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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遠征 때 코란 탐독한 나폴레옹,

                 그도 실은 무슬림이었다

 

 

      나폴레옹이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자대신 굳이 무슬림으로 바뀐 이유나 그 시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평정으로 일약 전국적 인물로

바뀐 그가 이집트원정에 올라 그의 원정함대가 알렉산드리아항(港)에 닿을 즈음,

          그가 선상에서 6주간 탐독했던 책이 코란이었다는 사실은 영국의 역사작가

빈센트 크로닌이 남긴 <나폴레옹>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이집트의 카디스(무슬림 법관), 쉬크(족장), 이맘(회교僧)들을 모아놓고

선포한 첫 포고령은 “내가 진정한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너희 국민들에게 고하라!”였고,

그 대가로 프랑스군 주둔지역 부근에  둘레 1.5마일 크기의 모스크(회교사원)를 짓겠노라는

약속까지 합니다. 이집트 종교지도자들이 나폴레옹에게 무슬림이 되는 징표로

할례와 (포도주의)금주를 요청하자 그는 잠시 주춤했으나 곧이어 타협이 이뤄집니다.

 


그가 향후 이슬람교를 적극 보호하고, 알라 신의 메신저와 선지자(모함메드)의 친구가

되겠다는 선언을 채택했고, 그는 실제로 유럽 전역에서 벌인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그 영광을 알라신에게 돌림으로서 이 선언을 준수한 걸로 나타나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황제 취임 대관식에서 왕관을 씌워주려는 교황을 거부, 자신이 손으로 

직접 왕관을 쓰는 장면.  자칫 나풀레옹의 위세와 교만을 시사하는 그림으로 오해되고 있으나,

실은 당시 나폴레옹은 이미 회교도로 바뀌어, 교황의 권위는 그에게 무슬림 교리 상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다비드 그림(1806~7)/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그렇다면 훗날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이 대관식에서 교황이 씌워주는 왕관을 거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받아쓴 대목에 대한 해석은 달라져야 합니다.

교황의 왕관을 거부한 이유가 나폴레옹의 권위나 오만 때문이 아니라,

당시 이미 독실한 무슬림으로 바뀌어 있던 그에게 교황의 권위는

무슬림 교리 상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김승웅                        

 

예컨대 미국이민자의 경우 한 세대(30년), 유럽이민자의 경우 3세대가 지나면 정착이 가능하나

프랑스이민자만은 3세대가 지나도 개선은커녕 빈곤의 악순환을 되풀이,

그 정도가 타 지역 이민자의 5~19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이슬람분포는 공식적으로는

7~8%에 불과하나, 이런 기회박탈로 인해 18~24세의 프랑스 청년 4가운데 한명은

이미 IS세력에 대한 동조자, 그것도 적극동조자로 바뀐 걸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니스의 트럭 테러를 다루는 과정에서 미국과 서구 언론이 보인 이 같은 스타일의 변화는

결코 취재보도의 낙후와는 무관한, 오히려 진보적이고 거시적 접근이라는 소회가 듭니다.

니스 테러범인 한 무슬림 운전자의 소년시절이나 프랑스이민경위나 캐는 기존의 미시적 취재로는

이슬람이라는 매머드조직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교전당사국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고 전선에 임한 미군장병들의

정훈(政訓)자료로 미 국무부가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4년, 당시 컬럼비아대학 인류학

여교수 루스 베네딕토에게 ​<국화와 칼>이라는 명저의 집필을 의뢰한 것과 유사한

접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테러취재의 스타일 변화를 기해 일본 자리가 무슬림으로 바뀐 것입니다.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문화일보·시사저널 워싱턴특파원 역임>

 - 2016년 7월 25일字 이투데이 칼럼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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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 사역자가 이슬람에 대해 알아야 할 것

모하메드 칼리프 카리지파 쉬아파 순니파 무타질라 메카 히즈라 / 알라위파 드루즈파

 

"이슬람교"는 모하메드의 종교를 가리키는 정확한 이름으로 아랍어의 동사"복종하다"의 부정사(不定詞)이고, "무슬림"은 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정확한 이름으로 같은 동사의 현재분사이다. 이슬람교는 역사의 주목할 만한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이 종교의 창시자가 죽은 지 일세기 이내에 무슬림 제국은 남부 프랑스로부터 스페인, 북 아프리카, 레반트,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국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이것은 동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 아시아 그리고 대서양에서 필리핀, 코카서스 산맥(Caucasus)에서 케이프 타운까지에 널리 퍼져 있고, 유럽인들로부터 하우사 폴라니족, 아리안 인디언족으로부터 필리핀 종족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다양한 인종들로 이루어진 약 12억의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


※ 이슬람교의 기원


1. 모하메드의 초기 삶


이슬람권 사역자가 이슬람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에 관하여


A.D.570년 메카에서 태어난 모하메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아버지의 유복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겨우 6세였을 때 죽었다. 그의 소년 시절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는 홀로 떨어져서 묵상하기 위해 동굴에 들어가곤 했다. 그는 자주 금식을 했고 쉽게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는 그의 고향 메카의 다신교와 조잡한 미신들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족했으므로, 한 참된 하나님의 존재와 초월을 열정적으로 확신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러한 확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기독교나 유대교에 힘입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핫산의 아랍 왕국에는 단성론적 기독교리가 널리 퍼져 있었다. 동방 정교회는 히자즈의 주변에 흩어져 있던 은자들로 대표되었는데, 그가 그들과 접촉했을 것은 당연하다. 네우토리우스 교인들은 알 히라와 페르시아에 자리를 잡았고, 유대교 신자들은 알 메디나, 예멘 아랍 공화국 그리고 그 밖의 곳에서 강세를 보였다. 더구나 그의 삶의 어떤 시기에 탈무드적인 원천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흡수했고 모종의 기독 교리와 접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의 계시


코란의 첫번째 계시가 그에게 온 것은 약 40세 때이었다고 한다. 한 목소리가 세 번 그에게 "그대의 주(主)의 이름으로 낭독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상당 기간 동안 아무런 계시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깊은 영적 우울, 불확신의 기간을 지난 후에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카디야에게서 위로를 받고 숨기 위해 떨면서 집으로 갔지만 한 목소리가 "오 망투를 두르고 있는 그대여, 일어나서 외치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랍의 시인들과 점장이들의 경우와 같이 자신이 귀신에 들리지 않았나 두려워했다. 그러나 카디야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는 곧 점점 더 자주 신의 계시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정통적인 무슬림에게 코란에 있는 모든 구절은, 천사장 가브리엘에 의해서 예언장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코란의 가장 초기 수라(계시)들은 개념의 현저한 단순성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알라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의 도덕적 반응을 촉구하고, 심판의 날을 예언하며,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과 처음 보기에는 대단히 감각적인 것 같은 낙원의 즐거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3.헤지라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에서의 반응은 여전히 미미한 것이었고, A.D 622년에 모하메드는 그의 추종자 약 200명과 함께 알 메디나로 철수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순례 동안에 그를 만났었고,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동료 시민들에게 그가 올 것에 대해 일단의 그 곳 주민들이 그를 초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피(혹은 헤지라)는 모하메드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되었고 적절하게 회교 기원의 시작으로 선택되었다. 메카에서 그는 그의 동향인들에게 참된 한 하나님을 가르쳤으며 앞으로 올 심판에 대해서 경고했던, 거부당한 예언자이었다. 알 메디나에서 그는 곧 정치가, 입법자, 재판관-즉 새로운 신정 정치의 대변인뿐만 아니라 행정관이 되었다.


모하메드가 처음에는, 유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아브라함과 모든 가부장들과 선지자(예언자)들이 설교해 온 유일한 참된 종교로서, 계속 부패해 온 것을 단지 새로이 선포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초기에 성경의 백성들에 대해서 언급한 것들이 한결같이 우호적이었고, 그가 처음에 유대인의 몇 가지 관습들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메디나에서 그는 곧 유대인들이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구약 사건들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설명했었고, 그가 그것들을 인간적인 근원에서 배웠다는 것을 부인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란의 수라들은 그가 전에 믿을 만한 것이라고 확정했었던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구약의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음이 명백히 드러났을 때,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경을 개악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잘못 인용했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비난, 유대인 종족들에 대한 그의 추방 혹은 대학살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서 분간할 수 있듯이 유대적인 것들로부터 아라비아와 메카로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무슬림 공동체가 기도 할 때 향해야 하는 곳은 예루살렘보다는 차라리 카바가 되었고 이교도의 순례 의식이 순화되어 이슬람교속으로 통합되었다.

