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서강해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7)

Exceedingly Abundant Grace

 

1. 은혜 이전 (Before Grace)

*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Blasphemer/ persecutor/ violent aggressor)

* 무지 때문에 범죄(레 5:15-19)

(Because of ignorance)

* 율법주의 도표

(Diagram of Legalism)

 

2. 은혜 이후 (After Grace)

* 긍휼과 은혜 (Mercy and grace)

* 은혜의 파문 (The ripple of grace)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5-16).

* 죄인의 괴수 (Chief of sinners)

* 은혜의식의 도표 (Diagram of grace-consciousness)

 

3. 항상 은혜 (Always Grace)

* 겸손 (Humility) (1:15)

* 감사 (Gratitude) (1:12)

* 선포 (Propagation) (1:15)

 
디모데전서를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주님에게서 받은 은혜을 상기하며
넘치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 은혜를 받기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7)

1. 은혜 이전

바울은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고백했지만,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힌 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히기 전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고 했습니다.
“비방자”란 ‘신성 모독자’란 뜻입니다. 바울은 언행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박해자”는 사냥꾼이 맹수들을 사냥하듯, 교회를 사냥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살기(殺氣)와 위협이 등등(??)했습니다(행 9:1).
스데반 집사를 돌로 때려죽이는 일에 찬동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박해한 것이었습니다(행 9:4).

“폭행자”란 거드름을 피우는 지독한 박해자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자들이 수치와 고통을 당할 때에 고소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자들을 때려잡는 깡패였습니다.

2. 은혜 이후

바울은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감격하고 감탄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14).
주님을 믿게 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엡 2:4).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십니다(엡 2:7).
바울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로 바울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박해자(persecutor)를 설교자(preacher)로,
살인자(murderer)를 목회자(minister)와 선교사(missionary)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변화시키신 것은 너무도 전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인들이 바울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힘들 정도였습니다(행 9:26-31).


하나님은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실 뿐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나약한 질그릇 같은 바울이지만, 오뚝이 같은 능력을 받았습니다(고후 4:7-12).


바울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태양보다 더 밝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너무 크신 주님에 비해 너무 작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을 더 가까이 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더 깊이 보았습니다.
교만할래야 교만할 수 없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아니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태양보다 더 밝은 주님 앞에서 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의 괴수인 자기까지도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무한한 능력을 확신한 것입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 항상 은혜

신앙생활은 주님의 은혜에 부딪힌 사람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미 앞에서 나왔지만, 바울은 항상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1:15; 벧전 5:5).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했습니다(1:12). 주님의 은혜를 망강하고 불평하면 주님의 은혜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할 때에 주님의 은혜에 부딪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에 더욱 강하게 부딪힐 것입니다(신 8:11-18).


바울은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1:15).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자신만 간직하고 있으면 주님의 은혜에 부딪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할 때 주님의 은혜의 복음에 점점 더 강하게 부딪힙니다.
우리는 주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축복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정말 능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쏟아 부어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입니다.
율법에 매여 있으면, 스스로 교만하고 남을 정죄하여 남을 죽입니다.
은혜에 부딪혀 살 때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말씀대로 살면서도 겸손하고 남에게 은혜를 전하여 남을 살립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주님의 은혜’에 부딪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17).

