

 


칼리파를 알리의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써 시작된 시아이슬람은 곧 독특하고 구별되는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물론 이 운동의 생성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재구성하기는 아직까지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알리의 자손을 제거하려는 우마위야조(661-750)와 압바시야조(750-1258)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다. 시아파는 우마위야조의 창시자 무아위야가 알리와 파띠마의 장남인 하싼(Hasan)을 독살시켰다고 믿는 반면에, 순니들은 그가 자연사를 했다고 주장한다.

 


하싼의 동생 후세인(Husayn)이 680년에 이라크의 쿠파 근처의 도시 카르발라(Karbala)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그의 부상은 치명적이었고 갈증에 목말라 했으나 그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았고 결국 그의 목을 잘랐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제삿날인 이슬람력의 정월(Muharram) 10일은 시아파의 중요한 종교적 공휴일이다. 이 날은 단식종료절과 희생제 때의 평화로운 명절행사와는 달리 신자들은 길거리에 나와 행렬을 지어서 후세인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려고 자위행위를 하기가 예사다.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후세인의 아들과 손자도 독살당했으며 그 후 몇 세대나 이 박해가 계속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시아파의 핵심은 이러한 정치적 책략의 희생자들을 반신격화된 순교자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러한 변형은 중근동의 전통종교로 자리 잡아온 영지주의적(gnostic) 또는 이원론적 가르침의 영향 아래 일어난 것은 명백하다. 영지사상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신에 관한 지식󰡑을 뜻하는 영지(靈知)에서 왔으며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과정을 뜻하는 영지사상은 종종 일종의 마술에 참여하여 그 마술로 신을 알게 되고,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움직인다는 것이다. 서기 2,3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신플라톤학파는 플라톤의 관념철학을 영지주의적 색깔로 바꿔 놓았다. 영지주의는 또한 인간에게 신-구약성서나 꾸란과 같은 위대한 예언서의 구절에서 자구적인 의미를 넘어 깊숙히 파고들어 그 속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게 한다고 약속했다.


이원론적 형상은 모든 유일신적 종교에 나타나 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천국의 완벽성과 인간사회의 부패상을 대조하고 있으며 또 페르시야의 사산조(226-641) 시대에 유행한 조로아스터교(Zoroasterianism)와 마니교(Manichaeism) - 둘다 그 창시자의 이름에서 유래 - 에서는 선과 악, 빛과 어둠 및 불과 흙이라는 양극의 관점에서 우주를 해석하여 이 양극적인 두 힘이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으려 다투고 있다고 보았다.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에서 여러가지 신앙으로써 시아파는 혼합적신앙(syncretistic faith)이 되었다. 즉 이슬람이 아닌 외적요소에서 빌린 것을 새로운 합(synthesis)으로 융화시켜 나타난 구심적 인물이 알리, 후세인 및 그들의 자손들이라는 믿음이다. 그들은 이맘이라고 불리워졌는데 그 의미는 순니에서 집단예배인도자를 지칭하는 이맘보다 훨씬 격이 높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9세기의 한 시아파 신학자는 그 속성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꼭 믿어야 할 점은 이맘들은 모두 창세기에 빛에서 창조되었고 신이 주는 은총과 지식은 모두 그들을 통하여 오는 것이며 그들을 통하여 우주는 생동하고 그 존재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예언자 무함마드를 제외하고는 모든 관점에서 가장 탁월한 존재여서 비록 인간적 욕구와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모든 예언자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흠없이 완벽하여 크든 작든 그들 상호간에는 대등하여 덕, 지식 및 능력을 타고 난 것이다. 그들은 출생 때 이미 보통 인간처럼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예언자처럼 할례되어 태어난 것이다.󰡓


이맘은 믿는 자들에게 꾸란구절의 비교적(秘敎的)인 속의미를 밝혀주어 그들을 어둠에서 광명으로, 타락에서 은총으로 이끄는 것이다. 시아파가 이맘에게는 완전무결성이 있다고 믿는 것은 순니파가 칼리파에게 기대하는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시아파는 이슬람 속에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개념을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무함마드의 엄격한 유일신보다 기독교적인 예언자는 동시에 이맘이어서 이 세상 어느 곳 어느 시대에도 이맘은 신의 명증(明證)으로 항상 존재한다고 본다.

 


시아파는 메카와 메디나의 성지순례에 못지않게 이맘들의 무덤 또는 그 친척과 심지어 그 옹호자의 무덤에까지 순례하는 것이다. 특별히 신성시하는 곳은 카르발라에 있는 후세인의 무덤인데 수많은 시아파들이 이곳에 묻혀지기를 원하여 그 소원을 성취하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이 도시는 죽은 이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

 


우리와 같은 비무슬림세계 사람에게 비치는 시아이슬람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신앙 즉 죽음, 순교 및 슬픔에 휩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한쪽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쪽에는 <숨은 이맘>인 구세주의 사상이 들어 있어 희망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아무슬림은 열두 이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즉 알리, 후세인 및 그의 자손이 계승하여 12번째 이맘에 까지 이른다. 제 12대 이맘은 어린 나이에 압바시야조의 당시 수도인 이라크의 사마라시에 볼모로 잡혀가 그곳에서 873년(일설 878년)에 사라졌다. 그는 지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결코 죽은 것은 아니어서 <숨은 이맘>으로써 오랜 은둔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언젠가 지상에 마흐디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중세 시아무슬림들은 마흐디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그의 이름과 출생을 이미 절대신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알려 주었으며 그의 임무는 현세가 억압과 불의에 충만해 있는 것처럼 정의와 공정으로 군림하도록 할 것이며 그때 예배로 이끄는 부름은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들릴 것이고 종교는 완전히 신의 것이 되어서 신의 찬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는 (제12대 이맘) 올바르게 인도된 마흐디이며 그에 관해서는 예언자께서 이미 언급하신 것처럼 그가 이 세상에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낼 때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도 지상에 내려와서 그의 뒤에 서서 경배 올릴 것이다.󰡓


시아이슬람에 대한 그후 역사기록에는 이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인물들이 스스로 <숨은 이맘>인 마흐디로 자처하면서 등장하였다. 시아파는 순니파의 박해에 짓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 즉 시아파임이 드러날 경우 자신과 가족의 생명 또는 재산에 손실을 입을 부득이한 처지에 놓일 때 순니파 또는 다른 파의 소속으로 자신을 위장할 수 있다. 이것을 타끼야(taqiyah)라 부른다. 대부분의 시아파는 이것을 교의로 삼고 있다.

이처럼 시아파의 특징은 이맘의 무결점성, 이맘의 부활, 타끼야(믿음의 가장), 마흐디 사상을 들 수 있다.


4. 열두 이맘파와 자이드파

 


시아파의 85%를 이루고 있는 열두 이맘파(약칭 이맘)는 오늘날 무슬림세계의 중요한 소수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란에서 열두 이맘파 시아이슬람은 16세기 이후 국교가 되어 국민의 90% 이상이 믿게되어 절대다수를 이루었고, 이라크에서는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 순니파무슬림에 비하여 열등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 분위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레바논은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서 박해받는 종파의 피난처로써의 기능을 해왔기 때문에 오늘날 30% 이상의 인구가 이 분파에 속하나 그들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빈곤층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에서도 열두 이맘파시아는 전체 무슬림인구의 10%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로코의 왕가는 8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칼리파 알리의 자손이나 국민의 지배적 법체계는 순니파의 4대 법학파의 하나인 말리키이다.

 


시아무슬림 모두가 열두 이맘파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자이드파는 열두 이맘 가운데 후세인의 아들로 끝나는 제4대 이맘까지만 인정한다. 그 이름은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Zayd)에서 유래했다. 즉 자이드를 포함한 다섯 이맘에게만 마술적 능력을 인정한다하여 다섯 이맘파라고도 부른다. 그는 할아버지처럼 반란을 일으키다가 이라크에서 전사했다. 자이드파의 교리는 알리 이후 모든 칼리파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순니와 구별될 게 거의 없다. 비록 이맘파 즉 칼리파는 하싼이나 후세인의 자손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들의 이맘은 완전무결성이나 인간과 신 사이의 중재적 기능을 지녔다고 보지 않아 단순히 왕이나 최고 종교지도자에 불과하다. 9세기말경부터 최근까지 자이드파는 남부아라비아의 예멘지방을 지배했으나 그 인구의 다수는 순니무슬림으로 남아 있다. 자이드파의 이맘이 예멘을 1000년이나 지배했으나 1962년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쫓겨나가고 이 나라는 공화국이 되었다.

 


5. 이스마일파와 암살단파


자이드파와는 대칭을 이루는 시아분파 가운데 가장 많이 논쟁의 여지가 있고 또 매력적인 것이 이스마일파 즉 일곱 이맘파이다. 그들은 열두 이맘파가 제6대 이맘 자아르 알 싸디끄(765죽음)의 장남인 이스마일이 술을 마신다고 비난하여 그의 동생 무사(799년 죽음)를 제7대 이맘으로 모신데 반대하고 이스마일을 옹립한데서 비롯한다. 이스마일파는 이스마일의 자손만이 <숨은 이맘>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이스마일의 계승권을 옹호하기 위해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시아파를 통합적 교의로 이끌었다. 특히 영지주의적 의례에서 이원론적인 사항을 많이 도입했다. 이스마일파는 글자 그대로를 믿는 대중에게는 초보적 신조만을 포교했으나 무함마드가 받는 계시의 표면적 의미 속을 뚫고 들어가 진정한 내적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정밀한 해석을 통해 포교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스마일파는 압바시야 칼리파를 반대해서 격렬한 선전투쟁을 진전시켜 이 칼리파들을 타도하려 했다. 한때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기도 했다. 이스마일이 사망한 후 100년경인 9세기 말에 그들은 압바시야조가 점차 쇠약해가는 틈을 이용하여 이라크에서 농민과 도시노동자의 불만을 선동하여 맹렬한 선교투쟁을 벌였다. 이스마일파와 당시 연합한 세력은 전투적인 까르마트(Carmathian, 그 지도자 Qarmat에서 그 이름이유래)였다. 이 파는 이라크와 시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서 아라비아반도를 휩쓸었다. 심지어 메카순례객들을 공격했고 더구나 929년에는 메카도 점령했다. 놀랍게도 까르마트파는 카아바의 신성한 <검은 돌>을 빼내어 수백리 밖에 팽개치기도 했다.

 


이스마일파의 또 다른 분파는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족과 베르베르족 사이의 만성적 긴장상태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다. 909년에 <숨은 이맘>을 은신처에서 데려와 마흐디로 선언하니 곧 파띠마조(909-1171)의 초대 칼리파 우바이둘라 알 마흐디(909-934)이다. 튀니지의 시실리섬에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969년에 그들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옛 수도 푸스타트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그 이름을 까이라(al-Qahirah 승리자)라 하니 곧 오늘날의 카이로의 시작이다.

 


이곳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니 곧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에서 이 칼리파조는 커다란 도서관을 운영했고 아즈하르(al-Azhar)성원을 건립했다. 이 성원은 곧 신학의 배움터가 되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자랑하고 있다. 이 칼리파조는 11세기 초에 그 국력이 전성기에 이르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병합하니 이라크의 압바시야조는 그 그늘에 들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11세기말에 내분이 일어났고 더구나 셀죽 터키의 침입과 십자가원정과 같은 외환도들이 닥쳐 파띠마조의 국력은 쇠잔했다. 그후 파띠마조는 점차 수그러들어 카이로 근교에만 그 권위가 미치다가 1171년에 아이유브조의 살라 알 딘(1138-1193)이 카이로를 점령하여 이 조를 멸망시킨 뒤 이스마일파를 억압하고 순니이슬람을 다시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교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스마일파는 파띠마조의 종말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파에 속하는 한 페르시아인 지도자는 11세기 말에 파띠마조와 결별을 선언하고 카스피아해 남쪽에 있는 산속에 그 추종자와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암살단파(Assassin 이 명칭은 대마초를 뜻하는 아랍어단어 al-hashishin 에서 유래하여 십자군을 통하여 유럽 각국어로 들어감.)로 알려졌다. 그들은 대마초를 복용함으로써 천당의 쾌락을 미리 맛보게 되고 임무수행에 있어서는 초인간적 용기를 갖게 된다고 보았다.


