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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찬송과 기도

 

 

 

제 목 : 찬송과 기도

말 씀 : 약5:13-18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굴곡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평안할 때가 있으면 뭔가 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일이 자꾸 꼬일 때도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 들어옴으로써 어렵고 힘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어렵고 힘들 때가 있더라도 너무 힘들어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으려니 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또 형통할 때에도 너무 자랑하거나 남 앞에 으스대지 마세요.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기쁠때나 슬플때나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며 감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여기에 대한 답변을 주고 계십니다.

1.고난이 올 때 기도하라.

오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난 앞에서 아무 대책이나 노력도 없이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험이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세요.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웬지 아세요. 그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앞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주셔서 그 고난에 넉넉히 대처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하여 결국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셔서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혹시 고난이 온다해도 당황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18절 까지는 우리 인생에게 다가오는 고난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인 질병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장로(교회대표자)를 청하여 기도하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라고 하니까 앞으로 아프면 목사님 부르지 말고 장로님 불러야 되나 생각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목사도 장로입니다.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일 두가지를 다하는 장로를 목사라하고, 치리만 하는 장로를 일반적으로 장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질병이 생겼을 때 먼저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병원에는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반적인 고난도 먼저 기도하고 대책을 세우고, 질병도 먼저 함께 기도하고 병원도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보입니다.

2)믿음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라.

약5:1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여기에 보면 질병의 원인이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것은 질병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온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것은 질병의 원인이 본인의 죄로 인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하라. 서로 기도하라. 이것은 죄를 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사람앞에서도 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자신의 죄를 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만큼 죄를 철저히 회개한다는 의미와 함께 죄로부터 철저히 떠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서로 내 놓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더욱 힘이 있는 것입니다.

3)간절히 기도하라.

오늘 17,18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에게 무슨 신성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이 나타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간절히 해야 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어놓고 매달려 부르짖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도 죽음을 직면했을 때 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을 때 눈물로 침상을 띄울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을 때 간절히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장)를 통하여 낙망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질병이든지 어떤 다른 고난이든지 혹시 고난이 올 때 먼저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대한 믿음 가운데서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목숨을 내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즐거울 때는 찬송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그렇다고 고난당할 때는 기도만 하고, 즐거울 때는 찬송만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당할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하고, 즐거울 때는 특별히 더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은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경제가 풀리고 자녀가 잘되고 취업이 되고 병이 낫고 하여튼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내가 누리는 모든 형통함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잘될 때 오히려 신앙을 까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되고 형통하니까 아쉬운 게 없다고 찬양도 기도도 예배 생활도 잘 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능력이요 노력인 줄 알고 자기가 영광을 다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아 숨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를 잘 만났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노력했다면 노력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는 어디서 왔습니까? 머리가 좋다면 그 좋은 머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때가 좋았다면 그 좋은 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럴 때 감사와 기쁨과 은혜는 더욱 충만해집니다. 일도 더욱 잘 풀려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기쁠때나 즐거울 때나 형통할 때나 불통할 때나 먼저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당할 때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면 받는대로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어떤 여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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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제목 :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말씀 : 벧전4:1~6

제법 오래 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도 북부의 ‘무자파르나가르’라는 작은 동네에 엄청난 땅을 소유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미간척지도 많아서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개간해 주면 1/3은 개간한 사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땅을 개간하다가 엄청난 고대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물을 발견하여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주인도 부자가 되면 뭔가 자기 몫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인도의 문화재 관리국에서 당국자들이 나와서 100년 이상 된 유물은 개인소장이 불가함으로 집으로 가져간 모든 유물을 회수할 것이고 지금부터 유물을 유출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과 주민들이 반발하며 유물을 내주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경찰과 주민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는데 주민들이 과격하게 저항함으로 급기야 경찰이 실탄까지 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더욱 난폭한 폭도로 변하여 삽과 낫과 곡괭이와 총을 들고 저항하게 되어 결국 많은 경찰이 투입되어 수십 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야 폭동이 진압되고 유물은 문화재당국이 몽땅 회수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금당하는 것으로 사태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평화롭게 지내던 마을이 황금유물이 발견된 후에 사람들이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히고 남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나 유령마을처럼 번해 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 황금에 눈이 멀어 마을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육체적 정신적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만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물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진실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고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오직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벧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 마음으로 갑옷을 입고 즉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하고 고난을 받을망정 죄를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더 이상 죄가운데 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월이 어떠하든 주님을 따라 진리와 선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다시 죄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과가 사해진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내 죄가 사해졌으니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죄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하던 옛자아가 죽고 예수님께 종노릇하는 새 자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죄에게 종노릇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죄를 향해 호통을 치고 명령하고 물리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믿음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삶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리며 친구삼아 살아가면 고난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 물결 흐르는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요,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므로 죄와 타협하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당연한 삶이고 그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 치고 이제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더 이상 과거처럼 죄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주님의 따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는 길이 혹시 어렵고 힘들어도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서 모든 죄된 것들을 물리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생명의 능력과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죄가운데 사는 것은 과거로 충분합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참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무지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사탄에게 얽매어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것은 지난 것으로 이미 넘치지 않느냐? 지나간 세월을 그렇게 살아간 것만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정말 무지해서 어리석어서 캄캄한 가운데서 어리석게도 바보같이도 미련하게도 마귀에게 속아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그게 행복인줄 알고 그게 인생이 가야할 길 인줄 알고 그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빠져서 죽자 사자 그런 것만을 따라서 세월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고, 육신을 허비하고, 정열을 허비하고, 능력을 허비하고, 아니 그냥 허비한 것이 아니라 악에게 바치고 마귀에게 바치고 살았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얼마나 분한 일이냐,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냐, 그러니 이렇게 지나간 죄악으로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아까운데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과 향락과 우상을 섬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한스럽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필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 아닙니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추한 모습 들 싹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안 그렇습니까? 마귀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세월입니다. 속고 살아온 세월입니다. 헛된 것을 위해서 살았던 세월입니다. 그냥 헛될 뿐 아니라 악하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섬기며 세상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던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지나간 세월로 족하지 않습니까? 지나간 세월만으로도 원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때는 지나간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제는 정말 지나간 때에 죄를 따라 살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진리를 따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이겨야 합니다.

