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은 부활주일 전까지 주일을 뺀 40일의 기간으로, 영어로는 Lent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Anglo Saxon語의 봄을 나타내는 lencten or Lenchthen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진다.
초기 기독교 시대인 3세기초까지는 기한을 정하지 않고 2-3일간을 지키다가, AD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40일의 기간을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40일의 기간을 정하는 방법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동방교회는 7주간을 지키면서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하고 성주일 만 포함하여 36일을 지켰고, 서방교회는 6주간을 지키면서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지켰으며, 예루살렘 교회는 9주간을 지키면서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지켰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르러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이 지나고 만월이 된 후 첫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도록 결정하게 됨으로.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에 시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올해는 4월 23일이 부활 주일이며, 3월8일에 사순절이 시작된다.
사순절은 본래 부활주일 전에 세례 받을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기간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6주간 동안의 집중적인 신앙 훈련과 기도, 회개를 통하여 세례 받을 준비를 하였다. 이때 주로 공부하는 내용은 복음서, 사도신경, 주기도문에 대한 것이었고, 교육과 훈련을 위해 성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완전금식을 하면서 사제 앞에서 질문에 답하고 세례를 받았다.
또한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을 회개를 시작하는 날로 정하여, 회개의 상징이 되는 "재(ash)"를 머리에 쓰고, 자루 옷을 입고 다녔으며, 이러한 전통은 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사순절 기간동안 모든 사람들이 금식하도록 되어 있어서, 채소와 생선, 달걀로 하루에 저녁한 끼만을 식사하였고, 부활주일이 지날 때까지는 화려한 음악회도 허용 되지 않았고, 오페라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는 수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기념하여 슬픈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기쁨을 노래하거나 화려한 음악으로 되어있는 '알렐루야'와 하나님의 영광을 장엄하게 노래하는 '대영광송(Gloria)'은 부르지 않았고, 오라토리오, 수난곡, 칸타타 등을 연주하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었다. 이렇게 교회 역사 가운데 나타난 사순절을 지키는 방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먼발치에서 구경군의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가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께서 당하신 고난의 길에 함께 동참한다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들을 살펴보면 그 형식은 조금씩 달라도 사순절을 위한 영적 훈련의 과정들은 그 범주가 대략적으로 정해지는 것을 보게된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내려주셨듯이 이 가정에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 위의 풍성한 것으로 복을 주시사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가나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 집의 흥겨움이 떨어져 갈 무렵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사 가정에 기쁨을 주신 예수님, 이 가정에 주님 오시사 주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주님으로 인하여 언제나 축제같은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 속에서도 성령의 충만을 입과 기뻐하여 노래하고 손뼉을 치고 수갑과 착고가 풀려나는 기적을 경험하였듯이, 이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시사 기쁠 때도 힘겨울 때도, 감옥같은 암담한 현실을 만났을 때도 서로 손잡고 무릎꿇어 기도함으로 기적을 경험하게 하옵소. 기도로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굳건한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들 가정의 규칙과 법은 성경인줄 믿고, 신앙과 행위의 규범인 성경 말씀의 기초 위에 서게 하옵소서.
땅 위에는 수백만의 처녀 총각들이 있지만, 이들에게만 딱 맞는 특별 맞춤 안경을 주시사 오로지 옆에 서 있는 이 사람 이에는 눈에 들지도 맞지도 않을 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담의 고백처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고백하였고, 솔로몬의 고백처럼 나의 비둘기 온전한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뿐, 새벽처럼 밝고 보름달처럼 훤하고 해처럼 눈부시고 깃발을 앞세운 군대처럼 장엄하구나 라는 고백처럼 오늘 신랑의 고백이 가치 있게 하시며, 술람미 여인의 고백처럼 "나의 사랑 멋있어라. 나를 이렇게 황홀하게 하시는 그대,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 그는 레바논처럼 늠름하고 백향목처럼 훤칠하다.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은 사랑스럽다고 노래한 것처럼 항상 이 기쁨 속에서 살게 하옵소서.
