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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설교] 오직 하나님만 기대하는 자

 

 


찬송 : ‘내가 깊은 곳에서’ 363장(통 479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요나 2장 1∼4절
 
말씀 : 요나가 죽기 위해 바다에 빠졌을 때 큰 물고기가 그를 통째로 삼켰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갇힌 요나는 물고기와 함께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지요. 어쩌면 요나는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요나는 요동할 수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첫째, 요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았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거나 몸부림치지 않았지요.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얻는 유익은 결국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자신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이렇게 된 원인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써 그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애원합니다. 요나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현재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둘째, 요나는 유일한 해결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 요나는 두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놀라운 확신으로 기도하고 있지요. 그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드리는 이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신을 얻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비록 물고기 뱃속에서나마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거쳐 온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 앞에 자기 모습을 고백하고 바른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배드릴 수 있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요나는 현재의 상황과 자신의 소원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기가 처한 상황과 자기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표현했지요. 요나는 지금 주의 파도가 자신을 터뜨리려 하고 있고 주의 물결이 자신을 질식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운데 오로지 민족주의에 사로잡혔던 요나는 이제 이스라엘이 망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하며 이방인이라도 구원받을 사람들은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성전을 바라볼 소원이 생겼고 ‘이제라도 이방인에게 가겠다’ 는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요나처럼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때 우리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 유일한 해결자이신 하나님,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니 감사합니다. 자신의 소원을 주께 아뢰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이에스더 목사(요나3일영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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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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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박 한 응목사                        
본  문 : 로마서 12 : 1 - 3
제  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Series 1)
찬  송 : 213, 214, 321, 325, 327, 539

        할렐루야!!
        오늘도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려고 오늘 거룩한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충만하게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예>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저, 목사님 긴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예,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라고 대답을 하자 그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 목사님, 저 아무래도 권사를 못하겠습니다.’
        ‘아니 권사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습니까?’
        ‘일도 많고 너무 바쁘고 해서 집사하고 바꿔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권사는 못하고 집사는 할 수 있습니까?’
        ‘네 가만히 보니까 집사는 심방도 하지 않고, 또 하는 일도 별로 없고, 이름만 가지고 있어도 되잖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우리 교인들 중에는 권사라고 해도 심방 한 번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속장이라고 해도 속회 심방 한번 하지 않는 속장도 있습니다.
        집사, 권사라고 해도 새벽기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달에 감사헌금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안 한다고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으면 따라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은 주님 심판대 앞에 가 보아야 합니다.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불신앙적인 행동이 나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라 행하여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신앙생활이 남에게 믿음의 상처를 준다거나 실족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잘못하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기왕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도둑놈 따라가면 결국 도둑놈 됩니다. 노름꾼 따라다니면 결국 노름꾼 됩니다. 게으름뱅이를 따라가면 결국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민수기 16: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바네아에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더불어 당을 조직하고 모세를 반역하였습니다. 이때 고라를 추종하는 사람이 250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땅을 갈라서 생매장을 시켰고 추종하던 250명은 제단에서 불이 나와 모두 타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공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함께 자라지 않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가라지를 먼저 묶어 지옥 불에 던져 태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9-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또한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사람은 더 악해지고 선한 사람은 더 선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가 가까울수록 믿음 있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음 없는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과 멀어지고 교회와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집니다.
        (계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 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완악 하여져서 바른 교훈이나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래서 신앙으로 말씀으로 권면을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여야 하늘의 신령한 영적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여 주시며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황충을 금하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는다고 아무리 설교를 하여도 마이동풍이고 권면을 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사, 권사, 속장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르기 좋으라고 붙여준 이름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그 직분이 어떤 것이든 간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도 그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에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겔16: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 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지금까지 쌓여만 가던 모든 죄악은 모두 아침 안개의 사라짐같이 빽빽한 구름이 물러감같이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로 씻음 받아 거듭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래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방법론이 제기되겠습니다만 저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사랑이요 은혜이며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만약에 우리에게 예배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허락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선교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입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까지 예배에 대한 말씀으로
        오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오늘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
        다음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지 말자”
        그리고 다음 주일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이렇게 시리즈로 말씀을 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아멘!>
        우리 ○○교회 성도들은 기왕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1.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건축케 하신 후에 성소에서 만나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출30:6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날 것이라” 고 하셨고 왕상 9:3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시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광야가 아닙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골방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안방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1) 하나님과 만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삭개오는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하여도 평생소원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오시고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정이 구원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②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죽어가면서도 메시아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③요한복음 4장 5절 이하의 기록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은 남편을 다섯씩이나 거느린 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온 성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④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일평생 주님을 섬기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장사지낸 지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과 만나고 예수님과 만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출15:26) 고 말씀 하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② 여리고성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③ 열 명의 문둥이를 고치셨습니다.
       ④ 거라사 지방의 군대 마귀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만나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병 고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는 줄로 믿습니다.<아 멘!>