현대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들이 대마초를 복용했다는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정치적 살인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으로 증명했다. 암살은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의례적 행동이어서 가해자는 항상 단검을 사용하였고 도피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암살대상자는 대체로 고위직의 인사였다. 최초의 희생자는 셀죽조의 술탄 말리크샤(1072-1092)의 재상으로 유명한 니잠 알 물크(1091 죽음)였다. 암살단파는 셀죽조가 12세기에 들어와 쇠약해지는 틈을 이용하여 페르시아의 변방지역과 서부 시리아의 산악지역에 새로운 요새를 만들었다. 십자군이 두려워한 것은 시리아의 암살단파와 그 우두머리인 󰡐산속의 쉐이크(sheikh al-jabal)󰡑였다.

 


암살단파가 테러행위를 무기로 삼은 것은 극단적 소수파의 저항전술로 이해된다. 그들의 최종목적은 그들이 옹립하고 있는 <숨은 이맘>의 통치체제를 전영역에 확립하는 것이다. 그 전제조건은 순니이슬람을 파괴하는데 있었다. 페르시아에 있었던 암살단파의 쉐이크는 <숨은 이맘>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숨은 이맘>은 쉐이크에게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이슬람성법을 멀리 할 것을 지시했으므로 모든 사람은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라마단의 단식 기간중에 행한 큰 행사에서 신자들은 메카에 등을 돌린 채 예배를 올리고 오후에는 또 특별히 마련된 연회에 참석했다.

 


암살단파가 기대한 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순니이슬람은 쓰러지지 않았고 <숨은 이맘>은 그 자신의 통치영역을 확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13세기에 들어와 암살단파 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마침 페르시아를 침입한 몽고군에 의해서 그곳의 암살단파는 섬멸되었고 시리아의 암살단파도 아이유브조의 살라 알 딘을 계승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맘룩조(노예왕조 1250-1517)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파의 추종자는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도망한 자칭 한 이맘의 지도아래 19세기와 20세기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근원은 모호한 편이다. 이들은 그 지도자를 페르시아 왕가의 칭호인 아가 칸(Agha khan)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암살을 자행하지 않으며 주로 사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다른 무슬림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6. 알라위파(󰡐Alawis)와 드루즈파(Druzes)

 


이스마일파 선교활동의 영향으로 다른 유사한 종파가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류의 종파는 비이슬람적 요소를 너무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종종 다른 종교로까지 분류된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알라위파와 드루즈파이다. 알라위파(Alawis,알리의 숭배자들)는 시아파의 알리에 대한 숭배를 극단화시켜 그를 신격화했고 또 이스마일파의 대중을 위한 단순한 신앙과 정밀한 종교의례의 이분법을 더욱 극단화시킨 것이다. 이 파는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Muhammad ibn Nusayr)가 9세기 말에 창시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서 일명 누사이리파라고도 한다. 알라위파는 고대중근동의 여러 이교도적 의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예로는 성스런 나무숲을 숭배하고 기독교의 의례도 받아들여 심지어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도 축하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혼의 전생을 믿어서 영혼이 지상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일곱 번의 화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알라위파의 주된 주거지는 시리아이며 그곳 총인구의 약 1%를 점유하고 있다. 주로 시리아 해안지역에 있는 자발 알라위지역에 집결되어 살고 있다. 터키에서는 알레비라고 한다. 그들은 오랜 기간 박해당해 온 소수파여서 씨족의 결집, 불만 및 반란이 그들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제2차대전 후 시리아 육군사관학교가 모든 시리아인에게 문호개방을 했을 때 알라위파의 청년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거 입학했다. 1971년에 이들 가운데서 장군으로 승진한 하피즈 알 아사드가 첫 알라위파로 비순니무슬림 가운데서는 시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알라위파의 믿음에 영향을 받은 터키계 부족의 종파는 키질바쉬(Kizilbashi, 붉은 두건을 쓴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드루즈파의 기원은 11세기의 이스마일파 포교자였던 다라지(Darazi)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추종자는 파띠마조의 칼리파 하킴(Hakim)을 <숨은 이맘> 이라고 주장했다. 괴짜이었던 칼리파는 1021년의 어느 날 저녁 카이로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드루즈파는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키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남부레바논의 산악지대에 그 피난처를 발견했고 후에는 남부시리아의 고원지대인 자발 드루즈지역에서 그 주거를 찾아냈다. 그들은 비밀 엄수라는 물신숭배를 가졌는데 심지어 그 추종자들에게도 그들의 성서를 감추고 또 새로운 개종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추종자의 배교행위까지 허용한는 것이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고 그들 통치자의 종교 주로 순니이슬람과 레바논의 기독교 종파인 마론파(Maron)의 추종자인 것처럼 가장도 하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830년대였는데 그때 레바논의 통치권이 오스만 터키에서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에게 몇년간 넘어갔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구학자들이 그들의 성서를 연구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드루즈파는 그들이 일신론자인 것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칼리파 하킴을 일종의 신의 화신인 우주적 존재의 현시로써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들은 그들의 <숨은 이맘>과 절대신 사이의 일치성보다 이스마일파의 이스마일이나 시아파의 알리와의 일치성보다 더 완벽하다고 주장한다. 드루즈파의 교의와 종교적 관행의 자세한 내역을 보면 무슬림의 기준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드루즈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금지되어 있고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들과 대등하게 취급되고 영혼이 전생한다는 믿음은 널리 보급되어 있다.

 


드루즈파는 비록 순례(Hajj)시기에 축제를 열고 있지만 금식이나 메카순례는 하지 않는다. 그들의 집단예배는 금요일 정오에 열리지 않고 목요일 저녁에 열리며 그 장소도 중심지역의 성원에서가 아니고 산간의 작은 사당에서 여는 것이다. 드루즈공동체는 두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덜 비밀스러운 정기 주간예배에만 참석하는 무식자층이고, 다른 한 계층은 현자들로서흰 터반을 머리에 두르고 금욕적이고 모범적인 생활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드루즈파는 아무리 비천한 가문에 태어나도 현자가 될 수 있으나 현재 일부 지주 가문만 이 공동체의 사회적, 정치적 지도층이 되고 있다. 이 공동체의 봉건적 사회구조와 비밀엄수전통으로 비교적 안전하고 또 산악생활의 습성으로 드루즈파는 수세기 이상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드루즈파의 신자수는 약 25만 가량으로 추산되며 주로 레바논과 시리아에 살고 있다. 또 극소수는 이스라엘 통치 아래 있는 하이파(Haifa)근처의 마을과 골란고원에 살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통치하에서 아랍인보다 더 당국에 잘 협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바비파(Babis)와 바하이

 


인간의 내면적 생활을 비교적으로 파고드는 이스마일파의 교리와 <숨은 이맘>사상에 대한 시아파의 믿음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이슬람의 이단적 분파조성에 산모 구실을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세기 중반경에 이란에서 나타난 바비파이다. 이란 중남부의 도시 쉬라즈에서 설득력있는 신학자가 나타나 스스로를 <밥>(아랍어로 문이란 뜻이며 진리의 관문으로도 상징됨)이라고 자처했는데 1000년 전에 시아파 이맘의 이름 높은 제자에게도 이 명칭이 사용된 적이 있었다.

 


마침 1844년은 이슬람력에 의하면 12번째 이맘이 873년 사마라에서 사라진지 천년이 되는 즈음이어서 <밥>의 교의에는 영지주의적 요소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와 숫자 19의 신성성(神聖性)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밥>의 달력에 따르면 일년은 19개월이며 매달은 19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이란에서 <밥>의 교의는 수많은 개종자를 획득하여 타락된 기존정권의 붕괴와 함께 열두 이맘파 시아의 국교적 지위마저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정부의 <밥>운동에 대한 진압은 가혹하여 <밥>을 1850년에 사형시키고 그 추종자를 대량 학살했다.


그러나 <밥>의 사상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제자 바하울라(Bahaullah, 알라의 광채)를 지도자로 삼았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교의를 펼치기 시작했다. 즉 구약성서의 예언자 아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른 지도자들 즉 조로아스터, 예수 및 무함마드 등으로 이루어지는 낡은 예언자의 순환기는 <밥>과 함께 끝났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바하울라의 추종자인 바하이(Bahai)들은 그들의 신앙만이 진실로 보편적이어서 낡은 예언자적 종교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부처와 공자도 존경하여 그들의 가르침도 포괄하였다고 주장했다. 바하이들은 <밥>의 달력을 그대로 받아들여 매달(19일)마다 집단예배를 올리고 무슬림의 라마단달 금식처럼 한달(19일)간의 금식을 행하며 또 하루에 3번씩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예배를 올린다. 즉 무슬림의 그것과 유사한 반면에 더욱 간결화시킨 감이 있다.

 


바하이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폭넓은 관용성과 사회개선에 참여하려는 강력한 책임의식이다. 기이하게도 시아파의 초대 이맘 알리의 말을 인용하여 사회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적인 문제는 인간사(human sphere)에 속하나, 사회적 관심사는 모두 신에게 속한다. 바하이들의 <사회적 관심사>라는 말 속에 여성의 평등권, 교육의 기회균등화 및 국제평화의 달성 등이 포함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바하이는 평화주의자요, 양심적인 거부자 및 절대금주론자이며 육식보다는 채식을 또 금연을 더 선호한다.


역대 이란정부는 <밥>의 추종자를 박해한 것처럼 바하이들을 국민단합에 유해한 번역자로 보고 무자비할 정도로 박해하였다. 또 1979년 이슬람혁명 후에도 박해의 고삐는 늦추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많은 바하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숨기거나 일부는 이민을 떠나고 있어서 이란 내에서의 그 수를 어림잡기는 힘드나 대체로 50만에서 1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들의 국제적 본부는 이스라엘의 하이파에 있으며 아크레의 근교인 카르멜(Carmel) 산에는 밥의 거대한 무덤이 있으며 바하울라는 망명생활을 하다 1960년대에 죽었다. 오늘날 전세계에 138개의 바하이공동체가 있으며 미국에는 바하울라의 아들이 선교에 나서고 있어서 시카고 근처 윌메트(Wilmette)에는 웅장한 바하이성원을 두고 있다. 한국에도 지식층을 중심으로 건물을 빌려 상당수의 바하이 추종자들끼리 모이고 있다.

 


무함마드가 7세기에 이슬람을 포교할 때의 주장과 바하이들이 20세기에 그들의 신앙을 선교할 때의 공통된 주장은 중근동에서 옜날부터 영혼의 진리임을 자처하고 나온 수많은 종교의 계승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방성 때문에 무슬림들은 바하이들을 단순한 이단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는 전혀 관계없는 거짓종교로서 규탄한다. 그렇지만 바하이교는 이슬람역사상 정통파와 이단파의 갈등과 마찰 속에서 다듬어진 요소가 그 발생의 계기가 된 점은 사실이다. 이러한 요소 가운데 <밥>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것은 수피(굂fi) 사상으로 알려진 신비주의적 믿음과 그 관행의 결합관계이다. 수피주의는 이슬람역사에 있어서 오히려 시아 사상보다 더 큰 비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에는 바하이파 추종자가 2만 5천명이다. 이상과 같은 이슬람의 종파가 주로 산재하는 곳을 살펴보면 와하비파(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자이드파(예멘), 시아파(이란, 이라크, 레바논 등), 알라위파(시리아, 터키), 드루즈파(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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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한 100가지 질문

 

1. 이슬람(Islam)이란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무슬림 (복종자란 의미로 이슬람교도를 통칭)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2. 알라(Allah)는 무슨 의미인가?

 

유일한 창조자라는 뜻이며 아랍어의 중성(中性) 보통명사. ‘알라신()’이라고 부르면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3. 이슬람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역사적 실체로서 이슬람의 원년(元年)은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해(헤지라) 신앙공동체를 만든 622년이다. 무하마드는 610년에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4.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이슬람은 어떤가?

 

평화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어원인 살라미(salami)는 평화란 뜻이다.

