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선교행적을 통한 무슬림 선교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이시고 우주적이시지만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인종적이고 민족적이고 국가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고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고 말씀하셨으며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 1:2)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방을 멸시하고 정죄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지만 제자들은 가기를 싫어했고, 베드로에게 가이사랴로 가라고 했지만 베드로도 처음에는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가기는 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가기 싫다고 하는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베드로와 바울을 반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로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의 선교의 시급한 대상은 공산권과 모슬렘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지칭한 두 “악의 축”이 오늘의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시급한 선교의 대상은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라고 생각합니다. 니느웨와 로마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저에게 이와 같은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관심과 비전을 깨우쳐주신 분들이 고 랄프 윈터 박사님을 비롯한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님들이었습니다.
제가 랄프 윈터 박사님의 역사적 및 선교적 안목에 접하게 된 것은 조동진 목사님의 권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11년 동안의 유학을 마칠 무렵인 1973년 조동진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후암교회의 교육목사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풀러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고 나서 후암교회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1974년 초 풀러신학교에 가서 Research Associate의 자격으로 8개월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신학과 선교신학을 접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미국 교회사의 아버지 라토렛 교수님이 교회사와 선교학을 겸해서 연구했고, 랄프 윈터 박사님이 교회사와 선교학을 겸해서 연구했는데 저도 교회사 연구에다 선교학 연구를 접목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서 윈터 교수님을 비롯한 그 당시 유명한 선교학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의 안목을 넓혀갈 수가 있었습니다. 윈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그 분의 진취적인 입장을 다소 비판하며 질문도 했지만 많은 깨달음과 도전도 받았습니다. 한 평생을 교회 역사 연구와 선교 전략 개발에 모든 정열을 쏟아 바치면서 즐겁고 멋지게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가신 랄프 원터 박사님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랄프 원터 박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참고가 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8년 5월 한국을 방문한 랄프 윈터 박사님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강의도 같이 했고 대담도 같이 하며 오랫만에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1976년에 랄프 윈터 박사님이 한국에 와서 며칠 동안 강의를 했는데 그 때도 제가 그 분의 통역을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5월 랄프 윈터 박사님이 강의와 대담을 하면서 미국 복음주의교회의 잘못들을 진솔하게 지적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1) ‘구원’을 단순히 몇 마디 말을 감성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 단기 선교 여행만큼 선교에 해를 끼치는 것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3) 북 치고 시끄럽게 노래하는 것은 예배를 해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요사이 한국교회는 북치고 장구치고 시끄럽게 음악을 연주하므로 예배를 해치고 영성을 죽이는 것같이 보입니다. 4)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미가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교회는 본래 가족 중심의 신앙공동체였는데 오늘날 서구화와 개인주의화와 대형화 때문에 가족공동체의 특성이 해체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미국 복음주의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너무너무 진솔하고 귀중한 충고였습니다.
저는 2008년 5월 10일 윈터 박사님과 마지막 대담을 했는데 윈터 박사님은 한국교회가 미국과 서구교회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말 것을 재차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했습니다. 윈터 박사님은 단기선교에 대해 “다른 나라를 배우는 것은 좋지만 선교적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다시 나타내 보였습니다. “선교에 공헌을 못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오히려 방해꾼이 되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그럴 경우 선교사는 여행안내자일 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장기 선교사가 쓸 돈을 단기 선교여행자가 쓰는 것이다. 전쟁할 때 군인들을 전쟁터에 보내는데 일반 시민도 전쟁터가 보고 싶다고 해서 다 태워 보내는 것은 낭비고 방해다. 군인만 보내야지 무장되지 않은 일반 시민을 보낼 필요는 없다.”
문화와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교는 문화와 복음을 엮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모든 문화 안에는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문화가 나쁘다고 하기 전에 미국의 문화도 가장 나쁜 문화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러나 문화 안에 좋은 면이나 배워야 할 면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결점이 있는 문화권 속에서도 신앙이 자리잡게 될 수 있고 문화도 변할 수 있다. 모든 문화는 질그릇에 비유할 수 있다. 복음은 보배다. 어느 한 질그릇의 보배를 다른 문화권의 질그릇에 집어넣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보배가 한 질그릇에 담겨졌을 때 그 보배가 문화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보배가 문화라는 질그릇에 스며들면서 그 질그릇의 결점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인도에는 힌두권에 속하면서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 2천 4백만 명이 있다. 그들은 예수라는 보배를 가지고 있지만 힌두권이라는 질그릇 안에서 계속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모슬렘권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와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언어를 쓰지만 보배가 있고 없고가 차이 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차이지만 드러나는 문화적 행위에서는 크게 차이가 안 난다.”
