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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역사 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Chapter 1

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장로교회란 무엇을 말하는가? 장로교회란 장로회 정치제도하에 유형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교회 형태를 말한다.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칼빈이나 낙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약성경에 이미 나타나 있는 제도였다.

1. 성경에 나타난 장로회의 기원

A. 구약에서의 사용: 구약에서는 장로라는 말이 백번 이상 사용되었다. 그 중 모세 오경에만 절반 이상이 사용되었는데 그 어의들을 보면 두 단어로 집약된다.

 

) 손윗사람, 형이란 뜻으로 원래는 큰, 위대한, 대단한, 등의 의미를 지닌 말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10:21, 27:42, 삼상18:17, 왕상2:22, 16:64, 61, 23:4

 

)연장자, 장로, 수염 있는 등의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정적인 형용사로 쓰일 때 주로 젊은 자와 구별되는 늙은 사람을 지칭 할 때 사용되었다. (19:32, cf. 렘애 5:12). 이렇게 성경은 노인을 존중하며, 백발은 노인의 영화요 자녀들은 그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20:29, 17:6).

 

그러나 자켄이 실명사로 쓰일 때는 전문적인 용어로서 그 문맥에 따라 한 사람의 장로를 가리키기도 하며 또 장로회라는 지역통치기구를 지칭하기도 한다. 50:7, 시편 105:22, 삼하1 2:17, 22:4,7, 9:11 등에 나타난다.

 

모세 오경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는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었고(2:16,18:12,17:5-6). 광야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70인의 장로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일이 있는데(24:1-9) 이러한 현상들은 장로회란 바로 통치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증거인 것이다.

 

장로들은 바벨론 포로기간 중에서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29:1, 8:1, 14:1, 20:1). 또 포로 이후에도 장로의 권한은 여전히 존재하였다(10:8, 14). 그들의 역할은 회당에서도 존재하였고 신약시대 까지도 존재하고 있었다. 구약에서의 장로회제도는 민의(民意)를 수렴하는 의회제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래의 장로직은 구약에서 종교적인 제사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시행정과 관계있는 것으로 언제나 민의(民意)를 표현하는 자치 (또는 代議)기구의 대의원의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에서의 장로직의 존재와 그 영향은 자치성의 원리와 습성을 배양시켰던 것이다.

   

B. 신약에서는 70인역이 번역되면서 구약의 자켄을 πρεσβύτερος 번역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의미는 손윗사람, 공직에 있는 사람, 영광을 얻을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장로라는 말은 주로 교회와 연관되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직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장로 혹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말이 파생된 것이다. 장로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έπίσκοπος라는 말로 이것은 감독하다또는 치리한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에서는 감독교회 (Episcopalian Church)라는 말이 나왔다.

 

2. 초대 교회의 시작과 조직

 

초기 기독교의 시작은 이미 앞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유대교회 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유대인들이 대망하여 온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우리는 예수의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기독교가 이방에까지 진출하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초기 기독교의 출현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의 분리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과 아울러 불순종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무엇보다도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야 하며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초기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이러한 새로운 가르침을 유대교적인 틀 안에서 어디까지 수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가장 훌륭한 유대교회의 진수와 다른 것이 아닌 윤리적 근본원리들로 받아들였고 또 예수 자신도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왔다고 선언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인 이 예수를 다른 유대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단순히 순교자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순종을 보이는 자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시는 구속의 죽음이었고, 이 죽음을 통하여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는 길을 연 것이다. 또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 무릇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전하는 것이다(cf. 3:16, 11:25-26).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종교적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다 하나인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다툼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오순절 사건은 해리보더가 그의 책 초대교회사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신약의 교회는 성전과 회당에서 모였던 엄밀한 이스라엘의 성전중심에서 벗어나 회중 중심의 색채를 띠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국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국제적이고 우주적이어야 함을 보여주었으며, 설교자가 제사장을 대신하였고 강단은 제단을 대신하여 선포의 사역을 강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핍박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교회에 가해진 핍박이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신자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복음의 확장을 꾀하게 된 것이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베드로는 욥바와 가이사랴지역에까지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의식을 버리지 못하였고 또 이방교회를 자기들 수하에 두려고 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는 결국 팔레스타인 안에서 기독교회의 쇠퇴를 가져왔다. 유대의식을 과감하게 떨쳐버리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시켰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단호히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6년경에 벌어진 독립운동과 같은 유대인들의 반란은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를 크게 갈라놓은 것이 되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독립을 위한 반란에 가담해 주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유대인 국수주의자들은 저주하였으며, 결국 이것이 기독교회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갈라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2) 초대 교회의 생활과 조직

 

오순절 사건 이후 초대교회의 생활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도들의 지도 하에 성장해갔다. 이 때는 어떤 특별한 조직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매일 늘어감에 따라 조직의 필요성이 교회 안에 부각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7명의 대표선출이다. 이들은 집사들이 아니었다. 후에 바울이 목회서신에서 교회 직분자들에 대한 자격을 논할 때 언급한 부분이 7명의 평신도 대표들이 한 역할과 유사한 것 때문에 대부분 집사라고 부르지만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사람은 집사로서 역할을 한 것보다 도리어 전도자로서 사역을 감당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외적 성장에 따라 사도들의 명령과 인준에 의한 직분자 선출 문제는 오늘날 사도들이 없는 현실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남겨놓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직분자 세우는 근거를 가져야 하며 반드시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선출되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초창기의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움직여져 특별한 조직의 형태는 갖추지 않았으며 오직 7명의 대리인들을 선출하여 사도들이 감당해왔던 구제의 임무를 맡겼을 뿐이다.

 

그러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을 망각하였기에 예루살렘교회에 일어난 핍박이 그들을 사방에 흩어지게 만들었고, 각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지교회에 필요한 직분자들을 임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각 서신에서 언급한 직분자들을 고찰하면서 성경에 명시된 초대교회의 조직과 직분자들의 기능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3) 교회의 직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교회의 직분(Office)이다. 직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직임에 해당되는 기능(Function)’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유기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능적인 차원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기능적인 측면에서 신약성경에 의거한 교회의 직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언급해온 직분은 크게 목사, 장로, 집사 세 가지이다. 사도는 초대교회의 특별직으로 보로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항존직(桓存職)1)에 해당하는 장로와 집사직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장 로(presbyter or elder)

 

초대 교회에서의 장로직은 사도행전 11:30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교회 형제들의 기근 문제로 말미암아 구호품을 전달하고자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보냈다. 또 사도행전 14:23절 이하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에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장로들을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부터 장로직은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해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장로직이 어떻게 하여 생기게 되었는가? 신약성경은 그 시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처음부터 교회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 회당제도에 근거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회당에서 주로 행정적인 업무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신약교회가 설립된 이후 사도들의 설교사역을 통해서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허다한 무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6:7) 그 중에는 회당에서 행정적인 업무들을 맡아보았던 장로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명칭이 신약에서 공직에 있는 자 손윗사람, 존귀한자의 뜻을 지닌 πρεσβύτερος이고 이들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έπίσκοπος이다. 이 뜻은 감독한다또는 치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장로들은 감독들이었고 감독은 치리하는 일을 맡은 장로였다.

