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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룩한 칭호

 

말씀 : 요일3:1~6

 

1.가장 위대하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칭호

 

여러분, 세상에서 뭔가 특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칭호가 붙습니다. 성왕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또 일반적으로도 음악의 아버지, 축구의 황제, 가왕 누구누구, 요샌 뭐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여신, 얼짱, 몸짱 그러면서 그럴듯한 칭호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복되고 거룩한 칭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칭호로서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 등의 칭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속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실 분 등등의 의미이지요. 세상에 이렇게 거룩하고 복되고 위대한 칭호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고 능력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품이 좋고 엄청난 업적과 공로를 남겨 대단한 칭호를 얻어도 하나님께 적용되는 칭호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도 안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간에 붙여진 칭호 중에 그래도 어느 정도 하나님께 대하여 붙여진 칭호에 근접하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는 칭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누구누구, 성도 누구누구 이런 칭호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물론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칭호에는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세상의 다른 어떤 위대한 칭호나 타이틀이나 지위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물론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지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갔을 때 어떻게 됩니까? 거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됩니다. 물론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거룩과 의와 선과 사랑 등의 영화로운 속성에 있어서는 거의 예수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영광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칭호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뭔가 특출 나서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멋진 칭호를 얻는 것도 귀한 일이고 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칭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 들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1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보라.’ 너무나 엄청난 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의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늘 자부심과 긍지 속에 감사와 기쁨과 거룩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자녀가 된 과정

 

1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컴을 받게 하였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엄청나고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경이로운 사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만해도 엄청난 사랑인데 게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라도 그런 일을 하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과 사람과는 그 비중이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다릅니다. 물론 사람도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을 살린다면 대단한 일이고 칭찬과 상급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심지어 더럽고 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숭고한 헌신도 그 가치가 줄어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물론 그 결과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여 몇 사람을 살린다해도 숫자적으로 얼마 안될 뿐 아니라 그 영혼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못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고 흠없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럴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은 수억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사랑과 헌신과 섬김을 우리가 어디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놀랍고 크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랑을 받은 자인지를 늘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엄청나고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나서 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안다는 것은 마지막때에 주님이 오실 때 우리도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되어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게 됨으로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장래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거룩하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주님이 재림하시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는 확연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주님과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영화로운 몸을 덧입어 주님처럼 거룩하고 영화롭고 선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빛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엄청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무슨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이런 특권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감히 주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특권이요, 주님처럼 되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하고 영화로운 은총들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나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삶 또한 있어야 합니다.

 

오늘 3~6절의 말씀이 그 말씀인데요,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라는 것은 장차 주님과 같이 되어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소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는 이 소망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물론 어느 정도 소망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 질 수 없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고, 만약 범죄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어야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무엇입니까? 물론 겸손 사랑 자비 긍휼 용서 의 선 지혜 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물론 거룩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받쳐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되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방향과 목적에 부합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된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을 버리고,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의 의미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모든 욕심 욕망 미움 저주 시기 질투 불법 악 폭력을 버리고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날 우리가 힘이 없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시스템을 멋지게 하고 재미있게 유쾌하게 편안하게 해 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봉사하고 선을 행해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신뢰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목적을 그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에 대하여 뭐 그렇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진실하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우선 자신의 심령속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신뢰받게 되고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서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랍고 귀한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써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동시에 거룩하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함으로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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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떳떳한 인생(요일3:18-22)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떳떳한 삶을 위하여

말씀 : 요일3:18~22

 

법이 왜 필요할까? 그밖에 무언가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 같은 질서나 규범이나 관례나 이런 것들은 왜 필요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결코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애당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굳이 그런 규제를 두지 않아도 자기 이성과 영으로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아니 사실은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스스로를 통제하고 제어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성과 지성과 감성과 이성이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진리와 선과 의를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이 없다. 때로는 분별을 하면서 그 분별한 선과 의를 따라 살아갈 능력이 없다. 그래서 법과 규범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법과 규례와 질서를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에서 최대한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두말할나위도 없다. 모든 인생이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죄와 무지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과 인간과 세상과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진리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물론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선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춤으로 저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또한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1.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이 나타남

요일3:18,1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가 정말로 사랑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마음이 있다면 행위도 따른다. 물론 정말 마음은 원인데 여건과 상황이 안돼서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마음에 별로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으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단숨에 달려가지만 마음에 없으면 안강이라도 안 달려간다.

그래서 마6: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고, 약2장에서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셨다. 당연하지 않나?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말로만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계속 말만 하면 위선이 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혹은 상황과 여건이 안돼서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뭐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에 있다는 것도 결국 자기 방어와 변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안 그런가? 정말로 사랑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결국은 한다. 주님을 위한 일도 그렇다. 주님을 위해 드릴 물질도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것이나 자녀를 위한 것은 한다.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시간과 물질이 없고 여건이 안된다고 하지만 자녀를 위해서는 한다. 물론 다는 못하겠지만 주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도 자녀를 위해서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렇게 믿음이나 사랑이 행위로 나타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께 속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불법과 거짓과 악과 더러움 속에 살면 안 되지 않는가? 빛 가운데 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산다면 어떻게 빛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는데 여전히 더러운 모습으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8:12절을 보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빛이신데 그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둠 속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수님이 빛이시니까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그 빛을 받아 당연히 빛의 은혜를 누려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엡5:8,9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진리와 생명과 의와 선과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나온 자로써 온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가자. 다만 따라 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굳세게 됨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할 때에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침으로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하여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을 물리치고 빛과 같은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진실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선을 따르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동시에 나도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스스로 위축되고,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부끄럽고 그래서 결국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렇게 주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결국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됨으로 더더욱 빛의 은혜를 누리기 못하고 어둠의 세력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깨끗하고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당당하다. 마음이 뿌듯하고 자존감이 있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죄와 향락과 불법과 불의에 빠지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다. 숨으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범죄는 주로 어두운 곳에 이루어진다. 물리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의미적으로도 숨겨진 곳, 은밀한 곳,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선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한 일이라면 왜 숨어서 하겠는가? 일부러 나보란 듯이 하지... 그래서 잠28:1절에서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과 진리를 따르되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평안과 가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된다.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나 죄가운데 있거나 하나님 앞에 뭔가 떳떳하지 못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없어진다. 뭔가 그늘진 모습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서, 특별히 사랑의 도를 따라서 그런 말씀들을 실천해 나아갈 때에 정말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자부심을 가지고 생기있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실족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말 믿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로 최선을 다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과 같다. 정말 마음에 원이면 원하는 것을 향해 힘써 가야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실족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별로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실상은 마음에도 그다지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된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은 주님께 맡기고, 그저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역사 감당하며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4.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구하는 바를 얻게 됨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 그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앞의 2:2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면 그를 아는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 알리라고 하셨다. 2: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였다. 2:29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라야 그에게서 난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선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을 향하여 갈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기도라고 해서 맨날 달라는 기도만 드리지도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응답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과 혀로만하고 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기도응답을 기대하겠는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주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힘들고 부자유스럽고 어렵고 번거롭고 통제하고 제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물론 그래도 안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의기소침하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당당하고 생기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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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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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제목 : 우리를 택하신 이유