 

4. 모하메드의 인격


(한때 유럽에서 널리 퍼졌던) 모하메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꾼이었다는 사상은 다행히도 없어졌다. 그리고 최소한, 그의 초기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초기 계시들을 희망적 관측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그에 관해서 묘사한다. 그의 초기 삶의 불행과 좌절, 아랍인들도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처럼 신의 사자와 경전이 필요하다는 그의 깊은 확신, 그를 그들의 예언자로 특징지어 줄 어떤 계시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그의 갈망 그리고 다양한 내외적 자극이 그의 잡재 의식적인 마음에 불러일으킨 생각들과 이야기들이 이러한 연속되는 계시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그의 확신이 그 설명이다. 그는 때때로 간질 환자, 히스테리 환자, 병리상의 환자, 혹은 계시에 대한 에비온적- 마니교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따금 대단히 비판적인 견해를 취함으로써 계시의 징후들이 때때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 왔다. 물론 그 현상들은 현대의 교령술 무당들이 주장하듯이, 간헐적으로 영에 사로잡힌 증후들로 설명될 수 있다. 코란의 초기 수라들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스타카토 스타일은 이러한 가정들 중의 어느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그의 선지자적 주장들에 대한 기적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는 자연적 요구를, 이야기들에 대한 그의 지식이 오로지 신의 계시에서 나온 것으로 함으로써 충족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너무 세밀하게 탈무드와 일치하여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원천에서 나왔음은 거의 의심할 수가 없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는 다르게 네 명 이상의 아내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고, 그의 시간을 그 여자들 사이에서 균등 분배해야 하는 정상적인 의무로부터 면제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의 양자의 이혼한 아내와 결혼했을 때 아랍의 관습에 상관없이 비판을 모면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첩 메리와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맹세로부터 면제되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몇몇의 아내들 사이에서 야기될 문제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들은 베일을 쓰도록 명령받았고 부정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중 벌을 받는다고 위협받았으며 그의 사후에는 재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학자들은 모하메드의 본질적인 진실성에 대해서 깊이 확신하고 있어서, 그가 어떤 의식적인 사기도 하지 않았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나이가 좀 든 후에 그는 그가 신의 계시를 받은 자라고 지나치게 확신하고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지나치게 믿게 되어, 주위 상황과 그 자신의 성향이 일으킨 협박을 그가 너무 자주 들었다고 믿는 신의 목소리로 진지하게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적으로 심리학자의 문제이지 역사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


그 밖의 점에 대해서 말해 보면, 그의 성격은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혼성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시인이었고 조직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뛰어난 즉흥 시인이었다. 그가 취향에 있어서는 주로 단순했고 기질에 있어서는 상냥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관대하고 단호했으며 친절하고 빈틈이 없었다. 또한 그는 날카로운 심판관이었고 타고난 지도자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잔인해지고 깊은 앙심을 품은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수치를 무릅쓰고 암살할 수도 있었으며 관능적인 경향을 띠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의 하림(후궁)의 규모는 솔로몬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다윗의 것에 비하면 좀더 나은 것이다. 그의 덕망은 그의 동시대인들의 것보다 뛰어났으며 그의 결점은 거의 시대에 이런저런 비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참된 개혁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만약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그가 자신에 대해서 내린 평가대로 받아들였다면, 그의 성격에 대한 다른 견해는 대부분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란은 그의 예언자적 존엄성에 대해서 확실한 용어로 주장하고 있지만, 반면에 그의 소멸성과 불완전성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전설들에서 보이는 그의 언행에 대한 반 신성화와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언행은 곧 이론상으로는 코란 다음 가는 중요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5. 전설들

 


그 종교의 창시자가 그리스도에게 존경심을 바치는 것은 나쁘다고 가르쳤고 그 자신은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솔직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가 마침내 기독교나 그 박의 다른 것에서 그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창시자의 개인적인 습관들에 대한 노예적인 모방을 주창한 것은 이슬람교의 여러 모순들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호가르드(D.G.Hogarth)의 다음과 언급은 정당하다.


중요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간에, 그의 일상적인 행위는 오늘날까지 수백만이 의식적으로 흉내내서 지키는 법규가 되었다. 인간에 의해서 완벽한 인간으로 간주되어 온 사람들 중에 아무도 이처럼 세밀하게 모방되어 본 적은 없었다.


잘 알려진 전통주의자 아마드 이븐 한발은 결코 수박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언자가 수박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껍질 채 먹었는지 혹은 그가 부수어서 깨물어 먹었는지 혹은 잘라먹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가 말했고 행했던 것에 대한 전설들을 모으는 것이 곧 신앙 고백이 되었고, 그의 흩어진 동료들이 여러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무슬림 세계 전체를 여행했던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것은 영감 받은 말들과 행위들에 대한 영감 받지 않은 기록으로 간주되었고, 많은 일련의 서술자들에 의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 서술자들의 이름은 주제의 진실성에 대한 보장으로서 전설의 첫 부분에 항상 기록되었다. 그러나 날조된 전설들이 범람하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그가 죽기 전까지 약4,000개의 전설들을 꾸며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모든 엉뚱한 정치적 철학적 혹은 신학적 사상은 예언자의 진술이라고 함부로 주장된 것에서 그것의 증거를 찾곤 했다. 나중에 위대한 전통주의자들은 전설들은 모아서 정리하였고, 그들 중의 몇 명은 위조된 것과 참된 것을 구별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들의 비평을 실제의 전설이 그럴 듯한가 하는 것보다는 그 전설에 있는 이름들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데에 한정했다. 오늘날 서로 다른 수집물들이 이슬람교의 다른 분파들에 의해서 각각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지만, 모든 경우에 그러한 전설들은 무슬림 신학, 율법, 관습의 1차적 원천으로서 코란 곁에 위치하고 있다.


6. 기독교에 대한 모하메드의 관점

 


모하메드는 기독교의 교의에 대해서 대단히 피상적인 그리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초기 삶에서 그는 유대교인들에게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후기 삶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덜 심한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예수에 대한 코란의 이름인 이사(I'sa)는 메시아이었고 처녀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는 자이었고,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코란은 명백하게 그의 신성을 부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코란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졌다."(혹은 "그는 그들을 속이기 위해서 위조되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그를 자신(하나님)에게로 끌어올렸다고 말하고 있다. 정통적인 무슬림들은 항상 이것은 실수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예수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오고 있다


※ 이슬람교의 발전


1. 칼리프(Caliph)의 직위

 


가장 잘 입증된 견해에 의하면, 모하메드는 어떤 후계자(Caliph)도 지명하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물론 예언자들 중의 마지막이고 가장 위대한 자인 그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웠던 공동체는 정치와 종교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없는 신정국이었고 그러므로 누군가가 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행하기 위해서, 전쟁시에 이끌고 평화시에 인도하기 위해서 확실하게 계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칼리프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고, 마침내 우마르 이븐 알 하타프(자신은 제 2대 칼리프가 됨)가 최초의 신자들 중 하나인 나이 지긋한 아부 바크를 급히 뽑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칼리프 직위의 문제는 이슬람교의 어떤 다른 문제보다도 많은 분열을 일으켰고 유혈이 나게 했다. 그리고 거의 처음부터 최소한 미발달의 상태에 있던 3개의 적대 파가 구분될 수 있었다. 우선 코라이쉬족 가운데 적절한 "초기신자"가 적임이라고 믿은 예언자의 동료들이 있었고, 칼리프직을 우마이야가에 주고 싶어한 메카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는 필요 없고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신에 의해서 그의 후계자로 지명 받았다고 믿는 "합법주의자들"이 있었다.


