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무소유' 개신교는 '과소유' 

법정 스님 입적을 통해 본 기독교의 과다한 '소유 집착'


 


  

'불교계의 김수환'으로 불리던 법정 스님이 입적(불교 용어로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하셨습니다. 종교를 떠나 그분의 삶 자체에 많은 국민들은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무소유>라는 책이 워낙 유명세를 타면서 웬만한 기독교인들도 한 번쯤 읽어

보고 감동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요.


지난해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의 청빈한 삶이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신 바 있어서

이번 법정 스님 또한 김수환 추기경과 비슷한 생의 걸음걸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각별한 인연도 잘 알려져 있지요.


이처럼 천주교와 불교의 두 지도자가 보여준 '삶'의 모습 속에서 수많은 국민들은

감동과 함께 아쉬움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많은 존경과 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 지도자 중에는 이처럼 '무소유'를 실천한 분이 없을까요? 있는지는

몰라도 잘 알려지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알려졌다 해도 순수성을 의심받는

경우가 많은 건 참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것보다는 다른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즉 개신교에서

'무소유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맨발의 최춘선 할아버지'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김구 선생과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와세다대학을 나와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두 헌납하고 맨발로 30년을 전도하러

다녔던 분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분 외에 그리 알려진

'청빈'의 삶을 보여주신 분이 없습니다.


목사의 '무소유', 가능할까


사실 개신교 목사에게 '무소유'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가정이 있고 아내와 자녀가 있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리

무소유를 추구하고 싶지만 결국 가족들의 부양 의무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쩌면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가능했던 것도 그들이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가족의 유무로 '무소유'의

실현 가능성을 따지기에는 좀 억지스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불교와 천주교에서도 '무소유'가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외에 딱히 청빈한 삶으로 알려진 분도

없고, 불교계에서도 법정 스님 외에는 '무소유'를 실천한다는 분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두 분의 삶이 그래서 더 빛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무소유'를 실천하라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만큼 성경을 많이 읽는 종교가 없지만 그만큼 실천하지 않는

종교도 없을 것 같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성경 자체를 읽거나 배우는 기회가 개신교만큼

많지 않습니다. '예전' 중심의 교리 때문에 그들이 매주 시행하는 '미사'는 의식이 대부

분을 차지합니다. 불교 또한 마찬가집니다. 불교 신자가 불교 경전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있을까요. 사찰에서 법회 때 스님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을 뿐, 법전을

곁에 두고 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천주교인들과 불교인들은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과 같은 큰 지도자

들의 삶을 보기만 해도 자신들의 신앙이 결코 '엉터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 곁에 매일 두고 보는 경전은 없지만 살아 있는 경전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잡는 것이지요.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묵상하고 공부하고 읽고, 거기에다

매일 설교를 듣습니다만, 웬일인지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뭔가 잘못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19장 21절에는 부자 청년이 영생을 구할 때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만, 그 청년은 고민하고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2장 33절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했고, 마가복음 10장에서도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도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물론 부자들의 선행도

등장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재물' 때문에 더 귀중한 '천국'을 버리는 것으로

비교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는 개신교인들, 가능할까


가장 두드러진 구절은 누가복음 16장 13절의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내용입니다. 결국 재물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미 재물의 맛을 알기 시작하면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재물을 보존하고 확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종방했던 '좋은나라운동본부'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거액의 세금을

채납한 사람들을 세무 공무원들이 찾아가 압류 또는 약속 이행서를 받는 내용이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체납자들의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고 큰소리를 칠 수 있나"는 반응들인데, 돈을 좀 만져본 사람들은

잘 압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재산의 규모에 비례해서 목소리도 커집니다. 그리고 자신감

에 늘 차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재물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이런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자기 목소리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일부 지도층들은 대부분 '부자'들입니다. 청빈하고 가난하며 도덕적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장로님이나 권사님들, 또는 집사님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큰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부정적 이미지 덮는 불교의 '무소유' vs 긍정적 이미지 덮는 개신교의 '과소유'


이처럼 개신교에서는 '소유' 자체를 '축복'과 연결 짓습니다. 물론 '소유'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거나 '이웃을 위한 구제' 등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 속마음은 '하나님의 축복 = 재물'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계 전체가 '무소유'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불교계의

재산다툼과 승려들 간의 암투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만, 그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순간에 덮어 버릴 만큼 법정 스님과 같은 몇몇 대승들의 '청빈의 삶'이 있기 때문에

수면에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개신교는 일부 목회자들과 교회들의 순수한 봉사와 청빈의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전체를 대표할 만한 대형 교회 목사들의 온갖 비리와 탐욕스런

행태들 때문에 세상의 빛과 소금은커녕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바닥에 버려져서

밟히는 신세가 돼 버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교는 대표 승려들의 선행이 좋은 이미지를 양산하는 반면, 개신교는

대형 교회 이름 난 목사들이 이미지를 흐려 버리는 꼴입니다.


지난 13일 전라도의 한 사찰에서 열린 법정 스님의 다비식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왔습니다. 물론 불교 신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꽤

많은 숫자가 참석했다고 언론은 보도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상상을 해 봤습니다.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초대형 교회를 가진 목사님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어느 언론에서 사흘씩 집중 보도를 할 것이며, 자기 교회

교인들 외에 타 교인이나 불신자들이 얼마나 애도할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곧 '부끄러움'으로 변했습니다. '무소유'는 고사하고 맹목적인

'축복'을 빙자한 '과 소유'를 부추기며 달려 온 개신교 대표 지도자들의 죽음에 어느

불신자가 애도를 해 줄까요. 이미 개신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과는 너무나 멀어져

버린 게 아닐까요.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말입니다.


 
뉴스 엔조이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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