벧전4:4~6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진리를 따라 주님을 따라 방탕과 음란과 향락 등의 온갖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때에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심지어 힘있는 자들이 핍박을 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도 말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우리 갈 길을 묵묵히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데 항상 조롱과 핍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죄와 무지 속에서 그저 육신의 욕구만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고 구덩이 빠트리고 넘어지고 곤경에 처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과 다르다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천국만을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것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더더욱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과 다르니까요. 우리는 진리이고 그들은 비진리니까요. 그래서 딤후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3:14절에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물론 당연히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의인을 핍박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전했느냐?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즉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으나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물론 당연히 고난도 수반될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그게 생명의 길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비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핍박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같이 대항하여 싸우지도 말고 그저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실직고 할 수 밖에 없고, 그 때에 믿음 안에서 산자는 영생복락이요, 불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영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러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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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성령을 따르라

 

 

 

 

제목 : 성령을 따릅시다.

말씀 : 살전5:19-22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은 한편으로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소망의 삶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 그리스도인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세상에 속한 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쪽 나라의 법과 원리와 규례와 법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엄청난 특권을 누릴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엄청난 특권을 누리려면 마땅히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많은 제약이 있고, 의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도리어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고 우리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신분이 전적으로 다른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과 가치기준을 가지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혹 어렵고 힘들지라도 그런 삶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귀한 신분을 가진 존재로서의 올바른 삶이요, 자랑스러운 삶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 삶이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물론 하나님 앞에 큰 상급받는 복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자부심과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성령을 소멸치 말라.

살전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얼마나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사느냐 하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니까 하나님의 모든 것을 통달하고 계신다. 그리고 물론 생명과 진리와 사랑과 은혜와 평화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시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깨닫고 분별하고 판단하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로 달려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그 어떤 지식이나 이성이나 논리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아시는 것이다.

동시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고 다스리고 인도하시게 된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그 뜻을 향하여 갈 수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과는 무관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한마디로 성령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가라는 말씀이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바를 알고도 거부하든 몰라서 거부하든 결코 성령의 소리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분, 성령의 말씀에 민감해야 한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심령에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진정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즐거움이나 욕심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소리가 들리지 않다. 마치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시끄러운 락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것과 같다. 그러면 시끄러운 락 음악 소리에 클래식 음악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말씀으로 무장하는 등 우리 심령을 어찌 하든지 하나님으로 채워서 우리 일생 생활에서 들려오는 모든 하나님의 음성을 캐치하고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꾸만 세상의 소리에 끌려가려고 할 때가 많은데 어리석은 일이다. 주일에는 교회에 와야 한다. 가까운 친척집에 무슨 일이 생기고, 바쁜 일이 생겨도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성령의 소리이다. 월급이나 기타 어떤 소득이 있을 때 비록 생활비가 넉넉하지 못해도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성령의 소리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다. 너희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그 밖에 무슨 말씀을 더하겠는가? 이 모든 걸 깨닫고 성령을 따라 살려면 물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령의 소리를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 일을 할 때나 직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나 헌금을 할 때 사람을 대할 때나 시간을 사용할 때나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가치와 이성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무어라고 하시는지 겸손하게 엎드려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사시기 바란다. 그러기 위하여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사람의 소리인지 사탄의 소리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그걸 따라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따라갈 때에 주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예언을 멸시치 말라.

살전5: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성경에서의 예언은 한마디로 하나님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미래에 일어날 특별한 일에 관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특별한 일에 대한 예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알려주는 것이 예언이다.

그래서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의 선지서를 예언서라고도 한다. 거기에는 물론 미래에 어떤 나라가 망하고 어떤 나라가 일어날 것인가 등의 미래적인 어떤 일에 대한 말씀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개하라. 순종하라. 우상을 물리치라. 하나님께 바르게 경배드리라. 말씀에 순종하라는 내용들이다. 그래야 미래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고전14:3절에 보면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예언이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것들을 선포할 때에 그 메시지를 멸시치 말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에 예언을 완전히 무시한다. 천국이 있다. 회개하라고 해도 콧방귀도 꾸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은 절대로 예언을 무시하면 안된다. 현재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 특별히 천국에 대한 예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분,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믿는가? 그때에 우리 모두가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것을 믿는가?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믿는가? 그리고 완전한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을 믿는가? 믿어야 한다. 믿고 따라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기서도 바르고 복된 삶이 되며 물론 영원한 영광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이다. 은혜의 말씀이다. 유일한 잣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게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이다. 어떤 말씀이든지 그저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 말씀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는 자의 태도이고 그런 사람이 결국 성령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예언을 무시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주의 은혜 가득하시기를 바란다.