 

신약교회에서 장로를 말할 때 다음 다섯 가지 직무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들이다(20:28, 벧전 5:2), 이 용어 사용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내 양을 치라"(21:15절 이하)명령하신 말씀에 그 근원을 둔다.

 

둘째, 장로는 감독자이다(20:28 cf. 1:1, 딤전 3:2).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셋째, 장로는 감독직과 더불어 치리자이다(딤전 3:5, 5:17, 벧전5:3, cf. 13:7), 그러므로 장로란 잘 다스리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다.

 

넷째, 장로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1:7). 청지기직이란 하나님의 것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위의 세 가지 기능은 성도들을 돌보는 직책에 더 초점이 있다면 청지기직은 하나님의 자산을 잘 관리하는 임무에 더 강조점이 있다.

 

다섯째, 장로는 그의 직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잘 가르치는 교사이며 권위자이다(딤전 3:2, 5:17, 1:9). 모든 장로는 잘 다스려야 하며 잘 가르쳐야 하되 모든 장로가 다 잘 가르치는 장로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목사와 장로라는 구분은 역할분담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직위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위치에 서 있으며 단지 기능면에서만 서로 주된 업무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초대교회에서 7명의 대표인들을 선출했을 때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까지 취급했었던 것처럼 목사는 잘 다스리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바울도 장로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딤전 4:14). 이렇게 장로들을 임명할 때 장로회에서 그들을 안수하여 세웠다. 안수행위는 신령한 은혜와 복을 내리며, 은사를 수여할 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cf. 9:18, 19:13, 6:5, 7:32, 8:23, 13:13, 8:17, 9:12, 17, 13:3, 19:6, 딤전 5:22). 초대교회의 7명의 대표들을 뽑을 때도 그들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 확정지었다. 그들은 회중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사도들 앞에 세워졌을 때 사도들이 안수하였다. 사도행전 20:28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엄숙히 장로직, 감독직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면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임무야말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장로들이 명심해야할 것은 그들 역시 대 목자장인 그리스도의 감독과 지도를 날마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집 사 (deacon)

 

집사라는 말은 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12:26, 13:4, 고전 3:5, 고후 6:4, 11 :23, 3:7, 살전 3:28, 딤전 4:6). 집사직은 διακονία 라는 추상명사에서 독특성을 찾는다. 이 단어는 집사로서 잘 섬기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딤전 3:10, 13). 교회의 처음 조직이 생긴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하는 일과 먹이는 일을 7명의 대표들을 통해서 집사란 용어를 사용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양들을 돌보는 일, 특히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은 교회의 가장 중점 되는 사업 중 하나였기 때문에(15:25-26, 2:10), 자연스럽게 집사직이 교회 안에 형성된 것 같다. 따라서 바울은 장로직을 말하면서 집사의 의무를 말하기보다는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였다. , 장로직과 집사직이 이미 초대교회에서 명확히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집사직의 자격은 무엇보다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딤전 3:9)여야 했다.

   

3. 교회 정치 형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교회조직이나 직분자들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움을 입은 자들이며,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자라야 회중들이 은사의 됨됨이와 신앙인격을 보고 선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현존하는 각 교파의 정치 제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현존하는 각 종파의 정치형태는 교리적인 차이와 성경 해석적인 이견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크게 나누어 감독정치, 회중정치 또는 독립정치및 장로정치이다.

 

1) 감독정치

 

흑자는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를 구분하지만(장로교화사 오덕교저, pp. 14) 교황정치는 감독정치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감독정치란 대주교, 주교 사제, 부주교, 집사 등의 여러 직분자들에게 교회를 통솔하게 하는 권력기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통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 등에서 유지하고 있는 정치제도이다. 다만 이 둘의 차이는 전자는 모든 권력이 교황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그가 지상의 모든 카톨릭교회를 통치하는 것이요 후자는 교회의 수장권이 군주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감독정치는 한 사람의 최고 통치권자 밑에 여러 계층의 직제에 의하여 움직이는 교회정치이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인본주의적 정치인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위치상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며 다만 기능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직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운 자들이요 회중들의 선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회중 정치 또는 독립 정치

 

독립정치를 지향하고 있는 회중교회의 정치인 회중정치는 교회의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생긴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나 가르침을 그들의 공식문서에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회중에 의한 목사 청빙과 교회운영 및 지교회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로회’(딤전 4:14)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일에 개교회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기 때문에 이것은 곧 개 교회의 무흠한 능력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것이다.

 

3) 장로 정치

 

이것은 지금까지 앞에서 직분자들을 다루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로정치라고 본다. 장로정치제도는 교회와 교회 및 직분자들과 직분자들 사이에 계급구조를 인정치 않으며 회중교회의 정치의 자율과 평등사상을 수용하지만 모든 지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연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장로회주의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 정치형태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감독주의나 교황의 통치권에서처럼 교회가 성경을 판단하고 인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성경에 의하여 교회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다스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로회주의는 개교회의 당회와 지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노회, 일정 지역권의 노회를 의미하는 대회와 전국적인 총회로 나누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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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와 부목사

 

한국 개신교회에서 직분을 바라보는 관점이 계서적(Hierarchy)인 관점으로 굳어진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목사, 장로, 집사는 평등한 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더구나 목사, 장로, 집사의 수는 피라미드 구조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구조는 자연히 성도들에게 목사는 가장 높고, 그 다음은 장로이고, 그 다음은 집사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준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일반적으로 장로의 수와 집사의 수를 비슷하게 함으로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여 왔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직분 안에서도 서열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목사 안에는 원로목사, 공로 목사, 담임목사, 수석 부목사, 부목사, 교육목사로 분화 되고, 장로 안에서도 선임장로를 정점으로한 서열이 매겨지며, 집사에도 안수집사와 서리집사로 구분되었다. , 단순하게 목사, 교사(신학교수), 장로, 집사라는 단순한 개혁주의적 직분이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그냥, 현대 교회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로마 카톨릭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안게 될 수 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종교개혁 당시, 로카 카톨릭 교회 안에는 수많은 직분들이 있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부사제, 등등. 개혁가들은 이러한 것이 성경에 전혀 맞지 않다고 공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누리게 된 단순한 직분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특히 직분과 관련하여 그들은 적어도 2가지 가장 근본적인 주장을 참된 교회에 확립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직분의 평등"이다. , 목사와 장로 집사는 하는 일만 다를 뿐이지 다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시킨다면, 집사는 장로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집사가 장로가 될 수도, 나중에 목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집사는 집사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장로는 장로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목사는 목사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교회에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목사직 자체에도 적용이 된다. 목사직 역시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목사직 안에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목사들은 다 동등하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다. 이것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엄격하게 적용시킨다면, 목사 안에 담임목사, 부목사, 협동 목사가 계서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목사직을 복잡하게 함으로 종교개혁 이전시대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목사에 대한 개혁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목사는 반드시 교인들의 선출에 의해서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개인적 소명은 교회의 소명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로마 카톨릭에서는 주교가 성직 임명에 있어서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주교의 임직은 교황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목사의 임직을 교인들에게 돌려 준 것은, 직분론에 있어서 개혁신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목사를 보도록 하자. 부목사를 교회에서 청빙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교회에 있어서 담임목사가 거의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물론 당회의 허락과 제직회를 통과해야 하지만, 거의 형식적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목사는 그냥 담임 목사가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한다.

