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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교회의 이슬람대책 실패 교훈은 현재진행형이다

유례없이 급증하는 국내 이슬람 인구와 문화, 교리적 경계 강화하며 동시에 선교적 과제도 적극 모색해야

과거 한국 이슬람의 역사

 

 


▲ 권순직 목사
(총회이슬람대책위원장)

한국에 이슬람이 들어온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 우편 관리인이었던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dadbid)는 자신의 저서 ‘도로들 및 왕국들 안내서’에서 신라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구히 정착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이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한국의 기록에 이슬람이 등장하는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는 예궁이라고 불리우는 이슬람 사원이 있었고 무슬림들이 그 주변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원나라는 중앙아시아에서 이동한 유목민이 세운 나라로서 많은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다. 또한 무슬림들이 한국으로 귀화하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에 이어서 명나라가 들어서고 한국에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슬람은 대중 속에 정착되지 못하고 자생력을 가지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오늘날의 한국 이슬람

1950년 한국 전쟁에 유엔군 소속으로 이슬람공화국인 터키 군인 1만 5000명이 참전하게 되었는데 당시 압둘가푸르 (Adulgafur)라는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 이맘(Imam)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 등이 개종하였고, 이들은 1세대 한국인 무슬림들로 형성되었다.

이후 김유도와 김진규는 1955년 9월 15일 ‘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함으로서 적극적인 이슬람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슬람 선교 활동은 교육에도 이르렀는데, 한국 전쟁 당시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여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활동을 하였고, 1956년 4월에는 ‘청진학원’을 설립함으로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무료로 실시하기도 하였다. 1956년 주베이르 코치(Zubeyr Koch)가 2대 이맘으로 부임하면서 입교자는 ‘208명’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에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이후이다. 또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전, 7월 11일 아랍연맹이 발행하는 아랍신문(Arab League News)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한국에는 기독교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현재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약 1000만 명이 기독교인으로 보고되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놀라운 증가 추세를 보면, 한국은 상당히 종교성을 가진 나라이다… 한국에는 현재 3만 명의 무슬림들이 있다. 한국인의 종교 성향에 비추어 볼 때 향후 수십 년 안에 이슬람이 기독교를 앞지를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한국은 이슬람 국가 중의 하나로 불리게 될 것이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듯이 1990년부터 한국에는 이슬람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2016년 기준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이주노동자와 유학생 및 결혼이주자를 포함하여 약 23만 명이다. 한국인 무슬림들은 이슬람권에 근로자로 가서 그들의 포교를 받아서 이슬람을 믿게 된 경우, 이슬람권에서 언어를 배우거나 학위를 받기 위해 공부하러 가서 이슬람을 믿게 된 경우, 국내에서 이슬람을 믿게 된 경우, 무슬림과 결혼을 통해서 믿게 된 경우 등 다양하다.

외국인 무슬림들은 합법체류자와 불법체류자로 나눌 수 있는데 불법 체류자들은 약 2만 5000명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40~50여 곳에 모여 살며 한국에 정식 모스크는 16개, 기도처소는 101개 정도 된다. 최근에 출판된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의 ‘2030 대담한 도전’에 의하면 한국에 있는 무슬림 인구는 40만 명에 이르고 2050년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300~400만 명에 이르며 이슬람은 기독교인구보다 많아질 것으로 본다.

이슬람의 교리는 무엇인가?

이슬람의 교리는 네 가지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첫째 무함마드가 살았을 당시 아라비아에서 행하던 토속종교, 둘째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유대인들이 살 수 없게 되자 아라비아 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유대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셋째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고, 넷째 비잔틴 기독교제국 당시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에비온파, 네스토리안파, 마리안파, 콥트파, 영지주의 등이다.

따라서 꾸란의 약 60%는 구약성경에서 왔으며, 약 6~7%는 신약성경에서 인용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교리는 기독교랑 비슷한 점도 있으면서도 반기독교적인 교리가 혼합되어 있다.

이슬람의 신앙은 믿음과 행위에 근거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슬람의 6가지 믿음으로 첫째 알라에 대한 믿음, 알라는 아라비아 전통의 신들 중 하나였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개념을 유일신으로 정리하였다. 둘째 천사에 대한 믿음, 천사는 알라가 창조한 영적인 존재들이다. 셋째 책에 대한 믿음, 알라는 인간에게 104권의 책을 주었는데 모든 책들은 분실되었기에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꼭 필요한 내용은 꾸란에 있다고 가르친다. 넷째 선지자에 대한 믿음, 12만 4천 명의 선지자와 315명의 사도가 알라에 의하여 보냄을 받았다고 한다. 6명의 선지자에게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그들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이다.

이들 선지자들 중에서 최고의 선지자는 무함마드이다. 다섯째 마지막 날에 대한 믿음으로서 세상에 심판이 임할 것으로 믿는다. 꾸란 전체 가운데 약 14%가 심판에 관한 구절이다. 마지막으로 숙명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의 운명은 판에 새긴 것처럼 이미 알라의 뜻에 의하여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다.