말씀 : 딤전1:12-17

우리는 정말 감사할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정말 행복하게 기쁘게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받은 바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게 어딨나? 내가 무얼 잘나고 선하다고 날 찾아와 만나주셨나? 뭐 남보다 선하다고 날 구원해 주셨나? 내 생명, 시간, 육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 천가지 만가지 억가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겠나!

만약 우리가 자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어 별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데 감사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근심 걱정 염려 불평하며 산다면, 아니면 맨날 더 달라고 노래를 부른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적으로라도 기쁘게 살아야 한다. 부모 앞에서 억지로라도 행복한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1.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직분 맡겨 주심에 감사함(12,13절)

딤전1:12,13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예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사와 기쁨 속에 죽도록 충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나 같은 것을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설령 충성되이 여겨 맡겨주신 것이 아니라 하도 일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세워주셨다고 할지라도 감사하고 영광 돌릴 일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 같은 것을 주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나 같은 것을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게 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크나큰 영광인가?

게다가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추한 존재였나?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나? 얼마나 많은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었나? 그런데 그런 나를 주님의 자녀로 받아 주신 것이다. 주님의 자녀라니 얼마나 영광인가?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가? 왕자가 되는 것도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재벌의 자녀가 되는 것도 제법 누릴 것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까짓 것들과 비교나 되겠는가?

또한 우리 각자에게 귀한 달란트와 사명을 주셨다. 직책과 직분을 주셨다. 이게 보통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명암에 근사한 직함을 새겨 가지고 다닌다. 무슨무슨 박사 ○○○, 변호사 ○○○, 의사 ○○○, 국회의원 ○○○, 나는 목사 조학환이다. 나는 이게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장로 ○○○ 이것도 엄청난 영광이다. 꼭 목사 장로만 그런 게 아니다. 권사 ○○○, 집사 ○○○. 꼭 직분자만 그런 게 아니다. 성도 ○○○, 이것도 얼마나 굉장한 이름인가? 아니 사실은 이게 가장 영광스러운 명칭이다. 성도, 대단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자녀. 이 이상 더 귀한 이름이 어디 있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다. 이게 상상이 가나? 세상의 무슨 직함이나 직책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단 말인가? 또한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다르다.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빛으로 생명으로 은혜로 인도하는 일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귀하겠나? 세상에 어떤 일이 이 일보다 아름답겠나? 중요하겠나? 보람 있겠나? 가치가 있겠나?

게다가 나 같이 자격도 없는, 공로도 없는 인생에게 이 귀한 생명과 이 귀한 믿음과 이 귀한 사명을 맡겨 주셨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요, 그저 영광 돌리며 기쁨으로 감당해야 되지 않겠나? 그러므로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주의 풍성하신 은혜에 감사함(14절)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주님의 자녀가 되고 게다가 귀한 직분까지 맡겨 주신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다. 다시 말해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이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셨든지 그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질병이나 환난을 통해서 했어도, 설령 나 혼자 믿게 되었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이다.

안 그런가? 뭐 우리가 그렇게 남들에 비해 특별하게 착하게 의롭고 아름다운 삶을 산 것도 아니다. 더 겸손한 것도 아니고, 더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다른 사람들은 놔두고 나를 부르셨는지는 모른다. 그건 그냥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하셨다는 것이요, 그것이 결코 내 의와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의와 공로와 겸손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우리를 부르셔서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말 그저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하고,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 채워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미련하고 부족하고 직분이나 직책이나 달란트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인생이 되자.

3.긍휼을 입은 까닭.(15,16절)

딤전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살인죄나 음란죄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실을 가리킨다. 사실 도덕적 윤리적 죄보다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데 가표를 던지고 하는 일이 더 큰 죄이다. 물론 윤리적 경제적 정치적 죄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악한 죄이긴 하지만 복음의 역사를 막는 자들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들이며 결국 많은 사람들을 지옥가게 만드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 죄수까지도 회개하는 자는 받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죄까지도 참으사 구원해 주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론 기본적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다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죄인에 대하여 참으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도 참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며 복음의 역사를 감당해 나가야 될 것에 대한 모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 괴수와 같은 날 참으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참고 기다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도 참고, 심지어는 내게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참음으로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요 사명이요,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4.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림(17절)

딤전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이렇게 직분을 맡겨 주신 것,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 죄인 중의 괴수를 불러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보내고 있다.

만세의 왕이란 시간적으로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한다. 썩지 아니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고안해서 손으로 만든 어떤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를 말한다. 홀로 하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인 유일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 하나님만이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유일하신 참 신이므로 이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다. 영원불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오직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천지의 주재이시다.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시간적 질적 공간으로 완전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에 의하여 모든 역사는 진행된다. 알든 알지 못하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것은 사람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 구원해 주셨다. 오래 참으시며 은혜를 풍성하게 내려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모습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자. 감사와 기쁨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자.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자.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향기를 발하여 주님 품으로 인도하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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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찬양예배설교
제목 : 산 소망

말씀 : 벧전1:3~5

 

1.예수님만이 우리의 완전한 산 소망이십니다.

