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1)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화,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의 대화는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미 모든 무슬림들이 선지자로 추종하고 있는 무함맏과 그가 대화했던 무수히 많은 무함맏과 동시대의 아랍인들, 유대인 및 기독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관계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꾸란에는 무함맏이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과 논쟁했던 핵심적인 주제들과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꾸란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진짜 유일신이 누구인가, 무함맏이 진짜 선지자인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이며 가짜 선지자인가, 무함맏은 성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물려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참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토론을 했던 당사자들 자신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무함맏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꾸란에서 말하는 것처럼 책의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항상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무함맏은 꾸란과 모든 무슬림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문맹이었다.
따라서 무함맏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한 번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였던 타우랏, 자부르, 인질을 자기 눈으로 직접 읽은 적이 없었고,읽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무함맏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되기 전이었다. 꾸란에는 성경에서 다루는 수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틀림 없지만,꾸란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읽어보고 성경과 대조해 보면 무함맏이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말한 것들은 거의 하나도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함맏은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자기가 주워들은 선지자들과 성경 이야기들을 자기 멋대로 꾸며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무함맏이 꾸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가 바로 ‘무함맏 자신이 꾸란을 스스로 지어냈느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였다는 것을 꾸란을 한 번 만이라도 주의깊에 읽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꾸란에서는 누가 거짓말쟁이가 되었을까? 성경을 항상 읽었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문맹이어서 그것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던 무함맏 앞에서는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성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이 항상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상관없이 자기 식대로 우겨댔는데도, 모든 무슬림들은 오늘날까지도 성경을 직접 읽었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왜곡하여 무함맏에게 거짓말을 했고,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무함맏이 성경과 선지자들에 대해 진리를 말했다고 믿는다. 오늘날 이슬람 지역들이나 무슬림들이 사는 곳에서 우리가 무슬림들과 대화를 나눌 때 겪게 되는 문제가 정확히 이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거의 모든 무슬림들도 전혀 성경을 읽지도 않으면서 성경의 내용들을 자기 방식대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무슬림들은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고자 할 때, 항상 근본적인 내용을 가지고 해답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주로 상황(context)이나 인물이나 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유명한 어떤 학자가 무슬림이 되었다. 어떤 스타가 무슬림이 되었다. 무슬림의 인구가 세상에서 몇 퍼센티지이다. 한편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관점에서 신학적인 주제를 열심히 설명하려고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에게 해답을 주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무슬림들과 토론을 할 때 상황에 관한 문제를 놓고 서로 옳다고 주장하려 할 때에는 결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논쟁은 끝없는 나락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문제의 발단이 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이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진리를 대변해 줄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답변은 무슬림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신학적인 해명을 하는 식이다. 우리는 먼저 세상에 그 어떤 누구도 진리를 대변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어야 한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고 단지 선한 선생으로만 알았던 젊은이에게 “네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란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보여줄 수 있는 표준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사실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 밖에 없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것이 항상 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도, 믿고 의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진리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무수히 많은 거짓에 속고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리이냐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도와야 한다. 즉 꾸란이 참된 진리이냐 아니냐, 성경이 참된 진리이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하고, 무슬림들의 관심도 이 문제에 집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는 문맹이었던 무함맏과는 달리 대부분 글을 읽을 줄 아는 무슬림들을 상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억지로 서로 자기 주장을 할 필요 없이 그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꾸란과 성경을 읽어가면서 비교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감히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근본이 되고 있는 꾸란을 성경과 대조해 가며 꾸란의 허구성을 송두리째 드러내어, 꾸란 자체를 통해 무슬림들을 거짓에서 진리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구원할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도전적인 방법을 나라에 따라서는 적용할 수 없는 지역도 있을 수 있겠지만, 성경과 꾸란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전도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국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각국 각처에서 이슬람의 전면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꾸란의 허구성을 만방에 알려 사람들을 거짓 종교에 속지 않도록 미리 경계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사실상 무슬림 선교에 있어서 토론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만큼 토론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논쟁의 발단이 되고 있는 꾸란을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이러한 작업은 무슬림들의 세계관과 사고 구조를 깊이 있게 아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그들과 효과적으로 대화하는데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내가 읽어본 대부분의 이슬람에 대한 책들은 이슬람의 허구성과 모순들을 드러내는 일에 조심하고 있다. 무슬림들을 가능한 한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해 무슬림들의 반응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신학적인 주제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기독교와 거의 대부분의 주제들을 공유하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속을 위험성이 있다. 비록 신학적인 주제들은 공통 분모를 갖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심지어는 기독교인 선교사도 함정에 빠뜨리는 수 많은 사탄의 간계들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혹자는 영적 전쟁을 단순히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어두운 영들의 세력과 신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대립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로 작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이다. 절대로 영적인 전쟁에서 이와 같은 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어두움의 영들을 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신자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사탄의 악과 불의의 통치, 천사들과 타락한 영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순복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순복치 않고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 사람들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와 영혼을 지배하는 두 세계라고 하는 매우 복잡하고 전면적인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교인들은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의 세계관들과 부득이 하게 맞부딪히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가고, 멸망해 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이다.