(3) 하나님을 만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 창21:14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난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지고 온 물과 떡이 모두 떨어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방성대곡하여 울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샘물을 주시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② 요한복음 6장의 말씀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5병2어를 가지시고 저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병2어를 가지고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였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입니다. 바로 한 소년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③ 왕상 17:8절 이하의 말씀에는 사르밧의 한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구를 듣고 순종하였을 때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기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예배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집을 나간 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허랑 방탕하여 허비한 후에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들어서 아사 상태에까지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그 아들을 얼싸 안았습니다.
        아들이 생각하기엔 아버지가 도무지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아들은 고사하고 그저 품꾼으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모든 일을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아들로서의 모든 권한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고,
        또 기억치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렐루야!!

 

3.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수 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5:8-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고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만이 할 수 있습니다.

 

4. 예배는 우리의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 귀한 시간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식물들까지도 성장할 수 있는 양식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영적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오직 귀한 시간이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 시간이야 말로 얼마나 귀한 시간인 것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예배를 소홀히 하는 성도가 있어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분을 내시며 저들을 책망하여 내쫓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영적으로 기갈이 들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갈급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이 시간마다 순간마다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07:9)
         (사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기름진 것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심과 두려움과 세상의 재리와 염려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가 되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하나님의 주시는 신령한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22;1-14절 말씀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이 종들을 불러 청한 사람을 모셔오라고 하였지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사양을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청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무슨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고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 상태는 지금 아사(餓死) 상태인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말세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암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 하여 피곤하리라”
        이와 같은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이때에 오늘 예배드리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여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 오히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2) 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예배는 피 흘림이 있는 예배입니다.
        피 흘림이 있는 예배는 희생과 헌신과 감사가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희생이 없고 감사가 없고 제물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 쌓는 곳에 강림하셨고, 제물 있는 곳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또 제물 있는 곳에서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3) 새롭게 변화된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는 것” 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으로써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세상 것을 다 끊어버리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성령이 역사 하시고 거듭남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며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옷도 아무렇게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또 지각이나 하고, 와서는 졸기나 한다면 이런 예배를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부르짖고 찾아서 만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렘29:12-14)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막혔던 모든 문제들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구원의 문이 열려지고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모든 질병도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아무쪼록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총과 축복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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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두 얼굴

 

그런데, 그들의 말처럼 정말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폭력을 일삼는 극렬 원리주의자들은 정말 소수의 테러분자들일 뿐인가? 그들의 주장처럼 이슬람이 정말 그 정도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지만 이슬람은 두 얼굴을 가지고 둘 중의 어느 한 쪽을 편의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하는 변신에 능한 이들임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이며, 테러를 자행하는 극렬 원리주의자들은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온건한 이들이며 우리와 같은 선한 이웃일 뿐이다는 주장들을 당연하듯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이슬람 전략가들이 가장 노리는 전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슬람은 평화를 의미하며 따러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이슬람'평화의 뜻이라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평회를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는 쌀람’(히브리어의 샬롬)이며, ‘이슬람은 단순히 복종’(submission)을 의미할 뿐이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무슬림)로 구성된 종교요, 그 종교의 경전인 꾸란(Quran)은 최소한 다음과 같이 무슬림들에게 명령한다.