무슬림의 행동규약은 6가지가 있는데, 첫째 신앙고백(Shahada)이다. 이슬람 신자들은 “알라 외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한다. 둘째 기도(Salat)는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기도한다. 셋째 무슬림은 그의 재산에서 이슬람세, 즉 구제금(Zakat)을 2.5% 내야한다. 넷째 금식(Saum)인데 이슬람력으로 9월은 라마단 달로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금식을 한다. 다섯째 메카에 있는 알라의 집 즉 카바신전을 방문하는 것으로서 능력있는 무슬림은 일생동안 한번 다녀온다. 이를 성지순례(Haji)라고 한다. 그러나 능력이 안되면 성지순례를 가는 이들을 도우므로 대신할 수 있다. 여섯째 알라를 위하여 싸우는 지하드(Jihad)는 이슬람 종파에 따라서 종종 6번째 행동규약에 포함되기도 한다.

이슬람인구 증가에 대한 한국의 대응

2015년 3월 중동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은 제7차 무역진흥회의에서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킬 것을 언급하였다. 이어서 발표된 문화체육관광부의 보도자료에 의하면 첫째 이슬람 관광객들이 올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개선하고, 둘째 이슬람기도처소를 확장하며, 셋째 이슬람 음식인 할랄을 만들어서 수출하며 넷째 무슬림의료관광을 유치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제1의 중동 붐이 한국인 노동자들이 중동에 진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인 것이라면 제2의 중동 붐은 한국 안에 이슬람 붐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이 발표가 나자마자 두주 만에 터키 종교청은 한국 이슬람 중앙사원을 새로 짓는데 350억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였고, 한 달 만에 전북 익산에 49만 평 식품클러스터 단지 안에 할랄 전문 단지를 만들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2016년 한국에 들어온 이슬람 관광객이 30만 명이 늘었다. 이제 이슬람은 한국에서 정부의 지원 아래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유럽을 본받아서 저출산, 고령화, 노동인력의 부족을 외국인 인구를 받아드려서 해결하려고 한다. 따라서 값싼 임금을 선호하기에 이슬람 국가에서 노동력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문화실패를 교훈삼아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이슬람에 대한 교육을 시급하게 실시하여야 한다. 그동안 한국에 이슬람 인구가 없었기에 이슬람은 타종교인줄 알고 배웠으나 이미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교회는 이슬람에 대하여 교육을 해야하며 각 교단들은 이슬람으로 인하여 무너져 가고 있는 유럽교회를 교훈삼아서 이슬람에 대하여 연구하며 가르쳐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건강해야 하며, 교회 청소년들에게도 이슬람에 대하여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약 80%가 기독교인들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슬람은 언제나 기독교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왔다. 과거에 중동은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었으나 오늘날 이슬람으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유럽 또한 기독교 국가들이었으나 오늘날 이슬람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또한 한국에 와 있는 무슬림에 대한 선교정책도 수립되어야 한다. 한국 땅에 미전도종족인 무슬림들이 소리없이 정착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교단과 교회의 적극적인 대안을 수립하여야 한다. 이슬람은 한편으로는 경계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선교적 과제로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에 따라서 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에서는 지난 4월 21일 총회회관에서 16명의 전문위원 위촉식 및 연석회의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올 해 여름 ‘종교개혁과 이슬람’이라는 주제로 2박 3일 동안 기독교이슬람대책아카데미를 열기로 하였다. 기독교이슬람대책아카데미는 국내외 최고의 강사진과 커리큐럼을 통해서 전국노회 이슬람 대책 담당자와 평신도 사역자들을 교육하고 이를 5년간 이어갈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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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선교종결자


조승호 선교사(차드)

 

들어가는 글

요즘 종결자라는 단어가 유행인 것 같다. 낯선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신조어는 아니다. 외래어긴 하지만 terminator라는 단어가 더 친숙하다. 굳이 다른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끈질긴 자’, ‘끝을 보고야 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선교에도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 좀 더 문학적인 표현으로 ‘선교의 마침표’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시대에 선교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선교를 유언으로 명령하시고 2천 년이 훨씬 넘어선 지금에도 선교는 미완성 과업으로 남아 종결되지 않을까? ‘선교는 하나님이 종결자다’라는 말은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정답 같은 오답이다. 선교의 종결자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자는 바로 교회다.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단체도 아니다. 교회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제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선교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가 하나님이라면 교회가 철로이기 때문이다. 철로 없이 기차는 달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선교의 종결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이다. 머리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개정개역)

 

 선교의 목적(종결)은 무엇인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온 땅의 사람들이 승리와 기쁨의 상징인 '종려 가지'를 들고 순결을 의미하는 '흰 옷'을 입고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다.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지만 온전한 화음은 아니다. 사람들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22). 구원받은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어린 양의 희생의 사랑을 노래해야만 하는 합창제가 남아 있다. 그 장엄한 노래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울려 퍼지는 그날 드디어 선교의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그 때 역사의 막은 내려진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것을 말씀하시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개정개역)

 

1)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너머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셨다. 눈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사람들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그들이 나아간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맞서다가 강제로 흩어지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셨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인류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종족마다 제각기 독특한 컬러를 가지고 서로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샬롬이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신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과 조화를 이룬 샬롬공동체를 꿈꾸신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하신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 10:5 개정개역)

 

2) 예수님의 첫 사역지

예수님께서 첫 사역지로 정하신 곳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고향 나사렛도 아니고 태어나신 곳이요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도 아니었다. 이방의 갈릴리였다.(마 4:12-16)

 

왜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메시아로 선포된 이후의 첫 사역지로 정하셨을까? 단지 다른 지방보다 더 멸시 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이 불쌍해서일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같다.