아부 바크르의 2년간의 짧은 통치는 주로 "탈퇴의 전쟁들"과 코란의 첫 편찬으로 유명하였다. 예언자가 죽자 많은 종족들은 세금낼 것을 거부했으나, 아부 바르크는 칼로써 순종케 했다. 죽기전에 아부 바크르는 우마르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고, 그의 선출은 아무 탈없이 통과되었다. 그는 이슬람교의 제 2의 창시자로 불리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칼리프로 있을 때에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이집트 등이 무슬림의 무력 아래 함락되었고 많은 중요한 결정적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계승자를 임명하지 않고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투만이 선출 되었다. 그 자신은 나이든 신실한 "초기 신자"이었지만, 거의 끝까지 예언자를 반대했던 우마이야의 귀족 집안 자손이었다. 그의 명령으로 현재의 개정판 코란이 준비되었고 모든 상이한 판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그의 파멸의 원인으로 증명되었고 그는 암살자의 칼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2. 카리지파(Kharijis)

 


사실상 최초의 분열은 "올바르게 인도된" 칼리프들 중 네 번째이며 마지막으로 우트만을 계승했던 알리('Ali)가 칼리프 직위에 있는 동안 일어났다. 두 지도급 동료, 탈하(Talha)와 알 주바이르(al-Zubayr)는 예언자의 과부인 아이샤('A'isha)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일만 명의 무슬림들이 생명을 잃은 카멜(Camel) 전쟁에서 패하였다. 이 사건은 경건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코란은 정당한 이유 없이 형제 무슬림을 살인한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는 곧 훨씬 단호한 적을 만났다. 왜냐하면 시리아의 통치자 무아위야가 그의 친족 우트만의 암살에 대해 복수한다는 구실로 그에게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알리는 우트만의 죽음에 공모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리가 다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쟁의 중요한 때에 무아위야는 교묘하게 알리로 하여금 칼리프 직위의 문제를 중재에 붙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알리 자신의 추종자들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들은 알리가 그렇게 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저버렸다고 느꼈다. 그리고 무아위야에게는 더욱이 충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탈퇴했고 자신들은 "배교적인" 이슬람교로부터 분리시켰다(따라서 그들의 이름이 카리지파가 되었다).

 


3. 쉬아파(shi'a)

 


칼리프직의 말썽 많은 문제는 곧 훨씬 더 중요한 분열을 일으켰는데, 쉬아파(알리의 "추종자들" 혹은 "종파")가 순니 이슬람교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알리를 신이 임명한 예언자의 후계자로 간주한 합법주의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중재하려는 시도가 불행하게도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고, 알리가 한 카리지의 칼에 죽을 때까지 무아위야와 칼리프직에 관해서 계속 논쟁했는데도, 혹은 심지어 그의 장남 알 하산이 왕자의 연금을 받는 교환 조건으로 알리를 계승할 권리를 포기하고 물러나서 알 메디나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 죽었는데도, 그들은 헌신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그들은 알 하산이 무아위야의 명령으로 독살되었다고 주장했고, 그에게 "순교자자들의 주"라는 명칭을 주었으며 그의 동생 알 후세인에게로 그들의 충성심을 옮겼다. 동생은 좀 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1세에 반대하여 일어났을 때, 그는 그의 가족의 대부분과 함께 카르발라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집안에 대한 이러한 도살의 참사는 쉬아파의 교리에 대한 많은 뒷받침이 되었고, 점차 증가하는 수가 하나님은 결코 경건치 못한 지도자들에게 그의 백성을 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고 항상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맘(Imam), 즉 지도자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이후에 칼리프직은 우마이야가에서 세습되었고, 무아위야와 그의 계승자들은 대부분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구식의 아랍 왕들처럼 다스렸다. 그런 상황에서 쉬아파의 선전은 극히 성공적었다. 특히 페르시아인 "예속민"들 가운데에서 더욱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그것에서 아랍의 거만함으로부터 도피할 길이 발견했고 이맘직의 교리가 이슬람교 시대 이전에 왕에 대해 가졌던 태도에 좀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많은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쉬아파의 지지자들은 마침내 우마이야조를 몰락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왕위는 알리나 예언자의 자손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삼촌 압바스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쉬아파는 압바스조하에서 막대하고 부분적으로는 비밀적인 공동체로서 지속되었고, 여러 책략들은 유혈이 낭자한 반란의 형태로 간헐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쉬아파는 무수한 아류 종파들로 갈라지는 경향 때문에 계속적으로 약화되었다.


대다수의 쉬아파는 코란의 해석에 있어서 흔히 순니파와 다르고 심지어는 칼리프 우트만이 알리에게 유리한 많은 절들을 삭제했다고 그를 비난하기는 하지만, 코란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지지하는 순니파의 수집물을 거부하기는 하지만, 전설의 권위를 받아들인다.


4. 4개의 순니파들


논쟁이 불붙은 것은 칼리프직에 관해서만이 아니었다. 이성의 제자들과 전통의 제다들 사이에 영원한 갈등이 이슬람교에서도 법과 신학의 분야에서 가차없이 나타났다. 순니파 이슬람교가 압바스조 시대 초기에 지금처럼 4개의 정통 법률학파들로 나뉘어 진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갈등 때문이었다. 그 네 학파를 살펴보면, 전설적 창시자가 아부 하니파이고 오늘날 대부분의 구 오토만 제국, 북인도에서 지지받고 있는 하니파 혹은 이라크 학파, 이름은 말리크 이븐 아나스에서 나왔으며 북 아프리카와 서 아프리카, 상부 이집트 그리고 수단에서 우세한 말리키 혹은 히자즈학파, 무슬림 법률학의 "아버지"인 알 샤피에 의해 창시되었고, 하부 이집트, 동 아프리카, 남 아라비아, 동남 아시아에서 추종되는 샤피학파, 주로 중앙 아라비아의 와하비족에게 국한되어 있는 한발리 학파 등이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론적인 법학자들(그들의 적들이 하나피 학파를 그렇게 불렀다)과 전통주의자들(그들에게 이 이름을 어느 정도 붙일 만한가 하는 것은 그들간에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밖의 모든 다른 학파들이 자기들에게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한 용어)사이에 쓰라린 갈등이 발전되었다. 실은 아부 하니파와 말리크의 시대에는 그러한 갈등이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체계를 세울 때 후자가 전통에 약간 많이 의존하고 전자가 이론에 의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말리크는 예언자의 바로 그 도시와 환경에서 살았지만, 아부 하니파는 이라크에서 예언자의 선례가 없는 상황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크는 상황에 따라서는 공공복지에 관한 자신의 견해나 판단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극단적인 전통주의자들이 제거하고자 한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된 말씀 자체가 밑바탕이 되는 원리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성이 구체적인 명령이나 금지 사항으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추론해 낼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간은 추론하지 않고 순종해야 한다. 마침내 중도 노선이 우세하게 된 것은 알 샤피파의 영향이었다. 이 학파는 예언자로부터 온 "믿을 만한" 전설들의 가장 중요한 권위를 인식했지만, 항상 변하는 일상 생활의 예측 못할 사건들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정의된 유추법에 의해 신성한 말씀의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는 필요를 충분히 받아들었다. 마침내 네 학파는 모두 코란, 순나 즉(전설들 속에 보존되어 있는) 예언자의 관습, 이즈마 즉 무슬림 공동체의 동의 그리고 키야스 즉 이러한 세 가지로부터 유추적으로 연력한 것을 법의 주용한 네 원천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피 학파는 필요에 따라서 유추의 엄격한 적용을 통해 이르게 된 결론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들이 "좀더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한" 해결책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였다.


5.무타질라(The Mu'tazila)


이성과 전통간의 동일한 갈등이 신학의 영역에서 훨씬 더 가열되었다. 회교 기원2세기 초에 벌써 무타질라라고 알려진 어느 정도 뚜렷이 구분되는 사상가들이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에 반대하고 코란의 교리에 이성의 완화제를 적용시켰다. 그들은 신앙과 불신 사이에(그러므로 축복과 멸망 사이에도) 중간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보다 앞선 카다리파의 영적 후계자들읜 그들은 인간 의지의 자유를 주장했고 신이 인간이 악과 불신을 예정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반드시 정의에 따라 행동하여야 하고 항상 그의 피조물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애야 한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정통파는 어떠한 중간 상태도 부정했고 인간이 모든 행동들은 영원부터 "간직되어 있는 서판"에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이 정의를 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인간 사색의 기초를 부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지성으로 선악을 감지하거나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선악의 본질은 단지 신이 뜻에서만 나왔고 그의 명령과 금지에 의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로부터 벗어난 신학이나 윤리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신적인 속성들(아는 것, 의지를 갖는 것, 말하는 것 등)과 신이 본직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의 논쟁 그리고 코란이 창조된 것인가 혹은 영원한 것인가에 관한 유사한 논쟁이 불붙었다. 무타질라는 그러한 속성들이 신의 본질에 내재해 있지 않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분리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코란은 확실히 창조된 것인데, 그 이유는 이와 다른 주장은 어떻든 코란을 제 2의 신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철학자들