3.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21절)

살전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범사란 물론 모든 일이다. 육적, 영적, 정신적인 것이나 환경이나 상황이나 조건이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또한 헤아린다는 것은 시험으로 입증하다,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좋은 것으로 단정하다는 의미이다. 좋은 것은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옳은 것을 말한다. 취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즉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말씀은 모든 영역과 모든 조건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바르고 선한 것으로 입증된 것만 택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내가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내 경험과 이성의 생각은 어떠하든지 당장에 육체적 물질적으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런 피상적인 것들을 잣대로 사용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다도 인정하시는 것을 택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소유하라는 말씀이다. 물론 그럴 때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 약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되고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짐을 받는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을 택하고 그 말씀을 취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영원토록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 기도하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그래서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헤아릴 줄 알자. 그래서 내 눈에 보기에 어떠하든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을 헤아려 그 편을 택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4.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22절)

살전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이다.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모든 악의 종류를 버리라. 다시 말해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영적 악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다른 하나의 의미는 악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것, 다시 말해 악과 조금이라도 닮은 것들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므로 조금 불평했다고 그게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이 되겠는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감사하라고 했는데 감사하지 않고 불평한다면 그게 바로 악인 것이다. 또 성경에 선한 말, 감사의 말, 위로의 말을 하라고 하셨으니까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하면서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런 생각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다보면 십일조 못할 수도 있지, 주일성수 못할 수도 있지, 좀 싸울 수도 있지, 살다보면 남의 것 좀 떼어먹을 때도 있지, 살다보면 거짓말 할 때도 있지, 어쩌다 한잔 할 수도 있지,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비슷한 거라도 그 근처에 있는 거라도 버리라는 말씀인 것이다.(고전6: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물론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악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결국 더 큰 악으로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다. 주일성수 몇 번 안하다 보면 주일날 빠지는 것을 예사로 알게 됩니다. 십일조 몇 번 안하다보면 뭐 당연한 것으로 알게 됩니다. 결국 영적, 윤리적 무감각에 빠지고 점점 더 큰 악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약1: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늘 영적인 예민한 감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주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택하며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삶을 통하여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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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예수님의 전도방법

 

 

 

말씀 : 예수님의 전도방법

제목 : 요4:1-5

어느 날 목사님이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전도에 대하여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자 한 집사님이 말했다. “목사님, 우리는 지혜도 부족하고, 말씀도 잘 모르고, 성령의 능력도 부족해서 전도를 잘 못합니다. 그런 일은 아무래도 목사님이 전문가시니까 목사님이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다. “양이 새끼를 낳지 목자가 새끼를 낳는 것 보았습니까?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해 주면 양들이 안전하게 꼴을 먹으며 성장하게 되고 그러면 자기들끼리 새끼를 낳아 양무리가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목사는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님도 전도를 하셨는데 감히 누가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전도는 목사만 하는 일이 아니라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할 가장 막중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왕도는 없다. 전도에 대한 분명한 사명감 가운데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기도하며 가르침을 받으며 훈련하며 하나씩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전도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보았다. 오늘부터는 전도의 실제적인 측면으로 여러 가지 전도의 방법들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전도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배워보자.

1.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

예수님의 전도사역을 압축해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두군데 있는데 그것은 마4:23절과 9:35절이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즉 예수님은 가르치심과 전도와 병고침을 통하여 전도사역에 힘쓰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은 기도나 하시면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복음전파와 가르침과 병고침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직접 복음을 전하시는데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직접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냥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하셨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였으면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되 한편으로는 직접 복음을 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일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자.

2.사람들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셨다.(1-3)

오늘 본문 요4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한 여인을 주님품으로 인도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1-3절에 보라.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제자들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이 바리새인들이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셨다는 말씀이다. 왜 그러셨을까? 한마디로 지금은 다른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변론하거나 충돌하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보면 이렇다. 당시 세례요한은 갈릴리지역을 통치하던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를 삼은 것에 대하여 부당함을 말하다가 헤롯에 의하여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유대인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서슴없이 독설을 퍼붓곤 했기 때문이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니까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자기들의 노력 없이도 다른 사람에 의하여 제거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세례요한이 제거되어 좋아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정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하나의 정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세례요한보다 더 강력한 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들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아직은 이들과 불필요한 마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에 갈릴리로 가시기로 한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는 가급적 세상의 일반 대중이나 지도자나 통치자들과 가능한 마찰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찰이나 갈등이나 대립관계는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고,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저 좋은 게 좋다고 그들과 어울려서 적당히 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아닌 것은 아니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정말 지혜가 필요하다. 자칫 그들과 갈등이나 대립 관계가 되면 복음의 역사에도 지장을 받게 되고, 공연히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분명히 선을 그을 부분은 긋되 협력해야 할 부분은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건전하고 유익한 일에는 우리가 더욱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일이라도 선한 일, 의로운 일, 유익하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결국 우리를 인정하게 되고, 나아가 존경심마져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보다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5:16절에서 말씀하셨지 않는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어떤 영역에서든지 빛된 모습을 가지자. 세상과 갈등하고 대립하고 기피하고 정죄받지 말고 정말 옳은 일, 선한 일, 의로운 일, 정직하고 거룩한 일등을 통하여 세상에서 인정받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자.