 

더구나 담임 목사는 부목사를 해임시키는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장치들이 만들어지게 된 상황을 이해는 할 수 있다. 부목사가 자기 편을 만들어 언제든지 교회를 분열하게 만들 위험이 있으니 그 위험의 싹을 처음부터 자르는 것이 지혜롭다고 판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부목사로 하여금 교인들을 위한 목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를 위한 목사가 되게 한다. , 부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담임 목사의 의중이지, 교인들의 생각이 아닌 것이다. , 이것이 로마 카톨릭교의 주교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개혁가들은 바로 일반 성도들을 위한 목사직의 확립을 위해 그토록 싸웠는데, 오늘날은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담임 목사든, 부목사든, 목사는 교인들의 부르심을 받아 청빙되어야 함이 개혁신학의 근본원리이다. , 부목사는 담임목사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우리교회는 이 원리를 가능한 한 살리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운영상 담임 목사의 의중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교인들이 청빙하는 것도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교회의 헌법도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부목사는 교회의 전부 보다는 어떤 한 기관을 맞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회에서 부목사를 철저하게 심사하여, 섬기게 될 기관에 속한 성도들에게 물어보게 하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면, 중고등부 담당 부목사를 청빙한다면, 부목사의 지원자 중에서 당회가 잘 심사한 다음, 담임 목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을 2명 정도 선정한다음, 최종적인 선택은 중고등부 담당 교사들과 학부형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담임 목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현 교단 헌법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개혁교회의 근본 원리를 거스리지 않으면서 또한 담임 목사와 부목사의 긴장관계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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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의 기독교

 I. 3 세기의 박해

II. 3 세기 - 변화

1 세기가 "시작"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면, 2 세기는 "박해"로, 3 세기는 "변화"의 세기로 명명될 수 있다.
기독교가 고통을 당하는 기간동안 태도와 교리에서 변화가 생겼다. 변화가 있었던 몇 가지 주요한 영역은 다음과 같다.

A. 교회 직분(Offices)의 변화
2 세기에 목양자와 집사의 성경적 직무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목양자의 권능과 특성이 커갔다. 그리고 성직자 계급제도를 높이는데 영향을 끼친 성직자직분의 특성이 뒤따랐다.

3 세기 중반에, 성직자 계급이 나뉘기 시작했다. 감독과 장로 사이에 차별이 확립되었다.이후에, 많은 직분(office)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부집사, 성구 낭독자, 또는 성가대, 문지기, 시종직(acolytes)(감독 수종자), 무당(exorcists) 등이다.
오직 감독만이 임명하는 권리를 가졌다. 서방에서는 견진 성사(confirmation)의 개념이
생겼다. 견진례를 베푸는 권리는 오직 감독에게만 주어졌다.

성직을 계승하는 개념이 생겨났다.
요약하면 : 1 세기 - 성직자 없음 : 장로(감독) & 집사
           2 세기 - 평신도 위에 성직자가 등용
           3 세기 - 성직자가 여러 등급으로 나뉨

1. 이레니우스 (115-200 A.D.)
그는 사도직을 존속시키고 캐톨릭 전통을 전하려는 매체로서 감독제도 개념을 감독관구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단에 대적하여 신앙의 보존자요 보호자로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을 강조했다.   

2. 키프리안(Cyprian)(200-256 A.D.)
그는 희생 사역의 성직자직분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의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누구든지 감독과 같이 하지 않으면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B. 교회 행정의 변화
초기부터 성직계급제도의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씨는 1 세기에 뿌려진 것이다. 

1. 교회 성직 계급제도의 출현에 영향을 끼친 요인
다음과 같은 요인의 영향으로 캐톨릭 성직계급제도가 서서히 발전되었다.

a.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델들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 안으로 태어났다. 로마는 종교적 의식(sacralist) 사회였다. - 로마의 행정과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얽혀진 형태였다.
양자가 별개로 나뉘어서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국의 영토 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로마 행정의 지배를 받았고 당연히 로마의 다신교를 신봉해야 했다.
 

이 혼합 사회는 결국 로마와 참 기독교 사이에 충돌을 낳았고, 또한 기독교 안에 종교적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b. 유대 (구약) 체계
부분적으로는 초기의 유대교적 경향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는 교회 형태의 성직자 직분 개념에 대한 성경적 지지를 얻으려는 방법으로, 신약교회 체제(order)의 모형을 구약의 레위 성직자 직분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원래 종교적 의식 사회였다. 이스라엘 국가에 속한 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종교를 가져야 했다. 
 

구약 체제를 신약 교회의 실행에 적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약 성직자직분    →    신약 사제제도
구약 국가              →    신약 카톨릭주의
구약 할례              →    신약 유아세례
구약 유월절           →    신약 만찬
구약 종교적 의식   →    신약의 전례(예배식)


c. "모교회(Mother Churches)"의 승인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은 순수한 사도적 전통의 주(主) 매체(媒體)로 존중되었고, 자연히 이들 교회의 감독들은 큰 존경을 받았다.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감독관구로 나뉘어졌고, 각 감독관구는 여러 지방으로 나뉘어졌다. 각 지방에는 수도가 있었다. 수도에 위치한 교회의 감독들은 수도대감독(Metropolitan Bishop)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다른 지방 분구(分區) 주교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졌다.
수도대감독들에게 대주교(Archbishop), 수도대주교(Primates), 총대주교(Patriarchs)의 명칭이 주어졌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끼친 3 대 중심지는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도시들은 무역과 여행과 정치적 영향에서도 주요한 중심지였다. 

d. 이단의 출현
이단들의 등장으로 참된 그리스도 교회(Catholic church)는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외적 특성들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2.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 

보편적(우주적) 교회 개념은 이 시대의 시대적 발전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 우주적 교회 개념을 조장시킨 이는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200-258)이다.