어느 분이 ‘인생은 B로 시작하여 D로 끝난다. 그런데 중간에 C가 있어서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B는 birth 곧 출생입니다. D는 death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C가 있어서 소망이 있는데 여기서 C는 Choice ‘선택’, Change ‘변화’, Chance ‘기회’, Challenge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태어나서 결국 죽는다. 그러나 그렇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변화를 꾀하고 기회를 활용하고 도전하는 삶을 통하여 뭔가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가지 빠진 게 있지요. 그게 뭡니까? 진짜 C가 빠진 것입니다. 바로 Christ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선택을 하고, 바람직한 변화를 꾀하고, 기회를 잘 활용하고, 상황과 환경에 절망하지 않고 도전을 해서 좋은 결과를 창출해도 Christ가 없으면 말짱 꽝인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물론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삶도 분명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그런 것들을 통하여 뭔가 기쁨과 만족과 가치를 누리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물거품이 되잖아요. 그냥 물거품만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고통만이 남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8:24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물론 세상의 소망입니다.

물론 그것도 소망은 소망입니다. 사실 그런 소망도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하면 잘 될 것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가을에 풍성한 결실이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면 월급도 잘 나오고 인정도 받고 승진도 하게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장사를 하면 결국은 성공할 것이다. 등등 이런 소망도 소망이고 이런 소망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소망이 없으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이런 소망이 없으면 무슨 일할 의욕이 있겠습니까? 이런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야 일이 잘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진짜 영원한 완전한 소망은 못 된다는 뜻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세상의 소망은 영원할 수도 없고 전인격적인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 세상적으로 성공해도 그것이 영혼의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줄 수 없고 더구나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소망만 가지고 살면 영원한 고통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생복락을 주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진정한 소망과 기쁨과 위로와 행복을 영원토록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참된 생명과 기쁨과 평안을 온전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떻게 산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까?

2.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맨 마지막 부분에 보면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산소망이 뭡니까? 말 그대로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소망입니다. 진짜 생명을 주고, 영원한 생명을 주고, 참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소망입니다. 전인격을 살리고 전 인격에 기쁨과 은혜를 주는 소망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소망도 소망은 소망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유익하고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생명의 은총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산소망은 아닙니다. 우리 전인격을 살리지 못합니다. 전인격에 생명의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영원하지는 더더구나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죽은 소망입니다. 결국은 없어질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산 소망을 가져야 하는데 그 산 소망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그 산 소망을 알지도 못하고 얻을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끝내 세상의 죽은 소망 가운데 살다가 허무 속에 죽고 결국 둘째 사망 곧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하게 되는 말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어떤 상태입니까?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마귀사탄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영혼이 완전히 어두워져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영의 세계에 대해서 고작 안다는 것이 귀신이 어떻고, 죽은 영혼이 어떻고 떠들어 대거나 혹은 온갖 우상을 섬기고 나무에 빌고 온갖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나무를 깎거나 돌을 다듬어 섬기고 합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저는 새해가 되면 그 추운 날씨에 그 밀려 터지는 동해바다로 가서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해에게 비는 사람들,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태양은 가스덩어리입니다. 불타는 가스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어서 거기에다 빕니까? 그러면 나름대로는 다 잘났다고 하는데 이런 짓을 합니까?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그렇지요.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그렇지요.

그럼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사람이 만든 그 어떤 지식이나 문명이나 과학으로도 안됩니다. 과학 문명이 지금보다 천배 만배 더 발달하여 달과 화성에 관광지를 만들어 이웃 나라에 다녀오듯 왕래할 수 있는 시대가 와도 죄와 무지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귀사탄의 권세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면 전능자이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만이 죄와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3절 말씀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이 거듭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죄가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일단 죄를 죽였으면 이제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고 부활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안 그래요? 죄가 죽고 죄에서 용서되었어도 다시 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단 죽어야 하고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생명을 얻어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새생명을 얻은 자로서 영원한 산 소망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죽고 부활의 생명을 덧입어 산소망을 가진 자라는 것을 기억하며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정말 우리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우리 옛 자아를 십자가에 온전히 못박음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인간의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고집도 벗어던지고 오직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산소망을 주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소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영원한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산 소망이신 또 다른 이유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즉 천국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세상의 아무리 좋고 대단한 것이라도 다 썩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들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업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기업은 단순히 영원하기만 한 기업이 아닙니다. 너무나 완벽하고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기업입니다. 그 어떤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괴로움도 근심도 걱정도 상처도 심지어는 죽음조차 없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오로지 100% 완전한 영광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사랑이 넘칠 뿐입니다. 내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 성은 황금성입니다. 온갖 보석들로 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에서는 다달이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거는 뭐 우리가 어떻게 말로는 다 표현할 없는 너무나 영광스럽고 아름다고 평화롭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입니다. 그곳이 우리의 기업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드려도 별로 실감을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한 천억짜리 복권이 당첨되어 내일모레 천억원을 탄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얼마나 흥분되고 마음이 설레겠습니까? 여러분, 이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돈도 사실 좋은 것입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으면 구제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아름답게 건축할 수 있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나라도 지킬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많은 것도 해 줄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잘못 사용해서 돈 때문에 하나님도 사람도 제대로 못 섬기고 돈 때문에 싸우고 헐뜯고 거짓을 행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휘둘러서 문제지 돈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좋다해도 천국만 하겠습니까? 전 우주의 모든 재산을 가진다해도 천국과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1/100. 1/10,000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영적으로 완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내일이 설날입니다. 설날이 되면 왜 좋습니까? 그건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도 하고 선물도 주고받으며 맛있는 음식도 나눠먹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나중에 어디서 누구를 만나 교제하며 사랑과 은혜를 나누게 됩니까? 주님입니다. 그리고 성화된 성도들입니다. 그것도 이 추하고 악하고 아픔과 고통과 미움과 걱정과 근심이 있는 세상이 아니라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기쁨과 은혜를 누린다고해도 거기에는 완전한 기쁨도 사랑도 평안도 위로도 없습니다. 만나기 전에는 설레고 또 만나면 좋긴 하지만 또 걱정 근심이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있고 그리고 곧 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만남과 교제와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벽합니다. 영원합니다.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완벽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평안과 위로만이 넘쳐날 뿐입니다. 그러니 이 부족하고 허물 많고 죄 많고 고통 많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것도 기쁘고 감사할 진대 하물며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만이 가득한 나라, 그 어떤 근심 걱정 아픔 슬픔 미움 시기 갈등 없는 나라,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날 때에야 그 기쁨과 행복과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설명절을 보내면서 오랜만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 마음껏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나누면서 지금 여기서 주신 은혜와 사랑에도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되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나 인간적인 교제나 이런 것들이 온전한 기쁨와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은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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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제목 : 그리스도의 군사

말씀 : 딤후2:1-6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생명의 능력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사탄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유혹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며 덤벼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력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비열하게 때로는 고상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언제 당하는지도 모르게 당한다. 자칫 잘못하면 속임수에 넘어가 도리어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교묘한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이 지금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비진리가 혹은 거짓이 진리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기에 속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분별력을 기르고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사탄에게 속지 않고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1절)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우리가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려면 강해야 한다. 강하지 않으면 진다. 군인이 체력이나 정신이나 사기가 약해지면 진다. 그러므로 우리도 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 그래야 마귀가 덤벼들어도 끄떡 않고 이긴다.