3.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를 찾아가셨다.(4,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기피하여 들어가지 않는 사마리아땅으로 들어 가셨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기피하는 이유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리아는 옛날 남북분열왕국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북왕국이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하면서 앗수르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유력한 자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대신에 자기네 나라 사람들과 그들의 정복지에서 다른 많은 이방인들을 사마리아로 보내어 함께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혼인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방인을 죄인으로 취급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남왕국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아주 추하게 여기며 멸시하며 상종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북쪽에 있는 갈릴리를 가려면 같은 나라이면서도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기피하여 서쪽의 해변길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동쪽의 베뢰아 길로 돌아가든지 하여 그 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시되 그냥 가깝기 때문에 가신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로 가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가신 것이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것은 오늘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리아를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통행하여야 하겠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과해야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래서 그 땅으로 일부러 들어가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사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경멸하고 더럽게 여기는 땅이었지만 주님에게만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유대나 사마리아나 갈릴리나 주님에게는 모두가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고 있는 안타까운 땅이었다. 그래서 그곳에도 유대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던 것이다. 아니 단순히 필요를 느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멸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지 말고 그들에게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된다안된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아무리 완고하고 추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혼이나 우리 영혼이나 똑같이 주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 생명이나 우리 생명이나 천하보다 귀한 것은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딤전2:4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세가지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는 예수님은 직접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시되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기도만 하지 않고 발로 뛰셨으며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직접 전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두 번째는 세상과 가급적 갈등관계를 피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히 성별된 삶을 삶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건전하고 유익한 일들을 위하여서는 발벗고 나서서 세상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멸시당하고 소외당하고 추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 영혼과 우리의 영혼이 똑같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으며 복음의 역사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편으로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며 다른 한편으로 선한 일로 사랑의 빛을 비출 때 교회가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복음의 역사도 더욱 힘있게 이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며 힘쓸 때 정말 주님의 복음의 역사가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우리들도 잘했다 칭찬듣고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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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맙시다.

말씀 : 살후3:13-18

1.끝까지 선을 행합시다.

옛날에 수리시설이 잘 안되어 있어서 농사짓기가 힘들었던 시절에는 가뭄이 들면 논에 물을 대는 문제로 곧잘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바로 그런 시절의 이야기인데 한 농촌교회의 한 집사님이 밤 늦게까지 수고해서 논에 물을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논을 나가보니 자기 논에는 물이 하나도 없고 바로 아랫 논에만 물이 있었다. 아랫논 임자가 자기 논의 물을 훔쳐간 것이다. 집사님은 당장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싸우고 싶었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이기에 한번 꾹 참고 다시 밤늦게 까지 논에 물을 대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또 아랫논 임자가 논둑을 터서 물을 훔쳐갔다. 그래서 집사님은 화가 치밀어 당장 달려가서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다. “집사님, 예수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이번에는 그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대어주고 그 다음에 집사님의 물에 대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님은 한번 더 참기로 하고 먼저 그 원수 같은 사람의 논에 몰을 대준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대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일찍이 그 고약한 사람이 이 집사님을 찾아와서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달려와서 내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논에 물을 대주다니 예수님 믿으면 그렇게 됩니까? 그러면 나도 예수님 믿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집사님의 선행으로 귀한 영혼을 구원하고 이후로 좋은 친구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게 되었다.

그렇다.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론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아니 열매는커녕 도리어 손해를 보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동시에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령 열매를 맺지 못해도,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해야 한다. 그게 선이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알고 계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선을 택하여 선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6: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고, 오늘 13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하셨다.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말씀을 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으나 여전히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전1:6절을 보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사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힘든 현실들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낙심도 되고, 심지어 회의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 어려움 없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게다가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니 낙심하는 자도 생기고 회의를 갖는 자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믿음을 따르라.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라. 그것만이 살길이고 그럴 때 분명 열매가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선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그러나 문제는 선을 따라 사는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어 낙심하기 쉽고 포기하기 쉽다. 그건 나나 세상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죄와 무지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어렵고 힘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참고 기다리며 선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분명히 그 열매를 누리게 된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약속을 받고 25년 만에 얻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에게 쫓겨 다니기를 10년 이상 도망 다니다가 결국 왕으로 등극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가서 10년 이상을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며 온갖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참고 선을 따랐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며 선을 따랐다. 그럴 때 결국 전세계에 복음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말씀따라 살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잘 몰라도 그저 기다리라.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2.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태도(14,15절)

그러나 이런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서 있어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교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살후3:14,15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여기에 보면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세가지 태도가 있다. ①지목하라. ②사귀지 말라. ③부끄럽게 하라.