 

박해가 없어질 때까지, 종교가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꾸란 2:193)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슬람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평화의 집(Dar Es-Esalam. 다르에 쌀람)’ 전쟁의 집(Dar Al - Harb. 다르 알 하릅)’ 으로 이분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타의 종교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이루어 이슬람의 율법(샤리아)으로 다스림 받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세계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들이 공존하는 현실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인 것이다.

 

흔히 꾸란이냐 칼이냐?” 라는 문구로 이슬람을 이해하던 과거의 표현을 두고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그렇지 않다. 평화의 종교인 이슬람에 대한 서구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편견이 담긴 표현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이야 말로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가장 짧은 표현으로 그 이중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이슬람의 실체는 과거나 지금이나 그 근본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며, 그 전략에 있어서도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있다면 대신 총과 폭탄과 같은 현대식 무기로의 무장이라 하겠다.

 

이슬람은 처음부터 로 세계를 정복해왔고 여전히 을 휘두르며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슬람에선 아무리 아니라하지만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녹색바탕 위에 선명하게 보이는 아랍어 글씨와 그 아래에 놓인 긴 칼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이요,

그 신앙고백의 기초에는 엄연히 긴 이 놓여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거기에는 그 고백과 함께 다른 상징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굳이 평화를 위한 이라고 우긴다면,

평화모든 이교도와의 전쟁을 그치고 난 후의 평화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알라의 이름으로’ (비스밀라) 이 땅에 이교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성전(聖戰. 지하드)해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온 세계가 이슬람 율법이 다스리는 이슬람 세계가 오기 전까지

 전쟁은 쉼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 속에서 테러소식이 가장 많은 나라들을 꼽아보라.

모두 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절대 다수인 국가들이다.

왜 그럴까?

 

 경전을 통한 판단과 분별

 

아무리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평화로 포장하여 소개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절대적이고 규범적인 권위의 원천인 꾸란)코란)의 진술을 부정할 수는 없다. 꾸란에는 수많은 구절들이 무슬림들을 독려하면서 알라를 위해 투쟁(지하드)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여기에 몇 구절만 소개해 본다.

 

알라를 위하여 당신을 적대시 하는 자와 싸워라”(꾸란 2:190, 이하 김용선 번역본)

 

박해가 없어질 때까지, 종교가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2:193)

 

알라와 그 사도에 싸움을 걸고 지상에 해악을 뿌리려 하는 자가 받는 벌은 살해되든가 십자가서 박히든가 손발을 반대쪽부터 절단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국외로 추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서 받는 그들의 굴욕이며 내세에서도 그들에게는 무서운 벌이기다리고 있다 “ ( 5:33)

 

그런데 신성월이 지났으면,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 모든 길에 복병을 두고 기다리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회개하여 예배를 지키고 희사를 한다면 방면해 주라, 알라께서는 관용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시다“ (9:5)

 

어떤 이들의 반박과 같이 기독교 역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살상과 전쟁들을 일으켜 온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그것을 경전을 통해 신의 이름으로 명시적으로 명령하는 것과,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칼을 든 것은 현실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쨌든 이 명령들이 실제로 오늘날 무슬림들에 의해 수행된다고 가정해 보라. 세계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구절들에만 의거해 보더라도 오늘날 테러행위를 서슴지 않는 극렬 무슬림들을 가리켜 어찌 소수의 극렬 윈리주의자라고 비난하겠는가? 오히려 무슬림들은 이러한 꾸란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수행하는 전사들에게 환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무슬림들이 이러한 꾸란의 명령들을 문자적으로 실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수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복음서의 지상명령을 끊임없이 읽고 또 듣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렇게 심각하게 문자적으로 그 명령따라 살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 명령을 발하신지 2천년이 되도록 그 명령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업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꾸란을 읽는 수많은 무슬림들 역시 위에 명시한 구절들을 무자적으로 수행하지 않은 결과 그나마 세계는 이만큼이나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리 주위에는 온건한 무슬림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만,