일평생동안
이들 가정에 아들딸도 주시사 자손의 번창과 잘됨을 주옵소서. 땅 위에서 높아지게 하시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꾸어줄지언정 빌리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늘에서 상급이 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둘이 하나 되어 교회를 섬기고, 부모님을 봉양하며 형제들과 우애 있는 신앙의 기품이 있는 가정되게 하옵소서.
이들을 지금까지 훌륭한 아들과 딸로 양육해온 양가의 부모님을 위로하시고, 이들의 새 출발이 양가의 부모와 형제들과 친지들 모두에게 큰 기쁨과 보람과 복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이 예식을 집례하시는 목사님께 주의 은혜로 채우시사 예배가 은혜 충만케 하시며, 말씀이 이들의 평생 길동무가 되게 하시고, 이들을 축복함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분께 "왜 사느냐?" 고 물었더니 "혹시나......" 해서 산답니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세상은 여관, 당신은 잠깐 다녀가는 나그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심, 걱정,죄악의 짐을 지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삶이란 너무나 허무합니다. 이것이 당신 인생의 전부라면 얼마나 비참할 것입니까? 그러나 여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믿는 순간이 당신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바로 지금, 하나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당신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당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를 용서받은 당신의 영 혼속에 하나님이 자기의 평강의 영을 부어 주셔서 지금까지 당신이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당신의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합니다. 구원은 항상 당신의 마음속에 불안과 불행감을 일으키고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마귀가 당신 속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언젠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또는 온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될 때, 이것에 상관없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죄중에서 잉태되었고 죄악 중에서 출생했기 때문에(성경시편51:5) 양심대로 살수도 없습니다.사람이 선 한일을 하거나 많은 돈으로 구제사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윤리, 도덕이나 어떤 종교라도 당신의 죄를 해경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마귀의 세력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죄는 하나님에 대한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해 주실 때까지는 당신은 죄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당신이 노력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용서받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사람의 새생명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기독교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지식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약의 성분을 잘 몰라도 약시를 믿고 약을 먹으면 그 약이 약효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간 당신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당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생명의 영이 당신을 변화시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당신의 인생을 의탁하십시오 성장과 성숙은 평생 걸리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 집니다.
당신이 진신으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다음 기도를 따라 읽어 보세요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이 시간부터 예수님을 나의 주인님으로 마음 중심에 영접하니다. 이제부터 나의 삶을 주 예수님께 맡깁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위의 기도를 진심으로 드렸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골로새서1:14) 당신은 이제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한복음1:12) 당신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계시록20:15 당신이 이시간 죽는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과 함께 처형되었던 한 강도는 죽음 직전에 믿고 그 순간 구원 받았습니다. (누가복음23:42)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 후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십시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뜻과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배워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까운 교회에 나가셔서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 교회로 오시면 더욱 친절하게 상담하여 드리고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편집/최용우
오늘은 기도하는 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처음 기도를 하게되면 어려움을 격지요 그리고 대표기도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부터도 처음에 그랬으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포스팅합니다.
대표기도의 방법
가. 기도의 요소
기도하는 데는 따라야 할 여러 절차가 있다. 절차가 필요한 이유는 계획성 있게 준비함으로써 효과적이고 완전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표기도나 공중기도에 있어서는 순서를 마음속에 정해 놓고 메모하여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1) 찬 양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앞서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에서 보면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영광이 서두에 나와 있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기도가 우선 되어야 한다.
(2) 감 사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써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하였다. 간구하기 전에 먼저 감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감사함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3) 회개와 고백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기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확립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지은 죄를 남김없이 회개하는 것이다. 이 회개와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만 정당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4) 간 구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간구이다. 간구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육체의 정욕을 위해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간구는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는 간구가 되어서는 안되며, 이웃과 섬기는 교회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먼저 간구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이다.
(5)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함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신자의 특권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보잘 것 없이 낮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하는 것이다.
(6) 아멘으로 마침 아멘은 "확인하다", "확증하다", "진실로", "확실히" 등의 뜻이 있다.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과 기도의 응답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다는 의미에서 "아멘"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멘"은 기도문의 총 결론으로 쓰여 지는 것이다.