 

3) 예수님의 오신 목적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 때문에 원심적 선교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요나 선지자가 이방인을 향해 나아갔지만 어디까지나 떠밀려 억지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심적선교를 스스로 펼치셨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듣고 이스라엘의 언약 속으로 들어왔다(수2:9-10). 이방 여인 룻도 인애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왔다. 모두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구심적인 선교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출 19:6).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꿈을 포기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역으로 선교의 도구로 이용하셨다. 그들을 바벨론 포로와 앗수르의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당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에 당신의 백성을 심으셨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그들과 함께 거기 머물면서 스스로 당신을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내셨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 스스로 나태내시고 당신의 구원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었다. 예수, 그이름은 여호와 삼마의 신약적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개정개역)

 

이 말씀은 어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구절이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인가? 죽기로 예정된 하나의 밀알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죽음으로 맺게 될 많은 열매는 바로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이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선민 의식에 절어 있던 유대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들을 향하여 뜬금없이 밀알(죽음과 열매)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한 종족만이 아니라 온 땅의 모든 족속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는 바로 그 때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이다.” (요 12:23)

 

이것이 복음의 특징이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큰 소식 말 그대로 복음인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개정개역)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성경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4) 교회의 태동 목적

지상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 주시었다. 이제는 또 다른 보혜사를 통해서 천상사역이 시작되었다.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성령은 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갓 태어난 교회의 울음소리는 함께한 모든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는 각기 다른 방언으로 울려 펴졌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태동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사건이다. 교회는 모든 방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개정개역)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단어

 

왜 그럼 이토록 중요한 개념을 교회는 오랫동안 몰랐을까? 우리의 성경해석이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 유익이 되는 한 구절만 쏙 뽑아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빌 4:13의 말씀을 우리는 좋아한다. 그러나 그 참 의미는 헤아려 보지 못하고 무작정 좋아하는 것 같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개정개역)

 

이 말씀은 11절과 12절의 연속성 속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개정개역)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가난, 궁핍, 핍박, 환란, 죽음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런 것들은 모두 뺀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만이다. 그는 가난해도 비참하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부해도 교만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환란과 죽음이 그를 대면하여서도 그는 감사할 수 있다.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28:18-20 이러한 우를 범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 종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잊었다. 오직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라는 말씀만을 기억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으로 가라’는 선교의 명령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평범했던 한 사람,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암 케리’에게 세계를 바라보게 하셨다. 개신교선교는 그렇게 무명의 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어렵게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William Carrey, Pere des missions moderns, 1761~183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시작된 근대선교도 한동안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교회가 보지 못하던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보게 한 사람이 바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선교사이다.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그 이후 교회는 종족이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를 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해 가는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종족이란 공통의 역사와 한 언어와 문화로 연결된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 선교사들의 3%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사역한다는 통계는 이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목적(목표)과 전략의 혼돈

 

종결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선교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한 가지이다. 그러나 전략은 여러 가지이다.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략은 변한다. 목적은 전략에 선행한다. 목적이 없는 전략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과 전략을 혼동해 왔다. 선교의 목적과 전략을 혼동했던 것 같다. Peter Wagner, 풀러신학교 교수는 전략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략이란 하나의 분명한 목표(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다. 선교전략이란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다.”

목적과 전략의 혼동이 선교사역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퍼즐의 한 조각만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모든 종족을 보아야 한다.

  

미전도종족 선교의 역사

 

1970년대에 전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바로 미전도종족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선교학자들은 믿었다. 만약에 그들을 겨냥한 어떤 효과적인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다면 2000년 말에는 선교의 사역이 종결될 것이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 랄프 윈터박사는 참가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16,750 종족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 세계선교의 새로운 도전을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그도 알지 못했다. 아직은 자세한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1980년 영국의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랄프 윈터는 다시 지구상의 미전도종족에 대한 도전을 하였다. 그때 스칸디나비아 출신 그린랜드에서 사역하고 있던 한 선교사가 강단에 올라와 “2000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교회를!”라고 외쳤고 함께 자리한 수천 명의 전세계의 교회 선교 지도자들이 함께 구호를 외쳤다. 예정에 없던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따라 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십 년 후에 AD2000운동이 출발하였다.

Patrick Johnstone(Operation World 편집자이며 WEC선교회)의 선교사는 그간의 십 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발표한다. 이른바 ‘세계 복음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보고서이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13,000여 종족에 대한 리서치를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1만 명 이상 되는 종족중에 2% 미만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혹은 5%미만의 신자를 가진 종족을 교회개척이 시급하게 필요한 종족으로 규정했다.