출처 : 총회 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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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적인 시각에서 본 신약의 영성
1.영성에 대한 정의
복음주의 진영의 대부분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영성을 지지하며, 영성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 사람이 된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성령을 쫓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지칭한다. (막 12:30-31)
2. 균형적인 시각에서 본 영성
최근 영성개념의 혼란은 신약성경 교훈에 기초한 '균형성'을 상실하고 부분적인 진리를 극대화하거나 왜곡하여 그것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데 원인이 있다. 이런 영성개념의 왜곡 현상은 역사적으로 심령부흥회의 감정적 열광주의, 상속이원론, 은사제일주의, 말씀객관주의, 차가운 지성주의, 금욕적 세상도피주의, 개인영혼 구원사상, 신비주의 등의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다.
1) 삼위일체 신론에 기초한 영적 균형성
참된 영성 개념은  삼위일체 신론에 함당하게 기초하여 정립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신론 중에서 한 분만을 강조하는 영적 생활은 영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2) 회심 경험과 영적 균형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출발점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제2축복' 경험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들음으로'(갈 3:2,5) 성령을 받는 일에서 시작된다.
3) 윤리와 은사 사이의 균형성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 사역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은혜의 외면적 작용이다.
4) 올바른 신앙과 바른 실천 사이의 균형성
정통신앙(Orthodoxy)와 정통실천(Orthopraxy)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영적 생활은 참된 영적 생활이 아니다.
5)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균형성
현실 교회들이 영적 균형을 잃기 쉬운 또 다른 영역은 '영과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 사이의 균형성이다. 후자없는 전자만을 강조하는 신앙 자세는 영적 생활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6)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균형성
기독교의 영성 구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already) 이루어진 것과 '아직' (not yet) 이루어 지지 않은 것 사이를 살아가는 종말론적 긴장 구조와 관련이 있다. 영성 두축들 가운데 '이미' 쪽만을 강조하게 되면 위에서 말한 영과의 신학이나 변영의 신학을 추구하게 되고 교회의 영성은 쉽사리 현세지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7) 감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의 균형성
현실 교회들 가운데서 영적 균형을 잃기 쉬운 또 다른 영역은 감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의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9) 사랑과 공의 사이의 균형성
기독교인의 영성은 사랑과 공의 사이에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죄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태도를 나타내야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은혜롭게 넘어가면서 불의에 눈 감으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10) 결어
오늘날 한국교회 속에서도 성령운동이나 은사집회 같은 것들이 교회나 기도원 마다 수없이 유향하고 있지만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재현하고자 하시는 십자가의 형상은 잘 나타나 않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복음이 없이 영광의 신학만을 추구하는 세속화의 위기이며 십자가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위기이다.  참된 기독교 영성은 십자가 신학을 회복하는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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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역사적 개관


초대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은 초기 기독교 500년 동안 성도들의 고난과 박해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박해에도 불구하고 무럭무럭 성장하여 소아시아와 유럽을 넘어 로마제국을 뒤덮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편만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사에 대한 이해는 목회자나 성도들에게도 필수 입니다.
또한 초대 교회사를 모르면 이 시대와 교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사는 교회사의 기초요 모판입니다. 초대교회는 언어적으로는 헬라어와 라틴어이고 지리적으로는 지중해 중심이며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1.제국의 통치 아래 기독교는 고난과 박해를 받았지만 교회는 결국 고난을 이겨 냈습니다.
박해 이후 많은 이단들이 등장하여 교회는 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지만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이 등장해 바른 신학을 지켜 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사 500년은 교회의 건설과 신학적 체계를 확립한 시기입니다. 초대 교회사는 펀의상 3기로 구분됩니다.
시도시대, 사도 후 시대, 니케아 공의회 시대
이 시기의 교회사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그의 부활. 2. 오순절 성령 강림과 사도들의 전도 활동
3.속사도들의 신앙전승, 4. 로마 황제들의 박해, 5. 기독교 변증가들의 논쟁. 6. 배교자와 여러 이단들의 등장, 7. 성경의 정형 과정, 8. 수도원의 태동과 발전, 9. 기독교 공인과 국교 선언, 10. 동서로마의 분리, 11. 니케아와 예베소 공의회, 12.칼게돈 공의회를 통한 삼위일체와 기독론 교리의 체계화, 13.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서방교부들의 신학, 14. 사도직의 전승과 교황권의 학립, 15. 초기 기독교 선교,
사람들은 초대 교회를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우(430년)까지입니다.
정치적으로는 476년 서로마의 멸망까지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590년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등장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다시 사도 시대, 사도 후 시대, 니케아 공의회 시대로 구분됩니다.  사도시대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활동하던 초기 100년까지의 기간으로, 신약교회가 태동하고 초대 교회의 조직과 예배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사도 후 시대는 100년부터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로마의 박해을 받았으나 초기 교부들과 변증가들의 헌신을 통해 사도적 전통을 지켜 냈습니다. 또한 교회는 여러 이단과 분파주의 등장으로 매우 혼란했으나 정경을 채택하고 신조를 체계화함으로써 교회 제도들이 정착되었습니다.
니케아 공회 시대는 313년부터 590년 그레고리우스 대제의 등극까지로 이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나 교회 내부에서 신학 논쟁들이 대거 발생했습ㄴ다.
이런 논쟁들이 공의회를 통해 정리 되면서 신학적 체계가 구체화되었습니다. 이어서 선교 운동의 확장과 수도원 운동. 동서방 교부들의 신학체계 확립 및 예배와 교회 직제의 조직화
로마 교황의 교권 강화와 교회의 발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회 역사를 체계적으로 저술한 사람은 유세비우스입니다. 그는 교회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데 323년 완성된 10권의 '교회사'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유세비우스 이후 그의 교회사를 계승한 사가들이 곳곳에서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역사가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완성자로 기독교 신학 전반에 많은 저술을 남긴 목회자요 신학자요 역사가였습니다. 많은 저술 중에 기독교의 역사를 잘 정리한 '신국론'은 히포의 감도으로 있을 때 13년에 걸쳐 기록한 대작입니다. 당시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모든 책임을 기도교에 떠넘겼습니다. 그런 주장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침묵했습니다.  이 같은 비판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했습니다.
그는 신국론에서 모든 세속적문화와 사건들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했습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고대 헬라인들이 갖고 있던 순환 개념 대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단회적 사건과 획일적 역사관을 주장했습니다.
결어
초대 교회의 교리적 체계 확립은 이후 교회 역사의 산실이 되었으며
오늘날처럼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교리적으로 혼탁한 때에 교회는 초대 교회
성도들 처럼 바른 교리의 체계 확립에 힘써야 할 것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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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과 그리스도