 

5. 무하마드는 어떤 인물인가?

 

서기 570년쯤 아라비아의 꾸라이쉬족()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6세 때 죽었다. 삼촌 집에서 양육됐고 25세 때 40세 부자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40세부터 알라의 계시를 받아 포교활동을 하다가 632년에 숨졌다.

 

6. 이슬람의 예언자(預言者)란 무슨 뜻인가?

 

알라의 말씀을 인간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에선 모두 124000명의 예언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28명이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의 성경(聖經) 인물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무하마드가 주요 예언자다.

 

7. 헤지라(Hijra)란 어떤 것인가?

 

무하마드가 지역 부족들의 탄압을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추종자 70여명을 데리고 622년에 이주한 사건으로 성스러운 이주를 뜻한다.

 

8. 무하마드는 메디나에서 움마(Ummah)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무하마드가 신도들을 모아 만든 형제애적인 신앙공동체. 그후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신도들의 공동체란 의미로 움마란 단어가 사용됐다.

 

9. 무하마드는 부인을 몇 명이나 두었나?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4명 이상은 두지 않았다. 코란의 규칙을 지킨 것이었다.

 

10. 무하마드의 후계자라는 칼리프는 어떻게 선출되었나?

 

무하마드는 아들이 없었고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후계자는 신도들이 협의해 투표로 선출했다. 1대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였다.

 

11. 코란은 언제 완성됐으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무하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은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모아 644~656년에 완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114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을 수라라고 한다. 알라가 1인칭으로 말하는 형식을 취했다.

 

12. 코란은 왜 아랍어로만 읽어야 한다고 하는가?

 

알라가 내려준 언어인 아랍어만이 가장 아름답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13. 하디스(Hadith)는 무엇인가?

 

무하마드의 언행 및 전승을 기록한 책으로 종교예식과 일상생활 세칙을 모두 담고 있다.

 

14. 술탄은 무엇인가?

 

칼리프의 위임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 내지 전역을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자의 칭호.

 

15. 이슬람은 특히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보나?

 

이슬람은 예수(이사라고 부름)가 훌륭한 예언자지만 신성(神性)은 없으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본다.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16. 교리적으로 보아 이슬람은 유태교 및 기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하마드는 초기 시리아와 아라비아 쪽으로 흘러나온 기독교 이단인 단성론(單性論)과 유태교 이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쪽 교리를 채택했다. 상당수 주변부 교리나 풍습도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가져간 것으로 본다.

 

17.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을 어떻게 보는가?

 

사이비 기독교 종파가 아랍 토착종교와 결합하여 발생한 전혀 별개 종교로 본다. 알라는 아라비아 부족의 월신(月神)에서 유래됐으며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18.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관계는?

 

이슬람의 3대 성지(聖地)중 하나. 코란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무하마드가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천상(天上)여행을 다녀왔다는 전설에 따라 성전산에 바위사원이 세워졌다.

 

19. 이슬람에도 원죄(原罪)의 개념이 있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란 개념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죄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20. 이슬람의 종파에는 어떤 것이 있나?

 

수니(Sunni)파가 다수파로 초기 칼리프들을 무하마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한다. 아라비아, 이집트, 터키 등에 널리 퍼져 있다. 시아(Shiite)파는 2대 종파로 암살당한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본다. 이란이 본거지이고 이라크, 시리아 등에 분포한다. 이밖에 타 종교와 혼합한 드루즈파,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 등이 있다.

 

21. 이슬람의 율법이라는 샤리아는 어떤 것인가?

 

법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내용이 많아 결혼이나 식사방법, 기도 방법이나 기도 시기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22. 이슬람의 율법은 법을 공개 집행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법 집행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정의를 실천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그렇게 실시해 왔으나 최근에는 종파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23. 이슬람 사회에서 일반법률은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나?

 

사우디 아라비아, 수단, 이란 등에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헌법이다. 하지만 터키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이슬람 제국에서는 샤리아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폐지하고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법 제도를 채택했다.

 

24. 이슬람교도(무슬림)들에게는 육신(六信)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인가?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알라를 믿는다. 예언자들을 믿는다. 거룩한 책들(코란 포함)을 믿는다. 천사들을 믿는다. 심판과 부활을 믿는다. 알라의 법칙과 정명론(定命論)을 믿는다.

 

25. 무슬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5가지 기본적인 의무는 무엇인가?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신앙고백(샤하다), 하루 다섯번의 기도(사라트), 구제(자카트), 메카 순례(하지), 라마단 금식(禁食)(사움)이다. 시아파는 여기에 성전(聖戰)(지하드)을 추가한다.

 

26.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할 때 메카를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하마드는 처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고 했다가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구약도 제대로 모른다며 자신을 비웃자 630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기도 방향으로 정했다.

 

27. 예배는 꼭 정해진 시간에 보아야 하나?

 

태양의 위치에 따르도록 돼 있기에 정확한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28. 모스크는 어떤 곳인가?

 

아랍어로 엎드리는 곳이란 뜻의 마스지드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의 예배당을 일컫는다.

 

29.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몸을 씻는 이유는?

 

예배 전 몸을 씻는 것을 우두(wudu)라 하는데, 알라에 대한 예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코란에도 청결하지 않은 몸으로 행하는 예배는 받지 않겠다고 되어 있다.

 

30. 모스크에 딸려 있는 미나렛의 역할은?

 

예배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는 역할(아잔ㆍadhan)을 하며, 이를 행하는 사람은 무에진(muezzin)이라 한다.

 

31. 무에진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나?

 

크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32. 모스크 안에서도 남녀는 따로 앉아 예배를 보나?

 

남녀가 따로 앉되 남자가 앞에 앉는다. 좁은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불편한 점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33. 이슬람에는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고 하는데,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오마르를 물라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신과 인간 사이에 중매자를 두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중매자만 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슬람에선 성직자가 없다. 물라는 종교지도자, 율법학자란 뜻이다.

 

34. 이슬람을 흔히 정교(政敎)일치 종교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코란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 전반을 망라하기에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는다. 성과 속을 구별할 경우 정신생활이 물질생활에 종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5. 이슬람에서 모든 사람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슬람은 지위나, 명성, 부와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 알라와의 만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36. 이슬람 사회의 슈라(shura)는 무엇인가?

 

협의를 뜻하는 말. 무하마드도 무슨 결정을 할 때는 슈라를 거쳤다. 지금도 쿠웨이트, 아프간 등 이슬람국가 중에는 슈라를 국회와 같은 기구로 활용하고 있다.

 

37.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라사)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고등교육 시설을 말하나 전통적으로는 울라마(율법사) 양성이 주목적이다.

 

38. 이슬람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유는?

 

알라가 유일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 금지이기 때문이다.

 

39.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보는데 왜 그런가?

 

이슬람에선 금요일에 태양이 떠올랐고 아담이 창조됐으며 심판이 일어나기 때문에 금요일을 가장 훌륭한 날로 여긴다.

 

40.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기독교가 활동하고 있나?

 

일부 아랍지역에서 극소수 기독교 신도가 있으나 계속되는 탄압과 사회적 소외로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저 대개 단성론자나 정교회(正敎會) 계통으로 서방 기독교와는 차이가 난다.

 

41. 무슬림들이 많이 쓰는 인샬라는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따라라는 아랍어로 무슬림들이 일상 생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한다.

 

42. 이슬람에선 하루를 무엇으로 기준하여 계산하는가?

 

유태인과 같이 하루 해가 지면 새로운 날로 간주하고 아랍쪽도 그런 관행이 있어 결혼식 등 중요 행사를 밤에 열곤 했지만 지금은 대체로 하루 계산이 서구와 비슷해졌다.

 

43. 라마단은 무엇이고 왜 단식(斷食)을 규정하고 있나?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은 달(대략 음력 9월경)을 라마단으로 정하고 단식을 한다. 초기엔 24시간이었으나 10일로, 다시 한달로 연장됐다. 올해 라마단은 1117일에 시작한다. 단식으로 지옥의 문이 닫히고 천국의 문이 열린다며 속죄의 의미를 강조한다 

  

44.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교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된다. 부부관계를 해도 안되며 남을 비방하는 말을 삼가야 하고 향수 냄새를 맡거나 화를 내서도 안된다. 다만 13세 미만의 어린이, 노약자들, 여행자, 생리 중인 여자 등은 단식이 면제된다.

 

45. 무슬림들은 반드시 메카순례를 해야만 하나?

 

모든 무슬림들은 자유로운 성인으로 온전하고 건강하며 적당한 재산이 있다면, 그리고 순례하는 동안 가족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일생에 한번 메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외이면 면제가 되기도 하고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다. 기업체에는 메카 순례를 위해 회사가 돈을 적립해주기도 한다.

 

46. 메카의 카바 신전이란 어떤 곳인가?

 

원래 아라비아 다신교(多神敎)의 우상숭배 장소였으나 무하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알라에게 예배드린 곳이라며 이곳을 성지(聖地)로 삼았다. 카바란 입방체란 뜻.

 

47. 성지순례시 메카에서 하는 의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

 

보통 카바 신전을 7바퀴 돌고 내부의 검은 돌에 키스한 뒤 잠잠이란 우물 주변에 있는 99개 예언자들 무덤과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블리스(사탄)라고 하는 돌기둥에 돌을 던지며 코란 구절을 외운다. 또 메카에서 25떨어진 아라파트 언덕을 오르고 6떨어진 미나에서 양과 낙타로 희생제사를 드린다.

 

48. 이스마엘과 이삭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서로 어떤 관계인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자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 나중에 본처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다.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은 쫓겨나아랍인의 조상이 됐고, 적자(嫡子)인 이삭은 유태인의 조상이 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49. 이슬람교도들은 왜 턱수염과 구렛나루를 기르나?

 

예언자 무하마드가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하여 그에 따르려는 행동인데, 여기에 유목민 고유의 연장자 우대 전통과 어울려 더욱 확산됐다.

 

50. 이슬람권 국가의 여성들이 집 밖에 나설 때마다 차도르(머리를 덮어싸는 보자기로 이란에서는 히잡이라고 함)를 쓰는 이유는?

 

남녀가 상대의 육체(겉모습)만 보고 인격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남자의 경우도 맨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공중목욕탕에서도 꼭 팬티를 입는다.

 

51. 흔히 성전(聖戰)으로 일컬어지는 지하드(jihad)는 무엇을 의미하나.

 

지하드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항거 등 자기 방어의 목적을 갖고 있다. 또 내부적으로도 부패에 찌든 사회,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지키는 일도 이에 포함된다. 지하드가 악용 내지 남용될 소지가 있으나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52. 아프간 여성들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부르카는 어떻게 생겼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다. 내놓는 것은 손 뿐인데 그것마저 망사로 쳐 외부에선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다.

 

53. 이슬람 지역 여성들은 어릴 때 할례를 해야 한다는데, 그 이유는?

 

할례란 성기의 일부를 도려내는 작업으로 그걸 하면 성에 대한 욕구가 절제된다고 한다. 아랍이나 아프리카의 토착 풍습.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성에게만 요구한다는 차원에선 여성 차별이라 말할 수 있다.

 

54. 이슬람 사회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나?

 

여성이 혼전에 순결을 잃는다거나 결혼 후에 간통을 하게 되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 해서 그 아버지나 오빠가 당사자를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명예살인이라 부른다. 따라서 명예를 더럽힌 남자도 이 사회에선 발을 붙이지 못한다.

 

55. 이슬람 지역 여성들이 손발을 치장하는 헤나(henna)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헤나란 꽃가루와 나뭇가루, 식물성 기름 등을 한데 섞어 만든 검은 색 계통의 안료를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아랍, 인도 여성들은 손등과 손바닥, 발등에 식물의 줄기나 잎, 나비 등을 예쁘게 그려 치장한다. 남성의 시선을 끌기 위해생겨난 풍습.

 

56. 아랍지역에도 찻집이 있나?

 

물론 있다. 서양의 오픈 카페처럼 주로 길거리에 있는데, 남성들만 출입한다. 여기서 물담배, 체스 등을 즐긴다.