윈터 박사님은 미국 복음주의의 오류들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복음주의를 성경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가 참되지 복음주의에 근거한 기독교를 성경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결점도 많고 완전한 해석이 아니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하나의 종교다. 복음주의의 못된 이단 중에서도 가장 큰 이단은 아주 짧은 시간에 ‘구원’을 단순이 몇 마디 말을 감성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구원 받는 것, 이런 가르침은 아주 못된 것이다. 구원은 감정적으로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과정이다.” 제가 윈터 박사님에게 “한국교회에 더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하고 싶다.믿음은 순종하는 것이다. 외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항복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이뤄지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도래했는데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온 것에 완전 복종하는 것이다. 그냥 믿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복종해야 한다. 믿는 것은 마귀도 한다. 그러나 마귀는 가슴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귀 담아 들어야 할 너무너무 귀중한 조언과 충고였습니다. 랄프 윈터 박사님은 존 스토트 박사님,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함께 현대 선교 신학계의 대표적인 선구자였습니다. 랄프 윈터 박사님은 지식이 풍부한 분이었고 안목이 균형 잡힌 분이었고 판단이 명석한 분이었고 표현이 진솔한 분이었고 가슴이 따뜻한 분이었고 시간에 충실한 분이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랄프 윈터 박사님, 존 스토트 박사님,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 분들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의 선교행적과 모슬렘 선교”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목회자이든지 선교사이든지 어떤 종류의 목회나 선교를 하든지 평생토록 힘써야 할 일은 우리들의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이시고 목자이시고 선교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본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와 선교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14과 마가복음 10:45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마가복음 10:45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행적”을 살펴보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선교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떠남’과 ‘찾아감’과 ‘됨’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말씀이셨고 하나님이셨는데 하늘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The Word became flesh.”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육’ 즉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물론 헬라인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미련한 일이며 약한 일이며 멸시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되는’ 일입니다.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받아서 백인이 흑인이 되는 일이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 되는 일이고,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부러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일부러 병든 환자가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가 되기를 그렇게도 소원했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삶에 지친 그래서 목이 마른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 여인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여인처럼 행로에 피곤하여 주저 앉으셨다고 했고 여인처럼 목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 7). 그 여자가 알아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 쉬운 말로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선교적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 최근에 선교사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에 와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던 존 로스 목사를 가장 존경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 4?5년은 공부만 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를 공부했고 도교와 불교를 배웠다. 유불선의 영향 속에 있던 한국인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 사람이 되는데 최선을 다한 훌륭한 선교사였다.”
둘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서 사셨지만 하늘 영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사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선교는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받아서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처처럼 백인이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언더우드 선교사 4대 손처럼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신홍식 선교사처럼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사셨고 나중에는 제자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0-13).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죄인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대화를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동진 목사님은 선교의 ABC 중의 하나는 선교지에 가서 무슨 음식을 주든지 그대로 받아서 먹으면서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는 선교지에 가서 대형 집회를 잠깐 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오래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 저명한 선교신학자 준더마이어(Sundermeier) 박사는 올바른 선교는 ‘콘비벤츠’(Konvivenz)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콘비벤츠는 브라질의 도시나 농촌에 있는 소집단들이 이웃 돕기 운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로 돕고, 서로 배우며, 함께 축하’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갖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준더마이어 박사는 서로 돕고, 배우고 함께 축제를 경험하는 콘비벤츠의 원리를 무엇보다 복음서에 기록한 예수님의 삶에서 입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 살았으며 그들과 함께 동고 동락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았다.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데 이러한 식탁 공동체야 말로 예수님의 선교에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식탁은 ‘공동체’와 ‘잔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는 타자와 함께 사는 교회이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섬기는’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열병환자의 손과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마 5:44). 주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리고 원수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선교는 함께 사는 것이고 모두를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선교적인 삶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사셨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지난 주 토요일인 11월 12일 UBF 가을 수양회에 가서 “사랑과 선교”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면서 말이 아닌 삶과 죽음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언하신 사랑의 선교사요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선교의 깃발을 높이 그리고 강하게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만큼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강력하게 전파한 복음의 증인과 복음의 선교사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2005년 12월 16일 1,400만 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강변교회가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지역의 모슬렘 지도자들과 군인들과 경찰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40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아프간에 두 번 방문했지만 공식적으로 설교나 전도나 기도나 강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준공식 행사를 하는 중에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명한 한국말 발음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너무너무 놀랐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 때 그런 노래를 하면 테러를 당할 것입니다. 선교의 길은 반드시 설교나 전도나 강의를 하는 길이 아니고 다양한 행사나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길이 아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삶의 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중국 연변지역에서도 발견했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조용히 펼 때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이 녹아지는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넷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목적이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심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증오와 분노와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과 우주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데 있었다고 누가와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화해’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짓고 과실을 범하면 그 사람의 죄와 과실을 용서하고 그 사람과 화해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그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2).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세상을 등지고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낮아진 모습이었고 따뜻한 모습이었습니다. 말하기 싫어하는 수가성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소통을 먼저 시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소통이야말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마음과 말을 주고 받는 소통이 없이 화해와 평화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진 모습으로 그리고 따뜻한 모습으로 수가성 여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여인이여, 내가 목이 마른 데 내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해 줄 수가 있소?” 그 여인은 아주 퉁명스러웠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은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네며 물 한 모금까지 달라고 하시네.” 아주 무례하고 퉁명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낮은 자세로 따뜻한 모습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14). 