지목하라는 것은 대상자를 밝히라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밝히지 말아야 할 때도 있겠지만 대상자를 공개적으로 밝힘으로 그런 잘못된 사람이나 태도에 대한 분명한 경계심을 가지고 그런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다. 사귀지 말라는 것도 결국 같은 의미이다. 그들과 절교하고 내치고 함께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함께 교제함으로 그들의 잘못된 태도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부끄럽게 하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져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과정에서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내치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마음이 아프지만 이런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게 그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악을 그냥 묵인하고 감싸주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분명히 악을 악이라 말하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만들어야 한다. 죄를 지으면서도 당당하게 수치도 모르고 살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자신도 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의 문을 막는다. 교회 공동체에 죄를 누룩처럼 퍼지게 하여 교회 공동체마져도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우리는 그냥 무조건 감싸주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싸주는 것은 실수하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지혜와 능력이 모자라는 것 등을 덮어주는 것이다. 고의적 악의적 의도적으로 행하는 악한 죄나 습관을 덮어주는 것은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악에 빠져 죽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도 그렇다. 죄와 악을 행하고도 아무런 반성이나 회개나 돌이킴이 없는데 무조건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죄와 허물에 대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것을 벗어던지고 선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는 당연히 백번 천번이라도 용서해야 하지만 그런 과정도 없이 그냥 무조건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용서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징계하실 때는 징계하신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책망할 것을 책망하라고 하신다. 아이를 훈계할 때도 때로는 매도 들라고 하신다. 교회에서도 분명히 징계할 것을 징계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잠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러므로 가족이든 교회 안에의 형제자매이든 진정어린 사랑을 가지고 대하되 그러나 윤리적 도덕적인 죄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바로잡아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함으로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자.

3.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기원함(16-18절)

살후3:16, 18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 후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교인들을 축복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축복의 내용인데 그것은 평강과 하나님의 은혜이다.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무슨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축복해 줄 때 가장 기쁜가? 물론 돈, 건강, 물질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이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기쁨, 위로, 소망, 믿음, 사랑, 보호, 인도 등의 인생에게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먼저 이것을 누려야 한다. 설령 세상의 것은 조금 못 누려도 이것만은 누려야 한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인생이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적게 받았어도 은혜를 충만히 받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가장 행복하게 산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된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다 가졌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 진짜 자유 평화 기쁨 은혜 소망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자. 그래서 모든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자.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자. 사랑으로 책망할 것은 책망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기도해주고 이끌어가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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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룩한 칭호

 

말씀 : 요일3:1~6

 

1.가장 위대하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칭호

 

여러분, 세상에서 뭔가 특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칭호가 붙습니다. 성왕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또 일반적으로도 음악의 아버지, 축구의 황제, 가왕 누구누구, 요샌 뭐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여신, 얼짱, 몸짱 그러면서 그럴듯한 칭호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복되고 거룩한 칭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칭호로서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 등의 칭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속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실 분 등등의 의미이지요. 세상에 이렇게 거룩하고 복되고 위대한 칭호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고 능력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품이 좋고 엄청난 업적과 공로를 남겨 대단한 칭호를 얻어도 하나님께 적용되는 칭호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도 안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간에 붙여진 칭호 중에 그래도 어느 정도 하나님께 대하여 붙여진 칭호에 근접하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는 칭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누구누구, 성도 누구누구 이런 칭호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물론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칭호에는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세상의 다른 어떤 위대한 칭호나 타이틀이나 지위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물론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지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갔을 때 어떻게 됩니까? 거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됩니다. 물론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거룩과 의와 선과 사랑 등의 영화로운 속성에 있어서는 거의 예수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영광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칭호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뭔가 특출 나서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멋진 칭호를 얻는 것도 귀한 일이고 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칭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 들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1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보라.’ 너무나 엄청난 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의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늘 자부심과 긍지 속에 감사와 기쁨과 거룩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자녀가 된 과정

 

1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컴을 받게 하였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엄청나고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경이로운 사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만해도 엄청난 사랑인데 게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라도 그런 일을 하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과 사람과는 그 비중이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다릅니다. 물론 사람도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을 살린다면 대단한 일이고 칭찬과 상급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심지어 더럽고 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숭고한 헌신도 그 가치가 줄어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물론 그 결과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여 몇 사람을 살린다해도 숫자적으로 얼마 안될 뿐 아니라 그 영혼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못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고 흠없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럴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은 수억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사랑과 헌신과 섬김을 우리가 어디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놀랍고 크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랑을 받은 자인지를 늘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엄청나고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나서 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안다는 것은 마지막때에 주님이 오실 때 우리도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되어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게 됨으로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장래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거룩하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주님이 재림하시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는 확연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주님과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영화로운 몸을 덧입어 주님처럼 거룩하고 영화롭고 선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빛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엄청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무슨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이런 특권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감히 주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특권이요, 주님처럼 되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하고 영화로운 은총들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나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삶 또한 있어야 합니다.

 

오늘 3~6절의 말씀이 그 말씀인데요,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라는 것은 장차 주님과 같이 되어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소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는 이 소망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물론 어느 정도 소망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 질 수 없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고, 만약 범죄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어야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무엇입니까? 물론 겸손 사랑 자비 긍휼 용서 의 선 지혜 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물론 거룩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받쳐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되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방향과 목적에 부합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된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을 버리고,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의 의미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모든 욕심 욕망 미움 저주 시기 질투 불법 악 폭력을 버리고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날 우리가 힘이 없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시스템을 멋지게 하고 재미있게 유쾌하게 편안하게 해 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봉사하고 선을 행해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신뢰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목적을 그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에 대하여 뭐 그렇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진실하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우선 자신의 심령속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신뢰받게 되고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서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랍고 귀한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써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동시에 거룩하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함으로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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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제목 : 예수님의 사역

말씀 : 마4:23~25

 

오늘 말씀. 예수님의 사역. 물론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예수님의 가장 근본적 사역.