여호수아 6-8장의 언약적 의미

1.들어가는 말

여호수아서는 모세 오경의 언약과 유기적이며 점진적으로 연결되며, 아브라함의 언약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 아래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따라서 가나안 땅의 정복 및 분배조차도 여호와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언약의 성취의 한 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여호수아서의 주제 및 특징

여호수아서의 주제는 성경 전체의 주제와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의한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성취되었다.

3. 여호수아서의 언약적 위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에서 한 민족으로 성장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다시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에 따라 이곳 가나안 동편 모압 평지까지 오게되었다(15:13-16).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가 이곳에서 언약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 성취라는 큰 언약적 의미가 있다.

4. 여호수아와 그리스도

여호수아서의 메시아 사상은 우선 여호수아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이름의 문자적 의미는 구원과 연관되어

있으며 호세아(13:6)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예수(예수스)

의미와 같으며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고 부요하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의 다른 호칭이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를 하나님 나라의 안식으로

인도하신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중재자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믿는 자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여리고성을 바치라(6장 원문강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한 역사적 사실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 아브라함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 내려간 후

사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다시 올라오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이루고 계심을 보여 준다.

둘째, 여리고 성 주위를 도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 성을 무너지게 하신 것은 이미 그 성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 전체적인 내용은 요단을 건너라(1-4), 가나안 땅을 취하라(5-12),가나안 땅을 분배하라

(13-21), 그리고 여호만 섬기라(22-24)는 네 부분으로 요약된다.

여호수아서의 내용은 단순한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주제인 언약의 역사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언약사인 것이다.

결론

여호수아를 통해 낭독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 및 저주의 형태로 역사 속에서 반드시 성취될 언약이었다.

즉 신명기 27장의 에발산을 향한 저주 선포는 역사 속에서 반드시 성취될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이 축복과 저주의

선언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훗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축복을 받기도 했으나 불순종함으로 심판을 받아

이방인에게 사로잡혀 가서 저주를 받았다. 마침내 축복과 저주의 언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자의 축복 및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여리고 및 아이 성 점령은, 가나안 거민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동시에 노아의 언약 및

아브라함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역 이후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적 이스라엘이며 아브라함 자손이

됨으로써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구분이 사라졌다. 구약의 축복과 저주 선언은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심찬이 선언되는 모형과 그림자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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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신학체계와 루터의 신학

1 근본주의, 복음주의,그리고 개혁주의

1.서론

우리는 근본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자주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을 깊이 이해하고

각각의 차이점을 분명히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2. 근본주의 역사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본주의 운동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들은 그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1871년 신구파의 여낳ㅂ 이후, 북장로교 안에서는 자유주의 도전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3. 근본주의 해석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20세기초 미국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현대주의적 기독교 운동이다

근본주의란 일차적으로 미국에서 일어난 현재주의와 진화론과 자유주의에 대항해서 정통 기독교를 보수하려는

보수적인 기독교 인들의 광범위한 연합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이 제시한 다섯가지 기본교리들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 부활과 재림, 이적의 역사성-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핵심 교리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가 반드시 수호해야 할 교리들이다.