 

57. 아랍과 이슬람, 중동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아랍은 인종, 언어 등 문화적인 요소를 일컫고, 이슬람은 알라를 믿는 종교를 말하며, 중동은 지리적 개념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칭한다.

 

58. 중동 평화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은 어디인가?

 

현재 이스라엘 영토 및 점령지역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합친 지역.

 

59.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종종 벌어지는 인티파다(Intifada)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에 저항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되찾기 위해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이는 무차별 과격 무장 봉기를 뜻한다.

 

60. 아프간의 실질적인 정부인 탈레반은 어떤 조직인가?

 

구도자란 뜻. 이슬람학교에서 코란을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199410월 동남부 칸다하르의 이슬람학교 학생운동가들이 세웠다. 969월 이슬람 조직간의 내전에서 승리, 국토의 90%를 장악했다. 종파간 자치형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지만 UN은 합법적인 정부로 간주하지 않는다.

 

61. 이슬람의 교리에 폭력을 인정하거나 찬미하는 부분이 있나?

 

공식적으로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리주의자들은 지하드(聖戰)를 언급한 코란 구절들을 자주 동원한다. 하디스에는 지하드가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데 첫째 순수한 포교활동이며 둘째 신앙의 방어로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밝혔다.

 

62. 이슬람 부흥운동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정신적 쇠퇴를 비판하고 무하마드의 움마 정신, 즉 순수 이슬람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반서구적, 반체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63.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현재의 사우디 왕국을 세운 와하브의 와하비주의(主義)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다. 사우디는 친()서방적이지만 국민들은 와하비주의에 기반한 엄숙주의, 배타주의, 그리고 혁신을 반대하는 극도의 보수주의를 지킨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샤리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이란이나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이 사례가 될 수 있다.

 

64. 원리주의자들은 왜 테러를 일삼고, 서구에 증오감을 갖고 있나?

 

서구의 물질주의가 이슬람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서구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히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이를 분쇄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테러리즘이 증폭됐다.

 

65. 이슬람교에서는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을 용인하고 있는가?

 

테러리스트로 이슬람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반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하드와 관련해 그들이 공개적 또는 잠재적으로 존경받기도 한다.

 

66. 이란에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부패한 친미(親美) 팔레비 정권이 이란을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의 전통과 정신이 훼손되자 호메이니를 비롯한 물라(율법학자)들이 왕정을 끈질기게 비판, 왕정 타도로 이어졌다.

 

67. 이슬람권 반미(反美)의 뿌리는?

 

터키의 경우 근대화와 세속화에 어느 정도 성공해 세계체제에 순조롭게 편입했다. 하지만 나머지 중동 국가들은 이교도(異敎徒) 국가인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페르시아만 전쟁 등으로 반미운동이 확산됐다.

 

68. 서구의 이슬람공포증은?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은 유럽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다는 게 정설. 강한 군대를 몰고 다니며 코란이냐 칼이냐를 외치는 이슬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적대의식과 두려움이 생겨났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1세기 십자군이 일어났다.

 

69. 이슬람 무장단체에는 어느 지역에 어떤 것이 있나.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이 본격적인 불을 지폈다. 현재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집트의 자마아트 이슬라미야, 알제리의 무장무슬림그룹,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 등이 있다.

 

70. 이슬람에서 음주와 돼지고기의 식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음주는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이집트를 제외한 이슬람 국가에서 금지된다. 돼지고기는 불결한 음식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된다.

 

71. ()은 어떤 방식으로 잡는가?

 

이슬람법에 따라서 희생제를 맡는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말한 뒤 단숨에 양의 목을 자른다. 피는 동맥을 통해 완전히 뺀 다음 고기를 도려낸다.

 

72. 이슬람권에서 술을 마실수 있나?

 

음주는 코란에선 우상숭배·도박과 함께 금지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하나다. 마실 수도 없고 제조할 수도 없다.

 

73. 이슬람에서는 남자에게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데,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인가? 왜 여성은 4명의 남편을 둘 수 없나?

 

코란의 규정에 의해 경제적 능력과 부인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에 한해서만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복수의 남편을 거느릴 수 없다. 여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보아 그랬을 것이다.

 

74.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신부가 될 여자에게 마흘이라는 것을 지불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신랑이 결혼과 함께 신부집에 지불하는 돈으로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증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돈은 이혼을 하더라도 여성의 몫이다.

 

75. 코란에서 별도로 금지하고 있는 결혼도 있나?

 

어머니, 여형제,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이모, 고모, 형제 자매의 여아, 유모,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여자, 장모 등과는 결혼할 수 없다.

 

76. 이슬람사회에서도 이혼은 가능한가?

 

남자는 언제든지 이혼 청구가 가능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77. 이슬람사회에도 창녀가 있나?

 

순결과 가정을 중시하는 이슬람이라 원칙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주 은밀하게 존재한다.

 

78. 이슬람의 남녀 분리 사회생활은?

 

원칙적으로 남녀의 공간이 분리돼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물론 집안에서도 그러하다. 사람과의 접촉이 많은 직종은 그래서 남자들이 한다. 그러나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그러한 전통이 허물어지고 있다.

 

79. 왜 이슬람 국가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가?

 

이슬람만의 습관은 아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러하다. 손은 남의 것과 섞일 염려가 없어 가장 위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0. 왜 무슬림들은 오른손을 신성시하나?

 

하늘에서 알라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높은 곳이며, 순교하면 바로 그 오른쪽에 앉을 수 있다고 믿는다.

 

81. 아랍인들의 주식은 무엇인가?

 

쿠브즈라 부르는 우리의 빈대떡 크기 만한 식빵이다.

 

82. 이슬람 지역에도 대중목욕탕이 있나?

 

큰 도시의 시장에는 반드시 함맘(hammam)이라 부르는 대중목욕탕이 있다. 둥근 천장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바닥은 대리석이다. 그러나 욕조는 없다. 물을 수조에서 받아 씻을 뿐인데, 때를 벗기지 않는다. 팬티 차림으로 목욕한다.

 

83. 이슬람 전통 도시를 흔히 메디나(medina)라 부르는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모스크와 마드라사(종교학교), 함맘(대중목욕탕), 수크(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길가의 집은 대개 가게를 겸한다. 메디나의 외곽은 외부 공격에 대비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84. 이슬람 지역의 시장은 어떠한가?

 

수크(souq, 페르시아나 터키에선 바자)라고 하는데, 없는 게 없다. 매력은 흥정에 있다.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매우 인간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85. 유태인, 화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상인이라고 하는 아랍인들의 상술은 어떠한가?

 

돈을 버는 일에 종사하나 돈버는 데만 급급하지 않는다. 마케팅에 열을 올리지 않으며 대체로 향락산업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86. 이슬람교는 초기부터 포교가 빨랐다. 그 비결은?

 

우선 이들에 맞설 만한 세력이 없었고 단순한 교리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데다 종교적 열정이 매우 강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87. 아라베스크 문양이란 어떤 것인가?

 

살아 있는 것들은 그리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식물의 형상, 기하학적 도형, 코란의 서체(書體) 등을 이용하여 문양을 그렸는데 이를 아라베스크 문양이라 부른다.

 

88. 모스크가 대체로 돔 구조로 되어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반구형(半球形)의 돔은 천상의 하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알라에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89. 이슬람교도들은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나?

 

아이가 태어난 뒤 7일째 되는 날에 일가 친지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낭송한 다음 축하연을 베푼다. 이름은 맨 앞쪽이 그 아이 이름이고 뒤로 갈수록 먼 조상의 이름이나, 이름의 길이는 가문에 따라 다르다.

 

90. 이슬람의 장례는 어떠한가?

 

유족들은 사자를 위해 매장하나 대개의 경우 묘는 작게 만든다. 장례식은 모스크에서 치른다.

 

91. 이슬람에선 3개의 시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

 

그들은 원래 헤지라 역()을 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선 서력을 무시할 수 없게 돼 두 개의 시계가 필요하다. 여기에 일출과 일몰에 의해 시간이 결정되는 예배 때문에 또하나가 필요하다.

 

92.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나?

 

금요일은 이들에겐 안식일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게문도 닫는다. 모스크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남는 시간은 코란을 읽으며 하루를 지낸다.

 

93. 물에 대한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이 있나?

 

물은 알라가 준 것으로 개인이 독점할 수 없으며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청결하게 이용해야 한다. 도시의 길거리에 설치된 물독의 물도 절대 헛되이 쓰지 않는다.

 

94.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세계 180여 개국에 12억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국가 수만도 55개나 된다.

 

95. 현재 서구에서도 이슬람은 포교되고 있는가?

 

아랍 및 아프리카인들의 유럽 또는 미국으로의 이주에 따라 서구에서도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인구 5800만의 프랑스의 경우, 개신교도가 70만명인 데 비해 이슬람교도는 300만명이나 된다.

 

96. 한국과 이슬람 지역은 언제 어떻게 교류하기 시작했나?

 

이슬람과 우리와의 교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때의 아랍측 기록에 신라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데다 서역인이라 부르는 석상이 신라인들에 의해 세워지기도 했다. 교역에 따른 인적 교류인 것으로 보인다.

 

97. 현재 한국의 이슬람교 사원과 신도는 어느 정도인가. 언제 들어왔나?

 

625 때 터키군의 파병으로 이슬람이 우리에게 다시 알려졌는데, 최초의 모스크는 오일쇼크 때인 1976년 서울 이태원에 세워졌다. 현재는 전국 5곳에 사원이 있으며, 신도는 주로 이슬람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근로자들이다.

 

98. 현재 한국에서 이슬람교 포교활동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

 

적극적인 포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이슬람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9. 한국에서도 이슬람 또는 아랍음식을 맛볼 수 있나?

 

서울 이태원동의 해밀튼호텔과 중앙성원 주위에서 아랍·인도음식을 즐길 수 있다. 차와 향료 등도 구할 수 있다.

 

100. 덕수 장씨가 아랍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13세기 원나라 제국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던 아랍인 삼가(三哥)가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한국사회에 동화되었는데, 덕수 장()씨가 바로 그 후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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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성지순례" 오늘시작 무슬림 참가자 200만명 전망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은 일생에 한번은 성지순례가 의무라고 합니다.
이슬람의 최대 종교행사인 성지순례가 현지시각 30일
사우디 메카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성지순례에 참가하는 무슬림들이
117만 명이라고 발표했으며, 사우디내에서  20만명이
참가하면 올해 성지순례객은 200만명이 될 전망이라합니다.

해마다 성지순례기간동안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들이
발생했었는데 올해 성지순례기간에는
큰 사고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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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 코란의 주제3

무함마드 종교에 대한 가르침

ㅇㄱㄷ 선교사

당시 아랍 사람들은 무함맏의 꾸란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비난 하였다. 수라 25:4-5 그 당시의 사람들이 꾸란에 대해 비난한 내용이다.