그러나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죄사함과 부활과 천국을 알리고 깨닫게 하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천국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끊임없이 전하시고 가르치심.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핵심 사역 세가지. 복음을 전하심. 가르치심. 병을 고치심. 즉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리심. 선포하심.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믿은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심. 그 다음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심.

이것이 교회의 사역. 이것이 인간의 삶의 우선순위. 인간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일.

오늘날 이런 의미가 많이 퇴색, 예수님의 오심, 성탄절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 인간적인 사랑,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하나됨, 서로 인정함. 물론 이런 의미도 있고 또 상당히 중요한 일이기도.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님.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생명.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에서 잘 나타남.

1.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천국 복음은 전하심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분명.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물론 섬기시고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도 사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적인 섬김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결국 십자가까지. 사랑도 단순한 인간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동기는 생명. 인간에게 참된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

그래서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 천국 모두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그리고 사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소용없어. 그래서 또 말씀.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알자. 바르게 믿자. 바르게 영접하자.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생명의 소식을 전하자.

2.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가르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천국복음을 전하신 다음에는 가르치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정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무엇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인가? 등 하나님의 형상, 천국시민으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심.

우선은 믿어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생복락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고 심판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어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 눈앞에 전개될 현실적인 세상. 단순히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나 마음속의 소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 공간.

그리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중요한 일인가? 무엇이 정말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인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가를 가르치심.

그러므로 열심히 듣고 배워야. 그리고 그 말씀따라 살아야.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육체적인 건강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주님이 우선되는 삶으로 방향전환해야. 돈이나 명예보다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거룩과 의가 우선시 되는 삶을 살아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생명과 기쁨을 은혜를 주는 삶.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는 삶. 이런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그럴 때 진정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풍성함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됨.

3.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 이웃 돌보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께서 하셨던 세 번째 일은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시는 사역.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돌보심이다. 비단 몸 뿐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주셨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다. 죽은 야이로의 딸, 어떤 과부의 청년 아들과 죽은지 나흘리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마14장),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셨다.(마15장)

즉 예수님은 인간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그 영혼과 육신과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심. 물론 분명히 우선순위가 있었다. 먼저는 영혼을 살리는 것.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의 백성의 삶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육신과 물질적으로 돌보셨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균형적인 믿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런 균형잡힌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먼저는 영혼이 온전히 거듭나야 한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현실적인 것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바르게 알고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몸과 마음과 영혼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성탄절주민초청잔치는 바로 이런 자리다. 복음을 전하는 자리이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리는 자리다.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자리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리는 자리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이다. 어찌하든지 그들의 교회 마당을 밟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리게 하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하려면 한명이라도 더 오게 해야 한다.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벤트나 홍보도 필요하다. 이벤트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이벤트다. 한명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하고 일단 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뭐가 되어도 된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전해도 튕겨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사랑을 베풀고 하다보면 결국은 조금이라도 교회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이미지가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어쩌구저쩌구 잘하지만 행동은 전혀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무엇인지 그 역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되새겨 보며 먼저 나 자신이 그런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자.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주님을 만났으면 진정 거듭난 자로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자.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그 일에 힘쓰자. 그 일환으로 실시하는 성탄절주민초청잔치에도 적극적인 자세로 홍보하고 참여 함으로써 많은 분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하자.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믿게 하자. 혹시 당장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해도 마음이 점점 부드러워져서 결국은 주님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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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찬양예배설교


제목 : 가장 큰 능력

말씀 : 요20:24-31

 

1.가장 큰 능력은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가장 큰 능력이고 무기이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다. 그렇다고 기도하면 산도 옮겨질 것이라는 믿음, 믿기만하면 죽은 자도 살아나고, 바닷물로 갈라질 것이라는 믿음 등의 뭔가 대단한 능력을 일으킬만한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믿음도 포함되지만 믿음이 능력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은혜와 진리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먼저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지옥의 권세를 이긴다. 일단은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다. 세상의 다른 무엇이 이런 능력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궁극적인 구원만을 가지고 믿음이 가장 큰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 생명력과 기쁨과 은혜와 사랑을 준다. 근심 걱정 염려 불평 불만 낙심 절망 한탄욕심과 미움과 시기를 이기게 한다. 그래서 그야말로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가장 큰 능력인 것이다.

안 그런가? 이보다 큰 능력이 어딨나? 지옥의 권세 깨트리고 천국가는 능력이 세상의 다른 어디에 있겠나? 또 세상에서도 우리가 무엇으로 이런 생명의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겠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평안을 주겠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주님을 믿는 자는 이런 은혜를 분명히 누리게 된다. 분명히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된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희망과 소망을 찾을 수 있다. 많이 갖지 못했어도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4:13절에서 말씀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 고후6:10절에서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모든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가운데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세상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주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무지와 불신가운데 있는 제자들(24,25)

그렇다. 믿음이 관건이다. 믿는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상황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다만 자신만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힘있게 사명을 감당함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영광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믿음을 늘 강조하셨고, 부활 후에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주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며 믿음을 강화시켜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힘있게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여러 번 목격하기 전에는 아주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눅24:11절에 보면 사도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였다. 또 마28:17절에 보면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19절에 보면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고 숨어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오늘 25절 말씀이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러니까 앞서 도마가 없는 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셨었는데 이 사실을 도마에게 말하자 그는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예수님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라고 그 만큼 말씀하셨는데... 또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는지 보았는데... 그만큼 천국에 대하여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게다가 방금은 열명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그 제자들이 모두 방금 예수님이 다녀가셨다고 말을 하는데 어떻게 손의 못자국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창으로 찔린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하는가?