나. 대표기도 할 시 유의사항
기도의 형식에는 묵상기도, 개인기도, 공중기도, 통성기도, 윤번기도, 대화기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형식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 다만 공중기도는 여러 사람을 대표하여 하는 것이므로 다른 기도와는 다른 내용과 형식으료 준비해야 한다.
(1) 공중기도자의 자세 먼저 공중기도의 자세는 언제나 정직하고 바른 자세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 공중 앞에 나선 대표기도자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모든 잡념을 잠재워야 한다. 욕망이나 불만 그 어떤 슬픔과 기쁨도 잠재워야 한다. 공중 앞에 나서기 직전부터 오직 주님만을 그리며 자신의 생활에 얽힌 모든 것을 떨쳐 버려야 한다. 마음 가득히 주님만을 사모하며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한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것이 잡념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지만 눈을 뜨고 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렇게 기도를 해도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모아 정성껏 기도문을 준비해서 드리는 것은 전체 예배자들을 위해 크게 유익할 수도 있다.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공중기도를 할 때에는 예배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나 다 자신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쉬운 말로 기도를 해야 한다. 자신의 개인 사정이나 자기와 친한 그 어떤 사람의 특별한 형편을 함부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특별한 형편이 그 곳에 모인 모든 회중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일 때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이다. 공중기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공중기도는 단 한 번에 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가급적이면 참석자의 모든 형편을 자세히 아는 것이 좋다. 공중기도자의 기도를 들으며 함께 기도하는 회중의 태도 역시 진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대표로 인도하는 기도만 들으며 막연히 따라만 갈 것이 아니라 공중기도자의 기도에 자기가 바라는 진실 된 삶의 의미를 함께 실어서 주께 아뢰어야 한다. 그것이 함께 드리는 진정한 기도이다. 공중기도를 드릴 때 대표기도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이웃과 세상을 온전하게 섬기는 법을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 주의 나라와 그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전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갇힌 자를 해방시켜 주시며 소경의 눈을 여시며 의인을 사랑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며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개인기도이든 공중기도이든 기도의 대상은 분명히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영광을 찬양하고 참회하고 간구하는 우리의 자세는 겸허하고, 솔직해야 할 것이다. 결코 하나님 앞에서 가르치려 들거나 설교투의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자적이거나 철학적인 용어들을 동원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위선의 탈을 벗어야 한다. 웅변가의 그럴듯한 음성을 흉내 내는 것도 듣기에 따라서는 민망스런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구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필요 이상 인용하여 기도할 때가 있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역시 덕스럽지 못하다. 그럴 경우에는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훤히 알고 있는 양 자랑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가 쉽다. 또 한 가지는 대표기도를 하는 사람이 스스로의 슬픔과 고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습관처럼 시종 우는 음성으로 기도를 하는 이가 있는데 정말 난처한 일이다. 왜냐하면 참석한 회중들이 다 슬픔에 빠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는 사업이 잘되어 돈 많이 벌었거나 직장에서 승진 등을 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반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고 경쾌한 소리로 기도를 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참석자들 중에는 괴로움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대표기도를 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회중을 대표해서 기도하는 사람이다. 자기중심으로 하는 기도는 피해야 한다. 교회 전체가 공동으로 해야 할 일과 같이 염려하는 것들에 대하여 기도를 함이 좋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기도를 맡은 사람은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 못지않게 정성을 다하여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흔히 교회 내에서 대표기도를 길게 하면 믿음이 좋아 보이는 것 같고 짧게 하면 믿음이 적은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풍조는 속히 시정이 되어야 한다.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공중대표 기도자의 자세는 어떤 것일까. 먼저 원래의 자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평소에 행동이 민첩하고 말씨가 좀 빠른 편에 속하는 사람이 어느 날 대표기도를 한다고 해서 갑자기 근엄하고 엄숙한 표정에다 굵고 느릿느릿한 말투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다. 기도를 드릴 때는 철저하게 가식적인 요소가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쳐해 있는 그대로의 상황 속에서 꾸밈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괜히 무게나 잡거나 근엄한 체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214장은 흔히 그런 자세를 취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언제나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이 찬송가의 후렴에 나오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는 가사는 바로 우리의 삶의 자세와 기도의 자세를 일깨워 주는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자가 명심해야 할 것 중의 또 하나는 기도를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회중들과 함께 깊은 공감대를 형성해 가야 하는 일이다. 혼자서 하는 개인기도라면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말을 빠르게 하든 느리게 하던 혹은 명상을 하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을 대표한 공중기도를 맡은 자의 입장은 그게 아니다. 회중들과 함께 기도하고 같이 호흡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회중은 그저 듣기만 하고 대표기도자만이 빠른 속도로 청산유수처럼 기도를 한다고 해서 좋은 기도가 될 수는 없다. 전체 회중이 바라고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을 추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고 대표자가 드리는 기도의 한마디 한마디가 전체 회중 속에 용해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찍이 우리에게 모여서 열심으로 기도하기를 촉구하시었다.