“불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이 꾸란은) 단지 (무함맏) 자신이 스스로 꾸며낸 거짓말이다. 그에게 이 (거짓말을 지어낼 때) 다른 어떤 종족 (특별히 책들의 종족)이 도와 주었다’ 라고 모독하고 중상한다. 또 그들은 ‘(이것은) 이전에 있던 전설인데, (무함맏이) 그것들을 다시 고쳐 쓴 것이다. 그렇다. (이 전설들은 어떤 자들 편에서) 그에게 아침과 저녁에 읽혀져 주어진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난을 들으면서 무함맏을 따르던 자 중 일부도 무함맏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였다. 이럴 때 무함맏은 그들도 독한 말로 욕을 하였다. 수라 33”12-13 “그 때 외선자들과 마음에 상처 받은 (즉 확신이 약한) 어떤 자들이 ‘알라와 그의 선지자가 우리들에게 오직 거짓 약속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많은 반대에 부딪히자 무함맏은 화가 났다. 무함맏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며,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며,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수라 43:22-26 “아니다. 그들은 말했다. ‘당연히 우리는 조상들을 한 종족-종교 위에 있었고, 당연히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그러므로 우리<알라>는 당신<무함맏>보다 전에 어떤 마을과 도시에 어떤 증거자-선지자 보내지 않았다. 단지 그곳의 나타난 것들이 : ‘당연히 우리 조상들을 한 족속-종교 위에서 찾았고, 당연히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라고 한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만일 내가 너희들에게 너희 조상들을 찾은 종교에서 올바른 종교를 끌어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말할때 , 그들은 : ‘당연히 우리들은 너희들이 사도로 만들어 보낸 종교에 불신자들이다’라고 말했다. 됐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보복을 받았다. 이제 그를 (자기 선지자들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자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라!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종족에게 말했었다. ‘당연히 나는 당신들을 숭배하는 우상들보다 정결하다.” 무함맏은 자기 동족들과 종교적인 문제로 다투게 될 때에도 자기 조상들이 섬겼던 잘못된 우상 숭배보다 올바른 종교를 끌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아브라함에게 두어,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와 동족들이 섬겼던 우상 숭배에서 참 종교를 이끌어 낸 것과 같은 행위을 무함맏 자신이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아랍 우상숭배자들의 비난 중에는 근거 없는 것들도 있었다.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무지막지하게 대한 것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랍인들의 우상 숭배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으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지적되는 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함맏은 단지 아랍인들에게서만 반대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았다. 무함맏이 당시의 사람들과 함께 했던 것처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축복 대신에, 서로에게 욕지거리와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던 지독한 말다툼으로 구성되어 있는 종교의 경전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꾸란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아니라 무함맏이 자기의 반대자들에게 무섭게 쏟아부은 저주로 가득찬 책이다. 꾸란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진리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한 거짓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채운 책이다. 수라 32:13 “나는 지옥을(불신자) 귀신과 사람들의 모든 자로 채우는 자이다.” 이러한 소름끼치는 말을 마귀 이외에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한 독한 저주를 퍼붓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런 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메카에서 무함맏의 종교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 도리어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았고,심지어는 그를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수라18:15,16“자우리 종족은 그 분 외에‘신들을’ (신)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 우상들이 신인 것에 대하여) 분명한 한 증서를 가져온다면. (결코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 (어떠한 문서도 없이, 동료가 있다 라고 하여) 알라의 영광에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보다도 난폭한 자가 누가 있느냐? (젊은이들이여!) 너희들은 그들과 알라 외에 그들이 숭배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서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 (유일한 너희의 창조주, 알라 자신에게 예배하기 위하여) 동굴에 피난처를 찾아가라! 너희 주가 너희에게 자기 은택을 크고 풍성하게 할 것이고, 너희들의 일들을 번성시킬 것이다.”

 

아랍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하고 반대하자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모든 아랍인들을 정죄하였으며, 점점 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를 품게 되었다. 수라 6:114 “(오무함맏,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말하라!) ‘나는 알라 외의 다른 것을 맹세하겠는가? 그 자신이 너희들에게 이 책 (꾸란을) 상세한 (즉 너희들이 논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충분히 답변을 주는) 상태로 내려준 자이지 않느냐?’ 우리가 책을 준 사람들(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그의(꾸란이) 너희들의 창조주보다 진리로 내려진 것을 알 것이다.” 수라 11:17 “자 이제 창조주 편에서 온 분명한 증서를(즉 꾸란을) 소유한 사람이 (단지 이 세상의 유익들만을 찾는 사람들과 똑같겠는가?) 오히려(알라) 편에서 온 증거 (즉 가브리엘 천사가) 그의(무함맏의) 동료이고, 그보다 이전(즉 분명한 문서인 꾸란보다 이전에) 모세의 책(타우랏이) 있었다. 그것은(이스라엘을 위해 온) 인도자와(알라의) 호의이었다. 자, 그 자들이 (즉 분명한 증서를 소유한 자들이) 그것을(꾸란을) 믿게 될 것이다. (선지자에게 대항하여서는) 집단들 중에서 누구든지 그 꾸란에 불신자가 되면, 그에게 약속된 장소는 지옥이다.” 수라 21:7 “(오무함맏) 우리는 너보다 전에도 (천사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사람들을 (즉 인간들을)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계시를 보낸 상태로 선지자로 삼았다. 그렇다. (오 메카 족속아) 만일 너희들이 모를지라도 (타우랏, 인질을 아는) 족속의 지식있는 자들에게 물어보라!”

 

수라 21:7은 알라도 무함맏처럼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할 것을 모르고 기대를 하였던 무지한 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알라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도 모르고 무함맏에게 말했던 것이다. 수라 29:46-47에서 볼 수 있듯이 무함맏은 그의 사역의 초기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라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쳤다.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친근한 책-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오직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토론하라! 단지 그들 중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과만 (날카로운 관계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너희들은 말하라! ‘우리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것에도 (꾸란도), 너희들에게 내려진 (타우랏과 인질도) 믿는다. 우리들의 신도, 너희들의 신도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에게만 복종을 한다.’ (오 무함맏, 우리는 너보다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에게 책들을 내려 주었다.) 그러므로 너에게도 책, 즉 꾸란을 내려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책이 (즉 타우랏과 인질이) 주어진 자들은 그것을 (즉 꾸란을) 믿을 것이다.” 무함맏과 그의 신 알라와 오늘날의 무슬림들은 이 본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끊임없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선을 행하고 있고, 또한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평화를 원하더라도 무슬림들은 결코 평화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무함맏은 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옹호할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과 책을 읽는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 모두를 인정하여 주었다. 수라 3:52-54 “이제 언젠가 예수가 그들 (유대인들) 편에서 불신(신성모독)을 보고서, ‘알라의 (종교에 초대할 때) 누가 나에게 협력자가 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사도들이 ‘우리가 알라의 종교에 협력하는 자들입니다. 알라를 믿었습니다. 오 예수여, 증거하소서, 우리는 알라에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창조주여, 증거한 것을 믿었습니다. 당신의 선지자를 따랐습니다. 충분합니다. 우리를 증거자들의 반열에 기록하소서!’ 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교묘하게 했다. 알라도 교묘하게 했다. 알라는 더 교묘하게 하는 자이다.” 수라 10장은 무함맏이 초기에 이스라엘 민족과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극도로 호의적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라 10:93-94 “의심없이 우리는 이스라엘을 빼어난 최종적인 곳에 장소를 정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하고 깨끗한 것들에서 양식을 주었다. 후에 그들이 지식(즉 모세오경)이 주어질 때까지 불일치(모순) 하지 않았다.…… (오 무함맏), 만일 우리가 너에게 밝힌 것들에서(즉 전에 종족들에 대해 밝힌 우리 구절들에서) 의심하게 된다면, 그럴 경우에 너보다 전에 있었던 책(즉 모세오경과 신약성경) 읽는 사람들로부터 물어보라! 분명히 너에게 창조주 편에서 진리인 꾸란이 왔다.” 수라 44:29-32 “그렇다. 그들에게 하늘도, 땅도 울지 않았고, 그들에게 기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 참으로 우리는 그들을 아는 상태에서 모든 세상들, 즉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였고, 선호하였다.” 비교적 초기의 메카 수라에 속하는 위의 44장에서 무함맏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동경심과 감정은 거의 눈물을 쏟을 직전이었다. 수라 45:16도 비슷한 내용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스라엘 (종족)에게 책, 즉 타우랏, 지혜 그리고 선지자직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들을 정하고 깨끗한 것들에서 양식을 주었으며, 또한 그들을 모든 세상보다 높게 했다.”

 

그래서 무함맏은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자기가 만든 새로운 신과 종교가 서로 비슷하니 함께 숭배하자고 제안한다. 수라 3:64-65 “ ‘(오무함맏) 말하라! ‘오 친근한 책’ (즉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동일한 한 말씀에 일치하여 유일한 알라에게만 예배를 드리자! 그에게 어떤 것도 동료로 만들지 말자! 그리고 알라를 두자! 어떤 것들을 신으로 삼지 말자!’ 만일 그들이 (즉 친근한 책들 그 초대를)거절하면, 그 때는 너희들이 (오 신자들이여) ‘너희들은 증인이 되라! 우리는 무슬림들이다. 유일한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들이다’ 라고 말하라! ”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먼저 무함맏은 자기가 유대-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즉 구약과 신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와서 그것을 확증하는 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무함맏은 우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 모세의 종교, 노아의 종교이고, 무함맏은 그들의 종교에 꾸준히 머물러 있는 자라고 주장한다. 수라12:38,39 “나는<무함맏은> 나의 조상들의 길,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종족과 종교를 따른다. 우리를 위해서 알라에게 어떤 것을 동료로 만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 오 친구들이여, 흩어진 다양한 안개 “신들”이 더 좋은가 아니면 유일하고 승리자 알라가 더 좋으냐? 너희들은 그를 버려두고, 자기들과 조상들이 부른 이름들 -우상들에게만 예배하고 있다… 가장 올바른 종교는 바로 이것이다.” 라고 말한다.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과 조상들이 섬겼던 알라의 동료신들을 비난하고 있으며, 이슬람이 가장 좋은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 종교가 가장 올바른 이유는 알라에게 다른 동료가 없는 유일한 신이기 때문이며, 정통 아브라함의 종교를 따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함맏과 이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아랍 조상들로부터 참된 이슬람 종교를 물려 받았다는 증거가 꾸란에는 전혀 없다. 무함맏에게 있어서 아랍인들은 조상 대대로 우상들을 섬긴 불신자들이었다. 무함맏이 자신의 선지자직의 정통성과 권위를 찾는 것은 자신의 조상들이 섬겼던 종교도 아니고, 결코 자신의 조상도 아닌 아브라함의 종교에 언제나 호소한다. 심지어 무함맏은 아브라함을 자기의 조상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한다. 무함맏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모세와 노아와 예수 등 모든 선지자들이 이슬람 종교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라고 선동한다. 수라 42:13 알라가 노아에게 명령한 것과 같은 동일한 종교를 너희를 위해 제정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종교를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즉 무함맏은 알라의 종교에 있어서 꾸준히 머물러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분할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한결같이 무함맏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무함맏은 자신이 과거의 다른 선지자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자라고 주장한다.수라 46:9 “(오무함맏) 말하라! ‘나는 선지자들 중에서 새롭운 자도, 첫번째도 아니다. (즉 나보다 이전에도 알라의 선지자들이 지나갔다. 왜 너희들은 나의 선지자들에게 놀라서 부정하려고 하느냐?) 나는(미래에) 자신에게도 너희들에게도 무엇이 이루어질지를 모른다. 나는 단지 자신에게 계시된 것을 따르는 자이다. 나는 단지 분명한 경고자이다.” 그러나 무함맏은 자기 자신이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하여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한 것, 즉 전혀 특별한 점이 없고, 첫번째도 아닐만큼 뛰어난 점도 없다고 소개한 것과는 달리, 신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을 뒤엎어 놓을 만큼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를 존재가 되었다. 더군다나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자가 선지자들 중의 가장 위대한 지위를 찬탈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무함맏은 자신이 성경에 자신이 예언되어 있으며, 자신은 성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있는 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함맏은 선지자들과 예언이 중단되었던 역사를 이어주는 자라고 선포한다. 수라 5:19“오 친근한 책이여, 자 우리의 사도(무함맏)이 전에 선지자들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우리에게 어떤(천국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와 어떤(지옥의 고통을) 두렵게 하는 자가 오지 않았다.’ 라고 너희가 말하기 때문에 너희들에게(종교 법령들을) 선포하려고 왔다. 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와(지옥을) 두렵게 하는 자인 자가 왔다.” 본문은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대한 무함맏의 무지를 드러낸다. 신구약 성경이 종결된 이후 상당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떠한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무함맏은 바로 이러한 세월을 간격을 이어주는 최종적인 선지자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무함맏이 문맹이 아니었고, 계시록을 한 번만이라도 읽었다면, 이미 오래 전 성경에 선포된 무서운 저주를 자기에게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 22:18-19“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19:19-21“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탄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 도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그러나 이러한 무함맏의 제안이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처음부터 한결같이 거절되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이다. 수라 3:65-71에서는 유대-기독교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했을 때, 그가 상당히 실망했음을 보여준다. 수라 3:65 “오 친근한 책, 왜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는 우리의 종교에 있었다 라고 하여) 논쟁하느냐! 결국엔 타우랏도, 인질도 그 후에 주어진 것이 분명하지 않으냐? 도대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들이 아는 것들 (모세와 예수 선지자들에)대하여 논쟁하고 있다. 이제 무엇 때문에 너희가 모르는 것 (아브라함이 어떤 종교에 있었는지)에 대하여 논쟁하려 하느냐? 알라는 알고 있고, 너희는 모른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오히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경우에 (알라에게) 복종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상숭배자들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더 가까이 있는 자는 그(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자 이 선지자 (무함맏)과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알라는 겸손한 자들의 친구이다. 친근한 책 중 한 교파는 너희들을 (너희 참 종교로부터) 혼동시키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느끼지 못할 때에 단지 자기들만 혼동시킬 뿐이다. 오 친근한 책이여, 무엇 때문에 너희 자신들이 증거자 되어 알라의 (타우랏에 있는 무함맏이 참 선지자인 것에 대한) 구절들을 부정하느냐? 오 친근한 책이여, 무엇 때문에 너희 자신들이 알면서도 진리를 거짓과 혼합시키고 진리를 가두느냐?”