이성의 옹호자들로서 무타질라의 위치는 알 킨디, 알파라비, 이븐 시나, 이븐 러쉬드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진지한 무슬림의 위치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또한 전심으로 그리이스 철학을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이론들과 함께 진리의 형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었다. 그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매우 단순했다. 코란은 진리였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두 진리를 설명했다. 그러므로 코란과 철학은 모두 서로 조화시키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 희랍의 철학 및 지식이 보존되고 유럽으로 재도입된 것은 주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7. 사변 신학자들


그러나 무타질라 견해의 후기 발전과 함께 정통파 가운데에서도 한 집단이 성장해 갔는데, 그들은 코란의 진술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어떤 의문도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비정통파와 칼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칼람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의 사변 신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학문적 체계는 점차적으로 발전해 나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알 아샤리가 전통적으로 주요 공적을 이룩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무타질리로 자라나고 약 40세까지 그들의 견해를 주장했지만, 갑자기 다른 편으로 급회전했다. 그리고 무타질라의 합리주의와 좀더 극단적인 한발리 학파의 조잡한 신인동형론에 반했다.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아야리 체계는 극단적인 원자 형이상학을 신학에 응용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공간은 수많은 단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각각의 단자는 부피가 아닌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음 단자와는 절대 공간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 유사하게 시간은 무수한 연결되지 않은 시간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과 관계에 대한 어떤 사상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에서 분간할 수 있는 한 사물과 다른 것과의 조화 및 명백한 연관 관계를 어느 정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어떤 법이나 필연성에 의해서도 제한 받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서 이러한 해명의 길을 발견했다. 즉 하나님은 계속으로 원자들과 여러 특징들을 창조하고 제거하며, 그럼으로써 모든 움직임과 모든 변화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8. 신비주의자들

 

신비주의는 이슬람교에서 처음부터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처럼 보인다. 모하메드 자신은 비록 신비주의적인 면이 가장 적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고독과 단식에의 욕구에 강하게 이끌렀다. 그리고 그가 세운 종교에서 신비주의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금욕주의, 세상 및 세상 악에 대한 부정의 맥락에서였다. 아라비아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 은둔자들은 그러한 태도를 고무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원시 이슬람교의 근본적 요소인 지옥에 대한 두려움의 발전과 먼저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우마이야조 칼리프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난 불경함과 그리고 나서 압바스조의 매우 제한된 경건함으로부터 물러선 것도 그러한 태도를 대단히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창기부터 방랑하는 금욕주의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비교적 흔히 보는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모두 단순한 모직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들 즉 수피파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곧 좀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맥락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에 있어서 그것은 희랍의 교회로부터 많은 힘을 입었고 참으로 페르시아와 인도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로티누스와 신플라톤 학자들에게 많은 힘을 입었다. 무슬림 철학자가 코란의 어떤 가르침들과 희랍 철학의 추상적 개념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고, 사변 신학자들이 아샤리 형이상학의 전면 부정으로부터의 도피처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보통의 순니 무슬림이 자기의 종교에서 시와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비주의에로의 도피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사변 신학자들이 그러한 학문적 업적을 달성하여 영향을 미치게 되자, 정통파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통해서가 아니면 "자연법칙"도 인과 관계도 없어지고, 신학과 윤리학의 가능성도 없어진다. 그들은 코란과 전설들의 예언적 계시에 철저히 의존하는데 만족하거나, 아니면 신이 그를 진실로 찾는 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내려주는 "보다 작은 영감"에 의해서 그것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진실한 수피는 이것에 확고 부동하게 헌신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비록 흐릿하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신이 거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신비주의자의 의무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그 자신을 근절하여, 이 거울을 깨끗하게 하고 그것을 신 쪽으로만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신의 비추임을 받게 될 것이다.

 

 

※ 모하메드를 중심으로 본 이슬람교의 성립 배경과 과정


이슬람교 와 코란


-<셈>계 일신교 계통의 종교로 추종자인 모슬렘은 약 12억정도이며 발흥시기는 7세기 초이다. "이슬람"의 뜻은 "복종"이며 "모슬렘"의 뜻은 "복종하는 사람"이다.


경전은 "코란"이며 114장, 6239절로 되어있다. 코란의 내용은 신관념(神觀念), 천지창조, 인류의 역사와 이에 대한 신의 지배, 종말(終末),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 예배등 의례 적인 규범에서부터 법적 규범까지 포함한다. 또 코란은 알라에 대한 신앙을 언제나 인간 의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1. 이슬람 이전의 아랍부족사회

 


이시기를 자할리야시대 또는 무명시데, 영웅시대라고하며 6~7세기초 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아랍 유목부족의 생존경쟁, 부족적 혈연집단의 연대의식으로 요약할수 있다.


이당시 아랍인은 까흐탄및 아드난이란 두 조상에 기원을 둔다고 여겼다. 까흐탄은 구약의 요그탄에, 아드난은 이스마엘의 자손으로 여겨지며 전자는 남아라비아의 예멘의 여러부족으로 아라비아의 서남부, 후자는 북부 아라비아 출신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인종상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은 크게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뉜다. 유목민(베드윈)은 방목생활과 수렵, 전투, 약탈등으로 생계를 꾸려갔고, 반면 정주민은 중부 아라비아의 오아시스나 해안가에 살며 농업과 상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의 부족은 대개 경우 생각하는 그런 커다란 집합체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비교적 작은 집단이었다. 집단의 기본은 혈연을 유대로 하며, 노예와 해방노예가 있었고 차별을 받고있는 비 자유민인 미왈리, 그리고 다른 부족 출신의 자유민인 할리프가 있었다. 즉 혈연이 바탕이나 그 내부에는 동족이외의 자유민이 스스로의 의사로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유목부족은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 데다 때때로 인근의 다른 부족과 싸우기도 했다. 그들에겐 약탈을 받았다 생각되면 받은 만큼 되갚는 동해복수(同害復讐)가 행해졌다. 부족내에는 뚜FUT한 정치적제도나 조직이 없었고 정치적 권력을 가진자도 없었다. 물론 부족장이 있긴하나 그의 영향력은 그가 부족민에게서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받는가에 의존하며, 자국민인 부족민은 부족내의 중요문제를 부족집회를 개최하여 결정했다.


그러나 같은 부족민은 같은 조상을 갖고있다는 강한 부족의식인 아사비야-집단 연대의식-를 갖고있어 부족내에선 서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혈연은 모든이가 복종해야하는 유일절대의 권위로 여겼다. 이것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연계되어 부족정신을 이뤘다. 이런 부족정신은 자신의 부족민이 살해당하면 가해자가 속한 부족에게 같은 수의 복수를 행하는 것-피의 복수:이를 피하기 위해선 배상금으로 낙타 100마리-을 의무로 여기게 했다. 한편 그들에겐 지와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유목 베드윈의 관습으로, 보통의 경우 부족밖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나 이 지와르관계에 있는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은 수치스런 행위로 여김으로 그의 재산을 보호하게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유목부족은 방목과 약탈로 생계를 유지했으므로 재산에 대한 소유권도 극히 유동적이었고 (강한 부족은 언제든 약한 부족의 재산을 뺏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겐 빈부격차도 크지않아 부족내 개인은 평등하고 상당한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

 


2. 이슬람 발흥시기의 메카

 


그러다 이슬람이 발흥하기 직전, 6세기 후반 히자즈 지방의 메카에 경제적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메카는 대상 교역의 교통 요로에 위치했고 또 성소 카바신전-오늘날 이슬람이 가장 신성한 신전. 코란에 의하면 카바의 건설자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로 되어있다. 카바란 입방체를 의미-이 있어 아라비아의 유목민은 매년 일정시기 이곳을 순례했으며 순례기간인 신성월에는 성역으로서의 메카 및 그 주변에서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되었다.


이시기(6세기 후반)아라비아 반도의 각 부족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우상신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메카이 카바신전에 두고 매년 특정 달에 희생을 바치고, 또 매년 많은 사람들이 순례했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런 신앙은 (우상신) 메카의 중요 소득원이었다. 즉, 땅이 척박해 농사를 할 수 없는 메카는 목축을 했는데 양, 산양, 낙타 등을 순례자에게 팔고, 가축의 생산물, 양모, 가죽등 제사에 남은 것은 상품화하여 타지방의 특산물과 교환하는 것이다.