4. 근본주의 다른 면

근본주의 운동이 나중에는 분리적이고 전투적인 모습을 띠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근본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집단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극복해나가야 할 모습이다. 근본주의의 부정적 모습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미 복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복음주의는 21세기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역사

복음주의를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의 중심 메시지를 믿음을오 받아들이고 성경의 무오한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규정한다면,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미 부흥운동을 그 시작으로 삼는다.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20세기 초반의 근본주의 운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근본주의 운동은 복음주의적 개신교들이 중심이 되었던 운동이였기 때문이다.

2.복음주의자의 특성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개 복음주의란 2000년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성을 보수하는 입장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규정한다. 복음주의자는 성경의 신적 권위와 영감과 무오성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또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대사회적 책이과 봉사를 강조한다.

. 개혁주의

1.개혁주의 역사적 뿌리

스위스의 쯔빙글리와 제네바의 칼빈과 스코틀란드의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사상이 개혁주의의 역사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개혁파는 화란(네델란드)과 영국까지 확산된다. 유럽에서는 스코틀란드와 화란이 개혁주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해왔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 개혁파드은 본국의 종교적 핍박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종교공동체를 건설했다. 이들이 청교들이다. 청교도들의 개혁신앙은 미국 국가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결어

근본주의, 복음주의, 및 개혁주의와 한국교회

근본주의란 말은 일차적으로 미국 내에서 일어난 개신교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현재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 신학적으로 편협하고 비관용적이고 전투적이고 분리주의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 교회 내의 진보주의 자들은 보수주의 자들을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근본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경향은 진보주의자들이 기독교 역사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개혁주의는 일정한 신학체계를 가리키는 말이고, 복음주의란 신학적 체계라기 보다는 신학적인 운동 또는 신학적인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운동의 특성과 방향을 예의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도 본래 교리적인 측면에서나 교회적인 측면에서 폭이

좁지 않다. 개혁주의의 문화 신학적 측면이 충분히 계발되면 복음주의적인 여러 특성들 중의 상당 부분을 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개혁주의 자들은 복음주의라는 큰 흐름 안에서 개혁주의의 특성을 견지하면서 복음주의의 장점을

흡수해나감으로써, 개혁주의가 현대의 정통 기독교 운동의 주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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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론 강의 ( doctrine of God)

 

1강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

 

모든 정통교회가 하나님의 예정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예정론인데, 바로 이 부분들이 칼빈주의의 체계를 형성하게 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은 이 칼빈주의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요소들이 한편으로 알미니얀주의를 막아내었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로마 카톨록 교회의 신학사상에 맞서는 데 있어서 큰 공헌을 해 준 요소들이 되어 왔다.

 

1)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장차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의 도모에 의해 영원부터 자유롭게, 변할 수 없게 정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작정(Divine Decree)라고 부른다. 한편 이 작정에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온 우주적인 하나님의 뜻과 섭리뿐만 아니라 인류와 천사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의 작정도 포함되는데, 특별히 인류와 천사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우리는 흔히 예정이라고 부른다.

 

2강 삼위일체의 하나님

개혁주의 신학의의 대표적인 신조로서 가장 성경적이면서 강장 칼빈주의저ᅟᅥᆨ인 신조로 평가되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Westminster Confession of Taith)의 제23절에서는 성 삼위일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 신격의 단일성 안엘 삼위께서 계시니, 곧 한 실체요, 한 권능이요, 한 영원성이신 성부 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는 누구에게서도 기원하시지 않고, 아무게게서도 나시자 않았으며, 또 나오시지도 않는다; 성자께서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셨다; 성령께서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5: 26)

'한 실체-세위격' 바로 이것이 기독교 역상 A.D.4 세기에 확립되어 그동안 1,600년 이상을 변함없이

지켜져 온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과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기독교회들이

함께 공통으로 긍정하는 신앙고백이자 교리이다. 즉 로마카톨릭과 동방정교회, 러시아정교회를 포함하여

모든 정통적인 개신교들이 이 교리를 부정하지 않고 잘 붙잡아 지켜온 교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교리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유독 기독교교회만의 독특한 신앙고백이면서 또 기독교 내의

이단을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는 교리가 되는 셈이다. 이 교리는 어떤 철학적인 논리나 또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사색에서 나온 교리가 아니다. 이 교리는 오직 성경에서 나온 교리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믿고 아멘으로 받아들여 더욱 더 확고하게 맏아들일 수 있는 교리가 바로 이 교리이다.