 

위의 본문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무함맏의 주장으로, 유대인들이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충분히 ‘미친 사람이 지껄이는 헛소리이다’라고 말했을 법한 말이었다.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은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인데, 아브라함이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 즉 무슬림이었다고 억지를 부린다.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장 가까이서 추종하는 자는 무함맏과 무슬림들이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무함맏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짓 선지자로 판단하고 배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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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슬람

 

 

기독교와 이슬람은 그 뿌리가 같은가?

 

전혀 다릅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근본부터가 다른 종교 입니다.

 

무슬림의 홍보자료에 의하면 "기독교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는 근본적으로 같다"라고 말합니다.

전적으로 거짓입니다.

 

대한민국 많은 사람이 '이슬람과 기독교는 엄연히 다르지만, 그 뿌리는 같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무함마드가 정치적 권력과 군사적 힘이 미비하던 초기에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했던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경전인 꾸란에서도 알라가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나와 있고 이슬람에서 유포하는 홍보용 자료에는 언제나 알라와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라고 주장하며 접근하고 있으므로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브라함의 종교'입니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이슬람의 신 '알라(Allah)'는 아브라함이 섬기던 그 하나님이며 기독교와 유대인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기독교와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종교를 타락시키고 경전으로 내려 중 ~~~

성경을 변질 시켰기 때문에 무함마드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경전 원본을 보내어 아브라함 종교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이슬람이다. 라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인물과 꾸란의 인물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아브라함(Abraham)과 꾸란의 이브라힘(Ibrahim)이 과연 같은 인물일까요?

 

우선 성경의 아브라함은 아버지 이름 데라(창11:31~32)인데 꾸란의 이브라힘의 아버지 이름은 아자르(Azra)입니다.

 

아버지가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

이었는데 99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 바꾸어 주신 것 입니다.(창17:5)

 

꾸란의 이브라힘은 젊었을 때부터 이브라힘 이라고 불리던 사람입니다.

성경의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의 손에 의하여 불속에 던져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이방인들이 그를 불속에 던진 것을 알라께서 구해 주셨다고 합니다(꾸란21:68~69)

 

꾸란의 여러 주석들에 보면 그를 태워 죽이려던 이방인은 앗수르 왕 니므롯의 백성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간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메카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Kaaba)신전을 건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꾸란2:125~127)

 

이슬람의 제2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이브라힘은

이스마엘에게 이혼을 명령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전혀 이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결국 내용상의 차이는 성경의 아브라함(Abraham)과 꾸란의 이브라힘(Ibrahim)은 동일인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글의 출처는 이슬람국가에서 나고 자란

하워드신 목사님의 글을 옮긴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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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Islam)이란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무슬림 (복종자란 의미로 이슬람교도를 통칭)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2. 알라(Allah)는 무슨 의미인가? 

 
유일한 창조자라는 뜻이며 아랍어의 중성(中性) 보통명사. ‘알라신(神)’이라고 부르면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3. 이슬람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역사적 실체로서 이슬람의 원년(元年)은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해(헤지라) 신앙공동체를 만든 622년이다. 무하마드는 610년에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4.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이슬람은 어떤가? 
평화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어원인 '살라미(salami)'는 평화란 뜻이다. 
  
5. 무하마드는 어떤 인물인가? 
서기 570년쯤 아라비아의 꾸라이쉬족(族)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6세 때 죽었다. 삼촌 집에서 양육됐고 25세 때 40세 부자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40세부터 알라의 계시를 받아 포교활동을 하다가 632년에 숨졌다. 
  
6. 이슬람의 예언자(預言者)란 무슨 뜻인가? 
알라의 말씀을 인간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에선 모두 12만4000명의 예언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28명이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의 성경(聖經) 인물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무하마드가 주요 예언자다. 
  
7. 헤지라(Hijra)란 어떤 것인가? 
무하마드가 지역 부족들의 탄압을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추종자 70여명을 데리고 622년에 이주한 사건으로 ‘성스러운 이주’를 뜻한다. 
  
8. 무하마드는 메디나에서 움마(Ummah)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무하마드가 신도들을 모아 만든 형제애적인 신앙공동체. 그후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신도들의 공동체란 의미로 움마란 단어가 사용됐다. 
  
9. 무하마드는 부인을 몇 명이나 두었나?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4명 이상은 두지 않았다. 코란의 규칙을 지킨 것이었다. 
  
10. 무하마드의 후계자라는 칼리프는 어떻게 선출되었나? 
무하마드는 아들이 없었고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후계자는 신도들이 협의해 투표로 선출했다. 제1대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였다. 
  
11. 코란은 언제 완성됐으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무하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은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모아 644~656년에 완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114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을 수라라고 한다. 알라가 1인칭으로 말하는 형식을 취했다. 
  
12. 코란은 왜 아랍어로만 읽어야 한다고 하는가? 
알라가 내려준 언어인 아랍어만이 가장 아름답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13. 하디스(Hadith)는 무엇인가? 
무하마드의 언행 및 전승을 기록한 책으로 종교예식과 일상생활 세칙을 모두 담고 있다. 
  
14. 술탄은 무엇인가? 
칼리프의 위임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 내지 전역을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자의 칭호. 
  
15. 이슬람은 특히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보나? 
이슬람은 예수(이사라고 부름)가 훌륭한 예언자지만 신성(神性)은 없으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본다.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16. 교리적으로 보아 이슬람은 유태교 및 기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하마드는 초기 시리아와 아라비아 쪽으로 흘러나온 기독교 이단인 단성론(單性論)과 유태교 이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쪽 교리를 채택했다. 상당수 주변부 교리나 풍습도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가져간 것으로 본다. 
17.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을 어떻게 보는가? 
사이비 기독교 종파가 아랍 토착종교와 결합하여 발생한 전혀 별개 종교로 본다. '알라'는 아라비아 부족의 월신(月神)에서 유래됐으며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18.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관계는? 
이슬람의 3대 성지(聖地)중 하나. 코란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무하마드가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천상(天上)여행을 다녀왔다는 전설에 따라 성전산에 바위사원이 세워졌다. 
  
19. 이슬람에도 원죄(原罪)의 개념이 있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란 개념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죄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20. 이슬람의 종파에는 어떤 것이 있나? 
수니(Sunni)파가 다수파로 초기 칼리프들을 무하마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한다. 아라비아, 이집트, 터키 등에 널리 퍼져 있다. 시아(Shiite)파는 2대 종파로 암살당한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본다. 이란이 본거지이고 이라크, 시리아 등에 분포한다. 이밖에 타 종교와 혼합한 드루즈파,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 등이 있다. 
  
21. 이슬람의 율법이라는 '샤리아'는 어떤 것인가? 
법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내용이 많아 결혼이나 식사방법, 기도 방법이나 기도 시기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22. 이슬람의 율법은 법을 공개 집행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법 집행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정의를 실천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그렇게 실시해 왔으나 최근에는 종파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23. 이슬람 사회에서 일반법률은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나? 
사우디 아라비아, 수단, 이란 등에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헌법이다. 하지만 터키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이슬람 제국에서는 샤리아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폐지하고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법 제도를 채택했다. 
  
24. 이슬람교도(무슬림)들에게는 '육신(六信)'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인가?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알라를 믿는다. 예언자들을 믿는다. 거룩한 책들(코란 포함)을 믿는다. 천사들을 믿는다. 심판과 부활을 믿는다. 알라의 법칙과 정명론(定命論)을 믿는다. 
  
25. 무슬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5가지 기본적인 의무는 무엇인가?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신앙고백(샤하다), 하루 다섯번의 기도(사라트), 구제(자카트), 메카 순례(하지), 라마단 금식(禁食)(사움)이다. 시아파는 여기에 성전(聖戰)(지하드)을 추가한다. 
  
26.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할 때 메카를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하마드는 처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고 했다가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구약도 제대로 모른다'며 자신을 비웃자 630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기도 방향으로 정했다. 
  
27. 예배는 꼭 정해진 시간에 보아야 하나? 
태양의 위치에 따르도록 돼 있기에 정확한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28. 모스크는 어떤 곳인가? 
아랍어로 '엎드리는 곳'이란 뜻의 마스지드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의 예배당을 일컫는다. 
  
29.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몸을 씻는 이유는? 
예배 전 몸을 씻는 것을 '우두(wudu)'라 하는데, 알라에 대한 예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코란에도 '청결하지 않은 몸으로 행하는 예배는 받지 않겠다'고 되어 있다. 
  
30. 모스크에 딸려 있는 미나렛의 역할은? 
예배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는 역할(아잔ㆍadhan)을 하며, 이를 행하는 사람은 '무에진(muezzin)'이라 한다. 
  
31. 무에진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나? 
크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32. 모스크 안에서도 남녀는 따로 앉아 예배를 보나? 
남녀가 따로 앉되 남자가 앞에 앉는다. 좁은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불편한 점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33. 이슬람에는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고 하는데,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오마르를 '물라'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신과 인간 사이에 중매자를 두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중매자만 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슬람에선 성직자가 없다. 물라는 종교지도자, 율법학자란 뜻이다. 
  
34. 이슬람을 흔히 정교(政敎)일치 종교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코란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 전반을 망라하기에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는다. 성과 속을 구별할 경우 정신생활이 물질생활에 종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5. 이슬람에서 모든 사람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슬람은 지위나, 명성, 부와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 알라와의 만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36. 이슬람 사회의 '슈라(shura)'는 무엇인가? 
'협의'를 뜻하는 말. 무하마드도 무슨 결정을 할 때는 슈라를 거쳤다. 지금도 쿠웨이트, 아프간 등 이슬람국가 중에는 슈라를 국회와 같은 기구로 활용하고 있다. 
  
37.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라사)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고등교육 시설을 말하나 전통적으로는 '울라마(율법사)' 양성이 주목적이다. 
  
38. 이슬람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유는? 
알라가 유일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 금지이기 때문이다. 
  
39.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보는데 왜 그런가? 
이슬람에선 금요일에 태양이 떠올랐고 아담이 창조됐으며 심판이 일어나기 때문에 금요일을 가장 훌륭한 날로 여긴다. 
  
40.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기독교가 활동하고 있나? 
일부 아랍지역에서 극소수 기독교 신도가 있으나 계속되는 탄압과 사회적 소외로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저 대개 단성론자나 정교회(正敎會) 계통으로 서방 기독교와는 차이가 난다. 
  
41. 무슬림들이 많이 쓰는 '인샬라'는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따라'라는 아랍어로 무슬림들이 일상 생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한다. 
  
42. 이슬람에선 하루를 무엇으로 기준하여 계산하는가? 
유태인과 같이 하루 해가 지면 새로운 날로 간주하고 아랍쪽도 그런 관행이 있어 결혼식 등 중요 행사를 밤에 열곤 했지만 지금은 대체로 하루 계산이 서구와 비슷해졌다. 
  
43. 라마단은 무엇이고 왜 단식(斷食)을 규정하고 있나?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은 달(대략 음력 9월경)을 라마단으로 정하고 단식을 한다. 초기엔 24시간이었으나 10일로, 다시 한달로 연장됐다. 올해 라마단은 11월 17일에 시작한다. 단식으로 지옥의 문이 닫히고 천국의 문이 열린다며 속죄의 의미를 강조한다. 
  
