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광호 목사
Ⅰ. 시작하는 말
최근 몇 년전부터 이슬람은 우리의 가까운 이웃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 초기까지 우리 민족과는 특수한 관계 속에 있었으나 역사 가운데서 그 종적을 감추게 됨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 초엽부터 이슬람이 한반도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6.25전쟁과 1970년대 한국기업의 중동진출을 통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으며, 1990년대 이후부터 이어진 걸프전쟁, 미국의 9.11사태,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현재까지 예민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해 이슬람은 우리의 매우 가까운 이웃이 되어 있다.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세계 각국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는 나름의 국익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서로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복음을 소유한 성도가 이슬람을 대하는 시각이나 자세는 일반 국가나 사회단체들과는 달라야 한다. 성도들은 진리와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좋은 이웃으로서 복음을 통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잘 이행해 가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이슬람 교도들은 무엇을 믿고 있으며 어떤 인생관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이슬람에 관련된 몇가지 중요한 사항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Ⅱ.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기독교
이슬람의 창시자가 무함마드라는 사실은 이슬람에 대해 웬만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과연 애초부터 이슬람을 창시할 마음을 먹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주후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걸쳐 아라비아 반도에 살며 활동했던 무함마드는 원래 자기 종족들이 믿던 다신신앙(多神信仰)의 토속종교를 믿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성장해 가면서 점차 유일신교인 기독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급기야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를 크게 구분하지 않고 그 두 종교를 합해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라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아랍 토속종교의 다신사상 보다는 기독교적 유일신 사상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함마드가 이해하고 있던 기독교란 오늘 우리가 믿는 참 기독교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종교였다. 당시에는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구전적(口傳的)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기독교와 아라비아 반도에 흩어져 있던 토속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무함마드는 25세 때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의 연상의 부인인 하디자(Khdijah)의 종교적 배경은 아라비아의 토속 기독교였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무함마드가 610년 소위 계시라는 독특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을 했을 때 그는 신실한 종교인으로 살려고 했으며 결코 처음부터 이슬람을 창시할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다. 나중 무함마드의 토속 기독교가 이슬람으로 발전하게 되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무함마드가 마음먹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이라는 용어는 무함마드가 개종한 이후 10여 년이 훨씬 지나 622년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해 간 후에 생겨난 말이다. 그것은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한 이후 기독교 및 유대교와 차별화를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는 자기 종족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해 가면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자기와 동일한 신앙을 가졌으므로 어떤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때는 무함마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있었고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때는 무함마드가 유대교를 인정하며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함마드의 종교는 일반 기독교 및 유대교와는 다른 아라비아의 토착형식의 기독교였던 것이다. 그것이 점차 이슬람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독립된 종교로 발전해 가게 된다.
Ⅲ.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묵은 감정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은 이슬람의 초기 단계에 이미 생겨나게 된다. 무함마드의 초기 신앙시대라 할 수 있는 메카시대에는 기독교나 유대교와 별다른 갈등이 없었으며 자기 민족의 토속종교인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메디나로 이주한지 오래지 않아 기독교 및 유대교와 결별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얻게 된 무함마드는 후일 메디나에 거주하던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게 되는데 그때는 무함마드가 순수 종교인이 아니라 정치화된 종교지도자였다.