(2) 공중기도의 내용
기도의 내용 또한 좀 더 포괄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더욱 더 시야가 넓고 가슴이 뜨거운 것이 좋다. 지나치게 기복적이거나 일방통행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응석받이 어린아이처럼 무조건 달라고만 조르는 경향은 지양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는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지녀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들이 항상 드리는 개인기도는 물론 공중기도 역시 자꾸만 편협해지고 있음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편협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중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갖아야 한다.
① 모든 기도자들의 감사의 마음이 반영되고, ② 모든 기도자들이 용서 받고자 하는 내용이 보편적으로 언급되어야 하며 ③ 간구의 내용이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간략하여야 한다.
즉, 회중의 심중을 헤아리는 기도, 회중이 공감할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하다는 말이다. 또한 개인이나, 우리교회만을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 정의와 평화, 사랑을 위한 기도로 발전되어야 하다. 그러나 이런 기도 역시 한탄이나 불평, 불만의 해소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교회와 개인이 하나님과 의논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역사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응답을 갈망하는 것이어야 하며,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의 기도여야 마땅할 것이다.
(3) 공중기도의 준비
① 먼저 개인기도로 준비한다. ② 각 성도들의 형편과 사정 등을 종합하여 기도를 구상한다. ③ 기도하는 시기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④ 기도문이나 기도의 요약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⑤ 다른 사람이 들으라는 식으로 준비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대상으로 준비하여야 한다. ⑥ 기도 전에 성경 구절을 읽는 것은 설교식이 되어 버림으로 삼가야한다. ⑦ 대표기도자는 적어도 평소에는 못해도 한 주간 정도 새벽기도를 통해 준비해야 한다. ⑧ 기도자는 그 주간 예배와 말씀과 통일성을 이룰 수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⑨ 기도자를 이끄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위탁하여야 한다. ⑩ 공중 기도는 개인기도가 아님을 명심하고 공중의 대표로서 그들의 마음으로 예배자로 기도한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Catch for us the foxes,the little foxes that ruin the vineyards, our vineyards that are in bloom.”(Song of Songs 2:15)
여행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슴을 뛰게 하는 설렘과 즐거움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느 순간에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여행지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는 기쁨과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게으름, 안일함, 나태함, 자만심, 음란, 중독 등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와 같은 것들입니다. 방심을 멀리하고 항상 깨어 기도하십시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마태복음 19장 1절 - 2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하늘나라 말씀을 가르쳐 깨닫게 하고 병자들을 고치시니 그 소식이 전파되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가 따르고 큰 무리가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큰 무리 중엔 여러 종류의 생각과 소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는데, 1. 예수님으로부터 병 나음을 받았으니 고마워서 병 나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 예수님의 일을 돕는 사람. 2. 병 낫는 이적 기사가 일어나니 그것 보고 싶어서 구경만 하며 따라 다니는 사람. 3. 예수님으로 인해 예수님 덕으로 뭘 얻어서 살고 싶은 사람. 예를 들면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니 물건을 팔려면 그 무리에게 가서 팔려고 하는 것. 마치 소풍갈 때 장사꾼이 소풍 행렬을 따라가듯이. 4. 예수께서 하시는 그 기술을 잘 배워 써먹으려는 사람. ‘예수님이 어떻게 병을 고치나, 병 고칠 때 예수님의 손은 어떻게 하나’ 등을 배워서 자기도 써먹으려고. 5. 자기의 사회 지위문제나 종교적 지위나 명예 영광의 이득을 얻기 위해 따르는 사람, 또는 예수님의 활동을 따다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따르는 사람. 6.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싶어서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병 고쳐주니 따랐고, 인간과 세상을 깨닫게 해주니 따랐고, 천국을 깨닫게 해주니 따랐고 하는 등 따르는 사람들의 종류가 여러 종류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긴 따르는데 자기 생활형편, 시간형편, 개인형편에 따라 예수님을 따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어느 동리에 예수님이 들어갔을 때 그 동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내는 것을 봤는데도 불구하고 따르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봤는데도 따르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다고 얻어맞으면서도 따르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그토록 예수를 믿고 따르느냐?