이같은 알라의 절대적 명령들이 무슬림들의 가슴에 끊임없이 각인되는 한,

어느 날 예기치 않는 때에 그들은 오늘날의 테러분자들로 돌변하여 나타날 가능성들을 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치 수많은 기독청년들이 자아실현을 꿈꾸며 자기만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 삼으라는 지상명령에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도를 전하고 생명을 전하는선교가 아니라, 알라의 이름을 위해서는 테러와 피흘림도 불사한다는데 있다. 기독교의 선교 명령이 준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자연스런 열매인 반면, 이슬람의 지하드가 수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을 멸하고 파괴와 죽음이 열매로 맺어 나오는 현실이라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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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소강당에서 열린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 제26회 영성포럼에서 이동주 박사님이 발표한 논문 '이슬람 대처' 전문을 몇 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필자는 중동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여성들이 누리지 못하는 인권문제를 보았고, 방문자인 필자조차 조심하지 않으면 그러한 피해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현실적으로 한국인의 인구 감소와 무슬림들의 대거 유입, 그들의 자연적 인구 증가, 무슬림 남성들의 국내 장기체류를 위한 타끼야(위장) 전략적 결혼과 피해사례들, 타끼야 전략적 이슬람 미화선전을 그대로 믿고 안일하고 느긋하게 외래 종교의 급류 현상을 신경 쓰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필자는 크게 걱정한다.


이제 IS는 한국인 테러대상 20명을 지목하면서 공개적으로 '테러'와 '성전'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 이슬람화의 초기단계인 '평화 선전전략'을 벗어나려는 국내 무슬림들의 행동들, 그리고 관찰하면 바로 알 수 있는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의 각 처소의 고지를 점령해 올라오는 이미 드러난 사례들로 인해 우리는 긴장하고 있다.

이미 기독교 윤리관과 기독교 문화에 젖은 우리는 이슬람 문화도 그러한 공통적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전제하고 무슬림들을 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나는 이슬람 테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무슬림들의 사명감은 알라가 명한 대로 전쟁 무기로 전 세계를 이슬람 화하는 것이다. "박해가 사라지고 종교가 온전히 하나님(알라)만의 것이 될 때가지 성전하라"(Sura 8:39). 이 구절의 각주에는 "피트나(fitnah 반란, 투쟁)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쉬르크)으로 지구상에 한 사람의 불신자도 존재하지 아니할 때까지 성전(지하드)해야 한다"고 해설돼 있다.


무슬림들의 테러는 이슬람교의 경전과 국법(샤리아)의 의미로 일종의 약한 "성전"(聖戰)이다. 테러리스트들이 비무슬림들을 습격하고, 강탈하고, 강간하고, 살해해도, 이슬람 국가들 중 어디에도 테러리스트들을 검거하거나 처단하는 경우를 볼 수 없다.


우리는 종교 경전과 법률(샤리아)이 명하여 칼로 비무슬림들을 살해하고, 인질로 잡고, 고문하고, 탈취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는 이슬람교에서 합법일 뿐 아니라 경전이 말하는 알라의 뜻이다. "성전"은 무슬림들에게 세계 선교방법 중 가장 경전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이다. 무슬림들은 테러도 성전으로 간주한다.


이슬람의 세계 선교 방법은 타끼야(위장, 거짓말)전략, 일부다처와 다산에 의한 무슬림 인구증가, 성전의 첫 단계로 평화적 접근선교인 '다와(dawa)', 이민선교, 교육선교, 교도소 선교, 석유선교, 문화선교, 인터넷선교, 미디어선교, 금전선교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슬람선교의 목적은 '세계의 이슬람화'라기보다는 '세계의 샤리아 지배'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세계 이슬람화는 샤리아의 세계 지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슬람 '샤리아'는 세계 이슬람화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슬람의 샤리아와 샤리아의 근간인 꾸란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는 이슬람에 대처하기도 어렵다.


세계 이슬람화는 1972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Jeddah)에 모인 30개국의 '이슬람 외무부장관 회의(Islamische Außenmisisterkonferenz)'로부터 개시된다. 이 '이슬람 외무부장관 회의'는 세계 무슬림의 정치와 종교를 한 덩어리로 묶고 단결시켜 스스로를 헌장국들(Charta-Staaten)로 표명했다.