두 번째 성과로는 이 연합운동의 결과 1900년 5개 단체에서 2000년에는 73개의 단체가 주로 종족을 중심으로한 연합사역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도표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이유가 있다. 엄청난 인구가 사는 사람들 속에 단지 하나 교회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반딧불 하나로 넓은 홀을 다 밝힐 수는 없다. 소금 농도는 3.5%이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바로 3.5%의 소금의 힘이다. 100미리 리터의 물에 3.5그램의 소금만 있으면 그 물은 웬만해서 썩지 않는다.티스푼 하나가 5그램이라고 한다. 3.5그램은 스푼의 위를 깎아낸 정도의 분량이 아닐까? 적어도 한 종족에 3.5%의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 'FTT 운동이란' 639개 종족 복음화 추진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가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를 주최하면서 대회에 참여한 한 소그룹 지도자들이 모든 종족에게 교회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 그룹은 ‘테이블 71’이라고 칭했다(그분들이 자리했던 테이블 번호). 2004년 가을에 이들은 다시 모여 남은 비접촉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남은 과업 완수’(Finishing The Task) 운동을 시작했다. FTT운동의 목표는 3400여 미전도종족 중 1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639개의 미개척 종족을 우선 복음화시키는 데 있다.또 미전도종족 입양뿐만 아니라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가 자립 및 재생산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를 위해 지역교회와 현장 선교사, 선교단체의 유기적인 네트워크 구성이 필수요건이다. 특히 지역교회가 선교에 주체가 되고 선교단체는 정보와 전략을 제시하는 협력기관으로 활동한다.

 

* Target 2020

예수전도단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족속에 복음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제자화하기 위하여 서기 2020년까지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우리는“Target 2020”이라고 부른다.

‘Target2020’은 최소복음화된 국가와 인구 백만 이상이나 관문되는 대도시, 미전도종족 내에 토착적인 교회를 개척, 제자화하고 스스로 배가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갖는다.

1.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 나라 50개 국을 개척한다.

2.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와 관문도시 13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3.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미전도종족과 관문종족 17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넘어야 할 장벽

 

오늘날 선교의 완성이라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도 많고 싸워 이겨야 할 적들도 많다.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

전년도(2010년)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20억의 인구가 아직도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종족이라고 한다(크리스챤 투데이 2011.10. 23). 2010년 10월 3차 로잔대회에서 20일 ‘세계의 종교’(World Faith)란 주제하에 열린 미싱피플 : 복음을 듣지 못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란 세미나에서 미전도종족 네트워크인 ‘에슨 투 에슨’(Ethne To Ethne)의 선교 지도자들이 한 발표이다. 수많은 세계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세계 선교에 열정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1만 6천여 가량의 미전도종족 중 3천7백여 종족이 복음을 접하지도 못한 채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교회들의 주저함이 영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선교회, 선교사들이 주저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단지 3%만이 미전도 종족에게로 파송되고 있다는 것을 미국 언리치드피를즈 대표 켄트 박사는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가 미전도종족 선교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 이라는 생각 때문에 투자하길 원치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이 갈렙의 정신이 아닌 메뚜기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개정개역)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3 개정개역)

 

또 하나의 주저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편견도 작용한다. 이 편견에 대해 15년간 미전도종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온 에디오피아 출신의 아리킬룸 베예네선교사는 소말리아에서 복음을 듣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된 미전도종족 출신 청년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면 달라 보이고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다.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무서워 보일지 몰라도 안으로는 진리를 갈급하게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개정개역)

이 고백은 하나님을 아는 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개정개역)

 

미전도종족선교의 목표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끔 인도하는 일이다. ‘에슨 투 에슨’의 남아공 디렉터 피터 탄탈 선교사는 아프리카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배우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프리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독교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1900년에 아프리카에는 8백만여의 기독교 인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5억이 기독교인이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독교인구가 90%를 넘는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또한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률과 빈곤, 부정부패와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미전도종족 선교를 행함에 있어서 이겨야 할 도전은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가르치고 또한 보여줘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개정개역)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개정개역])

 

본문에서 본 동사는 ‘제자를 삼아라’이다. ‘세례를 주다’와 ‘가르치라’는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베풀면서 그리고 가르치면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이 분사형 단어들은 제자를 삼는 방법(전략)과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세례는 예수님과 더불어 죽고 살았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종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새생명의 사람을 낳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되는 첫 걸음이다. 가르치되 머리에 지식만을 넣어주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가르침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내려 가야 한다. 삶으로 실천된 지식이 아니면 율법처럼 죽이는 의문이 될 수 있다. 진리가 실생활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행하시고 가르치셨다'. 순서에 주목해 보자. '가르치고 행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1:1).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면 생명 없는 종교로만 남게 된다.

 

나가는 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그 동안 우리는 선교의 쉼표는 찍었다. 많은 선교 전략들이 유행처럼 등장하고 사라졌다. 느낌표도 찍었다. 선교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슴 절절히 외쳤고 그 결과 선교사 이만 명 시대를 열었다. 선교의 말 줄임표도 찍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땅끝으로 남아있는 많은 종족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행진해야 할지 머뭇거렸다.이제는 유행에 휩쓸리지 말자. 이제는 전략과 목적에 혼란을 갖지도 말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부를 그 영광과 환희의 송가를 부를 그날을 향해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자. 3%는 부끄럽다. 적어도 십일조, 1/10 선교사는 미전도 종족, 복음이 시급한 사람들에게 나아가 제자를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임마누엘 주님의 마라나타를 꿈꾼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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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이슬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무슬림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현재 전 세계 인구는 약 70억 명이다. 이 가운데 무슬림 인구는 약 16억으로 전 세계 인구의 22% 정도이다. 이슬람을 아랍 지역의 종교로만 여겨왔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대도시에서는 모스크와 무슬림들을 만나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지역과 국경을 넘어 만날 수 있는 이슬람, 이런 이슬람을 향한 기독교의 선교적인 접근은 아주 미미하였다. 현재까지도 기독교 선교는 미완성 사역이다.