 

2.필리오께(Filioque)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나오실 (proceed)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filioque) 나오신다.”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

역사적으로 유명한 A.D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의에서는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 관해서는 명시적인 진술을 했으나 성자와 성령에 과계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질술이란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라는 고백이었다. 이 고백에 대해서는 동방과 서방의 모든 교회들이 동의하고 아멘으로 그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5세기를 거쳐 6세기에 이르자,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논란이 있게 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입장에 큰 차이가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서 양 교회는 결국 나중에 (1054)분리까지

하게 되었다. 즉 서방교회는 성령께서는 성자에게서도(filioque) 나오신다라는 입장을 고백하였고, 동방교회는 그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서방교회는 A.D.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이 명제를 받아들이고, 비록 A.D.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보다 200 여년이나 더 늦게 이 부분을 추가하기는 하였지만, 이 진리를 200년 여년 전으로

소급하여 적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A.D.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선언된 신조를 오늘날 우리가 살펴볼 때,

‘filioque’라는 한 단어가 추가되어 소급 적용된 신조를 우리는 현재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0 여년이 지나 17세기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 고백을 받아들인 서방교회의 입장에서 필리오께 교리를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 동방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3. 아타나시우스 (동방교회사람)신조 (420-450년사이, 또는 8세기 말 작성 추정) 중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그 자체로 존재하신다.성부께서도, 성자께서도, 성령께서도 결코 만들어지지 않으셨다. 그러나 세 영원이 아니며, 다만 한 영원한 이가 계신다.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우리의 이해를 초원하시는 오직 한 분만이 계신다. 성자께서는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지음받거나 출생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나 지음을 받거나 출생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세 성부들이 아닌 오직 한 성부,

세 성자들이 아닌 오직 한 성자, 세 성령들이 아닌 오직 한 성령만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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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

 

성경이란 하나님이 다른 목적이 아닌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계시, 즉 구속계시라는 점이 가장 우선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그 계시의 특성인 역사성-즉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구속의 역사-

반영하는 되어야 하며, 성경이 바로 그런 역사적 방법론으로 구원서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서정이

성경속에 어떻게 나타나는 살펴본다

 

1) 누가복음 2444-49

본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이 본문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으리라 본다

44절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하면서 늘 당부하셨던 말씀을 상기시키시고 계신다.

다시말해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 성경이 당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자주 말씀하셨다.

46절의 기록내용은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써 성경이 무엇을 기록하고 있느냐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며

충분이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47절을 통해 우리가 놀랍게 받아들이게 되는 사실은 계속해서 구원의 일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도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일 또한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고,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내용은 두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구속사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구원의 적용사역이 계속된다는 내용이다.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이 전제될 때, 성경은 구속사(구원의완성)의 일과 구원서정(구원의 적용)의 일을 서로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속에서 하나의 일로써 성경관에 근거한 우리의 방법론이 설정되는 것이다.

 

2) 사도행전 21-21

누가복음에서는 대체로 복음서 전부가 그런 면을 보이는 것이 사실인데 - “성령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다소 자제된 듯한 느낌을 주는 반면 사도행전에서는 서두에서부터 성령이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등장한다.

2장 본문이 성령이 강림한 결과에 대해 제일 먼저 지적하는 것이 4절에서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거이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결과로 그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지작했다고 적고 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여호와의 신(성령)이 어떤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기록을 보게된다. 구약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여호와의 신(성령)이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는 욜2:28절에서

만민에게 여호와의 신이 부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이 때 만민에는 일반이도 포함되고,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도

포함되고, 자유자가 아닌 종도 포함됨을 뜻한다. 요엘의 선지자는 당시의 정형을 넘어서는 시대적 패러다임을 깨는,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구약의 정서에서 요엘의 예언은 어쩌면 신성모독으로 몰려 돌에 맞아 죽을 수도(24:16)있는

깜짝 놀랄만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요엘은 시대적 종교적 정서에 맞서 앞으로 그런 때가 올 것이라는 예언의 사명을

다한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요엘을 인용함으로써 입증한 것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14절에서 말한 이 일그리고 11절의 ”“하나님의 큰 일이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육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구속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을 근거로 이제

성령이 강림하시는 일까지 진행됐고, 그 결과 뭇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 일이 가능해 진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신 큰 일인 것이다.