신학적으로, 이같은 이상한 개념은 "교회(에클레시아)"와 "왕국(바실레이아)"을 동일시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이 엄청난 오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제안한 자들의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믿는이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실재(entity)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회는 그 본성에 있어서 지역적이고 가시적인 것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이 구원의 영역이기 때문에 "교회"도 구원의 영역이 된다는 논리적인 결과를 추가로 제안자들에게 제공했다. 키프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250 A.D.)

키프리안의 많은 교리는 그와 노바티안파와의 충돌의 결과로 발전된 것이다. 그는"한 개의 참된 우주적 교회(ONE true universal church)"를 제안하여 계급 제도를 반대하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였다. 

Cunningham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교회 안에 오류와 부패가 진보하게 된 것은 키프리안의 지대한 공헌 때문이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개념을 거부하고 신약 형태를 고집스럽게 고수하였다. 그 결과 제도권 교회들은 이들을 "교회 분리자(Schismatics)" 또는  "이단(heretics)"으로 불렀다.

 

3. 로마 교회
이 교회는 그 당시 큰 교회 중의 하나로서(롬 1:8), 다른 이들에 의해 큰 존경을 받았다.
a.로마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b.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다.
c.많은 교회들을 세우는데 활동적이였다.
d.많은 지역을 도왔다. 이 교회는 그들이 베푼 사랑으로 존경을 받았다.
e.로마 제국에 의해 첫 번째로 박해를 받았다.
f.그들의 순교자 명부에는 많은 유명한 순교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순교는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g.논쟁이 있을 때에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
h.사도 시대에 세워진 오래된 교회였다.

모든 시선이 이 교회를 향했고, 곧 교회 권위의 가장 상좌(上座)로 여겨졌다.
로마의 감독 빅터는 교리적 문제로 소아시아 교회들을 파문했다.
키프리안은 베드로의 우월성을 가르쳤고, 로마교회 감독직은 사제의 유일성(unity)의 원천인  베드로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교황제도를 옹호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3 세기에 로마 교회는 단지 교리의 해설자가 아닌 보호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로마 교회는 명령 또는 통제에 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무오하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C. 교회 기율(紀律)의 변화.

성경은 때로는 교회 회원의 자격 박탈을 가르친다(마 18:17).
 

3 세기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회개자(Penitent)라는 부류가 생겨났다. 이 부류는 파문되었다가 회개 의사를 표시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도록 특별한 장소에 앉아야 했다. 성직자들이 그들에 대한 벌을 정하였다.
비록 이 당시에는 참된 내적 회개가 강조되었지만, 결국 이 기율은 "고해성사 (Penance)"의 교리로 발전되는 기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 가운데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venial sins)와 용서받지 못하는 죄(mortal sins)가 구별되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후에 "밥티스마로 베푸신 은혜"를 상실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D. 교회 예배의 변화

 

1. 금욕주의의 출현

금욕주의는 근본적으로 동양 신비주의의 산물이다. 금식의 날을 정하는 것과 독신주의는 금욕주의의 초기 형태이다. 많은 경우, 수요일과 금요일이 금식의 날인데,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정했다가 후에 교령(敎令)으로 정해졌다.

2. 예배장소

그리스도인들이 모임 장소로 사용한 초기의 건물은 로마의 공회당(basilica)을 모방한
것이다. 이 공회당은 그 당시 재판소와 증권거래소였다. 성찬을 받는 사람(communicants)은 본당에, 회개자는 현관에, 관객은 별석(別席)(gallery)에, 성가대와
감독은 후진(apse)에 모였다.

3. 상징(Symbols)
3 세기말에 사람들은 "십자가의 상징"에 신비한 효능 같은 것을 부여했다.

 

E. 밥티스마(침례) 실행의 변화
3 세기까지, 모든 밥티스마는 성인을 물에 잠그는 것이라고 확실히 공표되었던 것 같다.교회들이 규례에 성례전의 강조 사항을 넣을 경우, 유아들은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으며,
물 뿌리는 양식을 실행하지 않았다.  몇몇 교부들(특히 터튤리안)의 고증을 연구한 결과
밥티스마의 실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얻을 수 있다.

 

1. 성인에게만 실행되었다.
2. 잠김으로 실행되었다.
3. 통상 긴 가르침이 선행되었다.
4. 자주 장대한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a. 이마와 가슴에 성호.
b. 밥티스마 후보자에게 우유와 꿀을 줌.
c. 소금을 baptizand의 머리 여러 곳에 둠
d. 256년 카르타고 공의회 후 밥티스마 전에 주문을 외우는 의식이 생김
e. 모든 밥티스마 후보자의 대부모(代父母) - 그들의 가르침을 보증

5.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짐
3 세기까지 밥티스마는 구원의 과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지켜져 왔다. 밥티스마는 원죄를 씻어버린다고 했다.


a, 터툴리안

비록 밥티스트와 유아세례자들이 똑같이 그를 자주 인용하였지만, 터툴리안은 밥티스마와 관련한 많은 반대적인 실행에 대항했다. (터툴리안은 제도권 교회에 속했지만 후에는 회심하고 몬타니스트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것)터툴리안은 조기 밥티스마와 대부모의 사용을 반대했다.

b. 키프리안

대조적으로 키프리안은 밥티스마에 성수가 (따라서 성수를 뿌리는 자 -사제)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성수는 성령의 깨끗케 하는 에너지를 운반하는 매체가 된다"
또한 키프리안은 편의주의적 실행으로 물을 붓는(pouring) 것을 처음으로 지지하였다.

비록 밥티스마가 여전히 물에 잠그는 것으로 실행되었지만, 초기의 가장 큰 규례의 부패는 아프리카 교회로부터 왔다. 첫 번째 예로 Clinic Baptism을 들 수 있다.
그가 곧 죽을 것으로 여겨지자 노바티안은 Clinic Baptism을 받아들였다. 그가 종이로
자기 몸을 완전히 두룬 후 그 종이를 물에 담그어서 마치 그를 물 속에 잠근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로부터 그 당시에는 물에 잠그는 실행을 올바른 양식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2 세기 동안 유아세례가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 학식 있는 유아세례자들도 충분히
인정한 것이므로 그들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F. 주님의 만찬의 변화
     

1. "애찬(愛餐)(아가페)" 이는 초기부터 많은 교회들이 지켜 온 애찬(love-feast)이다 - 행 2:46, 유다12박해를 받는 동안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모여서 음식을 나누었다. 때로는 주님의 만찬 후에 애찬이 있었으나 지나쳐서 문제가 발생했다.
 