무함마드의 이슬람 세력은 짧은 기간에 막강한 힘을 소유하게 되어 무함마드 생존시에 이미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그 이후 이슬람 세력은 점차 로마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게 되는데 이슬람 정복 초기단계의 북 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던 많은 주민들은 처음 이슬람을 '아랍인들의 기독교'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억압받던 로마 제국의 기독교로부터 이탈해 쉽게 아랍인들의 종교에 귀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로마제국의 기독교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아랍인들을 보잘 것 없는 종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무력 앞에서 무릎을 꿇는 패배를 맛보며 자존심을 엄청나게 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11세기 막바지에 시작되었던 십자군 운동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십자군 운동은 이슬람에 대한 로마제국 기독교인들의 자존심 회복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에서 마저 최종적으로 패배했을 때 그들은 신의 존재마저도 의심하게 되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는 더욱 깊은 적대감이 싹트게 된 것이다. 나중 18세기를 눈 앞에 두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오스만 제국에 군사적 위력을 보이게 되자 이슬람은 그것을 서구 기독교 세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또한 세계 제1차 대전을 통해 오스만 제국이 패망하게 되고 서구의 열강들이 득세하여 팔레스틴을 다시 장악했을 때, 이슬람의 지성인들은 십자군 운동의 연장선에서 이슬람이 기독교 세력에 패배 당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정황에서 최근 10여년 사이에 있었던 아랍 이슬람과 서구 국가들의 갈등에서 그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Ⅳ. 이슬람의 오해와 우리의 대응
이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는 일단 견제의 대상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란 곧 서구인들이며 그것은 오랜 역사적 경험에서 축적된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서구 기독교를 타락의 본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짙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서구 기독교인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복과 약탈을 일삼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가공할만한 무기들을 개발하며 윤리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인간들이다. 서구 기독교인들은 어른도 몰라보며 남녀의 관계도 지극히 문란하다. 그들이 접할 수 있는 영화나 잡지 등을 통해서 얻는 서구인들에 대한 정보는 성적으로 문란하며 싸움을 즐기며 많은 무기들을 만들어 침략을 일삼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최근의 인터넷의 보급은 그들로 하여금 서구의 비윤리적인 타락성을 더욱 가까이 보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권역에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전쟁과 전투에서 비쳐지는 서구인들의 모습은 잔인무도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이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가장 미리 보여주어야 할 자세는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나쁜 인간들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외적 윤리를 중시하는 그들은 서구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을 만날 때 웬만하면 그들의 그러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의 편견과 오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과 행동을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이슬람 선교단체들에서 역라마단 운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달을 의미하는데 그 달을 특별히 성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그 한달 동안 금식하며 특별기도를 한다. 그들은 낮에는 음식을 금하며 밤에만 먹는다. 역라마단 운동이란 이슬람 신도들이 금식하는 그 기간 동안 기독교에서 그들을 위해 금식기도 하는 것을 일컫는다. 좀 노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일종의 종교적 맞불작전이다. 그들이 잘못된 영으로 금식하며 힘써 기도할 때,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신앙을 가진 그들을 위해 참 하나님께 더욱 힘써 기도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런 운동을 하는 이들의 중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필자는 조직적인 그런 운동에 대해 반대한다. 오늘날처럼 모든 정보가 개방되어 있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들을 금방 알 수 있는 시대에 역라마단 운동 같은 조직적인 움직임은 이슬람에서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결코 기독교의 그런 운동에 대해 고맙게 생각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그것을 심각한 종교적 도전행위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 가운데서 기독교와 갈등관계를 형성해 왔으며, 지금도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갈등 구조를 가지고 있는 형편인데, 역라마단 운동은 의도와는 달리 도리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Ⅴ. 맺음말
기독교와 이슬람은 역사 가운데서 특별한 갈등과 경쟁관계를 형성해 왔지만 우리는 그들을 자연스런 이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들은 이미 서구 기독교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으며, 서구인들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우리이지만, 그들이 우리가 기독교인인 것을 알게되면 우리를 서구인들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그런 오해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될 문제가 아니며 오랜 세월을 두고 인내하며 노력해야할 과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은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게 되면 그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슬람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한 두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체 교회의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그들에 대해 지혜로운 자세를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할때 그들이 우리의 복음에 관심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이슬람 지역에 복음을 들고 나가 있는 형제 자매들이 상당수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은 형제들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그 지역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나아가 굳이 선교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지 않아도 많은 성도들이 이슬람 지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슬람 교도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아는 성도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신중해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2003.12.6, 기독교개혁신보)
출처 아름다운 성 |제석천왕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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