 

3)요한 복음 737-39

요한 복음 7:37-39의 내용은 사복음서 중 요한 복음에만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본문은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는 이유에서 중요하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표현이 직설적이기 보다는 매우 은유적인 화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난해하다. 구원서정의 일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있어야 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일이 먼저 진행되어야 구원서정의 일(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4) 요한복음 2019-23

이 보문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구속사와 구원서정의 관계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본문으로서 중요하다. 이 본문을 이해하는 있어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부활 이후의 시점에 일어난 사건임을 기억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한 마디로 평화를 완성하신 사역이었던 것이다. 이제 부활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자리에서 어느 말씀에 앞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샬롬하신 것은 실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의 모든 고난과 굴욕을 감당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원수 되었던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

 

5) 결어

구원서정은 신약에서만 나타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구약이 말하고 있었고, 고대하던 일임을 확인하였다. 구속사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끝이 아니라 성령강림까지 나아가야 하는 일이었으며 그리고 나서야 구원서정이 가능해지는 관계인 것을 보았다.

  구원론 / doctrine of salvation / salvation in christ

출처 :총회 목회대학원 / 총회 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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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와 지도력

 

목회의 근원적 주체는 성령이다. 그러나 성령은 목회자를 통하여 일하신다. 목회 현장은 목회자와 성도라는

두 주체가 있고 이들은 성호작용을 한다. 목회현장의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경지식을 가르치고,

기독교적 가치관과 삶을 전수하여 성도를 지성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목회자가 주어진 사역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이 필요하다.이러한 지도력의 필요성에 기초하여 아래셔는 목회자가 필요로 하는 지도력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한다.

 

지도력

지도력이란 무엇인가 지도자가 특히 정당의 직무와 위치,주어진 범위 안에서 다른사람을 지도하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위,이끌어가는 능력 : 다른사람에게 영향을 끼쳐서 자신이 의도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도록 하는 힘이다. 이러한 지도력에 대한 세속적 관점과 성경적 관점을 살펴본다.

1) 세속적관점

성도로 하여금 성숙하고자 하는 의욕과 동기유발을 일으킨다. 이러한 의욕과 동기를 유발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목회자가 보여주는 진지한 자세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말의 전달 곧 의사 소통을 명료하게 하여 자신의 생각을

문명하게 전한다. 그리고 표현방법의 변화를 사용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할 때 말의 억양에 변화를 준다거나 질문법을 사용하기도한다

2) 성경적관점

에베소서 411절은 교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직분자로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자,그리고 목사인 목회자를 세웠다. 그들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4:12)한다.

목회자는 지도력을 발휘함으로 설정한 목표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목회사역내용을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해야한다. 세속적 지도력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다양한 다양한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지만 섬기의 지도력은ㄹ 행동을 강요하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이러한 섬김의 지도력은 두가지 근거 곧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1) 성경적 근거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고 하였다.목회자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믿고,섬기고,따르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올바른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2) 신학적 근거

초대 고린도 교회는 연합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분열이 계속 일어났다. 특히 특정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벌을 이루는 분열이 일어났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라고 꾸짖었다. 한국교회 특히 예수교장로교회는 300개의 교단으로 나눠져 있는데 특별히 이단적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의식과 교리상의 차이가 있어도 믿음으로 하나가 되려는생각을 해야한다.

2.목회와 영적 지도력

영적 지도력은 강조점에 따라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영적지도력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지도력이다.

앞의것은 여러 지도력 중에서 영적인 것에 관한 것이고, 뒤의 것은 여러 영적인ㄹ 것 중에서 지도력에 관한 것이다.

목회자는 이러한 두가지의 영적 지도력 모두를 필요로 한다.