그러면 어떻게 강해지는가? 물론 많지만 일단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란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들을 말한다. 믿음, 구원, 감사, 사랑, 기쁨, 능력, 지혜, 선과 진리와 의 등...... 이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대한 확신과 믿음, 소망을 갖게 된다. 유혹을 분별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상황 환경 고난도 이기게 된다. 그래서 사명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덧입자. 더욱 충만한 은혜를 받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러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그래서 주의 은혜를 덧입고 주의 능력을 덧입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모든 유혹과 도전을 물리치고 힘차게 달려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자.

2.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2절)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자신이 먼저 말씀위에 서서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말씀은 천국을 알게 된다. 인생의 갈길을 알게 한다. 선과 진리를 알게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거짓되고 왜곡되고 잘못된 가치관 속에 있는 풍조와 양식과 습관과 모든 삶의 모습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씀 위에 굳게 서면 능력도 얻게 된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확신과 소망과 위로와 힘을 줌으로 올바른 분별력을 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혹과 도전과 고난과 조롱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천국과 진리의 길도 제대로 모를 뿐 아니라 마귀에게 속기 십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말씀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산다고 말한다.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은혜와 능력과 지식과 판단은 반드시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설령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말씀을 잣대로 삼으라.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붙든다. 힘을 주고 능력을 준다. 마귀 사탄을 물리친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3절)

딤후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진리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자연적인 세상은 결코 예수님께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다. 물론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하기도 하지만 오염되고 왜곡된 이성대로 자신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는데 그친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의 오신 참뜻을 왜곡시킨다. 십자가와 부활과 주되심을 거부하고 꾸며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대적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 고난을 피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해, 생명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향해 달려가려면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고난 즉 희생과 수고와 섬김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빌1: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여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환경이나 상황을 이기고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4.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딤후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사는 그를 모집한 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군사는 그 모집한 자의 뜻에 절대 순복해야 한다. 그래서 군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훈련받으며 적들을 물리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도 동일하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부르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세우셨다. 그래서 세상 속으로 가서 마귀사탄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말씀 훈련, 기도훈련, 전도훈련도 해야 한다. 동시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영광이나 즐거움 보다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직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해 가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길이요 진리의 길이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길이요 동시에 우리 자신도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자유가운데 살게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을 택하며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고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삶이 되자.

5.법대로 경기해야 함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렇다. 모든 경기자는 법대로 해야 한다. 운동경기도 법대로 해야 한다. 시험도 법대로 치러야 한다. 인생도 법대로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법대로 해야 한다. 물론 인생 최상위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법을 제정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한 법을 주셨다. 그 법대로 살아갈 때에 가장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법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7:21절에서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물론 이 말씀이 100%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법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한 따라가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공자가 된다.

오늘부터 사순절 집중전도. 오늘은 주님께 영광 돌리고 안식도 취하는 날. 그러므로 오후에 좀 편히 쉬면 좋은데 전도를 나가려니 솔직히 나도 좀 힘들다. 그러나 이 일은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이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일.

그러므로 좀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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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말씀 : 벧전1:6-9

 

1.금보다 귀한 믿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 육신의 생명, 세상 부귀영화, 입신양명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만이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서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기 때문이다.

오늘 7절 말씀을 보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또 잠3:14절을 보라.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물론 금도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지위도 귀하다. 그러나 믿음이 더 귀하다. 당연하지 않나?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봐야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풀의 꽃과 같다. 그리고 그것만 따라가다가는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한다. 그러나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 기쁨, 평안, 은혜, 사랑, 자유를 준다.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하다. 영원히 온전히 완전한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얻은 우리는 정말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자. 무슨 일이 있어도 금보다 귀한 믿음을 지켜 나가자. 우리의 후대들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이 믿음의 유산을 남겨두자. 이 금보다 귀한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그래서 나도 귀하고 복되고 다른 사람도 귀하고 복되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믿음에는 시련이 있음.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무조건 만사형통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영광의 나라는 주어져 있지만 완전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갈 때 이루어진다. 지금도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긴 하지만 여기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모르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그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마귀사탄의 역사와 싸워야 한다. 마귀 사탄은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고 도전하고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한다. 이걸 분별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곡된 풍조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그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이런 많은 도전과 유혹과 시험이 있기에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려면 그런 것들에게 속거나 타협하거나 져서는 안 된다. 깨어 있어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물론 힘들고 어렵고 억울하고 손해보고 자신을 부인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모든 귀한 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냥 얻어진 귀한 귀하지 않다. 믿음과 믿음을 통한 구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고귀한 것이기에 너무나 고귀한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이다.

물론 구원은 대가없이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결코 거저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가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단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을 찾아야 한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그냥 제멋대로 살아가는데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또 믿음을 얻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그 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풍조에 맞서야 한다. 오직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가야 한다. 그러자니 어려움도 있다. 고난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죄와 무지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6절에서는 말씀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또 벧전4:12절에서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가장 소중하고 귀하고 금보다 귀하다는 것, 거기에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 죄와 무지 속에서 사탄이 역사하는 세상에서 그래서 사람들이 왜곡되고 죄 되고 엉뚱한 길로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늘 깨어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모든 세력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3.믿음의 결과