메카는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상업의 중심뿐 아니라 금융의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왕성해졌고, 이결과 유목내지 반유목경제에서 상업경제로 이행하게되며 급기야 6세기후반엔 아라비아의 최대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조직 및 그들의 의식면에서는 부족적 연대성이나 동해복수와 같은 유목생활에 적합한 사회제도나 의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메케의 대다수 주민은 쿠라이쉬라는 부족에 속해 있었다. 쿠라이쉬부족은 스스로 대상을 조직하고 교역을 하면서 전에 가졌던 유목부족적인 부족연대의식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의 풍조에 물들어 부족내 유력자들은 약소자를 돕는 부족적 의무를 망각해갔다. 부족적 집단 지향형에서 개인적 이익 지향형으로의 이런 변화는 유목적 의식구조와 새로운 상업경제적 환경의 모순과 갈등을 가져와 이슬람이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된다.

 

3. 모하멧드

 


모하멧드는 쿠라이쉬부족의 일원으로 570년경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6살 때 잃은 그는 할아버지의 보호하에 있다가 그의 숙부 아부 앗딸리브에게 위탁되어 성장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않으나, 메카의 대상활동에 참가하여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25세엔 약 15세 연상의 거부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한다. 그후 40세 정도되었을 610년경 그는 처음 알라의 계시를 받아 최초의 3년간은 그에게 찾아오는 특정인을 상대로 전도를, 614년에는 대중전도에 나서게된다. 그는 예언자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한 후 13년간을 메카에서 10년을 메디나에서 지냈는데 코란의 2/3가 메카에서, 1/3메디나에서 받은 계시이다.


코란은 예언자 모하멧드에게 계시된 유일신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처음 계시받은 610년경에서 623년 타계할 때까지 약 23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시된 장구(章句)를 모은 것이다.


그가 처음 계시를 받은 것은 라마단(9월)말 히라동산에서 명상을 하다 대천사 가브리엘로 부터라고 전승-모하메드의 언행록-은 전한다. 초기계시는 ①신의 은총과 권능. ②부활과 최후 심판. ③절대자에 대한 감사와 예배. ④베풂과 너그러움으로 요약된다.

 

4. 박해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 반대자들의 주된 이유는 이 종교와 교리를 수락함으로 발생되리라 예상되는 정치 경제적 영향 때문이었다.


코란은 내세에 궁극적 가치를 둠으로 현세적인 것을 상대화하면, 부의 적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신앙과 선행을 강조했다. 이 선행은 부족적 연대의식의 발로가 아닌 오히려 종교적 개인주의의 가치기준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메카가 변화과정에 있었다해도 부족조직은 여전히 강했던 당시로선 종족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여겨 반발이 더했다. 그러나 어떤의미에선 코란의 상부상조원리는 사라져가는 옛 부족적 윤리의 좋은점의 재생이라 할 수 있다. 암튼 코란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부족적 집단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됐고, 코란의 내세주의는 아랍부족의 현세주의를 부정하며 지상의 모든 권위를 상대화하고 대상인(大商人)층을 정점으로하는 메카 사회 체제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중대사였다. 모하메드와 대상인층은 사이가 나빴지만 당시 그를 양육한 숙부의, 족장으로서의 비호로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615년경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를 첨가하면 입교하겠다는 메카 대상인층의 제안을 거절함으로 둘 사이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게다가 그를 비호하던 숙부 아부 앗딸리브가 619년 별세하고, 잇달아 부인 카디자도 사망한데다, 또다른 숙부 아부 라하브가 씨족장으로서의 그의 보호를 취소하자 모하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메카 동쪽 약 60㎞ 떨어진 고원도시 띠아프로 가나, 거기서도 배척당한다.

 


5. 히즈라

 


620년경 야스리브-현재 메디나-에서 메카를 방문한 여러명의 순례자들이 모하메드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다음해엔 다른 동료를 데려와 아까바에서 모하메드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아까바의 맹세.


야스리브, 즉 메디나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업을 주요생업으로 삼은 도시이다. 경제적 실권은 유태족이 장악했고, 그외 두 아랍부족 아으스와 하즈라즈가 있었는데 둘의 계속적인 상쟁으로 메디나의 정국은 불안정했다. 즉, 여기서도 새로운 정주사회에 적합치 못한 관습에 대치할 새로운 윤리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이를 확립치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모하메드는 그의 이상을 실현코자 알라를 궁극의 주권자로, 자신을 지상의 대리인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현실세계에 건설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메디나로 이주(이를 히즈라라고 함)한다.


한편 그를 초청하는 메디나 사람들은, 물론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는 자들이지만 또한 모하메드가 아랍부족간의 분쟁조정자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메디나출신은 공정한 입장을 취하기 힘들며, 보통사람으로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힘들것이나 모하메드는 메카의 망명자이고, 알라의 사도이므로 적격자란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모하메드의 히즈라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메카의 이슬람교도들은 무하지룬, 메디나의 아랍인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자를 안사르라 불렸으며 이들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 움마를 형성했다. 또 메카에 삶의 기반을 다 두고 와야했던 무하지룬을 위해 모하메드는 안사르의 자택에 무하지룬을 생활하도록 했다.

 


6. 바드르 전투와 우후드 전투

 


안사르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무하지룬은 그들의 생활보장 방법으로 "대상 습격"을 택한다. -당시 아랍 유목부족에게있어 대상 습격은 합법적이며 명예로운 생활수단이었다.


모하메드는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이 파견하는 대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메카측과의 전면대결을 의미한다. 메카측에선 상업활동이 방해받는 것은 사활의 문제이고, 쿠라이쉬 부족의 체면과 권위에 관한 일이기도 했다. 반면 메디나의 이슬람교도측에선 약탈은 경제적 자립의 토대가 될 수있고, 또 그들을 박해했던 불신앙자들에 대한 성전(聖戰-지하드)이라는 대의명분도있었다. 유목민이 아닌 모하메드가 약탈을 결의한 것에는 경제적 이익뿐이 아니라 쿠라이쉬 부족의 세력을 약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습격은 무하지룬이 주를 이루나 곧 안사르의 참가도 늘어나 바드르 전투에선 무하지룬 86명 안사르 238명이 참여했다 한다. 이 전투는 두배에 달하는 쿠라이쉬 부족의 대군을 완전격파하여 이슬람 교도에겐 자심감을 심어주고, 모하메드는 예언자적 위치가 고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 실제로 "예언자"란 칭호는 바드르 숭리의 후로, 바드르 전투에 관한 코란 계시인 8장에 처 음 나온다. 그 이전까진 "알라의 사도"로 칭한다.)


코란 8장 전리품의 장에선 이날을 "구제의 날"로 부른다. 이 승리로 이슬람교도들은 알라가 모하메드와 이슬람교도의 편임을 확신하게 된다. 더구나 전리품의 1/5을 모하메드의 집안의 경비와 이슬람교도의 궁핍한 자의 구제비로 모하메드가 취할 수 있게한 것은 그가 일반 신도와는 다른 특수한 지위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긴 하나 교단국가(교단國家)의 통치와 비슷한 정치가 시작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르드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은 메디나에서 자리를 굳히고 모하메드와 그의 공동체는 확고부동해지나, 메카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잃어버린 위신 회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625년 3월 유목민을 포함하는 메카군 약 3천명이 메디나를 공격해왔다. 이에 대응하기위해 이슬람군은 메디나의 교외 우후드 언덕에 진을 치나 전투가 개시되기 얼마전 일부의 신자들이 전열을 떠나고, 또 메카 기병대의 활약으로 이슬람군은 이 우후드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메카의 이전투의 중요목적은 모하메드가 메디나에 건설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파괴하고, 바드르 전투에서의 손실의 몇곱을 갚아주는 것이었다. 이런 메카군은 우후드 언덕에서 돌연 전투를 중지하고 메디나로의진격 대신 메카로 회군한다. 이것은 메카의 사상자도 많았거니와 메디나의 이슬람군 이탈자인 사이비 이슬람 신자의 세력증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드르 전투의 승리로 알라의 도움을 확신하던 이슬람교도둘은 우후드 전투의 결과를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알라의 처벌과, 신앙의 견고함을 확인하기위한 수단으로 내린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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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Islam) / 믿음의 다섯가지 항목

 

이슬람교(Islam)의 창시자는 아라비아에서 태어난 모함메드 (Mohammed, 570-632)로서 , 오늘날 세계적으로 40여 개국 이상의 나라에 약 45천 만명 이상이나 되는 신자를 가지고 있는 세계 제 2의 종교이다. "이슬람(Islam)"이란 단어는 명사로, 아랍어의 '복종하 다. 항복하다' 혹은 '자신을 맡기다'(to submit, surrender or commit oneself)는 동사로부터 형성된 말이다. "모슬림 (Muslim)" 이란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같은 동사에서 나온 또 다른 명사인데, 뜻 은 '복종하는 사람' (the·one who submits)이다. 서양에서는 이슬 람교를 흔히 창시자의 이름에 의.하여 "모하메드교"라고 부르기도 하 며, 동양에서는 그 종교를 동방으로 전파한 회흘 민족의 이름을 붙여 서 "회회교(回回敎)"라고도 부른다.