이러한 영적인 싸움의 가장 큰 원인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세계관의 현저한 차이점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은 서로 유사한 점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거의 하나도 닮은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언뜻 보기에 비슷하게 보이는 많은 신학적인 주제들도, 그 내용에 들어가보면 철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유사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탄의 음흉한 계략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신, 구약 성경과 그 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선지자들 또는 인물들을 언급할 때, 우리는 피상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고, 어떠한 의미와 목적으로 선지자들과 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하는 것인지를 잘 분석하고 있어야 한다.
무함맏은 왜, 어떠한 목적으로 꾸란에서 선지자들의 이름과 행적들을 거론하는가?
무함맏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선지자들을 어떻게 평가하였는가?
무함맏이 사용한 신학적인 용어들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이슬람의 용어들이 우리의 용어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어떤 식으로 무함맏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는가?
왜 모든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본받고 따르고 있는가? 이들이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함맏이 다루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들의 논리적인 상관성은 무엇인가?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효과적으로 복음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가?
이들의 배후에는 어떤 영적인 존재들이 역사하고 있는가? 등 많은 질문을 해 보고,관찰하고 연구해야 진짜 무슬림들의 필요를 볼 수 있고, 또한 채워줄 수 있다
우리는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 즉 성령, 그리스도(메시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 선지자의 사역과 역할, 죄, 정결과 부정함,회개, 믿음, 기도, 구원, 천국, 지옥, 종말, 심판 등 많은 단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슬림들의 생각과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면서도 의미를 전혀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단어들 때문에 그들이 이미 그 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오해 때문에 그들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반대로 그 단어들이 사용되는 의미의 차이점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그 모든 단어들이 정말로 중요한 전도의 접촉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단순히 그러한 단어들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많은 복음의 핵심들을 전하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2)
무슬림들이 말하는 선지자들에 관한 사상이나 사용하는 용어들의 의미와 차이점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반대로 우리가 전하는 성경 이야기나 용어들이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어지는 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무슬림들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떠한 존재일까를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할 때, 또는 삼위일체에 대해 우리가 언급할 때,무슬림들의 마음속에는 무함맏과 꾸란이 계시하고 있는 단일신 알라와 그들이 강력하게 배척했던 메카의 다신교 우상들, 즉 다신교 사상을 우선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의 신을 상상할 때,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쉬르크, 즉 알라에게 동료를 초래시키는 이슬람의 가장 큰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 외의 또 다른 신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원인은 하나는 우상숭배자들 때문이고, 하나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육체적이고도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요한복음 1장과 창세기 1장, 그리고 잠언 8장, 시편의 메시야 예언들 중에 특히 2편과 89편 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의 말씀이 왜 메시야로 세움을 받고, 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어야 했는지, 왜 인자가 되셔야 했는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논리 능력과 설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성령의 조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영적인 전쟁은 세계관의 전쟁이다.
또 성령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무슬림들은 가브리엘 천사나 무함맏과 같은 영적 존재나 꾸란과 같은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급하는 성령이 곧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구별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의 말씀을 인격적인 창조주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인간의 말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단순한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무함맏과 꾸란이 메시야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꾸란 어디에도 메시야의 의미와 성격 또는 사역에 대해 설명을 해 놓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언급할 때 무슬림들은 이것을 결코 육체적인 의미의 출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부분, 즉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되어 세워지는 면을 시편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다. 동일하게 죄에 대해서 말할 때에 무슬림들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깊이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죄의 심각성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담이 단 한 가지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와 영원한 낙원과 천국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회개에 대해서 말하지만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회개, 단지 “회개한다” 라고 입과 마음으로 고백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그들에게 참된 회개란 자신의 타락한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 전체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율법적인 정결과 부정에 대해 저들이 언급할 때, 우리는 의와 불의, 거룩과 죄,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꾸란에 무함맏은 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지적하지도 않았다.
꾸란에서 알라는 아담이 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용서해 주었다. 꾸란에서 나오는 용서와 구원은 사실상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합법적인 근거나 절차가 거의 필요 없다.
천국을 정욕적이고 세속적으로 소망하는 저들의 소망이 거짓됨을 지적해 주고, 천사와 같은 거룩한 삶과 부활체로서의 영광스럽고도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영원토록 유지하는 영생에 대해 가르쳐 주어야 한다.