이곳에서 결성된 '이슬람 회의(Islamische Konferenz =Motamar Islami)'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연합했고, 이 세계 이슬람교는 '이슬람 국왕회의 및 장관회의', '외무부장관 회의', '항구적인 이슬람 총무'를 세우기로 결정했으며, 대 반기독교적 전략을 함께 의논하였다. 이 이슬람회의의 초대 총무는 전 말레이시아 국무총리 퉁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이었다.


이 '이슬람 회의'에 속한 중요한 '세계이슬람 조직(Weltmoslemlinga =Rabita Al-Alam Al-Islami)'이 있다. 1974년 제2대 총무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자문 싸이드 하산 무함마드(Sayyid Hassan Muhammad Al Tuhamy)는 세계 무슬림 공동체를 강화하여 연대감을 가지고 서로 도울 것과, 다음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그것은 ①모든 나라에 이슬람지부를 설치하고 ②디아스포라 무슬림 신학대학을 세우며 ③전 아프리카를 이슬람대륙화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위와 같이 전 세계를 이슬람화 하자는 계획 하에 아시아를 이슬람화 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으로는 우선 '한국을 이슬람화 하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한국을 이슬람화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시행해야 할 방법을 간파했다. 그것은 이슬람 교육선교이다.


한국의 교육적 열망을 알아챈 그들은 1970년대부터 치밀한 교육정책을 개발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지대학교, 그 밖의 지방 대학교들에 아랍어과와 이란어과, 터키어과 등을 설치하고 아랍어를 보급하며, 학과목으로 이슬람 문화사, 꾸란 연구, 중동정치학 등을 개설했다.


이들의 교육은 이슬람사원에서도 실시된다. 우리는 차세대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모스크들과 이슬람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슬람의 차세대 교육을 무관심하게 방치한 서구와 미국의 이민 2세들이 받은 교육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슬람 노동자들뿐 아니라 이슬람 난민들을 맞이해야 하는 윤리도덕적 입장에 답해야 하고, 그들 중에 잠입해 들어오는 극단주의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대답해야 할 때가 됐다.


필자는 꾸란과 샤리아의 영향권 하에 있는 비무슬림들과 여성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필자에게 주어진 제목 '이슬람 대처'에 관해 연구하면서, 꾸란과 이슬람 샤리아가 어떻게 이슬람 국가를 이루어 가는지, 그리고 온 세계를 샤리아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게 하려고 끊임없이 돌진해온 1,400년의 이슬람화 역사를 살폈다.


필자는 독일어로 번역된 시아파 이란의 샤리아를 접했고, 중동을 왕래하면서 품었던 이슬람의 정체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시작했으며, 노니 다르위시(Nonie Darwish)의 저서 <숨겨왔던 샤리아의 진실(4HIM, 2013)>에서 서술된 이집트의 샤피이(Shafi'i) 학파적 샤리아 치하의 비무슬림의 삶에 관한 진술을 통해, 샤리아의 지배 하에 처한 비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의 입장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파악하게 됐다.


이슬람과 샤리아의 도전에 대해 무관심한 교회의 현재와, 사리아의 지배를 받고 사는 장래의 인류, 그들의 구원을 염려하는 필자로서는 노니 다르위시의 저서가 이슬람 대처를 위해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저서임을 발견했다.


필자의 연구는 무슬림들의 세계 이슬람화와 샤리아의 세계 지배 전략에 관한 관심으로 1. 무슬림 인구 확장, 2. 꾸란과 샤리아적인 세계선교, 3. 지하드 선교: 성전과 테러, 4. 이슬람 선교초기에 '평화의 종교'로 선전하는 이슬람의 타끼야 선교전략,  5. 이희수교수의 '교과서 바로잡기' 논문 내용의 진실성 고찰 6. 일부다처제와 다산에 의한 이슬람교 확장 등에 관해 연구했다.


이를 통해 이슬람의 한국 진입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세계 무슬림들의 한국 이슬람화 정책을 간파하고, 한국교회가 이슬람의 도전에 대해 방관하는 상태에서 깨어나 기도하며, 한국인 모두에게 이슬람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리고, 이슬람교가 한국에 더 견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의 논문은 이를 위한 경고 차원에 머문다.


우리는 한 믿음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 주신 굉장한 특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슬람이 우리의 후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영원토록 통치하시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띄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2-18)".