2. Eucharist
이것은 주님의 만찬에 붙여진 초기의 명칭 중에 하나다. [헬라어 유카리스테로(Eucharisteo) - 감사(thanks)]. 성찬중시주의(sacrementalism)로 인해 주님의 만찬의 단순성과 순결성이 변했다.

 

3. 미사(Mass)

비록 오늘날 실행되는 것과 같은 미사가 얼마 동안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  용어는
만찬 때 성찬을 받지 않는 사람들(non-communicants)을 제외시킨 3 세기의 관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예비 예배(Preliminary Worship) 후에 밥티스마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퇴장시켰다. "퇴장(dismissal)"의 라틴어 "missa"로부터 "미사"가 유래했다. 

 

G.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케 하는 영향력은 3 세기에 극에 달했다. 이는 주로 한 사람,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파 출신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철학자(골 2:8), 오리겐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 오리겐의 생애
a.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남
b. 젊은 나이에 높이 평가받는 성공적인 교사가 됨
c.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A.D.)가 일으킨 박해 중, 202년에 생애의 극적인 변화를 맞이함.
그의 아버지가 순교를 당함

그의 가족이 빈곤하게 됨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강제로 도피하자, 203년에 18 세의 나이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됨.
 

d. 그는 천재이며, 광범위한 독서와 저술과 수집을 함. 그노시스주의자 암브로우스의
서재를 가짐

e. 신플라톤주의 창시자인 이교도 암모니우스 사카스(170-243 A.D.)의 문하생이 됨.
f.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함. 맨발로 맨 땅에서 잤으며, 스스로 고자가 됨.
g. 박해에 맞서는 용맹성과 극단적인 인내로 존경을 받음.
h. 213년에 로마를 방문함.
i. 215-219 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 거주함.
j.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서 231년까지 머무름. 231년에 알렉산드리아 지도자와
              다툰 후 추방당하여 영구히 알렉산드리아를 떠남.

k. 232년에 가이사랴로 가서 알렉산드리아 학교와 경쟁이 되는 다른 학교를 설립함
l. 데키우스 황제가 일으킨 박해 때 받은 가혹한 박탈과 고문의 결과로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가이사랴에 머무름. 

 

2. 오리겐의 믿음

오리겐은 일반적으로 위대한 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지만, 그를 숭배하던
자들조차도 그가 엄밀하게 정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a. 비록 많은 그노시스파들과 철학적 논쟁을 가졌지만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조에
               정통했다.
           b. 플라톤 철학에 몰두했다.
           c. 구약을 신약과 비유하여 알레고리로 해석하며 자주 구약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해석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따라 문법적 해석에서 자기 의견상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의미가 도출될 때마다, 문자적인 의미를 벗어났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이해하는 자에게 성경은 아무 소용이 없다"
              고 했다.

          d.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기사를 부인했다.
          e. 혼이 영원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믿었다(혼의 선재).
          f.  어떤 사람의 혼이 죽은 후,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고등 생명이나 하등
             생명으로 귀속된다는 혼의 윤회를 믿었다.
          g. 사악한 자도 형벌(연옥?) 후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을 믿었다.
          h.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다.
          I. 별들과 행성이 혼을 가졌다고 믿었다.
          j. 마귀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k. 목양자를 사제로 언급한 최초의 사람 중에 하나이며 감독은 중대한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l. 밥티스마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암시를 보였다.
         m.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후천년 견해를 주장했다. 대부분의 초기 교부들은
             전천년주의자(chiliasts)였다.

       3. 오리겐의 작품들
          오리겐을 유력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다. 그의 생애 동안 약 6000권의
          책을 저술했다. 초기 교부들이 작성한 현존하는 신약 인용문의 50 % 가 그가 작성한
          것이다. 7 명의 유명한 교부가 작성한 신약 인용문 목록에서 오리겐이 작성한 것이
          거의 18,000 개다.

          a. 그의 주요 작품들
            · 오리겐은 거의 모든 성경책에 대하여 주석을 썼다.
            · 그의 저서 "제 1 원리(De Principiis)"는 방대한 조직신학이다.
            · 그의 책 "켈수스 이단 반박"은 변증론이자 논쟁이다.

          b. 구약 본문에 끼친 그의 영향 - THE HEXAPLA
              헥사폴라는 6개국어 구약 대조(對照) 성경이다. 6 개의 난으로 구성되었고, 각
              난은 구약 본문의 번역본을 실었다.  
            · 그 크기가 대략 6500 페이지, 50 권의 대형 두루마리에 달한다.
            · 약 250 년에 완성되었다
            · 그는 7 명의 속기사와 7 명의 필경자와 같이 일했다.
            · 첫째 난
               히브리어 본문으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후기 마소라 본문과 실질상
               동일한 것이다.
            · 둘째 난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음역이다
            · 셋째 난
               아퀼라(Aquila)(95-137년)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아퀼라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회심한 후에도 점성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문을 당한 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다.
            · 넷째 난
               에비온파였던 심마쿠스(Symmachus)(160-211 년)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 다섯째 난
               오리겐 자신의 작품으로 통상 70 인역(Septuaginst)과 동등시된다. 오리겐은
               히브리어에 대하여 불완전한 지식을 가졌으며, 그가 당시 유포된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 본문을 정열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 여섯째 난
               또 다른 에비온파 데오도티온(Theodotion)(160-211년)이 만든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 헥사폴라는 가이사랴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침입하여 분실 또는
               파괴될 때까지(638년) 이 곳에 남아 있었다.
            ·  5 번째 난은 오늘날까지 모두 잔존하며, 바티칸 사본(B) 필사본, 시내 사본(K),
                알렉산드리아 사본(A), Ephraemi Rescriptus(C)에서 발견된다.

          c. 신약 본문에 끼친 그의 영향
           오리겐은 자주"추측 교정(Conjectural Emendation)"이라는 본문 비평학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신약 본문을 고쳤다. 추측 교정이란 "당신이 생각하기에 본문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라!"를 뜻한다.    
                
    H. 교리의 변화
    
         2 세기의 대표적인 이단이 그노시스주의였다면 3 세기는 일위신론(一位神論)
       (단일신론 : Monachianism)이다. 이 이름은 터툴리안이 하나님의 단일성(unity)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하려는 시도로 계발한 가르침에서 적용한 것이다. 일위신론은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

         이 시대에 발달된 또 다른 이단은 "성자종속론(Subordinationism)"이다.