 

이슬람교의 가르침(The Teachings of Islam)

 

이슬람교의 가르침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ale (imam)과 실행 혹은 의무[practice or duty(din)]로 나눌 수 있 다. 노만 앤더슨 경(Sir Norman Anderson, 1976, p. 78)의 이슬 람의 가르침에 대한 기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슬람의 믿음과 실행은 두 개의 큰 가지인 모슬림의 학문과 신학 그 리고 법체계(jurisprudence)에 의해서 다스려 지고 있다 모슬림의 신학 을 보통 "타우히도(Tawhid)"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의 중심적인 교리는 신격의 단일화(the unity of the Godhcad)를 의미히는 것으 로. 보든 사람이 믿을 것을 정의하고. 그들의 율법(Shari'a)은 믿는 자가 행할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에게 성직 (priesthood)이 나 성례전(sacraments)은 없다. 철학적 신비에 의해서 자신들을 위 해 이슬람을 다시 해석했다고 하는 "슈피스(Sufis)"를 제외하고, 이슬 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신학과 율법을 충분히 배웠다고 인정되는 자 들에 의해서 오직 권고와 가르침으로 받을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오늘날 어떤 체계에서는 그들의 율법인(The 1.aw) "샤리아(Shari'a)"를 가르치고 있다. 그들의 율법 안에는 인간 생활 에 포함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범죄를 금하는 것으로부터 이 쑤시개(toothpick)의 사용에까지 , 그리고 국가의 조직으로부티 가족 생활, 즉 부부 관계(sacred intimacies)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그 율법에 대하여 "모든 일, 즉 인간과 신의 지식이요" (the science of all things, human and divine)라고 말하면서, 이 모든 행동은 무엇이 의무이고 명령인가, 무엇이 칭찬할 만하고 권 장할 만한가, 무엇이 허락된 것이고 합법적인가, 무엇을 싫어하고 비 난받는가, 그리고 무엇이 금지 되었는지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가 르침은 주로 수니 이슬람(Sunni Islam) 교도들이 진리로 믿고 따르 는 것들이다.

 

믿음의 다섯 가지 항목(Five Articles of Faith)

 

이슬람교에서 믿는 다섯 가지 중요한 항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슬람교는 믿는 유일한 하나님의 이름은 "알라(Allah)"이다. 그들이 믿는 알라는 전지 전능하며 심판의 주권자이다. 그러나 알라는 인격적 인 하나님이 아니며 (not a personal God) , 모든 것에 사람보 다 위에 있어 인간이 인격적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이 슬람교의 교리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인 "알라"를 그의 피조물들과 다 르게 만든다. 이슬람교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인 알라의 본성이 사랑이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거의 무시된 것을 의미하고. 알라가 최고로 정의롭다고 하지만 그의 사랑을 파기하는(Overrule love) 결 과를 가져온다, 이슬람교에서 알라에 대하여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비 나 은혜가 아니고 심판이며 힘이다. 이슬람교가 믿는 알라는 선과 악 의 근원이고 그의 뜻은 최고의 권위이다.

 

둘째, 이슬람교는 천사(Angels)의 존재를 중요하게 가르친다. 천 사들을 선도하는 가브리엘(Gabriel) 천사가 모하메드에게 나타나 코 란의 계시들을 전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모하메드에게 알라의 계시 를 전달하는 도구였다 그들이 말하는 "알 사이한(Al Shaytan)"은 마귀 (devil)로서 타락한 천사이거나 혹은 "(Jinn)"과 같은 것이다. "(Jinn)"은 천사와 인간 사이에 창조된 피조물로 선이나 혹은 악 둘 중의 어느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천사는 인간처럼 성 관계나 먹 는 것과 같은 몸의 기능들을 행할 수 없는 것들로 빛으로서 창조되었 다. 모든 천사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가브리엘이나 혹 은 지브릴(Gabriel or Jibril)은 계시의 전달자였다. 천사는 남자이 거나 여자이며 또한 두 기록의 천사들이 있다. 하나는 선한 행동을 기 록하고, 빠른 하나는 나쁜 행동을 기록하는 천사라고 이슬람교는 믿는 다.

 

셋째, 이슬람교는 모세의 율법(Torah), 다원의 시편(Zabin) 그 리고 예수의 복음서(Injil)와 코란(Qur'an)을 영감을 받은 책으로 믿 는다. 그러나 처음의 세 권은 유대인과그리스도인들에 의go 더러워졌 다고 생각하며.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근래에 마지막을 준 말이 코란 으로서 이것이 다른 모든 것들을 능가한다고 믿는다.

 

넷째, 이슬람교가 믿는 알라는 수세기 동안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했 다고 한다. 고들이 믿는 위대한 선지자들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 세, 예수 그리고 모하메드이다. 그러나 알라의 모든 메신저들보다 모 하메드가 마지막이며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주장한다.

 

다섯째, 이슬람교가 생각하는 종말은 부활과 심판의 때이다. 알라 와 모하메드를 믿고 순종하며 따른 자들은 이슬람교의 천국에 들어간 다. 그곳은 기장의 장소인 낙원(Paradise)이다. 그러나 알라와 모하 베드를 믿지 않고 반대한 자들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을 것이라 믿는 다.

 

마지막으로 위의 다섯 가지의 교리에 대부분 속해 있는 것으로, 이 것을 하나의 항목으로 간주하든지 않든지 간에, 이 항목 안에 이슬람 교의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이는 신의 규례와 키스메르 안에서의 신 앙으로. 운명의 교리를 말한다(the belief in God's decrees or Kismer, the doctrine of fate), 이 교리는 대단히 엄격한 예정론 의 견해로서 모든 선한 것이나 악한 것들은 신의 뜻으로 진행한다는 것 이다. 이러한 운명론(fatalism)은 모슬림 문화에서 지급도 하나의 중 요한 역할을 한다

 

 

 

믿음의 다섯 가지 요점(Five Pillars of Faith)

 

이슬람의 다섯 개 중요한 신조(beliefs)나 교리(doctrine) 외에, 또한 믿음의 다섯 가지 요점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이슬람교에는 신경(Kalima)이 있다. 이슬람의 신경에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모하메드가 알라의 선지자이다'(There is no God but Allah, and Muhammad is the Prophet of Allah)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모슬림 신앙의 기본 원리이다. 모슬림 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공중 알에서 큰 소리로 말해야 하고 신실한 모슬림 교도는 이 사실을 계속 반복하여 말한다.

 

둘째, 이슬람교에는 읜식으로서 행하는 기도(Salat)가 있다. 기도 는 경건한 모슬림에게 신앙 생활의 중심이다. 모슬림의 기도는 "해가 뜰 때, 정오. 정오가 지난 한 낮, 해진 후, 그리고 취침 전, 이렇게 하 루에 다섯 번의 기도를 실행한다. 모슬림은 메카의 카아아바 (Ka'aba in Mecca)를 향하여 처음에는 수라하(surah), 그리고 다음은 코란에 있는 것을 아랍어로 암송하며 기도한다. "하디쓰 (Hadith)" (book of tradition)를 펼치면서 섰다가 무릎을 꿇으며 .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는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 하면서 기도한다"(Boa, Kenneth, p 53). 카아아바(Ka'aba)에 관하여 , 모하메드 피크홀(Muhammad M. Pickthall)은 다음과 같 이 말했다. "메카의 사람들은 이스마엘을 통한 아브라함의 혈통이라 주장하고, 전통 또한 그들의 성전(temple)에 대하여 말하는데, 카아 아바(Ka'aba)는 한 하나님에게 예배를 위해서 아브라함에 의해 세워 졌다. 그들은 이것을 아직도 알라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예 배에 있어 가장 크게 방해가 되는 젓은 그곳에 알라의 딸들이라 불리는 많은 우상들과 중재자들이다"(Pickthall, p. ix) .