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라도 예수를 믿고 따를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인간이 예수를 믿고 따르면 예수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 믿는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인가? 자기에게 유익이 있다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얼마나 큰 유익이 있는가? 성경에 보니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인간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인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죄짓기 이전의 그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고로 인간은 인간 차원에서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본질적인 온전, 완전에 비하면 인간은 이질적이라서 하나님에 비하면 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이질적이라는 말은 ‘나쁘다’ 라는 의미가 아니고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개는 개대로 개 차원에서는 개로서 완전히 지음을 받았고, 돼지는 돼지대로 돼지 차원에서는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 돼지, 새, 인간 할 것 없이 피조물이라는 차원에서는 같으나 개, 돼지, 새 등과 비교해 볼 때 인간은 질적으로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또한 같은 짐승 차원이라도 지렁이와 개와의 차원이 다릅니다. 개나 돼지나 새들이 각기 차원이 다른데 이런 것들이 아무리 높은 차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런 것들보다는 월등히 차원이 높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비하면 인간은 불완전입니다. 타락 전이라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생명과 따먹고 하나님의 본질, 온전으로 성장했어야 할 인간임에도 그렇게 안 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본 목적에서 인간이 이탈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지은 여러 피조물들이 있지만 인간만은 특수한 존재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어떤 특수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을 지으실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질적 온전으로 인격과 성품이 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 궁극의 신령한 세계에서 실력대로 누리게 했습니다. 인간 자기가 알던 모르던 모든 피조물 중 오직 인간만 이런 특수한 목적으로 지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할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면, 1. 질적, 성분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2. 인간은 영육 결합으로 지음 받았다는 자체나, 세상을 거쳐 신령한 천국에 갈 자인고로 예수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3. 이 물질세상을 만든 것은 인간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부지런히 영적 실력을 키우라고 만들고, 이 면을 독촉하려고 육신의 죽음을 만들어 놓았으니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부지런히 영적 실력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고로 인간은 예수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고가 아니고 반드시 믿고 따라야만 하는 나로 창조 받은 존재입니다. 4. 우리 인간이 아직도 믿지 않고 있는 미신자(택자이나 구원받을 때가 아직 되지 않은 자)는 아직 영이 살아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이 살아났으나 영적인 기능, 지능 면에는 병자요, 하나님의 진리 말씀으로 고침 받아야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가 있고, 또 신앙이 본질적으로 성장할 수가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5. 육적인 면에서도 병자들입니다. 육적으로도 병들면 교회에서 육체적 봉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 영을 예수로 말미암아 살렸는데 우리 육신의 어떤 병이라도 능히 고치실 수가 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나는 나사로도 살렸는데, 그리고 당신 자신이 스스로 신령체로 부활했는데 육신의 병을 못 고치실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현재적으로 병든 자기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기에게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나보다 주님이 더 잘 알고, 내 앞날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나의 앞날의 그 날에 그 사건 환경에서 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지 인간 나는 잘 몰라도 하나님은 더 잘 아십니다. 