44.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교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된다. 부부관계를 해도 안되며 남을 비방하는 말을 삼가야 하고 향수 냄새를 맡거나 화를 내서도 안된다. 다만 13세 미만의 어린이, 노약자들, 여행자, 생리 중인 여자 등은 단식이 면제된다. 
  
45. 무슬림들은 반드시 메카순례를 해야만 하나? 
모든 무슬림들은 자유로운 성인으로 온전하고 건강하며 적당한 재산이 있다면, 그리고 순례하는 동안 가족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일생에 한번 메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외이면 면제가 되기도 하고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다. 기업체에는 메카 순례를 위해 회사가 돈을 적립해주기도 한다. 
  
46. 메카의 카바 신전이란 어떤 곳인가? 
원래 아라비아 다신교(多神敎)의 우상숭배 장소였으나 무하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알라에게 예배드린 곳'이라며 이곳을 성지(聖地)로 삼았다. 카바란 입방체란 뜻. 
  
47. 성지순례시 메카에서 하는 의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 
보통 카바 신전을 7바퀴 돌고 내부의 검은 돌에 키스한 뒤 '잠잠'이란 우물 주변에 있는 99개 예언자들 무덤과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블리스(사탄)라고 하는 돌기둥에 돌을 던지며 코란 구절을 외운다. 또 메카에서 25㎞ 떨어진 아라파트 언덕을 오르고 6㎞ 떨어진 미나에서 양과 낙타로 희생제사를 드린다. 
  
48. 이스마엘과 이삭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서로 어떤 관계인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자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 나중에 본처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다.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은 쫓겨나‘아랍인의 조상’이 됐고, 적자(嫡子)인 이삭은 유태인의 조상이 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49. 이슬람교도들은 왜 턱수염과 구렛나루를 기르나? 
예언자 무하마드가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하여 그에 따르려는 행동인데, 여기에 유목민 고유의 연장자 우대 전통과 어울려 더욱 확산됐다. 
  
50. 이슬람권 국가의 여성들이 집 밖에 나설 때마다 '차도르'(머리를 덮어싸는 보자기로 이란에서는 ‘히잡’이라고 함)를 쓰는 이유는? 
남녀가 상대의 육체(겉모습)만 보고 인격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남자의 경우도 맨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공중목욕탕에서도 꼭 팬티를 입는다. 
  
51. 흔히 성전(聖戰)으로 일컬어지는 지하드(jihad)는 무엇을 의미하나. 
지하드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항거 등 자기 방어의 목적을 갖고 있다. 또 내부적으로도 부패에 찌든 사회,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지키는 일도 이에 포함된다. 지하드가 악용 내지 남용될 소지가 있으나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52. 아프간 여성들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부르카'는 어떻게 생겼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다. 내놓는 것은 손 뿐인데 그것마저 망사로 쳐 외부에선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다. 
  
53. 이슬람 지역 여성들은 어릴 때 할례를 해야 한다는데, 그 이유는? 
할례란 성기의 일부를 도려내는 작업으로 그걸 하면 성에 대한 욕구가 절제된다고 한다. 아랍이나 아프리카의 토착 풍습.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성에게만 요구한다는 차원에선 여성 차별이라 말할 수 있다. 
  
54. 이슬람 사회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나? 
여성이 혼전에 순결을 잃는다거나 결혼 후에 간통을 하게 되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 해서 그 아버지나 오빠가 당사자를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명예살인이라 부른다. 따라서 명예를 더럽힌 남자도 이 사회에선 발을 붙이지 못한다. 
  
55. 이슬람 지역 여성들이 손발을 치장하는 헤나(henna)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헤나란 꽃가루와 나뭇가루, 식물성 기름 등을 한데 섞어 만든 검은 색 계통의 안료를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아랍, 인도 여성들은 손등과 손바닥, 발등에 식물의 줄기나 잎, 나비 등을 예쁘게 그려 치장한다. 남성의 시선을 끌기 위해생겨난 풍습. 
  
56. 아랍지역에도 찻집이 있나? 
물론 있다. 서양의 '오픈 카페'처럼 주로 길거리에 있는데, 남성들만 출입한다. 여기서 물담배, 체스 등을 즐긴다. 
  
57. 아랍과 이슬람, 중동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아랍은 인종, 언어 등 문화적인 요소를 일컫고, 이슬람은 알라를 믿는 종교를 말하며, 중동은 지리적 개념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칭한다. 
  
58. 중동 평화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은 어디인가? 
현재 이스라엘 영토 및 점령지역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합친 지역. 
  
59.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종종 벌어지는 인티파다(Intifada)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에 저항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되찾기 위해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이는 무차별 과격 무장 봉기를 뜻한다. 
  
60. 아프간의 실질적인 정부인 탈레반은 어떤 조직인가? 
구도자란 뜻. 이슬람학교에서 코란을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1994년 10월 동남부 칸다하르의 이슬람학교 학생운동가들이 세웠다. 96년 9월 이슬람 조직간의 내전에서 승리, 국토의 90%를 장악했다. 종파간 자치형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지만 UN은 합법적인 정부로 간주하지 않는다. 
  
61. 이슬람의 교리에 폭력을 인정하거나 찬미하는 부분이 있나? 
공식적으로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리주의자들은 '지하드(聖戰)'를 언급한 코란 구절들을 자주 동원한다. 하디스에는 지하드가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데 첫째 순수한 포교활동이며 둘째 신앙의 방어로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밝혔다. 
  
62. 이슬람 부흥운동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정신적 쇠퇴를 비판하고 무하마드의 '움마 정신', 즉 순수 이슬람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반서구적, 반체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63.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현재의 사우디 왕국을 세운 와하브의 와하비주의(主義)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다. 사우디는 친(親)서방적이지만 국민들은 와하비주의에 기반한 엄숙주의, 배타주의, 그리고 혁신을 반대하는 극도의 보수주의를 지킨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샤리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이란이나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이 사례가 될 수 있다. 
  
64. 원리주의자들은 왜 테러를 일삼고, 서구에 증오감을 갖고 있나? 
서구의 물질주의가 이슬람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서구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히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이를 분쇄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테러리즘이 증폭됐다. 
  
65. 이슬람교에서는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을 용인하고 있는가? 
테러리스트로 이슬람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반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하드와 관련해 그들이 공개적 또는 잠재적으로 존경받기도 한다. 
  
66. 이란에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부패한 친미(親美) 팔레비 정권이 이란을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의 전통과 정신이 훼손되자 호메이니를 비롯한 물라(율법학자)들이 왕정을 끈질기게 비판, 왕정 타도로 이어졌다. 
  
67. 이슬람권 '반미(反美)'의 뿌리는? 
터키의 경우 근대화와 세속화에 어느 정도 성공해 세계체제에 순조롭게 편입했다. 하지만 나머지 중동 국가들은 이교도(異敎徒) 국가인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페르시아만 전쟁 등으로 반미운동이 확산됐다. 
  
68. 서구의 이슬람공포증은?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은 유럽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다는 게 정설. 강한 군대를 몰고 다니며 ‘코란이냐 칼이냐’를 외치는 이슬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적대의식과 두려움이 생겨났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1세기 십자군이 일어났다. 
  
69. 이슬람 무장단체에는 어느 지역에 어떤 것이 있나.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이 본격적인 불을 지폈다. 현재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집트의 자마아트 이슬라미야, 알제리의 무장무슬림그룹,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 등이 있다. 
  
70. 이슬람에서 음주와 돼지고기의 식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음주는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이집트를 제외한 이슬람 국가에서 금지된다. 돼지고기는 불결한 음식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된다. 
  
71. 양(羊)은 어떤 방식으로 잡는가? 
이슬람법에 따라서 희생제를 맡는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말한 뒤 단숨에 양의 목을 자른다. 피는 동맥을 통해 완전히 뺀 다음 고기를 도려낸다. 
  
72. 이슬람권에서 술을 마실수 있나? 
음주는 코란에선 우상숭배·도박과 함께 금지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하나다. 마실 수도 없고 제조할 수도 없다. 
  
73. 이슬람에서는 남자에게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데,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인가? 왜 여성은 4명의 남편을 둘 수 없나? 
코란의 규정에 의해 경제적 능력과 부인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에 한해서만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복수의 남편을 거느릴 수 없다. 여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보아 그랬을 것이다. 
  
74.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신부가 될 여자에게 마흘이라는 것을 지불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신랑이 결혼과 함께 신부집에 지불하는 돈으로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증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돈은 이혼을 하더라도 여성의 몫이다. 
  
75. 코란에서 별도로 금지하고 있는 결혼도 있나? 
어머니, 여형제,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이모, 고모, 형제 자매의 여아, 유모,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여자, 장모 등과는 결혼할 수 없다. 
  
76. 이슬람사회에서도 이혼은 가능한가? 
남자는 언제든지 이혼 청구가 가능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77. 이슬람사회에도 창녀가 있나? 
순결과 가정을 중시하는 이슬람이라 원칙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주 은밀하게 존재한다. 
  
78. 이슬람의 남녀 분리 사회생활은? 
원칙적으로 남녀의 공간이 분리돼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물론 집안에서도 그러하다. 사람과의 접촉이 많은 직종은 그래서 남자들이 한다. 그러나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그러한 전통이 허물어지고 있다. 
  
79. 왜 이슬람 국가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가? 
이슬람만의 습관은 아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러하다. 손은 남의 것과 섞일 염려가 없어 가장 위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0. 왜 무슬림들은 오른손을 신성시하나? 
하늘에서 알라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높은 곳이며, 순교하면 바로 그 오른쪽에 앉을 수 있다고 믿는다. 
  
81. 아랍인들의 주식은 무엇인가? 
'쿠브즈'라 부르는 우리의 빈대떡 크기 만한 식빵이다. 
  
82. 이슬람 지역에도 대중목욕탕이 있나? 
큰 도시의 시장에는 반드시 '함맘(hammam)'이라 부르는 대중목욕탕이 있다. 둥근 천장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바닥은 대리석이다. 그러나 욕조는 없다. 물을 수조에서 받아 씻을 뿐인데, 때를 벗기지 않는다. 팬티 차림으로 목욕한다. 
  
83. 이슬람 전통 도시를 흔히 메디나(medina)라 부르는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모스크와 마드라사(종교학교), 함맘(대중목욕탕), 수크(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길가의 집은 대개 가게를 겸한다. 메디나의 외곽은 외부 공격에 대비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84. 이슬람 지역의 시장은 어떠한가? 
수크(souq, 페르시아나 터키에선 바자)라고 하는데, 없는 게 없다. 매력은 흥정에 있다.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매우 인간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85. 유태인, 화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상인'이라고 하는 아랍인들의 상술은 어떠한가? 
돈을 버는 일에 종사하나 돈버는 데만 급급하지 않는다. 마케팅에 열을 올리지 않으며 대체로 향락산업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86. 이슬람교는 초기부터 포교가 빨랐다. 그 비결은? 
우선 이들에 맞설 만한 세력이 없었고 단순한 교리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데다 종교적 열정이 매우 강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87. 아라베스크 문양이란 어떤 것인가? 
살아 있는 것들은 그리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식물의 형상, 기하학적 도형, 코란의 서체(書體) 등을 이용하여 문양을 그렸는데 이를 아라베스크 문양이라 부른다. 
  
88. 모스크가 대체로 돔 구조로 되어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반구형(半球形)의 돔은 천상의 하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알라에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89. 이슬람교도들은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나? 
아이가 태어난 뒤 7일째 되는 날에 일가 친지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낭송한 다음 축하연을 베푼다. 이름은 맨 앞쪽이 그 아이 이름이고 뒤로 갈수록 먼 조상의 이름이나, 이름의 길이는 가문에 따라 다르다. 
  
90. 이슬람의 장례는 어떠한가? 
유족들은 사자를 위해 매장하나 대개의 경우 묘는 작게 만든다. 장례식은 모스크에서 치른다. 
  