지옥을 말할 때 저들은 모든 사람들이 일단 지옥에 가서 형벌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헛된 소망을 버리도록, 지옥에서 천국으로 전혀 옮겨갈 수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헛된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이 외에도 구체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무슬림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들이 대단히 많은 사실을 알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도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착각하도록 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숨겨져 있다.
지금까지 나 자신도 무슬림들과 상당히 많은 부분을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가운데 대화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역자들을 살펴보아도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대해, 즉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시키는 꾸란과 하디스와 기타 이슬람의 의식 및 신념들에 대해 일반적인 것 외에는 꽤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같은 것들을 주제로 삼아서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그들의 무엇을 변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기독교인 사역자들이 이슬람의 일반적인 교리들을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사용하여 무슬림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상 이슬람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들이 체계적으로 세워 놓은 교리들이 아니라, 꾸란 자체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 무슬림들의 교리들과 종교 의무들은 꾸란의 허구성을 감추기 위해 치장해 놓은 장식품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그런 것들을 알 필요는 있어도, 결코 다룰 필요가 없다.
꾸란을 연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흥미로운 작업이 아니다.
꾸란을 읽는 것은 심지어는 무슬림들에게도 어려운 중노동이다.
꾸란을 읽는데 가장 큰 어려운 점은 꾸란 자체 내에 있는 논리적인 모순들과 비약,무의미한 반복들, 심지어는 어두움의 영들의 세계에 대한 무수한 언급들 때문이다.
오늘날만 해도 수억의 인구가, 역사상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무슬림들이 자기들의 무지 때문에 지옥에 가고 있다면, 그들 모두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뭐든 해야 한다.
따라서 꾸란 자체에 대한 연구는 지옥으로 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것들에 속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그들을 그 속에서부터 끌어내 구원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위의 본문을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이 말씀은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인간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작정,그리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의무와 책임 등에 관계된 것들이지만,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하여 얼마나 다양하고 창조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생명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구원과 멸망을 마치 우리들의 손에 모두 맡겨 놓으신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사역이 얼마나 의미있고, 위대한 것인가를 알게 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이 앓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슬람 지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꾸란을 직접 읽어보고, 꾸란과 성경의 내용상 차이점들을 논리적으로 숙지하고 있으면 전도의 접촉점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무슬림들이 어떤 말을 어떤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히‘말도 안되는 엉뚱한 이야기, 비성경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간주해 버리고 만다면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의 접촉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주로 형성하는 것으로는 꾸란, 하디스, 순나, 세속적인 가치관 등이다. 무슬림들이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극도로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영적 전쟁이 치열한 장소는 각 사람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자리이다. 세계관의 변화와 영적 전쟁 사이의 상관 관계를 별도의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영적 전쟁을 단지 기도와 성령의 능력의 대결만은 아니다. 그것들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심각한 영적 전쟁의 현장은 사람의 지식과 성품과 가치관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고후 10:3-6)“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세계관의 배후에는 그 세계관을 지배하고 형성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영적인 세력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영적 세력은 추종자의 전인격, 즉 지, 정, 의 모두를 통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과 유사하게,무슬림들도 전인적으로 어두움의 영들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살아간다.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3)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원하는 것처럼 무슬림들도 전인격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에 충실한다. 무슬림들도 나름대로 지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의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들을 어느 정도는 만족시켜 주는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사탄적인 종교나 이단 종파를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열정적으로 믿고 있는가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도 매우 강렬한 그 무엇이 있다.
따라서 영적인 감동과 같은 것이 단지 기독교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역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지만,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도 스스로는 매우 강렬한 영적인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 때로는 그러한 체험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다 더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매우 온유하고 친절하게 자기 백성들을 권면하시고 인도하시는 반면, 사탄은 매우 강력한 독재와 위협으로 자기 세력 안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을 때, 기도를 드릴 때, 찬양을 할 때, 기타 종교적인 일들이나 선행을 할 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을 통한 감동을 자주 체험한다. 동일하게 무슬림들도 꾸란을 읽을 때, 사원에서 예배를 드릴 때, 종교적인 의무를 지키고, 선행을 할 때 악한 영으로부터 감동을 체험한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아무런 영적인 감동도 없이 단순한 인간적 열심에 의해 그들의 종교에 깊이 심취해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동의 경험일 수 있지만, 근원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요일 4:1-6; 딤전 4:1), 때로는 대단히 강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자기 신념을 위해 생명도 아깝지 않게 희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비슷한 현상들을 사회 전반에서 많이 경험한다. 때로는 전혀 종교적이 아닌 심지어는 악한 일들 가운데서도 감동을 받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며, 이러한 광경은 스포츠 활동이나 영화와 같은 매스 미이디어나 독서, 테러리즘, 기타 열광주의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세계관으로 빠져 들어갈 때, 그들이 그 속으로 깊이 몰입되는 그럴듯한 계기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감동은 무함맏에게서 알 수 있듯이, 또는 사탄 숭배자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한다.