         1. 역동적 일위신론(Dynamic Monachianism)
            이것은 사실상 에비온 이단의 존속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지하는 이론이다.
            이 일위신론의 형식은 비잔틴의 데오도투스(Theodotus)가 처음으로 가르쳤으며,
            대부분은 특히 사모사타(Samosata)의 바울이 가르친 것이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로고스(Logos)"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었으며, 인간의 이성이 사람 안에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다. 비인간적 권능(로고스)은 사람인 예수 안에
            들어가서 점차적으로 그를 신성화했다. 비록 그가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할지라도"사람인 예수가 그렇게 신성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신성한 영예
            (honor)를 받기에 합당하다".

            이 이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기 보다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2. 양식론적 일위신론(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
            Patripassianism/사벨리우스주의 :
            이 이단은 신격의 세 인격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세 양식으로 생각한다.
            이 이론은 스미마의 Prakeas 와 Noetus이 최초에 주장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제안자는 사벨리우스이다. 동부에서 이 교리는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
            불린다.
            사벨리우스에 따르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은 신성한 본질을 스스로 계시
            하는 세 양식(modes)또는 상(phase)의 명칭이다.이 이론은 '아버지가 육체가 되어서
            우리 안에 거하셨다'고 주장한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분은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Patripassian 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Patri = Father, Passion = suffering)

         3. 성자 종속설(Subordinationism)
            이 견해는 오리겐이 가르쳤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께 종속된 2 위(secondary divinity)
            를 가진 한 신(a god)이지 하나님(the God)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성령은
            아들에게 종속되고 실제로 아들이 창조한 것들 가운데 있다고 가르쳤다.

           "오리겐의 삼위일체 교리는 ....아리우스파에게 디딤돌을 제공했다"
           "아리우스파의 논쟁의 뿌리는 위대한 오리겐의 그리스도론의 모순된 원리(elements)
           에서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I. 기억해야할 사람들

         1. 오리겐(184-254) - 부패한 성경의 아버지
         2. 키프리안(200-258) -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
         3. 유세비우스(260-339) - 부패한 사학의 아버지
         4. 어거스틴(354-430) - 부패한 신학의 아버지

III. 노바티안

     노바티안은 신약 신앙 및 반열의 노선에서 몬타니스트의 뒤를 잇는 다음 연결점이다. 2 세기의 몬타니스트 운동이 "모든 믿는이의 성직자직분 논쟁"이라면, 노바티안 분파는 "교회 기율 논쟁(church discipline controversy)"으로 불릴 수 있다.  양 운동은 신약교회의 순결과 관련된 것이다. 그들은 영 안에서 밥티스트였고 복음의 진보를 낳았다.

    A. 지도자
         노바티안파란 이름은 지도자 노바티안 때문에 명명되었다.
         노바티안은 250년경에 이교 철학의 배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가 병들어 곧 죽을 것으로 여겨지자, 노바티안은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고
         "clinic baptism"을 받았다. 회복된 후 그가 다시 올바르게 밥티스마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노바티안은 감독 파비안(Fabian)에 의해 로마교회의 장로(목회자)로 임명되었다.

    B. 노바티안의 분파
         데시우스 트라얀 황제의 칙령으로 교회는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상과 황제의 수호신에게 희생물을 드렸던 자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고
         하자, 심각한 논쟁이 고조되었다.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주장되었다.

         1. 엄격한 기율
           배교에 대한 본성 때문에 그러한 자들은 결단코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가능성이 거절당한 것은 아니었다)

         2. 엄격하지 않은 기율
            그러한 사람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유예 기간이 지난 후 교회 일원으로
            복직될 수 있다.

            노바티안파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은 로마인 목양자 Hippolytus(?-235 A.D)이다.
            그는 이레니우스의 제자였으며 티버 강에서 순교 당했다. 그는 엄한 규율의
            주창자였으며, 스스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노바티안은 엄격한 규율의 견해를 견고하게 지지했다. 250년에 파비안 감독이
            죽자마자, 그는 공석의 감독직을 가지고 유명한 코르넬리우스와 경쟁을 하였다.
            (코르넬리우스는 엄격하지 않은 규율을 지지했다) 코르넬리우스가 감독으로
            선정되자 노바티안은 교회의 소수 무리와 함께 교회를 떠났다.

           이 분열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를 비난하는 많은 거짓 고소가 유포되었다. 즉, 이 큰
           분열의 원인이 노바티안의 권력에 대한 개인적 야망 때문이며, 그가 당선되지 않자
           악의로 대항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거짓 고소가 유포되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
           논쟁은 교회의 기율에 관한 것이며, 노바티안은 실제로 자신이 원했던 바와는 반대로
           분열되어 나온 그룹에 의해 목양자로 뽑혔다.

    C. 노바티안파의 교리

         노바티안파의 교리는 다음을 지지했다.
    
         1. 교회 일원의 순결
            교회는 모든 배교, 불순물,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2. 엄격한 교회 기율

         3. 배교자의 재 밥티스마

         4. 밥티스마
           a. 잠김에 의해
           b. 성인에게
           c. 장대한 의식이 없이
           d. 교회의 권위 위에
 
         이들 교리는 기독교계 가운데서 실제적인 영구한 분열을 낳았다. 노바티안 교회들은
         더 이상 제도권 교회들의 밥티스마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 분열은 251 년에 발생했다.

    D. 노바티안에 대한 고소

         우리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항은 노바티안이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으며 소위 clinic baptism을 받아드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1. 밥티스마에 관한 노바티안의 가르침
            밥티스마는 교회의 권위에 의해 그리고 오직 잠김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고 명확히
            가르쳤다. 그는 제도권 교회로부터 온 모든 자들에게 다시 밥티스마를 베풀었다.
            이 사실은 비록 준비된 증거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올바르게 밥티스마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밥티스마는 사람이 아닌 권위가 중요하다.
            비록 노바티안이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지만, 그는 밥티스마에 관한
            권위가 교회와 관련한 것이지 밥티스마를 집행하는 사람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노바티안파의 밥티스마는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E. 노바티안 운동의 영향
   
        그 이름과 초기 시작은 로마였지만 분열을 일으킨 의견은 널리 퍼졌고, 운동은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로마에서 보다 앞서서 250 년에 카르타고에서 유사한 분열이 일어났다. 키프리안이
        감독으로 성급하게 선임되자 노바투스라는 이름의 인자한 목양자와 Felicissimus라는
        이름의 집사가 교회를 떠났다. 그 때 회개자에 대한 논쟁에서 키프리안이 보다 더 엄격한
        견해를 가졌으나, 분열 후 노바투스는 그의 입장을 바꾸고 엄격한 노바티안 운동에
        합류했다.

         254년에 이들의 반대자들은 이들이 프랑스를 이들의 교리로 오염시킨다고 고소했다.

         역사가 샤프는 노바티안파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진지함 덕분에
         동쪽으로 여러 지방에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6 세기까지 전래되었다고 언급했다.
         이들은 피리기아에서 몬타니스트의 잔류자들과 결합했다.