우리가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그 기도가 이루어짐으로 되어진 그런 결과를 미리 당겨 놓고 본다면 히스기야의 그 기도를 들어주면 안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들어주니 히스기야에게는 한이요, 남조 유대민족에게는 한이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보고 ‘너는 죽을 준비를 하라’고 했지요. 그렇게 하니 히스기야 자기는 자기의 과거의 선행을 말하면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안 듣고 벽으로 돌아앉아 자기 고집대로 살려달라고 떼를 쓰니 하나님께서 살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그 증표를 달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해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 주었더니 그 결과는 사선 넘어가서도 두고두고 마음 아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도로 낳은 아들 므낫세는 가장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런 면을 깨닫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궁극적인 성화구원, 이룰구원을 위해 육신의 병을 있게도 하고, 없게도 하고, 그냥 두기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적으로 육신에 병이 들어 있는 것은 영적 건강을 깨닫게 해주려 육신의 건강을 잘 돌보라는 뜻이 있을 수도 있고, 또는 건강한 육신을 줬더니 죄짓는데 썼다고 책임추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못 고치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이룰구원을 두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가 지금 육신의 병이 있던, 없던 육신의 병에 집착하는 소원성보다 인간은 영적 면에서 100% 다 병들어 있다, 약하고 자라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이런 영적 병에서 나으려고 해야 하는데 이것은 모르고 육신의 병만 인식을 하고 고침을 받으려고 하니 그런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주님의 의사성과는 대립이 된 채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패역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의 병을 고치심은 단순히 육신의 병을 고쳐주려는 것으로만 알면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활동하신 것은 우리의 영을 위해 계시목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죽었던, 병들었던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을 깨닫게 하는 말씀임에도 영적인 병은 모르고 육신의 병만 목적하고 믿다가 고침 받은 자들 중에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를 더 짓다가 죽는 사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 믿으며 영적인 면에서 고치고 갈 병이 없습니까? 육신의 병만 알고 영적인 병은 없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 병이 있다면 예수 믿고 나서 몇 가지나 고침을 받았습니까? 다 고침을 받았습니까, 하나도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까? 영적인 면이 자라지 못하고 힘없고 병든 상태를 몇 가지나 고침을 받았습니까?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의식하지 못하고 했던 그 면을 예수 믿고 나서 깨우침, 깨달음을 받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그 면이 있다면 몇 가지나 있습니까? 그런 게 있다면 그게 살아난 것이고, 고쳐진 것이고, 고쳐지는 중이고,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인데, 생각은 그렇다고 의식이 되는데 그 면이 확고히 정돈이 안 된 채 있는 것이 자기 속에서 발견이 됩니까? 오늘날까지 예수 믿으면서 그런 면이 하나도 없습니까? 영적이던 육적이던 고쳐야겠다는 그것은 있습니까, 아니면 고칠게 영적 육적으로 하나도 없습니까? 고쳐야 될는지 안 고쳐야 될는지 그것조차도 전혀 모르고 예수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예수 믿으며, 교회 다니며 육신의 병이 나아가는 사람만 보았습니까? 예수 믿으므로 영적인 병이 나은 사람을 못 보았습니까? 자신에 대해 이런 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게 성령님께 감화된 사람입니다. 성경에 무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는데 자기도(나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무리 중 한 사람인데 자기는 언제 고침을 받을는지?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나는 장소적으로 예수를 믿고 따르고 앉아 있는 것뿐이지 큰 무리 중 한 사람에 불과합니까? 몇 가지나 고침을 받았습니까? 예수 믿는 건 하나의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건 실재요 실상입니다. 종교적인 어떤 큰 업적이나 성과를 이뤄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얻고 종교적인 어떤 감투를 얻는 것이 아닌 실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얼마나 실상화 시켰습니까?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어떤 큰 이력을 이뤄놨다고 해도 예수 믿은 효력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은 인간의 본 목적에서 이탈된 채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