 

셋째. 이슬람교는 자선(Zakat)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하메드는 그 자신이 고아로서 자랐기 때문에 빈궁한 자를 돕는 일을 강하게 원했 다. 자선물은 일반적으로 자원해서 기부되어야 하지만 모슬림은 그들 의 수입의 사분의 일을 빈곤한 자에게 주도록 법으로 요구하고 있다. 고들의 생산물이나 가축 등에 대한 규정도 있으며, 자유로운 뜻에 의 해서 돕는 일을 실행하도록 되어 있다. 도움을 받는 자는 돕는 자에게 구원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은 자는 자기를 도와준 자에게 조금도 빚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도와주는 자는 돕는 것이 자기의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 을 도을 수 있는 것이 자기에게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신실한 모슬림은 거룩한 달인 라마단(Ramadan)에 왜가 뜰 때부터 해가질 때까지 매일 금식(Ramadan)한다 금식은 자신을 조 정하고, 신과 빈곤의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헌신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많은 모슬림들은 라마단(Ramadan) 동안 하루에 두 번의 식사만 하는데 해 뜨기 전과 해가 진 후에 한다.

 

다섯째, 성지 참배(Hajiji)는 모든 모슬림에게 그들의 일생 동안 최 소한 한번은 실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지 순례는 심히 어 려운 것으로서 어떤 자들은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을 보내 기도 한다. 이 성지 순례는 모슬림들이 구원을 얻는데 하나의 필수 불 가결한 부분이다. 이것은 의식과 의례(ceremonies and rituals)의 하나로(a set), 순례자들이 카아아바(Ka'aba) 사당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서 행하는 일이다. 모슬림은 그들이 알라에게 예배하는데 방해 가 되는 카아아바에 있던 우상들은 모하메드가 망명(Hijira, exile) 후 능력 있는 자가 되어 다시 메카에 돌아온 후에 파괴되었다고 믿는 다. 순례하는 모슬림이 성도(holy city)로부터 6 마일 가량 떨어 졌을 때, 순례자는 이흐람(ihram)의 상태에 들어가는데. 이 때 순례자는 기도를 하고 그의 평상복을 벗어버리고 이음매가 없는 두 개의 덮게 옷 을 입으며 거의 맨발로 면도질이나 머리나 손톱을 깍지 않고 성도를 향 한파.

 

순례자가 모슬림 사원을 방문했을 때 기본적으로 행하는 것은. 검은 돌(al-Hajar)에 입 맞추고, 세 번은 달려가고 네 번은 천천히 이렇게 일곱 번 카아아바(Ka'aba)의 주위를 돈다. 이렇게 신성한 돌을 방문 하는 것을 마왕 이브라힘(Maqam Ibrahim)이라 부르고. 사파 (Safa) 산과 마르와(Marwa) 산 사이를 일곱 번 달리며, 아라파트 (Arafat) 산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설교를 듣고 무즈달리파 (Muzdalifa)에서 밤을 지내며, 미나(Mina)의 세 기둥에서 돌을 던 지고 이흐람(Ihram)의 마지막 날에 희생을 드리는데 이것이 회생의 이드이다('Idal-Adha) (Encyclopedia Britannica, p. 664).

 

이러한 모슬림의 성지 순례는 이슬람교의 신항을 높고 견고하게 만 든다. 그들에게는 다섯 기둥과 연관이 있는 여섯 번째 종교적 의무가 있으며, 이것은 지하드(Jihad)인 성전(the Holy War)을 말한다. 이 의무는 정당한 상황 즉 이슬람교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에 남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나 혹은 그들의 종교를 방어할 때이다. 만약 전쟁에 나간 자가 지하드(Jihad)인 성전(the Holy War)에서 죽는다면 그 는 낙원에서 영생이 보장된다고 모슬림은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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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 선교 전략 (1)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있다면 이슬람교이다. 1990년 Abd Al-masih가 쓴 “World Muslim Population Growth 1990-2000"에 의하면 전세계 모슬렘의 숫자는 12억을 넘어섰다. 지난 50여 년간 기독교가 47%의 성장을 보였고, 불교가 63%, 힌 두교가 117%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슬람교는 500%의 성장을 해왔다. 인구는 세계인구의 5 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2025년에는 전 세계인구의 3분의1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세계도처에서 이슬람 인구가 확산되고있는 요인을 정립해 보면 가장 큰 원인은 인구증가 율에 따른 것이다. 모슬렘들은 일부 다처제로서 산아제한을 하지 않는다. 둘째는 열성과 실 천적 신앙이다. 모슬렘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계율이 현실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계율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그들의 열성은 라마단 금식 기간에 잘 나타난 다. 모든 모슬렘들이 100% 금식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 기간에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약 1개월간 금식한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첨단 과학의 시대에 어려운 일이 지만 지켜가고 있다. 셋째는 오일 달러로 인한 경제성장이다. 이슬람은 전 세계에 걸쳐 오 일이라는 경제무기를 가지고 엄청난 오일 달러를 투입하여 제 3세계의 급증하는 인구증가 에 교세확장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들로 결성된 ‘77개국 경제 그룹’과 ‘이슬람 경 제 협력기구(E.O.C)’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넷째는 오늘날 교회가 자유주의 신 학의 영향으로 인하여 힘을 잃어가고 있고 랄프윈터가 지적한대로 “극심한 소홀”로 무관심 과 방관 속에서 교회는 그들의 확장추이를 지켜보는 것에 연연하였으며 이슬람의 성장에 적 극 대응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슬람 인구를 대륙별로 보면 아프리카에 2억3백만 명, 아시아에 8억9천8백만 명, 미국․ 유럽․호주 등지에 2천2백만 명이 분포되어 있다. 이슬람은 전세계에 걸쳐 다양하고 광범위 하게 퍼져있고 동부와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선 계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현재 중앙 아 시아 내에도 이슬람이 급증하고 있다. 구 소련의 공산주의 붕괴와 함께 칼 마르크스의 사상 을 모하메드가 대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Ⅰ. 우리는 왜 이슬람권에 선교사를 보내고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첫째, 모슬렘은 그동안 그들에게 대한 편견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에게 소외되어 왔다. 오 늘날 교회는 모슬렘에 대해 보편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서구교회의 영향이 한국에 서도 그대로 전달된 것 같다. 모슬렘은 마치 전도가 불가능한 사람들로 오해되어 왔고, 모 슬렘에 대해서 배우는 것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모슬렘 하면 정치적 편견으로 인해 오 - 2 - 사마 빈 라덴나 호메이니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연상하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막연 한 두려움과 무관심은 그들을 방치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마치 모슬렘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 으로 기독교의 적이며 이스라엘과 싸우는 데만 관심 있는 집단으로 왜곡되어 왔다. 우리는 강대상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강론하지만 그들에게 복 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모슬렘들은 역사 속에서 왜곡되어 왔고 우 리 또한 서구인들의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모슬렘은 세계에서 가장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전세계 선교사의 2%만 이 이슬람권에서 사역하고있다. 그렇다고 2%가 모두 모슬렘을 대상으로 선교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이 중에는 자국인 선교하는 이들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바벨탑 이후에 70종족 이 였던 세계인종은 오늘날 24,000종족이 되었다. 1980년에는 약 16,750개의 미전도 종족이 복음을 듣지 못했으나 2000년 통계에는 약 8,000 종족이 복음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약 8,000개의 종족 중에 모슬렘이 4,000개의 종족으로써 모슬렘은 가장 전도가 미치지 않은 곳이다.

 

셋째, 이슬람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이다. 미국에서 이슬람은 1970년에 130만 명에서 1990년에 6백만 명 이상으로 성장해왔다. 유럽에서는 1970년 4백2십6만 명 에서 1990년 7백5십2만 명으로 성장했고, 구 소련에서는 1970년 3천4백만에서 1990년 5 천3백만으로 성장해 왔다. 1940년에 약2억이었던 전세계 모슬렘은 오일 파동의 여파를 지 나 1977년 5억 3천만이더니 1990년에 10억3천만에서 이제 12억을 넘어서고 있다. 이슬람 은 AD 7세기에 시작되었으나 전 세계 종족과 문화에 퍼졌으며 본래의 기독교 영토를 정복 하였다. 오늘날도 이슬람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이기에 모슬렘을 전도해야 한다.