 

전 세계 미전도 종족은 약 8,000~6,000개 이고, 그중 성경이 번역되지 않은 종족은 4천 개나 된다. 영국의 데이빗 바렛(David Barrett)이 미전도 종족에 대한 선교지도를 A, B, C로 구분하였다. A가 미복음화 된 지역이다. 30개 국가로 인구는 13억 정도이며 23.7%이다. B지역은 전도된 국가이면서도 기독교 신자가 적은 나라이다.

 

이들 나라가 76개국으로서 23억 정도이다. C국가는 기독교 국가로서 145개국이며 인구는 18억이다. 기독교인이 60% 이상인 나라들이다. 전 세계교회의 모든 수입 중에 99.8%가 이미 복음화 된 곳에서 사용되고 0.09% 만이 비기독교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0.01% 만이 A지역, 즉 미 복음화된 지역을 위해서 사용되어진다. 전 세계 기독교 선교사 가운데 3천 명만이 이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전 세계선교사는 약 17만 명이다. 전체의 2% 만이 미전도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그곳의 대부분은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기독교에서 이슬람권을 향해 최초로 선교적 접근을 한 사람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였다. 그는 5차 십자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집트의 술탄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선교사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물론 가시적인 열매는 없었으나, 중요한 것은 이슬람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1219년 다섯 명의 수도사가 모로코로 갔다. 그러나 1년 후에 그들은 순교하였다.

 

실제로 최초로 무슬림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사역한 선교사는 레이몬드 룰 Raymond Lull,(1235-1316)이다. 그는 이슬람권에 보낼 선교사의 훈련을 위하여 1290년 아랍어과와 신학부가 있는 몽펠리에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유럽에 이슬람과 아랍에 관한 학문을 고취시켰다. 그는 82세의 노구로 튀니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베자야 해변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핸리마틴 Henry Martyn(1781-1812)은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성공회 목사로서 인도로 가서 동인도회사의 전임 사목으로 있다가 힌두교성경을 번역했고, 이란으로 가서 이란성경을 번역했지만, 결핵으로 인해 겨우 31세의 나이에 터키 토카트에서 죽었다.

 

그 후에 이슬람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무엘 쯔머 Samuel Zwemer(1867-1952)이다. 학생신앙운동에 자극을 받고 헌신하여 아랍선교회를 세우고 그의 친구들과 아랍어를 배우기 위하여 레바논에 들어갔으며, 1900년대 초반에 이집트에서 사역을 하였고 40년 동안 20여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이슬람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에 알렸다. 그는 21년간 아라비아 반도에서 사역을 하였다.

 

이것이 19세기까지 이슬람권에 들어가서 사역한 사람들이다. 이슬람권을 향한 몇몇 선교사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는 달리 서구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목과 갈등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항상 걸림돌이 되어왔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이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무슬림에 대해 배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에 대해 무관심함에 따라

결국 무슬림들은 복음을 듣고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무슬림들은 자연스럽게 서구교회로부터 냉대를 받았으며,

무슬림은 그들의 관심 밖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서구의 자세가 지속되어 왔는데 이는 이슬람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장벽과 함께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무관심으로 인하여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무함마드에 의하여 이슬람이 시작된 지 227년이 지난 837년이었다. 아랍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고 해도 정작 아랍어 성경이 출판된 것은 1516년이다.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서구의 이슬람에 대한 심리적 원수관계로 인하여

전 세계 무슬림들의 80%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구교회로부터 무시당했다.

 

기독교회사에서 무슬림이 구교회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099년부터 8차에 걸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은 성지탈환이라는 구호아래 약 200년간 예루살렘을 다스렸는데, 무슬림 역사가들에 의하여 군인들은 말을 타고 모스크 안을 휘젓고 다닐 때 모스크 바닥에 피가 얼마나 흥건했던지 말의 굽이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2) 그때 많은 무슬림들이 학살당함으로서 이슬람과 기독교사이에 큰 상처가 생겨난 것이다.

 

데이빗 바렛(David Barrett)<세계 그리스도인 백과사전>(The 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서 AD 33년부터 AD 2000년까지 약 69,420,000명의 남녀 및 아이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 전체 인원 중에 9,101,000 명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3)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종주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의 복음의 진보와 역사 앞에 이 같은 엄청난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를 가장한 인종주의와 차별주의에 대해 분명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인류를 편애하지 아니하시고

 전 세계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슬림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은 과거 기독교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다.

 

무함마드가 살던 시절에 중동은 기독교의 중심이었다. 북부아프리카는 가장 큰 교구를 자랑했었다.

초대교회 기독교는 5곳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로마였다.

그런데 이 5곳 중에 지역적으로 4개는 모두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가 있었을까?

 

첫째, 당시 비잔틴 제국은 페르시아와 100년 넘게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많은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였다.