         "노바티안파는 최초의 재침례교도(Anabaptist)였다 : 반대자들의 사역과 성례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참된 교회가 될 것을 주장하며, 카톨릭 교회로부터
        온 사람들 모두에게 다시 밥티스마를 받을 것을 필수적으로 강요했다. 이 무리는
        소아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얻었는데, 거기서 많은 몬타니스트가 합류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노바티안파는 6∼7 세기까지 잔존했다"

        "로빈슨 박사는 그들의 존속이 종교개혁과 재침례교도 운동의 출현때까지라고 밝혀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바티안파의 본을 따랐고  제국 전역에 걸쳐 순결한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200 년 동안 번창했다. 후에 가혹한 법 때문에 부득불 희망자를 은밀히
        가입시키고 몰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만 했을 때, 그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특징을
        이루며 종교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들의 순결한 삶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을 '순결한'을 뜻하는 카타리(Cathari)라고
        불렀다. Mosheim은 말하기를 "더욱이 그들은 캐톨릭교회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
        를 베풀었다. 다른 단체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를 주었기 때문에 재침례교도라고
        불렸다. 제 4 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 재침례자들을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법령을 포고
        했다. 로빈슨 박사는 그들을 Trinitarian Baptist(삼위일체를 믿는 밥티스트) 라고 했다.
        그들은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존엄과 권위에 관하여 모든 목양자들의 동등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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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전도훈련을 해야 하는가?

 

1) 주님의 새벽 기도는 전도를 준비한 기도였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 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5-38)

주님은 새벽 미명부터 전도를 위한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는 전도를

위하여 왔음을 말씀하셨다.

새벽기도를 나만을 위한 기도 시간으로 가질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당부하신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전도는 주님이 가장 소원하는 일이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분이므로 년2회 이상 새벽예배 시간을

전도를 위한 “특별 새벽 전도 훈련”시간으로 계획하여 전교인이 새벽시간에 전도 훈련을 받고

낮시간에는 전도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도록한다.

 

2) 주님의 삶은 제자들을 전도자로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택하신후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말씀하시고 12명의 제자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키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복음 전도를 위하여 오셨으며 이 땅에서 3년동안 주님의 발자취를 보면

공생애 대부분이 제자들을 전도자로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3) 교인들은 왜 전도를 못하는가

 

앙케트를 통하여 조사를 하면 교인들이 전도를 못하는 이유는?

1) 전도를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하는 마음

2) 전도 은사가 없고 전도할 성격이 아니며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

3) 막상 전도를 하려고 해도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오고 있다.

 

4) “21일 생활 전도”통한 해결방법

 

위의 세가지 문제를 “21일 새벽 전도 훈련”을 통하여 해결한다.

첫째: 새벽 시간을 통하여 전도를 왜 해야 하는지 이유와 사명감을 깨닫도록 하고 그날 낮시간에

      실시할 구체적인 행동훈련을 지시 받는다.

둘째: 낮시간에 개인별로 지시 받은 사항을 실천하도록 함으로서 행동훈련을 통하 여 전도에 자신감을

      갖도록 한다.

셋째: 매일 전날 실시한 상항을 점검하고 격려와 독려를 하며 지속적인 실천을 통 하여 전도를 생활속의

      습관으로 만들도록 한다.

 

5) 전도하고자 훈련을 받아야 한다.

 

평소 전도를 안하던 성도들에게 설교 시간을 통하여 전도에 대하여 간절하게 당부하고 호소할 때에

“아멘” “아멘”이라고 입으로는 화답을 잘 하지만 나중에 집에 가서는 언제 그랬냐는 표정으로 전도를

잊어버리고 있다.

전도는 설교 시간에 듣는 당부와 교육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훈련을 통하여

 

1) 전도를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는 길뿐이며

2) 행동이 반복되어서 누구를 만나든지 즉시 자연스럽게 전도 행동이 나올 수 있도록 생활속의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훈련을 받지 않고 전도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은 마치 군대에 갓 입대한 신병이 총 쏘는

   법을 모르고 전투현장에 나가는 것과 같다.

   모든 평신도는 전도하고자 원하면 전도 훈련을 통하여서 실천하고, 반복하여 전도를 습관으로 만드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6) 유능한 전도자가 되기 원하면 훈련을 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전도 훈련이 없이 사람들이 “우리 교인들은 전도를 안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전도자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는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하여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전도 훈련을 실시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쉽고 실제적인 전도 방법을 배우고,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반복하여 익히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교히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으로 말씀에 양육을 받았으면 이제는 나가서 증거하는 후속조치로

전도 운동이 벌어져야 한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해서는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배우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나가서

증거하는 일이다.

많은 교인들이 성경을 몰라서 전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증거하는 훈련이 안돼서 전도를

못하는 것이다.

 

7) 교회는 유능한 전도자를 양성하는 전도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

 

교회 성장 비결은 평신도를 얼마나 전도 역군으로 잘 훈련시켰느냐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교회는 전도 훈련으로 유능한 전도자를 많이 양성하여야 한다.

전도는 복음이란 소프트웨어(Software)와 전도인이라는 하드웨어(Hardware)가 균형있게 무장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프트웨어적인 말씀연구는 잘 되었으나 하드웨어적인 전도자 양성

훈련을 등한시 함으로서 좋은 연장은 많으나 농부가 없는 격이 되었다.

교회는 유능한 전도자를 양성하는 전도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

전도자의 능력이란 믿음생활의 연륜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1년에 한 두명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는 집사들이 너무 많다.

유능한 전도자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에서 실제적인 전도 훈련으로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수고를 통하여 양성되어야 한다. 훈련의 수고와 노력이 없이 “우리 교인들은 전도를 못해”

라고 말을 하는 것은 씨앗을 심지도 않고 추수할 것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

 

8) 10%의 핵심 멤버가 먼저 변해야 한다.

 

어느 단체든 그 단체를 이끌어 가는 것은 10%정도의 핵심멤버들에 의하여 움직이며 그들의 행동에

따라서 그 단체가 성장하느냐 후퇴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단체가 변하고 성장하려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10%정도 사람들이 먼저 변하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평소 전도를 안하던 교회의 성도들이 일순간에 사명감을 갖고 전도 역군이 되어서 전도하러 나서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장로, 권사, 구역장, 집사등 교회의 핵심적인 10%의 중직들이 먼저 변하여

전도하러 나설 때에 구경꾼 같은 나머지 성도들도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어느 교회든 그 교회가 놀랍게 성장한 이면에는 초기에 일부 핵심적인 멤버들의 피땀어린 헌신과

수고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10%의 핵심 멤버들이 영혼 구원을 위하여 변하고 솔선 수범을 보여 줄 때에 나머지 90%평신도들이

본 받고 따라 오는 것이다.