91. 이슬람에선 3개의 시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 
그들은 원래 헤지라 역(曆)을 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선 서력을 무시할 수 없게 돼 두 개의 시계가 필요하다. 여기에 일출과 일몰에 의해 시간이 결정되는 예배 때문에 또하나가 필요하다. 
  
92.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나? 
금요일은 이들에겐 안식일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게문도 닫는다. 모스크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남는 시간은 코란을 읽으며 하루를 지낸다. 
  
93. 물에 대한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이 있나? 
물은 알라가 준 것으로 개인이 독점할 수 없으며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청결하게 이용해야 한다. 도시의 길거리에 설치된 물독의 물도 절대 헛되이 쓰지 않는다. 
  
94.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세계 180여 개국에 12억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국가 수만도 55개나 된다. 
  
95. 현재 서구에서도 이슬람은 포교되고 있는가? 
아랍 및 아프리카인들의 유럽 또는 미국으로의 이주에 따라 서구에서도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인구 5800만의 프랑스의 경우, 개신교도가 70만명인 데 비해 이슬람교도는 300만명이나 된다. 
  
96. 한국과 이슬람 지역은 언제 어떻게 교류하기 시작했나? 
이슬람과 우리와의 교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때의 아랍측 기록에 신라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데다 서역인이라 부르는 석상이 신라인들에 의해 세워지기도 했다. 교역에 따른 인적 교류인 것으로 보인다. 
  
97. 현재 한국의 이슬람교 사원과 신도는 어느 정도인가. 언제 들어왔나? 
6ㆍ25 때 터키군의 파병으로 이슬람이 우리에게 다시 알려졌는데, 최초의 모스크는 오일쇼크 때인 1976년 서울 이태원에 세워졌다. 현재는 전국 5곳에 사원이 있으며, 신도는 주로 이슬람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근로자들이다. 
  
98. 현재 한국에서 이슬람교 포교활동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 
적극적인 포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이슬람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9. 한국에서도 이슬람 또는 아랍음식을 맛볼 수 있나? 
서울 이태원동의 해밀튼호텔과 중앙성원 주위에서 아랍·인도음식을 즐길 수 있다. 차와 향료 등도 구할 수 있다. 
  
100. 덕수 장씨가 아랍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13세기 원나라 제국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던 아랍인 삼가(三哥)가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한국사회에 동화되었는데, 덕수 장(張)씨가 바로 그 후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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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5가지 종교적 의무 준수

이슬람의 다섯 기둥

모슬렘의 기본적인 의무는 다섯개의 기둥으로 되어있다.

1.신앙고백(Shahada)

매일 기도할 때만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하메드는 하나님의 사도이시다"

(There is no God but God, and Muhammed is the Apostle of God.)를 반복하여 암송한다.

2.기도의식(Salat)

하루에 메카를 향해 다섯번씩 기도를 한다.

①FAIR : 동틀녁부터 해 뜨기 전,
②ZUHR : 낮12시부터 오후,
③ASR : 늦은 오후부터 해 지기 바로 전,
④MAGHIB : 해 진후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⑤ISHA : 어두워진 후부터 자정까지.

3.자선의 의무(Zakat)

모슬렘은 자신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매년 수입의 1%를 구제에 사용해야 한다. 또한 이것은 불행을 만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

4.라마단의 금식(Sawm)

이슬람 음력 9월(Ramadan) 한달동안 해 뜰때부터 해 질때까지 모슬렘은 음식, 음료, 담배, 성관계, 욕설, 화내는 것을 금지한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영적으로 보다 강하게 만든다고 한다.

5.성지순례(Hajj)

모든 모슬렘은 병들어 있지 않는 한 반듯이 평생에 한번은 성지인 ''메카''를 방문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적인 신분이나 빈부에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동인한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것은 거룩을 향한 이슬람의 종교활동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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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경 아라비아반도는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세력다툼으로 전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파르티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와 파르티아,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대신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전쟁상태에 있었는데 이들 세력들 사이에서 아라비아 사막지대에 거주하던 아랍부족들은 양측간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로마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별볼일 없는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곳에는 로마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여전히 미개한 풍습들이 남아있었으며, 가증스러운 수백개의 우상을 세워놓고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메카는 많은 오아시스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큰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570년경에 예언자 무함마드(محمد = 마호메트)가 태어납니다. 그는 어린시절에 고아가되어 상인이었던 삼촌의 손으로 자라게 되는데, 이후 삼촌의 직업을 물려받아 상인이 된 그는 26세때 가게주인인 15세 연상의 카디자와 결혼해서 가족을 이룹니다. 그러다 40세 무렵 그는 영적인 명상을 위해 메카 외곽의 히라 동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번쩍거리는 광채와 함께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그로부터 신의 계시를 받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완전 딴사람이 되어 메카의 시민들에게 예언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미 돈맛을 볼때로 본 메카 귀족들은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박해에 이기다못한 그들은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피신합니다. 이를 히지라 (هجرة) 라고 부르며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으로 삼습니다.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하느님(아랍어: 알라)이 보낸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그의 사상이나 이슬람 경전 꾸란(القرآن)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나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일치합니다.

 

꾸란의 첫장인 개경장(Al-Fatiha - الفاتحة). 개경장에는 이슬람신앙의 핵심이 들어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 그 분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며 /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며 당신께만 구원을 청하노니 / 저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하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가 걷지 않은 길이나이다. /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포교활동과 부족간의 분쟁조절, 그리스도교국인 에티오피아왕의 보호를 통해 세력을 이룹니다. 그는 메디나의 대표자가 되었으며 이윽고 메카와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624년 5월 17일, 메디나군과 메카군은 바드르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غزوة بدر) 이 전투에서 메카군은 무함마드 군의 일방적인 돌격에 큰 피해를 입어 전승에 의하면 '70명이 전사하고, 70명이 사로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전합니다. - 이슬람학자들은 이는 메카 총전력의 15~16%정도로 추측합니다 - 바드르전투는 꾸란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대가 한심하리만큼 적은 병력을 갖고 있었을때 그대를 바드르에서 도왔다. 그 분은 그대가 감사해하는 것을 보고 그대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대가 믿음에 대해 말하였던것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 3000명의 천사를 보내어 그대들을 도와줘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그대가 굳건하게 믿음을 갖고, 올바르게 행한다면 적이 그대를 향해 빠른속도로 밀려 올지라도, 그대의 주님은 무시무시한 5000명의 천사를 보내어 그대를 도울것이다." - 이므란(가족장) 3:123~125

 

무함마드 시대 아랍인들은 동시대 비잔티움인이나 페르시아인에 비해 지극히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위 그림은 무함마드시대 무슬림 전사들의 모습을 고증한 그림으로, 왼쪽부터 지휘관, 복합궁을 들고 있는 아랍인 궁사, 무슬림에게 우호적인 베두인 족장의 모습입니다. 이슬람하면 떠오르는 언월도는 아직 없었고, 체인메일을 착용한 경우가 일부 보이지만 돈이 많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전사들만 국한되었습니다. 흥미있는 점은 그림 뒤의 낙타안장에 가죽으로 된 등자가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아랍인들에게 등자가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썩어서 남아있지 않는 가죽등자는 사용했을 법 합니다.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뛰어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동시에 많은 부족들과 연합한 무함마드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630년 무함마드의 군대는 메카를 정복하고, 까바 신전에 모셔져 있던 수백개의 우상을 모조리 때려부수고 난 다음, "하느님 외의 신은 없다!" 를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세계사의 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새로운 문화권의 탄생을 선언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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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년,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하고 얼마 되지 않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이때 무슬림공동체는 아라비아반도 전체에 확대되어 있었지만 구심점을 잃은 무슬림공동체는 곧 분열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인 아부 바크르(573 ~ 634.8.23 - ابو بكر الصديق)는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합니다. "무함마드만이 사도는 아니며. 많은 사도들이 그 이전에 존재했다. 만일 그가 사망하거나 살해당했다면, 그대들은 발길을 돌려버릴 것인가? 누구든 그의 발꿈치를 돌린다 한들 하느님께 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감사해하는 이에게는 그분께서 즉시 상을 내려 보상하시리라." - 이므람 3:144

 

17세기에 필사된 화려한 장식을 한 <코란>의 모습. 코란은 아부 바크르의 시대에 최초로 수집되기 시작해서 우스만 시대에 완성되었는데, 이시기의 코란 필사본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 봤을때 전혀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후 이슬람공동체는 그를 '공동체의 봉사자'(خليفة 할리파=칼리프)로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다시 단결하기 시작합니다. 아부 바크르 사후 이슬람공동체는 오마르, 우스만, 알리까지 3명의 할리파를 선출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일컫어 '정통칼리프 시대'(632~661 - الخلفاء الراشدون)라고 부릅니다. 당시 중동의 구도를 비유하면, 두마리의 사자와 호랑이가 -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 피터지게 싸우다가 둘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데 갑자기 웬 하이애나가 - 이슬람제국 - 나타나 기지개 켜고 일어나는 형국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이애나는 사자와 호랑이를 모두 건드려 손쉽게 승리를 거둡니다. 위의 그림은 정통 칼리프시대의 이슬람군대의 모습으로, 1번 인물은 '후원자,지지자'라는 의미의 안사르 전사(الأنصار)이고, 2번 인물은 무슬림군대와 싸우던 페르시아 기마궁사의 모습인데, 그의 말에는 목재 등자가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물은 없지만, 등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입니다. 3번 인물은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족 전사로 갑옷은 입지 않고 있으며 창과 투석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9세기경 필사본에 등장하는 비잔티움군대와 이슬람군대의 모습

 

아부 바크르가 이끄는 이슬람군대는 동시대 비잔티움군이나 페르시아군과 비교해 보았을때, 지극히 빈약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군대는 거의 대부분이 말과 낙타를 탐으로써 그들의 적이 가지고 있지 않은 뛰어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비잔티움군이나 페르시아군이나 사막지형에는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양측군대가 대부분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쪽의 방어는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아부 바크르의 군대는 이라크 남부를 통해 먼저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고, 634년 유능한 족장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592~642 - خالد بن الوليد)의 군대가 비잔티움,페르시아 연합군을 피라즈에서 대파함에 따라 이라크 정복을 완료합니다. - 오마르의 통치시기인 65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병합하기에 이릅니다. - 이윽고 말머리를 비잔티움제국으로 돌려 634년 9월에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637년 10월에는 알레포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시리아 전체를 정복한 뒤, 이어서 654년에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까지 진출하기에 이릅니다.

 

이슬람제국의 무한확장 - 자주색 영역은 무함마드 시대의 영역, 짙은 핑크색 영역은 정통 칼리프시대에 확대된 영토이며 상아색으로 칠해진 영역은 우마이야 왕조시대에 확대된 영역을 나타낸다.

 

세례자 요한의 유골이 안치되어있고, 로마 교황으로써는 최초로 2001년 이슬람사원을 방문한것으로 유명한 시리아 우마이야 모스크의 모습. 715년에 현재 모습으로 완성되었지만 이곳은 그 이전부터 그리스도교도와 무슬림이 함께 공유하던 장소였다.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들이 세운 군사도시 알 푸스타트(الفسطاط)의 유적. 이 도시는 한때 20만명이 거주했던 이집트의 수도였으나 1168년, 십자군의 침공을 우려한 파티마왕조의 재상 샤와르(شاور بن مجير السعدي)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슬람공동체가 그토록 빠른시기에 중동전역에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비잔티움과 페르시아가 긴 소모전으로 국력을 소모한 탓도 있지만, 비잔티움제국의 경우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에 퍼져있던 아리우스파와 콥트교등 단성론파를 이단으로 여기며 탄압한 탓도 있었습니다. 단성론파 그리스도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인정하는 삼위일체론과 예수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비잔티움황제가 예수의 대리인임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의 유일신 사상은 이들 단성론파가 주장하는 바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었으며, 또한 무슬림들은 세금만 꼬박꼬박 내는 한 어떤 종교도 믿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으므로 오히려 그들의 정복을 환영하고 협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초기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띄었던 이슬람공통체는 661년, 무와이야(602~680 -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 가 쿠데타를 일으켜 마지막 정통칼리프 알리를 암살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비잔티움제국과 같은 신성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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