특히 비잔틴 제국 아래에서 살아가는 기독교 이단들에게 더욱 가중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이단으로 판명된 이후에 가중한 세금을 견디기 힘들어 하던 중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슬람을 해방자로 여기고 이에 협력하였다.

 

수백 년 동안 쌓아왔던 신학적인 공로와 업적들이 단지 몇 십 년의 역사밖에 없던 이슬람에게 넘어간 것이다.

기독교 안에 수세기에 걸친 이단 논쟁과 끊임없는 영토전쟁 등으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은 식어갔고,

믿음 또한 한계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이슬람의 협박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신념보다 정치적, 경제적 실리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치가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지지야(Jizya)라는 약간의 종교세(인두세)만 내면 각자의 종교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이는 아주 관대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자유를 주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딤미가 되는 것이었다.

딤미는 2등 국민으로서 정치적, 사회적인 불평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으로 개종 할 경우, 고위관리, 군 장성 등 사회 지도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4)

 

셋째, 무슬림 남자들이 샤리아 법에 따라서 기독교여성들과 결혼을 하게 됨으로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은 감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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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요즘 종결자라는 단어가 유행인 것 같다. 낯선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신조어는 아니다. 외래어긴 하지만 terminator라는 단어가 더 친숙하다. 굳이 다른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끈질긴 자’, ‘끝을 보고야 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선교에도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 좀 더 문학적인 표현으로 ‘선교의 마침표’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시대에 선교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선교를 유언으로 명령하시고 2천 년이 훨씬 넘어선 지금에도 선교는 미완성 과업으로 남아 종결되지 않을까? ‘선교는 하나님이 종결자다’라는 말은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정답 같은 오답이다. 선교의 종결자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자는 바로 교회다.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단체도 아니다. 교회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제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선교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가 하나님이라면 교회가 철로이기 때문이다. 철로 없이 기차는 달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선교의 종결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이다. 머리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개정개역)

 

 선교의 목적(종결)은 무엇인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온 땅의 사람들이 승리와 기쁨의 상징인 '종려 가지'를 들고 순결을 의미하는 '흰 옷'을 입고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다.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지만 온전한 화음은 아니다. 사람들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22). 구원받은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어린 양의 희생의 사랑을 노래해야만 하는 합창제가 남아 있다. 그 장엄한 노래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울려 퍼지는 그날 드디어 선교의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그 때 역사의 막은 내려진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것을 말씀하시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개정개역)

 

1)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너머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셨다. 눈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사람들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그들이 나아간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맞서다가 강제로 흩어지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셨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인류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종족마다 제각기 독특한 컬러를 가지고 서로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샬롬이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신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과 조화를 이룬 샬롬공동체를 꿈꾸신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하신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 10:5 개정개역)

 

2) 예수님의 첫 사역지

예수님께서 첫 사역지로 정하신 곳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고향 나사렛도 아니고 태어나신 곳이요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도 아니었다. 이방의 갈릴리였다.(마 4:12-16)

 

왜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메시아로 선포된 이후의 첫 사역지로 정하셨을까? 단지 다른 지방보다 더 멸시 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이 불쌍해서일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같다.

 

3) 예수님의 오신 목적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 때문에 원심적 선교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요나 선지자가 이방인을 향해 나아갔지만 어디까지나 떠밀려 억지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심적선교를 스스로 펼치셨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듣고 이스라엘의 언약 속으로 들어왔다(수2:9-10). 이방 여인 룻도 인애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왔다. 모두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구심적인 선교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출 19:6).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꿈을 포기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역으로 선교의 도구로 이용하셨다. 그들을 바벨론 포로와 앗수르의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당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에 당신의 백성을 심으셨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그들과 함께 거기 머물면서 스스로 당신을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내셨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 스스로 나태내시고 당신의 구원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었다. 예수, 그이름은 여호와 삼마의 신약적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개정개역)

 

이 말씀은 어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구절이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인가? 죽기로 예정된 하나의 밀알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죽음으로 맺게 될 많은 열매는 바로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이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선민 의식에 절어 있던 유대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들을 향하여 뜬금없이 밀알(죽음과 열매)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한 종족만이 아니라 온 땅의 모든 족속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는 바로 그 때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이다.” (요 12:23)

 

이것이 복음의 특징이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큰 소식 말 그대로 복음인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개정개역)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성경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4) 교회의 태동 목적

지상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 주시었다. 이제는 또 다른 보혜사를 통해서 천상사역이 시작되었다.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성령은 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갓 태어난 교회의 울음소리는 함께한 모든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는 각기 다른 방언으로 울려 펴졌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태동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사건이다. 교회는 모든 방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개정개역)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단어

 

왜 그럼 이토록 중요한 개념을 교회는 오랫동안 몰랐을까? 우리의 성경해석이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 유익이 되는 한 구절만 쏙 뽑아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빌 4:13의 말씀을 우리는 좋아한다. 그러나 그 참 의미는 헤아려 보지 못하고 무작정 좋아하는 것 같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개정개역)

 