그러면 왜 믿음이 금보다 귀한가? 왜 시험 중에도 기뻐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는 자에게만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8절을 보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즐거움 일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다. 어떤 이들은 천국에 가면 심심할거 같다고 말한다. 맨날 찬송이나 하고 예배나 드리고 일도 안하고 놀고 먹으니.... 거기는 농사를 지을 일도 없고, 취직하기 위하여 애쓸 일도 없다. 무슨 취미생활 할 일도 없다. 취미생활은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착각마라. 아무것도 안해도 그냥 마냥 즐겁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지 말라. 지금 아무것도 안하면 심심한 것은 우리의 심령의 상태가 온전치 못한 까닭이다. 우리가 영화의 몸을 입고 심령이 온전히 회복되면 심심이라는 단어는 없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런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즐겁다. 그냥 영광스럽다. 그냥 기쁘다. 그냥 사랑이 철철 넘쳐 흐른다. 영광스런 즐거움이 넘친다. 그러니 믿음이 금보다 천배만배 귀하다. 이게 바로 믿음의 결국이다. 오늘 9절을 보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즉 믿음의 결과는 영혼구원이고 영혼 구원을 받을 때에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영혼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주님을 모셔들일 때만이 영혼의 구원을 받고 영혼의 구원의 받을 때만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함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며 이로 인하여 정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소망과 기쁨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놀라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인들도 영혼 구원에 대한 감각이 둔하다. 어떤 이는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영혼 구원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자기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도 무덤덤하기도 하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하면 헛일이다.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영원히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하게 된다.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일이다. 그래서 믿음이 금보다 귀한 것이다. 이것이 교회에 다녀야할 목적이고, 이유이고,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에 전도가 참 어렵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잘 먹고 잘 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식과 문화와 물질문명과 과학의 발달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까 마치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정말 가소로운 일이다. 인간이 물질문명과 과학과 지식을 지금보다 천배 만배 더 발전시킨다해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고 한계 속에 있다. 죄와 무지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하고 올바른 길로 가지도 못하고 때론 알면서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이다. 우리가 알고 해결하고 누릴 수 있는 일보다 알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천배만배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이 왜곡된 흐름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도 세상의 그런 왜곡된 가치관에 휘말리고 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물질문명 속에 젖어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그래서 영혼의 풍성함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 깨어 기도하고 말씀묵상하며 무엇보다도 영성을 풍요롭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냥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귀히 여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지탄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러지 않아도 물질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 꼴난 지식과 과학을 믿고 하나님을 점점 더 멀리하고 있는데 교회마져 거기에 휩쓸려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 복음의 역사를 이루기가 정말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자. 그래서 먼저 내 영혼이 풍성해 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자.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자. 그리고 정말 죽어가는 저 영혼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자. 지금 우리가 사순절 전도를 하고 있는데 정말 이 일을 위해서 더욱 기도하자. 잘 안돼서 맥이 빠질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룩한 모습으로 본을 보이고 말씀을 증거 할 때에 분명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이 가장 중요한 명제를 잊지 말고 엎드려 기도하며 복음의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며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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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진정한 승리자

말씀 : 딤후2:7-13

 

딤후2장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병사)라고 말씀한다.(3,4절) 왜냐하면 세상은 영적인 전쟁 터이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마귀사탄이 얼마나 교활하게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가? 얼마나 무리를 넘어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가? 그래서 벧전5:8절에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엡6:12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전신갑부를 입으라고 하신다.

그렇다. 세상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다. 사탄마귀가 끈질기게 우리를 공격한다. 때로는 사납고 포악하게 때로는 교활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다가와 유혹하여 넘어 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앞 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 강하라, 말씀을 가르치라, 승리하려면 예수의 은혜로 강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으라, 주님을 기쁘게 하라, 법(말씀)대로 살라고 하셨다. 왜? 그래야 우리가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 사탄마귀의 흉계와 거짓을 간파하여 물리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과 싸워 이김을 우리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계속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한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총을 덧입어 더욱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우뚝 서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흉계와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1.말씀을 묵상하여 총명을 얻으라.

딤후2:6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내가 말하는 것이란 앞의 말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1~6절의 말씀들이다. 예수의 은혜로 강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법대로 경기해야 한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 그러면 주께서 총명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총명이란 물론 진리를 아는 것이다. 바르게 알고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된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 고난이 와도 이긴다. 세상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면 평안을 누리고 기쁨과 자유를 누린다.

과연 무엇이 총명인지, 총명을 어떻게 얻는 지 기억하라. 물론 말씀이다. 거기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나 말씀을 묵상하며 심비에 새기고 그 말씀을 잣대와 등불과 희망과 소망과 힘으로 삼고 그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과 동행하라. 그리하여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예수님을 기억하라.

딤후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생각하라. 예수님을 생각하되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라. 그러면 무엇을 따라 가야 할지 알리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리라. 진정 진리가 무엇인지 알리라. 능력을 받으리라.

무엇이 생명인가? 무엇이 은혜인가? 어디에 영광이 있나? 어디에 기쁨이 있나?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인가? 무엇이 소망인가? 무엇이 영생복락을 가져다 주나? 무엇이 진정 영광스러운 삶인가? 물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다. 우리도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오직 거기에 생명과 구원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 지금 여기서도 진정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아간다. 그래서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된다. 사탄의 역사를 분별하고 물리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방법을 따르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딤후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말씀으로 인하여 숱한 고난을 받았다. 주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다. 그것도 순교를 앞두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말씀이 막힌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너무나 엄청난 장벽이 앞을 가로막아 답답할 때도 있었다. 조바심이 날 때도 있었다. 걱정과 염려가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낙심과 절망과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어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도리어 죽음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는 더욱 힘있게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독교역사는 고난 시에 도리어 생명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다. 때로는 위축되는 듯이 보여도 때로는 심지어 배교자도 생기기도 해도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환난과 핍박을 통해 생명의 역사는 더욱 힘있게 이루어져 왔다.

반면에 잘먹고 잘살고 평안하고 안전하고 걱정과 염려가 없을 때 기독교역사는 도리어 퇴보했다. 서양교회가 그렇고 우리나라 교회가 그렇다. 어렵고 힘들 때 도리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무릎 꿇었다. 우리의 무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엎드려 도우심을 구했다. 주님 앞에 매달렸고 힘들고 어려워도 오히려 더 봉사했고 오히려 더 열정을 가졌다. 그럴 때 교회는 힘과 능력과 은혜가 있었다. 거룩한 삶이 있었다. 그래서 비록 힘들지만 그들은 생명력있는 신앙생활을 유지했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왔다.