결국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수가성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고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수가성 여인과 주님 사이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수가성 사람들과의 화해와 평화도 이루어졌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물동이를 내 버려두고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만나기 싫어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저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를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평화의 사도 프랜시스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요 한국교회와 사회가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낮은 자세와 따뜻한 자세로 말을 건네고 소통하면서 화해와 평회를 이루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과 식물과도 친밀한 소통을 하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선교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길 때 그곳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마리아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가이사랴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로마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일본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사실 화해와 평화는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점입니다.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방편이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함께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이 아닙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는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이 반드시 이룩하여야 할 필수적인 일이고 민족적인 과제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7). 에베소서 1:10과 계시록 7:9-12은 앞으로 이루어질 우주적인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정치적인 방법이나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진리의 깃발만을 휘두르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악을 선으로 갚으며 악을 행한 상대방을 존중하고 포용하고 품었던 야곱과 같은 그리고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 앞에서 일곱 번 땅에 허리를 굽히고 절하며 예물을 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남한 교회가 북에 대해서 이와 같은 겸손과 존경과 사랑의 자세를 취하여야 남북의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2007년 10월 12일 신촌 성결교회에서 림인식 목사님께서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형들을 만나자 방성대곡하며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5, 7, 8).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한국과 세계 안에 지금이야말로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야말로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세계 곳곳을 찾아가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도구로서의 선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을 싫어했고 모슬렘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싫어했고 순복음주의자도 싫어했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본 사람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북한 사람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며 중국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70여 명을 지난 10여 년 이상 돕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가까이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지도자들과 친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작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동물들과 식물들과도 친밀하게 소통하는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개들도 고양이들도 새들도 물고기들도 식물들도 친밀하게 다가가면 반갑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고 조금씩, 조금씩 흉내를 내고 배워서 되어진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물려주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귀한 영적인 유산들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선교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보다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고 함께 놀아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는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도 하시고 대화도 하시면서 함께 놀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2005년 11월 12일자 기독교개혁신보에 실렸던 저의 글을 여기 그대로 소개합니다.
“나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현지인들과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힘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2년 전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초년생 선교사 한 사람과 밤 늦게까지 볼링을 친 일이 있다. 아주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가 모두 이겼다.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강성철 선교사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이다.그 젊은 초년생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스승인 나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다.” “내가 5년 전에 불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20여 명의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 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다. 게임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시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다. 어린이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기뻐했다.유치부 어린아이 하나는 내가 떠날 때 예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네를 함께 탄 아이였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또 오세요. 정예찬 2000. 6. 10’ 하루 오후에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왔다. 맛있는 바다 가재도 사 주었다. 너무너무 좋아했다.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내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나는 두 주 전에 한 주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왔다. 러시아 목회자 50여 명과 한인 선교사 20여 명이 한데 모여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를 가졌다. 내가 저들에게 강의도 하고 설교도 했지만 내가 주력한 것은 저들과 함께 교제하고 음식을 먹고 놀아준 것이었다. 도착하던 날 저녁 46명의 한인 선교사 가족들과 한국식당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고등학생이 된 은덕이라는 여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5년 전 내가 블라디를 방문했을 때 어린 아이들 20여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때 은덕이는 초등학생이었다. 은덕이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자기들을 찾아온 나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함께 놀아줄 때 선교사들은 물론 현지인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이 들어 가십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제물 되는 삶을 사시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5년 12월 31일 강변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2006년도 새해의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는 2010년 1월 1일 새해의 소원과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온유와 겸손과 착함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기독교는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1885년 조선땅에 선교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16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게 했고, 그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했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헨리 아펜젤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희생적인 삶’ 즉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교회와 조선의 교육과 조선의 의료 사역의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가의 3대가 조선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희생적인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희생적인 제물 되는 죽음을 죽어 지금 양화진에 모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지극한 경외감과 존경과 사랑을 느끼면서 한 없이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듭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조선땅에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모슬렘 선교도 북한 선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지적한 여섯 가지 선교의 모습을 몸과 마음과 삶과 사역에 지니고 찾아가면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구원과 화해의 선교가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 가지 추가해사 말씀을 드리면 모든 선교에는 필수적인 파트너십 즉 협력이 절대로 필요한데 모슬렘 선교와 북한 선교야말로 파트너십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은 불신과 반발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간의 파트너십과 현지인들과의 파트너십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파트너십이 이루어지려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온유 겸손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선교가 무엇이며 선교사가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선교가 무엇이고 선교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선교사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는 함께 살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트너십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사시고 보여주신 삶과 사역의 모습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너무 이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유행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도 그런 경향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최근에 자신이 복음 사역을 다시 시작한다면 정치와는 무관한 사역을 하고 싶다는 고백을 한 일이 있습니다. 목회 사역은 물론 선교 사역도 좀 단순해지고 좀 바보스러워지고 좀 어리석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순수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슴과 몸과 손발에 지니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으로 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살면서 사역을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도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조금씩, 조금씩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선교적인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피를 부어주셔서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랑과 구원과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과 제물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출처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선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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