이 말씀은 11절과 12절의 연속성 속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개정개역)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가난, 궁핍, 핍박, 환란, 죽음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런 것들은 모두 뺀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만이다. 그는 가난해도 비참하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부해도 교만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환란과 죽음이 그를 대면하여서도 그는 감사할 수 있다.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28:18-20 이러한 우를 범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 종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잊었다. 오직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라는 말씀만을 기억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으로 가라’는 선교의 명령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평범했던 한 사람,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암 케리’에게 세계를 바라보게 하셨다. 개신교선교는 그렇게 무명의 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어렵게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William Carrey, Pere des missions moderns, 1761~183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시작된 근대선교도 한동안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교회가 보지 못하던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보게 한 사람이 바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선교사이다.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그 이후 교회는 종족이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를 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해 가는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종족이란 공통의 역사와 한 언어와 문화로 연결된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 선교사들의 3%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사역한다는 통계는 이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목적(목표)과 전략의 혼돈

 

종결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선교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한 가지이다. 그러나 전략은 여러 가지이다.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략은 변한다. 목적은 전략에 선행한다. 목적이 없는 전략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과 전략을 혼동해 왔다. 선교의 목적과 전략을 혼동했던 것 같다. Peter Wagner, 풀러신학교 교수는 전략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략이란 하나의 분명한 목표(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다. 선교전략이란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다.”

목적과 전략의 혼동이 선교사역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퍼즐의 한 조각만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모든 종족을 보아야 한다.

 

 

미전도종족 선교의 역사

 

1970년대에 전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바로 미전도종족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선교학자들은 믿었다. 만약에 그들을 겨냥한 어떤 효과적인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다면 2000년 말에는 선교의 사역이 종결될 것이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 랄프 윈터박사는 참가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16,750 종족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 세계선교의 새로운 도전을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그도 알지 못했다. 아직은 자세한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1980년 영국의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랄프 윈터는 다시 지구상의 미전도종족에 대한 도전을 하였다. 그때 스칸디나비아 출신 그린랜드에서 사역하고 있던 한 선교사가 강단에 올라와 “2000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교회를!”라고 외쳤고 함께 자리한 수천 명의 전세계의 교회 선교 지도자들이 함께 구호를 외쳤다. 예정에 없던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따라 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십 년 후에 AD2000운동이 출발하였다.

Patrick Johnstone(Operation World 편집자이며 WEC선교회)의 선교사는 그간의 십 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발표한다. 이른바 ‘세계 복음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보고서이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13,000여 종족에 대한 리서치를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1만 명 이상 되는 종족중에 2% 미만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혹은 5%미만의 신자를 가진 종족을 교회개척이 시급하게 필요한 종족으로 규정했다.

두 번째 성과로는 이 연합운동의 결과 1900년 5개 단체에서 2000년에는 73개의 단체가 주로 종족을 중심으로한 연합사역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도표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이유가 있다. 엄청난 인구가 사는 사람들 속에 단지 하나 교회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반딧불 하나로 넓은 홀을 다 밝힐 수는 없다. 소금 농도는 3.5%이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바로 3.5%의 소금의 힘이다. 100미리 리터의 물에 3.5그램의 소금만 있으면 그 물은 웬만해서 썩지 않는다.티스푼 하나가 5그램이라고 한다. 3.5그램은 스푼의 위를 깎아낸 정도의 분량이 아닐까? 적어도 한 종족에 3.5%의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 'FTT 운동이란' 639개 종족 복음화 추진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가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를 주최하면서 대회에 참여한 한 소그룹 지도자들이 모든 종족에게 교회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 그룹은 ‘테이블 71’이라고 칭했다(그분들이 자리했던 테이블 번호). 2004년 가을에 이들은 다시 모여 남은 비접촉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남은 과업 완수’(Finishing The Task) 운동을 시작했다. FTT운동의 목표는 3400여 미전도종족 중 1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639개의 미개척 종족을 우선 복음화시키는 데 있다.또 미전도종족 입양뿐만 아니라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가 자립 및 재생산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를 위해 지역교회와 현장 선교사, 선교단체의 유기적인 네트워크 구성이 필수요건이다. 특히 지역교회가 선교에 주체가 되고 선교단체는 정보와 전략을 제시하는 협력기관으로 활동한다.

 

* Target 2020

예수전도단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족속에 복음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제자화하기 위하여 서기 2020년까지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우리는“Target 2020”이라고 부른다.

‘Target2020’은 최소복음화된 국가와 인구 백만 이상이나 관문되는 대도시, 미전도종족 내에 토착적인 교회를 개척, 제자화하고 스스로 배가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갖는다.

1.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 나라 50개 국을 개척한다.

2.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와 관문도시 13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3.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미전도종족과 관문종족 17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넘어야 할 장벽

 

오늘날 선교의 완성이라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도 많고 싸워 이겨야 할 적들도 많다.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

전년도(2010년)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20억의 인구가 아직도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종족이라고 한다(크리스챤 투데이 2011.10. 23). 2010년 10월 3차 로잔대회에서 20일 ‘세계의 종교’(World Faith)란 주제하에 열린 미싱피플 : 복음을 듣지 못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란 세미나에서 미전도종족 네트워크인 ‘에슨 투 에슨’(Ethne To Ethne)의 선교 지도자들이 한 발표이다. 수많은 세계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세계 선교에 열정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1만 6천여 가량의 미전도종족 중 3천7백여 종족이 복음을 접하지도 못한 채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교회들의 주저함이 영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선교회, 선교사들이 주저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단지 3%만이 미전도 종족에게로 파송되고 있다는 것을 미국 언리치드피를즈 대표 켄트 박사는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가 미전도종족 선교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 이라는 생각 때문에 투자하길 원치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이 갈렙의 정신이 아닌 메뚜기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개정개역)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3 개정개역)