여기서 무엇을 생각하가? 철저하게 굳어져 버린 인생의 모습.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인생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걸 경계해야 한다. 정말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한다. 정말로 철저하게 깨져야 한다. 그 알량한 이성 경험 논리를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우리의 그 작은 모든 이성과 생각과 논리를 내려놓고 오직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름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진정한 믿음(26~29)

그러나 다행히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면서 점차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들은 주님 안에 있는 그 부활의 생명을 믿어 의심치 않고 사명을 감당하여 결국 복음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도 마찬가지다. 도마가 없을 때에 오셨던 부활의 주님께서 그 후 여드레가 지나서 이번에는 도마가 있는 자리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한다.(28절) 그때 주님이 다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절) 그렇다고 보고 믿는 자는 복이 없다는 말씀은 아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며 그러기에 그들이 더 복되다는 말씀이다.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보지 못하고 믿는 마음이야말로 순수한 마음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이다. 물론 보고 믿는 것만해도 다행은 다행이지만 그건 어쩌면 온전치 못한 믿음이다. 안 그런가? 부모가 자녀에게 약속을 했는데 손에 쥐어 주지 않으면 안 믿겠다고 하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러나 부모님이 약속을 했을 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는다면 얼마나 갓난아이와 같이 순전한 믿음인가?

그렇다. 우리는 이런 순수한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정말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가? 주님께 믿지 못할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 아니신가? 주님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지 않았는가? 당신께서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이런 주님을 믿어야 하고 믿었으면 믿고 따라가야 하지 않는가? 그럴 때 얼마나 생명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자신의 그 무지, 경험, 이성, 고집 이런 정말 별거 아닌 것들 다 내려놓고 진정으로 갓난 아기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4.성경의 기록목적(30,31절)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31절을 보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목적이 뭐냐? 예수님 믿게 하는 것, 그러면 왜 예수님 믿게 하려고 하느냐,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의 목적은 이것이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 믿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이며,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며,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는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한 구원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을 믿었으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그게 교회생활이다. 이거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고상한 무슨 소리를 해도 헛일이다. 교회는 철학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고, 무슨 봉사단체도 아니고, 개화기관도 아니다. 그런 것은 주변적인 것이다. 핵심은 언제나 믿음이다. 히11:6의 말씀을 보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므로 이 시간 더욱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셔 들이자. 정말 나 자신은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성이나 지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여 그 안에서 새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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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 하나님의 영광 Sunday Night Service
제 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 씀 : 고전10:31-33

 

1.인간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31절)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존재의 목적에 부합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해도 만약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컴퓨터가 있습니다. 컴퓨터의 목적은 정보를 잘 처리하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키보드나 마우스를 통해서 원하는 정보를 입력하면 중앙처리장치에서 정보를 처리하여 디스플레이어에 그 결과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고성능의 컴퓨터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여기 서서 마이크를 통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이크가 여기에 있어야 할 목적은 여러분에게 제 음성을 보다 잘 전달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이 마이크가 저의 목소리를 여러분에게 잘 전달해 주지 못한다면 이 마이크는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사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제아무리 인물이 훤하고 키가 크고 능력이 많아도 만약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런 인생은 쓸모없는 인생이요, 무가치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그 지식과 능력을 합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과 능력은 죽은 지식입니다. 아니 그저 죽은 지식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43:7에서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혼자 영광을 독차지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인간은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갖게 되고 그럴때에 결국 인간 자신도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조건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3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를 비롯하여 모든 삶의 행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여러분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여러분의 삶도 참된 기쁨과 가치와 의미가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좀전에 말씀드렸던 3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 또는 욕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을 먹는 일 조차도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아니면 단순히 식욕을 채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식생활을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하게 영위하여 그래서 육신의 건강도 도모하고, 건강한 육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의, 식, 주 등의 모든 문제가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볼때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유명한 음식점을 여기저기 찾아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끼에 몇만원씩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몇십만 몇백만원짜리 옷을 입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넥타이나 티셔츠 하나에 몇십만 몇백만원 가는 것도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지금매고 있는 이 넥타이는 오천원짜리입니다. 저는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별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먹고 마시는 문제를 생각할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음주와 흡연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일부 한국교회의 성도들 특히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는 술과 담배를 개방해야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사단의 유혹에 불과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술 담배가 그 해독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술과 담배로 인해 건강을 해치고, 심지어는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술로 인하여 가정 폭력이 발생하고 심지어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모든 범죄의 80%이상이 술담배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든 퇴폐향락의 중심에는 언제나 술과 담배와 마약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또 술과 담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낭비합니까? 그 시간과 그 물질을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한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습니까?