1. 무슬림 인구 확장


1999년 11월 12일 10면에 조선일보는 세계 무슬림 인구가 2025년 인류의 삼분의 일이 된다고 했다. '이슬람 바로 알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세계선교부 이슬람 대책위'에서 제작한 동영상 '국내 이슬람 확산 방지대책을 위한 안내,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선교'에 의하면, 한국, 북미, 유럽의 인구증가율은 아래와 같다.


현재 유럽 무슬림 인구는 2,200만명이다. 앞으로 14년 후엔 유럽 어린이의 3분의 1이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다. 20년 후 무슬림 인구는 지금의 두 배가 되어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1억 400만 명이나 될 것이다. 현 유럽의 무슬림 인구는 이미 가톨릭 신도 수를 능가 했다고 한다.


유럽을 포함한 무슬림 인구의 수적 증가로 이슬람은 세계 지배 종교가 된다. 리비아 국가 원수 무함마드 카다피가 "알라가 칼, 총, 정복, 전쟁 없이 유럽에서 승리할 것이다. 테러리스트나 자살폭탄 테러는 필요하지 않다. 20-30년 안에 5천만 명 이상의 인구의 힘으로 유럽을 무슬림 대륙으로 만들 것"이라고 역설한 바를 우리는 심각하게 듣지 않을 수 없다.


'국내 이슬람 확산 방지대책위'에서 주장하는 바에 의해면, 두 가정이 각각 1자녀씩 낳았을 때 자녀 세대의 인구 수는 2분의 1이 되고, 손자 세대 인구 수는 4분의 1이 된다. 1개 문화를 위한 최소 출산률은 2.11명이어야 하는데, 역사상 1.9명 이하의 출산율은 역전시킨 적이 없다고 한다. 출산 자녀수가 1.3명이면 회복이 불가하고, 만일 회복하려 한다면 80년에서 100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위 '이슬람 확산 방지대책위'의 무슬림 출산인구 통계는 약 8명으로 제시되고, 헤럴드경제는 인구보건협회의 '2016 세계인구현황'에 대해 "전 세계 여성 1인당 평균 출산율은 2.5명이었으며, 출산율이 가장 높은 국가로는 출산율이 7.5명인 니제르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2012년 세계 인구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이슬람협력기구에 속해 있는 57개국의 평균 출산율은 3.67명"이다.


필자는 이 통계가 일부다처제 가정의 무슬림 여성 한 명당 출산 숫자로 이해된다. 그러니 2025년에는 무슬림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30%에 달할 전망"이라고 집계되는 것은 사실일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유럽연합 31개국 출산율은 1.38명으로, 프랑스 1.8명, 영국 1.6명, 그리스·독일 1.3명, 이탈리아 1.2명, 스페인 1.1명에 불과하다. 무슬림들과 유럽연합의 출산 인구를 대비하면 8.1명이 된다. 현재 프랑스 남부에는 모스크가 교회보다 많고, 프랑스 20세 미만 인구의 3분의 1이 무슬림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니스, 마르세유, 파리의 무슬림 인구는 45%이다. 34년 후(2050년)에는 프랑스가 이슬람 국가가 된다고 한다.


미국의 출산율은 1.6명이다. 1970년 미국 내 무슬림 인구는 10만 명이었으나 현재는 900만명으로 약 약 100배 증가했다. '시카고이슬람전략회의'에서는 30년 후 미국의 무슬림 인구가 5천만 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캐나다의 출산율도 미국처럼 1.6명이고, 2001-2006까지 1,600만 명이 늘어났으며, 그 중에 1,200만 명은 이민자였다.


한국의 여성 1인당 평균 출산율은 1.3명으로, 세계 평균인 2.5명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전 세계 국가 중 끝에서 4번째에 해당하는 출산율이다(헤럴드경제, 2016년 10월 20일). 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확실하게 인구회복 불가의 범주에 속해 있다.


무슬림의 자연적 숫자 증가로 이슬람이 세계 지배 종교가 된다는 것을 이제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계속>

 

 출처 : 크리스쳔투데이 /오피이언/칼럼 /[이동주 칼럼] 이슬람 대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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