그런데 잘먹고 잘살고 여유가 생기고 그러니까 도리어 나태해졌다. 평안해 지니까 아쉬운 게 없어졌다. 등 따뜻하고 배불러지니까 슬슬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것이 좋았고, 재미있는 게 많아졌다. 세상에서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졌다. 좋은 세상이라며 세상으로 자꾸만 나갔다. 그래서 하나님과 도리어 멀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결코 우리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이 우리를 주님 앞에 묶어두는 끈과도 같다는 것을 기억하며 고난에 동참하라. 그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기억하며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 도리어 고난 가운데 더욱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계기로 삼으라.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은헤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라.

4.고난은 영광을 가져다 준다.

딤후2:10~12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바울은 고난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말씀을 결코 막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어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역사를 위하여 달려갔다. 왜? 자신이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복음의 역사에 진력했다.

그래서 10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1절에서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라고 하였다. 또 12절에서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의 복음의 사역에는 정말 많은 고난들이 있었지만 죽어가는 영혼들을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아 영원한 영광을 차지할 것을 믿었기에, 참고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면 주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을 알았기에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힘차게 달려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말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과 뜻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역사로 된다.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때로 바라보며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꾸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1절 말씀처럼 죽어야 한다. 내 자아가 죽고 내 가치관과 목표와 목적과 삶의 양식과 우선순위와 방법과 경험이 죽고 주님의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된다. 영광을 누리게 된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영광도 누리지 못한다. 죽지 않으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새것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죽으면 다시 산다. 주님의 것이 된다. 주님과 동행하게 된다. 그러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여러분, 다시 산다는 것,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냥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다시 사는 것이다. 왕노릇 한다고 무슨 권력을 휘두르고 명령을 내리고 복종시키고 그런 왕노릇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영광을 누리는 상태를 말한다. 그 어떤 악의 세력이나 어둠의 세력이 근접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완전무결한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왕도 누릴 수 없고 어떤 백만장자라도 누릴 수 없고 어떤 지식인이라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까짓 세상의 왕이나 부귀영화나 권세 따위는 새발의 피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까짓 세상 명예와 부귀영화 따위는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은혜를 누리자.

5.주님의 약속은 완전하다.

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는 것은 완전히 믿을만하다. 신뢰할만하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신뢰할만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완전히 신뢰할만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주님은 항상 미쁘시다. 주님을 결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다. 자기를 부인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은 물론 자기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자신의 말씀과 약속과 행동에 대하여 완전히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황이 불리하면 오리발을 내밀기도 하고, 아니면 능력이 없어 못하기도 하지만 주님은 절대로 딴 소리도 안하시고 능력이 없어 못하지도 않으신다. 약속을 100% 완전히 지키시는 능력자이시고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렇다. 주님의 나라는 너무나 확실하다. 주님의 약속은 100%이루어진다. 주님의 재림도 천국도 완전하게 이루신다. 영광의 나라도, 영광의 면류관도 완전히 100% 다 이루신다. 세상이 쪼개지고 박살나도 주님의 약속은 변개치 않는다. 아니 도리어 세상이 박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감사하라. 기뻐하라. 우리에게 이 놀라운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를 알지 못하는 죽어가는 저 많은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더욱 기도하고 힘쓰자. 그런 진리를 위한 삶을 살려면 고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광의 고난임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참여하자. 그러기 위해 더욱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거듭난 자아로 살아가자. 그래서 주께 영광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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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서로 용납합시다.

말씀 : 골3:12-14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한다. 한마디로 자비를 베풀고 용납하고 참으며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말은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르고 더 나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계속해서 훈련하다보면 조금씩 가능해진다. 주님 앞에 엎드려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면서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용서하고 받아주고 용납하기를 연습하다보면 조금씩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저 자신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1.사랑과 자비와 긍휼등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과 거룩의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야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에 걸맞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너무나 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가 어떤 특혜를 받았는가?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갖게 되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것도 뭐 남들보다 크게 선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남들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나를 택하셔서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는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사랑의 법을 적용시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향기를 발할까? 얼마나 크나큰 은총 속에 살아갈까?

2.구체적 사랑의 모습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긍휼히 여기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연민을 갖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가 이 마음만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결국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무지해서, 연약해서, 심각하게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아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지 않는가? 오죽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혹 누군가가 잘 사랑해지지가 않고 용서가 잘 안된다면 그의 무지와 죄와 어리석음과 죄로 오염된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보고, 동시에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 되새기며 어찌 하든지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용서하고 그래서 함께 주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자비를 베풀라

자비란 선함, 친절함, 우호적임, 온화함 등을 말하는 것으로 긍휼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연민을 가지면 자비를 베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최대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왜? 불쌍한 영혼이니까. 왜 나도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주의 은총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겸손하라.

겸손은 말 그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하지 못하고, 싸우고 대접받으려고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교만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춘다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뭘 그렇게 잘 났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용서하지 못하고, 허물을 받아주지 못하겠는가?

벧전5:5(하),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4)온유하라.

온화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있고, 기질이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깨트리고 부서트려서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럽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내 자아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온유하라고 해서 죄와 추함과 더러움 마져도 적당히 받아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하는 말 맞다나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죄는 미워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화를 내기도 하셨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상냥하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좀더 친절하자. 상냥하자.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오래 참으라.

앞서 말씀드렸던 일들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해서 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금방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런 점을 이용해 먹으려고도 한다. 뭔가 나만 손해보고 나만 바보 되는 것 같을 때도 많다.

그러다보면 그만 나도 모르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온유를 지키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같이 대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열 번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여 앞에 잘한 것까지 말짱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도 내 맘대로 잘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깨져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6)용서하라.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서 불만의 원어적인 뜻은 비난, 허물, 책망을 의미하는 말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이나 자신에게 잘못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싫은 사람, 미워하는 사람,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 요구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주님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찌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일만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이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비난하고 욕하고 원수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7)이 모든 것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온전하게 매는 띠란 옷을 입고 모든 옷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띠를 말한다. 즉 사랑이 앞서 말했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등을 하나로 묶어서 온전하게 해 주는 띠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만 있으면 앞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온전치 못하고 타인에게는 욕을 먹을망정 부모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랑이라는 것도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행동으로 잘 안될 때가 많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할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변명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다른 방법이 없다. 은혜받아야 한다. 능력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자아가 깨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래도 온전치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조금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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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성실한 그리스도인

말씀 : 살전4:9-12절

 

1.믿음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영적 전투를 해야 함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문제점도. 크게 두가지. 하나는 당시 고대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성적 부정한 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 다른 하나는 올바른 재림관을 갖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재림이 없다하고, 어떤 이들은 재림을 믿는다는 이유로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에 빠져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며 참 안타까운 마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서 있는 교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삶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생각대로 신앙생활하는 이들도.