그러나 10%의 핵심 멤버들이 변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다면 아무리 새신자들의 전도열이 뜨거워도

교회 중직들의 텃세와 시기로, 은연중에 나오는 찬물을 끼얻는 언행들이 걸림돌이 되어서 결국 교회는

다시 조용해지므로 교회는 핵심적인 멤버들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교회의 중직들은 비록 열매가 없어도 시작한 모습을 보여 전도의 불씨가 되어야 한다.

 

9) 제자 훈련 성경 공부는 전도 훈련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마28:19)는 말씀은 불신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고

그들에게 복음 전파 즉 전도 훈련을 시키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수영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많이 알고 있어도 직접 물 속에 들어가 수영을 할 줄을 모른다면
알고 있는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자, 훈련, 전도”세단어를 서로 분리시켜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제자란 말을 영어로 disciple로 표현하며 훈련을 discipline로 표현할 때 같은 언어적 어원을 갖고 있듯이

제자란 훈련을 통하여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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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박 한 응목사                        
본  문 : 로마서 12 : 1 - 3
제  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Series 1)
찬  송 : 213, 214, 321, 325, 327, 539

        할렐루야!!
        오늘도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려고 오늘 거룩한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충만하게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예>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저, 목사님 긴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예,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라고 대답을 하자 그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 목사님, 저 아무래도 권사를 못하겠습니다.’
        ‘아니 권사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습니까?’
        ‘일도 많고 너무 바쁘고 해서 집사하고 바꿔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권사는 못하고 집사는 할 수 있습니까?’
        ‘네 가만히 보니까 집사는 심방도 하지 않고, 또 하는 일도 별로 없고, 이름만 가지고 있어도 되잖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우리 교인들 중에는 권사라고 해도 심방 한 번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속장이라고 해도 속회 심방 한번 하지 않는 속장도 있습니다.
        집사, 권사라고 해도 새벽기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달에 감사헌금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안 한다고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으면 따라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은 주님 심판대 앞에 가 보아야 합니다.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불신앙적인 행동이 나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라 행하여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신앙생활이 남에게 믿음의 상처를 준다거나 실족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잘못하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기왕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도둑놈 따라가면 결국 도둑놈 됩니다. 노름꾼 따라다니면 결국 노름꾼 됩니다. 게으름뱅이를 따라가면 결국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민수기 16: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바네아에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더불어 당을 조직하고 모세를 반역하였습니다. 이때 고라를 추종하는 사람이 250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땅을 갈라서 생매장을 시켰고 추종하던 250명은 제단에서 불이 나와 모두 타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공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함께 자라지 않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가라지를 먼저 묶어 지옥 불에 던져 태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9-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또한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사람은 더 악해지고 선한 사람은 더 선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가 가까울수록 믿음 있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음 없는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과 멀어지고 교회와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집니다.
        (계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 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완악 하여져서 바른 교훈이나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래서 신앙으로 말씀으로 권면을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여야 하늘의 신령한 영적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여 주시며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황충을 금하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는다고 아무리 설교를 하여도 마이동풍이고 권면을 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사, 권사, 속장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르기 좋으라고 붙여준 이름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그 직분이 어떤 것이든 간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도 그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에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겔16: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 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지금까지 쌓여만 가던 모든 죄악은 모두 아침 안개의 사라짐같이 빽빽한 구름이 물러감같이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로 씻음 받아 거듭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래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방법론이 제기되겠습니다만 저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사랑이요 은혜이며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만약에 우리에게 예배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허락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선교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입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까지 예배에 대한 말씀으로
        오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오늘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
        다음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지 말자”
        그리고 다음 주일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이렇게 시리즈로 말씀을 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아멘!>
        우리 ○○교회 성도들은 기왕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1.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건축케 하신 후에 성소에서 만나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출30:6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날 것이라” 고 하셨고 왕상 9:3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시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광야가 아닙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골방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안방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1) 하나님과 만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삭개오는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하여도 평생소원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오시고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정이 구원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②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죽어가면서도 메시아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③요한복음 4장 5절 이하의 기록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은 남편을 다섯씩이나 거느린 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온 성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④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일평생 주님을 섬기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장사지낸 지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과 만나고 예수님과 만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출15:26) 고 말씀 하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② 여리고성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③ 열 명의 문둥이를 고치셨습니다.
       ④ 거라사 지방의 군대 마귀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만나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병 고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는 줄로 믿습니다.<아 멘!>

(3) 하나님을 만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 창21:14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난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지고 온 물과 떡이 모두 떨어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방성대곡하여 울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샘물을 주시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② 요한복음 6장의 말씀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5병2어를 가지시고 저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병2어를 가지고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였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입니다. 바로 한 소년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③ 왕상 17:8절 이하의 말씀에는 사르밧의 한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구를 듣고 순종하였을 때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기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예배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집을 나간 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허랑 방탕하여 허비한 후에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들어서 아사 상태에까지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그 아들을 얼싸 안았습니다.
        아들이 생각하기엔 아버지가 도무지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아들은 고사하고 그저 품꾼으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모든 일을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아들로서의 모든 권한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고,
        또 기억치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렐루야!!

 

3.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수 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5:8-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고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만이 할 수 있습니다.

 

4. 예배는 우리의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 귀한 시간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식물들까지도 성장할 수 있는 양식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영적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오직 귀한 시간이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 시간이야 말로 얼마나 귀한 시간인 것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예배를 소홀히 하는 성도가 있어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분을 내시며 저들을 책망하여 내쫓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영적으로 기갈이 들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갈급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이 시간마다 순간마다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07:9)
         (사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기름진 것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심과 두려움과 세상의 재리와 염려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가 되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하나님의 주시는 신령한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22;1-14절 말씀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이 종들을 불러 청한 사람을 모셔오라고 하였지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사양을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청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무슨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고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 상태는 지금 아사(餓死) 상태인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말세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암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 하여 피곤하리라”
        이와 같은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이때에 오늘 예배드리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여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 오히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2) 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예배는 피 흘림이 있는 예배입니다.
        피 흘림이 있는 예배는 희생과 헌신과 감사가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희생이 없고 감사가 없고 제물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 쌓는 곳에 강림하셨고, 제물 있는 곳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또 제물 있는 곳에서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3) 새롭게 변화된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는 것” 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으로써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세상 것을 다 끊어버리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성령이 역사 하시고 거듭남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며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옷도 아무렇게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또 지각이나 하고, 와서는 졸기나 한다면 이런 예배를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부르짖고 찾아서 만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렘29:12-14)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막혔던 모든 문제들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구원의 문이 열려지고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모든 질병도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아무쪼록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총과 축복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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