더군다나 술과 담배는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생명체를 파괴하고, 죄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허용하라고 한다는 이것이 마귀의 유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1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누를 끼치는 일이냐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의식주 문제를 비롯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농사를 짓든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와 권력과 명예를 얻어서 대접받고, 호의호식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힘쓰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쉬고 노는 일 까지도 그저 쉬고 놀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통하여, 직장을 통하여, 쉬는 것을 통하여, 권력이나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과 이웃에게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삶을 영위하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 한마디 할 때도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직장을 구할 때나 결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나 언제나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바로 그러한 삶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앞에서나 인정받으며 남에게도 큰 유익을 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3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거치는 자」라는 것은 물론 남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남의 진로를 방해하고, 장애물이 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 진리의 길로 가는 것을 막고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은 한마디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우리 교회나 남의 교회나 어쨌든 상대방이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남을 걸려서 넘어지게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가 되지 말라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 보면 너무나 이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남이야 고통과 상처를 받든 말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기치고 도적질하고 빼앗고 때리고 죽이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남의 길을 가로막아서 자기가 앞서 가려고 합니다. 남을 넘어뜨려서 자기가 일어서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헐뜯고 난리입니다. 요즈음 너도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와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가관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말과 행실을 바로 해야지 나보다도 못한데 내가 거기 가서 무엇을 배우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내에서도 많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거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빨리 청소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나의 잘못된 행동이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말 한마디가, 나의 잘못된 행동이 남을 실족하게 하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교회에 누를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행동 하나 하나가 정말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를 늘 생각하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여러분께서는 결코 남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남을 세워주고, 남을 위로해주고, 천국길로 인도해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정말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펼쳐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려면 남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정말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래야 결국 인간들의 삶이 풍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남을 유익하게하는 삶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남을 위해서 할 일이 무한히 많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입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입을 것도 주어야 합니다. 병든자를 고쳐주기도 하고, 좌절과 낙심 중에 있는 자를 위로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남을 위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천만금을 준다해도, 헐벗은 자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많이 준다해도, 병든자에게 아무리 병을 고쳐준다고 해도 만약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병을 고쳐주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먹고 입을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결국은 다시금 절망 할 수 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진정한 유익을 끼치고자 한다면 먹고 입을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일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더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누려야 할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은혜로 누리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인생을 전인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러한 일에도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물론 직접 나가서 전도도 해야 합니다. 사랑도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학교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찬양단원으로, 차량운행 봉사로, 청소와 식사당번으로 모든 영역에서 열심히 봉사도 해야 합니다. 헌금에도 물론 당연히 감사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요,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인생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만이 먼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뿐만 아니라 자신과 남의 생명을 유익하게 하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거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을 넘어지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상처받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지고, 여러분의 삶에는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고, 여러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유익을 주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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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서로 용납하라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서로 용납합시다.

말씀 : 골3:12-14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한다. 한마디로 자비를 베풀고 용납하고 참으며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말은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르고 더 나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계속해서 훈련하다보면 조금씩 가능해진다. 주님 앞에 엎드려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면서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용서하고 받아주고 용납하기를 연습하다보면 조금씩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저 자신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1.사랑과 자비와 긍휼등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과 거룩의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야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에 걸맞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너무나 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가 어떤 특혜를 받았는가?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갖게 되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것도 뭐 남들보다 크게 선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남들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나를 택하셔서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는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사랑의 법을 적용시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향기를 발할까? 얼마나 크나큰 은총 속에 살아갈까?

2.구체적 사랑의 모습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긍휼히 여기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연민을 갖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가 이 마음만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결국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무지해서, 연약해서, 심각하게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아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지 않는가? 오죽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혹 누군가가 잘 사랑해지지가 않고 용서가 잘 안된다면 그의 무지와 죄와 어리석음과 죄로 오염된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보고, 동시에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 되새기며 어찌 하든지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용서하고 그래서 함께 주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자비를 베풀라

자비란 선함, 친절함, 우호적임, 온화함 등을 말하는 것으로 긍휼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연민을 가지면 자비를 베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최대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왜? 불쌍한 영혼이니까. 왜 나도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주의 은총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겸손하라.

겸손은 말 그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하지 못하고, 싸우고 대접받으려고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교만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춘다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뭘 그렇게 잘 났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용서하지 못하고, 허물을 받아주지 못하겠는가?

벧전5:5(하),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4)온유하라.

온화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있고, 기질이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깨트리고 부서트려서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럽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내 자아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온유하라고 해서 죄와 추함과 더러움 마져도 적당히 받아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하는 말 맞다나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죄는 미워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화를 내기도 하셨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상냥하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좀더 친절하자. 상냥하자.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오래 참으라.

앞서 말씀드렸던 일들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해서 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금방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런 점을 이용해 먹으려고도 한다. 뭔가 나만 손해보고 나만 바보 되는 것 같을 때도 많다.

그러다보면 그만 나도 모르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온유를 지키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같이 대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열 번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여 앞에 잘한 것까지 말짱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도 내 맘대로 잘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깨져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6)용서하라.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서 불만의 원어적인 뜻은 비난, 허물, 책망을 의미하는 말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이나 자신에게 잘못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싫은 사람, 미워하는 사람,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 요구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주님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찌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일만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이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비난하고 욕하고 원수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7)이 모든 것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온전하게 매는 띠란 옷을 입고 모든 옷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띠를 말한다. 즉 사랑이 앞서 말했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등을 하나로 묶어서 온전하게 해 주는 띠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만 있으면 앞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온전치 못하고 타인에게는 욕을 먹을망정 부모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랑이라는 것도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행동으로 잘 안될 때가 많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할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변명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다른 방법이 없다. 은혜받아야 한다. 능력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자아가 깨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래도 온전치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조금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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