 

 넷째, 한때 성장했던 기독교 영토를 정복한 세계 유일의 종교이다. 모하메드가 이슬람을 시작하기전까지 중동과 북 아프리카는 미국이 지난 2세기동안 기독교 국가였던 것 이상으 로 기독교 국가였다. 교부시대에는 5개의 신학센터가 그곳에 있었고 로마만 유럽에 있었다. 기독교 교리를 포함한 모든 중요한 회의는 중동에서 있었고 이교도에 대한 반박에 승리했던 사람들도 중동의 주교들과 학자들이였다. 중동은 기독교 도서관과 모든 종류의 성경 및 신 학관련 작품들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이슬람 국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당시에는 검으로써 이슬람이 개종의 수확을 거뒀으나 그것만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미온적인 선교자세와 물질지향의 반복음주의적인 태도가 지배하고 있 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위협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때 성장했던 기독교 국가 를 지배하고 정복한 유일의 종교가 이슬람이기 때문에 모슬렘을 전도해야한다.

 

 다섯째, 비기독교로서 전투적 선교적 사고를 가진 세계 유일의 종교이다. 이슬람은 전세 계를 이슬람화 하는데 궁극적인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모든 가능한 수단은 모든 모슬렘들이 사용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만 해도 2천명 이상의 이슬람 지도자를 양성시키는 이슬람 신학교가 5개나 되며 공식적으로 세워진 모스크만 해도 1천8 백 개이며 3천 개의 코란학교가 세워져 있다. 미국에는 1,209개의 모스크가 있고 독일에는 70개의 사원과 2204개의 기도처가 있으며 30개의 모스크가 건축 중이다. 사실상, 모든 모스크는 어느 정도 훈련센터이다. 모슬렘은 비 이슬람국가에서 정치적으로 크게 활동하고 있다. 더욱이 정치적인 힘을 발휘해서 정부의 힘을 얻으려고 하며 본질적으 로는 영적인 것이다. 이슬람은 해 아래 모든 나라가 이슬람 국가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전 투적인 자세로 이슬람을 전파할 것이다. 기독교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이다. 그러 나 이것은 모든 교파 즉 구교, 정교, 복음주의 교회를 모두 합한 숫자인 것이다. 만일 나눈다고 하면 이슬람이 가장 크다. 그러므로 최대의 지상명령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어 디에서나 이슬람과 충돌하게 될 것이다.

 

 

여섯째, 모슬렘에 대해서 교회가 책임이 있다. 모슬렘은 안타깝게도 교회 역사에서 항상 왜곡 되어 왔다. 구 교회는 200년 이상 십자군 전쟁 때 모슬렘들을 박해하였으며,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이교도들을 거룩한 땅에서 씻어내고 모슬렘을 인 자는 천국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십자군의 구호였다. 이것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5:44)’는 것과 얼마나 상반 된 논리인가! 그리스정교는 공산주의 이전 러시아의 모슬렘을 심하게 박해했다. 많은 모스 크와 모슬렘 가정을 불태웠다. 오늘날 세르비아 정교회는 민족 척결이라는 미명 아래 보스 니아 모슬렘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일들을 지금도 자행하고 있다. 얼마나 비극적인가! 편애 없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거리가 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은 교회 가 선교사명을 망각한 채 교리적 논쟁만 일삼던 시대전의 암흑기에 태어난 사생아다. 이슬 람이 시작 될 당시 중동은 많은 우상들로 가득 찼으며 동서 로마가 분열되어 종교적 분쟁이 가속화되었다. 이슬람의 창시자 모함메드는 유일신을 찾고자 갈망했던 젊은이였다. 그가 기 독교를 접했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문제는 당시 교회가 초대교회의 뜨거웠던 신 앙과 사명을 망각한 채 신앙적 타락에 있던 시대에 그는 진정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일곱째,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주님이 인류의 모든 사람 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 속엔 모슬렘도 포함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오셔 서 죽으시고 사랑하시며 그들이 예수님을 알기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모든 종족에 게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당시에 천대 받던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들에게 그의 사랑을 보이셨다. 그의 제자들조차 그를 이해 하지 못했을 때 그는 제자들을 향해 “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양식이 있 느니라(요 4:32).” 그리고 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실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 히 이루는 것이니라(요 4:34 )”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주님의 일의 완성을 위해서 모든 종족 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슬람권으로 선교사를 보내며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유해석 목사 총신대학교 졸업, 총회신학교 졸업, 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파송 선교사, 현 F.I.M.국제선교회 대표로서 영국본부 사역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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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는 어떤신 인가?

 

 

 

 

세계 교회 운동은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운동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제를 기반으로 세계 종교의 형식을 통해 세계 평화를 이루려 한다.

과감하게 신앙에 대해 모슬렘과 논쟁을 하려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관용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이슬람의 교리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관용을 죽음으로 단죄할 죄로 여긴다.

이런 기독교적 관용은 소심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특히 “알라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슬람의 참고 도서 이슬람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알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 모슬렘과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섬기고 있음.” 이것은 알라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오류이다.

‘알라’ 또는 ‘하나님’이란 제목의 한 이슬람 사전은 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서 섬기는 신과 동일하다며, 히1:1의 말씀을 인용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설사 이 언급이 유대인과 기독교, 모슬렘 예언자들을 말 한 것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오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불교의 교리대로 달라이 라마를 윤회한 하나님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알라’라는 이름은 과연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아라비아에는 한 때 수 많은 다른 신들, 영혼들, 악령들을 믿는 신앙이 존재했었다. 그들의 신전은 돌, 나무, 샘이었으며, 그곳에서 번제와 희생 제사를 올렸다. 뱀은 예언자들이 예언을 받게 하는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이는 뱀에게 영혼이 내재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고대 아랍어로 뱀을 사이타 즉, 사탄이라고 부른다.

주후 622년 모하메드가 이슬람 종교를 선언하기 전인 이슬람 이전 시대에는 아라비아에 360개 이상의 신들이 있었다. 각각의 부족들은 자신들만의 수호신을 섬겼다. 따라서 모하메드의 부족도 360개의 신들 중 자신들의 신인 알라와 더불어 카바라는 신성한 검은 돌을 가지고 있었다. 모하메드는 당시 작은 마을 메카에 거주하는 쿠라이쉬 부족에 속해 있었다.

모하메드는 부족간의 반목을 보고, 다른 신들 가운데 자신의 부족신인 ‘알라’를 높이겠다고 맹세했다.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인 주후 610년, 모하메드는 더 높은 임무를 위한 소명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금식을 하는 모슬렘의 거룩한 달인 라마단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모하메드는 다른 부족들의 신들을 정복하는 거룩한 전쟁, 지하드의 소명을 받았다고 느꼈다. 마지막 부족신을 무찔렀을 때, 그는‘알라 후아크바르!’라고 외쳤다. 그것은 다른 360개의 우상들 보다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의미로, 알라는 많은 다른 신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 때가 모하메드가 알라를 성경의 하나님인 야훼와 동등하게 올려 놓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후 곧 모슬렘은 구약과 신약을 초기 이슬람 문서로 명시했다. 그들은 출처 자료를 모방하고 왜곡했고, 그 위조 문서를 코란, 즉 ‘신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칭했다. 그 후 전세계가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거룩한 전쟁을 시작했다.

오늘날 ‘알라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신학적 질문 일뿐 아니라, 점점 더 정치적인 질문이 되고 있다. 서방 언론과 정치인들은 흔히 ‘알라’를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마찬가지로 ‘알라’를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어 이름인 엘로하 (복수: 엘로힘)의 언어학적인 어형 변화라는 주장은 문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또한, 알라의 99개의 이름과 함께 그의 본성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본성과는 비교될 수 없다. 알라는 ‘자비의 신’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본성은 정반대이다. 수라 9:80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당신이 그들을 70번 용서하더라도, 알라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반면 마18:22에서 예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랍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르지 않는다. 알라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대항해 싸우는 이슬람 종교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주님’이라는 뜻인 라브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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