 

또 하나의 주저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편견도 작용한다. 이 편견에 대해 15년간 미전도종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온 에디오피아 출신의 아리킬룸 베예네선교사는 소말리아에서 복음을 듣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된 미전도종족 출신 청년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면 달라 보이고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다.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무서워 보일지 몰라도 안으로는 진리를 갈급하게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개정개역)

이 고백은 하나님을 아는 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개정개역)

 

미전도종족선교의 목표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끔 인도하는 일이다. ‘에슨 투 에슨’의 남아공 디렉터 피터 탄탈 선교사는 아프리카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배우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프리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독교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1900년에 아프리카에는 8백만여의 기독교 인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5억이 기독교인이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독교인구가 90%를 넘는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또한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률과 빈곤, 부정부패와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미전도종족 선교를 행함에 있어서 이겨야 할 도전은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가르치고 또한 보여줘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개정개역)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개정개역])

 

본문에서 본 동사는 ‘제자를 삼아라’이다. ‘세례를 주다’와 ‘가르치라’는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베풀면서 그리고 가르치면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이 분사형 단어들은 제자를 삼는 방법(전략)과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세례는 예수님과 더불어 죽고 살았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종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새생명의 사람을 낳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되는 첫 걸음이다. 가르치되 머리에 지식만을 넣어주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가르침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내려 가야 한다. 삶으로 실천된 지식이 아니면 율법처럼 죽이는 의문이 될 수 있다. 진리가 실생활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행하시고 가르치셨다'. 순서에 주목해 보자. '가르치고 행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1:1).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면 생명 없는 종교로만 남게 된다.

 

나가는 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그 동안 우리는 선교의 쉼표는 찍었다. 많은 선교 전략들이 유행처럼 등장하고 사라졌다. 느낌표도 찍었다. 선교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슴 절절히 외쳤고 그 결과 선교사 이만 명 시대를 열었다. 선교의 말 줄임표도 찍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땅끝으로 남아있는 많은 종족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행진해야 할지 머뭇거렸다.이제는 유행에 휩쓸리지 말자. 이제는 전략과 목적에 혼란을 갖지도 말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부를 그 영광과 환희의 송가를 부를 그날을 향해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자. 3%는 부끄럽다. 적어도 십일조, 1/10 선교사는 미전도 종족, 복음이 시급한 사람들에게 나아가 제자를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임마누엘 주님의 마라나타를 꿈꾼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출처 : 조승호 선교사(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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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언어 교육원에서는 선교사들에게 각국 현지언어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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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현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블러그 소개 / 폴리아카데미 http://poly-academ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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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선교사 파송에 공헌하겠다”

선교사언어교육원 서윤석 목사

 

 

 

해외에 선교를 나갈 때 마다 꼭 해결해야하고 부딪혀야 하는 것이 해당 나라의 언어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영어권이 아닌 나라(영어권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의 언어들은 간단한 회화나 인사말 정도를 배워 나가거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그 나라 원주민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배워야만 한다.

그러면 국내에는 전 세계 미전도 종족 선교를 위해 그 현지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는 것일까? 최근 1여년 전부터 서윤석 목사는 선교사언어교육원을 설립하고 선교사로 나가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 다국어 연구소를 운영했던 서 목사는 이 곳에서 각 나라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 등을 가르치고 해당 나라의 성경과 찬양도 학습하고 있다. 또한 각 나라 언어의 컴퓨터 학습과 교회주보 작성 그리고 홈페이지 및 동영상 제작까지 선교사님들이 필요한 것들을 알려 준다.

서 목사는 “현지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진정한 선교사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장단기선교 사역에 있어 정말로 준비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세계 각국 언어를 가르치는 선교사언어교육원이 선교사 언어 교육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할 수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며 많은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아울러 서 목사는 “저희는 파송되는 선교사들의 언어분야에서 공헌하고 싶다. 작년에도 미전도 종족 언어를 중심으로 강의가 이루어 졌지만 올해에도 기독교 박해지역 언어를 중점으로 강의를 할 예정이다”면서 “선교사 언어 교육 뿐만 아니라 장단기 선교사역 팀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고 선교사 재교육과 쉼터도 마련할 계획이다” 선교사언어교육원의 교육 내용과 비전도 밝혔다.

 



현재 선교사언어교육원은 전국 어디에서나 편하게 와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진행 중인 외국어 교육은 30개 가량이다. 설립 초기에는 서 목사 홀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여러 외국어 전문가 들이 도움을 주면서 더욱 교육이 활성화 되고 있다. 앞으로 미전도 종족과 기독교박해지역으로 더 많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점차 대두되고 있는 선교 현실에 맞춰 선교사 언어교육원의 사역과 활동이 계속 기대되는 이유다.

 

홈페이지 : http://www.indo.co.kr 

위치: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626-1

전화 : 02-749-0316 / 080-7579-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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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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