우리는 정말 기도해야. 온전치 못한 지상교회의 모습. 그러나 당연시 여겨서는 안된다. 어쩔 수 없이 부족하긴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죄와 왜곡된 가치와 싸워야 한다. 그래서 엡6:12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더욱 많이 힘쓰라. 거룩함을 취하라.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케 하려 하심이다. 오늘도 계속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말씀. 이 말씀을 묵상하며 더욱 거룩한 삶으로 주님의 향기가 되고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사랑이나 선에는 끝이 없음.(9,10절)

살전4:9,10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데 너희가 이미 말씀을 따라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그렇게 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권한다. 더욱 그렇게 하라.

그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사랑.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힘씀. 그것도 자기 교회만 아니라 마게도냐 지역 전체의 교회들에게. 이 정도면 상당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더욱 많이 하라고 말씀. 1절에서도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많이 힘썼지만 더욱 힘써라. 과연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지 생각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더욱 힘쓰라.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야 한다. 형제사랑만 아니라 선과 의와 진리를 따르는 일에는 완성도 졸업이 없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힘써야. 자기 가족이나 자기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도 해야되고 지역에도 해야 된다. 과거에 많이 했다고 오늘 중단해서도 안된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3:12절에서 말씀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주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열심히 수고해야 함.(11절)

살전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제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인데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떤 이들은 재림이 없다고 생각하여 탈이고, 어떤 이들은 곧 재림이 있을 터이니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서 모여 다니며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후3:10,11절에서도 말씀.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우리는 분명하고 올바른 종말관을 가지고 있어야. 종말은 반드시 온다. 예수님도 반드시 재림하신다. 모든 인류는 부활한다.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만 다를 뿐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다시 오시마 약속하셨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막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마24:36]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예비하고 있으라. [마24:44]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러면 예비하는 것이 무엇인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며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저 기도만하고 찬송만 해서도 안 된다.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맨날 산 기도나 다니고 무슨 신령한 은사만을 사모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맨날 먹고사는 일에만 집착하며 거기에 목숨을 걸어서도 안된다. 하나님께 나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쓰며 주님의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 뿐만아니라 가정과 이웃과 직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예비이다. 영적인 일과 물질적인 일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의 역할 잘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영육간에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고 그래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되자.

4.믿음의 사람들은 단정해야 함.(12절)

살전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열심히 자기 일을 해야 할 이유이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지역사회에서 단정한 삶을 살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일은 하지 않고 먹고 놀고 한량생활이나 하고 그래서 엉뚱한 짓이나 하고 그래서 사람에게 욕먹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물론 열심히 일함으로 궁핍함이 없어 자신도 풍요롭고 하나님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의 사람들은 단정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며 규모있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물론 너무 누추하거나 궁상맞고 초라하고 추래서도 안된다. 마음적으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청결하고 육체적으로도 단정해야 한다. 일하는 것도 규모있게 일해야 한다. 그래서 덕을 끼치고 윤택하고 남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규모없이 행하고 너무 가난하고 누추하고 초라하고 무지하고 추하면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내기 어렵고. 하나님의 역사도 이루어가기 어렵게 된다.

물론 하나님은 가난하고 못나고 부족하고 힘없고 무지하고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사랑.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가난하고 힘없고 초라하고 누추한 자리에 있어서는 곤란. 하나님의 자녀답게 모든 영역에서 누구보다도 잘해야 한다. 일도 규모있게 열심히, 사회생활도 멋있게, 물질적으로도 기왕이면 풍성하게 그래서 영적으로는 물론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도 고상하고 아름답고 윤택하고 풍요로워야.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래야 하나님의 일도 하고 그래야 다른 사람도 도와주고 그래야 나도 당당하고 멋진 삶이 되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뭐 우리가 해서 되나요? 하나님이 해 주셔야 되지요. 하면서 자신의 일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그건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변명이다. 고의적은 아니겠지만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 물론 백날 힘써봐야 하나님께서 안 도와 주시면 아무 일도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라고 하셨다. 오늘11절에서는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것은 주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주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잘 활용하여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무엇인가를 창출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써 일하는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넉넉하게 채워주신다.

오늘 말씀을 보며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쓰자.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자. 그래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단정한 삶을 살자. 본이 되는 삶을 살자. 남에게 줄지언정 달라는 자가 되지 말자. 그래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나 윤택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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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문밖으로 나아가자

말씀 : 히13:7~13

 

히브리서도 역시 다른 서신서들과 같이 전반부(1~10장)는 믿음, 후반부(11~13장)는 삶에 대하여 말씀. 전반부에서는 마지막에 아들을 세우심. 그는 천사나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대제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대 제사장, 새 언약의 중보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 그러므로 오직 그 분 안에 영구한 소유.

그리고 나서 후반부인 11장부터 그리스도인의 삶.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시면서 믿을 따라 살 것을 촉구. 그래서 12장에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13장에서도 동일. 형제를 사랑하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그리고나서 오늘 본문. 말씀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던 자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세상의 다른 교훈에 끌려가지 말라. 너희 예수님처럼 영문밖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그 은총을 누리라.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조화를 이루어야. 그래야 인생의 수레바퀴가 잘 굴러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치가 마찬가지. 커다란 두 축이 조화를 이루어야. 땅과 하늘, 밤과 낮, 겨울과 여름, 남자와 여자, 물과 불, 영과 육, 하나님과 인간이 조화를 이룰 때에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미 있고 풍성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을 가게 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과 행위를 잘 조화시킴으로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자.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으라.(7,8절)

히13:7,8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자들을 본받으라. 히브리서가 기록된 것은 A.D.64년~70년 사이. 어떤 사도들은 순교 당했고, 어떤 사도들은 아직 생존. 바울은 왕성하게 활동을 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즈음.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자들이란 사도나 속사도 즉 사도들의 제자들. 여하튼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던 믿음의 선진들, 믿음의 위대한 스승들의 말씀을 따르고 그 삶을 본받으라는 것.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주님을 본받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아야. 그것을 모델로 삼고 기준으로 삼고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을 지켜나가고 생명력 넘치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돼. 세상에서도 그렇다. 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위대한 인물들을 롤모델로 삼아야. 잘하는 사람, 멋있는 사람, 훌륭한 사람, 바람직한 사람을 모델로 삼아야.