영적지도력은 지책이 아니라 능력이요 역할이다. 목회자는 영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질 수도 있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영적지도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군림하는 지도력이 아니라 섬기는 지도력이다.

영적 지도력은 영적 사역에서 필요한 지도력을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인 자세를 지녀야 한다.

 

결어 :

다윗는 역대상 225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므로 그가 거하실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는 뛰어난 목회자가 되어 자신의 일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야한다.

 

출처 : 총회 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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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과 신앙의 요체

오직 성경의 신학만이 성경적 신학

1.연원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 자주 이 말은 칼빈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개혁주의는 오직 서역으로 라는 모토로 집약된다.오직 성경안에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모토가 들어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할 때, 그것이 가장 신학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신학은 성경에서 시작되고 성경에서 머문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참 신학과 참 경건함을 추구한다. 개혁주의가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고유한 기원과 근원에 충실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참 근본을 교회의 서고 넘어지는 조항으로서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2.개혁주의와 개혁신학

개혁주의에 대한 정의가 다체롭다, 최광의로 이를 이해하는 입장은 그것이 성경적 진리와 정통 신학 그리고 삶을

망라하는 개념이라고 본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칼빈의 사상이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세계관을 창조, 계시, 구원의 관점에서 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칼빈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자기부인에 기독교 철학이 가장 분면하게 새겨져 있다고 보았다.

3. 개혁주의 근본원리 하나님의 근본원리

기독교 강요에서 언약신약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전개되는 신구약에 관한 장들은 기독론 안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

칼빈은 구약이 그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 다양하다는 원리를 분명히 제시한다. 신구약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말씀의 실체라는 측면에서 칼빈은 율법과 복음을 이해한다. 율법은 언약의 법으로 약속을 담고있고 복음은 그 약속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소식을 정의한다. 밀러는 이 부분에 착안하여

칼빈과 칼빈주의의 연속성을 예정에 대한 칼빈의 기독론적 이해에서 찾았다. 존 녹스는 예정에 대한 언약신학적 입장을 전개함에 있어서 장로교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4.개혁신학의 원리와 중심교리

칼빈의 신학이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칼빈주의로 수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신학의 원리혹은계시의 원리라는 개념이

신학의 서론으로서 논의 되었다. 칼빈은 이러한 계시의 원리가 삼위일체론적이며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성부하나님은 계시의 시작 혹은 뜻이며, 성자는 계시물 즉 말씀이며, 성령은 계시의 작용이다.

5.개혁교리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참 교회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종교[기독교]의 합당한 가르침을 삼위일체의 교리,기독론 교리,

전적은혜의 구원 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교리에 성경의 모든 진리가 합의된다. 또한 개혁주의 전통은 몇몇교리를 중심으로 성경의 전체의 가름침을 배변하기도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도르트 신경으로부터 수립된 칼빈의 5대교리를 들을 수 있다: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의 은혜, 성도의 견인, 그리고 1910년 미국의 북장료교회가 성경과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으로 선포한 다섯 가지를 들을 수 있다: ”성경의 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그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들.” 대체로 개혁신학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에서 특징적으로 잘 나타나듯이 죄, 은혜, 감사,을 담고 있다.

6. 결론 :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한국교회는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개혁주의를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영향을 미친

초기 선교사들은 개혁신ᄒᆞᆨ에 대한 식견이 깊었으며 신앙 또한 그에 걸맞게 경건했다. 특히 보수적인 장로교 합동 교단은 12신조를 받으며 그 선언에서 웨스트민스트 신도게요서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공표함으로 신학과 신앙의 자리를 분명히 했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신학의ㅣ 윈리를 성경이라고 명명한 제 일장에서 분명히 천명한다.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하고 무오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다.성경은 살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을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개혁주의 입장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비한 예정의 교리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예지예정론을 반대하고, 선택과 유기가 만세 전에 미리 정해졌다는 이중예정을 뚜렸이 공표한다. 이것이 전적타락 교리와 함께 천명된다.

타락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해서 은혜가 아니면 언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 교회는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견인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유일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한 몸으로 모인 언약 공동체이다.

정통신학은 신구약 성경의 천계와 영감으로 말미암아 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인정하는 초자연적인 성경관을 가진다고 피력하여 그 자리매김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이 개혁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의 원리에 정확하게 잇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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