이슬람 교리와 의식에 깊이 감동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하는 것은 덜 감동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이슬람에 헌신되어 있는 무슬림을 구원하는 것은, 이슬람에 실망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이슬람 지역에서 무슬림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지적인 논리 싸움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아무리 강한 무슬림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능력을 체험하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고 불신자가 꿈에 예수님을 보고,그분의 음성을 듣고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과거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리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꿈의 계시나 치료나 귀신 축사를 통해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일지라도 지식과 신념과 삶의 태도와 방식이 변화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집중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한 가지의 전도 방법만을 가지고 모든 무슬림들을 구원해 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전도 방법은 다른 방법에 비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무슬림들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무슬림들의 영적인 세계를 송두리째 파악하고 있어야 영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세계관의 변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 발생한다.
먼저 부정적인 측면은 자신이 기존에 옳다고 믿었던 것의 거짓됨을 발견하고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긍정적인 측면은 새로운 세계관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무엇이 거짓인 줄 알게 되면 무엇이 진리인지도 쉽게 알 수 있게 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게 되면 무엇이 거짓인지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거짓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버리기를 원한다면,그들이 믿고 있는 신념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를 그들보다 더 명확하게 알아서 그들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꾸란이 거짓인 것을 발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꾸란을 손에서 던져 버릴 수 없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꾸란의 어떠한 점이 잘못되었는지, 무함맏이 누구인지, 이슬람의 역사적, 종교적 배경은 어떠한 것인지 등 기본적인 상식들을 알고 있어야 하며 계속해서 그들을 연구해야 한다.
또한 복음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경험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관의 변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측면이다. 즉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진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거짓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설령 다양한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진리의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결과는 이단에 빠지든지 거의 성장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진리의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넓고 깊고 강하게 내릴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가게 된다. 물론 이것은 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꾸란과 이슬람의 거짓됨을 인정하지 않고 온전한 계시를 통해 참된 하나님과 만난 후 그 분께 돌아오는 결단이 없다면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조우(만남)를 경험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려는 열망에 가득차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하며 살아가려는 거룩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초대해야 한다.
우리는 무슬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이슬람 신념으로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몸 속에는 이슬람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할 만큼 철저하게 이슬람 세계관으로 세뇌되어 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은 그 어떠한 것보다 위대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운명에 맡겨 살던 무슬림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무슬림이 일단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운명에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랑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 한다.
무슬림 중에 혹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이전에 믿던 여러 선지자들 중의 하나로서 영접하는 수준이거나, 혹은 무함맏과 동일한 수준으로 놓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기도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한 사람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주 체험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해산의 고통’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해산의 고통은 단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일시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전적으로 변화되기까지의 전 돌봄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끝임 없는 관심과 사랑과 모범과 기도와 가르침을 통해 한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즉 완전한 성경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한 사람을 해산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이 영광스러운 해산의 기쁨인 것이다.
꾸란의 내용 전체를 다룬 이 글의 목적은 이슬람과 무슬림의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는 접근방법을 스스로 발견해 나가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비진리의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영적 소경으로서 어두움의 영이 이끄는 대로 이끌리며 살아간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이다.심지어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단순히 말해 주었을 때에도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그것이 단지 꾸란의 이야기로만 이해를 하지 실제적인 차이점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선지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꾸란에 있는 내용들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성경과 꾸란의 차이점을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고 많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진리의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 즉 세상의 빛으로 세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참된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면, 다시 말해 참된 진리를 설명해 주면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흑암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지에 대해 반응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믿고 있는 내용들이 거짓이고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진리를 통해 조명해 주고 그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꾸란의 주제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꾸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사실상 꾸란에는 복음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꾸란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을 이용하면 복음을 전할 접촉점이 많다.그 이유는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관의 유사성 때문이다. 즉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모방한 옷을 입고 있는데, 우리는 그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꾸란과 성경을 동시에 사용해야 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꾸란과 성경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무슬림들 가운데는 복음 자체를 듣고 싶어하고, 또 복음을 들으면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편 많은 무슬림들이 현지인 그리스도인이나 외국인 사역자들에게 꾸란에 대해 질문을 해 온다. 그런데 과거 무슬림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꾸란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르고,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답변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처 : 바울선교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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