그런데 안타깝게 자꾸 세상을 본받으려고 해. 세상 사람들에게 끌려 다녀. 세상이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던데, 어느 장로도 그렇던데, 어떤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던데 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따라 가려해. 또 어떤 때는 지금은 세월이 다른데, 환경이 다른데 하면서 세월 따라 환경 따라 상황 따라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물론 진리가 아냐.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속에 있는 인생의 왜곡된 모습. 우리는 끝까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델로 삼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아야.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 그것이 교회가 사는 길,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길.

그래서 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 즉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동일하게 생명이시고 진리이시고 부활이시고 빛이시고 생명의 떡이시고 선한 목자다. 따라서 물론 그 말씀도 영원한 진리이고 생명양식이고 빛. 그러므로 당연히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과학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져도 무조건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세월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면 그게 변질된 것이지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섬기던 예수님이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과 같은 분. 동일한 예수님. 동일한 말씀, 동일한 생명, 평안, 소망을 주신 주님. 그러므로 그들이 섬겼던 방법이 지금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섬겼던 방법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섬기던 방법과 지금 우리가 섬기는 방법이 다르다면 그건 우리가 섬기는 방법이 왜곡되고 변질된 것.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 듣고 복음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갔던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삶의 모습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어떻게 변한다해도 오직 영원토록 변함없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갔던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을 본받아 살아가자. 그리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자손 만대로 복음의 진리를 올바르게 전수시켜 자손만대로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은혜로써 마음을 굳게 하라.

히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도 앞의 말씀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세상의 잘못된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말고 오직 마음을 은혜로 풍성하게 함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다른 교훈에 이끌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당시 만연되어 있던 유대주의를 말한다. 즉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따지며 예수님 믿어도 구약의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규례를 비롯한 모든 규정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거기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

물론 음식 문제만이 아니라 음식 문제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 중의 하나의 예. 즉 그 당시 기독교내에 여러 가지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 그 중에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도 믿어도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 그러나 너희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진리위에 굳게 서서 어떤 말이나 왜곡된 가치관이나 이단의 달콤한 유혹이나 현혹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

그렇다.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들’을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우리도 걸려 들 수도 있다. 특히 이단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때로는 광명의 천사처럼 다가온다. 어떤 신비한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찾아온다.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들만 성경의 신비한 비밀을 깨달은 것처럼 떠들어대고 다닌다.

요즈음에는 유대주의적 이단자들보다는 그 반대의 성향을 가진 이단자들이 더 많다. 즉 예수님만 믿으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것. 육체는 본래 더럽고 악하고 죄덩어리이요,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이 없다는 것. 그냥 믿기만하면 영혼이 깨끗함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것. 그러나 사탄의 수작일 뿐. 주님은 결코 그런 말씀하시지 않았다. 믿으면 구원받지만 영혼이 깨끗해지면 육도 거룩하고 아름답게 사용해야. 영혼이 깨끗한데 육은 돼지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죄사함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옛날에 살던 방식대로 육신의 정욕대로 살던 삶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요즘에는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가 가장 강력한 이단 사상이다. 요즘 세상은 성경과는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사람과 물질이 주인이 되고, 사람이 영광을 받는 세상이다. 외적인 조건들과 외모와 물질과 지식과 능력에 의하여 평가받는 세월. 이게 바로 이단 사상이다. 하나님은 결코 외적인 것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 마음의 중심과 믿음을 보신다. 믿음안에서 성실하게 진실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가장 크게 보신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풍조를 분별하고 이겨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기나?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고 하셨다. 말씀그대로 마음을 은혜로 충만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유대주의적 이단이나 반대로 행함을 구원과 관계없다는 영지주의적 이단이나 기타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물리치고 승리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은혜 받으면 어떻게 되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를 알게 된다. 또한 믿음으로 구원받고 죄사함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된다. 또 그렇게 살아가는 마음이 간절해지고 그렇게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사는 삶이 기쁘고 행복하다. 그래서 엉뚱한 것에 미혹되지도 않고 마지못해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찬양함으로 믿음 위에 굳게 서고 은혜로 충만하게 하게 하자. 그래서 오직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정말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자. 그래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으로 세상의 다른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말고 왜곡된 이상 사상이나 헛된 교훈에 속지 말고 은혜와 기쁨과 감격과 능력으로 더욱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3.영문밖으로 나아가자.

히13:10~13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을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게 먹을 권이 없나니 /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하지만 제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단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완전한 속죄를 전체를 의미한다.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먹을 권한이 없다는 것은 특별히 속죄제를 드릴 때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은 물론 제사장조차도 11절 말씀처럼 제물의 그 어떤 것도 취할 수 없고 피는 전부를 제단에 쏟고 제물은 몽땅 진영 바깥 재버리는 곳에 태우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레4:1~12)

그런데 그러한 구약의 제사는 실상 모형일 뿐이고 예수께서 완전한 속제제물이 되어 구약의 속죄제물이 제단에서 피를 다 쏟고 영문밖에서 태워진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영문밖으로 나가셔서 자신의 피를 다 쏟고 불태워지는 것 이상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 제단 즉 죄사함의 은총을 주는 은혜의 단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연히 세상의 헛된 교훈에 미혹되지 말고 오직 유일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을 믿고 예수님따라 영문밖으로 나가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문밖으로 나가자는 것은 한마디로 고난의 장소로 가자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온갖 수치와 멸시를 당하며 성문밖으로 나가 자신의 피를 다 쏟고 죽으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그저 영문 안 즉 자신의 삶의 자리에 안주하며 편안한 삶만 추구하지 말고 외롭고 힘들더라도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게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자의 당연한 태도요, 그게 한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는 자의 삶이요, 그게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자신의 삶도 귀하고 복된 아릅다고 가치있는 의미있는 삶이되는 비결인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그저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 안주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님을 따르겠나? 주님을 따르지 않고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나? 어떻게 그 역사를 이루겠나? 어떻게 진정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가운데 살겠나?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자.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새기고 오직 믿음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자. 그리하여 세상의 그 어떤 헛소리나 왜곡된 가치관이나 인생관이나 이런 것들에 미혹되지 말고 오직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주의 역사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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